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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7년 한겨울 설악산을 찾고, 한여름 지리산을 찾은 이화여대생의 등반기 2편입니다.
설악산은 친구 세명이서 산장을 이용하며 4박 5일 오른 거고요.
지리산은 문리대내 등산반 21명이 10박 11일의 대장정이었습니다.
문리대생의 글들이다 보니 글이 다르긴 다르네요.
1970년대 사람들의 성정과 등산풍경 등등을 엿볼 수 있습니다.
꽃이 아니라 푸름을 취해 '녹원(綠苑)'이라 이름지은 이대 문리대 교지는 4년만에 나왔다는데,
자그마치 21호라는 걸 보면 역사가 제법 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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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은 하단에 싣고요. 먼저 하이라이트라고 생각하는 부분부터 보겠습니다.
설악산 산행기인데요.
돌탑이 여기저기 산재해 있는 정상에서 '주위의 풀포기 하나하나가 모두 땅위로 누웠다.
곧음과 푸른 색의 소나무도 잔디처럼 깔리고 돌탑과 사람만이 섰다.'라고 적네요.
이하 문장도 이렇게 상당히 문학적^^입니다.
우측은 비선대에서 문명세계를 만나는 순간인데, 역시 문학적입니다.
'화려한 사람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구두를 신고, 화장을 하고 머플러를 한 사람들이...'
좌측은 백담산장에서의 이야기입니다.
백담산장의 내부는 방들이 있었나 봅니다. 책상하나 들으갈 만한 방이라고 표현하고 있네요.
오른쪽은 봉정산장에서의 이야기입니다.
수렴동대피소도 그러하고 장작으로 불을 때서 방이 따뜻했다고 적고 있습니다.
아래는 지리산입니다.
한여름 지리산 등반에 4박 5일, 이후 남도여행에 6박7일을 이대 문리대 산악부가 했네요.
이인정 대산연 회장의 아내인 구혜정이 이대 법정대 산악부장이라고 하는 걸 보면,
당시 이화여대는 단과대마다 산악부가 있었나 봅니다.
그들은 지리산에서 마지막 밤을 캠프파이어로 피날레를 장식합니다.
필자는 우표까지 붙여 온 20장의 편지 봉투를 갖고 왔네요.
그때는 이렇게 엽서나 편지를 보내는 게 유행이었죠.
이런 문화가 언제 사라졌을까요? -> 여기
지리산에 내려서는 구례 섬진강에서 수영을 하고, 쌍계사, 송광사를 거쳐 여수, 남해 상주 등인데,
남해 상주를 간 까닭 중에는 '남해대교'도 있습니다.
1973년 완공된남해대교는 당시 대학생들의 수학여행지로도 이름 높았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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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전문을 보겠습니다.
사진은 클릭하면 확대됩니다.
마장동 여관에서 하룻밤을 자고 새벽 5시30분차 속초행 직행버스.
용대리 도착은 11시 25분이군요.
이어 8km를 걸어 백담산장에 도착은 오후 1시 30분. 그들은 여기서 하룻밤을 잡니다.
버너를 처음 다루다보니 고생고생을 하죠...~
이튿날은 백담사도 들렀다가, 12시 40분이나 되어서야 출발합니다.
그 까닭은 수렴동 대피소에서 다시 1박을 하려했기 때문입니다.
'나 이대 나온 여자야^^'
산장지기의 방에 초대되어 그가 푸는 구라에 세 여대생들은 어머어머!를 연발하다 다시 돌아와
산장지기의 규칙적인 장작패는 소리에 저절로 잠이 듭니다.
산장의 크럭스인 봉정산장에서 장작불을 지펴 따뜻한 방에서 쾌적한 하룻밤을 지내고,
그들은 다시 백담사로 내려오려던 계획을 과감히 변경해서 외설악으로 나아갑니다.
외설악 계곡 길은 눈으로 가득하였는데...양폭산장에서 처음으로 개소리를 들었다고 하네요.
당시 양폭산장에 개를 키웠나 봅니다.
그리고 몇몇 학교의 산악부를 맞닥뜨립니다.
양폭산장은 대학산악부의 적설기 설악산 등산의 베이스 캠프역할을 했습니다.
그리고 하산하여 설악동을 벗어나 낙산에서 민가에 투숙하는데, 주인 아주미의 친절함과 함께.
전기불과 TV라는 문명의 이기를 반갑게 맞이합니다.
다음날 아침 그 유명한 낙산사 일출을 맞이하고...곧 강릉행 버스를 타고 서울로 돌아옵니다.
두사람의 등산객은 한겨울인데도 에델바이스를 나누어주는데, 겨울에 어떻게 찾았을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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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23일 밤차로 남원에 내려...그들은 마천의 칠선계곡으로 향합니다.
7월인데도 워낙 비경이라 나뭇잎들이 여리고 여린 유록빛이라고 적고 있습니다.
5시에 기상하여 식사하고 천왕봉 정상에 오른 다음 장터목에서 텐터를 칩니다.
무거운 베낭을 벗었을 때...균형을 잡기 어려움도 잘 표현하고...
삼거리에서 고추장찌게- 아마 감자와 양파를 넣었을 -와 된밥으로 저녁을 먹었군요.
여대생들이라 그럴까요. 술이야기가 없습니다...^^
그들은 지금 막 환갑을 지나는 나이가 되었습니다.
만남이 계속된다면, 지금도 어제인양 그때의 추억을 이야기하겠죠...~~
첫댓글 아껴두었다 나중에 꼼꼼히 음미하며 읽어봐야겠네요
옛날의 산행기에는 진한 그리움 같은것이 배어있어요
요즘은 잘닦인도로에 라무진버스로 단숨에 설악산에가서 백화점진열장에 명품구경하듯 비경을 둘러보죠
이제는 비경도 아니죠 워낙많은 인구가 쉽게 공유하다보니 그 가치도 많이 희석된 느낌입니다.
장시간에걸쳐 어렵게 어렵게 찾아가서 만나게되는 고적함속의 설악은 지금설악과는 달랐습니다.
어느일반잡지에 60년대초 학생들과 설악을찾아간 등산기를 어느교사가 기고한글을
당시 학생이었던 내가 참으로 흥미있게 읽었던 기억이있습니다.
민박값으로 100원을 줬다는얘기며 비선대앞 계곡을 주둔했던 군인들의 도움으로건넌후
굳은 악수만으로 석별의 정을 나누고 갈길을 갔다는얘기등등..
세월이 많이 흐른후의 산행기는 누가썻던 읽을만합니다.
올려주신 산행기도 고맙게 잘읽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동안 어떻게 잘 지내시는지 궁금했습니다...
오래전 시절에 읽었던 잡지 기고글을 지금까지 기억하시다니...~~~
주말 강추위가 계속될 것 같네요. 형님, 건강조심 하시길 바라겠습니다...
첫날밤을 백담산장에서 묵었을까요? 객실은 2층 평상이고 산장지기 방이 따로있었는데...아마도 백담사 부근 민박이지 싶은데요.
저는 백담산장에 대한 기억이나 추억이 하나도 없습니다^^..
백담산장에는 룸이 없었는지요?
'책상하나 들어갈 방'은 산장의 방이라기보다는 산골 초가삼간에서나 가능한 방 크기같기도 하고요
저도 사실은 대피소인지 민가인지 긴가민가했는데요.
'나흘'이라는 제목아래 '어느 대피소이건 따뜻하다'라는 말에
대충 찍어서 산장일거라고 퉁친 겁니다...~~~
그러고보니 첫날밤은 낯선이불이라고 표현하고, 봉정산장에서는 침낭이라고 하고 있네요.
기록중에 인상깊은 아저씨로 수렴대피소의 산장지기 이경수씨가 등장하는데
이분,세간에서는 일종의 기인으로통했는데 누구나에게 10년지기를보듯 반갑게 인사했죠
이분 행적이 등산잡지에도 기고된적있습니다. 저도 가끔생각나는분이죠
대를 이어 아들 두 형제가 공단에서 일하고 있어요. 2년전에 수렴동 올라가는 길에 얼틋 지나쳤는데 어디서 뵌 분같아 '경수 형님~'해서 만났었지요(경수 형님 이라 부르라 해서 부르는 건데... 듣는 누군가는 뭐라하더군요).
@여름날 아하 ~~두아드님이 공원공단에서 일하고있구만....
아우님덕에 새로운사실을 알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