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년 6월의 자락이 찾아오면, 육사 27기 자전거 동호회 도반(道伴)들의 마음은 자연스레 뜨거웠던 그 시절의 전적지로 향한다. 올해 우리의 발길이 머춘 곳은 유엔군 최초의 참전지이자, 뼈아픈 역사의 서막을 품고있는 오산 죽미령이었다. 그곳은 미군 스미스 특수임무부대가 한반도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 북한군과 최초로 맞딱뜨린 운명의 장소다. 시계를 1950년 그해 여름으로 돌려본다. 6. 25 동란이 발발한 지 불과 나흘 만에 수도 서울이 함락되던 참담한 순간, 우리 군은 한강을 사이에 두고 피아간의 치열한 공방전을 벌이며 미 지상군이 참전할 소중한 시간을 벌어주고 있었다.
6월 30일 밤, 맥아더 장군은 미 수뇌부가 모인 긴박한 회의 끝에 트루면 대통령을부터 지상군 참전 승인을 받아냈다. 그렇게 미 제24사단 제21보병연대 제1대대를 주축으로 포병과 통신을 급조한 540여 명 규모의 .' 스미스 특수임무부대'가 세상에 태어났다. 찰스 B. 스미스 중령이 이끄는 406명의 부대원은 대전으로 파병되었고, 곧이어 제52포병대대가 합류하여 전형을 갖추었다. 이들에게 주어진 임무는 단 하나, 밀고 내려오는 북한군의 남침을 최대한 지연시키는 것이었다. 7월 1일 부산에 첫발을 디딘 그들은 열차와 트럭을 갈아타며 거친 숨을 몰아쉬었고,
마침내 7월 5일 새벽 2시 30분, 장맛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오산 북방 죽미령에 도착했다. 스미스 중령은 어둠과 빗속을 뚫고 B-C중대를 경부국도 양옆 능선에 배치하며 서둘러 방어진지를 구축했다. 75mm무반동총 2문과 4,2인치 박격포 2문이 그들이 가진 무기의 전부였다. 수원과 평택을 잇는 경부국도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죽미령의 낮은 언덕, 이미 전날 수원을 점령한 북한군 제4보병사단이 이곳을 향해 몰려오고 있었다. 오전 7시 30분, 지축을 뒤흔드는 굉음과 함께 빗속을 뚫고 적의 T-34 전차 8대가 모습을 드러냈다.
미군 포병부대가 황급히 105mm 곡사포를 발사했으나 적전차의 두꺼운 장갑은 끄덕도 하지 안않다. 오전 8시 16분 선두 전차가 700야드 앞까지 조여 오자 스미스 중령의 사격명령이 떨어졌다. 바주카포가 불을 뿜었지만 로켓탄은 강철벽에 던져진 테니스공처럼 불꽃만 튕긴 채 무력하게 튕겨 나갔다. 적들은 멈추지 않았고 뒤이어 25대의 전차가 추가로 사선을 넘어왔다. 마지막 희망이었던 대전차 고폭탄으로 겨우 전차 2대를 파괴하고 2대에 손상을 입혔을 뿐, 탄약은 이내 바닥을 드러냈다. 북한군 전차들은 유유히 진지를 통과해 남하했고, 오전 11시경에는 5,000여 명에 달하는 북한군 보병이 죽미령을 향해 밀물처럼 밀려왔다.
무려 10대 1이라는 절대적인 숫적 열세 속에서 통신마저 두절되자 지휘체계는 완전히 무너졌고 결국 오후 2시 30분 스미스 중령은 비장한 철수 명령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것은 질서있는 후퇴가 아니었다. 공황상태에 빠진 처절한 패주였다. 일부 병사들은 철모와 소총마저 던져두어야 했고 무거운 중화기는 물론이고 쓰러진 전우들의 시신과 부상병 조차 챙기지 못한 채 떠나야 했던 참담한 전장이었다. 단 몇 시간의 전투 끝에 세계 최강을 자부하던 미군의 자존심은 처참하게 무너져 내렸다. 부대원 500여 명 중 181명이 전사하거나 실종되는 혹독한 대가를 치렀다.
당시 미 제24보병사단장 윌리엄 딘 소장은 이 전투를 두고 "마치 이쑤시개로 불도저를 막으려 했던 것과 같았다".며 가슴을 쳤다. 죽미령의 패배는 단순한 군사적 패배가 아니었다. 그것은 미군에게 뼈아픈 진실을 일깨워준 각성제였다. 한국전쟁은 성조기만 흔들면 끝나는 단순한 '경찰활동'이 아니라 막대한 희생을 각오해야 하는 '진짜 전쟁'이라는 사실을, 그리고 눈앞의 북한군은 오합지졸이 아니라 실전 경험을 갖춘 강력한 정예병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한 혹독한 대가였다. 전쟁사에는 치욕적인 패배로 기록될지언정 스미스 부대의 희생은 결코 헛되지 않았다.
가장 먼저 이 땅에 달려와 가장 먼저 쓰러진 그들의 피는 자유세계의 거대한 양심을 깨웠고 미군 사단 전체가 한반도에 본격적으로 투입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그들이 흘린 붉은 피야말로 자유를 지키기 위한 총력전의 귀중한 밑거름이었던 셈이다. 그날의 패인을 군사적으로 짚어보면 몇가지 아쉬움이 짙게 남는다. 첫째는 적을 너무 쉽게 여겨 정신무장이 해이했던 점이다. 훗날 참전 장병의 기록처럼" 성조기만 흔들면 지레 겁먹고 도망갈 줄 알았다."던 방심이 화를 불렀다. 둘째는 적의 전차에 맞설 대전차 무기와 지뢰 철조망 조차 준비하지 못했던 빈약한 대비태세였다.
셋째는 2개 중대가 감당하기엔 1,6km라는 방어선이 너무 길어 적에게 쉽게 우회 공간을 내어준 점이며, 마지막으로는 적시적절한 근접항공지원이나 상급부대의 화력지원이 결여되었다는 점이다. 냉정히 말해, 고작 1개 대대 규모로 그 거대한 적의 진격을 지연시키라는 임무 자체가 작전상 무리한 요구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죽미령 전투는 6.25 전쟁에서 미군이 대한민국을 위해 피를 흘린 최초의 전투이자 오늘날 한미동맹 70년의 출발점이라는 거대한 역사적 의의를 지닌다. 이방인의 땅에서 이름 모를 소년병들이 흘린 피와 희생이 있었기에 오늘날 우리는 이 푸른 하늘 아래에서 자유와 평화를 누리며 살아가고 있는 것이리라.
답사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 가슴 속 깊은 곳에서 묵직한 울림이 인다. 나라를 지탱하는 뿌리는 결국 스스로를 지킬 수 있는 강력한 국방력이다. 평화는 말로 구걸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강한 힘만이 이 엄혹한 국제정세 속에서 나라를 살아남게 하는 유일한 길임을, 죽미령의 바람은 우리에게 나즈막이 속삭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