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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리교의 자금성습격사건, 계유사변
청나라 가경18년(1813년) 구월 십오일, 북경에는 가경황제가 '한,당,송,명에도 일어난 적이 없었다'고 말해지는 계유사변이 발생한다. 이는 천리교(天理敎)의 수령인 임청(林淸)이 자금성을 습격한 사건이다.
먼저 천리교와 임청에 대하여 얘기해보기로 하자.
천리교는 청나라때 팔괘교(八卦敎)의 한 갈래이다. 경기일대의 감괘교(坎卦敎)와 홍양교(紅陽敎)가 융합되어 이루어진 종교이다. 팔괘교는 청나라 강희연간에 산동성 단현(單縣)에서 유좌신(劉佐臣)이 창립한 비밀종교이다. 팔괘의 방위에 따라 전도했기 때문에 "팔괘교"라고 불렀다. 팔괘는 각각 건(乾), 곤(坤), 진(震), 손(巽), 감(坎), 리(離), 간(艮), 태(兌)이다. 각각 서북, 서남, 정동, 동남, 정북, 정남, 동북, 정서의 8개 방위를 가리킨다. 유좌신이 산동성 단현에서 창교하였으므로, 단현을 중심으로, 경기일대는 산동단현의 북쪽이므로 감괘(坎卦)에 속한다. 경기 대흥일대에는 팔괘교의 '감괘교' 이외에 홍양교(紅陽敎)도 있었다.
임청의 조적(祖籍)은 절강성 소흥이다. 어려서부터 부친을 따라 직예 대흥현(지금의 북경시 대흥현)으로 이주해서 황촌송가장에 살았다. 임청은 소년시절에 집안이 가난해서, 17세때, 북경 서단 패루의 한 약포에서 학도(學徒)로 들어간다. 일을 배우고 난 후에 삼리하의 한 약포에서 점원으로 일한다. 그런데, 자주 창녀와 어울리다가 성병에 걸려 약포에서 쫓겨난다. 할 수 없이 거리에서 순찰을 도는 것으로 생계를 유지했다. 임청의 부친은 일찌기 서리(書吏)를 지낸 바 있어, 부친의 사후에 임청이 맡아서 한 적이 있다. 그러나 그가 일을 맡아서 한지 1년만에 부정부패가 적발되어 쫓겨난다. 그리하여 그는 그의 자형(姉兄)과 함께 동업으로 차관(茶館)을 차린다. 그러나 그는 매일 도박과 계집질을 하는 바람에 돈을 다 날리고, 자형에게 쫓겨난다.
그는 다시 승덕피서산장의 소포탈라궁공사에 노가다꾼으로 일한다. 그리하여 돈을 좀 벌었다. 황촌에 돌아온 후에 그는 매일 먹고 마시고 계집질하고 도박했다. 그리하여 돈을 다 써버린다. 다시 소주로 간다. 거기서 그는 셋째자형을 찾아가서, 그의 도움으로 단양지현의 밑에서 일한다. 그러나 다시 뇌물을 받은 것이 발각되어 도망친다. 생활할 방법이 없자 그는 조운양선에 줄을 매어 배를 끄는 일을 하면서 통주로 되돌아온다. 외조카인 동국태(董國太)의 집에서 며칠간 머물다가 다시 북경 순성문으로 간다. 작조포(雀鳥鋪)에서 메추라기를 받아다가 길거리에서 파는 일을 한다. 이때 장군을 지낸 왕노야를 알게 된다. 왕노야는 그에게 돈을 대주어 작조포를 열 수 있게 해준다. 그는 다시 본전을 다 까먹고는 쫓겨난다. 송가장에 돌아와서 누나의 집에서 얹혀살면서 집안일을 도운다.
가경십일년 오월, 임청은 현지의 홍양교에 가입한다. 가경십삼년, 홍양교사건이 발각되어, 임청은 사건에 연루되어 곤장을 받고, 보정으로 끌려가서 재판을 받는다. 돌아와보니 교내의 두령들이 모조리 붙잡혀가거나 도망쳐서, 우두머리가 없었따. 임청은 말을 잘하는 재주는 있어서 우두머리로 모셔진다. 그는 점차 경기와 직예 고안, 웅현등지의 감괘교를 흡수하기 시작한다. 이후 임청은 다시 직노예(하북,산동,하남) 세개 성의 팔괘교와 연락하기 시작한다. 이때 그는 홍양교사건때 보정에서 재판을 받으면서 알게된 우량신(牛亮臣)을 떠올린다.
우량신은 하남 활현 사람이며, 일찌기 활현아문 창고지기를 지냈다. 창고의 의복을 훔쳐냈다가 발각되는 바람에 보정으로 도망와 있었던 것이고, 마가점에 살면서 가게를 돌봐주고 있었다. 임청은 홍양교사건으로 보정에서 재판을 받을 때 역시 마가점에 살았고, 우량신과 알게 된다. 우량신은 임청과 도에 대하여 논의했는데, 그의 이론이 깊이가 있다고 생각해서 그를 스승으로 모신다. 가경십육년 이월, 임청은 직노예 삼성의 팔괘교와 연락하려고 생각하고, 하남 활현으로 가서 우량신을 만난다. 그리고 우량신을 통하여, 현지 진괘교(震卦敎)의 풍극선(馮克善)과 이문성(李文成)을 만난다.
임청은 풍극선, 이문성과 알게 된 후, 세 사람은 생사지교를 맺는다. 가경십육년, 임청은 세번에 걸쳐 하남활현으로 가서 풍극선, 이문성과 현지 각교파를 통합하는 일을 논의한다. 임청은 스스로가 팔괘교의 창시자인 유좌신이 환생한 것이라고 말한다. "스스로 미래의 일을 예지할 수 있으며, 복과 화를 알아낼 수 있고, 길과 흉을 구분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는 자신의 말재주를 이용하여 이문성이 현지의 진괘교 교주가 되도록 도와준다. 그는 또한 <<역경>>의 "제출어진(帝出於震)"이라는 말을 이용하여, "진괘가 팔괘의 우두머리이다"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나머지 괘는 모두 진괘의 명을 따라야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하여 이문성은 "구궁을 겸리하고, 팔괘를 통령하는" 팔괘교의 총교주가 된다. 이문성은 임청의 도움에 감사하기 위하여, 임청을 십자귀일(十字歸一)로 모신다. 이리하여, 이문성과 임청이 공동으로 두령이 되는 국면이 형성된다. 이렇게 하여 활현 일대의 팔괘교는 통일된다.
통일후의 팔괘교는 천리교라 부르게 된다. 팔괘교와 관련된 청양, 홍양, 백양 삼겁의 설은 답습한다. 그리하여 현세는 석가모니가 교를 장악하고 있어 홍양시기에 해당된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미 말기에 도달했다. "인류는 거대한 겁난을 맞이할 것이다. 겁난이 지나간 후에는 광명, 행복이 충만한 백양시기가 된다. 이렇게 하여 '홍양이 끝나고 백양이 흥한다'는 구호를 내놓는다.
임청과 이문성은 의거를 일으킨다. 사람들에게 이렇게 선언한다: "돈이나 양식을 보내주면, 일을 이룬 후에 땅과 관직을 주겠다. 그리고 조직을 발전시키고, 제자들을 통하여 세력을 각지로 확장시킨다. 직예, 산동, 하남의 많은 곳에 신도가 늘어난다. 가경십육년 구월, 이문성과 임청은 반란을 일으키기로 결정한다. 그리고 날짜를 가경십팔련 구월 십오일 오시로 결정한다. 그리고 풍극선, 우량신등과 반란의 구체적인 사항을 논의한다. 그리고 임청을 천황(天皇), 풍국선을 지황(地皇), 이문성을 인황(人皇)으로 하며, 반란을 일으킬 때 백색깃발을 들고, 백포(白布)로 머리를 감싸고, 허리를 묶기로 한다. 그리고 구호를 확정하는데, 공개된 구후는 "봉천개도(奉天開道)"였다. 암호는 "득승(得勝)"의 두 글자였다. 누군가가 물었을 때, 그저 '득승'이라는 두 글자로 답하면 바로 한식구이다. 죽임을 면할 수 있다"
가경십칠년 십일월, 우극경(于克敬)이 <<삼교(불)응겁총관통서>>라는 책을 임청에게 바친다. 임청은 이 경권에 들어있는 "천반삼부(天盤三副)"를 근거로 하여, 하늘을 장악한 신도 바뀌었으니, 인간세상을 주재하는 황제도 바뀌어야 한다는 주장을 내놓는다. 임청은 또한 이 책에 들어있는 "십팔자명도(十八子明道)"라는 말을 견강부회적으로 해석하여, "현재는 이(李)씨성이 도를 받았다. 이문성이 인간세상의 왕이 되어야 한다"고 말하였다. 그리고는 신도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이문성은 바로 명나라의 이자성이다" 이문성도 스스로 "이자성이 환생하였다"고 말한다. 임청도 스스로 유좌신이 환생한 것이라고 말한다. 그리하여 신도들은 그를 유노야라고 불렀다. 그는 교도들 사이에 노래도 퍼트렸다: 전등북수귀한제, 대지건곤지일전(專等北水歸漢帝, 大地乾坤只一傳). 한제는 바로 임청 본인을 가리킨다. 왜냐하면 그는 스스로 유씨성이라고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외에 그는 북경남쪽 대흥, 양항 일대의 민간에 민요도 퍼트린다: "약요백면천, 제비임청좌료전(若要白面賤, 除非林淸坐了殿)" 많은 군중들은 재난을 피하기 위하여 속속 입교했고 반란의 대오에 선다. 교도들간의 입소문으로 입교자는 갈수록 늘어났다.
반란의 계획이 구체적으로 확정된 후, 이문성, 임청등은 구체적인 준비작업에 착수한다.
하남방면에서, 이문성은 우량신으로 하여금 800여명을 이끌고 준산현에 군수공장을 만들게 한다. 이문성 본인은 활현 사가장에서 조직기획업무를 진행한다. 그런데, 기밀유지에 철저하지 못하여, 현지관청이 정보를 탐지하게 된다. 그리하여 사람을 보내어 이문성, 우량신등을 체포해간다. 심문을 받을 때, 이문성은 '버티며 사실대로 실토하지 않았다" 그리고 현령이 무고한 사람을 도적으로 몰고 있다고 주장했다. 지현은 그의 말을 듣고는 대노했다. 몽둥이로 이문성을 수백대 때리고, 우량신도 수백대 때린 후, 피로 범벅이 된 상태에서 감옥에 가두어두고, 성으로 보내어 처결하게 하고자 한다.
이문성, 우량신이 체포된 후, 교내의 핵심인 황흥재, 황흥상 형제 및 이문성의 처인 장씨등은 구월 초칠일에 활현을 공격가여, 관리를 죽이고 감옥에서 사람을 구해내기로 결정한다. 이렇게 하여 이문성, 우량신등을 구하려 한 것이다. 초칠일 새벽, 풍극선, 우극경, 황흥재 형제, 장씨 및 이문성의 조카 몇몇이 수하 약 3천을 데리고, 활현 현성을 점거하여, 이문성, 우량신을 구출해낸다. 이문성은 스스로 "대명순천이진주(大明順天李眞主)"라고 주장하고, 우량신을 군사(軍師)로 삼고, 송원성에게 군사를 맡긴다.
하남활현의 의거는 주변 각현에 큰 영향을 미친다. 산동서남부 일대의 천리교는 속속 이에 호응한다.
천리교의 난은 청나라조정을 깜짝 놀라게 만든다. 가경제는 직예총독 온승혜를 흠차대신으로 하여, 병력을 이끌고 북에서 진군하게 하고, 산동순무 동흥은 활현의 동남쪽을 막는다. 그리고 하남순무 고기로 하여금 서남의 두 방면을 엄밀하게 막도록 지시한다. 반란군이 태행산으로 들어가는 것을 막은 것이다. 나중에 산서 대동진 총병인 장적이 요지에 주재하고, 서주진 총병도 신속히 북상한다. 이렇게 하여 합공을 당하게 된다. 또한 양강총독 백령도 서주에 주둔하면서, 반란군이 남하하는 것을 막고 있었다.
청나라조정에서 병력을 움직이느라 부산해 하면서 병력을 집중하여 하남활현등지의 천리교의 난을 일거에 섬멸하고자 할 때, 경기의 천리교의 수령인 임청의 지휘, 기획하에, 구월 십오일 원래의 계획대로, 궁중의 태감들이 도와주어, 자금성을 습격한다. 청나라의 제도상 매년 칠월에서 구월까지, 황제는 승덕피서산장에 머문다. 그 동안에 목란위장으로 가서 사냥을 한다. 이때 조정의 정치중심은 승덕으로 옮겨간다. 황자와 일부 대신만이 북경의 자금성에 머물며, 일상업무를 처리한다. 임청등은 바로 북경과 궁중의 방비가 허술한 틈을 타서, 자금성습격계획을 행동에 옮긴 것이다.
임청은 처음에 사람을 보내어 교외의 사냥터에서 가경제를 납치하려고 했다. 나중에 청나라병사의 방비가 엄밀한 것을 우려하여, 자금성을 습격하는 것으로 계획을 바꾼다. 임청은 "구월 십오일 북경으로 가서 일을 벌이면, 관병들이 어찌할 바를 모르고 당황할 것이며, 우리는 성공할 수 있다. 우리가 북경을 점거하면, 황제가 관동으로 가도 두렵지 않다." 그래서 그는 자금성을 습격하는 일에 대하여 아주 엄밀하게 준비하지는 않았다. 그는 평일에도 무술을 익히지 않았다.
어떤 사람이 그에게 무술을 익히라고 하자, 그는 "나는 신이 도와준다. 검술은 도라고 할 수가 없다"고 대답한다. 그리고 신도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지금은 하늘이 바뀌는 시기이다. 미래불이 주재할 것이며, 우리의 때가 올 것이다" 경성을 혼란에 빠트리면, 황상은 관동으로 돌아갈 것이다. "모든 성공의 희망을 신의 도움에 걸고 있다" 어떤 사람은 사람수가 너무 적어서 성공하기 힘들다고 걱정했다. 임청에게 하남의 병력이 도착한 후에 자금성을 습격하자고 제의했다. 임청의 대답은 이러했다: "일인일기로 유주를 격파하는 것은 아무 것도 아니다" "자금성에 들어가는 것은 수십명이면 된다. 하남병력이 도착하면 외성이 혼란에 빠질 것이고, 내성은 공격하지 않아도 스스로 무너질 것이다."
임청은 궁중태감의 안내를 받아서 자금성을 습격하려고 하였다.
임청은 궁중태감과 연락하였는데, 이는 교내의 진상(陳爽)이 다리를 놔준 것이다. 처음으로 천리교에 가입한 태감은 유득재(劉得財)였다. 그는 대흥현 상벌촌 사람이다. 가경십칠년 이월, 같은 마을의 진상이 그를 마을로 돌아오도록 요청하고, 그에게 여러번 연회를 베풀어줄 뿐아니라, 그에게 많은 돈도 보내준다. 그리고 그와 형제의 맹약을 맺고, 어려운 일을 함께하기로 약속한다. 유득제는 진상의 소개로 천리교에 가입한다. 유득재가 입교한 후, 태감 왕복록, 고광복, 장태, 난진희, 양진충등이 차례로 입교한다. 가경십팔년 삼월, 임청은 자금성 서화문밖의 음식점에서 태감 유득재, 유금, 고광복, 장태, 왕복록의 다섯 명을 만난다. 그들에게 "겁운이 곧 도래한다"고 말한다. 그들에게 자금성을 습격할 때 충분히 내응하도록 준비하라고 한다. 그달 이십사일, 임청은 다시 북경에 가서, 순성문밖의 채시구의 술집에서 유득재등 4명을 만난다. 그리고 그들에게 구월십오일에 일을 벌일 것이라고 말한다. 그들에게 궁내에서 길안내를 책임지라고 한다. 그리고 그들에게 일이 성사되면 장래 유득재를 대총관으로 삼겠다고 말한다. 구월초이틀, 진상은 다시 유득재를 만난다. 그에게 백포 여러개를 건내주고, 입궁하여 길안내할 때 쓰도록 한다.
교도들이 자금성을 습격하는데 동원하기 위하여, 임청은 이익으로 유혹하고 협박하고 사기치는 등의 수법을 동원한다. 교도 왕유신은 이렇게 말했다: "구월십이일, 진상이 나를 북경으로 가서 동화문에서 소란을 피우라고 했다. 일이 성공하면 공로의 크기를 봐서, 나에게 관직을 주겠다고 했다." 이득전은 이렇게 말했다: "그(임청)는 말했다. 현재 겁운이 이미 도래했다고. 구월십오일에 그가 일을 벌이는데 나에게 도와달라고 했다. 나는 장래 성공하면 무슨 좋은 일이 있는지 물어보았다. 그는 일이 성공한 후, 관직을 주겠다고 했다." 어떤 교도는 이렇게 말했다: "그들과 함께 북경에 가서 일을 벌이는데, 소인에게 현관을 약속했다." 반란행동에 참가하지 않으려는 자들에게는 위협을 가하기도 했다. 주투아는 이렇게 말한다: "구월 초이틀, 굴사가 나에게 함께 북경으로 들어가서 소란을 부리자고 했다. 나에게 백포 두 조각과 칼 한자루를 주었다.
그리고 만일 그를 따르지 않으면, 반드시 죽이겠다고 했다. 나는 따르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난칠을 이렇게 말했다: "십오일 새벽일찍, 내처의 친동생 굴명아가 나에게 말했다. 굴사가 오늘 반란을 일으킨다. 네가 그를 도와주어라. 난칠이 못하겠다고 하자, 굴명아는 말했다. 네가 가지 않으면 굴사가 나중에 성공했을 때, 너의 집안은 모조리 목숨을 부지하기 힘들 것이다." 한달자는 이렇게 말한다: "한래차가 이렇게 말했다. 임청은 무서운 사람이다 만일 가지 않으면, 집안에서도 죽을 것이다. 나는 할 수 없이 승락했다." 굴사는 성안에서 노래하고 연극하는 안국태도 협박으로 끌어들였다. "만일 가지 않으면 먼저 너를 죽일 것이다." 어떤 무리는 일반 군중과 같이, 상황도 잘 모르면서 자금성내로 속아서 들어갔다. 굴사가 이진방에게 성으로 들어가라고 할 때 그는 이렇게 말했다: "십오일 아침에 동화문으로 가라. 거기에 도착하면 칼을 주겠다. 너는 거기서 기다리고 있어라. 거기에 가면 너에게 뭘할지 말해주겠다." 굴사는 유구아에게 칼을 사라고 시킬 때도, 그에게 "가축을 잡는데 쓸 것이다"라고 말한다. 이렇게 하여 일부 사람은 진상을 잘 모르는 상황하에 북경으로 들어가서 반란에 가담한다.
천리교가 자금성을 습격하는 행동에서, 임청등은 대흥, 통현 및 인근의 직예 고안, 신성, 웅현등지에서 140여명을 동원한다. 구월십삼,사일, 각지의 교도는 속속 대흥현 황촌 송가장에 모인다. 임청은 그 중에서 칠십여명을 선발한다. 각각 진상, 진문괴 두 사람이 이끌도록 한다. 구월십사일 저녁, 임청은 모두에게 저녁을 같이 먹게 하고, 한 사람에게 백포 2조각, 칼 1자루를 나눠준다. 그후에 밤을 새워 북경성으로 들어간다. 진상은 황촌, 상벌 두 곳의 이십여명을 지휘해서, 동화문으로 공격해 들어갔다; 진문괴는 송가촌, 홍가촌, 태평장 및 웅현, 고안등지의 오십여명을 지휘해서, 서화문으로 공격해 들어갔다. 발견되지 않기 위하여, 사람들을 분산시켜 북경성으로 들여보냈다. 각각 잡상인으로 위장하여 무기를 들여보냈다. 그리고 외성 채시구 등지에서 집합했다. 그 후에 내성으로 진입했다.
이란의 진술에 따르면, 그의 부친은 구월 십이일에 두 광주리의 감을 샀는데, 광주리 안에는 열 세자루의 칼을 숨겨두었다고 한다. 그리고 십사일저녁에 영정문 밖에 와서 쉬고 있었다. 십오일 새벽에 감광주리를 들고 전문밖에 간다. 그 후에 서화문으로 갔다. 이육의 진술에 따르면, 십사일 저녁에 칼, 백포를 들고 웅노오의 집으로 갔다. 칼을 웅노오의 감광주리에 넣고 길을 가면서 서로 바꿔 들었다. 채시구에서 하팔등의 사람을 만나고, 각각 식당에서 식사를 한 후에, 서화문밖으로 갔다. 감광주리에서 칼을 꺼내들고는 옷속에 감추었다. 구월십오일 정오, 모두 약정한 시간에 각각 동화문과 서화문 부근에서 기다렸다. 진문괴는 사십여명을 이끌고 서화문으로 들어간다. 진상등은 몇 사람은 칼을 들고 동화문으로 들어간다. 내감 유득재, 유금등이 인도해주어 창진문으로 곧장 달려간다.
원래 동화문으로 들어오기로 된 사람은 삼십여명이었는데, 관병들이 대문을 닫아서 5,6명만이 들어왔다. 진상, 공서등은 관병과 싸우다가 상처를 입고 붙잡힌다. 서화문에서 진문괴가 이끄는 사십여명은 태감 장태, 고광복의 인도하에, 서화문으로 자금성에 진입한다. 금방 융종문에 도달한다. 위병의 화살을 빼앗아서 무기로 삼고, 융중문을 통하여 황제, 후비들이 거주하는 '대내(大內)"로 진입하려 한다. 수비병사들은 황급히 대문을 걸어닫았다. 교도들은 문밖에서 들어가지 못했다. 그중 한 사람이 담을 타고 올라가서 담을 넘어가려 한다. 당시 황자 민녕, 즉 나중의 도광제는 어찌할 바를 몰라하고 있었다. 그때 옆에 있던 태감 상영귀가 그에게 '조총으로 마구 갈기라'고 일깨워준다. 민녕은 그리하여 양심전의 문밖에서 조총으로 서쪽벽을 오르는 교도를 사살한다. 당시에 담위에는 세 명이 있었는데, 그중 1명은 백기를 들고 지휘하고 있었다. 그도 민녕이 사살한다. 금방 성친왕 영리, 진국공 혁호등이 관병 5,60명을 이끌고 융중문앞에 도착한다. 교도들은 수령인 이오의 지휘하에 청나라군대와 혼전을 벌인다. 화살촉 하나가 융중문의 편액을 맞추었다. 가경제는 애신각라 자손들이 이때의 교훈을 잊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그것을 남겨두게 했다. 지금도 볼 수가 있다.
천리교교도들은 화기, 칼, 창, 화살을 들고 있는 관병들에 대항하기 어려웠다. 그리하여 융중문에서 서화문쪽으로 철수한다. 그리고 서화문부근에서 다시 청나라군대와 격전을 벌인다. 쌍방에 모두 사상자가 나온다. 나중에 태감 고광복은 반란군을 서화문의 마도를 통해 황궁의 성벽위로 올라오게 한다. 그리고 어떤 자는 "순천보민(順天保民)"과 "대명순천(大明順天)"이라고 쓴 백포기를 내건다. 그들은 하남에서 호응하여 달려오는 구원군을 기다렸다. 소수의 천리교교도들은 대세가 이미 기울었다는 것을 알고 어하(御河)에 몸을 던져 자결했다. 어떤 사람은 관병에게 사살되었다. 몇몇은 성벽의 풀숲 속에 숨어 있다가 나중에 오봉루(五鳳樓, 황궁 오문의 성루)로 잠입한다. 밤이 되어, 청나라병사들이 성벽을 수색할 때도 발견되지 않는다. 다음 날, 해가 밝은 후, 교도들은 오봉루에 불을 내어 태워버리고자 한다. 그리고 어지러운 틈을 타서 도망가려고 한다. 그러나, 불길이 금방 큰 비로 꺼져버린다. 잔존한 교도들도 모조리 붙잡혀 버린다.
구월십오일 천리교의 황궁습격사건은 이틀만에 모두 칠십이명이 죽임을 당한다. 궁중태감들 중에서, 고광복은 자금성 성벽위에서 사살당한다. 양진충은 일이 실패한 후 도망쳤으나, 오래지 않아 체포된다. 유득재, 유금, 왕복록, 장태, 난진희등은 모조리 체포되고 나중에 능지처사를 당한다. 태감 난진희는 조사를 받으면서, 또 다시 십여명의 황금습격사건에는 가담하지 않은 천리교의 교도인 태감들의 이름을 불어버린다.
임청은 진상, 진문괴로 하여금 교도들을 이끌고 자금성을 습격하게 한 후에, 자신은 황촌 송가장에서 소식을 기다린다. 청나라관청에서는 체포된 교도들의 입에서 이 사건은 임청이 꾸민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리하여 황촌 송가장으로 사람을 보내어 임처을 체포한다. 임청과 동시에 체포된 것은 임청의 처자, 친척외에 임청의 집에서 일하던 일꾼과 같은 건물에 거주하던 이웃등 모두 20여명에 이르렀다. 구월 이십삼일 임청등 46명은 능지처사된다. 이미 죽은 자도 육시를 당한다. 이번 사건에 참여한 자는 그 본인이 엄한 처벌을 받은 외에, 가족, 친구들까지도 연루되어 나중에 관청에서는 모두 사백명에 가까운 사람을 체포했다. 청나라당국은 체포된 자들에게 온갖 혹형을 가해서, 최후에 능지처사를 당한 자가 73명, 육시를 당한 자가 55명, 참교(斬絞)자가 6명이었다. 친척으로 연좌되어 신강에 유배가서 노비가 된 사람이 49명, 복건, 광동,사천등지로 붙잡여가서 노비가 된 자가 88명이었다.
구월십일, 가경제는 승덕피서산장에서 북경으로 출발했다. 십육일 오는 도중에 천리교가 자금성을 습격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리고는 깜짝 놀라서, 연교에서 <<죄기조(罪己詔)>>를 반포한다. 거기에서 "자신이 황위를 승계한 이래로 조심스럽게 업무를 처리했으며", "비록 애민의 실정은 이루지 못했지만, 백성을 해치는 포학한 일도 저지르지 않았다"고 적었다. 이러한 "한,당,송명에도 없던 일이 벌어진 것은" 신하들이 태만한 소치라고 하였다. 제목은 <<죄기조>>이지만 실제 내용은 스스로의 변명에 불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