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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음회 칭구들에게!
지난 연말 약속한대로 드디어 오늘부로 다시 글을 올리게 되었네.오늘 소개할 내용은 <솔베이지의 노래>로 유명한 노르웨이의 그리그와 그의 대표작품인 <페르귄트>組曲(솔베이그 혹은 솔베이지의 노래)에 관한 내용일세.
‘그 겨울이 지나 또 봄은 가고/그 여름날이 가면 더 세월은 간다/아 그러나 그대는 내 님일세/내 정성을 다하여 늘 고대하노라 고대하노라....’ 이 슬프고도 애잔한 노래를 들으며 그의 고향으로 여정을 떠나보세.
*組曲 : 몇개의 곡을 짜맞춘 일련의 모음곡을 말한다.
*국민주의 음악 : 19세기 민족주의 운동이 꽃피기 시작하면서 주목받기 시작한 음악으로 작품속에 민족적인 감각의 양식
을 창조하는 것을 말한다.
[노르웨이 위대한 국민주의 음악가, 에드바르드 그리그]
‘그 겨울이 지나 또 봄은 가고/그 여름날이 가면 더 세월은 간다/아 그러나 그대는 내 님일세/내 정성을 다하여 늘 고대하노라 고대하노라....’
북국의 우수가 한기처럼 가슴을 저미는 선율,애련한 모정(慕情)이 결빙(結氷)된 청징(淸澄)한 빙청(氷靑)의 리리시즘,우리 누구나가 다 아는 유명한 <솔베이그(지)의 노래>다.이 명곡의 고향을 찾아가는 길은 정말 그 곡조처럼 시리고 맑다.
*리리시즘 : 예술적 표현에서 서정성을 의미
노르웨이의 오슬로에서 베르겐 행 기차를 탄다.수도와 제2의 도시(베르겐) 사이(470km)를 잇는 노르웨이 철도의 간선이다.기차가 오슬로를 빠져 나오면서 노르웨이 철길은 서서히 산으로 오른다.이윽고 주위는 온통 깊은 숲이다.앞이 막힌 듯한 산간의 협곡을 꼬불꼬불 돌며 기차가 헐떡인다.이따끔씩 새파란 호수와 시원한 폭포가 나타나 땀을 씻어준다.차창밖은 여름인데도 써늘하다.높이 오를수록 일년 내내 녹지않는 만년설이 눈부시다.
오슬로를 떠난 지 약 5시간 후 핀세 역을 조금 지나자 이 철도 최고 지점인 다우게바튼에 이른다.해발 1,301m.별것 아닌 높이 같지만 북위 60도를 생각해야 한다.이미 식물이 자라는 한계선을 지났다.여기서 바다 쪽을 향해 내려서면서부터는 서부 노르웨이 특유의 풍경이 펼쳐진다.
* 피오르드 협만
눈덮인 산을 배경으로 하여 노르웨이의 명물인 피오르드 협만(峽灣)의 깊고 좁은 가지 끝이 저 아래로 들락거린다.미르달 역에서 아울란드 피오르드 플롬까지는 55% 경사의 철도 지선이 달려 내려간다.기차가 평지에 내려서자 마지막에 긴 터널을 빠져나오며 숨을 내쉬면 거기가 베르겐이다.8시간 걸린다.그사이 200개의 터널과 300개의 교량을 지나온다.
베르겐은 한때 한자동맹 상인들의 근거지로 활기를 띠다가 뒤에 노르웨이 굴지의 무역항으로 번영한 항구 도시다.인구 21만,바겐 피오르드의 북안(北岸)에 위치하여 피오르드 관광 여행의 센터이기도 하다.배후가 험한 산으로 둘러싸여 육상교통은 지금도 불편한 상태다.철도가 개통된 1909년 이전까지만 해도 베르겐 사람들은 오슬로에 가기보다 런던으로 나가는 것이 더 쉬었을 정도다.
* 베르겐
그 때문에 같은 노르웨이라도 오슬로와는 언어,식생활,기질 등이 판이하다.오슬로 사람들은 베르겐 사람들을 보고 “베르겐인이기는 해도 노르웨이인은 아니다”라고까지 말한다.베르겐 사람들은 그들대로 그만큼 향토 의식이 강하고 그래서 자기 고장이 낳은 세계적인 음악가를 그럴 수 없이 자랑스럽게 여긴다.그가 바로 <솔베이그의 노래>의 작곡가 에드바르드 그리그다.
그리그는 베르겐에서 태어나 소년 시절을 보내고 한때 코펜하겐,스톡홀름 등지로 나가 살았으나 결국 이 땅으로 돌아와 살다가 뼈를 묻은 순전한 베르겐인이다.
그리그의 생가 자리는 스트란드가텐 152번지.ㄷ자형으로 생긴 항구의 남안에서 100m 가량 안쪽으로 항구와 병행하여 달리는 길이 스트란드가텐이다.길 양쪽으로는 상점들이 늘어섰다.그리그가 태어난 집은 2차세계대전 때 없어져 버리고 그 자리는 상점이다.어린 그리그가 피아니스트이던 어머니한테서 피아노를 배우며 자라던 자취는 없다.대신 바닷가에서 조금 떨어져 있기는 하지만 항구의 훤소(喧騷)와 물새의의 울음과 해풍 냄새는 그 때나 마찬가지로 이 거리까지 전해온다.그리그는 이 갯내를 호흡하며 컸다.
* 밤의 베르겐 1
부둣가의 시장은 베르겐의 관광 명물이다.노점들이 늘어서서 생선 등 해산물뿐만 아니라 각종 일용품도 판다.이 시장은 어린 그리그가 날마다 지나다니던 곳이다.하루는 한 친구와 같이 가다가 “이 고약한 생선 냄새!”라고 하자 “고약하다고? 이것이 얼마나 좋은 냄샌데”하던 그리그였다.
그 수십년 후 베르겐의 그랜드 호텔에서는 그리그의 61회 생일을 축하하는 만찬회가 열렸다.이 자리에서 그리그는 “내 작품은 베르겐의 아름다운 자연과 활기가 영감을 준 것이다.나는 바다 냄새라면 지금도 가슴이 두근거린다.내 음악은 선창에 올라온 대구맛 같은 것이다”라고 인사말을 했다.
그리그가 어릴 때 다니던 학교는 生家에서 약 1km 떨어진 곳에 지금도 남아있다.탕크校.콩 오스카르스가테 길가에 있는 돔 교회 부근이다.3층짜리 석조 건물의 중앙 아치 위쪽에 학교 이름과 함께 1855년이란 설립 연대가 쓰여 있다.그리그가 입학한 것이 10세 때인 1853년이니 입학 때는 다른 장소의 교사였던 모양이다.그는 여기서 15세 때까지 공부를 했다.
그리그는 학교가 싫었다.특히 숫자가 질색이었다.어느날 등굣길에 큰 비를 만나 학교에 닿았을 때는 옷이 흠뻑 젖어 있었다.선생님은 옷을 갈아입고 오라고 집으로 돌려 보냈다.이것에 재미를 붙여 가랑비가 오는 날도 일부러 처마 밑에 한참 서서 옷을 홍건히 적신 후 학교로 가곤 했다.선생님이 나중에 그 꾀를 알아차려 호된 꾸지람을 당했다.
탕크교에 다니던 12세 때 그리그는 그의 첫 작품인 <독일 선율에 의한 변주곡>을 썼으나 이 학교 음악 선생이 보고 재능을 인정해 주지 않았다.그 때의 억울함을 그리그는 내내 잊지 않고 50년 후에 회상하고 있다.이 학교는 그리그의 그런 분노가 담긴 곳이다.
* 베르겐의 밤2
그리그가 9세 때인 1852년 란도스에 살던 외조부가 죽자 그의 커다란 저택이 그리그 일가의 손에 넘어왔다.일가는 이 때부터 매년 여름 동안 여기 와서 살았다.란도스는 베르겐 도심에서 2km쯤 떨어진 교외다.시내에서도 멀찍이 바라다보이는 언덕 지대에 이 집은 지금 목사관이 되어 있다.벽에 아무 기념판도 안 걸리고 집안에 아무 유물도 없지만 이 저택이 그리그에게 중요한 것은 음악가로서 그의 운명이 정해진 곳이기 때문이다.
이 집에 살 때인 1858년 베르겐이 낳은 또 하나의 세계적 음악가인 피아니스트 올레 불이 근처에 이사를 와서 그리그 가에 인사하러 왔다.이 때 그는 15세이던 그리그의 피아노를 듣고 그의 아버지에게 “두말 말고 이 아이를 라히프츠히에 보내 작곡 공부를 시키십시요”했다.이 한 마디가 작곡가 그리그의 출발 신호였다.
그리그는 이 해 라히프치히 음악원에 입학하면서 본격적인 작곡 생활을 시작했고,4년후 음악원을 졸업하고 돌아와서 연주 활동이 개시되었다.
그리그가 노르웨이의 문호 입센으로부터 시극(詩劇) <페르귄트>의 부수 음악 작곡을 의뢰받은 것은 1874년(31세)이었다.
<페르귄트>는 노르웨이의 옛 전설에서 취재한 ,방랑과 모험 속에 생애를 보내는 한 몽상가의 이야기다.
허풍쟁이로 소문난 페르귄트는 남의 신부 잉그리드를 유괴하여 산으로 달아난다.산의 마왕과 계약하여 환락을 쫓다가 산골의 소녀 솔베이그의 헌신적인 사랑을 받는다.어머니 오제가 죽고 나자 페르귄트는 그 사랑을 버리고 공상적인 모험 여행을 떠난다.모로코,아라비아에서 거부가 되었으나 다 털리고 다시 캘리포니아에서 금광을 발견해 돈을 모았다가 귀국 도중 배가 난파하여 무일푼으로 고향의 산마을로 돌아온다.백발이 된 솔베이그가 그 때까지 기다리고 있다가 그를 따뜻이 맞아주고,그는 솔베이그의 가슴에 안겨 눈을 감는다.
그리그는 이 시극에 23곡의 부수 음악을 작곡했고 뒤에 <오제의 죽음> 등 4곡을 골라 연주회용의 조곡으로 내놓은 것이 평판이 좋아 다시 4곡을 제2조곡으로 묶었다.곡마다 그리그 특유의 서정적인 선율이 아름답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이 제2조곡 마지막에 들어있는 <솔베이그의 노래>다.이 노래는 솔베이그가 평생이 다가도록 산간의 초옥에서 혼자 페르귄트의 귀환을 기다리며 부르는 단심(丹心)의 망부가(望夫歌)다.
이 곡의 가녀린 선율은 여성의 순애와 정절의 상징이다.조곡에는 들어 있지 않지만 극의 마지막에서 솔베이그가 죽어가는 페르귄트를 가슴에 안고 부르는 <솔베이그의 자장가> 또한 가슴을 메게한다.‘잘 자거라,잘 자거라,나의 큰 아기야/나는 그대를 잠재우고 그대 곁에서 밤을 새우리니...’
그리그 일가는 1874년 여름동안 형편이 어려워 란도스의 저택을 팔아버리고 이 동네로 잠시 나와 살고 있었고,이 때 그리그는 친구 롤프센의 소유이던 이 가든 하우스를 빌려 <페르귄트>음악의 작곡에 전념했다.이 음악은 결국 이 집에서 끝을 맺지못하고 덴마크의 코펜하겐 북쪽에 있는 프레덴스보리에서 친구의 별장에 머물며 완성을 보게 된 것이지만,그리그가 1874년 한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 “<페르귄트>는 잘 진행되지 않는다.이미 되어있는 솔베이그의 노래 등 약간의 부분외에는 아주 힘이 드는 테마다”라고 한 것을 보면 그가 이 좁은 가든 하우스에서 이 곡에 얼마나 고심했는가를 알 수 있다.
‘그 겨울이 지나 또 봄은 가고 또 봄은 가고...’소옥 전체가 하나의 뮤직 박스가 되어 <솔베이그의 노래>가 향기처럼 새어 나오는 것 같다.
시립 도서관에는 그리그의 100곡이 넘는 육필 악보,그가 소장했던 2,000여 곡의 인쇄된 악보,340통의 자필 편지,그밖에 일기 등이 보관되어 있다.연주회장인 그리그 홀은 그를 기념하여 1972년에 건립한 것이다.여기서는 매년 5월 하순 국제적으로 널리 알려진 베르겐 페스티발이 열린다
* 그리그 박물관,아래는 그리그 홀(지붕이 잔디로 덮여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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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그는 북구의 국민주의 음악을 대표하는 작곡가다.그의 음악의 바닥에는 노르웨이 민족이 사는 준수한 산지와 피오르드의 숨소리가 깔려 있다.그리그의 이 민족 음악이 자란 것은 특히 로포트휘스 시대다.
로포트휘스는 베르겐에서 동쪽으로 100여 킬로,산악지대로 깊이 파고 들어간 하르당게르 피오르드가 두 갈래로 갈라지면서 남쪽으로 뻗은 쇠르 피오르드 연안에 있는 마을이다.육로로는 교통이 불편하여 여름 시즌에는 베르겐에서 피오르드 탐방 유람선이 여기까지 다닌다.로프트휘스의 피오르드 가에 서면 앞은 백설을 인 포르겐폰드의 봉우리가 물 속으로 엎어질 듯 높고 뒤쪽은 잔잔한 기복의 언덕이 목가적 풍경을 이룬다.
인가는 띄엄띄엄하지만 피서지라 고급 호텔이 들어서 있다.그울렌스방이라는 호텔의 한쪽 구석 뜰을 눈여겨보면 조그만 목조 소옥을 발견하게 된다.양쪽에 창이 달린 단칸짜리 집은 안이 텅 비었다.이 곳이 그리그의 작곡실이다.
그리그는 도시 문화의 소음이 들리지 않는 오지의 물가가 마음에 들어 1877년(34세) 여름부터 1880년까지 여름을 이 곳에서 지냈다.이 나무 오막을 지어 어느 농가의 바위 위에 갖다 놓고는 피아노 한 대,난로 하나,그리고 자신,이렇게 셋만이 들어앉아 인기척과 담을 쌓고 작곡에 몰두했다.
* 그리그 동상,아래는 조그맣게 그리그의 조그만 작곡실이 보인다
* 작곡실 내부
누가 근처에 얼씬거리기라도 하면 피아노를 덮어 버렸다.그는 때때로 산보를 했다.사람 그림자 없는 구릉 지대를 들풀과 들꽃을 밟으며 걸었다.인근 일대의 산지와 피오르드 여행도 자주 했다.하르당게르 지방 농민들 사이에는 노르웨이 민족 음악의 악기인 할링펠레의 명연주자가 많았다.그래서 옛 노르웨이의 선율에 기초를 둔 <남성 합창의 앨범>이라든가 <산의 트롤> 등,민족적 작곡가로서의 그리그의 특색을 충분히 살린 작품들이 이 로프트휘스에서 나온 것이다.
그리그가 42세 때인 1885년부터 64세로 죽을 때까지 만년의 20년을 살던 곳은 트롤드하우겐이다.
베르겐에서 동남쪽으로 약 10km, 버스를 타면 15분만에 내려 차도 없는 길을 20분 가량 걸어 들어가야 한다.잡목림 사이 길은 바닷가에 돌출한 갑(岬) 끝에서 끝난다.그 막다른 데가 트롤드하우겐이다.노르도스반네라는 내해(內海)의 기슭에 위치한다.나지막한 산들로 빙 둘러싸인 만은 외해(外海)에서 10km쯤 안으로 들어와 있기 때문에 호수 같다.
그리그가 살던 집은 수면에서 20m 가량 높은 산 언덕 끝에 있다.하얀 칠을 한 나무 판자벽의 옛 농가풍 2층 건물이다.베르겐 시내를 일주하는 관광버스가 여기까지 들러 집안에는 순례객들로 득실댄다.아래층의 서재 겸 거실은 그리그가 거처하던 때 그대로다.진열된 여행용 가방,수많은 트로피,훈장들은 그가 얼마나 외국 연주 여행을 많이 다녔는가를 말해준다.스타인웨이 그랜드 피아노 한 대는 그리그가 1892년 은혼식 때 베르겐 시로부터 선물 받은 것이다.
* 그리그와 부인 니나
이 은혼식 때 이 집에서의 축하 행사는 거국적 규모였다.그날 그리그 부처가 아직 침실에 있을 때 군악대가 와서 연주를 했고 꽃다발과 선물이 세계 각지에서 답지했다.뜰에는 130명을 초대한 파티가 열리고 그리그는 <트롤드하우겐의 축혼(祝婚)의 날>을 작곡하여 소프라노 가수이던 아내 니나에게 바쳤다.대안에서는 축포가 울리고 내만(內灣)에는 축등을 단 작은 배들이 무수히 떠서 그 불빛이 밤 하늘을 밝혔다.이쪽 언덕 위에서는 약 5,000명의 인파가 모여 축하했다.
트롤드하우겐의 집 테라스에서는 뜻밖에도 순정의 여인 솔베이그를 만난다.한 손을 이마 끝에 대고 하염없이 먼 곳을 바라보며 페르귄트의 귀향을 기다리는 하얀 대리석상이다.1950년대에 소련의 한 조각가가 기증한 것이라는데,정말 실재의 솔베이그를 대면이라도 하듯 반갑다.
* 트롤드하우겐 집(현재는 그리그 기념관)
그리그가 일대의 땅을 사서 영주의 거처로 지은 이 건물은 그가 죽은 뒤 1차 세계대전 때의 어려움으로 1919년 아내 니나가 팔아 버렸다.1928년 그리그의 조카가 인수하여 기증함으로써 1928년부터 기념관이 되었다.
*그리그가 사용하던 피아노
건물 앞에는 1985년에 세워진 실내악 음악회장이 있다.매년 5,6월 기념 음악회가 여기서 열린다.앞뜰에서 내만 쪽을 향해 좁은 언덕길을 내려가면 물가 가까이에 또 하나 그리그의 소옥을 발견하게 된다.피아노가 한 대,그리고 책상과 의자가 안에 놓여있다.<서정 소곡집> 등 트롤드하우겐 시절의 명곡들이 여기서 작곡된 것이다.
그리그는 베르겐의 병원에서 죽자 국장이 치러진 후 화장을 한 유골이 트롤드하우겐의 집으로 돌아왔다.무덤은 집 아래의 물기슭 절벽 안이다.바위에 동굴을 뚫어 유골 단지를 넣고는 그의 이름을 새긴 돌뚜껑을 덮었다.이 특이한 묘실에서 그는 태어날 때 듣던 해조음(海潮音)을 자장가처럼 들으며 잠자고 있다.
* 그리그의 묘지
첫댓글 간만에 블라디 고의 음악 이야기를 대합니다
앞으로 다른 음악가들의 재미난 연재 부탁함다.
하도 오랫만이어서 그런지 박도사(용두열 친구중 가장 HTML의 거장인 동시의 본인의 싸부이기도 함) 덕분에 간신히 글 올렸슴다.앞으로 드보르작,차이코프스키,포스터,나폴리 민요 등이...그리고 재밌는 오페라 얘기가...
아! 솔베이지의노래 .. 황홀!,전율,! 무명에서 유광의 빛으로.....우주안은 21차원으로 구성됨다 그중 이시간은 약5차원의 세게에서 노는것같슴다 ,, 아! 어지러워 ,,,약먹을시간됫네 또라이진정제인데 함 드셔볼라우 불라디?
고선상님 글 오랫만에 뵙게되니 반갑습네다, 가만히 이 곳에 앉아서도 좋은 글을 볼 수 있으니 새삼 감사드립네다.
남훈에게! 오랫만이네.먼저 새해 더욱 건강하시고...새해에는 가상 공간에서나마 더욱 자주...귀국하시면 한번 용음회에 나와 회포를 푸시는것도...Happy New Year!!
또 다시 영혼의 양식을......
감사~~~
'돌아온 장고'처럼 오랜만에 돌아와서 기관총으로 수많은 총알[이야기]을 발사하여 많은 팬들을 기쁘게 하는구만, 계속 부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