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예수의 제자가 되려면
1980.1.3. 정인세 원장
처자나 형제자매나 심지어는 자기 자신마저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습니다. 그리고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습니다.
고린도전서 1장 7절 이하에서 몇 절 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세례를 베풀라고 나를 보내시지 않고 기쁜 소식을 전하라고 보내셨습니다. 그것은 인간의 말재주로 하라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인간의 말 재주로 기쁜 소식을 전하면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그 뜻을 잃고 맙니다. 멸망할 사람들에게는 십자가의 이치가 한낱 어리석은 생각에 불과하지만 구원받은 우리에게는 그것이 곧 하나님의 힘입니다. 그 아래로 가서 31절 이하를 2장까지 가면서 읽겠습니다.
그러므로 성서에도 기록되어 있듯이 누구든지 자랑하려거든 주님을 자랑 하십시오. 형제 여러분 내가 여러분을 찾아갔을 때에 나는 유식한 말이나 지혜를 가지고 하나님의 진리를 전하려고 하지는 않았습니다. 그것은 내가 여러분과 함께 지내는 동안 예수 그리스도 특히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 외에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기로 하였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내가 여러분과 함께 지내는 동안 예수 그리스도 특히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 외에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기로 하였기 때문입니다.
갈라디아서에서 몇 절 읽겠습니다. 2장 19절 20절. 나는 이 율법의 손에 죽어서 율법의 기대에서 벗어나 하나님을 위해서 살게 되었습니다.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달려 죽었습니다.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달려 죽었습니다.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거하시는 것입니다.
끝으로 6장에 가서 14절 이하입니다. 6장 14절 이하입니다. 갈라디아서.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밖에는 아무것도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에 못 박히심 으로서 세상은 나에게 대해서 죽었고 나는 세상에 대해서 죽었습니다. 예수님의 그 십자가를 같이 조금 생각해 보겠습니다. 일 년에 한 두 차례씩 이렇게 모이면 서로 마음에 교제를 위해서라도 한 두 마디 말씀을 드리게 되는데 어제 아침까지도 이번에는 어떻게 한 말씀도 말하고 지나갈까? 어쩔까? 하는 중에 책을 하나 받았어요. 받았는데 이 말씀을 읽는 가운데서 느낌이 생겼어요. 비로소 조금 이렇게 증거 하려고 그럽니다. 성전12월호인데 책 첫 장을 딱 여니까 무슨 제목이 나오는가하니 ‘십자가를 진다’ 그런 제목으로 안병무 박사가 쓴 글이에요. 십자가를 지고 그런 소리들을 잘들 하는데 그 뜻이 대부분 틀려먹었더라. 그 말씀이에요. 뜻을 모르고 십자가를 진다는 말들을 하더라. 그렇게 말씀이 시작이 됐어요. 첫머리를 조금 읽어가는 가운데 조금 한 마디를 하고 싶은 마음이 생겨서 그 말이지요. 처음에 이런 말씀으로 시작이 되었습니다. 십자가를 질 각오라는 말이 지각없이 오염되고 있다. 잘못들 쓰고 있다. 십자가를 진다는 말을 잘못 쓰고 있다. 그 결과 그리스도교의 상징이며 그것이 주님의 진리의 핵인 그리스도 주님의 알맹이라는 말이지요. 씨앗과 같은 그 핵인 십자가의 의미가 부족 된다. 십자가의 뜻이 끝내져버려. 우리가 특히 정가에서 그런 것 같다. 요새 정치하는 사람들, 십자가를 지는 마음으로 내가 이 책임을 집니다. 그런 말 잘 하지 않습니까? 그것이 대단히 아마 듣기가 좋지 않으셨던 모양이지요? 이 분은 그런데 이런 오용은 반드시 악인에 기인하는 것만은 아니다. 꼭 악한 뜻으로 쓰이는 것만 같지 않다. 그 말이에요.
무지에 연루 됐다는 것 같다. 몰라서 그런다는 거야. 십자가를 진다는 말에 참 뜻을 몰라서 무지에 연루 되었다고 생각됨으로 그런 말과 관련된 교리 안에서 십자가에 대한 초보적 지식을 전달해줄 의무를 느낀다. 그 십자가에 대해서 초보적인 것 그것 조금 전하겠다. 그런 말씀으로 시작했어요. 그러면서 이런 예를 한두 가지 들으셨거든요. 이 십자가가 십자가의 뜻이 잘못된 것으로서 퇴색된 까닭은 일차적으로는 그리스도의 교회가 그 책임을 져야한다. 교회에서 그걸 잘 못 가르쳤다는 말이에요. 저들은 십자가를 함부로 매도하고 있다. 매도, 팔아먹고 있다. 그 말이지요? 십자가를, 장사를 하는 것처럼 팔아먹고 있다. 그 뜻이에요. 몇 가지 일상적으로 듣는 볼 수 있는 예를 들어보자. 어떤 장로가 이런 말을 했다. 나는 십자가를 지고 삽니다. 이렇게 어떤 장로가 말을 하더라는 거지요. 그래서 그게 무슨 뜻인가? 했더니 그 장로는 말을 조금씩 이렇게 알아듣기 쉽게 풀이해가면서 읽습니다. 그 장로는 등산을 갔다가 발을 다치는 바람에 상한 다리를 수술을 했었는데 어떤 계절만 되면 그 다리가 가렵고 아프니까 그것이 자기 십자가라는 것이다. 다리가 아파가지고 자꾸 그 다리가 아픈데 도지는 것 그게 십자가라고, 장로님이 그러더라. 그 말이지요? 또 어떤 여자는 나는 십자가를 지고 산다고 해서 구체적으로 무엇이 너의 십자가냐? 이렇게 물었더니 자기 마음에 안 드는 시어머니가 십자가라고 했다. 마음에 안 드는 시어머니 모시고 사는 게 그게 십자가라고, 그러더라. 어떻게 생각하시오? 그게 십자가 입니까? 여러분 마음에 안 맞는 사람하고 같이 사는 게 십자가일까요? 이렇게, 이렇게 지극히 자질구레한 모든 고통스러운 상처나 여건 그것이 자기 잘못에 기인했건 남에게 가해된 것이건 나아가서는 심지어 어떤 자기 야욕을 이루는데 거리낌이 되는 조건 따위도 그런 것이 다 모두 이렇게 십자가라고, 그렇게 말들을 해요. 그 십자가의 자체의 뜻을 모두 격하 시키는 거라고, 띄엄띄엄 읽습니다.
여기는 십자가의 뜻을 얼마나 격하시키고 있는지 전혀 생각하지도 않고 있는 것 같다. 만일 저들이 감상적으로 상기 하고 눈물을 짜는 대상으로서의 갈보리 산상의 십자가라, 그 십자가를 생각하고 눈물이 조금 찔끔찔끔 나오는데 그런 거지요. 감상적으로, 또 그들의 구원의 열쇠처럼 반복되는 십자가, 또 자신들이 졌다는 십자가라는 것을 연관시켜 보면 모두 이런 것들을 생각하며 십자가에 대해서 얼마나 자기들이 망발을 하고 있는지 깜짝 놀랄 것이다. 거기까지 읽지요. 그렇게 참 실감나게 적절한 말씀을 잘 쓰신 것 같아요. 참 십자가의 뜻을 깨닫는 다면 ‘십자가를 진다.’ ‘십자가에 죽는다.’ 그 자기들이 쓰고 있는 말이 얼마나 망발 스러운지, 그것은 아마 깨닫는 날이 올 것이다. 그런 뜻이에요. 그 말씀을 이렇게 읽으면서 생각을 하니까 우리들이 오늘 쓰고 있는 기독교의 용어는 다시 한 번, 다시 한 번 생각해야 이해해야하겠다. 하는 말이 많이 있는 게 사실이에요. 가령 동정녀 탄생이라는 말이라든지, 또 그 예수님의 설교나 비유를 우리가 많이 이야기를 하는데 심지어 기적이라든지 그 하나하나를 다시 전부 생각해 봐야겠다. 그런 생각이 나지요. 부활 이라는 말, 재림 이라는 말, 심판 이라는 말, 모두 그런데, 또 천국 이라는 말 지옥 이라는 말 그런 말들 또 그 외에 많은 덕목이 있지요? 온유니 겸손이니 절제니 인내니 또 믿음이니 사랑이니 교만이니 하는 그 말들이 얼마나 교회 안에서 들, 잘못들 쓰여 지고 있는가? 그런 생각이 났어요. 그 하나하나 깊이 다시 한 번 그 뜻을 찾아봐야 하지 않나? 그래서 오늘 이 시간에 깊은 뜻을 다 찾아볼 수 있겠어요? 그러나 조금 생각을 해보려는 거지요. 여기도 그런 말씀하십디다만 십자가 하면 고생을 생각한다는 것만은 비슷하다는 거지요. 고생을 하는 것이 십자가다. 이렇게 생각하는 건 기특하나 고생이 다 십자가냐? 이렇게 생각하는 거지요? 고생만 하면 무조건 십자가는 아니다. 또 십자가 하면 조금 깊이 생각하면 죽는 사람이다. 그쯤은 죽는 거다. 그것쯤은 또 생각들을 하는 것 같으나 꼭 죽는 것이 다 십자가는 아니거든요. 그렇지요? 그런 설명은 하지 않아도 아마 아실 겁니다.
그런데 오늘 한 가지 이야기하고 지나가야 할 것은요? 십자가가 몹시 신자들에게서도 기피당하고 있다는걸 먼저 생각해봐야겠어요. 십자가가 기피를 당하고 있어요. 십자가라는 그 말이나 더군다나 십자가를 지는 생활을 싫어해. 그 싫어하는 까닭이 몇 가지 있지요? 빌립보 3장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빌립보 3장 18절에 제가 읽습니다. 나는 전에 여러 번 여러분에게 일러드린 것을 지금도 눈물을 흘리며 말 하는 바 이지만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가 되어 살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십자가의 원수가 되어 살고 있습니다. 그들의 최후는 멸망뿐입니다. 그들은, 그들은 누구에요? 십자가의 원수들? 십자가의 원수들, 그들은 자기의 배속을 하나님처럼 섬기고 먹는 것 밖에 모른다. 그 말이지요? 배로 하나님을 섬긴다. 자기의 배속을 하나님처럼 섬기고 자기의 수치를 오히려 자랑하고 부끄러운 것을 오히려 자랑을 해. 여자들이 벌거벗고 다니면서 자랑을 한다. 그 말 이지요? 요즈음 옷들이 그러지요? 부끄러운 것을 자랑을 하고 뭐 음란이니, 뭐 그런 사실, 사람으로서는 부끄러운 건데, 몰래 하기도 어려운건데, 도리어 광고를 치고 자랑을 한다. 그 말 이지요? 부끄러움을 오히려 자랑을 하고 또 셋째로는 세속의 사물에만 마음을 쓴다. 거룩한 하늘나라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세속, 세속 이 세상에 붙은 것. 거기에만 정신을 잃고 산다. 그게 십자가의 원수들이다. 그렇게 말하고 있어요. 사실은 이런 것 때문에 십자가가 기피를 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 다른 말로 하자면 향락주의 어떻게 하던지 즐겁게 재미있게 살자. 이런저런 오락잡지에도 보면 향락스러운 것, 참 부끄러운 거 또 텔레비전 프로에도 그렇게 향락스러운 것이 나오지 않으면 관심들을 기울이지 않아요. 사람들이, 그러니까 모두 그러지. 그런 것이 사람들의 마음을 잡고 사치나 허영이나 모두 그런 것들이 그런 것 들이 십자가를 멀리하게 만들어요. 사실 그 십자가라는 것은 고난이고 모두 고생스러운 거고 확실히 그렇지요? 그 향락적인 생각이나 사치허영이나 그런 것과는 거리가 머니까, 사치나 향락에 빠진 현대인에게 있어서 십자가라는 말은 듣기 싫은 소리가 될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그래 십자가가 자꾸 멀어지는 거지요.
또 십자가가 기피를 당하는 이유는 역시 이기주의입니다. 이기주의, 제 몸통어리만 생각하는 거 이기주의 그거는 십자가의 정신과 근본적으로 다르거든요. 십자가는 완전히 이타주의 아닙니까? 희생 아닙니까? 십자가는 완전히 희생정신 인데 사람들은 이기주의가 갓 난 애기 때부터 절어놔서 도저히 탈피하기가 어려워요. 일생동안을 두고 싸워도 그 이기주의에서 완전히 이탈하기가 대단히 힘듭니다. 약간 믿어보고 좀 더 희생적으로 살아보려고 하는 사람까지도 어느 틈엔지 모르게 다 잊어버리고 자기를 도모하게 됩니다. 그러니까는 이 십자가의 정신이라는 게 이해되기가 힘들어, 도저히 들어갈 수가 없어. 그 정신이 그래서 자연히 십자가의 정신은 이렇게 뱉어버리는 거지요. 기피를 당하게 되는 거지요. 또 하나있지요. 그 물질만능주의, 돈이 제일이다. 그럴듯한 말이지만, 이 황금 돈, 돈이 우상이 되어가지고는 사람 마음가운데 그래가지고 돈이 없으면 못산다. 돈을 숭배하고 그저 돈만 주면 좋아하고 돈이 없으면 허전하고 그런 마음들, 그게 십자가의 정신을 받아들일 수 없는 마음이지요? 그러니까 십자가는 그런 세계에 있어서 기피당할 수밖에 없지 않아요? 십자가는 집 한 칸도 없고 환경, 먹을 걱정도 하지 말아야 하고, 심지어 자기 육신을 참 이렇게 잘못 생각하면 학대하는 것이 십자가인데, 그렇게 될 수가 없거든요. 그러니까 바울 사도께서는 이렇게 설명을 하셨지요? 고린도서에 보면 공동번역에는 십자가의 이치라 그랬고, 개역 성경에는 십자가의 도라 그랬지요. 그래서 십자가의 도가 어리석은 생각이 된다. 이랬는데 모두 그런 사람들에게는 십자가의 말이나 또 십자가를 생각하는 거, 또 십자가적인 생활을 하는 거, 그게 이해가 안 될 뿐 아니라 어리석어요. 이런 사람들에게 물질만능주의자 향락주의자 이기주의자들에게는 십자가가 어리석은 것이고 그런 사람들을 바울사도께서는 멸망할 사람들이라. 이렇게 말했어. 망할 사람들이야. 결국은 다 망해먹을 사람 망해먹을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십자가가 기피를 당해.
그런데 원 참 그저 얼른 보기에 망해먹을 사람이라면 몰라도 어엿한 교회의 신자들에게 있어서도 십자가가 기피를 당하고 있는데 신자들이야. 망하지 않으려고 예수를 믿는 것인데 우리 속에도 각자의 속에서도 은근히 십자가를 기피하는 마음이 있지를 않습니까? 싫어하는 아마 십자가라는 말은 찬송은 쉽게 부를지 몰라요. 또 그런 말쯤은 쉽게 할지 몰라. 그러나 십자가를 짊어지면 그때부터는 반항을 하는 거지요. 또 십자가적인 생활에 딱 몰아넣으면 그때 가서는 발악을 하는 사람도 있고, 그렇게 되요. 그러니까는 우리는 조금 우리 안에서 십자가가 좀 더 이해되고 십자가가 받아들여져야 하지 않겠냐? 그래서 십자가의 뜻을 다시 한 번 생각해 보는 것이지요. 십자가는 우리 생활 가운데 정당히 받아들여져야겠다. 우리 생활 가운데 정당히 받아들여져야겠다. 그 이유는 이렇지요. 그 아래 바로가보면 바울사도는 이렇게 말씀하고 있어요. 그러나 멸망할 사람에게는 십자가의 깊이가 한낮 어리석은 생각에 불과하지만 구원을 받은 우리에게는 그것이 곧 하나님의 힘입니다. 십자가는 구원을 받을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는 능력이 된다는 겁니다. 힘이야. 사람은 힘이 있어야 살지 않습니까? 여기 힘이라는 건 육체의 힘을 가르치는 건 아니지요. 영혼의 힘이지요? 영적 능력을 말하는 것인데 오늘 기독교인이 능력을 상실했다면 김빠진 사이다 같거든요? 아무짝에도 쓸데없어. 그런데 신자, 믿는 사람들이 능력을 얻는 데에는 십자가가 들어가야 된다. 이렇게 되어있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다. 힘이다. 영력이다. 그 구원을 받을 사람은 누구입니까? 믿는 사람들 아닙니까? 예수 믿는 사람들, 또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의 자녀들, 또 택함을 입은 자들, 또 이렇게 말을 하자면 성신 받은 사람들, 그 하나님의 자녀들, 믿는 사람들, 구원받을 사람들, 구원받을 사람들, 또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거듭난 사람들, 거듭난 사람들, 그런 사람들 에게는 이 십자가의 도가 능력이 된다. 거듭난 사람들 에게는 십자가의 도가 능력이 돼. 하나 거듭나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십자가의 도가 이해도 안 되고 싫어. 그렇게 된다. 그러면 조금 우리가 알아듣게 되지요.
또 성신을 받은 사람에게는 십자가의 도가 능력이 되는 거지요. 하나님의 자녀들, 이제 십자가의 도가 그 사람 생활 가운데서 십자가의 정신이나 십자가의 이치가 이해가 되고 그것으로 힘을 얻어가지고 사는 사람들은 그게 구원받을 사람들이다. 그 말이지요? 구원을 받을 사람들에게는 힘이 된다. 그런데 이거는 어째서 그런가? 어째서 그 십자가가 사람 속에 들어가서 힘이 되는가? 능력이 되는가? 십자가에는 우리가 잘 아는바와 같이 속죄 구령의 이치가 있으니까, 첫째 그렇습니다. 우리가 사람들이 힘을 잃어버리는 까닭이, 믿음의 길 영혼의 길을 잃어버리는 까닭이, 죄 때문에 그러는 거 아닙니까? 죄라는 것이 들어와서 우리의 힘을 상실시켜 버렸지요? 모두 그래가지고 사람들이 짐승같이 되고 바보가 되고 참 지질하게 그 다윗 왕이 자기는 벌레라고 그랬고. 그렇게 아브라함이 자기를 티끌 같다 그랬고, 모두 인생을 저주스럽게 말을 하고 그림자라니 아주 모두 그렇게 되서 인생의 가치가 여지없이 몰락되어 버리고, 무가치하게 된 까닭이, 죄 때문에 그렇거든요. 죄 짓기 전에는 어엿하게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어서 하나님하고 대화하면서 살던 사람들이 그렇게 된 거 아닙니까? 그런데 그것을 청산하기 위한 것이 십자가 아닙니까? 우리가 쉬운데서 부터 이야기를 해봅시다. 십자가라는 건 그 근본적으로 인생을 약화시키고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만들어버린 그 원흉, 그 죄라는 거, 그걸 없애는 것이 십자가 아닙니까? 그러니까 십자가로 말미암아서 그 죄가 도말되어 버렸기 때문에 사람들은 다시 생기를 되찾는 거지요 십자가를 통해서 힘을 얻게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 십자가에서는 사람을 약화시키고 미련하게 만드는 그 육을 죽이는 힘이 있거든요. 그 육이 죽는 게 십자가니까, 그 차차 우리가 이야기 합시다.
육이 죽고 또 육체라는 것은 우리의 육이라는 것은 이 세상을 쫒아가는 것이 육이 아닙니까? 그 세상이 죽는다는 그 말인데요. 십자가에서는 세상이 모두 죽어버리는 거거든요. 또 그걸 또 다른 말로 하면 죄가 죽어버리는 거지요. 십자가, 또 다른 말로 한다면 마귀가 죽는 거지요. 죄의 왕 된 마귀가 죽는 거, 그 십자가 안에는 그런 힘이 있거든요. 십자가가 그렇지요? 그건 차차 성경을 찾아보면 거기에 대한 설명이 나오지요? 십자가는 마귀를 이기고 죄를 이기고 세상을 이기고 내 육체를 이기고 그래서 하나님의 자녀들에 잃었던 그 자격을 회복시키는, 회복시키는 그런 작용을 십자가가 하기 때문에 그래서 믿는 사람들 에게는 능력이 된다. 그렇게 말씀을 한 거다. 그 말입니다. 이거 중대한 문제 아닙니까? 예수 믿는다고 하는 사람이 하나님의 자녀들이 하나님처럼 살아야한다. 성경에는 하나님을 닮으라. 그랬고 예수님을 닮으라고 그랬는데 그런 사람들이 능력을 얻지 못한다는 것 같이 비참한건 없거든요. 그렇지 않습니까? 총을 들고 있는 군대가 적군이 오면 도망만 치는 바보 같은 군대들 이라면 그 나라는 망하는 거 아닙니까? 하나님의 군대들이 마귀 그림자만 보면 도망들을 치고 쩔쩔매고 그런다면 그 하나님 나라는 참 허망하게 되지 않소? 하나님의 군대들은 마귀하고 싸움을 해야 할 텐데. 세상을 이겨야 할 텐데. 자기를 이겨야하고 그래야 할 텐데. 능력 없는 하나님의 자녀들같이 사실은 비참한 모습은 없을 겁니다. 이제 여기는 십자가는 믿는 사람들에게 능력이 된다. 이렇게 말하는 거예요. 십자가의 도가 이치가 사실은요. 우리가 직접적으로 일상생활에 경험하지만 우리가 어떤 결단을 할 적에는 이건 아니다. 끊어버리자. 또 이건 옳다. 해야겠다. 그 결단을 내리게 하는 것이 역시 십자가입니다. 이거 십자가의 정신을 가지고 이렇게 사는 사람은 끓기도 잘하고 행할 능력도 생기는 겁니다. 그러면 아까 누가복음을 읽었지요? 마태복음 16장 24절에도 같은 말씀이 있지 않아요? 내 제자가 되려는 사람은 누구든지 자기를 미워하고 버리고 그리고 내 십자가를 날마다 지고 나를 따라야 내 제자가 된다. 내 십자가를 지지 않은 사람은 내 제자가 아니다. 이렇게 말씀하셨는데 예수님의 제자다운 생활을 하려면 아주 십자가는 불가불 이거든요. 그래서 그런 말들을 많이 하지 않아요? 예수를 믿되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를 믿어라. 또 예수를 닮으려고 애들을 쓰는데 예수를 닮되 십자가의 (끊김)
그래서 그렇게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를 생각할 때는 우리가 무엇이든지 행동을 취할 때 결단성 있게, 아닌 것은 안 할 수도 있고 또 긴 거를 할 수도 있고 그런 결단력을 우리가 가질 수 있습니다. 대개 우리가 결단을 못하고 아닌 줄 알면서도 하고, 하고 금지를 알면서도 하지 못하는걸 보면 그거거든요. 저가 아직 죽지 않고 희생적 정신 그 십자가의 정신이 부족할 적에 우리는 항상 그런 걸 우리는 경험으로 많이 압니다. 우리가, 둘째로 생각할 것은 십자가에는 하나님의 지혜가 있다. 그 말을 퍽 강조하고 있는데 아까 읽은 고린도전서에도 이런 말이 있지요? 아주 그 지혜에 대한 말씀은 많이 했는데, 19절 이하를 보면, 성서에도 나는 소위 지혜롭다는 자들의 지혜를 없애버리고 똑똑하다는 자들의 식견을 물리치리라. 하는 말씀이 있지 않습니까? 그러니 이제 지혜로운 자가 어디 있고 식자가 어디 있느냐? 이렇게 말을 해 내려오다가 22절에 가서 유대인들은 기적을 요구하고 그리스인들은 지혜를 찾지만 우리는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찾을 따름입니다. 현대교회 병태를 잘 지적해 주시네요. 유대인들은 이적을 구하고 소위 율법주의자들 이적을 구해요. 현실적인 이익만 도모하고 육체적인 것만 모두 도모한다. 그 말이지요? 이적을 구하고 또 소위 공부께나 했다는 신학자들이니 모든 이런 거 뭐냐 하면 합리주의니 뭐니 이런 걸 주장하는 사람들은 그리스 인들은 지혜를 찾아요. 지혜, 그런 사람들에게는 십자가가 도리어 어리석은 것이지요. 그건 예수님이 사십일 동안 광야에서 시험받으실 때에 이미 다 밝혀주신 것인데 그런데 우리는 진지하게 단순하게 믿는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선포할 따름이다. 우리는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밖에 모른다. 성인 가운데 요한 성인이라고 계시지요? 십자가의 요한, 그는 신학자입니다. 학문적으로도 대단히 깊이가 있는 분인데, 그러나 그 양반은 십자가 밖에 몰랐거든요. 가슴에다가 언제든지 두 팔을 얹고 다녔으니까 십자가를 잊어버리지 않으려고 그저 지혜롭고 유식한 양반이 언제든지 가슴에다 두 팔을 십자가위에다 얹고 그렇게 다녔거든요. 그 양반 별명이 십자가의 요한이지요? 십자가의 요한,
다른 거 다 알아봤자 별거 없고 또 자기 생활을 다 잡는 데는 십자가 밖에 없다. 항상 십자가를 손으로 가슴에다 안고 다녔어요. 우리는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선포할 따름이다. 그게 지혜라는 거예요. 지혜라는 건, 그 아래가 보면 또 이런 말이 나옵니다. 2장으로 가봅시다. 고린도전서 2장, 그러나 2장 6절입니다. 신앙이 성숙한 사람들에게는 우리가 지혜를 말합니다. 신앙이 성숙한 사람이라는 거예요. 우리 쉬운 말로 하면 잘 믿는 사람, 정말 진짜로 믿는 사람 진짜로 믿는 사람, 신앙이 성숙한 사람에게는 우리가 지혜를 말합니다. 그 고린도서에는 여러분도 잘 알다시피 두 가지 지혜를 말했지요? 세상 지혜와 하나님의 지혜, 그 둘을 말했는데 여기서 지금 말하는 건 하나님의 지혜를 말하는 거지요. 우리가 지금 지혜를 말한다. 다만 그 지혜는 이 세상의 지혜나 이 세상에서 곧 멸망해버릴 통치자들의 지혜, 지도자에 있다는 모든 사람들이 혼자서만 잘하는 척 하는 통치자들의 지혜가 아니라 내가 여기서 말하려고 하는 건 세상 사람들이 똑똑한척하는 그런 지혜가 아니다. 여기서 말하는 지혜는 하나님의 심오한 지혜입니다. 그랬어요. 여기 심오한 지혜라는 건, 뭘 말하려고 하는가? 그걸 생각 하는 거예요. 심오한 지혜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영광을 위하여 천지창조 이전부터 마련해 놓으시고 감추어 두셨던 지혜입니다. 자 보시오. 여기 지혜가 뭘 말하려고 이렇게 하시나 아주 옛날부터 감추어 두셨던 하나님의 지혜, 그걸 지금 내가 말 하려고 그럽니다. 이 세상 통치자들은 이 지혜를 아무도 깨닫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이 감추어 두셨던 신비라. 그 말이야. 하나님의 비밀이야. 하나님이 비밀이 감추어 두셨던 게 있어. 만일 이 세상 사람들이 통치자들이 그걸 알았더라면 하나님의 그 비밀, 그 지혜가 무엇인지 알았더라면 영광의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럼 그 십자가가 하나님의 비밀이고 하나님의 지혜야. 십자가, 만일 그때 빌라도라든지 가야바라든지 안나스라든지 그들이 그 십자가 가운데 하나님의 지혜가 있는 줄 알았더라면 하나님의 비밀이 무엇인지 알았더라면 또 그들의 머리빡에 그 지혜가 있었더라면 아예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지 않았을 것이다. 그럼 그 지혜가 없기 때문에 세상 지혜는 발달했을지 몰라. 그 가야바는 당대의 대학자입니다. 제사장으로 신학문을 한 사람이야. 일부러 로마까지 가서 신학문 공부를 많이 한 사람이야. 그런데 예수를 죽여 버렸거든. 그렇게, 산헤드린회원들은 다 유력한 사람들이지만 그들의 머리빡에는 정말 세상지혜는 많았는지 몰라도 천국지혜는 없었어. 하나님의 비밀은 몰랐어. 왜 그러냐? 사실 예수님의 십자가에는 마귀도 속았거든요. 그래서 여러 번 이야기 하는 거 아닙니까? 마귀가 암만 봐도 이 예수라는 걸 없애버려야겠는데 가만히 보니까 하나님이 보내신 하나님의 아들인데 이 예수를 이렇게 살려줬다가는 자기 나라가 망하겠거든. 그래서 곰곰이 생각한 게 예수를 죽여 버리자. 그거거든. 마귀는 그래서 마귀가 전 민중을 동원시키고 정치를 동원 시키고 그래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자. 십자가에 못 박자. 그거 아닙니까? 마귀는 자기 딴에는 큰 꾀를 냈는데 어떻게 됐어요? 결국은 하나님의 뜻을 성취시키고 말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그 가운데서 자기의 큰 뜻을 이룩하셨거든.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기 위해서 세상에 오신 분인데, 또 예수님이 죽어야만 인류는 살게 되는데, 하나님의 큰 역사가 성취되는 것인데, 마귀가 그걸 몰랐거든. 그걸 모르고 예수님 죽여 버리면 되는 줄 아는데 예수님을 죽임으로서 하나님의 뜻을 이룩해 버렸거든. 그 거기 하나님의 지혜가 있다. 그 말이에요. 그 십자가의 지혜가 가르쳐줬다. 이게 무슨 말이에요? 이런 거 찾아보자. 하는 건 무슨 뜻이에요? 우리도 그렇지 않으냐? 그거지요. 그러니까 미련한 사람들이 십자가를 싫다고 그래 죽기를 싫어한다. 그 말이에요. 손해 보는걸 싫어해. 미련한 사람들은 그러나 지혜 있는 사람들이 믿음이 성숙한 사람이라고 그랬는데 믿는 사람들은 그렇지 않다. 그 말이지. 십자가 안에 참 힘이 있고, 뜻이 있고 지혜가 있는걸 알고 십자가를 진다. 그 말이지. 그래서 이 말씀을 한 거 아닙니까? 만일 그들이 그걸 깨달았더라면 영광의 그를 십자가에 못 박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십자가에는 하나님의 지혜가 하나님의 신비가 감추어져있다. 또.
셋째로 우리가 십자가의 참 뜻을 올바르게 찾으려면 십자가의 정신을 전부 찾으려면 십자가는 하나님의 사랑의 결정체 이지요? 십자가는, 우리는 하나님이 사랑이신 걸 다 잘 압니다. 또 예수님도 사랑이신걸 압니다. 기독교에서 사랑 빼어버리면 쭉정이가 됩니다. 그만큼 사랑이 대단히 중요 합니다. 그리고 사랑이라는 말을 많이 하고 이제 사랑이라는 말만 하면 기독교가 다 독점하려고 그러고 또 기독교를 말 하면서 사랑을 말을 하지 않을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십자가와 사랑 이라는 건 하나 라는 걸 지켜야 합니다. 그것이 실제로는 대단히 모순되는 거 같지요? 이 십자가는 너무 비참하고 잔인하고 어떻게 사랑이, 그래서 여기 이 양반도 십자가의 정신에 대해서 설명하면서 이삭의 이야기를 조금 띄웁디다. 어떤 사람은 이삭을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제단 앞에 바친 것이 십자가의 정신이다. 그렇게 말하는데 그것도 근사하다. 또 그런 뜻으로 이야기를 했어요. 그런 거야 비슷한 게 있지 않아요? 그런데 그것을 이야기하려면 옆으로 나갈 염려가 있습니다만 이삭을 아브라함이 하나님 앞에 바친 건 너무나 자연스럽지 않습니까? 그런데 대개들 아브라함의 신앙은 강조하면서 이삭의 신앙은 무시를 합니다. 그러나 조금 생각하는 사람은 이삭이 그때 나이가 열한 두어 살인가? 열 네댓 살 되었다. 여러 가지들로 추측들을 하는데 어떻든지 이제 이삭도 철이 들어서 제 아버지를 인격적으로도 존경하고 신앙적으로도 참 믿어지고 그럴 적인데 그 어느 의미로 피동적인 것도 있지만 능동적인 것도 있지 않으냐? 그렇게 이야기하는 사람들도 있어요. 이삭 자신이 자기 신앙으로 자기 생명을 바친 것으로 이렇게도 의미가 있어요.
그건 어쨌든지 간에 참 잔인하고 보통으로 할 수 없는 일이지요. 자식의 목을 칼로 찔러서 하나님 앞에 제물로 바친다. 그럼 그때는 하나님은 무자비한 하나님이었을까? 만일 그렇게 되었다면 성경적으로 사실인데 무자비한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의 사랑이 엄연하게 이렇게 넉넉하게 흐르고 있을 텐데 어째서 그런 일이 하나님의 사랑은 그런데 있다. 그 말이야. 그것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고난당하심 에서도 보지 않습니까? 겟세마네 동산에서 그렇게 자기 독생자 아들이 몸부림을 치고 아버지여 이 잔을 내게서 떠나게 해 주십시오. 하고 바보 같은 제자들이 졸고 있는데 가서 사정사정하고 안달을 하고 계셨는데 얼마나 그 어려운 시기인데 그렇게까지 하셨는데 그런 것도 내버려두시고 모욕을 당하시고 십자가를 짊어지시고 가시는 꼴이라든지 찢기시며 피를 흘리신 거라든지 또 목이 말라서 내가 목마르다 한건 말씀 적으로도 그렇지만 그 안타까운 경지인데 그걸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이 어째 그 가만히 보고 계셨겠느냐?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십자가에 가서 하나님의 사랑은 절정으로 이루신거야. 하나님의 사랑은 그런 것이다. 우리가 그걸 알고 사랑이야기를 해야 해. 언제든지 기독교에서 사랑 이야기를 너무 남발하지 말고, 하나님의 사랑은 기독교의 사랑은 어떤 것이다. 그런데 그 십자가가 하나님의 사랑의 결정이라는 것은 우리가 설명하지 않아도 알겠지요? 누구 때문에 누구 때문에 예수가 죽으셨는가 하는걸 알면 그 이해가 되는 거예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들을, 전 인류를 여기 앉아있는 우리들을 사랑해주지 않았다면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을 필요가 없지 않아요? 그렇지 않아? 그냥 내버려두지. 지옥가게, 그렇지 않아요? 그러니까 자기 독생자 예수를 그 요한복음 3장 16절이라든지 요한1서 3장에 처음에 보라. 하나님이 어떠한 사랑으로 우리를 사랑하셨는가? 또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셨다는 건 그 뜻이 있어요. 자기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셨다. 그 말이 돼요. 여기 어떤 부모가 있어서 자기 자식이 죽는 걸 볼 수가 없어서 자기 손가락을 잘라서 피를 본다든지 물속에 빠진다든지 살리기 위해서 그 어머니가 자식 살리려고 물속에 들어갔다가 같이 죽었다는 어머니들 가끔 나오지 않습디까? 그런다면 전부 사랑 때문에 자기 생명 같은 건 생각하지 않은 맹목으로 덤벼든 사랑입니다. 어떻게 보면 그런 대목이 있어요. 예수님이 그 그러기 때문에 그걸 마귀에게서 우리를 건지기 위해서 하나님의 아들이 돌입을 했다. 그런 말들도 하거든요. 어떤 이들은 막 물에 빠진 이것들을 건져야겠다. 하고는 뛰어 들어왔다는 거예요. 세상으로 그것도 아마 여러 가지로 말할 수 있겠지요? 뛰어 들어가서 이것들 좀 살려야겠다. 그래가지고 뛰어 들어왔다. 그렇게 그래서 십자가상에서 그냥 죽었다. 그리고 그것을 이렇게 말씀한 대목들이 있지요? 골로새서 2장에 가보면 이런 말씀이 있지요? 14절입니다. 또 하나님께서는 채무이행에 대한 여러 가지 달갑지 않은 조항들이 들어있는 우리의 빚 문서를 무효화 하시고 그것을 십자가에 못 박아 버려 없애버리시고 말았습니다. 무엇을, 무엇을 십자가에 못 박아 없애버리셨다고 그랬어요?
빚 문서를. 빚 문서,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 빚을 몽땅 졌는데 죄의 빚을 이건 마귀에게 졌다고 그러지만 어떻든지 우리들이 누구에게 빚을 졌든지 빚을 몽땅 졌어. 그냥 조상 때로부터 자자손손이 내려 정욕과 탐욕으로 절어버리듯이 빚을 몽땅 졌어. 그래 빚 문서가 있어요. 우리가 있는데 그걸 십자가에 못 박아버렸다고 그랬어. 골로새서에 보면 그것참 창피한 일이에요. 그리고 그 빚 문서를 다 찢어버렸어. 자 너희들 빚 내가 다 갚아준다. 그걸 예수님이 죽으신 것이라. 이렇게 말하는데 예수님이 죽으신 것은 우리의 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실 적에 그 큰 고통이 무엇 때문에 나와 대개 우리가 심지어 어폐 있는 말인지 몰라도, 이빨하나 아픈 것도 죄 값입니다. 그렇지요? 죄가 이 세상에 들어오지 않았더라면 병이 생겼을 리가 없고 죽음이 있을 리가 없지 않아? 병도 죄 때문에 생긴 것이고 또 죽음도 이거 말 잘못하면 죄 없는 사람 예수 믿는 사람은 병을 안 앓는다는 이런 바보 같은 소리들 하는데 그건 잘못된 생각이구요. 이성인들도 병을 앓아요. 그건 잘못된 소리고, 어찌되었든지 모두 이 죄인 이라든지 죽음 이라는 건 죄 때문에 이 세상에 들어온 거예요. 사실이에요.
그래서 이 세상에 참 이런 고통들이 눈물과 한숨과 근심 걱정 고통들이 모두 이런 참 흉악한 일들이 많이 이렇게 참 생겼는데, 우리가 도저히 사람 머리빡으로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세상에도 죄가 하늘에서 땅까지 꽉 차있고, 구석구석 오늘 이 땅위에 인류사회에는 죄가 들어가 박히지 않은 곳이 없을 겁니다. 심지어 먼지 속에도 죄가 있고 공기 속에도 죄가 있고 꽉차있어. 그럼 현재만 그러냐? 인류 역사 이래로 과거도 그렇고 앞으로 세상 끝날 때까지도 그럴 거야. 그렇게 이 죄악이라는 건 참 관영을 했어. 그런데 그 모든 죄를 어떻게 해결을 하느냐? 해결할 길이 없거든요. 조금 그 선지자 성인들이 나타나서 질금질금 해봤지만 그렇다고 죄가 없어지는 거 아니고 뭐 교육이니 뭐 도덕 이니 뭐니 하고 수없이 떠들어 봤지만 죄는 누룩 불어나듯이 일으키기 만한 오늘이나 옛날 세상 아닙니까? 그런데 성경대로 보면 그걸 근본적으로 아주 옛날 죄부터 오늘까지 미래까지 죄를 다 없애버리시기 위해서 오신분이 예수님이다. 이렇게 되어 있어. 예수님이 그래서 모든 죄를 현재나 과거에 있는 모든 죄를 예수님이 전부 책임지신 걸로 되어있거든요. 빚 문서를 청산했다고 그랬는데 그거 당연한 거 아니요? 빚 문서, 빚 문서를 찢어버렸다. 그랬는데 모든 죄를 전부 하나님 편으로 봐서는 맨 이 가득한 죄를 예수님 등허리에다가 전부 짊어지워 버렸어. 네가 책임져라. 그렇게 예수님으로서는 자진해서 그랬다. 그러셨지요. 사실은 내가 책임지겠습니다. 어떻게 되었든 그렇게 되었어.
하나님도 허락하셨으니까 그렇게 되었지. 그래서 그걸 전부 짊어지고 자 이제는 어떤 사람의 죄던지 과거나 미래의 어떤 죄든지 이제는 내가 전부 책임집니다. 그러니 아버지는 이제 상관 마시오. 그러지 않았어요? 그래서 무시하고 모른척하시고 못 본 척 하시고 그렇게 모두 표현을 했어. 성경에도, 그 뒤를 예수님이 그렇게 책임을 다 져버렸으니, 그러니까 그게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거예요. 그게 이제 거기에 대해서 문제가 있겠어요? 하나님이 이처럼 사랑하셨다. 그 말이지요. 또 이처럼 사랑하셨다. 또 예수님도 그래 그럴 수가 있는가? 그렇게 그래서 예수님 비유 가운데 보면 그걸 뜻으로 나타난 대목이 많지요. 빚을 많이 탕감 받은 사람이 더 사랑을 받은 자냐? 쪼금 받은 탕감 받은 사람이 사랑을 받은 자냐? 그렇게 자꾸 질문을 하시지 않았어요? 그 여인이 와서 눈물을 흘리면서 참 예수님이 내가 네 죄를 사했다. 그런 말 한마디 때문에 그런 말이 나왔는데 그래서 예수님이 하시지 않았어? 그러니까 사랑이 크면 클수록 많이 빚을 탕감해 준다. 많은 죄가 탕감을 받는다. 그렇게 되요. 그럼 생각해 봅시다. 전 인류의 과거나 현재의 죄를 싹 도말해 버리신 사랑이라면 그걸 다 탕감해주는 사랑이 얼마나 풍성한 사랑이냐? 사랑해 보셨어요? 우리 저 이 송사리 같은 머리빡으로는 도저히 헤아리지 못해. 그러니까 그래서 저는 가끔 그런 말씀을 들을 때 참 깊은 무엇에 빠져요. 보라. 하나님께서 어떠한 사랑으로 우리에게 나타났느냐? 사도요한은 그걸 느꼈거든요. 체험을 했거든요.
아마 이 세상에서 지금 제일 많이 읽는 게 요한복음 3장 16절 일거에요. 하나님이 이 세상을 이 처럼 사랑하사 그랬는데, 그 이처럼 이라는 것이 무엇을 표현하는 것이냐? 아무 무한대의 바다에 빠지는 거 같거든요. 이처럼 사랑하사 하나님의 사랑이 그렇게 굉장하시다는 말이야. 뭐 이 죄라는 엄청난 많은 죄를 다 책임지고 자기가 나타날 정도로 그리고 용서해 줄 정도로 다 용서했다. 너희들 걱정 말아라. 고민하지 마라라. 괜찮다. 너희들 생각 속에 있는 죄까지 뼈다귀 속에 있는 죄 까지 내가 다 안다. 다 알아. 다 아는데 다 용서해줬다. 그래서 내가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은 거 아니냐? 예수님의 피는 너희들의 죄를 말끔히 씻어버릴 수 있다. 다 씻어버릴 수 있다. 넉넉히 씻어버릴 수 있다. 그게 기독교의 원 사랑의 정신이에요. 그게 십자가에 나타났다. 그 말이지요. 십자가에 나타났다. 생각을 해 보시오. 예수님이 아무리 깨끗하게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탄생했다고 합시다. 또 예수님이 하신 말씀은 동서고금을 찾아봐도 참 불교 서적을 많이 못 읽어봤어요. 그러나 불교 이야기들을 자주 꺼내지만 나는 암만 봐도 예수님 말씀같이 맛이 없어. 그래서 불교서적은 나는 안 봐요. 어찌되었던지 예수님의 말씀은 그렇게 값이 있고 무게가 있다고 합시다. 예수님이 33년 동안을 완전무결하게 사람으로서는 가장 완전하게 살았다고 합시다. 그래도 예수님이 십자가의 죽음이 없었더라면 어떻게 되었겠소? 생각해 보시오. 어떻게 되었겠소? 우리의 죄가 어떻게 되었겠느냐? 그 말이지요. 예수님의 교훈만 가지고 우리의 죄가 없어진다는 말이 없거든요. 그렇지 않아요?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는다는 사실이 그게 특이한 거야. 석가도 못 하는 거고 공자도 못하는 거야. 그래서 저는 불교 책을 안 봐요. 석가가 우리를 위해서 죽었다는 말이 없기 때문에 어떻든지 예수님의 죽음이라는 것은 예수님의 모든 교훈, 예수님의 33년이라는 공생활을 아주 가장 값있게 지은거야. 그 참인거야. 어떤 의미로는 그 증거 한 거야. 증거 한 거야. 이렇다. 그래서 그걸 사도바울은 아주 감격적으로 썼거든요. 죽기까지 하셨다. 죽기까지 하셨다. 죽음으로서 하셨다. 이런 말씀 한 거지요. 하여간 저는 여기서 셋째 번으로 그걸 이야기 하는 겁니다. 십자가에는 하나님의 사랑이 또 그리스도의 사랑이 절정으로 나타났다. 그 사랑의 결정체다. 참 그 다음으로 나가봅시다.
넷째 번으로 우리가 생각할 문제는 십자가에는 에베소서에서 하나 보지요. 에베소서 2장 16절.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에 죽으심으로서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에 죽으심으로서 둘을 한 몸으로 만드셔서 하나님과 화해시키시고 원수 되었던 모든 요소를 제거 하셨습니다. 여기 분명히 한 가지 뜻이 나타나있지요.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심으로서 여기 둘이라는 건 직접적으로 이방인과 유대인을 가리킨 거고, 또 이방인이라는 건 믿지 않는 마음이고 또 유대인이라는 건 믿는 이스라엘적인 신앙을 가르친 것이고 그러니까 신 불신을 하나로 만들었다 그것도 되고 또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과 우리들 그 말도 되요. 우리가 다 이방인들과 같이 하나님을 배반하고 반역을 하던 인간들 아닙니까? 하나님을 등지고 살던 인간들 아니에요? 그러니까 도저히 하나님과 화목할 길이 없었거든요. 막혀 버렸었어. 그런데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실 적에 그 십자가상에서 예수님의 살이 찢어질 적에 하나님의 지성소의 법궤를 가렸던 성전 휘장이 위에서부터 아래로 찢어지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그때 하나님의 법궤를 사람들이 제사장을 빌리지 않고 직접 바라볼 수 있게 됐어. 그게 무엇을 의미합니까? 지금까지 모든 율법과 형식 의식 제사장 그들을 통해서만 하나님과 만나던 사람들이 이제 예수님을 통해서 직접 만날 수 있는걸 가르친 거지요.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게 된 것 아닙니까? 언제든지 아무데서나 우리는 하나님을 부를 수 있고 생각할 수 있지 않습니까? 그게 예수님이 살이 찢기심으로 그렇게 된 거거든. 그건 왜? 꼭 그 살이 찢겨야만 되겠거든.
요놈의 살덩어리가 하나님과 우리를 원수로 만들었거든 우리들의 이것, 그래서 이것을 찢어버려야 하겠거든. 그래서 자기가 찢기신 거 아닙니까? 예수님이 우리들의 살을 빌려서 예수님이 자기를 십자가에 못 박고 십자가를 짊어지고 그 뜻이 있지 않아요? 너희들이 너희 자신을 이기고 이긴다는 건 십자가에 못 박는 한 과정이지 나를 극진히 사랑하고 마지막에 가서는 나를 십자가에 못 박아라. 그래서 그 참 말씀이 순서적이 되었어요. 자기를 부인하고 그 다음에는 십자가를 지고 그리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않다. 내 제자가 되지 못 한다. 그래서 우리를 결국에는 십자가에 못 박게 하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그 길을 열어놓으신 거야. 자기가 살을 찢음으로서 우리들도 똑같은 과정을 밟아서 우리들을 알뜰하게 십자가에 못 박아 버리고 그리고 하나님과 대면할 수 있도록 그걸 말 한 거야. 화해시키셨다. 이제 화목이 됐어. 이제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심으로서 죄 때문에 막혔던 담은 무너져버리고 자기 육체를 십자가에 못 박음으로서 우리 육체도 십자가에 못박아버리고 그리고 이제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막힌 조건이 없어져버렸어.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가로막을 조건이 없어져버렸어. 그게 그 말 아니에요. 무엇에 대해서든 모든 요소를 제거했다. 그랬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