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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모데전서 4장
1. 거짓말 하는 자들(1-5)
성도는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람으로 고침 받고, 달라지기를 원하는 마음으로 말씀 앞에 나와야 합니다. 물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람이라는 것은, 대개의 사람이 생각하는 것처럼, 교회를 부흥시키고, 많은 일을 하며, 능력을 가진 것을 뜻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람은, 하나님이 사랑하셨던 그리스도께서 가신 길을 가는 자를 뜻합니다. 이것이 주님이 원하시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성도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마음이 있다면, 분명 주님이 가신 십자가의 길도, 외면하지 않고 가게 되는 사람으로 고쳐달라는 심정으로, 하나님께 나오게 될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만약 하나님의 말씀이, 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해서, 외면해 버리고 불만을 가진다면, 그것은 이미 그 마음에 말씀에 대한 순종이나,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람으로, 고침 받을 마음이 전혀 없다는 것을 뜻할 뿐입니다.
이러한 마음으로 말씀을 대한다면, 진리가 아닌 거짓말도 진리로 여길 수밖에 없습니다. 곧 진리와 진리를 모방한 거짓말을, 분별할 수 없게 된다는 것입니다. 진리는 인간을 자신으로부터 분리하여, 예수 그리스도께로 인도합니다. 그래서 인간이 자신에게 머물면서, 그리스도를 사랑한다거나, 그리스도를 신앙한다는 것은 모두 거짓말입니다.
그런데 인간이 어떻게 자신으로부터 분리될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성도는 스스로의 힘으로 자신을 고쳐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고칠 수 있고 새롭게 하실 수 있는,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소원을 가지고 하나님을 찾는 성도에게, 인간의 잘됨을 위한 모든 것은, 진리가 아닌 것으로 여겨집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인간의 잘됨을 위해 오신 분이 아님을 알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잘됨은 물론 육신의 잘됨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진리를 아는 성도에게는, 그리스도를 빙자하여 인간의 잘됨이나 교회의 잘됨, 곧 세상적인 시각에서 말하는 소위 성공이라는 것을 연결하여 말하는 것은, 거짓말하는 것으로 들려지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의 심각성은 바로 이러한 거짓말에 있습니다.
1-2절 “그러나 성령이 밝히 말씀하시기를, 후일에 어떤 사람들이 믿음에서 떠나, 미혹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을 따르리라 하셨으니, 자기 양심이 화인을 맞아서, 외식함으로 거짓말하는 자들이라.”
에베소교회에 발생한 심각한 문제는, 거짓말 하는 자들이 발생했다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 믿음에서 떠나, 미혹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을 따르는 어떤 사람들이 일어난 것입니다.
만약 갈보리교회에 이런 문제가 있다면, 그것은 심각한 것입니까, 가벼운 것입니까? 문구상으로 보면 매우 심각한 문제로 여겨질 것입니다. 귀신의 가르침, 거짓말하는 자라는 문구들이, 마치 교회에 무당 같은 사람이 들어오고, 사이비 종교를 전파하는 자가 들어온 것 같은 느낌이 들 것입니다.
그런데 거짓말하는 자들이 전한 귀신의 가르침은, 3절을 보면 혼인을 금하고, 어떤 음식물은 먹지 말라는 것입니다. 곧 평생 혼인을 하지 말고 살 것을 가르치고, 구약처럼 더럽고 부정한 음식을 규정하여, 그러한 것들을 먹지 말도록 가르친 것입니다.
과연 이러한 가르침이 교회에 있다는 것이, 심각한 문제로 여겨집니까? 어쩌면 그러한 가르침들에 대해서는, 가볍게 여기고 넘어갈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무엇 때문에 혼인을 금하고 음식물을 먹지 말라는 것을 귀신의 가르침으로, 그리고 거짓말하는 자들의 거짓말로 규정하는 것입니까? 문제는 단순히 혼인을 하지 않는 것, 음식물을 먹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혼인을 금하고 음식물을 먹지 말라하는 행동에, 의와 거룩의 의미를 담는 것입니다.
혼인을 하지 않거나 음식물을 금하는 것은 금욕주의를 말합니다. 곧 인간 편에서 뭔가 금지함으로써, 의를 이루고자 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경건으로 의를 이루고자 하는 것이고, 다른 사람과 구별된 신앙으로 자신을 높이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타인과 차별된 신앙이 있을 때, 타인이 받지 못하는 축복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의 당위성으로 삼는 것입니다. 신앙이 다른데 축복을 똑같이 받을 수 없다는, 세상적 사고방식으로 하늘의 복을 계산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교회에 심각한 귀신의 가르침이며, 거짓말하는 자들의 말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의를 무시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양심에 화인 맞은 것입니다.
이처럼 사도 바울은 예수님의 의가 아니라, 인간의 의를 바라보게 하는 가르침을, 귀신의 가르침으로, 미혹하는 영으로, 거짓말하는 것으로 말하면서, 아주 심각하게 대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에게는 어떻습니까? 인간의 금욕과 노력으로 의를 얻고, 그 의를 바탕으로 타인과 차별된 복을 받을 수 있다는 가르침에 대해, 어떤 생각이 듭니까? 교회를 허물어뜨리는 귀신의 가르침으로, 진리를 가리고 미혹하는 거짓말로 여겨집니까? 아니면 그러한 말들이 왜 잘못된 말들인지, 이해할 수 없습니까? 그렇다면 그것은 내가 주님을 바라보지 않고 있는 결과입니다.
내 속에 주님이 계시다면, 그 사람은 주님이 계시는 것으로, 모든 것이 충족됨을 알아야 합니다. 주님이 계시기에, 모든 영광은 내가 아니라 주님이 받으시면 되는 것이고, 높임도 내가 아니라 예수님께 돌아가면 되는 것이고, 내게 능력이 없어도 예수님께 능력이 있으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일의 자랑도 내가 아니라, 주님께 돌아감이 마땅함을 알게 됩니다.
그런데 주님이 안계시기에 내가 있게 되고, 결국 주님께 돌아가야 할 모든 것을, 자신에게 돌리고자 하게 되고, 자신이 높임 받고 영광 받으며, 능력 있음을 드러내기 위해, 다른 사람과 다른 신앙을 보여야 할 필요성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귀신의 가르침이라는 것, 거짓말하는 자들의 거짓말이라는 것은, 내 속에 살아계시는 주님을 보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 대신 나를 보게 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과는 다른 신앙을 가져보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5절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짐이라.”
거룩은 인간의 노력과 금욕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이루어짐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이루어진다는 것은, 말씀을 읽고 기도함으로써, 거룩이 이루어진다는 뜻이 아닙니다.
5절을 그처럼 이해한다면, 그것은 여전히 그 속에 주님이 계시지 않고, 자신이 살아있는 결과일 뿐입니다. 자신이 살아있기에 자신의 종교적 행동으로, 거룩해질 수 있다는 생각을 버리지 못한 것입니다.
말씀과 기도는 모두 하나님께로부터 나오는 것입니다. 기도를 내가 하는 것으로 생각하기 쉽지만, 내가 하는 기도가 힘이 되어서, 나를 거룩하게 하지를 못합니다.
기도는 자신을 부인하고 포기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의로우심만이 나를 살린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이처럼 자신에게는 의가 없음을 고백하고, 그리스도의 의로우심만을 바라보고 의지하는 성도가,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거룩하신 피의 은혜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성도는 이 믿음 안에만 있으면 아무런 부족이 없습니다. 이것이 진리입니다.
그런데 거짓말하는 자는 이 진리만으로는 부족하다고 말합니다. 그리스도를 믿는다면 믿음에 합당한 행함이 있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그리고 행함으로 믿음을 차별해 버립니다. 바울에게는 이러한 가르침이야 말로,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훼방하는 귀신의 가르침에 불과했습니다. 거짓말이라고 말합니다.
여러분이 그리스도의 공로가 무엇인가를 알고, 그리스도만을 바라보고 의지한다면, 무엇이 거짓말인지, 무엇이 여러분을 미혹하는 사탄의 말인지 분별하게 될 것입니다.
2. 예수의 좋은 일꾼(6-8)
6절을 보면 ‘예수의 좋은 일꾼’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으로부터 지시를 받고 일하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일꾼에 대해 오해를 합니다. 일꾼을 교회를 위해 일하는 존재로 인식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마다 일꾼을 달라고 기도하기도 하는데, 그 의도는 교회의 발전에 도움이 되는 그런 인물이, 교회에 많이 들어오기를 원한다는 것입니다.
결국 일꾼과 교회의 발전을 연결 짓는 것입니다. 물론 교회가 발전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몸을 돌보지 않고, 자신의 재물도 아끼지 않고, 교회를 위해 수고할 수 있는 사람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다만 교회의 발전을 위한 일꾼일 뿐이지, ‘예수의 좋은 일꾼’이라고는 말할 수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교회에는 목사를 위한 일꾼도, 교회를 위한 일꾼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존재한다면 예수님을 위한, 예수의 좋은 일꾼만 있을 뿐입니다. ‘교회를 위한 것이 예수님을 위한 것이 아니냐?’라는 생각을 한다면, 그것은 예수님을 교회, 곧 기독교라는 종교 단체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신 분으로 여기는 것에 불과할 뿐입니다.
참된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의 관계를 말하는 것인데, 그리스도의 몸이 세상적 사고방식으로 생각하는 발전을 하는 것이 아니기에, 교회의 발전을 꾀하는 것 자체가 이미 교회됨으로부터 멀어져 있음을, 스스로 보여주는 것에 불과할 뿐임을 알아야 합니다. 따라서 오늘 여러분은 ‘좋은 일꾼’이라는 말을 대하면서, 우리가 무엇을 생각하고 무엇을 바라며, 살아가고 있는가를 확인해 봐야 할 것입니다.
좋은 일꾼은 그리스도의 지시대로 움직이는 사람이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런데 이런 말을 하면, 꼭 우리의 뇌리를 스치는 것 중에 하나는, ‘그러면 그리스도의 지시대로 움직이면서, 좋은 일꾼으로 살아가면, 하나님이 뭔가 갚아주시는 것이 있는가?’라는 것입니다. 곧 말씀대로 살았으니까, 그에 대한 보답이 있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어떻습니까? 흠없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셨던 예수님이, 세상으로부터 대우를 받고, 하나님으로부터 우리가 생각하는 좋은 것을 받아 누리셨습니까? 말씀대로 움직이고 행했던, 말 그대로 예수의 좋은 일꾼으로 살았던 사도들은 어떻습니까? 그들 중에 말씀으로 산 것으로 인해서, 세상에서 혜택을 받고 잘 산 사람이 있습니까? 전혀 아니라는 것을 잘 알 것입니다.
좋은 일꾼이란 단지 말씀이 지시한 대로, 움직이고 전하라고 한 것을 전할 뿐이지, 그에 대한 다른 결과와 자기에게 돌아올 혜택에 대해서는, 기대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 성도에게 믿음을 주시고, 믿음으로 살아가는 좋은 일꾼으로 세우신 것은, 그리스도의 은혜와 온유와 고난과 죽으심과 부활을 증거하라는 것일 뿐이지, 믿음을 앞세워서 자신을 위한 뭔가를 받아 챙기라는 것은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성도가 ‘믿음으로 살았는데도, 주님을 위해 일했는데도, 왜 이런가?’라는 생각을 하는 것은, 그리스도만을 보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행하는 자신을 바라본 결과일 뿐입니다.
6절 “네가 이것으로 형제를 깨우치면,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일꾼이 되어, 믿음의 말씀과 네가 따르는 좋은 교훈으로 양육을 받으리라.”
형제를 깨우치는 이것이란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울이 앞에서 말한 내용, 곧 바른 믿음과 진리를 증거 하는 것입니다. 곧 깨우침이란 바른 믿음과 진리에 의해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좋은 일꾼으로서 할 일은, 사람을 설득하여 교회로 데려오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른 믿음과 진리로 살아가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좋은 일꾼으로써 바른 믿음과 진리로 살아갈 때, 그것으로 인해 형제들이 양육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에서 우리가 주의할 것은, 양육하는 사람과 양육 받는 사람을 구별하는 것입니다. 대개 목사를 양육하는 사람이라고 하면서, 성도는 목사에 의해 양육 받는다는 생각을 합니다. 하지만 목사가 성도를 어떻게 양육할 수 있습니까? 자기 자신의 욕망도 어떻게 할 수 없는 목사가, 어떻게 누구를 양육한다는 것입니까?
양육하는 분은 그리스도이십니다. 바른 교훈과 진리를 전하는 좋은 일꾼을 세우셔서, 바른 교훈과 진리로 자기 백성을 부지런히 양육하시는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목사는 양육하는 사람이 아니라, 바른 교훈과 진리를 전하면서, 그 말씀에 의해 자기 자신도 양육을 받으며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리를 전하는 자에게 돌아오는 유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없이 진리를 전한다고 한다면, 그는 자신은 보지 않고, 가르치기만 하는 선생일 수밖에 없습니다. 결국 교회의 분쟁은 모두가 자신을 바라보지 않고, 가르치려고만 하는 선생의 자리에 있음으로써 발생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목사가 설교할 때, ‘너는 잘하냐?’라는 생각을 가질 필요가 없습니다. 바른 교훈을 전하는 목사는, 자신이 잘하는 것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참된 예수님의 진리만을 전하고자 힘씁니다. 따라서 바른 교훈을 전하는 목사는, 자신이 전하는 교훈으로 자신을 살피게 됩니다. 곧 자신도 말씀에 의해 책망을 받을 수밖에 없는 존재임을 아는 자로 전하기에, 자연히 성도와 같은 위치에 있게 되는 것입니다.
만약 목사가 자신이 잘 지키고 행하는 것을 내세워 설교한다면, ‘나는 이렇게 잘하는데, 당신들은 왜 못하는가?’라는 식으로, 당당함을 가지고 나무라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교인들은 목사 앞에서 주눅이 들 것입니다. 이러한 것에는 말씀으로 인한 양육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예수의 좋은 일꾼이란, 그리스도의 교훈을 그리스도의 지시대로 전하면서, 자신 역시 그리스도의 교훈으로 인해, 양육을 받으며 살아가는 사람을 뜻하는 것입니다. 다함께 그리스도의 말씀에 의해 교훈을 받고, 다스림을 받으며, 양육을 받는 관계에 있는, 이것이 그리스도의 몸이고 교회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에는 잘난 사람은 있을 수 없습니다. 내가 나를 볼 때는 잘한다고 생각했다 할지라도, 말씀 앞에 서게 되면, 나 또한 멸망의 자식에 불과한 존재였음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목사든 성도든, 우리 모두는 동일한 말씀에 의해 가르침 받으며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7절 “망령되고 허탄한 신화를 버리고, 경건에 이르도록 네 자신을 연단하라.”
3:16절에서 경건의 비밀을 그리스도로 말하는 것을 보면, 경건이란 외형적인 모습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사는 것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그런데 경건에 이르도록 네 자신을 연단하라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연단은 어떤 일을 숙달하고 잘하기 위해, 계속 반복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렇다면 경건에 이르도록 연단하라는 것은, 항상 자신이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살아가는지 살피고, 자신을 돌아보며, 믿음에 거하기를 힘쓰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연단이 없다면 내 생각에는 잘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막상 어떤 일에 부딪히면, 믿음에 아주 서툰 모습만 보이게 되는 것입니다.
믿음은 생각이 아니고, 실제 살아가는 삶이라는 것을 생각한다면, 생각만 가지고 ‘나는 잘할 수 있다’고 여기는 것은, 크나큰 착각임을 알아야 합니다. 부지런히 자신을 돌아보고 살피면서, 주어지는 모든 삶에서 말씀에 의해 다스림 받고, 양육 받고 있음을 나타내기를 힘써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의 좋은 일꾼입니다.
8절 “육체의 연단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느니라.”
육체의 연단에 약간의 유익은 있을 것입니다. 약간의 유익이란 금생에서 주어지는 유익을 뜻합니다. 육체의 연단이 건강을 위한 것이든, 아니면 인간의 행함이든, 그 모든 것은 금생에서 약간 유익을 얻는 것으로 그칠 뿐, 내생의 약속은 되지를 못합니다.
하지만 경건은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습니다. 금생에서부터 내생까지 약속에 거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곧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는 믿음으로 사는 일에, 모든 힘을 쏟고 관심을 기울여야 합니다. 모든 일에서 무엇이 믿음으로 사는 것인가 고민하면서, 믿음이 이끄는 길에 순종하기를 소원해야 합니다.
좋은 일꾼은 오직 예수님 편에 서서, 예수님이 지시하신 대로 진리를 전하면서, 듣는 자와 전하는 자 모두가 함께, 영원한 그리스도의 세계에 소속되어 있음을, 날마다 확인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경건의 연단을 부지런히 하면서, 자신이 속한 곳이 어디인가를 확인하면서, 그리스도 편에만 서서 살아가기를 소원하기 바랍니다.
3. 믿는 자에게 본이 되어(9-16)
성도에게는 하나님이 정해 놓으신 길이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신이 자신의 길을 정하고, 그 길을 가기를 힘씁니다. 하나님께도 자신이 정한 길을, 잘 갈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애원합니다. 결국 이들에게는 하나님이 정해 놓으신 길이란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아무리 하나님이란 이름을 부르고 외친다고 해도, 그것을 신앙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신앙은 자신이 가고자 하는 길이 아닌, 하나님이 정해 놓으신 길을, 내가 가야 할 길로 믿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성도의 기도는 하나님이 정하신 길에 순종할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소원하는 것으로 드러날 뿐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 관심이 있는 것과 없는 것은, 자신을 중심으로 전혀 다른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하나님이 정해 놓으신 길에, 순종하는 자로 만들어 가신다는 것입니다. 디모데도 자신이 정한 자신의 길을 가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정하신 길을 가고 있습니다.
11절 “너는 이것들을 명하고 가르치라.”
이 말씀을 하는 것은 디모데로 하여금 다른 길을 가는 자들에게, 무엇이 바른 길인가를 가르치라는 말씀입니다. 곧 디모데는 지금 자신을 위해 살고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길을 가는 자들 때문에, 하나님께 불려 나와서 이런 말을 듣고 있는 것입니다. 생각하면 이것은 참 귀찮은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디모데는 지금 자신에게 득이 되는 일을 하는 자로 세움 받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타인의 득을 위해서, 디모데가 존재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도인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을 믿음으로써, 자신이 득을 얻기를 갈망합니다. 곧 자신을 위한 믿음으로만 생각할 뿐, 타인을 위한 믿음에 대해서는 전혀 도외시 해버립니다. 하지만 우리가 하나님께 부름을 받았고,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로 세상에 존재하고 있다면, 그것은 나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작정하신 누군가를 위해서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12절 “누구든지 네 연소함을 업신여기지 못하게 하고, 오직 말과 행실과 사랑과 믿음과 정절에 있어서 믿는 자에게 본이 되어”
말과 행실과 사랑과 믿음과 정절에 있어서, 믿는 자에게 본이 되라는 것은, 성도의 모든 것은 믿음에서 나오는 것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말도 행실도 사랑도 믿음도 정절도, 믿음에서 나온 것이 됨으로써, 믿음이 무엇인가를 드러내는 것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디모데의 말을 들으면서, 디모데의 행실과 사랑과 믿음과 정절을 보면서, 바른 믿음이 무엇인가를 배울 수 있게 하라는 것입니다. ‘열심히 믿었더니 복 받았다’는 보이는 것을, 본을 보이는 것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바른 믿음, 진리의 길이 무엇인가를 드러내는 것을, 본을 보이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결국 성도가 예수님을 알게 되고, 믿음을 선물로 받고, 진리의 길을 가게 되었다면, 그것은 믿는 자로 하여금 믿음의 본을 보이게 함으로써, 곧 믿음을 드러내게 함으로써, 다른 자에게 믿음을 증거하고 가르치시겠다는, 하나님의 뜻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은 날 위해 주어진 것이 아닌 것입니다. 믿음으로 사는 삶 역시 날 위한 것이 아닌 것입니다. 결국 성도의 사명은 믿음의 본을 보이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이다’는 것을 증거 하는 자로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믿음의 본을 보인다는 것을, 착한 행동을 요구하는 것으로 오해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믿음으로 사는 것을 착한 행동을 하는 것으로 이해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믿음이 있는 자가, 도덕적으로 악한 길을 갈 수 없음은 분명합니다. 믿음은 성도를 악한 길로 가게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도는 도덕에 의해서, 도덕적 행동을 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에 의해서 믿음의 열매가 맺어지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본을 보이라는 것은, 착한 행동을 하면서 살아라는 의미가 아니라, 오직 믿음의 정신으로 살아갈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믿음의 정신으로 살아간다면, 그가 행하는 것, 말하는 것 모두가, 믿음을 드러내는 것이 되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처지와 환경에서도, 믿음에서 벗어나지 않고, 예수님의 십자가로 감사하며 살아가는 것이야 말로, 최고의 믿음의 행실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마 18:15절을 보면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가서 너와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 권고하라. 만일 들으면 네가 네 형제를 얻은 것이요”라는 말씀을 합니다. 형제를 얻었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몸된 관계에서 지체를 얻었다는 뜻입니다.
하지만 내가 형제를 얻었다는 것은, 결국 하나님의 백성을 찾으심을 뜻하는 것이기 때문에, 우린 예수님의 말씀에서, 하나님의 마음은 잃어버린 자를 찾는 것에 있음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잃어버린 자를 찾는 일에, 우리를 부르신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마음으로 형제를 대한다면, 모든 관심은 하나님이 선물로 주신, 믿음을 드러내는 것에 집중되기 마련입니다. 말하는 것도 행실도 모든 것이, 믿음을 보여주는 방향으로 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사랑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성도는 서로 믿음의 본을 보이는 관계로 모입니다. 믿음의 본을 보임으로써, 서로 그리스도의 말씀에 굳게 서는 관계로 존재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위해서 성도는 날마다 무엇이 믿음인가를 살피면서, 바른 진리의 길을 가기를 힘써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부르시고자 한 자를 위해서 그렇게 해야 하는 것입니다.
당시 디모데는 젊은 사람이었습니다. 젊기 때문에 나이든 사람들에게 업신여김을 받기 쉽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누구든지 네 연소함을 업신여기지 못하게 하고”라는 말을 합니다. 무엇으로 업신여기지 못하게 하라는 것입니까? 외적인 모습이 아니라, 믿음의 본을 보임으로 그렇게 하라는 것입니다.
성도의 권위는 나이에 있지 않습니다. 성도의 권위는 믿음의 본을 보이는 자로 살아가는 것에 있습니다. 믿음으로 살고자 하는 사람들에게는, 믿음의 본을 보이는 그가 진심으로 귀하게 여겨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믿음의 본을 보이는 자로만 살아가면 되는 것입니다.
사람에게 있어서 큰 유혹은, 자신을 보이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세상은 믿음만으로는 자신을 인정해주지 않습니다. 그래서 세상에 보여줄 수 있는 것에 관심을 두는 것입니다.
교회를 크게 만들고 싶어 하는 것도, 교회가 커야 세상이 자신을 인정한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예수님만 바라보는 믿음으로 산다고 해도, 교회가 작으면 무시를 받는다는 잘 알기 때문에, 교회를 키워서 자신을 높이고, 자랑스럽게 드러내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결국 이런 사람들이 하는 말은, ‘믿음만으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믿음에 인간의 행함까지 있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오직 예수님만 계시면 된다는 생각에서 한참 멀어져 있는 것입니다.
13-15절 “내가 이를 때까지, 읽는 것과 권하는 것과 가르치는 것에 전념하라. 네 속에 있는 은사, 곧 장로의 회에서 안수 받을 때에, 예언을 통하여 받은 것을 가볍게 여기지 말며, 이 모든 일에 전심전력하여, 너의 성숙함을 모든 사람에게 나타나게 하라.”
사도 바울이 올 때까지 읽는 것, 권하는 것, 가르치는 것에 전념하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교회를 크게 부흥시키라는 말을 하지 않습니다. 예언의 말씀을 읽고, 예언의 말씀을 권하고, 예언의 말씀을 가르치는 일에만 힘쓰라는 것입니다
‘네 속에 있는 은사 곧 장로의 회에서 안수 받을 때에’라는 말은, 당시 안수를 줄 때에는 ‘그가 말씀을 가르치고 전하는 은사를 받았는가?’를 살폈습니다. 곧 예언의 말씀에만 관심이 있는가를 살폈던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의 관심은 오직 말씀이 되어야 합니다. 복음을 나타내고 전하는 것에만, 모든 관심을 두어야 합니다. 교회를 바라봐서는 안됩니다. 교회를 바라보게 되면,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가 보이는 것이 아니라, 큰 건물이 보이고, 많은 수의 교인이 보이고, 교회의 많은 재정이 보일 뿐입니다.
목사는 말씀에만 관심을 두어야 합니다. 교인들의 다른 관심에 동조해서는 안됩니다. 교인이 아무리 자신들의 관심거리에, 함께 해줄 것을 요구한다고 해도, 하나님의 마음을 생각한다면, 그리고 믿음의 본을 보여야 할 위치에 있음을 생각한다면, 잘못된 관심에 동조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또한 “이 모든 일에 전심전력하여, 너의 성숙함을 모든 사람에게 나타나게 하라”는 말씀도, 디모데의 속에 있는 은사대로, 예언의 말씀을 전하고 가르치고 권하는 일에 전심전력하라는 것입니다. 그것으로 모든 성숙함을 모든 사람에게 나타나게 하라는 것입니다.
성숙함이란 똑바로 나아가는 것, 발전하는 것을 뜻합니다. 곧 오로지 말씀을 향하여만 나아가는 그 모습만이, 모든 사람에게 나타나게 하라는 것입니다. 죽든 살든 말씀만을, 전하고 가르치고 권하는 자로만 존재하라는 것입니다.
16절 “네가 네 자신과 가르침을 살펴, 이 일을 계속하라. 이것을 행함으로 네 자신과 네게 듣는 자를 구원하리라.”
이 말씀은 믿음의 본을 보이고, 예언의 말씀을 가르치고 전하는 이 일에 전념하여 살아갈 때, 그것이 디모데 자신도 구원에 이르게 한다는 것입니다.
성도의 할 일은, 믿음의 본을 보이는 자로 존재하는 것입니다. 무엇이 믿음인가를 살피고, 그 믿음에만 거하며 살기를 소원하십시오. 여러분에게서 믿음의 본이 나타날 때, 그 믿음은 하나님이 택한 자를 찾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