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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레이션: (동영상) 1979년 10월 26일, 대한민국이 발칵 뒤집힌다. 중앙정보부장 김재규가 박정희 대통령을 저격한 것이다. 박정희 대통령의 서거로 18년간의 군부독재 시대는 끝이 난다.
장례행렬: 1979년 11월 3일, 이 충격 이 비통 어디다 비기리까 이 가을 어인 강풍 낙엽지듯 가시어도 가지마다 황금열매 주렁 주렁 열렸소이다.
내레이션: 1979년 11월 10일, 최규하 대통령 권한대행은 헌법에 규정된 시일 내에 국법이 정하는 절차에 따라 대통령 선거를 실시해서 새로 선출되는 대통령에게 정부를 이양한다는 방침을 밝혔습니다.
내레이션: 갑작스러운 대통령 성명으로 대통령 보궐선거가 치러지게 되고 대통령 권한대행이든 최규하가 후보로 나선다(제10대). 그리고 이때 차기 대통령 후보로 떠오른 또 다른 유력인물이 있었다.
김종필/1979.11: 저에게 주어진 봉사의 기회가 마지막 기회라고 저는 생각을 하면서 있는 힘 다 바쳐 힘껏 본사를 할까 생각합니다.
내레이션: 5.16 쿠데타의 설계자이자 박정희 대통령의 최측근이며 실세인 김종필이었다.
최원정/KBS 아나운서: 사백 일곱 번째 역사저널 그날입니다. 박정희 대통령 사망 이후 강력한 대권주자로 떠오른 JP 김종필 이야기를 해볼까 하는데요. 김종필하면 뭔가 훈남 이미지~
최태성/한국사 강사: 잘 생겼어요.
이시원/배우: 멋 있네요
최원정: (3김이 만나서 서로 악수하는 장면) 80년대 3김 시대를 일컬었던 그 시절의 김종필의 모습을 떠올려 보는데 우리에게 익숙한 모습이죠. (김종필의 모습사진) 2004년에 10선 낙선한 그때 쯤의 모습입니다. 모두를 내려 놓은 편안한 모습 아닌가요. 60년대부터 2000년대 까지 대한민국 현대사를 총망라한 분이세요.
최태성: 그 자체가 현대사죠.
허준/방송인: 저희들은 3김 시대 영원한 2인자 정치 9단 이때 저는 많이 뵀었거든요. 79년대는 박정희 대통령의 2인자다 이 시대를 보니까 어딘지 저렇게 젊으신 시절이 있으셨구나.
이시원: 최규하 대통령은 그냥 최규하 라고 부르잖아요. 그런데 김종필은 왜 JP 라고 부르죠?
최태성: 그만큼 많이 불렸다는 반증이 아닐까요. 사실은 이니셜로 호칭이 되었던 정치인이 많지가 않아요. DJ YS JP, 가만 있어 최규하는 어떻게 불러요 KH인가? 입에 안붙잖아요. 그만큼 이 호칭이 정말 막강한 정치력을 보여주었다 라는 반증같아요.
정병준/이화여자대학교 사학과 교수: 3김 시대의 지역 맹주였죠. DJ YS JP (三金時代-1970년대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 김영삼 김대중 김종필이 대한민국 정치계에서 막강한 권력을 행사했던 시대)를 3김 시대라고 부르고요. 70년대 80년대에 한국 민주화의 대표적인 상징입니다. 지역의 패주였습니다. 그 중에서 YS나 DJ는 대통령이 되었지만 JP는 대통령이 되지를 못했습니다. 사실은 10.26 이후에 전두환 신군부가 등장하기 전에 JP가 대통령이 될 기회가 있었습니다.
최태성: 맞어
정병준: 그런데 사실은 되지 못했습니다. 이 시기를 들여다 보면은 강력한 1인자 시대에서 2인자로 살아남는다는 게 무엇이었는가. 권력이란 무엇이었는가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가 권력을 잡는다고 그러잖습니까. 권력이라고 하는 것은 손잡이가 하나 있는 칼입니다.
최태성: 멋지다.
정병준: 그래서 권력을 잡을 수 있는 사람은 1인자 뿐이었습니다. 나머지 사람들은 칼 끝을 잡거나 칼날에 베이거나 잘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JP라고 하는 사람은 박정희 정부에서 2인자로 남았고요. 그리고 전두환-노태우 시대를 지나서 김영삼 김대중 시절까지 2인자로 살아남았던 한국 현대사에서 거의 唯一無二한 사람이라고 생각이 듭니다.
최원정: 오늘 제목이 JP 대통령의 기회를 놓치다 예요. 오늘 기회를 놓치다 그러면 관점 포인트는 아까운데 아니면 다행이다 이런 분위기인가요?
정병준: JP가 자동적으로 대통령이 될 수 있는 유일한 찬스였다 라고 생각을 할 수 있구요. 어떻게 보자면 당시에 현실적인 힘을 가지고 있던 군부와 관계가 소원해진 상태에서 一場春夢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최원정: 권력의 속성을 볼 수 있는 귀한 날이 될 것 같애요. 오늘 특별한 손님을 모셨습니다. 10대 국회 보좌관 출신이시고 KBS 정도전 드라마 에셈블리 드라마를 직접 집필하신 정현민 작가를 소개합니다.
일동: 안녕하세요
정현민/드라마 작가: 정현민입니다.
최원정: 당시 정도전 드라마 집필하신 작가이신데 당시 최고 시청률을 넘어섰나요?
정현민: 당시 최고 시청률 19.8%~
이시원: 정말 제가 좋아하는 명대사~ <정도전> 속 명대사-“전장에서 적을 만나면 칼을 뽑아야 하지만 조정에서 적을 만나면 웃으세요”
박영규 배우/정도전役: 정치하는 사람의 칼은 집이 아니라 웃음 속에 숨기는 것입니다. 하루 먼저 죽는 것보다 권력 없이 하루를 더 사는 것, 그것이 난 더 두렵네.
이시원: 이런 내뱉는 대사들이 우리와 같이 버무려서 보면 너무 좋지 않을까?
최원정: 지금 말씀하신 대사들이 정도전이 한 얘기가 아니라 거기서 나올 때 이인임의 대사, 배우 박영규가 연기한 이인임, 이 드라마는 정도전이 아니라 이인임으로 바꿔야 되는 게 아닌가?
최태성: 초반에는 좀 그런 느낌 이었어요. 이런 명대사는 즉흥적으로 만든 거예요 아니면 일부러 의도적으로 만드신 거예요?
정현민: 즉흥적으로 나올 때도 있구요. 보통은 멋진 말을 써보려고 노력을 하기도 합니다.
최태성: 만진 다음에~
정현민: 제가 노력해서 의도적으로 쓴 대사는 별로 명대사라는 말을 못 들어요. 오히려 자연스럽게 캐릭터 안으로 들어가서 써낸 말들이 의외로 대중들한테 더 많은 반응을 가져오는 경우를 많이 봤습니다.
최원정: 드라마를 보면 작가님께서 이인임이라는 인물에 애정이 깊었던 것 같애요.
정현민: 캐릭터를 보면서 정말 재밋는 인물이다 라는 생각을 했어요. 고려말기 공민왕 때부터 신돈의 개혁기 우왕 때까지 당시에 權門勢家 지금으로 따지면 보수입니다. 보수를 대표하는 진영의 대표적인 정치가로서 막강한 권력을 가졌거든요. 저는 그 배경의 하나로서 그 분이 가지고 있던 노련함을 생각합니다. 그래서 이인임 이란 분을 캐릭터 할 때 노회함, 노련함, 세련됨 이런 것들을 많이 집어넣을려고 노력을 했었죠.
이시원: JP와도 비슷해요?
정현민: 그렇죠, 첫째로 캐릭터를 구축할 때 JP를 많이 참고했습니다. JP하면 떠오르는 이미지가 노회한 정치 9단의 이미지이잖아요. 무려 국회의원을 아홉 번 합니다. 어떻게 보면 진정한 정치 9단이라는 말을 많이 하는 데 이분은 정말 단증이 있는 정치 9단이에요. 아홉 번 했으니까요.
허준: 국회의원들을 보면은 그냥 현장에서 내뱉는 말 때문에 곤욕을 치르는 국회의원이 굉장히 많아요. 저분은 차라리 입을 안 열었으면 하는 그런 경우도 많이 있거든요.
최태성: 그렇지 그렇지
허준: 굉장히 세련되고 현명한 대사를 많이 하세요. 이건 대부분 보좌관들이 써주잖아요. 그러면 거기서 준비를 잘 하시다가 작가로 성공하신 거예요?
정현민: 네~ (웃음) (보좌관 시절 갈고 닦은 문장력) 사실 저희가 활동하던 2000년대 국회만 하더라도 어떤 보좌관들은 자기가 모시던 국회의원을 스피커라고 표현하기도 해요. 우리 스피커 대단히 훌륭하셨어~ 그런데 보통 우리가 어록으로 기억할 정도의 말들은 사실 보좌관들이 써줬다기 보다는 연기로 따지면 애드 리브인 경우가 많아요. 결국은 그 정치인이 갖고 있는 어떤 관록이나 내공에서 나오는 말이 보좌관이 써준 말보다 훨씬 대중들한테 다가가는 거죠.
허준: 지금 하나 떠오르는 것은~~사퇴 하세요!
일동: (웃음)
정현민: 이런 말은 많이 써줍니다. 존경하는~~
최태성: 그말 정말 따분해~
최원정: 본론으로 다시 돌아가면, 1979년 10.26 박 대통령이 서거하고 나서 가장 큰 현안은 새 대통령 선출인 거잖아요. 그때 떠올리는 인물이 최규하 권한대행이고 다음이 JP입니다.
허준: 저희가 알기로는 다른 역사가 스포일러 보니까 최규하 대통령 권한대행이잖아요. 근데 이미지상으로만 보면 JP가 박정희 정권의 2인자였고 박정희 대통령이 서거를 했기 때문에 굉장히 많이 우는 장면이 나왔잖아요. 나가기만 하면 될 것 같은데 인기는 JP보다 오히려 최규하 대통령이 더 많았던 거예요?
정병준: 그렇지는 않죠. 우리가 알기에는 5.16쿠데타 라고 하는 거는 박정희 중심의 쿠데타라고 생각을 하지만 실제로 모의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 사람은 JP를 비롯한 육사 8기생이었습니다. 쿠데타 계획 당시에 김종필은 책략을 담당하는~
최태성: 브레인
정병준: 브레인이죠. 그래서 사실은 쿠데타의 실질적인 설계자가 JP였습니다. 그래서 김종필이라고 하는 사람은 쿠데타서부터 시작해서 박정희 정부 내내 중요한 브레인 트러스트 핵심이었습니다. 왜~ 국가재건최고회의 라고 하는 아이디어를 낸 사람도 JP였구요.
최원정: 아~ 그래요?
정병준: 그 명칭이 (국가재건최고회의-5.16 군사정변의 주체세력이 세운 입법, 사법, 행정 3권을 행사한 국가 최고통치기관) 국가 혁명이 아니라 국가를 재건하는 위원회를 만들어야 한다. 그 얘기를 듣고 사람들이 이건 굉장히 탁월하다고 생각했다는 거예요.
최원정: 지금 얘기를 듣고 보니까 정도전 같은 사람이에요. 모든 걸 다 설계 했어요.
정현민: 이성계라는 사람을 리더로 내세우고 실제로 조선의 왕업을 창업하는 과정에서는 설계자로서의 역할을 정도전이 했기 때문에 비슷한 부분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시원: 어쩌면 5.16 때 이미 1인자가 될 기회가 있었던 거잖아요. 핵심 브레인이었으면 자기가 그냥 1인자로 나서도 될텐데~
최태성: 나이 때문에~ 5.16군사정변이 일어났을 때 김종필의 나이가 35세, 그때 박정희가 44세 였거든요. 5.16군사정변 주도세력 평균연령이 35세 예요. 거기서 박정희가 나이가 가장 많은 거에요. 자연스럽게 박정희가 주도하는 모습으로 비쳐진 거죠.
최원정: 나이가 많아서 연공서열인가요?
최태성: 나이도 중요합니다.
정병준: 아무런 규칙이 없는 상태였기 때문에 나이가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볼 수가 있습니다.
정현민: 어떻게 보면 1인자가 되지 못했기 때문에 쿠데타의 내실에는 더 많이 기여할 수 있었다. JP가 2인자로 자리매김하면서 쿠데타의 여러가지 콘텐츠 라고 할까요. 그런 것들을 많이 생산한 측면이 있는데 JP는 5.16혁명 직후에 1961년 6월 10일 중앙정보부를 창설해서 스스로 초대 부장을 지냅니다. 유명한 표어가 하나 있죠. 중앙정보부 원훈: 우리는 陰地에서 일하고 陽地를 지양한다. 이 표어도 역시 JP가 만든 겁니다.
허준: 중정을 JP가 만든 거구나.
정현민: 카피를 뽑아내는 작가적 열량도 대단하거든요.
최태성: 작가 역량 그거 대단하다.
정현민: 그 이후에도 계속 많은 활동을 해 나가는 데 특히 민주공화당을 창당해서 집권 이후의 시나리오를 만들고 당의 주류로 활동하면서 계보도 만들어가고 국회의원은 물론 국무총리까지 역임 했던 박정희 시대의 명실상부한 2인자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최태성: 정말 김종필의 어록이 많아요. 품격이 있다. 정치인들은 말을 할 때 조심했으면 좋겠다 라는 생각이 드는데 유명한 어록 중에 자의반 타의반이 있습니다. 이게 63년도 4대의혹 때문에 외유를 나가는데 (1963년 4대의혹사건-군사정변 주체세력들이 연루된 4가지 부정부패사건 JP는 실각되어 외유를 떠남), 이런 말도 있어요, 굉장히 멋진 말인데, 정치는 허업(虛業)이다.
김종필(동영상): 정치는 虛業이라는 감을 다시 한번 떠올려봅니다.
최태성: 기업가는 열심히 노력하면 과실이 생기지만 정치는 과실이 생기면 국민에게 돌려주는 것이다 라는 건 멋진 말이잖아요.
허준: 대선 3김시대가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드는데 김대중 대통령 보면 소리를 지르시면서 연설을 하던 모습이 기억나고 YS도 마찬가지고 김종필 의원은요 한번도 소리 지르는 것이 한번도 없어요. 그냥 ~내가요~ 항상
최원정: 適材適所에 촌천살인 같은 말을 꽂아 놓았던 어록 제조기 사실 이런 브레인이라면 누가 봐도 유력한 차기 대권주자인데 최규하 라는 벽이 높았던 모양이지요. 이걸 왜 못 넘었죠.
정병준: 유신헌법에 따르면 대통령 서거 후 3개월 안에 보궐선거를 치러야 했는데 집권당인 공화당에서는 당연히 JP가 총재가 되어서 대통령 후보로 나서야 된다 라고 하는 의견이 지배적이었지만 JP가 출마하지 않았습니다. 최규하 후보만 단독 출마해서 대통령이 됐습니다.
최태성: 사실 이 부분이 JP가 좋고 나쁘고를 떠나서 정치인으로 실망하는 부분이에요. 정치는 기본적으로 타이밍을 기다리는 게 아니고 타이밍을 만들어가는 거거든요. 그런데 이 상황 속에서 왜 JP가 나오지 않았는지 정말 하늘이 준 기회인데~
허준: 본인이 나가게 되는 걸 알아요. 본인 태생이 나는 전략가야. 나는 지략가야 왕을 만드는 사람이지 왕이 되어서는 안 돼요. 아예 처음부터 이런 생각을 갖고 계셨던 것 같애요.
최태성: 아니야 그건 이후의 모습을 봐도 그렇지는 않은 것 같고
허준: 해봤는데 후회스러워~
이시원: 이 정도가 나의 운신의 폭으로 적당하구나. 이걸 벗어나는 순간 난 위험하구나. 이걸 깨달았을 수도 있죠.
최원정: 이 분은 무려 43년 동안 정계에 있었어요! 43년~ 그만큼 정치적 판단과 처세술에 있어서 뛰어났다는 얘기인데~JP의 처세술 어떤 특징이 있는지 이광용 아나운서와 함께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이광용/아나: 역사저널 그날의 2인자 이광용입니다. (꾸벅인사)-----------
최태성: 아니, 언제까지 2인자 할 꺼에요?
이광용: JP를 보니까 2인자가 좋더라구요.
일동: 하~하~
이광용: JP는 박정희 정권부터 김영삼의 문민정부 김대중의 국민의 정부까지 43년 동안이나 2인자의 자리를 지켰습니다. 어떻게 치열한 정계에서 40년 넘게 2인자의 자리에 살아남을 수 있었을까요? 그래서 준비했습니다. JP의 처세술~ 얼마나 유명하고 대단하면 책으로 까지 나왔구요. 책명: 성공의 법칙 2등으로 살아라 제목에서 모든 걸 말해 주잖아요. 여기서 JP 김종필의 처세술을 분석해 소개했는데요. 그 첫번째 1. 2등이 ( ) 있다. 뭘까요?
이시원: 매력 왜 주인공 보다 서브 주인공이 더 매력이 있을 때가 많거든요.
이광용: 지금 제 얘기하고 있는 거예요?
일동: 웃음~
최태성: 2등이 편안함이 있다? 저는 2등으로 살고 싶거든요.
이광용: 땡~
허준: 2등이 (기회가) 있다.
이광용: 땡~ 정답은 2등이 실속 있다. 아무래도 어떤 결과가 나왔을 때 1등보다는 2등이 책임으로부터 자유로워져요. 만약에 오늘 역사저널 그날에 시청률이 안 나온다? 그게 제 책임이겠습니까?
최원정: 그럼 그게 제 책임인가요? 조심해!
이광용: 여러분! 오늘 방송 많이 봐 주시고요. 저 내려갔다고 채널 돌려버리시면 안 돼요. 아시겠죠? JP의 두번째 처세술, 2. 우두머리와는 ( ) 않는다.
최태성: 요건 느낌이 온다.
이시원: (겨루지) 않는다?
이광용: 오~
최원정: (겸상을 하지) 않는다?
이광용: 이시원씨, 대들지 않는다. 정답 싸우지 않는다. 1979년 12.12 군사반란 이후에 당시 2인자가 누구였습니까?
최태성: 노태우 노태우
이광용: 노태우에게 JP가 직접 처세술에 대한 얘기를 해주었다고 해요.
최태성: 진짜로~
이광용: 2인자는 절대로 1인자를 넘겨 보지 말아야 한다. 또 성의를 다해서 일관되게 1인자를 보좌하는 사람이라는 인상을 줘야 하고 의심받을 만한 일은 하지 말아야 한다 라는 조언을 JP가 노태우에게 해주었다고 합니다. 1인자에 순종하는 자세를 강조했다는 거죠.
최원정: 느낌이 약간 조직문화 같기도 하고, 형님, 보스를 모시는 요즘은 저런 문화가 없지 않나요?
최태성: 요즘도 살아남기 위해서는
이시원: 1인자에 찍혀봐요 그게 밉쌍이예요.
이광용: 요즘엔 그런 문화가 없다고요? (최원정을 향해) 누님, 왜 이러십니까?
일동: (폭소)
최원정: 착한 척 하기 힘들어
정현민: 그때 당시에는 총재 제도도 있고 제왕적 총재 얘기를 많이 했던 것처럼 단순히 정치 리더를 떠나서 카리스마가 있는 보스 이미지가 강했던 시대였죠. 그런 측면이기 때문에 지금의 정치문화와는 달리 정말 형님 동생 하는 권위적인 정치문화가 있었고요. 저는 아까 사실은 2등이 ( ) 있다 라고 말 할 때 저는 2등이 (숙면이) 있다 라고 생각했어요.
최원정: 숙면?
정현민: 2등은 발을 뻗고 잘 수 있다.
일동: 아~아~ 숙면~
정현민: 마찬가지로 우두머리와는 싸우면 안 되는 것이 1인자는 항상 예민합니다. 그리고 1인자 주변에는 또한 1인자 측근들이 있습니다. 1인자의 눈 만큼이나 무서운 것이 측근들의 눈이죠. 그런 걸 JP는 아주 오랫동안 2인자의 삶을 살면서 그걸 보았기 때문에 절대 싸우지 않고 또한 귀에들어가거나 오해할 만한 행동을 하지 말라는 조언을 노태우에게 하지 않았나 그렇게 생각합니다.
정병준: 그때 이렇게 얘기 했다는 겁니다. 참을 수 없는 걸 참는 게 진정한 인내다. 박정희 정부시절 2인자가 되려던 사람들이 있다. 김성곤, 김형욱, 이후락, 차지철 모두 다 몰락하거나 사라졌다. 당신이 처세를 할려면 참을 수 없는 것을 참을 줄 알아야 한다. 그런 얘기를 했다고 합니다.
이광용: JP의 처세에 대해서 세번째 카피를 보면, 3. 오늘의 적만 아니면 누구와도 친구가 될 수 있다. 87년 대선 국면에 JP는 신민주공화당을 창당하고 대선 후보로 나섭니다. 물론 4등으로 떨어졌어요. 하지만 그의 행보를 보면 그게 고스란히 드러납니다. 90년대는 무슨 일이 있었죠? 1990년 1월에 3당 합당! (三黨合黨-집권 여당인 민주정의당, 야당인 통일민주당, 신민주공화당이 합당하여 민주자유당이 탄생한 일), 적이었던 자기를 막았던 노태우 민주정의당, 그리고 박정희 정부 때 경쟁자였던 김영삼 통일민주당 대표와 손을 잡고 민주자유당을 창당을 하죠. 그리고 YS가 (제14대) 대통령이 되는 데 공을 세우죠. 그리고 나서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YS와 헤어집니다. 96년 총선에서 자유민주연합, 자민련을 창당해서 충청의 맹주로 돌아가죠. 그리고 이후에 97년 대선을 앞두 고 어떤 사건이 있습니까? DJP 연합, 이게 한국 정치사에 가장 충격적인 사건이 아닐까 싶습니다. (DJP 연합-1997년 대통령 선거 당시 김대중과 김종필이 공동 여당의 목표를 가지고 결성한 연합), 가장 큰 정적이라고도 할 수 있는 DJ와 손을 잡고 국민의 정부를 출범시킵니다. JP는 이렇게 누구와도 손을 잡을 수 있는 그런 처세, 그런 것을 현실정치에서 보여준 사람이었습니다. JP 따지고 보면 외유-칩거-은퇴와 정계복귀를 반복해서 끝까지 권력의 중심부에서 멀어지지 않았습니다.
허준: 만약에 기회가 생긴다면 1인자의 자리에 도전할 기회가 생긴다면 도전하실 겁니까?
이광용/JP代役: 저는 테이블에 앉아서 2시간 동안 녹화를 하는 게 상당히 비효율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일동: 웃음
이광용/JP代役: 저는 이 자리가 좋아요. 2인자가 실속 있다 저를 보시면 뭐 대충~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 JP를 보면서 그 말이 어떤 의미인지 아시게 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오래도록 2인자의 자리를 지켜온 JP 김종필, 대통령 빼고는 다 해본 남자 JP의 처세술 살펴봤습니다.
최원정: 노련한 처세술을 보인 JP 그러니까 10.26 이후 대선에 출마하지 않은 게 나에게 더 유리하다는 판단이 있었기 때문에 그런 결단을 내린 게 아닌가 싶기도 하구요.
정병준: JP가 회고록에서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나는 체육관 대통령 되는 게 싫었다. 사실은 이게 반쯤 진실이라고 생각합니다. JP 자신은 유신헌법을 폐기하고 민주적인 헌법을 만들어서 국민이 뽑는 대선에 본인이 나갈 계획이었다 라고 회고록에 쓰고 있습니다.
정현민: JP의 말을 저도 액면 그대로 믿기 힘들다고 봅니다. 정치인에게 가장 중요한 것 중의 하나가 권력의지를 많이 얘기하거든요. 정치란 때론 냉정하고 총성 없는 전쟁터와 같으니까 그런 것들을 돌아가게 하고 매 번의 선거 낙선을 견딜 수 있게 하는 건 사실 權力意志 이거든요. 근데 JP 같은 분들은 지금의 정치인들이 경험하지 못했던 어떤 극한적인 상황도 많이 보셨던 분들이 아니겠어요. 이런 분이 자기가 정말 결심하면 대통령이 되는 데 팔부 능선을 넘는 그런 기회가 왔을 때 과연 말씀하신 그런 이유들 때문에 하지 않았을까. 저는 물론 체육관 대통령보다는 직선제 대통령이 대우를 받겠으나 그런 이유 때문에 아니라는 것을 제 경험칙상 답변하기는 어렵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정병준: 저는 역사학자이기 때문에 이런 생각을 합니다. 회고록이 중요하지만 반드시 믿지는 않는다. 왜냐면 회고록이나 증언록을 썼는데 당연히 자기를 증오하고 미워하고 혹은 합리화하고 변명할 수 밖에 없는 게 아니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회고록을 남기는 정치인은 훌륭하다고 생각합니다. 왜~ 자신의 주관적인 싯점에서 당시 시대를 어떻게 봤는지 자신이 경험한 정치적 사건들을 어떻게 평가했는지를 보여 주기 때문에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당시 주한미대사가 글라이스틴 이었습니다. 글라이스틴 회고록에 이런 얘기가 들어 있습니다. 당시에 최규하 권한대행이 체육관 대통령으로 입후보할 때 JP도 입후보할 생각이 있었다는 거예요. 그런데 최규하를 둘러싸고 있는 군고위층이 JP를 반대해서 JP가 대통령 출마결심을 철회했다 라고 썼습니다. Kim Jong Pil, perhaps the strongest candidate ultimately to succeed Park, threw a monkey wrench into the works by threatening to contest Choi for the interim job. 2016년에 나온 JP 회고록에는 이런 대목에 대한 해명이 없습니다. 당시 10.26 이후 계엄령이 내려졌고 그리고 군부가 당시 계엄사령관이 육군대장 정승화 육참총장이었습니다. 당시 정치적 배후에서 실권을 행사하고 있었기때문에 사실은 보이지 않는 손이 작용을 했을 것이다 라고 생각을 합니다.
이시원: 군부가 날 반대해서 못 나갔어요 난 체육관 선거가 싫어서 안 나갔어 이게 확실히 본인 한테도 편하고 있어 보이잖아요.
최원정: 근데 군부가 JP를 반대한 이유가 있나요? 같은 군인 출신이잖아요?
정병준: 군부 입장에서는 JP가 상당히 부담스러운 면이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이 듭니다. 왜냐면 JP는 5.16의 지분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거든요. 지분을 가지고 있었고 육사 8기생과 JP가 혁명의 주체라고 생각을 했기 때문에 이 사람들은 자신들에게 기회가 와야 된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박정희가 지도자 이자 혁명의 동지였지만 10년 정도이면 충분하다. 이제는 우리 차례다 이런 생각이 있었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68년에 박정희의 3선개헌에 JP가 처음에는 굉장히 강력하게 반대를 합니다. (3선개헌 1968년-박정희 정권이 정권연장을 위하여 대통령의 3선이 가능하도록 헌법을 개정한 사건),
이시원: 그러면 만약에 3선개헌에 성공하지 않았으면 JP가 박정희 대통령을 이어서 대통령이 될 가능성도 있었을 까요?
정현민: 3선개헌을 하지 않았으면 아마도 여야를 통틀어 거의 JP가 대통령이 될 가장 유력한 정치인이 아니었을까 라는 생각이 들고요.
정병준: 결국은 5.16 쿠데타를 같이 했지만 사실은 어떻게 보면 박대통령과 김종필은 서로 가고자 하는 길이 조금 다른 면이 있지 않았을까 그런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최원정: 정병준 교수님께서 저에게 큰 숙제, 작은 숙제 아무튼 뭔가 숙제를 내주셨는데 과연 어떤 미션인지 보도록 하겠습니다. 피디, 가져오셨어요? (봉투가 하나 전달됨) 아래 주소로 찾아가세요: 서울특별시 세종대로 172, 여기가 도대체 어디인가요?
피디: 미션1. 일단 그 주소로 찾아가셔서 그 주소에서 박정희 이름을 찾아 인증사진 찍기입니다.
최원정: 모래 밭에서 바늘 찾으라는 건가 어떻게 그게 가능하죠? 뭔가 있기는 있는 거죠? 알겠습니다. 일단 한번 가보도록 하죠. (주소지로 향하는 최원정 아나운서) 도착한 곳은? 광화문 거리 한 복판? 이순신 장군 동상 앞~ 서울 광화문 광장 세종로에 왔는데 여기 눈에 띄는 것은 이순신 장군 동상 외에는 눈에 띄는 게 없거든요. 제가 여기 쯤에 있다는 얘기인데 제가 한번 찾아가 보겠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의 이름은 어디에? 여기는 그냥, 이순신에 대한 얘기들이구나~ 막연한데요 장군님, 힌트를 좀 주십시오 (정답을 알리지 말라!) 보통 이런 동상을 보면 뒤에 이름들을 새기잖아요. 찾았습니다! 드디어 발견!
朴正熙 獻納
題字 朴正熙 書
銘文 李殷相 撰
彫像 金世中 作
西紀 1968年 4月 일
愛國先烈彫像建立委員會/서울신문사 建立
여기 있네요, 아니 제가 여기 이순신 장군 동상을 몇 천 번을 왔다 갔다 했을 것 아네요 그런데 이 글씨는 처음 봐요. 동상 뒤편에 새겨진 ‘박정희 헌납’ 충무공 이순신 이라는 글씨가 박정희 대통령이 직접 쓴 글씨래요. 인증 샷까지 찍어야 되는 거죠? 하나 둘 셋! 미션 클리어! 간단하네요.
피디: 미션이 하나 더 있어요.
최원정 또 있다구요?
피디: 두번째 주소로 찾아가세요
최원정: 또 아래 주소로 찾아가세요-서울특별시 동대문구 회기로 56, 여기 뭐가 있을까요? 여기서 뭘 찾아야 해요?
피디: 거기에서 김종필 이름을 찾아 인증사진 찍기
최원정: 한 번 가보겠습니다. 동대문구 고고~ (두번째 미션 장소는 어디?) 서울시 청량리동에 위치한 세종대왕 기념관에 오늘의 미션이 있다. 저기 세종대왕께서 정중앙에 멋있게 자리잡고 계시는 데요. 저 근처 어디엔가에 아까 이순신 장군 동상처럼 어딘가에 이름이 있을 거예요. 어디 있는지 알 것 같애요. 가보겠습니다. 여기 어디에 JP의 이름이? 세종대왕 동상이 2012년까지는 덕수궁 중화전 동쪽 광장에 모셔져 있었다. 동상에 많은 분들의 이름이 있는데 혹시 김종필의 이름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동상 뒤에서 뭔가를 찾게 되는데 오~ 글씨가 너무 흐릿해서 안 보여요. 하지만 제 눈에는 보입니다. 金鍾泌 獻納 또 찾았습니다. 찰칵! 미션은 다 완료는 했지만 이게 오늘의 주제랑 무슨 관계가 있을까? 대통령의 이야기를 하다가 지금 김종필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어떻게 이야기가 이끌어가는 지 스튜디오에서 얘기 나눠보겠습니다. 아니~ 저는 지금까지도 제가 왜 갔다 왔는지 모르겠어요.
이시원: 이름 찾아 오신 거잖아요.
허준: 헌납~ 헌납~ 거기에 공통점이 있는 것 같은데 헌납이라고 하면 자기가 돈을 내서 만든 거잖아요. 내 돈으로 만든 거잖아요.
정병준: 전부 다 사비로 낸 것은 아니고요. 이순신 장군 동상의 경우에는 박 대통령이 900만원 가량을 헌납했다고 합니다.
최태성: 그 당시 900만원이요?
정병준: 군사정부가 수립되고 난 다음에 1966년 정부주도 애국선열조상(彫像) 건립위원회를 만들어서 위원장을 누가 맡느냐 하면 JP가 맡습니다.
일동: 아~아~ (감탄)
정병준: 처음으로 만든 게 1968년 4월 27일에 만든 이순신 동상입니다. JP는 당시 덕수궁에 세종대왕 동상을 세웠는데요. 우리가 지금 알고 있는 덕수궁은 높지 않았습니다. 당시에는 담장이 없었고요. 철책으로 투과형으로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다 지나면서 세종대왕 동상을 볼 수 있도록 만들어 놓은 것이었습니다.
최원정: 박정희는 이순신 동상을 김종필은 세종대왕 동상을 만들었는데 특별한 이유는?
이시원: 본인들이 가장 존경하는 역사적 인물이 아닐까요?
허준 통하는 느낌이 이순신은 武의 1인자 이런 느낌이 있잖아요. 武臣, 그리고 세종대왕하면 한글이잖아요. 그러니까 文 이런 느낌 이잖아요. 박정희 대통령은 武人으로써 나라를 뒤엎는 게 아니라 武人으로써 나라를 지킨다. 그것도 국가재건 이런 이름을 부쳤던 것처럼 그래서 내가 이렇게 武人으로 우리나라를 구하는 거야 라는 투영을 하고 싶었고 김종필은 JP로서는 반대의 이미지가 있어야 살잖아요. 나는 文人으로서 국가를 발전시킬 거야 이런 이미지~
정병준: 한국역사에서 민족주의적 역사관들이 부흥하는 싯점이 60년대 중반 이후 이거든요. 위인들을 많이 발굴해서 동상을 세워서 애국심을 고취하는 사업입니다. 이게 사실은 일종의 국정교과서 애국주의 그런 것입니다. 역사를 예술과 결합해서 정치에 동원하는 방식이죠.
최원정: 제가 한 줄 요약으로 얘기를 마무리 해볼까 합니다. 박정희 대통령은 이순신 장군한테 줄을 섰고 김종필은 세종대왕한테 줄을 섰다. 이 얘기는 정치적 지향점을 드러낸 거예요. 난 이쪽~넌 저쪽~
최태성: 이제 이해돼요?
최원정: 이제 깨달음을 얻었네요.
정현민: 제 의견인데요. 교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은 현실적인 어떤 팩트라고 한다면 저희 같은 작가들은 그것 가지고는 심심하니까 거기에다 판타지를 넣어야 되지 않겠습니까?
최태성: 어떻게 넣으시겠어요?
정현민: JP가 각하께서는 난세의 영웅이 되십시오 그렇게 해놓고 세종대왕하면 태평성대잖아요. 자신의 속 마음은 치세의 히어로가 되겠습니다. 이런 식으로 저는 구상해 보았습니다.
최태성: 야~ 약 오르시다. 어쨌거나 3선개헌을 바라보는 입장은 초기엔 달랐잖아요. 김종필 같은 경우는 3선개헌 반대, 박정희는 밀어부치는 그런 단계 하지만 결국 최종적으로는 김종필 역시 3선개헌에 찬성으로 돌아갑니다.
이시원: 굽힐 때는 굽혀야 합니다. 정치하는 사람에게 허리와 무릎은 유연할수록 좋은 것이오 (드라마 정도전 中)
최태성: 왜 그래~ (이인임에 빙의된)
정현민: 김종필이 3선개헌에 찬성하면서 여러가지 풍문들이 도는 데요. 그 중에 가장 대표적인 게 박정희 대통령이 JP에게 다음 대통령 자리를 약속했다. 다음 대통령은 너다.
정병준: 사실은 3선개헌이 아니었다 하더라도 JP가 대통령 되기는 상당히 어려운 면이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왜냐면 미국의 영향력 때문입니다.
최원정: 미국이 등장하나요?
정병준: 60년대에 한국정치에서 미국의 힘은 지금과 전혀 달랐습니다. 미국이 JP에 대해서 우호적이지 않았습니다.
허준: 박정희 대통령과도 안 좋았고 카터도 그렇고 너무 자기 방식대로 추진력만 강한 타입이라 그런 건데 JP는 느낌이 브레인이고 정치적인 유연성도 있는데~좋을 것 같은데 왜 안 좋아요?
정현민: JP가 젊은 시절에 좌익사상에 빠졌던 그런 성향 때문이 아닐까요? 그때 당시는 미국의 지상 최대 과제는 소련과의 냉전체제경쟁 속에서 반공이었지 않습니까? 실제로 JP는 대학시절에 공산주의 모임에서 활동하기도 했고 가족 중에서도 공산주의에 협력했던 분들도 계시고요. 특히 JP 장인 어른이시자 박정희의 형인 박상희 선생이 공산주의 성향이 있었죠. 그리고 북한에서 무역상 부상(남한의 차관급)까지 지낸 황태성씨와도 절친한 사이였습니다. 물론 젊었을 때 한 때였지만 이런 것까지 미국이 염두에 두고 두루두루 연구하지 않았을까요?
정병준: 처음에는 박정희나 김종필이 좌익경력이 있다는 점을 미국이 굉장히 우려했습니다. 당시 주한미국 대사관 근무 그레고리 헨더슨 이라고 하는 유명한 나중에 하버드에서 한국학을 가르치는 분이 보고서를 썼는데 5.16 혁명의 주체라고 하는 사람들이 좌익 경력자들이 굉장히 많다고 우려를 했지만 사실은 박정희 정부가 쿠데타 이후 제일 먼저 내세운 게 뭡니까? 남버 원이 반공이죠. 한국의 반공노선에 미국이 안심을 하게 됩니다. 5.16 이후에 JP가 미국과의 갈등을 많이 겪게 됩니다. 어떤 갈등을 겪게 돼냐면 사실은 4대의혹 사건으로 자금을 마련해서 공화당을 사전에 조직했죠. 또 한편으로는 경제개발 5개년계획을 수립하게 되는 데 (경제개발 5개년 계획(1962~1986)-국가경제발전을 목적으로 5년 단위로 짜여 추진된 경제계획, 처음에는 우리가 알고 있는 수출 주도형이 아니었습니다. 통화개혁을 통해서 내자를 동원해서 (통화개혁(1962)-미국과 사전 협의 없이 화폐 단위를 10분의 1로 절하해 신 원화 발행), 경제개발계획을 하겠다. 미국이 바라볼 때는 저건 비현실적인데 저건 사회주의적인데 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미국의 입장으로 볼 때는 이런 정책을 추구하는 핵심에 누가 있느냐 김종필이다. 그래서 JP가 중정을 만들고 공화당을 만들어서 박정희가 63년도에 민정이양을 해서 대통령을 만드는데 1등 공신이었지만 JP의 권력이 너무 강해졌고 미국의 말을 안 듣는다고 했습니다. 또 권력 내부에서도 JP에 대한 반대세력이 커지고 있었습니다. 즉 박정희 라고 하는 인물을 제거할 수는 없는 상황입니다. 그런데 2인자인 JP는 누구나 다 미워할 수 있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미국도 미워하게 됐고 박정희를 따르는 군부 내의 오비를 중심으로 제는 안돼~ 큰일낼 인물이야 그러니 박정희 로서도 자신의 사랑하는 처조카이자 혁명동지이지만 김종필을 잘라 버리는 거죠.
최원정: 아무튼 이제 1979년 10월 26일 이후에 제10대 대통령은 JP가 아니고 최규하가 차지하게 됩니다. 이후 대한민국은 다시 한번 군부의 소용돌이에 휩싸이게 됩니다.
내레이션: (동영상) 1979.12.6. 서울장충체육관 박정희 대통령 서거 후 장충체육관에서 제10대 대통령 선거가 치러집니다. 단독 출마한 최규하 권한대행이 96.6%의 득표율로 제10대 대통령이 된다. 그로부터 6일 뒤인 1979년 12월 12일 예기치 못한 사건이 발생한다. 전두환 노태우를 중심으로 한 신군부 세력이 계엄사령관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을 체포하며 군사반란을 일으킨 것이다. 이로써 최규하 정권은 무력해 지고 전두환과 신군부는 실질적인 권력을 손에 넣게 된다.
최원정: 18년 전에 본인이 박정희 대통령과 군사 쿠데타를 일으켰는데 그와 똑 같은 상황이 지금나를 향해서 눈 앞에 펼쳐지고 있어요.
허준: JP가 그 육사 중에서 가장 사랑받는 8기 출신이라고 했는데 전두환이 후배잖아요. 11기 이잖아요. 어렵지 않았을까요? 아니 건방진 후배 놈이 선배한테 반기를 들어? 이런 생각을 했을 것 같애요.
정병준: 육사 11기는 좀 특이했다고 합니다. 이전 과는 달랐는데 미국 웨스트포인트 과정을 모방해서 만든 정규 육사과정입니다. 4년제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죠. 육사 8기는 3~6개월의 단기교육을 받아서 임관했습니다. 왜냐면 미군정 끝나고 장교요원들이 필요하니까 속성으로 충원하던 시절입니다. 육사 11기는 간단한 거죠.
최태성: 우리가 정통이다.
허준: 우리가 정규과정 첫 육사 기수다.
이시원: 프라이드가 있었겠네요.
정병준: 그런 프라이드는 있었죠. 그렇지만 8기는 또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소대장 중대장으로 6.25전쟁에 참전해 나라를 지켰다.
최원정: 참전 용사~
정병준: 나라를 지키고 목숨을 바친 건 우리들이야 라고 하는 겁니다. 육사 한 기수가 약 200~250명인데 육사 8기는 1300명이었습니다. 그 중에서 300명 넘는 분들이 전사했습니다. 남은 사람들이 한국군의 주요직을 차지했고 이 분들이 60년 5.16쿠데타의 핵심인 거죠.
이시원: JP도 군출신이잖아요. 그러면 가끔 만나면서 술 먹다가 밥 먹다가 신군부의 동향을 들을 법도 한데 어떻게 몰랐을까요?
최원정: 그러게~
정병준: 당연히 18년이 지나는 동안에 상황이 바뀌게 된 거죠. JP가 사실은 5.16에 참가하게 된 동기는 59년, 60년에 34, 37세이었는데 중령이었습니다. 한국군 최초로 별 넷을 단 분이 백선엽 장군이었습니다. 나이가 몇 살이었을 것 같애요? 33살입니다.
허준: 옛~
정병준: 1953년 1월에 33세에 four star를 달았습니다. 그리고 1년 뒤에 1954년에 정일권, 이형근 두 분이 four star가 되었는데 나이가 37, 34세였습니다.
이시원: 와~
정병준: 그러니까 말이 안 되는 거죠. 그래서 1960년에 JP가 한 일이 뭐였냐면 부정선거에 가담한 군의 장성 이하의 장군들 다 물러나야 한다 (整軍運動-1960년 국군 내 하급장교들이 부정부패 및 과거사 청산을 빌미로 중장급 이상 장성들의 퇴진을 요구한 운동), 정군운동을 했습니다. 그러니까 군혁신의 아이콘이 JP고, 그래서 육사 8기를 중심으로 혁명을 한다고 했는데 18년이 지나고 보니까 그 JP가 정군운동의 대상이 되어 버린 장군들처럼 비춰진 겁니다. 사실은 JP는 전두환이 누군지도 잘 몰랐다고 합니다 (12.12군사반란 전두환 VS JP)
일동: 하~하~ (웃음)
정병준: 게다가 박정희 대통령이 직접 군을 장악했기 때문에 쿠데타 이후에 JP는 군과 이렇다 할 연결고리가 없는 상황이었다.
정현민: 그렇다고 얘기를 합니다. 만약에 5.16이 형이라면 12.12는 아주 못된 동생이다. 이런 식의 얘기를 하는 데요. 우리가 오늘 JP가 대단히 머리가 비상하고 통찰이 있고 이런 식의 많은 얘기와 사례들을 나누지 않았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인 역시 칼로 흥한 자는 칼로 망한다 라는 걸 본인에게는 해당도 되지 않았다 라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결국 자기는 예외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보편적인 심리가 있지 않았을까요?
최태성: 거기서 문제가 발생하죠. 신군부 입장에서는 김종필은 부담스러운 존재예요. 일단 육사 선배에 집권 여당인 공화당 실세, 차기 대권주자에 있고 지금 신군부가 가만히 놔둘 수 있는 사림이 아니예요.
이시원: 하지만 정치에서 서열은 딱 두 가지 뿐입니다. 실세와 허세, 실세는 이제 신군부로 넘어갔고 JP는 허세인 거죠.
정병준: 1980년 5월 17일 이후에 신군부에게 JP와 이후락 두 사람을 부릅니다. 두 사람은 중정부장을 지냈고 박정희 정권의 가장 중요한 두 인사를 부정축재로 지목을 합니다. -----金鍾泌 216億 李厚洛 194億 李世鎬 111億 金振晩 103億 金鍾洛 92億 朴鍾圭 77億
최태성: 신군부에서 김종필 재단을 몰수를 해요. 액수가 어마어마 합니다, 1980년 기준으로 213억 4천여 만원을 강제로 헌납합니다. 월급 100만원 받는 사람들이 먹지도 쓰지도 않고 2000년을 모아야 하는 금액입니다.
정병준: 1980년 7월 신군부가 JP를 보안사 서빙고 분실로 끌고가서 46일간 구금했다. JP와 이후락 둘 다 잡으려고 했는데 이후락은 미국에 가서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이후락한테 이렇게 얘기했다는 겁니다. 너 들어와서 JP에 대한 못된 말을 좋게 해주면 봐주께, 이후락이 그래서 들어오게 됩니다. JP의 부정축재에 대해서 증언해 주면 봐주겠다. 결국은 JP가 권력형 부정축재혐의 1위가 됐구요. 그리고 사회소요 불안 내란음모는 DJ가 지게 되는 거죠. JP와 DJ가 이 시기에 부종축재의 원흉 사회불안의 원흉으로 등장을 하게 됩니다.
허준: 진짜 200억원을 축재한 거예요? 아니면 200억을 했다 하는 거예요?
정병준: JP의 말에 따르면 JP의 호가 雲庭입니다. 구름 속의 정원이라는 뜻이에요. 운정 장학재단을 만들어서 제주에 있는 감귤농장, 서산삼화목장을 재단에 헌납했는데 자기가 기부한 장학재단 돈까지 모두 포함하고 공화당의 정치자금까지 포함해서 부정축재자로 만들었다 라고 본인의 회고록에서 그렇게 쓰고 있습니다 (JP의 회고록-운정장학재단의 돈-공화당 정치자금까지 모두 포함시킨 것),
정현민: JP가 유명한 말을 남깁니다. 그 유명한 春來不似春 봄은 왔으나 아직 봄이 아니다. 결국 이 이후로 신군부 시대에는 1980년 9월 정계에서 은퇴를 하게 되는 거죠.
허준: 너무 못됐다. 이렇게 해서 모든 것 다 강제몰수 해서 다른 사람한테 부정축재자해놓고~ 난 20만원 밖에 없는데 (전두환)
일동: 마냥 웃을 수 만은 없는
정병준: 당시 이후락이 들어와서 똑 같이 부정축재자로 몰리니까 이렇게 얘기했다고 합니다. 떡을만지는데 떡고물이 안 묻을 수 없다(부정축재자로 몰린 이후락 曰)
정현민: 교수님, JP라는 분이 항상 결정적인 순간에는 좀 굽히거나 물러났던 것 같거든요. 이 분이 정말 진검승부는 언제 했던 겁니까?
정병준: 제가 볼 때는 생존 자체가 진검승부가 아닐까요? 권력의 주변에서 사실은 1961년부터 2000년대까지 살아남았다고 하는 것이 이분한테는 진검승부였다고 생각합니다.
최원정: 칼이 진짜 대단한 분 같아요. 우리 같으면 꺾일텐데 꺾이지 않고 적당히 휠 줄 아는 지혜를 갖고 있어요.
이시원: 꺾이지 않는 마음을 이때부터~
정병준: 사실은 JP가 정계 복귀한 데는 1987년 인데요 (JP가 1980.12에 그린 그림등장) 이것은 1980년 12월에 그린 그림입니다.
최태성: 본인이 직접 그림도 잘 그리시네
정병준: JP가 예술적 소양이 많이 있습니다.
최원정: 유화로 그린 거예요?
정병준: 유화로 그린 거예요. 5.17로 몇 달 동안 바깥 세상과 차단되어 살아야 했었다. 설악산에 갔다. 산은 생명력을 잃지 않고 의연했다 라고 쓰고 있습니다.
허준: 저 산이 딱 기세가 있는 게 느껴져요.
최태성: 본인이에요
이시원: (그림을 보고) 저 뜻은 나는 아직 포기 않았다.
허준: 80.12. JP라고 본인이 본인을 JP라고 하셨네
최원정: 그러니까 증오와 고통을 예술로 승화시키는 그런 기간이었군요.
정병준: 자신의 처지를 저렇게 휜 눈이 쌓여있는 설악산에 비유한 것이겠죠. 재주가 굉장히 많았습니다.
최원정: 바이올린도 잘 하신다고
정병준: 만돌린입니다.
최원정: 서예도~
정병준: 5.16 이후에 유명한 예그린 악단을 만들어서 우리나라 최초의 일종의 뮤지컬 같은 걸 했구요. (예그린 악단-1961년 김종필의 주도로 창단된 국내 최초 종합음악예술단체), 만들린도 했구요. 검도 2단에 승마와 골프도 굉장히 잘 했다고 합니다.
이시원: 아까 JP가 영원한 적은 없다고 했었잖아요. 그렇다면 그말이 전두환 한테도 적용됐을까요?
정병준: 그림이 또 하나 있습니다. [그림 제목: 주먹 1984년 7월] 이게 84년에 그린 그림입니다. 힘을 수반하지 못한 정의(正義)는 무기력하고 정의를 수반하지 못한 힘은 폭력(暴力)일 뿐이다. 파스칼이 이렇게 갈파했다. 사실은 JP는 영원한 적도 동지도 없다. 전두환과는 관계가 안 좋았던 것입니다. 주먹 그림을 보고 이건 전두환을 향한 분노였구나. 끝까지 사실은 화해하지 않았습니다. JP는 90세에 와서 많은 기자들이 와서 생일잔치를 하고 그랬는데 그때 이렇게 얘기했습니다. “구십이 되었는데도 미운 사람이 한 명 있다”
최원정: 한 명이 전두환이구나.
정병준: 다들 그게 누굴까 라는 건 다 알아들었다고 생각을 합니다.
허준: 주먹 하나를 그렸는데 (JP) 힘이 없는 정의는 무기력하다 라고 표현하면서 (신군부) 그런데 정의를 수반하지 못한 힘은 폭력이다 라고 하나의 주먹으로 둘의 정반대 되는 마음을 표현한 거예요.
최원정: 사실 전두환 때문에 저런 돌덩이 같은 주먹을 가슴에 안고 사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는데 김종필도 그 많은 사람들 중의 한 분이었구나 라는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허준: 오늘 새롭게 많은 면을 보게 되었어요.
최원정: 한 사람의 인생을 통해서 대한민국 현대사를 총망라한 느낌이에요.
정현민: JP만큼 평가가 엇갈리지는 않을 겁니다. 거인의 어떤 모습이 엿보이는 이면에는 또 어쩔 수 없는 군사정변의 핵심이라고 하는 부분과 또 유신이라고 하는 엄혹한 시대의 실세 총리를 했었다고 하는 그런 꼬리표가 끝까지 따라다니는 거죠. 그것으로부터 우리가 자유로움을 주어서는 안 된다 라는 생각이 들어요. 하지만 그런 것들을 차치하고 저는 JP에게서 한 가지만 가지고 오라고 한다면 그 사람의 말을 가져오고 싶습니다. 정치인의 말들이 시정잡배들의 말들을 닮아간다 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훨씬 더 엄혹하고 치열한 전쟁터에서 항상 미소지으며 선문답 하지만 뼈를 때리는 일갈을 했던 JP의 말만큼은 현대 정치인들이 배워야 한다고 생각을 합니다.
정병준: JP가 자신이 유신 잔당이 아니라 유신 본당이라고 했을 때 본심이 있었다고 생각을 합니다. 5.16에 대한 박정희에 대한 진심이었고요. 그렇지만 87년 정계복귀 이후에 JP는 김영삼과 김대중 두 사람을 대통령으로 만드는데 중요한 공로를 했습니다. 한국이 민주화 되는 과정에서 타협적 점진적인 경로로 진행되는데 기여한 공로는 분명히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역사학자로서는 미워하기 어려운 인물입니다. 笑而不答의 정치인입니다 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최원정: 대한민국 현대사 그 자체 김종필의 이야기를 나눠봤고요. 오늘 함께 해주신 여러분 감사합니다. 끝. (KBS 역사저널 그날 407회 10.26 그 후 JP 대통령의 기회를 놓치다 에서 정리).
내용 요약
① 1979년 10월 26일, 대한민국이 발칵 뒤집힌다. 중앙정보부장 김재규가 박정희 대통령을 저격한 것이다. 박정희 대통령의 서거로 18년간의 군부독재 시대는 끝이 난다. 1979년 11월 10일, 최규하 대통령 권한대행은 헌법에 규정된 시일 내에 국법이 정하는 절차에 따라 대통령 선거를 실시해서 새로 선출되는 대통령에게 정부를 이양한다는 방침을 밝혔다. 갑작스러운 대통령 성명으로 대통령 보궐선거가 치러지게 되고 대통령 권한대행이든 최규하가 후보로 나선다(제10대). 그리고 이때 차기 대통령 후보로 떠오른 또 다른 유력인물이 있었다. 5.16 쿠데타의 설계자이자 박정희 대통령의 최측근이며 실세인 김종필이었다. 80년대 3김 시대를 일컬었던 그 시절의 김종필, 2004년에 10선 낙선한 그때, 모두를 내려 놓은 편안한 모습, 60년대부터 2000년대 까지 대한민국 현대사를 총망라한 정치인이다. 이니셜로 호칭이 되었던 정치인이 많지가 않다. DJ YS JP, 그만큼 이 호칭이 정말 막강한 정치력을 보여주었다. 3김 시대의 지역 맹주였다. DJ YS JP 三金時代는 1970년대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 김영삼 김대중 김종필이 대한민국 정치계에서 막강한 권력을 행사했던 시대였다.
② DJ YS JP 70년대 80년대에 한국 민주화의 대표적 상징이다. 지역의 패주였다. 그 중에서 YS나 DJ는 대통령이 되었지만 JP는 대통령이 못됐다. 10.26 이후에 전두환 신군부가 등장하기 전에 JP가 대통령이 될 기회가 있었다. 그런데 되지 못했다. 이 시기를 들여다 보면은 강력한 1인자 시대에서 2인자로 살아남는다는 게 무엇인가. 권력이란 무엇인가를 생각할 수 있다. 우리 모두가 권력을 잡는다고 말한다. 권력이라고 하는 것은 손잡이가 하나 있는 칼이다. 그래서 권력을 잡을 수 있는 사람은 1인자 뿐이다. 나머지 사람들은 칼 끝을 잡거나 칼날에 베이거나 잘리는 것이다. 그런데 JP라고 하는 사람은 박정희 정부에서 2인자로 남았고 그리고 전두환-노태우 시대를 지나서 김영삼 김대중 시절까지 2인자로 살아남았다. 한국 현대사에서 거의 唯一無二한 사람이다. 10.26 그후 JP가 자동적으로 대통령이 될 수 있는 유일한 찬스였다. 그러나 당시에 현실적인 힘을 가지고 있던 군부와 관계가 소원해진 상태에서는 一場春夢이었다.
③ JP하면 떠오르는 이미지가 노회한 정치 9단이다. 국회의원을 아홉 번 했다. 어떻게 보면 진정한 정치 9단이다. 1979년 10.26 박 대통령이 서거하고 나서 가장 큰 현안은 새 대통령 선출이다. 그때 떠올리는 인물이 최규하 권한대행이고 다음이 JP다. 우리가 알기에는 5.16쿠데타는 박정희 중심의 쿠데타라고 생각을 하지만 실제로 모의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 사람은 JP를 비롯한 육사 8기생이었다. 쿠데타 계획 당시에 김종필은 책략을 담당하였다. 쿠데타의 실질적인 설계자였다. 그래서 김종필이라고 하는 사람은 쿠데타서부터 시작해서 박정희 정부 내내 중요한 브레인이었다. 국가재건최고회의 라고 하는 아이디어를 낸 사람도 그였다. 국가재건최고회의는 5.16 군사정변의 주체세력이 세운 입법, 사법, 행정 3권을 행사한 국가 최고통치기관, 국가 혁명이 아니라 국가를 재건하는 위원회를 만들어야 한다. 그 얘기를 듣고 사람들이 이건 굉장히 탁월하다. 이성계라는 사람을 리더로 내세우고 실제로 조선의 왕업을 창업하는 과정에서 설계자로서의 역할을 정도전이 했다.
④ 5.16군사정변이 일어났을 때 김종필의 나이가 35세, 박정희가 44세였다. 5.16군사정변 주도세력 평균연령이 35세, 거기서 박정희가 나이가 가장 많아서 자연스럽게 박정희가 주도하는 모습으로 비쳐졌다. 아무런 규칙이 없는 상태였기에 나이가 중요한 역할을 했다. 어떻게 보면 1인자가 되지 못했기 때문에 쿠데타의 내실에는 더 많이 기여할 수 있었다. JP가 2인자로 자리매김하면서 쿠데타의 여러가지 콘텐츠들을 많이 생산한 측면이 있다. JP는 5.16혁명 직후에 1961년 6월 10일 중앙정보부를 창설해서 스스로 초대 부장을 지낸다. 유명한 표어가 하나 있다. 중앙정보부 원훈: 우리는 陰地에서 일하고 陽地를 지양한다. 이 표어도 JP가 만들었다. 그 이후에도 계속 많은 활동을 해 나가는 데 특히 민주공화당을 창당해서 집권 이후의 시나리오를 만들고 당의 주류로 활동하면서 계보도 만들고 국회의원은 물론 국무총리까지 역임 했던 박정희 시대의 명실상부한 2인자였다. 김종필은 어록이 많고 품격이 있다. 유명한 어록 중에 자의반 타의반이 있다. 63년도 4대의혹 때문에 외유를 나가는데 1963년 4대 의혹사건은 군사정변 주체세력들이 연루된 4가지 부정부패사건 JP는 실각되어 외유를 떠났다, 이런 말도 있다, 굉장히 멋진 말인데, 정치는 허업(虛業)이다. 기업가는 열심히 노력하면 과실이 생기지만 정치는 과실이 생기면 국민에게 돌려주는 것이다 라는 멋진 말이다. 適材適所에 촌천살인 같은 말을 꽂아 놓았던 어록 제조기 이런 브레인이라면 누가 봐도 유력한 차기 대권주자다. 유신헌법에 따르면 대통령 서거 후 3개월 안에 보궐선거를 치러야 했는데 집권당인 공화당에서는 당연히 JP가 총재가 되어서 대통령 후보로 나서야 된다 라고 하는 의견이 지배적이었지만 JP가 출마하지 않았다. 최규하 후보만 단독 출마해서 대통령이 됐다. JP가 좋고 나쁘고를 떠나서 정치인으로 실망하는 부분이다. 정치는 기본적으로 타이밍을 기다리는 게 아니고 타이밍을 만들어가는 거다. 그런데 이 상황 속에서 JP가 나오지 않았다.
⑤ JP는 무려 43년 동안 정계에 있었다. 43년~ 그만큼 정치적 판단과 처세술에 있어서 뛰어났다는 얘기다. JP의 처세술 어떤 특징이 있다. JP는 박정희 정권부터 김영삼의 문민정부 김대중의 국민의 정부까지 43년 동안이나 2인자의 자리를 지켰다. 어떻게 치열한 정계에서 40년 넘게 2인자의 자리에 살아남을 수 있었을까. 그래서 준비했다. JP의 처세술~ 얼마나 유명하고 대단하면 책으로 까지 나왔나. 책명: 성공의 법칙 2등으로 살아라. 제목에서 모든 걸 말해 준다. 여기서 JP 김종필의 처세술을 분석해 소개했다. 1979년 12.12 군사반란 이후에 당시 2인자가 노태우였다. JP가 노태우에게 직접 처세술에 대한 얘기를 해주었다. 2인자는 절대로 1인자를 넘겨 보지 말아야 한다. 또 성의를 다해서 일관되게 1인자를 보좌하는 사람이라는 인상을 줘야 하고 의심받을 만한 일은 하지 말아야 한다 라는 조언을 JP가 노태우에게 해주었다. 1인자에게 순종하는 자세를 강조했다. 당시에는 총재 제도도 있고 제왕적 총재 얘기를 많이 했다. 단순히 정치 리더를 떠나서 카리스마가 있는 보스 이미지가 강했다. 때문에 지금의 정치문화와는 달리 정말 형님 동생 하는 권위적인 정치문화가 있었다.
⑥ 1인자와 싸우면 안 되는 것이 1인자는 예민하다. 그리고 1인자 주변에는 또한 1인자 측근들이 있다. 1인자의 눈 만큼이나 무서운 것이 측근들의 눈이다. 그런 걸 JP는 아주 오랫동안 2인자의 삶을 살면서 보았기 때문에 절대 싸우지 않고 또한 귀에 들어가거나 오해할 만한 행동을 하지 말라는 조언을 노태우에게 하였다고 본다. 그때 이렇게 얘기 했다고 한다. 참을 수 없는 걸 참는 게 진정한 인내다. 박정희 정부시절 2인자가 되려던 사람들이 있다. 김성곤, 김형욱, 이후락, 차지철 모두 다 몰락하거나 사라졌다. 당신이 처세를 할려면 참을 수 없는 것을 참을 줄 알아야 한다. 그런 얘기를 했다. JP의 처세 세번째를 보면, 오늘의 적만 아니면 누구와도 친구가 될 수 있다. 87년 대선 국면에 JP는 신민주공화당을 창당하고 대선 후보로 나선다. 물론 4등으로 떨어졌다. 하지만 그의 행보를 보면 그게 고스란히 드러난다. 90년대는 무슨 일이 있었다. 1990년 1월에 3당 합당! 三黨合黨은 집권 여당인 민주정의당, 야당인 통일민주당, 신민주공화당이 합당하여 민주자유당이 탄생한다. 적이었던 노태우 민주정의당, 그리고 박정희 정부 때 경쟁자였던 김영삼 통일민주당 대표와 손을 잡고 민주자유당을 창당하였다. 그리고 YS가 제14대 대통령이 되는 데 공을 세운다. 그리고 나서 무슨 일이 있었나. YS와 헤어진다. 96년 총선에서 자유민주연합, 자민련을 창당해서 충청의 맹주로 돌아갔다. 이후에 97년 대선을 앞두고 어떤 사건이 있었나. DJP 연합, 이게 한국 정치사에 가장 충격적인 사건이다. DJP 연합은 1997년 대통령 선거 당시 김대중과 김종필이 공동 여당의 목표를 가지고 결성한 연합, 가장 큰 정적이라고도 할 수 있는 DJ와 손을 잡고 국민의 정부를 출범시킨다. JP는 이렇게 누구와도 손을 잡을 수 있는 그런 처세, 그런 것을 현실정치에서 보여준 사람이었다. JP 따지고 보면 외유-칩거-은퇴와 정계복귀를 반복하면서 끝까지 권력의 중심부에서 멀어지지 않았다. 오래도록 2인자의 자리를 지켜온 JP 김종필, 대통령 빼고는 다 해본 남자 JP의 처세술 살펴봤다.
⑦ JP는 회고록에서 나는 체육관 대통령 되는 게 싫었다. 이게 반쯤 진실이라고 생각한다. JP 자신은 유신헌법을 폐기하고 민주적인 헌법을 만들어서 국민이 뽑는 대선에 본인이 나갈 계획이었다 라고 회고록에 쓰고 있다. JP의 말을 액면 그대로 믿기는 힘들다. 정치인에게 가장 중요한 것 중의 하나가 권력의지다. 정치란 때론 냉정하고 총성 없는 전쟁터와 같다. 그런 것들을 돌아가게 하고 매 번의 선거 낙선을 견딜 수 있게 하는 건 權力意志이다. 근데 JP는 지금의 정치인들이 경험하지 못했던 어떤 극한적인 상황도 많이 보았다. 이런 사람이 자기가 결심하면 대통령이 되는 데 팔부 능선을 넘는 기회가 왔는데 과연 그런 이유 때문에 출마하지 않았을까. 회고록이 중요하지만 반드시 믿지는 않는다. 왜냐면 회고록이나 증언록은 당연히 자기를 증오하고 미워하고 혹은 합리화하고 변명할 수 밖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회고록을 남기는 정치인은 훌륭하다. 자신의 주관적인 싯점에서 당시 시대를 어떻게 봤는지 자신이 경험한 정치적 사건들을 어떻게 평가했는지를 보여 주기 때문이다. 당시 주한미대사가 글라이스틴 이었다. 글라이스틴 회고록에 이런 얘기가 있다. 당시에 최규하 권한대행이 체육관 대통령으로 입후보할 때 JP도 입후보할 생각이 있었다. 그런데 최규하를 둘러싸고 있는 군고위층이 JP를 반대해서 JP가 대통령 출마결심을 철회했다. Kim Jong Pil, perhaps the strongest candidate ultimately to succeed Park, threw a monkey wrench into the works by threatening to contest Choi for the interim job. 2016년에 나온 JP 회고록에는 이런 대목에 대한 해명이 없다. 당시 10.26 이후 계엄령이 내려졌고 그리고 군부가 당시 계엄사령관이 육군대장 정승화 육참총장이었다. 당시 정치적 배후에서 실권을 행사하고 있었기 때문에 보이지 않는 손이 작용을 했을 것이다.
⑧ 군부 입장에서는 JP가 상당히 부담스러운 면이 있었다. 왜냐면 JP는 5.16의 지분을 가지고 있었고 육사 8기생과 JP가 혁명의 주체라고 생각을 했기 때문에 이 사람들은 자신들에게 기회가 와야 된다고 생각을 했다. 박정희가 지도자 이자 혁명의 동지였지만 10년 정도이면 충분하다. 이제는 우리 차례다 이런 생각이 있었다. 그래서 68년에 박정희의 3선개헌에 JP가 처음에는 굉장히 강력하게 반대하였다. 3선개헌은 1968년 박정희 정권이 정권연장을 위하여 대통령의 3선이 가능하도록 헌법을 개정한 사건, 3선개헌을 하지 않았으면 여야를 통틀어 거의 JP가 대통령이 될 가장 유력한 정치인이 아니었을까. 결국은 5.16 쿠데타를 같이 했지만 어떻게 보면 박대통령과 김종필은 서로 가고자 하는 길이 조금 다른 면이 있지 않았을까. 군사정부가 수립되고 난 다음에 1966년 정부주도 애국선열조상(彫像) 건립위원회를 만들어서 위원장을 누가 맡느냐 하면 JP가 맡았다. 처음으로 만든 게 1968년 4월 27일에 만든 이순신 동상이다. JP는 당시 덕수궁에 세종대왕 동상을 세웠다. 우리가 지금 알고 있는 덕수궁 담은 높지 않았다. 당시에는 담장이 없었다. 철책으로 투과형으로 되어 있었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다 지나다니면서 세종대왕 동상을 볼 수 있도록 만들어 놓았다. 박정희는 이순신 동상을 김종필은 세종대왕 동상을 만들었다. 한국역사에서 민족주의적 역사관들이 부흥하는 싯점이다. 위인들을 많이 발굴해서 동상을 세워서 애국심을 고취하는 사업이다. 이게 사실은 일종의 국정교과서 애국주의 그런 것이다. 역사를 예술과 결합해서 정치에 동원하는 방식이다. 박정희 대통령은 이순신 장군한테 줄을 섰고 김종필은 세종대왕한테 줄을 섰다. 이 얘기는 정치적 지향점을 드러낸 거다.
⑨ JP가 각하께서는 亂世의 英雄이 되십시오 그렇게 해놓고 세종대왕은 태평성대다. 자신의 속 마음은 治世의 히어로가 되겠다. JP는 3선개헌을 초기엔 반대했다. 결국 최종적으로는 김종필 역시 3선개헌에 찬성으로 돌아섰다. 그가 3선개헌에 찬성하면서 여러가지 풍문들이 돌았다. 박정희 대통령이 JP에게 다음 대통령 자리를 약속했다. 다음 대통령은 너다. 사실은 3선개헌이 아니었다 하더라도 JP가 대통령 되기는 상당히 어려운 면이 있었다. 왜냐면 미국의 영향력 때문이다. 60년대에 한국정치에서 미국의 힘은 지금과 전혀 달랐다. 미국이 JP에 대해서 우호적이지 않았다. JP가 젊은 시절에 좌익사상에 빠졌던 그런 성향 때문이 아닐까. 그때 당시는 미국의 지상 최대 과제는 소련과의 냉전체제경쟁 속에서 반공이었다. JP는 대학시절에 공산주의 모임에서 활동하기도 했고 가족 중에서도 공산주의에 협력했던 분들도 있다. 특히 JP 장인 어른이시자 박정희의 형인 박상희 선생이 공산주의 성향이 있었다. 그리고 북한에서 무역상 부상(남한의 차관급)까지 지낸 황태성씨와도 절친한 사이였다. 물론 젊었을 때 한 때였지만 이런 것까지 미국이 염두에 두고 연구하지 않았을까.
⑩ 미국은 처음에 박정희나 김종필이 좌익경력이 있다는 점을 굉장히 우려했다. 당시 주한미국 대사관 근무 그레고리 헨더슨이 보고서를 썼는데 5.16 혁명의 주체라고 하는 사람들이 좌익 경력자들이 굉장히 많다고 우려를 했다. 박정희 정부가 쿠데타 이후 제일 먼저 내세운 건 반공이었다. 한국의 반공노선에 미국이 안심을 하게 된다. 5.16 이후에 JP가 미국과의 갈등을 많이 겪게 된다. 4대 의혹사건으로 자금을 마련해서 공화당을 사전에 조직했다. 한편으로는 경제개발 5개년계획을 수립하는 데 경제개발 5개년 계획(1962~1986)은 국가경제발전을 목적으로 5년 단위로 짜여 추진된 경제계획, 처음에는 수출 주도형이 아니었다. 통화개혁을 통해서 내자를 동원하는 통화개혁(1962)은 미국과 사전 협의 없이 화폐 단위를 10분의 1로 절하해 신 원화 발행해 경제개발계획을 하겠다. 미국이 바라볼 때는 저건 비현실적인데 저건 사회주의적인데 라고 생각을 했었다. 그래서 미국의 입장으로 볼 때는 이런 정책을 추구하는 핵심에 누가 있느냐 김종필이다. 그래서 JP가 중정을 만들고 공화당을 만들어서 박정희가 63년도에 민정이양을 해서 대통령이 되는데 1등 공신이었지만 JP의 권력이 너무 강해졌고 미국의 말을 안 듣는다고 했다. 권력 내부에서도 JP에 대한 반대세력이 커지고 있었다. 즉 박정희 라고 하는 인물을 제거할 수는 없다. 그런데 2인자인 JP는 누구나 다 미워할 수 있는 존재가 되었다. 미국도 미워하게 됐고 박정희를 따르는 군부 내의 오비를 중심으로 제는 큰일낼 인물이야 그러니 박정희도 자신의 사랑하는 처조카이자 혁명동지이지만 김종필을 잘라 버려야 했다.
⑪ 1979.12.6. 박정희 대통령 서거 후 장충체육관에서 제10대 대통령 선거가 치러진다. 단독 출마한 최규하 권한대행이 96.6%의 득표율로 제10대 대통령이 된다. 그로부터 6일 뒤인 1979년 12월 12일 예기치 못한 사건이 발생한다. 전두환 노태우를 중심으로 한 신군부 세력이 계엄사령관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을 체포하며 군사반란을 일으킨 것이다. 이로써 최규하 정권은 무력해 지고 전두환과 신군부는 실질적인 권력을 손에 넣게 된다. 18년 전에 본인이 박정희 대통령과 군사 쿠데타를 일으켰는데 그와 똑 같은 상황이 지금 JP를 향해서 눈 앞에 펼쳐지고 있다. JP가 육사 중에서 사랑받는 8기 출신인데 전두환은 11기 후배다. 육사 11기는 좀 특이했다. 이전 과는 달랐는데 미국 웨스트포인트 과정을 모방해서 만든 정규과정이다. 4년제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한다. 육사 8기는 3~6개월의 단기교육을 받고 임관했다. 왜냐면 미군정 끝나고 장교요원들이 필요하니까 속성으로 충원하던 시절이다. 육사 11기는 간단하다. 우리가 정통이고 정규과정 첫 육사 기수다. 프라이드가 있었다. 그렇지만 8기는 또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우리가 소대장 중대장으로 6.25전쟁에 참전해 나라를 지켰다. 참전 용사~ 나라를 지키고 목숨을 바친 건 우리들이다. 육사 한 기수가 약 200~250명인데 육사 8기는 1300명이었다. 그 중에서 300명 넘는 사람들이 전사했다. 남은 사람들이 한국군의 주요직을 차지했고 이 분들이 60년 5.16쿠데타의 핵심이었다.
⑫ 당연히 18년이 지나는 동안에 상황이 바뀌게 된다. JP가 5.16에 참가하게 된 동기는 59년, 60년에 34, 35세이었는데 중령이었다. 한국군 최초로 별 넷을 단 분이 백선엽 장군이다. 나이가 33살이다. 1953년 1월에 33세에 four star를 달았다. 1년 뒤에 1954년에 정일권, 이형근 두 분이 four star가 되었는데 나이가 37, 34세였다. 그러니까 말이 안 되는 거다. 그래서 1960년에 JP가 한 일이 부정선거에 가담한 중장급 이상 장성들 다 물러나야 한다. 整軍運動이다. 1960년 국군 내 하급장교들이 부정부패 및 과거사 청산을 빌미로 중장급 이상 장성들의 퇴진을 요구한 정군운동을 했다. 그러니까 군혁신의 아이콘이 JP고, 그래서 육사 8기를 중심으로 혁명을 한다고 했는데 18년이 지나고 보니까 그 JP가 정군운동의 대상이 되어 버렸다. JP는 전두환이 누군지도 잘 몰랐다. 게다가 박정희 대통령이 직접 군을 장악했기 때문에 쿠데타 이후에 JP는 군과 이렇다 할 연결고리가 없었다. 만약에 5.16이 형이라면 12.12는 아주 못된 동생이다 라는 식의 얘기를 한다. JP가 머리가 비상하고 통찰이 있다는 얘기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인 역시 칼로 흥한 자는 칼로 망한다 라는 걸 본인에게는 해당도 되지 않았다 라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결국 자기는 예외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보편적인 심리가 있지 않았을까.
⑬ 신군부 입장에서는 김종필은 부담스러운 존재다. 육사 선배에 집권 여당인 공화당 실세, 차기 대권주자에 있고 지금 신군부가 가만히 놔둘 수 있는 사람이 아니다. 하지만 정치에서 서열은 두 가지 뿐이다. 실세와 허세, 실세는 신군부로 넘어갔고 JP는 허세다. 1980년 5월 17일 이후에 신군부에서 JP와 이후락 두 사람을 부른다. 두 사람은 중정부장을 지냈고 박정희 정권의 가장 중요한 두 인사를 부정축재로 지목을 한다. -----金鍾泌 216億 李厚洛 194億 李世鎬 111億 金振晩 103億 金鍾洛 92億 朴鍾圭 77億---- 신군부에서 김종필 재단을 몰수한다. 액수가 어마어마 하다, 1980년 기준으로 213억 4천여 만원을 강제로 헌납한다. 월급 100만원 받는 사람들이 먹지도 쓰지도 않고 2000년을 모아야 하는 금액이다. 1980년 7월 신군부가 JP를 보안사 서빙고 분실로 끌고가서 46일간 구금했다. JP와 이후락 둘 다 잡으려고 했는데 이후락은 미국으로서 돌아오지 않았다. 이후락한테 얘기했다. 너 들어와서 JP에 대한 못된 말을 해주면 봐줄께 이후락이 들어온다. JP의 부정축재에 대해서 증언해 주면 봐주겠다. 결국은 JP가 권력형 부정축재혐의 1위가 됐다. 그리고 사회소요 불안 내란음모는 DJ가 지게 되었다. JP와 DJ가 이 시기에 부종축재의 원흉 사회불안의 원흉으로 등장을 하게 된다. JP의 호가 雲庭이다. 구름 속의 정원이라는 뜻이다. 운정 장학재단을 만들어서 제주에 있는 감귤농장, 서산삼화목장을 재단에 헌납했는데 자기가 기부한 장학재단 돈까지 모두 포함하고 공화당의 정치자금까지 포함해서 부정축재자로 만들었다 라고 회고록에서 쓰고 있다.
⑭ JP가 유명한 말을 남긴다. 春來不似春 봄은 왔으나 아직 봄이 아니다. 결국 JP는 1980년 9월 정계에서 은퇴를 하게 된다. 1987년 정계 복귀한다. JP가 1980.12에 그린 그림이다. 5.17로 몇 달 동안 바깥 세상과 차단되어 살아야 했었다. 설악산에 갔다. 산은 생명력을 잃지 않고 의연했다 라고 쓰고 있다. 그러니까 증오와 고통을 예술로 승화시키는 그런 기간이었다. 자신의 처지를 저렇게 휜 눈이 쌓여있는 설악산에 비유한 것이다. JP는 5.16 이후에 유명한 예그린 악단을 만들어서 우리나라 최초의 일종의 뮤지컬 같은 걸 했다. 예그린 악단은 1961년 김종필의 주도로 창단된 국내 최초 종합음악예술단체, 만들린도 했다. 검도 2단에 승마와 골프도 잘 했다고 한다. 그림이 또 하나 있다. 그림 제목: 주먹, 1984년 7월에 그린 그림이다. 힘을 수반하지 못한 정의(正義)는 무기력하고 정의를 수반하지 못한 힘은 폭력(暴力)일 뿐이다. 파스칼이 갈파했다. JP는 영원한 적도 동지도 없다고 말했다. 전두환과는 관계가 안 좋았다. 주먹 그림을 보고 이건 전두환을 향한 분노였구나. 끝까지 화해하지 않았다. JP는 90세에 많은 기자들이 와서 생일잔치를 하였는데 그때 이렇게 얘기했다. “구십이 되었는데도 미운 사람이 한 명 있다”. 한 명이 전두환이구나 다들 그렇게 알아들었다고 한다. 주먹 하나를 그렸는데 (JP) 힘이 없는 정의는 무기력하다 라고 표현하면서 (신군부) 그런데 정의를 수반하지 못한 힘은 폭력이다 라고 하나의 주먹으로 둘의 정반대 되는 마음을 표현하였다. 사실 전두환 때문에 저런 돌덩이 같은 주먹을 가슴에 안고 사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는데 김종필도 그 많은 사람들 중의 한 사람이었다.
⑮ JP의 인생을 통해서 대한민국 현대사를 총망라하였다. 거인의 어떤 모습이 엿보이는 이면에는 또 어쩔 수 없는 군사정변의 핵심이라고 하는 부분과 유신이라고 하는 엄혹한 시대의 실세 총리를 했었다고 하는 꼬리표가 끝까지 따라다닌다. 그것으로부터 우리가 자유로움을 주어서는 안 된다. 하지만 JP는 말을 품위있게 잘 한다. 정치인의 말들이 시정잡배들의 말들을 닮아가고 있다. 엄혹하고 치열한 정치 전쟁터에서 항상 미소지으며 선문답 이지만 뼈를 때리는 일갈을 했던 JP의 말만큼은 현대 정치인들이 배워야 한다. JP가 자신이 유신 잔당이 아니라 유신 본당이라고 했을 때 본심이 있었다. 5.16과 박정희에 대한 진심이었다. 그렇지만 87년 정계복귀 이후에 JP는 김영삼과 김대중 두 사람을 대통령으로 만드는데 중요한 공로를 했다. 한국이 민주화 되는 과정에서 타협적 점진적인 경로로 진행되는데 기여한 공로는 분명히 있다. JP 김종필은 대한민국 현대사 그 자체이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