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논 / 복향옥
집에서 읍내로 내려가다 보면 많은 논밭을 지난다. 충청도 시골에서 태어나 20년 가까이 살았고 지금은 광양 산골에서 그와 비슷한 세월을 살고 있지만, 밭에서 나는 작물들이 여전히 낯설다. 그런 것에 상관없이 시골 풍경은 언제나 마음을 환하게 한다. 가을 중간을 지나는 요즘은 더 그렇다. 집을 나서자마자 만나는 감나무 밭은 한마디로 황홀지경이다. 이른 아침이나 어둑해지는 저녁 무렵이면 언뜻 빨간 등처럼 보이고, 낮에는 꽃 같다. 조금 더 내려가면 무, 배추, 쪽파, 갓들로 밭이 가득 차 있다. 곧 김장철이라는 얘기다. 지금은 빈 나무만 있지만, 복분자 밭도 있다. 옥수수나 수수, 도라지, 토란은 열매와 상관없이 관상용으로도 좋겠다는 생각을 가끔 한다. 아무튼, 계절마다 종자를 달리해가며 밭을 일구는 사람들이 존경스럽다.
그렇게 두리번거리며 내려가다 보면, 넓게 펼쳐진 논을 만난다. 열댓 마지기쯤 되려나. 그곳을 지날 때마다 불쑥불쑥 아버지가 생각난다. 텅 빈 겨울철에는 그런 일이 없다가 추위가 물러가고 모내기할 즈음이 되면 그때부터 아버지가 겹쳐 오른다. 논에 물이 가득하거나 모내기하려고 논을 갈아놨거나 모내기를 마쳤거나, 또 곡식이 익어갈 때나 벼 베기가 끝났거나 볏짚들만 나란히 누웠거나. 일하는 사람이 보이지 않아도 아버지 그림자는 항상 거기 있다.
그곳에서 아버지를 떠올리게 된 건 광양으로 이사 온 지 얼마 되지 않은 봄날이었다. 너른 논에 물이 가득했다. 물속에 서서 삽으로 논둑을 두드리는 이가 눈에 들어왔다. 크지도 작지도 않은 키에 살찌지도 야위지도 않은 몸집이었다. 지나치면서 설핏 보는데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하얀 머리칼과 금테 안경이 친정아버지를 닮아 있었다.
논에서 일하는 아버지를 떠올릴만한 기억은 많지 않다. 직업이 두 개였던 아버지는 이른 아침이나 땅거미 지는 저녁에만 논을 돌봤다. 농사 대부분은 일꾼들의 몫이었다. 밥상 차리던 엄마가 “아버지, 진지 드시라고 해라.” 하면, 집 앞 채마밭을 지나 층층이 계단을 이룬 논들 끝에 점처럼 박혀있는 아버지를 불렀다. 입에 손나발을 만들어 “아버지! 진지 드셔유!” 하고 두어 번 길게 소리쳐 부르면 아버지는 대답 대신 손을 흔들었다. 그처럼 내 기억 속, 논을 배경으로 한 아버지는 언제나 혼자였다.
낮에 아버지는 학교에서 일했다. 학교에서 만난 아버지한테 나는 아버지라 불러본 적이 거의 없는 것 같다. 아버지가 교장 선생님이란 걸 알면 친구들이 나를 불편하게 여길 것 같았다. 적어도 우리 동네에선 그랬다. 다른 집에는 자주 들락거리는 친구들도 우리 집에는 오지 않았다. 아버지를 맘 놓고 부르지 못한 이유가 또 있다. 교장 선생님답게 좀 품위 있게 옷을 입으면 좋겠는데 후줄근한 차림일 때가 많았다. 소사(학교 시설을 관리하며 소소한 일을 돕는 직원을 당시에는 그렇게 불렀다) 아저씨가 따로 있는데도 아버지는 언제나 그와 함께 일했다. 한번은 사다리 위에서 복도 천장 전선을 만지고 있었다. 복도를 지나는 아이들이 있어 그냥 가려다 무심코 올려다봤다. 아뿔싸. 까만 바지 가랑 사이로 하얀 속옷이 보였다. 누가 볼세라, 들을세라 속삭이듯 소리쳤다. “저기유!” 아버지가 내려다봤다. “바지 터졌슈.” 애타는 내 마음은 아랑곳하지 않고 아버지는 무심하게 “괜찮여.” 하고는 하던 일을 계속했다. 그런 아버지가 얼마나 야속하고 창피했는지 모른다.
내 눈에만 교장 선생님으로 안 보인 게 아니었다. 전학 온 친구가 운동장 주변 향나무들을 전정하고 있는 아버지와 소사 아저씨를 보더니, 이 학교는 일하는 아저씨들이 많은가 보라고 했다. 그렇듯 따로 설명하지 않으면 열이면 열, 아버지를 소사 아저씨로 생각했다. 어떤 날에는 작업복 차림 그대로 퇴근해서 논을 다 돌아보고 나서야 귀가하기도 했다. 양복 입은 아버지를 보는 건 출퇴근할 때나 전체 조회시간, 그리고 가끔 자전거 타고 읍내 교육청에 가실 때뿐이었다.
어느 날 문득, 논에 물꼬 대던 아버지가 떠오르면서 마음이 따듯해졌다. 아버지는 계곡에서 도랑을 거쳐 논으로 흘러가는 물 가운데에 돌무더기를 만들어 물줄기를 나누고 있었다. 한 줄기는 우리 논으로, 다른 한 줄기는 아래에 있는 다른 사람 논으로 가게 한 것이다. 아래 논 임자가 자기 논에 물 대느라 우리 물꼬를 막았더라며 걱정하시던 게 며칠 전이었다. 아버지는 그런 사람이었다. 시시콜콜 말하지 않았지만, 누군가를 위해 일하는 걸 좋아했다. 말은 어쩔 수 없이 나눠주는 것처럼 했어도 이웃에게 베푸는 걸 마다한 적이 없던, 따듯한 사람이었다.
첫댓글 논에 물 대러 새벽같이 나가던 제 아버지도 같이 그려지네요.
두 곳으로 논물을 대는 따뜻한 아버님 맞네요.
선생님이 아버지 닮아서 그렇게 나누기를 좋아하시는군요.
할머니도, 고라니도 지나치지 못하고요.
따뜻한 복 선생님, 힘내세요.
교장이라는 직위에 있으면서 일꾼처럼 학교일을 돌보는 건
아무나 할 수 없어요. 아버지가 훌륭한 분이네요.
아버지를 그리워하는 선생님이 잔잔하게 그려집니다. 따듯한 글,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