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전법륜경
(初轉法輪經, The Dhammacakkappavattana Sutta)
1. 사슴동산에서
"Evam me suttam — Ekam samayam Bhagavā Bārānasiyam viharati Isipatane Migadāye. Tatra kho Bhagavā pañcavaggiye bhikkhū āmantesi:"
"Thus have I heard — At one time the Blessed one was staying at the deer park in the Sage's Grove. Then the Blessed one addressed the group of five ascetics:"
이렇게 나는 들었다. 어느 때 세존께서는 와라나시 근처의 이시빠따나의 사슴동산에 계셨다. 거기서 세존께서는 다섯 비구에게 말씀하셨다.
2. 두 가지 극단에 대하여
"Dveme, bhikkhave, antā pabbajitena na sevitabbā. Katame dve? Yo cāyam kāmesu kāmasukhallikānuyogo hīno gammo pothujjaniko anariyo anatthasamhito, yo cāyam attakilamathānuyogo dukkho anariyo anatthasamhito. Ete kho, bhikkhave, ubho ante anupagamma majjhimā patipadāTathāgatena abhisambuddhā cakkhukarani ñānakarani upasamāya abhiññāya sambodhāya nibbānāya samvattati."
"These two extremes, monks, should not be followed by one gone forth. Which two? Sensual indulgence, which is low, vulgar, worldly, ignoble, and unprofitable; and self-mortification, which is painful, ignoble, and unprofitable. Avoiding these two extremes, monks, the Tathāgata has discovered the Middle Path that produces vision and knowledge, and leads to tranquillity, higher knowledge, enlightenment, and nibbāna."
“비구들이여, 출가자가 따라서는 안되는 두 가지 극단이 있다. 그것은 저열하고 통속적이고 범속하고 성스럽지 못하고 이익을 주지 못하는 감각적 욕망에 대한 쾌락의 탐닉에 몰두하는 것이며, 괴롭고 성스럽지 못하고 이익을 주지 못하는 자기 학대에 몰두하는 것이다. 비구들이여, 이러한 두 가지 극단을 따르지 않고 여래는 중도를 완전하게 깨달았나니, 이 중도는 눈을 만들고, 지혜를 만들며, 고요함과 높은 지혜와 바른 깨달음과 열반으로 인도한다."
3. 중도와 팔정도에 대하여
"Katamā ca sā, bhikkhave, majjhimā patipadā Tathāgatena abhisambuddhā cakkhukaranī ñānakaranīupasamāya abhiññāya sambodhāya nibbānāya samvattati? Ayameva ariyo atthangiko maggo, seyyathidam: sammāditthi sammāsankappo sammāvācā sammākammanto sammā-ājīvo sammāvāyāmo sammāsati sammāsamādhi. Ayam kho sā, bhikkhave, majjhimā patipadā Tathāgatena abhisambuddhācakkhukaranī ñānakaranī upasamāya abhiññāya sambodhāya nibbānāya samvattati."
"And what, monks, is the Middle Path that produces vision and knowledge, and leads to tranquillity, higher knowledge, enlightenment, and nibbāna? It is this noble eightfold path itself, namely: right view, right thought, right speech, right action, right livelihood, right effort, right mindfulness, and right concentration. The Tathāgata, monks, has discovered the Middle Path that produces vision and knowledge, and leads to tranquillity, higher knowledge, enlightenment, and nibbāna."
비구들이여, 그러면 어떤 것이 여래가 완전하게 깨달았으며, 눈을 만들고, 지혜를 만들며, 고요함과 높은 지혜와 바른 깨달음과 열반으로 인도하는 중도인가? 그것은 바로 성스러운 팔정도(八正道)로 바른 견해[正見], 바른 사유[正思惟], 바른 말[正語], 바른 행동[正業], 바른 생계[正命], 바른 정진[正精進], 바른 알아차림[正念], 바른 집중[正定]이다.” 비구들이여, 여래는 참으로 이 중도를 통하여 완전하게 깨달았으며, 눈을 만들고, 지혜를 만들며, 고요함과 높은 지혜와 바른 깨달음과 열반을 얻었다.
위 초전법륜경에서 첫번째로 오비구에게 언급된 중도는 고락중도라고 이해하고 있습니다.
고락중도를 오비구에게 다시 풀어서 설명한 것이 팔정도라고 이해하며
오늘은 고락중도를 가지고 함 이야기해보고자 합니다.
"이러한 두 가지 극단을 따르지 않고 여래는 중도를 완전하게 깨달았나니, 이 중도는 눈을 만들고, 지혜를 만들며, 고요함과 높은 지혜와 바른 깨달음과 열반으로 인도한다."라고 언급된 부분을 먼저 살펴보면
영어번역에선 중도를 발견했다고 하고 있습니다. 한글 번역에선 완전하게 깨달았나니 라고 하고 있습니다. 영어번역이 맞고 한글번역이 틀리다 라는 것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번역의 과정을 거치다 보면 원어의 원뜻을 제대로 번역할 수 없을 수도 있다는 것을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우리나라 시와 소설 중 뛰어난 작품이 많지만
그 맛을 살려 타 언어로 번역하기가 그렇게 쉽지 않다고 합니다.
특히 우리에게만 있는 용어 "거시기"와 같은 것은 번역하기 정말 쉽지 않을 것입니다.
아무튼 번역의 과정을 거치게 되면 원뜻 그대로 100% 번역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하여 번역된 것을 접한 우리는 원뜻이 뭘까 하고 머리를 굴리게 되고 그래서 해석이 또 난무하게 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위에서 오비구에 이야기한 두 극단은 고와 락을 의미하며
초전법륜경에선 그것을 길게 풀어 이야기한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줄여 표현하면 고락중도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한글번역에선 고락중도를 완전히 깨달았다고 하고 있으며
영어번역에선 고락중도를 발견했다고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위에 언급된 초전법륜경 후반부에서 "여래는 참으로 이 중도를 통하여 완전하게 깨달았으며, 눈을 만들고, 지혜를 만들며, 고요함과 높은 지혜와 바른 깨달음과 열반을 얻었다." 라고 되어 있는데 영어번역에선 여전히 중도를 발견했다고 하고 있습니다.
한글번역이 아닌 영어번역으로 옮겨 보면
"여래는 참으로 이 중도를 발견하게 되었으며 그 중도로 인해 눈이 만들어지고 지혜가 만들어지며 고요함과 높은 지혜와 바른 깨달음과 열반을 얻게 되었다"라고 할 수 있게 됩니다.
즉 영어번역에서 중도를 여래가 발견하고 그 중도를 통해 여래는 바른 깨달음과 열반을 얻게 된다고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제가 지금까지 공부한 것을 통해 볼 때
한글번역 보다 영어번역이 더 적절하다 생각됩니다
물론 다른 분들은 한글번역이 영어번역 보다 더 적절하다고 생각될 수 있을 것입니다.
다시 고락중도로 돌아가서 생각해 보면
고도 아니고 락도 아닌 중도를 발견했다고 하셨는데(영어번역을 참고했을 때)
그렇다고 할 때 이때의 중도는 깨달음이 아닌 어떤 경험을 이야기한다고 유추할 수 있습니다.
(물론 이 중도는 유추할 수 있지만 실상 경험하는 것은 또 별개입니다.)
그리고 고도 아니고 락도 아닌 중도의 상태에 있게 되면
고를 억누려고 하지 않게 되고 락을 추구하지도 않게 되면서
바로 그런 순간의 경험을 통해 그것이 자신이 노력하여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닌
저절로 그렇게 되는 것임을 알게 됨을 자각하게 됩니다.
이러한 중도는 머리로 유추할 수 있지만 경험으로 이해되지 않으면
확연하게 알 수 있는 것이 아니기에
제가 여기서 말을 많이 보태면 오히려 헷갈리게 할 수도 있어 이만 줄입니다.
중도를 깨달음이라고 생각하는 분들이 혹 있다면
함 생각해 볼 수 있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첫댓글 늘 고맙습니다
수행자는 육체의 통증도 극복되어질 수 있는 것이라 보시는지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위 댓글은 님의 댓글을 보고 올라온 그 순간의 생각입니다.
아래 댓글은 조금 시간 지나 올라온 생각입니다.
'그 수행자가 어떤 수행을 하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생각됩니다.
그리고 수행의 과정 중에는 수많은 것들이 오고 가는 것이라서
일괄적으로 이렇다 저렇다 이야기할 수 없다 생각됩니다. '
저렇게 바뀐 부분을 올린 것은
생각은 수시로 바뀔 수 있음을 저도 혹 이 글을 읽는 분들도 알게 되었으면 하여.
중도를 통해서 깨달음으로 가겠죠.
유레카를 외치던 때의 두뇌의 상태가 중도의 상태이겠죠. 우리는 누구나 유레카를 외칠때가 있지 않습니까?
이러한 상태를 언제나 유지할수있고 거기다 운까지 좋다면 깨달음을 얻기도 하겠죠.
그러한 중도는 고와 락을 완전히 이해한다면 저절로 갈수있기에
중도는 고와 락을 통해서 갈 수 있는 곳이 되겠네요.
고와 락은 비유적인 표현이고 이것을 고통이나 쾌락으로 이해하면 안되겠죠.
고와 락은 사고의 패턴을 의미하는 것이죠. 그냥 우리들의 일상적인 사고의 패턴말입니다.
물론 일상적인 사고의 패턴속에서 결국에는 고이던 락이던 고통으로 결말이 나는것이긴 하지만 말입니다.
고락중도는
감각적 욕망이 올라올 때 감각적 욕망과 자신을 동일시 하거나 아니면 억누르려 하는 대신
감각적 욕망이 올라올 경우 올라오는 것이 알아질 때를 의미합니다.
그러할 때 감감적 욕망과 자신을 동일시 하지 않을 수 있는 여지가 생기게 됩니다.
하여
이는 삶에서 경험하여 스스로 해 보면 누구나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상태를 유지하고자 해도 유지될 수 있는 것은 아니기에
되어지는 대로 이며
혹 감각적 욕망과 자신을 동일시 하여 감각적 욕망을 추구하게 되면
그러한 상황에서도 다시 자신이 감각적 욕망을 추구하고 있구나 하고 알아지면
역시 중도의 상태라 할 수 있다 봅니다.
@달리다굼 감각적 욕망이 올라올 때 감각적 욕망과 자신을 동일시 하거나 아니면 억누르려 하는 대신
감각적 욕망이 올라올 경우 올라오는 것이 알아질 때를 의미합니다.
이렇게 말씀하셨는데 이부분은 정말 감동이네요 ^^
@올빼미 감동된 만큼 그렇게 되어지길 바랍니다.
통증을 관찰한다면 폭넓은 의미의 극복도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진통제를 통해서 통증을 잊으려 하죠. 심리적으로는 쾌락이 진통제의 역할을 하죠.
진통제가 나쁘다는 말은 아닙니다. 꼭 진통제가 필요한 경우도 있겠죠.
삭제된 댓글 입니다.
아는 것을 알려주세요.
바이러스를 이길 수 있는 방법 공유하면 어떤 분들은 함 해볼 수 있어 그 나름 도움될 것도 같네요.
혹 쉬운 방법 알고 있으면
알려주세요.
아즉 많이 모르기에
저러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게 되면
질색 보다
안타까운 반응이 올라오지 싶기도 ...
깨달음이란 ?
배우고 경험하고 수양도하고 하면서 자기스스로 알아 차리는것을 깨달음이라 하는것이고
중도가 어떤 것인가을 자기스스로 알고있다는것을의미한다
발견이란?
연구을 하든 실험을 하든 무었을하든 행운이 있어 없는것을 찾았다는것이다
어떤것이 중도인지 있다는것을 노력을 해서 찾았다는것을 의미한다
그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초전법륜경에서 영어번역을 보면 중도를 발견했다고 번역됩니다. 빨리어 원문을 영역한 것이 맞는지 한역한 것이 맞는지 그런 것은 제외하더라도
발견이란 이미 있는 것을 알게 된 것이란 의미도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