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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1009. 연중 제27주간 금요일. 묵상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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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독서<믿음으로 사는 이들은 믿음의 사람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습니다.>(갈라3,7-14)
형제 여러분, 7 믿음으로 사는 이들이 바로 아브라함의 자손임을 알아야 합니다. 8 성경은 하느님께서 다른 민족들을 믿음으로 의롭게 하신다는 것을 내다보고, “모든 민족들이 네 안에서 복을 받을 것이다.” 하는 기쁜 소식을 아브라함에게 미리 전해 주었습니다. 9 그러므로 믿음으로 사는 이들은 믿음의 사람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습니다. 10 율법에 따른 행위에 의지하는 자들은 다 저주 아래 있습니다. “율법서에 기록된 모든 것을 한결같이 실천하지 않는 자는 모두 저주를 받는다.”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11 그러니 하느님 앞에서는 아무도 율법으로 의롭게 되지 못한다는 것이 분명합니다. “의로운 이는 믿음으로 살 것이다.” 하였기 때문입니다. 12 율법은 믿음과는 관련이 없습니다. “그 규정들을 실천하는 이는 그것들로 살” 따름입니다. 13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스스로 저주받은 몸이 되시어, 우리를 율법의 저주에서 속량해 주셨습니다. 성경에 “나무에 매달린 사람은 모두 저주받은 자다.”라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14 그리하여 아브라함에게 약속된 복이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다른 민족들에게 이르러, 우리가 약속된 성령을 믿음으로 받게 되었습니다. 복음<하느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와 있다.>(루카11,15-26)
예수님께서 벙어리 마귀를 쫓아내셨는데, 군중 15 가운데 몇 사람은, “저자는 마귀 우두머리 베엘제불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 하고 말하였다. 16 다른 사람들은 예수님을 시험하느라고, 하늘에서 내려오는 표징을 그분께 요구하기도 하였다. 17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생각을 아시고 이렇게 말씀하셨다. “어느 나라든지 서로 갈라서면 망하고 집들도 무너진다. 18 사탄도 서로 갈라서면 그의 나라가 어떻게 버티어 내겠느냐? 그런데도 너희는 내가 베엘제불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고 말한다. 19 내가 만일 베엘제불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면, 너희의 아들들은 누구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는 말이냐? 그러니 바로 그들이 너희의 재판관이 될 것이다. 20 그러나 내가 하느님의 손가락으로 마귀들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느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와 있는 것이다. 21 힘센 자가 완전히 무장하고 자기 저택을 지키면 그의 재산은 안전하다. 22 그러나 더 힘센 자가 덤벼들어 그를 이기면, 그자는 그가 의지하던 무장을 빼앗고 저희끼리 전리품을 나눈다. 23 내 편에 서지 않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고, 나와 함께 모아들이지 않는 자는 흩어 버리는 자다. 24 더러운 영이 사람에게서 나가면, 쉴 데를 찾아 물 없는 곳을 돌아다니지만 찾지 못한다. 그때에 그는 ‘내가 나온 집으로 돌아가야지.’ 하고 말한다. 25 그러고는 가서 그 집이 말끔히 치워지고 정돈되어 있는 것을 보게 된다. 26 그러면 다시 나와, 자기보다 더 악한 영 일곱을 데리고 그 집에 들어가 자리를 잡는다. 그리하여 그 사람의 끝이 처음보다 더 나빠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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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1009. 연중 제27주간 금요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http://www.ofmkorea.org/ofmhomily/586116 2026.10.08 21:41 2026년 10월 9일 금요일 아니마또레 평화기도 학교 말씀 기도
✝️ 오늘의 복음 말씀 묵상 ✝️
루카 11,15-26
‘하느님의 손가락’ ― 아름다운 표현입니다. 일찍이 이집트에서 파라오의 요술사들조차 모세의 기적 앞에서 “이는 하느님의 손가락이다” 하고 인정했습니다. 그리고 마태오 복음은 같은 자리에서 ‘하느님의 영(성령)’이라 씁니다. 곧 ‘하느님의 손가락’은 ‘성령’이십니다. 어제 “아버지께서 청하는 이들에게 성령을 주신다” 하셨는데, 오늘 그 성령께서 악을 몰아내고 하느님 나라를 여시는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저 멀리가 아니라, ‘이미 우리에게 와 있습니다.’
그런데 복음은 서늘한 경고로 끝맺습니다. 더러운 영이 나갔다가 돌아와 보니, 그 집이 ‘말끔히 치워지고 정돈되어’ 있었습니다. 깨끗한데 ‘비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자 그는 더 악한 영 일곱을 데리고 들어와 자리를 잡습니다. 무서운 진실이 여기 있습니다. 악을 몰아내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그 자리를 ‘그리스도로 채우지’ 않으면, 더 나쁜 것이 그 빈자리를 차지합니다.
성 아우구스티노가 긴 방황 끝에 깨달은 것도 이것입니다. 우리 마음은 하느님으로 채워지기 전에는 쉬지 못합니다. 헛된 것을 비운 자리에 하느님을 모시지 않으면, 그 자리에 또 다른 우상이 들어섭니다. (지혜서 14장도 바로 그 ‘우상’을 경고합니다.)
영적 열매 성월의 눈으로 보면 여기서 ‘절제’의 참뜻이 드러납니다. 절제는 ‘끊고 비우는 것’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술을 끊고, 욕심을 줄이고, 소비를 아껴도 그 빈자리를 사랑과 기도로 채우지 않으면 오래가지 못합니다. 참된 절제는 ‘더 좋은 것으로 채우는 자유’입니다. 그리고 그 채움은 우리 힘이 아니라 ‘하느님의 손가락(성령)’께서 이루십니다.
오늘 우리는 조용히 묻습니다. 나는 남의 좋은 일에 ‘거짓말 한마디’를 섞고 있지 않은가? 나는 하느님의 손가락(성령)의 일하심을 알아보는가? 나는 비우기만 하고 ‘채우기’를 잊지 않는가? 내 마음의 빈자리에 무엇이 들어와 앉아 있는가?
주님, 좋은 일을 비방으로 흐리지 않게 하소서. 당신의 손가락(성령)께서 제 안의 악을 몰아내시고, 그 빈자리를 당신 사랑으로 가득 채워 주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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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1009. 연중 제27주간 금요일.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CAC 매일묵상 https://cafe.naver.com/f-e/cafes/30893450/articles/3282?referrerAllArticles=true 하느님의 숨 2026.10.08. 21:29
모든 피조물과 함께 드리는 기도
CAC(Center for Action and Contemplation)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호명환 번역)
우리는 가장 단순한 것들을 사랑함으로써, 점차 하느님을 사랑하는 데에 이르게 됩니다.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프란치스코와 자연의 세계 모든 피조물과 함께 드리는 기도 2026년 10월 8일 목요일 예술가의 모든 작품 안에서 그는 참된 "예술가"이신 하느님을 찬미하였고, 피조물 안에서 발견한 모든 것을 창조주께 돌려드렸습니다. - 토마스 첼라노, 프란치스코의 전기 리처드 신부는 프란치스코와 보나벤투라가 어떻게 해서 자연 세계를, 우리가 하느님을 증언하고 사랑하는 법을 배우는 자리로 인식하였는지를 성찰합니다: 성 보나벤투라(1221–1274)는 하느님을 사랑하는 데에 이르기 위해서는 먼저 가장 겸손하고 단순한 것들을 사랑하는 데서 시작하여 점차 그 길을 오를 수 있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는 이렇게 썼습니다. "우리의 첫 걸음을 오름길의 가장 낮은 자리에서 내딛읍시다. 온 물질 세계를 하나의 거울로 우리 앞에 두어, 이를 통해 지극한 장인(至工-지고)이신 하느님께 나아가도록 합시다." 그리고 또 이어서 말했습니다. "창조주의 지극한 권능과 지혜와 자애는 모든 피조물 안에서 빛을 발합니다" [1] 결국 우리는 모든 것을 사랑하게 되거나, 아니면 그 어떤 것도 참되게 사랑한다고 말할 수 없게 됩니다. 이러한 하나의 사랑과 하나의 아름다움은 많은 중세 신학자들과 사상가들에 의해 "존재의 위대한 사슬(Great Chain of Being)"이라 불렸습니다. 그 메시지는, 만일 우리가 그 사슬의 어느 한 고리 안에서도 하느님의 현존을 알아보지 못한다면, 온 성스러운 우주가 무너질 것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창조—행성이나 식물, 혹은 판다와 같은 모든 피조물—는 성경 속 인간의 이야기를 위한 단순한 준비 단계가 아니었습니다. 창조는 자연 세계 자체가 이미 선하고 충분한 이야기이며, 우리가 겸손과 사랑으로 바라볼 수만 있다면 그 자체로 하느님을 드러내 줍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것을 알아차리기 위해서는 관상적 기도 수행이 필요합니다. 우리의 분주하고 피상적인 마음을 잠시 멈추고, 그 아름다움을 바라보고, 그 진리를 받아들이며, 그것이 지닌 고유한 선함을 지켜내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에게 이익이 되든, 기쁨을 주든 상관없이 말입니다. [2] 프란치스칸 시인 머레이 보도는 프란치스코를, 창조와 함께 기도하는 관상적 모범으로 제시합니다: 프란치스코는 피조물들 가운데 자신을 두고, 경외와 기도의 마음으로 그들과 함께 하느님을 찬미하였습니다. 저는 우리가 세상을 향해 드러내는 선한 몸짓과 그에 대한 감사가, 그 몸짓이 흘러나오는 침묵의 깊이에 크게 달려 있다고 믿습니다. 성 프란치스코와 마찬가지로, 오직 침묵과 고독 안에서만 우리는 우리 자신이라는 분주하고 소란스러운 존재 너머의 피조물들을 경외심으로 바라보고, 듣고, 응답하는 법을 배웁니다. 오늘날 땅의 아름다움과 풍요로움을 폭력적으로 이용하고 남용하는 현실을 치유할 수 있는 길은, 홀로 바라보고 듣는 관상적 침묵뿐입니다. 그 땅은 우리를 먹이고, 지탱하며, 인도하는 바로 그 대지입니다. 프란치스코의 고향인 움브리아 말에서 땅이 하는 일을 가리키는 단어는 sustenta('자양분을 제공하다')와 governa('이끌다', '길을 보여주다'), 그리고 '산출하다', 곧 '내어 놓다'라는 뜻을 가진 말입니다. 이 세 가지 동사는 바로 침묵 속 관상이 우리에게 행하는 바입니다. 그것은 우리를 먹이고, 우리를 인도하며, 우리 안에 이해와 지혜를 산출합니다. 저는 이러한 주장을 증명하려 하지도 않고, 그럴 필요가 있다고 느끼지도 않습니다. 그것은 또 다른 논쟁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다만 여러분께 권하고 싶은 것은 여러분이 직접 시도해 보고, 체험하며, 느껴보라는 것입니다. 프란치스코도 자신의 시대와 자리에서 그렇게 했습니다. 그리고 그의 안에서 무언가가 자라나기 시작했는데, 그것은 식물이 자라듯 서서히 이루어졌습니다. [3] 우리 공동체 이야기 저는 우리가 땅과 동물의 지혜를 자주 알아차리지 못하기 때문에 그 지혜를 인정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들의 지혜는 인간의 지혜와는 다르지만 결코 덜 소중하지 않습니다. 인류는 함께 살아가지만, 동시에 우리가 걸어가는 여정 속에서 자연 세계와 영원히 연결되어 있습니다. 제가 동물과 나무, 그리고 모든 자연 안에서 발견하는 지혜는 언제나 제 집이 되어 줍니다. —Nancy B. Reference [1] Bonaventure, The Soul’s Journey into God 1, 9–10 (Paulist Press, 1978), 63. [2] Richard Rohr, The Universal Christ: How a Forgotten Reality Can Change Everything We See, Hope for, and Believe (Convergent Books, 2019), 57–58. [3] Murray Bodo and Susan Saint Sing, God’s Love Song: The Vision of Francis and Clare (Franciscan Media, 2024), 122–123. Image credit and inspiration: Richard Bell, untitled (detail), 2022, photo. Unsplash. Click here to enlarge image. 창조의 신비는 우리가 잠시 멈추어 아주 작은 것, 이를테면 한 줄기 풀잎 위에 맺힌 이슬을 바라볼 때 가장 깊이 드러납니다. 그것은 마치 하느님께서 피조물 안에 숨겨 두신 은총의 흔적을 발견하는 순간과도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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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1009. 연중 제27주간 금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2026.10.09 04:42
- 마음을 놓으면 성령을 놓치고 마음을 잡으면 성령도.
갈라티아서의 바오로 사도도 성령을 주셨다는 것을 얘기한 다음 이렇게 질문이랄까 질책을 어제 한 바가 있지요.
“여러분은 그렇게도 어리석습니까? 성령으로 시작하고서는 육으로 마칠 셈입니까?”
복음도 어제 하느님께서 최고선이신 성령을 주시지 않겠냐고 말씀하신 주님께서 오늘은 악령에 지배받을 위험성에 대해서 경고하십니다.
“더러운 영이 집이 말끔히 치워지고 정돈되어 있는 것을 보게 되면 다시 나와, 자기보다 더 악한 영 일곱을 데리고 그 집에 들어가 자리를 잡는다. 그리하여 그 사람의 끝이 처음보다 더 나빠진다.”
이것은 우리의 영적 상태는 성령의 성전이 되었다가 악마들의 소굴이 될 수도 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한 번 성령을 모셨다고 하여 내내 성전이 되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성령을 모셨다고 하여 방심해서는 안 되고, 자만해서는 더더욱 안 되겠지요.
방심과 자만의 그 지점에서 순식간에 성령의 성전이 악마들의 소굴이 되는 것인데 이에 대해 바오로 사도는 성령으로 시작하여 육으로 마칠 것이냐며 한탄하고, 주님께서도 그리되면 끝이 처음보다 더 나빠지는 것이라고 경고하십니다.
사실 이것처럼 나빠지는 것이 더 없습니다. 부자였다가 가난해지는 것이 차라리 더 낫고, 온유했던 사람이 포악해지는 것이 차라리 더 낫습니다.
어쨌거나 오늘은 더 나빠진다는 말씀이 가시처럼 마음에 박히는데 끝이 처음보다 나빠지지 않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무엇은 하지 말아야 하고 무엇은 해야 합니까?
앞서 말했듯이 첫째는 방심하지 말아야 하고 조심해야 합니다. 조심(操心)과 방심(放心)은 마음과 관련하여 서로 반대되는 말입니다.
조심은 조(操) 자가 쥔다, 잡다는 뜻 그대로 마음을 잡는 것이고, 방심은 방(放) 자가 놓다, 놓인다는 뜻 그대로 잡았던 마음을 놓거나 우리가 흔히 ‘이제 마음이 놓인다.’라고 할 때처럼 마음이 놓이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풀어졌던 마음을 잡아야 인생 망치지 않고 잘 사는 것인데 잡았던 마음을 오히려 놔 버리니 더 나빠지는 것이고 인생 망치는 겁니다.
그런데 마음을 놓느냐 잡느냐에 따라 성령을 잡느냐 악령을 잡느냐가 갈린다는 것이 저의 생각입니다.
성령을 모신 순간 마음을 놓고 그 결과로 마음이 놓이는 순간에, 곧 안심하고 방심하는 순간에 우리는 성령은 놓치게 되고 악령이나 더러운 영은 우리 안에 슬며시 들어오게 됩니다.
안심과 방심은 종이 한 장 차이입니다. 이것은 안정(安定)과 안주(安住)가 종이 한 장 차이인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더 조심해야 할 것은 자만 또는 교만입니다. 안심이나 방심은 정신을 차리고 다시 마음을 다잡으면 되지만 교만은 정신 차리는 것 자체가 쉽지 않고 그래서 마음을 다잡을 수 없습니다.
교만한 사람은 성령을 모실 수 없지만 성령으로 모시기 전에는 겸손하여 성령을 모셨다가 마음이 교만해졌을 때, 그때는 이미 성령은 나가고 악령이 자기 안에 자리 잡고 있는데도 그것을 모르고 자기가 아직도 영적인 사람인 양 남은 육적이거나 악령의 사람이라고 단죄합니다.
이것이 무서운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예수님을 감히 베엘제불의 하수인이라고 한 자들의 짓입니다.
늘 조심하고 깨어있어야 하고 늘 겸손해야 함을 마음에 새기는 오늘 우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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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1009. 연중 제27주간 금요일.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숨영성 묵상글
https://cafe.naver.com/f-e/cafes/30893450/articles/3283?referrerAllArticles=true 하느님의 숨 2026.10.09. 05:22 하늘 나라는 "함께함"과 "어우러짐"입니다.~~~ 흔히 지옥은 불타는 뜨거움으로 묘사되지만, 고대 아일랜드에서는 오히려 차가움으로 상상했다고 합니다. 이는 지옥의 본질이 특정한 물리적 환경이 아니라, 인간에게 가장 혹독한 고통이라는 점을 강조하는 겁니다. 그러나 가장 혹독한 차가움은 외적인 온도가 아니라 정서적이고 영적인 차가움입니다. 결국 지옥은 외부의 불이나 얼음 같은 물리적 조건이 아니라, 각자가 가장 괴로워하는 상태를 뜻하는 것일 겁니다. 그러니 [사랑과 연결이 끊어진 외로움], [마음이 얼어붙은 무관심과 단절], [영혼이 메마른 상태, 희망이나 따뜻함이 사라진 상태] 등이 바로 지옥인 것입니다. 작년 이맘 때도 언급해 드렸습니다만... 프랑스의 유명한 영적 지도자 아베 앙리 위블랭(1838–1910)은 성녀 브리짓다의 전기에서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악마가 성녀 브리짓다 앞에 나타났을 때, 성녀가 물었습니다. '네 이름은 무엇이냐?' 그러자 그는 대답했습니다. '나는 곧 추위 그 자체다.'" 아주 적절한 표현입니다. 차가움, 냉혹함, 냉랭함 등이 악마에게 뜨겁디 뜨거운 열기보다 더 어울리는 표현 아닙니까?! 악마는 어둠의 왕자이며, 자기애 외에는 어떤 사랑도 결여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 유명한 아인슈타인이 말했던 것처럼 사실 차가움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입니다. 차가움은 에너지, 즉 열이 없는 상태를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물리적으로도 에너지나 물질이 상호 작용하지 않을 때의 상황이 바로 차가움이듯이, 우리의 정서적, 영적 차가움 역시 '나 홀로'의 에고가 만들어내는 '차가운 상태'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 하늘 나라는 '함께함'과 '어우러짐'이고, 그 반대인 지옥은 '나'와 '너' 혹은 '나'와 '또다른 나'의 관계성이 아닌 '나'만 존재하는 끝없는 외로움과 함께함의 단절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어떻게 군중이 예수님께서 그 반대자와 손잡고 있다고 상상할 수 있었을까요? 그들은 그분을 성급히 설명해 버리려 했습니다. 신비 안으로 들어가려 하지 않고, 오히려 그 신비로부터 도망치려 했던 것입니다. 많은 설명들이 사실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처리하려는 성급한 시도일 뿐이며, 무지로부터 더 큰 무지로 달아나는 행위입니다. 잘못되거나 피상적인 이론은 단순한 무지보다 더 나쁜 무지입니다. 그것은 이해에 대한 방어막이 됩니다. "모른다"는 태도는 완전히 정직하고 겸손한 자세이며, 배움에 있어 가장 완전한 자세입니다. 우리가 "모른다"는 태도 안으로 온전히 들어갈 수 있다면, 우리의 마음은 어린아이의 마음처럼 새로워지고, 그들처럼 빠르게 배울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지식의 길을 이론과 설명으로 어지럽히고, 그것을 지식으로 착각합니다. 이는 위험으로 가득 차 있으며, 때로는 오래 전 예수님 앞에서 억지를 부렸던 그 군중처럼 선을 악이라 부르게 만들기도 합니다. 오늘날에도 그 위험은 여전히 존재합니다. 최근 수십 년 동안 세상(그리고 교회마저도)은 점점 더 양극화되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자기 생각과 다르면 상대를 향해 아주 거친 말이나 혐오를 퍼붓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마음속에는 "종교적 열심"이 있긴 하지만, 그것이 사랑으로 이어지지 않고 오히려 증오로 변질된 경우가 있다는 겁니다. 즉, 신앙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 신앙이 사랑으로 열매 맺지 못하고, 오히려 분열과 미움으로 나타나는 것이지요.~ 이렇게 볼 때 종교를 가지고 살아가면서도, 사랑할 만큼의 종교는 갖지 못하는 것은 참으로 비극적인 일입니다. 바로 그것이, 그 옛날 사람들이 예수님께서 악마와 손잡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었던 이유와 같은 것입니다. 오늘은 [한글날]입니다. 이 세상 어디에서 문자가 발명된 날을 기념하는 민족은 없습니다. 우리 민족밖에요... 그런데 사실 이 한글날은 한글만을 기념하는 날이 아니라 이 한글을 있게 한 우리말 자체를 기념하는 날이기도 합니다. 다 아시겠지만 우리말은 느낌을 아주 중요시하는 언어라고 합니다. 자기의 느낌만이 아니라 '나'와 상대하는 모든 것에 대한 느낌을 중요시하는 것이지요. 일전에 어떤 외국인이 '한국어'를 할 수 있어서 너무 행복하다고 말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 이유는 자기 말로는 표현할 수 없었던 느낌들을 표현할 수 있어서라고 하더군요.... 심지어는 자연의 상태를 표현할 때에도 우리말은 우리의 느낌을 투영하여 표현하는 경우가 다른 언어에 비해 훨씬 더 많습니다. 프란치스코 성인이 그랬듯이 자연을 그저 물질로만 보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함께하는 "또다른 나"로 바라보기 때문에 그 깊은 마음 때문에 그런 것이겠지요?! 오늘 특별히 우리 함께 우리말과 우리 글의 소중함을 마음에 새기며 따스하고 늘 새롭고 따스하고 아름다운 관계성의 하늘 나라를 건설해 가도록 합시다!~~~ 이런 의미에서 김영랑 시인의 [돌담에 속삭이는 햇발 같이]를 함께 나누며 오늘 복음 묵상을 마치겠습니다.^^ 돌담에 속삭이는 햇발같이 풀 아래 웃음짓는 샘물같이 내 마음 고요히 고운 봄 길 위에 오늘 하루 하늘을 우러르고 싶다 새악시 볼에 떠오는 부끄럼같이 시의 가슴에 살포시 젖는 물결같이 보드레한 에메랄드 얇게 흐르는 실비단 하늘을 바라보고 싶다 ---------------------------------------------------- 261009. 연중 제27주간 금요일. 이 마르첼리노 M. 수사님. http://www.ofmkorea.org/ofmkfb/586124 2026.10.09 05:45 우리가 찾는 것은 무엇인가? 1. “성령으로 시작하고서는 육으로 마칠 셈입니까?”(갈라 3,3) 이 말씀은 신앙의 길을 걷는 우리에게 “처음에 너를 살게 한 사랑을 지금도 믿고 있느냐?” 하고 묻습니다. 하느님의 은총으로 시작한 삶이 어느새 자신의 힘과 성과로 자신을 증명하려는 삶으로 바뀌지는 않았는지 돌아보게 합니다. 바오로가 여기서 경계하는 ‘육’은 몸 자체가 아닙니다. 갈라티아 신자들이 성령을 받고서도 할례와 율법 준수를 구원의 보증으로 삼으려 했던 것처럼, 하느님께 받은 생명을 자기 노력으로 확보하려는 태도입니다. 은총을 받아들이던 빈손이 어느새 자기 의로움을 움켜쥐는 손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이러한 변화가 일어납니다. 처음에는 사랑받았기에 기도하고, 감사했기에 봉사하며, 주님께 이끌렸기에 자신을 내어주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 인정받아야 마음이 놓이고, 내가 한 일을 알아주지 않으면 서운하며, 다른 사람이 내 뜻을 따라야 공동체가 잘되어 간다고 생각합니다. 하는 일은 여전히 거룩해 보이지만, 그 일을 움직이는 마음에는 두려움과 통제가 자라날 수 있습니다. 성령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날마다 사랑을 먼저 받는 자리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기도 안에 멈추어, 오늘도 나를 살게 하는 하느님의 선을 알아봅니다. 형제의 배려와 누군가의 수고를 통해 내가 사랑받고 있음을 깨닫습니다. 그리고 받은 사랑에 응답하여, 내 앞에 있는 사람의 필요에 자신을 내어줍니다. 우리의 노력도 그 사랑 안에서 자리를 찾습니다. 그 열매는 관계에서 드러납니다. 상대가 내 뜻대로 움직이지 않을 때에도 그의 말을 들을 수 있는지, 내 수고가 드러나지 않아도 기꺼이 도울 수 있는지, 잘못을 지적받았을 때 자신을 변호하기 전에 돌아볼 수 있는지 살펴보게 됩니다. 성령께 마음을 내어드릴수록 다른 사람이 숨 쉴 자리가 넓어집니다. 프란치스칸 길에서도 이 말씀은 깊은 물음이 됩니다. 가난하게 시작한 사람이 자기 경험과 공로와 옳음을 쌓아, 어느새 아무도 가까이할 수 없는 사람이 되어 있지는 않은지 묻습니다. 오래 살아온 신앙이 나를 더 부드럽고 작은 사람으로 빚고 있는지 돌아보게 합니다. 2. 성령으로 시작한 삶,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마음. “성령으로 시작하고서는 육으로 마칠 셈입니까?”라는 바오로의 물음은, “청하여라, 찾아라, 문을 두드려라.” 하시는 예수님의 초대와 이어집니다. 성령으로 시작한 삶을 끝까지 살아가려면, 날마다 하느님께 손을 내밀고 그분을 찾으며 마음의 문을 열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마음에도 자신의 바람을 관철하려는 마음이 스며들 수 있습니다. 원하는 것을 얻을 때까지 청하고, 내 생각을 뒷받침하는 답을 찾으며, 내가 정해 놓은 문만 열어 달라고 두드리는 것입니다. 기도하면서도 무엇이 좋은지에 대한 판단은 끝까지 내가 쥐고 있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초대의 끝에서,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당신께 청하는 이들에게 성령을 주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간절히 구하는 모든 것 가운데, 아버지께서 주시려는 선물은 우리 안에 머무시며 사랑하도록 이끄시는 성령입니다. 기도는 우리의 바람을 아버지께 말씀드리고, 그 바람까지 그분의 사랑 안에서 새롭게 빚어지도록 맡기는 시간입니다. 구한다는 것은 자신의 가난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주님, 제 힘만으로는 사랑할 수 없습니다. 상처받은 마음을 열고, 미운 사람을 이해하며, 지친 형제 곁에 머물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이렇게 청할 때 우리는 이미 받은 은총에 다시 기대어 섭니다. 오래 기도하고 많이 봉사했어도, 오늘 사랑할 힘은 오늘 다시 받아야 합니다. 찾는다는 것은 일상과 관계 안에서 하느님의 선을 알아보는 것입니다. 나를 배려한 형제의 작은 수고, 말없이 내 곁을 지켜 준 사람의 온기, 당연하게 받아왔던 하루의 양식 안에서 사랑의 흔적을 찾습니다. 그리고 나를 불편하게 하는 사람 앞에서도 묻습니다. “주님, 이 사람의 어떤 아픔을 제가 아직 보지 못하고 있습니까? 지금 저에게 어떤 사랑을 청하고 계십니까?” 찾는 마음은 자기 판단에 머물지 않고, 상대의 현실을 향해 열립니다. 두드린다는 것은 응답이 더디어도 관계를 향한 걸음을 이어가는 것입니다. 화해가 곧 이루어지지 않아도 먼저 건넬 인사를 준비하고, 상대의 마음이 열리지 않아도 그의 말을 들을 자리를 남겨 둡니다. 상대가 감당할 수 있는 거리를 존중하면서, 사랑할 길을 다시 찾습니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아버지께 청합니다. “저 사람을 제 뜻대로 바꾸려는 마음을 내려놓게 하시고, 제가 건넬 수 있는 선을 가르쳐 주십시오.” 이렇게 구하고 찾고 두드릴 때, 기도는 우리의 관계 안에서 열매를 맺습니다. 사랑받고 있음을 알아보는 눈이 열리고, 다른 사람의 필요를 헤아리는 마음이 자라며, 그 필요에 응답하도록 자신을 내어주게 됩니다. 성령으로 시작한 삶을 성령 안에서 마친다는 것은, 마지막까지 은총을 필요로 하는 사람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세월이 흐를수록 더 겸손히 청하고, 더 깊이 사랑의 흔적을 찾으며, 더 끈기 있게 자비의 문을 두드리는 것입니다. 3. 먼저 찾아야 할 것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입니다.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마음의 중심에 “내가 무엇을 얻을 것인가”와 함께 “아버지의 사랑이 지금 이 자리에서 어떻게 이루어질 것인가”라는 물음이 있어야 합니다. 하느님의 나라를 찾는다는 것은 내 삶과 관계 안에서 하느님께서 다스리시도록 자리를 내어드리는 것입니다. 내 뜻을 앞세우던 자리에서 그분의 뜻을 묻고, 내 옳음을 주장하던 자리에서 상대의 아픔을 살피며, 인정받고 싶은 마음을 넘어 누군가에게 필요한 선을 행하는 것입니다. 그분의 의로움을 찾는다는 것은 하느님의 사랑에 합당한 관계를 찾는 것입니다. 소외된 이가 존중받고, 상처 입은 이가 돌봄을 받으며, 잘못한 이에게도 회개와 회복의 길이 열리도록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그 길의 바탕에는 내가 이미 사랑받고 있음을 알아보는 기도가 있습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돌보고 계심을 믿을 때, 내 몫을 지키려는 두려움에서 조금씩 자유로워져 다른 사람의 필요를 바라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구하고 찾고 두드립니다. 성령으로 시작한 삶이 육으로 기울어지는 순간은 하느님의 이름으로 내 왕국을 세우려 할 때입니다. 그때 다시 멈추어 물어야 합니다. “지금 나는 내 뜻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는가, 아버지의 사랑이 이 관계 안에 흐르기를 바라는가?” 먼저 찾아야 할 하느님의 나라는 오늘 내 곁에 있는 사람을 사랑하는 자리에서 구체적으로 드러납니다. 주님, 당신의 사랑으로 시작한 이 삶을 끝까지 당신께 맡기게 하소서. 제 공로를 세느라 받은 사랑을 잊지 않게 하시고, 날마다 성령께 마음을 열어, 형제들 곁에 감사하며 머물게 하소서. 오늘도 당신께 사랑할 힘을 구합니다. 사람들 사이에 흐르는 당신의 선을 찾습니다. 두려움으로 닫힌 제 마음의 문이 열리도록 당신의 자비를 두드립니다. 성령을 보내시어, 제가 받은 사랑이 누군가의 삶에 작은 위로로 흐르게 하소서. “주님, 당신의 나라를 먼저 구할 마음을 주십시오. 오늘 만나는 사람 안에서 당신께서 바라시는 선을 찾게 해 주십시오. 제 마음의 문을 열어, 그 선을 행할 수 있도록 성령을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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