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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219 / 하나님 때문이라면 (삼상1:1-5, 20)
어떤 여자가 선을 무려 38번이나 봤는데도 매번 퇴짜를 맞았는데 이유가 못생긴 얼굴 때문이었답니다. 자기가 봐도 눈은 축 처져 하회탈이고 코는 치켜 올라간 들창코였습니다.
고민 끝에 성형외과에 가서 눈은 황신혜같이 했고 코는 김희선같이 고쳤답니다. 그리고 수술 후 첫 번째 선본 자리에서 맘에 드는 남자를 만나 결혼을 했고 시간이 흘러 아이를 낳게 되었는데 출산한 아이와의 첫 대면 순간 산모가 기절해 버렸답니다.
딸아이였는데 눈은 축 처진 하회탈이고 코는 바짝 들려 올라간 들창코더랍니다.
또 이런 얘기도 있습니다. 앞서와 똑같이 여자분이 못생겼다는 이유로 선 자리에서 계속 퇴짜를 맞았는데 이분은 성형외과에 가는 대신 기도원엘 갔답니다. 그리고 기도하기를 ‘외모가 어떻든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시는 줄 압니다. 다만 하나님처럼 다른 사람들도 내게 그리하게 해 주세요.’라고 기도하고 일어서는데 웬 남자분이 따라오며 말을 걸더니 자기는 배우자감을 위해서 기도하러 왔는데 기도 중에 눈을 뜨라는 음성이 들려 눈을 떠보니 당신이 보이더라며 데이트 신청을 하더랍니다.
그렇게 해서 결혼하여 살게 됐다는 게 제가 아는 장로님, 권사님 부부의 간증입니다.
살다 보면 남들은 다 잘 되는 것들이 유독 나에게서만은 안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유가 무엇이든 결과만 놓고 보면 그것처럼 속상한 일도 없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한나라는 여인도 그런 사람 중 하납니다.
엘가나라는 남편을 만나 결혼했는데 그에게는 브닌나라는 또 다른 아내도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2절을 보면 브닌나에게는 자식이 있고 한나에게는 자식이 없더라고 한 것으로 보아 한나에게 아이가 없다 보니 당시 풍습에 따라 대를 잇기 위해 후처를 들인 것이 아닌가 하는 짐작을 하게 됩니다.
보통의 경우 남들은 결혼하면 아이도 잘 낳고 그러는데 유독 한나에게만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그러니 여인으로서 아이를 못 낳는 심정에 더하여 그로 인해 후처를 맞아야만 하는 마음이 어땠겠습니까?
그나마 남편이 한나를 더 사랑했고 매년 여호와의 법궤가 있는 실로에 가서 하나님께 번제를 드릴 때면 되받은 제물의 분깃을 나누어주면서 유독 한나에게만은 갑절을 주었다는 것으로 위로가 됐을 듯한데, 이게 또 문제가 됐습니다. 남편이 매년 한나에게만 그렇게 하다 보니 질투가 난 브닌나가 한나에게 분풀이를 합니다.
아마도 이 말을 꼭 덧붙였겠지요. “애도 못 낳는 주제에….”
이 말 한마디에 한나는 브닌나의 횡포에 변변한 대응조차 할 수 없었습니다. 사실이었으니까요. 없는 말이 아니었기에 한나에게는 그게 한이 되었고 눈물이 되었던 겁니다.
그런데 이 장면에는 이상한 점이 하나 있습니다. 5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그에게 임신하지 못하게 하시니.”라는 말이 나오는데, 언뜻 이해가 잘 안 됩니다. 하나님이시라면 없던 아이도 낳을 수 있게 해 주셔야 하건만 오히려 하나님이 임신을 방해하고 계시더라는 겁니다.
최소한 우리가 아는 하나님이시라면 믿는 자녀들에게는 ‘남들보다’는 아니더라도 ‘남들만큼’은 복을 주셔야 하지 않겠는지요? 그런데 오히려 남들이 다 받는 복마저 방해하고 계신다면 이는 누구라도 하나님을 믿지 않을 충분한 이유나 명분이 됩니다.
그렇다면 이런 상황에서 한나는 어땠을까요?
여기서 우린 믿음의 선배인 한나에게서 배워야 할 것이 있습니다.
1. 언제든 믿음으로 하나님을 바라봐야 합니다.
간혹 믿는다는 분 중에도 믿음이 아닌 원망과 불평으로 하나님을 바라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매 주일 하나님께 나오긴 합니다. 또 나름 기도하긴 합니다만 늘상 하는 말이 “이건 왜 이래요? 저건 왜 저래요?”라든가, “나는 왜 이래요? 저 사람은 왜 저래요?”라고만 합니다.
그러나 이런 말들은 믿음의 본질을 잘 몰라서 하게 되는 실수입니다. 마태복음 8:26절에서 예수님께서 풍랑으로 인해 무서워 떠는 제자들을 향해 “어찌하여 무서워하느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라고 하셨을 때의 상황과 같은 것입니다.
당시 현장에는 풍랑도 있었지만, 예수님도 계셨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풍랑만 보며 두려워만 했지, 풍랑으로 인해 예수님께 도움을 요청한 사람은 하나도 없었던 겁니다.
그런데 오늘을 사는 우리라고 해서 다르지 않습니다. 당시 제자들에게는 “어찌하여 무서워하느냐?”라고 하셨지만, 오늘의 나를 향해서는 예수님이 뭐라 하실까요?
“어찌하여 걱정하느냐?” “어찌하여 화를 내느냐?” 내지는 “어찌하여 낙심하느냐?”고 하지 않으실는지요?
그러면서 이 말씀을 덧붙이실 겁니다. “믿음이 작은 자들아.”라고.
그렇습니다. 우리가 하나님만 바라본다고는 하지만 생각해 보세요. 두 사람이 서로를 바라본다고 할지라도 서로 사랑해서 바라보는 것과 한번 싸워 보자고 눈싸움하고 있는 것이라면 결과는 전혀 다른 차원으로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주여주여 한다고 다 같은 게 아닙니다.
여러분이라면 문제가 있을 때면 하나님을 바라보시되 원망이나 불만이 아니라 믿음으로 바라보시기를 바랍니다. 그러자니 우리가 매 순간을 믿음으로 살려고 하면 우린 하나님을 향해 ‘왜냐?’고 묻지 말고 ‘왜입니까?’를 물어야 합니다.
존댓말이야 반말이냐의 차이만 있을 뿐 얼핏 듣기엔 같은 말 같지만 풀어 쓰자면, 인생에서 이해되지 않는 상황이나 문제 앞에서는 ‘내 입장에서의 왜’가 아니라, ‘하나님 입장에서의 왜’를 물으라는 것입니다.
한나의 경우를 다시 보세요. 남들 대부분이 다 잘하는 임신이건만 한나에겐 안 됩니다. 게다가 그 원인이 하나님의 막으심에 있더라고 한다면, 왜냐고 묻지 않을 수 없을 겁니다.
예를 들어 하나님을 잘 믿는다고 믿으며 살았는데 그럼에도 만약 여러분이 친한 이에게서 배신을 당하고, 인신매매에 팔려 가 종살이를 하고, 억울한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힌 요셉이었다면요?
평생을 교회에 헌신하며 살았는데도 만약 여러분이 어느 날 갑작스레 전 재산을 잃고, 아들딸을 먼저 저세상 보낸 것도 모자라, 몹쓸 병에 걸려 아내며 친구까지 다 떠나버린 욥이었다면요?
심정적으로는 이해가 되나 그래도 예외는 없습니다. 그런 때라도 믿음이 있으려면 우린 스스로에게 ‘왜일까?’가 아니라 하나님께 ‘왜입니까?’를 물을 수 있어야 합니다.
만약에라도 같은 상황에서 내 입장만 앞세워서 ‘왜 내게?, 왜 하필이면 나야?’를 묻기 시작하면 우린 하나님에 대해 아무것도 이해할 수 없게 됩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인정할 수도 없기에 믿지도 순종하지도 못하게 됩니다.
이제부터 여러분이라면 문제가 있을 때면 ‘하나님 입장에서의 왜일까?’를 생각하시기를 바랍니다.
보면 우린 그냥 ‘시험’이란 표현을 쓰지만, 성경에서는 시험이 두 가지의 경우로 나누어짐을 보게 됩니다.
먼저 시험이란 말이 구약의 히브리어로는 ‘나사’라고 해서 ‘하나님의 시험하심’을 말하고 있으며 신약의 헬라어로는 ‘페이라조’라 해서 ‘사탄의 시험’으로 언급되고 있습니다.
굳이 구별하자면 마귀의 시험은 유혹이나 시련이라 할 수 있고 하나님의 시험은 테스트 내지는 연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종종 시험이라고 여기게 되는 경우는 둘 중 하나이게 됩니다.
그렇다면 각각의 대처 방안은 어떠해야 할까요?
마귀의 속성상 사람은 절대 마귀를 이기지 못합니다. 그렇기에 마귀의 시련과 유혹들이라면 당연히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물리쳐야 하고 혹여라도 하나님이 주신 시험이라면 결자해지라 했으니 하나님이 풀어주셔야만 해결될 수 있습니다.
결국엔 우리가 시험을 굳이 둘로 나눠 생각할 필요가 없다는 겁니다. 대신 어떤 시험이든 믿음이 이긴다는 사실만을 믿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게 마귀의 시험이라면 여러분의 믿음으로 물리칠 수 있습니다. 또한 그게 하나님의 시험이라면 여러분의 믿음으로 통과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어떤 시련이든 또는 시험 앞에서든 하나님이 역사하시기까지,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께 나와, 하나님께만 ‘왜인가요?’를 묻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주 예수를 믿음이 온 세상을 이깁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에게 있는 시험이 누구에게서 온 것이든 여러분의 믿음이 커질수록 시험은 반비례하다가 결국엔 사라질 줄로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2. 나에게 있는 약점을 인생의 승부처로 생각해야 합니다.
사람은 누구에게든지 한두 가지 약점들은 다 있습니다. 때문에 인생을 살아가면서 수백 가지의 필요한 것 중에서 한두 가지 없는 것으로 인해 낙심하고 스트레스받아서는 안 됩니다. 대신 부족하고 불만이라 생각하는 것들을 약점이라 여기지 말고 그것을 이유로 오히려 하나님께 기도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어떤 핑계로든 그것 때문에 내가 기도할 이유이기만 하다면 그 자체로 이미 내게는 축복입니다.
예전 설교 중에 “기도가 적으면 문제가 커 보이고, 기도가 많으면 축복이 커 보인다.”는 말씀을 드린 적이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면 다시금 이 말을 상기할 필요가 있습니다. 매사에 하나님만 믿고 기도하는 여러분이라면 여러분 앞에도 해결하지 못할 불가능은 없을 것입니다.
한나가 그랬습니다. 남들은 다 잘하건만 내게선 안 되는 일, 게다가 안 되는 이유가 하나님 때문이라면 그냥 서운해만 하고, 그냥 원망만 하고 말아야 할까요?
간혹 사람 사이에서도 오해가 있거나 의사소통이 안 될 경우라면 만나서 해결하는 게 가장 좋습니다.
하나님께도 그러합니다. 그랬기에 한나는 하나님을 찾아가 만났습니다. 그리고 묻습니다. “왜입니까?”를.
왜였을까요? 왜 하나님은 한나의 임신을 막으셨을까요?
하나님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임을 알게 하시려고 그러신 것입니다.
이 말은 곧 하나님이 나를 축복하시려니 나로 기도하게 하시려고 그리 계획하신 일인 것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므로 이제부턴 우리도 시험이 있게 되면 그것이 곧 ‘기도해서 응답받으라.’시는 하나님의 계획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그렇더라도, 본 장에서 이해되지 않는 것이 하나님이 처음부터 한나의 임신을 막지 않으셨다면 한나가 그렇게까지 고통받다가 굳이 기도할 필요도 없이 어차피 자연스럽게 임신할 수 있었던 것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들게 됩니다.
어떤가요? 여러분은! 하나님이 병 주고 약 주는 것 같지 않은가요?
그런데도 하나님은 왜 그렇게까지 하시면서 우리에게 기도해서 응답받으라고 하시는 걸까요?
우리에게 있게 되는 결과가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보세요. 보통의 여인들이라면 보통의 아이를 낳았을 겁니다. 그런데 한나가 기도해서 낳은 아이는 사무엘이었던 겁니다.
결과가 ‘그냥 아기’냐 ‘사무엘’이냐처럼, 누구든 자기가 가진 것과 자기 노력만으로도 성공할 수는 있습니다. 그렇더라도 기도해서 얻는 성공과는 그 결과의 질이 다르다는 것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을 믿음에도 우리에게 약점이 있고 매번 시험이 있는 이유는 하나님은 그것들을 핑계로 혹은 이유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기도할 기회를 삼으라시는 겁니다.
그래 놓고 하나님은 하나님대로 기다리십니다. 우리가 기도하기를. 그래서 우리에게 응답하실 날이 오기만을.
한나의 경우도 당시의 시대 상황으로 볼 때 하나님은 선지자 한 사람을 이 땅에 보내셔야 할 필요를 느끼셨습니다. 그러자니 자연 아이를 임신하기 전부터와 임신 중에나 출산 후에도 오직 믿음과 기도로 준비하고 키울 수 있는 여인이 필요했습니다.
그때 한나가 택함 받은 것입니다. 그런 이유에서 한나가 아이를 낳지 못하게 된 것은 하나님께서 그러한 환경을 허락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어땠습니까?
한나는 믿음과 기도로 하나님이 기대하신 일을 해낸 것입니다.
한나로 인해 하나님이 얼마나 기뻐하셨을까요?
이게 우리도 할 일입니다. 하나님이 나로 인해 기뻐하시게 하는 것.
그런데 아십니까? 우리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면 하나님은 30배, 60배, 100배 이상으로 오히려 우리를 기쁘게 해 주신다는 것을.
이게 우리가 같은 상황 속에서도 시험에 들 것인가, 믿음으로 살 것인가를 빨리 결정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성경에 보면 사탄이 등장해서 인간을 유혹하는 두 개의 장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는 사탄이 하와를 유혹하는 장면이고, 다른 하나는 예수님을 시험하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결과를 놓고 보세요.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께 순종하기보다는 자기만족을 택했기에 실낙원의 슬픔을 자초했지만, 예수님은 모든 악조건 속에서도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심으로 승리하셨고 하나님이 주시는 능력과 기쁨을 얻으셨습니다.
결국 이겁니다. 조건이나 상황이 인간을 불행하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시험이나 약점이 있고 없고가 문제가 아닙니다.
앞서 드린 말씀을 다시 드리자면 “기도가 적으면 문제가 커 보이고 기도가 많으면 축복이 커 보입니다.”
이젠 하나님께 기도하세요. 약점만 핑계 대면 인생은 실패하지만, 약점을 핑계로 기도하면 인생은 성공합니다.
솔직히 배부르게 하심을 감사하다고 기도하는 사람보다는 배고프기에 밥 달라고 기도하는 사람이 더 많습니다. 따라서 때론 우리가 기도하기 위해서라도 좀 부족한 게 있을 필요도 있다는 게 전혀 억지스럽지만은 않습니다.
약점을 스스로 약점이라고 인정하게 되면 그건 콤플렉스가 됩니다. 결국 자기를 비하하게 되고 인생을 부정적, 소극적으로 살게 합니다. 내게 있는 약점이 아니라 나에게 있는 강점을 보는 것. 지금 내게서 안 되는 것이나 없는 것이 아니라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것과 내게 있는 것을 보는 것에서부터 믿음은 시작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인생의 위대한 승부처로 삼으라고 때론 우리에게 약점도 있게 하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리하셨다면 그 약점을 강점이 되게 하실 분도 결국엔 하나님뿐이신 것을 믿고 약점을 핑계 삼아 하나님께 기도해 보실 것을 권면을 드립니다.
기도할 수 있음을 안다면 이젠 불만 대신 감사하세요.
교회 학교에서 아이들을 상대로 감사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자리에서 한 아이가 이런 말을 했답니다. 한번은 엄마가 새 신발을 사주지 않는다고 심통부리고 집을 뛰쳐나왔는데 길가에 웬 아이가 넘어져 있더랍니다. 장애자 같은데 목발이 저만치 떨어져서 혼자서는 손이 닿지 않아 쩔쩔매고 있더랍니다. 딴엔 친절을 베푼답시고 다가가 도우려고 하니까 넘어진 아이가 씩 웃으며 하는 말이 ‘괜찮아요. 혼자서도 할 수 있어요.’ 그러더니 얼굴이 뻘게지도록 기어가 목발을 주워 들고는 딛고 일어서더랍니다.
순간 새 신발로 심술이 났던 아이 머릿속에서는 발이 없는 저 친구도 불평 없이 홀로 서는데 두 다리 멀쩡한 내가 신발이 없다고 불평한다면 그건 사치겠다는 생각이 들더랍니다.
많은 사람이 없는 것, 안 되는 것에 대해서는 불평하지만 있는 것에 대해서는 감사하지 못합니다. 나보다 돈 많은 사람을 보며 부러워는 할지언정 나보다 가난한 사람을 보며 감사하질 않습니다. 나보다 많이 가진 사람을 보며 불평은 하지만 나보다 못 가진 사람을 보며 감사하진 못합니다.
신앙생활의 첫걸음은 감사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젠 없는 것으로 인해 낙심에 빠지지 말고 또한 없고 안 된다는 이유로 포기할 구실을 삼지 말고 없기 때문에, 안 되기 때문에 하나님께 기도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틀림없이 길은 있습니다. 하나님이 도우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믿음이 있고 기도할 수만 있다면 그간 우리가 부러워하던 것들을 더이상은 부러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부러우면 지는 거다.’라는 말도 있듯이 세상을 부러워하지 말고 그런 상황에서조차 기도하지 못하는 내 믿음을 부끄러워해야 합니다. 그리고 다시 기도하세요. 그래서 이번 기회에 여러분 모두가 하나님이 응답하시는 질이 다른 결과들로 인해 진정한 인생 성공자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첫댓글 약점을 핑계대기만 하면 실패하는 인생일수
있지만 약점을 핑계로 기도한다면
성공한 인생이라는 말씀에 역시 무엇이든
기도로 간구하는 삶을 살아야겠다는
다짐 또 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