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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나 죽으나 우리는 주의 것이다
롬 14:1-9
1 믿음이 연약한 자를 너희가 받되 그의 의견을 비판하지 말라
2 어떤 사람은 모든 것을 먹을 만한 믿음이 있고 믿음이 연약한 자는 채소만 먹느니라
3 먹는 자는 먹지 않는 자를 업신여기지 말고 먹지 않는 자는 먹는 자를 비판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이 그를 받으셨음이라
4 남의 하인을 비판하는 너는 누구냐 그가 서 있는 것이나 넘어지는 것이 자기 주인에게 있으매 그가 세움을 받으리니 이는 그를 세우시는 권능이 주께 있음이라
5 어떤 사람은 이 날을 저 날보다 낫게 여기고 어떤 사람은 모든 날을 같게 여기나니 각각 자기 마음으로 확정할지니라
6 날을 중히 여기는 자도 주를 위하여 중히 여기고 먹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으니 이는 하나님께 감사함이요 먹지 않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지 아니하며 하나님께 감사하느니라
7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8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
9 이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셨으니 곧 죽은 자와 산 자의 주가 되려 하심이라
롬 14:1-9 / [형제를 심판하지 말라] 여러분의 동료가 되기를 원하는 형제가 있거든 그의 믿음이 약하더라도 따뜻이 맞이하십시오. 옳고 그른 일에 대해서로 의견이 다르다고 해서 비판해서는 안 됩니다. 2) 우상 앞에 놓았던 고기를 먹느냐 마느냐 하는 문제를 놓고 논쟁하지 마십시오. 어떤 사람들은 그것을 먹어도 해로울 것이 없다고 믿고 있지만 믿음이 약한 사람들은 그렇지 못합니다. 그들은 그런 고기를 먹느니 차라리 채소를 먹는 것이 낫다고 생각합니다. 3) 고기를 먹어도 된다고 생각한다해서 먹지 않겠다는 사람을 업신여기지 마십시오. 또 먹지 않는 사람은 먹는 사람을 비난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어떤 믿음을 가진 사람이나 다 받아들이셔서 당신의 종으로 삼으셨습니다. 4) 그러므로 종의 행동을 판단할 분은 하나님뿐이십니다. 누가 옳고 그르냐는 하나님께서 일러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바르게 행동하도록 만드실 것입니다. 5) 어떤 사람들은 그리스도인도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특별한 날인 유대교의 명절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또 어떤 사람들은 어느 날이나 하나님께 속해 있기 때문에 그렇게 성가시게 만드는 것은 잘못되고 어리석은 짓이라고 말합니다. 이런 따위의 문제는 각자 자기가 결정할 일입니다. 6) 만일 누가 주께 예배드리는 특별한 날을 정해 놓았는데 그것이 주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서라면 나쁠 게 없습니다. 우상 앞에 놓았던 고기를 먹는 사람에 대해서도 같은 말을 할 수 있습니다. 주께 감사드리고 먹는 것인데 무엇이 나쁘단 말입니까? 그리고 그런 고기에는 손을 대지 않으려는 사람도 주님을 기쁘게 하려는 간절한 심정으로 그러는 것이니 그 역시 잘못이 없습니다. 7) 우리는 우리가 죽고 사는 문제를 마음대로 선택할 권리가 없습니다. 8) 살든지 죽든지 우리는 주님을 따라야 합니다. 사나 죽으나 우리는 주님의 것입니다. 9)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것은 우리가 살든지 죽든지 언제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주님이 되시기 위한 데에 그 목적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대두되는 가장 큰 문제점 가운데 하나가 내적인 분열입니다. 본 서신의 수신자인 로마 교회에는 식사법과 절기문제로 인한 분열이 있었습니다.
나는 확신하는가?(1-5) 로마의 성도들 중에서 어떤 이들은 우상의 제단에 올려졌다가 시장으로 유통되게 마련인 육류를 부정하게 여겨 채식만을 먹어야 한다고 고집했습니다. 또 어떤 이들은 음식 자체가 더러운 것이 아니라고 여겨 무엇이든지 먹을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음식 문제와 함께 절기를 지키는 일도 분쟁의 소지가 되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안식일, 절기들, 월삭 등을 지켜야 한다고 했고 다른 이들은 어느 날만이 아니라 모든 날을 소중히 여겨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만일 이들이 자기 신념을 자기에게만 적용했다면 별 문제가 없었을 것입니다. 문제는 서로가 자기의 신념만이 옳다고 주장하고 다른 쪽을 비판하는데 있었습니다. 바울은 “남의 하인”을 판단하는 잘못을 범하는 일이 없도록 가르칩니다. 주인 되신 하나님만이 성도를 판단할 수 있다는 견해입니다. 율법에 치우쳐 지나칠 정도로 예민하게 반응하는 성도에 대해 그 연약함을 비판하고 업신여기지 말며 믿음이 강한 자 편에서 먼저 받아들이라고 권고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단순한 감정에 따라 행동해서는 안됩니다. 주의 종의 가르침과 기도, 그리고 말씀 연구의 결과로 얻어지는 내면적 확신에서 행동을 해야 합니다. “견해는 우리가 붙들고 있는 것이며 확신이란 우리를 붙들고 있는 것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내가 하고 있는 일은 주님을 위한 것인가?(6-9) 바울은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을 섬기기 위한 중심이라면 하나님과 그 개인의 관계이니 만큼 각자 마음에 확정한 대로 행하라고 합니다. 문제의 핵심은 ‘하나님 중심인가 자기 중심인가’에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으로 인해 하나님의 소유가 되었기에 더 이상 자신을 위해서 살아서는 안될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이편이든 저편이든 우리 모두가 그 중심이 하나님을 위해서라면 하나님께 감사할 일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살아도 주를 위하여,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을 수 있는 이들이기 때문에 우리는 주의 것이라고 했습니다.
적 용 : 타인의 생각이나 행동에 대한 나의 판단이 아무리 성경적이라고 할지라도 상대가 내 판단을 이해하고 올바르게 인식하지 못한다면 내 판단은 상대에게 상당한 부담이 될 수 있음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무언가를 상대에게 말하기 전에 이것이 상대의 영혼에 신앙적으로 유익한 것인가를 먼저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믿음이 연약한 사람이나 모든 것을 먹고 마실 수 있는 사람이나 하나님이 받으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선악을 판단하는 일의 기준은 내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선악을 판단하시는 일의 온전한 기준임을 인정하는 것이 겸손입니다. 거기서부터 사랑의 우물이 솟아나서 함께 마시고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이계연
< 설 교 >
신앙의 삼 단계
교회에 출석하는 교인들은 크게 둘로 나눌 수가 있습니다. 변화 받지 못한 교인과 변화 받은 교인입니다. 농부들은 봄이 오면 씨앗을 뿌립니다. 씨앗은 그냥 두면 전혀 변화가 없습니다. 무슨 씨든지 땅에 묻어야 껍데기는 썩어 없어지고 그 속에 있는 생명체인 배아(胚芽)라는 곳에서 싹이 나오고 줄기가 생기고 어느 날 꽃이 피고 열매를 맺는 변화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교인들이 교회에 출석하여 예배를 드리고 설교를 듣는 것으로는 변화가 안 일어납니다. 씨앗 그대로 있는 것과 같습니다.
씨앗이 변화되려면 땅 속에 들어가 껍데기가 썩어 없어져야 하는 것처럼, 우리가 예수님의 십자가에 동참하여 거기에서 겉사람이 깨어지고 우리 속에 있는 생명체인 영에서 부활의 싹이 날 때만이 그 때부터 변화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번 사순절 기간동안 우리 교인들은 모두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자아라는 겉사람을 못박아 버리십시오. 그러면 그 때부터 우리 영의 변화의 능력이 나타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변화의 싹은 계속 자라야 합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서 보면, 변화 받은 교인들을 셋으로 구분할 수가 있습니다. 이를 다른 말로 표현하면 신앙성장의 삼 단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설교를 들으시면서 여러분은 어느 종류의 교인에 속해 있는가? 어느 신앙단계에 이르고 있는가를 스스로 분석하시고 한 단계 더 높은 신앙에 이르시기를 바랍니다.
1. 믿음이 연약한 자, 연약한 단계에 있는 자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서 중생은 받았으나 아직도 어린 아이 신앙을 벗어나지 못한 자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린 아이 때는 마음은 원이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습니다. 자기는 흘리지 않고 먹고 싶은데 먹다보면 국물이 흘려 옷이 더러워지고, 밤에 오줌을 싸고 싶지 않은데 자고 나면 이부자리에 지도를 그려놓고 있습니다. 자기는 잘 달리고 싶은데 넘어져서 무릎에 피가 나고, 자기는 용감하게 일어나고 싶은데 울고 있는 자신을 발견합니다.
교인들 중에도 그런 분들이 많습니다. 교회와 세상에 양다리를 걸치고 삽니다. 교회 나올 때는 교인 같은데 세상에 나가면 교인인지 아닌지 모를 정도로 구분이 안 되는 삶을 삽니다. 먹을 것 다 먹고, 거짓말이나 부정한 일들도 버리지 못 하고 있습니다. 교회 나와서는 회개하고 결심을 하지만, 일주일을 버티지 못하고 넘어지고 있는 자신을 발견합니다. 그래서 어느 분은 너무나 죄의식에 싸여서 교회를 떠나기도 하지만, 어느 분은 양다리 걸치며 계속 살다보니 어느 날부터 아예 위선적인 삶을 삽니다.
오늘 본문의 배경에 나오는 로마교회는 지엽적인 문제로 많은 논쟁을 벌리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로마제국 판도 안에서는 시장에서 파는 고기들이 대부분 우상에게 먼저 제물로 드렸던 것이므로, 어느 분은 이를 꺼림칙하게 여기어서 아예 채식만 하는데, 어느 교인들은 어쩔 수 없이 우상의 제물을 먹는 일이 많았고, 또한 날짜에 대한 시비도 유대인들은 안식일을 토요일로 지키고 기독교인들은 주일을 지킴으로 누가 옳으냐의 시비로 교회가 시험의 기운이 가득 차게 되었던 것입니다
더 나가서는 소위 신앙적으로 살려고 힘쓰는 자들이, 양다리 걸친 약한 교인들을 사정없이 공격하는 일들로 인해 상처를 받는 경우가 많았던 것입니다. 오늘 한국교회도 그런 일이 많습니다. 우리가 우상숭배나 음란한 짓, 부정을 저지르는 것은 분명한 죄임으로 더 이상 논의할 일이 못되나, 한국교회만 유독 가지고 큰 문제는 술 담배 문제로, 교인들 중에 이 문제로 고민하는 분들이 대단히 많습니다. 아무리 끊으려고 해도 인이 박혀서 결심대로 끊어지지 않습니다.
더 큰 문제는 신학적인 문제입니다. 성경에 분명히 금지하는 말씀이 분명치 않습니다. "술 취하지 말라"는 말씀은 있으나 한 두 잔을 금하는 말씀은 없고, 더 나가서는 담배를 언급한 곳이 전혀 없습니다. 특히 술 담배를 취하는 자는 구원을 받지 못한다는 말씀이 전혀 없습니다. 그럼에도 한국교회의 문제는 교회를 다니면서 술 담배를 먹는 자는 마치 중죄인인 것처럼 취급하는 것입니다.
어느 여집사님은 남편이 모처럼 교회를 나오는데 출석한지 얼마 안 되는 때부터 술 담배를 끊으라고 윽박질러댐으로 나중에는 견디다 못해 교회까지 그만 두게 합니다. 구원 문제에 비하면 술 담배 문제는 만 분지 일도 안 되는 것인데, 그 문제로 교회를 떠나게 한다는 것은 너무나 어리석은 일입니다. 그러므로 각자 신앙의 양심에 맡길 수밖에 없고 또 요즈음은 술 담배가 건강에 얼마나 해롭다는 것을 매스컴이 계속 강조하고 있음으로 스스로 끊을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 믿음이 연약한 자들이 분명히 명심할 것은,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다고 하면서 계속 교회와 세상에 양다리 걸치며 살아서는 안 되는 사실입니다. 믿음이 자라야 합니다. 가정에서 어느 아이가 자라지 않고 계속 어린 아이로 남아 있다면 얼마나 가슴이 아픕니까? 하나님도 어느 성도가 믿음이 자라지 못한 채 항상 넘어지는 상태에 있다면 얼마나 안타까우실까요? 믿음이 자라려면 십자가에서 자아가 계속 못 박혀야 합니다. 날마다 죽어야 합니다. 그러면 계속 부활의 능력을 통해서 믿음이 자랄 것이며, 그와 동시에 자연적으로 어린 아이의 일을 버리게 될 것입니다.
■ 1998년 '그 해의 교육자'로 뽑힌, 코페이빌레 대학장인 맥파랜드 박사는 졸업식에서 자기의 제자 낸시 홀링 스워드의 이야기를 소개했습니다. 낸시와 오빠 둘은 어려서 부모가 죽음으로 난데없이 고아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삼촌 벤이 그 아이들을 양자 양녀로 맞아들이려고 하는데 법원에서 입양을 허락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이유는 삼촌이 알코올 중독자라는 때문이었습니다. 그 때 삼촌 벤은 판사 앞에서 무릎을 꿇고 눈물을 흘리며 맹세하기를 "판사님께 두 가지 약속을 하겠습니다. 첫째, 오늘부터 술을 끓겠습니다. 둘째, 이 아들 셋과 내 아이 셋을 위하여 날마다 저녁에 기도하겠습니다."라고 했습니다. 판사는 이 술주정꾼의 첫 번째 약속은 믿지 않았으나 두 번째 약속은 특이하기 때문에 우선 30일 동안 시험 기간으로 아이들을 맡기기로 했습니다. 과연, 벤은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모든 고통과 싸우며 술을 끓고 저녁마다 아이들을 모아 기도하며 공장에도 결근하지 않고 시간 외 근무까지 하는 것이었습니다. 벤은 자기 아이 셋과, 양자 양녀 셋을 모두 대학까지 졸업시킬 정도로 장한 아버지가 되었습니다. 삼촌 벤은 아이들에게 늘 말하기를 "이 아버지를 보았지? 하나님이 도와주시면 누구나 새사람으로 거듭날 수 있다. 그리고 한 사람이 거듭나면 많은 사람이 행복해질 수 있어"라고 했다고 합니다. 그 동안 삼촌 벤은 얼마나 자기와의 싸움에서 고통을 받았을까요? 아마 술이 먹고 싶어 견딜 수 없을 때마다 하나님이 앞에 엎드리어 자기를 십자가에 못박고 울면서 자기를 이길 수 있는 능력을 달라고 구함으로 이런 변화의 역사를 만났을 것입니다.
사랑하시는 여러분이여, 아직도 변화 받지 못한 분들은 이번 사순절 기간동안 주안에서 변화를 받으십시오. 그리고 변화는 받았지만 아직도 어린아이의 연약한 믿음을 가진 분들은 하나님께 간절히 구함으로 믿음이 한 단계 더 성장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2. 믿음이 강한 자, 강한 단계가 있습니다.
어린 아이가 자라면 청소년이 됩니다. 청소년 때는 대단히 강해집니다. 하루 다르게 성장하면서 힘과 능력이 넘쳐납니다. 고등학교 정도 되면 아버지와 씨름해도 아버지가 질 정도로 강해집니다. 더 나가서는 과거에는 남이 나를 도와주었지만, 청소년이 되니까 부모를 돕고 이웃을 돕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능력에 의해서 믿음이 자라니까 점점 강한 신자, 여러 가지 은사가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어린 신앙일 때는 자기 자신을 이기지 못하여 밤낮 넘어지는 신자였습니다. 신년 초부터 결심하는 것이 많았습니다. 열심히 기도하기로 하고 새벽기도를 시작했지만 한 달도 못되어 잠을 이기지 못 함으로 실패하고 혈기와 욕심을 부리지 않겠다고 단단히 결심했지만 어느 날 보니 여전한 것을 보면서 '나 같은 것은 아무리 애써도 소용이 없어'라는 자포자기하는 마음이 생기기도 합니다. 그러나 아닙니다. 넘어진 자리에서 다시 일어나서 하나님께 나아가 능력을 구하십시오.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다시 일어나 하나님 앞에 서십시오.
그러면 놀랍지요. 아이들이 넘어지고 깨어지는 속에서 점점 강하게 되고 어느 날부터 어린 아이의 상태를 벗어나는 것처럼, 넘어지고 일어나서 하나님 앞에 나갈 때에 어느 날부터 믿음의 능력이 임하니까, 자기를 이길 수 능력이 임하게 됩니다. 혈기와 욕심도 절제할 수 있고 나쁜 습관도 끊을 수 있고, 기도와 충성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단계까지 이르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세상의 것들을 끊지 못할 정도로 어린 아이 같은 연약한 믿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믿음의 능력이 강하게 임하니까 어린 아이의 상태에서 벗어나 오늘 같은 강한 믿음의 사람들이 되신 것입니다. 그러나 믿음이 강한 자들은 거기에 만족해서는 안됩니다. 청소년들이 자기는 이제 키도 다 컸고 힘도 있으니까 어른이 다 되었다고 자만하는 것은 얼마나 잘못된 것입니까? 더 성장해야 합니다. 더 어른스러워야 합니다.
식물이 싹이 자라고 잎이 무성해지면 얼마나 강해 보입니까? 그렇다고 그 나무가 다 성장했다고 할 수 있습니까? 아닙니다. 그 다음 단계는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우리 신자들이 잎만 무성하고 열매가 없으면 무화과나무처럼 책망을 면치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한 단계 더 성장해야 합니다. 그런데 믿음이 강한 자들이 더 성장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명심할 것입니다. 연약한 믿음의 소유자들을 바라보고 비판하지 말아야 합니다. 잘못하면 바리새인같이 율법주의적인 신앙의 소유자가 되기가 쉽습니다.
오늘 본문 1절을 보면 "믿음이 연약한 자를 너희가 받되 그의 의심하는 바를 비판하지 말라"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내 신앙이 중요한 것같이 남의 신앙도 귀한 줄 알고 함부로 남을 비판하거나 판단함으로 남의 신앙에 상처를 주어서는 안됩니다. 가령, 어느 집에 초대를 받고 가서 음식을 먹는데 알고 보니 어제 저녁에 제사를 지낸 음식입니다. 부인은 교회 집사님이지만, 시댁은 믿지 않음으로 할 수 없이 제사를 지냈던 것입니다. 그 때 "나는 제사 음식을 안 먹어요. 성경에서 금하거든요."라고 말하면 얼마나 무안하겠습니까?
왜냐하면 성경에 뚜렷이 명시하지 않은 문제에 대해서는 자기 믿음의 양심에 따라 결정할 일이지, 남이 이래라 저래라 판단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철저히 성경의 말씀에 따라 믿음의 순결성을 지키어야 하는 반면, 크게 중요하지 않고 또 아무리 토론해도 결론이 나오지 않는 문제로 서로 다투고 심한 경우에는 파가 생겨짐으로 교회를 갈라지게 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사랑의 계명을 어기는 더 큰 범죄를 저지르는 것이 되기 쉬운 것입니다.
그러므로 때로 교회 안에서 이 사람은 이것이 옳다 하고 저 사람은 저것이 옳다 하는 경우에는 서로 다투지 말고 서로 믿음의 양심에 따라 결정해야 합니다. 그것이 사도 바울의 주장입니다. 가령 제사 음식이 믿음의 양심에 꺼리거든 먹지 말라. 그러나 양심에 꺼리지 않거든 먹으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나의 믿음의 양심의 것을 다른 성도에게 강요해서는 안 된다고 했습니다. 어느 분은 봉헌할 때에 이름을 밝히지 않는 것이 옳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어느 분은 이름을 밝히는 것은 자기의 신앙고백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런 때는 각자 신앙의 양심에 따라 행할 수밖에 더 없습니다. 문제는 자기가 하는 것이 옳다는 것을 주장하기 위해 남의 태도를 비판하는 자세는 옳지 않은 것입니다. 특별히 믿음이 약한 사람일수록 우리는 비판을 조심해야 합니다. 우리가 연약한 자를 지나치게 비판함으로 그 사람이 실족하게 된다면 그 죄는 큰 것입니다. 왜냐하면 3절 하반절에 보니까 하나님을 저를 자기의 자녀로 받으셨기 때문입니다.
10절에 보면 하나님이 받으신 자를 우리가 비판하거나 업신여기는 것은 심판을 받을 일이요, 심판의 권한은 하나님께만 있기 때문에 우리가 정죄성 비판을 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성역을 범하는 죄가 되기 때문입니다. 또한 남을 비판한다는 것은 곧 교만의 자세입니다. 교만은 성장의 큰 저해요소가 됩니다. 비판은 세 명을 죽게 한다고 합니다. 먼저 자신이 죽게 하며, 둘째는 상대방을 죽이게 하며, 세 번째는 듣는 자를 죽게 한다고 했습니다.
■ 미국의 저명한 정신과 의사인 깁손 박사와 휜크 박사는 다음과 같은 발견을 하게 되었습니다. 과거 2년 동안의 모든 기록을 조사해서 긴장과 불안에 싸여 애를 쓰는 사람들에게 어떤 공통적인 요소나 특징이 있는가 조사한 결과 그런 증상을 가지고 있던 모든 사람들의 공통적인 특징은 다른 사람들의 결점을 찾아내려는 태도, 즉 남을 비판하는 정신이나 태도가 강하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그래서 병원에서는 그 발견을 적용하여 즉시 시험에 들어갔습니다. 불안과 초조, 긴장 등의 문제를 가진 환자들 100명을 선정하고 그들에게 이 조사와 연구의 결과를 말해주고 이제부터 여기 있는 동안 일체 다른 사람을 비판하는 자세를 버리고 오히려 칭찬하는 자세를 가지도록 지시했습니다. 환자들은 지시에 따라 행동하였습니다. 일정의 기간이 지난 후, 그 증상을 앓던 환자들을 조사해 보니 100명중 70명의 상태가 놀랍도록 좋아졌고 나머지 사람들 가운데 20명은 의사의 지시대로 행하지 않았다고 고백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남의 결점이나 잘못에 관심을 두고 생각하고 비난하고 비판하는 자세는 심적인 불안, 고통을 가져올 뿐 아니라, 심한 경우에는 자신이 정신병에까지 이르게 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비판받지 않으려면 비판하지 말라. 너희의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으리라"하신 주님의 말씀은 의학적으로 규명된 진리인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믿음이 연약한 자들이 우리의 비판으로 실족한다면 하나님 앞에 심판을 받을 뿐 아니라 교만의 자세로 신앙성장에 큰 저해요소가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시는 여러분들이여, 여러분은 믿음으로 한 단계 성장되기를 원하십니까? 비판하는 마음을 십자가에 못 박아 버리고, 오직 우리 앞서 가시는 주님만 바라보고 그만 따라가며 닮으려는 겸손의 자세를 가지는 것인 줄 믿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3. 믿음이 성숙한 자, 덕을 나타내는 단계입니다.
청소년은 힘이 있고 능력은 있지만 아직도 미숙한 부분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이 책망한 무화과처럼 잎만 무성하지, 열매가 없다는 점입니다. 신앙의 단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리 은사가 강할지라도 그것이 신앙의 성숙한 단계는 아닙니다. 고전13:1-3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내가 예언하는 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랑의 열매가 있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 19절에 보면 "이러므로 우리가 화평의 일과 서로 덕을 세우는 일을 힘쓰나니"라 했습니다. 하나님이 성도들에게 요구하시는 삶은 사람들에게 화평을 가져다 주고 그들을 세워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는 자들은 화평을 이루고 덕을 세우는 일에 힘써야 합니다. 로마서에서는 그러한 삶을 많이 강조하고 있습니다. 롬12:18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평화하라" 롬15:2 "우리 각 사람이 이웃을 기쁘게 하되 선을 이루고 덕을 세우도록 할지니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는 것이 구체적으로 덕을 세우는 일입니까? 먼저는 하나님께는 영광을 돌리는 삶이요, 그 다음은 이웃을 위하는 삶입니다. 바울은 고전10:23-24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이 아니요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덕을 세우는 것이 아니니 누구든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말고 남의 유익을 구하라"고 했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우상제물을 먹어야 되느냐 마느냐와 안식일에 대한 논쟁에서 믿음이 강한 자가 약한 자의 믿음의 행위를 비판하지 말고 각자 신앙의 양심을 따라 행하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의 위대한 점은 믿음의 양심도 좋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덕을 세우는 일이라고 했습니다. 예를 들면, 우상제물을 먹는 것이나 술 담배 먹는 것이나 내 신앙양심에 전혀 거리낌이 없지만, 그러나 만약에 내가 우상제물을 먹는 것이나 술 담배를 먹는 것 때문에 초신자나 어떤 신자가 보고 믿음의 상처를 받거나 낙심하여 교회를 떠나는 일이 생긴다면 이는 덕이 안될 뿐 아니라, 마18:6에서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소자 중 하나를 실족케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에 그 목을 달리우고 깊은 바다에 빠뜨리우는 것이 나으니라"고 한 것을 보아 오히려 범죄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고전8:14에서 "그러므로 만일 식물이 내 형제로 실족케 하면 나는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바로 이것이 화평과 덕이 있는 삶인 것입니다. 모든 신앙생활을 자기 중심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중심, 다른 사람 중심으로 하는 것이 덕 있는 삶이요, 믿음이 성숙한 삶인 것입니다. 가정에서 어른이란 누구입니까? 어린 아이들의 연약과 허물을 씻어주고 감싸주며 그 연약과 허물의 짐을 대신 지는 자인 것입니다. 롬15:1 "우리 강한 자가 마땅히 연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고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랄 것이라"고 했습니다.
성숙한 믿음은 사랑의 열매, 덕과 화평의 삶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사실, 사랑 하나만 있으면 모든 것을 이루는 것입니다. 기독교 TV에서 보니까 이런 재미난 이야기가 소개되고 있습니다. 어느 노인 부부가 까페에 들어가서 비스켓과 커피를 먹는데 보니까, 할아버지가 먼저 비스켓을 먹고 틀니를 빼서 할머니를 준 다음, 커피를 마십니다. 할머니는 틀니를 끼고 비스켓을 먹더니 다시 틀니를 빼서 할아버지에게 준 다음 커피를 마시더랍니다. 노인들이 돈이 없으니까 한 사람만 틀니를 하고 공동으로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젊은이들이 들으면 약간 비위가 상하는 이야기지만, 그 노인들에게는 조금도 불편한 모습이 아니었다고 합니다. 바로 이것이 사랑의 삶입니다. 사랑만 있으면 그런 불편도 오히려 덮어지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교회가 가장 필요로 하는 사람은 말 잘하는 인물이 아니라 큰 가슴을 가진 인물입니다. 큰 가슴을 가진 인물은 어떤 자입니까? 십자가의 마음, 연약한 자의 허물을 덮어주고 감싸주며 그것을 대신 지는 희생적인 인물입니다. 그런 인물이 많은 교회는 복 있는 교회입니다.
■ 미얀마에서 선교활동했던 아도니람 저드슨 목사는 예수님을 전한다는 이유만으로 17개월 간 투옥되었습니다. 그것도 발목에 무거운 쇠고랑을 차고 습기 많은 토굴에 갇혀 살았습니다. 그가 석방된 후 그는 다시 전도를 시작했는데 불교도 중 많은 개종자를 얻었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믿게된 것은 저드슨 선교사의 설교 때문이 아니라 발목에 새겨진 쇠고랑 자국 때문이었습니다. 진리가 아니면 그런 희생을 나타낼 수 없을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백 마디의 말보다 예수님과 인간들을 위한 희생의 '흔적'이 강한 능력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왜 우리가 예수님만 생각하면 가슴이 뭉쿨합니까? 그의 오묘하고 깊은 말씀 때문입니까? 아닙니다. 우리같이 더럽고 추한 인간들을 위해서 십자가의 모진 고통을 당하시면서 끝까지 참고 견디신 그 사랑 때문입니다.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들이여, 믿음이 연약한 자, 믿음이 강한 자, 믿음이 성숙한 자 중에 여러분은 어디에 속해 있습니까?
여러분 중에 아직도 변화 받지 못한 분들은 이번 사순절 기간동안 예수님의 십자가 안에서 변화 받으십시오. 변화 받았으나 아직도 어린 아이 상태에 있는 분은 더 성장하여 강한 믿음의 소유자가 되십시오. 믿음이 강한 자는 교만하지 말고 더욱 더 앞서가시는 주님을 겸손히 따라가며 닮아 가심으로 모두가 화평과 덕을 나타내는 성숙한 믿음의 소유자들이 다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