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고등학교 2학년 때 무역 회사의 과장으로 진급을 하신 아버지에게 자가용이 처음 생겼다. 현대에서 만든 흰색 포니2였는데 새차도 아니고 약 5년쯤 직장 상사분이 쓰시던 걸 받았다고 한 기억이 난다. 어쨌거나 꿈같은 마이카 실현을 이룬 우리 가족이 음식을 차려놓고 초저녁에 고사까지 지낸 기억이 나는 걸 보면 대단한 일임에는 틀림 없었던 모양이다. 더군다나 차를 받은 후 우리 아버지의 자세에는 이전에 없던 힘까지 들어가 마치 사장이나 되신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였다. 식사때 수저를 잡는 폼이 벌써 달라졌고 자가용을 가진 가족으로서의 품위와 처신을 일장 훈시하기도 하셨다.
수다 떨기 좋아하는 엄마의 푼수도 한 몫 했다. 포니 보다 좋은 차는 세상에 없는 거라며 우릴 세뇌교육 시켰다가 초등 학교 다니던 순진한 막내가 그 말을 학교에서 퍼뜨리는 바람에 친구들에게 왕따 당했다.(사실 그때 포니는 생산도 다 끝나 부속품 구하기도 어려운 시기였다) 여하간 우리가족에겐 일대 사건 이었다.
아버지가 앉는 운전석은 어린 우리들에겐 꿈의 구장이었다. 운전석 옆 보조석에라도 서로 앉으려고 5남매가 어찌나 싸웠던지...... 하지만 제일 유리했던 건 체구가 작은 막내였다. 아버진 막내를 늘 당신의 무릎팍에 앉히시곤 온동네를 돌면서 "저긴 오씨네 중국집, 저긴 최씨네 문방구, 저긴 니네 오래비가 맨날 가는 전자오락실..." 하시며 구경을 시켜 주시곤 하였다. 신호를 위반하는 차가 있으면 "자가용을 몬다는 사람이 말이야... 품위없이... 츳츳.." 하시며 삿대질을 하셨다. 나는 그때마다 얼른 어른이 되어 내 손으로 운전해 보겠다고 다짐하곤 했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나는 대학엘 들어가자 마자 운전 면허 시험에 응했고 그때의 포부가 맺혀서 인지 단 한번의 낙방도 없이 제 1종 보통면허를 받았다. 하지만 기쁜 마음도 잠시, 얼른 달려가 아버지에게 자랑을 하고는 당신의 차를 한번 운전해 봐도 되겠느냐고 물었다가 버릇 없는 놈이 임금 붕알을 만지려 든다는 헤괴 망칙한 꾸중만 들은 채 들고있던 면허증 까지 빼앗기고 말았다.
아버지가 폭군 네로처럼 화를 내고 있는데도 엄마는 말리기는 커녕 한술 더 떠 포니 2가 얼마나 비싸고 고급차인지를 장황하게 널어놓아 시린 내 가슴에 멍이 맺히게 했다. 닭똥 같은 눈물을 흘리며 나는 주먹을 불끈 쥐고는 언젠가는 아버지보다 좋은 차를 사서 복수(?) 하겠다고 맹세했다.
그 후로 몇 년이 흘렀고 우리 가족의 차는 조금씩 더 나은 걸로 몇 번 바뀌었다. 내게도 차가 생겨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나의 푸코(내차의 별명)를 몰고 다닐 수 있어서 드디어 포니의 악몽으로 부터 탈출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언제 부터인가 운전 때문에 집으로 부터의 호출이 잦아졌다. 이유인즉, 주말마다 독실한 불교 신자이신 부모님들께서 절에 가시는데 운전할 사람이 없다는 것이다. 아버님께서 왜 직접 안하시느냐고 물어보면 "운전도 하루이틀이지 이젠 귀찮아, 그리고 그 멀리까지 너무 지루해" 하고 대답하신다. 나는 그럴때 마다 의아해 해야 했다. 10년이 지나 강산이 바뀌면 사람의 마음도 바뀌는 건가? 그렇게 운전하시는 걸 좋아하던 아버지가 날더러 운전을 대신 하라고 하시는 걸 보면 뭔가 특별한 이유가 있을 법도 한데 도무지 종잡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며칠 후 나는 아주 우연히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아버지의 고등학교 친구분 중에 정형외과 선생님이 한 분 계신다. 개업을 하신 분인데 내가 의대를 가는 바람에 당신의 자식이나 다를 바 없다며 간혹 불러내어 저녁을 사 주시는 내겐 친숙부 같은 분이다. 어느날 그 분으로 부터 연락이 왔다. 대뜸 내게 어서 와서 주사제를 받아 아버님께 놔 드려라는 것이었다. 벌써 맞아야 할 날이 일주일이나 지났다는 첨언과 함께....
영문을 모르고 되묻는 내게 숙부 아저씨는 쌍놈이라며 어떻게 자기 부모 퇴행성 관절염이 온것도 모르고 있느냐고, 그런 눈쌀미로 어떻게 외과의사가 되겠느냐고 다그치셨다.
병원에 가서 아저씨의 설명과 아버지의 무릎 엑스레이를 보면서 고갤 들 수가 없었다. 그 정도가 될 때 까지 자식에게 말 한마디 하지 않으신 아버지가 얄밉기도 했고, 자동차의 기어를 바꿀 때 마다 아픈 무릎 때문에 고통스러워 하는 아버지의 얼굴이 떠올라 내 무릎이 시큰거리는 것 같았다. 집으로 달려가 관절강 내에 항염주사를 놓으면서 왜 나에게는 말을 하지 않으셨냐고 물었다. 아버지는 무뚝뚝하게 " 넌 네 환자나 잘 볼 생각 해" 하시며 온김에 내가좋아하는 열무비빔밥을 시켜먹자고 하셨다. 눈물이 맺혀 주사기끝이 보이지 않았다.
부모는 자식의 거름이라고 한다. 그 말은 아마도 나처럼 부모 고생 꽤나 시킨 어떤 자식이 만들었지 않았나 싶으다. 평생 살아가면서 단 한번도 멋적고 쑥스러워 사랑한다는 말을 해 보지 못한 부모님의 흰 머리카락이 종일 마음에 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