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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나안 정탐
민 13:1-20
1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2 사람을 보내어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주는 가나안 땅을 정탐하게 하되 그들의 조상의 가문 각 지파 중에서 지휘관 된 자 한 사람씩 보내라
3 모세가 여호와의 명령을 따라 바란 광야에서 그들을 보냈으니 그들은 다 이스라엘 자손의 수령 된 사람이라
4 그들의 이름은 이러하니라 르우벤 지파에서는 삭굴의 아들 삼무아요
5 시므온 지파에서는 호리의 아들 사밧이요
6 유다 지파에서는 여분네의 아들 갈렙이요
7 잇사갈 지파에서는 요셉의 아들 이갈이요
8 에브라임 지파에서는 눈의 아들 호세아요
9 베냐민 지파에서는 라부의 아들 발디요
10 스불론 지파에서는 소디의 아들 갓디엘이요
11 요셉 지파 곧 므낫세 지파에서는 수시의 아들 갓디요
12 단 지파에서는 그말리의 아들 암미엘이요
13 아셀 지파에서는 미가엘의 아들 스둘이요
14 납달리 지파에서는 웝시의 아들 나비요
15 갓 지파에서는 마기의 아들 그우엘이니
16 이는 모세가 땅을 정탐하러 보낸 자들의 이름이라 모세가 눈의 아들 호세아를 여호수아라 불렀더라
17 모세가 가나안 땅을 정탐하러 그들을 보내며 이르되 너희는 네겝 길로 행하여 산지로 올라가서
18 그 땅이 어떠한지 정탐하라 곧 그 땅 거민이 강한지 약한지 많은지 적은지와
19 그들이 사는 땅이 좋은지 나쁜지와 사는 성읍이 진영인지 산성인지와
20 토지가 비옥한지 메마른지 나무가 있는지 없는지를 탐지하라 담대하라 또 그 땅의 실과를 가져오라 하니 그 때는 포도가 처음 익을 즈음이었더라
민 13:1-20 / [가나안 땅을 탐색하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셨다. 2) `가나안 땅으로 정탐꾼을 보내라. 가나안 땅은 내가 너희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겠다고 약속한 땅이 아니냐? 각 지파별로 대표자 한 사람씩을 뽑아 가나안 땅의 사정이 어떤지 몰래 탐색하고 돌아오게 하여라.' 3) 모세는 여호와의 말씀대로 바란 광야에서 가나안 땅으로 정탐꾼을 보냈다. 가나안 땅으로 보낸 사람들은 각 지파에서 뽑은 이스라엘 백성의 우두머리들이었다. 4-15) 다음은 그들의 이름이다. 르우벤 지파 삭굴의 아들 삼무아, 시므온 지파 호리의 아들 사밧, 유다 지파 여분네의 아들 갈렙, 잇사갈 지파 요셉의 아들 이갈, 에브라임 지파 눈의 아들 호세아, 베냐민 지파 라부의 아들 발디, 스불론 지파 소디의 아들 갓디엘, 므낫세 지파수시의 아들 갓디, 단 지파 그말리의 아들 암미엘, 아셀 지파 미가엘의 아들 스둘, 납달리 지파 웝시의 아들 나비, 갓 지파 마기의 아들 그우엘. 16) 이상이 모세가 가나안 땅을 탐색하고 오라고 보낸 각 지파 대표자들의 이름이다. 모세는 눈의 아들 호세아의 이름을 여호수아라고 고쳐 불렀다. 17) 모세는 가나안 땅을 탐색하고 오라고 그들을 보내면서 이렇게 지시하였다. `너희는 여기서 북쪽으로 올라가 가나안 땅의 남부를 지나서 산악 지역으로 가거라. 18) 그곳의 지형이 어떠한지를 자세히 살펴보고, 그 땅에 사는 주민들이 강한지 약한지, 주민이 많은지 적은지도 알아보아라. 19) 그 땅이 좋은지 나쁜지, 그들이 살고 있는 곳이 마을인지 요새인지도 살펴보아야 한다. 20) 또 그 땅이 기름진 땅인지 메마른 땅인지, 나무가 많은지 적은지도 잘 살펴보아라. 자 무서워하지 말고 용기를 내어라. 돌아올 때에는 잊지 말고 그 땅에서 나는 과일을 따와야 한다.' 그들이 가나안 땅을 탐색하기 위하여 떠날 때에는 포도가 막 익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본문에는 가나안 정탐의 원인과 열 두 명의 정탐꾼과 그들이 할 일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가나안 땅을 정탐하게 하되(1-16) 이스라엘 백성은 광야 여정의 어려움으로 인하여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불신과 가나안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가나안 정탐을 요구하기에 이르렀고(신 1:1-23), 가나안 땅 가까이에 있는 바란 광야의 가데스바네아에 이르자 하나님께서는 그 땅을 정탐하기를 허락하셨습니다. 이 정탐은 정복의 방법을 찾는 것이 아니라 그 땅이 하나님이 약속하신 대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임을 확인시키며 이스라엘의 믿음을 강화시키는 것이 목적이었습니다. 가나안은 남북이 240km, 동서가 85km, 전체 면적이 22,000km로서 일주일 정도면 충분히 탐지할 수 있었지만 이들이 40일 동안 정탐업무를 수행한 것은 그 땅의 지형과 거주민, 그리고 산물들을 자세히 조사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각 지파 중에서 “각 지파 중에서 지휘관 된 자”는 열두 지파의 족장이 아니라 정탐을 위해 특별히 선발된 사람입니다. 그들은 건강하고 신임이 두터운 청장년들이었을 것입니다. 그들의 이름이 하나하나 열거되어 있는 것은 어느 한 지파, 어느 한 사람도 중요하지 않은 사람이 없으며, 모두 다 귀히 여김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너희는 네겝 길로 행하여 산지로 올라가서(17-20) 본 단락의 산지는 가나안 남부 지역에 있는 메마른 광야입니다. 나무가 자라지 않는 불모지로서 아말렉 족속이 살고 있었습니다. 산지로 올라가라는 것은 가나안 전 지역을 살피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모세는 그들에게 가나안 사람들의 강약과 다소, 땅의 호불호, 성읍이 진영인지 산성인지의 여부, 토지의 상태, 수목의 유무에 대해서 자세히 살피고 그 땅의 실과 중 포도를 가져오라고 지시했습니다. 모든 것은 불신의 이유가 아니라 믿음의 근거가 되어야 하는 것들이었습니다.
적용: 모세는 열두 명의 정탐꾼들에게 그들의 임무를 지시한 후에 ‘담대하라’라고 하며 격려하였습니다. 이는 그들 스스로의 힘을 의지하여 용맹성을 발휘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그들이 어떤 위험에 처하든지 그들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의지하여 모든 위기를 극복하라는 말입니다. 당신은 위기를 어떻게 극복하십니까?
하나님은 사랑스럽지 않은 사람들을 주위에 두셔서 우리에게 사랑을 가르치시고 우리가 계획대로 일이 진행되지 않고 혼란스럽고 당황스러운 상황을 경험하게 하심으로 우리 안에 진정한 평안을 허락하십니다. 우리가 슬픔 가운데 하나님을 찾을 때 진정한 기쁨을 가르쳐주시고 우리가 역경을 만났을 때 우리 곁에 계서서 이길 힘 주시고 축복하시는 분이심을 경험하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우리를 도우시고 지키시는 분이심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 설 교 >
내일을 여는 사람, 내일을 닫는 사람
민 13:1-16 / 오정호 목사
믿는 사람은 두 가지 눈이 필요합니다. 이미 주신 것에 대해서 볼 수 있는 눈이 필요합니다. 또 한 가지는 무엇입니까? 주님이 미래에 주실 복들을 바라보는 믿음의 눈이 필요합니다. 이렇듯 우리는 두 가지를 동시에 가져야 합니다. 우리가 누리지 않은 것이 무엇입니까? 다 가지고 있습니다. 전 세대에 비해서 우리는 너무나도 풍성하게 가졌습니다. 그러나 감사는 거기에 비례합니까? 우리의 누리는 경제지수, 우리의 누리는 환경지수, 우리가 가진 정보력, 모든 것이 나날이 흘러넘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또 질문합니다. 우리의 감사 지수도 점점 깊어지고, 넓어지고 있습니까? 미래 지수는 하나님을 사모하는 믿음의 눈입니다. 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2006년의 하반기를 허락해 주셨을까요? 어떤 사람은 하나님이 주신 기회를 죄 짓는 기회로 오염을 시킵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하나님 주신 기회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그리스도인다운 삶을 사는 영적인 기회로 삼습니다. 우리는 어느 편에 서야 합니까? 본문에는 12지파를 대표한 12명의 이름이 나옵니다. 그 이름 가운데서 우리가 기억하는 이름은 단 두 사람입니다. 여호수아와 갈렙이라고 하는 이름입니다. 믿음으로 살지 않고, 불신앙으로 살았던 사람의 이름은 다 잊혀졌습니다. 자신에게도, 가정에게도, 민족에게도 전혀 도움이 되지 못했습니다. 왜 하나님 앞에서 쓰임 받는 사람은 쓰임을 받았고, 쓰임 받지 못한 사람은 쓰임 받지 못했는가를 살피고자 합니다. 예수를 믿어 구원을 받아도 여전히 믿지 않는 사람처럼 살 수 있습니다. 승리하는 사람, 믿음의 사람, 열매 있게 사는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하는 원리를 살펴봅시다.
I. 승리하는 태도의 원리를 배운다.
“사람을 보내어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주는 가나안 땅을 탐지하게 하되”(2절) 약속의 땅 가나안에 백성들이 들어가기 전에 먼저 선발대를 보내었습니다. 우리는 이들을 정탐꾼이라고 말합니다. 소위 순찰대로 보낸 것입니다. 40일 동안 하나님이 허락하신 가나안땅을 탐지하고 그 땅의 형편과 지세를 알뿐 아니라 농업과 군사력에 대해서 정보를 수집하도록 특별한 명령을 받은 사람들은, “모세가 여호와의 명을 좇아 바란 광야에서 그들을 보내었으니 그들은 다 이스라엘 자손의 두령 된 사람이라”(3절) 다 예외 없이 이스라엘 백성의 두령 된 사람들이었습니다. 엘리트들입니다. 분석력, 정보력이 대단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 믿는 사람이 분석력 정보력 학력과 경력만 가지고는 안 됩니다. 신앙적 담대함이 필요합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2006년을 살아갈 때 우리에게는 신앙적 담대함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내 삶에 옮겨놓으려는 신앙적인 담대함이 필요합니다. 이들을 파송하는 그들의 영적 지도자 모세는 “담대하라”(20절)고 말합니다. 이 담대함은 사람이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붙잡는 가운데 오는 담대함을 말합니다. 사람은 유한한 존재이기 때문에 새로운 일을 만날 때, 새로운 시련을 만날 때 본래적인 두려움이 있습니다. 이 두려움을 뛰어 넘고 하나님이 하시려고 행하는 일들을 이루기 위해서는 심령의 용기가 필요합니다. 영적인 담대함이 필요합니다. 우리 새로남교회 저 탄방동에서 만년동으로 옮겨올 때 그 과정 가운데 성도들의 담대한 기도가 앞섰습니다. 영적인 지도자들의 담대함이 필요합니다. 담대함의 은혜를 갖기를 바랍니다. 어떤 일에도 두려워 떨지 마십시오. 담대하게 나가야 합니다. 전인미답의 땅을 거닐 때 왜 두렵지 않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붙잡는 가운데, 주님의 뜻과 명령 가운데 담대한 자들에게 하나님은 풍성한 열매를 허락해 주십니다.
II. 영향력 있는 대표의 원리를 배운다.
기록된 이들은 모두 대표였습니다. 각 가정을 대표하고, 각 지파를 대표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왜 대표가 중요합니까? 민족의 삶에 영향을 끼치기 때문입니다. 월드컵 축구대표팀 코치로 봉사했던 홍명보 코치는 인터뷰가운데 이런 질문을 받았습니다. 한국과 세계축구 가운데 격차가 얼마입니까? 그 질문에 대해서 그는 “볼 컨트롤, 기본기에서 큰 차이를 느꼈습니다. 체력은 언제라도 키울 수 있지만 기술은 어렸을 때 키우지 않으면 안 됩니다. 코치로서 뼈저리게 느낀 것 입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우리 역시 대표의식을 가지려면 영적인 기본기에 충실해야 합니다. 영적인 기본기는 무엇입니까? 주님 사랑, 주님과 가까이 하는 것, 공적 예배를 존중하는 것, 삶의 우선순위를 주님 앞에 두는 것, 내 뜻을 고집하고 내 방법대로 살기보다 하나님이 원하는 방법으로 살려고 몸부림치는 것, 이 모든 것이 영적인 기본기와 연결이 되는 것입니다. 안타깝게도 민수기 13장에 나타는 리더들 ·12명 가운데 10명은 백성들에게 희망을 주지를 못했습니다. 절망과 낙담을 가져다주었습니다. 나폴레옹은 “리더는 희망을 파는 상인”이라고 말했습니다. 왜 주님께서 주님을 믿는 사람들을 이 땅에 두셨을까요? 빛으로, 소금으로 두신 것입니다. 캠블랜 차드는 말합니다. “성공적인 리더십의 열쇠는 권위가 아니라 영향력”이라고 했습니다. 선한 영향력, 긍정적인 영향력을 미치는 것이 바로 리더의 역할입니다. 잘못된 리더는 백성들의 눈에서 피눈물을 짜내게 합니다. 이들은 똑똑한 사람이었고, 학력과 경력에서도 남다르게 탁월했지만 하나님에 대한 태도와 대표의 원리를 자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은 백성에게 아픔을 주었습니다. 영적인 대표선수의식을 가지고 우리 모두가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말씀을 받아 이 말씀이 나를 살리고 우리 가정을 살리고 우리 교회를 살린다는 분명한 의식을 가지고 산다면 하나님우리에게 상상을 초월한 은혜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III. 하나님이 일하시는 원리를 배운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사람을 보내어...”(1절) 첫째 원리, 하나님은 사람을 통해서 일하십니다. 준비된 사람, 순종하는 사람을 통해서 일하십니다. 아무리 그가 많은 탤런트를 가지고 있어도 순종하지 않는 자들을 통해 주님 일하시지 못합니다. 둘째 원리, 하나님은 치밀한 계획을 세우시고 일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출애굽 시키셨을 때는 가나안땅을 미리 염두에 두셨습니다. 가나안땅에 이스라엘 백성들을 두시기로 작정하시고, 계획을 세우시고, 모든 과정을 추진을 하십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심정을 너무나 몰랐습니다. 에베소서 1장을 보시면 우리의 구원이 임기응변처럼 된 것이 아님을 발견하실 것입니다.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여러분과 저를 택하신 줄 믿습니다. 웅대한 구원계획이 있습니다. 그 구원 계획 속에서 우리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결혼생활, 가정생활, 사업은 우연의 열매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계획하심의 열매입니다. 우리는 우리 대한민국에 우연히 태어나지 않았습니다. 우연의 산물이 아닙니다. 이번에 평양에 가서 “주님! 저를 휴전선 이북에서 태어나지 않게 하시고, 이남에 태어나게 하셨습니까?”라고 질문을 했습니다. 여러분이 새로남교회에 출석함은 우연이 아니라 하나님의 섬세하심의 결과입니다. 우연이라는 태도는 옳지 않습니다. 필연적으로, 사명적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허락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신 7, 8월에 우리 모두가 하나님 앞에서 쓰임받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올바른 태도를 주시고, 믿음의 태도를 통하여, 대표성의 원리를 깨닫게 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가운데 믿음으로 전진합시다.
당신 안에 있는 영적 거인을 깨우라
민 13:1-24 / 강준민 목사
우리 교회의 금년 슬로건이 새 역사를 창조하는 비전 공동체이다.
새역사를 창조하는 영적 거인이 되라.
새역사를 창조하는 것은 변화를 추구하는 것이다.
새역사를 창조하는 것은 모험하는 것이다.
아브라함이 갈대아우르를 떠나는 것처럼 새로운 땅을 나아가 밟고 인생의 새로운 지평을 넓혀가는 것이다.
갈렙은 85세에 헤브론을 내게 달라고 이야기 한다.
가나안 땅을 정탐한 후 45년이 지난 이후 그 땅을 달라는 것이다.
새 역사를 창조한다는 것은 남이 해 보지 않은 일을 도전하는 것이다.
한 번도 도전해 보지 않는 일에 최초로 도전하는 것이다.
최고보다 최초가 되길 원하는 사람이다.
완벽한 열매를 처음부터 기대하지 않는다.
첫 열매는 건실하지 않다. 그러나 갈수록 건실한 열매를 맺는다.
인생에서 최초가 되는 것이 중요하다.
1등은 기억되나 2등은 별로 기억되지 않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처음으로 시작하는 사람을 개척자라고 하며 오래 기억한다.
처음 시작하는 것이 중요한 것은 기초와 기준을 만들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태권도가 올림픽에 들어갔다.
우리의 국기와 같은 태권도가 올림픽 종목에 들어가면서 기준을 만들었다.
경기에서는 우리나라 말을 많이 사용한다.
우리가 만든 기준을 사용한다.
양궁도 그렇다.
바둑이 경기 종목에 들어간다면 또 하나의 기준을 만들어 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최초가 된다는 것은 기준을 만들어 내고 석권할 수 있는 계기가 되는 것이다.
구본형씨는 [월드 클래스를 향하여] 라는 그의 저서에서 기준을 만들라고 한다.
최고가 되기 전에 최초가 되라고 한다.
우리에게 개척자의 정신이 필요하다고 역설한다.
개척자 정신은 과거의 뿌리 속에서 자라나되 그대로 답습하는 것이 아니다.
과거를 중심으로 하되 주도하는 정신이다.
창조를 통해 대우를 받는다.
대가는 대우를 받는다.
대가에게는 추종자가 따른다.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고 모든 것을 처음으로 시작하셨기에 중요하다.
예수님의 탄생후 2003년이 되었지만 역사는 예수님 중심, 하나님 중심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새 역사를 창조하도록 도전하신다.
일을 행하는 여호와, 그것을 지어 성취하는 여호와, 그 이름을 여호와라 하는 자가 이같이 이르노라,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게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 ( 렘 33:2-3 )
기독교의 역사는 진보와 마지막 역사를 향해 나아가는 것이다.
하나님이 제일 싫어하는 것은 후퇴하고 옛날을 답습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뒤로 물러나는 것을 싫어 하신다.
너희는 이전 일을 기억하지 말며 옛적 일을 생각하지 말라 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니 이제 나타낼 것이라 너희가 그것을 알지 못하겠느냐 정녕히 내가 광야에 길과 사막에 강을 내리니 ( 사 43:18-19)
하나님은 새로운 인생길에 도전하라고 하신다.
익숙한 것과 결별하라고 하신다.
도전해 보지 않은 땅에 도전하라고 하신다.
그런 인물이 누군가? 여호수아 이다.
광야에 길을 낸다는 것은 결코 편한 것이 아니다.
사막에 길을 내는 것은 하나님의 역사가 아니고는 불가능하다.
12명의 정탐꾼중 새역사를 창조하는 두 사람만이 우리의 뇌뢰에 기억된다.
나머지는 12명은 기억할 필요도 없다.
최초만이 기억된다. 생애를 창조한 사람 만이 기억된다.
새역사를 창조하려면 도전의식, 영적 거인을 만나야 한다.
여호수아, 갈렙을 만나야 한다.
영적 거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영적 거인을 만드신 하나님이시다.
여호수아를 만나는 것보다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 더 중요하다.
하나님이 우리 뒤에서 우리를 영적 거인으로 만드신다.
하나님이 모세를 바로 앞에 새우셨다.
모세로 하여금 이스라엘 무리를 이끄는 하나님 같게 하셨다.
바로 앞에서, 아론 앞에서 하나님처럼 행하게 하셨다.
내가 뒤에 있으니 너는 앞에 나가서 영적 거인처럼 살라고 말씀 하셨다.
지나간 과거의 변하지 않는 말씀 원리를 따라 살라.
원리를 터득해 이 시대 여호수아 갈렙과 같은 창조적 소수자가 되라.
지나간 과거를 배워 머무르지 말고 과거를 통해 새 역사를 창조하라.
어떻게 새로운 역사를 창조할 수 있는가?
첫째, 좋은 만남을 통해 자신 안에 있는 영적 거인을 깨우라.
먼저 당신이 영적 거인임을 알라.
우리는 좋은 만남을 통해 자신이 영적 거인임을 안다.
여호수아가 모세를 만나면서 모세를 통해 자신 안에 영적 거인이 있음을 알았다.
민 13:1-2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사람을 보내어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주는 가나안 땅을 탐지하게 하되 그 종족의 각 지파 중에서 족장된 자 한 사람씩 보내라.
모세가 가나안 땅을 정탐하면서 12명을 선택한다.
6절 유다 지파에서는 여분네의 아들 갈렙이요
8절 에브라임 지파에서는 눈의 아들 호세야요
16절 이는 모세가 땅을 탐지하러 보낸 자들의 이름이라, 모세가 눈의 아들 호세아를 여호수아라 칭하였더라.
호세아는 여호수아의 이름이다.
모세는 특별히 여호수아의 이름을 바꾸었다.
여호수아의 뜻은 하나님은 구원이시다 이다.
헬라어의 표기로 예수이다.
예수님의 모형이다.
영원한 천국, 하나님의 나라로 인도하는 사람이다.
여호수아가 영적 거인을 발견하게 된 것은 모세를 만났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 안에 능력과 잠재력이 있다는 것을 모를 때가 많다.
시몬은 흔들리는 갈대라는 뜻이다.
데리고 예수께로 오니 예수께서 보시고 가라사대 네가 요한의 아들 시몬이니 장차 게바라 하리라 하시니라 (게바는 번역하면 베드로라) ( 요 1:42)
게바는 아람어이다. 베드로는 헬라어이다.
베드로는 예수님과 만나면서 영적 거인으로 새롭게 탄생한다.
인생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곧 만남이다.
농부는 씨앗을 만나고 본다.
씨앗속에 있는 잠재력, 가능성을 알아본다.
영적 거인만이 거인을 알아 본다.
모세는 여호수아를 만나면서 영적 거인이라는 것을 알아본다.
우리는 보이는 것을 본다.
알고 경험하고 소유한 것을 본다.
그러나 거인만이 거인 됨을 알아본다.
자신을 알아 주는 사람과의 만남을 통해 새롭게 탄생하고 역사가 바뀐다.
이런 만남은 축복된 만남이다.
하나님과의 만남이 제일 큰 축복이다.
예레미야가 하나님을 만나 열방의 선지자로 눈을 뜨기 시작한다.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내가 너를 복중에 짓기 전에 너를 알았고 네가 태어서 나오기 전에 너를 구별하였고 너를 열방의 선지자로 세웠노라 하시기로 내가 가로되 슬프드소이다주 여호와여 보소서 나는 아이라 말할 줄을 알지 못하나이다 (렘 1:4-6)
하나님을 만나 새로운 인생으로 탄생한다.
당신은 영적 거인이다.
무한한 잠재력과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그것을 알지 못하고 발견하지 못하고 계발하지 못해서 땅에 씨앗을 묻은 것 처럼 산다.
일어나라.
당신안의 놀라운 잠재력을 깨우라.
성도 속에서 잠자는 거인을 깨우는 것이 나의 일이다.
여러분의 꿈을 하찮게 여기는 사람을 가까이 하지 말라.
당신을 인정해 주고 높여주고 당신의 꿈을 귀하게 여기는 사람을 가까이 하라.
그 사람이 영적 거인이다.
둘째, 맡겨진 사명을 통해 자신 안에 있는 영적 거인을 깨우라.
여호수아는 열 두명중의 하나인 스파이로 가나안 땅을 갔다.
위험한 사명을 맡았다.
각지파중 1명을 선택하는 데 거기에 포함되었다.
그러나 가나안을 들어갔다고 다 같은 것은 아니다.
12명이 다 갔는데 각각 다르게 본다.
정탐이라는 일은 어쩌면 작은 사명일지 모른다.
그러나 이것을 성실히 완수하는 것을 통해 그는 더 큰 사명을 맡는다.
최선을 다해 일을 하면 그것을 통해 더 큰일을 맡긴다.
포기할 수 없는 절대 사명을 맡을 수 있다.
그 주인이 이르되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할지어다 하고 ( 마 25:21)
하나님의 은혜는 하찮은 것이 없다.
작은 것을 맡을 때 최선을 다하라.
어떻게 일을 감당하는지 하나님이 보고 계신다.
다윗은 남의 양을 맡아서 지키기 위해 물맷돌을 연습한다.
양을 지키기 위해 연습한 것이 최선을 다하다가 하나님이 기회를 주어서 골리앗을 쓰러뜨리는데 그 물맷돌을 사용한다.
작은 사명완수를 통해 하나님이 그에게 놀라운 일을 맡기시고 영광을 받으신다.
나는 고등학교때 새벽 종치는 일을 2년 동안 했다.
정말 열심히 했다.
고등학교 타이프를 치면서 주보를 만들었다. 교회에서는 사찰처럼 일했다.
청소하고 겨울에 난로를 위해 톱밥을 준비하고 청소를 했다.
매일 새벽 새벽종 치는 일 제일 먼저 나와야 한다.
작은 사명을 완수하는 과정을 통해 더 큰일을 맡기시는 것을 경험했다.
미국에 와서 대학생들 , 캠퍼스 미니스트리를 8년을 했다.
교통비 한번 받은 적이 없다.
집에 데려다가 8년 동안 학생들을 먹였다.
그 결과 젊은이들이 좋아한다.
당신에게 현재 맡겨진 사명을 꾸준히 하라. 최선을 다하라.
그 다음 단계를 맡기신다.
놀라운 하나님의 역사다.
우리 자신을 발견하는 독특한 역사가 나타난다.
새로운 일, 위기, 문제를 통해 하나님은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 간다.
내 안에 어떤 역사와 가능성이 있는지 모른다.
모세스라는 여인은 나이 80에 유명한 화가가 되었다.
언제 우리의 재능이 드러날지 모른다.
그것을 사용하지 않음으로 내 안에 잠재력을 모른다.
우리 인생가운데 실패, 위기, 좌절과 낙심을 경험하는 일들이 놀라운 경험을 만들어 낸다.
척 콜슨 이라는 보좌관이 있었다.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감옥에 연루되었다.
감옥에서 책을 한권 소개 받는다.
C.S 루이스의 [단순한 기독교]라는 책이었다.
이책을 통해 그는 그리스도를 만났다.
그리고 감옥에 있는 동안의 경험을 계기로 감옥 선교 비전을 받고 현재는 놀라운 감옥 선교 사역을 하고 있다.
감옥속에서 그는 자기 안의 가능성을 발견했다.
최근 [야생초편지]라는 책을 읽었다.
학원 간첩단 사건에 연루된 저자가 13년 2개월 동안 감옥 생활을 하는 가운데 쓴 편지이다.
농대를 졸업한 저자가 할일이 없어서 감옥 안에서 야생초를 연구한다.
야생초 연구를 하고 길러서 뜯어 먹기도 하고 키우기도 한다.
야생초를 관찰하면서 쓴 글을 통해 많은 사람이 감동을 받는다.
저자는 잡초를 보고 가능성을 몰라 잡초라고 한다고 안타까워 한다.
저자에 의하면 전 세계적으로 야생초가 35만종이 있다는 것이다.
그중 인간들이 재배 해서 먹는 것 3천종이며 사람들은 나머지 34만 7천종을
잡초라고 뽑아 없애는 우를 범하고 있다는 것이다.
저자는 잡초를 [야초]라고 한다.
각각의 야초는 나름대로 고유한 가치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단지 각각의 자치를 아직 모른다고 없애서는 않된다는 것이다.
“잡초는 그 가치가 아직 우리에게 알려지지 않은 풀이다” (에머슨)
우리는 모르면 잡초라고 한다.
그러나 야생마가 길만 들여지면 준마가 된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
아직 그 가치가 발견되지 않은 것 뿐이다.
당신은 놀라운 거인이다.
새역사를 창조할 거인이다.
셋째, 영적 거인의 발자취를 따라감으로 영적 거인이 되라.
영적 거인은 어떻게 사는가?
영적 거인은 무엇을 소중히 여기는가?
존귀히 여기는 가를 배우라.
1) 영적 거인은 하나님의 말씀을 나침반으로 삼는다.
하나님의 말씀을 존귀히 여긴다.
모세, 여호수아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
배를 타고 항해하는 항해사에게 제일 중요한 것은 나침반이다.
바다는 길이 보이지 않는다.
바다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나침반이다.
성경이 우리 인생의 길이다.
길되신 예수님께 나아가 나침반을 가지라.
세상 사람들이 방황하는 이유는 나침반이 없어서 이다.
말씀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면 나침반을 갖고 방향을 갖고 사는 것이다.
요직 너는 마음을 강하게 하고 극히 담대히 하여 나의 종 모세가 네게 명한 율법을 다 지켜 행하고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라 그리하면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리니
(수1:7)
새 인생을 개척하는 것 중 제일 중요한 것은 말씀을 붙잡는 것이다.
물건이 고장나면 매뉴얼로 돌아간다.
인생의 문제 앞에 성경으로 돌아가라.
2) 영적거인은 비전의 능력을 안다.
먼저 가서 보는 것이 비전이다.
남이 볼 수 없는 것을 보는 것, 하나님의 안목으로 보는 것이 비전이다.
하나님이 보는 눈으로 보는 것이 비전이다.
아브라함을 향해 동서남북을 보라.
하늘의 별을 보라고 하셨다.
보는 자가 얻는다.
보는 사람이 인도한다.
리더쉽의 관점에서 보면 모세가 실패한 이유는 모세는 가나안을 본적이 없기 때문이다.
모세는 광야만 보았다.
그러나 여호수아는 직접 가나안을 보았다.
우리는 상상으로 보고 직접 가보아야 한다.
교회는 꿈, 비전이 있어야 한다.
보는 것이 중요하다.
3) 영적거인은 좋은 지도를 갖기를 소원한다.
가나안에 들어가서 정탐꾼이 했던 일은 로드맵을 그리는 것이었다.
인생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지도이다.
샌프란시스코를 가야 하는데 잘못해서 샌디에고 지도를 받으면 잘못 간다.
잘못된 지도를 갖고 가면 샌디에고를 가는 것이다.
샌디에고를 가면서 통성기도 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지도를 잘못 가지면 않된다.
정탐꾼은 먼저 지도를 그렸다.
지도를 수정하는 것을 어려워 하지 말라.
더 좋은 지도를 갖기 위해 옛날 지도를 과감하게 버려라.
고정관념, 아집을 버려라.
쓸모없는 지도를 버려라.
시대가 바꾸었다. 아직도 애굽의 지도를 갖고 사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가난안 땅의 지도를 갖고 살아야 한다.
배워야 한다.
사실 설교를 듣는 것은 지도를 갖는 것이다.
설교를 듣는 것은 생의 목표와 설계도를 갖는 것이다.
인생의 설계도를 어떻게 가질 것인가.
유언, 장례식의 조사를 먼저 작성해 보라.
정말로 원하는 조사를 먼저 써보라
라이프 맵핑을 하라.
여호수아는 늘 가나안을 생각하다가 가나안에 들어갔다.
4) 영적 거인은 정보를 생명처럼 여긴다.
21세기는 정보를 얻는 자가 이긴다.
가나안의 정보를 가져야 한다.
시대가 바꾸었다. 디지털 시대이다.
정탐꾼들은 정보, 땅의 형편이 어떤지를 알아 보았다.
땅의 형태, 실과 유무 등을 정확히 알아보았다.
9.11사태가 있기전 테러리스트 정보를 알았다면 많은 사람이 희생 당하지 않았을 것이다.
정보는 생명이다.
정보는 생명과 지식을 얻는 것이다.
정탐꾼은 미리 가나안 땅의 형편을 얻었다.
나는 동양선교교회 부임전에 한달 동안 동양선교교회를 연구했다.
그래야 섬길 수 있었기 때문이다.
사람들의 성향, 코리안 타운의 흐름 등을 알아 보았다.
정보를 소중히 여기는 사람은 정보의 중요성을 안다.
여호수아가 먼저 정탐꾼을 보냈다.
그곳에서 라합을 만나 생명을 얻는다.
정보를 제공한 라합은 생명을 얻고 예수님의 족보에 들어간다.
하나님이 귀하게 사용하였다.
눈의 아들 여호수아가 싯딤에서 두 사람을 정탐으로 가만히 보내며 그들에게 이르되 가서 그 땅과 여리고를 엿보라 하매 그들이 가서 라합이라 하는 기생의 집에 들어가 거기서 유숙하더니 ( 여호수아 2:1)
아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우리는 아는 것을 현실에 적용해야 한다. 의지력만으로는 부족하다. 우리는 의지를 행동에 옮겨야 한다. (괴테)
하나님은 창조적 소수를 사용하셨다.
아놀드 토인비는 창조적 소수자의 특징을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첫째, 정보 교육을 중요시 한다.
둘째,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승리한다.
한국일보 이철 주필의 글이 공감이 갔다.
성공한 이민 사회의 특징은 두가지라고 한다.
첫째, 교육이다.
케네디, 레이건가는 모두 아이리시 계이다.
노동자로 이민온 조상들이 자녀들을 열심히 공부를 시켰다.
그결과 이민 150년만에 아이리시계는 대통령을 두명이나 냈다.
우리 교회의 비전, 선교, 교육, 봉사라는 것은 의미가 있다.
우리는 곧 중고등학교를 시작할 예정이다.
교육하지 않은 민족은 큰 민족이 될 수 없다.
징기스칸이 위대한 나라이나 빛을 발하지 못하는 이유는 교육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 나라는 놀라운 교육열을 가지고 있다.
미국의 유명한 대학마다 한국인 교수가 있다.
위대한 일이다.
둘째, 뒤를 돌아보지 말라는 것이다.
유대인들이 미국 사회에 뿌리를 내린 이유는 그들이 돌아갈 곳이 없어 배수진을 치고 살았기 땜누이다.
그들은 고국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이태리계나 스태니시계는 향수병어 젖어 산다.
그러니 그들에게서 인물이 안나온다.
여호수아는 가나안 땅을 보고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여러분도 이민 왔으면 한국을 자꾸 생각하지 말라.
자녀들을 미국 주류사회에 들어가 주류 역할을 감당하는 인물로 키우라.
한국 교회와 한국 민족을 사랑하는 사람이 되도록 키우라.
뒤로 돌아가려 하지 말라.
어디서 든지 그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고 뻗어 나가라.
애굽에서 가나안으로 떠나는 것처럼 돌아가려 하지 말라.
미국생활 하면서 한국으로 돌아갈 생각하지 말고 이땅에 뿌리를 내리고 미국 주류 사회에 들어가 세계를 움직이며 살아가는 성도들이 되자
영적 거인의 자아상을 소유하라
민 13:15-33 / 강준민 목사
새역사를 창조하려면 긍정적인 자아상을 소유해야 한다.
가나안을 정탐한 12명중 2명이 긍정적 자아상, 영적 거인의 삶을 살았다.
자아상은 자기 자신에 대한 의견을 의미한다.
내가 나를 어떻게 평가하는가
자신을 가치있는 존재로 평가하는가? 아니면 무가치한 존재로 평가하는가?
자신을 능력이 있는 사람으로 보는가? 아니면 능력이 없는자로 보는가?
자기 자신에 대한 의견이 바로 자아상이다.
새역사를 창조하는 대열에 들지 못했던 10명의 정탐꾼은 메뚜기 자아상을 소유했다.
스스로 자기들을 메뚜기라고 칭했다.
민 13:33
거기서 또 네피림의 후손 아낙 자손 대장부들을 보았나니 우리는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으니 그들의 보기에도 그와 같을 것이니라.
메뚜기 자아상을 가진 사람들은 스스로를 메뚜기라고 생각한다.
스스로가 자기 자신을 지나치리 만큼 과소평가 한다.
자신들을 메뚜기 라고 생각한 이들은 사실 메뚜기 같은 사람들은 아니었다.
12명 전부 각 지파의 두령이었으며 지도자요 족장이었다.
지도자 가운데 지도자를 세웠고 뽑고 뽑은 사람들이었다.
그런데도 자기들을 메뚜기라고 한다.
이런 자아상이 하나님이 주신 땅을 악평하게 하였다.
32절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탐지한 땅을 악평하여 가로되 우리가 두루 다니며 탐지한 땅은 그 땅 거민을 삼키는 땅이요 거기서 본 모든 백성은 신장이 장대한 자들이며
메뚜기 자아상을 가진 사람들은 하나님이 주신 땅을 악평한다.
아울러 자신 스스로도 메뚜기라고 이야기한다.
새로운 역사를 창조하려면 여호수아와 갈렙과 같은 자아상을 소유해야한다.
문제는 땅이나 하나님이 아니라 그들이 가진 자아상이 문제이다.
10명은 결국 광야에서 죽으나 2명은 새 역사를 창조하는 대열에 들어간다.
어떤 사람은 땅을 악평하나 어떤 사람은 젖과 꿀이 흐르는 사람이라고 말한다.
모두가 네피림 자손을 보았다. 그러나 10명은 두려워했으나 두명은 밥이라고 했다.
민 14:6-9
그 땅을 탐지한 자 중 누의 아들 여호수아와 여분네의 아들 갈렙이 그 옷을 찢고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에게 일러 가로되 우리가 두루 다니며 탐지한 땅은 심히 아름다운 땅이라 여호와께서 우리를 기뻐하시며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시고 그 땅을 우리에게 주시리라 이는 과연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니라. 오직 여호와를 거역하지 말라 그들은 우리의 밥이라 그들의 보호자는 그들에게서 떠났고 여호와는 우리와 함께 하시느니라 그들을 두려워 하지 말라 하나
무엇이 이들을 이렇게 만들었는가?
자아상이 이들을 이렇게 만들었다.
가장 큰 인생의 장애물은 환경이나 조건이 아니다.
우리 앞길을 막는 가장 큰 장애물은 우리 자아상 또는 우리 자신이다.
세상이나 환경을 바꾸려 하지 말고 나의 생각과 나 자신을 바꾸라.
내 생각과 나 자신을 바꾸는 순간이 인생의 터닝 포인트가 된다.
긍정적인 자아상을 가진 사람은 많지 않다.
대부분의 사람은 메뚜기 같은 부정적인 자아상을 가지고 있다.
메뚜기 자아상을 가진 사람, 부정적인 사람의 영향력은 매우 크다.
두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온 이스라엘 민족이 원망하고 불평한다.
애굽으로 과거로 돌아가자고 울부짖는다.
모세와 아론을 죽이려 한다.
대단한 일이다.
메뚜기 자아상을 버리고 영적 거인의 자아상을 가진 다는 것은 놀라운 혁명이다.
의식의 혁명이 내면 안에서 일어나면 놀랍게 바뀐다.
새역사를 창조하는 영적 거인의 자아상을 갖고 사는 사람은 얼마나 되는가?
새역사를 창조하는 비전 공동체가 되려면 한 사람 한 사람이 영적거인의 비전을
소유하는 것이 중요하다.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는 대다수의 사람은 절망적인 삶을 살고 있다고 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여론을 따라 살아간다.
겁이 많으며 인생을 도전하고 모험하는 사람들이 아니다.
죽은 물고기는 떠내려 간다.
살아있는 물고기는 물을 거슬러 올라 간다.
정탐꾼중 2명은 물을 거슬러 가나 나머지 모두는 떠내려 간다. 원망하고 불평한다.
근본 문제는 하나님이 아니라 이들의 자아상의 문제이다.
어떻게 하면 새역사를 창조하기 위해 긍정적, 영적 거인의 자아상을 갖을 수 있는가?
어떻게 하면 메뚜기 자아상을 포기하고 영적 거인의 자아상을 소유할 수 있는가?
첫째, 자아상의 중요성을 절실하게 깨달으라.
자신을 쓰레기, 메뚜기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2명은 하나님이 함께 하므로 밥이라고 이야기 했다.
1) 부정적인 자아상은 부정적인 미래를 창조한다.
10명의 정탐꾼의 특징은 자신들을 무가치 하다고 생각했다.
상대는 크고 자신은 메뚜기라고 생각했다.
자신감이 없다. 남과 비교한다
민 13:28
그땅 거민은 강하고 성읍은 견고하고 심히 클 뿐 아니라 거기서 아낙 자손을 보았으며
부정적인 사람들의 특징은 부정적이며 확신이 없는 언어를 사용한다.
우리는 하기 싫으면 하기 싫으면 어렵다고 말한다.
할 수 없다고 한다.
부정적인 자아상을 소유한 사람들은 과거 집착형이며 추억 집착형이다.
존재가 넉넉치 못하기 때문에 메뚜기들을 모아 힘을 규합하려 한다.
스스로가 너무 가치 없다고 생각해서 당을 짓고 여론을 형성하려 한다.
자꾸 다른 사람에게 부정적인 생각을 전염시킨다.
사람들을 모아 여론을 형성하고 악한 일을 저지르는데 명수들이다.
창조적인 자아상을 가진 사람은 여론을 형성하려고 하지 않는다.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이 역사하시도록 한다.
그러나 메뚜기 자아상을 갖고 사는 사람은 부정적인 미래를 창조하고 인생을 비참하게 마감한다.
지나간 과거에 집착하는 과거 집착형은 메뚜기 자아상을 갖고 있는 것이다.
가나안을 눈 앞에 두고 애굽으로 돌아가려는 것은 마치 펼쳐진 21세기 앞에서 20세기를 추억하는 것과 같다.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으신다.
사람은 자기가 좋아하지 않는 것을 악평 한다.
이숍우화를 보면 여우가 포도를 못 따먹으니까 신 포도라고 한다.
악평하고 싫어하면서 얻을 수 있는 것은 없다.
성공한 사람을 악평하거나 꼭 그래야만 하냐고 하는 사람은 성공할 수 없다.
교회가 꼭 성장해야 하는가? 골치 아픈데라고 생각하는 목회자도 있다.
살아 있는 것은 성장한다.
그렇게 생각하고 불평하는 사람은 교회를 성장시키거나 성숙시킬 수 없다.
열명의 정탐꾼과 그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아무도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했다.
부정적인 자아상을 가진 사람은 부정적인 미래를 창조한다.
민 14:36-38
모세의 보냄을 받고 땅을 탐지하고 돌아와서 그 땅을 악평하여 온 회중으로 모세를 원망케 한 사람 곧 그 땅에 대하여 악평한 자들은 여호와 앞에서 재앙으로 죽었고 그 땅을 탐지하러 갔던 사람들 중에 오직 눈의 아들 여호수아와 여분네의 아들 갈렙은 생존하니라.
긍정적인 자아상을 선택해야 한다.
그래야 하나님이 원하시는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 있다.
그래야 새역사 창조의 대열에 들어갈 수 있다.
2) 긍정적인 자아상을 가진 사람들이 새 역사를 창조한다.
여호수아, 갈렙은 긍정적인 자아상을 소유했다.
이것은 하나님의 안목으로 자기를 평가하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를 모른다.
그러나 우리를 만드신 하나님은 우리를 잘 안다.
자신을 아이라고 이야기하는 예레미야를 향해 하나님은 열방의 선지자라고 했다.
내가 너를 복중에 짓기 전에 너를 알았고 네가 태에서 나오기 전에 너를 구별하였고 너를 열방의 선지자로 세웠노라 하시기로 ( 렘 1:5)
우리는 하나님 앞에 나가서 하나님의 의견과 평가를 알아야 한다
우리는 열등생도 아니고 우등생도 아닌 우리 자신이다.
하나님이 평가하는 대로 그대로 보라.
하나님의 안목으로 나를 보는 것이 중요하다.
스스로 자신의 생각으로 자기를 보지 말라.
에례미야가 자신의 자아상을 버리고 열방의 선지자라는 자아상을 갖고,
베드로가 시몬에서 반석이라는 말씀을 붙잡았을 때
이들의 인생이 바뀌었다.
예수님을 만나고 하나님의 자녀요 왕 같은 제사장이요 하나님의 의견, 생각, 평가를 받아 들인 그 순간에 메뚜기 자아상을 버리고 영적 자아상을 갖게 된다.
긍정적 자아상을 가지라. 할 수 있다, 진취적이다, 모험한다는 생각을 하라.
민 14:30
여분네의 아들 갈렙과 눈의 아들 여호수아 외에는 내가 맹세하여 너희로 거하게 하리라 한 땅에 결단코 들어가지 못하리라.
민 14:9
오직 여호와를 거역하지 말라 또 그땅 백성을 두려워하지 말라 그들은 우리 밥이라 그들의 보호자는 그들에게서 떠났고 여호와는 우리와 함께 하시느니라 그들을 두려워 말라 하나
자신감에 차있다. 하나님을 보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함께 한다는 생각으로 자신감에 차 있었다.
거인 보다 가나안 땅보다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보았다.
하나님이 주신 땅을 보고 감사했다.
긍정적인 자아상을 갖고 승리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면 생각을 갖고 있으면 두려울 것이 없다.
긍정적인 자아상을 가진 사람은 다수의 말, 여론에 따라 움직이지 않는다.
교회는 민주적 방식에 따라 움직이나 민주주의는 아니다.
모두가 찬성해도 하나님이 아니라면 아니다.
모두가 곡을 해도 여호수아, 갈렙은 용기 있게 말했다.
사람을 두려워 하지 않고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하나님의 뜻을 좆는 사람이 창조적인 공동체를 만드는 사람이다.
제일 나쁜 공동체는 목소리 큰 사람의 뒤를 따라가는 공동체이다.
백성들이 밤새도록 울었음에도 여호수아와 갈렙은 끄떡 하지 않았다.
사명에 투철하면 죽음을 두려워 하지 않는다.
요한 웨슬레는 사명을 추구하는 것은 불멸에 이르는 길이라고 했다.
가장 좋은 공동체는 하나님을 좇는 공동체이다.
2명은 백성들이 공격하고 돌을 치려 해도 담대했다.
목회할 때 제일 힘든 것은 다수결로 하자는 것이다.
그러면 않된다.
하나님의 뜻을 물어보고 기도해 보고 결정해야 한다.
다수 때문에 하나님이 상처를 받는다.
다수 때문에 하나님의 일이 막혀 하나님이 가슴 아파 하신다.
창조적 자아상을 갖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살자.
오직 여호와를 거역하지 말라 또 그 땅 백성을 두려워하지 말라 그들은 우리 밥이라 그들의 보호자는 그들에게서 떠났고 여호와는 우리와 함께 하시느니라 그들을 두려워 말라 하나 ( 민 14:9 )
둘째, 긍정적인 자아상을 형성하는 원리를 터득하라.
1. 긍정적인 자아상은 부모에 의해서 형성된다.
자아상 형성에 있어 부모의 영향이 크다.
어머니가 잉태한 후 자녀를 어떻게 보는가가 중요하다.
모세가 영적 거인인 이유는 그 어머니 요게벳을 잘 만나서이다.
가장 가까운 부모의 책임이 크다.
그 여자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아 그 준수함을 보고 그를 석달을 숨겼더니 (출2:2)
하나님이 보시기에 아름다운 지라.
그 때에 모세가 났는데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운 지라 그 부친의 집에서 석달을 길리우더니 ( 행 7:20)
믿음으로 모세가 났을 떼에 그 부모가 아름다운 아이임을 보고 석달 동안 숨겨 임금의 명령을 무서워 아니하였으며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 봄이라 ( 히 11:23-26 )
모세의 모친은 모세에게 사명을 준다.
너는 모세다, 민족을 구해야 한다.
그는 애굽왕의 궁중에서 타락하지 않고 방탕하지 않았다.
어릴때 가치관 형성이 매우 중요하다.
2. 긍정적인 자아상은 좋은 만남에 의해 형성된다.
모세가 여호수아를 만나 창조적인 자아상을 형성했다.
이는 모세가 땅을 탐지하러 보낸 자들의 이름이라 모세가 눈의 아들 호세아를 여호수아라 칭하였더라 (민 13:!6)
특별한 만남이 특별한 이름을 붙여주고 재능과 은사를 말해준다.
만남을 통해 재능과 은사를 형성한다.
하나님은 새로운 역사를 이루기 위해 이름을 바꾼다.
3. 긍정적인 자아상은 반복되는 언어에 의해 형성된다.
자꾸 말해주는 것을 통해 새로운 자아상을 형성하게 한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셨을 때,
하늘로서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 ( 마 3:17)
계속해서 내 사랑하는 자라고 말씀하신다.
누군가가 말해주는 것, 자신에게 스스로 말하는 것은
자아상을 형성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자녀를 축복 해 주면서 미래를 예언해 주라.
계속 축복하면 자녀들이 그대로 믿는다.
강단에서 계속 축복을 강조하면 성도들의 자아상이 그렇게 바뀐다.
긍정적인 사람은 긍정적 열매와 가치를 창조한다.
긍정적 자아상을 가지면 하나님의 마음대로 움직이는 놀라운 결과를 갖는다.
나의 경우도 고교시절 시골교회의 목사님이 그렇게 기도해 주셨다.
세계복음화 앞장서고 야곱의 축복을 받는 사람이 되라고
계속해서 축복을 해주니 그렇게 되었다.
기도대로 된다.
반복되는 언어가 그 사람을 만든다.
감옥에 들어간 사람들중 많은 경우 부모가 감옥에 들어가는 것이 좋겠다고
말하는 것을 듣고 자란 사람들이다.
한번만 말하지 말고 계속 말해주라.
잘하면 계속 말해 주라.
계속 반복해 주면 말대로 그렇게 된다.
설득력있게 계속 이야기 해주라.
그렇게 이야기 해 줄 때 자아상이 형성된다.
4. 긍정적인 자아상은 좋은 환경에 의해 형성 됩니다.
모세는 광야 40년 동안 자아상이 완전히 허물어졌다.
바로에게 가라고 했는데 못간다고 한다.
환경가운데 가장 중요한 환경은 주변에 있는 사람의 환경이다.
좋은 사람을 만나면 자기가 몰랐던 재능과 은사를 발견한다.
예수님의 보혈로 형성된 자아상을 소유 하라.
자아상을 형성하는 데 가장 중요한 것은 소속감과 자부감과 자신감 이다.
소속감 : 여호수아와 갈렙은 하나님, 모세라는 영적지도자, 가나안 땅에 소속되었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자부감 : 우리는 가치 있는 존재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자신감 : 예수 믿고 성령을 받아 능력있는 생활을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고 나가라.
아침마다 스스로에게 말하라.
하나님의 자녀, 왕 같은 제사장,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이야기 하라.
하나님의 자녀, 성령님이 함께 하는 사람, 다시 일어나야 된다.
자녀들에게 강조하라.
메뚜기 자아상을 버리고 영적 거인의 자아상을 가지라.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고전 6:19-20)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롬 8:37)
나는 메뚜기다?
민 13:17-33 / 노경모 목사
민수기 13:17-33 / 노경모 목사
<본문> ‘(17) 모세가 가나안 땅을 정탐하러 그들을 보내며 이르되 너희는 네겝 길로 행하여 산지로 올라가서 (18) 그 땅이 어떠한지 정탐하라 곧 그 땅 거민이 강한지 약한지 많은지 적은지와 (19) 그들이 사는 땅이 좋은지 나쁜지와 사는 성읍이 진영인지 산성인지와 (20) 토지가 비옥한지 메마른지 나무가 있는지 없는지를 탐지하라 담대하라 또 그 땅의 실과를 가져오라 하니 그 때는 포도가 처음 익을 즈음이었더라 (21) 이에 그들이 올라가서 땅을 정탐하되 신 광야에서부터 하맛 어귀 르홉에 이르렀고 (22) 또 네겝으로 올라가서 헤브론에 이르렀으니 헤브론은 애굽 소안보다 칠 년 전에 세운 곳이라 그 곳에 아낙 자손 아히만과 세새와 달매가 있었더라 (23) 또 에스골 골짜기에 이르러 거기서 포도송이가 달린 가지를 베어 둘이 막대기에 꿰어 메고 또 석류와 무화과를 따니라 (24) 이스라엘 자손이 거기서 포도를 베었으므로 그 곳을 에스골 골짜기라 불렀더라 (25) 사십 일 동안 땅을 정탐하기를 마치고 돌아와 (26) 바란 광야 가데스에 이르러 모세와 아론과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에게 나아와 그들에게 보고하고 그 땅의 과일을 보이고 (27) 모세에게 말하여 이르되 당신이 우리를 보낸 땅에 간즉 과연 그 땅에 젖과 꿀이 흐르는데 이것은 그 땅의 과일이니이다 (28) 그러나 그 땅 거주민은 강하고 성읍은 견고하고 심히 클 뿐 아니라 거기서 아낙 자손을 보았으며 (29) 아말렉인은 남방 땅에 거주하고 헷인과 여부스인과 아모리인은 산지에 거주하고 가나안인은 해변과 요단 가에 거주하더이다 (30) 갈렙이 모세 앞에서 백성을 조용하게 하고 이르되 우리가 곧 올라가서 그 땅을 취하자 능히 이기리라 하나 (31) 그와 함께 올라갔던 사람들은 이르되 우리는 능히 올라가서 그 백성을 치지 못하리라 그들은 우리보다 강하니라 하고 (32)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그 정탐한 땅을 악평하여 이르되 우리가 두루 다니며 정탐한 땅은 그 거주민을 삼키는 땅이요 거기서 본 모든 백성은 신장이 장대한 자들이며 (33) 거기서 네피림 후손인 아낙 자손의 거인들을 보았나니 우리는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으니 그들이 보기에도 그와 같았을 것이니라’
누가 나에게 “너는 개다”라고 말한다면 듣는 나는 얼마나 기분이 나쁘겠습니까? 나를 짐승으로 여기는 것이니 자존심이 상하게 됩니다. 글세 요즈음 이런 말을 들어도 별로 기분이 나빠하지 사람들도 있을 겁니다. 요즈음 개보고 애기야 하는 사람도 있고, 엄마한테 와, 언니한테 와 하면서 개를 가족같이 여기는 사람들이 있지요. 그러나 노골적으로 상대를 향하여 개라고 하면 그것은 상대방의 인격을 모독하는 것입니다.
개나 소와 같은 짐승보다 더 못한 곤충이나 벌레의 이름을 빗대어서 “너는 모기다.” “너는 파리다.” “너는 송충이다.”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기분이 더 상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자기가 자신을 향하여 “나는 메뚜기다.”라고 한다면 그것은 자기 자신을 낮추는 겸손한 사람이 아니라 자기를 무시하고 폄하하고 비하하는 부정적인 시각을 갖고 있는 사람입니다. 자존심이 없고 자존감도 없는 사람이지요. 우리는 짐승도 아니고 곤충도 아니고 벌레도 아닙니다. 우리는 사람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입니다. 그들은 항상 하나님의 보호와 인도를 받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자존심이 대단하고 자존감이 높은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다른 민족들을 즉 이방인들을 무시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나님의 사랑과 관심이 대상이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오직 자기들만이 하나님의 사랑과 선택의 대상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그들이 선택받지 못한 이방인이 비해 자기들은 메뚜기와 같았다고 자기를 스스로 평가해버리는 이해가 가지 않는 일이 발생해버리고 말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을 기업으로 주시겠다고 약속하셨고 드디어 이 약속을 이루시기 위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모세를 통해 애굽 땅에서 이끌고 나오게 하시고 하나님의 은혜로 홍해를 육지처럼 건너고 광야길에서 만나와 메추라기를 주시고 샘물을 주시고 그들의 신발과 옷이 헤어지지 않게 하시고 주위의 원수들의 손에 지키시고 드디어 가나안 땅 가까이 까지 인도하셨습니다. 바로 ‘가데서 바네아’입니다. 여기서 12명의 정탐꾼을 가나안 땅으로 들여보냅니다. 그들은 40일 동안을 정탐하고 돌아와서 보고를 합니다. 12명의 정탐꾼 중에서 10명의 정탐꾼이 하나님이 기업으로 주시는 가나안 땅을 악평을 합니다. 31절에서 33절의 내용입니다.
‘그와 함께 올라갔던 사람들은 이르되 우리는 능히 올라가서 그 백성을 치지 못하리라 그들은 우리보다 강하니라 하고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그 정탐한 땅을 악평하여 이르되 우리가 두루 다니며 정탐한 땅은 그 거주민을 삼키는 땅이요 거기서 본 모든 백성은 신장이 장대한 자들이며 거기서 네피림 후손인 아낙 자손의 거인들을 보았나니 우리는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으니 그들이 보기에도 그와 같았을 것이니라’
가나안에 있는 족속들은 거인족이기 때문에 자기들이 보기에서 그들에 비해면 메뚜기 같았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하나님이 가나안 땅을 우리에게 기업으로 주셨다 할찌라도 우리를 그들을 치지 못하고 그들을 이기지 못할 거라는 이야기입니다. 33절에 ‘우리는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으니’라는 말이 있지요? 이 말은 ‘우리는 메뚜기다.’라는 말입니다. 정말로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 백성이 메뚜기에 불과합니까? 하나님이 메뚜기에게 가나안 땅을 기업으로 주시려고 하는 것일까요?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내 자신이 누구인지를 바로 아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내 자신의 정체성, 나의 신분을 바로 알아야 합니다. 내가 누구입니까? 여기에 계신 여러분이 누구입니까? 메뚜기입니까? 내 자신이 누구인지를 바로 알지 못할 때, 우리 자신은 흔들릴 수가 있습니다. 사탄은 우리 자신의 정체성과 신분을 잘 알지 못하도록 우리를 혼란하게 만듭니다.
마귀가 광야에서 40일을 금식을 한 예수님께서 나타나서 시험을 합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하나님의 아들임이 분명한데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혼란시키셔 무너뜨리려고 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4장 2-3절을 읽어 보겠습니다.
‘사십 일을 밤낮으로 금식하신 후에 주리신지라 시험하는 자가 예수께 나아와서 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로 떡덩이가 되게 하라’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임은 재론할 필요가 없는 당연한 진리임에도 불구하고 마귀는 예수님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이 돌을 떡으로 만들어라” 예수님의 정체성과 신분을 혼란시키려는 간교한 계략이지요.
마귀는 계속해서 예수님의 정체성과 신분을 혼란시킵니다. “내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뛰어 내려라” 예수님은 마귀의 이러한 간교한 계략에 넘어가지를 않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이 선택받은 백성입니다. 그들은 매뚜기가 아닙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약속이 기업인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을 받아 누려야 하는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우리는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이 크리스천의 정체성을 확고히 해야 합니다. 크리스천의 정체성을 잃어 버리고 하나님의 백성이요 하나님의 자녀인 신분을 바로 인식하지 못할 때, 나는 메뚜기라는 불신앙의 고백을 해 버리고 끝나버리는 안타까운 결과를 가져오게 됩니다.
메뚜기라고 보고한 열 명의 정탐꾼은 하나님의 약속하신 가나안 땅을 기업으로 받기 못합니다. 아니 가나안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안타깝게도 광야에서 죽고 맙니다.
키위라는 새가 있습니다. 키위는 뉴질랜드에만 사는 토종 새입니다. 나는 법을 잃어버린 새이다 보니 새라고 부르기는 좀 그렇습니다. 날개는 퇴화되어 없어졌고, 굵은 두 다리가 무거운 몸집을 지탱하고 있습니다. 이 새는 뉴질랜드의 비옥한 토양 속에 서식하는 벌레를 잡아먹고 삽니다. 주로 밤에만 활동하다 보니 눈이 어두워졌습니다. 단지 후각과 발의 감각만 발달되어 있기 때문에 땅을 쿵쿵 밟아 움직이는 벌레의 냄새나 촉감으로 먹잇감을 찾습니다. 그러다 보니 새의 가장 중요한 두 특징인 날개와 눈이 퇴화되고, 부리와 다리만 발달되었다. 키위는 모양만 새입니다. 새의 정체성을 잃어버린 불쌍한 새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정체성을 잃어버릴 때 우리도 키위처럼 될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향해 품으시는 그림은 두려움에 싸여 밝은 낮에는 나오지도 못하고, 밤에 기어 나와 땅을 후비며 사는 키위 같은 새와는 거리가 멉니다.
정체성이 분명할 때만 우리는 모양이 반듯하고 색깔이 분명하며 맛이 확실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기업을 받아 누리게 됩니다.
또한 ‘우리는 메뚜기와 같다’라고 외친 열 명의 정탐꾼은 자기들이 믿는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알지 못했습니다.
그들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으시고 그들을 지금까지 보호하시고 인도하시고 그들의 필요를 공급하신 분이 바로 그들의 하나님이십니다. 이 하나님에 대한 확고한 인식이 없었습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을 기업으로 주시겠다고 약속하셨고 그 약속을 이루시기 위해서 모세를 통해 그들을 애굽에서 구출해내어 가나안으로 이끄시는 신실하신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약했습니다.
출애굽기 6장 7절, ‘너희를 내 백성으로 삼고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리니 나는 애굽 사람의 무거운 짐 밑에서 너희를 빼낸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인 줄 너희가 알지라’ 라고 말씀하셨지만 이들은 그들의 여호와 하나님을 잘 알지 못했습니다.
우리도 자칫 잘못하면 하나님을 바로 알지 못하게 될 수 있습니다. 크리스천들이 영적으로 타락해가는 현실을 깊숙이 들여다보고, 인기에 영합하지 않고 타협 없는 하나님의 말씀을 강력하게 선포한 ‘이 시대의 선지자’라고 일컫는 A. W. 토저는 그의 저서‘하나님의 바로 알자’라는 책에서 ‘거룩하신 하나님을 바로 알지 못하는 것이 오늘날 많은 문제의 근본 원인이다. 만일 하나님의 위엄을 다시 발견한다면 그 문제들이 쉽게 해결될 것이다. 우리의 삶에서 능력을 되찾기 원한다면 하나님을 올바로 알아야 한다.’고 외치고 있습니다.
이 책에서 토저는 현대 크리스천들이 ‘반쪽 예수’만을 믿어나가는 것을 매섭게 지적하고 있습니다. 즉, 구주(구출자, Savior)로서의 예수는 받아들이지만 주님(주인님, Lord)으로서의 예수는 거부한다는 것입니다. 인생의 위기 상황에서 나를 건져주시는 구출자 예수는 좋아하지만, 나의 순종을 요구하시는 주인으로서의 예수는 배척한다는 것입니다. 그는 이것이 현대 크리스천들의 만병의 근원이라고 지적합니다. 토저는 단호히 말합니다. 순종 없는 구원은 없다고.
반쪽 하나님, 반쪽 예수님만을 알고 믿으면 안됩니다. 우리는 온전하게 하나님을 바로 알아야 합니다. 온전하게 예수님을 알고 믿어야 합니다. 이럴 때 여호수아와 갈렙 처럼 멋지게 선포할 수 있습니다.
민수기 14장 9절, ‘다만 여호와를 거역하지는 말라 또 그 땅 백성을 두려워하지 말라 그들은 우리의 먹이라 그들의 보호자는 그들에게서 떠났고 여호와는 우리와 함께 하시느니라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하나’
이제 말씀을 정리합니다. 혼돈과 죄악이 팽대해 있는 시대를 우리는 살아가고 있습니다. 마귀는 우는 사자처럼 삼킬 자를 찾고, 광명한 천사처럼 성도들을 미혹하고 유혹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믿는 자들이 점점 줄어가고 있습니다. 예수님도 말세에 믿는 자를 보겠느냐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러한 때에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확고한 정체성을 가져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향기를 발해야 합니다.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해야 합니다. 우리를 자녀삼으시고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으신 하나님을 바로 알아야 하겠습니다. 그리하여 베드로전서 2장 9절,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말씀처럼 승리의 삶을 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미래를 살리는 길
민수기 13:17-24 / 이한배 목사
I. 서 론
오늘날 현실을 보면 모든 사람들에게 힘이 듭니다.
① 젊은이들은 진학하고, 취직하고, 결혼하기가 힘이 듭니다.
그래서 삼포라는 말이 생겨났습니다.
연애, 결혼, 출산을 포기한다는 말입니다.
청년들의 삶이 얼마나 힘든가를 대변하는 말입니다.
② 일반인들의 삶도 힘이 듭니다.
직장생활이 힘이 듭니다.
직장생활의 연수가 점점 줄어듭니다.
일찍 퇴직을 해야 합니다.
자영업의 성공률이 너무 낮습니다.
새로운 것의 등장이 너무 빠릅니다.
③ 노인들의 삶도 힘이 듭니다.
오래 살다가 보니 너무 힘이 듭니다.
자식들 키우며 살다보니 모아 놓은 돈은 없습니다.
몸 돌보지 않고 열심히 일하며 오래 살다가 보니 아픈 곳도 많습니다.
그래서 자녀들에게 너무 짐이 됩니다.
목사는 많은 사람들을 접하다가 보니 이런 사회가 걱정이 됩니다.
과연 어떻게 살아야 할까 ?
물론 모든 것을 다 하나님이 하시니 걱정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며, 아무런 생각 없이 살아도 됩니다.
그러나 이것은 의식 있는 자의 생각은 아닙니다.
책임적인 삶을 사는 자의 자세는 아닙니다.
저는 이런 시대에 우리가 살아야 할 자세를 오늘 본문에 나오는
① 모세가 12명의 정탐군을 택하여 가나안 땅을 정탐하라고 한 사건과
② 미국 서부개척사를 통하여 살펴보려고 합니다.
이 두 사건을 살펴보면 비슷한 것이 많이 있습니다.
① 두 곳 다 광야에서 생활을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서 생활을 했습니다.
눈만 뜨면 삭막하고 황량한 광야만 보였습니다.
그들이 사는 땅에서는 희망이라고는 찾아볼래야 찾아볼 수가 없었습니다.
② 두 곳 다 광야를 살기 좋은 곳으로 바꿔놓았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서 살았습니다.
광야의 삶을 젖과 꿀이 흐르는 삶으로 바꿔놓았습니다.
미국은 광야였던 서부를 살기 좋은 곳으로 바꿔놓았습니다.
그러면 이들은 어떻게 이렇게 광야의 삶을 젖과 꿀이 흐르는 삶으로 바꿔놓았을까요 ?
이것을 알면 우리도 희망을 갖을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될지 안될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희망만은 갖을 수 있습니다.
제가 처음 그랜드 캐년에 갔을 때 I-Max 영화관에서 그랜드 캐년에 대한 영상물을 봤습니다.
그런데 그랜드 캐년을 탐험한 자로 John Wesley Powell이란 사람을 이야기 했습니다.
저는 그 사람의 이름을 처음 들어봤습니다.
그런데 John Wesley라는 말이 낯익게 잘 들렸습니다.
그런데 죤 웨슬리는 영국에서 목회를 했기 때문에 미국 탐험과는 상관이 없는 인물이라 그냥 아무 상관이 없는 인물로 알았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비전교회 자녀들과 비전 여행을 하면서 그들에게 뭔가를 더 가르쳐보려고 하다가 애리조나주와 유타주 경계에 있는 Lake Powell에 관한 글들을 읽어봤습니다.
페이지에 있는 한 박물관에서 그곳에 관한 정보를 알 수 있는 자료 좀 달라고 하자 한 여인이 그곳을 개척한 인물에 관한 자료를 줬습니다.
숙고에 와서 읽어보니 그 사람이 바로 죤 웨슬리 포웰이였습니다.
저는 옛날 일을 생각하며 자세히 읽어봤습니다.
그랬더니 놀랍게도 그 죤 웨슬리 포웰이 감리교 창시자 죤 웨슬리와 관계가 있었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미국 감리교 목사였습니다.
그의 이름은 Joseph이였습니다.
그런데 그는 감리교의 창시자 죤 웨슬리의 이름을 따서 아들의 이름을 죤 웨슬리 포웰이라고 졌습니다.
이 포웰이 그랜드 개년과 서부 개척에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광야인 서부에 사람이 살 수 있는 낙원으로 만드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 사람이 바로 이 포웰입니다.
서부 광야를 사람들이 살 수 있는 낙원으로 만드는데 가장 중요한 근원이 된 것은 바로 콜로다도 강입니다.
그런데 이 콜로다고 강을 탐사한 사람이 바로 죤 웨슬리 포웰입니다.
그는 10명의 팀원들과 4척의 보트를 갖고 900마일(1,440km)의 그랜트 캐년을 흐르는 콜로라도 강을 탐사를 했습니다.
II. 본 론
그러면 불모지의 땅 서부에 희망을 준 이 죤 웨슬리 포웰은 어떤 사람이였을까요 ?
그 사람과 오늘 본문에 나타난 정탐군들이 오늘날 우리에게 미래를 살리는 길을 열어줄 것입니다.
1. 교사(Teacher)였습니다.
포웰 아버지는 1838년에 Jackson, Ohio로 파송을 받아서 갑니다.
포웰은 거기에서 학교에 다니게 됩니다.
그런데 그의 가정이 노예제도를 반대를 한다는 이유로 급우들의 적대감을 받게 됩니다.
그래서 포웰은 학교를 다니지 못하게 됩니다.
지금으로 말하면 왕따를 당한 것입니다.
그러나 포웰은 배우는 것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가정교사를 통하여 그리고 개인적으로 열심히 공부를 했습니다.
① 그는 왕따를 당한다고 학업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어떤 일이 있어도 학업을 포기해서는 안됩니다.
환경이 어려우면 어려울수록 더욱더 열심히 공부를 해야 합니다.
② 혼자서 독학을 열심히 했습니다.
그는 매우 독창적인(original)인 공부를 했습니다.
혼자서 생물학, 동물학, 지질학, 지리학을 공부를 했습니다.
공부는 자기가 스스로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자기 스스로 하는 공부가 진짜 공부입니다.
③ 그는 열심히 돌아다니며 탐사하고 수집하는 일을 좋아했습니다.
그는 조개, 광석, 그리고 일반적 자연 역사의 대상들을 수집했습니다.
그는 Mississippi강, Ohio강, Illinois강, Colorado강을 탐사했습니다.
④ Wisconsin에 살았을 때에는 Jefferson 평원에 있는 학교에서 월급 14불을 받고 가르쳤습니다.
남북전쟁이 끝난 후에는 Bloomington, Illinois에 있는 Wesleyan대학에서 지질학을 가르치는 교수와 박물관장을 했습니다.
그는 이 학교를 졸업하지는 않았지만 이 학교에서 A. B.와 A. M. 학위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Illinois Normal University에도 출강을 했습니다.
그는 Illinois주에서 과학에 관한 주제로 강의와 강연을 했는데, 당시 일리노이즈에서는 이 강의와 강연으로 유명한 인물이 되었습니다.
포웰은 후에 독일 Heidelberg 대학에서 Ph. D.를 Harvard 대학에서 L. L. D. 학위를 받았습니다.
⑤ 그는 어떤 분야에 교사가 될만큼 열심히 공부를 했습니다.
우리가 지금의 어려움을 극복하고 미래를 살리기 위해서는 어떤 분야에서 박사가 되어야 합니다.
최고의 권위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만큼 열심히 공부를 해야 합니다.
⑥ 공부도 할 때가 있습니다.
때를 놓치면 하기가 너무 힘이 듭니다.
그러므로 젊은이들이여 젊어서 열심히 공부하시기 바랍니다.
⑦ 오늘 본문에 나오는 정탐군들도 가나안 땅에 대한 전문가들이였습니다.
그들은 가나안 땅을 두루 탐사하였습니다.
그들의 지리, 생활, 주민들의 모습들을 탐사하였습니다.
40일 간 탐구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가나안 땅의 전문가들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나안 땅으로 인도할 수 있었습니다.
⑧ 오늘에 힘들고 어려운 것을 극복하고 미래를 여는 길은 어떤 분야에 전문가가 될 정도로 열심히 공부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분야에 선생님이 되어야 합니다.
2. 군인(Soldier) 이였습니다.
그는 미국 남북전쟁이 일어나자 제20 Illinois 의용군에 입대를 했습니다.
그는 소위로 임관을 했습니다.
그는 Cape Giradeau에 주둔을 했습니다.
제2 Illinois 포병부대의 F중대장으로 Shiloh전투에 참전했습니다.
그리고 Pittsburg 상륙 때 오른손을 잃었습니다.
그런데 치료를 마치자마자 다시 부대로 복귀했습니다.
그리고 Champion Hill전투와 Black River Bridge전투에 참전했습니다.
Vicksburg 작전이 끝났을 때 그의 팔에 두 번째 수술을 했습니다.
그러나 Meridan 공격에 참전하기 위하여 즉시 복귀를 했습니다.
후에 그는 소령이 되고, 제17포병부대장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Tennessee부대의 대장이 되고, Atlanta와 Franklin전투에 참전을 했습니다.
후에 그는 명예 대령으로 예편을 했습니다.
① 그는 용감한 군인이였습니다.
전쟁터에 목숨을 아까워하지 않고 참전을 했습니다.
② 오른팔을 잃었지만 부대를 떠나지 않았습니다.
전쟁터를 떠나지 않았습니다.
전쟁이 끝날 때까지 열심히 전쟁을 했습니다.
③ 그는 포병대장이 되었습니다.
지휘관이 되었습니다.
④ 그는 오른팔을 잃은 장애에도 굴복하지 않았습니다.
⑤ 본문의 정탐군들도 다 군사들이였습니다.
목숨을 걸고 적진에 들어가 적진을 정탐하는 용맹하고 지혜로운 군인들이였습니다.
전쟁에 있어서 이보다 더 위험한 것은 없습니다.
이런 불굴의 정신이 오늘날의 어려움을 극복하고 미래를 여는 자세입니다.
3. 탐험가(Explorer)가였습니다.
① 그는 어려서부터 탐험하기를 좋아했습니다.
② 그는 Wiscon, Illinois, Iowa, Missouri주에 있는 Iron산에 있는 조개, 광석, 그리고 일반적 자연 역사의 대상을 수집하러 돌아다녔습니다.
③ 1856년에는 만 22살 때 혼자 노를 젖는 배를 타고 Mississippi강을 따라 St. Anthony 폭포에서 하구까지 내려가며 탐사를 했습니다.
④ 1857년에는 Pittsburg에서 하구까지 Ohio강을 전부 노 젖는 배로 탐사했습니다.
⑤ 1858년에는 Illinois강을 하구까지 탐사를 했고, Des Moines까지 노를 저어 올라갔습니다.
⑥ 남북 전쟁이 끝나자 그는 16명의 학생들을 데리고, 아직 인디언들이 우굴거리는 Rocky산맥을 탐사를 했습니다.
이때부터는 오른팔을 잃은 상태였습니다.
⑦ Denver에서 이 탐사팀을 해체를 한 후에는 부인과 Colorado 중부지방을 방문하여 눈이 그들의 탐험을 가로막을 때까지 탐험을 했습니다.
⑧ 그리고 1868년에 두 번째 Colorado 원정팀을 구성을 합니다.
이 때에는 White강에서 월동을 하며 탐험을 했습니다.
⑨ 그리고 1869년에는 4척의 보트와 10명으로 구성된 탐험대를 구성하여 10개월 간의 식량을 갖고 그 유명한 Grand Canyon 탐사를 했습니다.
5. 24.에 시작하여 8. 29에 그랜드 캐년 하구를 벗어났습니다.
장장 900마일(1,440km)입니다.
⑩ 본문에 나오는 정탐군들도 40일 간을 가나안 땅을 정탐을 했습니다.
모세는 정탐군들에게 이런 사명을 주었습니다.
“너희는 네겝 길로 행하여 산지로 올라가서, 그 땅이 어떠한지 정탐하라. 곧 그 땅 거민이 강한지 약한지, 많은지 적은지와 그들이 사는 땅이 좋은지 나쁜지와 사는 성읍이 진영인지 산성인지와 토지가 비옥한지 메마른지, 나무가 있는지 없는지를 탐지하라. 또 그 땅의 실과를 가져오라.”
이런 탐험가의 정신, 개척자의 정신이 어려운 오늘날을 극복하고 미래를 여는 자세입니다.
어려운 곳을 정탐하는 개척자 정신이 오늘의 어려움을 극복하고 미래를 여는 정신입니다.
4, 과학자(Scientist)였습니다.
그는 생물학, 동물학, 지질학, 지리학을 공부를 했습니다.
그는 그랜드 캐년의 형성에 관한 이론을 전개했습니다.
그런데 그에게 있어서 더욱 과학자적인 것은 콜로라도 강 주위의의 불모지를 어떻게 쓸모 있는 땅으로 바꿀가를 관심을 갖고 연구한 것입니다.
그래서 페이지에 가면 그렌 댐이 있습니다.
아리조나 사막을 위하여 막은 다목적 댐이니다.
그런데 그 그렌 댐으로 생긴 호수는 포웰호수라고 합니다.
죤 웨슬리 포웰이 불모지 개간을 위하여 얼마나 힘썼는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인물 중에도 그런 인물이 있습니다.
유다 지파의 대표였던 갈렙은 45년이 지난 후에 여호수아에게 가서 헤브론 산지를 기업으로 달라고 합니다.
당시 “헤브론에는 아낙 사람이 있고, 그 성읍들은 크고 견고했습니다.”(수 14:12)
그러나 갈렙은 그런 산지를 달라고 하고는 그 땅을 정복했습니다.
이렇게 나쁜 땅, 나쁜 상황, 나쁜 일을 좋은 일로 바꾸려는 자세를 갖는 것이 바로 죤 웨슬리 포웰과 갈렙과 같은 정신입니다.
이것이 과학자의 정신입니다.
그리고 이런 정신이 바로 어려운 현실을 극복하고 미래를 여는 정신입니다.
5. 장애를 극복하는 자였습니다.
포웰은 학교에 다니다가 급우들의 적대감으로 학교를 다닐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포기하지 않고 더 열심히 공부했습니다.
오른손을 잃었습니다.
그러나 굴하지 않고 열심히 전투에 참전했습니다.
당시 그랜드 캐년은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인디언들이 만연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 모든 것들을 다 극복했습니다.
이렇게 장래를 극복하는 자가 오늘의 어려움을 극복하고 미래를 여는 자들입니다.
I. 서 론
오늘날 현실을 보면 모든 사람들에게 힘이 듭니다.
① 젊은이들은 진학하고, 취직하고, 결혼하기가 힘이 듭니다.
그래서 삼포라는 말이 생겨났습니다.
연애, 결혼, 출산을 포기한다는 말입니다.
청년들의 삶이 얼마나 힘든가를 대변하는 말입니다.
② 일반인들의 삶도 힘이 듭니다.
직장생활이 힘이 듭니다.
직장생활의 연수가 점점 줄어듭니다.
일찍 퇴직을 해야 합니다.
자영업의 성공률이 너무 낮습니다.
새로운 것의 등장이 너무 빠릅니다.
③ 노인들의 삶도 힘이 듭니다.
오래 살다가 보니 너무 힘이 듭니다.
자식들 키우며 살다보니 모아 놓은 돈은 없습니다.
몸 돌보지 않고 열심히 일하며 오래 살다가 보니 아픈 곳도 많습니다.
그래서 자녀들에게 너무 짐이 됩니다.
목사는 많은 사람들을 접하다가 보니 이런 사회가 걱정이 됩니다.
과연 어떻게 살아야 할까 ?
물론 모든 것을 다 하나님이 하시니 걱정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며, 아무런 생각 없이 살아도 됩니다.
그러나 이것은 의식 있는 자의 생각은 아닙니다.
책임적인 삶을 사는 자의 자세는 아닙니다.
저는 이런 시대에 우리가 살아야 할 자세를 오늘 본문에 나오는
① 모세가 12명의 정탐군을 택하여 가나안 땅을 정탐하라고 한 사건과
② 미국 서부개척사를 통하여 살펴보려고 합니다.
이 두 사건을 살펴보면 비슷한 것이 많이 있습니다.
① 두 곳 다 광야에서 생활을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서 생활을 했습니다.
눈만 뜨면 삭막하고 황량한 광야만 보였습니다.
그들이 사는 땅에서는 희망이라고는 찾아볼래야 찾아볼 수가 없었습니다.
② 두 곳 다 광야를 살기 좋은 곳으로 바꿔놓았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서 살았습니다.
광야의 삶을 젖과 꿀이 흐르는 삶으로 바꿔놓았습니다.
미국은 광야였던 서부를 살기 좋은 곳으로 바꿔놓았습니다.
그러면 이들은 어떻게 이렇게 광야의 삶을 젖과 꿀이 흐르는 삶으로 바꿔놓았을까요 ?
이것을 알면 우리도 희망을 갖을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될지 안될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희망만은 갖을 수 있습니다.
제가 처음 그랜드 캐년에 갔을 때 I-Max 영화관에서 그랜드 캐년에 대한 영상물을 봤습니다.
그런데 그랜드 캐년을 탐험한 자로 John Wesley Powell이란 사람을 이야기 했습니다.
저는 그 사람의 이름을 처음 들어봤습니다.
그런데 John Wesley라는 말이 낯익게 잘 들렸습니다.
그런데 죤 웨슬리는 영국에서 목회를 했기 때문에 미국 탐험과는 상관이 없는 인물이라 그냥 아무 상관이 없는 인물로 알았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비전교회 자녀들과 비전 여행을 하면서 그들에게 뭔가를 더 가르쳐보려고 하다가 애리조나주와 유타주 경계에 있는 Lake Powell에 관한 글들을 읽어봤습니다.
페이지에 있는 한 박물관에서 그곳에 관한 정보를 알 수 있는 자료 좀 달라고 하자 한 여인이 그곳을 개척한 인물에 관한 자료를 줬습니다.
숙고에 와서 읽어보니 그 사람이 바로 죤 웨슬리 포웰이였습니다.
저는 옛날 일을 생각하며 자세히 읽어봤습니다.
그랬더니 놀랍게도 그 죤 웨슬리 포웰이 감리교 창시자 죤 웨슬리와 관계가 있었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미국 감리교 목사였습니다.
그의 이름은 Joseph이였습니다.
그런데 그는 감리교의 창시자 죤 웨슬리의 이름을 따서 아들의 이름을 죤 웨슬리 포웰이라고 졌습니다.
이 포웰이 그랜드 개년과 서부 개척에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광야인 서부에 사람이 살 수 있는 낙원으로 만드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 사람이 바로 이 포웰입니다.
서부 광야를 사람들이 살 수 있는 낙원으로 만드는데 가장 중요한 근원이 된 것은 바로 콜로다도 강입니다.
그런데 이 콜로다고 강을 탐사한 사람이 바로 죤 웨슬리 포웰입니다.
그는 10명의 팀원들과 4척의 보트를 갖고 900마일(1,440km)의 그랜트 캐년을 흐르는 콜로라도 강을 탐사를 했습니다.
II. 본 론
그러면 불모지의 땅 서부에 희망을 준 이 죤 웨슬리 포웰은 어떤 사람이였을까요 ?
그 사람과 오늘 본문에 나타난 정탐군들이 오늘날 우리에게 미래를 살리는 길을 열어줄 것입니다.
1. 교사(Teacher)였습니다.
포웰 아버지는 1838년에 Jackson, Ohio로 파송을 받아서 갑니다.
포웰은 거기에서 학교에 다니게 됩니다.
그런데 그의 가정이 노예제도를 반대를 한다는 이유로 급우들의 적대감을 받게 됩니다.
그래서 포웰은 학교를 다니지 못하게 됩니다.
지금으로 말하면 왕따를 당한 것입니다.
그러나 포웰은 배우는 것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가정교사를 통하여 그리고 개인적으로 열심히 공부를 했습니다.
① 그는 왕따를 당한다고 학업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어떤 일이 있어도 학업을 포기해서는 안됩니다.
환경이 어려우면 어려울수록 더욱더 열심히 공부를 해야 합니다.
② 혼자서 독학을 열심히 했습니다.
그는 매우 독창적인(original)인 공부를 했습니다.
혼자서 생물학, 동물학, 지질학, 지리학을 공부를 했습니다.
공부는 자기가 스스로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자기 스스로 하는 공부가 진짜 공부입니다.
③ 그는 열심히 돌아다니며 탐사하고 수집하는 일을 좋아했습니다.
그는 조개, 광석, 그리고 일반적 자연 역사의 대상들을 수집했습니다.
그는 Mississippi강, Ohio강, Illinois강, Colorado강을 탐사했습니다.
④ Wisconsin에 살았을 때에는 Jefferson 평원에 있는 학교에서 월급 14불을 받고 가르쳤습니다.
남북전쟁이 끝난 후에는 Bloomington, Illinois에 있는 Wesleyan대학에서 지질학을 가르치는 교수와 박물관장을 했습니다.
그는 이 학교를 졸업하지는 않았지만 이 학교에서 A. B.와 A. M. 학위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Illinois Normal University에도 출강을 했습니다.
그는 Illinois주에서 과학에 관한 주제로 강의와 강연을 했는데, 당시 일리노이즈에서는 이 강의와 강연으로 유명한 인물이 되었습니다.
포웰은 후에 독일 Heidelberg 대학에서 Ph. D.를 Harvard 대학에서 L. L. D. 학위를 받았습니다.
⑤ 그는 어떤 분야에 교사가 될만큼 열심히 공부를 했습니다.
우리가 지금의 어려움을 극복하고 미래를 살리기 위해서는 어떤 분야에서 박사가 되어야 합니다.
최고의 권위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만큼 열심히 공부를 해야 합니다.
⑥ 공부도 할 때가 있습니다.
때를 놓치면 하기가 너무 힘이 듭니다.
그러므로 젊은이들이여 젊어서 열심히 공부하시기 바랍니다.
⑦ 오늘 본문에 나오는 정탐군들도 가나안 땅에 대한 전문가들이였습니다.
그들은 가나안 땅을 두루 탐사하였습니다.
그들의 지리, 생활, 주민들의 모습들을 탐사하였습니다.
40일 간 탐구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가나안 땅의 전문가들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나안 땅으로 인도할 수 있었습니다.
⑧ 오늘에 힘들고 어려운 것을 극복하고 미래를 여는 길은 어떤 분야에 전문가가 될 정도로 열심히 공부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분야에 선생님이 되어야 합니다.
2. 군인(Soldier) 이였습니다.
그는 미국 남북전쟁이 일어나자 제20 Illinois 의용군에 입대를 했습니다.
그는 소위로 임관을 했습니다.
그는 Cape Giradeau에 주둔을 했습니다.
제2 Illinois 포병부대의 F중대장으로 Shiloh전투에 참전했습니다.
그리고 Pittsburg 상륙 때 오른손을 잃었습니다.
그런데 치료를 마치자마자 다시 부대로 복귀했습니다.
그리고 Champion Hill전투와 Black River Bridge전투에 참전했습니다.
Vicksburg 작전이 끝났을 때 그의 팔에 두 번째 수술을 했습니다.
그러나 Meridan 공격에 참전하기 위하여 즉시 복귀를 했습니다.
후에 그는 소령이 되고, 제17포병부대장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Tennessee부대의 대장이 되고, Atlanta와 Franklin전투에 참전을 했습니다.
후에 그는 명예 대령으로 예편을 했습니다.
① 그는 용감한 군인이였습니다.
전쟁터에 목숨을 아까워하지 않고 참전을 했습니다.
② 오른팔을 잃었지만 부대를 떠나지 않았습니다.
전쟁터를 떠나지 않았습니다.
전쟁이 끝날 때까지 열심히 전쟁을 했습니다.
③ 그는 포병대장이 되었습니다.
지휘관이 되었습니다.
④ 그는 오른팔을 잃은 장애에도 굴복하지 않았습니다.
⑤ 본문의 정탐군들도 다 군사들이였습니다.
목숨을 걸고 적진에 들어가 적진을 정탐하는 용맹하고 지혜로운 군인들이였습니다.
전쟁에 있어서 이보다 더 위험한 것은 없습니다.
이런 불굴의 정신이 오늘날의 어려움을 극복하고 미래를 여는 자세입니다.
3. 탐험가(Explorer)가였습니다.
① 그는 어려서부터 탐험하기를 좋아했습니다.
② 그는 Wiscon, Illinois, Iowa, Missouri주에 있는 Iron산에 있는 조개, 광석, 그리고 일반적 자연 역사의 대상을 수집하러 돌아다녔습니다.
③ 1856년에는 만 22살 때 혼자 노를 젖는 배를 타고 Mississippi강을 따라 St. Anthony 폭포에서 하구까지 내려가며 탐사를 했습니다.
④ 1857년에는 Pittsburg에서 하구까지 Ohio강을 전부 노 젖는 배로 탐사했습니다.
⑤ 1858년에는 Illinois강을 하구까지 탐사를 했고, Des Moines까지 노를 저어 올라갔습니다.
⑥ 남북 전쟁이 끝나자 그는 16명의 학생들을 데리고, 아직 인디언들이 우굴거리는 Rocky산맥을 탐사를 했습니다.
이때부터는 오른팔을 잃은 상태였습니다.
⑦ Denver에서 이 탐사팀을 해체를 한 후에는 부인과 Colorado 중부지방을 방문하여 눈이 그들의 탐험을 가로막을 때까지 탐험을 했습니다.
⑧ 그리고 1868년에 두 번째 Colorado 원정팀을 구성을 합니다.
이 때에는 White강에서 월동을 하며 탐험을 했습니다.
⑨ 그리고 1869년에는 4척의 보트와 10명으로 구성된 탐험대를 구성하여 10개월 간의 식량을 갖고 그 유명한 Grand Canyon 탐사를 했습니다.
5. 24.에 시작하여 8. 29에 그랜드 캐년 하구를 벗어났습니다.
장장 900마일(1,440km)입니다.
⑩ 본문에 나오는 정탐군들도 40일 간을 가나안 땅을 정탐을 했습니다.
모세는 정탐군들에게 이런 사명을 주었습니다.
“너희는 네겝 길로 행하여 산지로 올라가서, 그 땅이 어떠한지 정탐하라. 곧 그 땅 거민이 강한지 약한지, 많은지 적은지와 그들이 사는 땅이 좋은지 나쁜지와 사는 성읍이 진영인지 산성인지와 토지가 비옥한지 메마른지, 나무가 있는지 없는지를 탐지하라. 또 그 땅의 실과를 가져오라.”
이런 탐험가의 정신, 개척자의 정신이 어려운 오늘날을 극복하고 미래를 여는 자세입니다.
어려운 곳을 정탐하는 개척자 정신이 오늘의 어려움을 극복하고 미래를 여는 정신입니다.
4, 과학자(Scientist)였습니다.
그는 생물학, 동물학, 지질학, 지리학을 공부를 했습니다.
그는 그랜드 캐년의 형성에 관한 이론을 전개했습니다.
그런데 그에게 있어서 더욱 과학자적인 것은 콜로라도 강 주위의의 불모지를 어떻게 쓸모 있는 땅으로 바꿀가를 관심을 갖고 연구한 것입니다.
그래서 페이지에 가면 그렌 댐이 있습니다.
아리조나 사막을 위하여 막은 다목적 댐이니다.
그런데 그 그렌 댐으로 생긴 호수는 포웰호수라고 합니다.
죤 웨슬리 포웰이 불모지 개간을 위하여 얼마나 힘썼는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인물 중에도 그런 인물이 있습니다.
유다 지파의 대표였던 갈렙은 45년이 지난 후에 여호수아에게 가서 헤브론 산지를 기업으로 달라고 합니다.
당시 “헤브론에는 아낙 사람이 있고, 그 성읍들은 크고 견고했습니다.”(수 14:12)
그러나 갈렙은 그런 산지를 달라고 하고는 그 땅을 정복했습니다.
이렇게 나쁜 땅, 나쁜 상황, 나쁜 일을 좋은 일로 바꾸려는 자세를 갖는 것이 바로 죤 웨슬리 포웰과 갈렙과 같은 정신입니다.
이것이 과학자의 정신입니다.
그리고 이런 정신이 바로 어려운 현실을 극복하고 미래를 여는 정신입니다.
5. 장애를 극복하는 자였습니다.
포웰은 학교에 다니다가 급우들의 적대감으로 학교를 다닐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포기하지 않고 더 열심히 공부했습니다.
오른손을 잃었습니다.
그러나 굴하지 않고 열심히 전투에 참전했습니다.
당시 그랜드 캐년은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인디언들이 만연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 모든 것들을 다 극복했습니다.
이렇게 장래를 극복하는 자가 오늘의 어려움을 극복하고 미래를 여는 자들입니다.
불안사회, 정탐의 정석
“모세가 가나안 땅을 정탐하러 그들을 보내며 이르되 너희는 네겝 길로 행하여 산지로 올라가서 그 땅이 어떠한지 정탐하라” (민 13:17-18) / 이익환 목사
우리는 위기를 통제할 수 있는 사람이 되길 원한다. 또한 위기가 통제되는 안전한 사회에 살기를 원한다. 그러나 과거에 비해 오늘날 사회는 더욱 통제가 불가능하고 혼란스럽게만 여겨진다. 사회가 점점 예측불가능한 방향으로 갈수록 많은 사람들이 지금까지 누리고 있는 나의 삶이 위협받고 있다고 느낀다. 평생직장이라는 개념도 사라진지 오래다. 직장도 점점 더 위기와 불확실성이 가득한 곳이 되어가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코로나가 불어닥쳤다. 불확실성은 증폭되었고, 불안은 우리가 숨쉬고 사는 일상이 되버렸다. 지난 주 미국에서는 60대 한국인이 폭행을 당했다. 한 흑인이 “우리는 중국 바이러스를 원치 않는다”며 무차별 폭행을 가한 것이다. 미국사회가 불안하다는 증거가 계속 되고 있다. 인종차별에 그렇게 반대하면서 불안의 이유를 다른 인종에게서 찾는 것이다. 우리는 지금 불안사회, 불안한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불안한 사회에서는 미래를 전망하기가 쉽지 않다. 예측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가나안을 향해 여정을 시작한 이스라엘 백성들도 불안했다. 끝없이 펼쳐진 광야에서 어떠한 내일이 다가올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그들은 그들의 내일의 삶이 펼쳐질 가나안 땅으로 정탐꾼을 보낸다. 미래를 전망해보기 위함이었다. 오늘은 이들이 정탐했던 과정들을 살펴보고자 한다. 오늘 설교의 제목은 ‘불안사회, 정탐의 정석’이다. ‘정석’하면 ‘수학의 정석’이 생각날 것이다. 그래서 오늘 말씀은 수학적으로 풀어 보면서, 불안한 시대에 우리의 미래를 어떻게 전망해야 하는지에 대해 말씀을 나누고자 한다.
애굽을 출발한지 2년이 되어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란광야 북쪽, 가데스 바네아에 이르게 된다. 그곳은 브엘세바에서 약 80km 떨어진 곳이었다. 드디어 약속의 땅 가나안에 거의 도착한 것이다. 그러나 그들 앞에는 가나안 족속인 아모리 족속이 버티고 있었다. 모세는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 이 땅을 너희 앞에 두셨은즉 올라가서 차지하라 두려워하지 말라 주저하지 말라”(신 1:21)고 말한다. 그러나 백성들은 정탐꾼을 먼저 보내자고 모세에게 요청한다. 이에 모세가 이렇게 말한다. 신 1:22, “너희가 다 내 앞으로 나아와 말하기를 우리가 사람을 우리보다 먼저 보내어 우리를 위하여 그 땅을 정탐하고 어느 길로 올라가야 할 것과 어느 성읍으로 들어가야 할 것을 우리에게 알리게 하자 하기에” 그래서 모세는 열 두 명의 정탐꾼을 파견하게 된다.
자 이제 정탐의 정석, 더하기 편을 시작하겠다. 정탐꾼 중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인물은 여호수아일 것이다. 그런데 여호수아는 그의 원래 이름이 아니다. 원래 이름은 ‘호세아’다. 민 13:16, “이는 모세가 땅을 정탐하러 보낸 자들의 이름이라 모세가 눈의 아들 호세아를 여호수아라 불렀더라” 왜 모세는 유독 한 사람의 이름을 바꾸어 불렀을까? 호세아(הושע)는 ‘구원자’란 뜻이다. 그런데 여호수아(יהושע)는 ‘여호와가 구원하신다’라는 뜻이다. 호세아라는 이름 앞에 요드(י)가 하나 더 붙은 것이다. 탈무드에 의하면 모세는 대부분의 정탐꾼들이 불안정하고 충성스럽지 못하다는 것을 미리 알았다고 한다. 그는 호세아가 그들에게 휘둘릴까봐 우려했고, 그래서 그의 이름에 점 하나를 더하게 된다. 요드(י)는 야훼의 첫 글자이기에 하나님을 상징하는 문자다. 모세는 모든 상황에서 하나님이 먼저 와야 함을 일깨워주기 위해 그의 이름 앞에 요드를 더했다는 것이다. 이름이 바뀌면서 여호수아의 정체성도 바뀌게 된다. 그는 이제 자신이 구원자가 아니라 하나님이 구원자가 되실 것이라는 새로운 전망을 갖게 된다. 또한 그는 정탐의 상황속에서 하나님께서 그보다 앞서 행하실 것을 기대하게 된다. 나의 삶에 하나님이 더해진 인생은 흔들리지 않는다. 그래서 정탐의 정석, 첫 번째 공식은 여러분의 인생에 하나님을 더하라는 것이다. 여러분의 정체성에 하나님을 더할 때 앞서 행하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정탐의 정석, 두 번째는 빼기다. 정탐군들은 40일 동안 정탐을 마치고 돌아와 이러한 보고를 내놓는다. 민 13:31-33, “그와 함께 올라갔던 사람들은 이르되 우리는 능히 올라가서 그 백성을 치지 못하리라 그들은 우리보다 강하니라 하고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그 정탐한 땅을 악평하여 이르되 우리가 두루 다니며 정탐한 땅은 그 거주민을 삼키는 땅이요 거기서 본 모든 백성은 신장이 장대한 자들이며 거기서 네피림 후손인 아낙 자손의 거인들을 보았나니 우리는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으니 그들이 보기에도 그와 같았을 것이니라” 열 명의 정탐꾼들은 가나안 거민들과 비교해보았을 때 자신들은 메뚜기 같다고 여겼다.이들은 왜 이렇게 열등감에 사로잡혔을까?
랍비 조나단 삭스는 그들이 하나님의 명령을 잘못 이해했기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보통 ‘정탐하다’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라흐포르(לחפר)’나 ‘레라겔(לרגל)’이란 단어를 쓴다. 그런데 민수기에서는 ‘라투르(לתור)’라는 단어가 사용된다. ‘라투르’는 ‘탐험하다. 보다’란 뜻이다. ‘투어리스트(tourist)’라는 말인 히브리어 ‘타예르(תיר)’가 ‘라투르’에서 나온 말이다. 투어는 좋은 곳을 보는 것이다. 여행객들은 아름답고 장엄하고 영감을 주는 곳을 간다. 그들은 나쁜 것을 찾으려고 여행하지 않는다. 그런데 라투르라는 단어가 14-15장에 걸쳐 12번 사용된다. 이것은 열 두 명이 정탐하기 위해서 보내진 것이 아님을 말해준다고 랍비 삭스는 말한다. 그들의 미션은 정탐이 아니라 좋은 것을 추구하기 위해 탐험하는 것이었다는 것이다. 즉 그 땅의 좋은 면을 탐지하고 이스라엘 온 백성들이 그것을 얻기 위해 싸울 가치가 있다고 보고하는 것이었다는 것이다. 그들의 임무는 그들이 그곳을 정복할 수 있는지 없는지를 파악하라는 것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모세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이렇게 말한다. 신 1:33, ”그는 너희보다 먼저 그 길을 가시며 장막 칠 곳을 찾으시고 밤에는 불로, 낮에는 구름으로 너희가 갈 길을 지시하신 자이시니라” 이스라엘 백성들보다 먼저 그 길을 가시는 하나님께서 그들이 어디로 갈지 인도하시지 않겠는가? 그들이 어떻게 싸워야 할지 인도해주시기 않겠는가? 그러나 열 명의 정탐꾼은 그 땅의 좋은 것을 보고도 마음에 담아오지 못했다. 정복 가능성을 산술적으로만 계산했기에 그들은 불가능하다고 결론을 내렸고, 그로 인해 백성들은 절망에 빠지게 된다.
그러나 갈렙은 달랐다. 그는 ‘우리가 곧 올라가서 그 땅을 취하자 능히 이기리라’고 말한다. 같이 정탐하고 왔는데 무슨 차이일까? 갈렙은 두려움을 뺀 사람이었다. 반면 열 명의 정탐꾼은 두려움에 빠진 사람들이었다. 두려움은 두려움을 낳는다. 이성을 마비시키고 합리적인 사고를 방해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서 군대로 조직된 60만 대군이었다. 애굽의 군대도 무너뜨리신 하나님이 이끄시는 군대였다. 객관적인 전력이 결코 약하지 않았다. 그러나 열 명의 정탐꾼의 눈에는 거인 아낙자손만 보였다. 그들은 상황의 불리함만 묵상하며 두려움을 키웠다. 두려움이 주는 환타지를 따라가 보라. 끔찍한 결론을 마음속에 그리게 된다. 그리고 그 두려움에 결국은 쫄아버린다. 그들은 스스로를 메뚜기 같이 여겼고 적들이 보기에도 그와 같았을 것이라고 결론을 내린다. 그러나 그들은 오히려 가나안 족속들이 그들 때문에 떨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아내지 못했다.
우리는 그 사실을 여리고에 살던 기생 라합을 통해서 알 수 있다. 수 2:9-11, “말하되 여호와께서 이 땅을 너희에게 주신 줄을 내가 아노라 우리가 너희를 심히 두려워하고 이 땅 주민들이 다 너희 앞에서 간담이 녹나니 이는 너희가 애굽에서 나올 때에 여호와께서 너희 앞에서 홍해 물을 마르게 하신 일과 너희가 요단 저쪽에 있는 아모리 사람의 두 왕 시혼과 옥에게 행한 일 곧 그들을 전멸시킨 일을 우리가 들었음이니라 우리가 듣자 곧 마음이 녹았고 너희로 말미암아 사람이 정신을 잃었나니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는 위로는 하늘에서도 아래로는 땅에서도 하나님이시니라” 여리고 백성들은 강한 성벽 안에 살면서도 실은 그 안에서 떨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열 명의 정탐꾼들은 그 민족의 겉모습만 보고 그 앞에서 두려워 떨었던 것이다.
두려움의 보고는 삽시간에 전염되었다. 온 회중이 밤새 통곡하며 울부짖었다. 그들은 모세와 아론을 원망했고 그들을 인도해내신 하나님까지 원망했다. 민 14:3, “어찌하여 여호와가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칼에 쓰러지게 하려 하는가 우리 처자가 사로잡히리니 애굽으로 돌아가는 것이 낫지 아니하랴” 두려움은 그동안의 하나님의 역사를 부정하게 만든다. 그들의 결론은 한 지휘관을 세우고 애굽으로 돌아가자는 것이었다. 불안에 사로잡힐 때 사람들이 쉽게 하는 것은 과거로 돌아가는 것이다. 향수에 젖어 과거를 회상하며 익숙했던 환경을 그려볼 때 거짓안전감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거기서 종이었고, 고된 노역으로 시달리며 못살겠다고 부르짖었던 것을 망각한 것이다.
그래서 정탐의 정석, 두 번째 공식은 두려움을 빼라는 것이다. 여러분이 지금 무엇을 두려워하고 있는지 조사해야 한다. 상황이나 누군가를 원망하고 있다면 그것은 여러분이 뭔가를 두려워하고 있다는 증거다. 두려움을 뺄 때 상황 뒤에 계신 하나님이 보인다. 흔히 두려움 때문에 어떤 일을 서둘러 결정할 때가 있다. 미래 지향이 아니라 과거로 퇴보하려는 선택을 할 수 있다. 익숙한 과거에서 안전감을 누리려는 것이다. 그러나 두려움이 남아 있을 때는 어떤 결정을 내려서는 안된다. 그것은 하나님의 계획과 반대로 가는 결정이 되기 쉽다. 두려움은 우상이다. 마음 속에서 하나님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상황과 환경이 아니라 하나님이 보일 때까지 우리는 우리 마음 속에 스며든 두려움을 빼내야 한다.
정탐의 정석, 세 번째는 나누기다. 두려움에 떨고 있는 백성들 앞에서 여호수아와 갈렙은 자신들의 믿음을 나눈다. 민 14:7-9, “우리가 두루 다니며 정탐한 땅은 심히 아름다운 땅이라 여호와께서 우리를 기뻐하시면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시고 그 땅을 우리에게 주시리라 이는 과연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니라 다만 여호와를 거역하지는 말라 또 그 땅 백성을 두려워하지 말라 그들은 우리의 먹이라 그들의 보호자는 그들에게서 떠났고 여호와는 우리와 함께 하시느니라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수학에서 통계는 현상을 파악하고 미래를 예측하는데 사용된다. 그러나 하나님의 역사에서는 통계가 통하지 않을 때가 있다. 통계가 오히려 믿음의 역사를 방해할 수 있다. 하나님의 역사는 반드시 현상을 믿음으로 해석하고, 그 믿음을 나누며 그 믿음에 동참하는 사람들을 통해 진행되는 것이다.
그래서 정탐의 정석, 세 번째 공식은 믿음을 나누라는 것이다. 믿음이 없는 사람은 세상을 위험으로 가득찬 곳으로 본다. 자기 힘만으로 그러한 위험들을 통제하고 정복하려 하니 감당이 안 되는 것이다. 믿음의 사람들은 똑같이 세상을 보지만, 그것이 위험으로 가득하다고 보지 않는다. 물론 위험 요소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위험은 믿음의 사람들을 좌절시키지 못한다. 그것은 여호수아와 갈렙이 “여호와는 우리와 함께 하시느니라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백성들을 향해 외칠 수 있었던 이유다.
정탐의 정석, 마지막은 곱하기다. 오늘 토라포션은 이 말씀으로 끝난다. 민 15:37-40,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령하여 대대로 그들의 옷단 귀에 술을 만들고 청색 끈을 그 귀의 술에 더하라 이 술은 너희가 보고 여호와의 모든 계명을 기억하여 준행하고 너희를 방종하게 하는 자신의 마음과 눈의 욕심을 따라 음행하지 않게 하기 위함이라 그리하여 너희가 내 모든 계명을 기억하고 행하면 너희의 하나님 앞에 거룩하리라”
유대인들의 옷을 자세히 보면 셔츠 끝에 실 가닥이 달려있는 것을 보았을 것이다. ‘찌찌트(ציצת)’라고 불리는 것이다. 유대인들은 민수기의 이 말씀을 실천하기 위해 옷에 찌찌트를 달고 다니는 것이다. 자 그런데 여기서 ‘라투르’라는 단어가 다시 등장한다. 찌찌트를 다는 목적을 설명하면서 모세는 “너희를 방종하게 하는 자신의 마음과 눈의 욕심을 따라 음행하지 않게 하기 위함이라”고 말한다. לבבכם אחרי תתרו ולא/ 베 로 타투르 아하레이 레바베켐. 이 말을 직역하면 ‘너희의 마음을 따라 정탐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이다. 오늘 토라포션의 정탐이야기는 찌찌트를 보며 너희 마음대로, 너희의 눈으로 보는대로 정탐하지 말라고 결론을 내리고 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들과 결혼한 하나님에게서 시선을 빼앗겼다. 하나님의 언약을 기억하지 못하고 그들의 불안한 마음을 따라 상황을 해석하고, 눈으로 본 현상에 마음을 빼앗겨 스스로 좌절하고 만 것이다. 그 결과 광야 1세대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모두 광야에서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따라서 정탐의 마지막 공식은 기억을 곱하라는 것이다. 광야의 세대가 어디서 실패했는지, 그 기억을 증대시키라는 것이다. 우리는 눈으로 보는 것과 마음에 품는 것을 통해 상황을 인식하고 감지한다. 그리고 그것을 행동으로 옮긴다. 그런데 우리가 눈으로 본 것과 마음으로 느끼는 것만을 따라 행동할 때 우리는 잘못된 방향으로 가기 쉽다. 무엇을, 어떻게 보는가가 중요하다. 겉으로 드러난 표면의 현상만 보는 것은 우리를 전진하지 못하게 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언약을 기억하고, 그것으로 현상을 해석한다면 우리는 불안한 환경속에서도 하나님의 뜻에 따라 발걸음을 옮길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가나안 정탐 이야기는 너무도 슬픈 사건이다. 믿음이 없어 한 세대가 멸망해버린 이야기다. 하나님 나라는 오직 믿음의 세대가 누릴 수 있다. 믿음이 사라지는 이 시대에 다른 전부를 놓치더라도 우리는 믿음을 잃어선 안 된다. 우리의 인생 여정에서 우리는 우리에게 두려움을 주는 상황들을 계속 만나게 될 것이다. 사회의 불안은 어제보다 오늘 더 커져갈 것이다. 우리가 과거로 돌아간다고 안전한 것이다. 우리가 보안시설이 잘 되는 으리으리한 집에 산다고 불안이 가시지 않을 것이다. 믿음의 사람은 과거지향적이 될 수 없다. 믿음의 사람은 높은 벽 안에 숨어 안전을 추구하지 않는다. 불확실성과 불안은 앞으로 더더욱 우리의 일상적인 경험으로 다가올 것이다. 불안한 순간을 맞이할 때마다 오늘 우리가 살펴본 정탐의 정석을 기억하기 바란다. 여러분의 인생이 하나님이 더해진 삶이 되길 바란다. 두려움을 다 뺀 삶이 되길 바란다. 믿음만을 나누는 삶이 되길 바란다. 그리고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기억을 곱하는 삶이 되길 바란다. 그리하여 광야와 같이 불안한 사회속에서도 하나님이 주시는 안식에 들어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