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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후에는 내가 너희와 말을 많이 하지 아니하리니 이 세상 임금이 오겠음이라 그러나 저는 내게 관계할 것이 없으니 (요한복음 14:30)
1. 의심
가슴이 답답하다.
몰래 먹은 떡 한 조각이 얹힌 듯 가슴팍이 뻐근하다. 아무래도 스트레스 탓이리라. 운동을 시작해야 할 듯하다. 사실 이 답답함은 오랜만에 영화를 보면서부터 계속되었다.
영화의 엔딩 타이틀이 화면에 뜨자 신음처럼 불평이 새어 나왔다.
“이게 뭐야?”
한참 뒤에도 답답함은 가시질 않는다. 이것이 무슨 일일까? 도대체 내가 무슨 영화를 본 것일까?
나는 기독교인이다.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분의 피와 구원을 믿는다. 그래선지 나는 영화를 보는 내내 영화의 내러티브에 동조하기 힘든 순간이 많았다. 영화 ‘곡성’은 성경 말씀과 함께 시작된다. 영화 곳곳에 성경의 모티브로부터 비롯된 소재들이 쉽게 눈에 들어온다. 인터넷에서 찾아보니 감독이 기독교인이라고 했다. 섬뜩한 연기를 보여준 아역 배우 역시 기독교인이었다. 촬영 현장에서 엄마와 손을 꼭 잡고 기도한 뒤 그 끔찍한 장면들을 연기했다는 후일담이다. 그러나 기독교인이 각본을 쓰고 연기하고 연출한 영화라는 사실이 내게는 가장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그들은 마치 내가 믿는 하나님과는 다른 하나님을 믿는 것 같았다. 그 이야기를 해보려고 별로 내키지도 않는 영화 감상문을 시작했다.
영화 곡성은 ‘믿음’과 ‘의심’에 관한 영화처럼 보여진다. 영화는 의심에 사로잡힌 주인공의 모습을 통해 줄곧 관객들에게 ‘왜 의심했냐’고 핀잔하는 듯하다. 그것이 영화를 보는 내내 마음을 불편하게 했다. 마치 물 위를 걷다가 두려운 나머지 물에 빠진 베드로에게 ‘왜 의심하였느냐’고 책망하셨던 예수의 말씀을 연상케 한다. 끝까지 의심한 주인공은 결국 의심을 쓴 열매를 통째로 삼키고야 만다. 영화 속 주인공 못지 않게 의심 많았던 나 역시 같은 운명에 빠진 듯 씁쓸하고 허탈하다.
영화의 줄거리는 건너 뛰겠다. 리뷰가 사방에 넘쳐난다. 의심과 믿음에 대한 영화의 시각만을 살펴보도록 하자. 영화는 동네의 수호신이 빙의된 한 낯선 여인과 우리의 우직한 주인공 종구와의 마지막 대화를 거치며 절정으로 치닫는다. 여인의 경고를 의심하고 닭이 세 번 울기 전에 자기 집으로 돌아간 종구가 비극적인 현장을 목격하면서 영화는 끝을 맺는다. 종구가 남을 의심하고 죽게 한 죄 때문에 딸이 그렇게 되었다는 여인의 최종 선고는 마치 영화 전체의 결론과도 같다. 의심했기 때문이었다.
‘의심’이란 무엇일까? 사전적인 의미의 의심은 ‘어떤 사실을 주어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그렇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정의가 상당히 모호한 개념이다. 사실이 사실이 되기 위해서는 과학적이고 객관적인 증거가 필요하다. 사람들은 충분한 증명의 과정이 결여된 사건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한다. 또한 충분하다고 생각되는 증거도 사람에 따라서는 불충분하게 여겨질 수 있는 주관적 성향들이 존재한다. 따라서 무언가를 명확하게 선을 그어 ‘사실’이라고 단정할 수 있는 데에는 한계가 있는 셈이다. 결국 사실이란 말은 그 자체에 의심의 싹을 내포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의심’하게 된다. 영화는 초반부터 주인공에게 의심이 싹트고 있음을 보여준다. 독버섯이 마을 사람들의 정신 이상의 주요 원인이라는 과학적인 사실은 충분히 입증되지 못한 또 하나의 소문에 지나지 않는다. 종구가 의심에 빠져들기 시작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그때부터 그는 의심이 이끄는 대로 정처 없는 고통의 여정길에 오른다.
성경적으로 의심, 즉 불신은 믿음의 대척점에서 하나님을 대항하는 악한 개념으로 받아들여진다. 그러기에 불신은 곧 심판이요 사망을 의미한다. 반면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는 성경적 명제에서처럼 믿음은 기독교의 구원을 논할 때 가장 중요하게 여겨지는 핵심교리이다. 영화는 표면적으로는 ‘믿으면 산다’는 기독교적 관점을 따르는 듯이 보인다. 동네 수호신인 여인은 주인공을 저주와 억압에서 구원하고자 하는 신, 즉 그리스도의 은유이다. 그러나 종구는 여인이 제시하는 믿음을 끝내 거부하고 의심의 길을 선택하고 만다. 그리스도를 불신하는 선택의 귀결은 당연히 비극적인 파국이다. 영화는 인간이 믿음을 받아들이기가 얼마나 어려우며, 결국 인간의 운명은 의심에 좌우되고야 만다는 인간의 원죄적 한계에 대해 성찰하는 듯 하다. 기존 기독교 신앙관과의 충돌도 없어 보인다.
그러나 영화는 수호신 여인의 손을 들어주지 않는다. 영화에서 결국 승리하는 것은 악마로 현신한 외지인이다. 우리가 주인공 종구의 의심 이야기에만 집중한다면 영화의 의도 절반을 놓치는 셈이다. 바로 카톨릭 부제 이삼이 이야기의 또 다른 주인공이다. 그 역시 의심한다. 선악에 대한 확고한 기준이 요구되는 종교인으로서 그의 의심은 안타깝다 못해 참담할 지경이다. 그의 이름 ‘이삼’은 의심의 ‘의’자의 한 획을 ‘심’자에 옮겨서 만든 한글 식 애너그램으로 보여진다. 극중에서도 본명이냐고 묻는 종구의 대사로서 그의 이름을 부각시킨다. 종구가 선에 대해 의심했다면 이삼은 악에 대해 의심한다. 그는 외지인을 찾아가 제발 악마가 아니라고 말해달라고 사정한다. 스스로는 불가능하니 자신의 의심에 종지부를 찍어달라는 부탁이다. 엑소시스트 같은 영화에서의 강력하고 사명감 넘치는 사제의 모습에 익숙한 우리는 줄곧 왜소하고 무력한 그의 모습에 안타까움을 금치 못한다. 결국 의심의 대가로 이삼 역시 사망을 얻게 된다. 문자 그대로 악마에게 찍혔다. 기존 종교, 특히 서양에서 건너온 주류 종교를 바라보는 시각이 이 영화의 주요한 주제의 하나였음을 영화 막바지에서 엿볼 수 있다.
이쯤 되면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 자명해진다. 끝까지 마을을 지키려 했던 그리스도는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가자 무력하게 땅바닥에 주저앉는다. 반면 득의 양양한 악마는 종교인을 대표하는 이삼에게 자신의 뼈와 살을 만져보고 자기를 믿으라며 한껏 비아냥거린다. 종구는 자신을 붙잡는 여인의 살아있는 손길에도 끝내 구원을 불신했는데, 처참하게 죽었던 악마는 슬쩍 못 자국을 보여주는 것만으로도 그리스도의 자리를 빼앗는다. 영화 속에서 과연 누가 승리자인가?
2. 믿음
오늘날 공포 영화들의 악마적 성향 때문에 가급적 관람을 자제하는 편이지만 영화가 괜찮다는 누군가의 평을 듣고 ‘컨져링’이란 영화를 본 적이 있다. 악령의 끊임없는 공격에 만신창이가 된 일가족을 배경으로 ‘악마의 힘은 실재한다. 그 힘을 가볍게 생각하지 말아라.’는 나레이션이 흐르면서 영화는 끝난다. 악령의 세계에 대해 과대평가하고 대중들에게 그에 대한 막연한 공포심을 주입하려는 어둠의 프로퍼갠더 같은 이런 영화들을 나는 온몸으로 저항한다. 그리고 영화 곡성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사람들의 일반적인 통념과는 달리 세상은 빛과 어둠, 백과 흑으로 대변되는 선악 구도 하에서 진행되지 않는다. 물론 이것은 성경에 근거한 기독교적 신념을 바탕으로 한 주장이다. 절대선이신 하나님은 그분의 선하신 목적을 위해 잠시 악에 대한 심판을 보류하신다. 그 집행유예의 기간 동안 악은 세상의 임금이 되어 마음껏 영향력을 행사한다. 이것은 하나님의 의도적인 방임이다. 사실 악을 지워버리기란 절대자에게는 손가락을 튕기는 것보다도 간단한 일이다. 사탄 역시 피조물이 아니던가. 요한계시록을 보면 사탄과 죄와 지옥 자체가 그분의 말씀 한 마디에 단번에 불못에 던져진다. 그렇게 간단히 끝이 난다. 하나님은 현재 세상의 악과 버거운 싸움을 벌이고 계신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역사를 통해 인간의 죄악마저도 선용하여 그분의 계획과 목적을 성취하시는 분임을 온 세상에 선포하고 계신다. 인간의 죄악을 다루시는 하나님에 관한 논의는 워낙 교리적으로 깊은 내용인지라 이 감상문에 다 옮기기란 곤란한 일이다. 그래서 영화가 의도하는 메시지 자체에 더 집중하고자 한다.
사실 곡성뿐만 아니라 많은 영화들이 세상의 악을 바라보는 관점에서 출발하고 있다. 신이 존재한다면 어떻게 세상에 그런 추악하고 비극적인 일들이 일어날까 하는 의문점이 바로 그것이다. 신은 어째서 그토록 소중한 영혼들을 그런 비극으로부터 지켜주지 않는 것일까? 이것은 비단 일반 사람들뿐 아니라 신앙인이라고 하는 자들에게도 똑같이 적용되는 난해한 문제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답이 나오질 않는다. 왜 꽃잎 같은 어린 학생들이 바다 속에 그렇게 수장되어야 했는지 그 누구도 설명하지 못한다. 왜 착하고 진실된 사람들이 가장 큰 고통 속에서 살아가며 선을 베푸는 사람들이 악으로 응징 당하는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 가장 순수한 믿음을 가진 이들이 강제 수용소에게 억압을 겪고 비참한 죽음을 당하는 이유를 우리는 알 길이 없다.
어떤 사람들은 끝내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한다. 신은 없기 때문이라고. 아니, 신이 있다고 쳐도 생각보다 무력한 존재이거나, 아니면 너무나 고결해서 죄인인 인간들과 거리를 두는 것이라고, 그래서 인간들을 방치하는 것이라고 결론짓는다. 다른 사람들은 현실에 절망한 나머지 악의 능력을 더 부각시킨다. 그들은 신이 존재하는지는 모르겠으나 악마는 분명히 실재할 뿐 아니라 갈수록 그 힘이 커진다며 푸념을 늘어놓는다.
이 모든 혼돈과 절망에 종지부를 찍을 방법은 사실 한 가지밖에 없다. 그것은 바로 ‘믿음’이다. 언뜻 보면 의심의 반대말 정도로 치부될 이 말 속에 열쇠가 있다. 그런데 이 믿음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신념과는 거리가 있는 말이다. 영화 속에서 종구가 여인의 말을 믿고, 이삼이 악마의 정체를 믿었더라면 각기 구원을 받았을 거라는 기계적인 가정을 하는 것이 아니다. 그 믿음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듯이, 믿으면 구원을 받고 믿지 않으면 구원이 없는, 결국 구원의 주도권이 마치 믿는 당사자에게 있는 것 같은 그런 믿음과는 거리가 있다. 성경적인 믿음이란 구원자 측에서 대상을 구원하기 위해 주도적, 전지적으로 부여하는 믿음을 말한다. 성경에서는 이 믿음을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한다. 선택된 이들에게 선물로 주어지는 이 믿음은 사람의 노력과 열심을 초월하는 차원에서 능동적으로 구원을 성취한다.
그런 믿음이 생긴다고 해서 당장 죄악이 사라지거나 그 영향력에서 자유롭게 되는 것은 아니다. 믿음이 생기면 죄악이 목표로 하는 것과 더 이상 상관이 없어진다는 것이다. 도무지 해답이 없어 보이는 선악의 문제를 초월하게 된다는 의미이다. 그런 자에게는 장독에 까마귀가 빠지든, 장승에 정이 박히든, 금어초가 대문 앞에서 시들든 말든 상관 없는 일이다. 더 이상 죄와 저주의 종 노릇을 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그는 뭣이 중헌지 아는 사람이다. 참말로 중헌 것은 눈에 뵈지 않는 뱁이다.
이 진짜 믿음을 ‘은혜’라고 부르겠다. 내가 선택하거나 노력으로 성취하는 믿음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늘로부터 주어지는 믿음, 그것을 어찌 달리 표현할 길이 있을까? 어쨌든, 이 ‘은혜’야 말로 죄로 인해 타락하고 의심과 불신으로 평생을 방황할 수밖에 없는 인간들이 구원을 얻는 유일한 길이다. 그것이 성경적으로 올바른 기독교관이다. 내가 아는 한, 영화를 비롯한 대중매체에서 은혜를 주제로 다루는 것을 본 적이 없다. 아니, 다룰 수가 없었을 것이다. 그것은 선악 구도가 아닌 은혜와 심판의 구도 하에서만 이해가 가능한 주제이기 때문이다. 영화 곡성이 기독교인에 의해 만들어졌고, 믿음의 세계를 성찰한 걸작이라는 평까지 나돌아서 내심 기대를 했었지만 이 영화 역시 기독교적 믿음을 보여주는 데는 실패한 것 같다. 어쩌면 믿음이란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역설하는 영화인지도 모르겠다. 자신이 찾아 헤매던 답을 끝내 얻지 못할 때 아예 문제 자체로부터 돌아서버리는 모양새를 숱하게 목격해왔다. 신은 죽었다는 니체의 주장도 결국은 신을 찾지 못했다는 낙담의 또 다른 표현이 아니겠는가. 믿음이 없다면 신도 없고 선도 없다. 천국도 없고 심판도 없다.
3. 현혹
영화 곡성은 의심이 사망으로 자라나는 과정만을 가장 처절하고 절망적인 시선으로 그려나갔다. 마치 영화의 첫 장면을 외지인 낚시꾼이 바늘 두 개에 한 미끼를 끼우면서 시작하듯이 우리 관객들에게 의심이라는 하나의 미끼를 던질 뿐이었다. 그 미끼를 종구와 이삼으로 대표되는 우리 모두가 물었다. 영화 포스터마다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절대 현혹되지 마라’는 문구는 실은 가장 반어적인 표현이다. 믿음에 무지한 우리는 의심할 수밖에 없고 현혹될 수밖에 없다. ‘미끼를 물었다’는 또 다른 포스터 문구는 진짜 믿음을 상실한 세대의 절망적인 한탄, 혹은 거짓 미끼를 던진 악한 자의 환희에 찬 감탄에 지나지 않는다.
영화는 영화로만 보자는 투덜거림이 들리는 듯 하다. 안타깝게도 영화는 영화로만 볼 수가 없다. 우리가 눈으로 보는 모든 것은 우리의 영혼에 영향을 미친다. 눈은 인간의 감각 총합의 칠할 이상을 좌우한다고 한다. 그러니 잘못된 것을 보면 잘못된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 당연하다. 사악하고 끔찍한 것들이라면 더 말할 나위가 없다. 우리의 싸움은 혈과 육에 속한 것이 아니라고 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어둠의 세력과의 싸움이다. 우리는 눈에 보이는 것들을 보면서 그 속에서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인 공격들을 분별해내야 하는 사명을 지니고 이 땅을 살아간다. 그것이 곧 진짜 믿음의 삶이다. 이 믿음을 소유한 이들은 죄악이 던지는 미끼를 거부하고 흑암의 세력을 견뎌낼 수 있는, 그래서 언젠가 세상의 임금 악마와 관계할 것이 없는 하나님의 아들로 우뚝 선 자신들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영화의 마지막 부분에서 카메라를 든 채 우리 관객을 향해 사진을 찍고 있는 악마의 모습을 보게 된다. 실로 섬찟한 장면이다. 그렇게 악마는 우리의 사진을 하나씩 찍어 제단 위에 걸어놓고 있다. 그리고 온갖 주술을 날려 영혼들을 사망에 던지려고 곡 소리 마냥 발버둥 치고 있다.
정신 차리자. 잠에서 깨자. 절대로 현혹되지 말자.
첫댓글 영화를 보고 난 후 답답하고 깨림직한 느낌, 덫에 걸린 듯한 느낌이 있었습니다. 철저히 기독교적인 영화라고 극찬하는 해석도 읽어 보았고, 기독교를 악평하는 영화라는 해석의 글도 읽어보았습니다. 우리미네님의 글에 담긴 바른 시각으로 인해 답답한 느낌이 해소된 것 같습니다. 곡성이라는 영화를 통해 사단이 믿음의 자녀들을 밀까부르듯 조롱하고 주술을 걸고 있지는 않나 생각이 됩니다. 정신 차려야 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