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끼 반야(般若) 외 1편
유종인
수수억 년 전에도 이런 초록의 매트가 번져 있었지
초록 보료 위에 붓다는 처음 번뇌의 시동을 걸었고, 장차 멸종을 앞둔 짐승들 흘레붙은 그림자를 이끼밭에 드리웠지
빙하기를 견디다못해 무성생식을 시작했지 훤칠한 일이야
나는 춘란의 말라가는 뿌리를 감싸기 위해 이끼를 북어처럼 뜯어 감쌌네
꽃도 열매도 없지만 남루하진 않을 걸세
겨울인데 초록을 쌈짓돈처럼 꺼내드는 늡늡한 마련의 수천 세기, 여기 와
여기 누워봐, 두 손을 내려 네발짐승처럼 가만가만 이끼 짚으며 어슬렁거려봐
작심만 해도 여긴 소슬한 데뷔지, 짐짓 한 생각 내려놓듯 기꺼운 마련이 생기지
솔방울 몇 개 구르고, 먼 천둥소리도 잔업 마치고 와서 모로 누웠네
이 심심하고 담담한 내음의 빛깔을 반야의 속종으로 알 거야
인멸을 모르는 초록의 어스름, 결별을 모르는 만남의 먼동이 예 서렸으니
주검을 눕혀놓으면 너무 편안하다 가만 죽은 뒤에도 생각이 번지는 몸을 어쩌나
식물원에 수형된 풋것들은, 가끔 여길 떠올릴 때 호젓한 기색이 만연해
누군가 예 와서는 말이야, 생각 없이 눈물 흘리는데 너무 벅차고 고요해
신문
활자들만 모른 체하면
신문은 이리저리 접히는 보자기,
나는 신문이 언론일 때보다
쓸쓸한 마른 보자기일 때가 좋다
그 신문지를 펼쳐놓고 일요일 오후가
제 누에 발톱을 툭툭 깎아 내놓을 때가 좋다
어느 날 삼천원 주고 산 춘란 몇 촉을
그 활자의 만조백관들 위에 펼쳐놓고
썩은 뿌리를 가다듬을 때의 초록이 좋다
예전에 파놓고 쓰지 않는 낙관 돌들
이마에 붉은 인주를 묻혀
흉흉한 사회면 기사에 붉은 장미꽃을
가만히 눌러 피울 때가 좋다
아무래도 굴풋한 날 당신이
푸줏간에서 끊어온 소고기 두어 근
핏물이 밴 활자들 신문지째로 건넬 때의 그 시장기가 좋다
이젠 신문 위에 당신 손 좀 올려보게
손목부터 다섯 손가락 가만히 초록 사인펜으로 본떠놓고
혼자일 때
내 손을 가만히 거기 대보는 오후의 적막이 좋다
유종인 시집, 『그대를 바라는 일이 언덕이 되었다』 (문학동네 / 2024)
유종인
1996년 『문예중앙』 신인상에 시, 2003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조, 2011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미술평론이 당선되어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시집으로 『아껴 먹는 슬픔』 『교우록』 『수수밭 전별기』 『사랑이라는 재촉들』 『양철 지붕을 사야겠다』 『숲시집』 『숲 선생』이 있다. 지훈문학상, 김만중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출판사 책 소개
문학동네시인선 215번으로 유종인 시인의 여덟번째 시집 『그대를 바라는 일이 언덕이 되었다』를 펴낸다. 1996년 『문예중앙』 신인상을 수상하며 작품활동을 시작한 이래 지훈문학상, 김만중문학상 등을 수상하며 “세계에 대한 해박한 고전적 이해에 기초해 있고, 바깥 풍경에 자신만의 내면을 세심하고 유려한 시구로 투영”(김만중문학상 심사평에서)한다는 평가를 받은 시인은 삼십 년 가까운 시간 동안 시적 갱신을 게을리하지 않는 동시에 2003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조가, 2011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미술평론이 당선되며 장르를 넘나드는 유연한 글쓰기를 보여왔다.
『숲 선생』(2022, 시인의 일요일) 이후 2년 만에 펴내는 이번 시집은 “무심을 거쳐 무아를 엿보려는” 삶과 죽음에 대한 깊이 있는 고민이 담긴 시와 함께 “글을 조기처럼 낚아 말리”(「장인」)듯 글쓰기와 생활이 겹쳐진 시인의 삶이 드러나는 시들이 엮여 있어 사람과 삶을 향한 시인의 진지한 애정을 다양한 측면에서 보여준다.
유종인 시인과의 미니 인터뷰
Q1. 이번 시집은 『숲 선생』 이후 2년 만에 출간한 여덟번째 시집이지요? 작년에는 시조집도 출간하셨으니 거의 일 년에 한 권씩 출간하고 계시네요. 이번 시집을 출간하는 마음은 어떠신지 궁금합니다.
시는 제게 일상의 호흡과도 같습니다. 시가 쓰여질 때나 시가 쓰여지지 않을 때도 시는 저의 안과 밖이며 빛과 그늘이기도 합니다. 이번 시집은 그런 제 시의 여정에 있어서 하나의 자연스런 변곡점에 있는 듯합니다. 이런저런 우여곡절이 있었으나 그걸 달게 받아들이는 수렴의 서정인 듯도 합니다. 툭 트이는 것보다는 서서히 트여가는 모종의 눈뜸의 호젓함이 있기도 하고 또 가만한 설렘이 있기도 합니다. 내외적으로 주어지는 변화에 감사함이 있습니다.
Q2. 제목 ‘그대를 바라는 일이 언덕이 되었다’는 수록작 「언덕」의 한 구절이지요. ‘언덕’이 자연물의 이미지인 터라 왠지 호젓한 느낌이 들기도 하고, ‘그대를 바라는 일’이라는 구절에서는 조금 낭만적인 분위기도 느껴지는데요, 제목에 대해 설명해주신다면요.
산과 다르게 언덕은 일상과 자연을 연결해주는 그윽한 완충 지역 같다는 느낌을 가져왔습니다. 근원적인 그리움에 대해 생각할 때 언덕은 그 등을 보여주는 고래와도 같습니다. 우리가 잃어버려가고 있거나 잊고 있는 것, 그럼에도 조망하듯 떠올리는 가만한 간절함 같은 것을 연대해주는 시공간이 언덕으로 여겨지기도 했습니다. 성취와 소유만이 대세를 이루는 세간에 동경의 뉘앙스를 열어보고 싶었는지도 모릅니다. 그윽이 바라는 바를 향해 나아가는 이를 위해 마음의 어깨와 등을 보여주고 기대주는 것이 언덕인지도 모릅니다.
Q3. 시, 시조, 미술평론을 넘나들며 활발한 활동을 하고 계신데 선생님께서 생각하시는 시만의 매력은 무엇일까요? 시를 집필하실 때 특별히 신경쓰는 게 있으신지도 궁금합니다.
시는 제게 원천이자 가난이고 동경이자 소우주이며 생활의 낙락하고 웅숭깊은 동무입니다. 미술평론은 동서양을 가리지는 않지만 동양화가 가지는 여백과 깊이, 마음의 여유와 자유를 찾아가는 애호에서 너나들이하는 또하나의 고전과도 같습니다. 시가 그림과 멀지 않듯이 그림이 주는 영감 또한 새뜻하고 그윽합니다. 모든 영향과 영감과 생각을 주고받는 마음 그릇으로서의 시는, ‘쓸모 없음의 쓸모’처럼 우리를 위로의 심연으로 이끄는 데가 있습니다. 구원의 소박한 일상이 위로가 아닐까 싶은데 시는 여기에 손을 내어줍니다. 이런 시가 내게도 손을, 아니 손그늘이라도 내어줄 때의 느낌과 서슬을 귀히 여깁니다. 시를 쓸 때는 이런 시의 손길과 기척을 잘 알아들을 수 있도록 스스로 명징하고 고요해지도록 노력하는 편입니다.
Q4. 선생님의 시를 읽다보면 서정적인 분위기를 배가시켜주는 고즈넉한 시어들이 눈에 띕니다. 시어를 길어올리는 선생님만의 기준이 따로 있으실지 궁금해요.
순우리말의 가치가 상대적으로 소홀해지는 것 같아 안타깝게 여기는 편입니다. 다른 우리말도 그렇지만 순우리말이 가지는 미감을 가급적 잘 끌어와 쓰려고 하고 그 소슬한 분위기에 마음의 곁을 내주려고 하는 편입니다. 시인의 말은 옛것과 오늘날의 것이 따로 없습니다. 마음을 얹고 소통하는 순간 모든 언어는 시 속에서 현재화되고 미래로 나아간다고 봅니다. 마음의 상태가 기대고 스미고 돌올해질 수 있는 순간의 말들이란 어느 것이든 귀하고 고마운 동행인 듯싶습니다.
Q5. 마지막으로, 『그대를 바라는 일이 언덕이 되었다』를 읽을 독자들에게 인사를 건네주세요.
미지의 독자는 영원한 독자라고 생각합니다. 그윽한 동경과도 같이 ‘바라는 일’이 늘 선하게 자신을 이끌어갈 수 있는 여백과 가만한 울림이 있다면 그 삶은 기쁘다고 여깁니다. 바라고 바라는 바가 힘든 욕망이 아니라 자신을 열어가는 일이며 일상의 깨우침의 작은 숨쉬기라면 어떻겠습니까. 제 시가 그런 쪽으로 작은 언덕의 눈길이고 인사였으면 합니다. 저보다 늘 앞서 생의 기쁨과 나눔을 내다보고 있는 여러분들이 이미 다솜의 인류라고 생각합니다. 늘 푸르른 동경의 손목을 놓지 않기 바랍니다.
첫댓글 종인씨 시집 출간을 축하합니다. 그윽한 시집 기대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