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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ader & Reader 이문열, 시대를 쓰다
쌀 질질 흘리며, 첩 찾아갔다…이문열이 모델로 쓴 할배
카드 발행 일시2024.09.09
에디터
이문열
이문열, 시대를 쓰다
관심
24. 내 소설의 뿌리, 고향과 문중
알 수 없는 건 사람의 운명만이 아니다. 책의 생명력 또한 모를 일이다. 내게는 쓴 나조차도 어리둥절할 정도로 잘 팔린 책이 여럿 있었다. 글 빚에 쫓겨 급하게 썼는데도 베스트셀러가 된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가 그런 작품이다.
1980년 말에 출간한 『그대 다시는 고향에 가지 못하리』는 달랐다. 등단 1년 남짓 겁 없는 신예였을 때 한껏 야심에 부풀어 쓴 작품이었는데 한해 전 『사람의 아들』의 성공을 압도해 버리겠다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결과는 참담할 정도였다. 고향을 소재로 한 단편 14편을 묶은 연작소설이 시대착오적인 의고주의(擬古主義) 혹은 음울한 감상으로 비쳤는지 독자들의 손을 덜 탔다. 초판 이후 절판시켰다가 80년대 중반 출판사를 바꿔 재출간해야 했다. 남들이 내 글을 좋게 얘기할 때 대표적으로 거론되는 문장이 남았다는 점을 위안으로 삼아야 할는지.
진정으로 사랑했던 고향에로의 통로는 오직 기억으로만 존재할 뿐, 이 세상의 지도로는 돌아갈 수 없다.
우리들이야말로 진정한 고향을 가졌던 마지막 세대였지만, 미처 우리가 늙어 죽기도 전에 그 고향은 사라져버린 것이었다.
『그대 다시는…』에 대해 문학평론가 김화영 선생은 "참다운 발견과 상실의 동시성(同時性)이라는 낭만적 비전을 강하게 전달하고 있다"고 평한 바 있다. 낙원이나 행복이 그런 것처럼 고향은 그것을 잃어버리는 순간에야 비로소 발견하게 되는 삶의 어떤 총체이기 때문에, 최초의 감동으로 고향이라는 마음속의 정처(定處)를 발견하는 것과 동시에 우리는 그것을 잃어버리는 순간에 참여하게 된다는 뜻이었다.
고향은 자조 대상이자 자부심의 원천
글쎄, 사라져가는 고향의 전통에서 내가 몰락하는 영광의 비장미(悲壯美)를 목격한 것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내 몽롱한 유년을 섬광처럼 비추고 사라진 것일망정 고향의 세계에는 빛 또한 있었다. 고향은 한편으로는 우스꽝스러운 자조(自嘲)의 대상이었지만 동시에 내 자부심의 원천이기도 했다.
『그대 다시는…』에 등장하는 정산(正山) 선생은, 부자연스러운 별호(別號)가 암시하는 것처럼 실존 인물은 아니다. 고시준비에 지쳐 문단 말석에 이름을 올리고 주저앉은 옛 제자 현우가 일부러 인사드리러 찾아갔는데도 선생은 "군자(君子)는 불기(不器)"라며 만나주지 않는다. 군자는 한 가지만을 담는 편협한 그릇이 돼서는 안 되거늘 소설 담는 그릇, 그러니까 시정(市井)의 잡문(雜文)을 담는 그릇으로 전락한 제자를 나무란 것이었다.
물론 내 고향 석보(경북 영양군 석보면)에 정산 선생의 모델은 있었다. 나는 지금은 사라진 서울 청운동의 한 아파트에서 태어났다. 내게 고향은 나고 자란 곳이기보다는 조상 대대로 살아온 곳이다. 그 고향에서 내가 살아 본 것은 한국전쟁 발발 직후인 세 살 때, 밀양에서 국민학교를 졸업한 후, 어렵게 대학에 입학해 겨우 평균적인 인생행로를 회복한 뒤, 이렇게 세 차례에 걸쳐 각각 몇 년씩이었다.
한창 고향이 피폐해지던 60년대 후반 세 번째 귀향에서 나는 비로소 고향의 정신을 만난다. 정산 선생 같은 할아버지들과 그들의 정신을. 그 어른들은 고향의 낙기대(樂飢臺)에서 배고픔을 즐기시고, 세심대(洗心臺)에서 마음을 씻으실지언정 시류와 타협하시지 않는 분들이었다.
1980년에 출간한 『그대 다시는 고향에 가지 못하리』. 이문열씨의 고향 경북 영양 석보에서의 경험을 토대로 한 단편 14편을 묶은 연작소설집이다.
정산 선생의 모델로 삼은 OO 할배는 당시 영양의 유림(儒林)에서는 제일 낫다는 한문이었다. 사실은 성품도 굉장히 신중하고 근실한 분이셨는데, 어수룩한 위인으로 치부되고 있었다. 세상 물정 모른다는 뜻의 '숙맥불변(菽麥不辨)'에서 나온 표현일 텐데, 잘 속아 넘어가는 바보 같은 사람을 두고 고향에서는 보리 기운 있다, 맥기 있다고 표현했다. 사실은 사람 좋다 보니 잘 속는 거였을 텐데 사람들이 OO 할배를 두고 맥기 있다고 놀려댔던 것이다.
한 번은 OO 할배가 시앗(첩)을 본 모양이었다. 남편이 마을 머슴이나 종 출신으로 약간 모자라는 반편이고 아내 인물이 좋은 경우 세력과 돈이 있는 남정네가 그 아내를 첩으로 삼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한국전쟁 직후 어려울 때라 쌀가마니나 돈을 대줄 형편이 못 됐던 OO 할배는 한복 바지 아랫단을 대님으로 묶은 안쪽 공간에, 한쪽에 두 되씩 쌀을 채운 다음 남편이 출타한 틈을 타 시앗 집으로 향했다고 한다. 그런데 한쪽 대님이 풀린 데다 마침 비가 내렸다. 물론 OO 할배는 대님이 풀려 쌀이 솔솔 흘러나온 사실을 모를 터였다. 비 맞아 불은 쌀로 이루어진 땅 위의 실금은 아리아드네의 실타래처럼 OO 할배에게 첩이 생겼다는 사실과 그 첩이 누구인지를 꼼짝없이 드러내는 증거가 됐다고 한다. 맥기의 사례였다.
하루는 OO 할배 집에 놀러 갔더니 할배가 “관관저구(關關雎鳩), 재하지주(在河之洲), 요조숙녀(窈窕淑女), 군자호구(君子好逑)”라는 귀에 익은 구절을 외우고 있었다. ‘꽈악꽈악 우는 물새는 물가에서 노는데 아리따운 아가씨는 군자의 좋은 짝이라네’라는 뜻의 『시경(詩經)』 첫 구절이었다. 당시 고향 서당에서 한문을 배우던 나는 마침 『시경』을 공부하던 참이었다. 덩달아 할배가 숙맥이겠거니 여기던 내가 깜짝 놀라 “할배요, 좀 전에 외운 그거 『시경』 아니에요" 여쭸더니 “그래 맞다” 하시길래 “그걸 왜 외우고 있느냐”고 다시 여쭸더니 “심심해서”라고 답하셨다.
안동과 영양 지역의 이야기 가공 전통이 다른 지역보다 특출났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같은 이야기라도 이 지역 사람들의 입을 거치면 숱한 수정과 보탬이 이루어져 풍성해지는 건 있었다. OO 할배와 관련된 이야기만 해도 가지치기를 거듭하며 무성해졌다.
내 고향 석보는 강원남도 오지
경북 영양의 이문열씨의 고향 두들마을에 있는 석천서당. 한국전쟁으로 학업이 중단됐거나 피신 온 마을의 젊은 남녀가 모여 친교의 시간을 갖는 장소로 활용되곤 했다. 사진 이재유
내 고향 석보는 안동에서도 태백산맥 쪽으로 120리나 파고든 오지다. 한때 강원남도라는 말을 들었을 정도다. 재령(載寧) 이씨(李氏)가 석보면 인구의 절반가량 차지하는 동족 부락을 형성했다. 내가 국민학교에 다닐 때만 해도 안동에서 석보 가는 버스는 하루 한 대꼴이었는데 자연히 버스에는 우리 일가 여러 명이 타고 있었다. 지금이야 TV도 있고 인터넷도 있지만 그 시절 밤이면 잠자리에 누워 어른들 이야기 듣는 게 큰 재미였는데 전부 마을 전통이나 우리 집안과 관련된 얘기지 낯선 건 없었다. 전통 교육을 충분히 받게 됐다고 생각한다.
『그대 다시는…』의 후기(後記)에 나는 “내게 있어 고향의 개념은 바로 문중(門中)”이라고 썼는데 관념을 말한 게 아니었다. 마을 전체가 한 집안이었고, 아무 데나 들어가면 우리 집이었다. 어떤 집에서 밥때를 만나건 없으면 없는 대로 갈라먹었다. 궁핍하고 외로웠던 객지살이에서 돌아온 내게 고향은 그야말로 한 경이였다.
책이 귀할 때였는데도 100호를 헤아리는 일가 가운데 내가 읽을 책은 있었다. 남로당 거물인 아버지를 따라 월북했다가 못 견디고 남편과 함께 월남한 허근욱의 체험 수기 『내가 설 땅은 어디냐』, 비극적인 군대 폭력의 희생자인 서울대생 최영오의 옥중 수기 『이 캄캄한 무덤에서 나를 잠들게 하라』 같은 책을 그때 읽었다. 문중을 알게 된 것도, 자연과의 친화를 경험한 것도, 노동과 생산을 이해하게 된 것도 고향에서였다. 고향 살이가 아니었다면 나는 도회적인 감수성만으로 문학을 했어야 했을 것이었다.
고향을 찾은 이문열씨가 석천서당의 들어열개문(사분합문)을 들어 올리는 모습. 사진 이재유
재령 이씨 집안은 고려 때 지금의 국무총리에 해당되는 문하시중을 지낸 우칭(禹稱) 선조가 재령군에 봉해지면서 황해도 재령을 본관으로 삼게 됐다. 후손 모은(茅隱) 선조는 조선이 들어서자 두 왕조를 섬길 수 없다며 멀리 경남 함안으로 근거를 옮겼다. 모곡리 일대의 땅을 사들여 사방 담을 치고 고려 유민을 자처했는데 거기서 고려동·담안 같은 명칭이 유래됐다고 한다.
재령 이씨 여덟 개 파(波) 가운데 우리 집안은 영해파(寧海波)에 속하는데, 병자호란 이후 스스로 벼슬길을 끊은 석계(石溪) 시명(時明) 선조의 일곱 아들 가운데 갈암(葛庵) 현일(玄逸) 선조는 영남 남인을 대표해 기해예송(己亥禮訟) 같은 정쟁에서 노론의 거두 송시열과 대립했다. 석계 선조는 같은 퇴계 학통을 이어받은 장흥효(張興孝)의 딸을 부인으로 맞아들였는데 그분이 내 소설 『선택』에서 자세히 소개한 정부인(貞夫人) 장(張)씨다. 영양군 석보면에 자리 잡은 건 시명 선조의 아들 중 하나인 항제(恒齊) 숭일(崇逸) 선조였다. 그래서 좁게 말하면 나는 항제파, 항제의 12대손이 된다.
가문이 이데올로기 선택에 영향
이런 가문이 내가 이데올로기나 세계관을 선택하는 데 있어서 알게 모르게 작용했다고 생각한다. 등단 후 꽤 잘 나갈 때까지 한동안 고향행이 꺼려졌던 것은 소설가를 여전히 저잣거리 매문도배(賣文徒輩)쯤으로 여기던 고향의 따가운 시선 때문이었다. 반드시 가문이 작용한 탓이라고 할 수는 없겠으나 어떤 일에 가담할 때 내게는, 다른 사람들이 그런다고 나까지 그러면 되나, 나는 그러면 안 된다 싶은 게 늘 있었다.
고향과 문중은 소설 쓰는 데도 도움이 됐다. 『그대 다시는…』은 소재 대부분을 고향에서 얻은 것이었다. 돈키호테 같은 인물을 내세운 82년 소설 『황제를 위하여』 역시 고향의 이야기 전통과 무관하지 않다. 소설은 과학과 합리의 이름 아래 쓸모없는 것으로 배척당한 동양적인 것을 되살려 보려는 시도였다. 사대주의로 비난받을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중국 고전을 많이 인용했지만 고향에서 보고 들었던 우스꽝스러운 사건도 많이 들어가 있다. 큰 뜻을 품고 출행(出行)한 황제가 생전 처음 보는 기차에 놀라 도망치다 물웅덩이에 처박히는 장면이 그런 사례다.
고향과 전통에 주목한 내 소설 경향을 두고 양반 지향적 상고주의(尙古主義) 혹은 중세적 귀족주의라고 재단한 평론가들이 있었는데, 더이상 귀족이 나올 수 없는 시대에 잘 맞지 않는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반편이인 데다 몸이 성치 않았던 복합장애인을 소재로 한 2000년 장편소설 『아가』
2000년 『아가』도 고향에 빚진 소설이었다. 지적으로는 반편이인 데다 몸도 성치 않았던 복합장애인 당편이를 기억에서 소환해낸 것은 크게 미화할 것까지는 없겠지만 오로지 생산의 관점에서 쓸모없다고 내치지 않았던 옛 부락공동체의 심성과 구조를 보여주려는 생각에서였다. 당편이의 삶은 일반적인 행불의 개념으로 치환되지 않는 것이었다. 내 나름으로는 당편이를 사랑하는 한 방편으로 쓴 작품이었다.
하지만 역시 세상의 반응은 실망스러웠다. 페미니즘 진영의 집중포화에 시달렸던 97년 『선택』 때만큼은 아니었지만 장애인 비하나 여성성 왜곡 같은 비난이 일었다.
『아가』는 탁월한 사회학 보고서
감격스럽기까지 했던 것은 지금은 경북대에 있는 사회학자 김광기 교수가 『아가』가 어떤 사회학자의 작업보다 예민하고 탁월하게 사회변동에 따른 근대성 탐구를 수행했다고 분석한 논문(‘소설 속의 전통과 현대: 이문열의 『아가』에 묘사된 근대성에 대한 사회학적 소고’)을 써준 일이었다. 그는 내가 2006년 미국 버클리대에 체류할 때 일부러 찾아와 주었는데 눈빛을 번쩍이며 『아가』의 의미를 설명하던 모습이 아직도 떠오른다.
2021년 광산문학연구소를 찾은 이철우 경북도지사(왼쪽)와 이문열씨. 불나기 전이다. 중앙포토
2022년 6월 30일 밤 경북 영양에 있는 이문열씨의 광산문학연구소에 화재가 발생하자 지역 소방대원들이 진압에 나선 모습. 정확한 화재 원인은 밝혀지지 않았다. 연합뉴스
몇 해 전 나는 끔찍한 일을 당했다. 언젠가 돌아가 살 마음으로 공들였던 고향 석보의 광산문학연구소가 2022년 화재로 전소됐다. 2001년 개관 이후 조금씩 옮겨 놨던 귀한 것들도 모두 잃었다. 김동리 선생의 편액, 김지하가 도망 다닐 때 도장이 없어 손가락으로 대신 찍고 ‘지하(芝河)’라는 필명 대신 ‘지하(地下)’로 낙관한 수묵화, 아내가 몇 년에 걸쳐 수놓은 자수 병풍 같은 것들이다. 오래 전부터 나를 좋아한 이철우 경북도지사가 20억원 넘는 예산을 확보해 내년 말까지 문학관으로 복원하겠다는데 내 이름을 붙인 시설은 들이지 말라고 했다.
그보다 갈수록 인구가 줄어들어 이제 고향 자체가 사라질 것 같다는 소리를 들으면 기가 막힌다. 행정의 낭패인데 어떻게 하려는 건지 모르겠다.
에디터
이문열
관심
작가 [출처:중앙일보]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27636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