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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복수” 윤리의 결정 기준
바울의 윤리가 규범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의 윤리적 권면의 근거인 신학에는 분명한 규범적인 요소가 있다. 그 규범적인 요소는 무엇일까? 그것은 그리스도인의 자유, 양심, 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으며, 이것들은 상황에 따른 복수 윤리에 있어서 규범적 기능을 한다고 볼 수 있다.
(1) 자 유
1) 해방으로서의 자유
우리는 법적, 사회적, 정치적 자유 도는 양심의 자유와 출판의 자유 에 관해서 말한다. 그러나 이같은 모든 “세상적” 자유에 관해서 바울은 말하지 않는다. 그의 자유의 개념은 엄격히 신학적으로 이해될 성질의 것이다. 그는 곧 하나님의 자녀가 누릴 종말론적인 은총으로 주어진 자유를 생각하고 있다.
구체적으로 말해서 바울에 있어서 자유(ἐλευθερία)는 죄(롬 6:18 이하)와 율법(롬 7:3,4; 갈 2:4)과 죽음으로부터(롬 6:21,22)의 자유이다. 즉, 바울에게 있어서 자유(ἐλευθερία)는 죄 가운데서 율법을 통하여 죽음으로 인도하는 존재로부터의 자유인 것이다. 우리는 죄 가운데 있는 자들로서 죄의 노예들이다(롬 6:20). 그리고 그 결과는 바로 연적인 무질서(롬 6:19)로서, 이 영적인 무질서는 율법에 의하여 촉발된 육체의 정욕에 자기 자신을 내어 맡기는 것을 의미한다(롬 6:12). 율법은 하나님의 명령으로서 선을 위한 것이다. 그러나 율법은 우리의 죄된 존재 안에서 죄된 정욕들을 중개해 줌으로서 죄를 드러내 준다.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명령인 율법을 남용케 하는 것은 우리 자신의 이기적인 마음이다. 이 이기적인 마음은 로마서 6:17이하에서 언급되어 있는 무질서한 충동을 일으킬 뿐만 아니라, 갈라디아 교인들이 지녔던 것과 같은 율법주의의 충동을 일으키기도 한다.
따라서 자유는 죄로부터의 자유뿐만 아니라 율법으로부터 자유, 즉 율법을 통하여 의로운 자로 인정을 받고자 하는 욕구로부터의 자유도 의미하는 것이다. 이 자유는 율법을 어김으로서가 아니라 자율성을 획득하고자 하는 모든 시도들로부터의 자유이다.
그리고 율법으로부터의 자유는 도덕주의로부터의 자유와 신중하고도 복종적인 첵임성이라는 구절 아래 하나님 앞에서 자기 스스로 자신의 주인이 되고자 하는 오만함으로부터의 자유를 의미한다. 그리고 이 자유는 우리 자신을 스스로 하나님으로 간주하고, 이로써 우리 자신의 참된 실체를 인식하지 못하는 자기 기만으로부터의 자유를 의미하기도 한다. (비교, 요 :32; 롬 2:18 이하)
바울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선포하고 있는 자유는 죄와 죽음으로부터의 자유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구하지 않고 우리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는 죄인으로,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다. 이처럼 죄로 인하여 죽음에 넘겨진 모든 인간에게 있어서 자유는 자아로부터의 자유를 의미하며, 따라서 타락한 존재들을 파멸의 길로 고소하는 율법으로부터의 자유를 의미한다.
2) 종으로서의 자유
종으로서의 자유는 바울 사상에 있어서 특징을 이루는 하나의 공식으로 성립된다. 곧 자유는 그리스도의 지배 아래에서의, 또는 은총 아래에서의 섬김(롬 6:14 이하)라는 것이다. 이 지배는 율법 대신에 등장한 것이다.(비교: 롬10:4; 갈 3:13이하: 그리스도가 우리를 저주에서 해방시켰다) 그리스도의 “종”은 참된 자유인이다. 그는 하나님의 자녀요, 상속자다. 그를 위해서 모든 하나님의 약속이 충족된다(갈 3:15 이하; 4:1 이하).
중심사상의 양면은 고린도전서 3장 21-23절에서 말하는 그리스도-자유의 보편적 고백 가운데 고전적으로 표현되었다. 곧, “모든 것이 너희 것이다” 곧 세계, 생명, 죽음이 너희 것이다. “그러나 너희는 그리스도의 것이고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것이다.” 봉사하면서 그리스도에게 종속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을 세계의 주인으로 만든다. 의의 봉사(롬 6:16 이하)는 자유에서 일어나고, 자유는 바울이 가르친 신앙의 순종의 결과이다.
그같이 율법은 힝을 다 잃었다. 정죄하는 대신에 은총이 등장하고 그리스도 안에 있는 믿는 자들의 생의 규제가 은총의 명령임을 인수한다. 이 명령형이 하나님의 거룩한 뜻을 표현하고 그같이 하여 하나님의 “성령적” 율법을 바로 보존한다(롬 7:12, 14). 모든 반율법주의, 곧 하나님의 지시란 의미에 있어서 율법의 모든 절대적 거부를 바울이 멀리하였다는 것이 그것으로 입증된다. 영지주의적 자유의 열광주의나 현대적인 그것이 바울을 인증할 수 없다. 왜냐하면 계명은 그리스도인의 자유, 즉 “인간”의 자유의 바른 사용과 보존에 인도하는 것이지 이것을 위태롭게 하는 것은 아니다. 성령적 자유는 하나님의 계명에 대해 순종한다.
확실히 자유는 모든 세계 내의 속박으로부터의 자유요, 힘이지만 폴 틸리히 (P. Tillich)가 “무아경”(Ekstatische)이라고 부른 것에 집착하는 한-반명에 무엇으로부터의 자유이기보다는 이웃을 위한 자유라는 것은 옳은 말이다. 이 사랑하면서 얻는 자유는 자기의 것을 구하지 않는다(고전10:24). 그것은 따라서 체념의 형식도 취할 수 있다. 만일 그 자유가 약한 형제에게 걸림이 된다면, 바울은 “고기도 영구히 먹지 않겠다”(고전 8:13) 고 하였다. 이방 제사에서 신들에게 봉헌되었던 이른바 “우상의 제물”을 먹는 일의 자유는 결코 절대적인 자유는 아니다. 도리어 그것은 사랑으로 명령된 약한 형제에 대한 고려에 의하여 아마 제한을 받아야 하는 것 같다. 나의 자유가 형제들에게 함정이 되어서는 안되고 그의 양심을 괴롭혀서도 안된다. (고전 7:18-24)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롬 8:2)는 명제를 이해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첫 구절에서는 “법”(νόμο)이 순수하게 성서적으로 생각되었고 없어서 무방하다는 추측은 가능하지 않은가? 그리스도 안의 생명의 영은 위에서 말한 해방을 지어내는 것이지 임의의 율법을 지어내는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 공식 표현을 갈라디아서 6장 2절의 도움으로 이해하려고 한다. 거기서는 율법의 의의 요구는 “육에 따라 살지 않고 영에 따라서 사는 우리 안에서”(롬 8:4) 완성된다고 기록되었다. 그러므로 바울은 영의 인간에 의한 율법의 완성에 관해 말한다. 따라서 “ 생명의 영의 율법”이란 위의 표현은 순수하게 비유적으로 말하는 것일 수 없다. 그것은 도리어 우리가 쓴 “그리스도의 율법”이란 공식구에 상응한 훌륭한 신학적 의미를 지닌다. 이 “율법”은 새로운 생의 또는 그리스도의 영과 동일하며 따라서 이제 하나님의 계명은 영으로 채워진 인간을 통하여 “새로운” 순종으로 지켜질 수 있다.
(2) 양 심
“양심”(συνείδησιϚ)이라는 희랍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없다. 그러므로 LXX에서는 양심(συνείδησιϚ)란 단어가 거의 나타나지 않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바울은 이 용어를 그리스 세계로부터만 받을 수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사실은 양심(συνείδησιϚ)이 바울에게 의미하던 것과 똑같은 의미를 가진 LXX에서의 단 한 번의 예가 헬라 철학의 영향을 받은 문헌인 솔로몬의 지혜서 17장 10절에서 나온다는 것에 의해서 뒷받침되어진다. 이 단어가 신약성서 중에서는 바울 서신들에서 최초로 그리고 가장 빈번하게 나타나며 고린도전서 8장 7절 이하와 10장 25절 이하에서 특히 현저한 것으로 보아 고린도교회의 바울의 대적자들 사이에서 널리 유포되어 있던 용어였던 것 같다.
그렇다면 믿는 자들의 “양심”이란 무엇을 가르치는가? 바울은 양심 용어를 우상에게 바쳐진 제물을 먹는 것에 결부시키고 있다(고전 8:7 이하; 10:25 이하). 여기서 바울은 고린도 교회안에 만연해 있던 주장을 이용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바울에게 있어서 양심은 의지와 지식 사이의 분열이나 판단과 행위 사이의 분열에 의하여 위협받고 있던 “자아인식”을 의미했다. 즉 양심은 아무런 편견도 없는 공정한 판단력이 아니라 뜻과 행위에 있어서의 자아 인식인 것이다.
그리스도안에서 참되시고 은혜로우신 하나님을 만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의미에서 양심을 자유롭게 해 줄 뿐만 아니라 이러한 의미에서의 양심을 위임하기도 한다. 여기서의 이 자유는 아직 우상들로부터 완전한 자유를 누리고 잇지 못하는 연약한 자들을 위한 것인 반면에 위임은 그리스도께서 연약한 자들을 위하여 죽으신 까닭에 인간의 연약함을 인식하고 그 연약함을 인식하고 그 연약함을 받아들이는 강한 자들을 위한 것이다. 따라서 연약한 자들은 우상들에게 바쳐진 제물을 먹는 것에 대하여 의혹을 품거나 근심하지 말아야 하며, 강한 자들은 우상들에게 바쳐진 제물을 임의로 먹음으로서 연약한 자들에 하여금 의혹에 빠지도록 하지 말아야만 한다.
한편, 로마서 13장 5절의 “양심을 인하여”라는 문구는 (a)우리의 마음속에 자리잡을 수도 있는 악한 양심을 피하는 것이나 (b) 의무에 따라 행하는 것이다 (c) 국가와 하나님의 뜻 사이의 결속을 인식하는 것을 의미할 수 있다. 여기서 로마서 13장은 고린도전서 10장과는 달리 강압에 의한 복종이 아니라 행위와 자아 인식의 합일 안에서의 긍정적인 복종을 권면하고 있으며, 따라서 6절에 비추어 볼 대 “양심을 인하여”하는 문구는 (c)의 의미로 보인다. 즉 신자들은 국가를 단지 하나님의 종으로 간주하여야만 하는 것으로서, 베드로전서 2장 19절도 역시 이 점을 나타내 주고 있다.
다른 구절들에서 양심은 재판관의 기능을 지니고 있다. 고린도전서 4장4절에서 바울은 인간의 판단이나 심판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고, 오직 그를 받아들이시고 자유롭게 하시는 하나님의 판단만을 두려워하고 있다. 따라서 그는 그의 양심의 증거를 자랑하였으며(고후 1:12; 요일 3:19 이하 비교), 또한 모든 판결은 하나님의 말씀에 입각하여 행해지는 것으로써 그는 다른 사람들의 양심에 의하여 하나님의 참된 종으로서 평가되기도 하였다(고후 4:2).
한편 로마서 9장 1절에서 양심은 맹세의 성격을 지니고 있는데, 이 양심은 오직 성령에 의하여 지배되고 확증되는 것이었다. 그리고 로마서 2:15에서 이방인들의 양심은 인간의 책임성을 예시해 주고 있다. 비록 인간의 양심이 죄를 비난하는 기능만이 아니라 자신을 변호하는 기능도 지닐 수 있으나, 여기서 양심은 사법적 기능을 지니고 있다. 바울의 서신들에 있어서 양심의 비난자적인 역할은 다소 약화되어 있다. 이는 율법이 그 무엇과도 비교될 수 없을 정도로 예리하고 신랄한 비난자로 작용하고 있으며, 이 율법마저도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우리를 거듭나게 하시는 하나님에 의하여 기각되기 때문이다.
바울에게 있어서 양심은 인지하고 행동하는 인간의 중심적인 자아인식이었다.. 우리는 인간의 상태와 행위와 지식에 대한 그의 언급들 속에서 복합적인 여러 가지 이념들을 찾아볼 수 있다. 이러한 여러 가지 이념들을 하나로 결합시켜 주고 있는 것은 바로 새로운 진리 - 우리가 그리스도안에서 하나님으로부터 인정받고 잇는 자들로서 우리 자신의 내적인 갈등들을 보다 더 예리하게 인식할 수 있으며, 이와 동시에 이러한 갈등들을 치유와 회복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에 위탁될 수 있는 - 이다.
바울은 헬레니즘 체계 속에서 당시 일반적으로 통용되었던 이 개념의 의미를 그대로 사용하는데, 즉 이 “양심”이라는 개념은 기본적으로 한 사람의 행위들을 판단할 수 있는 보편적인(예, 롬 2:15; 고전 8:7 이하; 10:25 이하)역할이나, 사람들(예, 고후4:2; 5:11)을 평가하는 것이기는 하지만, 구체적이든 추상적이든 “하나님의 의지”를 확인하거나 규정하는 것은 아니다. 양심은 기독교인들의 삶 속에서 엄격히 제한적이고 잠정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을 뿐이다.
(3) 사 랑
1) 율법의 성취인 사랑
바울은 그 어느 곳에서도 율법에 “순종하라”는 말을 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그는 믿는 자도 율법의 계명들을 지켜야 한다고 생각한다.(예, 고전7:19). 그러나 이제 율법의 권세에서 자유로워진 믿는 자가 어떤 의미에서 아직도 그 율법에 얽매여 있다는 말인가? 사도는 구원의 방식이라고 주장되는 율법을 거부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그것을 지켰을 때 업적들로 간주될 수 있는 일단의 도덕적 의무들을 규정하는 성문법전의 하나로서 율법은 그리스도안에서 “끝”난 것이다. 하지만 이와 다른 방식으로 율법은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되었다. 왜냐하면 율법은 생명을 약속했지만 그것을 가져다 줄 수는 없었다. 그런데 그 생명은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을 통하여 인간들에게 부여되었다. 더욱이 율법의 계명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계시된 것으로서의 하나님의 은혜의 의미와 일치하는 한 그것들은 아직도 사실상 특별히 믿는 자를 구속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바울의 율법의 “성취”에 대해 말하는 두 개의 본문, 즉 로마서 13장 8절 이하와 갈라디아서 5장 13절-14절에 의해 암시되어있다.
이 두 구절들은 모두 다 기독교인들과 율법의 관련성을 이웃을 사랑하라는 율법의 명령에 입각하여 규정을 짓는다. 물론 두 구절 사이에는 자세한 부분에서 몇 가지 흥미있는 차이점들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로마서 13:8에서 사도 바울은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다”라고 말한다 따라서 동사 “이루었다”(πεπλήρωκεν, 현재완료형)의 주어는 기독교인인 것이다. 하지만 10절에서는 “사랑”(ἀγἀρη) 그 자체가 행위하는 주어이다.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치 아니하며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 이 구절을 고린도전서 13장과 비교해 보면 좋을 것이다.. 왜냐하면 고린도전서 13장에서는 “사랑” 그 자체가 오래 참음과 친절 등의 주어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바울이 사랑을 기독교인의 새로운 삶의 한 모습에 불과한 거이 아니라, 그 삶 전체의 내용과 양식으로 보고 있다고 결론을 내릴 수 있을 것이다. 믿는 자는 “사랑”이다. 즉, 그는 그리스도 안에서 삶의 새로움에로의 부활에서 사랑되어져 왔다. “은혜 아래” 있는 자로서 그는 하나님의 사랑을 부여받으신 분(롬 5:8)인 그리스도에 의해 “잡힌 바” 되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와 더불어 죽음과 부활의 사건에 동참하기 때문에 그 자신이 성령을 통한 십자가의 수난자가 된 것이다(롬 5:15). 그에 따라 그는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게”되는 것이다(롬 6:13). 바울이 믿음을 은혜를 받는 수단으로 본 것과 동일하게 그는 빋음을 성령을 받는 수단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예, 갈 3:2,5)
성령의 은사는 사랑의 은사이기 때문에 바로 사랑의 수납자인 것이다(비교, 갈 2:20). 그러므로 믿음의 순종은 사랑에 자신을 완전히 바치는 것이다. 바울의 의미에서의 “순종한다는 것”은 자기의 전 자아를 그 사랑의 지배적 능력에 양도하는 것이다(비교, 고후 5:14). 은혜의 영역은 사랑이 부여되고 사랑이 요구되는 영역이다(즉 사랑하는 자는 믿는 자들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인간으로서 믿는 자는 사랑이다. 사랑은 기독교인의 삶의 총체적 의미요, 그의 순종이 자기의 삶 전체를 하나님께 바쳐야 하는 이유이다.
바울의 사상을 이런 식으로 해석하는 것이 타당하다면, 우리는 율법의 성취에 관한 바울의 주장을 언급하는데 신중해야만 한다, 바울의 입장은 율법을 실천한 자 혹은 율법을 수행하는 자로서의 기독교인이 아니다. 율법은 믿는 자의 삶 속에서 사랑으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에 의해 성취된다. 로마서 13장 8절에서만 바울은 믿는 자를 “율법의 성취”라고 말한다. 갈라디아서 5장 13,14절은 이 점에 대하여 어떠한 수정도 가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모든 율법은 ‘네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이 한 문장 속에서 성취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갈라디아서 5장 14절의 “이루었다”(πεπλήρωται 현재 수동형)는 로마서 13장 9절의 “요약되어 있다”(άνακεφαλαιούται, 한글개역성경의 번역은 “다 들어 있다.”이다)와 동의어이다. 왜냐하면 바울은 율법의 계명들이 사랑하라는 계명 속에서 모두 표현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런 관점에서부터 어디에서도 어떤 율법의 계명들은 유효하지 않는다고 지적되지 않는다. 이런 점을 깊이 생각하는 것은 그에게는 일종의 결과론이요, 율법의 성문법전을 다루는 데로 돌아가는 것이라고 여겨졌을 것이다. 명확한 요점은 로마서 13장 8절 이하와 갈라디아서 5장 13,14절에서 전제하는 것에서 나타나 있다. 즉 율법은 은혜의 영역과 사랑의 지배에서 그리스도안에서의 믿는 자의 새로운 삶으로부터 독립된 규범으로서는 어떠한 가치도 없는 것이다.
2) “새로운 피조물”과 사랑
이 요점은 바울의 중요한 세 가지 경구들, 즉 고린도전서 7장 19절, 갈라디아서 5장 6절, 6장 15절의 병행적 표현들을 검토함으로써 요약될 수 있다. 세 경구들은 각기 할례도 무할례도 그 자체로는 가치를 지니지 못한다는 주장으로 사직된다(이에 대한 논의는 롬 2:25 이하에서 일어나며, 롬3:30의 진술 속에 요약되어 있다. 〔하나님〕은 할례자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무할례자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하신다). 하지만 이 세 개의 병행귀적 경구들은 문제가 되는 것을 다른 방식에서 설명한다. 고린도전서 7장 19절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하나님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요(RSV), 갈라디아서 6장 15절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새로 지으심 받은 자”(RSV)이다(우리가 이와 더불어 롬 3:30도 생각할 경우 “믿음”이 제 4의 문제로도 등장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 세 경구들의 상응성은 수사학적인 성격만이 아니라 자료상의 연결이기도 하다. 하나님의 능력에 의해 수정을 받고 하나님의 사랑에 의해 화해를 받은 하나님의 은총의 수납자로서 믿는 자는 부활하여 새 생명을 얻었다. 그의 전체 상황은 근본적으로 변화되었기 때문에 이제 그는 “새로운 피조물”이 된 것이다.
바울이 갈라디아서 6장 5절에서 이런 표현을 할 때 그는 분명히 그리스도와 더불어 죽고 더불어 부활한 믿는 자를 생각한 것이다. 즉 십자가를 통하여 이 세계는 믿는 자에게 “십자가에 못 박혔다”. 그리고 십자가와 더불어 “나” 옛 사람도 십자가에 못 박혔다(갈 6:14; 비교, 롬 6:6). 따라서 “새로운 피조물”은 “그리스도안에 있게” 되었다(고후 5:17). 그리고 새로운 피조물만이 중요한 것이 되어 있다.(갈 6:15). 이와 관계 있는 갈라디아서 5장 6절의 경구가 έν Χριστω Ιησού, 즉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중요한 것이 없으되......”라는 문구로 시작되어 있다는 사실이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3) 순종인 사랑
갈라디아서 5장 6절의 “사랑 안에서의 역사하는 믿음”(πίστιϚ δἰ αγἀπηϚ ἐνεργουμένη)는 정확히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가? 분사형 ἐνεργουμένη는 진행의 의미(“역사하는”),혹은 수동의 의미(“고취된”)로서 간주될 수 있다. 그렇다면 믿는 자의 사랑하는 행위(그의 믿음의 표현)에 관한 언급이 주인가 혹은 그의 사랑받는 상태(믿음을 불러일으키게 하는 하나님의 사랑)에 관한 언급이 주인가? 대부분의 주석자들(그리고 사실상 모든 영역본들: 또한 한글 개역성경)은 전자를 택한다. 그러나 후자의 입장에 대해서 혹은 적어도 “두 해석들이 상호 보완적이다”라는 판단에 대해서 많은 것이 야기되어져야 한다. 바울에게 있어서 신앙의 순종은 사랑안에서의 순종이라는 것이 명백해지는데, 그러나 그 순종의 근거는 하나님 자신의 사랑이기 때문에 그 순종은 사랑의 성격을 지닌 순종이다. 기독교인은 2중의 의미의 사랑에로 소환된다. 즉, 기독교인은 사랑받으며 사랑하여야 한다. 바울의 신학의 경계 안에서 이 두 가지는 분리되지 않고 나타나 있다. 갈라디아서 5장 6절을“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이라고 번역하는 것은 상당히 암시적이다. 믿음은 은혜의 사건에 대한 응답이요, 그러한 의미에서 은혜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그러나 주에 대한 순종으로서의 믿음은 그 자체의 “일”을 지니며, 그것은 “사랑의 노고”로 그리스도안에서의 믿는 자의 새로운 삶이라고 표현된다.
이제 고린도전서 7장 19절의 “하나님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의 의미가 규정될 수 있다. 로마서 13장 8절 이하와 갈라디아서 5장 13-14절이 보여주듯이 율법의 계명들은 그것들이 사랑의 계명을 표현하는 한 의미를 지니고 힘을 갖는다. 이 계명들은 율법이 요구하기 때문이 아니라 (이 경우에 율법에 준하는 “업적들”이 된다), 그것들이 인간들과 함께 하시려는 하나님 자신의 길과 일치하기 때문에 준수되어야 한다. 사도 바울이 “율법의 계명들을 지키는 일”에 대해서 말한다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기독교인의 순종은 성문법전에 의해 촉구되지도 그 법전을 향해 있지도 않다. 그 순종은 하나님께 대한 순종이며 하나님은 그 자신이 순종을 가능하게 하셨다.
바울 신학의 어휘들 가운데서 믿음은 순종이며 순종은 사랑이다. 그런데 철저하게 이해된 순종이 주께 속한다는 것, 즉 하나님의 종이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면, 바울이 하나님을 믿는 자의 사랑의 대상이라고 거의 말하지 않는 다는 것은 (롬 8:28; 고전 8:3 외에는 없다.) 이상하지 않는가? 니그렌의 대답은 본 연구에서 발견된 사실들과 일치한다. 하나님의 사랑은 십자가에서 순수한 은혜의 사건으로서 계시되어진다. 그런데 그 은혜는 자발적이고 무 동기적이며 인간의 편에서 볼 때는 아무 공로없이 받은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이 “자기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은 결코 응답 이상의 것이 아니다. 그 응답이 아무리 귀하다 할 지라도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의 반사이며, 그 사랑에 의해 ‘동기가 주어진’ 것일 뿐이다. 이런 이유에서 하나님에 대한 순종에는 ”또 다른 이름이 부여된다. 즉 ἀγάρη가 아니라 πίστιϚ가 주어진다. 그렇다면 사랑 안에서 이루어지는 믿음의 순종은 어떻게 표현되는가? 로마서 13장 8절 이하와 갈라디아서 5장 13-14절에 나타나 있는 이웃사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