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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어 독경과 원어독경의 논쟁에 대하여...
이 문제를 살펴보기 위하여 스위스의 세계적인 언어학자이며 오늘날 사상계를 풍미하고 있는 구조주의의 선구자
“소쉬르”의 언어분석방법을 통해 알아보기로 하자 그는 언어보다 앞선 개념인 기호를 가지고 이야기 하고 있다
기호를 보다 쉽게 이해하기 위해 일상생활의 기호들을 찾아보자.
교통신호의 빨간불에 우리는 차를 멈추게 되고,
교통표지판을 보고 길을 찾아간다.
우리는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딴 선수가 태극기를 들고 뛰며
관중들에게 인사하는 모습에서 눈시울을 적시며,
우리나라 축구 국가대표의 붉은 색 유니폼과 같은 색의 옷을 입고
경기장에서 열광적으로 응원한다.
여기서 교통신호, 표지판, 태극기, 붉은 색은 모두 기호이다.
어떤 기호라도 그 속에 의미를 의미를 품고 있기 때문에
사람들이 반응을 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교통신호의 빨간불은 가지 말고 서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고
태극기는 우리나라를 상징한다.
언어는 그야말로 의미를 직접적으로 품고 있는 기호이다.
기호의 속성 때문에 “문자”와 “소리”로 표시된다.
문자는 가시적(보이는 것)인 것이고
소리는 비가시적(보이지 않는 것)이다
누군가를 사랑한다고 했을 때 ‘사랑‘이란 하나의 기호이다.
하지만 사랑이란 여러 가지를 의미한다.
친구와의 사랑, 가족간의 사랑, 스승과 제자의 사랑, 남녀의 사랑,
에로스적인 사랑,
로고스적인 사랑,
종교적인 사랑 등 많은 의미를 지니게 된다.
그런데 구조주의 철학자 소쉬르는
언어의 특징을 본질에 있어서 자의적이라는 것이다.
“소년”이나 “boy" 어느 하나가 실제를 의미하는데 있어
더 적절하거나 더 합리적이라고 말 할 수 없다.
언어는 문화적 자의성의 산물이며
사회적 관행의 소산일 뿐이라는 것이다.
그의 말에 비추어보면
방편품 제2에서
한어인 “이시세존 종삼매”나
원어인 “니지세손 주산마이”가
법화경 방편품의 마음을 읽어내는 데
있어서 둘중에 어느 하나가 더 적합하다고
할수 없다는 것이다.
그것은 한어나 일어가 누군가에 의해서
꼼꼼이 따져서 원래의 뜻과 언어를 일치시키려고
의도되어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는 한국에서 의도되지 않고 자연발생적으로
생겨난 것이고
또 하나도 마찬가지로 일본에서 우리들의 언어는
이렇게 하자고 따져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수천년의 역사를 거쳐오면서 자연스럽게 만들어진
것이다.
이렇듯 의도되지 않은 자연발생적인 언어들이기 때문에
법화경의 방편품의 마음을 한어가 일어가 더 잘 표현
하고 있다고 볼수 없다.
만약 언어가 의도되어진 기호체계라고 하면
잘 따져보아야 한다. 두 언어중에서 어는 것이
더 잘 만들어졌나를 살펴보고
그중에서 하나를 선택해서 사용하여야 할 것이지만
절대 그렇치가 않은 것이다.
일차원적으로 소쉬르의 언어학자의 언어기호체계
분석에 따르면
일어독경을 하든
한어독경을 하든
법화경의 마음을 현시하는 데 있어서
아무런 차이가 없으며
불력 법력을 나타나는 데 있어서는 동등하다고 볼 수 있다.
“지기님”이나 “되게하라님”이나 논리적으로
한어나 일어나 똑 같은데 왜 굳이 일어독경으로 하여야 하는가를
세계적인 언어학자는 “언어생성의 자의성”이라는 언어의 본질을 가지고
분석적으로 대변해주고 있는 듯하다.
그에 따르면 기호로서의 언어는
“기표”와 “기의”로 결합되어 진다고 한다.
“기표”는 그냥 언어의 물리적 형태인 “글자”와 “소리”를 말하고
“기의”는 글자속에 소리속에 포함되고 있는
“언어가 나타내려는 본래의 의도,의미”를 말한다.
대성인님의 언어관이 “말이라 함은 앎의 생각을 울려서
소리로 나타냄을 말함인데”<총감문초>처럼
우리는 어떤 생각이 있을 때
이를 표현하기 위해 언어를 사용한다.
누군가를 사랑한다고 했을 때 ‘사랑‘이란 하나의 언어이다.
하지만 사랑이란 여러 가지를 의미한다.
친구와의 사랑, 가족간의 사랑, 스승과 제자의 사랑,
남녀의 사랑, 에로스적인 사랑, 로고스적인 사랑,
종교적인 사랑 등 많은 의미를 지니게 된다.
부자라고 했을 때 과연 돈이 얼마나 많아야 부자인가?
가난해도 마음이 행복하면 부자인가?
이처럼 언어는 추상적인 의미를 나타내기도 하고
여러 가지 의미를 가지기도 하는 것이다.
하나의 기표에 여러 개의 기의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은
결국 언어가 여러 가지로 해석된다는 의미이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언어를
문(文),의(義),의(意)로 나누어서 본다.
문(文)은 소쉬르의 기표에 해당하고
의(義),의(意)는 기의에 해당한다.
왜 언어는 달리 해석되는 것일까?
그것은 하나의 언어에 대해 해석하는 코드(code)가 다르기 때문이다.
이것이 언어가 갖고 있는 태생적인 한계이다.
같은 법화경이라도 법화경의 심을 죽이면서 읽는자와
법화경의 마음을 잘 드러내면서 읽는 자가 있는 것은
바로 이 언어의 한계 즉 백천만가지의 코드가 다르기 때문이다.
여기서 나타난 것이 “사제불이”이다
불교는 사제불이가 없으면
이 코드로부터 벗어나서 자신의 모든 수행, 노고등이
결국은 “회론”으로 되어 버리는 것이다.
코드를 잘못읽어서 법화경의 마음으로부터 비켜갔기
때문인 것이다.
그렇다면 코드란 무엇인가?
코드는 언어가 해석되는 토대이다.
이 언어에 대한 의미는 이것이라고
미리 정해둔 규약이 코드인 것이다.
대성인 불법의 대표적인 “코드”는 무엇일까
그 아름다운 “어의구전” “어서 10대부”그리고 “일반어서”등이고
그 이후로 대성인님의 코드를 잘 세분화시켜서 발전하여
창가학회에서 받아 들여온 “교학코드”들.....
어서는 “절대코드”라고 볼수 있지만 여기서 말하는
“교학코드”는 현증을 통해 대성인님의 시그널(신호)를 확인하여 온
“제자들의 세부코드”라고 할수 있다.
( * 지기님과 평회원님은 지금 이 코드를 바꾸자고 주장하고 있음. )
한편 선종은 참된 불도란 문자에 의해서 전해지고 있는 교법이 아니라
별도로 마음으로써 전해지는 것이라는 오의(奧義)를 세운다
불법의 진수는 교리의 추구가 아니라 좌선을 통해 스스로
체득하는 것이라고 한다.
깨달음을 달이라고 보고 문자(언어)는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으로 본다.
달을 가리키고 난 다음에는 손가락은 필요없다고 보는 것이다.
가령 제주도에 갈려고 할 때 타고간 배는 제주도에 가면 버려야
할 것이다라고 보는 것이다
이에 비해 교종은 교리자체에 깨달음이 숨어 있다고 믿는다.
아함경에는 아함의 마음이 있고
방등경에는 방등의 마음이 있고
반야에는 반야의 마음이 있고
화엄에는 화엄의 마음이 있고
법화에는 법화의 마음이 있다고 한다.
그래서 아무 뜻도 모르고 독경을 하면
경전의 마음이 타고 올라와서 깨달음을 열어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함방등만야화엄은 미현진실의 이전경이므로
이제 소용없는 마음이 되었으니까. 거론할 가치가 없지만
법화경의 글자는
법화경 “적문의 마음”을
“본문의 마음”을
“문저의 마음”품고 있으므로
글자를 제대로 만 읽는다면 글자자체 하나하나에
즉 소쉬르가 말하는 “기표”에
“법화경의 마음과 에너지”를 비축하고 있는 것이다.
교종입장을 충실히 따른다면
글자 하나하나에 엄청난 “건전지”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일어독경을 할 때 아무 뜻도 모르고
읽은 다고 해서 읽는 효력이 약하다고 하는 사람은
교종의 입장을 충실히 반영하지 않는 사람이다.
선종이 독경을 한다면 교리속에 숨어있는 뜻을 잘 헤아리고
그 뜻을 자신의 마음으로 것으로 해야만 깨달음을 열수가
있다고 하는 것이다.
한마디로 교종은 기표와 기의에 부처님의 마음이 있다고 믿고
선종은 기의에만 부처님의 마음이 있으며
그것도 자신의 것으로 했을 때만 가능한 것으로 보고 있다
대성인인께서 “기표”를 인정하는 어서가 있다.
<단의초>에
“법화경(法華經)을 봉독(奉讀)한다면 경(經)의 문자(文字)
육만구천삼백팔십사자(六萬九千三百八十四字)․하나 하나의
문자(文字)는 모두 금색(金色)의 부처이니라.”
여기서 문자는 “기표”를 이야기한다.
즉 문자 자체에 힘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방편품의 “니지세손 종삼마이 안조니끼......”
라고 읽어 나갈 때 뜻을 해석하지 않고 읽어도
“니지세손” 한 기표덩어리에
부처의 마음이
법화경의 에너지가
우주대의 “건전지”가 달려있다는
사실을 명심하여야 할 것이다.
자신이 선종이 아니라면.....
(누구나 선종이 되고 싶은 사람은 없을 것임. 천마이기 때문에....)
소쉬르의 입장에서 볼때 “언어의 자의성” 때문에
한어독경이나 일어독경이나
불력법력을 나타내는 데 차이가 없고
더욱이 뜻을 모르고 독경을 하여도 글자가 갖는
에너지 때문에 불력법력이 동일하게 나타난다고 하여도
그러나 개인적인 정서상 필자는
반드시 원어독경을 하고 싶다는 것이다.
불교공부를 하면서 정법, 상법시대의 불교선배들도 한없이 존경해왔다.
용수,천친,구마라습,남악,천태,장안,묘락,전교등
<만녜 마만녜 지례 차리제 사미 사리다위
전제 목제 목다리 사리 아위사리
상리 사리 차예 아차예 아기니
전제 사리 타라니 아로가파사파차비차니
녜비체 아변치라녜리체 아단치파례수지 구구례
모구례 아라례 파라례 수가차 아삼마삼리 불타비길리질제
달마파리차제 승가열구사녜 파사파사수지
만치라 만치라차야다 우루치 우루치교사략
악차라 악차야다야 아파로 아마야나다야 >
아무 뜻도 모를 이 “기표덩어리”는 무엇일까
바로 법화경28품중 다라니 26품중 “다라니”이다.
범어(인도 산스크리스트)의 “진언”이다.
구마라습이 다라니를 채택하여 법화경의
한구로 넣었다는 것은 무엇일까.
정법상법의 교주였던 석가부처님이 쓰셨던 언어를 그대로 가지고 와서
번역함이 없이 그대로 법화경으로 활용해서 사용한 것이다.
이 다라니 속에 석가부처님의 마음이 그대로 담아 있다는 뜻이다.
법화경(法華經) 제이(第二)․ 비유품(譬喩品)의
금차삼계(今此三界)․개시아유(皆是我有)․기중중생(其中衆生)․
실시오자(悉是吾子)․이금차처(而今此處)․다제환난(多諸患難)․
유아일인(唯我一人)․능위구호(能爲救護)라고 있다
<일대오시계도>에서 해석하시기를
(「이제 이 삼계(三界)는 모두 이는 나의 유(有)이며,
그 중(中)의 중생(衆生)은 모두 이는 나의 자(子)이니라.
게다가 지금 이 곳은 여러 환난(患難)이 많으나
오직 나 일인(一人)만이 능(能)히 구호(救護)를 함」
바로 석가부처님의 주사친의 삼덕을 표현하고 있다.
이 물질의 세계가 석가불의 소유라는 것이다.
그러면 그 제자들이 부처님의 살아생전에
사용하였던 언어로 소리를 매개로 하여 부처님의 마음을
자신의 마음으로 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총감문초>에 대성인님의 어경애를 나타내고 계신다.
이 삼여시(三如是)의 본각(本覺)의 여래(如來)는
시방법계(十方法界)를 신체(身體)로 하고,
시방법계(十方法界)를 심성(心性)으로 하며,
시방법계(十方法界)를 상호(相好)로 함이니,
이러한 고(故)로 이 몸은 본각삼신여래(本覺三身如來)의 신체(身體)이니라.
법계(法界)에 주편(周 )하여 일불(一佛)의 덕용(德用)이므로
본불님의 덕용이 우주법계에 편만되어 있음을 알리는
글이라고 보아도 무방하다.
우주법계에 편만되어 있는 대성인님의 생명은
이 키보드속에도 내재되어 계시고 나의 방안에
회사 사무실에도 산곡광야 어느 곳이라도 주편하여 계신다.
특히 본인이 독경을 할 때는 반드시 달려와 계신다.
아울러 <기도초>에서 말씀 하시기를
인간(人間)의 오십년(五十年)은
사왕천(四王天)의 일일일야(一日一夜)이니라.
이 일일일야(一日一夜)를 시초(始初)로 하여 삼십일(三十日)은
일월(一月) 십이월(十二月)을 일년(一年)으로 해서 오백세(五百歲)라.
그러므로 인간(人間)의 이천이백여년(二千二百餘年)은
사왕천(四王天)의 사십사일(四十四日)이니라.
그러니 일월(日月)과 더불어 비사문천왕(毘沙門天王)은
부처가 돌아가신 후․사십사일(四十四日)이니 아직 두 달도 안 됐으며,
제석(帝釋)․범천(梵天) 등(等)은 부처가 돌아가신지가
일월일시(一月一時)도 되지 않았다.
이런 대성인님의 계산법이라면 부처님이신
본불님입장에서는 미노부에서 서거하신지
방금전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분이 방금전에 방편품 자아게를 독경한 그 소리를
찾아서라도 제자인 우리가 함께해야 하지 않을까?
본인은 이 분이 살아계실 때와
같은 “언어”로
같은 “소리”로
같은 “다라니”로
같은 “진동수”로
같은 “음파”로 함께하고 싶다.
남묘호렌게교의
소리“교”에는 엄청난 담론이 숨어 있다.
“소리”는 어느 면에서는
대지도론이나 마하지관에서 언급한
“언어도단.심행소멸”이다
즉 인간의 언어로서 이렇다 저렇다 하고 표현할 수 없고
마음으로 이것이다, 저것이다 하고
생각할 수도 없는 실로 불가사의한 것이다라는 것이다
(2010년 흐름 작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