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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크라이나 와 러시아는 왜? 원수지간이 되었고! 한국은 어떠하게 될까?]
같은 뿌리를 둔 우크라이나와 러시아는 왜 이렇게 적대적인 관계가 되었을까?
한민족이 고구려, 백제, 신라로 나누어졌듯이
러시아, 우크라이나, 밸라루스는 키예프 공화국이란 같은 뿌리에서 갈라진 나라이다.
키예프 공화국의 수도 키예프는 현재 우크라이나의 수도이다.
같은 뿌리의 국가라서 이 3개 나라의 언어는 이는 따로 공부하지 않아도 서로 소통될 정도로 유사하다고 한다.
그런데 어쩌다가 이렇게 적대적인 관계가 되었을까?
그 이유는 스탈린 시절의 홀로도모르 (Holodomor) 라고 불리는 대기근 사건이 주 원인이다.
우크라이나는 세계 3대 곡창지대 중에 하나이다.
우크라이나 땅은 흑토이며 뭘 심어도 잘 자라는 풍요의 땅이다.
그런데, 공산혁명 후 스탈린이 부농 (쿨라크kulak)들 을 처형하였다.
그들의 가죽을 벗겨서 비누로 만들었다.
쿨라크가 가진 농지를 다 몰수하고 집단농장 체제로 만들어 운영하였다.
집단농장마다 생산량을 할당하였다.
그러자 당연한 결과로 농산물 생산량은 확연히 줄어들었다.
농사짓는 기술을 가진 부농을 다 처형했으니 그런 것이다.
그리고 열심히 해도 자기 것이 안 되는데 누가 열심히 농사짓겠는가?
소련은 농산물이 줄어들어도 과도한 목표량을 수탈하고 또 수탈을 하였다.
그래서 그 세계 3대 곡창지대에서 굶어 죽는 사람이 생겨났다.
1933년 어느 날, 단 하루만에 28,000명이 굶어 죽었다고 한다.
굶어죽는 사람 때문에 집단농장의 인구가 1/3로 쪼그라 들었다.
배고픔을 참지 못한 우크라이나 인들은 쥐, 개, 고양이, 벌레... 등을 닥치는 대로 잡아먹었다.
나중에는 사람까지 잡아먹었다. 부모들은 자식을 서로 바꾸어서 잡아먹었다고 한다.
인육을 파는 상점까지 생겼다고 한다.
그런데, 더 놀라운 사실은 당시에 소련은 연 천만 명의 인구가 먹을 수 있는 여분의 식량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소련은 식량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우크라이나인들을 굶겨 죽었다.
당시에 약 500만~ 1000만 명이 굶어 죽었다고 한다.
우크라이나인들은 이 대기근을 홀로도모르 라고 부르며, 매년 기념일엔 곡식 낱알을 흩뿌리며 원혼을 달랜다고 한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우크라이나인들의 공산당에 대한 반감은 엄청 커졌다.
독일이 우크라이나 지역으로 쳐들어오자 해방군이라고 오히려 환영했다고 한다.
아시다시피, 독일이 홀로코스트를 자행했는데, 유대인만 죽인 게 아니고 슬라브인도 엄청 많이 죽였다.
당시에 홀로코스트를 집행하는데 조력을 한 이들이 바로 우크라이나인들 이라고 러시아인들은 주장한다.
어제도 푸틴이 우크라이나를 친 나치 세력이라고 비난한 이유이기도 하다.
아무튼 이렇게 두 나라는 뿌리가 같은 나라이지만 이러한 연유로 적이 되었다.
최근에 우크라이나의 돈바스 지역은 왜 화약고가 되었나?
우크라이나의 우측 돈바스지역은 도네츠크와 루한스크 두 지역을 합쳐서 부르는 이름이다.
이 두 지역은 러시아어를 사용하는 친 러시아인들이 많이 산다.
그런데 우크라이나에 친서방정권이 들어서면서 러시아어를 금지시켜 버리고,
우크라이나어만 사용하게 하고 나토 가입을 결정하자 친 러시아인은 반발하였고,
돈바스 지역을 중심으로 독립을 선포하였다.
그래서 우크라이나에서는 정부군과 독립 선포한 돈바스지역과 내전이 발생한 것이다.
이들 분쟁지역은 민스크 협정으로 휴전을 했다.
민스크 협정 은 2014년 9월 5일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도네츠크 인민 공화국(DPR), 루간스크 인민 공화국(LPR) 사이에
서명한 돈바스 전쟁의 정전 협정 이다.
이 협정 은 돈바스 전쟁을 완전히 멈추는 데에는 실패했다.
중요한 협정내용은 중화기를 사용하지 못한다. 돈바스 지역은 자체 주민 선거를 실시한다.
돈바스 지역은 우크라이나에 속하지만 연방제 방식으로 자치권을 확대한다... 등등이었다.
그런데 푸틴이 돈바스의 2자치구 (도네츠크와 루한크) 를 독립국으로 인정하였다.
이에 대해서 독일 총리는, 러시아가 돈바스를 독립국가로 인정하여 민스크 협정을 위반하였다고 비난하였다.
한편 푸틴은 우크라이나가 민스크 협정을 지키지 않았다고 비난했다.
그 이유는 자체 주민투표를 허용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자체 주민투표를 하면 주민들이 크림반도처럼 러시아와 합병을 결의할 가능성이 100%였다.
암튼 푸틴은 돈바스 지역을 독립국으로 인정함으로서 우크라이나로부터 크림반도에 이어서 돈바스 지역까지 빼앗았다.
따라서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의 갈등의 주요 원인을 제공한 것은 공산주의 이념이였다.
공산주의 이념은 파라다이스를 약속하지만 실제는 원한과 분노 그리고 질투심을 부추겨 지옥을 만들었을 뿐이다.
지옥으로 가는 길은 언제나 선의로 포장되어 있다. 선전선동으로 무지 한 이를 앞세운다.
《동맹 없는 우크라이나 사태를 바라보면서》 한국은?
평화타령 불러대면 평화가 온다고 믿는 멍청이들이 아직도 꽤나 많은가 보다.
이번 우크라이나를 보라!
우크라이나에 힘이 없으니 우크라이나에 평화도 없다! 우크라이나 국민들이
”우리는 평화를 원한다.
우리는 전쟁을 원치 않는다!“
아무리 소리쳐도 아무 소용이 없다.
우크라이나 단독으로는 러시아에 대항할 힘이 없으니 NATO에 가입하려고 몸부림치는 저 모습을 보라!
동맹을 간절히 구하고 또 구하구 있다!
그러나 러시아와 충돌을 원치 않는 NATO에서는 완곡하게 거절했다!
자~ 그런데 우리 대한민국은 어떠한가?
대한민국은 세계 최강대국 미국과 1953년 <한미상호방위조약> 동맹을 맺은 후 69년이 지나 거의 70년,
그 동안 한국은 평화와 번영을 누려왔다.
오늘은 동맹의 중요성에 대해 짧은 글을 써 본다.
글의 내용은 <한미상호방위조약> 이전 조선조 70년과 <한미상호방위조약> 이후 70년 대한민국을 비교해본다.
읽고 나면 뭔가 명확하게 감이 잡힐 것이다.
<한미상호방위조약> 이전 70년 이전 조선조 70여 년 동안 이 땅 안팎에 무슨 일이 터졌는지
큰 사건들 중심으로 15 개만 정리해본다.
1. 임오군란과 대원군 납치
1882년 임오군란이 터지자 이를 기회로 청나라 군대 3,000명과 일본 군대 400명이 조선으로 들어왔다.
청나라 군대는 숭례문(남대문) 밖에 주둔했었는데 이 부대를 외교 차원에서 방문한 흥선 대원군을 강제로 납치,
청나라 톈진(天津) 으로 압송, 당시 청나라의 실권자였던 리홍장이 멋대로 대원군을 심문하고
톈진 서쪽 바오딩(保定)에 구금시켰다.
3년이 흘러 1885년이 되어서야 대원군을 풀어주어 겨우 귀국했다.
2. 동학란과 청일전쟁
1894년 학정에 못 견딘 전라도 고부(정읍) 지방 농민들이 전봉준과 동학교도들을 중심으로 난을 일으켰다.
그러자 이를 기화로 일본이 조선에 대규모 군대를 보내었고 조선에서의 지배권을 놓고
청나라와 일본 양국 간에 청일전쟁 (1894~1895)이 터졌다.
이 때 일본군이 한양으로 들어와 한양 경복궁을 지키는 조선군과 전투가 벌어졌다.
접전 끝에 일본군이 승리하고 고종은 사로잡혔다!
일본군 소좌가 칼을 빼들고 고종을 협박했다!
엉터리 대한민국 국사교과서에서 침묵하는 내용들이 있다.
일본군은 이어 평양으로 진격 평양성을 지키던 조선과 청나라 연합군을 격파했고 청나라 군대는 을밀대에서 항복했다.
연이어 벌어지는 여러 전투에서 일본은 모두 승리했고 조선에 대한 지배권을 차지했다.
조선 안에서 벌어진 청일전쟁, 전쟁터는 조선땅! 전쟁 피해는 고스란히 조선인들의 몫이었다.
3. 1895년 을미사변
청일전쟁이 1895년 4월 일본의 승리로 종결되자 조선 내에서 일본의 위세는 더욱 더 대단해졌고
동년 1895년 10월 8일 일본 낭인(사무라이보다 낮은 계층)들이 경복궁에 난입, 옥호루에 숨어 있던
민비 (나는 명성황후라고 부르지 않는다. 이 여자가 이 나라 역사에 저지른 죄가 결코 가볍지 않다) 를 죽였다.
고종은 선교사의 도움을 받아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했다.
이 사건을 후세 역사책에서는 '아관파천'이라 부른다.
당시 경복궁을 지키던 내금위 병사들은 무엇을 했을까?
일본 낭인들과 싸움에 밀려 도망갔었다.
자신들이 지키던 왕과 왕비를 버리고 도망간 조선 최고의 무사들...!
이런 내용들도 민족주의 역사관에 입각, 자랑스러운 역사만을 중심으로 기록하는 순 엉터리 한국 국사 교과서에서는
철저히 침묵하고 있다.
4. 1905년 을사조약, -외교권을 상실
5. 1910년 –한일합방.
조선이 망했다!
하지만 조선 왕족은 일본으로부터 상당히 높은 대우를 받았다.
태평양전쟁에서 일본이 패망할 때까지 조선 왕가에 대한 일본의 대우는 변치 않았다.
이런 내용도 국사 책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6. 1919년 3.1 운동
7. 1920년 청산리 전투
독립군 토벌을 위해 간도에 출병한 일본군을 청산리 일대에서 10여 회의 전투 끝에 대파한 전투
8. 1921년 자유시 사변.
1921년 러시아령 자유시 (알렉세예프스크)에서 한국독립군 부대와 러시아 적군이 교전한 사건.
흑하(黑河)사변 이라고도 한다
9. 1941년 12월 7일 진주만 공습과 태평양 전쟁 발발
10. 1945년 8월 6일 히로시마 원폭 투하, 8월 9일 나가사키 원폭 투하!
11. 1945년 8월 15일 일본 무조건 항복!
12. 1945~ 1948년 -미군정 시기.
13.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수립
14. 1950년 6월 25일 -북한군 침략전쟁!
15. 1950년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
16. 1950년 10월 19일 -중공군 개입...!!!
17. 1953년 7월 27일 -휴전
18. 이 6.25 전쟁으로 300만 명 이상이 죽고 전국이 잿더미!!
<한미상호방위조약> 1953년 10월 1일 체결. 이후 70년 대한민국 이야기
이 <한미상호방위조약> 의 핵심은 한반도와 그 주변에 미군을 배치한다는 내용이다.
한미군! 세계 최강대국인 미국의 군대가 주둔한 이후 70년 대한민국...!!!
<한미상호방위조약> 이후 69년... 그 기간 동안 무슨 큰 난리 있었나? 없었다.
한반도에 큰 난리 없이 70년을 지내왔다.
포항제철 삼성전자 현대조선 경부고속도로 한강의 기적 .... 세계 10대 강국....
그 기간 동안 북한군 병사들은 의무복무기간 10년, 북한 경제는 발전할 수가 없었다.
초근목피와 보리밥과 국수와 라면과 쌀밥을 위해서 지금의 90세 80세 70세 60세 의 사람들은 자기의 위치에서
조국과 사회와 가족과 그리고 자기가 몸단고 있는 단체를 위해서 머나먼 이국 월남에서 독일에서 수고를 했었다.
그리고 특히 건설 산업 역군으로 전 세계에서 더위와 추위의 환경속에서 4시간만 잠을 자면서 고생하면서
선진문물을 가져온 세대들의 노고 덕도 있다.
대한민국의 군대 복무기간 36개월 에서 18개월.
젊은 사람들과 노인들이 함께 일도 하니 경제 발전은 자연적 현상이다! 온고지신 이 답이다.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 이전 70년과 이후 70년 비교
미군 주둔 이전 70년과 미군 주둔 이후 70년을 비교해보라!
<한미상호방위조약> 이전 70년 동안 우리나라에 난리가 나면 청나라 군대가 들어와서 왕의 아버지를 납치해가고 (임오군란)
우리나라에 난리 (동학란)가 나면 일본 군대가 쳐들어와서 경복궁 지키는 군대와 싸워서 경복궁을 점령하고 왕은 사로잡히고
(청일전쟁) 왕비는 칼 맞아 죽고 (을미사변) 나라는 망하고 (한일합방) 태극기 들고 독립을 외치면 총에 맞고 감옥가고
(3.1 운동)
독립군 광복군만의 힘이 아닌, 이승만 정치학 법학 박사의 외교 의 힘으로 간신히 독립 (1945년 8.15 해방) 했으나
이를 간과 하는사람들도 있다. 즉 한국말로 아무리 뉴욕 한복판에서 외쳐도 미국말 로 하는것과 비교함이 아닌 것을 말함이다.
소련 중공 군대를 등에 업고 6.25 전쟁을 일으킨 북한 김일성.... (1950년 6.25)... 이 6.25전쟁으로로 300만 명 이상이 죽었다...!!!
부상자는 더 많앗다,
그리고 1953년 <한미상호방위조약>이 맺어진 후 69년이 흘렀다.
그동안 무슨 난리가 있었나?
전쟁이 있었나?
아니다!
북한은 1990년대 고난의 행군을 겪으면서 수백만 명이 굶어죽은 아시아 최빈국이 되었는데 한국은 세계 10대 강국!
동맹이란 이렇게도 중요한 것이다.
그러나!
이재명 후보가 중국에서 제일 큰 방송국인 관영 CCTV 인터뷰에 나와서 자신이 대통령되면 한반도에 배치된
미국 사드를 철수시키겠다고 선언했다.
그러면 한미동맹이 무사할 것 같은가?
한미동맹이 무너지면 그동안 누려왔던 평화와 번영이 어찌될 것인가?
나라 자존심 만 운운하면서 전시작전권 회수하고 사드 철수시키고 한미동맹 무너지면 어찌 될까?
힘없는 놈은 아무리 몸부림쳐도 힘잇는자들과 친구해야 함이 맞는 말인데.
선전선동으로 공산주의 주사파 의 운동정신으로의 길 만 이야기 한단다
대한민국이 중국을 이길 힘이 있나?
러시아를 이길 힘이 있는가?
경상도 김천 성주 지역을 지나다 보니 "사드 가고 평화 오라!" 이렇게 적힌 플래카드 들이 눈에 띄더군.
중국 러시아 이길 힘은 없어도 북한 핵무기에 대항할 힘은 없어도 평화타령 불러대면 평화가 오는가?
북한 그들이 평화 외치면서 악수하면서 핵무기 개발 하는 것을 보고도 평화를 외친다.
평화가 오라면 오고 가라면 가는 뉘 집 강아지 이름인가? 과거 노무현이 대통령이 되자마자 미국에 특사를 보낸 적이 있다.
그들이 주한미군 철수 운운했었다. 우리는 자주국 방하겠다면서!
그 때 미국 국방장관이 럼스펠드였다. 한국 특사들 주장을 다 듣고 럼스펠드가 유명한 말 한 마디 했다.
"자주국방!
그것 좋은 말이다.
하지만 우리 미국도 자주국방을 다 하지 못해서 여러 나라들과 동맹을 맺는다!
힘이 부족하면 동맹을 맺고 그 관계를 지켜야 한다.
그게 살 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