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bkcolumn.com/read/read_view.php?idx=65
일본서기(日本書紀)에는 신공황후(神功皇后) 49년에 군대를 파견하여 신라를 격파하고, 가야 7국을 평정하였으며, 백제로부터 번국(藩國)으로서의 영원한 조공을 맹세받았다는 기사가 있다. 이 기사는 서기후 4세기 이래 야마토 왜(大和倭, 이하‘왜’라고 한다)가 한반도 남부를 지배하였다는 남선경영론(南鮮經營論)의 주요 근거가 되고 있다.
19세기 말 역사학자 나카 미치요(那珂通世)는 일본서기 신공황후기사의 연대를 2주갑(120년) 내리면 삼국사기(三國史記) 내물이사금 9년(서기후 364년)의 ‘왜병 침입 기사'와 연결된다고 하면서 4세기 왜에 의한 한반도 지배는 사실로 인정된다고 주장하였다. 쓰다 소키치(津田左右吉)는 일본이 한반도 남부에 속령(屬領)을 가졌을 때 그 통치기관을 임나일본부라 하였으며, 임나는 일본부의 소재지였던 가라의 별명으로 사용되었다고 하였다. 스에마쓰 야스카즈(末松保和)는 더 나아가 일본이 서기후 4세기 후반부터 6세기 중엽까지 금관가야(532년 멸망후에는 안라)에 임나일본부라는 통치기관을 두고 가야지역을 직접 지배하였으며, 백제와 신라를 간접 지배하였다고 주장하였다. 이들의 견해는 일본의 정설로 자리 잡고 있다.
그렇다면 과연 기원후 4세기에 왜는 백제, 가야, 신라를 정복하고, 고구려와 대등하게 대적할 만한 능력을 보유하고 있었을까? 이를 위해서는 왜가 강력한 왕권을 가진 고대국가체제를 갖추어야 하고, 고구려와 대적할 만한 무력(武力)을 보유하여야 하며, 대규모 병력을 싣고 바다를 건너기 위한 조선 및 항해기술이 발달하여야 한다.
먼저 서기후 4세기 일본열도에 강력한 고대국가체제가 성립되었는지 살펴보자.
서기전 4세기에 한반도인들이 농경문화를 가지고 일본 큐수지역에 이주하였다. 이들은 앞선 문화를 바탕으로 여러 나라를 세우고 원주민들을 지배하였다. 서기후 1세기경 큐슈지역은 100여 개국으로 나뉘어 있었으며, 2세기 후반에 일부 통합이 이루어져 30여 개국으로 되었다. 3세기에 이들 30여 개국이 야마타이국(邪馬台國)의 히미코(卑彌呼)를 여왕으로 추대하였다. 4세기에 철기문화를 가진 한반도인들이 대거 일본열도로 이주하였다. 이들은 선주민들을 정복하면서 소국들을 통합해 나갔으며, 6세기 말에 이르러 고대국가체제를 완성하였다. 일본서기에는 603년에 처음으로 관위제(冠位制)가 시행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관위제는 고대국가체제의 기본이다.
일본서기에 의하면 천황은 5세기까지 띠(矛)로 지붕을 인 거처에 기거하였는데 호족의 주거지보다 견고하지 않았다. 534년에 천황이 가와치 왜(河內倭)의 왕에게 토지를 요구하였으나 왕이 이를 거절하였다. 이러한 사실들은 당시에 강력한 왕권이 존재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6세기에 이르기까지 천황의 왕권은 야마토(大和)지역에 국한되어 있었다.
결론적으로 4세기 당시 일본열도에는 강력한 왕권을 가진 고대국가체제가 출현하였다고 보기 어렵다. 천황의 왕권은 야마토지역을 벗어난 지역에는 미치지 못했다. 이러한 약한 왕권으로 고구려의 보병과 기병 5만 명에 대적할 만한 많은 병력을 전국에서 차출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6세기까지 일본서기에서 확인된 왜의 한반도 파견병력은 1,000명을 넘지 않았다.
다음 서기후 4세기 한반도와 일본열도의 무력수준을 비교해 보자.
고구려의 고분에서 출토되는 유물과 벽화는 고구려의 무력수준을 보여 준다. 4세기 말에서 5세기 초 사이에 축조된 안악3호분, 덕흥리벽화고분, 약수리벽화고분에는 창을 든 사람과 말이 모두 갑옷으로 무장한 중장기병(重裝騎兵)의 행렬이 보인다. 기병들은 물고기비늘과 유사한 작은 철조각을 끈으로 엮어 만든 갑옷을 입고 있고, 말도 철제투구와 갑옷으로 무장시키고 있다. 특히 5세기 초에 축조된 것으로 보이는 약수리고분벽화에는 긴 창을 보유한 중장창기병대(重裝槍騎兵隊)가 따로 분리되어 밀집대형(密集隊形)을 이루고 있다. 기병대가 긴 창을 이용한 밀집전술을 구사하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광개토대왕비문에는 4세기 말 신라를 구원하기 위해 보병과 기병 5만 명을 동원한 기록이 있고, 삼국사기에는 4세기 말에 백제와의 전쟁에 기병 5천 명을 동원한 기록이 있다. 백제도 고구려와의 전투를 통해서 고구려와 대등한 수준의 무력과 전투능력을 보유하고 있었을 것이다.
가야지역에서는 3세기에 대도(大刀)가 출현하고 4세기에 이르면 말의 투구와 갑옷, 그리고 발걸이인 등자, 말재갈 등을 비롯한 많은 종류의 마구(馬具)가 사용된다. 무기로는 긴 병기인 모(鉾, 창), 짧은 병기인 검(劍)과 도(刀), 그리고 궁시(弓矢)가 보인다. 남성 무덤의 대부분에서 긴 창이 출토되고 있는데, 이는 집단전술이 발달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국가 형성기에 접어든 4세기에는 갑주(甲冑)나 마구와 같은 선진적인 무장(武裝)을 이용한 전술을 구사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5세기에 들어서면서 마주(馬冑), 마갑(馬甲) 등 중장기마전술과 관련된 무구(武具)가 출토된다. 이 무렵에 가야도 고구려에 못지않은 무장수준을 갖추고 기마전과 원거리공격을 실행한 것으로 보인다. 신라는 가야지역의 내란에 실질적으로 관여하여 영향력을 행사한 것으로 보아 가야 이상의 수준에 도달하였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한편 왜는 철을 가야지역으로부터 수입하여 사용하면서 제련기술 역시 가야에 크게 의존하였다. 일본의 철강회사 신일본제철(新日本製鐵)의 연구팀이 일본열도에서 출토된 철제품을 분석한 결과 고대 일본열도의 철이 가야지역에서 들어온 사실과 가야지역의 제철기술이 일본열도의 그것보다 앞서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4세기 왜의 주력무기는 개인의 능력에 의존하는 단검(短劍), 단도(短刀), 화살이었으며, 점차 장도(長刀)와 장검(長劍)이 증가해 가는 상황이었다. 5세기 중엽 이후부터 긴 창이 약간 증가한다. 긴 창은 일정한 거리를 두고 상대할 수 있어 조직적인 전술 운용이 가능해진다. 따라서 짧은 병기 위주의 왜의 전력이 체계적으로 조직화되어 있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일본열도에서는 4세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볼 수 있는 금속제 마구가 1점도 출토되지 않고 있다. 일본학계에서는 4세기 말에 일본 규슈지역에 처음으로 마구와 함께 가축화된 말, 승마기술, 사육기술이 전래되었다고 본다. 5세기가 되면 각종 마구와 말투구 등이 일본열도에 도입되는데, 이 무렵에 말문화를 받아들이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고대전투에서의 기병의 역할은 현대전투에서의 탱크와 같이 절대적이었다. 보병만으로 기병을 상대한다는 것은 불가능하였다.
기병이 없고 무기도 열악하며 체계적으로 조직화되지 않은 병력으로 일시적인 변경의 침입은 가능할지 모르겠으나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와 대등한 전투를 벌이는 것은 불가능하였을 것이다. 왜의 병력이 한반도에서 백제나 가야와 합동작전을 벌였다면 백제나 가야의 전투조직 하부에 편제되어 보조하는 정도였을 것이다. 왜가 본격적으로 무장을 갖추기 시작한 것은 5세기 이후로 보인다. 5세기 전반에 가야가 해체되면서 일본열도로 이주한 세력이 기술과 전술을 이전하였을 것이다.
끝으로 서기후 4세기 일본열도의 조선 및 항해기술을 살펴보자.
4세기 무렵 한반도와 일본열도의 항로는 낙동강 하구 - 쓰시마(對馬) - 이키(壹岐) - 큐슈(九州) - 세토나이카이(瀨戶內海) - 오사카항(大阪港)으로 추정된다. 당시 배는 돛이 없는 통나무배를 기초로 구조물을 덧붙인 준구조선이었다. 5세기경의 고분에서 출토된 토제품(埴輪, 하니와)으로 만들어진 선박을 보면 노걸이가 8개 내지 14개이다. 선박학자 마쓰기 테츠(松木哲)는 이를 토대로 고대선박을 복원하였다. 배의 최대길이는 15 미터, 최대폭은 3 미터이내이다. 노젓는 인원과 기본적인 화물(식량, 물 등)을 제외하면 추가로 승선할 수 있는 인원은 5명을 넘기 어렵다. 말을 수송한다는 것은 어림도 없다. 4세기 말 고구려는 신라를 구원하기 위해 보병과 기병 합쳐서 5만 명을 동원하였다. 왜가 고구려를 대적하였다면 이에 필적할 만한 보병과 기병을 동원했을 것이다. 이들을 수송하기 위한 선박은 수천 척에 이르렀을 것인데, 과연 당시 왜가 이를 건조할 능력이 있었다고 보기 어렵다.
서기후 4세기경 일본열도에는 강력한 통일국가가 성립되지 않았다. 무장수준이나 전투능력에 있어서도 한반도에 크게 미치지 못하였다. 무기제작의 기초가 되는 제철기술은 크게 뒤져 있었다. 조선 및 항해기술 또한 그 수준이 극히 낮았다. 이러한 능력으로 한반도를 침공하고 나아가 지배하였다는 것은 신화나 설화 수준의 이야기에 지나지 않는다.
일본학계는 신빙성이 크게 떨어지는 일본서기를 근거로 이에 부합하는 듯한 단편적인 자료들을 끌어모아 고대일본이 한반도를 정벌하여 지배하였다는 허구의 신화를 만들어내고서는 이를 끊임없이 반복하여 선전하고 있다. 한국의 고대역사학자들은 이를 반박하는 데 대부분의 시간을 허비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고대 한일관계를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사료에 나오는 문구의 해석을 넘어서는 실증적인 연구가 필요하다. 서기후 4세기 당시 한반도와 일본열도의 정치, 군사, 산업 등의 역량을 비교해 보면 한반도가 압도적인 우위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역사서의 조작이나 왜곡된 해석으로 이 틈을 메울 수는 없을 것이다. 앞으로 보다 진전된 연구결과가 쌓이게 되면 불필요한 논쟁이 줄어들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