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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나안 정탐보고
민 13:21-33
21 이에 그들이 올라가서 땅을 정탐하되 신 광야에서부터 하맛 어귀 르홉에 이르렀고
22 또 네겝으로 올라가서 헤브론에 이르렀으니 헤브론은 애굽 소안보다 칠 년 전에 세운 곳이라 그 곳에 아낙 자손 아히만과 세새와 달매가 있었더라
23 또 에스골 골짜기에 이르러 거기서 포도송이가 달린 가지를 베어 둘이 막대기에 꿰어 메고 또 석류와 무화과를 따니라
24 이스라엘 자손이 거기서 포도를 베었으므로 그 곳을 에스골 골짜기라 불렀더라
25 사십 일 동안 땅을 정탐하기를 마치고 돌아와
26 바란 광야 가데스에 이르러 모세와 아론과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에게 나아와 그들에게 보고하고 그 땅의 과일을 보이고
27 모세에게 말하여 이르되 당신이 우리를 보낸 땅에 간즉 과연 그 땅에 젖과 꿀이 흐르는데 이것은 그 땅의 과일이니이다
28 그러나 그 땅 거주민은 강하고 성읍은 견고하고 심히 클 뿐 아니라 거기서 아낙 자손을 보았으며
29 아말렉인은 남방 땅에 거주하고 헷인과 여부스인과 아모리인은 산지에 거주하고 가나안인은 해변과 요단 가에 거주하더이다
30갈렙이 모세 앞에서 백성을 조용하게 하고 이르되 우리가 곧 올라가서 그 땅을 취하자 능히 이기리라 하나
31 그와 함께 올라갔던 사람들은 이르되 우리는 능히 올라가서 그 백성을 치지 못하리라 그들은 우리보다 강하니라 하고
32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그 정탐한 땅을 악평하여 이르되 우리가 두루 다니며 정탐한 땅은 그 거주민을 삼키는 땅이요 거기서 본 모든 백성은 신장이 장대한 자들이며
33 거기서 네피림 후손인 아낙 자손의 거인들을 보았나니 우리는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으니 그들이 보기에도 그와 같았을 것이니라
민 13:21-33 / 각 지파에서 대표로 뽑힌 사람들은 가나안 땅으로 올라가 샅샅이 탐색하였다. 신 광야에서 시작하여 하맛 어귀의 르홉까지 훑어 보았다. 22) 또 가나안 땅 남부 지역 이곳저곳을 살펴본 후에 헤브론까지 이르렀다. 헤브론은 애굽에 있는 소안보다도 7년이나 먼저 세워진 성읍이었다. 그곳에는 거인족인 아히만과 세새와 달매가 살고 있었다. 23) 그들은 또 에스골 골짜기로 들어가 그곳에서 포도 한 송이를 따서 두 사람이 막대기에 꿰어 어깨에 메었다. 또 석류와 무화과도 땄다. 24) 그 땅을 탐색하러 갔던 사람들이 그곳에서 포도 송이를 땄기 때문에 그 땅을 `포도 송이'라는 뜻으로 에스골이라 이름 지어 불렀다. 25) [정탐꾼들이 돌아오다] 각 지파 대표들은 40일 동안 가나안 땅을 탐색하고 돌아왔다. 26) 그들은 바란 광야 가데스에 진을 치고 있던 모세와 아론과 온 공동체에게로 돌아와 가나안 땅에서 두루 돌아다니며 본 것을 이야기하였다. 또 따 가지고 온 포도 송이와 과일을 보이면서 27) 모세에게 이렇게 보고하였다. `우리가 가나안 땅을 두루 살펴보았는데, 정말 그 땅은 젖과 꿀이 흐르는 기름진 땅이었습니다. 여기 그곳에서 따온 과일이 있습니다. 28) 그런데 그 땅에 사는 사람들은 무척 강해 보였습니다. 키는 장대 같고 거인족의 후손인 아낙 자손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성읍도 무척 견고해 보였습니다. 29) 남부 지역에는 아말렉 사람, 또 산악 지역에는 헷 사람과 여부스 사람과 아모리 사람이 살며 가나안 사람은 바닷가와 요단 강가에 살고 있습니다.' 30) 갈렙이 술렁거리며 모세에게 다가오는 백성들을 진정시키면서 이렇게 말하였다. `자, 우리가 힘을 합하여 그 땅으로 쳐들어 갑시다. 그 땅을 차지합시다. 우리 힘으로 그 땅을 충분히 정복할 수 있습니다.' 31) 그러자 갈렙과 함께 가나안 땅을 탐색하고 돌아온 사람들이 나서면서 이렇게 말하였다. `안되오. 우리의 힘만으로는 가나안 땅을 정복하기가 불가능합니다. 그 땅에 사는 주민들은 우리보다도 훨씬 강합니다.' 32) 그들은 자기들이 돌아보고 온 것보다도 훨씬 더 과장하여 말을 하였다. `우리가 살펴보고 온 가나안 땅은 사람들을 멸망시키는 땅이오 더구나 그곳 사람들은 맞서 싸우기엔 힘이 부칠 정도로 엄청나게 큰 사람들이오 33) 또 우리는 그곳에서 거인족이라고 옛날부터 소문난 그 아낙 사람의 후손들을 보았단 말이오. 그 사람들이 어찌나 크던지 우리는 스스로가 보기에도 메뚜기 같았소. 그러니 그 큰 사람들이 우리를 보면 어떠하겠소?'
본문은 40일 동안 가나안 땅을 정탐한 열두 정탐꾼들의 상반된 고백입니다. 신앙의 눈으로 사물을 보는 것과 불신앙의 눈으로 사물을 보는 것은 상당한 차이가 있습니다.
그들이 올라가서 땅을 정탐하되(21-24) 정탐꾼들은 신속하게 가나안 땅을 탐지하였습니다. 신 광야는 약속의 땅 가나안의 최남단 경계 지역이며, 르홉은 가나안의 최북단 경계 지역으로 지정학적으로 중요한 곳이었습니다. 그들은 가나안 전 지역을 종단하였습니다. 그들은 사막 지역인 네겝과 해발 927m의 헤브론까지 올라가서 정탐하였습니다. 그곳에는 기골이 장대한 아낙 자손 아히만과 세새와 달매가 있었습니다. 이들은 가나안 서남부 고지대에 살던 거인족입니다. 정탐꾼들은 가나안 남쪽 에스골 골짜기까지 들어갔습니다. 이곳은 아말렉 족속의 지역으로 포도송이가 너무 커서 일명 포도송이 골짜기라고 불렸습니다. 정탐꾼들은 이 포도송이가 달린 가지를 베어 두 사람이 막대기에 꿰어 메고 왔습니다.
사십 일 동안 땅을 정탐하기를 마치고 돌아와(25-33) 생존의 위협을 받는 광야에서 헤메던 이스라엘 백성에게 가나안 땅은 그들에게 희망을 주기에 충분한 곳이었습니다. 정탐꾼들은 그 땅의 풍요로움을 보았고 그 열매를 가지고 왔습니다. 그러나 그 땅 거주민은 강하고 성읍은 견고하고 심히 크며 거기서 거민족인 네피림 후손 아낙 자손을 보았고 아말렉인, 헷인, 여부스 인, 산족인 아모리 인, 가나안 인을 보았다고 하며 우리는 올라가서 그들을 치지 못하리라 그들은 우리보다 강하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갈렙은 이들의 말을 듣고 두려워 떠는 백성들에게 “우리가 곧 올라가서 그 땅을 취하자 능히 이기리라”고 외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순종하는 한 가나안 사람들이 크고 강하다 할지라도 이스라엘 앞에서 반드시 그들을 쫓아내실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신 7:1; 11:23; 31:3). 갈렙은 이 하나님의 약속을 굳게 믿고 의지하였지만, 10명의 정탐꾼은 눈에 보이는 대로 보고하며 그들의 불신앙을 드러내었던 것입니다.
적용: 불신앙은 자신뿐 아니라 타인에게도 치명적인 해가 되어 소망을 저버리는 결과를 가져옵니다. 당신은 이성적인 눈이 밝습니까? 믿음의 눈이 밝습니까?
분노와 조급함이 있는 시험의 상황 속에서 하나님은 온전함에 이르게 합니다. 예를 들면 정직함은 거짓을 말하게 하는 시험을 이김으로써 만들어지고, 겸손함은 우리가 자만하지 않으려 할 때 자라나며, 인내심은 우리가 포기하려는 시험을 이겨낼 때마다 강해집니다. 시험을 두려워 할 것이 아니라 말씀을 붙잡고 인내할 때마다 우리는 시험을 이기며 예수를 닮아가게 됩니다.
< 설 교 >
두 부류의 사람들
민수기 13:25-33 / 이성우 목사
하나님의 기적적인 역사하심으로 출애굽의 기쁨을 간직한 채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축복의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었던 가나안 땅으로 행군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척박한 광야를 내내 가로질러 가야하는 어려운 여정에 점점 회의를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물론 그들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430년 동안 고통스러운 종살이를 하던 애급에서 해방되는 감격을 누렸고, 홍해 한 가운데 마른 땅으로 홍해를 건너는 은혜를 누렸던 사람들입니다. 뿐만 아니라 자기들을 추격하던 애급 군대가 홍해 한 가운데 수장되는 것을 보기도 했으며, 자기들을 기습적으로 공격했던 아말렉 군대를 하나님의 도우심 가운데 물리치고 승리를 거두는 감격도 누렸던 사람들입니다.
더 나아가서 하나님은 그들 앞에서 반석에서 물을 내셔서 마시우게 하셨으며, 먹을 것이 없는 광야에서 만나를 주셔서 먹이셨던 분이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서 세우신 성막을 거처 삼으셔서 그들 가운데 늘 임재 해 계시면서 그들과 동행하시며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밤에는 불기둥으로 그들의 광야 길을 인도하시며 지켜주셨습니다.
이렇게 계속되는 하나님의 놀라우신 은혜와 능력을 경험하였으면서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들 앞에 또 다른 문제가 생기면 여지없이 하나님을 향하여 원망하고 불평하며 하나님께서 세우신 지도자인 모세와 아론을 향하여 불평하는 차원을 넘어서서 그들을 죽이려고까지 했던 사람들입니다.
그런 점에서 이들 이스라엘 백성들은 마치 뒤에 것은 모두 잊어버리고 앞에 것만 바라보고 살아가는 사람들 같았습니다. 그들은 그토록 숱한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을 경험하였으면서도 그들은 거기에 대해서는 감사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보내지 않았으며 오로지 계속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만을 구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기들이 원하는 때에, 원하는 방식대로, 원하는 만큼 하나님의 은혜가 공급되지 않으면 지체하지 않고 하나님을 향하여 원망하며 불평을 쏟아내기를 전혀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물론 이들의 이러한 원망과 불평은 그들 가운데 섞여 사는 이방 백성들에게서 시작된 것이었습니다. 이방 백성들은 하나님께 대한 믿음도 없었으며, 가나안 땅에 대한 소망도 없었던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그들은 하루하루, 그 때 그때마다 닥쳐오는 어떤 문제들에 대해서 불평과 원망을 쏟아낼 수밖에 없었던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들의 불평과 원망은 금방 이스라엘 공동체 전체에게로 번져나가게 되는 무서운 전염성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불평과 원망하는 마음은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점점 더 불신앙적인 모습으로 빠져들게 만들어 가고 있었습니다.
이 대목에서 우리가 깨닫게 되는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은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받은바 은혜와 사랑과 축복에 대해서 감사하지 않고 코앞에 닥친 문제들에 대해서 계속 원망하고 불평하게 되면 결국은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우리가 불신앙적인 사람으로 바뀌어가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그런 점에서 믿음이라고 하는 나무는 원망과 불평이 성장을 저해하는 독이 되는 것이며, 은혜에 대한 감사가 든든하게 자라가도록 만들어 주는 좋은 자양분이 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주어진 삶에 대한 이러한 두 가지 다른 태도와 자세가 결국은 서로 다른 운명을 만들어 내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그 서로 다른 운명이라고 하는 것은 행복과 불행, 그리고 영생과 영원한 죽음임을 성경이 밝히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운명의 이중적인 결말의 모습은 개인의 경우든지, 공동체의 경우든지 마찬가지로 적용되는 것입니다.
계속되는 광야 행군으로 지친 그들은 과연 자기들이 약속받은 그 땅이 축복된 땅인가? 하는 의구심을 갖게 되면서 점점 그들은 미래에 대한 불안감과 절망에 휩싸이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런 상황을 파악하신 하나님께서는 지도자인 모세를 통해서 그들에게 열 두 명의 정탐꾼을 선발해서 가나안 땅을 정탐하도록 지시하셨던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의 본래의 뜻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하나님의 능력과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믿음으로 용기를 가지고 전진해 들어감으로써 결국은 그 땅을 차지하고 그 곳에서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게 되기를 원하시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가나안 땅 정탐의 주된 동기는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불신앙의 결과로 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 땅에 대한 정탐이 실제로 추진될 수 있었던 까닭은 연약한 믿음을 소유한 백성을 질책하지 않으시고 그들의 성숙한 신앙과 가나안 땅에 대한 소망을 독려하기를 원하셨던 하나님의 자상하신 배려 때문이었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자상하신 배려와 돌보심은 비단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오늘 우리 모두에게도 마찬가지로 베풀어지고 있는 사실입니다.
오늘의 본문 말씀인 민수기 13장 25절~33절까지의 말씀은 이렇게 시작된 가나안 땅 정탐꾼으로 파견되었던 12명의 정탐꾼들이 모세의 지시대로 가나안 땅을 정탐하고 돌아와서 바란 광야 가데스 바네아에서 이스라엘 모든 백성들 앞에서 그 결과를 보고하는 내용으로 되어 있는데, 그 보고의 내용이 오늘 말씀의 제목처럼 두 부류로 나누어지게 되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서 12명의 정탐꾼들에게 가나안 땅 정탐과 관련된 경로와 정탐 방법 및 정탐에 필요한 것들을 그들에게 지시했습니다. 그 지시 내용의 핵심은 20절에 기록된 것처럼 ‘담대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이 말은 신앙에 기초한 용기로써 정확히, 그리고 긍정적으로 판단하여 능히 모든 어려움을 극복하라는 지시였습니다. 그 이유는 그들 앞에 어떤 상황과 환경이 펼쳐진다고 하더라도 그것으로 인해 위축되지 말고 그 모든 것들을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것으로 믿고 용감히 맡은 일을 수행하도록 하기 위한 안전 조치였습니다. 모세는 인간적인 시각으로 사물을 대하는 것과 신앙의 눈으로 그 대상을 접하는 것과는 현격한 차이가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정탐꾼들에게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한 이런 지시를 내렸던 것입니다. 사실 하나님과 그 약속만을 바라보고 믿는 자는 어떤 장애에도 굴하지 않고 담대히 전진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두려움은 확실히 불신앙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40일 동안에 걸쳐서 가나안 땅 정탐을 마친 정탐꾼들은 모세의 명령에 따라서 그 땅의 풍성한 수확물을 거두어 왔습니다. 그중에서도 특별히 우리의 시선을 끄는 것은 두 사람이 포도송이가 달린 가지 하나를 메고 왔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가나안 땅이 경작지로서는 최상이었음을 증명하는 동시에 이스라엘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크고 놀라운 것인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가나안 원주민들이 비록 강대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몰아내시고 대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비옥한 토지를 제공하실 것에 대한 확실한 약속의 증표였던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 말씀을 보면, 정탐꾼들은 모세가 지시한 정탐 원칙에 의해 남방 길로부터 산지를 따라 북상하면서 세밀하게 정탐을 마치고 무사히 귀환하여 정탐한 결과를 백성들에게 보고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우선 그들은 그 땅의 풍부한 생산력과 거민의 강대함 등을 사실적으로 보고하였습니다. 중요한 사실은 이러한 사실적인 보고 이후에 이루어지는 그 땅에 대한 정탐꾼들의 평가와 결론이 서로 달랐다는 사실입니다. 30절 말씀을 보면, 12명의 정탐꾼들 중에서 갈렙은 담대히 가나안 땅의 정복을 피력하면서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곧 올라가서 그 땅을 취하자. 능히 이기리라.” 그러나 본문 31~33절까지의 말씀을 보면, 여호수아와 갈렙을 제외한 10명의 정탐꾼들은 그 땅과 거민들의 강성함을 근거로 가나안 땅 정복이 불가능함을 보고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정탐한 사실을 보고하는데 그 보고의 내용과 결론이 서로 상반될 수밖에 없었던 사실은 한 쪽의 보고는 신앙적인 보고였으나 또 다른 한 쪽의 보고는 불신앙적인 보고였기 때문이었습니다. 먼저 여호수아와 갈렙 두 사람의 신앙적인 보고와 결론의 근거를 우리는 14장 7~9절 말씀에서 확인할 수 있는데 이렇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7)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에게 말하여 이르되 우리가 두루 다니며 정탐한 땅은 심히 아름다운 땅이라 (8)여호와께서 우리를 기뻐하시면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시고 그 땅을 우리에게 주시리라. 이는 과연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니라. (9)다만 여호와를 거역하지는 말라. 또 그 땅 백성을 두려워하지 말라. 그들은 우리의 먹이라. 그들의 보호자는 그들에게서 떠났고 여호와는 우리와 함께 하시느니라.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이어서 10명의 정탐꾼들의 불신앙적인 보고와 결론의 근거는 본문 31~33절에 잘 나타나 있는데, 그것은 그 땅과 거민들의 강성함을 근거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이들의 보고와 결론이 불신앙적일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그들은 목격되는 사실에 관해서는 정확히 보았으나 그 목격된 바를 신앙으로 승화시키지 못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그들은 그저 자신들의 눈으로 본 것만을 사실적으로 보고하였을 뿐이지 자신들이 본 것을 믿음의 눈으로 새롭게 바라보지 못하고 더 나아가서 하나님의 관점에서 그것을 해석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부정적인 보고를 할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들은 그 땅을 기필코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지 못하고 단지 그 땅의 강성함과 자신들의 미약함만을 견주어서 바라봄으로써 부정적인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이 대목에서 우리가 반드시 깨달아야 할 중요한 사실 한 가지는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 인생살이를 행복하고 성공적인 인생으로 만들어 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하나님의 함께 하심과 하나님의 약속과 능력을 신뢰하는 믿음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또한 어떤 사실을 바라볼 때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는 방법을 익혀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어떤 사실을 접할 때에 그저 우리의 인간적인 눈에 보이는 대로만 보고 평가하지 말고 그것을 하나님의 관점에서, 믿음의 관점에서 다시 평가하고 해석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10명의 정탐꾼들은 하나님을 빼놓고 자신들의 눈으로 본 것만을 가지고 평가하고 결론을 내렸지만 여호수아와 갈렙은 하나님을 염두에 두고 자신들이 본 것을 평가하고 결론을 내렸음으로 그들은 똑같은 상황을 보고 나서도 서로 다른 평가와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었음을 오늘 본문 말씀은 우리에게 교훈해 주고 있습니다.
불신앙적인 입장에서 하나님을 빼놓고 정탐을 하고 돌아와서 부정적인 보고를 했던 한 부류의 사람들은 사실을 왜곡하게 되었으며, 그저 눈에 보이는 현상만을 보는 분명한 한계를 지니고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미리 겁을 먹게 되는 결과를 낳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믿음의 눈으로 정탐을 하고 돌아와서 신앙적요 긍정적인 보고를 했던 또 한 부류의 사람들은 주위 사람들에게 안심을 주었으며, 행동을 촉구하는 적극적이며 열정적인 자세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보장된 승리를 믿고 가능성을 말하며 자신들 스스로가 용기를 가지게 되었으며 주변 사람들에게 용기와 가능성을 심어주는 결과를 낳게 되었습니다.
더 중요한 사실은 불신앙적인 사람들은 자신들뿐만 아니라 주변 사람들 모두를 불신앙과 불평에 전염되게 만들어 결국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축복의 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광야에서 하나님의 재앙으로 죽게 만들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신앙적인 관점에서 긍정적인 보고를 했던 여호수아와 갈렙 두 사람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축복의 땅을 차지하게 되는 복을 누리게 되었음을 성경은 분명히 증거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들은 어떤 부류의 사람들입니까? 오늘 우리의 현실은 여러 가지 면에서 광야생활 중에 있었던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미래가 불투명하며 힘들고 불안한 상황 가운데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바로 이러한 때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여호수아와 갈렙과 같이 믿음의 사람이 되어서 긍정적인 삶의 자세와 신앙의 용기를 갖는 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줄로 믿습니다. 믿음의 눈을 가지고 하나님의 임재와 동행하심을 믿고 상황과 환경을 초월하여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누리시는 여러분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믿음을 가진 눈
민수기 13:25~33 / 이필재 목사
몇 년 전에 한번 오라고 해서 알래스카에 간 적이 있습니다. 항상 테이프로만 제 설교를 들었는데 실물로 한번 설교 듣고 싶다고 해서 간 것입니다. 알라스카는 눈경치가 아름답고, 얼음산이 있어서 세계인의 관광 명소가 되어 있습니다. 알라스카는 전체 땅 면적이 미국 본토의 3분의 1 정도 될 만큼 넓고 넓은 땅입니다. 대한민국 땅의 15배 정도 넓이의 크기입니다. 알라스카는 보물단지와 같아서 지하자원이 많아 광업, 고기도 많이 잡혀서 어업, 나무가 많아 임업이 크게 발달할 수 있으며, 짐승이 많아서 모피 생산을 대량으로 할 수 있고, 특별히 가장 큰 보물은 석유가 100억 배럴 이상이 묻혀 있다고 합니다. 지정학적 위치로는 군사적 요새로 미군 기지가 있는데 아메리카 보호 기지로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보물과 같은 땅입니다. 미국은 미국이 가지고 있는 모든 자원의 마지막 보고를 네바다 뉴멕시코 사막과 알라스카를 꼽고 있습니다. “자원이 모두 다 고갈되어도 네바다와 멕시코 사막과 알라스카 얼음산 밑에 있는 자원을 가지면 미국은 그때 그것을 먹고 살게 될 것이다.” 이런 과학적인 보고를 합니다. 이렇게 크고 놀랍고 좋은 땅을 1867년 미국은 러시아로부터 720만 불에 사들였습니다. 이 사건은 러시아 사람들에게는 영원한 후회가 되었고 미국인들에게는 영원한 행운이 되었습니다. 물론 그 당시에 720만 불이라고 하면 큰돈은 확실합니다. 그러나 우리 돈으로 계산해서 100억도 안 되는 돈으로 한국 땅 15배의 땅을 구했다니 얼마나 큰일입니까? 그러면 무엇이 그렇게 엄청난 차이를 가져오게 했습니까? 한쪽은 미래를 봤습니다. 한쪽에서는 현실만 봤습니다. 미국 국회에서 알라스카를 사야 된다고 소리를 고래고래 질렀던 국회위원들은 “두고 보라. 앞으로 알라스카 얼음덩어리 밑에 있는 식량을 꺼내서 미국이 먹고 살게 될 것이다.” 그래서 우겨서 산 것입니다. 러시아에서는 알렉산드르 바라노프 주지사가 알라스카를 통치했는데 그 사람이 팔자고 했습니다. “이 얼음 덩어리를 지키느라고 국고만 손실이 나지 여기 할 일이 뭐가 있느냐? 나는 아무것도 할 것이 없다. 365일 10년이 가도 얼음만 있는 이것을 무엇 하러 국고를 손실해 가면서 지키느냐? 이것 아니어도 얼마든지 러시아는 넓고 넓은 땅이 있다. 이 알라스카는 소용없는 땅이다.” 그래서 장래를 보는 사람과 현실만 보는 사람의 차이가 이와 같은 결과를 가져온 것입니다.
오늘 성경 말씀에는 아주 비슷한 사건이 나오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마지막 가려고 하는 가나안 땅 이야기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40년 동안 광야에서 고생한 이유는 조상들에게 약속하신 가나안 땅이 그들의 땅이라는 희망 때문에 그 온갖 고생과 전쟁을 하면서 지금 민수기 벌판에서 살고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땅을 보니까 자기들이 떠나 있었던 430년 동안에 다른 종족들이 들어와서 살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이것을 내어놓으라 하면 전쟁이 일어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벌어졌습니다. 그래서 모세는 이 일을 어떻게 훌륭하게 해낼 수 있을까를 연구하다가 열 두 지파에서 대표자 한 사람씩 뽑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가나안 땅의 정탐꾼으로 탐지하고 와서 보고하라.” 열두 명은 위험을 무릅쓰고 가서 그 땅의 사정을 잘 알아보고 돌아와서 모세와 백성 앞에 보고했습니다. 그런데 큰 불행이 생겼습니다. 같은 시간에 같은 장소에서 같은 내용을 보고 왔는데 정 반대의 의견이 나온 것입니다. 열두 명 가운데 열 명은 부정적으로 보았습니다. “우선 그 사람들과 우리들이 전쟁을 해야 되는데 그 땅 사람들은 신체적으로 우리들보다 우수하고 그들을 볼 때 얼마나 무서워보였는지 마치 우리들은 그들 앞에 메뚜기 같이 보였습니다. 그러니 우리 힘으로는 도저히 당해낼 길이 없습니다.” 이런 보고를 했습니다. 14장에 보면 그러한 보고를 듣고 온 백성이 통곡을 했다고 했습니다. “차라리 애굽으로 돌아가자. 여기까지 우리를 끌고 와서 그 사람들에게 우리 처자들과 함께 다 죽을 일을 생각하니까 기가 막히다. 살아남으려면 여기서 그만 두자.” 그런데 그 중에 두 사람, 여호수아와 갈렙은 자기들의 옷을 찢으면서 “아닙니다. 그 땅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기로 약속한 땅입니다. 우리가 충분히 그 땅을 차지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말합니다. “그들은 우리의 밥입니다. 밥은 먹으면 그만입니다.” 이런 상반된 결과가 나타났습니다.
그러면 이 문제를 민주주의 방법대로 해결한다면 이 사건은 결정이 간단합니다. 10대 2의 투표로 회의를 끝내면 됩니다. 14장 10절에 보면 백성들이 돌을 들어서 가나안 땅에 들어가자고 우기는 여호수아와 갈렙을 때려죽이려고 합니다. 이제 상황은 어떻게 벌어졌느냐 하면 수백만 대 두 사람이 되었습니다. “열 명의 보고가 맞다. 저 두 사람이 잘못 본 것이다. 열 사람이 틀릴 리가 없다. 열 사람이 다 똑같은 보고를 하니까 저 여호수아와 갈렙을 아예 때려 죽여 버리고 우리는 다시 애굽으로 돌아가자.” 이런 결정을 합니다. 그러면 이제 어떻게 됩니까? 지금까지 고난스럽게 순례의 길을 걸은 모든 일이 다 무너져 버립니다. 출애굽 과정에서부터 민수기에 이르기까지 그들이 겪어왔던 그 많은 일들은 바로 가나안 땅에 들어가 정착해서 살기 위한 민족 이동인데 어떻게 되는 겁니까? 이제 여호수아와 갈렙은 꼼짝 없이 죽게 생겼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직접 개입하십니다. “지금까지 내가 너희들을 어떻게 인도했으며 보호해 왔는지 너희가 알 것이다. 이 가장 중요한 나의 목표를 놓고 이게 무슨 추악한 꼴이냐? 그렇다면 나는 여호수아와 갈렙의 손을 붙잡고 이 일을 성취하겠다. 이 일을 부정적으로 보고 나의 말을 듣지 아니한 애굽 세대는 한 사람도 가나안 땅에 들여보내지 않겠다. 광야에서 죽을 것이다. 여호수아와 갈렙 두 사람과 애굽을 모르는 광야 출산의 신세대만 가나안 땅에 들어갈 것이다.” 이렇게 된 것입니다.
성경의 기록은 앞뒤가 이렇게 역사적으로 맞지 않은 것 같아도 총체적인 내용은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이 택한 백성과 하나님이 택한 인물을 통해서 후대에 영원히 하나님의 섭리와 경륜이 영적으로 전해지게 하려는데 목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사건에 영적 교훈을 얻어야 합니다. 우리는 지금 믿음의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늘 믿음을 주장하고 있는데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란 무엇인가? 가능성을 극대화해서 오는 시각을 믿음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이 믿음에 대해서 설교를 할 때 뭐라고 하셨습니까? “만약 너희에게 겨자씨만한 믿음이 있다면 이 산을 옮겨 바다에 빠지게 할 것이다.” 얼마나 믿음이 없으면 겨자씨에 비유하셨겠습니까? “모든 씨 중에 가장 작은 씨앗이지만 그것을 심으면 자라서 나무가 되고 새들이 와서 거기 사느니라.” 예수님은 작은 것에서 가장 큰 것으로 극대화 되어지는 과정을 믿음에 비유해 설교하셨습니다. 오늘 이 지구상에 하나님의 백성이 얼마나 많아졌습니까? 또 계속해서 얼마나 많아지고 있습니까? 한국은 이제 100만 명 모이는 집회도 가능합니다. 정말 바다의 모래알 같이 바라보면 많아졌는데 시작을 보면 제일 처음에 너 같은 사람이 바다의 모래알 같이, 하늘의 별과 같이 많아지리라고 약속을 받은 아브라함과 사라와 같습니다. 아브라함과 사라는 다 늙어서 아기도 하나 생산 못하게 되었는데 하나님의 약속 그대로 되었습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하나님의 나라 확장을 생각해 봐도 이 세상 가장 작은 나라 유대 땅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우리 대한민국 땅도 세계 수준에서 생각해 본다면 땅 덩어리 작기로 뒤에서 순서를 따지는 것이 훨씬 빠릅니다. 유대 나라 영토는 이 작은 대한민국의 강원도 만합니다. 그 작은 곳 보이지도 않는 산골짜기에서 시작한 하나님의 나라는 오늘 땅 끝까지 극대화 되어졌습니다. 믿음이 있다는 것은 그런 것을 미리 볼 수 있는 능력을 말합니다. 우리 기독교의 교리를 간단히 설명하면 “믿음으로 구원받는다.”입니다.
오늘 사건에서 우리가 상식적으로 생각할 때 ‘아! 하나님은 그 백성들이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난리를 쳤어도 어쩌면 그 사람들을 그렇게 멸망을 시키셨을까? 그대로 설득을 시켜서 데리고 들어가시지.’ 우리 상식은 그렇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러지 않으셨습니다. “나는 이 일을 절대 신뢰하는 여호수아, 갈렙 두 사람만 가나안 땅에 데리고 들어가겠다.” 다른 사람은 하나도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편에서 볼 때는 믿음이 없는 수백만이 소용이 없는 겁니다. 믿음이 있는 두 사람이 중요한 겁니다. 왜 예수님은 부활하시기 위해 군중집회를 안 하셨습니까? 군중집회는 과거에 하셨지만 아무 소용없었잖아요? 5천 명씩 모여서 떡을 다 나눠주었는데도, 기적을 봤는데도 그 사람들이 십자가에 못 박았잖아요? 필요 없습니다. 그래서 꼭 필요한 사람만을 찾으신 것입니다. 하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절대 안 된다고 주장하면서 그 많은 군중은 된다고 하는 여호수아와 갈렙을 처치해 버리자고 했는데 하나님은 그 두 사람의 손을 붙잡고 그 기성세대들을 광야에서 다 죽게 만드셨습니다. 하나님의 가능성을 극대화해서 볼 수 있는 능력이 믿음입니다.
프린스턴 대학 기숙사에는 지금도 아인슈타인이 살던 집이 있습니다. 저는 그 집을 구경한 적이 있습니다. ‘이 집에 들어갔다 나오면 나도 아인슈타인과 같이 머리가 좋아지겠지?’ 그런데 아인슈타인의 학창시절을 아십니까? 거기 가면 설명해 줍니다. 어떻게 공부를 못하는지 항상 낙제였습니다. 너무 공부를 못해서 선생님이 성적표에 뭐라고 썼느냐 하면 “이 학생은 공부로서는 도저히 성공할 가능성이 없음. 공부를 시키지 말고 다른 노동을 시켜서 살아갈 길을 찾아야지 공부는 안 됨” 이렇게 성적표를 써서 주었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가지고 집에 와서 엄마한테 보여주었습니다. 만약 여러분들이 여러분 자녀를 맡은 담임선생님이 여러분 자녀의 성적표에 그런 똑같은 말을 써서 보내주었다면 그것을 보고 어떤 반응을 일으키시겠습니까? “너 죽고 나 죽자.” 하지만 아인슈타인의 어머니는 훌륭했습니다. 그러한 자기 아들을 놓고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내가 너를 오랫동안 지켜본 결과 너는 잘 모르는 것 같지만 엄마가 생각하기에는 너의 뇌 구조는 단세포적 구조 같다. 너 같은 사람은 여러 가지를 공부하면 아무것도 못하는 사람이야. 하나만 해라. 너의 뇌 구조가 그렇게 되어서 하나만 하면 다른 것은 전혀 몰라. 엄마가 봤을 때 너는 그랬어. 그러니까 너는 하나만 해.” 나중에 아인슈타인이 성공한 후에 산책을 나갔다가 자기 집을 잃어버렸습니다. 돌아갈 수가 없어서 비서실에 전화를 했습니다. “아인슈타인의 집을 찾아가려는데 어디로 가지?” 비서실에서 “아인슈타인의 집은 가르쳐줄 수 없습니다.” 그렇게 응용이 안 되는 머리였습니다. 그래서 어머니 말대로 하나만 했잖아요? 아인슈타인은 물리학만 연구했습니다. 그래서 이론물리학에서는 세계 최고의 권위자가 되었습니다. 어머니 믿음 때문입니다.
믿음의 눈이란 무엇입니까? 가능성을 극대화 하는 것을 자신에게도 적용시키는 겁니다. ‘나는 어떤 사람인가? 성공할 가능성이 하나도 없는 사람인가? 아니다. 남이 따르지 못하는 내 뇌구조가 있다. 나는 그것을 나아가면서 구한다.’ 마귀가 열심히 하는 일이란 내가 내 자신에 대한 평가를 “너는 아무짝에도 쓸데없는 형편없는 사람이니까 너 같은 사람은 하나님의 역사고 선한 일이고 떠들지 말고 그냥 그렇게 살다가 지옥에나 가라.” 마귀는 나를 그렇게 몰고 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무슨 소리냐? 나는 너희들의 손을 잡고 이 땅에 나의 인간 구원을 이룰 것이다. 가자.” 이렇게 된 것입니다. 저 같이 목사로 평생을 살아야 되는 사람들에게 신학교에서 가르치는 교육 중에 하나가 인성 교육 가운데 “자신의 나약성을 극복하지 못하면 목회를 하지 마라.” 이것입니다. 그 나약성이 뭐냐? 바울이 말했습니다. “나는 죄인 중에 괴수다.” 죄인 중에 괴수가 무슨 성직자가 됩니까? 하지 못합니다. 이것을 극복할 수 없으면 목사를 하지 말아야 합니다. “물론 그렇지만 하나님의 능력은 나의 약한 데서 강하여 짐이라.” 바로 그 믿음이 있었습니다. 바울이 그것을 소개하잖아요? 나의 모든 것을 초월해서 주님의 능력을 볼 수 있는 시각, 그것을 믿음이라고 합니다. 마귀는 끊임없이 우리로 하여금 아무것도 못하는 존재로 침몰시키려고 온갖 노력을 다 합니다. 만약 우리에게 믿음이 있다면 성경의 말씀대로 능히 이기게 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미리 바라보면서 일을 하는 것입니다. 지금 유대 민족은 그들이 처한 여러 가지 여건이 이제 가나안 땅에는 근처에도 안 가는 것이 가장 좋을만한 과학적 재료를 수입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민주주의 원칙으로 다수가결에 의한 의의 정치를 도입해서 그날 “이 가나안 정복은 포기한다.” 결정 내리면 끝입니다. 그 결정에 다 찬성하고 있는 것입니다. 두 사람만 반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그 두 사람 손을 잡고 군중을 없애버린 것입니다. 하나님은 믿음이 없는 군중은 필요가 없으십니다. 믿음이 있는 하나, 둘이 필요하십니다. “내가 하는 일을 봐라.” 붙잡으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역사가 이루어지려는 결정적 시점에 방해가 되는 사람을 제거해 버리십니다. 이것이 이 성경에 나타난 영적 교훈입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인정하는 행위입니다. 하나님의 권능을 믿으며 약속의 말씀의 확신을 갖는 마음, 이것을 믿음이라고 합니다. 나를 포함하여 이 세상의 모든 역사의 주인은 하나님이심을 믿어서 그의 인도와 보호와 섭리를 순종하고자 하는 실천적 행위가 곧 믿음입니다. 교회 오래 다닌 사람들은 열두 명 가나안 정탐꾼 가운데 두 명 여호수아와 갈렙은 모두 이름을 기억합니다. 이 이름을 모르는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다른 열 명의 이름도 이 두 사람의 이름과 똑같이 성경 한 페이지에 똑같이 나와 있습니다. 그 열 명의 이름 가운데 단 한 명이라도 기억하시는 분은 지금 손을 들어보십시오. 나도 모릅니다. 알 필요가 없습니다. 성경이지만 기억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행하시는 역사 과정을 하나도 기억하지 못하는 그 사람들은 필요가 없습니다.
미국은 여기저기에 미국 역사에 남길 만한 인물을 바위에다 얼굴을 조각해서 남기는 것을 좋아합니다. 그 중에서 제일 크고 웅장한 것이 사우스다코타 블랙힐스에 있는 러쉬모어 마운틴의 네 사람 얼굴 조각인데 얼마나 크냐하면 사람 얼굴 하나 길이가 142미터입니다. 미국 여행하신 분들은 보셨겠지만 그런데도 사진처럼 얼굴 모습이 다 나오잖아요? 조지 워싱턴, 토마스 제퍼슨, 테오도어 루즈벨트, 아브라함 링컨입니다. 왜 그 네 사람 얼굴만 거기 조각해 놨느냐? 그들이 남긴 말이 있습니다. 그 말 때문에 그 네 사람이 조각 된 것입니다.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은 대통령 취임식에서 말했습니다. “성경이 아니면 미국과 세계를 다스릴 수 없습니다.” 취임식에서 성경책 갖다놓고 성경책 위에 손을 얹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초대대통령이 그렇게 했기 때문에 지금도 그렇게 합니다. 토마스 제퍼슨은 미국의 독립선언서 작성자입니다. 그것을 작성하면서 “이 선언문의 기초를 성경으로 한다. 미합중국은 성경을 기초로 하여 서있는 나라이다.” 그래서 그분의 얼굴이 조각되어 있고, 루즈벨트는 미국 역대 대통령 가운데 가장 어린 나이에 대통령이 된 사람인데 최초의 연설을 하면서 “모든 미국인은 인간다운 삶을 누리기 위하여 성경을 열심히 읽으십시오. 나도 읽겠습니다.” 아브라함 링컨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내려주신 모든 선물 가운데 가장 훌륭한 선물이 성경입니다.” 그러한 믿음으로 이끌어 갔기 때문에 그들의 세대가 가장 빛이 났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해놓은 것입니다. 히브리서 11장을 보세요.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이 세상에서도 믿음이 없는 사람은 성공을 못합니다. 확신이 없는데 뭐가 주어지겠습니까? 세상에 조그만 것도 믿음의 확신과 열정을 가지고 진행해야만 그것이 나에게 주는 복이 될 수 있습니다. 영적으로는 말할 것도 없습니다. 믿음을 가지고서만 어떤 일이든 성취할 수 있습니다. 저 기독교 핍박 국가인 미얀마나 베트남 같은 지역에 우리가 선교사를 파송하면 장래에는 그 나라들도 대한민국과 같은 열정의 기독교 국가가 된다는 확신 때문에 보내는 것입니다. 이라크 같이 교회가 하나도 없는 나라에 암암리에 선교사 하나를 들여보낸 것은 그가 그 나라에 언더우드와 같은 역할을 할 수 있다는 믿음 때문입니다. 지금은 안보여도 그 이유 때문에 보낸 것입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은 아무 것도 되지 않습니다. 믿음으로 승리해야 합니다.
여호수아와 갈렙의 이 믿음 때문에 잔멸 위기의 히브리 민족은 430년과 가나안 땅 40년 이렇게 470년의 나그네 생활을 청산하고 영적으로 하늘나라를 상징하는 가나안 땅 정착을 실현시켰습니다. 다 반대했는데 두 사람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감동하실 만한 믿음의 눈을 가지면 사람이 감동할 만한 하나님의 역사가 이루어지도록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찬송가에서 늘 부르잖아요? “이 눈에 아무 증거 아니 뵈어도” 저는 아무 것도 안 보입니다. 그러나 “믿음만을 가지고서 늘 걸으며 이 귀에 아무 소리 아니 들려도 하나님의 약속 위에 서리라.” 할렐루야!
「 하나님 아버지! 오늘 말씀이 뜻하는 영적 교훈을 저희들이 기억하게 하옵소서.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우리 모두가 믿음의 소유자가 되어서 여호수아와 갈렙과 같이 하나님의 역사를 영적으로 관찰할 수 있게 하여 주시고 우리 갈보리교회가 그러한 믿음을 가지고 온 세상에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어가는 글로벌 패러다임을 갖게 해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
비전 성취의 핵심 요소
민 13:25-33 / 박인걸 목사
삼성 ceo의 7가지 특성이 있다고 합니다. ① 예측 가능한 반듯한 인재, ② 조직으로 일하는 노하우 소유, ③ 강한 공동체 의식으로 단결, ④ 육성형 능력주의로 정상 차지, ⑤ 의사 결정 시 모든 변수 검토, ⑥ 파벌 배격, ‘줄 대기’ 배제, ⑦ 목표 달성 위해 끝없이 매진이라고 합니다. 즉 비전에 대한 몰입과 열정이 아주 강한 특성을 지녔다고 합니다. 개인이든 집단이든 비전을 성취한 사람들은 남다른 열정과 노력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애급을 탈출한 히브리인들은 모세의 지도력에 따라 가데스바네아에 왔습니다. 그들의 비전은 가나안 정복입니다. 이제 가나안 땅이 지척에 있습니다. 손만 뻗으면 닿을 곳입니다. 그들의 마음은 들떴습니다. 곧 가나안 땅을 밟을 것이라는 기대감에 부풀어 있었습니다. 모세는 각 지파에서 민첩하고 총명하며 지도력을 갖춘 지휘관을 한 명씩 뽑았습니다. 12명의 정탐꾼들이 차출 되었습니다. 모세는 그들을 훈련시켰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파송하였습니다. 40일 간의 정탐 임무를 수행하고 돌아 온 그들의 보고는 백성들과 모세를 실망시켰습니다. 2/12, 1/6이 가나안 점령에 회의적이었습니다. 아니 불가능하다는 보고였습니다. 홍해바다를 건너 온 그들은 진퇴양란에 빠졌습니다. 모든 백성들은 절망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그들은 크게 낙담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 출애급 1세들은 가나안 땅을 밟는데 실패하였습니다. 아무도 들어가지 못하였습니다. 그들의 비전을 광야까지였습니다. 가나안 점령의 비전을 접어야 했습니다. 그것은 정탐꾼 열 명의 잘못 된 신앙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의 부정적이며 불신앙적인 자세와 태도는 백성들 전체에 나쁜 기류가 급속히 형성되었고, 그 결과 하나님의 진노와 함께 가혹한 징벌이 내려진 것입니다. 하나님의 결정론을 거부하고 자신들의 이론을 정당화 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축복하지 않았습니다. 광야에 매장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과 다른 태도를 가진 두 사람이 있습니다. 신앙의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을 절대 신뢰한 사람들입니다. 부화뇌동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았습니다. 그들은 신학은 확고부동했습니다. 주변 환경에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초지일관 하나님의 뜻과 섭리를 목도하였습니다. 불의 앞에 항거하며 대중들 앞에서 자신들의 신앙을 고백한 사람들입니다. 가나안 원주민들의 보호자는 떠났고, 여호와는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임마누엘 신앙으로 충만했습니다.(민14:9) 앞에서 보고한 열 명의 정탐꾼들과는 크게 비교될 정도의 신앙과 사상을 가졌습니다. 회중들이 그들을 돌로 쳐 죽이려 할 정도로 오직 하나님의 편에 서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사람들의 신앙과 고백대로 두 사람은 가나안 땅을 밟았고, 또한 궁극적으로 히브리백성들은 가나안을 정복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되었고, 그들의 신앙대로 되었습니다.
비전(vision)이란 원래 상상력, 직감력, 통찰력 등을 뜻하거나 미래상, 미래의 전망, 선견지명 등의 뜻을 가지고 있는 용어이지만, 예술적으로 사용될 경우 예술의 창작 및 향수(享受)에 있어서 마음에 나타나는 환상적인 현상을 지칭합니다. 정치적일 경우에 비전은 정치를 통한 이상사회 건설이며, 경제적학적인 경우에는 원활한 통화를 통한 부의 창출과 함께 부강한 사회, 부강한 국가를 이루는데 있습니다. 비전이 종교적인 경우에는 복음전파를 통한 죄에 빠진 인간들을 구원하는 일이며, 개인적인 경우에는 삶의 꿈과 목표를 달성해 가는 것을 지칭합니다. 본문에서 이스라엘 민족의 비전을 가나안 점령을 통한 영토, 국민, 주권, 그리고 하나님을 섬기는 자유로운 신앙생활이 그들의 비전입니다. 오늘 여러분의 비전을 무엇입니까? 그리고 그 비전을 성취를 위한 핵심 요소들을 무엇입니까? 우리는 오늘 그 요소를 본문을 통하여 찾아보는 시간이 될 수 있기 원합니다.
(1) 정확한 시각입니다.(13:28)
시각이란 사물을 관찰하고 파악하는 기본적인 자세를 칭합니다. 무엇을 보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가치관이 달라지고, 가치관은 그 사람의 방향을 결정합니다. 사물과 사건을 보는 시각이 정확한 사람이 있는 반면에 어느 방향으로 치우친 사람이 있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균형 잡힌 시각입니다. 균형 잡힌 시각을 소유한 사람은 언어, 행동, 삶의 방향, 판단과 결정이 비교적 바르지만 한 방향으로 치우친 사람은 삶의 태도에 큰 영향을 주며 그의 주변 사람들에게도 많은 영향을 주게 됩니다.
본문에 등장하는 열 명의 정탐꾼들은 시각에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가나안을 정탐하면서 비뚤어진 시각으로 사물을 관찰하고 돌아왔습니다. 28절을 보면, “그 땅 거주민은 강하고, 성읍은 견고하고, 심히 크며, 아낙자손이 살고 있는 것을 보았으며” 아말렉, 헷, 여부스, 아모리, 가나안 사람들이 그 땅에 포진하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29절) 이는 가나안 원주민들은 강하고 상대적으로 히브리인들은 약하다는 관점입니다. 아마 그들은 40일간 정탐하는 동안 아무래도 자신들이 그 땅을 차지하기 어렵겠다는 맘으로 활동한 듯합니다. 그들은 육적 시각으로만 사물을 보았을 뿐, 보이지 않는 영적 세계에서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이끌어 가고 있음을 보는 눈은 닫혀 있었던 것입니다.
경제학에서 거시경제학과 미시경제학이 있습니다. 거시경제학은 국민 총생산, 국민 소득, 고용, 투자, 저축, 소비 등 국민 경제 전반의 통계량을 토대로 하여 경제 순환의 동태를 총계 및 확률 면에서 포착하여 경기 변동이나 경제 성장의 규칙성을 분석하는 경제학입니다. 미시경제학은 경제 주체인 소비자, 기업의 형태를 분석하고 이들이 시장에서 가격을 형성하는 과정을 밝히는 학문, 즉 경제학의 한 분야입니다. 한 국가의 경제를 연구하는 학자들은 거시경제와 미시 경제를 보는 시각이 균형 잡힐 때 국가의 미래 경제를 바르게 진단하고 대책을 세워 탄탄한 경제구조를 갖게 하여 나라와 국민들의 살림살이를 바르게 하여 잘 살게 하는데 그 목적이 있습니다. 1997년 12월에 터진 IMF는 경제학자들이 거시경제와 미시경제를 제대로 읽지 못한 결과입니다. 한 국가와 개인의 경제를 망하게 한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이렇게 시각은 중요합니다.
전쟁을 하는 부대의 참모가 적의 수효와 무기의 재원, 그리고 작전계획을 보지 못하고 무조건 전쟁터에 나간다면 그 부대는 전멸할 수 있습니다. 참모는 적군의 능력과 아군의 능력을 바르게 보고 판단하는 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전쟁에 승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적의 수효가 아군의 수효보다 많아 전쟁이 이길 확률이 없다면 먼저 사자를 적군에 보내어 화친하는 것이 지혜라고 말씀하였습니다.
신앙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시각은 부정적 시각이 아니라 긍정적 시각, 즉 신앙적 시각입니다. 아무리 외적으로 내가 대항하기에 어려워도 나의 배후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볼 수 있는 신앙의 눈이 있는 사람은 위대합니다. 육신의 눈, 지식의 눈, 모두 중요하지만 영적인 눈이 더 중요한 것입니다. 열 명의 정탄꾼들은 육적인 눈, 지식의 눈만 떴을 뿐 영적인 눈이 어두웠습니다. 그래서 그 땅을 차지하지 못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갈렙과 여호수아는 영적인 눈을 가졌기 때문에 가나안 원주민들의 우수성을 보지 않고 하나님의 도우심과 함께 하심을 본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시각은 언제나 예수 그리스도의 채널을 통해 사물과 사건을 보는 눈을 가져야 합니다. 인간은 불가능해도 하나님은 가능하고, 인간은 연약해도 하나님은 강하며, 적들이 강해도 하나님의 능력 앞에는 아무것도 아닌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영적 시각으로 사물을 보는 지혜를 달라고 기도하며 살아야 합니다. 이런 사람이 비전을 성취할 수 있습니다.
(2) 올바른 사고입니다.(33)
열 명은 가나안 원주민들에 비하여 자신들은 “메뚜기 같다.”(33)고 했습니다. 2010년 새해가 막 지난 무렵 런던 서부의 한 공사 현장에서 일하던 29살의 남성이 층계참에서 떨어졌습니다. 약 15cm 못이 그의 부츠를 뚫고 거의 발등까지 뚫고 올라왔습니다. 상상도 못할 고통에 신음하는 그를 동료들이 즉각 구급차에 태웠고, 구급차는 서둘러 그를 응급실로 데려갔습니다. 못이 조금만 움직여도 그에게는 엄청난 고통을 안겨주었기 때문에 응급실 의사들은 재빨리 수술 전에 의식을 잃게 만드는 데 사용하는 미다졸람(Midaxolam)으로 그를 진정시켰습니다. 곧이어 의사들이 모르핀보다 100배는 더 강력한 진통제로 말기 암 환자에게 처방하는 펜타닐(Pentanyl)을 투여하였습니다. 그 청년이 고통스럽게 몸부림쳤기 때문입니다. 의사들은 환자를 진정시키고 통증을 제어하며 그의 부츠를 조심스럽게 벗겨내기 시작했습니다. 마침내 작업 부츠를 다 벗겨냈을 때 그들은 놀라운 일을 목격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15cm의 못은 청년의 살을 뚫은 것이 아니라 발가락 사이로 올라왔기 때문에 털끝만큼도 상처가 나지 않았습니다. 그 청년을 부추를 뚫고 올라온 못을 보고 자신의 살을 뚫었을 것이라는 상상으로 아프다고 외쳤던 것입니다. 이처럼 생각은 중요합니다.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생각은 알과 같다.’ 고 했습니다. 비둘기 알과 같이 좋은 알을 품으면 마지막에 아름다운 비둘기를 까는 것입니다. 독사 알과 같이 악한 생각을 오래 품으면 마지막에 독사 새끼를 깝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우리의 생각이 얼마나 중요하다고 하는 것을 알아서 우리의 생각을 항상 조심해야 합니다.
제가 어느 책에서 읽은 파괴적인 생각과 성공적인 생각을 소개합니다. ① 원래 그래, ② 소용없을 거야, ③ 돈이 있어도 걱정이야, 언제 사라질지 모르잖아, ④ 내 팔자에 무슨 좋은 일을 기대해? ⑤ 생각하는 게 그렇지 뭐, ⑥ 나 자신이 죽도록 미워, ⑦ 그는 나를 더 이상 사랑하지 않아, ⑧ 나는 머리가 나빠, ⑨ 나는 절대 할 수 없어,⑩ 매일 몸이 아파, ⑪ 주제에 맞게 살아야지 뭐, ⑫ 나는 말주변이 없어, ⑬ 먹고 살기가 너무 빠듯해, ⑭ 나는 먹으면 다 허리로 가, ⑮ 나야 늘 그렇지 뭐, ? 잘 될 리가 없어, ? 우리 부부는 처음부터 잘 살 수 없는 인연이었어, ? 내 잘못이 아냐, ? 그냥 운이 좋았어, ? 우리 사이가 점점 멀어지고 있어, 이런 생각들은 자신의 인생을 파괴합니다.
반대로 성공하는 사람들의 생각을 정리해 보았습니다. ① 최선의 결과가 나올 거야, 꼭 그럴 것만 같아! ② 나는 하나님을 믿어, ③ 나는 책임감이 있어, ④ 나는 사랑스러운 존재야,⑤ 나는 최고의 인생을 살겠어, ⑥ 나는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야! ⑦ 나는 발전하는 중이야, ⑧ 나는 이 나이에도 건강해, ⑨ 모든 일에서 가장 좋은 결과를 거둘 거야, ⑩ 내 자신과 미래를 오직 하나님께 맡기겠어, ⑪ 나는 아주 행복해, ⑫ 기운이 철철 넘쳐, ⑬ 내 주위에는 승자들뿐이야, ⑭ 나는 언제나 풍성하게 살 거야, ⑮ 하나님이 나를 위해 놀라운 계획을 세워놓으셨어! ?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해, ? 나는 부족함이 없어, ? 성경 말씀의 의미가 머리에 쏙쏙 들어와, ? 하나님이 도우시니 꾸준히 좋아지고 있어, ? 바꿔야 할 부분은 바꾸겠어, 이런 생각을 하며 사는 사람은 반드시 잘됩니다.
파괴적인 생각과 성공적인 생각은 서로 비교되지 않습니까? 열 명의 정탐꾼들은 파괴적인 생각들로 충만했습니다. 그들은 백성들의 신앙과 열정을 파괴하였습니다. 그리고 망했습니다. 그러나 여호수아, 갈렙은 두 사람만이 가나안을 밟았지만 그 두 사람의 영향력은 지금까지도 그리스도인들에게 살아서 역사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생각은 지금 어떻습니까? 파괴적입니까? 생산적입니까? 우리 주님은 마태4장9절에 보면 서기관들의 악한 생각을 책망하였습니다. 우리는 성령님이 주시는 생각 안에서 위엣 것들을 생각고, 마땅히 생각할 이상의 생각을 하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과 뜻을 생각하며 사는 성도가 돼야 할 것입니다.
(3) 신앙적 언어입니다.(민14:28)
“너희의 말이 내 귀에 들린 대로 내가 너희에게 행하리니”라고 하였습니다. 못 들어갈 것이라고 말하고 믿은 사람은 한 명도 못 들어갔습니다. 어떤 분이 대판 싸움을 하면서 소리를 질렀습니다.“대가리가 두 쪽 나도록 싸운다.” 그리고 나가다가 8층에서 떨어지는 망치에 머리를 맞아 머리가 깨져서 죽는 사고가 있습니다. 말 조심하여야 합니다. 미국 교도소에서 조사를 해보았습니다. 수감된 재소자 90%가 부모로부터 이런 말을 들은 사람이었습니다. “너 같은 인간은 결국 감옥에 갈거야” 남자들은 하루 평균 25,000 마디 말을 하고 여자들은 30,000 마디 말을 하고 산다는 통계가 있습니다. 일년동안 400페지 책 132권 분량의 말을 하면서 산다고 합니다. 그런데 부정적인 말을 많이 한다는 것입니다. 말은 그 사람의 운명을 좌우합니다. 거짓말하는 사람은 속아서 망합니다. 악한 말을 하는 사람은 자신이 악한 사람이 됩니다. 부정적인 말을 하는 사람은 되는 일이 없습니다. “죽겠다.”고 말 하는 사람은 죽습니다. “망하겠다.”고 말하는 사람은 망합니다. “큰일났다.”고 말하는 사람에게는 큰 일이 일어납니다.“두렵다.”고 말하는 사람에게는 두려운 일이 일어납니다. 그러나 믿음의 말을 하는 사람에게는 기적이 일어납니다. 믿는 사람은 믿음의 말을 해야 합니다.
잠언 18:21은 말하고 있습니다.“죽고 사는 것은 혀의 권세에 달렸나니 혀를 쓰기 좋아하는 자는 그 열매를 먹으리라.”미국 사람들은 아침에 일어나서 기지개를 마음껏 피면서 외칩니다.“good morning”(좋은 아침입니다.) 그런데 우리나라 사람들은 아침에 일어나 기지개를 피면서 말한답니다.“아. 죽겠다.” 이제는 아침에 일어나자 말자 팔을 피면서 외쳐야 합니다.“오늘도 기적은 일어난다.” “하나님이 축복하시는 거보를 내딛는 하루가 된다.” 이렇게 믿음을 기적을 기대하는 사람에게 기적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쓰시지 않고 믿음을 쓰십니다.
미국 캘리포니아 주에 있는 한 심리연구소의 두 연구원은 사람의 말과 행동이 씨앗의 발아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연구한 적이 있습니다. 이들은 두 개의 화분에 똑같은 흙과 비료를 섞어 넣은 다음 23개씩의 씨앗을 심었습니다. 그리고는 두 화분을 같은 온실 속에 두어서 씨앗이 발아되는 동안 똑같은 태양열을 받게 했지요. 그리고 이들은 하루에 세 번씩 첫 번째 화분에 심겨져 있는 씨앗들을 향해 “너는 절대로 흙을 뚫고 나와 싹을 틔울 수 없어. 혹시 싹이 난다 해도 곧 말라 죽을 거야.”라는 말로 학대했는가 하면 두 번째 화분에게는 정반대로 대했습니다.“그래, 내가 정성껏 심은 씨앗들은 다 잘 자란단다. 너는 분명히 아름다운 식물로 자라나서 예쁜 꽃을 피우게 될 거야. 그 날이 기다려지는구나.”라고 말했습니다. 드디어 3주간의 시간이 지나 두 화분의 사진이 유명한 주간 잡지인 타임지에 실렸습니다. 그런데 부정적인 말로 학대를 받았던 화분에는 몇 개의 작은 싹만 나왔을 뿐이지만 격려의 말을 듣고 자란 화분에는 길게 자란 여러 개의 줄기들이 활짝 핀 꽃을 자랑하고 있었습니다. 말한대로 됩니다.
“우리 교회는 부흥한다.” “우리 교회는 좋은 교회다.”“우리 교회는 행복한 교회이다.”자꾸 말하십시오. 말 대로 될 것입니다. 자신에 대해서도 말하십시오.“나는 구원받았다.”“나는 잘 될 것이다.”“나는 행복한 사람이다.”“내 비전을 이루어 질 것이다.” “하나님은 나와 함께 하신다.”“나는 축복의 사람이다.”그대로 될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우리 하나님은 내가 말한 대로 이루어지게 하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4) 확실한 믿음입니다. (14:11)
“어느 때 까지 나를 믿지 않겠느냐?”고 했습니다. 교통사고가 발생하면 일본은 보험사 직원이 제일 먼저 달려오고, 미국은 교통경찰이 달려오는데, 한국은 렉카차가 달려온다고 합니다. 교통체증이 일어나면 일본은 신호등 기술자가 나타나고, 미국은 교통경찰이 달려와 수신호를 하는데 한국은 뻥튀기 장사와 호두과자 장사가 달려온다는 우스갯소리가 있습니다. 문화의 차이인 것 같습니다.
어려운 상황에 처할 때 믿음의 사람과 믿음이 없는 사람의 차이는 하늘과 땅 차이입니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은 믿음의 사람들이었습니다. 모세, 다윗, 엘리야, 바울 같은 사람도 모두 믿음의 사람들입니다. 그들에게는 항상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믿음의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열 명은 믿음이 없었고, 두 명은 믿음이 있었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믿음 있는 자를 찾고 계시며, 그들에게 복을 주십니다. 나의 믿음은 어느 수준인지 돌아 볼 일입니다. 예수님은 백부장에게“믿음이 크다.”고 했습니다. 스로보니게 여인을 향해서도“네 믿음이 크도다.”라고 했습니다. 반면에 믿음이 없는 세대를 책망하였습니다.
믿음은 구원을 얻게 합니다. 기적이 일어나게 합니다. 축복을 받게 합니다. 사단의 세력을 이깁니다. 적들을 물리칩니다. 시험을 이깁니다. 하나님께 인정을 받게 합니다. 그만큼 믿음은 중요합니다. 동래 온천 중앙 성결교회 전 경백 장로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1.4 후퇴할 때 부산까지 맨 몸으로 피란을 나왔습니다. 입고 있는 옷 외에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었습니다. 영도다리 밑에서 거적을 깔고 살았습니다. 그는 두 손 들고 서원 기도를 드렸습니다.
“하나님! 하나님은 만복의 근원이라고 하셨습니다. 만복이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을 확실히 믿습니다. 이제부터 하나님을 확실하게 모시겠습니다. 신앙생활 하나님이 하라는 대로 잘 하겠습니다. 10년 후 기념 교회 단독으로 지어 드리겠습니다. 축복해 주세요.”그리고 열심히 살았습니다. 그렇게 결심한 지 꼭 10년째 되는 1967년 12월 18일 그 교회를 홀로 지어 드렸습니다. 그 후 두 기업체를 하나님이 축복하셨습니다. 부산 신광산업 주식회사, 마산 원명 모방 주식회사 둘을 창설하셔서 기업가가 되었습니다.
믿음을 확실히 가지고 사십시오. 가나안에 들어간다고 믿는 사람은 들어갈 수 있습니다. 할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은 할 수 있습니다. 결론입니다. 비전을 이루는 핵심적인 네 가지 요소는 첫째, 시각입니다. 둘째, 생각입니다. 셋째, 언어입니다. 넷째, 믿음입니다. 이 네가지 요소를 소유하여 승리합시다.
믿음으로 이끄는 세 질문
민 13:25-33 / 문기태 목사(창원침례교회)
질문을 많이 하는 어린이는 지혜를 빨리 터득하고 좋은 질문을 잘 하는 학생은 공부를 잘 합니다. 인생을 살면서도 아무 질문도 없이 사는 것보다 좋은 질문을 끊임없이 던지며 풀고자 하는 몸부림치는 사람이 성공적인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아무 질문도 없이 믿는 사람보다 좋은 질문을 가려서 잘 하는 사람이 견고한 믿음에 서게 됩니다. 여러분은 믿음생활을 하면서 어떤 질문을 자주 하고 있습니까?
오늘 본문은 바란 광야 가데스에서의 운명적인 순간의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을 담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을 비추어 우리가 살면서 어떤 질문을 끊임없이 자신에게 던져야 우리 자신이 견고한 믿음에 설 수 있는지 도전하고자 합니다.
1. 나는 무엇을 보고 있는가?
사람이 무엇을 보느냐? 하는 것은 참 중요한 문제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보는 것에 의해 반응하기 때문입니다.
어떤 부인이 어린 아들과 함께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집에는 남편도 바다에 나가 선원이 되어 배를 타다 죽었고 큰 아들도 역시 선원이 되어 바다에서 풍랑과 싸우다 죽었습니다. 나이 어린 작은 아들 만큼은 절대 선원으로 만들지 않으려고 바다로부터 멀리 이사 와서 사는데 작은 아들마저도 선원이 되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부인이 아무리 만류를 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그래서 목사님과 고민을 상의하였는데 목사님이 심방을 와서 보더니 "저 그림을 당장 치워 버리십시오." 하였습니다. 거기에는 넓은 바다에서 파도와 싸우며 나아가는 멋진 배와 선원의 그림이 붙어 있었습니다. 그 그림을 치워버리자 작은 아들의 선원이 되겠다는 생각도 사라지게 되었다고 합니다.
열 명의 정탐꾼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 이것 저것을 보고 돌아왔습니다. 그 땅이 젖과 꿀이 흐르는 비옥한 땅이며 실과가 모두 탐스럽게 잘 익어가고 있음을 보았습니다. 동시에 그 땅에 사는 주민들은 체구가 몹시 크고 힘이 세며 전투를 잘하게 단련된 강하게 생긴 사람임을 보았습니다. 또 그 땅에는 견고하고 큰 성벽을 높이 쌓아 그 성벽을 넘거나 무너뜨리기가 용이하지 않음을 보았습니다. 그렇게 보고 돌아와 자기 민족을 비교하여 보니까 자신들은 메뚜기같이 작고 무능해 보였습니다.
열 명의 정탐꾼들이 본 것은 정확한 현실이었습니다. 그들의 시력은 좋았습니다. 상황판단이 틀린 것도 아니었습니다. 실제 가나안 땅에 살고 있는 원주민들은 거인들이고 용맹스러웠고 전쟁에 대비하여 튼튼한 성벽을 쌓고 방어할 만반의 준비를 끝내놓고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들과 맞서 싸워 이기는 일은 먼 길을 여행하며 지쳐있는 이스라엘백성의 힘으로는 가능성이 없어 보였습니다.
현실만을 보았던 정탐꾼들은 정복 불가로 결론을 내리고 '우리가 그 백성을 치지 못하리라 그들은 우리보다 강하니라' 라고 보고했습니다.
그런데 갈렙과 여호수아는 똑같이 정탐을 하고 돌아왔지만 전혀 다르게 보고합니다. "우리가 곧 올라가서 그 땅을 취하자 능히 이기리라.(30)"라고 합니다. 왜 열 사람은 가나안 정복 불가의 결론을 내세우는데 두 사람은 정복 가능을 외칩니까? 갈렙과 여호수아는 다른 사람이 보지 못한 아주 중요한 것을 보았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육안으로만 보지 않고 믿음의 눈으로 보았습니다. 열 사람은 가나안 주민과 가나안 성읍만 보았지만 갈렙과 여호수아는 그 땅을 약속으로 주신 하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14장 8절에 '여호와께서 우리를 기뻐하시면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시고 그 땅을 우리에게 주시리라 이는 과연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니라'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시고 그 땅을 주실 것을 보았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인간의 군대로 정복할 계산만 하였으나 갈렙과 여호수아는 하나님이 그 전쟁에 개입하셔서 승리를 주실 것을 바라보았습니다.
더 나아가 9절에 '다만 여호와를 거역하지는 말라 또 그 땅 백성을 두려워하지 말라 그들은 우리의 먹이라 그들의 보호자는 그들에게서 떠났고 여호와는 우리와 함께 하시느니라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 하나님이 우리 편이시다. 그러므로 두려워 할 것이 하나도 없다. 저들은 우리 밥이다. 다 차려 논 밥상 먹기만 하면 되는데 왜 두려워하고 피하느냐?는 것입니다.
인생을 살면서 육안으로 현실을 바라보면서 두려워 떨며 뒷걸음치며 사는 사람이 있고 영안으로 함께 계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사람이나 질병이나 귀신이나 환경을 두려워하지 않고 담대하게 전진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똑같은 상황에 처해서도 무엇을 보느냐?에 따라 운명은 정반대로 바뀔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군사들은 골리앗을 보고 '우리가 싸우기에는 너무나 큰 거인이다.'라며 뒷걸음질치고 숨었으나 다윗은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고 교만하여 떠드는 것을 보니 네 운명도 끝이구나! 손쉽게 이길 수 있겠구나! 하고 겁내지 않고 나가서 싸워 거꾸러트렸습니다.
오늘 신앙생활을 오래 한 사람들 중에도 믿음의 눈은 감겨 있고 육신의 눈으로만 보고 판단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두려워합니다. 낙심하고 주저앉아 울고 있습니다. 할 수 없다고 말하며 도망갈 궁리만 합니다. 불안해하며 자신의 불신앙을 다른 사람에게까지 확산시키고 있습니다. 열 명의 정탐꾼처럼 현실만 바라보고 계산하지 마십시오. 갈렙과 여호수아처럼 우리와 함께 계시고 떠나지도 버리지도 않으시는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기 바랍니다. 우리의 능력이 끝나는 그 지점에서 본격적으로 우리를 위해 일하실 하나님을 신뢰하고 하나님 크기의 일을 벌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믿음에 서서 하나님의 역사를 경험하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먼저 눈을 크게 뜨고 믿음으로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나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볼 수 있기 바랍니다. 나를 기뻐하셔서 나의 인생에 큰 계획을 세우시고 나의 앞에서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볼 수 있기 바랍니다. 나의 한계 상황에서 능력을 나타내시고 위기에서 구해주시는 하나님을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2. 나는 무엇을 듣고 있는가?
이스라엘백성들은 소수인 갈렙과 여호수아의 말을 듣기 보다는 다수인 열명의 정탐꾼의 말을 더 귀 기울여 들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그들의 영향을 받아 모세와 하나님을 원망하여 폭도로 변했습니다. 군중들은 모세와 아론을 그리고 갈렙과 여호수아를 돌을 들어 쳐 죽이려고 하였습니다. 군중들은 다수의 견해라고 해서 깊이 생각해보지도 않고 옳고 그름을 생각해보지도 않고 따랐습니다. 하나님의 뜻인가? 아닌가?를 분별하지도 않고 부정적 견해를 무조건 받아들였습니다. 믿음이 없는 보고, 그리고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는 의견을 따른 백성들은 하나님의 원수가 되어 버렸습니다.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거스르고 하나님이 예비하신 축복을 거절해 버렸습니다. 그들의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기회를 걷어차 버린 것입니다.
반면 갈렙과 여호수아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따랐습니다. 다수의 위협에도 눈치 보며 굴복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신 바가 무엇인지 깨닫고 지도자 모세의 뜻을 헤아릴 줄 알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오직 내 종 갈렙은 그 마음이 그들과 달라서 나를 온전히 좇았은즉 그의 갔던 땅으로 내가 그를 인도하여 들이리니 그 자손이 그 땅을 차지하리라"하고 인정하셨습니다. '나를 온전히 쫓았은즉'이라고 하시며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며 순종하였다고 기뻐하셨습니다.
우리의 귀에는 두 종류의 음성이 들립니다. 하나는 우리를 잘못된 길로 유혹하는 마귀의 소리이고 하나는 우리에게 참된 길을 지시하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예수님도 마귀에게 이끌리어 광야에서 시험을 받으시면서 넘어뜨리고자 유혹하는 온갖 소리들을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물리치셨습니다.
우리에게도 예수님을 유혹하던 소리들이 계속 들려올 때가 있습니다. 동시에 하나님의 말씀도 함께 들려옵니다. 아무 소리나 다 듣지 말고 그것이 미혹하는 소리인지 진리가운데로 인도하는 말씀인지 잘 분별해야 합니다. 그래서 위험한 소리가 분명하면 말씀으로 곧 물리쳐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잘못된 소리에 속아 우리의 인생을 망칠 수 있습니다. 악한 영향을 주는 부정적인 말과 불신의 말에 끌려 다니며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고 하나님을 대적하는 편에 서게 될 수 있습니다. 코앞에까지 다가온 축복을 발로 차버리고 하나님이 예비하신 큰 은혜를 상실하는 불행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아무 소리나 다 들어서는 안됩니다. 불신의 말, 부정적인 말, 악평하는 말, 원망의 말을 조심하고 경계하시기 바랍니다. 믿음의 말, 긍정적인 말, 칭찬의 말, 감사의 말, 은혜로운 말을 가려 듣는 복된 귀를 소유하시기 바랍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힘쓰시기 바랍니다.
■ 어느 시골에서 한 소년이 늘 주위 사람들에게 차가운 시선을 받았습니다. 소년의 어머니가 처녀 때 낳은 사생아였기 때문입니다. 동네 사람들은 그 소년의 아버지가 누구일까 하며 수군거렸습니다. 가까이 지내는 친구가 한 명도 없었던 소년은 학교에서도 따돌림을 당해 너무 외롭고 괴로워 견딜 수 없었습니다. 소년이 열두 살이 되었을 때 마을에 있는 교회에 목사님이 새로 부임하셨습니다. 그 목사님의 설교가 은혜롭다는 소문이 나자 소년은 설교가 듣고 싶어졌습니다. 사람들이 자기를 어떻게 대할까 하는 두려움도 있었으나 여러 번 망설인 끝에 용기를 내어 주일 아침 교회를 찾아갔습니다. 사람들의 눈을 피해 예배시간이 시작된 후에 들어가서 조용히 뒷자리에 앉았습니다. 처음에는 말씀이 귀에 잘 들어오지 않았지만 한 번 두 번 나가면서 하나님의 사랑이 가슴에 와 닿았습니다. 소년은 주일만 되면 발길이 교회로 닿았습니다. 소년은 점차 하나님 아버지께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 늦게 가서 뒷자리에 앉았다가 예배가 끝나기가 무섭게 쏜살같이 돌아오곤 했습니다. 어느 날 전과 달리 예배를 마치고 조금 늦게 어른들 사이에 숨어 예배당을 빠져 나오는데 누가 소년의 어깨를 잡으며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넌 누구냐? 누구의 아들이지?" 돌아보니 목사님이 자기를 내려다보고 있었습니다. 목사님은 곧 이어 사랑이 가득한 음성으로 말씀하셨습니다. "아! 네 얼굴을 보니 누굴 닮았는지 알겠구나. 네 아버지는 하나님이시지!" 이 소년은 목사님의 이 따뜻한 말 한 마디를 통해 변화되었고 인생이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이 소년의 이름은 벤 후퍼입니다. 그는 미국 테네시 주에서 주지사로 두 번이나 당선되었고 사회와 교회에 아름다운 삶의 본을 남겼습니다. 후에 그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주일 예배 후 목사님께서 제게 하신 그 한 마디가 저의 인생을 완전히 바꾸어놓았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 성령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고 믿음의 말을 잘 가려 듣고 따르게 되어 견고한 믿음에 서기를 축원합니다.
3. 나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열 명의 정탐꾼의 영향으로 이스라엘백성은 우왕좌왕하게 되었습니다. 그 중에서도 가장 큰 문제는 그들의 목적지를 잃어버린 것입니다. 그들이 광야로 나온 목적은 오직 하나입니다.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들어가기 위해서입니다.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려고 애굽에서 나왔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땅을 축복으로 조상 아브라함에게 주셨고 후손인 그들에게 주셨다고 믿었습니다. 그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나라를 건설하는 것이 소망이었습니다. 오로지 그 땅에 들어가려는 목표로 거기까지 왔는데 목표를 상실했습니다. 갑자기 목적지를 잃어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애굽으로 돌아가자"하며 과거로 회귀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왜 이스라엘백성이 어디로 가야 할지 알지 못하게 되었습니까? 하나님의 뜻과 상관없이 과거로 돌아가려고 갑작스레 목적지를 변경하려고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보아야 할 것을 보지 못하고 들어야 할 것을 듣지 못하여 두려움이 앞서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가나안 정복은 도저히 불가능하게 여겨졌습니다. 이제 그들은 낙심하고 하나님의 약속도 포기하였습니다. 목적지를 잃어버리고 광야에서 영원히 미아가 될 것을 생각하니 불안해졌습니다.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이 애굽이었습니다. '차라리 애굽이라도 돌아가자.'
여러분에게 인생의 목표가 있습니까? 목적지가 뚜렷하고 나아가는 분명한 방향이 있습니까? 자신이 어디로 가는지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저 되는대로 방향도 없이 목표도 없이 여기도 기웃, 저기도 기웃, 바람 부는 대로 물결이 흐르는 대로 시대의 조류에 따라 사는 사람이 적지 않습니다. 우리는 분명한 목적지가 있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한 방향으로 계속 나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약속의 땅을 향해 나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천성을 향해 전진하는 사람들입니다. 과거에 사로잡혀 옛날을 회상하며 옛날로 되돌아가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18세기초 영국에 윌리엄 캐리라는 행상인이 있었습니다. 소달구지에 물건을 싣고 이 동네 저 동네 다니면서 팔면서 기회 있는 대로 주머니에서 지도를 꺼내 보여주었습니다. 누더기가 된 세계지도를 보여주며 말하기를 "나는 먼 나라에 가서 복음을 전하겠습니다. 그것이 나의 평생 소원입니다."하고 신이 나서 말했습니다. 사람들은 그를 미친 사람취급을 했습니다. 엉뚱한 공상가라고 빈정거렸습니다. 후에 그 윌리엄 캐리는 인도에 가서 성공적으로 선교하였습니다. 현대 선교의 아버지라고 사람들은 그를 부릅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입니다. 비전이 있고 목표가 분명해야 성취할 수 있습니다.
위기 앞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약속의 땅을 소망하며 목표를 바꾸지 않은 갈렙과 여호수아 만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 그 땅을 차지할 수 있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아무도 광야에 들어가지 못하고 40년동안 광야에 머무르며 죽기를 기다려야만 했습니다. 그들은 살았다는 이름은 있었으나 죽은 자들이었습니다. 방향을 잃어버리고 목표를 잃어버린 사람은 살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숨을 쉰다고 다 살아있는 것이 아닙니다. 아름다운 꿈을 품고 살며 끊임없이 도전하여 성취하는 사람이 살아있는 사람입니다.
여러분은 어디로 가고 있습니까? 여러분도 아름다운 약속의 땅을 향해 나아가고 있습니까? 장애물이 가로막아도 포기하지 않고 전진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이 도와주시고 일하실 것을 확신하며 물러서지 않고 뒤를 돌아보며 돌아갈 궁리를 하지 않고 한 방향으로 나아가십니까?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예수님도 질문하십니다. 너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우리도 자신에게 질문해야 합니다. 나는 지금 무엇을 보는가? 나는 지금 무엇을 듣는가? 나는 지금 어디로 가는가? 그 질문을 통해 여러분 자신을 계속 믿음의 길로 교정하며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기를 축원합니다.
10 대 2
민 13:25 / 조상호 목사
어떤 아버지가 아들에게 심부름을 시켰습니다. “목욕탕에 가서 사람들이 얼마나 있는지 보고 오렴.” 아들은 목욕탕에 갔습니다. 그런데 목욕탕 앞 땅 바닥에 끝이 뾰족한 돌멩이 하나가 박혀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목욕탕에 들어가고 나오면서 그 돌에 걸려 넘어져 무릎이 깨지기도 하고, 넘어지지는 않더라도 그 돌에 걸려 넘어질 뻔 하는 등 어려움을 겪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누구 하나 그 돌을 치우지 않았습니다. 그것을 본 아들은 한심하다는 생각이 들어 “누가 치우는지 봐야지” 하는 마음으로 목욕탕 앞에서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스무 명이 넘는 사람들이 목욕탕으로 들어갔지만, 한결같이 그 돌멩이에 계속해서 걸려 넘어진 후, “에잇, 빌어먹을! 도대체 누가 여기에 돌멩이를 놔둔 거야?”라고 화를 내는 것이었습니다. 이 아들이 한참 동안 앉아서 이러한 광경을 보다가 전혀 다른 반응을 보이는 사람을 드디어 목격하게 되었습니다. 그 사람 역시 돌멩이 걸려 넘어졌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은 “왜 돌이 이런 곳에 박혀 있담!”라고 말하더니 단숨에 그 돌을 빼냈습니다. 그 모습을 본 아들은 목욕탕에 있는 사람의 수를 헤아리지도 않은 채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기다리고 있던 아버지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버지, 지금 목욕탕엔 한 사람밖에 없던데요.” 아버지는 “잘 됐구나! 지금 목욕탕에 가자.” 아버지는 아들과 함께 목욕탕에 갔습니다. 그런데 웬걸, 한 사람밖에 없다고 하던 목욕탕에 사람들로 북적대어 발 디딜 큼도 없었습니다. 아버지는 화를 내며 “이 녀석아, 이게 한 명이냐?”라고 말하자, 아들이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아니에요. 아버지, 바로 전까지 목욕탕 앞에 뾰족한 돌멩이가 하나 있어 사람들이 걸려 넘어지고 다치곤 했는데. 아무도 그 돌멩이를 치우지 않았거든요. 그런데 그 돌멩이를 치우고 들어간 사람은 단 한 명뿐이었어요. 제 눈에는 오직 그 사람만이 사람다운 사람처럼 보여서 그렇게 말씀드린 거예요.”
저는 이 이야기가 매우 의미 있는 이야기라고 생각합니다. ‘사람은 많지만, 사람다운 사람은 한 사람밖에 없다‘는 아들의 이 말이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사람'이라는 단어에 ’성도‘ 또는 ’크리스챤‘ 이라는 단어를 집어넣어도, 매우 의미 있는 이야기가 될 것입니다. ’성도는 많지만 성도다운 성도는 별로 없다‘, ’크리스챤은 많지만 크리스챤다운 크리스챤은 별로 없다‘는 말로 바꾸어서 생각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과연 성도다운 성도일까요? 우리는 과연 크리스챤다운 크리스챤일까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분명히 하나님의 사람들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사람인 것처럼 아브라함의 후손인 이스라엘 백성들 역시 하나님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하나님의 사람다운 삶을 살지는 않았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그 사실을 잘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알다시피 이스라엘 백성들은 꿈에 그리던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에 앞서 그들이 앞으로 정복해야 할 그 땅을 정탐하기 위해 각 지파별로 12명을 선발하여 보내었습니다. 과연 그 땅이 어떠한 땅인가? 그 곳에 있는 사람들과 싸워 이길 수 있을까? 이러한 것들을 정탐하도록 스파이를 보내었습니다. 드디어 40일 동안 정탐한 스파이들이 돌아와서 보고를 합니다. 먼저 10명은 이렇게 보고합니다. “그 땅 거민은 강하고 성읍은 견고하고 심히 클 뿐 아니라, 우리는 능히 올라가서 그 백성을 치지 못합니다. 그들은 우리보다 강합니다.” 이때 그들 10명과 다른 시각을 가지고 있던 두 사람이 등장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합니다. “아닙니다. 할 수 있습니다. 한번 해봅시다.” 그들과 싸워서 이길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 땅을 정복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곳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자신들의 밥이라는 것입니다. 당장 올라가서 가나안 땅을 정복하자는 것입니다. 두 사람은 열 사람과 전혀 다른 보고를 했습니다. 이것을 뭐라고 하는 줄 아십니까? <시각차>라고 합니다. 제가 자주 소개한 구두 세일즈맨 이야기를 기억하는 분이 많으실 것입니다.
어느 구두 세일즈맨이 구두 판매 시장을 조사하기 위하여 아프리카의 어느 부족을 방문하였습니다. 그는 그 부족 사람들이 모두 맨발이라는 사실에 놀라움을 금치 못하고 국내 본사에 이런 전문을 보냈습니다. "구두 주문 취소. 이 마을에는 구두시장 가능성 전혀 없음." 후에 다른 판매원이 동일한 부족을 찾아갔습니다. 가자마자 그는 즉시 본사에 이런 전문을 보냈습니다. "구두 주문 곱절로. 이 마을에는 구두시장 가능성 무한함."
두 세일즈맨이 똑같은 곳을 다녀왔지만, 이처럼 상반된 보고를 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시각차이 때문입니다. 본문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열 두 사람은 똑같은 땅을 보고 왔습니다. 똑같은 사람들을 보고 왔습니다. 똑같은 기간 동안 보고 왔습니다. 그러나 여호수아와 갈렙 두 사람과 10명의 다른 정탐꾼들은 전혀 다른 보고를 했습니다. 그 이유는 보는 시각이 전혀 달랐기 때문입니다.
(1) 10명의 정탐꾼
먼저 10명의 정탐꾼들은 어떠한 시각을 가지고 있었습니까? 불신앙의 시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불신앙의 시각을 가지고 “안 됩니다. 불가능합니다. 어렵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지금 이 열명의 정탐꾼들이 어떤 사람들입니까? 이스라엘 백성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이 선택한, 하나님의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역사를 경험한 사람들입니다. 처음 난 장남들이 다 죽어가는 애굽 사람들과 달리, 자신들의 장남들은 죽지 않고 애굽에서 탈출한 경험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기적적인 방법으로 홍해 바다를 육지처럼 건너 가나안 땅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 하나님의 백성들입니다. 마라의 쓴 물이 단 물로 바뀌는 기적을 체험한 하나님의 사람들입니다. 아침과 저녁으로 만나와 메추라기를 통해 배고픔을 해결하고, 항상 불기둥과 구름기둥의 보호와 인도를 받고 있는 하나님의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이방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알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에 대해서 배운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한 사람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에게는 믿음이 없었습니다. 14장 11절을 보면 그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이 백성이 어느 때까지 나를 멸시하겠느냐 내가 그들 중에 모든 이적을 행한 것도 생각하지 아니하고 어느 때까지 나를 믿지 않겠느냐“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들이었지만, 그들에게는 믿음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의 사람들이었지만, 신앙의 눈이 아닌 불신앙의 눈으로 보았습니다.
두 사람이 감옥에 들어갔습니다. 한 사람은 창문 너머의 푸른 하늘을 보았습니다. 다른 한 사람은 창문 너머의 진흙탕을 보았습니다. 한 사람은 하늘의 별과 달을 보았고, 해를 보면서 시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다른 한 사람은 진흙탕을 보면서 원망을 하고 불평하기 시작했습니다.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우리의 인생이 달라집니다. 사실 우리 인생에 있어서 ‘무엇을 보느냐’ 보다 ‘어떻게 보느냐’가 더 중요합니다. ‘어떠한 것이 앞에 놓여 있느냐’ 보다, ‘어떠한 시각으로 앞에 있는 것을 보느냐’가 더 중요합니다. 10명의 정탐꾼들은 하나님의 사람들이었지만, 불신앙의 눈으로 보았습니다. 25절부터 28절까지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사십 일 동안에 땅을 탐지하기를 마치고 돌아와 바란 광야 가데스에 이르러 모세와 아론과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에게 나아와 그들에게 회보하고 그 땅 실과를 보이고 모세에게 보고하여 가로되 당신이 우리를 보낸 땅에 간즉 과연 젖과 꿀이 그 땅에 흐르고 이것은 그 땅의 실과니이다. 그러나 그 땅 거민은 강하고 성읍은 견고하고 심히 클 뿐 아니라 거기서 아낙 자손을 보았으며” 여기에서 우리가 눈여겨 보아여 할 접속사가 하나 있습니다. ‘그러나’라는 단어입니다. ‘그러나’라는 말은 앞에 서술하고 있는 말을 돌이키며 상황을 전환할 때, 사용하는 접속사가 아닙니까? 그러니까 40일 동안 정탐하고 난 10명의 정탐꾼들은 ‘과연 그 땅은 젖과 꿀이 흐르는 기가 막힌 땅입니다. 이것을 보십시오. 이것이 바로 그 곳에서 가져온 과일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말한 것입니다. 가나안 땅이 기름진 땅이기 때문에 농사짓기도 좋고 살기도 좋으나 그러나 가나안 사람들을 이기는 것은 어렵다는 것입니다. 그 땅이 하나님께서 약속하신대로 젖과 꿀이 흐르는 낙원과 같은 곳이지만, 그러나 그 땅을 정복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10명의 정탐꾼들은 <그러나>를 들먹이며 스스로 <그러나>의 올가미에 묶여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어떻습니까? 여러분들도 10명의 정탐꾼들처럼 <그러나>라는 올가미에 묶여 있지 않습니까? 부정적인 말로 스스로 한계를 지어놓고 있지 않습니까?
1807년 미국 뉴욕의 허드슨강에 커다란 증기선 한 척이 떠있었습니다. 그것을 바라보던 어떤 사람이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저 배가 움직이는 것은 불가능해. 불가능해! 불가능해!” 그런데 웬걸 그 큰 배가 움직이기 시작하니까 그 사람이 다시 이렇게 말하더랍니다. “저 배를 정지시키는 것은 불가능해. 불가능해! 불가능해!” 불가능하다는 생각을 가진 사람은 무엇을 보든지 전부 불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불가능하다는 눈을 가진 사람은 무엇을 보든지 전부 불가능하다고 봅니다. 본문에 나오는 10명의 정탐꾼들은 가나안 땅을 긍정적인 눈이 아닌 부정적인 눈으로 보았습니다. 믿음의 눈이 아닌 불신앙의 눈으로 보았습니다. 그러다보니 어떻게 되었습니까?
1) 악평을 함
첫 번째로 그들은 악평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가나안 땅을 정복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라고 열을 내며 외치던 10명의 정탐꾼들을 향해 ‘정확하게 판단했다, 일리 있는 관찰이었다‘고 말씀하고 있지 않습니다. 악평을 하였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32절을 보겠습니다.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그 탐지한 땅을 악평하여 가로되 우리가 두루 다니며 탐지한 땅은 그 거민을 삼키는 땅이요 거기서 본 모든 백성은 신장이 장대한 자들이며” 10명의 정탐꾼들은 가나안 땅은 사람이 살만한 땅이 못되고, 오히려 사람을 삼키는 땅이라고 악평을 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자원과 능력만을 가지고 계산을 했을 뿐, 하나님을 계산에 넣지 않았습니다. 그러다보니 악평을 하게 된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믿음 없는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면 악평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불신앙의 눈으로 세상을 보면 비판만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조금만 더워도 “아니 뉴질랜드가 춥다고 하더니 왜 이렇게 더운 거야?”라고 악평을 하고, 조그만 추워도 “아니 뉴질랜드가 지상에서 마지막 남은 천국이라고 하더니 날씨가 왜 이래. 이러다가 얼어 죽겠네.” 라고 불평을 합니다. 그래서 그 사람의 입에서 나오는 말을 보면 그 사람이 믿음의 사람인지 아닌지를 알 수 있습니다. 믿음 없는 사람은 입만 열면 악평과 비판하는 특징이 있습니다. 그러나 믿음의 사람의 특징은 입만 열면 하나님께 찬양하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고, 다른 사람들을 격려하는 특징이 있습니다. 지금은 한국으로 귀국하여 이곳에 계시지 않지만, 뉴질랜드에 처음 도착하고 나서 날마다 남편을 원망하고 불평하고 살던 모 자매님이 있었습니다. 그 자매님 말에 의하면 등 떼밀어 자녀를 위해 유학을 가라고 한 남편에게, 밤마다 전화해서 있는 욕, 없는 욕을 바가지로 해대었다고 합니다. 나중에는 심한 우울증에 걸려 대인기피증이 생겨, 죽고 싶은 마음까지 들었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우리 교회에 전도되어 와서 새가족 모임과 개인양육을 마치고 나서 이렇게 고백하는 것이었습니다. “목사님, 저는 정말 감사할 것밖에 없어요. 남들은 뉴질랜드에 오고 싶어도 오지 못하는데, 우리 남편이 유학 다녀오라고 보내주고, 얼마나 감사한지 몰라요.”그 자매님에게 환경과 상황이 하나도 바뀌지 않았습니다. 전과 똑같습니다. 아니 한국을 떠나온 지 더 오래되었기 때문에 한국에 가고 싶은 마음이 더 생겼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그 자매님에게 믿음이 생기자 입술의 고백의 바뀐 것입니다. 그 자매님에게 믿음의 눈이 생긴 것입니다.
이처럼 믿음의 눈이 생기면 삶이 변화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10명의 정탐꾼들과 같은 불신앙의 눈이 아닌, 믿음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세상적인 시각으로 악평을 일삼지 말고 믿음의 시각으로 감사하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악평과 비판만 일삼는 열 명의 정탐꾼들이 아닌, 하나님께 찬양하며 감사하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자학을 함
믿음의 눈이 아닌 불신앙의 눈으로 가나안을 땅을 보니까 둘째로 자학을 하게 되었습니다. 33절을 보겠습니다. “거기서 또 네피림 후손 아낙 자손 대장부들을 보았나니 우리는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으니 그들의 보기에도 그와 같았을 것이니라.” 스스로 보기에 자신들은 들판에 있는 메뚜기 같이 초라한 존재라고 생각했습니다. 완벽한 열등감에 사로잡혔습니다. 우리 주위에도 열등감에 사로잡혀 스스로 자학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교회에 다니며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외모 때문에, 가정 형편 때문에, 배우지 못한 것 때문에, 과거의 아픈 상처 때문에 스스로 올가미에 매여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나 같은 사람이 할 수 있는 것이 뭐가 있다고? 뭐 내 주제에 뭐한다고? 나는 해보나 마나에요.”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러한 사람들이 바로 스스로 메뚜기 정신으로 무장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 인생이 말대로 되어간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입술에서 나온 말대로 우리의 삶이 진행된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여러분! 자학하는 말은 아예 입 밖에도 내지 말기를 바랍니다. 농담이라도 열등감에 관계되는 말을 꺼내지도 말기를 바랍니다.
교수로서, 저명한 상담학자로서, 또한 저술가로서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쳤던 헨리 나우웬(Henri J. Nouwen)은 <이는 내 사랑하는 자요>라는 책에서 세상이 우리를 보는 눈과 하나님께서 우리를 보시는 눈이 근본적으로 다르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걸작품으로 평가합니다만, 세상은 우리를 별 가치 없는 존재라고 평가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무한한 가능성을 지닌 존재라고 생각하시지만, 세상은 우리가 도저히 가망 없는 존재라는 메뚜기 정신을 끊임없이 주고 있습니다. “너는 별 볼일 없는 존재야. 네 까짓 게 뭐한다고 그래. 너는 이 땅에 잘못 태어났어.” 그러나 예수 믿는 사람과 세상 사람들과 차이를 알아야 합니다. 그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가치관의 차이입니다. 본 훼퍼는 이렇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이란 그리스도 안에서 나를 발견하는 사람이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의 렌즈를 가지고 자기를 보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라는 렌즈를 가지고 자기 자신을 발견하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적인 가치관으로 여러분을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하늘나라의 가치관으로 여러분들을 판단하기를 바랍니다. 세상적인 기준을 가지고 자신을 바라보지 말고 주님의 시각으로 자신을 바라보기를 바랍니다.
3) 전염이 됨
부정적이고 불신앙적인 시각은 전염병처럼 온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퍼져갔습니다. 14장 1절부터 3절을 보겠습니다. “온 회중이 소리를 높여 부르짖으며 밤새도록 백성이 곡하였더라. 이스라엘 자손이 다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며 온 회중이 그들에게 이르되 우리가 애굽 땅에서 죽었거나 이 광야에서 죽었더면 좋았을 것을, 어찌하여 여호와가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칼에 망하게 하려 하는고 우리 처자가 사로잡히리니 애굽으로 돌아가는 것이 낫지 아니하랴” 10명의 정탐꾼들의 보고를 들은 온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와 아론을 향해서 차라리 애굽 땅이나 광야에서 죽었더라면 더 좋았을 것이라고 원망을 하였습니다. 이렇게 될 것이라면 차라리 애굽에서 종살이 하는 것이 나았을 텐데, 왜 이곳까지 데려와서 가나안 사람들의 칼에 망하게 하느냐고 하나님께 따집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또 하나가 있습니다. 부정적인 것은 전염이 빠르다는 것입니다. 마치 전염병이 이곳, 저곳, 이 사람, 저 사람에게 전염되는 것처럼 부정적인 것은 다른 사람들에게 쉽게 전염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사람을 사귈 때, 먼저 그 사람이 부정적인 사람인지 아닌지를 판단해야 합니다. 우리 자녀가 친구를 사귈 때, 부정적인 친구를 만나고 있는지를 잘 점검해야 합니다.
미국에서 가장 존경을 받는 인물 중에 한 사람은 다름 아닌 에브라함 링컨 전 미국 대통령입니다. 그가 어릴 때 그의 어머니가 항상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부정적인 사람과는 상종도 하지 말라! 그들은 병균이다.”
부정적인 사람은 병균이라는 것입니다. 부정적인 사람들은 그 부정적인 생각을 다른 사람에게도 오염시키기 때문에 병균이라는 것입니다. 온 이스라엘 백성들은 10명의 부정적인 사람들로 인해, 부정적인 색깔로 염색되어 그들 역시 부정적인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원망을 마구 퍼부었습니다. 그 결과 그들은 단 한명도 가나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광야에서 죽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원망하는 이들을 보시고, 하루를 1년으로 기준하여 40일 정탐을 40년으로 계산하여 광야에서 방황하게 하셨습니다. 11일이면 충분히 갈 수 있는 길임에도 40년을 방황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에 입성하여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가나안의 축복을 누리지 못한 채, 광야에서 다 죽고 말았습니다. 그러므로 입술의 중요성을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들의 입술이 원망과 불평과 부정적인 입술이 아니라, 감사와 찬양과 격려의 입술이 되기를 바랍니다. 여러분들을 망하게 하는 부정적인 사람 대신, 긍정적인 사람, 믿음의 사람, 입술에 열매가 있는 사람들을 가까이 하시기를 바랍니다.
(2) 2명의 정탐꾼
둘째로 본문에서 우리는 10명의 정탐꾼들과 다른 두 사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여호수아와 갈렙입니다. 이 두 사람도 사실은 다른 열 명의 정탐꾼들과 함께 똑같은 기간 동안 똑같은 상황을 보고 왔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고백은 10명의 정탐꾼들과 완전히 달랐습니다. 10명의 정탐꾼들이 메뚜기 정신으로 무장한 후, “우리는 그들을 결코 이길 수 없습니다. 그들과 싸워 보았자 질 것이 뻔합니다. 해보나마나입니다. 애굽으로 돌아갑시다.”라고 말한데 반해, 여호수아와 갈렙 두 사람은 전혀 다른 반응을 보였습니다. 14장 7절부터 9절까지 말씀을 보겠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에 일러 가로되 우리가 두루 다니며 탐지한 땅은 심히 아름다운 땅이라. 여호와께서 우리를 기뻐하시면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시고 그 땅을 우리에게 주시리라. 이는 과연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니라. 오직 여호와를 거역하지 말라. 또 그 땅 백성을 두려워하지 말라. 그들은 우리 밥이라. 그들의 보호자는 그들에게서 떠났고 여호와는 우리와 함께 하시느니라. 그들을 두려워 말라.” 인간의 눈으로 바라볼 때는 황량한 사막이었지만, 하나님의 눈으로 바라보자 그곳이 젖과 꿀이 흐르는 아름다운 땅으로 바뀌었습니다. 세상적인 눈으로 바라볼 때는 그 땅을 결코 정복할 수 없다고 생각했었지만, 영적인 눈으로 바라보자 그 땅을 정복하는 일은 너무나도 쉬운 일이었습니다. 불신앙의 눈으로 바라볼 때는 거인과 같은 가나안 거민들만 보였지만,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자 하나님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그 동안 하나님을 계산에서 제외시켰던 그들이 이제는 하나님을 계산에 넣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어떻게 되었습니까?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 아무리 그들이 거인과 같은 사람들이라 할지라도 우리는 그들을 능히 이길 수 있다‘는 답이 나왔습니다. 인간적인 계산을 할 때는 ’도저히 승산 없음‘이라는 결론이 나왔지만, 믿음으로 하나님을 계산에 포함시키자 ’능히 이길 수 있음‘이라는 완전히 다른 결론이 나왔습니다.
여러분! 여러분들은 어떻습니까? 혹시 10명의 정탐꾼들처럼 하나님을 제외한 채 계산을 하고 있지 않습니까? 아니면 여호수아와 갈렙처럼 하나님을 여러분들의 계산에 넣고 있습니까? 십자가는 우리 기독교의 상징입니다. 십자가는 더하기입니다. 우리 인생 가운데 하나님을 더하면 우리의 인생이 달라집니다.
일본의 뇌성마비 시인 미즈노 겐조라는 시인이 있습니다. 그는 입과 눈알만 움직이고 온 몸을 조금도 꼼짝할 수 없는 불구의 몸을 가진 사람입니다. 그가 눈짓으로 혹은 입술로 아이우에오를 짚어가며 쓴 시집이 있습니다. <네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일본에서는 그가 지은 대부분의 시에 곡을 부쳐 복음성가 가수들이 노래를 불렀다고 합니다. 한국어로도 번역되어 무려 10판을 거듭 인쇄하여, 일본 사람이 쓴 시집으로 보기 드물게 24,000부 이상이 팔렸다고 합니다. 그가 최근에 이러한 고백을 했습니다. “사랑 많으신 아버지 하나님은 -(마이너스)를 +(플러스)로 바꾸는 능력의 하나님이시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생을 플러스로 바꾸는 능력의 하나님이신 줄로 믿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우리의 인생에 더하면 우리의 인생이 달라질 줄로 믿습니다. 캐나다에 가면 세인트로렌스라는 강이 있다고 합니다. 어느 겨울, 어떤 사람이 그 강을 건너기 위해 얼어붙은 강 앞에 서서 고민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이 강이 얼마나 단단하게 얼어붙었는지 확신이 없어, 무릎을 꿇고 기어가다시피 하며 건너기 시작했습니다. 그가 두려워 벌벌 떨며 간신히 얼어붙은 강 한복판에 이르렀을 때, 뒤에서 갑자기 무슨 소리가 들렸습니다. 뒤를 돌아보니, 두 마리의 말이 끌고 있는 마차가 자기 곁을 휙 지나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그 순간 무릎으로 벌벌 떨면서 기어온 자기 자신이 너무 부끄러웠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처럼 믿음이 없는 사람은 불안하고 초조한 인생을 살겠지만, 믿음이 있는 사람은 부유한 인생을 살게 됩니다.
그러므로 여호수아와 갈렙처럼 불신앙의 안경을 벗어버리고 믿음의 안경을 쓰고 세상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불투명했던 미래가 바로 여러분들의 밥으로 보일 것입니다. 밥은 클수록 좋습니다. 밥이 강하면 얼마나 강하겠습니까? 여러분! 밥이 크다고 밥그릇 끌어 앉고 징징 짜며 우는 사람 보았습니까? 밥이 무서워서 두려워하는 사람을 본 적이 있습니까? 오랫동안 굶고 있다가 밥을 주니까 너무 감격해서 우는 거지를 옛날 시골에서 본 적은 있어도, 이 날 이 때까지 저는 밥이 무서워 우는 사람을 본 적은 없습니다. 밥을 먹다가 도저히 못 먹겠으면 남기면 그만입니다. 그런데도 10명의 정탐꾼들은 먹어 치워야 할 밥을 보고 두려워 떤 반면, 여호수아와 갈렙 두 사람은 “그들을 두려워 말라. 그들은 우리의 밥이다.”라고 큰 소리쳤습니다. 무엇이 그들로 하여금 이렇게 고백하게 만들었습니까? 안경 때문입니다. 열 사람은 불신앙의 안경을 쓰고 보았던 반면, 여호수아와 갈렙 두 사람은 믿음의 안경을 쓰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두 사람은 불신앙의 안경을 벗어버리고 믿음의 안경을 쓰고 가나안 사람들을 바라보니까 그들이 밥으로 보인 것입니다. 결국 여호수아와 갈렙 두 사람은 다른 10명의 정탐꾼들과 달리, 온전히 하나님을 좋았기 때문에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는 축복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들은 어떻습니까? 불신앙의 안경을 쓰고 보았던 10명의 정탐꾼과 같은 사람입니까? 아니면 믿음의 안경을 쓰고 보았던 두 명의 정탐꾼과 같은 사람입니까? 10명의 정탐꾼과 같이 하나님을 제외한 채 계산을 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여호수아와 갈렙처럼 하나님을 여러분들의 계산에 넣고 있습니까? 여러분들은 가나안의 거민들만 보고 스스로 “우리는 메뚜기와 같은 존재입니다”라고 말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나와 함께 하시는, 나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을 바라보고 “그들은 우리의 밥입니다. 올라가서 먹어버립시다.”라고 말하고 있습니까?
저는 오늘 한 가지 이야기를 소개하고 말씀을 마칠까 합니다. 목수 일을 하는 한 아버지가 어느 날 아들에게 못질하는 법을 가르치고 있었습니다. “얘야, 못질을 잘 하려면 못에 네 시선을 고정시켜야 한단다. 그러면 점차 못만 크게 부각되어 보일 거야. 그러나 만일, 못에 시선을 고정시키지 못해 손등이나 손가락이 시야에 들어오게 되면 십중팔구 네 손에 든 망치가 네 손을 내려치게 될 거야.”
매우 의미 있는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목표에 집중할 때, 비로소 그 목표를 달성할 수 있다는 교훈입니다. 우리 인생에는 크고 작은 목표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중에는 비본질적인 목표들이 많이 있습니다. 돈이나 권력이나 인기나 명예 등이 우리 인생에 있어서 필요한 것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그러한 것들이 본질적인 목표가 될 수 없습니다. 우리 인생에 있어서 본질적인 목표는 따로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분이 우리의 작음 신응에도 응답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여호수아와 갈렙 두 사람처럼 세상의 어떠한 것보다도 항상 주님을 여러분들의 계산에 넣고 살아가는 2004년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새해에는 여호수아와 갈렙 두 사람처럼 세상의 어떠한 것보다도 항상 주님을 바라보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미래지향적인 삶(믿음으로 사는 삶)
민수기 13장 25절 - 14장 3절 / 김우생 목사
본문 말씀 민수기 13장의 33절 하반절에서 "우리는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으니 그들의 보기에도 그와 같았을 것이니라" 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시간 "메뚜기 콤플렉스를 벗어버리자"라는 주제를 가지고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다른 말로 표현한다면 "미래 지향적인 믿음을 가지고 살자"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기억력 상실증에 걸린 한 사람이 의사를 찾아갔습니다. 의사는 그를 진찰한 후 그에게 이렇게 질문을 했습니다. "당신의 기억력을 회복시키려면 당신의 시력을 손상시키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선택해야만 하는데 당신은 어느 것을 원하십니까?" 만약에 이것이 여러분의 경우라면 기억하기를 원하십니까? 아니면 보기를 원하십니까? 이 환자는 한참 생각한 후에 "나는 기억력보다는 시력을 원합니다. 왜냐하면 내가 지나온 것을 기억하기보다는 내가 앞으로 가야할 곳을 보기 원하기 때문입니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이 이야기가 우리에게 연상시켜주는 것이 있습니다. 현시점에서 우리의 미래가 우리의 과거보다 더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과거는 이미 지나온 길이요, 닫힌 것인 반면에 미래는 새로운 가능성을 위하여 활짝 열려있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단지 우리가 과거의 성공이나 과거의 실패에 매여 있다면 미래에 의미 있는 삶을 살 수 없을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에 있는 성도에게 빌립보서 3장 13-14절에서 "...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기를 원했습니다. 그는 뒤에 있는 것에 의하여 영향받기를 원치 않았고, 뒤에 있는 성공 때문에 교만하기를 원하지 않았으며, 뒤에 있는 실패 때문에 좌절하고 낙망하기를 원치 않았습니다. 사도 바울은 앞에 있는 푯대를 향하여 좇아가는 미래지향적인 믿음의 삶을 살았던 사람입니다. 이런 바울의 삶은 우리에게 엄청난 도전을 줍니다.
그러면 우리들의 삶에 큰 장애나 어려움이 닥쳐왔을 때 과연 우리들은 어떻게 하면 미래 지향적인 삶을 살아갈 수 있을까 하는 사실을 본문의 말씀을 통하여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Ⅰ. 생활의 모든 면에서 의식적으로
하나님을 포함시키라
본문의 말씀을 보면 모세는 가데스 바네아에서 이스라엘의 각 지파로부터 한 명씩 택하여 열두 명의 정탐꾼을 가나안 땅에 보냈습니다. 아마도 각 지파에서 선출한 정탐꾼은 그 지파에서 지도력이 있고 통찰력이 있고 뛰어난 사람들이었을 것입니다. 저들은 가서 정탐을 하고 돌아왔습니다. 그들은 그 땅이 진정 하나님의 약속처럼 젖과 꿀이 흐르는 풍성한 땅이었다고 말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열두 명중 열 명은 "여기에 들어가면은 실패할 것이다"라는 현실론을 주장하며 두려움에 떨었습니다. 다수가 그 주장을 선택했습니다. 민수기 13장 27절에서 "과연 젖과 꿀이 그 땅에 흐르고 이것은 그 땅의 실과니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들은 그 땅에 젖과 꿀이 흐른다는 사실에는 모두 동의하였습니다. 그것을 증명하는 실과를 가지고 오기도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였습니다. 그런데 28절에 "그러나"로 시작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신 대로 그것은 사실이지만"이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어떤 일을 할 때 "성경의 말씀은 사실이지만 현실은 어찌 그렇습니까?"라고 하는 대표적인 불신앙을 나타내 보이는 모습입니다. 이들 대부분은 그들의 삶 속에서 하나님을 배재시키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대로 이루실 것이라는 믿음이 흔들리고 현실론자로서 판단하고 있습니다. 정탐군들이 가나안에 와 보니까 그곳은 큰 성곽이 지어져 있고 그 사람들은 장부들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들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다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가나안 사람들 보기에도 그와 같을 것이라는 생각까지 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이것은 사실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가나안 사람들은 이스라엘을 두려워했습니다. 정탐꾼들은 그들의 삶 속에 불신앙이 생겼습니다. 그들의 불신앙은 하나님을 배제시켰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땅을 악평했을 뿐만 아니라, 자기자신에 대해서도 과소 평가하였습니다. 메뚜기 콤플렉스에 걸린 것입니다. 그런데 여호수아 2장 9-11절에서 "말하되 여호와께서 이 땅을 너희에게 주신 줄을 내가 아노라. .... 우리가 듣자 곧 마음이 녹았고 너희의 연고로 사람이 정신을 잃었나니 너희 하나님 여호와는 상천하지에 하나님이시니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가나안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홍해를 갈라주신 일 때문에 그들의 마음이 녹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어떤 하나님의 일을 하려고 할 때 어려운 일에 봉착할 경우가 있습니다. 그럴 때 하나님을 전혀 고려치 않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어느 정도인가, 내가 능한가, 내가 가진 것이 무엇인가"에 매이는 현실론자가 되어버려서 하나님이 하실 수 있는 일은 전혀 배제시켜 버리게 됩니다. 그 결과는 실패가 불가피하게 됩니다. 즉 이스라엘 백성들이 사십 년 동안 광야 생활을 했던 것처럼 우왕좌왕하면서 풍성한 그리스도인의 삶을 이루지 못하게 합니다. 이것은 불신앙 때문입니다. 반면에 갈렙과 여호수아는 민수기 13장 30절에서 "... 우리가 올라가서 그 땅을 취하자 능히 이기리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하시면 능치 못할 일이 없다는 믿음의 눈으로 보고 왔습니다. 하나님을 포함시킨 보고를 한 것입니다. 그러나 불행히도 소수였습니다. 다수의 정탐꾼의 보고를 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저들의 불신앙이 부정적인 사고를 일으켰습니다. 그들은 부정적 사고로 시작하였습니다. 그리고 저들은 상황을 과장시켰습니다. 어떤 문제가 있을 때 하나님께 의뢰하지 않는 그리스도인은 문제를 확대시키고 왜곡합니다. 두 사람의 긍정적인 보고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열 명의 부정적인 보고로 인하여 불가능한 사실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부정적인 불신앙은 전염성이 강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민수기 14장 1장에서 "온 회중이 소리를 높여 부르짖으며 밤새도록 백성이 곡하였더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부정적인 태도는 엄청난 전염성이 있고 사람들을 낙망시킵니다. 그리고 민수기 14장 2절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와 아론을 원망합니다. 차라리 애굽 땅에서 나오지 않았으면 좋았을 것을, 차라리 광야에서 죽었으며 좋았을 것을 하면서 이제 차라리 세상으로 돌아가기를 원합니다. 구약에서 애굽은 세상을 나타냅니다. 이들은 믿음과 세상사이에서 끊임없이 방황하고 있습니다. 목표를 지척에 두고 돌아가자고 합니다. 그리고 민수기 14장 44-45절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루밤 사이에 또 변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노하셨습니다. 그들의 삶 속에 하나님을 포함하지 않았던 불신앙 때문이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하실 수 있다고 하는 믿음을 그들은 구사하지 않았습니다.
성경에서 골리앗과 다윗을 자연적인 현상으로 비교해 보면 골리앗이 당연히 이길 것이지만 다윗이 이겼습니다. 또한 기드온과 미디안 사이의 전쟁에서도 동일하게 미디안이 숫적으로 강했지만 기드온이 이겼습니다. 또한 제자들이 갈릴리 호수를 지나게 되었을 때 강풍 앞에서 속수무책이었지만 저들이 강풍을 뚫고 건널 수 있었던 것은 주님께서 개입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질문할 것은 우리가 과연 믿음의 삶을 살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까?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습니까? 또한 우리 가정에 인간적인 계산으로는 풀릴 수 없는 문제가 있다고 할 때, 하나님을 개입시키며 능하신 하나님께서 역사하신다는 사실을 믿으십니까? 우리들의 삶 속에 내가 정복하기 어려운 기질이 있다고 생각할 때 과연 하나님께서 역사하실 수 있다는 사실을 믿는 믿음을 구사해 보았습니까? 또는 나는 그를 사랑할 수 없고 용서할 수 없다는 생각을 가지고 자신만을 바라보지는 않았습니까? 우리는 사랑할 수도 없고 용서할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 안에는 그리스도께서 사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라는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Ⅱ. 어떻게 패배의 절룩거림을 이길 수 있는가?
결론적으로 생각하기 원하는 것은 우리가 패배하지 않고 어떻게 믿음의 길을 가면서 승리할 수 있을까하는 것입니다. 첫째로 우리는 매일 하나님의 약속을 묵상하며 주장해야 합니다. 누가복음 1장 37절에서 "대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치 못함이 없느니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과연 주님의 말씀이 능치 못함이 없다는 사실을 믿습니까? 그리고 빌립보서 4장 13절에서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목표는 궁극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닮는 것입니다. 복음을 듣지 못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함으로써 예수 그리스도를 닮는 것입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매일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그 능력을 믿으며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화하도록 해야 합니다. 둘째로 이 약속을 묵상한 후에 하나님께 감사하는 태도가 있어야 합니다. '감사하면 감사할 일이 더 생긴다'는 말이 있습니다. 성경에서 '항상 기뻐하고 쉬지 말고 기도하고 범사에 감사하라'고 말씀하고 있는데, 이것이 하나님의 뜻 가운데 사는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기도할 때도 감사함으로 나와야 합니다. 찬양과 감사로 하나님께 예배하는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시련 중에서도 감사하며 어떤 도전 중에서도 감사해야 합니다. 이것은 신뢰의 표현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믿음의 표이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 하실 것이라는 믿음의 표현이 감사함으로 나타납니다. 셋째로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에게 필요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격려입니다.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라"고 했는데 이것이 모임의 성격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영적인 전쟁을 할 때, 밖으로부터 대적하는 세력으로부터 처절한 싸움을 하는 어려운 가운데 있을 때, 격려는 그를 보호하며 그 일을 지속하게 합니다. 보혜사는 성령입니다. 그 말은 '파라클레토스', 즉 '곁에 서 있는 자', '격려해 주는 자'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위로의 아버지입니다. 이 말은 격려의 아버지란 말입니다. 예수님은 대언자란 말도 똑같은 '파라클레토스'라는 뜻입니다. 엄청난 어려움을 당하여서 낙망하기 쉬운 이 때에 필요로 하는 것은 격려자입니다. 우리는 격려자가 되어야 합니다. 한 분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나는 심령이 낙망하여 두려워 한 나머지 아무도 내가 겪는 이러한 비참한 지경에 이르기를 원치 않습니다. 개인적으로 나는 낙망의 어두운 계곡을 종종 지났습니다" 누가 이런 말을 한 줄 아십니까? 어떤 육신적인 그리스도인이 낙망에 빠져서 이와 같은 말을 한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깨닫지 못하는 초신자가 이 말을 한 것이 아닙니다. 이 말은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성경적인 설교가 중의 한 분이었던 찰스 스펄전이 한말이었습니다. 복음주의자의 태두라고 했던 A.W 토저와 같은 분도 낙심하였던 때가 있었다고 고백을 하였습니다. 그런 하나님의 사람들도 이런 경험이 있었다면 그 누구에게도 있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실패와 그의 위로가 다른 사람에게 도움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는 우리의 실패와 승리를 다름 사람에게 나눔으로 격려할 수 있습니다. 외롭고 용기를 잃은 그리스도인들을 찾으십시오. 그의 필요를 듣고 개인적인 시름도 그와 나누십시오. 사막의 오아시스와 같을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을 격려할 때 자신이 힘을 얻고 서로간의 교제는 개인적인 축복을 낳을 것입니다.
약속의 땅을 향한 로드맵
민 13:25-33 / 이동원 목사
우리 모두는 ‘루비콘 강을 건넌다’(cross the Rubicon)는 표현을 잘 알고 있습니다. BC49년 1월 유명한 줄리어스 시저(카이사르)는 갈림길에 서 있었습니다. 그것은 자신이 로마의 반역자가 되느냐, 혁명가가 되느냐는 선택이었습니다. 시저는 갈리아 지역 정복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하고 로마에 돌아가 집정관에 취임할 예정이었습니다. 그러나 시저보다 봄페이우스를 더 선호한 원로원은 그가 무장해제를 하고 돌아오도록 결정을 내립니다. 시저는 그러면 자신의 라이벌 봄페이우스와 함께 동시에 군사 지휘권을 내려놓게 해달라고 요청합니다. 그러나 원로원이 이를 최종적으로 거부하자 1월 10일 그는 1개 군단을 거느리고 갈리아 지역과 로마의 경계선상을 흐르는 루비콘 강을 건너면서 유명한 말을 남깁니다. “전우들이여, 이 강을 건너면 세상은 바뀐다. 그러나 이 강을 건너지 않으면 우리는 멸망한다. 주사위는 던져졌다. 진격하라!” 이렇게 해서 시저는 봄페이우스를 제압하고 위대한 대 로마제국의 기초를 놓게 되는 전기를 만들게 됩니다. 그래서 ‘루비콘을 건넌다’는 말은 중요한 결단을 내린다는 표현으로 쓰여지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다보면 그렇게 루비콘 강을 건너는 체험을 하게 되는 순간들을 직면하게 됩니다. 그런 소위 전환점의 시간들을 어떻게 직면하느냐에 따라 우리의 미래는 운명적으로 달라지게 됩니다. 애굽을 떠난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제 시내 산을 떠나 다베라를 거쳐 바란 광야에 들어와 바란 광야 북쪽의 변경도시 가데스 혹은 가데스 바네아에 드디어 도착합니다.(출 애굽 지도 참조) 신1:19을 보십시오.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명령하신 대로 우리가 호렙산(시내산)을 떠나 너희가 보았던 그 크고 두려운 광야(바란 광야)를 지나 아모리 족속의 산지 길로 가데스 바네아에 이른 때에” 이제 이어지는 신1:22-23에 보면 중요한 결정을 하지요. “너희가 다 내 앞으로 나아와 말하기를 우리가 사람을 우리보다 먼저 보내어 우리를 위하여 그 땅을 정탐하고 어느 길로 올라가야 할 것과 어느 성읍으로 들어가야 할 것을 우리에게 알리자 하기에 (23)내가 그 말을 좋게 여겨 너희중 각 지파에서 한 사람씩 열둘을 택하매” 그렇게 해서 가나안 땅을 정탐하기 위한 12명의 정탐을 보내게 됩니다.
오늘의 민수기 본문은 그 12명이 돌아와 보고를 하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그런데 그 보고는 여호수아와 갈렙 두 사람을 제외하고 나머지 10명은 부정적인 보고를 하게 됩니다. 10:2로 나뉘게 된 것입니다. 백성들은 다수를 따라 이제 모든 것을 포기하고 다시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저항을 하게 됩니다. 본문에 이어지는 민14:1 이하에 보면 “온 회중이 소리를 높여 부르짖으며 백성이 밤새도록 통곡하였더라--(3)어찌하여 여호와가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칼에 쓰러지게 하려 하는가 우리 처자가 사로잡히리니 애굽으로 돌아가는 것이 낫지 아니하랴” 이제 이스라엘은 출애굽이후 최대의 위기에 직면하게 됩니다. 결국 이 큰 소요와 저항 사건으로 어떤 결과가 초래됩니까? 14:33을 보십시오. “너희 자녀들은 너희 반역한 죄를 지고 너희의 시체가 광야에서 소멸되기 까지 사십년을 광야에서 방황하는 자가 되리라” 결국 여호수아와 갈렙을 제외하고 대부분이 광야에서 방황하다가 죽고 새로운 세대만이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리라는 징계를 받게 됩니다. 이 가데스의 반역 사건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중요한 두 가지 역사적 레슨을 남기게 됩니다. 이 두 가지 레슨은 무엇일까요?
1. 믿음의 레슨입니다.
저는 부정적 보고를 한 10명의 정탐의 보고가 결코 잘못된 보고만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10명은 나름대로 사실과 경험에 입각한 성실한 객관적 보고를 했을 것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 땅은 우리가 살만한 땅이 아니고 거기 사는 백성들은 우리가 상대하기 어려운 우리보다 신장이 강한 자들이라고 보고합니다. 마지막 절 33절을 보실까요? “거기서 네피림 후손인 아낙 자손의 거인들을 보았나니 우리는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으니 그들이 보기에도 그와 같을 것이니라” 여기서 ‘메뚜기 콤플렉스’라는 말이 유래하게도 됩니다. 어떤 분은 ‘거인 콤플렉스’라고 칭하기도 합니다. 상대는 거인인데 우리는 작은 메뚜기에 불과하다는 뜻이지요. 이것을 우리식으로 말하면 과거 일제 식민지 통치를 벗어난 직후 우리가 스스로를 자조적으로 비하할 때 ‘엽전’(일본 화폐에 비해서 우리 엽전의 화폐가치가 낮은데서 유래한 비하적 표현)이 무얼 하겠는가고 말한 것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왜 이들이 이렇게 패배 의식과 열등의식에 사로잡히게 되었을까요? 아직도 애굽에서 종살이하던 노예근성을 벗어나지 못한 때문일까요? 도대체 무엇이 이들의 문제이었습니까?
저는 근본 문제는 결국 믿음의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아직도 이들이 하나님을 믿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홍해를 여시던 하나님, 반석을 열어 물을 주시던 하나님, 마라의 쓴 물을 치유하시던 하나님, 하늘에서 만나를 내리시던 하나님을 아직도 믿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들만의 문제일까요? 우리는 성경의 하나님, 기적의 하나님을 믿는다고 늘 고백하지만 자신의 인생에서 다시 어려움을 경험하게 되면 오늘의 나의 어려움 앞에서는 다시 믿음 없는 사람처럼 행동하지 않습니까? 다시 믿음 없는 사람처럼 말하지 않습니까? 어제는 믿었는데 오늘은 또 다시 믿지 못하는 것입니다. 어떤 분은 이것을 신앙인의 불신앙이라고 말합니다. 아니 아직도 우리는 충분히 믿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어제만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오늘 이 순간은 더 더욱 필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롬1:17에서 복음적 삶의 본질을 어떻게 설명합니까?“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믿음의 사람으로 산다는 것은 언제 어디에서나 믿음으로 사는 것을 배워가는 것입니다.
갈렙이 그런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반응은 군중들과 아주 달랐습니다. 30절을 보십시오. “갈렙이 모세 앞에서 백성을 조용하게 하고 이르되 우리가 곧 올라가서 그 땅을 취하자 능히 이기리라” 무엇이 갈렙으로 하여금 나머지 정탐들과 이렇게 다른 반응을 하게 했을까요? 객관적인 상황의 유리함 때문만은 아니었습니다. 민14:8이 그 대답을 들려주고 있지 않습니까? “여호와께서 우리를 기뻐하시면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시고 그 땅을 우리에게 주시리라--” 민14:9하반부의 고백을 주목하십시오. “--그들은 우리의 먹이라(밥이라). 그들의 보호자는 그들에게서 떠났고 여호와는 우리와 함께 하시느니라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예,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 홍해에서 그 백성들과 함께 하신 하나님, 마라에서 그 백성들과 함께 하신 하나님, 르비딤에서 그 백성들과 함께 하신 하나님, 시내 산에서 그 백성들과 함께 하신 하나님이 오늘 우리의 삶의 자리에 여전히 함께 하심을 참으로 믿는다면--무엇을 걱정하시겠습니까? 무엇을 염려하시겠습니까? 누구를 두려워하시겠습니까?
그러므로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어떻게 사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까? 그것은 우리의 상황에 하나님을 더하기 하는 것입니다. “이 환경 속에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어떻게 될까요? 하나님이 기뻐하시면 이 문제가 어떻게 될까요?” 더하기(+)하나님을 해 보십시오. 그래서 누군가가 십자가를 ‘더하기 표’라고 말했습니다. 아무것이나 더하기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더하기 하는 것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 전지하신 하나님, 편재하신 하나님, 신실하신 하나님, 그 하나님이 당신과 함께 하신다면 어떻게 될 까요? 그러므로 갈렙 처럼 믿음의 사람이 되십시다. 아직도 우리 눈앞에 처치 불가능의 거인이 서 있다면 ‘넌 내 밥이라’고 소리치십시다. 함께 하시는 그분-내 하나님 때문에 나는 물러 갈수가 없다고 선포하십시오. 그리고 그가 이미 약속한 승리를 믿음으로 선포하십시오.
2. 순종의 레슨입니다.
결국 10명의 정탐 그리고 그들을 따라 소요에 동참한 당시의 이스라엘 백성들의 또 하나의 근본 문제는 불순종의 문제였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명하심 그리고 인도하심을 따라 애굽을 떠나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지금 하나님의 명하심을 따라 하나님께서 언약하신 약속의 땅 가나안을 향하여 가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지금 이들은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외치고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불순종이 아닙니까? 그래서 여호수아와 갈렙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제일 엄중하게 경고한바가 무엇이었습니까? 민14:9이 어떤 말씀으로 시작되었습니까? “다만 여호와를 거역하지는 말라”는 것입니다. 후일 히브리서 기자는 광야 시절의 이스라엘 백성의 경험을 반추하며 그들 대부분이 가나안의 안식에 들어가지 못한 원인을 이렇게 규명합니다. 히4:6입니다. “그러면 거기에 들어갈 자들이 남아 있거니와 복음 전함을 먼저 받은 자들은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말미암아 들어가지 못하였으니” 이어지는 히4:11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우리가 저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쓸지니 이는 누구든지 저 순종하지 아니하는 본에 빠지지 아니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므로 우리의 환경이 어려워질 때 제일 먼저 걱정할 것은 환경 그 자체보다도 지속적인 순종의 여부입니다. 우리 중에는 환경이 어려워 졌다고 너무나 쉽게 하나님의 인도 따라 해오던 사역을 중단하고, 하나님이 주신 일이라고 기쁨으로 섬기던 봉사도 중단하고, 환경이 어려워 졌다고 한때 하나님의 인도라고 믿었던 십일조와 헌금도 중단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면 어떻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시겠습니까? 여러분과 저를 향한 그분의 기뻐하심이 없다면 어떻게 재기가 가능하겠습니까? 건강 제약품 맨솔레담으로 백만 장자가된 알버트 알렉산더 하이드(Albert Alexander Hyde)라는 그리스도인이 있었습니다. 그는 한때 경제 공황시절 10만불의 빚을 지게 되자 빚잔치를 한 후 새롭게 결심하고 시작한 것이 십일조였다고 합니다. 사람들이 “당신 제 정신이냐. 빚더미위에 앉아 무슨 십일조냐”고 했을 때 “나 제 정신이라고. 내가 깨달은 것은 하나님의 빚부터 갚아야 한다는 것이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물론 그는 멋지게 재기했고 십의 이, 삼, 사까지, 나중에 10의 9까지 드리는 전설적인 믿음의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순종할 때 늘 유혹은 다음에 대한 걱정입니다. 그러나 여호수아나 갈렙은 어떤 마음으로 순종했을까요? 순종하면 하나님이 책임져 주실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순종하면 이후의 한 걸음 한 걸음 주께서 인도하실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던 것입니다. 민14:8의 고백이 그것이 아닙니까? “여호와께서 우리를 기뻐하시면----” 그리고 이런 믿음, 이런 순종이 마침내 그와 그의 백성들을 약속의 땅, 아름다운 땅으로 인도할 것이라고 믿은 것입니다. 물론 10명의 정탐의 보고처럼 그 땅에는 아직 그들을 기다리는 여러 위협이 있을지 모르고 그 땅 자체도 본문 32절의 악평처럼 불편하고 위험한 곳들이 있을지 모르지만 그들의 순종의 노력을 하나님이 기뻐하신다면 마침내 그 땅은 약속의 땅, 기업의 땅, 창조의 땅이 될 것을 믿은 것입니다.
그러면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의 미래가 어떻게 될 것인가가 아닙니다. 지금 현실이 얼마나 힘들고 어려우며 여기서 어떻게 탈출할 것인가도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믿음입니다. 순종입니다. 오늘의 난관 앞에서 다시 하나님을 믿으시겠습니까? 그리고 다시 그 하나님께 순종의 삶을 결단하시겠습니까? 그러면 구체적으로 우리가 다시 순종을 결단할 삶의 영역은 무엇인지요? 십자가를 앞둔 겟세마네의 밤, 예수님이 보여주신 결단도 그것입니다.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그는 아버지를 신뢰하고 십자가를 지시는 순종을 결단하신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구원, 우리의 새 인생이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을 사는 저와 여러분도 또 한번 새로운 역사 창조를 위해, 믿음과 순종의 결단으로 내 인생의 루비콘의 강을 건너는 오늘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제4 재채기 열등감
민 13:25-33 / 강문호 목사
오늘은 네 번째 재채기를 하기 위하여 근심에 대하여 알아 보려고 합니다. 사람은 육도 있지만 정신도 있습니다. 육이 아플 때가 있습니다. 아픈 곳을 감사려고 합니다. 건드리면 아픔니다. 정신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것을 건드리면 아픔니다. 공부하지 못 한 사람에게 무식하다고 하면 아픔니다. 가난한 사람에게 돈이 없다고 하면 자존심이 상합니다. 두 가지 이야기로 시작합니다. 오랜 교도소 생활을 했던 청년이 교도소 안에서 예수님을 영접하였습니다. 예수를 잘 믿었습니다. 너무나 착실한 청년이 되었습니다. 교도소에 나와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 후 참신한 처녀와 결혼하였습니다. 그리고 자녀를 낳았습니다. 너무나 행복하였습니다. 좋은 가정을 이루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대화 중에 서로 다투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부인이 자기도 모르게 말했습니다. "당신은 전과자라 그래" 남편이 그 말을 듣고 눈이 뒤집어졌습니다. 순간적으로 흥분한 그는 부엌에 가서 식칼을 들고 와서 부인을 찔러버렸습니다. 그래서 죽었습니다. 가장 아픈 부분을 건드렸기 때문입니다. 열등감을 건드리면 안 됩니다. 사랑하여야 합니다. 오늘 열등감을 재채기로 토하여야 합니다. 카니발 장군 초상화에 대하여 유명한 이야기가 전해 내려오고 있습니다. 어느 날 카니발 장군은 초상화가를 불렀습니다. 그리고 자기 초상화를 그려 달라고 불렀습니다. 카니발 장군은 초상화가 앞에 앉았습니다. 조금 후 완성하였습니다. 자기 초상화를 손에 든 한니발 장군은 그 자리에서 그 화가를 죽여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는 외눈박이였습니다. 그대로 그렸기 때문입니다. 눈이 하나밖에 없는 열등감을 가지고 있는 데 열등감을 건드렸다는 것입니다. 카니발 장군은 다른 초상화가를 불렀습니다. 그 초상화가는 한니발 장군이 먼저 초상화가가 외눈으로 사실 그대로 그려서 사형을 당하였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는 고민하였습니다. 어떻게 그릴가 곰곰히 생각하다가 옆 모습을 그렸습니다. 카니발 장군은 자기 초상화를 받아 들자 말자 너무나 기뻐하면서 상을 주었습니다. 사람들은 열등감이 있고 열등감을 건드리면 아파합니다. 죽일 정도로 아파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알게 모르게 열등감을 가지고 있습니다. 열등감에 대하여 많은 연구를 한 말츠의 말을 빌리면 94%의 사람들이 열등감을 가지고 있다는 통계입니다. 오늘 본문 이야기는 너무나 유명한 이야기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살면서 가나안을 향하여 행진하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자기들이 들어갈 땅을 탐지하고 싶어 하였습니다. 미드라쉬에 의하면 모세는 정탐을 반대하였습니다. 어차피 하나님이 주시기로 작정하신 땅이까 거냥 가도 하나님이 주실 것이라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러나 백성들은 막무가내였습니다. 할 수 없이 모세는 정탐군을 보냈습니다. 한 지파에 한 명씩 모두 12정탐군이었습니다. 모세는 정탐군을 파송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희는 남방길로 행하여 산지로 올라가서 그 땅의 어떠함을 탐지하라 곧 그 땅 거민의 강약과 다소와 그들의 거하는 땅의 호불호와 거하는 성읍이 진영인지 산성인지와 토지의 후박과 수목의 유무니라 담대하라 또 그 땅 실과를 가져 오라>(민13;17-20) 12 명이 40일간 정탐하고 돌아 왔습니다. 10명이 보고하였습니다. <당신이 우리를 보낸 땅에 간즉 과연 젖과 꿀이 그 땅에 흐르고 이것은 그 땅의 실과니이다. 그러나 그 땅 거민은 강하고 성읍은 견고하고 심히 클 뿐 아니라 거기서 아낙 자손을 보았으며 아말렉인은 남방 땅에 거하고 헷인과 여부스인과 아모리인은 산지에 거하고 가나안인은 해변과 요단 가에 거하더이다.........우리가 두루 다니며 탐지한 땅은 그 거민을 삼키는 땅이요 거기서 본 모든 백성은 신장이 장대한 자들이며 거기서 또 네피림 후손 아낙 자손 대장부들을 보았나니 우리는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으니 그들의 보기에도 그와 같았을 것이니라>(민13;27-33) 이스라엘 백성들은 금방 부정적인 감정에 염색되어 모세를 죽이려고 하였습니다. 이 때 여호수아와 갈렙 두 정탐군이 말했습니다. <우리가 두루 다니며 탐지한 땅은 심히 아름다운 땅이라. 여호와께서 우리를 기뻐하시면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시고 그 땅을 우리에게 주시리라 이는 과연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니라. 오직 여호와를 거역하지 말라 또 그 땅 백성을 두려워하지 말라 그들은 우리 밥이라 그들의 보호자는 그들에게서 떠났고 여호와는 우리와 함께 하시느니라 그들을 두려워 말라>(민14;7-9> 여호수아와 갈렙은 그들을 밥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10명의 정탐군은 우리는 메뚜기같다고 하였습니다. 열등감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많은 사람이 메뚜기 의식인 열등감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메뚜기 의식에서 벗어날 수가 있을까요? 어떻게 열등감을 재채기로 토하여 놓을 수가 있을 가요? 1. 메뚜기같이 느껴지나요? 남과 비교하지 말아야 합니다. 자기보다 나은 사람들과 자기를 비교하면 자꾸만 메뚜기같이 느껴지게 되어 있습니다. 남은 크게 보이고 나는 작게 보이기 때문입니다. 장점만 있는 사람은 이 지구상에 한 명도 없습니다. 그렇다고 단점만 있는 사람도 없습니다. 누구나가 다 장단점이 있습니다. <얌전한 사람은 속지 좁고, 활발한 사람은 덤비고, 씩씩한 사람은 까불고, 듬직한 사람은 미련하고, 착한 사람은 답답하고, 똑똑한 사람은 인색하고, 잘 웃는 사람은 싱겁고, 시원스럽게 말하는 이는 약속이 이행이 잘 안 되고, 경우밝은 사람은 너무 알로 까지고, 정확한 사람은 옹졸하다> 이것이 일반적인 이야기입니다. 나 자신의 부족한 것을 열등감으로 느끼지 말고 당연한 것으로 인정하여야 합니다. 다 약점이 있고 다 모자람이 있습니다. 인생은 다 그렇고 그런 것이라고 생각하며 비교하지 말아야 합니다. 몇 년 전 미국 새들백 교회를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 거의 산속이나 나찬가지인 그 지역에 놀랍게 교회를 성장시킨 현장이었습니다. 본당이 너무 차고 넘쳐서 커다란 텐트를 세 곳에나 세우고 있었습니다. 나는 내 스스로가 그렇게 작아 보이고 <나는 무엇인가?>하는 열등감이 솟았습니다. 돌아 오자 말자 110기 성막 쎄미나가 있었습니다. 나는 참석한 목사님들에게 공부를 하면서 그런 이야기를 진솔하게 목사님들에게 말했습니다. 간식시간에 한 목사님이 내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목사님! 목사님이 그런 교회를 보고 열등감에 빠진다고 하니 우리는 차라리 땅속에 들어가 죽어야 겠군요" 비교하면 열등감에 빠집니다. 메뚜기 의식을 가지게 됩니다. 비교하지 말아야 합니다. 나는 나고 너는 너입니다. 나는 나대로의 인생이 있고 너는 너대로의 인생이 있습니다. 나는 서울 시내에서 3,000평 대지위에 저택을 지어 놓고 살아 가는 이 집을 방문하고 돌아 온 적이 있습니다. 그 날 밤 나는 우리 집은 돼지우리 집같아서 한동안 메뚜기 의식에 빠져 있은 적이 있습니다. 나는 어떤 장관실에 들어 갔다 온 적이 있습니다. 당당하게 살아가는 그의 모습 속에서 나는 도대체 무엇인가하는 열등감에서 헤어나기가 힘들었습니다. 남과 자기를 비교하면 메뚜기 의식에 사로잡히기 쉽습니다. 10명의 정탐군이 가나안 거민을 보니 성이 강하였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공격하여야 했습니다. 그들은 무기도 많았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무기도 없었습니다. 그들은 아낙 자손이었습니다. 아낙자손이란 거인이라는 뜻입니다. 얼마나 거인인지 말해주는 전설이 있습니다. 12명의 정탐군들이 너무 더워서 동굴속에 들어가서 한잠을 자고 나왔습니다. 알고 보니 동굴이 아니라 아낙자손들이 먹고 버린 석류 껍질이었습니다. 자기보다 나은 사람과 비교하면 메뚜기 의식에 빠져서 좌절하게 됩니다. 자기보다 못 한 사람과 비교하면 우등감에 빠져서 거만하여 지게 되어 있습니다. 메뚜기같이 느껴지나요? 남과 비교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야 열등감에서 벗어 날 수 있습니다. 2. 메뚜기같이 느껴지나요? 과거를 보지 말고 꿈을 가져야 합니다. 10명의 정탐군은 이렇게 보고하였습니다.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그 탐지한 땅을 악평하여 가로되 우리가 두루 다니며 탐지한 땅은 그 거민을 삼키는 땅이요>(13) 그 거민을 삼키는 땅이라는 의미는 무엇일까요? 땅을 악평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이 말은 한 마디로 말하면 <사람을 잡아 먹는 터>라는 의미입니다. 그 땅에 적응하지 못 하면 죽는 마(魔)의 땅이라는 의미입니다. 지금까지 이 땅을 침범한 이들은 모두 삼켜 버린 땅이라는 의미입니다. 과거에도 그 땅을 점령하려고 시도한 이들은 모두 흔적도 없이 사라졌으니 우리도 안 된다는 보고입니다. 과거에 안 됐으니 지금도 안 된다는 메뚜기 의식이 10명의 정탐군들을 사로잡고 있었습니다. 이런 의식을 지그 지글러는 <벼룩이 의식> <메기 의식> <코끼리 의식>이라고 말했습니다. 벼룩이는 자기 키의 70배를 점프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곤충입니다. 그 벼룩이를 병에 넣고 뚜껑을 막아 놓습니다. 몇 번이고 시도하다가 아무리 뛰어도 병뚜껑 이상을 뛸 수 없음을 알고 스스로 가만히 있으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안 된다. 아무리 뛰어 보아야 병뚜껑이다. 수없이 많이 뛰어 보았다" 그리고 가만히 있을 때 병뚜껑을 열어 놓습니다. 이제는 병밖으로 나갈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는 데도 불구하고 뛰지 않고 가만히 앉아 있습니다. 메뚜기는 스스로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나는 안 된다. 아무리 뛰어 보아야 병뚜껑이다. 수없이 많이 뛰어 보았다" 그래서 자기 능력을 개발하지 못 합니다. 사용하지 못 합니다. 이를 벼룩이 의식이라고 말합니다. 병뚜껑 훈련이라고 말합니다. 과거의 실패가 현재를 꽁꽁 붙들어 매놓고 있습니다. 그러나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과거에는 안 되었어도 지금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승리할 수 있다> <능히 이길 수 있다> 이런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실패스러운 과거에 붙들려 살지 말고 소망스러운 하나님의 손에 붙잡혀 전진하여야 합니다. 꿈을 가지고 나가야 합니다.꿈은 능력입니다. 갈렙은 말했습니다. <문제를 밥으로 여기십시오 .그리고 당당하게 나가십시오. 그러면 메뚜기 의식에서 벗어 날 수 있습니다> 열등감을 이기려면 과거 실패를 보지 말고 미래 꿈을 보고 당당히 도전하여야 합니다. 열등감은 오히려 거룩한 분노로 도전의 계기가 됩니다. 나는 국민학 교 시절 시골에서 자랐습니다. 호박꽃이 막 필 때면 할머니가 밭에 가서 그 호박꽃을 막대기로 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러면 호박꽃가루가 많이 날라서 큰 호박을 많이 맺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고구마가 열릴 때에는 땅을 파고 이제 막 열리는 고구마에 호미로 상처를 내주면 호박만한 고구마가 열린다는 것입니다. 상처가 오히려 호박이나 고구마를 더 크게 만든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법율학자 사무엘 안타마이야는 대학에 다닐 때에 천식과 불면증으로 고통을 당하였습니다. 그러던 중 그는 "좋다! 잠이 오지 않는 시간을 이용하자! 잠이 안 온다고 초조해하고 괴로워하는 대신에 공부하자!"라고 결심하였습니다. 그는 드디어 우등생이 되었습니다. 천재들과 실력이 대등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불면증이 내게는 축복이 되었다고 말했습니다. 변호사가 된 후에도 불면증은 없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일많이 하라는 신호로 알고 그 시간을 노력에 노력을 거듭하였습니다. 그는 "자연이 나를 축복하고 있다"라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는 81세까지 불면증에 시달렸지만 그것을 잘 이용하여 큰 사람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이 되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3. 메뚜기같이 느껴지나요? 자신을 귀중히 여기십시요. 어떤 때는 자기가 자기를 볼 때 볼품이 정말 없고 메뚜기같이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10명의 정탐군처럼 상대방은 아낙자손같이 보이고 스스로는 메뚜기같이 초라하게 보일 때가 있는가요? 내게도 종종 그럴 때가 있습니다. 노만 핀센트 필 목사님이 늘 하시는 이야기입니다. 어느 소년이 산으로 놀라 갔다가 독수리 둥지에서 독수리 알을 꺼내가지고 내려 왔습니다. 그리고 닭이 달걀을 품고 있는 둥지에 넣었습니다. 얼마후 병아리도 독수리 새끼도 깨어났습니다. 병아리들은 자기와 다른 독수리 새끼를 쪼아 댔습니다. 자기들과 다르다는 것이었습니다. 못 생겼다는 것이었습니다. 구박을 받으며 독수리 새끼는 자라났습니다. 서럽기도 하였습니다. 눈물도 종종 흘렸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독수리가 병아리들을 채 가려고 닭장 주변을 맴돌았습니다. 독수리는 갑자기 자기도 저 독수리처럼 날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날개에 힘을 주어 보았습니다. 이상하게 날기 시작하였습니다. 공중으로 힘껏 치솟았습니다. 공중을 나르면서 자기를 서럽게 하였던 병아리들을 바라 보면서 독수리는 외쳤습니다. "아! 나는 병아리가 아니었어. 나는 독수리였어" 그렇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함께 한 위대한 존재들입니다. 자신을 너무 헐값에 팔면 안 됩니다. 자기가 자기를 귀중하게 여겨야 합니다. 보배입니다. 나는 마르틴 루터의 말을 너무나 좋아 합니다. <내가 얼마나 비싼 존재인지를 알고 싶으면 십자가를 보라.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바로 나를 위하여 돌아 가신 존재다> 부정적인 말에 염색되지 말고 거절하여야 합니다. 어떤 사람이 자꾸만 부정적인 말을 듣고 부정적으로 변해가니까 지혜로운 이가 그에게 다가가서 말했습니다. "만일 당신에게 선물을 주었는 데 그 사람이 준 선물을 받지 않고 싶지 않아 도로 주었다면 그 선물은 누구 것입니까?" 그는 당연하다는 듯이 대답하였습니다. "그야 준 사람의 것이 되지요" "그렇습니다. 누가 부정적인 말을 선물하거든 지 받지 마시고 도로 주십시오" 나는 지난번 권투 장면을 잠간 TV로 보았습니다. 상대방에게 한 방 맞았다고 좌절하고 신경을 쓰는 권투선수가 아니었습니다. 권투선수는 맞고도 대담하게 싸울 수 있는 훈련을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에 통쾌한 승리를 안겨 준 박 세리 골프선수는 역사상 최연소 우승자가 되었습니다. 한 기업이 수출하여 벌어드린 달라보다 많은 것을 벌어 드렸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야기를 들어 보니 박 세리는 사우나탕에도 들어가지 않았다고 합니다. 몸이 뜨거워져서 골프를 치는 자세가 변할가 두려워 하여서 그런다는 것입니다. 자기 관리가 철저한 이들이 큰 사람이 됩니다. 부정적인 것을 모두 거절하여야 합니다. 긍정적인 양식을 먹어야 합니다. 그래서 솔로몬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대저 의인은 일곱번 넘어질지라도 다시 일어나려니와 악인은 재앙으로 인하여 엎드러지느니라>(잠24;16) 자신이 메뚜기같이 느껴지나요? 자신을 귀중히 여기십시오. 부정적인 것들은 모두 돌려 주십시요. 4. 메뚜기같이 느껴지나요?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믿으십시오. 10명의 정탐군과 2명의 정탐군이 본 것은 같았습니다. 아름다운 땅이라는 데 의견이 일치되었습니다. 그들의 성이 견고하다는 것도 같았습니다. 그들은 모두 거인 아낙자손이라는 것도 다를 바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 있습니다. 10명의 정탐군은 말했습니다. "거기서 또 네피림 후손 아낙 자손 대장부들을 보았나니 우리는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으니 그들의 보기에도 그와 같았을 것이니라"(33) 그러나 2명의 정탐군은 말했습니다. <우리가 두루 다니며 탐지한 땅은 심히 아름다운 땅이라. 여호와께서 우리를 기뻐하시면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시고 그 땅을 우리에게 주시리라 이는 과연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니라. 오직 여호와를 거역하지 말라 또 그 땅 백성을 두려워하지 말라 그들은 우리 밥이라 그들의 보호자는 그들에게서 떠났고 여호와는 우리와 함께 하시느니라 그들을 두려워 말라>(민14;7-9> <우리는 메뚜기다> <그들은 우리 밥이다> 이 두 말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말은 승리를 장담하는 말입니다. 인간적으로 볼 때에는 안 되는 것인데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될 수 있다는 믿음의 사람들이 역사를 움직여 왔습니다. 나는 자신이 메뚜기같이 느껴지다가 모두를 밥으로 보고 승리한 한 사람의 이야기를 들려 드림으로 오늘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라디오에서 들은 간증입니다.
진주 고아원에 한 아이가 들어 왔습니다. 아버지가 누구인지 어머니가 누구인지 모르는 고아였습니다. 어려서부터 교육없이 자라 강팍한 성격의 소유자였습니다. 누구도 다룰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고아원에서 예배드릴 때마다 억지로 참석하여 서서히 예수를 통하여 변화받기 시작하였습니다. 16살이 되자 규정에 의하여 고아원에서 나가 독립하여야 했습니다. 고아원을 나선 그는 갈 곳에 없었습니다. 진주 역에서 구두닦기를 하고 있는 같이 지내다가 먼저 고아원에서 나간 형이 생각나서 찾아 갔습니다. 그는 길거리에서 노숙하며 구두를 닦고 있었습니다. 형이 말했습니다. "너나 내나 같은 신세다. 이 곳은 나 혼자 일하기에도 부족하다. 내가 기차표를 끊어 줄테니 넓은 곳에서 가서 돈을 벌어라" 형은 부산가는 기차표 하나를 끊어 주었습니다. 기차에 앉았습니다. 주머니에는 동전 한 개 없었습니다. 옆에 앉아 있던 중년 남자와 이런 이야기 저런 이야기 하며 시간이 흘렀습니다. 그 남자는 이 아이가 방금 고아원에서 나온 아이라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시간이 흘렀습니다. 배가 고파오기 시작하였습니다. 그의 마음속에는 주님이 자라잡고 있었습니다. 그는 조용히 기도하였습니다. "주님! 나는 주님밖에 없어요. 배가 고파요" 이 때 김밥 장사가 "김밥! 김밥! 따끈따끈한 김밥!" 라고 외치며 지나갔습니다. 옆에 있던 이가 김밥이 먹고 싶냐고 하더니 사주었습니다. 김밥을 먹고 나니 과일도 먹고 싶었습니다. 그는 또 기도하였습니다 "주님! 나는 주님밖에 없어요. 과일도 먹고 싶어요" 이 때 "오징어 땅콩! 귤이나 사과 팝니다" 라고 외치며 과일장사가 지나갔습니다. 그 남자는 저 것 먹고 싶냐고 말하며 역시 또 사주었습니다. 어느 덧 부산이 다가 오고 있었습니다. 고아는 또 기도하였습니다. "주님! 나 이 아저씨 댁에 가서 오늘 밤 지내게 하여 주세요. 잘 곳이 없어요" 이런 기도를 하고 있는 그 분이 잘 곳이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아무 곳도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럼 오늘 밤만 우리 집에서 지내고 내일 아침에 나가 먹고 자며 일할 자리를 알아 보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그 집에서 자게 되었습니다. 그는 하룻밤만 자고 이 집에서 나갈 것을 생각하니 한심하였습니다. 그래서 밤새 철야기도를 하였습니다. 지금까지 모든 기도를 들어 주신 하나님이 앞으로 기도도 들어 주실 것을 믿었습니다. "주님! 안정될 때까지 이 집에서 살게 하여 주세요.나는 주님밖에 없어요" 이튿날 아침이 되었습니다. 식탁에서 밥을 같이 먹는 데 얼굴이 부어 있고 피곤이 가득한 것을 본 그 남자분이 왜 그렇게 피곤하게 보이느냐고 물었습니다. 하룻밤만 자고 나갈 것을 생각하니 막연하여 밤새 주님께 기도하였다고 대답하였습니다. 그 남자는 그러면 자기가 아는 회사에 나가서 청소하며 살지 않겠느냐고 물었습니다. 일자리를 가릴 때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그 날부터 한 회사에 청소부로 취직이 되었습니다. 그는 청소만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닥치는 대로 모든 일을 부지런히 하였습니다. 사원들 구두도 모두 닦아 주었습니다. 시간이 남았습니다. 사원들 차까지 모두 닦았습니다. 온통 회사 분위기가 달라졌습니다. 사원들 사이에 인기였습니다. 이런 사람을 싫어할 사람은 없었습니다. 어느 날 사장이 공부 좀하지 않겠느냐고 물었습니다. 너무 좋아서 죽어라고 공부하여 서울 대 공대에 합격하였습니다. 서울 공대를 졸업하였습니다. 사장님은 자기 딸과 결혼을 서두르고 그 회사를 인계하고 말았습니다. 그가 백 신이라고 하는 부산 공장 사장입니다. 라디오에서 들은 간증입니다. 그는 지금도 주님을 위하여 죽도록 충성하고 있습니다 메뚜기 의식을 버리십시오. 열등감을 버리십시오. 재채기를 하면서 토하여야 살 수 있습니다.
더 좋은 생각
민 13:25-33 / 허태성 목사
새해를 맞이하여 당신은 어떤 소원을 가지고 있는가? 혹은 어떤 계획을 가지고 있는가? 어떤 이는 소원은 있으나 계획이 없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계획은 있는데 하나님 앞에 소원을 아뢰는 기도를 드리지 않고 자신의 힘으로만 이루어 보려고 한다. 양 극단을 조심하여야 한다. 이 세상의 모든 일은 100%가 다 하나님의 주권하에 있으며 동시에 100% 인간의 책임하에 있다. 오늘은 성경에서 이스라엘 민족의 실패가 주는 교훈을 살펴봄으로써 2008년을 시작하며 새롭게 출발하는 우리들에게 필요한 지침을 찾아보고자 한다.
이스라엘 민족에게는 새로운 소원이 있었다. 애굽을 떠나 광야에서 생활하던 그들은 좋은 정착지를 찾아서 거기에서 안정된 삶을 살기를 원했다. 그곳은 이미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약속하신 바와 같이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이었다. 그들은 가나안의 문턱이라 불리우는 '가네스바네아'까지 도착하였다. 지도자 모세는 치밀한 계획을 세웠다. 12지파에서 각 지파당 1명씩 정탐군을 선발하여 40일간 가나안땅을 살펴보고 와서 보고를 하도록 명령하였다. 드디어 40일간의 정탐이 끝난 다음에 보고를 하는데 의견이 상반된 두 그룹으로 나뉘어졌다. 83%에 해당되는 10명의 다수 그룹에서는 그 땅이 좋은 땅인 것은 분명하지만 그 땅의 원주민이 너무 강하기 때문에 가나안을 정복하려는 계획을 포기하는 것이 더 낫다는 부정적인 보고를 하였다. 이러한 보고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큰 혼돈과 두려움 그리고 자기 연민과 지도자들에 대한 불평을 불러 일으켰다. 그들은 애굽으로 다시 돌아가자고 결정을 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17%에 해당되는 2명의 소수 그룹은 "우리가 올라가서 그 땅을 취하자 능히 이기리라"(30절)고 확신에 찬 긍정적 보고를 하였으며 혼돈에 빠진 백성들을 안돈시키기에 힘썼다. 어떻게 같은 기간에 같은 지역을 정탐하고 돌아온 이들이 서로 다른 보고를 하게 되었을까? 부정적 보고를 한 사람들과 그것을 지지한 백성들은 결국 가나안 땅에 들어가 보지도 못하고 광야에서 그들의 인생을 마쳐야 했다. 오직 긍정적 보고를 한 두 사람 여호수아와 갈렙만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축복을 누리게 되었다. 이들의 보고는 곧 이들의 운명으로 이어졌다. 이러한 차이는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그것은 그들의 생각에서 온 것이다. 생각이 달랐다. 다수의 정탐군들은 합리적이고 실용주의적인 생각을 하였다. 그들의 보고는 그들이 관찰한 사실에 기초한 보고였다. 그 땅은 정말 심히 크고 견고한 요새였다. 그곳의 거주민들은 실제로 기골이 장대한 거인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맹점은 하나님에 대한 불신앙에 자신들이 이미 점령되어 있는 것을 알지를 못했던 것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불신앙을 인정하지도 회개하지도 않았다. 그들은 가나안을 정복하는 것이 여호와의 뜻이 아닐지도 모른다고 의심을 품었고(14:3), 자신들의 비겁함을 숨기고 처자들의 목숨을 보호하기 위해서라고 변명하였다(14:3). 그들은 더 나아가서 애굽을 떠나온 것 자체가 잘못된 것이었다고 평가하고 다시 애굽으로 돌아가려는 결정을 하기에 이르렀다. 왜 이런 불신앙에 빠져버렸을까? 그들은 하나님을 바라보지 않고 가나안 땅의 환경과 거주민들을 바라보았기 때문이다(13:28, 32, 33). 그렇게 되자 그들은 자신들을 메뚜기로 보게 된 것이다. 이러한 불신앙은 하나님의 진노를 촉발시켰고 그들은 끝내 광야를 무덤으로 삼게 된 것이다. 오늘날에도 이렇게 인생을 살다가 마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그러나 소수의 사람 여호수아와 갈렙은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하여 그들의 생각을 이끌어냈다. 그들은 가나안에 들어가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요 계획임을 알고 있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그리고 모세가 자기들에게 이 명령을 한 것을 알고 있었다. 그들은 하나님이 믿음의 사람을 기뻐하시는 것을 알고 있었다(14:8). 그들은 무엇보다도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 하심을 믿고 있었다. 하나님이 함께하시기에 이 싸움은 이미 결론이 난 싸움임을 알고 있었기에 그들은 자신 있게 올라가서 그 땅을 취하자고 외쳤던 것이다. 그들은 육신의 눈으로 보는 것을 근거로 판단하지 아니하였다. 그들은 들은 바 말씀을 믿는 믿음으로 생각하며 나아갔던 것이다. 어린 다윗이 골리앗과 싸울 때에 그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으로 나아가서 승리를 이루었다. 그는 이미 이길 줄 알고 나아갔던 것이다. 이 믿음을 하나님은 원하신다. 이런 믿음을 하나님은 기뻐하신다. 이런 믿음을 가진 사람을 하나님은 축복하신다. 이런 믿음을 가지고 나아가는 자에게 하나님은 역사하셔서 승리를 거두게 하신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이다(히11:1)."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한다(히11:6)."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근신하는 마음이다(딤후1:7)." 믿음의 생각을 하는 창조적 소수를 통하여 하나님은 당신의 하나님 되심을 드러내시고 영광을 받으신다.
계획을 세우는 것은 필요하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믿음으로 생각하며 계획을 세우고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더 좋은 교회를 이루려면 더 좋은 생각이 있어야 한다. 더 좋은 생각은 더 좋은 믿음에서 온다. 즉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믿는 믿음이 있으면 어떤 상황 가운데서도 긍정적인 생각과 자세를 잃지 않게 된다. 도전해 보지도 않고 환경만 보고 미리 겁을 먹고 여러 가지 변명을 대며 물러가는 것은 하나님의 마음을 안타깝게 만드는 것이다. 하나님은 오늘도 믿음의 사람을 찾으신다. 믿음으로 생각하며 믿음으로 계획을 세우고 믿음으로 나아가는 사람에게 미래는 아직도 미개척지로 남아 있다. 2008년을 믿음으로 계획하며 나아가서 하나님의 영광을 크게 드러내는 강변가족이 되시기를 축원한다.
자신을 누구라고 생각하는가?
민 13:25-33 / 서정호 목사
건강한 자아상을 확립하라 사람이 어떤 눈을 가지고 세상을 살아가느냐가 참 중요합니다. 근시안적인 눈을 가진 사람은 바로 눈앞의 일밖에 보지 못하지만 비전을 가지고 먼 미래를 볼 수 있는 사람은 하나님과 사람에게 인정받는 귀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자기 자신을 어떤 존재로 생각하고 있습니까? 상당한 존재라고 생각하고 있나요? 아니면 하찮은 존재라고 생각하고 있나요? 충분한 자질과 장점이 많은 사람이라고 여기며 살아가십니까? 아니면 메뚜기 같이 약하고 약한 존재라고 여기고 있나요? 최선의 삶을 살기 위해서는 건강한 자아상을 확립해야 합니다. 자신을 어떻게 보고 어떻게 느끼는지에 따라 성공의 크기가 결정 될 수 있고, 성공 여부가 판가름 나기도 합니다. 자기존중은 마음 깊은 곳에서 자기 자신에 대해 느끼는 감정인데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자신이 얼마나 중요하고 가치가 있는 존재인지에 대한 자신의 의견이나 판단입니다. “나는 나 자신이 좋아” 혹은 “나는 내가 싫어” 와 같은 말이 자기존중과 관련이 있습니다. 이와 비슷하게 자아상은 일종의 자화상이라 할 수 있는데 ‘스스로 자신을 그린 그림’ 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사실은 자아상이 자신의 진정한 모습보다는 자신에 대한 ‘시각’을 반영한다는 점입니다. 자기 자신을 누구라고 생각합니까? 건강한 자아상은 개인의 성공과 행복을 결정하는 핵심요소 중 하나입니다. 자기개념이 그토록 중요한 이유는 우리가 스스로 생각하는 대로 말하고 행동하고 반응한다는 데 있습니다. 심리학적 증거에 따르면, 우리의 행동은 자아상과 깊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물론 부정적인 자아상을 가진 사람이 큰 거래를 따내거나 사람들의 마음을 휘어잡거나 야구시합에서 장외홈런을 터뜨릴 수도 있는 반면 건강한 자아상을 가진 사람도 때때로 실패를 경험합니다. 하지만 장기적으로 보면 자화상은 현실로 그대로 이루어지는 법입니다. 우리는 마음에 품은 이미지 이상으로 성공 할 수 없습니다. ‘나는 자격이 없어. 하찮은 존재야. 매력이라곤 눈곱만큼도 없어. 나는 약하고 부족한 사람이야.‘ 이런 생각은 행동으로 그대로 나타납니다. “나는 제대로 할 줄 아는 게 하나도 없어.” “왜 하필 나야?” “나는 대단한 사람이 될 수 없어.” 자아상이 약한 사람의 대화 속에는 늘 이런 문구가 따라다닙니다.
반면 하나님과 같은 시각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사람은 만족한 삶을 살아갑니다. 자신이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되었고 하나님이 자신에게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셨음을 분명히 알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고 좋아하심을 알기에 자신감이 있습니다. 그래서 언제나 당당하게 말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를 지금의 모습으로 창조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를 위한 목적과 계획이 있으심을 믿습니다. 저는 제가 세상에 있는 누구와도 다른 유일한 존재인 줄 압니다. 아버지께서는 저를 위해 좋은 것을 예비해 놓으셨기에 당장 그것을 찾아보려 합니다” 자아상은 육체의 일부분이 아니라 우리의 행동을 통제하는 무의식속의 ‘관리인’ 이어서 마치 자동차의 자동속도조절장치와 같은 기능을 담당합니다. 속도를 시속 100킬로미터에 맞춰놓으면 도로 상황에 따라 차의 속도가 늘거나 줄어도 자동속도조절장치는 항상 원래의 속도를 회복시켜 줍니다. 우리는 어디에서 자존감을 얻을 수 있을까요? 아이러니하게도 남의 말, 이를테면 부모나 주위의 친구의 생각이 나의 자아상을 결정하기도 합니다. 그런가하면 자신이 만든 이미지로부터 자아상이 생기기도 합니다. 자기 성격이나 외모, 능력, 업적에 따라 자기 맘대로 자화상을 그려 버리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은 나름대로 자신에 대한 이미지를 갖고 있습니다. 문제는 자아상이 하나님의 음성과 정확히 일치해 있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용사로 보시며 우리의 잠재력을 우리 자신보다도 더 굳게 믿고 계십니다. 우리를 위한 큰 계획이 있으시다는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지 않습니까? 그런데 자아상이 약한 탓에 우리는 늘 김빠지는 소리만 해댑니다. “ 하나님, 저는 할 수 없습니다. 저는 그저 평범한 사람일 뿐입니다. 저 말고 능력이 많고 배운 것도 많은 다른 사람을 찾으세요. 저에겐 그런 능력이 없어요.” 구약에 나오는 기드온이 그런 모습이었습니다. 어느 날 천사가 기드온을 찾아와 말했습니다. “ 큰 용사여,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시도다.” 믿든 말든 하나님은 우리 역시 이런 눈으로 바라보십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우리도 불굴의 용기와 힘과 잠재력을 소유한 용사입니다. “ 하나님은 저만큼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실 거예요. 저는 용사가 아닙니다. 용기도 없고 강하지도 않아요. 저를 놀리시는 건가요? 기드온이 저랑 같아요? 기드온은 자신감과 결단력이 있는 위대한 리더니까 하나님이 그런 엄청난 말씀을 하신거죠.” 정말 그럴까요? 당시 이스라엘은 우상을 섬기는 악한 미디안에게 국토를 유린당하고 있었습니다. 천사가 기드온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시겠다는 하나님의 뜻을 전하자 기드온의 본래 모습이 드러났습니다. “저 같은 것이 어떻게 이스라엘 백성을 구하겠습니까? 저의 집안은 므낫세 지파 중에서도 가장 보잘 것 없습니다. 저는 그런 제 아버지 집에서 가장 못난 사람이고요.” 중요한 사실은 기드온이 자신을 보는 시각과 하나님의 시각이 전혀 달랐다는 것입니다. 기드온은 스스로 자격이 없다고 생각한 나머지 두려움이 앞섰으나 하나님은 여전히 그를 강하고 용감한 자로 대하셨습니다. 기드온은 스스로 약하다고 생각했으나 하나님은 그를 강한자로 보셨습니다. 기드온의 눈에 자신은 부족하고 결단력이 없는 존재였지만 하나님이 보시는 그는 유능하고 대담한 리더였습니다. 결국 기드온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을 해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도 용사로 보십니다. 우리 스스로 생각하기엔 그렇지 않아도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이미지는 조금도 변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성경에서 말씀하신 그대로 우리를 바라보십니다. 때로 우리는 스스로 자격이 없고 결단성도 없으며 약한 존재라고 생각합니다. 나 한 몸 챙기기도 바쁜 하찮은 존재라고 자기를 비하합니다. 그러나 누가 뭐래도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뛰어난 용사입니다! 자아상을 바꾸라 누구나 자아상을 바꿀 수 있습니다. 먼저, 하나님의 의견에 동의하십시오. 하나님이 우리를 강하고 용감한 사람으로 보십니다. 이런 하나님의 시각으로 자신을 바라보십시오. 이제 변명 같은 것은 그만하고 믿음으로 나아가 하나님이 명령하신 일을 행하십시오. 혹시 약점만 보거나 자신감이 없어서 온전한 삶을 나중으로 미루고 있지는 않습니까? 직장이나 교회에서 리더 자리를 받아들일 수 없다고 변명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지역사회에서 봉사할 수 없다고, 곤궁에 빠진 친구를 도울 수 없다고 말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하나님은 기드온에게 자격이 없다고 말씀하시지도 않았지만 기드온이 책임을 회피하도록 놔두지도 않으셨습니다. 우리가 자기 스스로를 부족하다고 생각할 때에도 하나님은 우리를 사용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이 완벽한 사람만 사용하려 하신다면 누가 감히 하나님 앞에 설 수 있겠습니까?
불신앙과 메뚜기 사고 400여 년 동안 애굽 땅에서 노예 생활을 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능력과 기적으로 해방되어 모세의 인도로 광야 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바란 광야 가데스 접경에 이르자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두려워하지 말고 진격해서 그 땅을 차지할 것’을 명령하셨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백성들은 앞으로 나가려 하지 않고 정탐꾼을 보내자는 의견을 내었습니다. ‘정탐꾼을 보내서 우리가 싸워서 얻어야 될 가나안을 좀 잘 미리미리 조사를 해서 유익한 정보를 얻은 다음에 그 정보를 기초를 해 가지고 전략을 세우고 그래서 전쟁을 합시다’ 라는 의견은 그럴듯해 보이는 제안이었습니다. 그러나 신명기1장22절에 보면 하나님이 정탐꾼을 보내라고 한 것이 아니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정탐꾼을 먼저 보내자고 아이디어를 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꼭 그렇게 고집을 피우면 한번 정탐꾼을 보내봐라' 하고 마지못해 허락해 주셨습니다. 어떻게 보면 이스라엘 사람들의 마음속에 잠복해 있는 불신앙을 합리성에 포장한 것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그 결과, 이 정탐꾼 사건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이 얼마나 비참해졌습니까? 그들은 보고를 통해서 백성들에게 두려움만 심어주었고 불신앙이 모든 사람들에게 퍼지기 시작했습니다. 마음속에 잠복해 있는 불신앙이 얼마나 치명적인 해를 끼칠 수 있는가를 우리는 미리 알고 있어야 합니다. 이 잠복성 불신앙이 고개를 들면 우리를 메뚜기 사고방식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만듭니다. 무엇이 메뚜기 사고입니까? 문제는 커 보이고, 자기는 작아 보이고, 하나님은 안 보이고, 세상만 보이는 것이 바로 메뚜기 사고입니다. 믿음이 없어지고 불신앙이 그들의 의식을 사로잡으니까 작은 성곽도 하늘에 닿을 큰 성곽처럼 보인 것, 이것이 메뚜기 사고입니다. 메뚜기 사고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첫째로 마음에서 선전포고를 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생각은 마음에서 싹트고 자라는 내면의 태도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고 내 모든 생각, 좋은 생각, 나쁜 생각, 메뚜기 같은 생각, 거인 생각, 다 가릴 것 없이 모든 생각을 예수님 앞에 갖다 놓고 예수님이 그 생각을 다스리도록 위임을 해야 합니다. 그러면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생각을 정리해 주십니다. 둘째로 크시고 위대하신 하나님을 찬양하고 선포하고 묵상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얼마나 광대하십니까? 오늘도 이 우주만물을 보존하시면서 지키시며 우리의 생명을 지배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이 얼마나 위대하신 분입니까? 이 인류 역사를 다스리고 계십니다. 이 하나님을 고백하고 순간순간 이 하나님을 마음에 묵상해야 합니다. 이렇게 되면 내가 메뚜기처럼 보인다고 생각되는 사고는 모두 사라집니다. 잠복해 있는 불신앙이 아무것도 아닌 것 같지만 중요한 계기가 되면 우리를 망칠 수가 있습니다. 우리를 메뚜기처럼 생각하게 만드는 무서운 힘이 될 수가 있습니다. 동시에 우리로 하여금 걷잡을 수 없는 공포로 몰아넣을 수 있는 강력한 힘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것을 우리는 처리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믿고 고백하고 그 하나님의 크심을 선포하고 묵상하면서 기도로 싸우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가 승리하는 자 되어 우리 하나님 아버지 앞에 영광 돌리는 내일이 있기를 바랍니다. 열 명의 이스라엘 정탐군들이 자신을 메뚜기에 비교한 것은 신앙적으로 자신을 비하하고 믿음을 상실한 메뚜기 신앙입니다. 이런 메뚜기 눈으로 봐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영적 무기력증에 빠집니다. 이러한 메뚜기 눈과 반대되는 것이 바로 여호수아 갈렙의 눈입니다. 그들은 적이 비록 강하고 클지라도 하나님 안에서 능히 이길 것이라는 신앙의 눈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우리의 밥이다! 아무것도 아니다! 이것은 만용이 아니라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신뢰하는 믿음 안에서 나온 용기요 확신입니다. 이제부터 그 어떤 어려움이 닥쳐와도 그 어떤 위기가 여러분을 흔들어도 결코 두려워하거나 도망하지 말고 당당히 맞서십시오. 여러분은 약하지만 여러분 안에는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이 계십니다. 힘든 싸움이 되리라 예상한 모세는 전투에 앞서 적을 알고 지형을 파악하기 위해 12명의 정탐꾼을 가나안 땅으로 보냈습니다. 6주 후에 정탐꾼들이 정보를 입수하여 돌아왔습니다. 일단 모두의 입에서 반가운 소식이 나왔습니다. “우리가 듣던 대로 정말 훌륭한 땅입니다.” 그러자 온 무리가 입을 모아 대답했습니다. “아멘!” 정탐꾼들의 말이 계속 이어졌습니다. “정말 젖과 꿀이 흐르는 땅입니다. 이 포도송이와 석류를 보십시오. 우리가 본 과일 중에서 가장 크고 맛이 좋습니다. 그뿐입니까? 여기 꿀도 맛보세요. 맛이 기가 막힙니다.” 이번에도 모두 입을 모아 기뻐했습니다. 그런데 마지막 소식이 떨떠름했습니다. “하지만 그 땅에는 거인들이 있더군요. 그들에 비하면 우리는 메뚜기 떼에 지나지 않습니다.” 모든 사람의 입에서 탄성이 흘러나왔습니다. “오, 저런!” 계속해서 정탐꾼 열 명이,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지만 우리에겐 그림의 떡일 뿐입니다. 우리는 그런 거인들을 물리칠 수는 없어요. 너무 크고 강하다고요. 스스로 보기에도 우리는 메뚜기에 불과했습니다.” 여기에서 “스스로 보기에도”에 주목합시다. 그들 앞에 놓인 적과 장애물에 비해 그들의 자아상은 너무나 작고 초라했습니다. 그들은 적이 몰려오기도 전에 스스로 무력하게 쓰러지는 불쌍한 메뚜기 떼와 똑같았습니다. 이 열 명이 부정적인 보고를 한 이유는 겉으로 보이는 상황에만 초점을 맞췄기 때문입니다. 이래서는 전쟁이 시작되기도 전에 이미 패한 셈이었습니다. 하지만 나머지 두 정탐꾼, 여호수아와 갈렙의 보고는 완전히 달랐습니다. 분명히 정탐하고 온 땅은 똑같았는데 여호수아와 갈렙은 마치 다른 땅을 다녀온 것처럼 말했습니다. “모세, 우리는 충분히 그 땅을 차지할 수 있습니다. 물론 거기에는 무시무시한 거인들이 사는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들보다 훨씬 크십니다. 하나님이 계시기에 우리는 할 수 있습니다. 어서 가서 그 땅을 차지합시다.” 이 얼마나 위대한 믿음인가요? 우리는 여호수아와 갈렙 같은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도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강해서가 아니라 우리 하나님이 지극히 강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흔하디흔한 ‘메뚜기’를 사용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그분의 명령을 실천할 ‘능력’과 자세를 갖춘 적극적인 사람을 원하십니다. 불행히도 애굽에서 나온 그 많던 사람 중에서 오직 여호수아와 갈렙만 하나님이 예비하신 땅에 들어갔지만 나머지는 아무도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믿음과 자존감의 부족이 하나님이 예비하신 풍성한 미래를 그들에게서 빼앗아간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미 히브리 백성에게 승리를 약속하셨지만 연약한 자아상 때문에 그들은 약속의 땅을 밟지 못하고 죽음을 맞았습니다. 그들이 약속을 성취하지 못한 것은 순전히 그들의 시각 때문이었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어떻게 보는가요? 성공한 사람, 건강하고 활기차고 행복한 사람으로 보는가요? 하나님을 위해 쓰임을 받는 사람으로 생각하는가요? 스스로 하나님이 원하는 일을 행할 ‘충분한 능력’이 있는 사람으로 여기는가요? 하나님과 그 크신 능력 안에서 스스로 상당하다고 확신하는가요? 아니면 자신을 하찮은 ‘메뚜기’로 보는가요? 하나님은 우리를 ‘충분한 능력’의 소유자로 보십니다. 상황을 좋은 방향으로 되돌리고 싶다면 먼저 ‘믿음의 눈’으로 새로운 미래를 꿈꾸어야 합니다. 스스로를 행복하고 성공한 사람으로 보는 시각이야말로 인생의 거친 파도를 헤쳐 나가기 위한 열쇠입니다. 하나님과 마찬가지로 자신을 승자이자 불굴의 용사로 바라보십시오. 우리는 목표 없이 아무렇게나 인생을 떠도는 무의미한 존재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 삶에 대해 특별한 목적을 가지고 계십니다. 불행과 낙심, 외로움, 병마, 패배 속에서 허덕이라고 하나님이 우리를 창조하신 게 아닙니다. 인생의 고난에 이리 치이고 저리 치여서 자신도 모르게 패배에 익숙해진 사람도 있고, 잘못된 생각에 빠져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보다 훨씬 못한 삶을 당연하게 받아들여 온 사람도 있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던 자아상은 이내 일그러진 지 오래입니다. 환경이라는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 그러니까 부모님이나 친구의 상처 주는 말과 행동, 의견을 통해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니 기괴하게 일그러져 있습니다. 나쁜 쪽으로 왜곡된 자아상을 품고 살아왔습니다. 이런 그릇된 이미지를 받아들일 때 낙심과 가난, 아니 그보다 훨씬 무서운 파괴의 힘이 우리를 파멸로 이끕니다. 정신 똑바로 차리지 않으면 그런 깨진 거울에 보이는 우리의 모습이 정말로 현실이 되어 버립니다. 죽을 때까지 인생의 쳇바퀴 속에서 맴도는 신세로 전락하고 마는 것입니다. 마음을 잘 다스리고 생각을 통제하여 하나님의 선하심 속에 거하기 바랍니다. 항상 작은 생각과 믿음과 기대를 품는 한 우리에게 돌아오는 것은 작은 행복뿐입니다. 열 명의 정탐꾼처럼 눈에 보이는 약점과 실패와 불가능만 생각하면 결국 ‘메뚜기 정신’이 우리 속에 뿌리 내릴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삶 속에서도 놀라운 일을 이루고자 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 안에 엄청난 잠재력과 재능을 숨겨 놓으셨지만 하나님의 시각으로 자신을 보고 믿음으로 나아가며 하나님이 주신 꿈과 소망에 따라 행동하는 사람, 하나님의 쓰임을 받을 준비가 된 사람만이 그 잠재력을 분출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용사로 창조하셨다는 믿음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그 믿음을 끊임없이 성장시키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차고 넘치는 복을 예비해 놓으셨습니다!
인생의 세가지 질문
민 13:25-33 / 문기택 목사
사십 일 동안에 땅을 탐지하기를 마치고 돌아와 바란 광야 가데스에 이르러 모세와 아론과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에게 나아와 그들에게 회보하고 그 땅 실과를 보이고
모세에게 보고하여 가로되 당신이 우리를 보낸 땅에 간즉 과연 젖과 꿀이 그 땅에 흐르고 이것은 그 땅의 실과니이다 그러나 그 땅 거민은 강하고 성읍은 견고하고 심히 클 뿐 아니라 거기서 아낙 자손을 보았으며 아말렉인은 남방 땅에 거하고 헷인과 여부스인과 아모리인은 산지에 거하고 가나안인은 해변과 요단 가에 거하더이다 갈렙이 모세 앞에서 백성을 안돈시켜 가로되 우리가 곧 올라가서 그 땅을 취하자 능히 이기리라 하나 그와 함께 올라갔던 사람들은 가로되 우리는 능히 올라가서 그 백성을 치지 못하리라 그들은 우리보다 강하니라 하고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그 탐지한 땅을 악평하여 가로되 우리가 두루 다니며 탐지한 땅은 그 거민을 삼키는 땅이요 거기서 본 모든 백성은 신장이 장대한 자들이며 거기서 또 네피림 후손 아낙 자손 대장부들을 보았나니 우리는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으니 그들의 보기에도 그와 같았을 것이니라(민 13:25-33)
어느날 유치원에서 돌아온 영특한 딸이 엄마에게 질문을 했습니다. "엄마! 난 어떻게 태어난 거예요?" "응! 하나님이 널 만드셔서 선물로 우리 집에 보내 주셨단다." "그럼 엄마는요?" "엄마도 하나님이 너처럼 아기로 만드셔서 선물로 할머니 할아버지에게 주신거지!" 그러자 영특한 딸아이가 중얼거렸습니다. "나, 참! 그렇다면 우리 집 남자들은 도대체 뭘 한 거야?"
좋은 질문을 잘 하고 많이 하는 아이는 공부를 잘 합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아무 질문도 없이 믿는 사람보다 좋은 질문을 가려 잘 하는 사람이 견고한 믿음에 서게 됩니다. 인생을 살면서도 아무 질문도 없이 사는 것보다 좋은 질문을 끊임없이 던지며 풀고자하는 몸부림치는 사람이 성공적인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오늘 저는 바란 광야 가데스에서의 운명적인 순간의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을 비추며 여러분이 인생을 살면서 끊임없이 자신에게 던져야 할 세 가지 질문을 가르쳐 드리겠습니다.
1. 나는 무엇을 보고 있는가?
사람이 무엇을 보느냐? 하는 것은 참 중요한 문제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보는 것에 의해 반응하기 때문입니다.
어떤 부인이 어린 아들과 함께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집에는 남편도 바다에 나가 선원이 되어 배를 타다 죽었고 큰 아들도 역시 선원이 되어 바다에서 풍랑과 싸우다 죽었습니다. 나이 어린 작은 아들 만큼은 절대 선원으로 만들지 않으려고 바다로부터 멀리 이사와서 사는데 작은 아들마저도 선원이 되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부인이 아무리 만류를 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그래서 목사님과 고민을 상의하였는데 목사님이 심방을 와서 보더니 "저 그림을 당장 치워 버리십시오." 하였습니다. 거기에는 넓은 바다에서 파도와 싸우며 나아가는 멋진 배와 선원의 그림이 붙어 있었습니다. 그 그림을 치워버리자 작은 아들의 선원이 되겠다는 생각도 사라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열 명의 정탐꾼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 이것 저것을 보고 돌아왔습니다. 그 땅이 젖과 꿀이 흐르는 비옥한 땅이며 실과가 모두 탐스럽게 잘 되고 있음을 보았습니다. 그뿐 아니라 그 땅에 사는 주민들은 체구가 몹시 크고 힘이 세며 전투를 잘하게 단련된 강하게 생긴 사람임을 보았습니다. 또 그 땅에는 견고하고 큰 성벽을 높이 쌓아 그 성벽을 넘거나 무너뜨리기가 용이하지 않음을 보았습니다. 그렇게 보고 돌아와 자기 민족을 비교하여 보니까 자신들은 메뚜기같이 작고 무능해 보였습니다.
열 명의 정탐꾼들이 본 것은 정확한 현실이었습니다. 그들의 시력은 잘못되지 않았습니다. 상황판단이 틀린 것도 아니었습니다. 실제 가나안 땅에 살고 있는 원주민들은 거인들이고 용맹스러웠고 전쟁에 대비하여 튼튼한 성벽을 쌓고 방어할 만반의 준비를 끝내놓고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들과 맞서 싸워 이기는 일은 먼 길을 여행하며 지쳐있는 이스라엘백성의 힘으로는 가능성이 거의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 전쟁은 이스라엘의 전투력으로는 불가능하였습니다.
그런 현실을 꿰뚫어 보았던 정탐꾼들은 정복 불가로 결론을 내리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백성에게 보고하면서 '우리가 그백성을 치지 못하리라 그들은 우리보다 강하니라' 라고 한 것입니다.
그런가하면 두 명의 정탐군들은 똑같이 정탐을 하고 돌아왔지만 전혀 다르게 보고합니다. "우리가 곧 올라가서 그 땅을 취하자 능히 이기리라."라고 합니다. 왜 열 사람은 가나안 정복 불가의 결론을 내세우는데 두 사람은 정복 가능 내지는 정복 필수를 외칩니까? 그들은 다른 사람이 보지 못한 아주 중요한 것을 보았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육안으로만 보지 않고 영안으로 영적 세계를 보았습니다. 믿음의 눈으로 하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14장 8절에 '여호와께서 우리를 기뻐하시면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시고 그 땅을 우리에게 주시리라 이는 과연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니라'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시고 그 땅을 주실 것을 보았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인간의 군대로 정복할 계산만 하였으나 갈렙과 여호수아는 하나님이 그 전쟁에 개입하셔서 승리를 주실 것을 바라보았습니다.
더 나아가 9절에 '오직 여호와를 거역하지 말라 또 그 땅 백성을 두려워하지 말라 그들은 우리 밥이라 그들의 보호자는 그들에게서 떠났고 여호와는 우리와 함께 하시느니라 그들을 두려워 말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 하나님이 우리 편이시다. 그러므로 두려워 할 것이 하나도 없다. 저들은 우리 밥이다. 다 차려논 밥상 먹기만 하면 되는데 왜 두려워하고 피하느냐?는 것입니다.
인생을 살면서 육안으로 현실만 바라보면서 두려워 떨며 뒷걸음치며 사는 사람이 있고 영안으로 함께 계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사람이나 질병이나 귀신이나 환경을 두려워하지 않고 담대하게 전진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똑같은 상황에 처해서도 무엇을 보느냐?에 따라 운명은 정반대로 바뀔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군사들은 골리앗을 보고 '우리가 싸우기에는 너무나 큰 거인이다.'라며 뒷걸음질치고 숨었으나 다윗은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고 교만하여 떠드는 것을 보니 네 운명도 끝이구나! 손쉽게 이길 수 있겠구나! 하고 겁내지 않고 나가 꺼꾸러트렸습니다.
오늘 예수를 오래 믿은 사람들중에도 믿음의 눈은 감겨 있고 육신의 눈으로만 보고 판단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두려워합니다. 낙심하고 주저앉아 울고 있습니다. 할 수 없다고 말하며 도망갈 궁리만 합니다. 불안해하며 자신의 불신앙을 다른 사람에게까지 확산시키고 있습니다. 열 명의 정탐꾼처럼 현실만 바라보고 계산하지 마십시오. 두 명의 정탐꾼처럼 우리와 함께 계시고 떠나지도 버리지도 않으시는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기 바랍니다. 우리의 능력이 끝나는 그 지점에서 본격적으로 우리를 위해 일하실 하나님을 신뢰하고 하나님 크기의 일을 벌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좋은 믿음을 소유하고 그 믿음으로 하나님의 역사를 경험하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먼저 눈을 크게 뜨고 믿음으로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나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볼 수 있기 바랍니다. 나를 기뻐하셔서 나의 인생에 큰 계획을 세우시고 나의 앞에서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볼 수 있기 바랍니다. 나의 한계 상황에서 능력을 나타내시고 위기에서 구해주시는 하나님을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은 무엇을 보고 있습니까? 육안으로 세상 사람들이 보두 보는 것만을 보십니까? 믿음의 눈으로 하나님의 사람만이 볼 수 잇는 것을 보십니까? 여러분의 영적인 눈이 활짝 열리기를 축원합니다.
2. 나는 무엇을 듣고 있는가?
이스라엘백성들은 소수인 갈렙과 여호수아의 말을 듣기 보다는 다수인 열명의 정탐꾼의 말을 더 귀기울여 들었습니다. 그러다보니 그들의 영향이 그대로 미쳐 모세와 하나님을 원망하여 폭도로 변했습니다. 군중들은 모세와 아론을 그리고 갈렙과 여호수아를 돌을 들어 쳐 죽이려고 하였습니다. 군중들은 다수의 견해라고 해서 깊이 생각해보지도 않고 옳고 그름을 생각해보지도 않고 따랐습니다. 하나님의 뜻인가? 아닌가?를 분별하지도 않고 부정적 견해를 무조건 받아들였습니다. 믿음이 없는 보고, 그리고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는 의견을 따른 백성들은 하나님의 원수가 되어 버렸습니다.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거스리고 하나님이 예비하신 축복을 거절해 버렸습니다. 그들의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기회를 걷어차 버린 것입니다.
반면 갈렙과 여호수아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따랐습니다. 다수의 위협에도 눈치보며 굴복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신 바가 무엇인지 깨닫고 지도자 모세의 뜻을 헤아릴 줄 알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오직 내 종 갈렙은 그 마음이 그들과 달라서 나를 온전히 좇았은즉 그의 갔던 땅으로 내가 그를 인도하여 들이리니 그 자손이 그 땅을 차지하리라"하고 인정하셨습니다. '나를 온전히 쫓았은즉'이라고 하시며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며 순종하였다고 기뻐하셨습니다.
우리의 귀에는 두 종류의 음성이 들립니다. 하나는 우리를 잘못된 길로 유혹하는 소리이고 하나는 우리에게 참된 길을 지시하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예수님도 마귀에게 이끌리어 광야에서 시험을 받으시면서 넘어뜨리고자 유혹하는 온갖 소리들을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물리치셨습니다.
우리에게도 예수님을 유혹하던 소리들이 계속 들려올 때가 있습니다. 동시에 하나님의 말슴도 함께 들려옵니다. 아무 소리나 다 듣지 말고 그것이 미혹하는 소리인지 진리가운데로 인도하는 말씀인지 잘 분별해야 합니다. 그래서 위험한 소리가 분명하면 말씀으로 곧 물리쳐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잘못된 소리에 속아 우리의 인생을 망칠 수 있습니다. 악한 영향을 주는 부정적인 말과 불신의 말에 끌려다니며 하나님의 뜻을 거스리고 하나님을 대적하는 편에 서게 될 수 있습니다. 코앞에까지 다가온 축복을 발로 차버리고 하나님이 예비하신 큰 은혜를 상실하는 불행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아무 소리나 다 들어서는 안됩니다. 불신의 말, 부정적인 말, 악평하는 말, 원망의 말을 조심하고 경계하시기 바랍니다. 믿음의 말, 긍정적인 말, 칭찬의 말, 감사의 말, 은혜로운 말을 가려 듣는 복된 귀를 소유하시기 바랍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힘쓰시기 바랍니다.
어느 시골에서 한 소년이 늘 주위 사람들에게 차가운 시선을 받았습니다. 소년의 어머니가 처녀 때 낳은 사생아였기 때문입니다. 동네 사람들은 그 소년의 아버지가 누구일까 하며 수군거렸습니다. 가까이 지내는 친구가 한 명도 없었던 소년은 학교에서도 따돌림을 당해 너무 외롭고 괴로워 견딜 수 없었습니다.
그 소년이 열두 살이 되었을 때 마을에 있는 교회에 목사님이 새로 부임하셨습니다. 그 목사님의 설교가 은혜스럽다는 소문이 나자 그 소년은 설교를 듣고 싶어졌습니다. 사람들이 자기를 어떻게 대할까 하는 두려움도 있었으나 여러 번 망설인 끝에 용기를 내어 주일 아침 교회를 찾아갔습니다. 사람들의 눈을 피해 예배시간이 시작된 후에 들어가서 조용히 됫자리에 앉았습니다. 처음에는 말씀이 귀에 잘 들어오지 않았지만 한 번 두 번 나가면서 하나님의 사랑이 가슴에 와 닿았습니다.
그 소년은 주일만 되면 발길이 교회로 닿았습니다. 이렇게 해서 그 소년은 점차 하나님 아버지께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 늦게 가서 됫자리에 앉았다가 예배가 끝나기가 무섭게 쏜살같이 집에 돌아오곤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전과는 달리 예배를 마치고 조금 늦게 어른들 사이에 숨어 예배당을 빠져 나오는데 누군가가 소년의 어깨를 잡으며 이렇게 말하는것이었습니다. "넌 누구냐? 누구의 아들이지?"
돌아보니 거기에 목사님이 자기를 내려다보고 있는 게 아니겠습니까? 목사님은 곧 이어서 사랑이 가득한 음성으로 말씀하셨습니다. "아! 네 얼굴을 보니 누굴 닮았는지 알겠구나. 네 아버지는 하나님이시지!"
이 소년은 목사님의 이 따뜻한 말 한 마디를 통해 변화되었고 인생이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이 소년의 이름은 벤 후퍼입니다. 그는 미국 테네시 주에서 주지사로 두 번이나 당선되었고 사회와 교회에 아름다운 삶의 본을 남겼습니다.
후에 그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주일 예배 후 목사님께서 제게 하신 그 한 마디가 저의 인생을 완전히 바꾸어놓았습니다."
3. 나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열 명의 정탐꾼의 영향으로 이스라엘백성은 우왕좌왕하게 되었습니다. 그중에서도 가장 큰 문제는 그들의 목적지를 잃어버린 것입니다. 그들이 광야로 나온 목적은 오직 하나입니다.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들어가기 위해서입니다. 가나안땅으로 들어가려고 애굽에서 나왔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땅을 축복으로 조상 아브라함에게 주셨고 후손인 그들에게 주셨다고 믿었습니다. 그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나라를 건설하는 것이 소망이었습니다. 오로지 그 땅에 들어가려는 목표로 거기까지 왔는데 목표를 상실했습니다. 갑자기 목적지를 잃어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애굽으로 돌아가자"하며 과거로 회귀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왜 이스라엘백성이 어디로 가야할지 알지 못하게 되었습니까? 하나님의 뜻과 상관없이 과거로 돌아가려고 갑작스레 목적지를 변경하려고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보아야 할 것을 보지 못하고 들어야 할 것을 듣지 못하여 두려움이 앞서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가나안 정복은 도저히 불가능하게 여겨졌습니다. 이제 그들의 꿈과 기대가 다 물거품이 되었다고 낙심하고 포기하였기 때문입니다. 목적지를 잃어버리고 광야에서 영원히 미아가 될 것을 생각하니 불안해졌습니다.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이 애굽이었습니다. '차라리 애굽이라도 돌아가서 받아달라고 사정하자.'
여러분에게 인생의 목표가 있습니까? 목적지가 뚜렷하고 나아가는 분명한 방향이 있습니까? 그리스도인중에도 자신이 어디로 가는지 어디로 가야할지 모르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저 되는대로 방향도 없이 목표도 없이 여기도 기웃, 저기도 기웃 바람부는대로 물결이 흐르는대로 시대의 조류에 따라 사는 사람이 적지 않습니다. 우리는 분명한 목적지가 있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한 방향으로 계속 나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약속의 땅을 향해 나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과거에 사로잡혀 옛날을 회상하며 옛날로 되돌아가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18세기초 영국에 윌리엄 캐리라는 행상인이 있었습니다. 소달구지에 물건을 싣고 이 동네 저 동네 다니면서 팔면서 기회있는대로 주머니에서 지도를 꺼내 보여주었습니다. 누더기가 된 세계지도를 보여주며 말하기를 "나는 먼 나라에 가서 복음을 전하겠습니다. 그것이 나의 평생 소원입니다."하고 신이 나서 말했습니다. 사람들은 그를 미친 사람취급을 했습니다. 엉뚱한 공상가라고 빈정거렸습니다. 후에 그 윌리엄 캐리는 인도 선교를 개척하여 성공적으로 선교하였습니다. 현대 선교의 아버지라고 사람들은 그를 부릅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입니다. 비젼이 있고 목표가 분명해야 성취할 수 있습니다.
위기앞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약속의 땅을 소망하며 목표를 바꾸지 않은 갈렙과 여호수아만이 가나안땅에 들어가 그 땅을 차지할 수 있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아무도 광야에 들어가지 못하고 40년동안 광야에 머무르며 죽기를 기다려야만 했습니다. 그들은 살았다는 이름은 있었으나 죽은 자들이었습니다. 빙향을 잃어버리고 목표를 잃어버린 사람은 살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숨을 쉰다고 다 살아있는 것이 아닙니다. 아름다운 꿈을 품고 살며 끊임없이 도전하여 성취하는 사람이 살아있는 사람입니다.
여러분은 어디로 가고 있습니까? 여러분도 아름다운 약속의 땅을 향해 나아가고 있습니까? 장애물이 가로막아도 포기하지 않고 전진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이 도와주시고 일하실 것을 확신하며 물러서지 않고 뒤를 돌아보며 돌아갈 궁리를 하지 않고 한 방향으로 나아가십니까?
학생 수가 39명뿐인 작은 섬에 한 선생님이 부임해왔습니다. 이 선생님은 정말 아이들을 사랑하고 열심히 가르쳤습니다. 아이가 아프면 그 집에 가서 밤새 물수건을 갈아 주며 간호했습니다. 아이들이 모두 선생님을 따랐습니다. 그런데 그 섬에는 어른들이 얼마나 욕설을 많이 하는지 아이들의 입에도 욕이 늘 붙어있었습니다. 하루는 선생님이 제안했습니다. 이것은 욕표다. 한 사람에 열장 씩 준다. 한 주일동안 친구간에 욕하는 사람이 있으면 한 장씩 뺏어라. 그래서 가장 많이 모은 사람에게는 공책을 선물로 준다. 그리고 다 뺏기고 한장도 없는 사람은 발가벗고 운동장을 도는 벌을 받는다. 누런 시멘트 종이를 잘라 공책으로 쓰던 시대에 아이들에게 하얀 공책은 굉장한 기대였습니다. 드디어 한 주간이 아이들이 욕표를 책상위에 내 놓고 상과 벌을 기다렸습니다. 한 아이에게는 욕표가 한장도 없었습니다. 선생님이 따라오라고 하더니 교무실에서 회초리를 들었습니다. 열 대 맞는다. 큰 소리로 세라. 네대를 맞고 너무 아파서 돌아서서 선생님의 손을 잡으려고 하는데 선생님이 눈물을 흘리는 것이었습니다. "내가 너를 얼마나 사랑하는데 이렇게 실망시킬 수 있느냐"며 울면서 종아리를 때렸습니다. 아이는 돌아와서 책상에 엎드려 울면서 결심했습니다. "나도 선생님처럼 나라를 사랑하는 사람이 될거야, 나도 선생님처럼 예수를 잘 믿는 사람이 될거야, 나도 선생님처럼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사람이 될거야"
그 소년이 우리 나라의 상담학의 최고인 한신대학교 정태기교수입니다. 미국 유학을 마치고 첫 월급을 탔는데 50만원이었습니다. 20만원을 생활비로 쓰고 30만원으로 선생님을 대접하겠다고 초청했습니다. 비행기표를 보내드리고 서울의 최고 유명한 중국음식점에 가서 20만원을 내놓고 음식을 주문했습니다. "몇 인분을 준비할까요?" "2인분입니다." "이 돈이면 40인분도 준비할 수 있는데요?" .... 그런데 백발의 선생님은 음식을 드시지 못하는 것입니다. 왜 안드십니까? 미안하이 위암 말기라네.. "선생님 오늘의 내가 존재하는 것은 선생님의 영향때문입니다. 그때 울면서 때린 선생님의 회초리덕분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질문하십니다. 아담아 네가 어디있느냐? 예수님도 질문하십니다. 너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우리도 자신에게 질문해야 합니다. 나는 지금 무엇을 보는가? 나는 지금 무엇을 듣는가? 나는 지금 어디로 가는가? 그 질문을 통해 여러분의 인생을 반듯하게 교정하며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기를 축원합니다.
능히 이기리라
민 13:25-33 / 김동호 목사
요즘 우리나라는 사학법개정으로 인하여 많은 혼란과 어려움을 격고 있습니다. 얼마 전에는 저의 이름이 사학법개정을 반대하는 어느 단체의 성명서에 저의 동의 없이 기록되어
많은 사람들에게 제가 사학법개정을 반대하는 사람으로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사학법개정에 대하여 나름대로의 생각과 소신이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공인이기 때문에 그와 같은 생각과 소신을 공적으로 표현할 때 함부로 행동할 수는 없습니다. 만일 그와 같은 행동을 하여야 할 필요가 있다면 최소한 당회에서 그와 같은 것을 결의한 후에야 가능할 것입니다. 내가 곧 교회인양, 내 생각과 입장이 곧 높은 뜻 숭의교회의 생각과 입장인양 행동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모든 사람이 다 그러하겠지만 제가 가장 심각하게 염려하는 것은 사학법개정이 이루어 지느냐 이루어지지 않느냐 하는 것이 아닙니다. 정말 심각하게 염려하는 것은 아직도 우리나라는 토론과 논쟁의 후진국으로서 자기와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을 극단적으로 폄하하며 자기가 가진 생각대로 일이 되지 않으면 나라가 망할 것 같은 위기감을 갖는 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와 다른 생각과 주장을 하는 사람들을 무조건 다 나라 망칠 매국노 취급을 한다는 것입니다.
제가 흐리멍텅해서 그런지는 잘 모르겠으나 제가 보기에 사학법개정을 찬성하는 사람들이나 그것을 반대하는 사람들 모두에게 일리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면을 양쪽에서 다 존중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 면을 인정하고 할 수 있는 대로 그 서로 충돌하고 염려가 되는 면을 줄이려고 서로 노력하는 것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사학법개정을 찬성하는 사람들은 사학법개정을 반대하는 사람들을 무조건 이기주의자들이고 학교를 제 마음대로 하려고 하는 파렴치한처럼 취급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아 보입니다. 그러나 그와 같은 생각은 매우 위험한 생각입니다. 몇몇 사학의 부정을 전체적인 사학의 부정으로 매도하여 사명감을 가지고 자기의 전 재산을 털어 경제적으로 볼 때 별 생산성이 없는 사학을 운영하는 사람들을 모욕하는 일은 매우 위험한 생각과 사상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이번 사학법개정을 소신껏 사학을 운영하는 일을 불가능하게 하는 것으로 여겨 그럴 바에야 차라리 학교를 포기하겠다고 하는 분들의 심정을 충분히 이해합니다. 우리 교회가 예배를 드리고 있는 숭의학원이 과거 왜정 시대 때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스스로 학교 문을 닫은 것은 매우 훌륭한 일이었고 용기 있는 일이었습니다.
저는 사립학교 중에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기독교 미션 학교들의 경우 이번 사학법 개정으로 인하여 학교 설립의 궁극적인 목적인 기독교 교육을 원칙적으로 할 수 없게 된다면, 학교를 국가에 넘기고 손을 떼겠다는 분들의 주장을 절대로 지나친 것이라고 일방적으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미 사립학교에 대한 국가의 힘이 너무나 커서 제대로 저항한번 하지 못하고 굴복하는 것과 같은 상황을 별로 건강한 상황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우리 높은 뜻 숭의교회는 기독교사립학교에 대한 뜻을 가지고 있는 교회입니다. 기독교학교교육연구소를 세우는데 중심적인 역할을 하였고, 머지않은 장래에 기독초등학교 설립을 계획하고 기도하고 있는 교회 중에 하나입니다. 그러므로 그와 같은 교회의 담임목사인 저로서도 이번 사학법 개정의 문제는 강 건너 불구경하듯 할 수 있는 그런 사안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 사학법개정안 중에 가장 핵심적인 사안이라고 할 수 있는 개방형 이사 제도에 저는 개인적으로 반대하지 않습니다. 너무 안일하게, 낭망적으로 생각하는 것이 아닌가하는 반성을 좀 더 해보아야 하겠지만 지금으로서 저는 과연 개방형 이사 제도 때문에 기독교학교를 할 수 없게 되는 것인가에 대해서는 좀 회의적입니다.
좀 다른 이야기입니다만은 저는 만장일치나 일사천리와 같은 말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비민주적인 언어와 생각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저는 비민주적인 것은 편한 듯 싶어 보이나 결국 인간과 조직을 나약하게 하는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처음 담임목사가 되었을 때 많은 선배 목사님들이 제게 권면해 주신 말씀 중에 하나가 당회를 만장일치로 운영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야만 교회가 은혜스럽게 된다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 말씀의 뜻을 모르는 바는 아니나 원칙적으로 저는 그때나 지금이나 그 말에 동의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만장일치가 정말 은혜스러운 것이라면 세상에서 가장 은혜스러운 나라는 북한일 것입니다. 100% 출석에 100%의 찬성으로 100%의 문제를 처리하는 나라가 북한입니다.
성숙한 나라들의 토의 문화와 법칙에 의하면 만장일치는 무효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만장일치는 무효라는 말이 너무 좋습니다. 사람마다 생각이 다르고 의견이 다릅니다. 그 이유는 우리들이 완전한 존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모두가 다 불완전한 존재이기 때문에 자기와 서로 다른 사람과의 토론과 심지어는 다툼을 통하여 자기의 부족한 면을 채워가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와 같은 과정을 통하여 보다 성숙하고 완전한 결론을 도출 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든 학교든 사회든 건강한 조직을 운영하려고 하면 자기와 똑같은 생각과 의견을 가진 사람들끼리만 모여서 그와 같은 조직을 운영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조직을 운영하기는 쉬우나 그것이 조직을 건강하게 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제가 개인적으로 노무현정부에서 나온 말 중에 가장 싫어하는 말은 ‘코드 인사’라는 말입니다. 코드가 같은 사람끼리 모여서 일을 하면 해피 할 것 같지만, 그것이 나라를 건강하게 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 제 개인적인 생각입니다.
제가 모시고 있던 목사님 중에 한 분이 독립교회를 하고 계십니다. 독립교회 중에서도 당회 없는 독립교회를 하고 계십니다. 전에 시무하시던 교회에서 당회 때문에 나름대로 개인적으로 많은 고통을 격으셨기 때문에 새로 목회를 시작하시면서 아예 당회라는 조직을 없이하신 것입니다. 저는 교회를 그렇게 운영할 수도 있다고 인정합니다. 그러나 저는 개인적으로 한번도 당회 없는 목회를 생각해 본 일이 없습니다. 저는 그것을 브레이크 없는 자동차를 타는 것과 같은 일이라고 확신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이야기하면 제가 당회 때문에 한번도 고통을 받아 본 적이 없어서 그럴 것이라고 혹시 생각하실는지 모르나 많은 분들이 그렇지 않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당회와의 갈등을 누구 못지않게 격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 때문에 많은 어려움을 격었음에도 불구하고 결과적으로 저는 그와 같은 갈등과 어려움 때문에 개인과 교회가 더 좋아졌다고 확신하고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는 이 다음에 기독교학교를 운영한다고 할 때 일부러라도 개방형이사제도를 도입하여, 혹시 저들 때문에 좀 더 힘들게, 좀 더 어렵게, 좀 더 천천히 학교를 운영하게 되는 한이 있어도, 극단적으로 이야기해서 결국 그 때문에 내가 목적 했던 대로의 학교를 운영할 수 없어서 학교를 포기하게 되는 한이 있어도 나와 같은 뜻과 생각을 가진 사람들만으로 이사를 삼아 학교를 일사천리로, 만장일치로 운영할 생각은 없습니다. 그것은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저의 걱정과 염려 중에는 우리 교회가 지금 너무 편하다는데 있습니다. 말이 씨가 된다고, 이 팔자 좋은 소리 때문에 소원대로 되어 목회가 좀 힘들어지고 어려워진다고 하여도 할 수 없습니다.
편해지면 인간은 누구나 하나님과 멀어집니다. 힘들어질 때 인간은 누구나 하나님과 가까워집니다. 기독교사학만해도 우리나라에서 기독교사학이 가장 기독교사학 다웠던 때를 저는 왜정시대 때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예외가 많이 있지만, 보편적으로 볼 때 오히려 기독교사학이 마음껏 반대 세력 없이 거의 족벌체제로 운영이 될 때 기독교사학은 가장 나약해 졌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이 땅에 많은 기독교사학이 있지만, 왜정시대 때의 숭의 학원과 같이, 아니 왜정 시대 때의 모든 기독교 사학과 같이 정신이 살아있는 기독교 사학이 과연 이 땅에 여러분은 몇이나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사학을 위하여 개방형 이사제도를 반대하지만, 저는 역설적으로 진정한 의미의 기독교사학을 위하여 개방형 이사제도를 도입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하는 엉뚱한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두 사람도 안 된다고 하는 개방이상도 설득하지 못하고 그 실력으로 어떻게 기독교사학을 운영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 집에서 제일 먼저 군대에 입대하는 둘째를 훈련소까지 데려다 주었었습니다. 차 뒤에는 둘째와 둘째의 친구가 둘이 타고 있었는데 한 친구가 ‘야, 군대는 요령이래 집합하면 앞에도 서지 말고 뒤에도 서지 말고 가운데 숨어’라고 이야기 했습니다.
제가 그 이야기를 듣가가 말 참견을 하였습니다. “이놈들아 너희들이 무슨 미꾸라지 새끼냐? 그런 약한 정신으로는 힘든 군대생활하기 어렵다. 집합하면 눈에 띄어 매 몇 대 더 맞는 한이 있어도 맨 앞으로 튀어나가” 그리고 계속해서 둘째에게 이야기 해 주었습니다. 군대에 아는 장성들이 많이 있지만 너 편한데 보내달라고 전화하지 않겠다는 것과 하나님께만 전화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둘째는 좋다고 하였습니다.
정말 하나님께 전화 많이 열심히 하였습니다. 둘째를 그렇게 큰소리치며 군대에 보냈지만 막상 아이가 훈련소에 들어가고 보니 하루에도 몇 번씩 군대에 힘 있는 장성들 생각이 났습니다. 그 때마다 하나님께 전화했습니다.
제 전화를 열심히 받으신 우리 하나님은 우리 둘째를 최전방 수색중대 유격조교로 보내셨습니다. 우리 둘째가 5월 달엔가 그 부대에 배치를 받았는데 1월부터 5월까지 힘들다고 두 명이나 자살한 부대였습니다. 감사하게도 저희 둘째가 제가 한 말을 명심하고 군대생활을 한 것 같았습니다. 얼마 후 둘째로부터 참으로 근사한 편지를 받았습니다. “아빠, 유격 재밌어요” 그 말을 곧이들은 우리 막내는 군대에 가서 유격조교를 자원했습니다. 죽다 살았다고 했습니다.
제가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성경 중에 하나는 예레미야 12장 1절 이하의 말씀입니다. 거기서 예레미야는 하나님께 의로운 자의 길이 험하고 악한 자의 길이 형통한 이유를 묻습니다. 우리들이 보편적으로 하나님께 대하여, 이 세상에 대하여 가지고 있는 의문과 같은 것입니다. 그에 대한 하나님의 대답이 너무 근사합니다. 하나님의 답변은 다음과 같은 질문을 통하여 예레미야와 우리들에게 주어집니다.
“네가 보행자와 함께 달려도 피곤하면 어찌 능히 말과 경주하겠느냐? 네가 평안한 땅에 서는 무사하려니와 요단의 창일한 중에서는 어찌하겠느냐?”
하나님의 질문 중에 하나님의 대답이 있으십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들로 하여금 말과 경주하는 사람이 되게 하려고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들로 하여금 요단의 창일한 중에서도 능히 살 수 있는 사람이 되게 하려고 입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은 당신의 사랑하는 자녀인 우리들을 과보호하시어 온실에서 키우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사랑하는 자녀들을 물 속에도 집어넣으시고 불 속에도 집어넣으시며 전투적으로 키우시는 분이십니다.
니이체라고 하는 철학자는 신은 인간을 나약하게 하는 존재라며 그와 같은 신을 자기가 죽였다면 큰 소리를 쳤습니다. 그러면서 니이체는 초인을 주장하였습니다. 니이체가 이야기한 신 중에는 물론 우리 기독교의 하나님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다른 미신적인 신에 대해서는 니이체의 말이 옳습니다. 그러나 우리 기독교의 하나님에 대해서는 니이체의 말과 생각이 틀렸습니다.
미신적인 종교의 신은 인간을 나약하게 하는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그와 같은 신은 우리도 죽여야만 합니다. 그러나 기독교의 하나님은 그와 같은 신들과 전혀 같지 않으십니다. 기독교의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를 온실에서 나약하게 과보호하시면서 키우시는 분이 아니라 물과 불속에서 강하게 연단하며 키우시는 그런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세상에 대하여 꼬리를 내리지 않고 당당하게 맞붙어 싸우는 사람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싸워서 승리하는 사람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세상이 아무리 골리앗처럼 강하고 무서워 보여도, 세상과 비교할 수 없는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다윗과 같이 담대하게 맞짱뜨는 사람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오늘 본문은 우리가 너무나 잘 아는 말씀입니다. 12 정탐꾼이 가나안 땅을 정탐하고 돌아왔을 때 그 정탐꾼들이 모세와 백성들 앞에서 한 보고입니다. 여호수아와 갈렙을 제외한 10 정탐꾼들의 보고는 아주 비관적이었습니다. 그러나 아주 정확한 보고였습니다. 저들은 이렇게 보고합니다.
“우리가 두루 다니며 정탐한 땅은 그 거주민을 삼키는 땅이요 거기서 본 모든 백성은 신장이 장대한 자들이며 거기서 네피림 후손인 아낙 자손의 거인들을 보았나니 우리는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으니 그들이 보기에도 그와 같았을 것이니라.” (민 13:32-33)
그것은 절대로 과장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사실이었습니다. 군사적으로 볼 때 매우 정확하고 옳은 평가와 보고였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신앙적으로 볼 때 옳은 평가와 보고가 아니었다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저들의 현실 이해와 세상 이해는 정확하였습니다. 상황 판단은 옳았습니다. 그러나 저들이 간과한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저들의 편이시라는 것이었습니다.
여호수아와 갈렙은 현실과 세상과 상황도 보았지만 보다 중요한 하나님을 보았습니다. 그리고는 올라가자고 말합니다. 도전하자 말합니다. 싸우자고 말합니다. 능히 이기리라 말합니다.
2006년 새해를 맞이하는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들에게 가장 드리고 싶은 말씀 중에 하나가 지난주일 설교한 신명기 6장 4절 이하의 말씀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말씀과 오늘 본문의 말씀 중 갈렙이 모세 앞에서 백성들을 조옹하게 하고 한 말 “우리가 곧 올라가서 그 땅을 취하자 능히 이기리라”는 말씀입니다.
지난 연말을 보내면서 제가 여러분들에게 드린 말씀 중에 하나는 2006년도 느낌이 좋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말씀드리면 여러분 대부분은 ‘2006년도의 세상은 좀 덜 힘들어 지려는가? 환경과 상황이 좀 나아지려는가? 경기가 회복 되려는가? 정치가 안정되려는가?’와 같은 생각을 하셨을는지 모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은 세상은 세상 때문에 좋아지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은 믿음 때문에 좋아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고 하였습니다. 세상이 바뀌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세상을 바꾸는 것입니다. 그것은 도전을 통해서 입니다. 싸움을 통해서입니다.
그러나 그 싸움과 도전은 우리의 힘과 능력을 힘입어 하는 싸움과 도전이 아닙니다. 그러면 백전백패할 것입니다. 우리의 싸움은 혈과 육의 싸움이 아닙니다. 영의 싸움입니다. 믿음의 싸움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하는 싸움입니다. 골리앗에 대한 다윗과 같은 싸움입니다.
하나님 없는 우리는 메뚜기와 같은 존재이지만, 하나님과 함께 하는 우리는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존재가 된다는 사실을 항시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과 같이 싸우지도 않고 도망하는 죄를 범해서는 안 됩니다. 싸워보지도 않고 포기하고 항복하는 우를 범해서는 안 됩니다.
2006년 둘째 주일 갈렙을 통하여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 새기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 말씀은 이것입니다. <우리가 곧 올라가서 그 땅을 취하자 능히 이기리라.> 이 말씀이 오늘부터 저와 여러분의 평생을 주장하는 말씀이 되실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계산을 잘 해야 합니다
민 13:25-33 / 조상호 목사
미국의 최북단에 위치한 주는 알래스카입니다. 원래 이 알레스카 땅은 여러분들도 잘 아시다시피 미국 땅이 아니라 러시아 땅이었습니다. 그런데 뒤늦은 산업혁명과 사치로 인해 재정이 바닥나자, 러시아는 미국에게 알래스카를 살 것을 제안했습니다. 러시아는 당시 시베리아도 감당 못하고 있었을 만큼 경제적으로 힘이 들었고, 게다가 알래스카가 본토와 연결되어 있지도 않았기 때문에 그 넓은 땅의 국경을 관리하기 위해서 지출되는 비용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알래스카를 단지 얼음의 땅 즉, 불모지로만 인식을 했고, 아직 석유, 등 많은 자원이 매장되어 있다는 사실을 몰랐습니다. 그래서 크림전쟁의 패배에 따른 후유증과 능력 이상의 채무를 지게 된 러시아는 미국에서 알래스카를 살 것을 제안한 것입니다. 당시 미국 국내에서도 얼음 땅을 사서 뭐하려고 하느냐는 식의 비난이 많았고, 특히 의회에서의 반대가 심했습니다. 하지만 우여곡절 끝에 미국의 스워드 국무장관은 1867년에 알래스카의 땅을 1 에이커(약 1,200평)당 2센트(한화로 20원)로 환산해서, 총 720만 달러에 그 땅을 구입했습니다. 그 이후 알래스카는 미국의 영토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거래가 있은 지 얼마 되지 않아 러시아는 엄청나게 후회를 한 반면, 미국은 크게 기뻐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미 거래가 끝났기 때문에 러시아로서는 어찌할 도리가 없었습니다. 알래스카는 미국으로 가는 항공기의 중간 착륙지점으로 활용되어 전략적으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할 뿐 아니라, 미국 석유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곳 중에 하나가 되었습니다. 또 수많은 산림과 천연가스, 석탄, 금, 등의 지하자원과 연어 등을 비롯한 수산자원을 통해 막대한 수입을 가져다주는 보물단지가 되었습니다.
이처럼 개인이나 가정이나 회사나 국가나, 계산을 잘못해서 어려움을 겪을 때가 있습니다. 그것이 있으나마나한 것이라면 별로 상관이 없지만, 개인의 일생을 좌우하는 일이거나, 국가의 흥망성쇠를 좌우하는 경우도 있기 때문에 우리는 계산을 잘 해야 합니다. 지금으로부터 2,000년 전, 예수님께서도 ‘‘계산’‘을 잘 해야 할 것을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누가복음 14장 28절에서 ‘“누가 망대를 건축할 때, 가진 것이 준공할 때까지 충분한지 비용을 게산하지 않겠는가.” 라고 하시며, 어떤 건물을 건축하기 전에 먼저 비용을 계산(estimate)해야 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이어서 31절과 32절에서도 ‘“또 어느 임금이 다른 임금과 싸우러 갈 때에 먼저 앉아 일만으로서 저 이만을 가지고 오는 자를 대적할 수 있을까 헤아리지 아니하겠느냐, 만일 못할 터이면 저가 아직 멀리 있을 동안에 사신을 보내어 화친을 청할찌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10,000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있는 왕이 20,000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있는 왕과 싸울 때, 전쟁에서 승리할 가능성이 있는지 계산을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 군대가 승리할 가능성이 있으면 괜찮지만, 승리할 가능성이 없으면 사신을 보내어 서로 사이좋게 지내자고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전쟁에서 패하여 어려움을 당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성경은 우리로 하여금 아무렇게나 살아가는 무대포식 삶을 가르치지 않습니다. 오히려 성경은 잘 계획하고 그에 따라, 열심히 노력하는 삶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성경은 우리로 하여금 되는대로 살아가지 말고 잘 계산하며 살아갈 것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가르치고 있는 계산방법은 세상에서 가르치는 계산방법과 다릅니다. 세상적인 계산 방법은 눈에 보이는 것을 가지고 합니다만, 하늘나라 계산 방법은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능력을 가지고 합니다. 세상적인 계산 방법은 자기가 가지고 있는 소유나 재능이나 경험, 등을 더하는 방식입니다만, 하늘나라 계산 방법은 하나님을 더하는 방식입니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은 그렇다 치더라도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조차, 하늘나라 계산 방법보다 세상적인 계산 방법을 따르는 경우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하나님의 역사를 염두에 두지 않거나, 하나님의 능력을 계산에 넣지 않는 경우가 있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이 어떤 계획을 세울 때, 하나님의 역사를 여러분의 계획 속에 넣습니까? 여러분이 어떤 것을 결정하려고 할 때, 하나님의 능력을 여러분의 결정 속에 넣습니까?
오늘 본문을 통해 우리는 여러 가지를 배울 수 있지만, 그 중에서도 ‘‘계산을 잘 해야 한다"는 것을 배울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이야기로, 모세는 가나안 땅의 정복에 앞서 12명의 정탐꾼을 보냈습니다. 이들은 40일간 가나안 땅을 돌아보았습니다. 신 광야에서부터 헤브론에 이르기까지 구석구석을 정탐하고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포도 한 송이가 달린 가지를 베어 두 사람이 막대기에 꿰어 가져왔습니다. 40일간의 정탐을 마친 12명의 정탐꾼들은, 바란 광야 가데스에서 기다리고 있는 모세와 아론과 이스라엘 백성들 앞에 나아가, 그들이 가져온 포도송이를 보여주며 보고를 하였습니다. “당신이 우리를 보낸 땅에 간즉 과연 젖과 꿀이 그 땅에 흐르고 이것은 그 땅의 실과니이다.”(27절) 이 말을 쉽게 말하면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이것 보십시오. 이것이 가나안 땅에서 따온 포도송이입니다. 역시 가나안 땅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었습니다.”여기까지는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정탐꾼들의 가나안에 대한 평가는 일치했습니다. 12명 모두 가나안 땅은 살기 좋은 땅이라는 평가를 내렸습니다. 문제는 그 다음입니다. 그 다음 절인 28절을 보겠습니다. “그러나 그 땅 거민은 강하고 성읍은 견고하고 심히 클 뿐 아니라 거기서 아낙 자손을 보았으며, 아말렉인은 남방 땅에 거하고 헷인과 여부스인과 아모리인은 산지에 거하고 가나안인은 해변과 요단 가에 거하더이다.” 여기에서 눈여겨보아야 할 단어는 '그러나'입니다. 바로 이 접속사가 문제입니다. 이 접속사는 불신앙의 접속사입니다. 망하게 하는 접속사입니다. 그런데 이 '그러나'라는 접속사 뒤에 반복하여 언급되는 말이 있는데, 그것은 ‘보았다'는 단어입니다. 28절에서 ‘성읍은 견고하고 심히 클 뿐 아니라, 거기서 아낙 자손을 보았으며', 또 32절에서 ‘두루 다니며 탐지한 땅은 그 거민을 삼키는 땅이요, 거기서 본 모든 백성은 신장이 장대한 자들이며’, 또 33절에서 ‘거기서 또 네피림 후손 아낙 자손 대장부들을 보았나니’ 이렇게 세 번이나 ‘보았다’는 말이 나옵니다. 10명의 정탐꾼들은 가나안 땅이 젖과 꿀이 흐르고 있는 것은 인정했습니다. '그러나' 그 땅의 성은 너무나 크고 견고하다는 것입니다. 가나안 땅이 살기가 좋다는 것은 인정하지만, '그러나' 거기에는 거인의 후손인 아낙 자손이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결국 갈렙과 여호수아를 제외한 10명의 정탐꾼들은 "우리가 보기에도 우리 자신들이 메뚜기처럼 느껴졌는데, 그들의 눈에도 우리가 그 정도밖에 보이지 않았을 것입니다." 라고 악평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우리보다 강하기 때문에, 우리는 올라가서 그들을 절대로 이기지 못할 것입니다."라고 보고하였습니다. 그런데 여호수아와 갈렙 두 사람은 10명의 정탐꾼들과 달랐습니다. 두 사람은 백성들을 안심시키며 "우리가 곧 올라가서 그 땅을 취합시다. 우리는 충분히 이길 수 있습니다."(30절)라고 보고하였습니다. 또 민수기 14장 8절과 9절을 보겠습니다. “여호와께서 우리를 기뻐하시면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시고 그 땅을 우리에게 주시리라. 이는 과연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니라. 오직 여호와를 거역하지 말라. 또 그 땅 백성을 두려워하지 말라. 그들은 우리 밥이라. 그들의 보호자는 그들에게서 떠났고 여호와는 우리와 함께 하시느니라. 그들을 두려워 말라.”
12명은 똑같은 사명을 가지고, 똑같은 행동을 하면서, 똑같은 기간 동안, 똑같은 산을 보았고, 똑같은 사람들을 보았고, 똑같은 장소를 보았고, 똑같은 과일을 보았고, 똑같은 땅을 보았습니다. 10명의 사람만 신장이 장대 같은 거인을 본 것이 아닙니다. 여호수아와 갈렙도 신장이 장대 같은 거인을 보았습니다. 10명의 정탐꾼들만 남쪽에는 아말렉 사람이 살고, 산지에는 헷인과 여부스 사람과 아모리 사람 살고, 해변과 요단에는 가나안 사람이 살고 있는 것을 본 것이 아니라, 여호수아와 갈렙도 똑같이 보았습니다. 10명의 정탐꾼들만 가나안에 있는 성읍이 견고하고 심히 큰 것을 본 것이 아니라, 여호수아와 갈렙도 가나안에 있는 성읍이 견고하고 심히 큰 것을 보았습니다. 10명의 정탐꾼들만 그곳에 거인들의 후손 아낙 자손이 있는 것을 본 것이 아니라, 여호수아와 갈렙도 그곳에 거인들의 후손 아낙 자손이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무엇을 말하고 있습니까? 똑같이 본다 할지라도 어떤 눈으로 보느냐가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눈이 좋지 않은 분들을 제외하고 사람들은 다 봅니다. 그러나 어떤 눈으로 보느냐에 따라 결과가 달라집니다.
1986년 11월24일자 시사주간지 `뉴스위크'에 미국 텍사스주에 사는 `로이 웨스틴'이란 사람의 이야기가 실린 적이 있습니다. 그는 수석(壽石) 전람회에 참석했다가, 마음에 드는 진기한 돌을 발견했습니다. 그런데 푸르고 회색 빛깔을 띤 이 돌에는 15불이라는 가격표가 붙어 있었습니다. 그는 주인에게 값을 깎자고 흥정을 하여, 결국 10불을 주고 그 돌을 사게 되었습니다. 집으로 돌아와 그 돌을 자세히 보는데, 이상한 예감이 들어 그 돌을 정밀 감정시켰습니다. 그런데 그 감정결과는 모든 사람을 놀라게 했습니다. 그 돌은 보통 돌이 아니라, 자그마치 1900 카랏트 `사파이어' 원석으로서, 지금까지 알려진 것으로는 전 세계에서 가장 큰 사파이어였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웨스틴이란 사람은 세계에서 가장 큰 사파이어를 단돈 10불에 샀던 것입니다. 그러나 돌의 원래 주인은 이 귀한 보물을 헐값에 팔았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는 그 돌이 보물인지 몰랐기 때문입니다. 만약 그가 그렇게 엄청난 보물인줄 알았더라면, 분명히 자기 목숨보다 더 귀하게 여겼을 것입니다. 그러나 안타깝고 어리석게도 보통 돌인 줄로 생각하고 단돈 10불이 팔았던 것입니다.
이 이야기에서 우리는 값진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다. 보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어떤 눈으로 보느냐가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똑같이 한 개의 사과를 보면서도 어떤 사람은 한 개 밖에 보지 못합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그 사과 속의 씨를 보면서 미래에 열릴 수 천, 수 만개의 사과를 봅니다. 사람의 눈으로 보면, 별 볼일 없게 보입니다. 그러나 영적인 눈으로 보면 하나님의 역사를 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 사람의 눈으로만 보지 말고, 믿음의 눈으로 보시기 바랍니다. 현재만 보지 말고, 영광스럽게 펼쳐질 미래를 보시기 바랍니다.
10명의 정탐꾼들이 40일 동안 잘못 본 것이 아닙니다. 정확히 보았습니다. 성벽의 크기를 정확히 보았습니다. 그 곳에 사는 사람들이 자기들보다 머리 하나 더 큰 것을 보았습니다. 보기는 정확하게 보았습니다. 그러나 못 본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렌즈로 보지 못하고 자기들 눈으로 보았습니다. 결국 그러한 시각이 그들로 하여금 정반대의 보고를 하게 했습니다. 2명은 가능하다고 했지만, 10명은 불가능하다고 했습니다. 10명은 ‘우리는 능히 올라가서 그 백성을 치지 못하리라’라고 보고를 했지만, 여호수아와 갈렙 두 사람은 ‘우리가 올라가자. 그 땅을 취하자. 능히 이기리라’고 보고했습니다. 10명은 "리는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습니다."고 말한데 반해, 2명은 오히려 “그 땅 사람들은 우리 밥에 지나지 않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여러분, 무엇이 이처럼 다르게 보고하게 만들었을까요? 무엇 때문에 12명의 정탐꾼들이 서로 다른 보고를 하게 되었을까요? ‘계산의 차이’ 때문입니다. 10명의 정탐꾼들은 눈에 보이는 것만 생각했습니다. 그 땅을 사방으로 두르고 있는 견고한 성들과 그 안에 살고 있는 몸집이 큰 아낙 자손들을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430년 동안 종살이하다가 가까스로 탈출하여 변변한 무기 하나 없이 초라한 자기 백성들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아무리 머리를 굴리고 또 굴리고, 아무리 계산을 하고 또 계산을 해도 이길 수 있는 가능성이 전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 땅을 정복하는 것이 어렵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어떻게 보면, 그들의 계산은 매우 합리적입니다. 매우 논리적입니다. 누가 봐도 그들의 계산이 옳은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그들의 계산에서 빠뜨린 것이 있습니다. 그들이 무엇을 빠뜨렸습니까? 그들이 무엇을 빼먹고 계산했습니까? 하나님을 빠뜨렸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빼먹고 계산을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여호수아와 갈렙, 두 사람은 달랐습니다. 그들 두 사람은 10명과 달리, 하나님을 그들의 계산에 포함시켰습니다. 두 사람은 그 동안 인도해 주신 하나님의 역사를 기억하고 있었을 뿐 아니라,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까지 인도해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습니다. 그리고 그 약속을 분명히 이루어 주실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하나님의 능력을 그들의 계산에 넣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들은 어떻습니까? 여러분들이 무언가를 계획할 때, 10명의 정탐꾼들처럼 하나님의 능력은 배제한 채, 계획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여러분들이 무언가를 계산할 때, 여호수아와 갈렙처럼 하나님의 능력을 포함하여 계산하고 있습니까?
예수님께서 벳세다 광야에 모인 5,000명이 되는 무리를 보시고 빌립에게 이렇게 질문하신 적이 있습니다. “우리가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로 먹게 하겠느냐?“ 그 때 빌립은 "각 사람으로 조금씩 받게 할지라도 이백 데나리온의 떡이 부족하리이다."(요6:7)라고 대답했습니다. 빌립은 계산을 잘하는 사람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계산을 잘하지 못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그의 계산속에 예수님의 능력과 예수님의 역사를 넣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안드레는 달랐습니다. 안드레는 "여기 한 아이가 있어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졌나이다. 그러나 그것이 이 많은 사람들에게 얼마나 되겠삽나이까?"(요6:9) 라고 주님께 대답했습니다. 비록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는 5,000명을 먹일 수 없었지만, 안드레는 그 적은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에다가 예수님의 능력을 넣었습니다. 결국 예수님께서는 안드레의 계산대로, 어린 소년 하나의 도시락 밖에 되지 않는 5병2어를 가지고 남자만 5,000명, 어린아이와 여자들을 포함하면 최소 20,000여명 이상을 먹이고, 12바구니나 거두는 기적을 일으키셨습니다. 그러니까 5병2어 기적은 예수님을 계산에 넣었던 안드레를 통해서 일어난 것입니다. 그러나 가정이지만, 만약 예수님의 능력을 빼놓은 빌립의 계산방법만을 따랐다면, 결코 5병2어의 기적은 존재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주위에 보면, 두 종류의 그리스도인으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똑같이 예수님을 믿는 것처럼 보이지만, 안드레처럼 예수님을 계산에 넣는 그리스도인들이 있는가 하면, 빌립처럼 예수님을 계산에 넣지 않는 그리스도인들이 있습니다. 똑같은 교회처럼 보이지만, 주님을 계산에 넣는 교회가 있는가 하면, 주님을 계산에 넣지 않는 교회가 있습니다.
요즘이야 많이 좋아졌지만, 과거 미국에는 흑백인종 문제가 심각했었습니다. 한번은 어느 흑인이 예배를 드리려고 교회에 갔지만, 안내를 맡고 있던 백인 교인이 예배당 안에 들어가는 것을 막는 것이었습니다. 할 수 없이 이 흑인은 예배당 안에 들어가는 것을 포기하고 밖에 있는 계단에 쭈그리고 앉아서, 안에서 울려오는 파이프 오르간 소리와 성가 소리를 들으면서 예배를 드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예배를 드리고 있는 그가 환상을 보게 되었습니다. 환상 중에 흰 옷을 입은 주님께서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그 흑인의 어깨를 치면서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어찌 여기 있느냐?" 계단에 쪼그리고 앉아 있던 흑인이 대답했습니다. "저의 얼굴이 검어서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그 말을 들으신 주님께서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그래, 나도 그 예배당엔 못 들어간단다."
저는 이 이야기가 여러 가지를 교훈하고 있지만, 그 중에 빼놓을 수 없는 것은 오늘날 주님이 계시지 않는 교회가 있다는 것입니다. 건물은 분명히 교회인데, 실제로는 교회 안에 주님이 사라진 채 세상의 논리가 판을 치고 있는 교회가 있습니다. 예배 시간에는 멋진 악기로 연주를 하고, 입을 열어 찬양을 드리고, 뜨겁게 기도도 하지만, 예배가 끝나고 나면 하나님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채 세상의 원칙만을 주장하는 소리만 들리는 교회가 있습니다. 말씀을 듣기는 듣지만, 교회당 문을 열고 나오면, 말씀을 의지하기보다 세상적인 경험과 상식만을 앞세우는 성도가 있습니다. 노동운동가이면서 저항시인으로 알려진 박노해 시인은 ‘나쁜 사람’이란 말이 ‘나뿐인 사람’에서 나왔다고 주장한 적이 있습니다. 저는 “나뿐인 사람이 나쁜 사람입니다”라는 이 말이 진리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 없이, 나만 생각하는 사람은 나쁜 사람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 없이 살아가는 사람은 나쁜 삶을 살 수밖에 없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어떤 사업을 할 때나 어떤 어려운 일을 만날 때, 주님을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주님의 능력을 기억하고 주님의 도우심을 구하시기 바랍니다. 어떤 능력 있는 사람을 부르기 전에, 돈을 가지고 일을 시작하기 전에, 우리 속에 역사하시는 예수님의 능력을 계산속에 넣으시기 바랍니다. 만약 우리가, 우리 가정이, 우리 교회가 주님의 크고 놀라운 역사를 계산속에 넣는다면, 그 역사가 우리 속에 실제로 이루어질 줄로 믿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구경하는 것을 싫어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아마 전에 소개한 것 같은데, 미국 야구잡지에 실렸던 이야기입니다. 미국 메이저리그의 대표적인 팀인 뉴욕 양키즈의 포수로 활약했었던 ‘요기 베라’라는 유명한 선수가 있었습니다. 시합 중에 수비를 하면서 쭉 보고 있는데 상대편 선수 ‘가라시 올라’라는 선수가 타자로 나와서 스윙을 몇 번 하더니, 매트에다가 십자가를 그렸습니다. 그러자 요기 베라가 심판에게 타임을 요구하고 나서, 십자가를 긋는 가라시 올라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도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고 자네도 하나님을 믿는 사람인데 하나님이 이런 형편에 누구 편을 들 수 있겠나? 그러니 하나님께서 이 경기를 구경만 하시도록 내버려두자.” 그러자 가라시 올라가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내가 들은 설교말씀에 의하면, 하나님은 구경하시는 것을 제일 싫어하시는 분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구경하는 것을 싫어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을 의지하고, 열심히 기도하고 있는데, 하나님이 뒷짐 지시고 가만히 구경하시는 분 아닙니다. 우리가 안드레처럼 하나님을 우리의 계산속에 넣는다면, 하나님께서는 5병2어의 기적을 우리에게도 허락해 주실 줄로 믿습니다. 만약 우리가 주님의 크고 놀라운 역사를 계산속에 넣는다면, 그 역사가 우리의 삶 속에서 실제로 나타날 줄로 믿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제 일본의 뇌성마비 시인 ‘미즈노 겐조' 이야기를 소개하고 말씀을 맺겠습니다. 그의 이야기를 아마 들어보신 분들이 많을 것입니다. 그는 입과 눈알만 움직일 수 있고, 온몸을 꼼짝할 수 없는 불구자였습니다. 그가 눈짓으로 혹은 입술로 ‘아이우에오’를 집어가며 쓴 시집이 있습니다. 그 시집 이름이 <네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입니다. 일본은 물론 한국에서도 10판을 거듭 인쇄하여 24,000부가 발행된 시집입니다. 그는 이런 고백을 했습니다. "사랑 많으신 아버지 하나님은 -(마이너스)를 +(플러스)로 바꾸는 능력의 하나님이시다."
그렇습니다. 십자가는 -(마이너스)가 아니라, +(더하기)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우리는 우리 혼자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더해야 합니다. 물론 요즘 다들 어렵다고 합니다. 영주권 따기가 어렵고, 공부하기가 어렵고, 돈 벌기가 어렵고, 살기가 어렵다고 합니다. 아니 실제로 이 자리에도 어려움을 겪고 있는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는 줄로 믿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가 되시는 줄로 믿습니다. 우리는 이길 수 있습니다. 여호수아와 갈렙처럼 우리가 하나님을 계산에 넣고 하나님을 철저하게 의지한다면, 하나님께서는 우리 앞을 가로막고 있는 문제를 밥으로 만들어주실 줄로 믿습니다. 여러분, 저는 여러분들이 계산 잘 하는 사람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눈에 보이는 것만을 계산하는 10명의 정탐꾼과 같은 사람이 되지 말고,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우리와 함께 하시고 우리를 인도하시고 우리를 도와주시는 하나님을 계산이 넣었던 여호수아와 갈렙과 같은 사람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비전을 가진 그리스도인
민 13:25-33 / 서정호 목사
"과거 있는 사람은 용서할 수 있지만 미래 없는 사람은 용서할 수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현재는 좋지만 미래가 없는 사람을 선택할 것인가요? 아니면 현재는 힘들어도 5년 후 10년 후가 좋은 사람을 선택할 것인가요? 5년 후, 10년 후가 더 좋은 사람이 되려면 비전이 있어야 하고 또한 그 비전을 위해 살아가야 합니다. 비전은 우리가 생각하는 큰 꿈이 우리의 현실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고 추진하는 능력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다른 사람들은 감히 시도하지 못하는 것을 시도하는 사람이 비전의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비전 있는 사람이 되려면 울타리를 치며 항상 그 자리에 머물러 있어서는 안 되고 제자리 뛰기하며 만족하는 사람이 아니라 멀리뛰기를 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하루를 살아가면서 어제보다는 나은 오늘로, 또 내일을 맞이할 때는 오늘보다는 나은 내일로 맞이할 수 있어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성실한 삶을 살아야 하기도 하지만, 우리는 비전을 가진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모든 사람은 크던 작던 꿈을 가지고 있는데 그 꿈을 이루기 위하여 도전정신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 주위에는 수많은 그리스도인이 있지만 하나님이 주신 복을 제대로 누리지 못하는 원인은, 우리의 마음이 그것을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마음의 힘은 ‘하나님 안에서 품는 긍정의 힘’이기 때문입니다. 현대인들은 긍정보다 부정을 선택하고 기쁨보다 걱정을 선택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걱정과 근심이 미래를 준비한다고 생각합니다. 이 얼마나 커다란 착각인가요? 긍정을 선택하고 기쁨을 선택하고 걱정을 버리며 높은 단계로 도약하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하며 가정이 번창하고 꿈이 이루어지는 순간을 상상하며 머리와 가슴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상상해야 실제로 그것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럴 때 여러분의 삶은 최선이 될 것입니다.
새로운 기회
대부분의 사람들은 어제 살았던 방식이 오늘의 삶을 결정하게 됩니다. 하지만 내일의 삶은 바로 오늘 어떻게 살아가느냐에 달려있습니다. 매일 매일이 새로운 기회가 되는 것이고 자기가 원하는 방식대로 살 수 있는 기회입니다. 지난날의 생각들에 이젠 더 이상 집착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삶을 살아갈 때 항상 꿈을 꾸거나 계획을 세우게 되는데 과거에 집착했던 지난날의 기억들 모두 떨쳐버리고 내일의 새로운 기회를 위해서 오늘의 삶의 계획을 다시 세우는 일. 그 새롭고도 중요한 계획들을 매일 매순간 세워보는 것은 어떨까요?
사람들이 만나서 명함을 주고받을 때 다음의 글로 넣으면 어떨까요? "우리가 만난 후 당신이 나를 잊는다 해도 당신은 잃는 것이 전혀 없습니다. 그러나 당신이 예수님을 만난 후 그분을 잊는다면 당신은 모든 것을 잃게 됩니다." 여러분, 예수님을 잊고 모든 것을 잃어버리는 어리석은 자가 되지 않으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은 어떤 꿈이 있습니까? 원하는 것이 무엇이며 되고 싶은 것이 무엇입니까? 되고 싶은 것, 하고 싶은 것, 갖고 싶은 것이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절망에 빠져 인생을 포기한 사람에게도 소원이 있습니다. 어떤 소원이냐면 "죽고 싶다"는 것입니다. "빨리 죽게 기도해 달라"고 부탁하는 분이 계셨습니다. 어떻게 살아 있는 사람을 "빨리 죽게 해 달라"고 기도하겠습니까? 그래서 "하나님, 건강하게 하시고 평안하게 하셔서 오래 오래 살게 해 주시옵소서."라고 기도했더니 그 분은 큰소리로 "아멘"하시는 것이었습니다. 며칠 지나서 그분을 만나서 "어디 가세요?"라고 여쭤봤더니 "허리가 아파서 약국에 가요"라는 것이었습니다. 죽게 해 달라고 기도 요청하던 분이 아프다고 약국에 가셨습니다. 사람이 "죽고 싶다"고 하는 말은 자신이 원하는 것, 되고 싶은 것, 하고 싶은 것을 지금 할 수 없어서 속상하다는 표현입니다. 나이 드신 어른들이 "아유, 내가 빨리 죽어야 되는데"라고 하시는 것은 100% 마음에 안 드는 일이 있어서 하는 말씀이라고 합니다.
비젼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꿈을 이루어 가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무엇인가 ‘되고 싶고, 갖고 싶고, 하고 싶은 것’ 이 있지만 야망과 비전을 구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야망과 비전은 다른데, 야망이 "자신의 만족을 위한 것"이라면 비전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꿈을 이루어 가는 것"입니다. 비전은 눈앞에 있는 것을 보는 것이 아니라 눈앞에는 없지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꿈꾸며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을 믿고 이루어 가는 것입니다. 사실 예수 믿는 사람들은 모두 비전을 가졌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며, 지금 확인되지 않은 천국에 간다는 사람이고, 아무도 증명해 내지 못한 영생을 산다고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 면에서 예수 믿는 사람들은 모두 비전을 소유한 사람들입니다. 히브리서 11장 1절에 보면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비전을 담은 고백입니다.
성경에 나타난 여러 사람을 보아도 하나님을 향해 있을 때와 하나님을 등졌을 때의 삶이 달라졌고 말과 행동이 달라졌습니다. 다윗이 비전을 가졌을 때는 골리앗을 눕힐 수 있었으나, 그것을 잃자 자신의 정욕조차 다스릴 수 없었습니다. 사울이 비전을 가졌을 때 많은 왕들을 정복할 수 있었으나 그것을 잃었을 때 자신의 질투심도 다스릴 수 없었습니다. 노아가 비전을 가지고 있었을 때는 방주를 지어 인류의 존속에 기여할 수 있었으나 그것을 잃었을 때는 술에 취해 부끄러운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엘리야가 비전을 가지고 있었을 때는 하늘로부터 불을 내릴 수 있었으나 그것을 잃었을 때는 이세벨을 피하여 도망하였을 뿐 아니라 자살까지 하려고 하였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지금 힘들고 어렵다면 "지금 내가 하나님을 등지지 않았는가" 한번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비전은 보는 것이다.
비전은 남이 볼 수 없는 것, 남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는 것입니다. 우리의 눈은 보이는 대로 보는 것이 아니라 보고 싶은 대로 봅니다. 그래서 "제 눈에 안경"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보기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데도 좋아서 어쩔 줄 몰라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다 "제 눈에 안경"입니다. 눈은 보이는 대로 보는 것이 아니라 보고 싶은 대로 보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민수기 13:30-4:10절 말씀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홍해를 건너 광야에 도달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전에 그 땅을 정탐하기 위해 12지파의 족장들을 보냈는데 40일 동안 가나안 땅을 정탐한 12명의 족장들이 돌아와서 보고를 했습니다. 열 명은 "그 땅은 거민을 삼키는 땅이요 우리가 갈 수 없는 땅, 거기는 성이 견고하고 그 사람들은 키카 크고 굉장한 사람들이기에 거기에 갈 수가 없습니다."라고 절망적인 보고를 했는데 여호수아와 갈렙은 똑같은 땅을 보고 와서 "그 땅은 참으로 아름다운, 심히 아름다운 땅이고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고 했습니다. 열 명은 거기는 사람들의 키가 크고 성이 견고하기 때문에 들어갈 수 없다고 했지만 여호수아와 갈렙은 "두려워하지 말라 그들은 우리 밥이라, 여호와는 우리와 함께 하시느니라"(민14:9)고 했습니다. 똑같은 것을 보고 왔는데 열 사람이 본 것과 두 사람이 본 것이 다릅니다. 눈은 마음속에 어떤 생각을 가졌느냐에 따라 다르게 보이는 것입니다.
비전을 가진 그리스도인은 믿음의 눈으로 봅니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눈으로 미래를 보고, 사람을 보고, 그리고 사건을 보는 것이 비전입니다. 이 세상에는 몽상을 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몽상이라는 말은 "꿈속의 생각, 실현될 가능성이 없는 생각"을 말합니다. 몽상가는 생각은 하지만 계획하지 않습니다. 몽상가는 말은 하지만 행함이 없습니다. 시작하지 않습니다. 몽상가는 뭔가 하려고 하는 것 같아도 배우거나, 훈련받거나 간섭받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노력하지 않습니다. 몽상가는 고난을 거절하고 힘든 것을 하려고 하지 않고 오직 입으로만 잘 합니다.
비전을 가진 사람은 생각하며 계획하고, 행동하며, 훈련받기를 감당합니다. 믿음 안에서 비전을 가진 사람은 다릅니다. 그는 말하기보다 행동합니다. 기꺼이 배우고 훈련받고 고난에 동참하기를 즐겨합니다. 한 마디로 비전을 가진 사람은 비전을 위한 정당한 값을 치룰 각오가 되어 있는 사람입니다.
세상의 어떤 일도 대가를 치루지 않고 이루어진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기도만 하고 가만히 앉아서 무엇이 될 줄로 생각하는 사람은 "몽상가"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하나님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값을 치루시고 우리들을 구원하시는 분입니다. 아무리 통성으로 기도하고 금식하며 기도해도 공부하지 않는 학생은 시험에서 점수를 잘 받을 수가 없습니다. 밤새 철야기도 하고 중간고사 볼 때 "주여 믿습니다."하고 연필을 굴려 보아도 소용없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그런 하나님이 아닙니다.
비전을 품고 달라지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변화하려면 눈물이 있고 고통이 있습니다. 익숙한 것과 결별해야 하고 때로는 편안하고 안락한 것을 포기해야 하며 집착하던 것을 놓아야 하고 아끼며 붙들고 있던 것을 던져버려야 합니다. 우리가 우리 속에 있는 하나님의 위대한 계획을 믿음으로 발견하였다면 비전을 방해하는 것을 기꺼이 내 버릴 수 있어야 합니다. 마음에 새겨 두고 잊지 않는 "집착"은 변화의 큰 장애물입니다. 집착을 버려야 새로운 세계가 열립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부름을 받았을 때 그들은 자기 존재에 대해 새롭게 눈뜨게 되었습니다. 자기들이 사람 낚는 어부가 될 수 있음을 보고서 배와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좇았습니다(마4:20~22). 제자들이 가진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를 수 있었던 것은 비전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비전을 가진 사람은 어려움과 문제들을 각오해야 한다.
폴 하비(Paul Harvey)는 "성공의 도상에 있는지 아닌지는 항상 알 수 있다. 성공하는 길은 언제나 오르막이다"라고 했습니다. 힘들고 어려운 길이라는 말입니다. 비전을 가진 사람은 방해물과 곤고함, 반대와 낙담, 실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함께 하실 것을 믿고 끝까지 목표를 향하여 나가는 단호한 결심을 가진 사람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장애물로 여기고 불가능한 것이라 말하는 것도 비전을 가진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나를 실패하게 하신 것, 눈물 흘리게 하신 것, 어려움을 겪게 하신 것에 모두 하나님의 뜻하심이 있다"고 믿고 낙망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선하고 온전하신 뜻이 이 일을 이루게 하실 것이라고 믿고 낙망하지 않는 것입니다.
비전을 가진 사람은 비전을 함께 할 사람을 사귀어야 한다.
우리는 결코 혼자 살아갈 수가 없는 더불어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가깝게 지내는 사람을 보면 그 사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람, 승리하는 사람, 비전을 가진 사람은 모범이 될 만한 사람을 사귀어야 합니다. 여러분은 어떤 사람과 가까우십니까? 어떤 사람을 자주 만나십니까? 자기가 만나는 사람이 자기보다 나은 사람인가 확인해 보세요. 나은 사람을 바라보고, 나은 사람을 닮으려 하고, 나은 사람을 가까이 하고 사귀려 해야 합니다.
신앙도 그렇습니다. 기도하는 사람을 바라보며 닮으려하고 가까이하려 하며 사귀려 해야 합니다. 감사하는 사람을 바라보며 닮으려하고 가까이 하며 사귀려 해야 합니다. 범사에 감사하며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사람을 가까이 하고 사귀면 그 사람에게도 감사할 조건이 생길 것입니다. 아무나 다 사귀면 안됩니다. 여러분도 감사하며 감사의 대상이 되도록 사시기 바랍니다. 예수 믿는 우리는 하나님 마음에 합하려 노력하는 사람, 주일을 잘 지키고, 예배를 귀중히 여기는 사람, 빛이 되고 소금되려 애쓰는 사람을 바라보며 닮으려하고 가까이 하며 사귀려 해야 합니다. 성실하게 노력하는 사람을 바라보며 닮으려하고 가까이 하며 사귀려 해야 합니다.
"집에서 가까운 교회가 좋은 교회이며 예수 믿는 사람은 가까운 교회에 출석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정말 그럴까요? 먼 교회가 좋은 교회라는 뜻도 아닙니다. 거리가 문제가 아닙니다. 가까운 곳에 유치원이나 학원이 있으면 무조건 그리로 아이를 보내나요? 가까운 곳에 식당이 있으면 거기만 갑니까? 실력이나 적성 그리고 장래희망에 상관없이 가까운 곳에 대학이 있으면 무조건 그리로 가나요? 그런데 교회는 가까운 곳에 가야 한다고 하는 것은 '편의주의적인 생각' 일뿐 신앙적이지는 못한 말입니다.
좋은 교회는 멀어도 다닐 가치가 있습니다. 집 가까운 교회에 나가는 것이 좋다고 주장하려면 '먼저 출석할 교회를 정해 놓고 그 교회에서 가까운 곳에 살집을 준비해야 옳은 것'입니다. 집을 먼저 정해놓고 가까운 교회를 찾는 것은 신앙적인 바른 태도가 아닙니다. 예배자는 가까운 교회가 아니라 좋은 교회를 찾아야 합니다. 교회를 신중히 정해야 하는 중요한 이유는 우리의 영적인 문제와 적결되기 때문입니다. 좋은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이 바르게 선포되는 교회이며 성도들은 주일을 주일답게 거룩하게 지키고, 예배를 예배답게 정성을 다해 드리며, 하나님 말씀이 선포되는 설교를 귀중히 여기며, 바르게 선포되는 말씀에 '아멘'하고 순종하는(딤후4:3-4) 교회가 좋은 교회입니다.
생명력 있는 교회가 좋은 교회입니다.
이 세상에는 살아있는 것 같으나“거룩한 모양만 있고 능력이 없는”죽은 교회(계3:1)가 있습니다. 그리고 병든 교회, 졸고 있는 교회가 있습니다. 생명력 있는 교회는 말씀이 살아있고 그 말씀을 따라 살아가는 성도들의 삶이 살아있습니다. 살아있는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고 행하기 위해 끊임없이 움직이며 꿈틀거리는 교회입니다. 한마디로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 안에서 존재하는 교회 같은 교회가 좋은 교회입니다. 이 땅에는 하나님 한 분의 눈치를 보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눈치를 보며 목회하며 사역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하나님 한 분의 눈치만 보며 사역하는 교회, 지도자와 일반교인들이 평안하여 서로 귀중히 여기며 다툼이 없는 교회가 좋은 교회입니다.
그러면 우리 영암교회는 어떤 교회입니까? 제 생각에 '영암교회는 좋은 교회'이지만, 영암교회에도 입을 쭉 내민 “오리 입을 가진 사람”들도 있지만 오리 입보다는 예쁜 입을 가진 교인들이 더 많습니다. 교회를 찾으면 마음이 편하고, 예배를 드리면 감사가 넘치고, 말씀을 들으면 깨달아지며 새로운 결단을 하게 되고, 힘이 들어도 봉사하는 기쁨이 있고, 헌금을 드려도 부족함에 죄송한 마음이 들고, 자신이 좋은 교회에 출석하는 자부심이 생기고 '어떻게 하면 하나님 마음에 합한 삶을 살까'하는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많은 교회가 좋은 교회입니다.
좋은 교회는'중심'과 '초점'이‘예수그리스도의 복음'입니다. 예수님이 중심입니다(히12:2). 좋은 교회는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만 바라보는" 교회입니다(히12:2). 예수님 중심으로 하나님 말씀대로 움직여 가는 교회가 좋은 교회입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상적인 교회, 완전한 교회는 이 땅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당연히 영암교회도 흠이 많습니다. 교회는 노아의 방주와 같아서 방주 속에 각종 짐승들이 들어갔던 것처럼 각종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이 교회이기 때문에 거기에 냄새도 나고 시끄럽기도 하고 마음에 안 드는 사람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모여서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마음에 드는 삶을 살까?" 노력하며 애쓰는 교회가 좋은 교회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 하면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어떻게 하면 좋은 사람을 사귈까, 기도하고 감사하며 사는 사람을 사귈까,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삶을 살까” 애쓰고 노력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의 꿈은 “내가 되고 싶은 것, 내가 꿈꾸고 있는 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일까?”하는 것을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
견고히 서고 흔들리지 말아야 한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일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많이 배웠어도 경험이 많아도 이 세상이 쉽지 않습니다. 얼마나 어려운지 모릅니다. 이 세상은 살기가 어렵고 살벌합니다. 우리보다 똑똑하고 잘 난 사람, 큰 사람이 많습니다. 그러나 세상이 그렇다고 해서 우리 스스로 '자기 자신을 메뚜기로 여기며 살면 안 됩니다.' 세상이 높고 잘난 사람이 많아도, 비록 힘이 들고 어렵지만, 가족의 문제, 자녀, 사업 등에 문제가 있고, 삶이 힘들다 해도 “하나님께서는 나와 함께 계십니다. 하나님이 범사에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 주실 것입니다(롬8:28). 비록 이 땅의 사람들이 인정하지 않아도 하나님은 우리를 붙드시고(시55:22)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않으실 것입니다”(요14:18)라는 확신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여러분은 스스로 자신이 메뚜기인가? 아니면 저들이 자신의 밥인가요? 하는 그것은 여러분이 비전을 가졌느냐 아니냐에 달려 있습니다. 자신을 메뚜기로 보고 사십니까? 아니면 저들을 밥으로 보십니까?
격려자 갈렙
민수기 13 : 25-33
역사의 획을 긋고 가는 많은 사람들을 보게 되면 그들을 돕는 파트너가 있었습니다. 연극이나 연속극을 볼 때에 주배우뿐 아니라 조연배우도 있습니다. 갈렙은 모세의 조력자로 조연 배우와 같은 위치입니다. 민수기 13장 6절에서 그는 유다지파로 명기되어 있으나 여호수아에서는 그니스 사람으로 나옵니다. 즉, 어떻게 보면 유다 사람인데 본래는 이방 사람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이방인 갈렙이 유대인의 하나님을 믿고 유대인을 위로하고 격려했습니다. 무엇보다 그는 역사 인식이 바르게 되어있는 사람이었습니다.
Ⅰ. 하나님의 성실하심을 기억하라(과거)
갈렙은 과거에 하나님의 성실하심을 기억했습니다. 옛날에 자기백성을 얼마나 성실하게 인도하시고 도우셨는지 확실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22절을 보면 갈렙과 다른 11명의 정탐꾼들이 네게브라는 곳에 올라가 헤브론으로 갔다고 나옵니다. 헤브론과 이스라엘 민족은 아주 특별한 관계가 있습니다. 헤브론에는 아브라함, 이삭, 야곱, 사라의 무덤이 있습니다. 다시 말해 이스라엘의 혼이 깃든 곳인 것입니다. 그런데 헤브론을 본 정탐꾼들이 돌아와 하는 말이 실패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갈렙과 여호수아는 하나님의 약속으로 말미암아 능히 이길 것이니 쳐들어가자고 합니다. 오늘날 과거는 이미 지나간 것이라며 붙잡히지 말라고 잊으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과거에 받은 은혜까지 잊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지금 현재의 불안과 미래의 두려움을 이길 수 있는 방법은 과거에 하나님이 나를 어떻게 사랑하고 인도하셨는지를 생각하고 믿는 것입니다.
Ⅱ. 하나님의 축복을 보라(현재)
하나님께서는 과거에만 복을 주신 것이 아니라 현재에도 축복의 포도송이를 주고 있음을 이스라엘 백성에게 보여주고 계십니다. 또 ‘두려워 하지 말라…여호와는 우리와 함께 하시느니라’(9절)라는 말씀으로 과거에도 함께 하셨고, 현재도 우리와 함께 하심을 알려주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주셨습니다. 성령님을 보내주셨으며 성경을 주셨고 위로와 축복을, 친구와 사랑하는 이들을 그리고 사고 능력과 마음도 주셨습니다. 이 것은 과거에만 주셨던 것이 아닌 지금도 우리에게 주어지고 있는 것들입니다.
Ⅲ. 하나님은 우리의 미래도 붙잡고 계신다(미래)
미래의 약속은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대로 12지파가 그 증거입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문제가 있다면 그것은 힘이 없거나 모자란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내게도 약속을 주셨음을 우리는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약속을 믿어야할 것입니다. ‘예수께서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평안을 주셨습니다.(요 14 : 27)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또 증인의 삶을 살 수 있도록 힘과 능력을 주셨습니다.(행 1 : 8)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너를 인도하시리라’(잠 3 : 5)그리고 성령의 인도를 받게 하셨습니다.
*결론을 말씀드립니다
신앙은 대리만족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갈렙의 신앙을 듣고 보는 것으로 족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의 신앙이 나의 신앙이 되어야 합니다. 오들도 역사의 주권자는 하나님이심을 믿는 역사의식을 우리는 가져야 할 것입니다. 과거에 하나님은 내게 성실하셨으며 현재도 하나님의 축복을 우리에게 주고 계심을 기억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은 나의 미래를 붙잡고 계심을 믿어야 합니다.
믿음의 눈, 긍정의 눈
민 13:25-33 / 이동규 목사
커밍 워크라는 사람은 성공의 요인을 네 가지로 말했습니다. 첫째는 "머리"(I.Q)가 좋아야 하며, 둘째는 "지식"(Knowledge)이 있어야하며, 세째는 "기술"(Technique)이 있어야 하며, 네째는 "태도"(Attitude)가 중요하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 네가지 요인중에서 성공에 93%이상으로 결정적인 영향을 주는 것은 바로 "태도"라고 했습니다. 모름지기 태도가 모든 것을 결정합니다. 믿음도 마찬가지입니다. 믿음은 바로 태도입니다.
태도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밝혀주는 사건이 바로 오늘 본문의 사건입니다.
이스라엘은 가데스 바네아에서 정탐꾼을 보내기로 결정했습니다. 모세가 보낸 게 아닙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먼저 보내자고 결정했습니다.(신1:22) 모세는 이를 허락했을 뿐입니다. 어쨋든 결론적으로 이 사건으로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 진입은 40년 간 보류됩니다.
이스라엘은 그냥 하나님의 약속을 굳게 믿고 가나안 땅으로 들어갔으면 가장 좋았을 것입니다. 만약 이스라엘이 정탐꾼을 보내지 않고 약속을 바위처럼 믿고 나아갔으면 아마 가데스 바네아에서 네게브 사막을 거처 헤브론으로 그냥 진입했을 것입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가나안을 나흘 길도 채 안 걸려 얻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100% 완전히 신뢰하지 못한 결과입니다. 머리를 굴리고 재고 판단했습니다. 그러나 결과는 어떠했습니까? 나흘길이 사십 년으로 지체된 것뿐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재거나 판단할 대상이 아니고 믿고 나아갈 대상입니다. 정탐하고 두드려 보고 따져 보고 판단해 보는 것, 하나님의 약속에는 안 하는 게 더 좋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인간 이성의 잣대로 따져봐서 이득 될 게 하나도 없습니다. 이스라엘은 정탐꾼을 보내 정보를 얻어 가장 합리적인 판단으로 진입작전을 결정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결과는 일대 혼란뿐이었습니다. 또 만에 하나 정탐을 했다손 치더라도 긍정의 눈으로 보고 와서, 긍정의 믿음으로 행진했으면 별 탈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마져 실패를 했습니다. 최악의 시나리오인 부정의 눈으로 보고 와서 부정의 보고를 한 것입니다. 각 지파의 지혜 있는 우두머리들이 이런 부정의 보고를 하자 이스라엘은 일대 혼란으로 급속히 빠져들었습니다. 정탐꾼의 임무는 각 지파 종족의 두령들 가운데 지혜있고 용기 있는 사람들 만 골라서 뽑았습니다. 그런데도 믿음의 눈을 가지지 못했습니다. 오늘 저희 교회에서 제직 임명을 합니다. 일꾼은 어떤 눈을 가져야 하는지를 엄중하게 보여 주는 사건입니다. 모두들 약속에 대한 확신이 부족했습니다. 긍정의 믿음이 부족했습니다.
어쨋든 이렇게 시작된 가나안의 정탐은 아주 정밀하게 진행되었습니다. 2주일이면 충분한 기간을 40일간이나 정탐했습니다. 정탐의 내용도 아주 치밀했습니다. 가나안 원주민의 군사적 능력, 땅의 인구, 기후 조건, 군사적 방어물, 토질 조사, 나무의 생태조사 이렇게 군사적 관점, 경제적 관점, 문화거주적 관점에서 충분히 파악했습니다. 우리 신앙인은 일을 시작하기 전에 조건과 환경을 충분히 객관적으로 정밀히 파악하는 것은 중요합니다. 그러나 무엇 보다 결론이 중요합니다. 정보를 얻는 것도 중요하지만 정보를 판단하는 능력은 더욱 중요합니다. 똑 같은 상황도 어떻게 판단하느냐에 따라서 정반대의 결과가 나올 수 있지요.
아프리카로 진출하고 싶은 신발 회사가 있었습니다. 두 사람의 직원을 파견하여 시장조사를 시켰습니다. 한 사람은 아프리카 진출을 포기하라고 보고를 했고, 다른 이는 그곳으로의 진출에 총력을 기울여야한다고 보고를 했습니다. 까닭인즉 먼저 직원은 아프리카 사람은 아예 신발 없이 평생을 사는데 진출하면 회사 망한다는 거지요. 다음 직원은, 신발을 지금은 신고 있지 않으나 신발을 한 번 신어 보게 되면 그 좋은 것에 홀딱 반할 테니 무한한 시장이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제일 먼저 진출하면 시장을 선점하는 것이니 반드시 진출해야 한다 것이지요. 코카콜라 회사가 아프리카에 진출한 예를 보더라도 후자가 더 맞는 결론일 수 있습니다. 어쨋든 똑같은 상황에서 동일한 사물을 보고 내리는 결론이 이렇게 다를 수 있다.
그래서 어떻게 생각하느냐 이것이 중요하다는 말입니다. 상황이 어렵지 않게 되는 게 믿음이 아닙니다. 어려운 상황, 이걸 어떻게 처리하느냐가 문제입니다. 충분한 평가 없이 무턱대고 믿는 것은 맹신이겠지요. 어려운 것도 압니다. 문제가 있다는 것도 압니다. 힘들다는 것도 압니다. 그러나 능력의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긍정의 시각을 갖는 것, 이게 믿음입니다. 그냥 있는 그대로를 보는 것은 믿음의 사람이 아닙니다. 믿음은 있는 상황 넘어 계신 하나님의 긍정을 보는 거예요.
열 정탐꾼들은 가나안 땅이 기름지고 풍요롭기는 하지만 강력한 방어기지와 군사력을 가지고 있다고 보고합니다. 이 사실이 거짓 없는 사실일 것입니다. 여호수아와 갈렙도 이 사실 자체에는 이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 사실을 평가하는 눈은 여호수아 갈렙과 다른 열 정탐꾼들과 차이가 있었습니다. 자 보세요. 아낙자손은 거인족입니다. 그래서 열 명의 정보원들은 자신을 메뚜기로 봤습니다. 그러나 여호수아와 갈렙은 “그들은 우리들의 밥이라”(민14:9)고 합니다. 밥으로 보느냐 거인으로 보느냐? 요리사로 보느냐, 메뚜기로 보느냐? 이 차이입니다.
그러면 여호수아와 갈렙은 그냥 척보고 이런 믿음의 결론을 내릴 수 있었을까요? 아닙니다. 여호수아는 정탐을 하고 돌아오는 길에 기도했을 것입니다. 절망도 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원망하기도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결국은 이런 결론에 도달한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우리를 기뻐하시면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시고 그 땅을 우리에게 주시리라.” (민14:8)
여호수아는 유일한 조건을 “여호와께서 우리를 기뻐하시면“으로 잡았습니다. 여호와께서 우리를 기뻐하시면 아무리 거인이고 견고한 성, 막강한 군사력이라도 함락이 가능하다는 겁니다. 거꾸로 말하자면, 아무리 약하고 어줍잖은 군사력이라도 여호와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으면 패배입니다. 얻지 못합니다. 긍정의 시각은 바로 여호와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부정의 시각도 바로 여호와로 말미암은 것이어야 합니다.
이 사실은 이제 가나안 진입과정에서 여실히 증명이 됩니다. 그래서 여리고 성은 난공불락의 요새였지만, 여호와께서 기뻐하시고 함께 해주셨기에 이스라엘은 승리했습니다. 어렵지만 믿고 순종한 긍정의 눈을 가진 이스라엘의 승리였습니다. 그러나 아주 작은 아이성의 함락 작전에서 이스라엘은 여지없이 참패를 합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은 연고 때문입니다. 부패하고 오만한 눈을 가진 이스라엘의 패배였습니다.
믿음의 관점으로 보면, 부정적인 사람과 긍정적인 사람의 차이가 있습니다. 부정적인 사람에게는 세 가지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약속, 비젼, 손이 없습니다. 약속이 없으니 기대가 없습니다. 비젼이 없으니 현실만 보이는 겁니다. 하나님의 손이 없으니 내 힘만 남아 있습니다.
사실 어려움은 상황에 있지 않습니다. 진짜 어려움은 긍정의 시선이 없어져 버린 데 있습니다. 하나님 긍정의 시선이 없어져 버린 후 이스라엘이 얼마나 허둥댔는지는 오늘 본문이 잘 증명을 합니다. 이스라엘은 도무지 여호수와 갈렙의 긍정적인 시각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내 급속한 두려움과 불안에 빠져 버렸습니다.
“너희가 그 땅을 탐지한 날 수 사십일의 하루를 일년으로 환산하여 그 사십년간 너희가 너희의 죄악을 질지니” (신14:34)
40년의 대가를 치르는 불행이 시작되고 있는 겁니다. 그러므로 불행은 무엇입니까? 상황이 아닙니다. 바로 긍정적인 시각의 상실입니다. 바로 믿음의 눈의 상실입니다.
그래서 긍정적인 믿음의 사람과 부정적인 불신앙의 사람은 실제 행동에서도 하늘과 땅 만큼의 차이가 큽니다. 여호수아와 갈렙은 “ 능히 이기리라”고 말합니다.
“갈렙이 모세 앞에서 백성을 안돈시켜 가로되 `우리가 곧 올라가서 그 땅을 취하자 능히 이기리라' 하나”(30절)
그러나 다른 열 정탐꾼들은 “능히 이기지 못하리라“고 말합니다,.
“그와 함께 올라갔던 사람들은 가로되 `우리는 능히 올라가서 그 백성을 치지 못하리라 그들은 우리보다 강하니라' 하고”(31절)
이기고도 남는다는 생각과, 절대로 못 이긴다는 생각만큼의 차이입니다. 반반도 아닙니다. 하늘과 땅 만큼의 차이, 천국과 지옥만큼의 차이를 가지고 있습니다. 믿음의 눈-긍정의 눈입니다. 불신앙의 눈- 부정의 눈입니다. 긍정의 근거는 무엇입니까? 바로 하나님에 대한 믿음입니다. 무슨 믿음입니까? 약속에 대한 믿음입니다. 인도에 대한 믿음입니다.
때문에 제일 먼저 길러야 할 것은 힘이 아닙니다. 관점입니다. 눈입니다. 시각입니다. 이걸 기르지 못하면, 아무리 힘이 크다하더라도 소용이 없습니다. 믿음의 눈, 긍정의 눈이 광야의 백성들을 전진하게 합니다. 불신앙의 눈- 부정의 눈이 광야의 이스라엘을 40년 동안 방황하게 했습니다. 때문에 참으로 중요한 것은 믿음의 눈을 가지는 것입니다. 참으로 중요한 것은 긍정의 눈을 가지는 것입니다.
믿음의 눈, 긍정의 눈으로 모든 사물을 대합시다. 믿음의 눈, 긍정의 눈으로 모든 사건을 대합시다. 여기에 하나님의 축복이 있습니다. 올해에 우리가 구할 축복은 좋은 환경을 달라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긍정의 눈을 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떤 환경에서도 승리하게 될 것입니다. 이런 참된 축복이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무기한 영향력을 소유한 사람
민 13:25-33 / 문기태 목사
복음을 전하다보면 '나는 내가 잘 알고 있는 기독교인 아무개때문에 절대 예수믿지 않겠다'고 말하는 사람을 종종 만나게 됩니다. 예수믿으며 교회안에서 중책을 맡았다고 자랑하면서 현실에서는 자기를 희생할 줄 모르고 탐욕으로 가득찬 삶을 살아갈 때 사람들에게 예수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가 깊이 새겨집니다. 반대로 자신이 존경하는 사람이 독실한 그리스도인인것을 알고 그분의 영향을 받아 쉽게 그리스도인이 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다른 사람의 영향을 많이 받으며 살아갑니다. 그리고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다른 사람에게 엄청난 영향을 주면서 살아갑니다. 특히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사실은 다른 사람의 신앙과 영혼에 엄청나게 큰 영향을 줄 수 있음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좋은 영향뿐 아니라 나쁜 면에 있어서도 크게 작용한다는 사실을 항상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헨리 조지- "사람은 누구나 자기에게는 영향력을 미칠 힘이 없다는 생각은 하지 말아야 한다."
모세는 약속의 땅이 바라다보이는 언덕에서 그 땅의 정복에 앞서 각 지파에서 선출된 족장 열 두 명을 정탐하도록 보내었습니다. "너희는 그 땅에 사는 사람들이 강한지, 약한지, 적은지, 많은지 살펴보아라. 그 땅이 좋은지 나쁜지, 그들이 사는 마을은 장막촌인지 요새화된 성읍인지, 토지는 기름진지 메마른지 살펴보아라 " 하고 사명을 주어 보내었습니다. 정탐하고 돌아온 족장들은 자신들이 탐지한 사실들을 보고하면서 자신들의 의견도 첨가하였습니다.
갈렙은 "올라갑시다. 올라가서 그 땅을 점령합시다. 우리는 반드시 정복할 수 있습니다." 하고 격려했습니다.
그러나 다른 정탐꾼들은 즉각 반대하며"우리는 도저히 그들을 정복할 수 없습니다. 그 백성들은 우리보다 강합니다. 그들이 얼마나 강한지 우리는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습니다."하고 찬물을 끼얹었습니다.
그들의 말의 힘은 강한 능력을 발휘했습니다. 온 회중이 놀라 아우성을 쳤습니다. 소리높여 울부짖는 사람도 많았습니다. 점차 모세에 대한 원망으로 바뀌었습니다. 하나님께 대한 불평으로 표현되었습니다. 애굽에서 나온 것을 후회하며 광야에서 죽는 것이 더 좋았을 것이라고 탄식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역사를 거부하고 애굽으로 돌아가자는 말까지 나왔습니다.
이제 가나안 정복은 도저히 실현이 불가능한 일로 아득하게 멀어져만 가는 순간이었습니다. 그들은 지금까지 잘 왔습니다. 숱한 고생을 참고 잘 견뎌왔습니다. 불가능을 가능한 일로 바꾸며 절대권력을 소유한 애굽의 왕의 방해를 뚫고 거대한 홍해바다를 건넜습니다. 물 한 방울이 귀하고 먹을 것이라고는 찾아 볼 수 없는 광야를 지나왔습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경험하며 수많은 기적을 보면서 믿음을 키워가며 거기까지 전진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도저히 정복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그들에 비하면 메뚜기입니다.'라는 말 한마디는 온 백성의 믿음을 집어 삼키고 말았습니다. 다 지워진 줄 알았던 노예근성에 불을 붙였습니다. 하나님께서 크신 능력을 나타내시고 인도해 오시며 심어 주신 아름다운 약속의 땅에 대한 꿈을 다 삼켜 버렸습니다.
그래서 순종하며 따라오던 양과 같은 백성으로 하여금 이리처럼 사납고 거치른 맹수로 변하게 하였습니다. 믿음으로 충만하여 하나님의 새역사를 기대하던 이들로 하여금 하나님께 대한 불신으로 가득찬 진노의 자식으로 만들었습니다.
그 결과는 엄청난 비극으로 나타났습니다. 그것은 백성들이 이제껏 안고 있던 꿈의 박탈로 나타났습니다. 당시 성인이었던 백성들은 모두 광야에서 살다가 약속의 땅을 보지 못하고 죽었습니다. 그리고 백성들에게 나쁜 영향을 끼친 정탐꾼들은 그 자리에서 재앙을 받아 죽었습니다. 참으로 불신앙의 영향력은 급속도로 확산되고 원자폭탄보다도 무서운 파괴력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반면 갈렙은 여호수아에게 영향을 끼쳤습니다. 민 13: 30절에서는 갈렙이 혼자 나서지만 민14:6에 보면 여호수아가 갈렙과 함께 회중들앞으로 나섰습니다. "주께서 그 땅으로 우리를 인도하여 들이실 것입니다. 주님을 거역하지 마십시오. 그들은 우리의 밥입니다. 주님이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갈렙의 믿음은 여호수아에게 영향을 끼쳐 그로하여금 담대한 믿음을 공유하게 만들었습니다.
비록 그 당시에는 그들의 말과 믿음이 아무 영향력을 끼치지 못하는 것 같았습니다. 아무도 귀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자 갈렙의 영향을 받은 여호수아는 모세의 뒤를 이어 민족의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평생을 믿음의 사람이 되어 하나님께 크게 쓰임받았습니다. 훌륭하게 '백성들에게 승리할 수 있다, 정복할 수 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하는 믿음을 확산시켜 이스라엘민족을 약속의 땅으로 인도해 들였습니다. 어려운 전투를 수없이 승리로 장식했습니다.
갈렙, 그는 여호수아에게 영향력을 끼쳤고 두 사람은 함께 민족 전체에 평생 믿음의 영향력을 행사했습니다. 그들의 영향은 한 민족의 역사에 어마어마한 획을 그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나라의 역사에 한 페이지를 장식했습니다.
우리도 갈렙처럼 영적 영향력을 강하게 미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민족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믿음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직장에 있는 동료들에게 긍정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가정에 있는 가족들에게 믿음의 영향력을 행사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믿는 사람들은 영향력있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부정적인 영향 말고 긍정적인 영향을 끼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다른 사람을 죽이고 자신도 죽는 사람이 되지 말고 다른 사람도 살리고 자신도 사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자신도 은혜와 축복을 풍성하게 받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확산시키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자신도 하나님께 쓰임받고 다른 사람들도 하나님의 도구가 되도록 헌신을 확산시키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데없이 다만 밖에 버리워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라고 하셨습니다. 소금은 아주 적은 양만 넣어도 음식의 맛을 변화시킵니다. 2-3퍼센트의 염분만 있어도 바닷물은 썩지 않습니다. 홍차에 레몬 한 방울만 떨어뜨려도 홍차 색깔이 레몬색깔로 바뀝니다. 다수를 변화시킬 수 있는 능력이 여러분에게 있어야 합니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그 사회에 아주 소수만 있어도 그 사회는 크게 변화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부패한 사회를 정화시킬 수 있습니다. 죽어가는 사회를 살릴 수 있습니다. 삶의 의미를 잃고 인생의 목적을 상실한채 방황하는 사람들에게 꿈을 심어주고 생기가 넘치는 삶을 살게 합니다.
진실한 그리스도인이 그 교회에 소수만 있어도 그 교회는 달라집니다. 부정적인 언어가 사라지고 긍정적인 믿음의 말들이 풍성해져 격려와 확신과 사랑의 분위기로 바뀝니다. 기도가 살아나고 예배가 활기가 넘치고 전도의 열매가 계속 맺혀질 것입니다. 서로 섬기기를 자원하고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사건들에 대한 간증으로 가득한 교회가 될 것입니다.
진실한 그리스도인이 그 가정에 한 사람만 있어도 그 가정에 믿음이 확산될 것입니다. 가정에 따뜻한 사랑이 확산되고 영적인 축복이 온 집안에 흘러 넘치게 될 것입니다.
문제는 얼마나 믿는 사람이 많으냐?가 아니라 얼마나 믿음으로 충만하고 예수에 충만히 사로잡혀 있느냐?입니다. 단 한 사람 갈렙이 믿음으로 충만했고 그의 영향이 여호수아에게 그대로 전달되어 그도 역시 믿음으로 충만해지자 한 민족의 운명이 멸망의 그늘에서 옮겨질 수 있었습니다. 저주에서 풀려날 수 있었습니다.
아무 생각없이 눈에 보여지는대로 따라가면 우리는 사단에게 속아 사단의 영향력을 확산시키는 사람이 되기 쉽습니다. 그러나 애써 위를 바라보고 하나님의 말슴을 붙들고 믿음으로 생각하며 나아가면 하나님의 사람이 됩니다. 하나님의 영향력을 확산시키는 사람이 됩니다. 죽이는 사람들에게서 사람들을 살리는 영향력을 행사하는 사람이 됩니다.
여러분은 예수님께 붙들리고 믿음으로 충만해져서 거룩한 꿈을 확산시키는 사람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기도의 능력을 맛보며 기도를 확산시키는 사람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복음을 확산시키는 사람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사람들의 마음에 믿음을 확산시키는 사람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안된다. 할 수 없다. 실패할 것이다. 나는 메뚜기 같은 초라한 인생이다.'하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승리할 수 있다. 행복할 수 있다. 나는 위대한 일을 해낼 하나님의 도구이다. 얼마든지 위기를, 실패를, 환경을 극복할 수 있다.'하는 믿음을 확산시켜 운명을 바꾸어 주는 사람이 되시기 바랍니다.
찰리 패트릭이라는 사람이 자기 모교에 가서 후배들에게 꿈을 심었습니다. 그 후배가운데 하나가 1936년에 베들린 올림픽에서 영웅이 되었습니다. 그가 제시 오웬스입니다. 그 제시 오웬스가 다시 모교에 와서 꿈을 심으니까 1948년에 해리슨 달라드가 그 꿈을 나누어 가지게 되었습니다. 제시 오웬스가 나온뒤 많은 청소년들이 뛰어난 육상선수가 되는 꿈을 가졌습니다. 특별히 흑인 청소년들의 꿈이 육상선수가 되는 것으로 변했습니다.
하나님은 창1:28에서 "번성하라, 땅을 다스리라, 충만하라'고 말슴하십니다. 여기서 번성하라는 말씀은 단순히 더하라는 뜻이 아니고 곱하라는 뜻입니다. 폭발적인 증가를 의미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 땅에 살면서 다른 사람들에게 큰 영향을 끼치면서 살아야 합니다. 생명이 번창하도록 영향을 끼쳐야 합니다. 믿음이 확산되도록 믿음의 영향력을 끼쳐야 합니다. 축복이 번창하도록 영향력을 행사하여야 합니다. 은혜가 확산되도록 은혜의 영향을 끼쳐야 합니다. 성령의 충만이 폭발적으로 확산되도록 성령의 사람이 되어 큰 영향을 끼쳐야 합니다.
여러분은 예수를 믿고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어떤 영향력을 행사했습니까? 불신의 영향력입니까? 믿음의 영향력입니까? 작은 영향력입니까? 큰 영향력입니까? 하나님께서는 여러분 모두가 갈렙처럼 믿음을 확산시키고 순종을 확산시키며 헌신을 확산시키는 하나님의 영향력을 크게 행사하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그렇게 말씀드리면 여러분중에는 '나는 너무 미약해서, 나는 너무 부족해서, 나는 너무 작아서..'하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이사야60:22에 보면 '그 작은 자가 천을 이루겠고 그 약한 자가 강국을 이룰 것이라' 약속하십니다. 하나님은 큰 자의 영향력을 강조하지 않으시고 약하고 작은 자의 영향력을 크게 약속하십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의 손에 붙들린 작은 자가 되기 바랍니다. 모두 하나님을 위하여 온전히 헌신한 약한 자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천을 이루는 꿈을 꾸고 강국을 이루는 비젼을 확산시키기 바랍니다. 진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역사의 주인공이 되시기 바랍니다.
희망적인 말하기
민 13:25-33 / 김필곤 목사
행복한 가정은 사용하는 말부터 다르다고 합니다. 결혼한 부부가 앞으로 어떻게 살 것인가는 서로 말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고 합니다. 세계적인 부부 치료사 존 가트만 박사는 <내 아이를 위한 사랑의 기술 감정코치>라는 책에서 가정 관계의 문제의 근본은 말에 있다고 말합니다. 첫 아이를 낳은 뒤 67%의 부부가 관계 악화를 겪게 되는데 “부부 사이에 생기는 문제 가운데 69%는 해결이 안되는 문제”라고 합니다. 그런데 부부가 어떻게 말하는 가를 보면 이 부부가 어떻게 될지를 예측할 수 있다고 합니다. 존 가트맨 박사는 35년간 3000여 쌍을 조사한 결과 화목한 가정은 긍정적인 대화가 부정적인 대화보다 5배 더 많았다고 합니다. 이를 '가트맨 비율(Gattman Ratio)'이라고 말합니다. 가트맨 박사는 부부의 대화를 3분만 들어보면 이혼 여부를 94% 예측할 수 있다고 합니다. 칭찬과 비난의 비율이 5:1인 부부는 순탄하지만 0.8대 1인 부부는 이혼한다고 합니다. 5:1의 법칙입니다. 비난 한 번 하면 5번 칭찬해야 겨우 만회하고 유지된다는 것입니다. 부부가 잘되고 가정이 잘되며 자녀가 잘되려면 절망적인 말보다는 희망적인 말, 부정적인 말보다는 긍정적인 말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기업이 잘 될 것인가 안 될 것인가도 직원들의 말하는 태도를 보면 알 수 있다고 합니다. 심리학자 마르셀 로사다의 이름을 따서 "로사다 비율(Losada ratio)"이라는 용어가 있습니다. 2.9대 1의 비율입니다. 60개 기업을 조사해 보니까 잘되는 기업은 부정적인 말 1이 있을 때 긍정적인 말 2.9 이상이 되었고 잘 안 되는 기업은 긍정적인 말이 2.9보다 낮았다고 합니다. 실적이 가장 높은 팀은 6대 1로 긍정적인 발언이 더 많았다고 합니다. 부자가 되고 싶으면 절망적인 말보다는 희망적인 말, 부정적인 말보가 긍정적인 말을 6배나 많이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마 교회도 잘 되는 교회와 잘 안되는 교회를 조사해 보면 비슷한 결과가 나올 것입니다. 누가 조사한 자료는 보지 못했지만 잘되고 행복하고 건강하게 부흥하는 교회를 만들려면 교인들이 절망적인 말보다 희망적인 말을, 부정적인 말보다 긍정적인 말을 6배가 넘게 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 성도님들, 특히 장로님, 권사님, 안수집사님, 구역장님들, 교회에 오래 다니신 성도님들 우리 교회에 대하여, 목회자에 대하여, 교회 식구들에 대하여 부정적인 말을 많이 합니까? 긍정적인 말을 많이 합니까? 절망적인 말을 많이 합니까? 희망적인 말을 많이 합니까?
인간은 '말'을 만들고, '말'은 인간을 만듭니다. 말은 자신을 드러내는 것이고 어떤 말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인생의 미래가 영향을 받습니다. 늘 희망적인 말을 하는 사람은 미래가 밝아집니다. 그러나 늘 절망적인 말을 하는 사람은 미래가 어두워집니다. 오늘 성경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말에 대하여 무서운 말씀을 해 주시고 있습니다. 민수기 14장 28절을 읽어 보십시오. "너희 말이 내 귀에 들린 대로 내가 너희에게 행하리니(민14:28)"라고 말씀하십니다. 무서운 말입니다. 내가 지금 말하고 있는 것이 앞으로 내 인생이 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죽고 사는 것이 혀의 힘에 달렸나니 혀를 쓰기 좋아하는 자는 혀의 열매를 먹으리라(잠18:21)"라고 말씀합니다. 혀의 열매를 먹는다는 말입니다. 말 속에 미래가 담겨 있다는 말씀입니다. 말이 미래의 인생을 만들어 낸다는 것입니다. 한 걸그룹이 노래의 제목으로 '아브라카 다브라'라는 말을 사용했는데 이 말은 히브리어로 "말하는 대로 된다"는 뜻입니다. 성경에 하나님께서 빛이 있으라하니까 빛이 있었고 말씀하신 대로 모든 것이 창조되었듯이 말은 "말하는 대로 된다"라는 것입니다. 인간에게 있어서는 심리학에서 말하는 '자기충족적 예언(Self-Fulfilling Prophecy)'입니다. 인간은 한계가 있어 말한 대로 모두 그렇게 되는 것은 아니지만 말은 성취력이 있는 것은 부인할 수 없습니다.
<입버릇 이론으로 꿈을 이루다!>의 저자 사토 도미오는 "우리 인간의 몸속에는 '꿈을 실현하는 시스템'이 장착되어 있기 때문에 '상상력'을 발휘해서 커다란 꿈을 그리면 그 시스템이 자동적으로 꿈을 이루어줍니다"라고 말합니다. 생화학을 전공한 작가는 '좋은 입버릇'을 의식적으로 사용하면 반복되는 언어는 주술처럼 뇌의 잠재의식을 자극해 의식보다 더 큰 힘으로 상상을 현실화한다는 것입니다. 프랑스 심리학자 에밀 쿠에도 "입버릇처럼 말하는 것은 자율 신경계에 자동으로 입력되며 인간의 몸은 입력된 그대로 실현하려 한다."고 말합니다. 빌 게이츠가 아침마다 거울을 보며 "오늘은 왠지 좋은 일이 생길 것 같아" "난 할 수 있어" 등을 외웠고 그는 말대로 세계 최고의 소프트웨어 전문가가 됐고, 세계 최고의 부를 일궜다고 합니다.
"말이 씨가 된다"는 우리 속담처럼 말은 각인력과 견인력과 성취력이 있습니다. 어떤 말을 들으면 그 말이 머릿속에 각인이 됩니다. 교회에 나왔는데 장로님이 “목사님 몸이 아파요. 표정 보니까 병든 것 같아요.”라는 말을 들으면 그 말이 머리에 각인이 됩니다. 뇌는 긍정적인 말보다 부정적인 말에 더 민감합니다. 말은 각인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견인력이 있습니다. 말은 잡아끄는 힘이 있어 머릿속에 각인되면 자신도 모르게 그 말대로 행동하게 되어 말이 사람을 이끌어 갑니다. 장로님에게 그런 말을 들으면 집에 가서 거울을 보고, 아내에게 “내 얼굴 병든 것처럼 보여요?”라고 물어 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말은 견인하는 것으로 그 역할을 다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일을 성취하게 하는 성취력이 있습니다. 발 없는 말이 발을 이끌어 갑니다. 아내도 병든 것 같다고 말하면 병원에 가서 진찰해 보게 되는 것입니다. 말이라는 것이 이렇게 각인력과 견인력과 성취력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네 입의 말로 네가 얽혔으며 네 입의 말로 인하여 잡히게 되었느니라(잠6:2)"라고 말씀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말을 잘해야 합니다. 말에는 힘이 있기 때문입니다. 말은 살아 움직이는 에너지로 각인력과 견인력과 성취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대통령이 누군가를 국방부 장관으로 임명하면 그는 국방부 장관이 되는 것입니다. 남자는 하루에 2만 5천 마디, 여자는 3만 마디 말을 한다고 합니다. 우리 성도님들은 희망적인 말을 많이 합니까? 절망적인 말을 많이 합니까? 우리 신앙인들은 희망적인 말을 해야 합니다. 기쁘고 행복한 삶을 살고 싶으면 희망적인 말을 해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아 왕같은 제사장이 된 사람으로 절망적인 세상에서 어떻게 희망적으로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1. 우리는 아무리 절망적인 상황일지라도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희망적으로 말하여야 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 30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갈렙이 무엇이라고 말씀합니까? “우리가 곧 올라가서 그 땅을 취하자 능히 이기리라”라고 말합니다. 모세가 각지파별로 지휘관 1명씩을 뽑아 12명의 정탐꾼을 가나안 땅을 점령하기 전에 미리 보내었습니다. 그들이 40일 동안 정탐을 하고 돌아왔습니다(25). 그리고 모세와 백성들이 있는 곳에서 보고를 하는 것입니다. 갈렙은 ‘당장 올라가서 그 땅을 차지하자’고 합니다. 능히 이길 것이라고 희망적으로 말합니다. 그런데 그와 함께 정탐한 10명의 사람들의 말은 달랐습니다. 무엇이라고 말을 합니까? 31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우리는 그 백성을 치지 못하겠다’는 것입니다. 절망적으로 말을 합니다. 부정적인 말을 합니다.
우리 성도님들이 정탐꾼이라면 어떤 말을 하는 부류의 사람에 속한 사람일 것같습니까? 희망적인 말을 하는 사람일까요? 절망적인 말을 하는 사람일까요? 지금 경제를 보면서 희망적인 말을 하고 있습니까? 절망적인 말을 하고 있습니까? 지금 가정을 보고 희망적인 말을 하고 있습니까? 절망적인 말을 하고 있습니까? 지금 자녀를 보고 희망적인 말을 하고 있습니까? 절망적인 말을 하고 있습니까? 지금 남편과 아내를 보고 희망적인 말을 하고 있습니까? 절망적인 말을 하고 있습니까?
똑같은 사람들, 똑같은 땅, 똑같은 강, 똑같은 나무를 보고 왔는데 왜 이렇게 말이 다를까요?
절망적인 말을 하는 사람들이 왜 절망적인 말을 합니까? 31절을 보십시오. “그들은 우리보다 강하니라”라고 말씀합니다. 상대를 어떻게 평가하고 있습니까? 과대평가하는 것입니다. 상대를 과대평가하면 하나님이 주신 약속의 땅을 어떻게 평가합니까? 32절을 보십시오. 땅에 대하여 거주민을 삼키는 땅이라고 합니다. 가나안의 토양이 너무 좋기에 그 땅을 정복하기 위해 각 민족들 간에 전쟁이 끊임없이 되풀이되기 때문에 정복을 해봤자 항상 불안에 떨며 살 수밖에 없다고 절망적으로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가 만만만 생명운동을 통해 열심히 최빈국 아이들 만명을 기독교 지도자로 만드는 일을 섬기고 있습니다. 어떻게 그 일을 이룰 수 있게냐고 부정적으로 말하며 오랜 세월 이 교회를 다니면서도 한 번도 협력하지 않으며 다른 사람들에게도 10명의 정탐꾼처럼 부정적으로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해외에 100개의 교회를 건축하여 주님께서 명령하신 선교적 사명을 이루자고 하면 비난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절망적인 말을 하는 10명의 정탐꾼을 보십시오. 그곳에 살고 있는 백성들을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모든 백성들은 거인이라는 것입니다. 아낙 자손같은 거인도 있지만 모든 백성이 다 거인은 아닌데 모든 백성이 거인이라고 확대해석하는 것입니다. 특수한 것을 일반화를 시키는 것입니다. 부분을 전체로 말하는 것입니다. 부정적인 말을 하는 사람들은 늘 이렇습니다. 33절을 보십시오. 네피림 후손인 아낙 자손의 거인들을 보고 호들갑을 떠는 것입니다. 자신들을 어떻게 생각합니까? 메뚜기라고 평가해 버리는 것입니다. 그들은 각 지파 중에 가장 뛰어나다는 지도자들입니다. 그런데 메뚜기 콤플렉스에 걸린 것입니다. 상대를 만나 보지도 않고 그들이 보기에 그럴 것이라고 과도하게 절망적으로 상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갈렙은 무엇에 근거하여 희망적으로 말을 하고 있습니까?
14장 7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똑같은 땅인데 희망적인 말을 하는 갈렙은 그 땅을 어떻게 말하고 있습니까? “심히 아름다운 땅”이라고 비전의 땅을 희망적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최고로 비옥한 땅이라는 것입니다. “삼키는 땅”과 얼마나 비교되는 말입니까?
14장 8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기뻐하시면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시고 그 땅을 우리에게 주시리라”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가나안 땅을 이미 그들에게 주실 것을 약속했습니다. 출애굽기 3장 8절에서 “내가 내려가서 그들을 애굽인의 손에서 건져내고 그들을 그 땅에서 인도하여 아름답고 광대한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곧 가나안 족속, 헷 족속, 아모리 족속, 브리스 족속, 히위 족속, 여부스 족속의 지방에 데려가려 하노라”고 이미 약속해 주었습니다. 그 땅으로 하나님이 약속한 대로 인도하실 것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약속을 한 번도 어기지 않았습니다. 문제는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면 되는 것입니다. 언약에 근거하여 희망적인 말을 하는 것입니다.
9절 보세요. 절망적인 말을 한 사람들은 자신들을 과소평가해서 하나님의 백성인 자신들을 “메뚜기”라고 비하했는데 희망적인 말을 하는 갈렙은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그들이 우리의 먹이라”고 말을 합니다.
우리는 현실의 상황을 보면서 절망적인 말을 하지 말고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고 희망적인 말을 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오랜 전 말에 훈련되어 있지 않는 집사님이 계셨습니다. 어느 주일 날 예배 후 할머니 권사님이 울고 계셨습니다. "왜 우시냐?"고 물었더니 그 집사님 때문이었습니다. 홀로 사시는 할머니 권사님에게 "놈팽이 하나 데려오지요?"라고 말한 것입니다. 물론 악의를 가지고 한 말은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오랜 세월 홀로 사신 권사님에게 할 말은 아니었습니다. 하루는 어느 여 집사님이 속상해했습니다. 알고 보니 그 집사님이 중학교 다니는 딸아이에게 "메주"라고 말했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아도 비만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고 있는 아이에게 할 말이 아니었습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하여 희망적인 말을 하시는 성도님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모세는 “하나님은 사람이 아니시니 거짓말을 하지 않으시고 인생이 아니시니 후회가 없으시도다 어찌 그 말씀하신 바를 행하지 않으시며 하신 말씀을 실행하지 않으시랴”(민 23:19)고 말했습니다. 99세가 된 아브라함에게 아이가 없을지라도 절망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아이를 준다고 하면 그 약속을 믿고 희망적으로 말하면 되는 것입니다. 때가 되면 하나님이 약속한대로 이삭이라는 아들을 주시는 것입니다. 느헤미야는 자신의 나라가 망하고 성이 다 무너졌다는 절망적인 소식을 들었을 때 “주를 사랑하고 주의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 언약을 지키시며 긍휼을 베푸시는 주여”라고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고 기도했습니다. 왕에게 희망적으로 말하고 백성들에게 희망적으로 말하고 적들에게도 희망적으로 말하며 결국 성을 재건하였습니다. 질병 걸리면 절망하며 절망적인 말을 하지 말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너희 죄를 서로 고백하며 병이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큼이니라(약5:16)”의 약속의 말씀을 붙들고 희망적으로 말하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자녀가 잘못되게 나아가면 절망적인 말을 하며 저주하지 말고 “내가 어려서부터 늙기까지 의인이 버림을 당하거나 그의 자손이 걸식함을 보지 못하였도다 그는 종일토록 은혜를 베풀고 꾸어 주니 그의 자손이 복을 받는도다(시37:25)”의 말씀을 붙들고 희망적으로 말하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사업하면서 직장생활 하면서 절망적인 상황이 다가 “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막9:23)”라는 말씀을 붙들고 희망적인 말을 하며 기도하며 전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절망적 상황보다 강하고 각인력과 견인력과 성취력이 있습니다.
자신의 무능력으로 한계를 만나면 절망적인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4:13)”라는 약속의 말씀을 붙들고 한계를 극복하는 것입니다.
2. 우리는 아무리 절망적인 상황일지라도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믿고 희망적인 말을 하여야 합니다.
감정은 전염됩니다. 희망도 전염되고 절망도 전염이 됩니다. 희망적인 사람과 함께 있으면 희망적인 사람이 될 수 있고 절망적인 사람과 함께 있으면 절망적인 사람이 됩니다. 고사성어에 먹을 가까이하다 보면 자신도 모르게 검어진다는 뜻을 가진 “근묵자흑(近墨者黑)”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끼리끼리 모인다는 “물이유취(物以類聚)”라는 말도 있고, 같은 무리끼리 서로 내왕하며 사귄다는 “유유상종(類類相從)”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처지가 같은 사람들끼리 한패가 되어 절망하면 생각도 전염되고 기분도, 태도도 전염되게 되어 있습니다. 감기만 전염되는 것이 아니라 절망도 전염이 됩니다. 심리학 용어에 “전염현상(contagion phenomena)”이라고 말합니다. 코미디 프로를 보면 가짜 웃음을 삽입시킨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가짜 웃음을 삽입시키는 것만으로도 시청자들은 더 재미있게 보며 웃기 때문입니다. 심리학자 스미스는 가짜 웃음의 효과를 알아보기 위해 40명의 남녀 대학생들을 통해 실험해 보았답니다. 가짜 웃음이 삽입된 것을 들었던 학생들이 그렇지 않은 학생들보다 더 자주 웃고(19회:6회),더 오래 웃었으며(19초:5초),코미디 내용을 더 재미있다고(93점:75점) 평가했답니다. 수십 년 동안 웃음에 관한 연구를 해온 메릴랜드대 라버트 프라빈스 박사는 사람들이 혼자 있을 때보다는 여럿이 함께 있을 때 평균 30배 정도 더 많이 웃는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만큼 감정도 전염력이 강합니다.
행복도 마찬가지입니다. “행복은 전염된다(니컬러스 크리스태키스, 제임스 파울러 저)에 의하면 행복도 전염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이들은 1만 2067명을 추적해서 행복의 생성, 확산 관계를 연구한 결과 '3단계 영향 법칙'을 제시하였습니다. 사람들은 3단계의 거리 안에 있는 사람,즉 친구(1단계),친구의 친구(2단계),친구의 친구의 친구(3단계)에게서 직접적인 영향을 주고받는다는 것입니다. 어느 사람이 행복할 경우, 1단계(친구)가 행복할 확률은 약 15% 더 높아지고, 2단계는 10%, 3단계는 약 6%이고, 4단계에서는 거의 사라진다고 합니다. 1020명의 네트워크를 분석한 결과 네트워크 내에서 불행한 사람들은 불행한 사람들끼리 함께 모여 있고, 행복한 사람들은 행복한 사람들끼리 함께 모여 있었답니다.
부정적인 말, 절망적인 말, 부정적인 감정은 아주 빠르고 강력하게 전파되고 전염됩니다. 부정적인 소식은 긍정적 소식보다 7~8배 정도 빨리 퍼진다고 합니다. 이것을 '3대 33의 법칙'이라고 합니다. 긍정적인 소식이 3명에게 전파되는 데 반해 부정적인 소식은 33명에게 전달된다는 것입니다. 와튼 스쿨의 '불만 고객 연구 보고서'에 의하면 불만 고객 31%는 친구들이나 가족에게 입소문이나 험담을 하고, 이들 중 78%는 3~5명에게 전파한다는 것입니다. 미국의 심리학자인 셰드 헴스테더 박사는 우리 인간은 하루에 5-6만 가지의 생각을 하고 그 많은 생각 중에 75%는 부정적인 생각이고 25%는 긍정적인 생각이라고 주장합니다. 미국 아이오와 대학의 연구기관에서 실시한 조사에 따르면 우리나라 나이로 세 살 정도의 아이들이 하루에 듣는 부정적인 말과 긍정적인 말의 비율은 100:1 정도라고 합니다. 사람은 관리하지 않으면 부정적이고 절망적이고 비관적인 말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거기다 절망적인 말을 하면 불에 기름을 붓는 꼴이 되는 것입니다.
당시 상황도 마찬가지입니다. 2명의 희망적인 말보다는 10명의 절망적인 말이 훨씬 빨리 전염되고 큰 영향력을 끼칩니다. 10명의 지도자들이 절망적인 말을 통해 절망을 생산해 내니까 어떻게 확산됩니까? 14장 1절을 보십시오. 백성들이 밤새도록 통곡합니다. 14장 2절을 보십시오. 모세와 아론을 원망합니다. 아주 비관적인 말을 합니다. 차라리 광야와 애굽 땅에 죽게 만들지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여 칼로 죽게 만느냐는 것입니다. 아직 가보지도 않은 땅인데 과도하게 미래를 절망적으로 추측하여 죽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노예로 살았던 애굽 땅이 더 좋다고 그 땅으로 돌아가자고 합니다. 절망적인 말은 부정적이고 소극적이고 비관적인 말을 하게 하고 결국은 그들의 말처럼 인생을 절망으로 끝내 버리고 맙니다.
왜 이들을 자신들이 가보지도 않았는데 남의 부정적인고 절망적인 말만 듣고 이렇게 절망적이 말을 했을까요? 하나님은 이런 상황을 어떻게 해석해 주시고 있을까요? 14장 11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을 멸시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것입니다. 14장 22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을 열 번이나 시험하고 하나님의 목소리를 청종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은 하는데 실제 삶의 현장에서는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는 사실을 믿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무엇이라고 선포합니까? 14장 23절을 읽어 보세요. 하나님을 멸시하여 한 사람도 그 땅을 보지도 못하겠다고 합니다. 14장 33절을 보십시오. 광야에서 방황하고 소멸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35). 절망적인 말이 가져온 결과입니다. 얼마나 무서운 결과입니까? 하나님을 믿지도 않고 멸시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도 않으니까 절망적인 말을 하고 부정적이고 비관적인 말을 하는 것입니다.
교회 다니면서도 이런 사람들처럼 부정적이고 절망적인 말을 하고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런 사람들을 잘 살펴보십시오. "교회가 어떻고, 목사가 어떻고, 장로가 어떻고, 대통령이 어떻고, 사회가 어떻고, 남편이 어떻고, 아내가 어떻고, 성가대가 어떻고..." 부정적이과 절망적인 말을 붓습니다. 아주 자기 의가 강한 사람들처럼 보입니다. 신앙생활을 누구보다 잘 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그 사람을 자세히 살펴보면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별로 없습니다.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는 믿음이 별로 없습니다. 지금 하나님이 자신의 말을 듣고 있다는 신전의식이 없습니다. 이들은 잘 분석하고 평가하고 현실을 잘 파악하는 것 같습니다. 문제만 말할 따름이지 대안이 없습니다. 희망이 없습니다. 10명의 정탐꾼과 같이 절망의 바이러스, 부정의 바이러스만 전파할 따름입니다. 그래서 백성을 살리는 것이 아니라 백성을 죽이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잘 믿는 사람들은 “안된다. 망한다. 끝났다.” 등과같은 절망적인 말을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함께하신 것을 실제적으로 삶의 현장에서 믿기 때문입니다. 부정적인 말을 하지 않습니다. 소극적인 말을 하지 않습니다. 비관적인 말을 하지 않습니다. 바울은 로마의 감옥에 갇혀 있으면서도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4:13)”라고 희망적인 말을 합니다.
희망적인 말을 하는 여호수아와 갈렙은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14장 9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여호와를 거역하지 말라고 말합니다. 그 땅 백성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합니다. 그들은 우리의 먹이라고 말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희망을 가지는 것은 우리의 조건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함께하시면 어떤 상황에서도 희망의 말을 하면 일어날 수 있습니다.
헨델은 후기 바로크 음악의 거장이지만 한때 그를 시기하는 사람들이 그의 곡이 발표되는 공연장에 불량배들을 동원하여 공연을 방해했답니다. 그 일로 헨델은 충격을 받아 앓게 되었답니다. 그때 무명의 한 시인으로부터 "그리스도는 사람들로부터 버린 바 되었으나 하나님이 부활시켜 만왕의 왕이 되게 하셨습니다. 힘을 내십시오."라는 희망적인 말을 들었답니다. 그는 그 편지를 읽고 힘을 얻어 23일간 금식하며 메시아 중 42번 할렐루야를 완성했다고 합니다. 자녀들에게 "하나님이 함께하는 네가 자랑스럽구나! 괜찮아, 넌 할 수 있어. 엄마 아빠는 널 믿어. 힘내."라고 희망적인 말을 해 주면 자녀의 재능은 춤을 출 것입니다. 남편에게 "오늘도 수고했어요. 당신이 최고에요. 내가 결혼 하나는 잘했지요. 다 당신 덕분이어요. 하나님이 함께하시면 당신은 최고가 될 수 있어요"라고 희망적인 말을 해 주면 남편은 세상을 다 얻은 것 같은 기쁨으로 사명을 감당할 것입니다. 아내에게 "난 누구보다 당신을 사랑해요. 당신이 최고 예뻐요. 당신 없었으면 난 아무것도 못 했을 거요. 하나님이 함께하시면 당신은 최고의 어머니가 될 수 있을 거여요"라고 희망의 말을 하면 아내는 세상 모든 것을 얻은 것 같을 것입니다.
절망적인 일을 당하면 "하나님이 함께하시기 때문에 목사님 할 수 있습니다. 장로님 할 수 있습니다. 여보, 당신은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어, 아들아 너는 얼마든지 성공할 수 있단다."라고 희망적인 말을 해야 합니다. "우리 교회는 가망이 없다. 우리 기업은 끝났다. 우리 가정은 어쩔 수 없다. 우리 자녀는 별수 없다. 우리 목사님은, 우리 장로님은, 우리 권사님은, 내 남편은, 내 아내는, 내 아들 딸은 별수 없다"고 절망적인 말을 하면 이 땅에서 약속의 땅의 축복을 누리지를 못합니다. "안 된다"를 "하나님이 함께하시면 된다"로 말을 바꾸시길 바랍니다. "할 수 없다"를 "하나님이 함께하시면 할 수 있다"로 말을 바꾸시길 바랍니다. "끝이다"는 "하나님이 함께하시면 시작이다"는 말로 바꾸시길 바랍니다. "죽는다"를 "하나님이 함께하시면 산다"로 말을 바꾸시길 바랍니다. "실패한다"를 "하나님이 함께하시면 성공한다"고 말을 바꾸시기 바랍니다. 말이 바뀌면 인생도 바뀌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함께하시면 훌륭한 사람이 될 수 있을 것야. 하나님이 함께하시면 얼마든지 치료될 수 있을 거야. 하나님이 함께하시면 사업도 성공할 수 있을 것야. 하나님이 함께하시면 어떤 장애물도 넉넉히 건너갈 수 있을 거야. 하나님이 함께하시면 20년 못 고치는 성경도 고칠 수 있을 거야."라고 희망적인 말을 해야 합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희망적인 말씀을 해 주십니다. 민족을 이끌어야 할 여호수아에게“ 네 평생에 너를 능히 대적할 자가 없으리니 내가 모세와 함께 있었던 것 같이 너와 함께 있을 것임이니라 내가 너를 떠나지 아니하며 버리지 아니하리니(여호수아 1:5)”라고 희망적인 말씀을 해 주십니다. 홀로 결혼도 하지 않고 외롭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예레미야에게 “너는 그들 때문에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하여 너를 구원하리라(예레미야 1:8)라고 희망적인 말씀을 해 주십니다. 우리와 오늘도 함께 하시는 하나님은 "내가 네게 힘을 준다. 내가 네 필요를 채운다. 내가 네게 응답한다. 내가 너와 함께 한다. 내가 너를 쉬게 한다. 내가 너를 축복한다. 내가 너를 실족치 않게 한다. 내가 너를 사랑한다."라고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희망적인 말을 한 여호수아와 갈렙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14장 24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그와 그 자손이 그 약속의 땅에 들어가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말을 하나님이 다 듣고 계십니다. 27절을 보십시오. 우리는 어떤 절망적인 상황이 다가온다고 해도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사실을 믿고 희망적인 말을 하는 신앙인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어떤 절망적인 순간이 다가와도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희망적으로 말하고, 하나님이 함께하심을 믿고 희망적인 말을 하며 살다가 죽음의 순간에도 ‘오늘 나 천국 간다.’라고 희망의 말을 남기고 이 땅을 살아가는 성도님들이 다 되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