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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2일 오늘의 역사
2023년 ‘향수’ 부른 국민테너 박인수 별세
2023년 대전 여자고등학교 난방용 석유난로 가동으로 일산화탄소 중독 19명 응급실 행
2022년 제천 비행장 폐쇄 시민공원 조성
2022년 숙명여자대학교 한국 최초 여성 공군학생군사교육단 창단
2019년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곽예남 할머니 사망(94세).
2016년 테러방지법 국회통과.
테러방지법의 표결 막기 위한 필리버스터(무제한토론) 192시간 27분 만에 끝남
(38명 토론)
세계최장기록, 더불어민주당 이종걸 의원 필리버스터 최장발언(12시간 31분) 기록.
2012년 범죄심리학 '깨진 유리창의 법칙' 창시자 제임스 윌슨 별세
미국 범죄예방프로그램의 초석이 된 '깨진 유리창' 이론을 만든 제임스 Q 윌슨(81·사진) 전 하버드대 교수가 지난 2일 백혈병 합병증으로 별세했다
경찰과 범죄자의 행동을 주로 연구한 윌슨 교수는 1982년 제자였던 조지 켈링 교수와 함께 '깨진 유리창' 이론을 시사 월간지 애틀랜틱(Atlantic)에 발표했다. 이 이론은 깨진 유리창을 고치지 않고 방치할 경우 지나가는 사람들이 관리자가 없는 건물로 생각하고 다른 유리창도 모조리 깨뜨린다는 내용이다. 작은 문제를 방치할 경우 큰 범죄로 발전하게 돼 도시가 무법지대로 전락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이론은 이후 뉴욕·로스앤젤레스 등 미국 대도시에서 범죄예방프로그램의 기초 이론으로 도입됐다.
1990년대 검사 출신으로 뉴욕 시장이 된 루돌프 줄리아니와 윌리엄 브래튼 경찰국장은 이 이론을 토대로 지하철 무임승차·지나친 구걸행위·노상방뇨 등 경범죄에 강력히 대처하는 범죄 분석 시스템을 도입했다.
2007년 경부선에 전기기관차가 투입되었다.
2009년 한국인 최초 아이비리그 총장 김용
미국 아이비리그(동부 명문 대학) 총장에 한국인이 뽑혔다. 다트머스대학 재단이사회는 2009년 3월 2일(현지시각) 김용(50·미국명 Jim Yong Kim) 하버드 의대 국제보건·사회의학과장을 제17대 총장으로 선출했다.
200여년이 넘는 아이비리그 역사에서 한국인은 물론 아시아인이 대학을 대표하는 총장에 선출된 것은 처음이다. 다트머스는 하버드·예일·프린스턴·브라운·코넬·펜실베이니아·컬럼비아와 함께 미국 동부 8개 명문 사립대(아이비리그)로 꼽힌다. 미국 최초의 공과대학과 비즈니스스쿨을 세운 240년 역사의 대학이다.
'첫 아시아인 아이비리그 총장'이라는 역사를 새로 쓴 김 신임 총장은 그동안 세계 무대에서 출중한 지도자의 길을 걸어왔다. 결핵, 말라리아, 에이즈 등의 질병 퇴치를 열정적이고 혁신적인 방법으로 이끌어온 그는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100인'(2006년 타임지), '미국의 최고 지도자 25명'(2005년 US 뉴스 앤 월드 리포트) 등에 뽑히고, '천재상'으로 불리는 맥아더 펠로상(2003년)을 수상했다. 김 신임 총장은 보스턴 아동병원 소아과의사인 부인 임연숙씨와 사이에 2남을 두고 있다.
김 신임 총장의 부친 김낙희(별세)씨는 6·25전쟁 당시 17살의 나이로 혈혈단신 북한에서 피란와 서울대 의대를 졸업한 뒤, 미국으로 건너와 아이오와대학에서 치의학 분야에서 활동했다. 모친 김옥숙씨는 경기여고 수석졸업생으로 역시 아이오와대학에서 한국 철학 퇴계 연구로 철학박사 학위를 땄다. 아이오와주 머스커틴고등학교를 나온 그는 고교시절 총학생회장으로 활약했고, 학교 미식축구팀에서 쿼터백을 맡기도 했다. 브라운대를 졸업한 김 신임 총장은 하버드대에서 의학과 인류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2009년 소록대교 개통
일제 강점기인 1916년 한센인들을 격리 수용하기 위해 만들어진 국립 소록도 병원!
일본 정부는 당시 폭압과 강권 통치로 한센인들을 관리했고, 해방 이후에도 단종과 낙태 등 한센인에 대한 인권침해는 끊이지 않았다.
이 때문에 수백 명의 한센인들이 소록도를 벗어나려다 바다에 빠져 숨졌다.
한센인의 한이 서린 섬, 소록도가 93년 만에 육지와 연결됐다.
2001년 공사에 들어간 지 8년 만에 완공되었다니다.
소록대교의 주탑은 두 손 모은 모습을 형상화한 것으로 육지와 소록도 사람들의 화합을 상징한다.
2005년 호주제 폐지안 국회본회의 통과
호주제(戶主制)와 동성동본 혼인금지 제도를 폐지하고, 양자(養子)도 친자(親子)와 같은 법적 권리를 갖도록 하는 내용의 민법 개정안이 2005년 3월 2일 국회본회의에서 통과되었다.
양성평등이라는 시대흐름에 따라 촉발된 호주제에 대한 논쟁은 2005년 2월 3일 헌법재판소에서 헌법불합치 결정이 내려진 후 28일 국회 법사위에서 호주제를 폐지하는 내용의 민법 개정안이 통과되었다. 이후 3월 2일 국회본회의에서 호주제(戶主制)와 동성동본 혼인금지 제도를 폐지하고, 양자(養子)도 친자(親子)와 같은 법적 권리를 갖도록 하는 내용의 민법 개정안이 통과되면서 호주제는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되었다. 이에 따라 새로운 민법 개정안이 시행되는 2008년 1월 1일부터 호주제는 폐지되고, 호적부 대신 ‘1인1적부’ 형식의 가족관계등록부가 사용된다.
2003년 자크 시라크 프랑스 대통령, 식민통치 후 40년 만에 알제리 첫 공식방문
자크 시라크(Chirac) 프랑스 대통령은 알제리의 알제를 공식 방문, 압델 아지즈 부테플리카(Bouteflika) 알제리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가진 뒤 양국의 교류협력을 강화하는 ‘알제리 선언’에 서명했다.
시라크는 알제리를 처음으로 공식 방문한 프랑스 정상이 됐다. 양국은 알제리 선언을 통해 “과거를 잊지 않으면서, 정치·경제적으로 특별한 동반관계에 획기적인 결정을 내린다”며 정상회담의 정례화, 정치·경제적 협력과 인적 교류의 강화를 약속했다.
시라크는 이날 공항에서 알제 시내로 이동하던 중 50만명의 시민들로부터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감동한 표정을 감추지 못한 그는 여러 차례 차에서 내려 시민들과 악수를 나눴다. 시민들은 양국의 화해를 위한 시라크의 방문을 한결같이 환영했다. 그러나 일부는 시라크를 향해 “비자, 비자”를 외치면서 프랑스 정부의 비자발급 증가를 요구했다.
시라크는 방문 첫날부터 화해의 상징적 의미를 강조하기 위해 애썼다. 그는 프랑스로부터 알제리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 싸우다 숨진 순교자들을 추모하는 기념탑에 화환을 바쳤다. 그는 알제리 독립전쟁 당시인 1956년 3월부터 1957년 6월까지 프랑스 육군소위로 참전한 경력이 있다. 시라크는 프랑스 군대가 1830년 탈취해간 알제리 태수(太守)의 도장을 알제리 정부에 공식 반환했다.
시라크는 공식 만찬연설을 통해 “양국 사이에는 거칠고, 종종 잔혹하고 비극적이고 고통스러운 역사가 있었다”며 “40여년이 흐르고 나서야 우정과 신뢰의 회복 속에 양국의 미래를 진지하게 바라볼 때가 됐다”라고 말했다. 시라크는 “우리는 진정한 동반관계를 구체화하기 위해 알제리를 향한 프랑스와 국제사회의 투자가 비약적으로 늘어나도록 촉진하고 싶다”며 “프랑스는 알제리가 추진하는 대역사(大役事)에 동참하고 싶다”고 말했다. 시라크는 1991년 이후 이슬람주의자들의 테러로 인해 12만명의 희생자를 기록한 알제리 내부 문제에 대해 “프랑스 국민들은 이 기간 알제리 국민들이 겪은 고통에 함께 아파하고 있음을 전하고 싶다”고 말했다.
2003년 북한 전투기 4대, 미국 정찰기 위협
2001년 국악 FM방송 개국
‘국악 FM방송’은 국립국악원이 운영 주체를 맡아, 서울·경기 일원에 출력5㎾·주파수 99.1㎒, 전북 남원 일원에 1㎑·95.9㎒, 매일 새벽5시부터 다음날 오전2시까지 하루 21시간 방송을 한다. 국악원이 재단법인 ‘국악방송’(이사장 윤미용·국립국악원장 겸임)을 설립해 서울 서초동 국악원 내 국악박물관 2층에 스튜디오를 차렸다.
생방송 프로그램은 ‘FM국악당(오전6~7시) ‘김자영의 창호에 드리운 창살’(오전9~11시) ‘채치성의 국악세상’(오전11~12시) 등 4개. ‘이금희의 고운 님의 노래’ 등 6개는 녹음 방송한다. 방송 인력이 ‘아나듀오’(아나운서·프로듀서·오퍼레이터의 합성어) 8명 등 14명에 불과해 방송의 질을 걱정하는 목소리도 있었다.
윤미용 이사장은 “1인 3역의 디지털·초미니 음악방송이지만, 예산과 재정자립도를 차츰 높여 국악 진흥의 전진기지로 거듭나겠다”고 밝혔다.
2001년 아프가니스탄, 바미안의 1500년 전 고대 석불 파괴
1999년 조선일보, 가로짜기 제작 시작
1998년 육군사관학교,여생도(58기)가 최초로 입교함으로써 금녀지대로서의 성역을 깨고 여성에 문호를 개방
1997년 정부, 초등학생 학원 영어 과외 금지 발표
1997년 워싱턴포스트, 오리건대학 돈 월프 박사 등이 96년 8월 원숭이를 복제탄생시켰다고 보도
1997년 탈북자 강철호씨 김포공항 통해 귀순
강철호씨는 기자를 만나자 왈칵 껴안으며 “내가 살 수 있게 도와달라”고 했다. 오랜 긴장이 풀린 탓인지 어깨를 들먹였다. 바깥 활주로에는 그가 타고 가야할 오후 6시30분발 오사카행 대한항공 722편이 기다리고 있었다. 비행기 출발 50분전이었다. 곧이어 김포공항 주둔 공안당국의 관계자들이 속속 몰려들었다. 강씨는 자신이 북한에서 탈출해 왔다면서 자신을 한국에서 살게 해달라고 공안관계자들에게 호소했다. 곧바로 강씨의 신병은 안기부에 인계됐다.
천신만고 끝에 북한을 탈출, 중국에서 4년간 은신생활을 해 온 강씨의 숨가쁜 귀순신청은 이렇게 이뤄졌다. 1993년 8월 북한을 탈출했던 그는 1997년 3월 2일 오후 3시25분 대한항공 652편으로 서울 김포공항에 도착했다. 중국에서 위조신분증을 이용해 획득한 해원증으로 일본 선박회사에 취업한다는 명목으로 북경을 출발, 김포공항을 경유해 일본 오사카로 향하던 중이었다. 일행에서 이탈한 그는 김포공항의 보세구역안 환승대합실에 머물면서 1994년 6월 심양에서 만난 적이 있는 기자에게 연락해온 것이다.
안기부 조사에 따르면 강씨는 함경남도 함흥시 사포구역 장수동에서 태어났으며 유복한 어린 시절을 보내다 1973년 항일독립투사였던 할아버지가 반혁명분자로 몰려 함흥시에서 쫓겨나자 함경남도 함주군 고양리 산골로 추방됐고, 1987년 9월부터 북한 함경남도 대흥정치범 관리소에 수용돼 있다가 1992년 10월 극적으로 탈출, 중국으로 넘어간 정치범으로 밝혀졌다.
1995년 미국 우주왕복선 엔데버호 발사
1995년 러시아 오스탄키노TV 방속국 블라디슬라프 리스티예프 사장 총격 피살
1995년 한국어선 모로코서 피격 - 이원호 선장 사망, 선원 24명 억류
1995년 베어링 은행 파산 주범 닉 리슨 검거
1994년 해직 전교조교사 1,135명 4년 만에 교단 복귀
1990년 토지공개념제도 시행
1989년 문공부, 평화방송과 불교방송 설립 인가
1988년 이현재 제20대 국무총리 취임
1983년 중고생 복장자율화 시작
1979년 국산전기자동차 개발 성공
1978년 여성 법학자 박관숙 사망
1972년 파이어니어 10호 발사
1969년 중국과 소련, 전바오 섬(珍寶島)에서 무력충돌 발생
중국과 소련의 동부국경에서 1969년 3월 2일 오전 4시10분 중소 양군이 무력충돌, 쌍방에 다수의 사상자를 냈다. 충돌이 일어난 국경은 하바로스크 남쪽에 있는 오소리강(소련명 우수리강) 전바오 섬(珍寶島. 소련명은 다만스키섬)이었다. 소련의 국영 타스통신은 `무장한 중국군 300명`, 중국의 베이징방송은 `무장한 소련국경경비대`가 먼저 자국 영토에 침입, 도발했다는 비난성명을 각각 발표했다.
첫날 전투는 다수의 사상자만 내고 막을 내렸지만 3월 15일 다시 대규모 전투가 벌어졌다. 9시간에 걸친 대접전 끝에 중국은 1,000명의 전사자와 2,000명의 부상자가 발생하는 큰피해를 입었으며, 소련의 '프라우다'는 소련군 240명이 사망했다고 발표했다.
이 섬의 영유권문제는 100년전의 제정 러시아-청조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전바오 섬은 면적이 0.74㎢밖에 안되는 작은 섬이지만 소련입장에서 시베리아 개발의 심장부인 흑룡강(아무르강)과 오소리강 일대는 극동전략의 중요한 요충지였다. 중국입장에서도 동북지방의 공업지대와 유전지역인 대경에 가까운 이 지역의 전략적 의미는 매우 컸다. 중소관계 결렬 이후 이 섬의 귀속을 둘러싼 충돌은 자주 있었지만 본격적인 군사충돌은 처음이었다.
중소 양국의 국경분쟁은 1956년 흐루시초프가 스탈린을 비판하면서부터 불거졌다. 당시 마오쩌둥은 '소련 수정주의'라며 모스크바와 거리를 두기 시작했고, 1958년 소련이 중국 내에 장파(長波)무선국 건설과 연합 잠수함대 창설을 제안했으나 중국이 주권에 위협된다면서 반대하자 양국의 갈등은 더욱 증폭됐다. 이후 1960년 7월부터 중국에 파견된 소련 기술자 전원이 철수하고 중소 양국의 각종 협정이 파기되면서 양국의 관계는 더 이상 회복할 수 없는 단계로 들어섰다. 양국은 국경지대에 100만 명의 병사들을 배치했다.
소강상태에 있던 국경분쟁이 다시 문제가 된 것은 흐루시초프가 실각하고 브레주네프가 득세한 1964년이었다. 1964년 10월부터 1969년 3월까지 총 4,189건에 달하는 국경분쟁이 발생했으며 진보도의 무력충돌이 중소 양국 국경분쟁의 정점이었다.
국경문제는 고르바초프가 등장하고 나서야 해결됐으며 현재 전바오 섬은 중국 헤이룽장(黑龍江省) 후린(虎林)시에 속해있다.
1969년 콩코드기 첫 시험비행에 성공
영국과 프랑스가 공동개발한 콩코드기 시험비행이 1969년 3월 2일 처음 실시돼 성공했다. 프랑스 남부 툴루즈에 있는 아에로스파시알사 활주로를 이륙한 콩코드 001기는 29분간 프랑스 상공을 날았다. 콩코드가 초음속비행에 성공한 것은 7개월 뒤 시험비행 45번째 만인 1969년 10월 1일이었다. 마하2(시속 2천1백55km)를 기록한 것은 1970년 11월 4일 1백2번째 시험비행에서 53분간 순항하면서였다.
1976년 1월 21일 상업운행을 개시함으로써 콩코드기는 민간 항공여행의 초음속 시대를 열었다. 25년간 가장 빠르고 안전한 여객기로 평가받아온 콩코드기는 2000년 7월 25일 파리 북부지역에 추락,승객과 승무원 109명을 비롯해 현장의 주민 3명까지 1백13명의 목숨을 앗아가자 콩코드기의 안정성에 논란이 일어나 운항을 1년이나 중단했고, 2001년 9.11테러 이후로 항공 승객이 급감하자 결국 2003년 5월 30일 뉴욕-파리간 비행을 마지막으로 그 막을 내렸다.
프랑스어로 '화합'을 뜻하는 콩코드기는 프랑스 드골 대통령의 제안으로 개발됐다. 프랑스와 영국은 개발 초기에 140억 달러라는 거액을 투입했지만 콩코드의 대당 가격은 190억 달러로 치솟았고 연비가 낮아 구입하려는 회사가 적었다. 덕분에 당초 300대 생산을 예상한 것과 달리 20대만을 생산했고 그 중 14대만이 상업비행에 성공했다. 대서양 거리를 7시간에서 3시간으로 단축하는 놀라운 성능을 보여줬지만 대서양 왕복요금이 1만 2,000달러에 달해 일반일들이 이용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콩코드의 실패를 빗대어 잘못된 판단을 말할때 '콩코드 패러시(Concorde Fallacy)'라고 말하기도 한다.
1969년 미국의원단 21명 내한
1967년 뤼프게 서독 대통령 방한
1964년 한국과학기술정보센터(KORSTIC) 발족
1962년 버마 쿠데타로 네윈장군 집권
1962년 3월 2일 미얀마의 육군총사령관인 네윈 장군이 무혈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장악했다. 쿠데타를 일으킨 직접적인 원인은 미얀마인들이 거주하는 지역을 하나의 연방행정단위로 축소함으로써 중앙집권정부 대신 연방을 이룩하라는 샨주(州)의 일부지도자들의 주장과 3월 2일로 발효하게 된 무역의 국영화 정책에 대한 야당경제계 및 군부의 반대 때문이다.
네윈 장군은 1958년 9월 26일 제1차 혁명을 일으킨 바 있다. 미얀마의 정국은 네윈 장군의 제1차 혁명 후 약15개월 간의 군정 끝에 1960년 2월 6일에 총선거를 실시해 정권이 민간인에게 이양됐다. 민정이양으로 다시 정권을 잡게 된 반 파시스트 인민자유연맹출신인 우누 수상은 혁명 후 최초의 민간내각의 수반으로 등장했으나 인민자유연맹의 청렴파와 안정파의 대립이 격화돼 정국은 불안했다.
이때 네윈 장군이 제2차 혁명을 일으켜 의회·정당활동을 정지시키고, 우누 수상 등 많은 정치인을 체포함으로써 미얀마는 다시 군정에 들어갔다. 네윈 군정은 그 기본원칙으로서 미얀마식 사회주의를 도입, 비(非)버마족 자본의 국유화를 중심으로 하는 국영 경제기구의 확립을 목표로 하고, 정치적으로는 사회주의 계획당을 창설, 기타 모든 정당을 불법화함으로써 1당 독재체제를 구축했다.
1960년 부산 국제고무공장 화재로 여공 62명이 사망
1959년 한국과 노르웨이 국교수립
1958년 영국 후크 탐험대 사상최초로 남극대륙 횡단 성공
1958년 3월 2일, 영국의 비비안 후크는 탐험대원 12명과 함께 남극 로스 아일랜드의 스콧 기지(뉴질랜드 쪽)에 도착했다. 이곳서 3453km 떨어진 남극의 반대편 새클턴 기지(남미쪽)를 출발한 지 140일 만에 이룬 사상 최초의 남극대륙 횡단이었다. 혹한과 악천후, 크레바스 등을 뛰어넘은 이 대장정은 1911년 노르웨이인 아문센이 처음 남극점을 밟은 지 47년 만의 일이었다.
후크 탐험대의 뒤에는 1953년 에베레스트를 처음 정복한 에드먼드 힐러리가 있었다. 힐러리는 후크와 남극점에서 만나기로 하고 같은 날 후크의 반대편에서 출발했다. 후크의 전인미답 탐험을 격려키 위해서였다. 스콧 기지를 출발한 힐러리는 사상 두번째(1912년) 남극점 정복자 스콧이 밟았던 길을 따라 먼저 남극점에 도착해 있었다.
16일 뒤 후크도 힐러리의 환영을 받으며 남극점에 닿았다. 둘은 눈보라 치는 빙판 위에서 뜨겁게 껴안았다. 힐러리로부터 장비를 지원받은 후크는 전진을 계속, 41일 후 무사히 얼음 대륙 횡단을 마쳤다.
1956년 모로코, 프랑스로부터 독립
1956년 영동지방에 40년 이래의 폭설(적설량 3m, 120여명 사망)
1955년 부산역구내에 객차에서 큰 화재로 사망 42명, 화상48명
1955년 3월 2일 오후 6시 35분 부산역에서 서울로 떠날 예정이던 야간 준급행여객열차가 출발 25분을 앞두고 제4번 객차에서 돌연 폭음과 함께 불이나 승객42명이 죽고 48명이 중상을 입는 큰 참사가 발생했다. 이 사고로 객차 1량이 전소하고 4량이 반소했다.
원인은 승객이 가져온 두 개의 신나통에서 신나액이 흘러나온 것을 열차내 판매원이 촛불을 켜서 무슨 액체인지 확인하는 순간에 불이 불어 마치 폭탄처럼 폭발한 것이다.
수사결과에 따르면 이날 임검하던 경찰 두명이 신나통을 운반하는 강생회 운반원 둘을 적발하고 "그 통속에 든 것이 무엇이냐"고 묻자 "하주가 없어서 무엇인지 알수가 없군요"하고 대답해 그대로 보냈다는 것이다. 검찰은 강생회 판매반장 손경찬씨와 강생회 부산역 운반원 정경석, 이길수씨 등 3명을 중실화 혐의로 구속했다.
1945년 캐나다 화가 에밀리 카 사망
1931년 미하일 고르바초프 소련 대통령 출생
1930년 영국작가 D.H.로렌스 사망
20세기 영국의 주요작가로 당대에 떠들썩한 논쟁을 불러일으켰던 D.H.로렌스가 1930년 3월 2일 숨을 거뒀다. 광부의 넷째 아들로 태어난 그는 조부의 대(代)부터 광부였던 아버지와 교사를 지낸 중류계급 출신인 어머니의 계급 차에서 오는 계속적인 불화 속에서 어린시절을 보냈다. 교양없는 주정뱅이 아버지와 격렬하게 대립했던 어머니는 모든 애정을 그에게 쏟았고, 이는 곧 사춘기의 그의 여성관계를 복잡하게 만들며 이후 그의 문학에 흐르는 주제가 되었다.
그러던 1912년 4월 어느날, 교편을 잡고 평범한 인생을 영위하던 그에게 결정적인 순간이 찾아왔다. 다름아닌 사랑에 빠진 것이다. 그러나, 그녀와의 사랑은 그에게 너무나 많은 대가를 요구했다. 프리다 위클리라는 6살 연상의 이 여인은 자신을 가르쳤던 교수의 아내이자 제1차 세계대전 중 적국인 독일의 귀족출신이었다. 그녀와의 사랑으로 그는 죽기까지 방랑자로서의 그의 운명에 순종해야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와의 사랑은 곧 그의 후기 작품들의 주제를 이루었다.
유럽전역과 미국 ㆍ멕시코를 떠돌며 방랑생활을 계속하던 그는 만년에 이르러 피렌체에 정착해 ‘채털리 부인의 사랑’(1928)을 완성했다. 이 작품은 기존의 ‘무지개’나 ‘사랑하는 여인들’에서 충분히 표현하지 못했던 그의 성(性) 철학을 펼치면서 사회에 대한 신랄한 저주와 함께 새로운 성관계만이 현대 문명세계를 치유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 작품은 사후 30여 년이 지나서까지 여러나라에서 외설시비로 발매금지를 당해오다 1959년, 1960년에 각각 뉴욕과 런던에서 비로소 완본이 출판됐다. 그는 결코 감정과 감각에 이성을 배제시키지 않음으로써 그보다 더 신중한 작가의 작품은 부자연스럽고 차가워 보이도록 만드는 위대한 상징문학의 탑을 세웠다.
1919년 코민테른(제3인터내셔널) 창립대회
1919년 3월 2일부터 6일까지 5일동안 모스크바 크렘린궁에서 30여개국 51명의 대표가 모여 공산주의 인터내셔널(약칭 코민테른 혹은 제3인터내셔널)의 창립대회를 개최했다.
대회는 `자본주의가 내부로부터 해체되고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새로운 시대가 도래하고 있다`고 선언했다. 당면강령으로 `자본주의 체제로부터 가능한 모든 양보를 쟁취할 것`을 결의하고 최고강령으로 `자본주의 체제를 끝장내고 프롤레타리아 독재에 기초한 새로운 사회주의 사회를 건설할 것`을 다짐했다.
제2인터내셔널은 1차대전 전부터 반전결의를 반복했지만 막상 전쟁이 일어나자 대부분의 참전국 사회주의 정당들은 자국의 전쟁에 협력했다. 여기에 절망한 레닌은 후진국 러시아의 혁명은 선진공업국의 혁명없이는 불가능하다고 판단, 새로운 국제적 혁명조직 설립을 추진해 왔다.
1909년 안중근의사 단지동맹결성
1906년 초대 조선통감에 이등박문 취임
1906년 2월 1일 을사조약에 따라 공사관이 폐지되고 통감부가 설치됐다. 통감부의 임무는 합병을 원활하게 진행시키기 위한 사전 정지작업이었다. 임시 통감이었던 하세가와 요시미치에 이어 3월 2일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초대통감으로 부임했다.
이토는 '고문 정치', '차관정치'라는 이름으로 크게는 외교에서부터 사소한 내정에 이르기까지 사사건건 간섭하며 병합수순을 밟아나갔다. 1907년 7월 19일 고종의 강제 퇴위, 1907년 7월 24일 통감의 권한을 강화한 '한일신협약'체결(차관정치 기틀 마련), 1907년 7월 31일 대한제국 군대해산 등 3년 6개월 동안 합병에 필요한 모든 정치 작업이 이토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우리에게는 '공적 1호'로 불리는 이토는 일본인들에게는 근대 일본의 기틀을 마련한 최고의 정치가로 존경받는 인물이다. 젊어서 영국과 독일의 선진문물을 접하고 돌아온 이토는 1885년 초대 내각 총리에 올라 메이지정부의 실권을 장악했고, 1888년에는 헌법초안을 심의하기 위해 설치된 추밀원 의장을 맡았다. 네번의 총리직, 메이지 헌법 제정, 국회 개설 등 일본의 근대화에는 이토를 빼고 이야기 할 수 없을 정도이다. 유연하고 신중한 성격에 타고난 조정력으로 정치적으로는 승승장구했지만 사생활이 문란하고 허장성세에 능했다.
1909년 통감의 임무를 성공적으로 수행하고 일본의 추밀원 의장으로 복귀했으나 그해 10월 26일 안중근 의사에게 피살됐다
1904년 미국 산업 디자이너 헨리 드라이푸스 출생
1900년 미국 작곡가 쿠르트 바일 출생
1867년 미국 의회, 하워드대학교 설립 허가
1855년 러시아의 황제(1825-55) 니콜라이1세 사망
1824년 체코 작곡가 스메타나 출생
1817년 헝가리 최고 서사시인 오로니 출생
1791년 영국 신학자 존 웨슬리 사망
1711년 러시아 터어키에 대한 선전포고
1316년 스코틀랜드 왕 로버트 2세 출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