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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 . 시체와 대리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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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체와 대리품 01
빨간 우산을 들고 횡단보도 중간에 서 있었다. 어두컴컴하고 텅 빈, 이 장소. 들리는 것은 고양이 울음소리. 그리고 비 내리는 소리. 비 내리는 거리는 슬펐다. 아이가 생각나서. 찰박거리는 소리와 함께 물웅덩이의 고인 물이 바지에 스며들었고, 고개 숙여 웅덩이를 바라보았을 때 우산을 떨어뜨렸다. 축축해지는 옷과 스며드는 빗물, 느껴지는 추위. 숙여졌던 고개는 위로 올려져 우중충한 하늘을 바라보았다.
어두운 하늘색은 아이의 표정과 너무나 닮아있었고, 어느새 그 아이를 추억하며 내가 울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난 하늘을 날고 있었나보다. 그렇게, 내 몸은 하늘위로 떠올랐다가 서서히 땅에 가까워졌다. 몸 속 내장이 파열 되고, 피는 빠져나가고. 그 아픔을 느끼며 앞이 흐려졌다.
그렇게 눈을 떴을 때 세상은 백색이었다. 검정과 조화 되지 않는 흰색. 갑갑한 마음이 들었다. 잠시 몸을 움직이려 했지만 팔이 따가웠다. 포도당인가. 움직이는 것을 포기하며 다시 누우려 했을 때 전화가 걸려왔다. 단조로운 벨소리. 전화를 받자 들리는 건, 악을 바락바락 쓰는 친구란 녀석의 목소리와 함께 들려오는 작고 작은 욕설. 그리고, 아이의 이름.
- [진 때문이지! 왜 못 잊어! 나도 잊는데 왜 못 잊냐고!]
그를 내 마음속에 담은 것뿐이다. 그저 아이를 추억하고 싶을 뿐이라는 거다. 왜 나의 사랑을 아무도 이해하려 하지 않는 걸까. 어릴 때의 풋사랑이래도 목숨 바쳐 사랑했기에 난 그에게 내 목숨이라도 내어줄 수 있었다. 그가 떠난 지금 내 목숨이란 한낱 부질없는 먼지에 불과하다.
- [광주병원 A동 702호실인거 다 아니까! 꼼짝 말고 기다려!]
정확히 1분 59초 걸린 녀석이었다. 헉헉거리며 내 앞에 나타난 녀석은 그 어느 때보다 불안감을 품은 것 같아 아무 것도 해 줄 수가 없었다. 그저 내 눈앞에 있는 물통을 녀석에게 건네주자 녀석은 벌컥벌컥 마셨고, 마시자마자 날 째려보며 화냈다.
“이윤진, 너 진짜 이러면 안돼.”
“알아. 내일 바로 학교 갈 거니까,”
“그게 아니잖아.”
연의 말에 얼굴이 찌푸려진다. 유진연은, 날 너무 잘 알고 있어서. 녀석은 진과 형제다. 연년생이며, 취향도, 다른 무엇도 모두 비슷하다. 이게 녀석을 내 옆에 두는 이유. 유진의 ‘대리품’ 유진연.
“상관없잖아. 이만 가.”
쌀쌀맞게 구는 날 보더니 이내 풀 죽은 녀석. 안된다. 진은 이런 녀석이 아냐. 진은 항상 내 앞에선 강했어. 일그러지는 나의 얼굴을 보고, 연은 주먹을 쥐었다.
“난, 진의 대리품 따위가 아냐. 기억해.”
연의 말에 난,
“유, 윤진아!”
쓰러졌다. 몇 분, 몇 십분 후에야 다시 깨어난 날 보며 연은 미안하단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내가 학교에 가겠다 말하자 날 말렸다. 자신이 대신 하겠다면서.
사실 나는 도암 고등학교 3학년 2반 담임이다. 그리고 녀석은 부담임. 이런 관계 따위는 필요 없는데 말이다. 같은 직업이라 그런지 학교 안에서 너무나 많이 마주치게 되는 녀석의 얼굴은 보고 싶지 않다. 진이 생각 나 버리니까. 또한, 녀석이 반에 들어가면 아이들은 왜 내가 나오지 않았느냐고 꼬치꼬치 물어 볼 것이고, 그러다 내가 사고 났다는 사실과 그 이유를 알게 되면 날 어떻게 생각하겠는가. 거기에 우리 반의 문제아 ‘임설운’이 내 소식을 아는 순간 내 핸드폰은 아마 제 기능을 못할 것이다. 전화를 너무 많이 해서 목록에는 아마 녀석의 이름만 보이겠지.
작년에 정말 이런 적이 있었다. 이 녀석과는 저번에도 같은 반이었는데, 장염으로 입원 했더니 하루에 100통이나 문자를 보내놓고 그걸로 모자라서 전화도 40번은 훌쩍 넘어서 아예 스팸 처리를 해 놓았다. 마지막으로, 녀석은 참새다. 친화력이 좋고 발이 넓어서일까. 녀석에서 뭐라 말하면 전교에 퍼지는 건 눈 깜짝할 새. 결론은, 내일 학교에 가야한다는 것이다. 이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퇴원수속을 해야 했다. 화장실을 갔다 온다고 거짓말을 쳐서 연을 내 주위에서 떨어뜨린 뒤, 곧바로 퇴원수속을 하러 갔다. 하루 이틀정도는 입원해있어야 한다고 의사가 계속 말렸지만 난 돈이 없다. 물론 돈은 연이 내줄 것이다. 하지만 친구도 연인도 아닌 미적지근한 관계에서 돈을 뻔뻔하게 요구하기에 내 철판은 그리 두껍지 않으며, 내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는다. 쓸모없는 자존심. 이 자존심 때문에 많이 피해보긴 했지만 후회한 적은 몇 번 있지만 그다지 성격을 고쳐야겠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어쨌든 나는 만류에도 불구하고 퇴원수속을 했다.
병실에 들어가자 연이 보였다. 묵묵히 나의 짐을 싸고 있는. 아니, 짐은 없었기에 그냥 가면 되었다. 연의 차가 보였다. 녀석의 취향이 아닌 내 취향에 맞춘 깜찍한 검정 마티즈. 연이 마티즈를 운전할 때면 웃겨서 쿡쿡거리기도 했지만 많이 보니 익숙해졌다. 집에 도착하자 연은 내게 죽을 주었다. 죽이 어디서 났냐고 물어보자 비밀이라며 그저 웃는다. 죽을 먹자 이번엔 재워주기에 나선 녀석. 이 친절이 부담되었지만 차마 말하지 못한 채 가만히 있었다. 그러자 설상가상으로 자장가를 부르기에 이르렀다. 부담스럽고 기분 또한 울적해지는 그런 자장가. 연은 내가 잘 때까지 부른 뒤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자신의 집으로 갔다. 하지만 난 자지 않았다. 자는 척 했을 뿐이다.
연은 모른다.
누가 있으면 잠을 잘 수 없는 나를, 연은 모른다.
그게, 진과 너의 차이점이다, 연.
그렇기에 넌, 항상 진의 ‘대리품’따위로밖에 남을 수 없는 거다. 아니, 가끔 네가 진품처럼 보일 때도 있지만, 그것은 내 눈이 잘못된 것이라 믿고 싶다. 그저, 너희는 연년생이기 때문에 외모가 닮았을 뿐이고, 같은 장소에서 함께 생활했기에 행동도, 말투도, 모든 것이 닮았을 뿐이다. 내가 진의 환영을 쫓고 있다는 사실은 이미 알고 있다. 하지만 난 역시 진을 잊지 못한다. 그건 내 옆에 있는 연 때문일 수도 있다.
여기까지 미치자 갑갑해졌다. 주위를 둘러보자 먼지 쌓여 구석에 박혀있는 기타가 보였다. 조율도 안 되어 있었고, 아르페지오도 안 친지 꽤 오래되어 소리가 괜찮을까 고민했지만, 역시 답답할 때는 기타가 최고였다. 내가 그나마 가장 자신 있던 로망스. 얼마나 쳤을까. 네 번째 손가락이 아파서 보자 물집이 생겨 있었다. 거슬렸다. 갑자기 모든 것이 귀찮아졌다. 잠이나 잘까 싶어 침대로 향하자 눕는 순간 전화가 왔다.
- [이윤진, 술 마시자]
그 말에 입에 침이 고이기 시작했다.
“안주는?”
- [치킨 시켜 놔. 술사서 갈 테니까.]
그렇게 전화는 끝이 났다. 난 곧바로 치킨을 시켰고, 아이는 10분 뒤에 집에 도착했다. 문을 열어주자 술부터 건네는 이 아이는 나의 10년 지기 단짝친구였다. 이름은 진하린. 연을 대리품으로 만든 장본인. 그 옆에서 지켜본 나. 과연 누가 더 나쁜 것일까.
“무심코 던진 돌에 죽는 개구리가, 넌 불쌍해?”
“무슨 소리야”
“대리품이, 불쌍해?”
전혀, 불쌍하지 않다면 거짓말일까. 하지만, 나를 위해서라면 불쌍하더라도 희생시키고 싶은 이기심이 있다는 것은, 추잡한 마음인걸까. 그러니까 결론은 그저,
“전혀”
희생시키는 내가 나쁜 게 아니라, 희생당하는 네가 잘못인가보다.
시체와 대리품 02
이렇게 생각할 정도로 나는 너에게 철저히 ‘이기적’인 존재이니, 제발 나에 대한 마음을 지워주길 바란다, 유진연. 허나 이 마음이 네게 닿을까. 전혀 닿지 않을 테다. 그러나 난 네 마음을 무시할 테니, 너도 알아주길 바란다. 진이 없으면 그저 생명 없는 시체일 뿐인 날, 버려주길 바란다. 혼자 마음이 곪아가며 그렇게 살 테니 제발, 제발.
“진이 보고 싶어.”
“난, 보고 싶지 않아.”
“… 보고 싶어.”
하린과 나의 차이점은, 나의 단점은 이것이다. 사람을 쉽게 믿고 쉽게 버려지고 쉽게, 너무나도 쉽게 잃어버린다. 이기적이고 자존심만 세서. 그 때문에 진을 잃었다. 진이 죽은 것은, 부정 할 수 없이 내 탓이었다. 내가 죽인 거였다. 내 말 한마디 때문에 그는 한강에 뛰어들어 죽었다. 그는 여러 번 나 때문에 자살시도를 했었다. 손목을 긋거나 시속 100km로 오토바이를 몰거나 도로에 뛰어들거나 하는 행동을 말이다. 하지만, 운이 좋은 건지 나쁜 건지 그는 한 번도 죽지 않았다. 죽을 뻔 한 적은 많았지만, 생명 줄이 질겼다. 난 그럴 때마다 그에게 달려가서 그의 뺨을 쳤었고, 그는 그저 웃을 뿐이었다. 맞으면서 웃는다고 내가 아무리 타박해도 웃었고, 그러면 난 울 것 같아서 재빨리 도망쳤다. 그러기를 몇 년. 결국은 시체로 내 앞에 다가온 녀석이었다. 그리고 난, 나만의 장례식을 치러주었다.
아아, 진이 보고 싶었다. 너무나도 보고 싶었다. 술을 마셨다. 술에 취해 진을 잊고 싶었다. 진연을 생각했다. 대리품을, 지금 내 옆에 있는 진의 대리품 진연을 생각했다. 허나, 그 아이를 생각하자 갑자기 속이 역겨웠다. 그 아이는 역시, 대리품으로는 너무나도 과분한 존재였다. 입술을 깨물었다.
비릿한 맛이 날 때까지 깨물다가 이젠 손톱을 깨물고 있는 날 보고 하린은 날 말렸다. 소주와 맥주를 섞고, 집에 있던, 진이 마지막으로 사주었던 와인을 결국 개봉했다. 그렇게 소주와 맥주, 와인이 섞인 정체를 알 수 없는 술을 마시며 밤을 보낸 우리는 다음 날이 되어서야 직장에 지각 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떡이 된 머리와 냄새나는 옷은 우리를 직장에 가지 못하도록 막았지만 우리는 열시까지 다시 깨끗한 모습으로 변해있었다. 물론 속은 좋지 않았지만 말이다. 그런데 집을 나서는 도중, 하린이 말했다.
“이제 술 먹지 마, 너는.”
“지랄 마. 아무리 친구래도 내 사생활에 간섭 할 순 없어.”
“나도 그러고 싶지만 진이 걱정해.”
“진은, 죽었어. 남은 것은 대리품 뿐이야.”
“해방은, 없겠지?”
그 말에 난 대꾸하지 않았다. 당연한 말이었기에, 그건. 나의 모든 것은 진으로부터 충족되어야 하나 진이 없는 이상 대리품으로부터 충족 받아야 한다. 내가 살기위해 그 아이를 철저히 나의 꼭두각시로, 진의 꼭두각시로, 대리품으로 만든다. 진을 죽인 것은 나인데 연 마저도 죽게 만들고 있는 내가, 진, 너는 내가 나빠 보이는가.
안 된다. 그럼 안 된다. 나를 이렇게 만든 것은 너이니. 나를 이렇게 이기적으로 만들어버린 건, 너 없이 살 수 없게 만든 네 탓이지 나의 탓이 아니라는 거다. 너 때문에 바친 모든 것은 바다보다 깊고 음지보다 짙으며 말라비틀어진 잡초에 불과하게 되었더라도 변하지 않을 나의 진심인데 왜 넌, 내 곁을 떠난 것이냐.
나의 그 장례식으로 인해, 내가 이리 후회할 줄은 나조차도 몰랐다. 너를 이렇게 그리워하는 내가 어째서 그렇게까지 하였는가. 차라리 너를 품을 것을. 너에게, 한번이라도 품어질 것을. 이렇게 그리워 질 줄 알았으면 나의 마지막까지도 너에게 모두 줄 것을. 네가 없는 나는 그저 시체일 뿐인데 어째서 날 떠나가는 것이냐. 혼이 없는 시체로 만들어버릴 것이라면 넌, 왜 날 이렇게 초라하게 만드는지. 왜 네 동생을 나로 하여금, 하린으로 하여금 대리품으로 만들어 버리는 건지.
하루가 지나갈수록 너를 죽였다는 죄책감은 진해지고 나의 이기심은 짙어지는데, 널 볼 수 없다는 희망 없는 하루만 지나가는데 왜 나를 구원해주지 않는 건지. 모든 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네가 없다면 모든 것이 하나씩 빠진 것 같아 불안하고 초조하고 마음 아프다. 이렇게 나약해져버린 내가 싫다. 너 때문이다. 너 때문이다, 유진. 그러니,
나를, 구원해라.
내가 이 세상에서 숨을 쉬고 살아 갈 수 있도록.
너 하나 때문에 나약해지는 나를 구원해라.
“그 아이에게 봄이란 없을 거야.”
내 말에 하린이 인상을 찌푸렸지만 난 하린을 무시하고 버스정류장으로 갔다. 가는 도중 핸드폰이 울렸다. 연이다. 연이라고 뜨는 액정이 야속했다. 너 따위가 진 대신 내 옆에 있다는 것이 싫다. 내게 연을 돌려줘라. 내가 호흡할 수 있도록 도와줘라. 네 마음을 유린하고 있는 이유는 그저 진 때문이나 난, 그것마저 힘들다.
내 옆에 있는 이상 넌 이미 냉혹한 겨울의 문을 연 것이 틀림없을 테다. 나는 시체. 시체 옆의 대리품. 너무나 완벽한 조화. 그 조화는 너무나 완벽하여 쉽사리 손을 댈 수 없다. 그러니, 자진하여 먼저 가라. 내 곁에서 떠나 내가 혼자 부스러질 때까지 기다려라. 나를 탐하는 것은 그 다음에. 아니, 아니다. 다음은 없다. 진이 없는 이상 난 시체, 그 이하이다. 부패된 생선만도 못한 쓰레기일 뿐이다.
진이 없는 이 곳은, 너무나도 숨쉬기 힘든 지옥임에 틀림없고, 넌 그런 나를 구원하지 못할망정 오히려 저 깊은 나락으로, 구덩이로 떨어뜨리는 지옥의 사신. 점점 더 말라비틀어진 채 죽어가는 불쌍한 나를, 제발 용서해다오. 차라리 너의, 그리고 나의 진을 죽인 죄를 갚을 다른 방법을 구해다오. 지금의 이 방법은, 내게 너무나도 약하지 않은가. 사랑을 잃고 사람을 잃고 마음을 잃은 내게, 너라는 기댈 수 있는 기둥이 있다는 것은 너무하지 않는가.
- [오늘 얘들 시험 보는 거 잊었지? 왜 이리 늦어.]
“하린과 같이 있었어.”
전화를 받자 웃음 섞인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허나 이 목소리의 주인공은 진이 아닌, 연이었다. 한순간 그 것이 진의 목소리라고 착각한 내가 미워졌다. 그러나 연은 내 마음을 모른 채 계속 진이라고 착각할만한 목소리로 말하였다.
- [선생님, 어디예요? 왜 안와요. 너무 늦은 거 알아요? 한 달이 다 되도록 안 왔잖아요.]
한 달이라. 난 그만큼 잔 적이 없다. 날씨와 풍경은 전과 같았다. 그저, 벚꽃이 지고 다른 꽃이 피었으며 날씨가 조금 더 따뜻해 진 것뿐이었다. 무슨 바보 같은 소리인가 싶어 착각이라 말하자 녀석은 당황한 목소리로 말했다.
- [진짜 몰랐어요? 교통사고 한 달 전에 당한 거잖아요. 식물인간처럼 한 달간 누워있어서 죽은 줄 알았는데.]
“그런 말, 들은 적 없어. 곧 학교 도착해. 끊어.”
그렇게 전화를 끊었다. 벌써 5월이 시작되었는가. 5월 중순이었나. 시간이 너무 빠르게 흘러간다. 5월이라 자각하고 나니 풍경이 너무나도 다르게 보였다. 하지만, 난 그대로 멈춰선 것 같았다.
시간의 뒤틀림 속에 녹여지지 못한 채 가라앉아 멈춰서고 그렇게, 날 두고 시간은 흘러간다. 나를 잡아주는 건 대리품 뿐. 진품이 아닌 대리품.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시체를, 대리품이 구한다. 그리고, 나를 더 깊은 수렁으로 몰아간다. 깊은 수렁, 깊은 나락. 지옥과 지상을 넘나들며 나를 지상에서 지옥으로 몰고 가는 잔인한 나의 대리품.
이제 그만, 내 고통을 너에게 주마. 가족을 잃는 것과 같은, 그 보다 더 한 슬픔을 겪은 나의 고통을 네게 주마. 그러니 날 귀찮게 하지 말아다오. 제발 내 옆에서 떠나다오. 한순간도 진이 아닌 너를 원한 적이 없다. 이대로 내 옆에 있어봐야 비참해 지는 사람은 너면서 왜 희생을 감수하는 거냐. 내게 한낱 먼지 같은 존재인 네가 내 옆에서 날아다녀 봤자, 난 관심 하나 던져주지 않는데.
진도 이런 마음이었을까. 내가 진에게 화가 나서 한 달 동안 연락 끊었을 때, 진도 이랬을까. 제발 이랬으면 좋겠다. 제발, 지금 내 옆에 연이 아닌, 진이 있었으면 좋겠다.
이것 봐라. 네가 내 옆에 있으니 나의 고통이 점점 깊어지지 않느냐. 얼마만큼 날 괴롭혀야 네가 행복해 질 것이냐. 이것 봐라. 네가 내 옆에 존재하니 진이 더욱 보고 싶지 않느냐. 이렇게 계속 진의 그늘 아래 살고 있는 내가 불쌍하지 않느냐. 그러니 내게 널 떠날 수 있는 자유를, 또한 죽을 수 있는 자유를 다오. 진의 그늘에서 벗어날 수 있는 자유를 다오. 항상 진을 그리워하며 진의 그늘에서 살고 싶지 않다. 내가 죽인 그를 생각하고 싶지 않다. 날 좀 살려다오.
손에 끼고 있는 이 커플링마저, 약혼반지마저 내게는 죄악이다. 그러나 한편으론, 이 사소한 행동으로 진에게 용서를 구하는 것이다. 너에게까지 용서를 빌고 싶지 않다. 제발 나를 살려다오. 너에게서 벗어나는 것이 내가 사는 길이다. 죽어도 좋다. 나를 죽여 다오. 괜찮다. 이대로 진을 만나 그 곳에서 새로이 속죄하는 방법도 나쁘진 않겠지.
그러니 마지막으로 말한다. 나를, 이윤진을 살려다오. 너라는 감옥해서 해방시켜다오. 내가 살기 위해 너를 이용하나, 너는 날 이용하지 말아다오.
시체와 대리품 03
그리고 이 점을 항상 잊지 말아다오. 오직 너만이 날 구원할 수 있다. 네가 날 떠나면, 그것이 내겐 구원이야.
뺨에 눈물이 흐르고, 바닥에 떨어지고, 또 떨어진다. 허나 이건 슬픔의 눈물이 아니다. 네게 구원 받을 때를 위한 기쁨의 눈물이다. 보고 있는가, 유진. 점점 더 죽어가는 내가 보이는가. 날 위해 축배를 들어다오. 죽음의 축배를.
천천히 걸음을 옮겨 학교로 향하자 반 아이들이 보였다. 특히 중간에서 환하게 웃고 있는 임설운이 눈에 띄었다. 홀로만 생일 고깔모자를 쓰고 케이크를 들고 있었기에 눈에 띄는 것은 당연지사. 반이 아닌 교문에서 날 기다리는 우리 반 아이들이, 고 3이라는, 학생이라는 타이틀에서 벗어나 수능 따위 잠시 버리고 겨우 나를 위해, 내 생일을 위해 날 기다렸다는 사실이 그다지 감동적이지는 않았다. 생일 축하한다고 외쳐주는 녀석들이 고맙지는 않았다. 그러나 난 웃어보였다. 연을 위해.
진의 대리품인 연에게 웃어 보인 까닭은, 임설운이 날 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날 좋아한다고 떠벌리고 다니는 녀석을 무시함으로써 연이 만족감을 느끼고, 내게 정복욕 따위를 느끼며 기쁨에 도취되어 날 향해 웃을 때, 거기서 난 진의 환영을 보고 웃는다. 애틋한 미소를 지으면 임설운은 케이크를 떨어뜨리고, 아이들은 왜 떨어뜨렸냐고 때리고 타박하고 화내면서 다시 사오라 등 떠밀지만 난 계속, 신경 쓰지 않은 채 연을 향해 웃는다.
힘들고 힘겹지만 연이 아닌 진을 위해서라면 웃을 수 있다. 온 몸이 불에 데워진대도 웃을 수 있고, 울라 하면 울을 수 있다. 이것이 진을 위한 나의 사랑. 사랑 법. 나의 사랑법이다. 모두가 이상하게 바라보아도 상관없는.
“고마워, 너희 모두.”
내 말에 모두 웃는다. 감정 하나 섞이지 않은 말에 모두 미소 짓는다. 고맙다는 말은 이렇게나 기쁜 말인가? 진이 있을 땐 남발했던 이 말이? 내겐 전혀 가치 없는 말이다. 쓸모없는 말. 진이 없기에 가치 없는 말.
슬슬 반에 들어가자며 아이들을 들여보내는 연을 보며 계속 웃어보였다. 하지만 모두가 들어가자 굳어진 내 표정. 이 연기를, 언제까지 해야 하는 것인지에 대한 불안감이 갑자기 앞섰다. 이대로 나는 연을 놓지 말아야 하는가. 연을 놓으면 나의 살아갈 마지막 희망이 사라지지만 놓지 않아도 마찬가지이다. 어차피 나의 진은 나로 인해 한 줌의 재가 되어 공기 어딘가에 섞여져 있을 테니.
대체 얼마나 밖에 있었던 것일까. 오래 있었던 것인지 그냥 그렇게 느껴지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임설운이 보였다. 돈이 없다면서 내게 조그마한 조각케이크 한 조각을 건네는 녀석이 웃겨서 피식 웃자 얼굴이 빨개져서는 날 교실로 데려간다. 교실로 가는 동안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고3이니까. 복도는 잡음 하나 없이 조용했고 오히려 나와 녀석의 발소리가 잡음이었다. 긴장과 침묵과 압박만이 쌓여있는 이곳에서 내가 5년 전 있었다는 것이 믿겨지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내 처지가 그리 만족스럽지는 않다. 차라리 미국에서 살았더라면 진을 만나지 않았을 테고, 연을, 임설운을 만나지 않았을 것이다. 또한 하린도. 진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내 인생은 너무나도 크게 변했을 테지만 나름 그 인생도 궁금하다. 진이 없는 내 인생은 지금의 나처럼 시체 같은 인생일까. 아니면 욕망에 허덕이며 이기심에 빠져들어 누군가를 이용하는 내가 아닌, 전혀 다른 사람일까.
허나 난 알고 있다. 내가 아무리 아등바등해도 인연의 끈은 그리 얇디얇은 선이 아니기에 끊을 수 없고, 결국 난 진을 만나서 지금의 인생을 살고 있었을 것이라는 것을. 이 삶이 만족스럽지는 않지만 진을 한 번이라도 만났기에 만족한다. 단비는 한 번이나마 사막의 모래에게 호흡할 수 있는 권리를 충족시켜주었으니.
“선생님, 감동했죠?”
“뭐가.”
“우리 이벤트.”
아니, 오히려 진이 생각나서 미칠 지경이다. 속이 역겹다. 나 때문에 진이 죽었지만 오히려 내가 진을 미칠 듯이 그리워하고 있다는 것이 웃기면서도, 추악한 내가 역겨워 눈물 날 지경이다. 만약 나의 속마음을 연이 듣는다면, 연은 어떻게 행동할까.
그 때, 난 연을 놓아줘야 할까? 아니, 난 알고 있다. 연이 스스로 떼어지길 바라면서도 아주 깊은 마음 한켠은 연이 내 옆에 있기를 바라고 있다는 것을. 아주 미묘하게, 연과 진을 헷갈리고 있는 내가, 그런 나의 행동이 이 마음을 증거 해주고 있다.
말도 안 된다고 나 스스로 나를 다그쳐 봐도 결국 둘이 쌍둥이처럼 흡사하다는 이유로 둘을 헷갈리는 내가 밉다. 내가 싫다. 그러면서도 그에게서 진의 흔적을 찾으며 안도하는 나를 보고 있는 내가 바보 같다. 하지만, 그 덕에 내가 지금 이렇게 살아있는 건지도 모른다. 연이라도 내 옆에 없었더라면, 연을 대리품으로 만들지 않았더라면 나는, 난 이미 여기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난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안도한 듯 웃는 녀석이 보이고, 난 교실 문을 열었다. 들어온 지 몇 분이나 되었다고 가득 찬 녀석들의 냄새가 내 코에 머물렀다. 미간을 찌푸렸다. 고 1들에게 살짝 파릇한 냄새가 난다면, 2학년과 3학년에게는 약간 찌든 냄새가 난다. 물론 3학년이 더 심하다. 그 불쾌한 냄새가 지금 맡아지고 있었다. 괴로운 이 냄새가 날 더 괴롭히기 전, 나는 황급히 오늘 이벤트 고마웠다고 말하고 반을 나왔다. 그리고 교무실로 직행. 쌓여있는 업무는 날 괴롭게 만들었다. 이렇게 많은 업무를 언제 다 진행할까 싶어 한숨을 쉬는데, 연이 들어왔다. 부담임, 이라는 이유로.
“윤진아.”
다정하게 부르는 이 목소리가 밉다. 결국 널 대리품으로 만들게 하는 건 너다. 내가 아니야. 네가 너무, 진과 닮아서 그래.
“곧, 기일이라는 거 잊지 마. 장미나 사서 갈까? 사내 녀석에게 장미는 좀 그러려나.”
“… 국화 사, 그냥.”
“그래도 좋아했던 걸로 사야지.”
“그냥 사, 국화. 아무거나 사. 죽은 사람에게 너무 신경 쓰는 건,”
“어차피 녀석을 잊지 못하는 너라는 걸 알고 있어. 뭐가 어때서.”
그랬다. 녀석의 말처럼 난, 그 녀석을 잊지 못했다. 잊지 못한다. 적어도 너라는 대리품이 있는 한. 내가 왜 녀석을 대리품으로 만들어버렸을까, 후회감이 드는 이유도 그 것 때문이었다. 진이 너무 그리워진다. 결국 너 때문에 난, 진의 그림자 속에 드리워져 거기서 눈물 흘린다. 모든 게 너 때문이다. 그런데도 넌, 내 곁에서 뻔뻔스럽게 머물러 있다. 모든 게 너 때문이라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내가 말이 없자 녀석은 한숨을 쉬며 그냥 국화나 사서 가자고 말 한 뒤, 자리에 앉는다. 그래봤자 내 앞이다. 부담스럽다. 녀석의 눈동자에 내가 채워진다. 부담스러운 눈동자가 날 직시하면, 난 고개를 돌린다. 녀석의 눈 속에 채워진 욕망을 내가 모를 리 없다. 녀석의 눈은, 날 향한 욕망으로 이글거리고 있었다. 진은 그렇지 않았는데. 아아, 또 진을 생각해버리는 내가 미웠다. 하지만, 진을 비교하지 않을 수가 없다. 너무 똑같으면서도 가끔 너무 다른 녀석 때문에. 저 이글거리는 욕망이 부담스럽고 역겹다. 속이 느글거린다. 커피를 타 마시자 한층 가라앉았다.
교무실의 문이 열리고 몇 명의 녀석들이 들어왔다. 그리고선 내게 질문을 하기 시작했다. 나는 선생님이니까 녀석들이 궁금한 걸 알려줘야 할 의무가 있었다. 하지만, 녀석은 한층 더 심해진 눈빛으로 날 바라보았다. 날 가져야겠다는 듯 한 눈빛에 기가 질렸다. 그리고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녀석과 나 사이에 선을 그어야했다. 대리품이라는 이유만으로 녀석을 너무 가까이 두고 있었다. 그래. 난 진에게 너무 약했고, 진과 같은 얼굴을 한 연에게도 약했다. 너무 유유부단한 나였다. 가끔 하린을 닮을 필요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학생들이 나가자 난 연에게 문자를 보냈고, 문자를 받은 연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날 쳐다보았다. 여기서 말하긴 찝찝해서 나가자는 사인을 보내자 녀석은 눈치 챈 듯 먼저 나가라는 듯이 업무를 하는 척 했다. 내가 나오고 몇 분 뒤, 녀석이 나왔다. 학교 뒤편으로 가자 더운 햇빛이 몸을 감쌌다. 하지만 냉기가 가득한 분위기는 쉽사리 진정되지 않았다. 아까의 문자를 보낸 의도가 무엇인지 탐색하려는 연의 눈빛은, 사냥감을 찾는 눈빛이었고, 난 그저 짜증이 가득할 뿐이었다.
“선을 그어야한다는 말뜻이 뭐야.”
“그 말 그대로야.”
“친구라는 선을 긋는다 해도, 난 거기에 만족하지 않을 거라는 것을 알고 있잖아.”
빌어먹게도, 난 알고 있었다. 하지만 선이 필요했다. 너무나도 미적지근한 관계는 오히려 독이 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친구라는 관계가 나중에 어떤 독으로 날 해치게 될지 예상하고 있었고, 만약 이 관계를 정리하지 못한다면 어떻게 될지는 모르지만 결국 안 좋은 방향으로 흘러갈 것이라고 장담했기에.
녀석은 친구라는 선을 긋기를 싫어했다. 오히려 연인이 되고 싶어 했다. 하지만 난, 친구라는 선조차 과분하다고 생각했다. 녀석은 그저 진의 대신일 뿐이니 말이다.
“그렇다고 해도 결국 우린 친구야.”
우리, 라니. 내가 녀석에게 ‘우리’라는 말을 썼다는 것이 이해되지 않았다. 나와 연은 그렇게까지 친한 사이는 아니었다. 오히려 주종관계 따위에 속하는 관계나 마찬가지였다. 서로는 서로의 대리품이었고 시체였기에. 그걸 알면서도 이 말을 쓰다니.
연도 잠시 멈칫했다. 내 말에서 이질감 따위를 느꼈나보다. 아니, 이질감보다는 새로운 느낌. 내 말이 마음에 드는지 살짝 웃는 녀석의 미소를 보며 동공이 흔들리는 느낌을 받았다. 그런 날 보며 연은 피식 웃었다.
“이윤진, 역시 난 확신 할 수 있을 것 같아.”
“뭘.”
“네가 아무리 발버둥쳐봤자 내게서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
아니, 난 벗어날 수 있어.
“네 자유대로 생각해.”
미풍이 불었다. 선선한 미풍이 나의 머리카락을 흔들어대었다. 눈꺼풀이 아래로 쳐지고, 고개가 내려간다. 입술을 깨무는 나. 녀석에겐 말로는 이길 수 없다는 걸 알기에 조용히 참는다. 그렇게 조용히 서 있으면, 녀석은 내 고개를 올린다. 그리고 침투한다. 침투하려 갖은 애를 쓴다. 하지만 이럴수록 내 증오심만 더 커질 뿐이다. 점점 연에게서 진의 모습을 비추며 후회하는 나의 모습만 더 커진다.
다 끝낸 걸까. 소유욕에 가득 찬 녀석이 날 바라보면, 난 입 안 가득 배어버린 녀석의 느낌을 잊으려 애쓴다. 입 안의 모든 침을 퉤퉤 뱉어버리면 녀석의 얼굴은 일그러지고, 그와 동시에 난 주먹을 쥐며 녀석의 뺨을 친다. 순식간에 돌아가는 녀석의 고개. 눈이 날 향해있다. 증오심이 차 있다. 무섭다. 이럴 때면 연이 무섭다. 하지만, 난 분명 정당방위이다. 내가 잘못한 점은 단 한 가지도 없다. 그저 당했을 뿐이라는 거다.
오늘따라 너무나 의식되는,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날 바라보는 녀석은 거슬렸다. 그 거슬리는 눈빛이 오늘만 해도 몇 번이나 날 향했다. 가시방석 같았다. 녀석이 날 해치려 하면 어떻게 해야 할까 싶어 미리 도망갈 준비를 하는데, 뜻밖에도 녀석은 피식 웃으며 날 향해 말했다.
“이 일은 잊어줄게. 대신, 일요일 날 별장 가자.”
마치 내가 잘못했다는 듯 행동하는 녀석이 웃겼다. 별장, 그 곳은 진이 깃들어 있는 곳이나 다름없다. 그런데 그 별장이 녀석의 입에 담기자 짜증이 났다. 일그러지는 나의 얼굴을 보면서도 녀석은 실실 웃고만 있었고, 난 싫다고 소리쳤다. 하지만, 녀석은 꼭 가야한다며 강압적으로 날 밀어붙였다.
곧 여름이라는 듯 나무 사이로 들려오는 매미소리들은 지금의 나와 너무나도 대조되었다. 점점 숨이 막혀오는 나. 나무에 밀쳐진 뒤 목을 졸리고 있었기에.
“생각 잘 하고 대답해. 알량한 내 인내심은 이미 바닥을 드러내고 있으니까.”
그 말을 듣고 생각했다. 역시 너와 난, 물과 기름이라고.
시체와 대리품 04
결국 섞일 수 없는 존재인 물과 기름. 이것이 딱 우리의 사이를 대변해주고 있다는 사실은 당연지사. 인상을 찌푸린 채 널 바라보면 넌 아무 일 없다는 듯 뒤돌아 걸어가고, 혼자 남은 난 멍하니 너의 뒷모습을 바라본다.
따스한 봄빛에 묻힌 나의 눈물은 느릿하게 추락하고, 내 입은 어느 샌가 진을 추억하고, 발은 땅에 붙어 움직이지 않는다. 어째서 날 이리도 흔들어 놓는 것인지. 쓸모없는 자식. 결국 포기한 채 나무에 기대어 앉으면 내 발 밑에서 기어 다니는 개미 한 마리. 평생 일만 하다 죽는 일개미. 그러다가 인간에게 밟혀 죽는 짧고 얇은 생.
하지만 생각한다. 내 인생도 개미와 같을까 하고.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다 결국은 죽임당하고 버려지는 인생.
전화가 울린다. 발신자에 떠있는 이름은 [개자식]. 연이다. 전화는 금방 끊기고 부재중 통화 1건이라는 새로운 창이 뜬다. 그리고 곧바로 오는 문자. 수업에 들어오란다. 수업이라니. 설마 하는 마음에 시계를 보자 벌써 오랜 시간이 지난 뒤. 불쾌하다. 연이 그만큼 내 머릿속에 오래 머물러 있었다니.
“개 같아, 씨발.”
욕을 읊조리고 천천히 건물 안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담배가 고프다. 텁텁한 담배냄새가 그립다. 아니, 담배라도 의지해야 내가 살 것 같다. 하지만 내게는 담배가 없었다.
반으로 향했다. 어차피 녀석들이 담배 한 갑조차 안가지고 다닌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으니까. 제일 만만한 녀석을 붙잡고 담배 내놓으라 하자 당황하다가 결국 내놓는다. 말보로.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담배다. 또 다른 녀석을 공략하자 럭키 스트라이크. 맞나? 어쨌든 내 취향은 아닌데 모두 비싼 것들이다. 돈이 넘쳐나는 것들. 담배 필 시간에 잠이라도 더 자던지. 수업시간마다 자는 녀석들 보느라고 내가 더 힘들다.
녀석들의 담배 기종을 반 이상 알아내고 나서야 내 취향에 맞는 담배를 찾아 피고, 바람에 흩날리는 연기를 보며 시간을 보냈다. 참고로 교실 안에서 피웠다. 창문 좀 열어 놓으면 흩날리는 게 당연하고. 녀석들은 내가 교실 안에서 피자 많이 당황했지만 상관 없었다. 이번 수업은 대충 이렇게 흘러간 듯싶었고, 침묵 속에서 자습을 한 아이들은 살짝 기침하는 얘들이 있었지만 거의 잘 버텨 주었다. 어떻게 고3이 되도록 담배 한 번 안 필 수가 있는지. 신기한 것들. 숨이 꽉 막혀 죽을 것 같아 아등바등 살면서도 삶에 활력소 같은 게 없는 건가.
가슴이 멍멍해져왔다. 왜 그런지는 모른다. 그저, 뭔가 차오르는 느낌. 종이 치자마자 교무실로 달려가 약을 먹었다. 그냥, 감기기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아스피린을 두 알 복용했을 뿐이었다. 울면 안 된다. 잊어야한다. 진은 이 세상에 없다. 그 사실을 나는 알고 있기에 이런 슬픔마저 감기 따위로 치부해버려야 한다.
허나,
“흐으…”
차오르는 눈물을 막을 길은 없다.
“…… 흡”
울음을 참아야 했다. 진에 대한 모든 게 파도처럼 밀려와 넘쳤음에도 불구하고 난, 참아야 했다. 멈칫하는 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문을 쳐다보자 그림자가 보였고, 입술을 깨물며 휴지로 눈을 비비고 들어오라 말했다. 목소리가 살짝 갈라졌고 눈시울은 살짝 빨개졌을지도 모르겠지만 상관없었다. 바로 몇 초 전까지는. 하지만,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을 보았을 때 난 욕을 뱉었다. 연이었다. 또한 임설운도 있었다. 망할 자식들. 타이밍도 지지리도 못 맞추고 개념도 없는 인간들. 아니, 가장 어리석은 인간은 나다. 누군지 확인도 하지 않은 채 문을 그냥 열어줬으니까.
내가 문을 열자 녀석은 말했다. 거의 강압조로.
“울지 마. 녀석 때문에.”
왜 녀석은 내게 대리품이라 할 때 가장 화내는 것은 녀석이면서 왜 필요에 따라 자신을 대리품이라 치부 시키라고 강요하는 걸까. 대리품이라 하면서 대리품이라 인정하지 않는 나인데, 진과 하나도 닮지 않았는데-닮았지만 인정하고 싶지 않으니까-어째서, 어째서… 어째서…!
분노에 휩싸였다. 몸이 부르르 떨렸고, 녀석을 바라보는 내 눈 또한 떨려왔다. 옆에 있던 임설운은 근접할 수 없는 분위기에 발걸음을 옮겼고, 난 조용히 말했다.
“난 널, 진 대신이라고 인정하지 않을 거야.”
“이왕이면 진보다 높이 평가해.”
짜증났다. 분노와 모든 감정이 섞였다. 하지만 몰랐다. 지금의 분노보다 수만 배 갑절이 되어 찾아올 분노를. 또한 눈물과 증오를.
순식간에 시간이 흘러갔다. 그래봤자 며칠 되지도 않았지만. 강압적으로 잡은 약속 때문에 휴일을 고스란히 반납하고 별장에 가야했다. 물론 가기는 싫었다. 허나 녀석이 집으로 찾아와 내가 나올 때까지 초인종을 누르고 문을 두드리는 바람에 할 수 없이 열어야 했다. 준비도 안한 날 보고 녀석은 짐 몇 개를 대충 챙기더니 차 안에 날 구겨 넣었다. 뭐 하나 마음에 드는 것도 없는 여행. 흥미도 다 떨어졌다. 재미도 없고. 창 밖이나 바라보자는 심보에 경치를 보았지만 그다지 볼 것도 없다. 그렇게 얼마나 갔을까. 말없이 몇 시간을 달렸을 때야 도착한 별장은 의외로 괜찮았다. 빨리 가서 잠이나 자자는 심보로 별장 안으로 들어갔고, 도착하자마자 녀석은 내게 물을 건넸다. 쓸데없는 친절에 거절하려다 목이 말라서 물을 마셨을 때, 녀석의 승리감에 도취된 얼굴을, 그 웃음을 보지 못했다.
차 안에서 신경을 곤두세우느라 잠을 못 잤다. 침대에 눕자마자 몰려오는 피로감에 눈을 감았다. 앞으로 일어날 일도 모른 채.
일어났을 땐 온 몸이 아팠다. 살짝 눈을 굴려 옆을 보자 녀석이 있었다. 유진연이라는 녀석이 내 옆에,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채로. 설마해서 나의 몸도 보았다. 나 또한 녀석과 마찬가지로 몸 위에 옷이 걸쳐져 있지 않았다. 그 순간 빠르게 돌아간 나의 머리는, 나를 비참하게 만들었다. 내가 생각한 그 무엇이 맞을 것이라는 생각에, 눈물이 나왔다. 그리고 강하게 드는 충동. 녀석을 죽이고 싶다는 충동.
빠르게 스쳐지나가는 프로그램의 한 장면. 그 것을 행동에 옮겼을 때, 녀석은 숨을 쉬지 않았다. 혹시나 싶어 심장 부근에 귀를 대보자 심장 소리도 느껴지지 않았다. 성공인가. 칼로 난도질 하고 싶었으나 나중에 발각된다면, 녀석 때문에 불이익을 당한다는 생각에 티 나는 범행을 저지를 수는 없었다.
무기는 필요 없었다. 필요한 것은 그저, 나의 주먹뿐이었다. 세게 정수리를 쳤다. 그 행동만으로 녀석은 죽었다. 정수리에 위치한 인간의 급소. 정확하게 맞으면 사망에까지 이른다던.
챙겨왔던 옷을 급히 입고 차에 올라탔다. 온 몸이 욱신거렸지만 참아야했다. 들통 나면 안 되니까. 살짝만 움직여도 느껴지는 고통에 이를 갈며 집으로 갔다. 몸을 씻었다. 녀석의 향수냄새가 맡아지자 더욱 박박 씻었다. 녀석의 모든 것이 내게 남아있지 않도록. 아무 일도 없다는 듯 행동해보려 했으나 미칠 듯이 아파오는 몸은 어제의 일을 상기시켜 주었다. 하지만 잠들어있을 때 그 행위를 한 녀석이라서 그런지 아무런 기억도 남아있지 않았고, 그저 몸만 아파왔다. 아팠을 텐데 깨어나지 않은 것은, 녀석이 준 물과 무슨 관련이 있다는 것이겠지.
샤워를 마치고 옷을 챙겨 입었다. 여행가방에 나의 전 재산이 든 통장과 도장 등등, 내게 필요한 모든 것을 챙겼다. 마지막으로 여권도.
다시 차를 몰고 공항으로 가던 중, 진의 생각이 났다. 도로변에 차를 대었다. 나만의 장례식. 시체로 내 앞에 다가온 녀석이 맘에 들지 않아 녀석의 몸을 이불로 말아 옥상으로 끙끙대며 올라갔었다. 난간에서 이불을 펴고 녀석을 떨어뜨렸을 때에야 내가 무슨 짓을 했는지 깨달았었다. 그리고 황급히 내려갔을 땐, 녀석은 누워있었다. 삐그덕한 모습으로. 그런데도 피 하나 흘리지 않았을 때에야, 난 녀석이 죽었다는 것을 실감했었다. 녀석의 시체를 끌어안고 오열했다. 새벽이라 아무도 눈치 채지 못한 그 행위. 아무도 발견하지 못했다는 안도감이 들어버렸을 땐, 스스로 미친년이라 생각했다.
다행이도 뉴스에 나오진 않았으나 그 때 사람을 죽였다는 죄책감에 한 달 정도, 누구와도 만나지 않았었다. 한 달 후에 찾아온 연을 보고 진이라고 착각했었다. 그러나 연과 진은 다른 사람이었다. 정신을 차렸을 땐 하린과 함께 녀석을 대리품이라 지칭하고 있는 나를 발견했었다.
지나간 생각을 하자 씁쓸해져 와서 다시 차를 몰았다. 공항은 꽤나 멀리 있었고, 도착하자마자 일본행 비행기표를 샀다. 시간은 한 시간이나 남아있었다. 그 동안 가만히 공항에 머물러있었다. 그리고 시간이 되었을 때, 비행기에 탑승했다.
일본에 도착한 뒤에야, 이번에는 연을 죽였다는 생각에 두려움이 들었다. 녀석이 명을 재촉하긴 했으나 죽이면 안 되는 것이었으니. 아니, 죽여도 되었을 거다. 하지만 그런 식으로는 안 되는 일이었다. 좀 더 내 손아귀에서 비틀며 괴롭게 살아가는 모습을 보아야했다. 그럼에도 내가 사람을 죽였다는 건, 안 되는 일이었던가. 감정에 모순이 일어났다. 갑자기 눈물이 나왔다. 잠식되어 있던 두려움이 수면 위로 떠올랐다.
몇 시간이나 울었던 걸까. 해는 저물고 오늘의 마지막 비행기가 도착하고 사람들이 내리고 있었다. 그 중에 보이는 익숙한 사람은, 하린이었다. 하린은 여기저기 두리번거리더니 내게 다가와 있는 힘껏, 내 뺨을 때렸다. 아팠다. 뜨뜻미지근한 눈물이 하린의 손에 묻자 하린은 불쾌한 듯 얼굴을 찌푸리며 다시 한번 내 뺨을 때렸다. 따가운 마찰음이 울려 퍼졌으나 아무도 우리에게 관심 한 번 주지 않은 채 유유히 지나갔다.
“이럴 줄 알았어! 감히 네가 진을 죽여? 용서 못해!”
“진은, 자살했어.”
“네가 아까 죽였잖아!”
“무, 무슨 소리야!”
“자살한 사람은 진도 연도 아닌! 다른 사람이라고! 유진후라는 막내란 말야! 세 쌍둥이였다고! 그리고, 그리고… 아까 죽은 사람은 진이야. 유진. 넌 지금까지도 네가 사랑한 사람을 헷갈리고 있었다고! 네가 사랑한 사람은 진이 아닌 연이란 말야!”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분명 내가 처음으로 죽인 사람은 진이었는걸. 내가, 나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조차 헷갈릴 리가 없잖아.
“연과 진후는 정말 똑같아서 부모님조차 구별해내지 못했대. 하지만, 그렇다 해도 넌, 너는 구별했어야 하잖아…”
“진… 짜 연은 어디… 에 있는 거야 그럼…”
“이탈리아에서 유학 중이야… 이 바보야. 너는, 넌 구별했어야 해… 그랬어야 했다고…”
결국 연은, 아니… 진은 대리품이 아니었다는 말이었다. 대리품이라 칭했지만 대리품이 아니었다. 하지만 내가 사랑한 사람은 연이다. 그런 의미에선 그는 대리품이다. 그러나 의문이 생겼다. 분명, 대리품이라고 칭하자 한 사람은…
“너였어. 진하린, 네가 시작했잖아. 대리품이라는 거, 네가 먼저…”
“결국 너 혼자 몰랐던 거야. 너 혼자 대리품이네 뭐네 지껄이며 결국 그 녀석들을 죽인 거라고! 살인자! 넌 살인자야!”
… 그 어떤 말보다 살인자라는 말이 심장에 박혔다. 몸 안에 응어리가 지는 것 같았다. 몸이 떨려오고, 오열했다. 그들의 고통이 내게 전해졌다. 눈물이 흘렀다. 너무나 울어서 드디어 멈춘 줄 알았던 눈물이 다시 흘러넘쳤다. 날 지탱하던 나의 세상이 무너졌다. 내가 믿던 게 부스러졌다. 연은 진이었고, 진은 연과 진후로 나뉘어져 있었으며, 내가 죽인 사람들은 진후와 진이었고, 살아있는 사람은 연이었다. 이것은 엄청난 사실이었다. 이해할 수 없을 만큼 이상한 사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연이 살아있다는 사실에 안도했다. 왜일까.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라서?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갑자기 진의 생각이 들었다. 연이라고 불리며 지금까지 무슨 생각을 했을까. 우스워보였을까? 불쌍해보였을까? 결국 난, 내가 농락한 게 아닌, 농락당한 것이었나?
헛웃음이 나왔다. 눈물과 함께 나온 웃음. 천천히 공항을 나섰다. 무작정 걸음을 옮겼다. 나의 짐들을 이끌며. 걷고 걸었지만 끝은 보이지 않았다. 오직 보이는 것이라곤 콘크리트 도로 뿐이었다. 그냥, 한국과 비슷했고, 그냥 그랬다. 차들이 달려오는 게 보였다. 약간 술에 취한 듯 한 사람이 운전대를 잡고 있는 게 보였다. 천천히 길을 건넜다. 그리고,
콰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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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진이 죽은 지 며칠 정도 지났다. 장례식에 온 사람은 하린의 반 학생들과 선생님 몇몇, 그리고 자신 뿐 이었다. 하린은 천천히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생각했다.
보고 있니. 네가 사랑했던 사람이 나 때문에 괴로워하고 있어. 이제 알겠니. 내 사랑을 짓밟은 대가야. 네가 아이를 사랑했던 만큼 나도 사랑했었어. 아이의 죽음으로 내 사랑을 보상 받는 거야.
눈물이 찼다. 하늘이 흐릿해졌다. 잠시 눈을 깜박거리자 눈물이 흘렀다.
날 용서 하지 마, 절대. 사랑에 눈멀어 친구를 팔아버린 내게 벌을 내려.
계속 눈물이 차오르고 하늘은 점점 더 흐려졌다. 눈물은 멈추지 않았다. 곧이어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눈물과 함께 섞여 추락하는 빗물과 함께, 하린은 걸음을 옮겼다.
세차게 내리는 비를 맞으며 멈춘 그 곳. 눈앞에는 깊은 강이 보였다. 한강이었다. 이끌려갔다. 하린은 잠시 눈을 감았다. 그제야 깨달았다. 발을 내딛는 순간 갖게 되는 이 희망의 의미를. 안식이라는 희망을.
미소 지었다. 그리고 달려갔다. 그녀의 안식을 찾기 위해. ‘풍덩!’소리와 함께 그녀는 가라앉았다.
그 순간에도 비는 멈추지 않은 채 밤을 적셔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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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쓴 단편이에요 끝이 좀 병맛인건 이해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