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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올 모양입니다. 기다리는 사람은 없지만 식료품을 한 아름 안고서 귀가했어요.
내 상황만 보면 살맛, 기뻐할 일 1도 없는데 두 딸내미들 때문에 어느새 입가에
미소가 지어집니다. 제가 이 세상에 태어나서 가장 수지맞은 일 중 최고는 에스더와
예주를 부녀의 인연으로 만난 일입니다. 두 녀석은 출생부터 지금까지 내 프라이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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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어주었고 생의 나침판이었습니다. 삐약삐약 할 때부터 성인이 될 때까지 단 한 번도
저를 실망시킨 기억이 없습니다. 어쩔 땐 아이들의 심 봉사 역할 밖에 한 것이 없는
아빠가 이런 엄청난 대리만족(Proxy contentment)을 누려도 되는지 모르겠습니다.
대리만족은 돈 안 들고 누리는 ‘소 확 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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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아는 것처럼 예수, 석가, 공자, 그리고 소크라테스는 교과서에서 말하는 4대
성인들입니다. 소크라테스가 아리스토텔레스의 제자가 맞다 고하면 아 씨는 소를 보며
얼마나 오지고 행복했을까요? 청출어람을 바라보는 즐거움은 아는 사람만 알 것입니다.
제가 기억하는 형님 패션의 유행은 아놀드 파마-잭니클라우스-먼싱-블랙 앤 화이트-돌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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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마니, 구찌, 프라다, 에레메스-르꼬끄-데쌍트-언더하모까지 변화를 거쳐 왔습니다.
슈트는 제냐, 아르마니160수를 최고로 쳐주었을 것입니다. 최근 추세는 돌체나 디젤이
시들해졌고 디스퀘어드, 몽클리어, 스톤 아일랜드, 탐 브라운 같은 브랜드가 핫한 것으로
압니다. 이 중에서 탐 브라운이 과거 아르마니 족보를 잇는 꿈의 슈트가 되었더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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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뽑은 슈트 발 1위는 장 동건 입니다. 그러고 보면 패션을 아직도 이태리가 잡고
있습니다. ‘비긴 어게인3’ 버스킹을 할 때 베네치아, 바티칸, 밀라노를 나는 언제 한번
가볼 까나했고 만 지금 코로나 때문에 생지옥이 되었습니다. 오늘 기준 미국이 6,500명의
확진 자가 나왔고 이탈리아가 7400명 확진자 중에 가톨릭 사제 사망자가 690명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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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왔다니 이러다 중세 흑사병 포비아가 재현되는 거 아닌지 잔뜩 겁을 먹고 있습니다.
제가 기억하는 이태리 간초네는 ‘베사메무쵸’입니다. 이 미숙, 전 광열이 주연으로 나온
영화 ‘베사메무쵸(2001)’ O S T로 나왔을 것입니다. 영어의 의미는 'kiss me much'입니다.
지난 몇 백 년 동안 유럽은 세계를 지배하였고 유럽의 문명은 온 세계로 퍼져 나갔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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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유럽문명의 뿌리는 고대 그리스에서 출발되었습니다. 유럽 땅이 아직 미개하여 야만에
가까운 생활을 하고 있을 때 이집트나 페르시아 같은 동방에서는 왕의 절대 권력 아래 찬란한
문화의 꽃을 피 운 데 비해 그리스는 이보다 훨씬 늦게 동방으로부터 문화를 전수 받게
되었는데 한 가지 차이라면 이집트나 동방나라들은 농업 유목 국가였던 것에 비하여 그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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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들은 계산이 빠르고 훨씬 현실적인 상인들이었다고 합니다. 그리스와 동방의 한가운데
에는 ‘크레테’라는 보물섬이 있어요. 지금의 그리스 남쪽 지방의 ‘미케네’사람들이 크레타
섬을 침략할 때 미케네 인들은 그들을 멸망시키고 엄청난 보물들을 빼앗아 갔는데 이것이
고대 그리스문명의 씨앗이 되었습니다. 빼앗아 온 뛰어난 문화재는 그리스 사람들을 크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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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라게 했고 차츰 그리스 문명이 자라기 시작했는데 나중에는 동방을 능가 하는 문화의
전성기를 갖게 됩니다. 특이할 만 한 것은 동방 사람들이 태양이나 달 별 같은 자연에 큰
가치를 둔 반면에, 그리스 사람들은 모든 것의 중심을 사람에게 두었다고 합니다.
희랍 신화에 나오는 신들이 모두 인간의 형상을 한 것도 바로 그 이유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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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정치에 참여하는 민주제도를 갖고 있었는데 바로 이 인간
중심 민주제도와 현실주의가 그리스의 밑바탕이고 오늘날의 서양문화의 가장 중요한
밑뿌리가 되었을 것입니다. 뒤에 로마가 그리스를 먹고 그리스 문명은 로마로 건너가
로마 문명의 밑뿌리가 됩니다. 엄청난 영토를 가진 로마를 통하여 그리스, 로마 문명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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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문명의 바탕이 된 것이니 유럽은 기독교의 혜택을 지구상에서 가장 많이 받은 셈입니다.
이러한 이유로 이탈리아의 역사는 여러 나라의 역사를 모아놓은 것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지금부터 1500여 년 전인 서기476년 로마제국이 멸망한 이래 1400년이란 세월이 흐르는
동안 이 땅은 천년이 넘게 여러 갈래로 갈라져 한 번도 통일되지 못하고 서로 다르게 흥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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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하기를 반복하다가 100여 년 전에 이르러서야 겨우 오늘의 통일된 이탈리아란 나라의
틀이 잡혔으니 복잡한 나라임에는 틀림이 없는 것 같습니다. 지중해 한 복판에 자리 잡은
이탈리아 반도는 마치 장화처럼 생겼는데 이탈리아 반도 남북으로 척추처럼 동서를 가로질러
‘아펜닌’산맥이 뻗어있고 아펜닌 산맥과 나란히 ‘티베르’강이 흐르고 있습니다.
로마는 이 티베르 강이 지중해 하구로 흘러드는 가장 낮은 지점에 위치하고 있었기 때문에
바다 쪽으로 나가는 길은 로마를 거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런 지정학적 장점을 이용하여
로마는 서족을 향해 세력을 뻗쳐갈 수 있었고 조금씩, 조금씩 힘을 키운 후에 나중에는
이탈리아 반도의 주인공으로 떠오르게 됩니다. 약 3000년 전인 기원전 753년경 이탈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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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도는 맨 처음 중동지방(오리엔트/소아시아)에서 이주해온 ‘에트루리아’족에 의해 세워졌고
그 후 다른 민족이 에트루리아 족 보다 조금 늦게 이곳에 옮겨왔는데 처음에는 이들이 힘을
펴지 못한 체 부락을 이루고 살다가 차츰 뭉치고 힘을 키운 끝에 굴러들어온 돌이 박힌 돌을
빼버리고 맙니다. 그들이 바로 라틴족입니다. 이들은 지금의 이탈리아 중앙부에 살고 있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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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쪽에는 그리스인들이 도시국가를 이루어 살고 있으니 이탈리아의 역사는 에트루리아,
라틴, 그리스, 이 세 민족과 함께 시작된 것입니다. 단군 신화가처럼 로마에도 신화가 있어요.
그 전설의 인물은 바로 로물루스와 레무스 라는 쌍둥이 형제입니다. 이들의 건국신화는 설
이니까 믿거나 말거나 하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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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옛적하늘에 많은 신들이 있었는데 그 가운데 마르스라는 전쟁의 신이 있었어요. 어느
날 산책길에 레아실비아 라는 여인을 만나게 되고 사랑에 빠집니다. 레아실바는 곧바로
임신을 하였고 유부남 신 이었던 마르스는 이 사실을 숨기기 위해 어느 깊은 밤 두 아들을
강포에 싸서 강물에 버렸는데 바구니에 실린 쌍둥이 형제가 테베 강을 흘러가다가 늑대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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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해 구출됩니다. 이래서 늑대 젖을 먹고 자라났는데 이들이 곧 로물루스와 레무스 형제
입이다. 이 때문에 늑대 젖을 먹는 쌍둥이 동상은 로마의 상징으로 카피톨 박물관에 지금도
당당히 그들의 위용을 과시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로마자(알파벳)는 에트루리아인
들이 로마에 가르쳐 주었다고 합니다. 독수리는 용맹과 위엄을 상징했기 때문에 맨 처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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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제국의 상징으로 쓰였는데 나중에 제국이 멸망한 뒤에도 각 나라 왕들은 앞 다투어
독수리 문양을 지배자의 상징으로 택하였고 주후962년에 프랑크 왕국의 ‘옷 토’ 대제가
신성 로마제국의 황제가 됨으로서 독수리를 정식으로 자기의 문장으로 차지하게 되고
제국의 황제 자리를 도이칠란트 왕이 겸 하게 되면서 독수리는 오늘날 까지 독일의 상징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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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었다 네요. 또한 신성로마 제국의 왕관이 오스트리아의 함부르크 집안에 가게 되자 이를
계기로 오늘날 까지도 독수리는 오스트리아의 문장으로 쓰이는가 하면 신성 로마 제국에서
폴란드가 떨어져 나가게 되니 폴란드 역시 독수리를 오늘날 까지 국가의 문장으로 사용
하고 있습니다. 역사의 흐름 속에 동쪽의 러시아가 강대해지자 러시아 황제는 아예 한 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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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떠서 머리가 두개인 독수리를 러시아 제국의 문장으로 사용합니다. 나폴레옹이 오스트리아
를 쳐부수고 오스트리아 가에 속해있던 신성 로마제국을 멸망(1806)시키니 나폴레옹은 스스로
황제의 자리에 올라 독수리 문장을 자신의 것으로 하면서 유럽 최고의 황제임을 자처했대요.
그 뿐 아니라 로마와 아무런 상관이 없었던 미국마저 독수리는 국가와 대통령의 문장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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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쩍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태리가 현재까지 패션의 리더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어쩌면
로마 귀족들이 입던 옷 토가(toga) 때문일 것입니다. 중세 건축 양식인 Arch는 로마에서
처음 사용한 것이 아니라 이미 메소포타미아의 바벨론에서 사용하던 것을 에트루리아 사람
들이 로마에 전해주었습니다. Arch의 도입은 건물이나 다리를 만드는데 큰 변화를 가져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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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요한 계기가 되었는데 기둥과 기둥 사이를 넓게 할 수 있어서 이때부터 돔을 이용해 규모가
큰 건물을 지을 수 있게 된 것이죠. 제가 아는 성경의 기록이 주전587년, 유다의 멸망입니다.
B C 7세기경 테베레 강 하류에 일어난 로마인은 중부 이탈리아의 에트루스키 인과 이탈리치
계 민족을 제압하여 남하하는 켈트인을 격퇴합니다. 또, 남이탈리아의 그리스 식민도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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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복하여 B C 270년경까지 반도의 대부분을 지배합니다. 그 뒤 지중해 지역뿐만 아니라
북쪽과 동쪽으로 그 세력을 확대하여 B C 27년 시작되는 제정의 최성기에는 북쪽은 영국,
남쪽은 사하라, 서쪽은 이베리아반도, 동쪽은 이란에 이르는 대제국을 건설합니다. 그러나
속주의 경제력·군사력의 상승에 따라 이탈리아 본토의 지위는 상대적으로 저하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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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스탄티누스 황제에 의한 그리스도교의 국교 화(331년) 콘스탄티노플 천도(395년) 동로마·
서로마의 분열 등 로마 제국은 분해경향을 더하다가, 476년 게르만 용병대장 오도아케르에
의해서 서로마 제국은 정치사에서 사라져요. 게르만계 민족의 침입은 그 뒤에도 계속됩니다.
6세기 말에는 엘베 강 하류 지역에 기원하는 랑고바르드족이 롬바르디아에서 캄파니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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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르는 지역을 지배하였습니다. 랑고바르드 세력은 8세기 후반 교황의 요청을 받은 프랑크
세력과의 싸움으로 약화되고, 800년 교황에 의하여 샤를마뉴가 신성로마 황제에 임명되어
카를 대제가 돼요. 이후 이탈리아의 역사는 프랑크 왕국의 후신인 독일·프랑스의 역사와
밀접하게 얽힙니다. 남이탈리아에서는 827년 튀니스의 이슬람 세력이 시칠리아에 상륙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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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잔틴의 지배에서 시칠리아를 빼앗아 팔레르모를 중심으로 독특한 문화를 열면서 많은
새로운 재배 작물을 이탈리아에 가져다주었습니다. 이슬람교도에 의한 시칠리아 지배는
11세기에 노르만인에 의하여 종지부를 찍습니다. 노르만인은 11세기 초부터 순례·용병
또는 십자군 병사로서 남이탈리아에 와서 왕조를 세웁니다. 서유럽풍의 봉건제도, 비잔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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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의 관료제도, 아랍 식 문화가 융화를 이루어 번영하였으며, 이것이 절정에 달한 것은
혈연관계로 시칠리아 왕과 신성로마 황제를 겸하게 된 호엔슈타우펜가의 프리드리히 2세
시대입니다. 그 뒤 남이탈리아는 프랑스 앙주가의 지배를 거친 후 에스파냐의 아라곤가의
지배를 받습니다. 이탈리아반도와 비잔틴의 교역은 10세기 말부터 활발하였으나 십자군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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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기로 더욱 진전하여 베네치아·피사·제노바 등의 여러 도시가 번영합니다. 아말피·바리
등의 남이탈리아의 상업도시의 번영은 집권적인 왕조체제의 강화 때문에 오래 가지는 못
하였으나, 북이탈리아와 중부 이탈리아에서는 기사계급도 상인 및 토지소유자들로 이루어진
도시세력과 결탁하여 코무네라고 하는 제권에서 독립한 자치 체를 형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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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세기 중엽, 호엔슈타우펜가의 프리드리히 1세가 롬바르디아 도시동맹에 패한 것이
이탈리아에서 코무네 번영시대의 계기가 됩니다. 이 시대에는 베네치아·제노바 등과 함께
피렌체·밀라노·루카 등의 내륙도시도 발전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와 동시에 도시상호간의
대립, 도시 내부에서 상공업에 종사하는 일반시민과 대상인이나 토지소유자로 이루어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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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지귀족의 대립이 격화하고 이에 황제와 교황의 대립이 얽혀 13세기의 이탈리아 도시
에서는 기벨린파와 겔프파의 대립이란 명목 아래 항쟁이 더욱 더 격화합니다.
항쟁상태에 있는 도시의 질서와 안정을 도모하기 위하여 특정 유력자에게 시정의 전권을
위임하는 이른바 시뇨리아제가 밀라노를 비롯한 기타 소도시에서 보이기 시작하여 형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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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으로는 공화제인 피렌체도 사실상 메디치가의 전제 지배에 들어갔습니다. 도시의 발전과
동방의 높은 문화와의 접촉에 의한 시야의 확대, 상인의 현세적·합리적인 의식 등을 기초로
하여 르네상스 문화가 탄생합니다. 그것이 특히 꽃핀 것은 메디치가를 비롯한 지배자의
궁정이나 교황의 보호 아래에서였습니다. 이탈리아반도의 정치정세는 독일·프랑스·에스파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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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 인접한 강대국의 개입을 초래할 계기를 내포하고 있었는데 16세기에는 외국세력의 싸움
터가 되고, 한편 신대륙 발견과 오스만 투르크의 진출, 이에 따르는 상업 로의 변화에 의하여
17세기 이후 이탈리아는 경제적으로도 정체됩니다. 이러한 가운데 북이탈리아의 사보이
왕국만은 17세기 후반 이후 합스부르크와 부르봉가의 대립을 이용하여 세력을 확대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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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기에는 사르데냐·리구리아·피에몬테로부터 롬바르디아의 일부까지도 영유하였습니다.
나폴레옹은 이탈리아 본토에서 오스트리아·에스파냐 세력을 추방하여 봉건적 특권의 폐지,
교회재산의 몰수 등 프랑스혁명 정신을 이탈리아에 가져다주는 역할을 합니다. 나폴레옹
몰락 후 구체제가 부활하였으나 각지에서 입헌혁명 또는 공화제를 목표로 하는 운동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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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어났으며, 1848년 유럽의 혁명운동이 고조되는 가운데 각지에서 무장봉기가 일어납니다.
그러나 이들 운동은 오스트리아의 군사력과 교황 원조에 나선 나폴레옹 3세의 무력간섭에
의하여 좌절되었으며, 입헌헌법을 유지한 곳은 사르데냐 왕국(사보이왕국)뿐이었습니다.
이후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 치하의 사르데냐 왕국이 이탈리아 통일의 중심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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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르데냐 왕국의 총리 카보우르는 국내에서 자유주의적 정책을 실시하여 열강의 대립을
교묘히 이용한 외교에 의하여 롬바르디아를 오스트리아에서 해방시키고, 토스카나 왕국·
교황령 등 중부 이탈리아의 병합을 추진합니다. 한편 가리발디는 의용군을 이끌고 시칠리아
섬에 원정하여 두 시칠리아 왕국을 제압합니다. 이리하여 당시 아직 오스트리아 영토였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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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동부와 교황이 지배하던 로마를 제외하고 이탈리아의 통일이 대체로 달성되어 1861년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를 국왕으로 하는 이탈리아 왕국이 성립됩니다. 수도는 처음에
토리노, 뒤에 피렌체로 옮겨졌다가 1870년 로마 점령에 이어 1871년 로마를 수도로 정
합니다. 통일 후 20년간 이탈리아는 카보우르 이래의 자유무역주의를 취하면서 철도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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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설, 통일적 행정 및 경제제도의 채용 등을 통해서 통일의 열매를 거두려고 하였어요.
자유무역주의와 북부의 제도를 남부에 강요했기 때문에 부르봉왕조의 식산정책에 의하여
싹을 본 남부의 근대공업은 쇠퇴하고 다시 전근대적인 토지제도와 결합된 낮은 생산력 수준의
남부농업이 화근이 되어 통일된 이탈리아에서 남부는 국내식민지 같은 입장을 취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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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0년대 말 이후 남북 이탈리아의 격차와 국내의 대다수 주민의 빈곤 등을 해결하기
위하여 이탈리아는 북아프리카에서의 식민지경영에 나섰으나 그것도 뚜렷한 성과를 거두지
못했으며 19세기 말의 사회적 혼란 속에서 한편에서는 사회주의운동이, 다른 한편에서는
국가주의적 경향의 운동이 대두합니다. 19세기~20세기 초의 호황기에 중공업의 보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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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성과 몇 가지의 자유주의적 정책이 취해져 중화학공업이 발달했습니다.
그러나 제1차 세계대전 직전의 시기에 총동맹파업과 폭동이 각지에서 일어났는데, 이
혼란에서 회복하지 못한 채 이탈리아는 제l차 세계대전에 휘말려 들어갑니다. 연합국
측으로 전승국이 된 이탈리아는 아디제 강 상류지역과 이스트리아 지방을 오스트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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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부터 획득하였으나 제1차 세계대전 후의 불황으로 엄청난 수의 실업자가 속출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달마치아의 영토 요구가 이루어지지 못한 점도 겹쳐 국내에서는 온갖
불만이 일어났습니다. 1920년 이후 밀라노·토리노 등에서 노동자에 의하여 공장이 점거
되고 생산을 관리하게 되자 이에 반감을 가진 소시민과 농민을 배경으로 무솔리니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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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끄는 파시스트당이 세력을 신장해갑니다. 1929년 정국의 혼란을 틈타 각지의 파시스트에
의한 ‘로마 진군’이라는 형식으로 무혈 쿠데타에 성공하여 무솔리니 정권이 탄생해요. 이에
대하여 좌익세력은 분열되어 있어 유효한 반격을 하지 못했으며, 또 현재의 기독교민주당의
전신인 인민당은 뒤에 무솔리니에 의해서 비 합법화 되는데, 최초의 무솔리니 정권 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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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에는 파시스트당과의 연립내각에 참가했습니다. 1929년 이탈리아에도 밀어닥친 세계
공황에 대처하여 무솔리니는 파산에 임박한 중요산업과 은행에 정부자본을 투입하는 한편
국내의 독재체제를 강화하며 동지중해와 북아프리카에 대한 시장 확보 전쟁에 나섭니다.
1936년 에티오피아를 병합하고 1937년에는 일본·독일·이탈리아 방공협정을 체결하여 194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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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틀러 독일의 뒤를 이어 영국·프랑스에 선전을 포고하고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합니다.
그러나 동지중해와 아프리카에서의 전국이 유리하게 전개되지 않았고 국내에서는 파시스트와
주둔 독일 군에 대한 레지스탕스 운동이 격화하여 1943년 7월 무솔리니 정권은 붕괴
합니다. 1943년 9월 바돌리오 정권이 연합군에 항복한 이후에도 북이탈리아로 도피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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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솔리니와 독일군은 연합군에 대한 저항을 계속하였으나 일찍이 파시스트에 의해서 비
합법화된 인민당(기독교민주당)·사회당·공산당 등을 주체로 하는 레지스탕스 운동에 의하여
밀라노·토리노 등 주요도시는 해방되었습니다. 1945년 봄, 북이탈리아의 독일 군· 파시스트
군이 항복하였고 스위스로 도주하던 무솔리니는 유격대의 손에 처형됩니다. 제2차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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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 후 이탈리아의 정치는 레지스탕스 운동을 담당한 기독교민주당·공산당·사회당을 주체로
전개되어 1946년 6월의 국민투표와 헌법제정의회의 선거 결과 이탈리아는 왕제를 폐지하고
공화제 채택이 결정되어 기독교민주당의 데가스페리를 수반으로 하는 연립내각이 탄생
하였으며, 공화국 헌법은 1948년 1월 1일부터 시행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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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론적으로 제가 본 로마의 문화는 고대 그리스의 정신을 바탕으로 자라났고 그 핵심은
삶에 대한 이성적 접근이었는데 이것은 자연과 사물을 과학적인 눈으로 바라볼 수 있게 한
것입니다. 그래서 만물의 이치와 삶에 대해 깊은 생각을 하고 그 원칙을 터득하여 이론의
체계를 세운 사람들이 많이 배출된 것입니다. 로마인들은 자연과 삶을 미신보다는 관찰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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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색으로 대하였고 그 결과 과학과 철학이 발달하게 된 것 같습니다. 이제 로마는 유적
만이 남은 폐허가 되어 있지만 정부 구조와 법률, 문학, 언어 등 로마의 탁월한 영향은
우리 인류의 정신과 문화 속에 영원히 ‘팍스로마나’로 남아 있을 것입니다. 수많은 영웅들,
피타고라스(우주만물은 숫자다), 아낙시메네스, 데모 크리투스(원자론), 소크라테스, 알라
등등 그중에 최고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아닐까요?
2020.3.26.thu.악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