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ader & Reader 쇳물은 멈추지 않는다
“박태준, 내 ‘쪼인트’도 깔까?” 포항공대 스카웃 교수의 질문
카드 발행 일시2024.09.19
에디터
더중앙플러스
쇳물은 멈추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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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호길을 무조건 잡아!”
필자는 1985년 6월15일 김호길 박사 가족을 포스코 영빈관인 백록대에 초청했다. 사진 왼쪽부터 시계방향으로 필자, 이대공 대학설립추진본부장, 권봉순 여사(김 박사 부인), 김호길 박사, 김 박사의 딸. 사진 박태준
1985년 5월 나는 영화 ‘스파이더 맨’의 촬영 장소로도 유명한 미국 캘리포니아공과대(칼텍) 31동 건물에 들어섰다.
“칼텍 같은 대학을 한국에도 하나 세우려고 합니다. 조언을 부탁드립니다.”
칼텍 재정담당 부총장은 처음엔 농담으로 받아들이는 눈치였다.
“한국 대학들의 공학과 과학 전통은 일천합니다. 매우 늦었지만 대기업이 나서서 21세기에 대비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오랫동안 이어진 나의 진지한 설득에 부총장이 마음을 열었다. 이미 포스코에선 이대공 상무를 책임자로 하는 대학 설립 추진반이 넉 달째 실질적 업무를 추진하고 있었다.
칼텍은 연구 중심 대학으로, 엑슨연구소와 더불어 산·학·연 협조체제가 모범적으로 이뤄지고 있었다. 이것이 내가 칼텍을 포항공대(포스텍)의 모델로 잡은 이유였다.
오스트리아 레호벤공대, 스위스 취리히공대, 독일 아헨공대·베를린공대, 영국 임페리얼공대·버밍엄공대·셰필드공대, 미국 MIT·일리노이공대·버클리공대….
긴 탐색 끝에 나는 칼텍을 찍었다. 나의 칼텍 방문은 세계적 일류 공대 설립을 꿈꾸는 마지막 현장 답사였다.
칼텍 부총장과 이런 대화도 나눴다.
“포스코의 지배주주가 정부라면 정권이 바뀌어도 당신이 포스코의 리더로 남아야 대학을 키울 수 있을 텐데, 그게 보장됩니까?”
“하느님이 나에게 포항공대를 세울 시간은 허락하실 거라고 믿습니다.”
나는 환한 웃음을 지어보였다. 그런 기우(杞憂)는 버려도 좋다는 뜻이었다. 그러고 보니 아슬아슬했다. 93년 내가 포스코에서 쫓겨날 때 다행히 포항공대는 막 본궤도에 진입해 있었다.
모델도 찾았고 대학 설립을 전담할 조직도 갖췄으니, 다음은 유능한 초대 총장을 구할 차례였다. 마침 한 인물이 있다는 보고가 올라왔다. 김호길 박사. 당시 52세(1933년생), 경북 안동 태생, 안동사범과 서울대 졸업, 버밍엄대 유학, 미국 로렌스버클리연구소 근무, 미국 메릴랜드대 물리학과 교수, 전자고리가속기 권위자, 재미과학기술자협회 간사장과 회장 역임. 게다가 매력적인 일화의 주인공이기도 했다.
이대공의 전언은 이러했다.
“김 박사는 원래 럭키금성(현 LG)이 설립한 진주의 연암공전을 4년제 대학으로 만든다는 약속에 따라 미국 생활을 청산하고 귀국했는데, 정부가 인가를 내주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전두환 대통령 앞으로 ‘대한민주공화국이라 하지 말고 대한사기공화국으로 하라’는 진정서를 냈다고 합니다.”
나는 김 박사를 일단 포항으로 모셔오게 했다. 이대공이 거의 ‘십고초려’한 끝에 김 박사가 85년 6월 초 포철을 방문했다. 그때까지도 그는 ‘포항공대’에 반신반의하는 상태였다. 포도주 몇 병을 곁들인 첫 만남에서 그가 던진 큰소리들이 지금도 귀에 쟁쟁하다.
“제가 만약 포항공대로 온다면 처음에는 포항제철의 포항공대로 출발하지만 나중에는 포항공대의 포항제철이 됩니다. 또한 캠퍼스 배치는 회장님 마음대로 하시더라도 교수 채용이나 대학 운영은 저에게 일임하셔야 합니다.”
포철 임원들이 들었으면 펄쩍 뛸 소리였다. 자리를 함께한 이대공도 가슴을 졸이며 좌불안석이었다.
나는 원래 김 박사 외에도 여러 총장 후보를 면접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나는 어떤 일은 심사숙고하지만 어떤 일은 육감으로 단박에 결정한다. 그날 밤 나는 이대공에게 전화했다.
“김호길을 무조건 잡아!”
“교수들도 ‘쪼인트’ 깔 거냐?”
포항공대 기공식이 끝난 뒤 필자(오른쪽)와 김호길 초대 포항공대 총장이 악수하고 있다. 사진 박태준
큰소리를 치고 돌아간 김호길 박사는 1985년 6월 중순 포스코가 문교부에 포항공대 설립 인가 신청서를 낸 뒤에도 포항으로 옮겨오려고 하지 않았다. 포항공대를 세울 환경은 최적이었다.
11대 국회에 진출해 정치에 한 발을 걸쳤던 나는 이땐 국회의원도 아니었다. 정치에서 완전히 발을 뺀 상태였다. 12대 총선에서 집권당 권익현 사무총장이 ‘포항 4년제 대학 신설’을 공약했다. 4년제 대학 설립은 포항 시민의 숙원사업이었다.
7월 초 포항공대 설립 승인이 난 뒤에도 김 박사는 포항으로 이사하는 것을 망설였다. 이번에는 럭키금성(현 LG) 측에 미안해 했다. 나는 그의 그런 태도가 좋았다. 유가(儒家)의 신의를 존중한 그는 다른 인물을 천거하기도 했다.
그러나 “당신이 조국에서 실현하려는 이상과 포항공대가 일치하지 않느냐”는 나의 설득에 김 박사는 결국 포항으로 왔다. 그의 첫 직책은 ‘포스코 대학건설본부 고문’이었다. 이때만 해도 회사의 모든 임직원이 제복을 입고 안전화를 신었다. 그는 군 제대 이후 처음 제복을 입었지만 불평하지 않았다.
첫 대면에서 그가 요구했던 대로 나는 재단이사장의 법적 권한을 양보했다. 교수 인사권과 대학 운영권은 온전히 그의 몫이었다. 이리하여 87년 3월 첫 신입생을 받아들일 포항공대의 개교 추진 일정은 카운트다운에 들어갔다.
그러던 어느 날 내가 진짜 거절하기 어려운 인사가 아들을 포항공대 교수로 보내고 싶어 했다. 도리 없이 나는 이력서를 김 총장에게 보냈다. 그랬더니 ‘점수 미달로 불가’라는 딱지를 붙여 돌려보냈다. 그 뒤부터 나는 그런 청탁이 들어오면 아예 “우리 총장에게 알아보라”고 발뺌했다.
85년 8월 중순 포항공대 기공식이 열렸다. 다음 차례는 해외에 있는 우수한 교수를 초빙하는 일이었다. 김호길과 이대공은 9월 중순 재외동포 교수요원을 스카우트하기 위해 한 달간 장정에 올랐다.
미국·영국·독일·프랑스를 돌며 450명의 동포 교수요원을 상대로 설명회를 했다. 김호길은 “한국에서 일류 대학 설립은 이번이 마지막이니 이민온 게 아니라면 돌아가자”고 호소했다. 이런 설명회를 거치면서 말이 빠른 김호길에게는 ‘속사포’, 말씨가 분명한 이대공에게는 ‘대공포’란 별명이 붙었다고 한다.
그해 10월 초 나는 세계철강협회 회의 참석차 런던에 갔다가 독일에 있던 이대공에게 전화를 걸었다. 성과가 있느냐, 어떤 질문이 많더냐, 이런 걸 궁금해 하자 이대공이 “회장님이 교수들에게도 ‘쪼인트’를 깔 거냐는 질문까지 나왔다”고 했다. 이렇게 회장과 상무가 허물없는 농담을 나누며 전화하는 장면을 본 김 총장은 “That’s it(바로 이거야)”이라고 했단다.
86년 1월 나는 뉴욕으로 날아갔다. 이정묵·염영일·함인영·변종화·김동환·최상일·장수영 등 포항공대의 주임급 교수 초빙 대상자들을 부부 동반으로 최고급 호텔에 모시게 했다. 아무래도 최종 결정은 결국 부인들의 결심에 달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나는 근무조건·아파트·학교 수준·건학 이념 등 모든 것을 솔직히 밝혔고, 반응은 좋았다. 이때부터 대학건설본부는 이 모든 소식을 담은 ‘포항공대소식’을 전국의 과학영재와 학부모에게 우편으로 보냈다.
박태준 포스코 명예회장 [출처:중앙일보]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2783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