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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성들의 원망
민 14:1-10
1 온 회중이 소리를 높여 부르짖으며 백성이 밤새도록 통곡하였더라
2 이스라엘 자손이 다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며 온 회중이 그들에게 이르되 우리가 애굽 땅에서 죽었거나 이 광야에서 죽었으면 좋았을 것을
3 어찌하여 여호와가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칼에 쓰러지게 하려 하는가 우리 처자가 사로잡히리니 애굽으로 돌아가는 것이 낫지 아니하랴
4 이에 서로 말하되 우리가 한 지휘관을 세우고 애굽으로 돌아가자 하매
5 모세와 아론이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 앞에서 엎드린지라
6 그 땅을 정탐한 자 중 눈의 아들 여호수아와 여분네의 아들 갈렙이 자기들의 옷을 찢고
7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에게 말하여 이르되 우리가 두루 다니며 정탐한 땅은 심히 아름다운 땅이라
8 여호와께서 우리를 기뻐하시면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시고 그 땅을 우리에게 주시리라 이는 과연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니라
9 다만 여호와를 거역하지는 말라 또 그 땅 백성을 두려워하지 말라 그들은 우리의 먹이라 그들의 보호자는 그들에게서 떠났고 여호와는 우리와 함께 하시느니라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하나
10 온 회중이 그들을 돌로 치려 하는데 그 때에 여호와의 영광이 회막에서 이스라엘 모든 자손에게 나타나시니라
민 14:1-10 / [무리가 불평을 늘어놓다] 이스라엘 온 공동체가 이 말을 듣고는 밤새도록 통곡하였다. 2) 이스라엘 백성이 저마다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는 소리가 점차 드높아 갔다 `우리가 차라리 애굽 땅에서 죽는 것이 더 나을 뻔하지 않았소? 아니, 어쩌면 여기 광야에서 죽었더라도 더 좋았겠소. 3) 그런데 여호와께서는 어쩐 일로 우리를 그 사람들이 사는 땅으로 끌고 가 그들 칼에 쓰러져 죽게 하려 하신단 말이오? 우리의 처자식들이 다 사로잡힐 것 아니오? 아예 여기서 애굽으로 돌아가는 편이 더 나을듯하오' 하고 대들면서 4) 자기들끼리 이렇게 떠들어댔다 `자, 그러지들 말고 우리가 지도자를 한사람 뽑읍시다. 그래서 다같이 애굽으로 돌아갑시다.' 5) 그러자 모세와 아론은 이스라엘 온 백성 앞에서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렸다. 6) 그때 가나안 땅을 살피고 돌아 온 사람 중에 눈의 아들 여호수아와 여분네의 아들 갈렙이 선뜻 앞으로 나와 입고 있던 옷을 찢으면서 7) 이스라엘 공동체에게 소리쳤다 `우리가 두루 다니면서 살핀 그 땅은 정말 좋은 땅이었습니다. 8) 그 땅은 정말 젖과 꿀이 흐르는 땅입니다. 여호와께서 우리를 참으로 흐뭇하게 여기신다면 우리를 반드시 그 땅으로 인도하시고 그 땅도 우리 손에 맡기실 것입니다. 9) 그러니 우리가 여호와를 거스르지 맙시다. 또한 그 땅에 살고 있는 사람들을 무서워하지도 맙시다. 자, 우리에게는 여호와가 계시지 않습니까? 그러니 그들은 이미 우리의 밥이나 다름없습니다. 그들을 지켜 준다는 그들의 신들도 이미 그들을 떠났습니다. 여호와께서 우리 편이시니 두려워할 게 없습니다.' 10) 그러나 온 이스라엘 백성이 일어나 그들을 돌로 쳐죽이려 하는데, 갑자기 여호와의 영광이 만남의 장막 위에 환하게 나타났다.
불신앙적인 보고를 들은 백성들은 하나님과 모세를 원망하고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만류하는 갈렙과 여호수아를 돌로 쳐 죽이려고 합니다.
백성이 밤새도록 통곡하였더라(1-4) 이스라엘 백성은 열 정탐꾼들의 악평을 듣고 낙심하여 밤새도록 소리 높여 부르짖으며 통곡하였습니다. 이들은 애굽과 광야에서 체험한 하나님의 능력과 약속을 의지하지 않고, 크게 울며 슬퍼하였습니다. 그리고 통곡 후에는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불안함에 차라리 죽기를 자처하고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며 하나님의 능력을 의심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새로운 지도자를 세우고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하였습니다.
모세와 아론이...... 온 회중 앞에서 엎드린지라(5-10) 그때 모세와 아론이 이스라엘 온 백성의 모임 앞에서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렸습니다.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리는 행위는 기도의 의미(민 16:22; 수 7:6), 경배의 의미(창 17:3; 레 9:24; 수 5:4), 모든 것을 하나님 앞에 의탁하는 의미였습니다. 모세와 아론은 하나님을 의지하는 겸손한 자세로 기도하며 그들이 하나님 앞에 돌아오기를 기다린 것입니다. 그때 여호수아와 갈렙은 자신들의 옷을 찢고 온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우리가 정탐한 땅은 심히 아름다운 땅이라고 권면하였습니다. ‘심히 아름다운 땅’이란 지리적인 조건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왕이 되어 그 땅을 다스릴 때 진정 아름다운 땅으로 변하게 된다는 사실을 암시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호와께서 우리를 기뻐하시면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시고 그 땅을 우리에게 주시리라 이는 과연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 다만 여호와를 거역하지 말라”고 강하고 담대하게 말합니다. 가나안 사람들의 방패와 그늘이 되는 보호자는 떠났고,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확신을 가지고 백성들을 회심 권면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이미 애굽 복귀로 마음을 먹은 그들은 여호수아와 갈렙을 적으로 간주하고 극도의 적대감을 표출하며 돌로 치려고 하였습니다. 그때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 그들을 가로막았습니다.
적용: 내재된 죄와 불신앙은 전염병처럼 그 전염 속도가 빠르고 강합니다. 당신은 불신앙적인 요소를 제거하려고 어떤 노력을 하고 있습니까? 현실과 적절히 타협하려는 비굴한 자세는 없는지요?
“내가 천국의 열쇠를 네게 주리니”(마 16:15)라는 말씀 속에는 교회의 권위와 동시에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라는 사명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예수는 음부의 권세가 이길 수 없는 교회에게 하나님 나라 열쇠를 주셨습니다. 성도에게는 하나님 백성으로서의 권위가 있습니다. 동시에 교회의 일원으로서 이웃을 하나님나라 백성이 되도록 인도하는 사명이 있습니다. 이 사명을 충실히 감당할 때 하나님 나라가 확장되며 성도는 열매 맺는 큰 기쁨을 얻게 됩니다.
< 설 교 >
고난을 소화하라
민 14:9-10 / 남 호 목사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란 광야에 이르렀을 때,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 가나안 땅에 12명의 정탐꾼을 보내서 탐지하고 오도록 명령하셨습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12명을 가나안으로 보냈습니다.
그리고 그 12명의 정탐꾼들이 정탐하고 돌아와 모세에게 보고했습니다. 먼저 12명 중 10명은 과연 그 땅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임에는 틀림없지만 그곳에 사는 사람들은 강하고, 성읍은 심히 클 뿐 아니라 그곳 거민들은 아낙자손으로 장수들이므로 우리는 그들에 비하면 메뚜기 같다고 부정적이고 불신앙적인 보고를 했습니다. 그 보고를 받은 회중들은 소리높혀 부르짖으며 밤새도록 곡했습니다.
“우리가 애굽땅에서 죽었거나 이 광야에서 죽었더라면 좋았을 것을,,, 우리를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여 칼에 망하고 처자식을 사로잡히게 하느냐, 다시 애굽으로 돌아가는 것이 낫지 아니하냐.”
하지만 정탐꾼 중 눈의 아들 여호수아와 여분네의 아들 갈렙은 10사람의 보고와는 달리 신앙적이고 긍정적인 보고를 했습니다.
“우리가 두루 다니며 탐지해 보았더니 땅은 심히 아름답고 기름진 땅이며, 여호와께서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시고 그 땅을 우리에게 주시리라. 여호와를 거역하지 말라. 그 백성을 두려워하지 말라. 그들은 우리의 밥이라. 여호와가 우리와 함께 하시느니라.”
이 두 사람의 보고를 받은 회중들은 도리어 분을 내며 이들을 돌로 치려고 했습니다.
그 때 여호와의 영광이 이스라엘 모든 자손들에게 나타났다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이것은 이 두 사람의 손을 하나님께서 들어주셨다는 뜻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언제나 긍정적인 믿음을 가진 자의 편이십니다. 그러므로 조그마한 고난을 당하거나 시련이 왔을 때, 부정적으로 말하고 하나님과 지도자를 원망하고 불평하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결코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결국 부정적인 생각을 하고, 부정적으로 말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들이 말한 대로 광야에서 다 죽었고, 가나안 땅에 사는 사람들을 밥이라고 말하던 여호수아와 갈렙은 가나안 땅의 주인공이 되었던 것입니다. 부정적인 생각, 믿지 못하던 사람들은 그들의 믿음대로 되고, 긍정적인 믿음과 생각을 가진 사람들은 그들의 믿음대로 가나안에 들어가 주인이 된 것입니다.
우리 앞에 다가오는 모든 역경과 시련을 밥으로 여기고 소화시키면 역경과 시련이 축복이 된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영적인 대장부가 되려면 자신 앞에 다가오는 역경과 고난을 소화시킬 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들에게 소화 시킬 수 없는 고난은 주시지도 않습니다.
고난에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경제적인 고난, 사람을 통한 고난, 견디기 어려운 환경, 질병, 마음의 근심, 고민 등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이런 고난 앞에 넘어지지 말고, 능히 이기고 소화시켜서 영적인 대장부가 되는 축복의 사람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고난과 역경과 시련 없이 위대한 신앙의 사람이 될 수가 없고, 귀한 그릇이 될 수가 없습니다.
* 다윗은 골리앗이라는 무서운 장수를 만나서 믿음으로 잘 소화했기 때문에 위대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 욥도 무서운 시련과 질병을 잘 소화했기 때문에 과거의 두 배 축복을 받은 사람이 되었습니다.
* 요셉도 노예 신분으로 절락했지만 그 고통에 요동하지 않고 믿음으로 잘 이겼기에 한 가정의 총무가 되고, 결국 애굽의 총리가 될 수 있었습니다.
고난과 시련을 축복받을 수 있는 기회로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반드시 극복해 낼 수 있는 능력과 지혜가 주어진다는 것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사41:10 두려워 말라고 6번이나 강조하면서 하나님이 함께 해 주실 것을 약속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어떻게 하면 시련을 잘 이겨내고 소화시킬 수 있을지에 대해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Ⅰ. 긍정적인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모세가 12명의 정탐꾼을 보냈는데 10명은 부정적인 생각, 부정적인 눈으로 가나안을 바라보았습니다.
“우리는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으니 그들의 보기에도 그와 같았을 것이니라.”
무슨 일이든지 부정적으로 보면 별것 아닌데도 점점 크게 보이고, 시도해 보지도 않고 겁을 먹게 됩니다. 문제가 10%라면 공연히 90%로 과대하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그까짓 것 아무것도 아니다. 문제없다 능히 할 수 있겠다!” 이렇게 생각하면 길이 열리고, 문제가 작게 보이고, 용기가 생기게 됩니다.
우리에게는 이와 같은 긍정적인 생각이 필요합니다.
긍정적인 믿음의 사람 갈렙과 여호수아 또한 다른 10명의 정탐꾼들과 같이 아낙자손과 튼튼한 성벽, 그리고 기름진 땅을 보았지만 그보다 먼저 위대하신 하나님을 바라보고 믿음의 눈으로 환경을 바라보았기에 가나안 사람들이 메뚜기 같이 보였고, 밥과 같이 보였습니다.
여호수아와 갈렙과 같이 근심과 불안을 주는 문제만 바라보지 말고, 문제를 해결하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을 바라보시기를 바랍니다.
근심과 불안 대신에 만물을 창조하시고 다스리시는 하나님을 바라보고 의지하시기 바랍니다. 부정적인 믿음과 생각을 가지고 있는 10사람의 말을 들은 회중들은 결국 가나안 땅에 들어갈 생각은 하지 않고, 애굽으로 돌아가거나 광야에서 죽을 것만 생각했습니다. 그러다가 그들의 말대로 광야에서 다 죽고 가나안에는 들어가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반면에 긍정적인 믿음의 사람들은 같은 환경에서 물러날 생각보다 하나님이 주실 것을 믿으며 전진했더니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큰 물결 일어나 쉬지 못하나, 이 거센 물결을 타고서 더 빨리 갑니다. 이 거센 물결 타고서 더 빨리 갑니다.”
큰 물결만 바라보면 낙심이 되겠지만 큰 물결을 타고 더 빨리 갈 수 있는 것입니다.
부정적인 요소가 있으면 반드시 긍정적인 요소도 있음을 알고 부정적인 요소는 낙심케 하나 긍정적인 요소는 희망을 가지게 만들고 용기와 담력을 가지게 만든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Ⅱ. 약속에 대한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고난을 소화시켜 우리의 영양으로 삼으려면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의지해야 합니다.
신1:29-30 “내가 너희에게 말하기를 그들을 무서워 말라 하나님이 너희를 위해 싸우시리라” 여호수아가 외친 말입니다.
노아 홍수 때, 노아가 그 무서운 홍수를 보았을까요? 비가 오자마자 문을 닫고 들어갔으며, 창문이라고는 지붕에서 한규빗쯤 꺾어진 맨 위에 있었기 때문에 하늘만 볼 수 있지 무서운 홍수는 보지 못했습니다. 이와 같이 홍수를 이기려고 하면 홍수를 보지 말아야 합니다. 노아가 홍수를 보지 않고 창문으로 하늘만 쳐다본 것과 같이 우리가 당하는 모든 고난과 시련을 고통의 문제만 보지 말고 기도의 창문으로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근심과 걱정과 불안이 마음속에 들어오지 못하게 마음의 문을 꼭 닫고 기도의 창문으로 하나님을 바라보고 믿음의 창문으로 하나님의 약속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고전10:13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에게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하나님은 우리가 이길 수 없는 시험을 주시지 않습니다. 믿음의 눈만 뜨면 능히 소화시키고 영양이 되고, 보약이 될 만한 문제를 주신다고 약속했습니다.
문제가 있는 것은 어딘가에는 해답이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또한, 문제나 근심이나 불안거리가 생기면 영혼의 약인 믿음이 보약인 줄 알고 소화시키시기 바랍니다.
사49:15-16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 내가 너를 내 손바닥에 새겼고”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자는 어떤 시련도 소화할 수 있습니다.
Ⅲ.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소망을 가져야 합니다.
민14:9 “오직 여호와를 거역하지 말라. 또 그 땅 백성을 두려워하지 말라. 그들은 우리 밥이라. 그들의 보호자는 그들에게서 떠났고, 여호와는 우리와 함께 하시느니라. 그들을 두려워 말라 하나”
고난과 시련을 소화시키려고 하면 임마누엘 신앙이 있어야 합니다.
종이자체는 매우 약합니다. 조금만 건드려도 찢어지고 물에 넣으면 풀어져 버립니다. 하지만 종이를 철판이나 판자위에 붙여 놓으면 주먹으로 쳐도 찢어지지 않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는 철저한 신앙으로 살아간다면 어떤 고난도 이길 수 있고 소화시킬 수가 있습니다.
히13:6 “주는 나를 돕는 자시니 내가 무서워 아니하겠노라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 요하노라 그러므로 우리가 담대히 가로되”
히13:5 “내가 과연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과연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하나님의 약속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면 우리는 연약하지만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 우리로 고난을 소화할 수 있는 힘과 용기와 도움을 베풀어 주실 것입니다.
수1:5- 내가 모세와 함께 있었던 것과 같이 너와 함께 있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시시 때때로 닥치는 여러 모양의 고난을 두려워하지 말고 긍정적인 믿음으로, 약속으로, 임마누엘 신으로 소화해서 축복으로 만드시는 모든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밥이냐 메뚜기냐
민수기 14장 9절 / 양희천 목사
“다만 야훼를 거역하지는 말라 또 그 땅 백성을 두려워하지 말라 그들은 우리의 먹이라 그들의 보호자는 그들에게서 떠났고 야훼는 우리와 함께 하시느니라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하나” 민수기 14장 9절
마음의 생각은 삶을 결정짓는 중요한 요소
십자가 은혜 통해 메뚜기 자화상 버리면 삶의 문제들 밥으로 여기며 승리할 수 있어
출애굽 후 가나안을 눈앞에 두고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과 모세는 열두 명의 정탐꾼을 보내어 ‘어느 길로 올라가면 제일 쉽게 올라갈 수 있을 지와 가나안 사람들은 스스로를 어떻게 방어하고 있는가? 그들이 잘 사는가 못 사는가?’ 하는 여러가지를 알아보게 했습니다. 열두 명의 정탐꾼들 중 열 명은 자기의 생각대로 가나안 땅의 사람과 이스라엘 백성들을 비교 했고, 스스로를 메뚜기 같다고 여겼습니다. 그런데 여호수아와 갈렙은 가나안의 사람들을 자기들과 비교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만군의 야훼 하나님을 모시고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과 가나안을 비교했습니다. 왜냐하면 여호수아와 갈렙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하여 가나안 앞에까지 올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이 하신 일이었음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사람의 생각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잠언 4장 23절에 “모든 지킬 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고 했습니다. 우리 마음의 생각이 잘 컨트롤 되어 있으면 그 사람이 하는 일은 반드시 성공하고 이루어지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세상 살아가면서 마음을 걷잡을 수 없을 때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가정과 직장과 사업 가운데서 우울하고, 죽고 싶은 생각까지 들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생각이 마음을 제어를 하고 마음을 잘 붙들어 놓으면, 그 마음을 통해서 하나님이 큰 기적을 행하시는 것입니다.
모세가 보낸 열두 명의 정탐꾼 가운데 열 명은 40일 동안 가나안을 정탐한 후 돌아와 백성들의 마음을 뒤흔들어 놓는 보고를 합니다. 만약 열 명의 정탐꾼들이 ‘할 수 있다. 하면 된다. 해보자. 눈에는 아무 증거 안보이고 귀에는 아무 소리 안 들리고 손에는 잡히는 게 없어도 주님 의지하여 나가면 우리는 그 땅을 소유할 있다’라고 긍정적인 보고를 했다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순식간에 가나안을 정복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열 명의 정탐꾼들은 말하기를 “그들 가운데 가 보니 우리는 그들과 비교해서 메뚜기 같다. 그들이 우리를 봐도 메뚜기 같이 보았을 것이고 우리가 우리를 봐도 메뚜기 같더라”고 보고하였습니다. 그들은 하나님 중심으로 사물을 보지 않고 인간 중심으로 사물을 보았기 때문에 백성들 앞에 와서 ‘할 수 없다. 못한다. 안 된다. 우리는 이길 수가 없다’라고 한 것입니다.
이 열 명의 보고를 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좌절하고 절망했습니다. 그러나 여호수아와 갈렙만이 일어나 “가나안 사람들은 우리가 먹을 영양분을 섭취할 수 있는 밥이다. 하나님이 요리해주시는 이 밥을 먹으면 되는 일인데 겁낼 것 없다”라고 주장했습니다. 열 명의 정탐꾼들은 우리가 메뚜기 같아서 절대 점령하지 못한다는 부정적인 보고를 한 반면 여호수아와 갈렙은 “그들을 보니 이미 잘 지어진 밥이더라. 맛있게 요리해 놓은 밥이니 올라가서 먹으면 된다!”라고 상반된 긍정적인 선언을 한 것입니다.
1. 밥이 마음에 주는 인상
밥하면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밥은 매일같이 먹어야 되는 양식입니다. 그 밥을 앞에 놓고 우리는 부정적인 생각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 가나안에 있는 사람들이 우리보다 강하고 무장이 잘 되어 있어서 우리가 점령할 수 없다”라는 식의 부정적인 소리는 할 필요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보내어서 점령하게 한 가나안 땅은 하나님 손에 달려 있기 때문이고, 이미 우리가 먹을 밥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면서 어려운 일은 반드시 있습니다. 인생에는 고통이 늘 다가옵니다. 그러나 고통은 우리의 밥입니다. 매일 육체적인 밥을 먹어야 사는 것처럼 우리에게 다가오는 육체적인 고난이든, 정신적인 고난이든 이 모든 고난과 고통은 우리를 성공하게 만들어 줍니다. 그러므로 성공하려면 고난과 고통의 밥을 먹어야 하고, 그 고통을 통해서 인격이 자라고 지혜와 총명도 자라고 성장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회적으로 성공한 사람들 중에 이런 고난과 고통을 겪지 않은 사람은 한사람도 없습니다.
또한 밥이 주는 이미지는 우리 몸에 주에너지가 된다는 것입니다. 다른 건 먹어도 주에너지는 되지 않지만 밥을 먹으면 몸도 자라고 튼튼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고난이라는 양식을 먹도록 만들어 주시고, 그를 통해 에너지의 근본을 얻게 해 주십니다. 고난이라는 밥은 우리에게 잘 먹도록 조리해 놓은 음식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밥상을 이미 우리 앞에 예비해 놓으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인생 속에서 시험과 환난과 고통이 다가와도 걱정하지 말기 바랍니다. 시편 23편 5절에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 주시고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라고 했습니다. 야고보서 1장 2∼4절에 보면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고난을 먹음으로 말미암아 인내가 들어와서 신앙의 근육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신앙의 근육이 생기면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갈 수 있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것입니다. 로마서 8장 28절에는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고 했습니다. 고난이 다가와도 우리가 믿음으로 하나님 앞에서 기다리면 그 고난의 끝에는 합력하여 선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고난과 시련을 매일 먹는 밥으로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고난과 시련을 밥처럼 소화를 잘 시키는 것은 감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고난 주신 것에 감사합니다. 합력하여 유익을 이룰 줄 믿습니다”라고 감사하면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고난이 크면 행복도 더 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세상에 살면서 우리에게 다가오는 원수나 외롭고 고통스러운 환경은 다 밥이라고 생각하고 즐겁게 받아먹고, 불평하고 원망하지 말고, 하나님께 감사하면 그 모든 것이 우리에게 영양이 되고 에너지가 되어 행복해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2. 메뚜기가 마음에 주는 인상
정탐꾼 중에 열 명은 자신들을 메뚜기로 봤습니다. 메뚜기들을 생각하면 어떠한 마음에 형상이 떠오릅니까? 열 명의 정탐꾼들은 자신들을 참혹할 정도로 비하해서 바라봤습니다. “나는 못났다. 무력하다. 무능력하다. 메뚜기 같다”라고 자신들을 본 것입니다. 민수기 13장 33절은 “거기서 네피림 후손인 아낙 자손의 거인들을 보았나니 우리는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으니 그들이 보기에도 그와 같았을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열 명의 정탐꾼들은 ‘구척장신의 골리앗 같은 대장부들이 있는데 우리가 어떻게 가나안에 올라가서 점령을 할 수 있을까?’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러나 여호수아와 갈렙만은 가나안의 아낙자손 거인들을 보았을 때 ‘하나님이 우리와 같이 계시니 하나님이 큰 역사를 베푸시겠구나’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열 명의 정탐꾼들은 결코 가나안 땅을 점령할 수 없을 것이라는 자괴감에 꽉 들어찼습니다. 하나님이 같이 계신다는 것을 알았으면 가나안이 아니라 어떤 땅이라도 점령할 수 있는데, 거인들이 점령하고 있는 그 땅을 보며 눈에 보이는 것만을 가지고 비교하며 자신들은 메뚜기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스스로를 비하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만들어서 세상에 보내셨을 때 우리는 다 하나님의 특제품들이고, 더불어 우리가 이 땅에서 잘 살 수 있는 필요한 은사는 다 주어서 보내셨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부산에 나환자촌이 있습니다. 거기에 한 선교사가 복음을 증거 하러 갔습니다. 그곳에 열네 살 먹은 아이가 있었는데 부모가 나환자가 되어서 어쩔 수 없이 부모를 따라 나환자촌에 들어왔지만 그 아이는 나병에 걸리지 않았습니다. 선교사가 그 아이를 미국으로 데려가서 예수를 믿게 했습니다. 그 아이의 마음속에는 하나님은 우리가 모든 사람의 머리가 되고 꼬리 되지 않고, 위에 있고 아래 있지 않고, 남에게 꾸어줄지언정 꾸지 않는 사람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또 하나님은 영혼이 잘됨 같이 범사에 잘되며 강건하고 생명을 얻되 넘치게 얻게 하는 분이라는 긍정적인 약속의 말씀이 새겨졌습니다. 그 아이는 희망을 가지고 열심히 공부해 건축기사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마흔 살이 되기도 전에 미국 거대한 건축회사의 이사가 되었고, 미국 오바마 대통령의 건축 설계 및 공사 자문 의원이 되었습니다. 그는 미국에서 최고의 건축 기술자가 되었습니다. 지금은 모두가 그가 세운 회사에서 일하고 싶어 한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필요한 인간으로서 이 세상에 만들어 놓으셨기 때문에 절대로 낙심하거나 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열 명의 정탐꾼들은 자기를 메뚜기라고 생각하고 들어갈수 없다는 부정적인 생각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민수기 13장 28∼32절에 보면 “그러나 그 땅 거주민은 강하고 성읍은 견고하고 심히 클 뿐 아니라 거기서 아낙 자손을 보았으며 아말렉인은 남방 땅에 거주하고 헷인과 여부스인과 아모리인은 산지에 거주하고 가나안인은 해변과 요단 가에 거주하더이다 갈렙이 모세 앞에서 백성을 조용하게 하고 이르되 우리가 곧 올라가서 그 땅을 취하자 능히 이기리라 하나 그와 함께 올라갔던 사람들은 이르되 우리는 능히 올라가서 그 백성을 치지 못하리라 그들은 우리보다 강하니라 하고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그 정탐한 땅을 악평하여 이르되 우리가 두루 다니며 정탐한 땅은 그 거주민을 삼키는 땅이요 거기서 본 모든 백성은 신장이 장대한 자들이며”라고 했습니다. 그러니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것을 포기하고 애굽의 종살이로 다시 돌아가자고 했던 것입니다. 그들의 모습을 보시며 하나님께서 진노하셔서 그 40일 동안 가나안 정탐의 시간 하루를 1년으로 쳐서 40년 동안 광야로 돌이켜서 걷게 하시고, 그 원망한 사람들이 다 죽고 그들 자손들만 여호수아와 갈렙을 따라서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부정적인 사람과는 절대로 일하지 않으십니다. “나는 못한다. 안 된다. 할 수 없다”라는 말하는 사람과는 같이 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셨고, 우리에게도 말할 수 있는 은혜를 주셨습니다. 우리가 말을 할 수 있다는 것은 즉, 우리의 말에 창조적인 능력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말 할 수 있는 것을 무의미하게 보지 말기 바랍니다. 창조적인 입술의 선언을 통해서 우리가 변화되고 발전되고 향상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부정적인 말이 아니라, “나는 좋습니다. 나는 행복합니다. 나는 씩씩합니다. 나는 할 수 있습니다. 나에게는 기적이 일어납니다”라는 긍정의 말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 말이 밖에 나가서 우리를 위해서 역사하고, 그대로 이루어지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지음 받은 창조의 능력을 가진 사람으로서 말을 잘 사용해 우리의 인생을 창조해 나가야 할 것입니다.
3. 십자가 대속의 은혜를 받으라
우리 인생은 ‘메뚜기’가 ‘밥’으로 바뀌어져야 생존을 할 수 있습니다. 갈보리 십자가 밑에 엎드려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볼 때 그리스도의 찢어진 몸과 피를 통해서 우리에게 다가오는 모든 메뚜기의 자화상은 다 밥으로 변화되게 되는 것입니다. 무능력한 메뚜기인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를 의지하고 받아들이면 모든 것이 밥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 입술의 신앙고백이 ‘메뚜기’를 ‘밥’으로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죄’라는 메뚜기가 우리를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고 하며, 우리를 괴롭힐 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보혈을 의지하면 그것을 밥으로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로마서 6장 6∼7절은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 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의 보혈로 우리를 의롭다고 말하시고, 하나님 자녀로 만들어 주셨기 때문에 우리에게 죄는 이제 더 이상 상관이 없습니다. “예수님의 이름과 보혈로 명하노니 이 죄악은 물러가라”고 하면 죄악이 메뚜기가 되어서 우리를 패배시키려고 하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 그 죄는 밥이 되지, 메뚜기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또한 ‘병’이라는 메뚜기도 치료의 능력이 임하여 메뚜기가 아니고 밥이 되는 것입니다. 이사야 53장 5절에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라고 했습니다. 병이라는 메뚜기가 뛰어다니면 그 메뚜기를 보고 “채찍에 맞음으로 나음을 입었으니 너는 메뚜기가 변하여 밥이 되라”고 명령 하면 그 명령대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큰 담력을 얻어야 합니다. 파도치는 갈릴리 바다를 예수님께서 잠잠케 하시면서 “왜 두려워하느냐? 믿음이 어디 있느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도 바람과 바다를 잠잠케 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데 왜 두려워하느냐는 것입니다. 제자들에게도 그런 능력이 있는데 하지 못하니 꾸짖으신 것입니다. 이와 같은 능력이 우리의 말 속에 있습니다. 우리가 단호하게 하나님 주신 말씀을 사용하여 선포하면 환경도 우리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는 것입니다.
‘저주’라는 메뚜기도 우리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하면 밥으로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성경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라,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갈 3:13∼14, 5:1)고 했습니다. 죄를 지어서 하나님께 저주를 받아 이 땅에서 가시와 엉겅퀴 속에서 고생을 하며 살았으나 예수님이 그 저주를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다 청산해 버리셨기 때문에 이제 우리에게는 아브라함의 복이 있지 더 이상 저주는 없습니다.
우리는 죽음이라는 메뚜기도 천국 낙원으로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히브리서 2장 15절에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한평생 매여 종 노릇 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 주려 하심이니”라고 했습니다. 또 요한복음 3장 16절에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죽었다가 부활하셨고, 죽은 사람을 살리고, 믿으면 영생한다고 하는 주의 약속이 있는데 이 약속을 우리는 말로서 사용할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 죽음 내 죽음, 예수 부활 내 부활, 예수 천당 내 천당, 예수 생명 내 생명”이라고 말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죽음도 “사망아 네가 나를 괴롭히지 못한다”하며 예수의 이름으로 평안하게 천사의 인도를 따라서 하늘나라에 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메뚜기가 되지 말아야 합니다. 세상적인 메뚜기가 온갖 짓을 다 하고 뛰어다녀도 메뚜기를 보고 불안해하지 마시고 ‘메뚜기야 너는 나의 밥이다’하며 다 먹어 소화시켜 버려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생각을 근본적으로 바꿔야 합니다. 바꾸어진 생각이 마음을 통해서 우리의 삶을 변화시켜 놓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 말씀을 따라 생각하고 말해야 합니다. 생각이 바뀌면 꿈이 달라집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를 통해서 오중복음의 꿈을 가질 수 있습니다. 용서받은 의인이 되고, 거룩한 사람이 되고, 질병이 고침을 받고, 아브라함의 형통을 얻으며, 죽어서 천당간다는 이 오중복음이 우리의 조그만 꿈이 되는 것입니다. 또한 삶속에서 네 영혼이 잘됨 같이 범사에 잘되며 강건하게 된다는 삼중축복을 꿈꾸기 바랍니다.
주님으로 말미암아 생각이 바뀌고, 꿈이 바뀌고, 믿음을 확인하고, 없는 것을 있는 것같이 말하는 사람과 믿지 않는 사람과의 삶의 차이는 엄청납니다. 그래서 잠언 4장 23절 “모든 지킬 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고 했습니다. 또 시편 20편 4절에 “네 마음의 소원대로 허락하시고 네 모든 계획을 이루어 주시기를 원하노라”고 했습니다. 마음의 소원은 곧 꿈을 말하는 것입니다. 시편 21편 2절에도 “그의 마음의 소원을 들어 주셨으며 그의 입술의 요구를 거절하지 아니하셨나이다”라고 했습니다. 마음에 소원이 있고, 입술을 통해 긍정적으로 말하면 하나님이 그것을 이루어지게 만들어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마가복음 9장 23절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 하시니”라고 하셨습니다.
삶이 바꾸어지려면 무엇보다도 먼저 우리 생각이 달라져야 합니다. 생각이 달라지고, 달라진 생각을 바탕으로 해서 꿈이 달라지고 그 꿈이 이루어질 것을 믿고, 입술로 말하면 기적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저에게 해외 선교 여행을 그렇게 다니면서도 어떻게 그렇게 피곤해 하지 않느냐고 묻습니다. 특별한 약을 먹는지 자꾸 물어봅니다. 저는 건강하다는 생각으로 저를 꽉 묶습니다. 그런 후에 말로 “하나님 지금 나는 피곤한데 주님이 같이 계시므로 안 피곤합니다. 나는 건강합니다. 튼튼합니다. 씩씩합니다. 굳셉니다!”라고 노래삼아 늘 이야기합니다. 우리에게는 어떠한 명약보다 좋은 영적인 산삼인 하나님 말씀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저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져도 일점일획도 변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주신 말씀을 늘 입으로 만 번, 십만 번, 백만 번 자꾸 시인하면 큰 능력의 효과가 발생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령의 감화감동, 함께 하심을 통해 열 사람의 정탐꾼이 가졌던 메뚜기의 생각을 내쫓아버려야 할 것입니다. 더불어 세상에 다가오는 모든 일은 좋은 일이나 안 좋은 일이나 다 우리의 밥이라고 생각하고 먹어 버려 승리하는 우리 모두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밥이냐 메뚜기냐
민 14:9 / 조용기 목사
<서론>
밥이냐 메뚜기냐 이런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겠습니다. 저가 초등학교 다닐 때는 일본이 제2차 세계대전 막바지에 다다를 때였었습니다. 군인들에게 반찬을 해줄 것이 없으니 메뚜기 공출을 했습니다. 우리 학교 간다고 논두렁 길 지나가면 메뚜기들이 굉장히 많이 뛰어 다녀요. 그럼 학교에서 메뚜기를 잡아오라 그럽니다. 그럼 우리가 열심히 메뚜기를 잡았죠. 그래서 그 메뚜기를 삶아서 먹기도 하고 볶아서 먹기도 하고, 찢어서 먹기도 하고 우리가 의외로 군인들에게 보낸 분량보다 많이 잡으면 굉장히 맛있게 먹었습니다. 지금도 세월이 오래 지나갔지만은 메뚜기 좀 먹어 봤으면 좋겠어요. 맛이 있어요. 여기 성경말씀에 왜 밥이냐 메뚜기냐를 제가 말씀드리고자 함은 이스라엘 백성이 430년 동안 애굽 종살이하다가 나와서 모세를 따라서 광야를 지나 이제는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땅에 열하루만 걸어가면 들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열흘만 걸으면 그 땅에 들어갈 수 있는데, 모세가 그냥 그 백성들을 데리고 진격했으면 좋았었는지 모르겠지만 백성들에게 미리 스파이를 보내서 잘 그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의 상태를 살펴서 오라고 그렇게 말했었습니다. 가데스바네아에서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땅에 들어가는데 열하루가 걸리니깐 정탐꾼을 보내서 어느 길로 올라가면 제일 쉽게 올라갈 수 있겠는가, 그 가나안 사람들은 스스로를 어떻게 방어하고 있는가, 그들이 잘 사는가 못사는가 여러 가지 알아보라고 했었습니다. 그래서 열두 정탐꾼이 그곳으로 올라가는데 사람들이 무엇을 볼 때에 척도가 필요한 것입니다. 무엇을 견주어서 봐야 어떻다는 걸 알지 견줄 자세가 안 되어 있으면 아무리 봐도 모른다 말입니다. 그 올라간 열두 정탐꾼이 열 명은 물질주의적이예요. 자기대로 가나안땅의 사람하고 비교를 했습니다. 우리와 가나안땅에 사는 사람과 무엇이 다른가 자기대로 비교를 했습니다. 그런데 여호수아와 갈렙은 자기들하고 비교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만군의 야훼 하나님을 모시고 계시므로 하나님하고 그들하고 비교해서 어떠한 것이냐 그것을 볼려고 했습니다. 왜냐면 그들이 광야를 지나오는 동안에 바위가 물을 솟아내고, 메추라기가 와서 고기를 먹게 해 주시고, 만나가 와서 밥을 먹게 해 주시는 그 모든 일은 하나님이 하셨지 자기들 힘으로는 광야를 지나올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 하나님을 모시고 가나안땅에 들어가는 것이기 때문에 그 하나님과 비교해서 어떤지 그걸 알아보려고 했습니다. 여러분 사람의 생각이라는 것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성경에는 잠언서에 ‘지킬만한 것보다 마음을 지켜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마음이 생각으로 잘 컨트롤 돼 있으면 마음이 컨트롤 된 그 사람이 하는 일은 반드시 성공하고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살면서 이 마음을 걷잡을 수 없을 때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생각이 마음을 제어를 하고 마음을 잘 붙들어놓으면, 그 잘 붙들어놓은 그 마음을 통해서 하나님이 큰 기적을 행하시는 것입니다. 마음이 외롭고 슬프고 우울하고 답답하고 고통스러울 때 걷잡을 수 없습니다. 죽어버리면 좋겠다는 생각이 날 때도 있는 것입니다. 사람이 육체적으로 병들어서 아프고 괴롭지만은 마음이 아픈건 굉장히 괴롭습니다. 혼자 앉아서 하늘만 쳐다보고 있으면 마음이 우울하기 짝이 없습니다. 마음이 우울하면 굉장히 슬프고 고통스럽습니다. 근데 열두 정탐꾼이 40일 동안 땅을 정탐하고 집으로 돌아와 보고한 내용이 기다리고 있던 백성들의 마음을 뒤흔들어 놓았어요. 그들이 긍정적인 보고를 했더라면 ‘할 수 있다. 하면 된다. 해보자. 눈에는 아무 증거 안 보이고 귀에는 아무 소리 안 들리고 손에는 잡히는 게 없어도 주님 의지해서 우리는 그 땅을 소유할 있다.’ 그렇게 하면 그대로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들 마음을 사용하셔서 땅을 점령할 수 있게 하는 것입니다. 근데 그들이 하나님 중심으로 사물을 보지 않고 인간 중심으로 사물을 보았기 때문에 백성들 앞에 와서 ‘할 수 없다. 못한다. 안 된다. 우리는 이길 수가 없다.’ 그렇게 말을 하니깐 듣는 사람들이 마음이 불안해지고 고통이 다가오고 슬픔이 다가오고 헛수고했다고 생각하고 사시나무 흔들리듯이 마음이 흔들렸습니다. 그리고 더구나 그 전체를 결론으로 말하기를 ‘그들 가운데 가 보니까는 우리는 그들과 비교해서 메뚜기 같다. 그들도 우리보고 메뚜기같이 보였을 거니와 우리가 우리를 봐도 메뚜기 같더라.’ 이 사람이 메뚜기 같더라고 하니깐 이 뭐 절단 아닙니까? 여러분 가을에 메뚜기가 논에 뛰어다니는 걸 보면 폴짝 포르르~폴짝~이렇게 뛰어요. 사람이 가면 확 달아났다가 또 사람이 멀리 있으면 확 올라와서 벼를 갉아 먹습니다. 그 메뚜기 같은 인생 하루살이와 같습니다. 이 열 사람의 보고를 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좌절하고 절망했습니다. 우리 메뚜기 떼들이 무얼 하겠는가? 그런데 여호수아와 갈렙은 일어나서 ‘가나안 사람들은 우리가 먹어 영양분을 섭취할 수 있는 밥이다. 밥인데 까짓거 하나님이 요리해주시는 걸 먹으면 되는 일인데 겁낼 것 없다.’ 요 열 사람은 우리가 메뚜기 같아서 그 사람들을 절대 점령 못한다는데 여호수아와 갈렙은 ‘그들 보니깐 이미 밥이더라. 잘 불을 떼어서 맛있게 요리해 놓은 밥이니깐 올라가서 먹으면 된다!’ 사람들이 여호수아와 갈렙을 보고 나쁜 놈의 자식들, 잘 보지도 못하고 와서 허위보고 한다고 돌로 쳐 죽이려고 그랬었습니다.그런데 여호수아와 갈렙은 우리는 가보니 그 사람들이 밥이라 그래요.
<본론>
1. 밥이 마음에 주는 인상
여러분 밥이라고 하면 마음속에 밥이 무슨 의미를 우리에게 전달해주는지 한번 생각해볼 수 있는 것입니다. 밥은 매일같이 먹어야 되는 양식입니다. 우리가 이 가나안에 있는 사람들이 우리보다 강하고 무장이 잘 되어 있어서 우리가 점령할 수 없다 그런 소리 할 필요 없어요. 그들은 가자마자 ‘아~우리 밥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보내어서 점령하게 한 가나안 땅은 하나님 손에 달려있기 때문에 이미 우리 먹을 밥이지 걱정할 필요 없다. 여러분 우리 인생을 살아가면서 어려운 일이 있습니다. 고통이 늘 다가옵니다. 그 고통은 우리 밥입니다. 매일 육체적인 밥을 먹어야 사는 것처럼 우리가 정신적으로 고난을 당해야 고난이 우리를 성공하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제가 어느 통계를 보니깐 전 세계에 백만장자가 되어서 큰 부자로서 사는 사람들이 어릴 때에는 모두 다 신문배달을 했어요. 어릴 때 신문배달을 하던 애들이 장성해서 다 백만장자가 됐어요. 그 왜 그러냐 그러니까 어릴 때 새벽에 일어나서 추운데 신문을 끼고 집집마다 신문배달을 함을 통해서 고통을 맛보았다는 것입니다. 인생은 고난을 통해서 발전한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에 고통에 불평하지 않고 긍정적으로 밥으로 대했기 때문에 백만장자가 된 것입니다. 우리에게 다가오는 크고 작은 고통이 인격적으로 자라는 데는 밥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공하려면은 고통의 밥을 먹어야 그 고통을 통해서 인격이 자라고 지혜와 총명도 자라고 성장하는 것입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강철왕 카네기는 굉장히 가난했습니다. 스코틀랜드 출신으로서 초등학교 4학년밖에 못 다녔습니다. 그러고 난 다음 하루 종일 노동을 해야 2달러밖에 못 버는 겁니다. 이 사람이 그 고통을 통해서 밥을 먹어서 지혜와 총명과 모략과 재능을 많이 마음속에 개발해가지고서 세계 최대의 갑부가 된 것입니다. 밥은 기초적인 영양분이기 때문에 매일 먹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고 밥이라 하면 또 어떤 인상이 생기냐면은 밥은 우리가 먹는 음식 중에 주 에너지가 되는 것입니다. 다른건 먹어도 주 에너지는 되지 않습니다. 밥을 먹어야 몸도 자라고 튼튼하게 되는 것입니다. 힘 있는 사람은 밥을 많이 먹어야 돼요. 요사이 사람들이 저를 보고 왜 몸이 빼빼하냐. 뭘 못 먹기 때문에 몸이 빼빼하냐. 그런 말을 합니다. 요사이 어떻게 됐는지 한 1kg쯤 줄었어요. 그러니 의사선생님이 하는 말이 ‘몸무게 줄이지 마십시오. 당신 지금 20살, 30살도 아닌 80대의 노인이 몸을 잘 돌보지 아니하면 갑자기 몸이 줄어지면 약해집니다.’ 근육은 몸의 방어력을 주는 것이기 때문에 근육이 붙어 있어야 감기도 쫓아내고 이번에 생긴 기침병도 이길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몸무게를 일부러 줄이지 마라. 왜냐면 밥은 에너지의 근본이기 때문에 밥을 잘 먹으라고 자꾸 그럽니다. 다른건 못 먹어도 밥을 잘 먹으라고. 그러면 몸에 에너지가 공급이 된다고요. 그런데 밥을 잘 먹을라고 하면 같이 밥을 먹는 사람이 잘 먹는 사람이 늘 같이 먹어야 되는 것이죠. 근데 요사이 우리 성도들하고 제가 점심도 같이 먹고 저녁도 같이 먹는데 언제나 보면 나보다 적게 먹는 사람들이에요. 먹으니까 내게 도움이 안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중에 밥 잘 잡수시는 사람은 내게 신청하십시오. 같이 먹어보게!
밥이라고 말하면 우리 기본적인 양식이고, 우리의 몸에 에너지가 되는 것이고 또 밥은 먹을 수 있도록 요리를 해 놓은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잘 못 먹는 일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고난을 통해서 매일 양식을 먹도록 만들어 주시고 에너지의 근본을 얻게 해 주시고 잘 먹도록 조리해 놓은 음식이 밥인 것입니다. 그들은 우리의 밥이라! 그러므로 굶을 리가 없습니다. 들어가자마자 적군은 밥이니까는 그냥 먹으면 되는 것이요. 그 적군과 싸워서 굉장한 에너지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고 우리에게 맛있는 음식이 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친히 요리해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밥상을 이미 예비해 놓으셨습니다. 여러분이 살아가면서 시험과 환난과 고통이 다가오거든 이거 어떻게 먹으라하냐 걱정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요리 전문가인 것입니다. 이 고난의 밥상에 요리를 친히 준비해 놓은 것입니다. 시편 23편 5절에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 주시고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하나님께서 원수의 목전에서 밥상 차려 주시는 것입니다. 야고보서 1장 2절로 4절에 보면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기는 온전히 기쁘게 여겨라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함이라’ 고난을 먹음으로 말미암아 인내가 들어와서 신앙의 근육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신앙의 근육이 생기면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갈 수 있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것입니다. 로마서 8장 28절에는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고난이 다가와도 우리가 믿음으로 하나님 앞에서 기다리면 그 고난이 다 끝에 가서는 합동하여 선하게 되는 것입니다. 좋게 돼요. 진짭니다. 제가 20살에 교회를 개척하기 시작해서 70에 은퇴했으니까 50년 동안 주님 사업을 했습니다. 50년 동안 주의 사업을 하면서 좋은 때도 많이 있었고 어려운 때도 많이 있었습니다만, 이 로마서 8장 28절은 말할 수 없는 보뱁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동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좋은 것도 나쁜 것도 모두 다 합동하여 나에게 선이 되는 것을 제가 체험을 했기 때문에 신앙이라는 것은 체험을 하면 더 굳센 신앙을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어려운 일이 생기면 하나님께서 또 맛있는 떡볶이를 만드시는 구나~합동하여 선을 이루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음을 잘 먹어야 생명의 근원이 그 마음에서 나옵니다. 생각을 바로 가져야 됩니다. ‘나는 못 한다, 안 된다, 할 수 없다, 버림받았다, 나는 희망이 없다’ 이러면 마음이 들뜨고 요동하고 망합니다. 그러나 어떤 일이 있든 생각이 마음을 꽉 잡아 줍니다. ‘할 수 있다. 하면 된다. 해 보자. 좋은 일이 생겨난다. 합동하여 선을 이룬다. 두려워하지 말라. 할렐루야 감사합니다!’ 그래서 어려운 고통이 있으면 그 앞에서 찬송을 하는 겁니다. 원망, 불평, 탄식하지 말고 고난 앞에 ‘하나님 이 고난을 주시니 감사합니다. 이 고난은 내게 밥입니다. 먹어서 영양실조가 되지 않고 에너지를 얻게 되고 좋습니다.’ 그래서 고난 앞에는 반드시 여러분 감사를 해야 되는 것입니다. 감사를 하면 하나님이 역사하셔서 고난을 통해서 아주 좋은 축복을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고난과 시련을 매일 먹는 밥으로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매일 밥 먹는 것처럼 고난과 시련이 매일 다가오는 것입니다. 고난과 시련을 밥처럼 소화를 잘 시키는 것이 다시 말해 감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고난 주신 것에 감사합니다. 합동하여 유익을 이룰 줄 믿습니다. 밥은 먹어야 생존하고 성장할 수 있는 것처럼 영적인 성장을 위해서 고난이 필요한 것입니다.우리가 이 세상에 살면서 우리에게 다가오는 원수나 외롭고 고통스러운 환경은 다 밥이라고 생각하고 즐겁게 잡수십시오. 불평하고 원망하지 말고, 하나님께 감사하고, 하나님 이 밥을 먹어 영양실조가 되지 않고 에너지가 있어 기운도 있고 행복해질 수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2. 메뚜기가 마음에 주는 인상
그런데 열 사람은 자기들을 메뚜기로 봤는데, 메뚜기들을 생각하면 어떠한 마음에 형상이 떠오릅니까? 가나안 사람들이 보기에 이스라엘 사람은 메뚜기 같다고 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메뚜기는 상대가 안 됩니다. 어떻게 사람이 메뚜기하고 싸울 수 있는 것입니까! 이 열 사람은 자기들 자신을 참혹할 정도로 비하해서 본 것입니다. 나는 못났다 무력하다 무능력하다 메뚜기 같은 놈이다. 민수기 13장 33절에 “거기서 네피림 후손인 아낙 자손의 거인들을 보았나니” 그들을 지나온 이야기에 보면
네피림이란 천사가 사람들하고 결혼을 해서 거인들을 낳았다는 것입니다. 네피림의 후손 아낙자손 대장부... 키가 구척장신으로 엄청난 대장부입니다. 그 사람들을 보면 우리는 메뚜기 같다고 그렇게 말한 것입니다. 정말 네피림이란 천사하고 결혼해서 애를 낳을 일은 만무하겠지요. 그러나 그 지역에 사는 사람들 중에 거인들이 있은 것 같습니다. “우리는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으니 그들이 보기에도 그와 같았을 것이니라 (민수기13장 33절)” 도저히 상상할 수 없습니다. 구척장신의 골리앗 같은 대장부들이 있는데 우리가 어떻게 올라가서 점령을 합니까? 여호수아와 갈렙은 이 대장부 후손 아낙자손 거인들을 보았을 때 하나님이 우리와 같이 계시니 다윗이 골리앗을 죽이는 것처럼 하나님이 큰 역사를 베풀겠구나.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하나님 우리와 같이 계심으로 키가 구척장신인 것이 무슨 소용 있느냐. 하나님 한 펀치면 다 날라간다. 그런데 이 열사람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저 메뚜기 떼들이 활짝활짝 곡식 밭에서 뛰는 것같이 우리에게 덤벼들면 우리는 다 죽었다는 것입니다. 메뚜기는 농부들이 잡아서 해충으로서 곡식을 갉아먹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가나안 땅에 사는 사람들 보기에는 해충에 불과하다. 우리에게 뜨거운 물을 부어도 우리는 다 죽을 것이다. 우리는 살아나갈 희망이 없다고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결코 가나안 땅을 점령할 수 없다는 자괴감에 꽉 들어찼습니다. 하나님이 같이 계신다는 것을 알았으면 가나안이 아니라 어떤 땅도 점령할 수 있는데 이 거인들이 그 땅을 점령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 같은 사람은 메뚜기라고... 아 기왕 메뚜기를 생각했으면 메뚜기를 버리고 개구리 같다고 해도 좋아할 것인데... 그 메뚜기가 어떻게 무얼 하는 것입니까? 여러분 스스로를 비하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우리를 만들어서 세상에 내놓았을 때는 여러분 다 하나님의 특제품입니다. 한번 따라 말씀하십시오. “나는 하나님의 특제품이다!” 여러분이 이 땅에서 잘 살 수 있는 필요한 은사는 다 주어서 내보낸 것입니다. 여러분 비하해서 나는 못한다. 안 된다. 할 수 없다. 나 같은 것이 무엇이냐? 어림도 없는 소리 하지 마십시오. 나 같은 게 무얼 하겠냐? 그런 사람이 더 큰 일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살면서 물질적으로 크게 성공한 사람들 살펴보면 대학 공부를 한 사람이 별로 없어요. 이 열사람의 정탐꾼은 자기를 기어코 자꾸 메뚜기라고 생각하고 우리는 못 들어간다고 자괴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민수기 13장 28절로 31절, 32절에 보면 “그러나 그 땅 거주민은 강하고 성읍은 견고하고, 심히 클 뿐 아니라 거기서 아낙 자손을 보았으며 그와 함께 올라갔던 사람들은 이르되 우리는 능히 올라가서 그 백성을 치지 못하리라 그들은 우리보다 강하니라 하고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그 정탐한 땅을 악평하여 이르되 우리가 두루 다니며 정탐한 땅은 그 거주민을 삼키는 땅이요 거기서 본 모든 백성은 신장이 장대한 자들이며”
그러니깐 우리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것을 포기하고 애굽으로 도로 종살이로 돌아가자고 그렇게 해서 하나님이 진노하셔서 그 사람들 40일 동안 가나안땅을 정탐한 것을 하루를 1년으로 쳐서 40년 동안 광야로 돌이켜서 다 늙어서 죽고 그들 자손들이 여호수아와 갈렙을 따라서 가나안 땅에 들어온 것입니다. 하나님은 부정적인 사람하고는 절대로 일하지 않습니다. 나는 못한다. 안 된다. 할 수 없다. 그런 말 하는 사람은 같이 하지 않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말을 할 수 있다는 것은 하나님 이외에는 없습니다. 이 세상에 말하는 원숭이 보았나요? 사람만 하나님 같이 말을 합니다. 말을 한다는 것은 여러분, 창조적인 능력이 있다는 것입니다. 없는 것을 있게 하시고 나쁜 것을 좋게 만들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말씀으로 천지를 지으셨습니다. 예수님도 말씀으로 병을 고치시고 귀신을 쫓아내시고 죄를 사하시고 죽은 자를 살리셨습니다. 여러분과 나도 예수 믿고 하나님의 성령을 모시고 말을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말을 창조적으로 성경을 열심히 공부해서, 성경에 말씀이 많지 않습니까?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누가복음 6:38)” 그 말을 하고서 구제를 하면 그 말이 여러분에게 돌려주는 축복을 가지고 오는 것입니다. 여러분 말을 할 수 있다는 것은 여러분께서 창조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 말할 수 있는 것을 무의미하게 보내지 마십시오. 언제든지 창조적인 입술의 선언을 통해서 여러분이 변화되고 발전하고 향상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입술을 통해서 “아유~ 우리는 아무것도 못해. 우리는 조상이 잘못해서 후손을 이렇게 고생시키느냐. 기대할 것 없어. 나쁜 사람이야. 무능한 사람이야.” 그런 부정적인 말을 하면 그 말이 창조적인 능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일일이 여러분 생활 속에 다 일어나게 만들어주는 것입니다. 다 거기 나타나요. “나는 좋아요. 나는 행복해요. 나는 씩씩해요. 나는 할 수 있어요. 나에게는 기적이 일어납니다.”
그 말이 밖에 나가서 여러분을 위해서 역사해서 그대로 이루어지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자신은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지음 받은 창조의 능력을 가진 사람으로서 말을 잘 사용해서 여러분 인생을 창조해 나가시기 바랍니다.
3. 메뚜기가 밥으로 바꿔지게 되려면 갈보리 십자가의 대속의 은혜를 받아야 한다
메뚜기가 밥으로 바뀌어져야 우리가 생명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 주위에 메뚜기가 아무리 뛰어다녀도 메뚜기를 밥으로 바꾸면 되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느냐? 갈보리 십자가 밑에 엎드려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면 그리스도의 찢어진 몸과 피를 통해서 여러분 다가오는 모든 메뚜기는 다 밥으로 변화되고 마는 것입니다. 무능력한 메뚜기를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를 의지하고 받아들이면 밥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입술의 신앙고백이 메뚜기를 밥으로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죄가 여러분을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고 할 때 죄라는 메뚜기가 여러분을 괴롭힐 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보혈을 의지하고 그것을 밥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것입니다. 로마서 6장 6절로 7절에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라” 예수님이 십자가의 보혈로 우리를 의롭다고 말하시고 하나님 자녀로 만들어주었기 때문에 우리에게 죄는 이제 상관이 없습니다. 한 길로 오면 일곱 길로 도망치게 만들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름과 보혈로 명하노니 이 죄악은 물러가라. 그것이 메뚜기가 되어서 우리를 패배시키려고 하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 그 죄는 밥이 되지, 메뚜기는 안 되는 것입니다. 병이라는 메뚜기로 치료의 능력이 임하여 메뚜기가 아니고 밥이 되는 것입니다. 병이 들어 죽게 되었어도 어떤 약이 무효라고 예수님께서 이사야 53장 5절에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의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입었도다” 우리는 병이라는 메뚜기가 뛰어다니면 그 메뚜기보고 채찍에 맞음으로 나음을 입었으니 너는 메뚜기가 변하여 밥이 되라고. 명령을 하면 명령대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굉장한 담력을 얻어야 되는 것입니다. 파도 잃은 갈릴리 바다를 예수님께서 잠잠케 하시면서 왜 두려워하느냐? 믿음이 어디 있느냐? 예수님의 제자들도 바람과 바다를 잠잠케 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데 왜 두려워하느냐는 것입니다. 능력이 없으면 주님께서 제자들을 꾸짖지도 아니합니다. 능력이 있는데도 못하니까 꾸짖었죠. 바람과 파도를 잠잠케 할 수 있는 능력이 여러분 말씀 속에 있습니다. 여러분이 단호하게 말씀을 사용하면 환경도 여러분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는 것입니다. 저주라는 메뚜기도 우리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하면 밥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라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갈3:13-14,5:1)” 죄를 지어서 하나님께 저주를 받아 이 땅에서 가시와 엉겅퀴 속에서 고생을 하며 살았으나 예수님이 그 저주를 십자가에 매달려서 다 청산해 버리고 이제는 여러분 아브라함의 복이 있지 저주는 없습니다. 여러분 복 덩어립니다. 한번 따라 말씀해주세요. “나는 복 덩어리다.” 그 말이 참 좋은 것입니다. 그 말이 복을 만들어 오는 말인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은 세상 사람이 사용하는 말을 사용하지 않고 영적인 말을 사용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을 통하여 생각하고 꿈꾸고 믿고 말하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그 말을 사용할 줄을 몰라요. 여러분은 창조적인 말을 사용할 수 있거든요. 정말로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십자가를 통해서 모든 운명과 환경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죽음이라는 메뚜기도 천국 낙원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2장 15절에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한평생 매여 종노릇 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 주려 하심이라”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함이라(요3:16)” 죽었다가 부활하셨고 죽은 사람을 살리고 믿으면 영생한다고 하는 주의 약속이 있는데 이 약속을 여러분은 말로서 사용할 수 있어도 안 믿는 사람은 말로서 “나는 영생을 가졌다.” 고 말 못합니다. 그렇잖아요. 예수 안 믿으면서 “나는 영생을 가졌다.” 말 못하지요. “죽어봐야 알지.” 그렇게 말하지. 우리는 예수 죽음 내 죽음, 예수 부활 내 부활, 예수 천당 내 천당, 예수 생명 내 생명인데 아 우리는 죽음도 ‘사망아 네가 나를 괴롭히지 못한다.’ 예수의 이름으로 평안하게 천사의 인도를 따라서 하늘나라에 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메뚜기가 되지 말아야 돼요. 메뚜기는 세상적인 메뚜기가 온갖 짓을 다 하고 뛰어다녀도 메뚜기를 보고 불안해하지 마시고 ‘메뚜기야 너는 나의 밥이다.’ 그럼 메뚜기가 다 밥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나사로가 무덤에 들어간 지 나흘이 되어 썩은 냄새가 나는데 예수님이 마르다와 마리아를 그 무덤 앞으로 데리고 가서 ‘무덤의 돌문을 옮겨 놓아라.’, ‘아이고 오라버니 죽어서 지금 썩은 냄새가 나나이다.’ 예수님이 뭐라고 하셨습니까? 네 말이 옳다, 장례 지내라 그렇게 했습니까? 무릎을 발로써 땅을 치면서 ‘마르다야! 내가 네게 말하노니 네가 하나님을 믿으면 기적이 일어날 것을 보리라 하지 않았더냐!’ 그래서 마리아와 마르다가 놀래가지고서 오라버니 돌문을 옮겨 놓으니까 예수님이 말씀으로 ‘나사로야 나오라!’ 수의를 입은 채 나왔습니다. 여러분 생각을 근본적으로 바꿔야 된다는 것입니다. 마음의 생각이 바꾸어져야 돼요. 여러분 생각을 부정적으로 하면 절대로 안 됩니다. 절대로 부정적으로 생각해선 안 됩니다. 생각이 마음을 통해서 여러분의 삶을 변화시켜 놓는 것입니다. 여러분 생각은 성경을 읽고 성경 말씀을 따라 생각하고 말하십시오. 생각이 바뀌고 그러면 꿈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여러분 적은 꿈이라도 꿈을 꾸고 있지요? 꿈을 갖고 있지요? 꿈이 없으면 안 됩니다. 꿈이 없는 백성은 망합니다. 여러분이 예수 그리스도 의 십자가를 통해서 오중복음의 꿈은 누구든지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용서받은 의인이 됐든 거룩한 사람이 되었든 저의 난 병이 고침을 받았다. 아브라함의 형통을 얻었다. 죽어도 천당 간다. 그게 여러분 조그만 꿈입니다. 네 영혼이 잘됨같이 범사에 잘되며 강건하게 된다. 성경을 통해서 꿈을 꾸고 여러분 생활 속에서 꿈을 꾸십시오. 우리 민족이 정치인들이 국회에서 주먹다짐을 하고 싸우지 말고 우리 국민들이 현재 이만큼 축복을 받아 자신을 가졌은즉 내일은 오늘보다, 다음 달은 금번 달보다, 내년은 금년보다 나아진 꿈을 마음속에 가져야 되는 것입니다. 꿈을 바라보고 말을 해야 돼요 말을. 그대로 된다고 말을 하면 새로운 세계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 세상 사람의 죽은 말하고 여러분 예수 믿고 난 다음 살아있는 말하고 말이 틀립니다. 그러므로 생각이 바뀌고 꿈이 달라지고 믿음이 강하게 되고 안 믿으면 겁이 나와서 못할 짓을 믿으면 할 수 있는 거예요. 그리고 입술의 고백이 여러분 생활을 바꾸는 것입니다. 생각이 바뀌고, 꿈이 바뀌고, 믿음을 확인하고, 입술로 말한다. 없는 것을 있는 것같이 말한다. 아~이거 정말 굉장히 중요한 거예요. 여러분 이게 이 진리를 알면은 여러분 미래에 걱정할 것 하나도 없어요. 이 삶을 가진 사람은 안 믿는 사람과의 삶의 차이가 엄청나게 나는 것입니다. 잠언서 4장 23절 ‘모든 지킬 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켜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라’, ‘네 마음의 소원대로 허락하시고 네 모든 계획을 이루어 주시기를 원하노라(시20:4)’, 마음의 소원이 바로 꿈을 말하는 것입니다. ‘마음의 소원을 들어주셨으며, 그의 입술의 요구를 거절하지 아니하셨나이다(시21:2)’ 마음에 소원이 있고 입술로 긍정적으로 말하면 하나님이 그것을 이루어지게 만들어주신다는 것입니다. 서양속담에 ‘그들이 할 수 있었던 것은 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못한다고 생각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 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나니라(막9:23)’
<결론>
삶이 바꾸어지려면 무엇보다도 먼저 우리 생각이 달라져야 되는 것입니다. 생각이 달라지고, 달라진 생각을 바탕으로 해서 꿈이 설레이는 꿈이 달라지고 그 꿈이 이룰 줄 믿고 입술로 말한다. 그 말이 기적을 베풀어주는 것입니다. 우리 장로님들하고 저는 운동을 종종합니다. 근데 해외선교를 하고 바쁘게 한국으로 돌아오고 또 가고, 그런데 시차가 변하고 하니까 우리 장로님들 내보다는 다 동생들이에요. 피곤해서 절절 매거든 피곤해서. 그래서 저보고 자꾸 말합니다. ‘비결이 뭐냐! 왜 안 피곤하냐 조목사는. 나이도 많고 한데, 무슨 신약이 있느냐! 신선이 먹는 약을 먹어서 그러냐, 왜 그러냐?’ 나는 생각을 건강하게, 나는 건강하다고 생각을 꽉 묶고 있어요. 그 다음에 말을, 하나님 지금 나는 피곤한데 주님이 같이 계시므로 안 피곤합니다. 나는 건강합니다. 튼튼합니다. 씩씩합니다. 굳셉니다! 노래삼아 늘 이야기 합니다. 오늘 여기 강단에서도 그렇게 속으로 말하고 있는데 내가 지금 진짜로 말했지 않습니까. 나는 건강하다. 나는 튼튼하다. 나는 씩씩하다. 나는 할 수 있다. 나는 힘이 있다. 여러분도 그렇게 해 보십시오. 안 피곤해요. 산삼 안 먹어도 안 피곤해요. 우리 성도들 중에 산삼을 캐는 것을 전공으로 하시는 분이 나에게 산삼뿌리를 캐서 가지고 오시는데 얼마나 사랑하고 좋지 않습니까. 그러나 내가 말하는 것은 그 산삼 캐러 산으로 돌아다니는 것보다도 하나님 주신 말씀 내가 딱 가지고 있는데 산삼을 안 먹어도 나는 피곤하지 않습니다. 나는 건강합니다. 나는 튼튼합니다. 아유~피곤치 않고 건강하고 튼튼해요. 여러분은 말씀을 사용하지 않을라거든 산삼 30만원, 50만원씩 주고 사서 잡수세요. 내 못 먹으란 말은 안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영적인 산삼인 말씀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 말씀이 저 하늘이 무너지고 이 땅이 꺼져도 일점일획이라도 변하지 않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이 가지고 있는 가장 큰 보배덩어리는 성경 말씀, 말씀 중에도 갈보리 십자가 중심으로. 여러분과 나같이 자격이 없는 사람도 주님께서 당신 몸을 찢고 피를 흘려서 유자격자로 만들어 놓은 것입니다. 여러분은 보통 사람이 아니라 예수 성을 가진 사람입니다. 나는 조용기가 아니라 예수용기. 예수님이 내 성이예요. 그 예수님께서 주신 말씀을 다 그대로 자꾸 입으로 시인해야 되는 것입니다. 창조적인 말씀을 입으로 자꾸 시인하면 그게 이루어져요. 만 번, 십만 번, 백만 번 자꾸 계속해도 효과가 발생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예배를 마치고 나갈 때, 하나님 성령께서 여러분과 같이 계시기 때문에 감화감동을 주어서 열 사람의 정탐꾼처럼 우리는 메뚜기라고 생각하는 것을 내쫓아버리고 우리는 세상에 모든 다가오는 것이 좋은 일이나 안 좋은 일이나 다 밥이다. 먹고 씩씩하고 승리한다고 여러분 자신을 보고 말하시기를 바랍니다. 아멘.
약속된 축복을 얻으려면
민 14:6-9 / 김근중 목사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400년 동안 살면서 후반기에는 노예 생활을 했습니다. 매일 성을 쌓는 고역을 시켰습니다. 짚도 주지 않고 하루에 정한 수를 채우게 했습니다. 아들을 낳으면 죽였습니다. 신앙적인 자유도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 애굽에서 나오게 한다고 했고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을 준다고 했습니다. 그 곳에서 물질적인 풍요와 정신적인 행복과 신앙적인 정체성을 에우게 해 주신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나와 광야를 지나 2년 4개월 만에 가나안 땅에 앞에 있는 가데스에 이르렀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약속한 가나안 땅이 어떠한지 확인하고 싶었습니다. 12지파의 족장 한 사람씩을 차출하여 가나안 땅을 정탐하고 돌아오게 했습니다.
12정탐꾼들은 40일 동안 가나안 땅을 정탐하고 돌아와 거기서 가져온 실과들을 보이면서 모세와 백성들에게 보고를 했습니다. 삼무아를 비롯한 10명의 정탐군은 부정적인 보고를 했습니다. 그 땅이 아름답기는 하지만, 성읍은 크고 견고하며, 산지는 사람을 삼키는 요새이고, 거민들은 심히 많아 7족속이 편만해 있고, 거민의 신장은 장대하고, 네피림의 후손 아낙 자손의 대장부들도 있는데 자신들은 그 앞에서 스스로 메뚜기 같았다고 했습니다. 그들은 강하니 치러 올라갈 수 없다고 했습니다 (13:25-33). 그 말을 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밤새도록 소리 높여 애굽이나 광야에서 죽었더면 좋았을 것이라고 울었습니다. 하나님과 모세와 아론을 향해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여 모두 칼에 죽게 하고 처자를 그들에게 붙잡히게 하려 한다고 원망했습니다. 한 장관을 세워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했습니다. 이젠 더 이상 하나님의 인도를 받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14:1-4). 그런 모습을 본 여호수아와 갈렙 두 정탐꾼은 옷을 찢었습니다. 극한 슬픔과 원통함의 표시입니다. 그리고 백성들을 안돈시키며 긍정적인 보고를 했습니다. 과연 그 땅은 젖과 꿀이 흐르는 심히 아름다운 땅이며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면 그 땅을 취하게 해 주시리라고 했습니다. 그들은 우리의 밥이라고 했습니다. 그들의 보호자는 그들에게서 떠났고 여호와는 우리와 함께 하니 두려워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민14:5-10).
그 결과 삼무아를 비롯한 10명의 정탐군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죽었고 백성들은 광야로 들어가 40여년을 헤매다가 모두 죽었습니다. 오직 여호수아와 갈렙만이 광야에서 새로 태어난 자들을 인도하여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갈렙의 가속은 가나안 땅에서도 가장 좋은 헤브론을 얻게 되었습니다. 같은 장소, 같은 사람, 같은 상황을 보고 각기 반응은 달랐고 그 결과도 달랐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언약적 축복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하나님은 이미 그 약속된 복을 주셨고 그 복을 취하라고 명령하시는데 그것을 얻느냐 못 얻느냐 하는 것은 축복의 대상자들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얼마나 취하여 누리느냐 하는 것도 대상자에게 달려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나라는 침노하는 자의 것입니다 (마11:12).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적인 복과 정신적인 평안과 물질적인 부요를 허락하셨습니다. 그것을 얻어 누리는 것은 우리의 반응에 달려 있습니다. 우리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어떻게 이해하고 어떻게 행동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1. 긍정적인 시각을 가져야 합니다.
10명의 정탐꾼들은 부정적인 면을 크게 보았고 여호수아와 갈렙은 긍정적인 면을 보았습니다. 10정탐군들은 가나안 7족속의 강함만 보았습니다. 성읍의 견고함과 거민의 많음과 군사의 장대함만 보았습니다. 그들은 스스로 절망감에 빠졌고 그 보고를 듣는 백성들까지도 좌절케 했습니다. 그러나 여호수아와 갈렙은 달랐습니다. "과연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니라"고 했습니다.
우산장수와 짚신장수를 아들로 가진 어머니가 있었습니다. 이 어머니는 비가 오면 짚신장사 아들의 장사를 걱정하고 또 반대로 날씨가 좋을 땐 우산장수 아들의 우산이 안 팔릴 것을 염려했다고 합니다. 그러니 이 어머니는 하루도 마음이 편할 날이 없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이 어머니는 그의 생각을 긍정적으로 바꾸었습니다. 비가 오면 우산이 잘 팔리겠다고 생각하며 좋아하고, 날씨가 좋으면 짚신이 잘 팔리겠다고 생각하며 즐거워하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매일 싱글벙글 기뻐하는 즐거운 생활을 보냈다고 합니다.
우리 앞에 하나님께서 주신 비젼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약속한 복이 많이 있습니다. 그 복을 취하는 데까지는 많은 어려운 난관들이 있습니다. 힘들고 어려운 부정적인 부분만 보지 말고 긍정적인 부분들을 보아야 합니다. 그 시각이 우리로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담대하게 하고 힘있게 하는 것입니다.
2. 적극적인 사고를 가져야 합니다.
10명의 정탐군은 그들의 강한 면을 보고 두려워 했고 소극적인 태도를 가졌습니다. 그러나 여호수아와 갈렙은 달랐습니다. "그들은 우리의 밥이라 우리가 곧 올라가서 그 땅을 취하자 능히 이기리라"고 했습니다 (13:30). 여호수아는 모세가 죽은 후에도 "반드시 약속한 땅을 취하게 하리니 극히 강하고 담대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하여 가나안을 정복해 들어가는 데 앞장섰습니다 (수1:1-18). 갈렙도 본 사건으로부터 45년 후 85세가 되었을 때에 본 사건을 기억하면서 "그 날에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이 산지를 내게 주소서 당신도 그 날에 들으셨거니와 그 곳에는 아낙 사람이 있고 그 성읍들은 크고 견고할지라도 여호와께서 혹시 나와 함께 하시면 내가 필경 여호와의 말씀하신 대로 그들을 쫓아내리이다"고 하면서 헤브론을 취했습니다 (수14:5-15)
두 아들을 둔 어머니가 장날 시장에서 사과를 한 바구니 사오셨읍니다. 어머니는 아들들에게 사과 다섯개씩을 나누어 주었읍니다. 사과 중에는 좋은 것도 있지만 벌레 먹은 것도 있었을 것입니다. 어머니는 아들들이 어떤 사과부터 먼저 먹는가 하고 유심히 관찰했읍니다. 큰 아들은 다섯 개 중에서 제일 좋은 것부터 골라서 먹고, 나쁜 것은 맨 나중에 먹었읍니다. 그런데 둘째 아들은 나쁜 것부터 먹고 좋은 것을 나중에 먹는 것이었읍니다. 이 광경을 지켜 보던 어머니는 두 아들 중에서 좋은 것부터 먹은 큰 아들을 칭찬해 주었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사과 다섯 개중에서 처음에 제일 좋은 것을 먹고, 남은 것 중에서 또 제일 좋은 것을 먹고, 그래서 큰 아들은 사과 다섯 개를 먹을 때마다 좋은 것만 골라 먹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작은 아들의 경우는 다섯 개의 사과를 먹을 때마다 가장 나쁜 것만을 골라먹은 셈이 된 것입니다.
우리에게 펼쳐진 축복들이 있습니다. 그 복을 취하는 데는 현실적으로 많은 어려운 문제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취하느냐 못 취하느냐는 그것을 어떤 관점에서 보느냐 하는 시각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또 중요한 것이 어떤 자세를 가지느냐가 중요합니다. 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과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정 반대의 결과를 가져옵니다. 우리는 열악한 환경과 우리의 약함을 보면 할 수 없게 됩니다. 하나님의 약속과 하나님의 강함을 보아야 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시각을 가지고 적극적인 그리고 진취적인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3. 신앙적인 관점을 가져야 합니다.
10명의 정탐꾼은 가시적인 상황만을 보고 두려워 하고 그 땅을 취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여호수아와 갈렙은 그 땅의 풍성함을 보고 하나님의 약속을 확인했습니다 (출3:8). 그 땅은 하나님이 주시기로 약속한 땅이고 그 땅을 취하라고 명령하셨으므로 하나님이 반드시 함께 하여 취하게 해 주실 것이라는 믿음을 가졌습니다.
어떤 선생님이 한번은 자기 반 학생들에게 '뛰는 벼룩'을 가지고 실험을 해보도록 했습니다. 학생들은 수십 마리의 벼룩을 책상 위에 올려 놓고 그 벼룩들이 얼마나 높이 뛸 수 있는지 지켜보았습니다. 그런 다음 학생들은 커다란 유리그릇을 가져다가 뒤집어서 뛰는 벼룩 위에 덮었습니다. 이제 벼룩들은 뛸 때마다 유리그릇에 부딪혀서 결국은 더 이상 높이 뛸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선생님이 유리그릇을 치웠으나, 벼룩들은 아직도 유리그릇이 머리 위에 있는 것처럼 계속해서 그 높이까지만 뛰었다. 벼룩들은 그들의 한계라고 생각한 높이로 뛰는 능력을 제한시켰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최선의 것을 얻지 못하게 하는 가장 큰 방해요소가 자신은 할 수 없다고 스스로 자신은 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꿈은 위대한 목표를 정하고 거기에 도달하도록 당신을 돕기 위해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입니다.
우리는 영적인 눈으로 보아야 합니다. 신앙적인 눈으로 보아야 합니다. 블레셋과 이스라엘 간의 전쟁이 있을 때 기골이 장대한 블레셋의 골리앗 장군이 하나님과 이스라엘을 모욕할 때 사울왕과 다윗의 형들과 이스라엘 군사들은 떨며 두려워 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하나님께서 과거에 양을 칠 때 맹수들의 입에서도 건지신 하나님께서 하나님과 이스라엘을 모욕하는 할례없는 블레셋 장수도 능히 이기게 주실 것을 믿었습니다. 그는 칼과 단창을 의지하고 나왔지만 다윗은 하나님을 의지하고 나갔습니다. 하나님께서 반드시 승리케 해 주셔서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이며 이스라엘 가운데 하나님이 계신 것을 알게 하실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삼상17:1-49). 이는 엘리사를 잡기 위해 도단 성을 겹겹이 포위한 아람 군대를 본 사환과 하나님의 천군천사를 본 엘리사와 같습니다. 사환은 "아아 내 주여 우리가 어찌하오리까?" 했고 엘리사는 "두려워 하지 말라 우리와 함께 한 자가 저들 보다 많으니라"고 했습니다 (왕하6:14-19). 원수의 강함을 보아서는 안됩니다. 우리의 약함을 보아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의 강함을 보아야 합니다. 언약을 근거하여 그가 함께 하실 것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결과적으로 10명의 정탐꾼은 저주받아 죽었고 이스라엘 백성은 가나안 땅을 두려워하여 들어가지 못하고 40년을 광야에서 헤매다가 결국 광야에서 새로 태어난 자를 제외하고는 모두 죽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여호수아와 갈렙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되고갈렙의 집안은 가나안에서 가장 좋은 헤브론 땅을 차지하게 됩니다 (민14:22-27,30, 26:65, 수14:5-15). 우리에게 하나님이 허락한 언약적 축복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취하느냐 취하지 못하느냐는 우리의 시각과 태도에 달렸습니다. 그리고 육신적인 삶으로 절망하여 하나님을 멸시하고 대적하는 사람들에게게 여호수아와 갈렙의 심정으로 권면하는 자가 되어 하나님 나라에 대한 비젼을 이루어 가야 합니다.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은 하실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마19:26). 입을 넓게 열어야 합니다 (시81:10).
세상을 이기는 믿음
민 14:6-10 / 최응희 목사
오늘 본문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요단강을 건너 약속의 땅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기 직전에 일어난 사건입니다. 모세는 가나안 땅이 요단 저 편에 보이자 그 땅을 탐지하기위해 12명의 정탐군을 보냈습니다.
그러나 정탐을 하고 돌아온 이들의 보고는 절망적이었습니다. 그 땅이 정말 젖과 꿀이 흐르는 비옥한 땅이기는 하였지만 사람들이 마치 거인들과 같았고, 그들의 무기는 발달하여 도저히 상대할 수 없어 보였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땅에 사는 사람들은 얼마나 장대하고 힘이 좋은지 자신들은 그들과 비교할 때 메뚜기처럼 보였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정탐군들은 한결같이 그 땅에 들어갈 수 없으며 그들과의 싸움에서 결코 이길 수 없다고 절망적인 보고를 한 것입니다.
그러나 같은 땅을 같이 정탐하고 돌아온 여호수아와 갈렙의 믿음과 주장은 달랐습니다.
우리가 두루 다니며 정탐한 땅은 심히 아름다운 땅이라.
여호와께서 우리를 기뻐하시면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시고
그 땅을 우리에게 주시리라. 이는 과연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니라.
다만 여호와를 거역하지 말라. 또 그 땅 백성을 두려워하지 말라.
그들은 우리 먹이라 그들의 보호자는 그들에게서 떠났고
여호와는 우리와 함께 하시느니라. 14:7-9
하나님은 이런 믿음의 사람들을 들어 쓰십니다. ‘네 믿음대로 될지어다’ 그것이 주님의 은혜의 말씀입니다. 믿음으로 가나안 땅을 바라보지 못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한 사람도 그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가나안 땅을 바라본 여호수와와 갈렙만은 그 땅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그 이유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오직 내 종 갈렙은 그 마음이 그들과 달라서 나를 온전히 따랐은즉
그가 갔던 땅으로 내가 그를 인도하여 들이리니 그 자손이 그 땅을 차지하리라. 14:24
같은 족속이요, 같은 신앙을 가진 사람이요, 같은 체험을 하였고, 같은 곳을 정탐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이렇게 다른 생각, 다른 태도, 다른 행동이 나오는 것일까요? 세상을 보는 눈이 달랐기 때문입니다.
1. 영혼으로 보는 눈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여호수아 갈렙은 세상을 보는 눈이 다른 사람들과 달랐습니다. 그들은 믿음의 눈으로 세상을 보았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겉모양으로 세상을 볼 때 갈렙은 믿음으로 세상을 보았습니다. 비록 그들이 거인과 같고, 무기가 발달했고, 힘이 장사와 같다 해도 하나님 앞에서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요, 믿음이 세상을 이길 것을 믿었습니다.
믿음은 무엇입니까? 겉이 아니라 속을 보는 것입니다. 영으로 영을 보는 것이 믿음입니다. 믿음은 긍정의 마음입니다. 믿음을 가지면 세상 사람들이 보는 대로 겉으로 보고 겉으로 생각하지 않게 됩니다. 말씀으로 분별하고,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믿음으로 행동하게 되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고린도전서1:18
같은 십자가도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지만, 구원을 받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 됩니다. 같은 것을 보고 다르게 생각하는 것은 그 속에 품은 생각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세상을 보는 눈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다른 지파사람들과 갈렙과 다른 점은 바로 세상을 외모로 보느냐 믿음으로 보느냐의 차이에 있었습니다. 저들은 가나안 사람들의 외모를 보고 놀랬을 뿐 아니라 자신들의 외모만 보고 자신들을 메뚜기라고 불렀습니다. 그러나 여호수아와 갈렙은 믿음의 눈을 가지고 세상을 보았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두려움을 이기고 그 땅을 찾이하는 사람이 됐습니다.
영혼으로 영혼을 보십시오. 믿음으로 세상을 보십시오. 말씀으로 세상을 보십시오. 그리하면 언제나 승리하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2. 살아있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여호수아와 갈렙의 믿음은 말만 무성하거나, 생각 속에서만 맴도는 믿음이 아니라 실제 생활 속에서 활용하는 믿음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다른 지파의 사람들도 분명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도 홍해를 건넜고, 반석에서 나오는 물을 마셨고, 하늘에서 내려오는 만나를 먹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믿음은 지금 어디로 간 것입니까?
열 지파의 사람들도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믿음은 사용되지 않는 믿음이었습니다. 생활 속에 있는 믿음이 아니었습니다. 성전에 맡겨져 있는 믿음, 두루마리 책 속에서만 보는 믿음, 기도의 말 속에만 있는 믿음이었습니다.
그러나 여호수아와 갈렙의 믿음은 책 속에 있는 믿음이 아니었습니다. 생활 속에 있는 믿음, 길 위와 광야와 들판에 있는 믿음이었습니다. 위험과 고통과 어려움 속에서 붙드는 믿음, 어두움과 절망의 자리에서 붙잡는 믿음, 삶과 생활 속에서 살아 움직이는 믿음이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생활 속에서 믿음을 사용하시기 바랍니다. 사용되지 않는 믿음은 죽은 믿음입니다. 어려움이 있음에도 기도하지 않는 믿음이 어찌 믿음이라 하겠습니까? 힘들고 어려울 때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지 않는 믿음이 어찌 살아있는 믿음이라 하겠습니까? 기쁘고 감사할 때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지 않는 믿음이 어찌 살아 계신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라 하겠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도 성전에 가서 예배를 드렸을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불렀을 것입니다. 그러나 막상 삶의 치열한 현장에서 그들의 믿음은 하얗게 증발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사용할 수 없는 믿음이었습니다. 말만 무성한 믿음이었습니다.
믿음을 사용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속에 있는 믿음을 사용하시기 바랍니다. 성령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믿음을 담대하게 사용하시기 바랍니다. 믿음은 감추어 마음속에 간직하는 것이 아니라 생활 속에서, 길 위에서, 장터에서, 집안에서, 삶의 현장에서 사용되어야 참 믿음입니다.
3. 믿음의 자아의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사람은 자신의 자아의식만큼 행동합니다. 자신이 누구인지를 아는 만큼 행동하는 것입니다. 여호수아와 갈렙은 자기 자신들이 누구인지를 확실히 알고 있었습니다. 자신들은 하나님의 백성이요, 약속 백성임을 분명히 의식하며 살고 있었습니다. 분명한 자아의식을 가지고 있을 때 사람은 사는 태도가 달라지게 됩니다.
그래서 그들은 두려워 떠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분명하게 말하였습니다.
...여호와를 거역하지 말라.
또 그 땅 백성을 두려워하지 말라. 그들은 우리 먹이라.
그들의 보호자는 그들에게서 떠났고, 여호와는 우리와 함께 하시느니라. 14:9
하나님이 여러분과 함께 하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의 자녀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교회 안에서만 믿지 말고, 집안에서, 일터에서, 고통 속에서도, 기쁨 속에서도, 어려울 때에도, 형통할 때에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 속에 힘과 능력이 있습니다. 그 속에 평안과 축복이 있습니다. 그 속에 은혜와 기쁨이 있습니다.
여러분이 누구입니까? 여러분은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습니까? 여러분 스스로에 대한 자아의식이 어떤 것입니까?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베드로전서2:9
너 하나님의 사람아 이것들을 피하고 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따르며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 디모데전서6:11-12
이렇게 나는 하나님의 택하신 족속이요, 하나님의 사람이요, 왕같은 제사장인 것을 믿으십니까? 그런 자아의식을 가지고 있습니까? 그 자기의식이 세상을 보는 눈을 다르게 만듭니다. 갈렙도 가나안 사람을 볼 때 두려웠을 것입니다. 여호수아의 눈에도 사실은 그들의 장대함과 자신들의 작은 키를 비교하면 정말 메뚜기 같이 느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호수아와 갈렙은 그런 겉모양을 자신의 삶의 판단 기준으로 삼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과 함께 하신다는 믿음으로 삶과 행동의 기준을 삼았습니다. 나는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믿음으로 행동의 푯대를 삼았습니다. 그러므로 두려움을 물리치고 승리로 나아갈 수 있었습니다.
믿음은 두려움이 없는 마음이 아니라 두려움을 이기는 마음입니다. 건강한 사람이란 병균에 감염되지 않는 사람이 아니라 감염되어도 이기는 사람을 말하는 것입니다. 나는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믿음이 나를 어떤 유혹도 이길 수 있게 해주고, 성령께서 나와 함께 계시다는 믿음이 어떤 두려움을 이기며, 예수께서 나를 사랑하신다는 믿음이 어떤 경우에도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게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 말씀하십니다.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요한복음 16:33
너희가 세상에서 환난을 당한다. 어려움이 있다. 그러나 담대하라. 왜 내가 세상을 이기었기 때문이다. 내가 이겼으니 너희도 이기리라. 그것이 주님의 말씀입니다.
여호수아에게 담대함을 주신 하나님이 여러분의 하나님이십니다. 갈렙이 가지고 있던 능력의 믿음이 여러분 속에 있는 믿음입니다. 그 믿음을 사용하시기 바랍니다. 믿음을 사용하십시오. 믿음으로 세상을 사십시오. 믿음으로 세상을 이기십시오. 믿음으로 하나님의 복을 받으십시오. 그리함으로 날마다 기쁨의 삶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라
민 14:4-10 / 김태복 목사
2002년, 신년 새해 여러분의 희망이 무엇입니까? 그 희망이 꼭 성취되는 금년 한 해가 되기를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새해에 보면 세 가지 종류의 사람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첫째로, '한 해가 가고 새해가 오는가 보다'라는 잠깐의 느낌이 있을 뿐, 아무 희망도, 계획도 없이 하루하루 사는 인생입니다. 둘째로, 새해가 와서 희망과 계획을 세우지만, 조그마한 문제나 장애를 만나면 '그러면 그렇지, 내 팔자에 무슨 좋은 날이 있겠는가?'라면서 쉽게 낙심하는 인생입니다.
그러나 세 번쩨 사람은 다릅니다. 어떤 난관이 온다고 할지라도 항상 긍정적으로 자기 인생을 바라보면서 그 시련을 뚫는 인생입니다. 여러분은 이 중 반드시 세 번째에 속하는 인생이 되기를 바랍니다. 왜냐하면 인생의 성공과 실패는 환경이 좋으냐, 나쁘냐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고, 어떠한 마음을 먹느냐에 따라 판가름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같은 세대, 같은 지역, 같은 환경에 접하면서도 긍정적인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느냐, 부정적인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 성공과 실패가 좌우되는 것입니다.
두 나그네가 불덩이 같은 테양이 작열하는 사막을 여행하고 있었습니다. 한 나그네는 너무 고통스러워 여행을 포기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다른 나그네는 친구를 위로하며 여행을 계속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눈앞에 펼쳐진 것은 무덤뿐이었습니다. 이 때 부정적인 사고방식이 더 강한 친구가 말하기를 "이제야 올 것이 왔군. 저 사람들도 우리처럼 지쳐서 죽었을 거야."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긍정적인 친구는 말하기를 "아닐세. 무덤이 여기 있다는 것은 멀지 않은 곳에 마을이 있다는 희망적인 징표라네. 좀 더 힘을 내게."라고 했습니다. 과연, 조금 더 걸어가다 보니, 쉬어갈 마을이 나타났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여러분이 너무나 잘 아시는 내용입니다. 본문에는 부정적인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들과 긍정적인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들이 극명하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의 인도를 따라 애굽에서 탈출한지 2년 만에 마침내 그렇게 희망하던 가나안복지 입구인 가데스 바네아에 도착하게 되었습니다. 그 때에 백성들은 "야, 이제는 지긋지긋한 광야생활을 마감하고,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서 호의호식하면 살게되었구나.'라는 기대에 부풀어 사기가 하늘을 찌를 듯 충천했을 것입니다.
그 때에 하나님은 모세에게 명하시기를 각 지파의 족장 되는 사람들 12명을 뽑아서 가나안 땅을 몰래 탐지하도록 하셨습니다. 족장이라면, 나름대로 믿음이 뛰어나고 식견과 지도력이 출중한, 큰 인물들입니다. 그들은 상황판단에도 능하고, 옳고 그른 것을 판별할 수 있는 자들입니다. 모세는 이 뛰어난 12명으로 점탐꾼으로 조직하여 40일 동안 가나안 땅의 주민, 농산물, 요새, 병력 등을 탐지하고 돌아와서 보고하라고 했습니다. 40일 동안 기다리면서, 백성들은 모여 앉았다 하면 그 땅에 들어가서 행복하게 사는 삶을 그리면서 너나 없이 이야기를 나누었을 것입니다.
마침내 기다리던 40일이 지나고 12명의 정탐꾼들이 돌아왔고, 모든 백성들이 모인 자리에서 '가나안 땅 탐지보고회'가 열리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10명의 정탐꾼이 먼저 보고하는데 "그 땅에 들어만 가면 당장 몰살을 당할 것이다.'라는 식의 부정적인 보고를 했습니다. 온 백성들은 기대했던 만큼 실망이 컸고, 속았다는 분노감에 흥분하기 시작했습니다. 나중에 여호수아와 갈렙이 아무리 긍정적인 보고를 해도 전혀 귀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군중의 심리는 다수의 소리를 따르지, 소수의 소리를 듣지 않게 되었습니다.
마침내 '우리는 모세에게 완전히 사기를 당했다. 그러나 객지에서 이대로 죽을 수 없다. 우리가 새 지도자를 세우고 애굽으로 돌아가자. 죽는 것보다 차라리 노예가 낫지 아니한가?'라는 어느 선동가의 말에 온 백성들이 데모에 가담하게 되었습니다. 그 기세가 얼마나 살벌한지, 모세와 아론은 회중 앞에 엎드렸다고 본문은 표현하고 있습니다. 만약에 그 때에 하나님이 막으시지 않으셨다면, 극도로 흥분한 군중들에 의해 모세와 아론은 물론이고 여호수아와 갈렙도 돌에 맞아 죽었을 것입니다.
참으로 너무나 한심한 일이었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의 진노하심이 나타나 민14:36에 보면, 불신앙적인 보고를 한 10명의 정탐꾼은 즉시 재앙으로 죽었고, 또한 10명의 정탐꾼의 보고를 듣고 하나님을 원망하며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데모하던 사람들은 40일을 1년씩을 쳐서 40년 동안 광야길에서 방황하다가 그 복된 땅에 들어가 보지 못하고 죽는 자들이 되고 만 것입니다. 오직 긍정적인 신앙으로 일관했던 여호수아와 갈렙, 그리고 20세 이하의 사람들만 그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복을 받았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년 새해의 희망을 이루려면 긍정적인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긍정적인 믿음을 갖는 자세는 어떠한 것입니까? 오늘 본문에서 배우고자 합니다.
1, 긍정적인 믿음은 하나님의 능력만 바라보는 것입니다.
가나안 땅을 점탐한 12 사람들 중에 여호수아와 갈렙은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본문 7절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에게 일러 가로되 우리가 두루 다니며 탐지한 땅은 심히 아름다운 땅이라"고 했던 것을 볼 때, 그들은 가나안 땅을 믿음의 눈으로 40일 동안 돌아보면서 하나님이 주실 땅의 아름다움을 보면서 계속 감탄해 마지않았을 것이 분명합니다. "오, 저 높은 봉우리, 저 맑은 시내, 저 푸른 초원, 저 엄청난 과일과 곡식들 너무나 아름답도다."라는 감탄사가 절로 나왔을 것입니다.
마침내 그 땅을 허락하시는 하나님에 대해서 감사의 찬송이 절로 나왔을 줄 압니다. "오, 하나님, 감사합니다. 이러한 땅을 우리 백성들에게 주시다니요? 이제는 우리 백성들이 이 아름다운 땅에서 행복하게 살수 있게 하시니, 너무 감사합니다."라고 했을 것입니다. 그들은 그 땅의 거민이 강대하든지, 성읍이 견고하든지 전혀 개의치 않았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약속만 바라보았던 것입니다. 만약 어느 분이 뒤에 숲이 있는 고급 아파트를 사기로 계약했다고 칩시다.
어느 날 그 아파트를 구경갔습니다. 가보았더니 거기 사는 사람이 인상이 고약하여 무슨 깡패 같습니다. 그렇다고 아파트를 산 사람이 도망 오겠습니까? 아닙니다. 어떤 험상궂은 사람이 살았던지 전혀 개의치 않습니다. 오직 고급 아파트와 그 시설들, 뒤편의 아름다운 숲을 보면서 즐거워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미 자기가 이 아파트의 주인이라는 계약서가 있기 때문입니다. 여호수아와 갈렙은 오직 하나님의 약속만 믿었을 뿐, 거기 살고 있는, 쫓겨갈 원주민들 따위에는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던 것입니다.
반대로 10명의 정탐꾼들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못하고 인간의 눈, 불신의 눈으로 그 땅을 바라보았을 때, 가나안 땅은 아름다우나 그곳에 사는 거민은 거인들이요, 그 성읍은 너무 견고해서 도무지 이길 수가 없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다시 말하면 좋지 못한 것, 불가능한 것, 실패할 것만 보고 다니면서 두려움과 불만으로 가득차 돌아왔던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바라보았던 여호수아와 갈렙은 그 약속의 복을 받는 자들이 되었으나 불신하던 자들은 그 복을 받지 못했던 것입니다.
어떤 시인은 표현하기를 "의심은 장애물을 보나 믿음은 대로(大路)를 본다. 의심은 어두운 밤을 보나 믿음은 밝은 낮을 본다. 의심은 발걸음을 옮기는 것을 두려워 하나 믿음은 높이 치솟는다. 의심은 '누가 믿겠느냐?'고 속삭이나 믿음은 '나는 믿어요'라고 대답한다."고 했습니다. 무디 선생님은 말하기를 "세상사람들은 보는 것은 믿지만, 우리 신자들은 믿는 것을 보는 자"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믿음의 눈으로 바라봅니까? 기도의 눈으로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상하지요. 열심히 기도하면 믿음이 생깁니다. 그러나 기도하지 않으면 믿음이 사라집니다. 여러분들이여, 새해 새날을 믿음으로 바라보면서 "하나님, 금년 한해를 가나안 땅으로 만들어 주실 줄 믿습니다."라고 고백해 보십시오. 그러면 하나님은 그런 긍정적인 믿음을 가진 자들의 길 위에 강한 능력으로 함께 하시면서 승리하게 하실 것입니다. 고아의 아버지요, 기도의 왕인 죠지 뮬러가 배를 타고 퀴백을 향해 나가는 데 뉴 파운드랜드 부근에 이르렀을 때, 너무나 안개가 짙어서 배가 22시간이나 멈춰 있었습니다.
그 때 죠지 뮬러가 선장에게 와서 강하게 말합니다. "선장님, 나는 토요일 오후까지 퀴백에 도착해야 합니다. 나는 평생 50년 동안 약속을 어긴 적이 없는데 빨리 출발합시다." "선생님, 나도 가고 싶지만, 안개가 너무 짙어서 대단히 위험하므로 못 가고 있습니다.' "선장님, 나의 눈은 안개의 짙은 정도가 얼마인가를 보는 게 아니라 나의 생의 상황을 조정하시는 살아 계신 하나님을 보는 것이요."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기도합시다."라더니 "오, 하나님, 제가 이번 주 토요일 퀴백에 도착하여 하나님의 일을 해야 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다면 5분 내에 안개를 걷어 주십시오."라는 것이었습니다.
선장은 얼마나 황당했겠습니까? 이런 기도는 8살 정도의 어린 아이나 할 수 있는 기도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놀랍게도 얼마 후에 안개가 씻은 듯이 걷히는 기적을 선장은 보게 되었던 것입니다.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들이여, 새해 새 날을 향해 나가실 때 안개가 나타나든지, 험한 산이 가로막든지, 그것을 보지 마시고 오직 능력으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믿음의 기도의 눈으로 바라보시므로 승리하시는 여러분들이 다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2. 긍정적인 믿음은 하나님의 약속대로 말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타나는 10명의 정탐꾼들의 불신앙적인 보고를 눈여겨 보십시오.
(1)그들은 그 가나안 땅을 악평했습니다.
그들은 가나안 땅이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인 것을 인정하면서도 민13:32에 보니 "우리가 탐지한 땅은 그 거민을 삼키는 땅"이라고 나쁘게 말했습니다. 하나님이 축복으로 주시는 땅을 악평하면서 그 약속을 완전히 무시했습니다.
(2)그들은 그 거민들이 강하다는 것을 지나치게 강조했습니다.
"그 땅 거민은 강하고 성읍은 견고하고 심히 클 뿐 아니라 거기서 아낙자손을 보았는데 그들은 얼마나 큰지 그들에 비하면 우리는 메뚜기 같았다"고 과장함으로 백성들을 선동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그 거민의 능력을 지나치게 강조하 반면, 하나님의 능력을 완전히 과소평가했습니다.
(3)그들은 하나님의 종,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면서 다른 지도자를 세우고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선동했습니다. 이는 하나님이 세운 지도자를 자기들 마음대로 페하고 새 지도자를 세우려고 함으로 곧 하나님의 권위를 완전히 무시하는 태도를 보였습니다. 그 때에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당장에 이들을 전염병으로 진멸하시겠다고 하시면서 무엇이라고 하셨습니까? 현대인의 성경을 인용하면 더 실감이 납니다. 민14;11-12 "언제까지 이 사람들이 나를 멸시할 작정이냐? 내가 그들 가운데 많은 기적을 행했는데도 언제까지 나를 믿지 않을 작정이냐?"고 진노하셨습니다.
그 백성들은 그렇게 수많은 은혜와 기적을 맛보았음에도 하나님의 능력을 믿지 못하는 것은 물론이고 함부로 하나님을 무시하는 말을 나태내는 것을 진노하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10명의 정탐꾼이나 백성들이나 민14:1-3에 자세히 읽어보면 망할 소리만 하고 있습니다. "큰 소리, 울음, 원망, 죽을 것이다. 망할 것이다, 사로잡힐 것이다."라면서 복 받지 못할 소리를 골라서만 합니다. 결국 그들은 입으로 시인한 대로 10명의 지도자는 즉사하고 그 지도자들은 따르던 백성들도 40년 동안 광야에서 고생하고 방랑하다가 죽고 맙니다.
그에 비해서 여호수아와 갈렙을 보십시오. 그들의 말은 구구절절이 믿음의 말이었습니다. 대부분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선동에 휩싸여 돌로 치려는 살기등등한 분위기임에도 개의치 않고 백성들 앞에 담대히 나와서 옷을 찢으며 외치기를 7-8절 "우리가 두루 다니며 탐지한 땅은 심히 아름다운 땅이라 여호와께서 우리를 기뻐하시면 우리를 그리로 인도하여 들이시고 그 땅을 우리에게 주시리라 이는 과연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음으로 대단히 존중했습니다.
또한 9절 "여호와를 거역하지 말라 그 땅 백성을 두려워하지 말라 그들은 우리의 밥이라 그들의 보호자는 그들에게서 떠나고 여호와는 우리와 함께 하시느니라 그들을 두려워 말라"고 했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능력을 절대적으로 높이고 신뢰했습니다. 그러므로 여호수아와 갈렙은 하나님의 약속의 땅을 들어가는 복을 받았을 뿐 아니라 하나님의 강하신 도우심으로 승리적인 삶을 사는 자들이 되었던 것입니다. 복된 사람은 미래지향적인 반면, 복되지 못한 사람은 여전히 과거지향적입니다.
복된 사람은 언제나 밝은 면을 바라보면서 말하지만, 불행한 사람은 언제나 어두운 면만 보고 말합니다. 부정적인 사람은 장미꽃을 보면서 "장미는 꽃은 아름다우나 가시가 있어 나쁘다."고 말하지만, 긍정적인 사람은 "가시나무에도 이런 아름다운 꽃이 피는구나."라고 감탄합니다. 부정적인 사람은 아침에 눈이 하얗게 내린 것을 보고 "아이고, 오늘도 길이 빙판이 되어 자가용 대신 지하철을 타야하다니 이제는 눈이 지긋지긋하다."라고 말하지만, 긍정적인 사람은 "아, 너무 아름답다. 내 마음도 이렇게 좀 아름다웠으면 얼마나 좋을까?"라고 합니다. 부정적인 사람은 비가 오면 "참 더럽게 비가 쏟아지고 있네."라고 하지만, 긍정적인 사람은 "시원스럽게 비가 오는 구나"라고 말합니다.
신년 새해 여러분의 가정이 하나님의 은혜와 복을 받으려면 부정적인 말을 버리고 긍정적인 믿음의 말을 해야 합니다. 과천교회 김찬종 목사님의 설교집에는 이런 간증이 나옵니다. 남편이 교회에 나오지 않고 항상 술에 취해 사는 가정이 있었습니다. 그 집 부인의 평생 소원이 남편이 예수님을 믿는 것인데 아무리 기도해도 응답이 되지 않아서 어느 날 목사님을 찾아가서 상담을 했습니다. 그랬더니 목사님은 하나님께서 자매님의 기도에 응답해 주실 것을 믿고 절대로 남편을 원망하지 말고 믿음으로 무조건 감사하라고 답해주더랍니다.
그 날도 남편은 변함 없이 술을 먹고 고주망태가 되어 집에 들어왔습니다. 남편의 잠자리를 보아주고 자기도 자려는데 잠이 오지 않습니다. 자기 신세를 생각하니 기가 막혔습니다. 저런 남자를 남편이라고 의지하고 계속 살 것을 생각하니 한숨이 저절로 나왔습니다. 이렇듯 신세 한탄을 하고 있는데 문득 '믿음으로 무조건 감사하라'는 목사님의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그 자매는 내 신세에 무슨 감사를 할 수 있는가 하다가 감사의 조건을 종이에다가 적어 보기로 했습니다. 그랬더니 무려 6가지나 되었습니다.
①남편이 술을 마시고도 집에 잘 찾아오니 감사하고, ②술을 저렇게 마시고도 그러저럭 남편이 건강하니 감사하고, ③술을 마시면서도 다른 여자한테 한눈 팔지 않으니 감사하고, ④술을 마시면서도 월급을 꼬박꼬박 갖다주니 감사하고, ⑤남편이 없으면 자기는 과부가 될 것인데 그렇지 않으니 감사하고, ⑥자식들을 끔찍이 사랑해주니 감사하고, 그렇게 적다보니 웃음이 나왔습니다. 그래서 열심히 감사기도를 드렸습니다.
술에 취해 잠자던 남편이 갈증이 생겨서 일어나 보니 아내가 고주망태가 된 자기를 보고 감사하고 있습니다. 너무나 감동이 된 남편은 예수님을 믿을 것을 약속했다는 간증입니다.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들이여, 신년 새해에는 우리 모두 어찌든지 부정적인 말보다는 믿음으로 긍정적인 말,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말, 하나님의 능력을 높이는 말을 함으로 여호수아와 갈렙처럼 승리하는 삶, 복 받는 삶을 사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3. 긍정적인 믿음은 하나님의 약속만 믿고 담대히 행하는 것입니다.
여호수아와 갈렙은 부정적인 사고방식과 불신앙으로 두려움에 가득찬 백성들, 가나안 족속에 비하면 자기들은 메뚜기만도 못하다고 말할 정도로 패배의식으로 가득차 있는 백성들을 향해 하나님이 주신 약속의 땅, 가나안을 점령하자고 주장하면서 그들의 보호자는 떠났음으로 그들은 우리의 밥에 불과하다고 외치는 모습은 너무나 긍정적인 믿음의 모습입니다. 그렇다면 여호수아와 갈렙은 말로만 큰 소리 치는 인물이었습니까? 아닙니다. 그들은 어느 누구보다도 행함이 있는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었습니다.
출17장에서 보면 아말렉과 전투할 때에 모세가 명하기를 "나는 높은 산에 올라가서 기도할 테니, 너는 군사들을 이끌고 아말렉과 전투하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별로 전투경험이 없는 여호수아는 "내가 어떻게 나가서 싸웁니까? 전투경험이 별로 없는 내 말을 백성들이 따르겠습니까? 못 합니다. 할 수 없습니다."라고 할 만도 한데 여호수아를 보십시오. 저는 거절했다는 말이 없습니다. 무조건 순종의 행함만 있었습니다. 모세가 죽은 후, 하나님이 모세 대신에 이스라엘 지도자가 되라고 할 때도, 난공불락 여리고성을 공격할 때 매일 나팔불며 성을 돌라고 할 때도 그대로 순종으로 행한 여호수아였습니다.
갈렙도 말만 번드르게 하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민13:30에 보면 그가 말하기를 "우리가 곧 올라가서 그 땅을 취하자 능히 이기리라"고 말했을 뿐 아니라, 끝까지 믿음으로 행한 사람이었습니다. 또한 수14:7-12에 보면 이제 85세가 된 갈렙이 자기의 친구요, 어느 의미에서는 같은 계급에 속한 여호수아에게 나와서 겸손하게 아뢰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제 보소서 여호와께서 이 말씀을 모세에게 이르신 때로부터 이스라엘이 광야에 행한 이 사십 오 년 동안을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나를 생존케 하셨나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같은 친구요, 같은 동역자인 여호수아에게 간청을 합니다.
85세된 갈렙이 무엇을 간청했습니까? 대부분의 백성들은 여호수아에게 이렇게 간청할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총사령관님, 제가 이제 나이가 연로하여서 옛날 같지 않습니다. 이제 나라가 어느 정도 안정되었으니, 제 한 가지 소원을 들어주십시오. 저도 자녀들과 후손들이 있는 몸인데, 이제 죽기 전에 명예 사령관이라도 허락해주면 우리 가문에 영광이 되겠습니다." 갈렙이 그런 요구를 한다고 할지라도 여호수아는 감히 거절할 수 없을 정도로 갈렙은 나라의 큰 공신이었습니다. 그러나 갈렙의 요청은 너무나 의외였습니다.
"오늘날 내가 팔십 오 세로되 모세가 나를 보내던 날과 같이 오늘날 오히려 강건하니 나의 힘이 그 때나 이제나 일반이라 싸움에나 출입에 감당할 수 있습니다."라면서, 남들이 싸우러 가기 싫은 장소로 자기를 보내달라고 하면서 외칩니다. "그 날에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이 산지를 내게 주소서 당신도 그 날에 들으셨거니와 그 곳에는 아낙사람이 있고 그 성읍들은 크고 견고할지라도 여호와께서 혹시 나와 함께 하시면 내가 필경 여호와의 말씀하신 대로 그들을 쫓아내리이다"라고 했습니다.
아니, 노인이 되어 젊은 사람들도 감히 가기를 싫어하는 장대한 거인들이 지키고 있는 헤브론 땅에 가서 전투하겠다고 자원하는 모습이 너무나 위대해 보입니다. 신년 새해 우리 성도들도 여호수아와 갈렙처럼 믿음의 삶을 나타내십시다. 새해의 길을 가는 동안, 푸른 초원이 나타나든지, 혹은 험준한 산이 가로막든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가는 때를 만나든지, 혹은 아낙 자손 같은 자들이 여러분의 가는 길을 방해할 때도 있을 것입니다.
때로 교사나 성가대, 구역의 일꾼이나 기관임원, 혹은 교회 안에 여러 가지 어려운 일을 맡아 봉사하거나 이웃을 봉사할 때에 도무지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낙심되는 일이나 상처받는 일이나 반대를 만날 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을 보지 마십시오. 눈을 들어 함께 하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음으로 바라보시고 믿음으로 말하고 믿음으로 행해 보십시다. 그러면 놀랍지요. 하나님이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밤에는 불기둥으로 인도하시는 속에서 그렇게 장대해 보이던 아낙자손도, 견고한 여리고성도 다 무너지고 승리하게 하심으로 복된 가나안 복지로 인도하시는 사실을 체험하게 되실 것입니다.
일본의 여류작가 미후라 아야꼬는 작가가 되기 전에 구멍 가게를 했는데, 장사가 너무 잘돼 나중에는 트럭으로 물건을 공급해야 할 정도였습니다. 어느 날 퇴근한 남편이 "여보, 우리 가게 장사가 너무 잘돼 이웃 가게들이 문을 닫을 지경이 되었으니 참으로 안타깝소. 이것은 하나님 뜻에 어긋나는 게 아니겠소?"하고 아내에게 말했습니다. 이 말에 자극 받은 미후라 아야꼬는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는 중에 남편의 말속에 하나님의 말씀이 들어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즉, 자기 혼자만 잘 사는 것보다 다른 가게도 함께 잘 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 줄 알고 마음에는 욕심이 일어났지만, 그 뜻대로 순종하기로 결단하고 상품을 다 갖추지 않고 손님이 오면 이웃 가게로 보내주곤 했습니다. 그러자, 지금까지는 새벽부터 밤중까지 쉴 틈이 없었는데 제법 쉴 수 있는 시간이 생겼습니다. 미후라 아야꼬는 시간이 나자 소설에 응모, 당선됨으로써 구멍 가게에서 번 돈보다 몇 백 배의 돈을 버는 복을 받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 소설이 그 유명한 <빙점>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순종한 결과, 받은 복인 것입니다.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들이여, 신년 새해에는 어떠한 문제, 어떠한 난관이 있을지라도 거기에 매이지 말고 눈을 들어 믿음으로 능력의 하나님을 바라보십시다. 부정적인 말을 버리고 오직 믿음으로 말하는 해가 되십시다. 그리고 오직 믿음으로 담대히 행함으로 2002년도는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복지의 해가 되는 복을 받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흥 망
민 14:4-10 / 장경동 목사
민13:4이하에 12명의 정탐꾼을 보내는 장면이 나옵니다. 같은 것을 보고도 평가가 다른 것은, 사람의 문제입니다. 그럼 나는 어떤 부류의 사람인가? 제가 바라기는 여러분들은 여호수아와 갈렙 같은 사람 되시기를 바랍니다.
자식들이 잘못되는 경우는 부모의 돈, 권력을 막 쓸 때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도 아무렇게나 살아서는 안 됩니다. 오병이어의 기적 때, 예수님은 남은 것을 거두어들이라고 하셨습니다. 아무리 풍족해도 절약은 미덕입니다. 우리나라에서 한해 음식 때문에 버려지는 돈이 8조 4천억이랍니다. 이것으로 북한을 다 먹여 살릴 수 있습니다. 회를 먹고 나서도 매운탕을 꼭 싸가지고 가는 습관은 알뜰한 것입니다. 가정에서 음식 할 때는 꼭 모자라게 하시기 바랍니다. 수준 있는 집은 음식이 모자라고 무식한 집은 음식이 남는다. 약간 모자라는 것은 간식으로 해야 합니다.
정탐꾼을 보내시는 하나님의 의도는 무엇입니까? 믿음의 반응을 요구 하셨던 것입니다. 원종수 권사는 지혜도 주셨지만 자기 나름 대로 최선을 다했습니다. 야곱도 눈 붙일 겨를도 없이 일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축복과 자신의 노력이 필요합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집인데 왜 교회가 안 되는가? 이것은 사람의 문제입니다. 흥하는 사람은 흥할 짓을 망하는 사람은 망할 짓을 합니다.
1. 흥망의 차이는 상상의 차이입니다. 흥하는 사람은 상상을 흥하게 합니다. 망하는 사람은 상상을 망하게 합니다. 정탐꾼은 모두 두령들인데, 자신들을 메뚜기처럼 보았습니다. 전혀 반대되는 상상을 했습니다. 그러나 여호수아와 갈렙은 “그들은 우리 밥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요셉시대의 바로는 “하나님의 신에 감동된” 요셉을 총리로 씁니다. 등용을 잘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대통령과 같이 등산한 사람이 한자리씩 해 먹었답니다. 이러면 안됩니다. 반면에, 링컨은 자신의 정적을 장관을 시켰습니다. 적격자가 앉아야 합니다.
한편, 모세시대의 바로는 “누군가 쳐들어오면 이스라엘이 적군편이 될거라”는 부정적 상상을 했습니다. 세상은 힘으로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의 원리가 맞습니다. 미국은 힘으로 세계를 정복하려 하면 안됩니다. 사랑으로 해야 합니다. 부부간에도 힘으로 아내를 이길수 없습니다. 사랑해 버리면 여자는 흐물흐물 가버립니다. 사랑이 귀중한 것입니다.
긍정적인 상상은 흥하게 하고, 부정적인 상상은 망하게 합니다. 이것은 성품의 문제요,
영적인 문제입니다. 하나님의 생각이 지배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기운이 상상 속에
역사해야 합니다. 저는 부족해도 상상을 긍정적으로 하는 장점이 있습니다. 믿음의 상상을 해야 합니다.
2. 시각의 차이입니다. 흥하는 사람은 흥하는 시각으로 보고, 망하는 사람은 망하는 시각으로 봅니다. 당시의 가나안은 풍요의 땅이었습니다. 그것을 보고 “저렇게 좋으니까 하나님이 주셨구나” 하고 생각이 되어야 합니다. 제가 처음 서울에 갔을 때 “사람이 저렇게 많으니, 뭘 해도 먹고 살겠구나 ” 생각했습니다. 뭐든지 안 되는 순간이 정말 실력이 필요한 때입니다. 장사도 목회도 그렇습니다. 무슨 일을 하더라도 야무지게 해야 합니다. 실력 있는 학생과 실력 없는 학생은 차이는 어려운 문제가 나타나면, 실력 없는 학생은 “안 배운거 나왔어요” 라고 합니다.
물이 반이 있습니다. 이때, “물이 반이나 찼습니다.”라고 보는 시각이 필요합니다. 우리의 시각이 긍정적인 시각으로 바뀌시기를 바랍니다. 또한, 흥하는 것은 흥하게 보이고 망하는 것이 망하게 보여야 합니다.
3. 언어의 차이입니다. 흥하는 사람은 긍정적인 말을 하고, 망하는 사람은 부정적인 말을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말 한대로 해주십니다. 말을 되게 하시기 바랍니다. 말이 중요합니다. 이삭을 바치러가는 아브라함은 “ 하나님이 준비하실 것이다.” 라고 말했고, 하나님은 그대로 실행하셨습니다. 믿음의 언어를 사용해야 합니다. 언행심사는 일치 됩니다. 언어가 바로 되야 나머지가 바로 됩니다. 말이 부정적이면 되는 게 없습니다. 주유소하는 집사님에게 “요즘 기름값 올라서 장사 잘 안되죠?”하면, “걱정 없습니다. 목사님이 기도해주시잖아요.”라고 합니다. 한편, 살찐 사람은 결단하시고 살을 빼는 실력을 보이시기를 바랍니다.
4. 삶의 차이입니다. 흥하는 사람은 흥하는 삶을 살고 망하는 사람은 망하는 삶을 삽니다.
고수는 가 보기 전에 미리 압니다. 하수는 끝까지 가봐야 안다고 합니다. 바둑에서도 그렇습니다. 삶 속에서도 그렇습니다. 가보면 늦습니다. 지금 돌이켜야 합니다. 흥망은 스스로의 문제입니다. 여러분은 흥하는 선택을 해야 합니다. 귀한 휴가철에 은혜 받는 선택을 하시기를 바랍니다.
희망을 말하고 노래하자
민 14:4-10 / 성흥모 목사
오늘은 청년주일입니다. 청년들을 위하여 “도전하는 사람들”이라는 제목의 목회칼럼을 썼습니다. 우리 청년들은 한번 읽어주시기를 바랍니다.
신록이 무르익어가는 5월, 이 아름다운 계절에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이 모든 청년들에게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 시대의 청년들이 살아가야 하는 현실은 한 마디로 고통스럽습니다. 경제적으로 얼마나 힘든 가운데 있는지 모릅니다. 청년실업이란 말이 없어지지 않습니다. 20대 청년들 태반이 백수라는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도 젊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청년들은 우리 시대에 소망을 전해주고 무한한 가능성을 열어주는 사람들입니다. 현실만 탓하고 낙심하고 절망에 빠져 있지 말고 팔을 걷어붙이고 과감하게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스코틀랜드가 낳은 유명한 역사가요 사상가인 토마스 칼라일(Thomas Carlyle 1795-1881)은 3권으로 이루어진 불후의 명작 프랑스혁명(The French Revolution)이란 책을 지은 사람으로 유명합니다. 그의 젊은 시절은 경제적으로, 정신적으로, 가정적으로 어려움의 연속이었고 매우 힘든 시절을 보내야 했습니다. 장로교회를 다니시는 아버지의 권유로 목사가 되려고 하였으나 소명도 없었고 적성도 아니라고 보았습니다. 그는 학교 교원으로 수학을 가르쳐보기도 하였고, 법률을 공부하려고 하였으나 신통치 않았고, 언론사에 취직하여 일하여 보았으나 보람도 긍지도 없었습니다.
그는 고집스럽게 ‘프랑스 혁명’이라는 책을 집필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거의 탈고할 무렵 평소에 절친하게 지내던 존 S. 밀(John Stuart Mill)에게 그 책을 읽어보라고 원고뭉치를 전해주었습니다. 이 원고는 무려 7년에 걸친 각고의 노력 끝에 이룩한 것으로 토마스의 전부였다고 하여도 과언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친구 밀의 책상에 놓여 있던 노랗게 빛바랜 원고는 하녀의 눈에 띄었습니다. 난로에 불을 피우려고 그만 불쏘시개로 태워버리고 말았습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칼라일은 너무나 기막힌 나머지 일 주일 동안 음식을 입에 대지도 않고 실의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토마스는 곧 생각을 바꾸기로 합니다.
“더 좋은 작품을 쓰라”는 하늘의 뜻으로 받아들이고 먼저 밀에게 편지를 써 보내었습니다. 그는 밀에게 화를 내지도 아니하였고, 부드럽고 온화한 문장으로 위로하면서 절대로 지난 일에 대하여 미련을 두지 않겠다고 하였습니다. 과거의 불행했던 시간들에 비추어보면 이번 사건도 그렇게 놀랄 일도 아니라고 하면서 큰 시련을 통하여 성숙한 사람이 되어 일을 마무리한 것입니다. 토마스는 또 다시 자료를 수집하고 정리하면서 온 정성을 다하여 7년에 걸쳐 새롭게 프랑스 혁명사를 집필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오늘날 우리가 읽고 있는 불후의 명작 ‘프랑스 혁명’이 된 것입니다.
토마스는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길을 가다가 돌이 나타나면 약자는 그것을 걸림돌이라고 하고, 강자는 그것을 디딤돌이라고 말한다”라고 하였습니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우리는 하루에도 많은 거침돌을 만나게 됩니다. 그런데 그 돌을 대하는 마음가짐에 따라 결과는 아주 달라집니다.
사랑하는 청년들이여, 우리가 넘어가기 힘든 오늘이라는 큰 돌을 재기와 도약의 발판으로 삼아 거센 물결을 헤치고 도전하기를 바랍니다. 토마스의 말대로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은 천직을 발견한 사람”입니다.
토마스 칼라일의 ‘오늘’이라는 시가 있다.
“어제는 이미 과거 속에 묻혀 있고 / 미래는 아직 오지 않은 날이라네/ 우리가 살고 있는 날은 바로 오늘/ 우리가 사용할 수 있는 날은 오늘/우리가 소유할 수 있는 날은 오늘뿐/ 오늘을 사랑하라/ 오늘에 정성을 쏟아라....”
일생에 혼신을 다할 수 있는 한 가지 일, 그런 일을 발견하면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주님에게 붙잡힌 청년들, 오늘을 최선을 다하며 보람 있게 살아가는 청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오늘은 우리가 어떤 말을 할 것인가? 저는 오늘, 희망을 말하는 사람이 희망을 노래할 수 있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현실만 보고 좌절하지 말고, 전능하신 하나님, 우리와 동행하시겠다고 약속한 하나님만을 바라보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호주에 다녀오신 분들이 많을 것입니다. 오스트레일리아는 지구상에서 가장 작은 대륙이지만, 세계에서 6번째로 큰 나라입니다. 우리 남한의 면적보다 77배나 큰 나라입니다. 그런데 인구는 우리나라보다 절반도 되지 않고 있습니다. 이 나라는 영국 사람들이 들어가 나라를 만들고 원주민들을 죽이고 쫓아내었습니다. 아주 평화롭게 살던 사람들이었는데 영국인들에게 땅을 빼앗기고 많은 사람들이 학살당하고 산으로, 산으로 숨어들어갔습니다. 순박하던 사람들이 도시로 나와 부랑인으로 구걸하면서 살았습니다.
평화의 나라요, 순박하던 사람들이 어찌하여 이 지경이 된 것입니까? 그들이 이렇게 불행한 위치로 전락한 것은 그들이 오랜 세월동안 섬에 갇혀 살다보니 외부와 연락을 끊었고, 그들만이 알아들을 수 있는 최소한의 말만 있었고, 멀리 있는 사람들과 의견을 나누고 서로의 의사를 전달할 수 있는 글자가 없었다고 합니다. 그들 원주민은 자기네 땅을 영국인들에게 그냥 내어줄 수밖에 없었습니다. 세월이 흘러 이제는 원주민 가운데 상원의원도 나오고, 그들이 사는 산악지대를 관광지로 개발하여 조금은 부유하게 살게 되었지만, 오랜 세월 힘들게 살 수밖에 없었습니다.
말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말과 글 즉 언어는 인간이 이 지구촌을 지배할 수 있게 해주신 하나님의 은사였습니다. 사람의 말이란 뜻을 담아낼 수 있는 도구입니다. 우리의 말에 어떤 의지를 담아서 말할 것입니까?
우리 속담에 “가는 말이 고와야 오는 말이 곱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한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나들이를 가게 되었습니다. 한참 걷다가 피곤함을 느낀 할머니가 “영감, 나 좀 업어줄 수 없소?”라고 했습니다. 할아버지는 싫었지만 나중에 들을 잔소리가 겁이나 할머니를 업어주었습니다. 업혀 가던 할머니는 조금 미안해서 “나, 무겁지?”라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할아버지는 “그럼, 무겁지!”하고 퉁명스럽게 쏘아붙였습니다. 할머니가 “왜?”하고 되묻자 할아버지가 대답합니다. “머리는 돌덩이지, 얼굴은 철판이지, 간은 부었으니까 그렇지.” 돌아오는 길에는 할아버지가 다리를 다쳤답니다. “할멈, 다리가 아파. 나 좀 업어주라.” 할머니가 갈 때의 일도 있고 해서 할아버지를 업어주었습니다. 미안한 할아버지가 “나, 무겁지?”하면 자기가 말한 대로 따라할 것 같아서 “나, 가볍지?”하고 물었습니다. 할머니는 “그럼 가볍지!”, “왜”하고 되물었습니다. “머리는 비었지, 입은 싸지, 허파엔 바람만 잔뜩 들었으니까”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가는 말이 고와야 오는 말이 곱습니다. 우리 크리스천의 말에는 격려와 위로가 있고, 긍정적인 생각이 담겨야 합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평소에 어떤 말을 주로 사용하고 있습니까? 아마 제가 사용하는 말 중에 즐겨 사용하는 말은 어떤 말이 있었는지 설교문을 읽어보면서 찾아보았습니다. 희망, 기쁨, 축복, 은혜, 믿음, 성령, 소중하다는 말, 복되다는 말, 그런 말을 주로 사용한 것 같습니다. 이 시간에 여러분은 어떤 말을 주로 사용하고 있는지 한번 생각해보는 시간을 가졌으면 좋겠습니다. 여러분도 아마도 긍정적인 말, 소망적인 언어를 주로 사용하실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우리 교회의 모든 교우들은 대체적으로 긍정적인 말을 많이 사용하시는 것을 보고 있습니다.
여러분, 앞으로 향우 10년을 어떻게 전망하고 있습니까? 여러분과 여러분의 가정이 향후 10년이 희망적이라고 생각합니까? 아니면 절망적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우리의 앞날이 한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어두운 그림자로 덮여 있습니까? 출구가 보이지 않는 절망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물론 우리의 앞날이 불투명하고 뿌연 안개가 걷히지 않는다고 불평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실제로는 그런대로 살만하고, 그렇게 절망적이지 않는데, 우리의 평소 사용하는 말이 우리의 앞을 어둡게 만들고, 스스로 절망에 빠져들게 하는 것은 아닌지 알아보아야 합니다. 사람은 어떤 말을 하느냐 하는 것으로 자기를 그 말에 얽어맨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행복을 주는 말이 있고, 불행을 불러오는 말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사용하는 말이 우리의 마음과 마음을 이어주는 다리 역할을 합니다. 이제는 우리가 사용하는 말부터 구별된 말, 세련된 말, 성숙한 말들, 믿음이 가득 담긴 말을 해야 합니다. 짧지만 그런 한 마디의 말이 우리를 행복하게 해줍니다. “사랑해요”, “고마워요”, “미안해요”, “잘 했어요”, “기도해 줄게요”, “믿어요”, “잘 될 거야”, “네가 참 좋아” 이런 말을 해야 합니다.
시인 이해인의 “나를 키우는 말”이라는 시가 있습니다.
“행복하다고 말하는 동안은/ 나도 정말 행복한 사람이 되어/ 마음에 맑은 샘이 흐르고// 고맙다고 말하는 동안은/ 고마운 마음 새로이 솟아올라/ 내 마음도 더욱 순해지고// 아름답다고 말하는 동안은/ 나도 잠시 아름다운 사람이 되어/ 마음 한 자락 환해지고// 좋은 말이 나를 키우는 걸/ 나는 말하면서 다시 알지”라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벤자민 프랭클린은 “성공의 비결은 험담하지 않고 상대의 장점을 드러내는데 있다.”고 했습니다. 우리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그 사람이 사용하는 말은 그 사람의 삶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가나안 땅으로 올라가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12명의 정탐꾼을 뽑아서 40일간 가나안 땅을 정탐하고 돌아와 보고하였습니다. 12명은 각 지파에서 한 명씩 선발하였으니, 젊고 패기가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장차 이스라엘을 책임질만한 인물들이었습니다. 이런 12명에 선정되었다는 것은 장차 역사에 남을만한 인물이 될 수 있었습니다. 이들 중에는 유다지파에서 갈렙, 에브라임 지파에서는 여호수아라는 사람도 들어 있었습니다. 그 외는 이름은 있으나, 다수의 부정적인 사람으로 기억할 것도 없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역사에서 기억할 수 있는 사람은 긍정적인 사람, 인류평화에 기여한 사람, 사람을 사랑한 사람들만 기억해주는 것입니다.
모세가 말합니다. 그 땅 거민이 강한지, 약한지 많은지, 적은지, 그들이 사는 땅이 좋은지, 나쁜지, 성읍을 이루고 사는지, 산성을 이루고 사는지, 토지가 비옥한지, 메마른지, 나무가 있는지, 없는지를 탐지하고 오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 땅의 실과를 가져오라, 담대해야 한다고 일러주었습니다. 그들은 40일 간 정탐하며 헤브론이란 성읍에 들어가 보았습니다. 그곳에는 아낙자손들이 살고 있는데, 성읍도 크지만, 그곳에 사는 아낙자손은 거대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에스골 골짜기에서 포도송이가 달린 가지를 베어가지고 두 사람이 막대기에 꿰어 메고, 또 석류와 무화과로 따 가지고 왔습니다.
이제 이스라엘이 모여 있었던 바란 광야의 가데스로 돌아와서 보고회를 가졌습니다. 정탐꾼들은 그 땅의 소산을 보이면서 “과연 그 땅에 젖과 꿀이 흐르는데 이것은 그 땅의 과일이니이다 그러나” 이 “그러나”라는 말이 문제입니다. “그러나 그 땅 거주민은 강하고 성읍은 견고하고 심히 클 뿐 아니라 거기서 아낙자손을 보았으며”(민13:28-29)라고 했습니다.
갈렙이 모세 앞에서 백성을 조용하게 하고 말하였습니다. “우리가 곧 올라가서 그 땅을 취하자 능히 이기리라”(민13:30) 이런 보고서를 내는 사람은 희망보고서를 낸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와 함께 올라갔던 많은 사람들 10명의 사람들은 “우리는 능히 올라가서 그 성을 치지 못하리라. 그들은 우리보다 강하니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가나안 땅을 악평하는데, “우리가 두루 다니며 정탐한 땅은 그 거주민을 삼키는 땅이요 거기서 본 모든 백성은 신장이 장대한 자들이며, 거기서 네피림의 후손인 아낙의 거인을 보았나니 우리는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으니, 그들이 보기에도 그와 같았을 것이니라”(민13:32-33) 이들은 절망보고서를 낸 사람들입니다. 아니 조금 전까지만 해도 그 땅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요, 이것은 그 땅의 과일이라고 증명한 사람들인데, 부정적인 말과 행동이 엄청난 악영향을 끼치고 있습니다.
온 회중이 소리를 높여 부르짖으며 백성들이 밤새도록 통곡하였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다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였습니다. “우리가 애굽 땅에서 죽었거나 이 광야에서 죽었으면 좋았을 것을 어찌하여 여호와가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칼에 쓰러지게 하려 하는가, 우리 처자가 사로잡히리니 애굽으로 돌아가는 것이 낫지 아니하랴”(민14:2-3)라고 통곡하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서로가 서로에게 말하며, 우리가 한 지휘관을 세우고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했습니다. 모세와 아론은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서 엎드렸습니다. 이제 모세와 아론은 백성들에게 맞아 죽을 지경이 되었습니다.
정탐꾼 중의 눈의 아들 여호수아와 여분네의 아들 갈렙이 너무나 안타까워서 자기들의 옷을 찢으며 이스라엘 온 회중에서 말하였습니다. “우리가 두루 다니며 정탐한 땅은 심히 아름다운 땅이라. 여호와께서 기뻐하시면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시고 그 땅을 우리에게 주시리라 이는 과연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니라”(민14:7-8)고 했습니다.
“다만 여호와를 거역하지 말라 또 그 땅 백성을 두려워하지 말라 그들은 우리의 먹이라 그들의 보호자는 그들에게서 떠났고 여호와는 우리와 함께 하시느니라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라”(민14:9)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온 회중은 모세와 아론, 여호수아와 갈렙을 돌로 치려고 하였습니다. 그 때 마침 여호와의 영광이 회막에서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모세와 아론, 여호수아와 갈렙이 살아남을 수 있었습니다.
이래서 하나님은 믿음이 없는 불신앙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서 다 죽게 하셨고, 여호수아와 갈렙만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하셨습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원망하는 이 악한 회중에게 내가 어느 때까지 참으랴 이스라엘 자손이 나를 향하여 원망하는 바 그 원망하는 말을 내가 들었노라 그들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내 삶을 두고 맹세하노라 너희 말이 내 귀에 들린 대로 내가 너희에게 행하리니”(민14:27-28)라고 하셨습니다. “너희 시체가 이 광야에 엎드러질 것이라 너희 중에서 이십 세 이상으로서 계수된 자 곧 나를 원망한 자 전부가 여분네의 아들 갈렙과 눈의 아들 여호수아 외에는 내가 맹세하여 너희에게 살게 하리라 한 땅에 결단코 들어가지 못하리라”(민14:29-30)고 약속하셨습니다.
우리는 절망적인 보고서를 낸 사람들처럼 현실만 보고 하나님을 바라보지 않는 사람이 되지 말아야 합니다. 희망보고서를 낸 여호수아와 갈렙처럼 현실은 엄연한 현실이지만 우리에게는 전능하신 하나님이 계신다고 말해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이 계신다”고 말해야 합니다.
지금 이곳까지 오게 하신 하나님, 애굽의 노예에서 해방시키신 하나님이 우리 조상들에게 약속하신 그 가나안으로 인도하여 들이시고 있다는 확신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함께 동행하여 주시지 않았다고 하면 이 자리까지 올 수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나는 지금까지 나의 힘으로 살아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나를 인도해주셨기에 올 수 있었습니다. 내 삶 속에 지금까지 인도해주신 하나님께서 앞으로도 나를 인도해 갈 것입니다. 하나님이 인도하여 주셨고, 하나님이 동행하시고 이끌어주셨기에 오늘 이곳까지 이르게 하셨고, 앞으로도 나와 함께 하여 주시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최선을 다하는 것은 내 힘으로, 내 의지로, 나의 경험으로 최선을 다하여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능력이 많으신 하나님, 우리 아버지 하나님께 부르짖어 간구하는 것까지 포함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도와달라고 부르짖어 기도하는 것이 들어가야 최선을 다하여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애굽의 완악하고 강퍅한 바로를 꺾으신 분입니다. 홍해를 육지와 같이 건너가게 하셨습니다. 반석에서 샘물이 터지게 하셨습니다. 아말렉과의 전쟁에서 승리를 주셨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현실만 바라보고 절망에 빠진 것입니다. 여러분, 기도해야 합니다. 나의 힘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어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사랑하시는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의 은총 속에 살려고 하시면 말부터 고쳐야 합니다. 우리 하나님이 당신의 삶을 두고 맹세하시기를 “너희 말이 내 귀에 들린 대로 내가 너희에게 행하리라”(민14:28)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장래에 대한 비전을 품어야 합니다. 희망을 말하는 사람과 절망을 말하는 사람의 차이는 그가 비전을 가지고 있느냐, 없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비전이라고 하니, 꿈과 이상, 목적의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꿈과 이상, 그리고 목적의식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과 그런 것이 없이 되는대로 살아가는 사람은 차이가 있어도 정말 하늘과 땅의 차이가 생기는 법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오늘 당장 편하면 그만입니다. 그것이 노예근성입니다. 노예는 오늘 배부르고 등이 따뜻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아무런 책임도 없고, 공동체성도 없고, 자유와 평등, 사랑, 인격 그런 말이 통하지 않습니다. 오직 자기만 편하면 그만, 잘 먹고 잘 살자는 것뿐입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나만이 할 수 있는 삶, 하나님이 내게 주신 삶의 목적을 찾아야 합니다. 나의 편의를 찾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환경을 바꾸기도 하고 거슬러 올라가기도 하고 좀 힘들어도 하나님 주신 놀라운 하나님의 목표를 이루어 드리는 삶이 목적이 이끄는 삶입니다.
갈렙이란 분은 보면 여호수아 앞에 나아와 헤브론을 점령하여 유다자손에게 주겠다고 “이 산지를 지금 내게 주소서 당신도 그 날에 들으셨거니와 그 곳에는 아낙자손이 있고, 그 성읍들은 크고 견고할지라도 여호와께서 나와 함께 하시면 내가 여호와께서 말씀하신대로 그들을 쫓아내리이다”(수14:12)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희망을 말하고 노래해야 합니다.
오늘 우리 성도들은 “할 수 있다,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고 하나님이 나에게 주시고, 나를 통하여 이루실 목적을 발견하고 살아가기를 바랍니다.
먼저 자신을 정탐하라
민 14:4 / 이정익 목사
내일이 성년의 날이기 때문에 오늘 성년주일로 지키게 되었습니다. 우리교회에서 성년을 맞이하는 젊은이들이 130여명이 됩니다. 청년 때는 인생 중에서 가장 빛나고 소망이 있는 때입니다. 우선 미래가 창창하고 신선하고 가능성이 충만합니다. 세월호가 침몰했는데 사망자 대부분이 젊은이였습니다. 그래서 모두 안타까워하는 것입니다. 청년 때는 모든 것이 신선합니다. 또 미래가 있습니다. 그래서 시간을 허비하는 청년들도 있습니다. 가끔 보면 새벽녘인데도 길거리에서 술에 취해 방황하는 젊은이들이 있습니다. 시간을 헤프게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헤럴드 쿠쉬너(Harold S. Kushner)라는 분이 인스턴트 커피 비유를 했습니다. 커피 병에 커피가 가득할 때는 사람들이 헤프게 먹습니다. 그런데 커피가 병에 반쯤 남으면 아껴 먹어야겠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러다가 바닥이 보이면 병에 붙어 있는 커피가루까지 싹싹 긁어 먹습니다. 청년 때는 이렇게 시간이 넉넉하니까 헤프게 낭비도 합니다. 그러다 시간이 무의미하게 많이 지난 후에는 후회하게 됩니다. 오늘은 젊은이들이 생각을 많이 하는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본문에서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고 바란광야 가데스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바란광야 가데스는 가나안의 입구입니다. 거기서 모세는 12지파에서 1명씩 지도자를 뽑아 가나안에 들여보내 정탐을 하게 했습니다. 그들이 40일간 정탐하고 돌아와서 보고를 했습니다. 아시는 대로 그날 보고는 정반대의 두 보고가 이루어졌습니다. 먼저 12명중 10명의 정탐꾼은 어두운 면만 보고했습니다. “그 땅 점령은 불가능하다. 삭막한 땅에 너무 강하고 큰 민족이 거주하고 있다.” 그들은 가나안에 들어가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외쳤습니다. 그런데 12명 중 2명은 거기에 반대하여 긍정적인 보고를 했습니다. “무슨 소리냐, 그 땅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고 그 땅 사람들이 키는 크지만 우리는 충분히 이길 수 있다.” 두 보고는 정반대의 내용이 되었습니다. 그때 백성들은 어느 보고에 더 크게 영향을 받았겠습니까? 당연히 부정적인 보고였습니다. 부정적인 것은 파급 효과가 큽니다. 원래 진리보다 비진리가, 밝음 보다 어둠이, 긍정보다 부정이 영향이 큽니다. 그 보고대회는 축제로 진행되었어야 했는데 그날 보고대회는 절망의 보고대회가 되었습니다. 탄식과 분노와 눈물의 보고대회가 되었습니다. 백성들은 탄식했습니다. 그리고 백성들은 되돌릴 수 없는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습니다. 하나는 “차라리 애굽 땅에서 죽었더라면 좋았을 것을...”(14:2)이라는 탄식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우리가 지도자를 새로 뽑아 애굽으로 돌아가자”는 선동이었습니다. 그들은 그 순간 출애굽 때 보았던 기적들을 다 잊었습니다.
그 결과 그날 사건으로 몇가지 운명이 결정되었습니다. 첫째로 가나안 행진이 40년간 늦추어졌습니다. 이스라엘은 아직 가나안에 들어갈 준비가 덜된 민족입니다. 지도자들도 자질이 부족했고 더 훈련되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가나안을 정탐했던 40일의 시간을 하루를 일년으로 쳐서 40년 광야생활이 다시 시작되었습니다. 두번째로 백성들을 절망시킨 부정적인 보고를 한 자들은 영원히 가나안에 못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정탐꾼들의 보고를 받고 손에 돌멩이를 들고 탄식하며 절망했던 자들도 못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약속하신 가나안 땅을 밟지도 못하고 광야에서 일생을 마치게 되었습니다. 셋째로 긍정적으로 보고를 했던 두 사람 여호수아와 갈렙만이 기성세대를 대표해서 가나안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넷째로 모세와 아론은 지도자로서 백성들에게 비전을 심어주지 못했기 때문에 그 책임을 물어 가나안에 못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다섯째로 광야에서 태어난 새 세대 즉 20세 이하의 세대만 광야에서 40년동안 재훈련을 받은 후에 가나안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메시지를 받게 됩니다. 그것은 먼저 너 자신을 정찰해 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먼저 나 자신을 정찰해 보아야 합니다.
긍정의 지혜와 믿음
우리는 내안에 매사를 긍정적으로 보고 생각하고 판단하는 자질이 있는가를 정탐해 보아야 합니다. 특히 젊은이는 생각, 사고, 판단기준이 긍정적인가를 정탐해 보아야 합니다. 내가 긍정적이지 않으면 내 자아가 병든 것입니다. 그러면 지도자가 되거나 큰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공동체에서 큰 역할을 할 수 없습니다. 부정적 사고는 자신을 병들게 만들고 그가 속한 공동체를 병들게 만듭니다. 그래서 내가 먼저 긍정적인 생각과 사고를 가지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그리고 나의 내면을 가꾸고 만들기 위해 힘써야 합니다. 밭을 갈아엎고 그냥 놔두면 잡초가 돋아나게 되듯이 내 안을 내가 가꾸고 조성해야 합니다. 그래야 내가 긍정적인 사고자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럴 때에 내 앞길이 밝아지게 됩니다. 그 때에 내 인생이 따뜻하고 미래가 소망적이고 현재의 삶에 감사가 넘치게 되는 것입니다.
얼마 전 어느 잡지에서 삼성그룹 이건희 회장에 대한 특집을 다루었습니다. 그 내용을 살펴보니 이건희 회장은 일반인들과 생각이 좀 다르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는 이런 말들을 했습니다. “들어온 떡을 먹으려고만 하지 말고 떡이 없을 땐 나가서 떡을 만들어라”, “장사꾼이 되지 말고 경영자가 되라. 그러면 보이는 것이 다를 것이다”, “부자처럼 생각하고 행동하라. 그러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부자가 될 것이다.” 또 이런 말도 했습니다. “집단에서 잘 나가는 사람의 뒷다리를 잡지 말라.” 전체를 끌고 가는 사람은 전체의 20%이고 나머지 80%는 묻어가는 사람들이다“.
젊은이는 생각이 긍정적이고 전향적이어야 합니다. 그리고 따듯하고 희망적이어야 합니다. 이 백성들이 왜 출애굽을 했습니까? 오직 가나안에 가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정탐꾼들이 가서 보니 가나안 사람들이 장대했습니다. 그 큰 사람들을 보자마자 기가 죽었습니다. 그리고 다른 것을 보니 하나같이 두렵게 보였습니다. 그러니까 그들의 입에서 나오는 것이 부정적이고 불가능 한 이야기만 나온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가나안에 들어갈 자격이 없습니다. 사람들에게 희망을 못 줍니다. 오늘 이런 젊은이가 있다면 그가 경쟁이 심한 세상에서 성공할 수 있겠습니까? 먼저 내안을 정탐해 보아야 합니다. 나는 매사를 긍정적으로 보고 판단하는 지혜와 믿음이 있는가를 정탐해 보아야 합니다.
건강한 자아
또 나는 자아가 건강한 가를 살펴 보아야 합니다. 이 정탐꾼들은 돌아와 보고를 했습니다. “상대는 너무 크고 장대합니다. 우리는 그들에 비해 메뚜기 같아 보입니다.” 사람들이 이 지점에서 모두 패배감에 휩싸이게 됩니다. 그래서 미리 포기하게 됩니다. 내가 입으로 그렇게 말하면 실제로 그렇게 됩니다. 내 입에서 나오는 말은 내 가슴에 가지고 있는 생각이 밖으로 그대로 표출되는 것입니다. 내 입에서 희망의 말과 소망의 말이 나온다면 내 자아는 건강하다는 표시입니다. 그러나 절망이 부정이 많이 나온다면 내 자아가 병든 것입니다. 사람들 중에는 자신을 너무 과대평가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것도 병입니다. 그래서 왕자병이 나오고 공주병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반대로 자신을 지나치게 과소평가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래서 언제나 뒷줄에 앉아서 스스로를 왜소하게 생각합니다. 이것도 병입니다. 이것은 자신을 과대평가 하는 것보다 못합니다. 나 자신은 생각보다 훨씬 힘이 있고 자질이나 능력이 있는 존재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스스로 부정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적들은 생각보다 훨씬 약하고 나는 보기보다 훨씬 강할 수가 있습니다. 여기 여호수아와 갈렙 두 사람을 보십시오. 10명이 절망이나 불가능을 외쳤지만 이들은 긍정과 희망과 소망을 외쳤습니다. 그래서 두려워하는 백성들에게 “걱정하지 말라. 그 땅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고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이라고 외쳤습니다. 얼마나 자신감이 있습니까? 그래서 그날 이 두 사람 때문에 백성들이 흘리던 눈물이 그치고 멈춘 가나안 행진이 다시 시작된 것입니다. 이것이 건강한 자아를 가진 사람의 모습입니다. 사람이 건강한 자아를 갖고 살아간다는 것이 이렇게 중요한 것입니다.
자아 이미지 심리학의 선구자 프레스코트 레키(Prescott Lecky) 박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개인의 자아가 그 자신의 인생에 엄청난 영향을 미친다.” 내가 가지고 있는 내 생각, 내 중심, 내 자아가 내 인생을 만들어간다는 것입니다. 네 손가락으로 피아니스트가 된 이희아라는 자매가 있습니다. 이 자매는 두 손을 합쳐 손가락이 모두 네 개뿐입니다. 그런데 열손가락이 있는 사람도 연주하기 힘든 쇼팽의 즉흥환상곡을 네 손가락으로 감미롭게 연주를 했습니다. 사람들이 너무 놀라서 어떤 동기가 있었냐고 물었을 때 그녀는 “그것은 하나님이 내게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라고 대답했습니다. 그 말은 그녀의 자아가 너무 건강하다는 말입니다.
오늘은 자아가 병든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남의 좋은 모습을 보면 찢고 싶고 욕하고 싶어 안달을 합니다. 그래서 인터넷에 수많은 악플들을 쏟아냅니다. 부자와 재벌을 향해서 욕을 퍼붓습니다. 그러면서도 자기 자식은 대기업에 넣으려 기를 씁니다. 부자나 재벌을 무조건 욕을 하게 되면 자신은 절대로 부자가 될 수 없을 것입니다. 병든 자아가 자신이 부자가 될 수 없도록 자기를 자꾸 억압하기 때문입니다. 미국을 그렇게 욕하면서 자기 자식들은 유학을 보내지 못해서 안달을 합니다. 모두 자아가 병들어서 그렇습니다. 우리는 내안에 건강한 자아가 있는가 먼저 정탐해 보아야 합니다. 그래야 내 입에서 건강한 자아의 소리, 고백, 메시지가 터져 나올 수 있습니다.
내안의 애굽
또 우리는 내 안에 여전히 남아 있을 애굽을 정탐해야 합니다. 10명의 정탐꾼은 가나안에 들어가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보고를 했습니다. 그 보고를 듣고 백성들이 절망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애굽에서 죽었더라면 좋았겠다(2절)고 울부짖었고 어떤 이들은 새 지도자를 뽑아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선동했습니다.(4절) 여러분은 이 지점에서 이들의 모습을 한번 깊이 통찰해 보십시오. 이들은 지금 몸은 가나안으로 향하고 있었지만 마음은 여전히 애굽에 머물고 있습니다. 이것은 불행입니다. 그러니까 매사에 불평하고 불만하고 불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기회만 되면 애굽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이들이 과연 가나안에 들어갈 자격이 있습니까? 우리 안에 이 애굽이 남아 있는가 한번 정탐해 보아야 합니다. 내안에 애굽이 남아 있으면 매사 불평하게 되고 불만에 쌓여 살게 됩니다. 그래서 매사 환경 탓을 하고 유산 탓을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남과 비교해 보니 내 모습이 더 초라하기만 한 것입니다. 그래서 불평을 원망을 하는 것입니다.
엊그제 책을 보니까 남녀가 짝을 이루는 프로그램을 소개했습니다. 그런데 그 내용이 재밌었습니다. 남녀가 만났습니다. 여성이 남성에게 제일 먼저 묻는 말이 어디서 사느냐는 것이었습니다. 남성이 강북에 산다고 말하자 상대방 여성 얼굴이 금방 어두워졌다고 합니다. 그런데 강남에 산다는 말을 들은 여성 얼굴에는 화색이 돌았다고 합니다. 강남에 있는 원룸에서 사는 줄도 모르고 말입니다. 어느 택시에 어여쁜 처녀가 탔습니다. 택시기사가 어디서 사느냐고 물었더니 강남에서 산다고 말했습니다. 택시기사는 이렇게 예쁘고 강남에서 살고 부모님이 얼마나 훌륭하시냐, 우리 집에도 아들이 있는데 한번 만나보지 않겠느냐고 말했다고 합니다. 오늘 사회가 이러니까 오늘 젊은이들이 자기를 들여다보면서 더 왜소하고 초라함을 느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유산이 없음을 탄식하고 무능한 부모 탓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이 좋은 환경에서 태어나면 모두 미래가 밝습니까? 환경이 나쁘고 가난하면 사람들의 미래가 모두 나쁜 것입니까?.
이 백성들이 지금 몸은 가나안으로 향하고 있지만 마음은 여전히 애굽에 있습니다. 그러니까 애굽에서 죽었더라면 좋았을 거라고 탄식을 하고 지금이라도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선동을 한 것입니다. 이 백성들은 아직 가나안에 들어갈 자격이 없습니다. 훈련이 더 필요합니다. 우리안에 이 애굽이 아직도 남아있는가 정탐해 보아야 합니다. 이 마음을 가지고는 절대로 가나안에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내안의 하나님
정탐꾼 중 10명은 보고할 때 가나안 정복은 불가능하다고 어둡게 말했습니다. 이것은 지도자의 모습이 아닙니다. 그런데 나머지 두명, 여호수아와 갈렙은 똑같은 현장을 보고서도 희망을 말하고 소망을 말했습니다. 그래서 탄식하던 백성들의 눈에서 눈물을 멈추게 했고 희망을 갖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면 이 두 사람은 왜 그 시간에 희망을 말하고 소망을 말할 수 있었습니까? 그것은 우리는 나 혼자가 아니고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땅은 이미 하나님이 약속으로 주신 땅이고 젖과 꿀이 흐르는 땅임을 알기에 그렇게 말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 믿음이 우리의 삶 가운데서 기적을 일구는 것입니다.
130년 전에 우리나라에 온 선교사들이 이 믿음을 가지고 왔습니다. 아펜젤라는 27세에 언더우드는 26세에 스크랜튼은 29세에 알렌은 27세에 게일은 25세에 왔습니다. 당시 한국은 선교지로서는 3급지였습니다. 당시 1급지는 중국이었고 2급지는 일본이었습니다. 유능한 선교사, 경험많은 선교사들은 모두 중국과 일본으로 갔습니다. 우리나라에 온 선교사들은 밀려서 3급지인 한국에 오게 된 것입니다. 그 20대 선교사들이 그 시대에 우리나라까지 어떻게 왔겠습니까? 오직 한가지, 하나님이 우리와 동행하신다는 믿음만 의지하고 온 것입니다. 그 믿음으로 미지의 나라를 향해 온 것입니다. 이 믿음을 보시고 하나님이 역사하셔서 이 땅에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여러분 안에 이 믿음이 있습니까? 오늘의 젊은이들이여, 여러분 안에 이 믿음이 있는가 먼저 자신부터 정탐해 보기를 바랍니다. 나 자신은 내가 생각하는 것 보다 훨씬 더 강한 사람일 수 있습니다. 더 능력있는 존재일 수 있고 더 멋있는 존재일 수 있습니다. 이 세상은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작을 수 있습니다. 거기다 나에게는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믿음을 가질 수 있다면 나는 누구보다 유능한 사람이 될 수도 있습니다. 문제는 내가 나를 왜소하게 보는 것이 문제입니다. 매사 자신감이 결여되어서 언제나 뒷줄에 서 있는 것이 문제입니다.
여호수아와 갈렙은 긍정의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건강한 자아를 갖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이 자질 때문에 소망을 말하고 희망을 말하고 청중들이 흘리던 눈물을 닦아 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 자질이 우리 신앙인들이 지녀야 할 자질입니다. 고로 이 두 사람은 위기의 때에 무한하게 빛을 발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안에 이 믿음을 가지십시오. 나는 나 혼자가 아니라는 이 믿음을 가지십시오. 그러면 여러분 미래는 환히 열리게 될 것입니다.
기다림, 미래를 향한 그리움
민 14:1-45 / 이병일 목사
제가 신학을 위해서 다시 대학입학을 준비하던 때에 외로운 마음을 달래주던 시가 있습니다. 서정윤의 “홀로서기”라는 시입니다. 이 시는 시집으로 출간되기 전에 이미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졌습니다. 모두 일곱 연으로 되어 있는데, 그 중에서 부분적으로 인용하겠습니다.
1> 기다림은 / 만남을 목적으로 하지 않아도 / 좋다.
가슴이 아프면 / 아픈 채로, / 바람이 불면 / 고개를 높이 쳐들면서, 날리는 / 아득한 미소.
어디엔가 있을 / 나의 한 쪽을 위해 / 헤매이던 숱한 방황의 날들.
태어나면서 이미 / 누군가가 정해졌었다면, / 이제는 그를 / 만나고 싶다.
2> 홀로 선다는 건 / 가슴을 치며 우는 것보다 / 더 어렵지만
자신을 옭아맨 동아줄, / 그 아득한 끝에서 대롱이며
그래도 멀리, / 멀리 하늘을 우러르는 / 이 작은 가슴.
누군가를 열심히 갈구해도 / 아무도 / 나의 가슴을 채워줄 수 없고
결국은 / 홀로 살아간다는 걸 / 한겨울의 눈발처럼 만났을 때 / 나는 / 또다시 쓰러져 있었다.
7> 죽음이 / 인생의 종말이 아니기에 / 이 추한 모습을 보이면서도 / 살아 있다.
나의 얼굴에 대해 / 내가 / 책임질 수 있을 때까지 / 홀로임을 느껴야한다.
그리고 / 어딘가에서 / 홀로 서고 있을, 그 누군가를 위해 / 촛불을 들자.
허전한 가슴을 메울 수는 없지만 / <이것이다> 하며 / 살아가고 싶다.
누구보다도 열심히 사랑을 하자.
이 시를 적어서 가지고 다니면서 외우거나 음미했던 기억이 납니다. 외로움과 그리움 그리고 희망과 기쁨을 함께 느낄 수 있었던 시입니다. 누군가를 기다리면서 살아가는 사람들, 무엇인가를 꿈꾸며 살아가는 사람들이라면 공감할 수 있는 시입니다. 게다가 그 기다림의 끝은 잘 보이지 않고, 꿈은 꿈으로서만 남아 있는 것처럼 느껴질 때에는 더욱 절절한 구절들이 있습니다. “기다림은 만남을 목적으로 하지 않아도 좋다.” 이 구절은 기다림 자체에 의미를 부여하기도 하지만, 기다림의 결과를 너무 성급하게 취하려 하지 말라는 말이기도 합니다.
오늘 본문은 광야에서 이스라엘 온 회중이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는 것과 그에 대한 하느님의 징벌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이스라엘은 출애굽 이후에 광야에서 여러 가지 은혜를 입었으나 그들은 하느님을 원망하였고, 서로 반목하였으며, 모세에게 반항하기도 했습니다. 출애굽기와 민수기에 따르면 광야에서 이스라엘이 불평했던 사건은 모두 열 번이나 됩니다. 그들의 탈출을 가로막는 홍해를 앞에 놓고 진퇴양난에 빠진 때부터 요단강을 건너가기 전까지 이스라엘은 수시로 하느님을 원망하였습니다.
신명기에 의하면 광야 생활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느님의 자비에 온전히 의존하여 살아가는 가를 “시험하기” 위한 기간이기도 했지만(신명 8:3; 마태 4:4), 백성들도 야훼가 자기들과 함께 한다는 증거를 찾으려고 야훼를 시험한 때이기도 합니다.
이스라엘이 아무리 하느님이 택한 백성이라고 해도 그들 역시 어쩔 수 없는 인간들이었고, 따라서 광야에서의 생활은 불가피하게 불평을 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집트를 떠나는 역사적인 결단을 내렸을 때에 그들은 이미 노예생활을 버리고 자유로운 생활을 선택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불평에서 드러나는 것처럼 이집트에서의 노예생활은 어느 정도의 풍요와 안전(?)이었지만, 광야에서의 자유는 굶주림과 목마름이 가져다주는 고달픔이었습니다.
결단은 순간적이지만 그 결과는 지속적인 것이기에 이스라엘은 원하지 않았던 광야의 괴로움을 견디지 못해 불평하게 된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야훼 하느님은 그의 진노를 발동합니다. 모세가 강하게 항변한 것처럼 때때로 구약에서 하느님의 징벌은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있고, 좀 지나치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마르시온은 구약의 하느님은 공의와 진노의 하느님이고 신약의 하느님은 사랑의 하느님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런데 잘 살펴봅시다. 광야에서 이스라엘의 불평에 대한 하느님의 진노가 임할 때에는 공통적인 것이 있습니다. “차라리 이집트로 돌아가는 것이 좋겠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 말은 야훼 하느님의 구원, 해방의 사건을 원천적으로 무효화하는 말입니다. 야훼 하느님과 이스라엘이 맺었던 관계의 근본을 뒤흔드는 행위입니다.
특히 과거에 대한 그리움이나 향수가 아니라, 과거의 암울했던 노예생활, 즉 야훼 하느님의 구원을 간절히 바라면서 울부짖었던 삶으로 되돌아가기를 간절히 바란다는 것은 그들의 부르짖음을 듣고 찾아와서 그들을 해방시킨(Exodus) 야훼 하느님과의 약속과 신뢰를 깨뜨리는 것입니다.
과거로 돌아가려는 사람들의 모습은 요즘 대선정국에서 나타나는 국민들의 감정과 비슷하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과거의 개발독재, 군사독재, 문민독재의 시절로 돌아가도 좋다. 조금 더 편안하게 넉넉하게 살 수만 있다면......’ 얼마나 더 넉넉하고 편하게 살고 싶어서 그럽니까. 이러한 막연한 그리움에 현혹된 나라의 꼴이 어떻게 될지 모르겠습니다.
이스라엘은 이집트를 탈출하여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기까지 40년 동안에 광야에서 살았습니다. 여기에서 광야의 의미는 두 가지로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광야가 생명의 위협을 느끼게 하는 ‘고통의 장소’이면서 하느님의 존재를 의심하게 했던 ‘불평의 장소’라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사람이 살 수 없는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40년 동안 살았다는 것은 광야가 하느님의 놀라운 ‘섭리와 보살핌을 느끼는 장소’라는 것입니다. 광야는 버려진 땅입니다. 삶을 지탱할 기본 조건들이 결여되어 아무도 살 수 없는 곳! 그곳에서 이스라엘이 살 수 있었던 것은 광야가 ‘고통의 자리’뿐만 아니라 ‘보살핌의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의 삶도 광야에 비유됩니다. 여전히 고통과 불평도 존재하고, 또한 하느님의 섭리와 보살핌도 존재합니다. 그것을 느끼면서 찾는 사람에 따라서 자기 자신과 하느님을 원망하기도 하고, 하느님의 은혜를 체험하기도 합니다.
본문 뒷부분에서 야훼 하느님은 이스라엘의 발걸음을 다시 광야로 돌리라고 합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자기들만의 힘으로 아말렉과 가나안 사람들과 싸우러 갑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참담한 패배였습니다. 때가 무르익지 않았는데, 결과를 억지로 취하려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히브리)이 광야생활에서 하느님을 원망하고 모세에게 불평했던 중요한 이유는 그들이 출애굽의 목적을 너무나 빨리, 성급하게 취하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광야 40년 동안에 충분히 단련하고 거듭나야 함에도 불구하고 준비도 하지 않고 결과만을 취하려 했기 때문입니다. 광야에서 느낄 수 있는 자유를 다시 스스로 종이 되어 또다시 울부짖는 삶으로 돌아가려는 퇴행을 위해 낭비했기 때문입니다.
이번 대통령 선거를 보면서 무서운 것 세 가지를 생각했습니다. 하나는 세뇌교육의 효과와 지속성입니다. 50년이 넘게 분단-안보 이데올로기로 세뇌당한 사람들과 그들의 무모함과 과격함에 진저리를 치게 됩니다. 둘은 언론매체의 힘입니다. 여론조작의 방법으로 사람들이 검은 것을 희게 볼 수 있도록 만드는 꾸준함과 집요함에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습니다.
셋은 가치의 상실입니다. 사회적인 사상적 흐름이 끊어졌습니다. 의식 있는 사람들이 지향하고 있는 가치들(생명 평화 민주 통일 평등 자유 등)이 자취를 감추고 그 대신에 맘몬(자본, 돈)이 들어선 것입니다. 이제 더 이상 시대정신은 남아 있지 않게 되었습니다. 돈 때문에 어렵게 쟁취한 자유와 통일을 향한 발걸음을 돌리려 하고 있습니다. 대선 후보들의 지지율이 궁극적인 가치보다는 자본에 휘둘리는 경제성장 공약에 달려있는 것에서 가치상실의 시대적 현상을 볼 수 있습니다. 또한 ‘불의에는 참을 수 있지만, 불이익은 도저히 참을 수 없다’는 말에서도 읽을 수 있습니다.
우리의 눈으로 보기에는 절망과 시련의 상황이 확실한 데도 불구하고, 희망을 갖게 하고 하느님의 섭리를 믿게 하는 것은 가나안 땅을 정탐했던 열두 명 중에서 여호수아와 갈렙의 말입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면...... 우리를 인도하실 것입니다. ...... 그들은 우리의 밥입니다.”(8절)
이스라엘이 기억하는 광야는 고통과 불평의 장소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하느님께서 그들을 각별히 돌보아주신 장소였습니다. 이스라엘은 그들이 걸어온 발자취를 돌아보았을 때 그들의 하느님 야훼가 구름과 불로 인도해주셨다는 사실과 만나와 메추라기로 먹여주셨다는 것을 고백하게 되었습니다(신명 8:15-16). 광야에서 하느님이 이스라엘을 위해 행하신 기적은 하느님이 자기 백성 이스라엘을 사랑하심으로써 자기 자신을 기적으로 나타내시고, 그 기적을 통하여 이스라엘을 구원했다는 증거입니다(신명 2:7).
하느님의 구원과 보살핌의 근거는 사랑입니다. 그 사랑은 하느님이 이스라엘을 죽음의 자리에서도 구원하신다는 확신입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면......” 이 말은 조건적인 가정이 아니라, 이미 광야에서 40년을 지내면서 온갖 어려움을 극복한 이스라엘에게는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라는 확신입니다.
광야는 죽음의 자리였으나 이스라엘은 그곳에서 생명을 유지했고, 광야는 고달픔 병듦 배고픔 목마름 질병의 자리였으나 이스라엘은 그 모든 것을 견뎌낼 수 있었습니다. 모든 것이 부족한 상황에서도 야훼 하느님이 함께 계시기 때문에, 반복되는 불평과 불신에도 불구하고 야훼 하느님의 사랑으로 이스라엘은 광야를 통과할 수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의 광야 체험은 그들 매일매일 생활을 통해 하느님의 신실성에 부딪쳐 온 것입니다. 그들은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기 위해서 광야를 거쳐야 했으며, 광야를 통해서 야훼만을 왕으로 모시는 새로운 공동체를 만들 수 있는 근거를 마련했던 것입니다.
우리의 개인적인 삶이든, 교회 공동체적인 경험이든 하느님을 저버리고 불평할만한 일들이 때때로 드러납니다. 황량한 언덕을 넘으면 푸른 초장이 우리 앞에 펼쳐질 것을 기대했으나, 멀리 지평선까지 몇 번이고 눈을 껌벅이면서 살펴보아도 더 넓은 황무지만 보일 때, 우리는 절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그 절망의 힘겨운 순간, 그 고통의 순간을 극복할 때에 비로소 하느님의 사랑과 함께 하심을 느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지나온 삶을 돌아보면서 하느님의 사랑과 섭리를 깨닫는 것은 우리의 믿음을 자라게 하는 큰 힘이 됩니다.
우리는 해마다 대림절을 지키고 있습니다. 대림절에 우리가 기다리는 것은 이천년 전에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심을 기다리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셨고 우리와 함께 계시는데, 무엇을 더 기다립니까? 기다림은 과거에 일어났던 사건을 회상하는 것이 아니라 미래를 향한 것입니다. 해마다 반복되는 절기에서 중요한 것은 오늘이고 내일입니다. 절기를 지키는 우리에게 중요한 의미는 현재이고 미래입니다. 이미 오신 예수님의 오심을 반복해서 기다리는 것은 그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고 예수님의 꿈을 우리의 꿈으로 삼아 함께 이루는 일입니다.
이스라엘이 광야를 거쳐서 가나안 땅에 들어갔듯이 우리의 기다림은 미래를 향한 그리움입니다. 그리움의 과정이 광야에서의 배고픔과 목마름을 동반할지라도 종의 멍에를 또다시 지지 않으려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죽은 자들을 위한 무덤을 만들고 말하지 못하는 거대한 우상을 만드는 일에서 해방된 사람들이 살아 있는 하느님을 생생하게 느끼고 체험하는 일이 광야에서 할 일입니다.
지금 바로 우리 앞에 광야가 펼쳐져 있고, 우리는 이미 그 광야를 걸으며 미래를 향해 가고 있습니다. 그 길에서 너무 힘들다고 과거로 돌아가려 하지도 말고, 성급한 나머지 미래를 강제로 앞당기려 하지도 말고, 너무 조급해 하면서 기다림을 포기하지도 맙시다. 우리가 뿌린 기다림의 씨앗을 그리움으로 자라게 한다면, 그 열매는 나나 혹은 나의 먼 후손들에게 돌아갈 것입니다.
무엇을 보십니까?
민 14:1-10 / 이성우 목사
벌써 금년도 상반기 6개월의 시간을 보내고 어느덧 하반기가 시작되는 6월의 첫 번째 주일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오늘은 특별히 교회력 상으로 평신도 주일로 지키는 주일입니다. 평신도 주일을 따로 구별해서 지키는 것은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그 중에서도 특별히 주님의 몸된 교회가 이 땅 위에서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 구원의 역사를 감당해 감에 있어서 목회자와 더불어 목회의 중요한 동역자로 부름 받은 평신도들의 위치와 그 역할의 중요성을 다시 한 번 깨닫고 결단하여 헌신하도록 하기 위한 것입니다.
시대의 변화와 사회 구조의 발달 과정에 따라서 직업도 세분화되고 다양화되어 가는 것처럼, 어느 공동체이든지 그 공동체의 외적인 성장과 부흥은 그 공동체를 지탱해 나가고 그 공동체가 추구하는 바를 보다 더 잘 감당해 나가기 위해서는 조직의 정비와 아울러서 역할의 분담이 필요하게 마련입니다. 물론 더 중요한 것은 어떤 공동체가 건강하게 유지되고 그 공동체에게 주어진 몫을 제대로 감당해 내기 위해서는 상부 구조로부터 하부 구조에 이르기까지 원활한 흐름을 통해서 유기적인 작용이 이루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몸도 건강을 유지하고 신체 활동이 원활하게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우리 몸의 각 부분 부분까지, 구석구석 혈액 순환이 잘 이루어지고 신경 조직이 민감하게 살아있어야 하듯이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고 각 성도들을 지체로 해서 한 몸을 이루고 있는 주님의 몸된 교회 공동체도 건강함을 지켜 나가고 그 역할을 제대로 해내기 위해서는 교회 공동체를 이루고 있는 모든 성도들이 각자의 위치에서 각각의 성도들에게 주어진 자리를 지킬 뿐만 아니라 자신만의 고유한 역할과 사명을 제대로 감당하는 것이 필수적인 요소가 됨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런 의미에서 생각해 볼 때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의 위치와 역할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을 것입니다.
우리 인체의 여러 부분 가운데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는 기관 하나를 꼽는다면 아마도 많은 사람들이 눈을 꼽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눈이라고 하는 기관은 우리 인간 삶에 필요한 각종 정보를 수집하는 일차적인 창구 역할을 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삶에서 행복과 성공, 승리와 기쁨을 판가름 짓게 되는 많은 부분이 눈을 통해서 어떤 정보를 얻고 그 정보를 어떻게 처리하며 활용하느냐에 따라서 좌우되기 때문에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특별히 우리 인간의 삶에서 무엇을 어떻게 보느냐하는 문제는 대단히 중요한 문제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을 통해서 결국은 인생의 가치관이 만들어지고 행동이 만들어지며 그것이 습관이 되고 삶이 만들어지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어떤 사람의 삶을 에워싸고 있는 여러 가지 다양한 환경은 대단히 중요한 역할을 할 수 밖에 없습니다.
여러분들이 이미 잘 알고 있는 것처럼, 1867년에 구 소련은 알래스카 땅을 미국에 720만불을 받고 팔아넘겼습니다. 그들은 그저 눈에 보이는 대로 그 동토의 땅이 무슨 쓸모가 있겠는가라는 생각을 하고는 그렇게 헐값에 팔아 넘겼던 것입니다. 그런데 나중에 보니까 그 알래스카는 눈에 보이지 않던 땅 속에 지하자원이 풍부하고 또한 군사적 가치면에서도 군사 요충지로서의 역할을 하게 된 것을 보고서 소련이 뒤늦은 후회를 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생각해 볼 때, 우리가 살아가면서 무엇을 보는가 하는 문제는 대단히 중요한 문제임에 틀림이 없는줄로 믿습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멀리 바라볼 줄 아는 눈을 가지는 것과 남이 보지 못하는 영역을 볼 수 있는 혜안을 가지는 것은 분명한 축복임에 틀림이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결국 이런 복된 눈을 가진 사람들이 성공적인 인생을 살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무엇을 보는가 하는 문제는 우리의 삶과 운명을 바꾸어 놓게 됨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이 세상 사람들이 무엇을 볼 때는 두 가지 원리가 사용됩니다. 그것은 곧 물질적인 측면만을 보게 된다는 것이며, 또 하나는 나를 중심으로 보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원리로 보게 되면 그 결국은 결코 성공적일 수 없다는데에 문제가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에서는 무엇을 볼 때 중요한 한 가지 원리를 말씀하고 있는데, 그것은 ‘믿음으로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아침에는 본문 말씀인 민수기 14장의 말씀을 중심으로 해서 이 보는 문제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함께 은혜를 나누려고 합니다.
우리가 성경을 통해서 깨달아야 할 분명한 사실 한 가지는 ‘믿음’이 무엇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이것 하나만 분명하게 깨닫게 되어도 우리의 신앙생활과 우리의 삶이 분명하게 달라지게 될 것입니다. 성경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는 내용에 따르면, ‘믿음’이라고 하는 것은 세상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하나님의 존재하심을 ‘믿음의 눈’으로 보게 되는 것이며, 세상 사람들이 깨닫지 못하는 바,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역시 ‘믿음의 눈’을 가지고 보고, 깨닫게 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하나님을 나의 주, 나의 하나님으로 고백하며 인정하는 것, 바로 이것이 믿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의 존재하심을 볼 수 있게 되는 방법과 그 과정은 하나님의 일하심을 통해서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경우를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본래 이스라엘 백성들은 히브리인들로서 하나님을 알지 못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애굽의 바로 왕의 손 아귀에서 노예 생활을 하고 있었던 이 히브리 인들에게 모세라고 한 사람을 보내서 당신 자신을 알리심으로 그들이 하나님의 존재를 알고, 그 하나님을 자신들의 주로 고백하며 섬기게 되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모세를 그들에게 보내시면서 자신의 이름을 묻는 모세에게 출애굽기 3장 14절 말씀에서, ‘나는 스스로 있는 자’라고 소개하시면서, 그들을 애굽 바로의 손 아귀에서 해방시키실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원래 ‘스스로 있는 자’라는 말의 의미는 이런 것입니다. ‘내가 누구인지는 앞으로 밝혀지게 될 것이다.’ 이 말의 더 분명한 뜻은 하나님의 존재하심, 그리고 그 하나님이 누구인지를 알게 되고, 믿게 되는 것은 그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통해서, 그 하나님을 만남으로서 알아가지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니까 결국 하나님의 존재는 관념적으로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행동하시는 그 하나님을 만남으로서만 분명하게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관점에서 성경을 바라볼 때, 성경에 등장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은 본래 가만히 계신 분이 아니라 끊임없이 일하시는 동적인 하나님의 모습을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 ‘스스로 있는 자’라는 이 표현은 70인역의 번역을 따른 표현으로 이것은 희랍적인 사고, 곧 정적이고 관념적인 사고를 반영하고 있는 것으로, 원래적인 히브리적 사고인 역동적인 모습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한 한계를 가진 표현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생각해 볼 때, 하나님께서는 그 히브리인들에게 당신 자신을 드러내 보여주심으로써 그들이 하나님을 알고, 믿게 되기를 위한 한 가지 목적을 가지시고 끊임없이 일하시고 역사하신 것을 우리는 분명하게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구약성경 출애굽기 이후의 말씀들을 한번 읽어보십시오. 하나님은 열 가지 재앙을 통한 놀라운 능력으로 히브리인들을 애굽에서 해방시키셔서 자기 백성으로 삼으시고는 홍해를 마른 땅같이 기적적으로 건너게 하셨으며, 광야에서 만나와 메추라기를 통해서 그들을 먹이셨고, 반석에서 물을 마시우게 하셨을뿐 아니라 모든 대적들을 물리쳐 주셨습니다. 또한 구름기둥, 불기둥으로 그들을 광야에서 지키시고 인도하셨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놀라운 능력으로 일하시는 그 여러 가지 하나님의 일하심을 보고도 그 속에서 자신들과 함께 하시며 끊임없이 일하시고 사랑과 은혜를 베풀어 주시는 하나님의 존재를 보지 못하고, 만나지 못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들이 믿음을 갖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출애굽기 14장에 기록된 홍해 도하 기사의 경우를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의 뒤를 추격해 오는 애굽 군대와 자신들의 길을 가로 막고 있는 홍해 바다만 보았지, 정작 보았어야 할 자신들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보지 못했기 때문에 그들은 결국 하나님을 향해서 원망하고 불평하며 하나님의 종 모세를 향해서 원망하며 공격적인 언사를 서슴치 않는 어리석은 행동을 하게 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 그들은 이미 우리가 알고 있는것처럼 애굽에서 하나님이 행하시는 열 가지 재앙을 보았던 사람들이며, 그 결과로 430년 간의 종살이를 기적같이 청산하고 해방의 기쁨을 맛 보았던 사람들이 아닙니까?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 역사를 통해서 하나님의 존재를 깨닫는 믿음의 눈을 뜨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믿음의 사람, 하나님의 종 모세는 자신을 부르시고 그 놀라운 구원 역사의 현장으로 보내셨던 하나님의 존재를 이미 호렙산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서 만났던 분명한 만남의 사건을 통해서 하나님의 존재하심과 임재하심을 보는 믿음의 눈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자신을 향해서 원망하고 공격적인 행동을 서슴치 않는 그들에게 14장 13절-14절에서 이렇게 외치고 있습니다. “너희는 두려워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날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너희가 오늘 본 애굽 사람을 또 다시는 영원히 보지 못하리라.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
오늘 본문 말씀인 민수기 14장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믿음없는 불신앙의 사람들을 이끌고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가나안 땅을 향해 가던 중, 신 광야 가데스 바네아에 도착한 모세가 가나안 땅을 정탐하기 위해서 12명의 정탐꾼들을 파송하게 되었는데,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 일을 통해서 그들의 믿음과 순종을 시험하시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12명 가운데 10명의 정탐꾼들은 아직까지도 자신들과 함께 하시며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볼 수 있는 믿음의 눈을 뜨지 못하고 있어서 자신들이 처한 환경만을 둘러보고는 돌아와서 믿음없는 불신앙적인 보고를 백성들에게 하게 됨으로 결국은 자신들만이 아니라 백성 전체에게 부정적이고 불신앙적인 생각을 갖게 만들어서 낙심하며 두려움 가운데 떨게 만들고 하나님을 향해서 원망하게 만드는 어처구니 없는 행동을 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믿음의 눈을 가지고 있었던 여호수아와 갈렙 두 사람은 똑같은 상황에서 똑같은 것을 보았으면서도 자신들이 처한 환경만을 본 것이 아니라 자신들과 함께 하시며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보았기 때문에 열 명의 정탐꾼들하고는 전혀 다른 보고를 백성들에게 하고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이 두 부류의 보는 방법과 보고의 태도와 내용은 결국 그들의 운명을 전혀 다르게 바꿔놓게 되었다는 점입니다. 놀라운 사실 한 가지는 약 200만명을 헤아리던 출애굽 세대 가운데 오직 여호수아와 갈렙 두 사람만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서 살게 되는 영광을 누리게 되었고, 나머지는 모두가 광야에서 하나님의 징계의 재앙으로 죽음을 보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평신도 주일을 보내면서 다시 한번 여러분 자신들의 믿음을 반드시 점검해 보시기를 진심으로 부탁합니다. 여러분들은 어떤 믿음의 눈을 가지셨으며, 무엇을 보는 눈을 가지고 계십니까?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그 분의 능력의 역사하심을 보는 믿음의 눈을 가진 평신도들은 그 하나님 앞에서 다만 잠잠히 있으면서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기다릴 뿐이지 어떤 부정적이거나 불신앙적인 말을 내서 자신과 다른 사람들까지 함께 공멸하게 만드는 사람이 결코 아닌 것을 오늘 분명하게 깨닫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그 분의 능력의 역사하심을 보는 믿음의 눈을 가진 평신도들은 하나님을 보고, 하나님이 세우신 지도자가 믿음으로 보는 것을 함께 바라보면서 그것을 공유하고 함께 만들어감으로 공동체 구성원들에게 기쁨과 행복을 주며, 하나님의 영광을 함께 누리게 되는 사람들임을 믿으시고 여호수아와 갈렙처럼, 살아계신 하나님,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볼 수 있는 믿음의 눈을 갖게 되시는 여러분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청년, 그 신앙적인 안목을 크게 넓게
민수기 14:1-10, 마가복음 9:21-24 / 이현우 목사
청년주일, 올해로 55회째를 맞이했다. 1953년 제38회 호헌총회에서 제정한 일이다. 한국기독교장로회가 새 역사를 시작한 교단으로서 다음 세대 육성에 각별한 관심과 의지, 결단이 적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청년이 미래요, 청년이 역사의 기둥인 것을 일찍이 주창했던 거다. 이토록 여러 사정으로 청년주일은 의미가 큰 일이라 하겠다.
「청춘! 이는 듣기만 하여도 가슴이 설레는 말이다. 청춘! 너의 두 손을 가슴에 대고 물방아 같은 심장의 고동을 들어보라. 청춘의 피는 끓는다. 끓는 피에 뛰노는 심장은 거선의 기관같이 힘 있다. 이것이다. 인류의 역사를 꾸며 내려온 동력은 꼭 이것이다. 이성은 투명하되 얼음과 같으며, 지혜는 날카로우나 갑 속에 든 칼이다. 청춘의 끓는 피가 아니더라면 인간이 얼마나 쓸쓸하랴?」 일제강점기에 이 땅의 지성으로서 한분이었던 민태원 선생의‘청춘예찬’의 몇 줄의 글이다. 청소년 시절 교과서에 실린 훌륭한 글이었다. 젊은이들, 청년에 대한 예찬인데 이는 일반적인 청춘예찬이다. 그렇다면 게다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살아가는 청춘이라면 얼마나 더욱 아름다운가! 하는 생각이 든다. 신앙으로 살고자 몸부림하는 교회의 젊은이라면 얼마나 존귀하겠는가! 하는 생각이 든다.
성경에는 청년에 대한 특별한 언급은 그리 많지를 않다. 다만 다음 세대를 위한 하나님의 말씀이 적잖게 있다. 신앙의 대물림이 중요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법도로 일러주었다. 그런가하면 역사의 미래를 전망하면서, 다음 세대 양육과 교육을 위대한 사명으로 여겼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여 온 것이다. 구약 율법서에서도 또한 신약 복음서에서도 다음 세대를 위한 말씀들이 분명하게 기록되어 있다. 자녀를 위한 부모의 교육, 나라와 민족을 위한 다음 세대 신앙교육이 이어지고 있다.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사람들로서 다음 세대의 기개가 담긴 인물소개도 의미 있게 기록되어 있다. 출애굽역사에서 여호수아와 갈렙의 일화, 왕조시대에서 청년의 군주로 신앙을 개혁한 젊은 남왕국 유다 왕들의 역사기록, 바벨론 포로기에서 다니엘을 비롯한 신앙의 젊은이들의 일화, 신약 교회시대에서 다음 세대의 교회 지도자에 대한 언급 또한 그런 내용들이다.
이 가운데 출애굽역사에서 돋보인 여호수아와 갈렙을 주목해보려 한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말씀의 내용이다. 출애굽 후, 이스라엘은 얼마를 가지 않아 가데스바네아 광야에 이르게 된다. 여기에서는 가나안 땅이 그리 멀지 않았다. 곧 진입할 때가 성큼 다가온 것이었다. 이제 막 들어갈 참이었다. 그러기 전에 가나안의 사정을 살펴봐야 했다. 이에 따라 가나안 땅을 정탐하게 된다. 이스라엘 각 지파의 대표자 한사람씩 세워 12인의 정탐꾼을 파견한다. 정탐꾼 열둘이 돌아왔다. 그들은 그곳 가나안의 사정을 보고한다. 그런데 그들의 보고 내용이 달랐다. 열 명의 사람들과 두 명의 보고가 달랐다. 열 명의 정탐꾼들은 가나안은 좋은 곳이지만 그곳에 살아가고 있는 원주민이 버티고 있어 결코 들어가지 못할 거라 보고한다. 그러나 두 사람의 경우는 달랐다. 대단히 반갑고 긍정적인 보고를 내놓는다. 하나님의 사람들인 이스라엘이 얼마든지 쳐들어갈 수 있을 거라 용기백배하는 보고였다.“오직 여호와를 거역하지 말라, 또 그 땅 백성을 두려워하지 말라, 그들은 우리의 밥이라 여호와는 우리와 함께 하시느니라, 그들을 두려워 말라”여기 둘의 정탐꾼은 곧 여호수아와 갈렙이다. 후일 여호수아는 모세의 뒤를 잇는 민족 지도자가 된다. 괜한 일이 아니었다. 그의 신앙과 기개, 안목이 뛰어났기 때문이라 하겠다.
열 사람과 두 사람의 차이는? 하나님의 명을 따른 순종과 하나님의 명을 따르지 않는 거역의 차이다. 엄청난 차이다. 신앙과 불신앙의 차이다. 사물을 대하는 안목의 차이다. 열 사람의 경우는 안목이 작고 비좁다. 두 사람의 경우는 안목이 크고 넓다. 순종과 신앙, 크고 넓은 안목을 가지고 있었다. 신앙적인 안목이요, 하나님의 뜻을 그대로 따르는 순종에서 얻는 안목이었다. 이 사람들의 신앙적인 안목을 봐야 하겠다. 안목이란 사물을 보고 분멸하는 견식이다. 안목은 사람마다 다 다르다. 그 중에서도 신앙적인 안목은 대단히 중요하다. 신앙적으로 보고 신앙적으로 들으며 신앙적으로 생각하고 신앙적으로 행동하는 거다. 신앙적인 안목이다. 그것도 크고 넓은 신앙적인 안목을 가져야 한다. 거기에서 위대한 역사가 펼쳐진다. 정탐꾼 중 다른 열사람은 도대체 부정적인 안목과 불가능한 쪽으로의 안목일 뿐이었다. 그러나 여호수아와 갈렙은 달랐다. 그들의 안목은 크고 넓었다. 교회 젊은이들로서 청년의 시절은 곧 신앙적인 안목을 키우는 시절이다. 또한 신앙은 분명 사람을 변화시킨다. 청년의 시절에 신앙적인 안목을 크고 넓게 하라. 신앙적인 안목을 키워 긍정적인 자세를 견지하여 그리스도의 역사에서 큰 일의 몫을 맡을 수 있어야 한다.
예수님 말씀은 신앙적인 안목을 크고 넓게 하라는 말씀이다.“할 수 있거든 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귀신 들린 어린아이를 제자들에게 데려 왔으나 도무지 쫓아낼 수가 없었다. 아이의 증세는 점점 깊어가고 있고 그 아비의 초조함은 이만 저만이 아니었을 테다. 그러는 동안 그 아비의 심중엔 부정적인 안목만 남아 있었다. 불가능한 쪽으로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예수님을 대하였을 때도 신앙적인 안목이 허물어지고 긍정적인 생각을 내놓을 수가 없었다. 예수님의 말씀은 강력했다.“할 수 있거든 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신앙적인 안목을 한없이 더 크고 넓게 하라는 말씀이다. 거기에서 신앙으로 살아가는 인생의 큰 역사를 감당 할 수 있음을 경고하고 있었다. 예수를 바라보고 그분의 십자가 길을 나선 데서 예수님의 안목을 살펴봐야 하겠다. 예수님은 세상의 놀랍고도 위대한, 큰 역사를 감당할 만큼 신앙적인 안목을 몸소 보여주었지 않은가.
오늘의 청년들은 어려운 형편에서 힘든 고갯길을 넘어간다. 취직, 불투명한 사회의 미래 등 , 이러다보니 이상이나 안목이 작고 좁아들고 있다. 움츠러들고 있다. 그런 사정으로 청년의 기개와 이상이 위축되고 있다. 생각하고 마음먹는 것, 삶에 대한 안목조차도 작고 비좁아지고 있다. 그럼에도 신앙은 젊은이들을 크고 넓게 할 수 있는 중요한 그루터기이다. 교회 청년은 그렇지 않기를 기대하고 믿는다. 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람이기 때문이다. 또한 이들을 양육, 교육하면서 저들이 더 크고 넓은 신앙적인 안목으로 성장, 성숙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기도하며 품어주어야 하겠다. 청년, 그 신앙적인 안목을 크고 넓게 하라. 오늘 우리의 교회가 맡아야 할 원대한 과제이다.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는 성도
민 14:1-10 / 이정우 목사
우리 인간은 누구든지 이 세상에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줄곧 누군가의 은혜를 입고 살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한 평생을 살아가는 동안에 아무에게서도 은혜를 입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태어나자마자 부모님을 비롯한 가까운 가족들로부터 은혜를 입게 되고 자라나면서부터는 그 은혜를 입게 되는 범위가 점점 더 넓어지게 되어갑니다.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주변 사람들로부터 은혜를 입게 되는데, 그 중에서도 스승의 은혜를 가장 크게 입으면서 살아가게 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은혜’ 라는 말을 사용하게 되면 곧잘 부모님의 은혜나 혹은 스승의 은혜를 가장 먼저 떠올리게 되는 것입니다. 안타까운 것은 학교 졸업식에 가보면 이제는 예전처럼 스승의 은혜에 대한 참된 감사와 고마운 마음의 표시를 좀처럼 찾아보기가 힘들다는 것입니다. 지난 금요일에도 우리 교회 사회봉사부 주관으로 실시하는 장학금 지급을 위해서 관내에 있는 석전 중학교 졸업식에 다녀왔는데, 졸업식에 참석한 학생들의 모습에서 진지한 모습이나 은혜에 대한 감사한 모습을 찾아볼 수가 없었습니다.
더 큰 문제는 사람들이 세월이 갈수록 점점 더 스승의 은혜뿐만 아니라 부모님의 은혜에 대해서까지도 감사하게 생각하거나 은혜를 은혜로 알고 소중하게 생각하는 모습이 사라져 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의 삶을 부드럽고 행복하며 살맛나게 만들어주는 은혜를 은혜로 알게 될 때 비로소 거기에서 감사한 마음도, 은혜에 대해 보답하고자 하는 마음도 생겨나게 되는 법이며, 은혜가 감사로 되돌려지게 될 때 더 큰 또 다른 은혜가 솟구쳐 나오게 되는 법인데 은혜를 은혜로 알지 못하게 되니 이 세상이 점점 더 심각하게 황폐해져 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정말로 심각한 문제는 우리의 안타까움이 여기에서 끝나지 않는다는데 우리의 심각성이 있습니다. 사단이 우리 인간의 마음에 불어넣어준 마음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를 은혜로 알아서 소중하게 여기며 감사한 마음을 갖지 못하게 만든 것입니다. 그 결과로 우리 인간은 하나님의 은혜의 소중함도 모른체 은혜를 사모하는 마음도 없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고자 예비해 놓으신 그 놀라운 은혜와 축복을 마음껏 누리지 못하면서 살아가게 됨으로 해서 점점 우리의 영과 육이 생명의 기운을 잃어버리고 황폐해져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참으로 감사하고 다행스러운 것은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우리 인간의 불행한 현실적인 모습을 결코 버려두시거나 포기하지 않으시고 한결 같이 사랑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성경은 온통 우리 인간을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의 마음과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셔서 어쩔 줄 몰라 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에 대한 기록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이런 하나님의 모습은 범죄한 아담과 하와를 먼저 찾아오셔서 그를 불러 주심으로 여전히 사랑하고 계시다고 하는 사실을 보여주신 모습에서부터 시작해서 결국은 범죄하고 자신들의 부끄러운 모습 때문에 어쩔 줄 몰라 하는 그들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친히 가죽 옷을 지어 입히시는 모습을 기록하고 있는 창세기 3장의 말씀뿐만 아니라 성경 전체에 걸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민수기 6장 24절부터 26절까지의 말씀은 우리를 사랑하시며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이렇게 적어 놓고 있습니다.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로 네게 비취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주시기를 원하노라 할지니라.”
그런데 참 재미있는 사실은 이 말씀이 기록된 민수기 전체의 말씀은 오늘 본문 말씀을 포함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향해서 사랑을 고백하며 은혜를 사모하고 그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의 품에서 행복하고 윤택한 삶을 살아가야 할 그들이 그 반대로 원망과 불평이 넘쳐나고 있는 모습을 기록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하신 하나님의 마음은 바로 이런 마음인데, 그들의 마음은 정 반대인 상황 가운데서 그들에게 주신 말씀이 바로 이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왜 범죄하고 불순종하며 불신앙적인 이스라엘 백성들을 포기하지 않으시고 그들을 향해서 이토록 지속적인 사랑과 은혜를 베푸시기를 원하실까라는 궁금증이 자연스럽게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 궁금증에 대한 해답이 성경 곳곳에 기록되어 있는데, 그 가운데서 창세기 1장의 기록에 의하면 하나님께서 그들을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하셨고 복을 주시기를 원하셨기 때문이라는 것이며, 출애굽기 19장 5절 말씀에 의하면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하나님의 ‘거룩한 소유(세굴라)’로 삼으셨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마치 하나님께서 낳으신 자녀와 같은 존재로 이 세상 그 어떤 것들보다 소중하고 보배로워서 왕이 가지고 있는 많은 재산 목록 가운데서 가장 소중한 보물인 재산 목록 1호와 같은 존재가 되게 되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무조건 그들을 향해서 은혜와 복을 주시기를 간절히 원하시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원래 ‘은혜’라고 하는 말은 히브리어로 ‘하난’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데, 이 단어는 본래 ‘구부리다’, ‘아랫사람에게 몸을 굽히다’는 의미였으나 이것이 발전하여 ‘은혜를 베풀다’, ‘긍휼히 여기다’는 의미가 된 것입니다. 창조주가 되시며 살아 계실뿐만 아니라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범죄하고 타락한 인간에게 끊임없이 관심을 가지시는 궁극적인 이유는 바로 그들에게 은혜를 베푸심으로 그들로 하여금 영생의 축복을 누리도록 하시기 위함인 것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중요한 문제는 이렇게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시기를 원하시는데, 누가 과연 그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그 은혜를 마음껏 누리며 살게 될까라는 문제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인 민수기 14장 1절-10절까지의 말씀을 중심으로 한 말씀의 흐름을 살펴보면 결국 어떤 사람은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시는 그 은혜를 누리지 못하게 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반대로 어떤 사람은 그 하나님의 은혜를 마음껏 누리며 살아가게 되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도록 인도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애굽 땅에서의 오랜 종살이 끝에 지쳐 신음하며 절망 가운데 빠져있었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은혜를 베푸셔서 그들을 바로의 손 아귀에서 해방시켜 주셨으며, 그들에게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을 주시겠다는 놀라운 은혜의 약속을 하시고는 그 땅으로 그들을 인도할 수 있도록 모세와 아론을 지도자로 세워서 그들을 이제 바란 광야 가데스 바네아까지 인도해 주셨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모세의 지시를 따라 가나안 땅을 정땀하고 돌아온 12명의 정땀꾼들의 엇갈린 보고와 그에 따른 이스라엘 백성들의 반응, 그리고 거기에 대한 여호수아와 갈렙 두 사람의 용기있는 신앙고백을 바탕으로 한 믿음의 행동이 기록되어 있는 말씀인데,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서 과연 어떤 사람이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며 살아가게 되는지를 깨닫고 그런 믿음의 결단을 하시는 복된 시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선, 오늘 본문 말씀과 연결해서 살펴보아야 할 말씀은 하나님은 모세와 아론을 통해서 애굽 전역에 10가지 재앙을 행하시는 놀라운 은혜와 사랑을 베풀어 주심으로 그들 모두를 구원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참으로 놀랍고 안타까운 사실은 그들은 그런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를 똑같이 체험하였으면서도 오늘 본문에 기록된대로 정땀꾼들의 부정적인 보고를 받고는 여호수아와 갈렙 두 사람만 제외하고는 거의 모든 사람들이 불신앙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이 두 부류의 사람들의 행동이 만들어낸 결과입니다. 민수기 14장 37절 말씀을 보면 성경은 분명하게 기록하기를 여호수아와 갈렙 두 사람만이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은혜를 누리게 되었고, 나머지 모든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주시고자 예비하신 가나안 땅에서의 은혜를 누리지 못하고 광야에서 하나님의 재앙으로 죽었다는 것입니다. 가나안 땅의 은혜와 축복을 누리지 못한 것도 안타까운 일이지만 그들은 계속해서 그 불평과 원망스런 마음에 사로잡혀 있었을 것이니 그 여정이 얼마나 힘들고 불행스러웠겠습니까?
자, 이제 그렇다면 과연 어떤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주시고자 예비하신 놀라운 은혜와 축복을 누리며 복된 삶을 살아가게 되는지 오늘 본문 말씀을 중심으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첫째로, 본문 5절 말씀을 보면 문제를 만났을 때 ‘하나님을 향하여 겸손히 엎드리는 사람’ 이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는 성도가 될 수 있음을 말씀하고 있습니다(5절 봉독). 문제를 만났을 때 하나님을 향하여 겸손히 엎드린다는 것은 하나님의 존재하심과 능력, 그리고 역사하심을 인정하고 고백하는 것이며, 하나님께서 이전에 베푸신 은혜를 기억하고 그 은혜가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깨달아서 그 은혜를 사모하는 신앙적인 자세를 가지고 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성경을 읽어보십시오! 성경은 온통 하나님을 향하여 은혜를 사모하며 엎드린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어떤 조건을 따지지 않으시고 은혜를 베푸셨음을 기록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될 줄로 믿습니다.
둘째로, 본문 7절~8절 말씀을 보면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은혜와 축복을 소중한 것으로 바라볼 줄 아는 믿음의 눈을 가진 사람과 불신앙과 절망에 빠진 다른 사람들을 신앙으로 격려하고 믿음을 북돋아 주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는 성도가 될 수 있음을 말씀하고 있습니다(7절~8절 봉독). 왜냐하면 이런 믿음을 가진 사람들은 하나님의 능력과 신실하심을 믿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와 축복을 다른 사람과 더불어 함께 나누고자 하는 따뜻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기 때문인 것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셋째로, 본문 8절~9절 말씀을 보면 하나님을 거역하지 않음으로 하나님의 기쁨이 되는 사람들과 임마누엘의 믿음을 가지고 은혜와 축복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임을 고백하며 담대하게 전진해 나가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는 성도가 될 수 있음을 말씀하고 있습니다(8절~9절 봉독). 왜냐하면 이런 믿음을 가진 사람들은 하나님과 쉼없이 동행하기 위하여 하나님께 믿음으로 순종함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며 하나님은 항상 우리와 함께 하시며 지키시고 인도하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을 반드시 성취해 가시는 신실하시며 전능하신 하나님이심을 믿는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은 이 세상 누구에게나 차별 없이 은혜와 사랑, 그리고 축복을 베풀어 주시고 싶으셔서 못 견뎌하시는 분이심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더 나아가서 구원받은 감격을 가지고 살아가시는 것으로만 머물지 마시고 광야와 같은 이 세상을 살아가지만 본문에 기록된 믿음의 사람들처럼 문제 앞에서 하나님을 향하여 겸손히 엎드려 은혜를 간구하시며,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소중히 여기고 다른 사람들을 믿음으로 격려하면서 손잡고 함께 나아갈 뿐만 아니라 믿음의 순종을 통한 하나님과의 쉼없는 동행과 임마누엘 신앙을 가지고 담대히 전진해 가심으로 하나님께서 주시고자 예비해 놓으신 은혜와 축복을 마음껏 받아 누리시며 살아가시는 복된 여러분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절망 보고서, 희망 보고서
민 14:1-10 / 김형준 목사
여러분, 설교를 시작하기 전에 잠시 생각하는 시간을 가지셨으면 좋겠어요. 여러분들의 건강, 연령, 재정상태, 가족관계, 사업의 모습 등 이 모든 것들을 종합해 볼 때 내 향후 10년이 희망적인지 아니면 절망적인지 생각 해 봅시다. 여러분의 앞날이 가정의 여러 가지 문제로 혹은 사업의 어려움으로 한 치 앞도 알 수 없는것 같은 어둠과 절망 그 자체 일 수도 있습니다. 한번 생각해보세요. 미래의 삶이 절망적이라고 생각한다면 이 절망을 희망으로 바꿀 능력이 우리에게 있는지 말입니다.
베스트셀러가 된 공병호 씨가 쓴 “10년 후, 한국“이라는 책에 보면 한국 사회가 변화 없이이대로 간다면 10년 후에는 심각한 위기를 겪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그 요인 중에 하나가 한국인이 위기를 극복할만한 정신세계가 없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문제가 생기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극복할 방법이 없다는 것은 절망이 아닐 수 없습니다.
여러분, 오늘날 영국이 부강해진 이유를 빅토리아 여왕시대 정신으로 봅니다. 이 회복의 역사를 일으켰던 마가릿 대처수상은 어릴 때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빅토리아 시대의 정신인 소박하고 정직한 태도, 자조정신과 약자에 대한 보살핌의 정신으로 영국을 다시 살릴 수 있었노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즉, 빅토리아 여왕시대의 정신이 대처수상으로 이어지면서 오늘날 영국을 거듭나게 한 것입니다.
우리나라도 스스로 극복할 수 없는 절망적인 상황에 처했을 때가 있었습니다. 한국 근세사를 살펴보았을 때 오랫동안 사회를 지탱해주었던 유교나 불교 정신으로는 무기력한 현실 속에서 미래를 찾을 수 없었습니다. 더구나 일본의 정책은 한국인의 아름다움을 무너뜨리고, 노예정신과 의존적인 속성 그리고 무기력으로 절망할 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를 통한 ‘하나님 나라’의 신앙과 철학은 그 시대의 정신이었고 소망이었습니다. 그것은 3.1운동과 상해임시정부의 수립, 그리고 이 땅에 새로운 역사를 전개해가는 발전소와 같은 역할을 하게 되었습니다.
우리 개인의 삶, 교회, 가정에도 문제는 없을 수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 문제를 풀어나갈 사고와 태도가 없을 때 반드시 심각한 문제로 다가온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문제를 풀어갈 방법을 아는 사람들에겐 새로운 변화와 도약의 기회가 됩니다. 오늘 여러분들은 자신의 불투명한 미래를 바꿀만한 그런 원리를 알고 있습니까? 또 정말 여러분이 생각한 자신의 미래모습이 바른 기준에 의해서 세워졌는지 오늘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함께 나누시길 바랍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430년 동안 노예로 살던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은혜로 출애굽한 후 2년 동안 광야생활을 하면서 그들이 가야 할 하나님의 약속 장소, 가나안 땅을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각 열두지파에서 총명하고 지도력 있는 12사람을 뽑았습니다. 그리고 가나안땅을 정탐하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이 12명의 정탐꾼들은 보고서를 작성하였습니다. 10명의 정탐군은 가나안 땅은 젖과 꿀이 흐르는 좋은 땅이라고 보고하였고 그 증거로 큰 포도를 가지고 왔습니다. 그러나 그 땅을 소유하고 정복하기에는 불가능 하다는 절망의 보고서를 내놓았습니다. 저들에 비하면 자신들은 메뚜기와 같은 보잘것없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열두명 중 두 사람은 희망보고서를 내었습니다. 그들이 비록 강하고 대단해보이지만 이스라엘백성은 반드시 저 땅을 차지할 수 있고, 저들은 자신들의 밥이라고 보고했습니다.
백성들은 요동했습니다. 온 회중이 희망보고서를 폐기처분 해버리고 싶은 절망가운데 빠지게 되었습니다. 자신들에게는 더 이상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사실이 견딜 수 없는 고통으로 다가오게 되었습니다.
여러분들의 앞날의 보고서는 바른 기준에 의한 것인지 또한 절망보고서를 희망보고서로 바꿀만한 원리가 무엇인지 오늘 이 정탐꾼들의 보고를 통해서 우리가 찾으려고 합니다.
첫째 희망보고서와 절망보고서의 차이는 과거를 생각하는가 못하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그들이 과거를 생각 하느냐 혹은 그렇지 않느냐에 따라서 희망보고서 혹은 절망보고서가 결정됩니다. 절망보고서를 썼던 정탐꾼들은 현실만을 바라보았습니다. 그 현실 속에서 자신들의 능력과 적들의 강함을 비교하며 살핍니다. 그리고 아무리 생각해 봐도 저들을 이기기란불가능하다는 답만 나옵니다. ‘우리는 이길 수 없다. 우리가 저 땅에 들어가면 다 잡혀 죽을 수밖에 없다’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희망보고서를 썼던 사람들은 현실을 무시하거나 인정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과거에 자신들을 걸어올 수 있게 했던 부인할 수 없는 한 가지 사건을 생각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들과 늘 동행하심이었습니다. 그 과거의 인도하심을 생각 했을 때 절망보고서는 희망보고서로 바뀌게 된 것입니다.
‘내가 오늘까지 살아온 것이 우연이며 나의 노력과 성실함으로 이루어졌다’는 생각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늘 자신을 살필 때 ‘내가 무엇을 가지고 있는가? 내가 다른 사람들과 경쟁해서 어떻게 이길 수 있는가? 내 미래가 행복해지기 위해서 행복을 좌우하는 요소인 물질과 명예와 이 모든 것을 얼마만큼 확보할 수 있겠는가? 환경이 얼마나 나를 도와줄 수 있겠는가?’에만 관심이 머물러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생각하는 것은 현실에 굉장히 민감합니다.
현재 돈, 나이, 사업의 정도에 따라 자신의 향후10년을 희망 혹은 절망으로 생각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잘 아시다시피 자신을 지탱하고 희망을 주었던 세상의 모든 것이 불행을 주는 요소로 변할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얼마나 많이 경험하고 살아갑니까? 요즘 유명하게 된 사람들, 과거가 드러나면서 하루아침에 몰락하는 것을 우리가 잘 보지 않습니까? 진정한 그들의 희망의 보고서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거죠.
그러나 이 희망보고서를 작성한 두명의 정탐꾼이 삶을 해석하는 방법은 이렇습니다.‘ 내 힘으로는 불가능한 삶이었다. 그리고 나의 목표와 뜻대로 되었더라면 오늘 나는 이 자리에 있을 수 없는 사람이다. 정말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지 않았더라면 나는 이 자리에 올 수 없는 사람이었다. 내 힘으로 살아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나를 인도해 오셨다. 내 삶 속에 지금까지 인도 하신 하나님께서 앞으로 내 삶을 인도해 갈 것이다. 비록 내 삶의 현실이 불투명해 보이고 그리고 내가 정복할 수 없는 어려움이 있다 할지라도 나의 모든 것을 능하게 하신 그 하나님께서 분명히 약속하신대로 이루어 줄 것이다’라는 믿음을 가지고 고백하게 되는 겁니다.
이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10가지 재앙을 통해서 애굽의 그 강한 팔에서 놓임을 받는 체험을 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마라의 쓴물도 단물로 바꾸는 역사를 보면서 하나님은 능히 환경도 바꿀 수 있음을 체험했습니다. 아말렉과의 전투를 벌일 때도 자기들의 힘으로는 되지 않았지만 주님을 의지하고 주님을 섬길 때 승리하는 것을 체험했습니다. 그러나 저들이 체험한 고백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현실만 바라보고 눈앞에 어려움만 바라보고 절망했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예수 믿고 구원받는 것이 우리의 능력으로 되는 것인지 가만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속성상, 기질상, 자신이 정말 물위를 걸으신 예수를 믿을만한 사람인지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나 같은 사람이 예수님 믿었다는 것 , 나 같은 사람이 오늘 술집 안가고 이 자리에 있다는 자체가 기적이다. 지금 안 졸고 지금 눈 떠서 듣고 있을 수 있다는 것만도 기적이다.’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꽤 많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자신의 의지로는 여기까지 올 수 없었음을 고백하며 지금까지 걸어온 것이 내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였다는 것을 우리가 깨닫게 될 때에 미래를 바라보는 우리의 시각은 달라집니다.
엡 2:8-9절 까지 보면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 이니라”
우리가 구원 받은 것, 하나님의 자녀된 것, 오늘 이 자리에 와서 함께 예배드릴 수 있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절대적인 섭리와 역사함에 있다는 것을 인정할 때에 메뚜기처럼 보이는 것이 우리의 현실일지라도 우리에게 희망이 있습니다. 그 이유는 주님이 우리를 인도해 가시기 때문입니다.
이번에 시카고에 갔을 때 제가 미국에서 처음 목회할 때 제자훈련 했던 75세 되신 권사님을 만났습니다. 작년에 권사님께서 하신 말씀이 “목사님 내년에 오시면 목사님과 식사할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 이젠 한해 한해가 어떻게 될지 모르겠네요.”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가보니 혼수상태가 와서 병원에 계셨습니다. “권사님”하고 불렀더니 권사님께서 눈을 뜨시며 초점을 맞춥니다. 그리고 눈물을 흘립니다. 그분의 따님이 하는 얘기가 “목사님 우리 어머니는 하루에 기도를 3시간 내지 4시간 하세요. 그런데 제일 1순위가 누군지 아세요? 목사님이세요. 동안교회와 목사님이세요. 그런데 그 기도하시는 어머님을 하나님께서 왜 이토록 2~3개월 동안 이런 고통과 아픔을 겪어야 하는지 정말 하나님을 이해하지 못하겠어요” 라고 합니다.
권사님은 10년 전에 뼈 암에 걸렸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 뼈 암이 진행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권사님은 하나님이 인도해주시고 지켜주신다고 고백했었습니다. 지금 제가 따님되시는 집사님께 물었습니다. “집사님 뼈 암 걸려서 진단 받았을 때 얼마 살지 못할지도 모른다고 그랬었는데 하나님께서 지금까지 10년간 생명을 연장 시켜주시고 정상생활 할 수 있었던 것이 하나님 인도하심이었습니까?” “네 그렇게 믿습니다” “어려움 중에서도 하나님 선하게 인도해 주셨다면 이제 지금 어머니가 보여준 혼수상태 그 미래와 아픔과 고통 이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어머니를 인도하고 계시고 앞으로도 어머니를 인도하실 것이고 가장 귀하고 아름다운 것으로 우리의 삶을 인도해 가신다는 것을 믿습니까?” “네 믿습니다.” “그러면 이제는 절망의 노래가 아닙니다. 지금까지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을 선하게 인도해 주셨다면 비록 눈앞에 보이는 현실이 어렵고 힘들더라도 이전에 인도하신 것처럼 오늘을 그 언약을 따라서 최선으로 인도해 가실 것입니다.”
육신의 눈으로 현실을 바라볼 때는 정말 어려운 상황일지라도 앞으로 하나님의 선하신 역사가 있을 것임과 하나님나라에 갔을 때 하나님께서 정말 아름답게 인도하셨다고 고백할 것임을 나누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여러분의 삶 속에서 지금 주어진 현실만 바라보면 절망할 수밖에 없는 분들이 너무나 많을 거예요. 그러나 지금까지 걸어오게 하신 그 하나님, 나를 향한 사랑이 한 번도 변하지 않은 하나님, 세상 끝날 때까지 나와 함께 하시겠다고 약속하신 그 하나님이 오늘 나와 함께 하시고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하신 것처럼 내 삶을 지켜주심을 믿으십시오. 그리고 오늘 내 앞의 불행과 어려움과 고통을 능히 극복할 수 있는 능력을 하나님께서 주신다는 그 믿음이 있다면 여러분의 미래는 희망보고서일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래서 범사에 주님의 인도하심을 인정하시고 주님을 인정하는 삶을 살 때 우리의 절망은 변하여서 희망으로 바뀌게 됨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들째 희망 보고서와 절망 보고서의 차이는 비전이 있는가 없는가에 달려있습니다.
비전의 유무에 따라서 보고서가 달라집니다. 비전을 다른 말로 목적의식이라고 할 때 살아가는 분명한 목적과 이유가 있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과 차이가 있습니다. 비전은 하나님께서 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발생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생각한 철학이 무엇입니까? 노예근성입니다 430년 동안 그들을 지배했던 노예문화가 있었습니다. 노예문화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미래를 생각하지 않고 오늘만 무사히 편하게, 잘 먹고 잘 살자 입니다. 그러다보니 책임성도 없고 공동체성도 없는 것이 노예근성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가나안 땅을 바라보았을 때 자신의 처자들이 잡혀가서 어려움을 겪게 될 것을 생각하며 절망합니다. 그런데 여호수아와 갈렙은 뭐라고 했습니까? “저 땅은 우리가 정복하기 어려운 땅이지만 하나님께서 이미 약속하셨다. 저 땅을 통하여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자녀 삼으셨고 하나님의 왕 같은 제사장인 백성으로 우리를 삼으신다고 약속하셨는데 그 약속을 따라 나가면 우리는 반드시 승리할 수 있다.”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사명과 비전과 꿈이 있는 희망보고서를 쓰게 되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삶을 볼 때 남자로 태어났다면 남자로 삽니다. 초등학교 가라고 했으니 학교 갔습니다. 시험 때가 되면 시험 칩니다. 시험 통과해야하므로 공부합니다. 졸업하면 중학교 갑니다. 또 고등학교 가야 하므로 고등학교 갑니다. 또 대학을 가야하므로 대학도 갑니다. 장가가고 시집갈 때가 되니 갑니다. 애도 낳았습니다. 애를 키워야 합니다. 학교 보낼 때 학교 보냈습니다. 시집보낼 때 시집보냈습니다. 어느덧 자신은 나이가 들었습니다. 그렇게 살다가 끝납니다. 그러나 세계적인 베스트셀러인 릭워렌의 저서 “목적을 이끄는 삶“에 보면 이렇게 나와 았습니다. 이미 자신이 처해있는 환경에 따라서 사는 삶, 그런 삶은 삶이 아니라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 땅에 보내셨을 때는 자신만이 할 수 있는 독특한 목적을 각자에게 주셨습니다. 그걸 찾자는 거예요. 나의 편의를 찾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내게 주신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환경을 바꾸기도 하고 거슬러 올라가기도 하고 좀 힘들어도 하나님 주신 그 놀라운 하나님의 목표를 이루어 드리는 삶이 목적이 이끄는 삶입니다.
지난번 남성세미나를 통해서 계속 강조했던 핵심은 ‘당신은 남자’입니다. 남자로 부르신 목적이 있습니다. 사회, 집안, 환경, 문화에 의해서 만들어진 남자의 모습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남자로 이 땅에 보내주신 목적을 이루는 것입니다. 그것을 깨달았을 때 하나님께서 주신 역할들을 알고 그리고 이 땅을 살아갈 때 하나님 원하시는 목적이 이끄는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의 어려운 환경은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를 체험할 수 있는 기회가 되며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삶의 목적을 이루는 기회가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비전이 없는 사람은 죽은 사람과 마찬가지입니다. 삼손은 하나님의 비전을 가지고 태어났습니다. 그러나 그 목적을 상실했을 때, 그는 40년간 쌓아온 하나님의 귀한 사역이 한 여인에 의해서 하루아침에 다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다윗은 골리앗을 이기고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며 새로운 하나님의 영광을 이루어 나갔지만 그가 비전과 사명을 상실했을 때 정욕의 노예가 되고 말았습니다. 엘리야는 하나님의 역사를 위해서 비전을 가지고 850명과 싸워서 승리하는 정말 놀라운 일을 했지만 그 비전을 잃어버렸을 때, 그는 로뎀 나무에서 차라리 죽여 달라고 하는 가장 연약한 모습으로 돌아섰습니다. 바로 비전과 꿈을 잃어 버렸을 때 그러한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여러분, 우리 믿음의 형제와 자매들의 가정에 어려움이 많이 있습니다. 이혼을 생각 하실 수 도 있고 배우자의 잘못된 것을 보면서 인내 하고 계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에서 내 미래가 암담하다고 생각할 것이 아니라 이 일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사명을 깨달아야 합니다. 자신을 통해서 이 가정을 살려야함을 믿고 다시금 도전한다면 그것이 우리에게 어려운 일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다시 매달리고 나가는 기회며 희망보고서로 바뀔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믿음을 가지고 사는 성도들을 격려해야 할 곳이 교회입니다. 그런데 목사, 교회 중직자들이 바쁘다는 이유로 돌보지 않는다면 그 모든 어려움을 감당하며 믿음을 지켜 나가는데 어려움이 있습니다. 여러분, 교회는 어렵고 힘든 환경 속에서도 하나님의 사명이 있음을 알려야 하며 희망을 갖고 용기를 내라고 격려하며 그 모든 어려움을 혼자 감당하지 않도록 함께 기도하고 도와주는 기능을 하는 곳입니다. 그런 교회가 살아있는 교회가 아니겠어요?
여러분, 오늘 나에게 어려운 문제와 환경이 주어질 때 이렇게 목적을 가지고 한번 전환해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나에게 고난을 주시고 여러 가지로 어렵게 하셨다면 하나님의 뜻대로 풀어나가기를 원하시는 주님의 섭리가 있음을 아십시오. 여러분, 이렇게 되면 절망보고서가 희망보고서로 바뀝니다. 새로운 삶을 살아갈 수 있게 될 것입니다.
85세 된 갈렙이 마지막 순간까지 보여준 믿음을 우리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저 산지를 내게 주소서! 그날의 주께서 약속하신 저 산지를 내게 주소서!”
아낙자손이 거하는, 젊은 사람도 가기를 두려워하는 저 땅을 내게 주소서! 단지 하나님의 약속과 비전을 따라 결정한 갈렙의 그 모습은 공동체에 얼마나 새로운 믿음의 이정표를 세웠는지 모릅니다. 하나님께 큰 영광 돌리는 장소로 변하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절망처럼 보여 지는 그 환경 속에서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삶의 목적이 무엇인가를 다시 돌아보며 검토해야합니다. 절망이 가득한 것 같은 이곳은 주의 영광을 드러내고 주께서 영광 받으실 현장이 된다는 사실을 알 때 우리의 절망보고서는 희망보고서로 바뀔 수 있습니다.
셋째 희망보고서와 절망보고서의 차이는 하나님의 뜻을 아느냐 모르느냐에 달려있습니다.
여러분 이스라엘 백성들의 최대목표는 무엇입니까? 노예생활을 빨리 청산하고 가나안땅에 들어가서 행복하게 사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그 행복이 오랫동안 지속되기를 원합니다. 즉, 행복을 감당할만한 사람으로 훈련이 되는 것이 하나님의 목표입니다. 우리는 빨리 그 땅에 들어가서 즐겁게 사는 것을 꿈꾸지만 하나님은 그 축복이 자신들의 축복이 될 수 있도록 감당할 능력을 길러 가신다는 겁니다.
여러분, 세상의 축복이 그것을 감당할 수 없는 사람에게 주어질 때 그 사람에게는 오히려 저주의 시작이 되기도 합니다. 물질이 없었더라면, 건강이 조금 약했더라면, 직분을 받지 않았더라면 저 사람은 하나님 앞에 겸손하게 살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감당할 능력이 있어야 축복이 되는 겁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행복하기를 원하며 그 행복을 누리기를 원하시기 때문에 우리를 훈련시키십니다.
훈련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training이 있고 또 하나는 discipline이 있습니다. training 은 우리의 육체를 튼튼하게 하는 것이라면 discipline은 우리의 인격과 삶의 자세를 다듬어 가는것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훈련시킨 것은 육체적인 훈련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자녀답게 만들기를 원하십니다. 즉 삶과 인격이 변화되고 하나님의 백성다운 모습이 되기를 원하는것 입니다. 시험가운데 던지기도 합니다. 때로는 유혹 가운데 두시기도 합니다. Test를 통해서 단련시키기도 합니다. 그래서 진정한 하나님백성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Training 이 능력을 향상시킨다면 discipline은 하나님의 백성다운 인격을 만드는데 목적이 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훈련하는 방법은 독수리가 새끼를 훈련하듯이 한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독수리의 새끼가 자라면 자기 새끼를 등에 업고 하늘높이 올라갑니다. 그리고 떨어뜨립니다. 새끼가 이제는 죽는다고 생각하는 순간에 또 받칩니다. 또 올라갑니다. 독수리 새끼가 자기 날개 짓으로 날개를 치고 믿음의 날개로 날 수 있을 때 까지 반복합니다. 그래서 하늘의 왕자답게 살 수 있는 그 모습을 갖출 때까지 독수리 엄마는 훈련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음의 사람으로 하나님의 축복의 사람으로 이루어 질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훈련하시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희망보고서는 그냥 만들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풀 수 없는 문제를 주시는 것이 우리를 하나님의 온전한 백성으로 성숙시키기 위한 하나님의 뜻임을 알 때 작성될 수 있습니다. 나아가 반드시 우리를 승리하게 하시는 하나님을 믿는 믿음에서 나옵니다. 거기에 진정한 희망이 있음을 고백하는 결과로 만들어지는 것이 희망보고서입니다. 절망보고서는 이러한 하나님의 의도와 뜻을 모릅니다. 고난이 오면 절망합니다. 어려운 문제가 오면 피해버립니다. 피상적이고 자기중심적인 관점에서 바라보며, 그것을 통해 이루어 가실 하나님의 뜻을 모를 때에 내어놓게 됩니다
하나님 나라와 축복은 저절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여러 가지 갈등이 있습니다. 오늘 내 삶의 현장에 도전해오는 세상과 처절하게 싸워서 승리해야 하나님의 의와 희락과 화평을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싸움이 없으면 하나님 나라를 맛보지 못하며 신앙생활에 활력이 없습니다. 내가 하나님께 받은 말씀을 가지고 내 삶의 현장에서 일어나는 정욕과 싸웁니다. 피비린내가 날 때까지 싸웁니다. 그리고 어둠의 영들과 싸워서 승리합니다. 이런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복을 주십니다. 복을 감당할 만한 능력 있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우리교회 비전센터를 건축하는 것에 대해서 여러분들이 다양한 의견이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건축시기, 돈 등에 대해 다양한 의견이 있지만 주님은 우리의 희망보고서를 보기를 원하십니다. 이 과정가운데 어려움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해결해야할 수많은 문제가 등장 할 수도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40년이 지나서야 하나님께 온전히 순종하고 하나님의 약속을 바라보며 믿음의 고백을 드릴 때 가나안에 들어가게 하신 것처럼, 우리의 기도와 믿음의 행위를 자랑하지 않고 진정 하나님의 인도하심이었다고 고백할 때 까지 기다리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기도해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시기에 우리가 원하는 것을 주시되 나의 노력과 능력이 아닌 하나님께서 온전히 행하셨음을 고백하는 믿음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의 축복을 누릴 수 있는 능력을 갖게 될 때까지 기다리신다는 것을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
이번에 미국에 갔을 때 제가 목회했던 교회에서 설교할 기회를 가졌습니다. 제가 힘들었던 시기에 잤던 강대상, 울며 하늘을 바라보았던 교회마당, 그리고 가장 절망적으로 탄식했던 본당에서 제가 드릴 수 있었던 고백은 한 마디였습니다. “지난 10년은 주님께서 저에게 선하게 행하신 삶이었습니다. 저에게 10년 뒤 가장 절망의 현장에서 내가 잘해서 부흥하고, 잘살고 있다는 이 자랑이 아닌, 주님의 은혜입니다” 라는 이 한마디를 듣기위해서 주님은 훈련시키시고 다듬어 오신 것을 고백할 수 있었습니다. 마치 이스라엘백성이 40년의 광야의 고난과 고초를 겪고난 후 다시 이 자리에서 절망의 보고서를 희망의 보고서로 고쳐 쓸 때에 주셨던 축복처럼 말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 내가 지금까지 살아온 것이 나로 인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인도하심 이었습니다” 라는 고백이 있으시길 바랍니다. “주님! 지금까지 인도하신 것처럼 내 삶을 또다시 선하게 나를 인도하여 주십시오.”라는 고백이 있으시길 바랍니다. 여러분의 삶을 주님께 맡기십시오. 불투명하고 절망적인 현실가운데에서 여러분과 동행하신 그 주님, 여러 목적을 두시고 일을 행하게 하신 그 주님, 그리고 훈련시키셔서 정말 복 있는 사람으로 살아가기를 원하시는 그 주님을 바라보면서 여러분의 그 절망보고서가 희망보고서로 바꿔지는 귀한 역사가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하시느니라
민 14:1-10 / 조용기 목사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하여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기 직전, 이스
라엘 백성들은 바란 광야 가데스에서 민족적인 위기에 처했습니다. 가데스에서 모세는 12
명의 정탐꾼을 통해 40일 동안 가나안 땅을 탐지하고 돌아오도록 했습니다. 12명의 정탐꾼
들이 가나안 땅을 정탐하고 돌아와서 보고하는데 그 중 열 명은 그 땅에 대해 아주 부정적
으로 얘기했습니다. ‘그 땅은 주민을 삼키는 땅이고 박토여서 농사도 되지 않는 땅이다. 뿐
만 아니라 그 땅의 거민들은 전부 장대한 장사들이어서 우리와 비교해 보면 우리는 메뚜기
와 같다. 그들이 만든 성이 얼마나 크고 강한지 우리는 도저히 그 성을 점령할 수 없다. 그
러므로 우리가 그곳을 쳐들어가면 우리는 모두 죽고 우리의 처자는 포로로 잡힌다’라는 것
이었습니다. 이 말을 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두 낙심하고 말았습니다. 그들은 밤새도
록 땅을 치고 통곡하며 울다가 아침이 되자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며 ‘너희가 애굽에서 우리
를 죽도록 하던지, 광야에서 죽도록 하지 이곳까지 고생하며 이끌고 와서 여기서 칼에 망
하게 하려느냐’며 ‘우리가 장관을 세워서 애굽으로 다시 돌아가자’고 외쳤습니다. 그야말
로 이스라엘에는 대 위기가 조성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때 같이 갔던 열 두명의 정탐꾼 중 여호수아와 갈렙이 일어나 ‘아니라 우리가 탐
지한 땅은 정말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다. 그리고 그 백성은 두려워할 것 없다. 왜냐하면
그들의 보좌는 이미 그들을 떠났고 그들은 우리의 밥이다. 우리가 들어가서 그 땅을 점령
하자’고 외쳤습니다. 이 말을 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일어나 두 사람을 돌로 쳐 죽이려 했
습니다. 그 때 여호와의 영광이 하늘에서 찬란하게 나타났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분노하
며 고함치다가 순식간에 찬란한 여호와의 영광이 구름 속에 나타나자 모두 구름을 쳐다보
았습니다. 그때 구름 속에서 여호와께서 말씀하시어 가나안 땅을 부정적으로 고했던 열 정
탐꾼은 그 자리에서 죽었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열 정탐꾼의 말을 듣고 부
정적인 마음을 가지고 원망하고 탄식하며 다시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했으므로 모두 광야
로 회진하도록 명령하셨습니다.
40일 동안 정탐한 하루를 1년으로 계산하여 40년 동안 광야에서 방황하도록 하셨습니다.
그리나 여호수아와 갈렙은 온전히 하나님을 따랐으므로 살아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들어갈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결국 출애굽했던 이스라엘 백성 제1세대들은 광야에서
40년을 방황하다가 모두 죽고 그 2세대만을 여호수아와 갈렙이 인도하여 젖과 꿀이 흐르
는 가나안 땅으로 들어갔습니다.
여기서 여호수아와 갈렙이 위기에 대해 처리하는 태도는 탁월했습니다. 다른 정탐꾼 열
명과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불안과 공포, 좌절과 절망에 처하여 몸부림치고 부정적인 마
음을 가지고 뒤로 물러나려 했으나 여호수아와 갈렙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그 고
난 앞에서 담대했습니다. 여호수아와 갈렙은 “이 고난은 우리의 밥이라”고 말했습니다. 밥
이란 우리가 매일 먹는 것으로 특별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밥을 먹어야 힘을 얻고 건강
해집니다. 그래야 우리는 살아갈 수 있습니다.
여호수아와 갈렙은 우리에게 다가오는 모든 시련과 환난에 대해 우리가 올바른 태도만 취
한다면 모두 이러한 밥과 같다고 말한 것입니다. 가나안 땅의 박토와 그곳의 강한 백성들,
높은 성벽의 어려운 고난에 대해 여호수아와 갈렙은 어떻게 밥이라고 말할 수 있었을까요?
1. 믿는 자에게 환난은 밥이다
믿는 자에게 환난이 밥이 될 수 있는 것은 눈에 보이는 현상과 실상이 다르다는 것을 분별
할 줄 알기 때문입니다. 현재 눈에 보이는 성은 높고 그 땅에 사는 백성은 장대하여 자신들
과 비교해 보면 그들 스스로는 메뚜기 같아 보입니다. 또한 그 땅은 황무하고 광야같이 보
입니다. 그러나 이처럼 눈에 보이는 현실은 실제와는 다를 수 있습니다.
예컨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 지구는 현재 우리 눈에는 평평하게 보입니다. 높은 산에 올
라가 보아도 우리 시선이 미치는 곳까지 이 지구는 평평하게 보입니다. 그래서 옛날 사람
들은 집을 멀리 떠나지 말라고 했습니다. 배를 타고 바다 멀리 가지 못하도록 했습니다. 이
지구는 평평하므로 땅 끝에, 바다 끝에까지 가면 그 후에는 낭떠러지가 있어서 떨어져 죽
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실상은 이와 다릅니다. 오늘날 우리는 이 지구가 둥
글다는 것을 압니다. 이처럼 눈에 보이는 현실과 실상은 같지 않습니다. 또한 지구는 움직
이지 않는 것 같습니다. 우리가 생활하면서 느낄 정도로 이 지구가 흔들리거나 진동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실상 지구는 맹렬하게 자전하고 있습니다. 무시무시한 속도로 지구는 자
전하며 태양을 중심으로 공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현재 우리 눈으로는 그것을 볼 수 없
습니다. 우리가 현재 느끼는 지구는 편안하고 안전하고 조용한 것 같지만 실상 지구는 자
전하면서 또한 공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사람이 죽으면 없어지는 것으로 압니다. 그러나 실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실상으로는 사람이 죽으면 그 영혼이 육신을 떠나서 천국으로 가든지 지옥으로 갑니다. 그
러므로 우리가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냄새 맡으며 맛보고 손으로 만지고 체험하는 현실
과 실상은 크게 틀리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주 공간은 텅 비어 있는 것 같이 보이고
역사는 그저 흘러가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실상 우주에 하나님께서 계시고 하나님께
서는 알파와 오메가되시며 처음과 나중 되시어 우리의 생사화복을 주장하시며 온 세계와
나라를 다스리고 계십니다. 이것이 우리 눈으로는 보이지 않고 우리의 감각으로 느낄 수
없지만 그것이 실상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세상에 살면서 현실이란 허상을 바라보고
두려워하면 안됩니다. 믿음의 눈으로 실상인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며
나아가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모든 일에서 승리할 수 있습니다.
성경에는 하나님을 믿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실상이십니다. 이 세상의
것들은 모두가 허상입니다. 하나님만이 우주와 만물을 지으시고 인간의 생사화복을 주장
하시며 역사를 주장하시는 실상입니다. 그러므로 눈에는 안 보이지만 실상인 하나님을 믿
으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나는 믿음이 없다’ ‘나는 믿음이 약하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믿음이 없는 사람보고 믿으라고 할 수 없습니다. 이는 마치 팔이 없는 사람에게 팔을 들으
라고 하는 것과 같고, 다리가 없는 사람에게 걸어가라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럴 수 없
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나님을 믿으라고 말씀하실 때에는 우리 모두 하나님을 믿
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믿으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
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지우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룰 줄 믿고 마음에 의심치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구하면 산이 바다로 옮
겨가는 기적이 일어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우리의 환경과 처지가 아무리 힘들더라도 태산 같은 환난을 바라보지 말고 하나님을 바라
보고 하나님의 약속을 믿으면 그 환난은 우리에게 위협으로 다가오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밥이 되는 것입니다. 환난이 우리에게 아무리 큰 위협으로 다가온다 할지라도 우리가 그
환난보다 더 크신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을 믿으면 환난은 오히려 우리 삶 속에 밥이
됩니다. 밥은 우리가 살아가기 위해 없어서는 안될 양식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하나님
을 믿고 의지할 때 환난과 고난은 우리의 양식이요 우리에게 신앙의 힘이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바라보며, 현실에 의해 두려워하거나 떨면 안됩니다. 하나님
을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의지해야 합니다. 우리가 어려운 일을 당했을 때 하나
님을 바라보고 난 후 현실을 보면 그 현실은 그렇게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대낮에 밖에 나
가서 햇빛을 한 번 쳐다보고 난 다음에 주변을 보십시오. 우리의 주변은 캄캄해서 잘 보이
지 않습니다. 태양의 강렬한 빛 때문에 우리 주변이 잘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하나님을 바라보고 난 다음에 우리에게 다가오는 현실을 바라보면 현실이 그렇게
우리에게 위협이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면 현실은 우리에게 밥이 되
는 것입니다.
2. 꿈이 있는 자에게 환난은 밥이다
꿈은 내일에 대한 희망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자에게는 언제나 내일에 대한 희망이 있습
니다. 로마서 8장 31∼39절에서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만일 하나님
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
람을 위하여 내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
시겠느뇨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
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
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기록된 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케 되며 도살할 양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그러
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내가 확신하
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
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
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고 바울 선생은 말씀하셨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생각할 수조차 없는 크신 사랑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를 붙잡고 계십니다. 천지와 만물을 지으시고 우주의 대 주재자 되시는 하나님께서 그
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이처럼 사랑하고 계시므로 하나님을 믿는 우리들은 꿈을 버릴 수 없
습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우리의 손을 잡고 가시는데 우리의 앞날이 아무리 캄캄하고 절벽
같이 되어도 낙심할 수 없는 것입니다.
꿈이 없는 사람에게 환난은 동굴이며 무덤과 같습니다. 동굴은 들어가면 나갈 길이 없습
니다. 그러나 꿈이 있는 사람에게 환난은 동굴이 아니요 터널입니다. 희망으로 나아가는
과정입니다. 터널은 그 안이 아무리 어두워도 저 건너편에 반드시 나가는 출구가 있습니
다. 그러므로 우리가 처해 있는 상황이 아무리 어둡고 캄캄해도 우리는 이것을 지나가는
과정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고 있으므로 마음에 희망을 가질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여러
가지 시험이 오더라도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면 그것은 하나의 터널일 뿐 출구가 없
이 꽉 막힌 동굴이 아닙니다.
고린도전서 10장 13절에 “사람이 감당할 시험밖에는 너희에게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
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시고 시험당할 즈음에 또한 피
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시험과 환
난의 터널을 지날 때 그 환난과 고통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더욱 간절하게 찾도록 도
와줍니다. 편안할 때 우리는 하나님을 찾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부르짖지 않습니다. 그러
나 우리가 환난과 고통의 터널을 지나게 되면 고통과 두려움 가운데 하나님을 찾게 됩니
다. 여러 가지 시험과 환난을 당할 때 우리는 그것이 하나님을 간절히 찾으라는 하나님의
지시인 것을 알아야 합니다.
또한 환난은 자아가 깨어지고 더욱 하나님을 믿고 순종하게 만듭니다. 내 고집대로, 내 생
각대로, 내 계획대로 행하던 삶을 하나님께서는 환난을 통해 깨뜨리시고 잘못된 길에서 하
나님께로 돌아오도록 만드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각자의 인생을 위해 모든 일을 예정
해 놓으셨습니다. 우리가 그 길을 올바로 걸어갈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더욱 축복해 주
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 길을 벗어날 때 우리는 하나님과 씨름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는 그 길에서 우리가 돌아오도록 하시기 위해 채찍을 드시고 시련을 주십니다.
우리의 자녀가 올바른 길에서 열심히 생활하려 하면 우리는 부모로서 더욱 도움을 주고
자 합니다. 그러나 자녀가 그릇된 길로 들어서 생활이 방탕하고 타락하게 되면 자녀와 씨
름을 하게 됩니다. 다투어야 하고 실랑이를 하게 되고 나중에는 채찍으로 때려야 하기도
합니다. 이와 같이 환난은 우리의 자아가 깨어져 하나님을 더욱 믿고 순종하게 하기 위한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환난은 우리의 신앙을 자라게하고 더욱 힘있게 만듭니다. 시련과 환난을 경험한 사람만
이 더욱 강한 힘이 생깁니다. 팔에 힘이 생기도록 하기 위해서는 근육을 단련시키는 훈련
을 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신앙은 환난을 통해 자라고 더욱 힘있게 되는 것입니다. 게
다가 환난은 더욱 큰 소망을 가져오는 씨앗입니다. 환난을 통하면 반드시 저 건너편으로
갈 수 있습니다. 환난은 터널일 뿐입니다. 그 터널을 통과하지 않으면 이쪽 편에 머무를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환난의 터널을 지나면 건너편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환난의 터널
을 통해 우리는 더 넓고 광활하고, 더 희망차고 복된 세계로 건너 갈 수 있습니다.
베드로전서 1장 7절에 “너희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
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
다. 환난은 꿈이라는 상 위에 차려진 밥입니다. 우리가 꿈을 가지고 있으면 꿈이란 상 위에
차려진 환난이라는 밥을 먹어야 합니다. 꿈이 있는 사람에게 환난은 밥이 되어 그것을 먹
음으로 더 큰 힘과 용기를 얻어 꿈을 향해 전진할 수 있습니다. 꿈이 있는 자에게 환난은 아
무것도 아닙니다. 그것은 단지 꿈을 이루기 위한 하나의 과정으로 우리가 즐기고 먹을 수
있는 밥이 되기 때문입니다.
3. 기도하는 자에게 환난은 밥이다
환난이 다가오면 우리는 그것으로 인해 더욱 기도하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더욱 깊
은 교통을 이룰 수 있습니다. 환난을 당하고 기도하지 않는 사람은 없습니다. 평소, 기도하
지 않던 사람이라도 환난과 시련을 당하면 하늘을 쳐다보며 하나님께 도움을 청하게 됩니
다. 사무엘하 22장 7절에 “내가 환난 중에서 여호와께 아뢰며 나의 하나님께 아뢰었더니 저
가 그 전에서 내 소리를 들으심이여 나의 부르짖음이 그 귀에 들렸도다”라고 말씀하고 있
습니다. 이는 환난 때에 내가 너와 같이 하여 너를 건지고 영화롭게 하겠다는 말씀입니다.
환난은 우리를 더욱 성령 충만하게 만들어 줍니다. 평소에 성령 충만하지 않은 사람이라
도 환난을 당하여 철야로 기도하고 금식으로 기도하고, 기도원으로 가서 기도하며 부르짖
기 때문입니다. 환난을 통해서 비로소 성령의 충만함을 체험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또한
환난 때에 회개 기도를 통하여 세속과 귀신들이 모두 쫓겨갑니다. 환난을 당하기 전에는
세속을 따라 죄악 가운데 살며 방탕하게 지냈지만, 이제 환난을 당하여 그러한 자신의 삶
을 회개하고 통회하고 자복하므로 세속이 떠나가고 귀신들이 떠나가 하나님 앞에 정결하
게 되고 거룩한 삶을 살게 되는 일들이 많습니다.
사무엘하 22장 29∼30절에는 “여호와여 주는 나의 등불이시니 여호와께서 나의 흑암을 밝
히시리이다 내가 주를 의뢰하고 적군에 달리며 내 하나님을 의지하고 성벽을 뛰어넘나이
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등불이
되셔서 우리가 어두운 길에서 방황할 때 바른 길로 인도해 주십니다. 그러므로 환난은 우
리를 회개하고 자복케하며 우리가 변화되어 바른 길로 들어서게 합니다. 더욱이 환난으로
인한 기도와 성령의 충만함은 귀신들을 내어 쫓고 세속을 물리쳐 이제 우리가 하나님 편에
서 살도록 만들어 줍니다.
이 때, 기도는 하나님 손을 움직여 환난을 다스리게 합니다. 우리는 환난을 당하면 하나나
님께 부르짖어 기도합니다. 여러 가지 시험과 환난이 다가올 때 하나님께 부르짖으면 하나
님께서 친히 손을 움직이셔서 우리의 운명과 환경을 다스려 주십니다. 예레미야 29장 11∼
13절에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은 내가 아나니 재앙이 아니라 곧 평
안이요 너희 장래에 소망을 주려 하는 생각이라 너희는 내게 부르짖으며 와서 내게 기도하
면 내가 너희를 들을 것이요 너희가 전심으로 나를 찾고 찾으면 나를 만나리라”고 말씀하
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부르짖으면 하나님께서 들으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간절히
찾으면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평안을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결코 절망을 주시지 않으시며 미래의 희망을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기도
는 하나님의 손을 움직여 환난을 다스리게 하는 것입니다. 결국 환난은 우리의 밥입니다.
시편 119편 71∼72절에 “고난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
게 되었나이다 주의 입의 법이 내게는 천천 금은보다 승하니이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
다. 이는 환난을 당할 때 비로소 우리들은 주의 법을 지키게 되고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게 되는 것임을 말해줍니다. 그러므로 환난을 당할 때 기도하는 자
에게는 그 환난이 변하여 밥이 되는 것입니다.
4. 감사 찬양하는 자에게 환난은 밥이다
하나님께 감사하고 찬양하는 자에게도 역시 환난은 밥이 됩니다. 시편 50편 23절에 “감사
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살면서 원망과 불평을 하고 탄
식하기 시작하면 끝이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 가운데에서도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리면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능력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노만 빈센트 필 박사는 어느날 자신을 버림받은 인생으로 여기고 자신이 가진 것은 아무
것도 없다고 생각하며 삶을 포기하려는 사람을 상담하게 되었습니다. 노만 빈센트 필 박사
는 종이와 연필을 꺼내 그에게 주며 묻는 말에 대한 대답을 적도록 지시했습니다. 박사님
은 “첫째, 당신은 아내가 있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가 있다고 대답하자 ‘첫째, 나는 아
내가 있다’라고 쓰도록 하였습니다. 이러한 식으로 하여 자식이 있는지, 친구가 있는지, 식
사 후 소화는 잘 시키는지, 잠은 잘 자는지 등에 대한 답을 적도록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것
을 읽어보라고 하였습니다. 그는 “첫째, 나는 아내가 있다. 둘째, 나는 자식이 있다…” 자신
이 쓴 목록을 다 읽은 후 그는 계면쩍어 하면서 자신이 많은 것을 갖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
다고 말했습니다. 박사는 그에게 이제부터는 이렇게 많은 것을 가진 사람이니 가진 사람
답게 당당하게, 감사하며 살도록 상담해주고 기도하고 돌려보냈습니다. 얼마 후 그는 박사
님의 말씀대로 자신이 가진 것에대해 감사하며 그것을 더욱 소중히 지키기 위해 열심히 노
력한 결과 직장도 구하고 가정도 회복할 수 있었다는 연락을 했습니다.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하나님의 도움을 받을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리
고 성을 엿새 동안 돌고 이레 째, 일곱 바퀴를 돌고 난 다음 모두 감사와 찬양으로 고함을
치자 하나님께서 역사하셔서 여리고 성이 무너졌습니다. 여호사밧 왕은 어떠했습니까? 그
가 적군의 침략을 받았습니다. 모압과 암몬 등 연합군이 유다를 침공해 들어오자 여호사
밧 왕은 너무나 두려워 백성들과 함께 하나님 성전 뜰에서 부르짖어 기도했습니다. 그러
자 하나님께서 선지자를 통해 “두려워하거나 놀라지 말라 전쟁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라 내
일 마주 나가 싸워라 이 전쟁에는 너희가 싸울 것이 없으니 하나님께서 너희를 위해서 싸
워주실 것이다”라고 전하셨습니다. 그 말씀을 듣고 여호사밧 왕은 다음날 전쟁에 나가는
데 성가대를 구성해서 군대 앞에 서도록 했습니다. 성가대원들은 거룩한 옷을 입고 나갔습
니다. 적군이 쳐들어오는 것을 보자 여호사밧 왕은 성가대와 함께 하나님께 찬양을 드렸습
니다. ‘여호와를 찬양하라 그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한 없이 크도다’라고 노래하고 하나님
을 찬양하자 적군들 사이에 그만 혼돈이 일어났습니다. 그들을 서로가 서로를 찌르고 죽이
며 싸워 이스라엘 백성은 적들과 싸우며 전쟁을 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위대한 승리를 가
져온 것입니다.
이러한 성경의 내용들을 통해 우리는 무엇을 알 수 있을까요?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늘 원
망하고 불평하고 탄식하면 스스로 파멸합니다. 성경은 “있는 자에게는 더 주고 없는 자에
게는 있는 것까지 빼앗는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입으로 없다고 시인하면 하나님
께서는 있는 것조차도 빼앗아 버리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있는 것을 생각하고
하나님께 감사하고 찬양하면 하나님께서는 더욱 좋은 것으로 채우십니다.
시편 22편 3절에 “이스라엘 찬송 중에 거하시는 주여 주는 거룩하시니이다”라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임하시면 하나님 앞에서 모든 환난은 사라지고 승리가 다가오는 것
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에는 “범사에 감사하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시편 30편 4∼5절에 “주의 성도들아 여호와를 찬송하며 그 거룩한 이름에 감사할지어다
그 노염은 잠깐이요 그 은총은 평생이로다 저녁에는 울음이 기숙할지라도 아침에는 기쁨
이 오리로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주께서 나의 슬픔을 변하여 춤이 되게 하시고 나의
베옷을 벗시기어 기쁨을 띠 띠우십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감사하고 찬양할 때 하나님께서
는 우리의 삶 속에 나타나셔서 우리에게 다가오는 모든 시험과 환난을 우리의 밥으로 변화
시켜 주십니다.
과거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을 탈출한 이후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을 앞에 두고 그
곳으로 들어간 것과 들어가지 못한 것은 그들의 삶의 태도 때문이었습니다. 환난을 보고
무서워하거나 부정적인 마음으로 원망하고 뒤로 물러가면 그 사람은 반드시 광야에서 죽
게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바라보고 약속을 믿으며 긍정적인 마음으로 감사와 찬양을 하
면 환난은 밥이 됩니다. 꿈과 희망이 있는 자에게 환난은 밥이 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오늘날 우리가 성령님을 믿고 의지하며 기도하면 환난은 우리에게 밥이 되는
것이며, 하나님께 감사하고 찬양하는 자에게도 환난은 변하여 밥이 됩니다.
여호수아와 갈렙은 “저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저들은 우리의 밥이라 들어가서 취하자”고
외쳤습니다. 환난과 고난일지라도 여호수아와 갈렙을 막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오히려 그
환난과 고난을 통해 더욱 강해지고 능력을 얻었으며 결국 위대한 인물이 되어 이스라엘을
가나안 땅으로 이끌고 들어갔습니다.
이 세상에 사는 사람들 가운데 크고 작은 시련이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 시험과 환난을
어떻게 관리하느냐에 따라 인생의 흥망이 달려 있습니다. 여러 가지 시험은 우리에게 반드
시 다가옵니다. 그러나 우리가 시험을 당할 때, 이스라엘 백성처럼 원망하고 불평하며 탄
식하면 우리의 삶은 광야가 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시험을 당할 때 그 환난과 고난을 단지
희망을 향해 통과하는 과정으로, 터널로 생각한다면 그 터널을 통해 더 크고 위대한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환난과 시련을 당할 때 우리는 그것을 밥으로 여기며 열심히 기도하여 소화시켜야 합니
다. 나아가 우리가 환난과 시험 중에 있는 것을 하나님께 감사하고 찬양하며 예배드리면
하나님께서 일어나셔서 환난이 변하여 복이 되게 하십니다.
[기 도]
사랑이 많으시고 거룩하신 아버지 하나님!
우리는 일생을 사는 동안 수많은 시험과 환난을 당합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시험과 환난
은 동굴이 되어 그 속에서 몸부림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는 우리에게 시험과 환난은
일시적으로 지나가는 터널일 뿐, 이 어둠을 지나면 더 넓고 광활한 세계로 나아갈 수 있다
는 것을 압니다. 이것을 알게 해 주심을 감사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여호수아와 갈렙이 환난과 고난은 우리의 밥이라 말한 것처럼, 우리에게
다가오는 크고 작은 시련은 모두 우리 삶에 밥인 것을 알고 거부하지 말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
민수기 14:1-10 / 고흥식 목사
믿음의 길은 수평적인 길이 아니라 수직적인 길입니다. 우리는 사람의 말이나 도움을 통해서 복을 받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하늘 문을 여셔야 복을 받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수직적인 은총을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알고 있는 길보다 더 나은 길을 가지고 계십니다. 1895년 미국 알리바마주의 목화농사에 목화바구니가 전염병처럼 퍼져서 망쳤습니다. 바구니로 인해서 목화는 다 썩어버렸고, 60% 이상의 사람들이 빈민이 되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그 동네 전체가 전염병이 돌게되었습니다. 그들은 교회에 모여서 살 길을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기도 중에 목사님이 땅 밑에 콩을 심으라는 음성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목사님은 땅콩농사를 지으라고 지시했고, 그대로 행했던 사람들은 땅콩농사로 인해 큰 부자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알리바마주 일대가 다 땅콩 농사를 짓게되었고 큰 부자동네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알리바마주는 '목화바구니에게 감사한다'는 기념비를 세웠습니다. 목화바구니로 인해서 하나님께 기도하게 되었고, 하나님께서 주신 땅콩농사로 인해서 큰 부자가 되었습니다. 믿는 사람은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길보다 훨씬 더 좋은 길을 하나님께서는 주십니다.(시32:7) 때로는 우리는 갈 바를 못하고 갈지라도 주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믿고 따라가면 하나님께서 역사 하십니다.
"또 여기는 죽을 자들이 십분의 일을 받으나 저기는 산다고 증거를 얻은 자가 받았느니라 (히7:8)"
하나님의 인도는 확실하며 분명합니다.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의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잠3:5)"
인생을 하나님께 다 맡긴 사람은 행복합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은 사람의 파수꾼보다 더 확실하게 보호받습니다. 또한 중요한 것이 자기 혀를 잘 관리해야 합니다. 언어에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혀를 사탄에게 빼앗긴 사람은 자기위치를 잃게 됩니다.
혀의 능력을 살리는 방법은 찬양과 기도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떨어지지 않도록 하나님께 매달려야 합니다. 입과 혀를 지키는 사람은 그 영혼을 보존할 수 있습니다. 삶의 행복을 잃지 말아야 합니다. 사탄은 휴일이 없습니다. 우리는 언제나 깨어서 끊임없이 기도와 찬양을 해야합니다. 우유부단하거나 소극적이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의 불, 은혜의 불이 여러분 위에 임하기 바랍니다. 모든 문제 위에 성령께서 역사 하시면 실타래가 풀리듯이 풀어집니다. 민13장, 14장은 하나님이 약속한 가나안땅에 12명의 정탐꾼을 보내 40일 동안 보고 온 내용을 보고하게 한 내용입니다. 그들은 같은 시간에 동일한 현장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평가는 판이하게 달랐습니다. 한 쪽에서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차지하자고 했습니다. 그러나 반대쪽에서는 메뚜기 같은 우리가 결코 그 땅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 땅은 거민을 삼키는 땅이라고 했습니다. 똑같은 현장을 보았는데 어떻게 평가가 판이하게 다를 수 있습니까? 그것은 시각의 차이입니다. 사물을 보는 눈, 관점이 다르기 때문이었습니다. 믿음은 시각을 바꾸게 합니다. 믿음은 하나님 측면에서 보게 만듭니다. 우리가 하나님께서 보시는 눈으로 모든 사물을 볼 수 있다면,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
1. 긍정 속에 불 신앙을 제거해야 합니다.
"모세에게 보고하여 가로되 당신이 우리를 보낸 땅에 간즉 과연 젖과 꿀이 그 땅에 흐르고 이것은 그 땅의 실과니이다(민13:27)"
'과연'은 감탄의 말입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좋은 땅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땅 거민은 강하고 성읍은 견고하고 심히 클 뿐 아니라 거기서 아낙 자손을 보았으며(민13:28)"
'과연'과 '그러나'가 교차하고 있습니다. 그 땅이 좋다고 감탄했지만, 그 땅은 거민을 삼키는 땅이며 그들을 대장부이고 우리는 메뚜기 같아서 그 곳을 얻을 수 없다고 부정적인 모습을 보입니다. 그들의 문제는 한 번도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말이 없습니다.(27-33)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신 분은 하나님이 십니다. 그러나 저들은 하나님을 찾는 모습이 없습니다. 약속하신 하나님을 보지 않고, 현실만 보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신앙은 현실을 보지 말고 하나님을 봐야 합니다. 저들은 하나님을 보지 않고 현실만 보았을 때 감당치 못하고 나약해졌습니다. 그러나 여호수아와 갈렙은 하나님을 바라보았기 때문에, 저들이 아무리 강해 보여도 마음에 용기와 담대함이 생겨났습니다.
영적인 신앙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좀 교만해 보일 수 있습니다.
"다윗이 곁에 섰는 사람들에게 말하여 가로되 이 블레셋 사람을 죽여 이스라엘의 치욕을 제하는 사람에게는 어떠한 대우를 하겠느냐 이 할례 없는 블레셋 사람이 누구관대 사시는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하겠느냐(삼상17:26)"
키도 작은 소년 다윗은 하나님의 영으로 충만하니까, 골리앗은 보이지 않고 주님만 보였습니다.
"장형 엘리압이 다윗의 사람들에게 하는 말을 들은지라 그가 다윗에게 노를 발하여 가로되 네가 어찌하여 이리로 내려왔느냐 들에 있는 몇 양을 뉘게 맡겼느냐 나는 네 교만과 네 마음의 완악함을 아노니 네가 전쟁을 구경하러 왔도다(삼상17:28)"
영적이지 못한 엘리압은 다윗을 교만하고 완악하게 봤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다윗을 사랑하셨습니다.
왜 성령 충만한 영적인 신앙이 되어야 할까요? 믿지 않는, 혹은 육적인 신앙을 가진 사람이 볼 때는 교만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그 안에는 당찬 신앙이 있고, 두려움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없는 현실은 낙심과 절망뿐이지만, 하나님이 그 속에 자리잡고 있는 신앙은 담대함과 용기가 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다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며 온 회중이 그들에게 이르되 우리가 애굽 땅에서 죽었거나 이 광야에서 죽었더면 좋았을 것을(민14:2)"
1절 말씀을 보면 백성들이 밤새도록 곡했습니다. 칼에 망하게 되고, 처자가 사로잡히게 될 것이라며 차라리 한 장관을 세워서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했습니다. 자기들 맘대로 새 지도자를 세우려고 했습니다. 불 신앙의 말은, 하나님이 약속하신 가나안땅을 점령하기는커녕 정면으로 도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 모세를 원망하는 것은 하나님을 원망하는 것이 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명령을 받은 수행자인 모세를 원망했던 백성들을 미워하셨습니다. 결과가 나타납니다.
"곧 그 땅에 대하여 악평한 자들은 여호와 앞에서 재앙으로 죽었고(민14:37)"
재앙으로 죽었다는 것은 40년 광야에서 살다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재앙으로 갑자기 즉사했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그 악평하고 원망한 사람들의 자녀는 어떻게 됐을까요?
"너희 자녀들은 너희의 패역한 죄를 지고 너희의 시체가 광야에서 소멸되기까지 사십년을 광야에서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민14:33)"
불평했던 사람들은 재앙으로 갑자기 죽고, 자녀들은 40년 동안 유리하는 자가 되었습니다.
어떤 구약 신학자의 연구를 보면, 20세 이상의 장정이 60만 명, 여자도 60만 명, 다시 말하면 장정남녀가 120만 명, 노인과 어린이까지 합치면 300만 명입니다. 그런데 광야를 배회할 때, 38년 반으로 계산하면, 매일 85명씩 죽은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장례식을 낮에만 치르기 때문에 낮 12시간으로 계산하면 1시간에 일곱 명씩 장례식을 치룬 것입니다. 그렇다면 매 시간 곡하는 일이 생겼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일이 40년 동안 계속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과 섭리를 무시하고, 불순종하고 불신하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죄악인지
"이 백성이 어느 때까지 나를 멸시하겠느냐 내가 그들 중에 모든 이적을 행한 것도 생각하지 아니하고 어느 때까지 나를 믿지 않겠느냐 내가 전염병으로 그들을 쳐서 멸하고 너로 그들보다 크고 강한 나라를 이루게 하리라(11-12)"
우리는 이제부터는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불평하는 일이 절대로 없어야 합니다. 지금까지 지내온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기적으로 지금까지 지내온 것을 잊고 불평하거나 원망하는 것은 무서운 죄악입니다. 불 신앙적인 말은 우리를 더욱 낙심시키고, 하나님께서 미워하십니다.(민14:1-3)
신앙생활 하면서 원망하며 불평하는 것을 성령의 불칼로 도려내야 합니다. 이후부터는 신앙생활 하면서 불평과 원망이 우리 입에서 영원히 떠나길 바랍니다.
이스라엘과 아랍간에 6일 전쟁이 있습니다. 세계전쟁사상 특이한 전쟁으로 1967년에 발생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이스라엘 300만명이 일억이 넘는 주변 아랍국가와 싸워서 6일만에 승리한 것입니다. 그때 수상이 베긴 총리였습니다. 세계의 기자들이 주목하고 승리의 비결을 물을 때 베긴 수상이 유명한 말을 했습니다.
"우리 이스라엘 군대는 절대 내려서는 안돼는 명령이 있습니다. 앞으로 가라는 명령을 하지 않습니다. 모두 나를 따라 오라 follow me 그 명령뿐입니다."
그것은 위대한 지도자만 따라와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 신앙도 온전히 주님만 따라가야 하는 것입니다. 사람의 말을 따라가거나. 치우치면 실패하고 맙니다.
온전히 주님만 따라가서 성공적인 인생 승리의 삶이 되시기 바랍니다.
2. 마음속에 참 신앙이 있어야 합니다.
"그 땅을 탐지한 자 중 눈의 아들 여호수아와 여분네의 아들 갈렙이 그 옷을 찢고(14:6)"
10명의 정탐꾼이 부정적인 말을 할 때 여호수아와 갈렙은 옷을 찢었습니다. 옷을 찢었다는 것은 분개의 표시입니다. 함부로 발설하는 불 신앙의 모습에 분개했다는 것입니다.
"오직 여호와를 거역하지 말라 또 그 땅 백성을 두려워하지 말라 그들은 우리 밥이라 그들의 보호자는 그들에게서 떠났고 여호와는 우리와 함께 하시느니라 그들을 두려워 말라 하나
(9)"
7절부터 9절까지 보면 "여호와"라는 말이 절마다 여러 번 나옵니다. 불평자들은 27-33절까지 보면 여호와란 말이 없는데 여호수아와 갈렙은 7-9절까지 구절마다 여호와를 찾고 있습니다.
"오직 내 종 갈렙은 그 마음이 그들과 달라서 나를 온전히 좇았은즉 그의 갔던 땅으로 내가 그를 인도하여 들이리니 그 자손이 그 땅을 차지하리라(24)"
갈렙과 여호수아는 말씀을 통해 여호와를 온전히 좇았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인간의 제도 중에서, 다수라고 하는 제도는 민주주의에서 가장 이상적인 제도로 다수결 원칙을 쓰고 있습니다. 다수를 존중하는 것은 이상적인 제도로 민주적인 방법이지만 신앙차원에서는 다수결을 따르게 되면 반 진리의 결과를 초래하기 쉽습니다. 예수님도 다수결에 의해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고 여호수아와 갈렙 이외의 모든 사람들도 하나님이 싫어하는 방향으로 뜻이 모아졌습니다.
신앙의 원칙은 다수를 따라서 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지시를 받고 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복된 신앙생활을 하려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듣고 가야합니다."그 마음이 그들과 달라서" different spirit. 그들과 영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마음이"란 말은 히브리말로 루아흐라고 하는데, 여호수아와 갈렙의 인격의 가장 깊은 곳에 있는 영이 저들과 달랐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온전히 여호와를 좇아서 살았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인도하신 곳은 아름답고,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니,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마음 깊은 곳에 하나님이 있는 사람은 상황이나 환경을 바라보지 않고 주님을 바라봅니다.(합3:2) 이를테면, 홍해가 갈라졌을 때 사람들은 "와" 하겠지만 깊은 곳에 하나님을 바라보는 사람은 "주님 놀랍습니다"라고 합니다. 아침마다 만나가 내린 것을 보고도 하나님의 신비한 역사에 감탄합니다. 반석을 쳐서 생수가 터졌을 때도 사람들은 "야"하지만, 하나님의 영이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신비함에 감사합니다. 하나님이 그 속에 있어야만, 상황에 흔들리지 않습니다.
"오라 하시니 베드로가 배에서 내려 물위로 걸어서 예수께로 가되(마14:29)"
베드로의 시선이 예수님께 있을 때는 물위를 걷지만 시선이 풍랑으로 갔을 때 빠졌습니다. 베드로가 주님께 도움을 요청했을 때 주님은 믿음이 없음을 책망하셨고, 배 위에 올라갔을 때 풍랑이 잔잔해 졌습니다.
"시몬이 대답하여 가로되 선생이여 우리들이 밤이 맞도록 수고를 하였으되 얻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 하고(눅5:5)"
고기가 가득 잡혔지만, 고기는 없다가도 있고, 있다가도 없어집니다. 사람들은 여러 가지 환경을 바라보지만 우리는 주님을 바라보고 살아야 합니다.
"너희는 우리로 말미암아 나타난 그리스도의 편지니 이는 먹으로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살아 계신 하나님의 영으로 한 것이며 또 돌비에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육의 심비에 한 것이라 (고후3:3)"
마음의 비석에 하나님이 새겨진 사람은 흔들리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주야로 불과 구름 기둥으로 지켜주셨습니다.(출14:24) 기둥처럼 길게 된 것이 아니라, 버섯을 뒤집어 놓은 모양입니다. 위에만 기둥이었는데,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40도가 넘는 태양 빛을 가려주었고, 한밤중에는 불기둥으로 따뜻하게 지켜주셨습니다. 새벽에는 불, 구름기둥으로 한 개의 기둥에 불과 구름이 교차하며 바뀌었습니다.
"여호와께서 그들 앞에 행하사 낮에는 구름 기둥으로 그들의 길을 인도하시고 밤에는 불기둥으로 그들에게 비취사 주야로 진행하게 하시니(출13:21)"
여기서 "인도하셨다'라는 말은 보호하셨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원망도 하고 불평도 했지만, 하나님은 여전히 떠나지 않고 지켜주셨습니다.(느9:19) 이것이 신약시대인 우리에게는 성령께서 함께 해 주시는 것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찌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마28:20)"
여호수아와 갈렙은 그 마음이 하나님은 온전히 좇았고, 하나님은 기뻐하셨습니다. 세계 대기업의 사장들은 대부분 기독교인입니다. 그리고 세계 유명 상품들은 기독교인의 것입니다. 우리가 타고 다니는 포드자동차는 자동차 계에서 선두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헨리포드는 자동차로 돈을 많이 벌었습니다. 자신의 마지막을 고향에 가서 보냈는데 그 집니 크거나 화려하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이 의아하게 생각했습니다. 그 때 헨리포드가 한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가정은 건물이 아니다." 집이 크다고 행복한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비록 집이 작고 초라해도 예수님이 거하시는 집은 위대한 집이라는 생각이 그의 생활의 전부였습니다. 하나님이 그 안에 있는 사람, 주님을 온전히 좇는 사람은 초막이나 궁궐이나 어느 곳이나 천국입니다.
3. 문제 속에 주님은 계십니다.
"온 회중이 그들을 돌로 치려하는 동시에 여호와의 영광이 회막에서 이스라엘 모든 자손에게 나타나시니라(민14:10)"
바른말과 믿음의 말을 하는 여호수아와 갈렙을 돌로 치려고 합니다. 그런데 그 때 하나님은 그들의 우매한 행동에 적극적으로 직접 빨리 개입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피할 길을 주십니다. 아무리 어렵고 힘들어도 하나님은 약속하신 대로 하나님 백성을 보호하십니다. 여호수아, 갈렙의 이런 믿음의 말에 온 회중이 그들을 돌로 치려할 때에 결정적인 난관에 하나님이 개입하십니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찌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시23:4)"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닐 찌라도 주께서 함께 하시니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조성하신 자가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함께 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치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행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 대저 나는 여호와 네 하나님이요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요 네 구원자임이라 (사43:1-3)"
이번 주에 하나님께 기도하시고 움직이는 모든 것 위에 하나님이 함께 하실 것입니다. 사탄은 쉬는 시간도 없고 휴가도 가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늘 깨어서 기도하면서 하나님이 늘 지켜 줄 것을 간구하며 살아가는 여러분이 되실 줄 믿습니다. 우리는 역경이라고 부르지만 하나님은 그때 우리에게 기회를 주십니다.(what we call adversity, God calls opportunity) 우리는 역경이지만 하나님은 기회로 만들어 주십니다. 우리들 앞에 때로 문제와 고난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 마음에 깊이 자리 잡은 사람은 하나님이 늘 지켜주십니다. 가정에 고난, 경제적 아픔, 힘든 일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의지하면 이길 수 있는 힘을 주십니다.(빌4:13)
구약시대에 불기둥과 구름기둥이 떠나지 않았듯이 신약시대에는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28:20)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그 안에서 너희가 구속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느니라 (엡4:30)"
성령께서 우리를 떠나지 않고 늘 지켜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성령 충만을 사모하고 구하여 그 안에 거해야 됩니다. 우리가 인침을 받았다는 것은 도장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너는 내 것이라 도장을 찍어주십니다. 프랑스와 러시아간에 전쟁이 일어났을 때 자기 아들을 전방 전선에 보낸 한 아버지가 아들 소식이 없다 직접 전쟁터 아들을 찾아 나섭니다. 아버지의 직업은 과학자였습니다.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찾아 전쟁터에 갔을 때 수많은 시체들이 널려 있었습니다. 수많은 시체를 돌아다니며 아들을 찾아 헤매고 있을 때 한 쪽에서 신음소리가 나는 것을 듣고 서둘러 피투성이가 된 병사를 자기 옷을 벗어서 덮어주고 급히 후송하게 되었습니다. 후송하는 도중에 병사의 얼굴을 들추었을 때 그 병사가 자기 아들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많은 병사의 시체 중에서 신음하며 마지막까지 살아있는 병사가 자기 아들이라는 것을 알고 깜짝 놀랐습니다. 그 아버지는 나중에 효소균과 왁친을 개발한 파스퇴르입니다. 파스퇴르는 "생명은 생명으로부터 오는 것이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우리가 살아 계신 하나님을 의지하고 사는 사람은 그 생명이 우리에게 전달됩니다. 예수님은 생명입니다. 우리의 생명은 예수님의 생명을 받을 때에 비로소 생명이 전달됩니다. 지금 이 시간 예수님의 생명이 우리에게 임하십니다. 여러분 심령 위에, 가정 위에, 예수의 생명이 충만히 임하셔서 주안에서 다 승리하시길 축원합니다.
역사를 보는 눈
민 14:1-10 / 윤창용 목사
나라없는 백성처럼 불쌍한 민족은 없습니다. 우리 민족은 다른 나라 사람들과는 별스러운 경험을 한 민족입니다. 36년간이나 일본의 지배를 받으며 온갖 수난을 당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도우심과 사랑으로 해방이 되었습니다. 벌써 우리나라가 해방이 된 지가 올해로 57년이 되었습니다. 혹시 젊은 분들은 이제 오래된 일이니까 잊어도 되지 않겠습니까? 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은 잊어서는 안 되는 날입니다. 그 잊어서는 안되는 날인 오늘이 해방 기념 주일입니다. 우리나라가 일제의 강점에서 벗어난 것을 기념하며 지키는 주일입니다.
글라스고우 대학의 위대한 신약학자 월리암 버클레이(William Barclay)교수는 그의 글 중 "고대 세계에 나타난 교육적 이념"이라는 제목의 글을 쓴 적이 있습니다. 버클레이 교수는 고대 세계에는 완전히 상반되 두 가지 교육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 하나는 스파르타식 교육이고, 다른 하나는 유대식 교육입니다.
스파르타는 펠레폰네스 반도 남부에 위치한 도시 국가의 이름입니다. 이 나라는 헬로트라는 농노를 다스리기 위해 여성의 지위를 인정해 주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고, 남자들은 집단 생활을 하면서 강한 체력훈련을 위주로 군사훈련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어서 까다롭고, 엄격한 교육을 지금도 '스파르타식' 교육이라고 합니다.
이 나라에서는 남자가 출생하면 신체 검사부터 시작했다고 합니다. 허약한 아이는 길거리에서 죽게 하고 건강한 아이만 가정에서 받아 들여 키웠다고 합니다. 남자아이가 일곱 살이 되면 아버지의 재산에서부터 나라의 재산으로 바꾸어집니다. 그리고 최소한의 음식과, 강인한 체력 훈련, 복종과 책임으로 군사 훈련을 받았습니다. 열두 살이 되면 무서운 군사훈련이 시작되는데 밤이면 길거리에 숨어 있다가 지나가는 농노인 헬로트를 살해하는 것으로 군사 훈련의 극치를 이루었습니다. 이 헬로트를 진압하고 살아야 하는 스파르타의 생존을 위한 훈련이었던 것입니다.
두 번째 교육 방법은 유대인 교육방법입니다. 예수님이 오시기 전 약 100여 년 전에 실시되었던 남자아이의 입학식은 이렇게 진행되었다고 합니다.
"나이는 다섯 살에서 일곱 살. 새벽 미명에 어린 아이는 잠을 깨고 목욕을 한다. 그리고 금술이 붙은 예복을 입는다. 반드시 아버지의 손에, 아버지가 없는 경우에는 친척 중 지혜가 있는 사람의 손에 이끌리어 회당으로 간다. 회당 앞에 놓인 두루마리 앞에 아버지와 아들은 무릎을 꿇고 앉는다. 아버지를 따라 출애굽기 20장 2절에서 26절을 반복해서 외운다. 출애굽기 20장 2절부터 26절까지의 내용은 십계명의 내용입니다. 그리고 하잔이라는 교사의 집으로 인도된다. 하잔이라고 부르는 교사는 문간에서 어린아이를 포옹하며 키스를 한다. 방안으로 인도된 어린이가 무릎을 꿇고 앉으면 신명기 33장 4절에 쓰여진 돌판이 놓인다. 그리고 교사를 따라 성경 말씀을 암송한다. 그리고 신명이 33장이 쓰여진 돌판 위에 꿀을 바르고 그 꿀을 핥아 먹는다. 이 말씀은 참고로 모세가 임종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축복한 말씀입니다. 또 이 행동은 에스겔의 신앙 경험을 상징하는 행위이다. 에스겔서 3:3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내가 네게 주는 이 두루마리로 네 배에 넣으며 네 창자에 채우라 하시기에 내가 먹으니 그것이 내 입에서 달기가 꿀 같더라"에 나오는 말씀을 상징화 해서 했던 교육이었습니다. 그 다음엔. 성경 말씀이 새겨진 케이크를 먹는다. 그리고 천사에게 기도한다. 마음을 열고, 좋은 기억력을 달라고..
스파르타 교육! 그것은 강력한 육체와 군사훈련을 익혀 갔던 스파르타인들이 주전 400년경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 강적 아테네를 물리치고, 불과 몇만 명으로 수십만의 농노인 헬로트를 장악하고 국가를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교육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여자들까지도 헤로트를 장악할 수 있는 체력을 키우기 위해 여권 신장에 나섰습니다. 그래서 스파르타 인들은 역사 속에 영원히 존재할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주전 371년 데베우라는 소도시의 군대 앞에 스파르타는 무참히도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나약하기 이를 데 없는 것 같아 보이는 유대인들의 교육은 주전 722년에 앗수르에 침공을 당하고, 587년에 바벨론에 의해 예루살렘이 멸망당하고 페르시아와 로마의 압정에 시달리고, 그리고 주후 70년 유대인 대 학살 이후, 전 세계로 흩어졌으며 더욱이 세계 대전 동안 600만 명이 나치에 의해 학살되는 비극을 겪으면서도 이스라엘은 지금도 역사 속에 뿌리내린 민족으로 생존하고 있습니다. 지금 유대인이 500명 이상 사는 나라가 지구상에 70여 개국에 이르는데, 그 중 가장 많은 나라가 인구 600만 명이 사는 미국입니다. 미국에서 가장 많은 유대인이 사는 곳이 뉴욕인데 약 250만 명이라는 유대인들이 살고 있다고 합니다. 미국의 유명인사 대부분이 유대인이라는 이야기들은 늘 끊이질 않고 나오고 있는 것은 미국의 유대인들의 파워가 대단하다는 것을 증명해 보이는 것입니다. 미국의 주류를 'WASP'라고 합니다. "White Anglo-Saxon Protestant"의 약자인데 이 사람들의 사실 대부분은 유대인이라는 것이 미국에서 알려져 있는 상식입니다.
강한 자가 먼저 망하고, 약한 듯한 자가 끈질지게 역사의 맥을 이어 살아간다는 이 역설을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겠습니까?
여기에는 교육의 차이점이라는 사실을 여러분들은 알아차리셨을 것입니다. 그 교육의 차이를 좀 더 구체적으로 말씀을 드리면 역사를 바라보는 눈을 스파르타 교육은 행하지 않고 오직 '힘'을 사용하는 자가 역사를 주관한다는 교육을 했습니다. 반면에 유대인의 교육은 나약한 교육 같았지만 거기에는 이 역사가 '하나님의 역사'이고, 하나님의 경륜과 섭리 안에 있다는 역사관이 있었습니다.
역사를 보는 눈! 3500년 간 나라가 망하고 민족이 학살을 당하며 흩어지는 비극의 현장 속에서도 하나님의 섭리가 있다고 믿어왔던 이스라엘의 '눈' 뒤에는 성서적인 사건 하나가 자리 잡고 있습니다.
그 사건은 출애굽 사건 가운데 일어난 일이었습니다. 시내산에서 하나님과의 언약을 맺고 가나안으로 향하던 이스라엘이 가나안의 남단 가데스 바네아라는 곳에 자리를 잡고 가나안을 탐지합니다. 12지파에서 한 사람씩을 선출하여 가나안 땅을 정탐하고 돌아와 300만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정탐한 후 청문회가 열렸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12명의 정탐꾼들의 보고가 각기 달랐습니다. 아니 더 정확하게 말씀드려서 2명의 보고와 10명의 보고가 상반된 보고였습니다.
이유는 바로 '역사를 보는 눈'이 달랐기 때문입니다.
10명의 보고는 이러했습니다. 민수기 13장 31절이하에 보면 "우리는 능히 올라가서 그 백성을 치지 못하리라 그들은 우리보다 강하니라 하고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그 탐지한 땅을 악평하여 가로되 우리가 두루 다니며 탐지한 땅은 그 거민을 삼키는 땅이요 거기서 본 모든 백성은 신장이 장대한 자들이며"라고 합니다.
가나안이라는 땅을 물량과 세속적인 잣대로만 판단했습니다. 크고 작은 것, 강하고 약한 것으로만 판단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으로 역사가 판가름난다고 보고하고 있습니다. 이런 역사관을 스파르타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또 그것은 "힘"으로 세계를 제압했던 로마의 역사관이기도 했습니다.
이 10명의 보고는 "자기 생존"을 위한 역사관으로 바라보았기 때문에 그들의 미래는 불안하고 공포와 좌절의 미래였습니다. 다가오는 미래를 살아남기 위한 생각으로만 갖고 뒤로 후퇴하며 절망에 빠졌습니다.
그러나 여호수아와 갈렙은 달랐습니다. 이 두 사람이 백성들 앞에서 보고하는 내용의 요약을 하자면
1) 우리가 탐지한 약속의 땅은 심히 아름다운 땅이라 (7절)
2) 하나님이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신다(8절)
3) 두려워하지 말라(9절) 는 세 가지로 요약해 볼 수 있습니다. 이 두 사람은 역사를 보는 눈이 달랐습니다. 하나님을 중심으로 판단하고 생각하는 눈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현실이 물량적으로 크고 작건 간에 역사를 주관하시는 분이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믿음의 눈으로 역사를 바라봅니다.
바벨론에게 항복하는 길이 사는 길이라고 사람들에게 비난을 받으면서도 곧은 소리만 외쳐댔던 예레미야의 눈물 뒤에는 하나님의 심판과 경륜을 바라보는 눈이 있었습니다. 밧모섬에서 연금 된 채 환상 속에 드러나는 새 하늘과 새 땅, 새 예루살렘을 바라보는 비전의 사람 요한은 하나님의 나라가 도래할 것을 육적인 눈은 보이지 않았지만, 영적으로 눈으로 바라볼 수 있었습니다. 그러면 갈렙과 여호수아는 역사를 바라보는 어떤 눈을 가지고 있었습니까? 구체적으로
첫째 그들은 사랑의 마음에서 사물을 보는 사랑의 눈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여러분 사랑의 눈이 있어야 아름다움을 느낍니다. 그 아름다움을 느껴야 살아갈 소망이 생깁니다. 우리는 문제를 보는 데에 익숙합니다. 여러분 아름다운 눈으로 세상을 보시고 계십니까? 사랑의 눈을 배우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역사를 하나님이 역사의 주장자라는 인식에서 비롯된 역사의 눈을 가진 사람이 바라보는 눈매입니다. 사랑의 주님이 주시는 미래는 아름답습니다. 또한 그의 자녀들을 위하여 계획하신 미래가 아름답지 않겠습니까?
"심히 아름다운 땅이라" 이 고백이 여러분의 고백이 되십시오.
두 번째로 여호수아와 갈렙은 소망의 눈을 가지고 있었습니다(8절). 갈렙은 자신이 본 아름다운 땅에서 자기의 기업을 보았습니다. 여러분 갈렙이 소망의 눈으로 땅을 바라보았을 때, 하나님이 그 땅을 그에게 주었습니다. 그가 금방 얻지는 못했습니다. 85세가 되어서 이스라엘 사람들이 모두 두려워하던 거인족을 물리쳐 길랏 아르바를 자신의 기업으로 취합니다. 시71:5 "주 여호와여 주는 나의 소망이시요 나의 어릴 때부터 의지시라"
당장은 실현되지 않더라도 하나님이 역사의 주장이시기에 나는 주안에서 내가 바라는 소망을 이룬다는 역사의 눈을 여호수아와 갈렙은 가지고 있었습니다.
세 번째로 여호수아와 갈렙은 믿음의 눈으로 봅니다. "그들은 우리의 먹이라" 믿음의 눈은 정확한 판단력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정확히 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호수아와 갈렙은 그 땅 백성의 영적인 상태를 볼 줄 아는 눈이 있었습니다.
합 2:4 "그러나 의인은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그들은 멸망 할 수에 없었던 백성이었음을 읽어내고 있었습니다.
사랑의 눈, 소망의 눈, 믿음의 눈으로 그 땅을 바라보았습니다. 이것이 역사의 눈을 바로 지니고 있는 사람이 갖는 눈입니다. 자신에게 준 새 땅을 바로 이 눈으로 바라보았을 때 여호수아와 갈렙의 귀에는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이 충만했고 그 입에는 성취의 열매들이 가득 했던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새로운 시점을 향하여 나아가야 합니다. 내게 주신 영광을 향하여 나가야 합니다. 우리의 눈에서 불신의 안경, 낙담의 안경, 미움의 안경을 벗어버리고 사랑의 눈을, 소망의 눈을, 믿음의 눈을 회복해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역사를 바라보는 바른 눈입니다. 해방 기념 주일을 맞이한 우리들이 가져야 할 눈, 바로 하나님이 역사의 주장자임을 확신하고 사랑의 눈, 소망의 눈, 믿음의 눈으로 우리의 현실을 바라볼 수 있을 때 새로운 미래를 소망할 수 있습니다.
주님을 바라볼 때 그 바라보는 눈에 대하여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제자들을 돌아보시며 종용히 이르시되 너희의 보는 것을 보는 눈은 복이 있도다" 눅10:23절에서 말씀하십니다.
21세기가 시작된다고 불과 2년 전에 우리는 호들갑을 떨었습니다. 21세기가 언제부터 시작되느냐 에서부터 시작해서 밀레니엄 버그를 잡지 않으면 사회 전체가 혼란에 빠진다는 이야기들로 해서 변화 앞에 두려움 반, 희망 반으로 서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21세기에 푹 젖어들려고 하는 이 시점인 2002년 8월 11일 주일 해방 기념 주일로 지키면서 우리는 지금 역사를 바라보는 눈조차 바로 갖지 못하고 물량과 현실의 눈으로만 바라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과연 가나안을 향해 가는 행진을 우리가 하나님의 구원의 약속 안에서 바라보고 있느냐는 것을 생각해 봅니다.
2002년 우리가 일제의 강압에서 벗어난 날! 다시 한번 역사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통해서 이 아름다운 역사가 이루어짐을 다시 확신하시는 여러분들이 되시길 축원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의식전환
민 14:1-10 / 한 대근 목사
성도란 예수를 구세주로 믿어 새롭게 변화된 거룩한 백성임을 의미합니다. 고린도후서 5장 17절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새로운 피조물이란 새로운 인간, 다시 태어난 인간을 말합니다. 성경에서 다시 태어난 인간이란 하나님의 사람으로 운명이 완전히 바뀐 사람을 말합니다. 불행, 저주, 슬픔은 모두 사라지고 오직 행복과 기쁨과 승리로 다시 태어난 인간이 되었음을 말합니다. 이제는 더 이상 사망도 없고, 실패도 없고 질병도 없는 영원한 생명, 영원한 승리의 사람이 된 것을 말합니다. 로마서 8장 1-2절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완전한 구원을 받은 인생이 되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를 구세주로 믿어 구원받은 성도는 동시에 가치관과 세계관도 변화되어야 합니다. 즉 구원은 육체와 영혼의 변화뿐만이 아니라 생활전반에 걸친 개혁-의식의 전환-도 요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의식의 변화가 없는 사람에게는 아무리 아름답고 좋은 천국이 펼쳐져도 무의미 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을 탈출하여 가나안 땅을 목전에 두고 여호와 하나님의 마음을 아주 슬프게 하는 불 신앙의 죄를 범했습니다. 12명의 정탐꾼이 40일간 가나안을 정탐하고 나서 백성들에게 보고하는 과정에서 하나님이 분명히 약속하시고 보여주신 가나안땅을 들어가기에는 역부족이라는 10명의 정탐꾼의 보고를 듣고 백성들이 원망과 불평, 그리고 지도자들을 불신하게 되었습니다. 그로 인하여 하나님은 가나안 땅을 탐지한 날 수 사십 일의 하루를 1년으로 계산하여 무려 사십 년간 광야에서 훈련을 받게 하시고 나서야 가나안에 들어가게 하셨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의식의 변화가 없는 이들에게는 아무리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이라도 만족의 대상이 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변화되지 않은 정신 상태로는 가나안의 축복도 감사하지 못할 것이 뻔한 사실이었기 때문입니다. 애굽의 종살이에서 육신 적인 해방과 구원은 얻었으나 내적인 변화를 체험하지 못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40년을 떠돌이로 방황하고서야 가나안에 들어갈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현실에 대한 두려움과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신뢰를 잃어버리고 늘 원망과 불평의 삶을 살았던 이들은 끝내 광야에서 멸망당하고 말았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늘 새롭고 늘 승리하는 삶을 살기 위해 어떠한 자세를 가져야 할 것인가? 2001년을 마감하고 새로운 해를 맞이하는 이 중요한 시간에 우리들이 해야 할 일이 무엇입니까?
1. 우리 중심을 하나님의 은혜로 가득 채워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실패의 원인에는 현실에 대한 불안과 두려움이 그들의 중심을 가득 채워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애굽을 나온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이 어떤 과정을 통해 애굽의 종살이에서 해방되었는지를 잊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10가지 재앙을 통해 바로 왕을 굴복시킨 것도, 애굽 백성의 장자가 다 죽어갔으나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아무런 어려움 없이 지나친 사건도 모두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그들의 앞길을 인도하시고 이끌어주셨습니다. 뒤 따라 오는 바로의 군대와 앞을 가로막은 홍해 앞에서도 하나님은 구원의 능력을 베푸셨습니다. 그러나 그 감격과 기쁨은 얼마 되지 않아 없어지고 가나안을 목전에 둘 때까지도 그 원망과 불평은 계속되었습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 2-3절을 보면 “이스라엘 온 회중이 그 광야에서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여 그들에게 이르되 우리가 애굽 땅에서 고기가마 곁에 앉았던 때와 떡을 배불리 먹었던 때에 여호와의 손에 죽었다면 좋았을 것을 너희가 이 광야로 이끌어 내어 이 온 회중으로 주려죽게 하는 도다”고 했습니다. 가만히 생각해 봅시다. 강제 노동자였던 그들이, 남의 나라의 노예였던 그들이 과연 고기 가마에 앉았던 때와, 떡을 배불리 먹었던 기억이 얼마나 많았을까요? 원망으로 가득한 의식의 표출입니다. 인간은 언제나 잃어버린 과거가 아름답게 보이는가 봅니다. 매사에 불평이 많고 원망을 잘 하는 사람들에게는 공통적으로 과거에 집착하는 경향이 그 내면에 잠재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현실에 감사하지 못하고 미래를 향한 비전도 없습니다. 그리고 늘 옛날의 기억을 꺼내어 향수하고 곱씹으며 괴로워합니다. 바로 이것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이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꾸 과거의 실패나 과거의 기억만으로 만족하려 한다면 아무리 큰 하나님의 은혜가 펼쳐진다 할지라도 감사할 수 없고 그것으로 만족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항상 원망과 불평의 삶을 살면서 피곤한 인생살이를 반복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문제는 지금 무엇이 여러분의 마음속에 채워져 있는가가 중요한 것입니다. 사람은 그 마음에 채워져 있는 것이 밖으로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도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입에서 나오는 것이 더러운 것이라고 바리새인들의 더러운 속마음을 저주하셨지요. 하나님의 은혜로 가득 채워져 있는 자는 늘 감사와 찬송이 나올 것이지만 그 마음에 은혜가 아닌 사단이 주는 악의 마음이 품어져 있다면 그 입에서는 늘 원망과 불평이 나올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아무런 대가없이 노예에서 자유인으로 되게 하였던 출애굽 사건, 죽음의 공포에서 극적으로 살았던 홍해의 기적, 기갈의 고통에서 해갈의 시원함으로 바뀌어졌던 마라의 역사가 그들의 가슴속에 채워져 있었다면 그들은 원망대신 감사와 찬송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을 것입니다.
감사한 일들만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시편 103편 2절 - 5절에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며 그 모든 은택을 잊지 말지어다. 저가 모든 죄악을 사하시며 네 모든 병을 고치시며 네 생명을 파멸에서 구속하시고 인자와 긍휼로 관을 씌우시며 좋은 것으로 네 소원을 만족케 하사 네 청춘으로 독수리같이 새롭게 하시는 도다.” 할렐루야! 우리들도 이 시편의 기자처럼 이제 것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은혜와 혜택을 잊지 말고 늘 기억하며 감사하고 고백해야 합니다. 우리의 언어도 바뀌어야 합니다. 날마다 은혜 되는 말만 합시다. 생활도 바뀌어야 합니다. 생활 자체가 은혜 받는 일이 되도록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눈으로 보는 것을 바꾸고, 생각을 바꾸고, 의식을 전환해야 합니다. 계속해서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의 중심을 가득 채워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의 입술에서 이런 고백이 나올 것입니다. “나의 힘이 되신 여호와여 내가 주님을 사랑합니다”. 사랑하시는 여러분들의 중심이 주님의 은혜로만 가득하시기를 소원합니다. 실패에 대한 두려움과 불안 그리고 염려와 같이 사단이 가져다주는 마음으로 채워져 있다면 이 시간 다 쏟아 놓으시고 하나님의 은혜로만 채우시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구원받은 성도로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늘 새롭고 힘있게 사는 자세입니다.
2. 하나님의 권능을 온전히 의지합시다.
성경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나올 때의 모습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출애굽기 14장 8절에 “여호와께서 애굽 왕 바로의 마음을 강퍅케 하셨으므로 그가 이스라엘 자손의 뒤를 따르니 이스라엘 자손이 담대히 나갔음이라.” 애굽 왕 바로가 이스라엘 백성들의 뒤를 따라 왔지만 그들은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담대하게 나왔습니다. “담대히”라는 원어 ‘야드 라마’는 [높은 손]을 의미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높은 손, 곧 능력의 높은 손을 의지하여 담대하고도 당당하게 나왔던 것입니다. 또한 이 말씀은 승리를 나타냅니다. 이스라엘은 애굽에서 나올 때 하나님의 도우심과 함께 하심으로 승리를 외치며 나왔습니다. 쫓겨 나온 것이 아닙니다. 도망자로 비굴하게 나온 것이 아닙니다. 출애굽기 12장 31-36절의 말씀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 사람들에게 은혜를 입어 은, 금과 패물 등 많은 물품을 취하였고, 중다한 잡족과 양과 소와 심히 많은 생축을 이끌고(12:38) 당당하게 나왔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강퍅한 바로의 기세를 꺾으신 하나님의 능력을 보았고, 최후로 발악하는 바로의 군대를 홍해에 수장시키는 하나님의 권능도 체험했습니다. 마라의 쓴 물을 단물로 바꾸신 하나님의 능력을 마셨고, 그 능력을 믿고 불과 구름기둥을 따라 광야로 행진하였습니다. 시편기자는 그 모습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시편 68:7-8절 “하나님이여 주의 백성 앞에서 앞서 나가사 광야에 행진하셨을 때에 땅이 진동하며 하늘이 하나님 앞에서 떨어지며 저 시내산도 하나님 앞에서 진동하였나이다”
이렇게 하나님의 권능을 따라 살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신 광야에 이르러서는 기근이라는 고통 앞에서 또다시 원망하고 불평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권능을 늘 체험하면서도 믿지 못하고 다시 불신앙의 모습으로 하나님을 원망하는 저들의 모습은 오늘날 나와 여러분의 모습은 아닌가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권능을 의지하면 우리의 삶에도 능력이 나타납니다. 예수 믿으면 아멘 합시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소유한 하나님의 사람들입니다. 그 하나님을 믿는 우리는 하나님의 능력과 권능을 날마다 체험하며 살 수 있는 특권이 주어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의 높으신 권세와 권능을 온전히 의지하십시오.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의 손을 높이 들어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권능은 여러분의 능력보다 크시고, 하나님의 생각은 여러분의 계획보다 세밀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권능을 온전히 의지합시다. 불과 구름으로 인도하셨던 주님께서 여러분의 모든 생애를 아름답게 하실 것이며, 여러분의 손이 항상 들려지는 승리의 삶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권능을 온전히 의지하시기 바랍니다.
3. 하나님의 약속을 소망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부르신 목적은 고통 중에 신음하는 그의 백성들을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에 인도하기 위함이었습니다(출3:16-17). 그리고 나와 여러분을 부르신 목적도 죄의 종에서 해방 시키셔서 천국백성이 되게 하심이었습니다(마11:28, 요10:10). 그러나 그 가나안과 영생의 축복은 쉽게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을 차지하기 위한 고통이 수없이 많았습니다. 출애굽 이전의 고통보다 더 험하고 아픈 고통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출애굽 이전의 고통은 그 결과가 여전히 종살이라는 것이었으나, 출애굽은 하나님이 약속하신 가나안을 향한 길이었습니다. 영생의 길입니다. 그러므로 고난이 있어도 그 길은 행복한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장 18절 “십자가의 도가 멸망당하는 자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구원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는 십자가가 하나님의 능력이기에 힘들고 어려운 길이지만 영원한 승리와 생명을 약속 받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베드로 사도가 말합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시험하려고 오는 불 시험을 이상한 일 당함 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오직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나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벧전4:12-13)” 바울 사도도 로마서 5:3-4절에서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을 소망을 이룬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약속을 반드시 이루십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을 따르고 사랑하며 온전히 의지하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반드시 기억해 주십니다. 시편기자는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 말씀대로 사는 자에게는 손이 수고한대로 먹으며 복되고 형통하리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신실하신 분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온전히 신뢰하고 소망하시면 그 약속은 언제나 여러분 곁에서 이루어진 것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여호수아와 갈렙은 가나안에 들어가기 전에 이미 가나안을 살았던 사라들입니다. 가나안은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이라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40일간 가나안을 탐지하면서 하나님께서 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왜 그 땅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는지를 깨달았습니다. 그들이 보기에 그 땅은 확실히 젖과 꿀이 흐르는 땅, 풍성한 결실이 있었습니다. 가능성의 땅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약속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반드시 이루어지는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여러분의 것이 될 그 때까지 그 약속을 신뢰하시고 소망하시기를 바랍니다.
주님이 오신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된 우리들은 하나님의 계획과 약속대로 그 삶이 풍성하고 행복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이제 과거의 죄악과 실패의 기억들, 불행과 저주의 사슬들은 다 벗어버리고 우리의 가슴에는 하나님의 은혜로 채우고, 우리의 손이 여호와의 권능을 의지하며, 우리의 눈은 항상 하나님의 약속을 소망하는 가운데 풍성하고 행복한 삶을 누리시길 소원합니다. (488장)
믿음있는 교회
민 14:1-10 / 박조준 목사
먼저 우리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 그리고 찬송을 드립니다. 지금으로부터 34년 전 북한에서 월 남한 난민들 몇 분이 모여서 하나님께 예배하기 시작한 우리 교회가 이처럼 한국 뿐 만 아니라 세계적인 교회로 성장하게 된 것을 생각할 때 얼마나 감사한지 말로 다할 수 없습니다. 지난날 의 일들을 생각하면 모두가 감격스러운 것 뿐 입니다. 금년 우리 교회 생활 목표를 전진하는 교회 로 정하고 온 교우가 마음과 힘을 모두어 일해 왔 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하나님의 축복을 받게 되었습니다.
우선 보이는 면으로 말해도 9억원의 예산을 세웠던 것이 30퍼센트가 초과한 12억원의 결산을 보게 된 것입니 다. 작년에 3만 교우가 금년 12월 현재 3만 6천을 확보하게 되었고 내년에는 4만 교우를 목표로 힘쓰게 되었습니다. 35주년 기념 사업의 제 2차년도 사업인 영락 상업 학교 신축도 본래 예산했 던 5억원의 공사를 현재 12억원의 공사로 학교 신축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저 자신으로서는 어떤 때 좀 마음이 무거울 때도 있었습니다. 이 엄청난 액수의 사업을 다 즐 거운 마음으로 해 나가야겠는데 하는 생각으로 기도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런데 본래 예정했던 것보다 갑절이 넘는 현실 앞에서도 우리 장로님들은 기쁜 마음으로 호응해 주셨고 우리 온 제직 들도 한 마음으로 쾌히 협력해 주신데 대하여 고마운 마음을 금할 길이 없습니다. 저는 정말 교 회를 맡아 일하며 보람을 느끼며 재미있게 삽니다. 우리 교회가 오늘의 축복을 받게 된 것이 여기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금년 안에 시작하 게 되는 일 중에 하나는 남한산성에 있는 여자 신학교 기숙사를 현대식으로 건축하는 일입니다. 그 동안 당국에서 허가가 나오질 않아 기다리고 있었는데 며칠 전에 허가를 받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금년 안에 공사를 시작하려고 하는데 150명에서 200명까지 수용할 수 있는 시설로 훈련 원을 겸하게 될 것이고 예산은 2억원 가까이 들 것 같습니다. 우리가 1984년 한국 교회 100주년까지 우리 교회에서 선교사 10가정을 파송할 목표로 기도하 고 힘쓰고 있는데 이미 몇 분이 파송 받아 일하고 있고 지금 벌써 10가정을 후원할 단체와 개인 이 거의 차 있습니다. 이 모두가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저는 교회 창립 34주년을 맞는 이 뜻깊은 주일에 우리 교회가 축복 받은 비결이 무엇인가 또 어떻게 해야 앞으로 계속해서 축복을 받을 수 있겠나 하는 것을 기도하는 중에 생각해 보았습니 다. 그것은 한 마디로 믿음 있는 교회입니다. 믿음과 축복은 정비례하기 때문입니다. 믿는 만큼 축복 받습니다. 크게 믿으면 크게 축복 받고 적게 믿으면 적게 축복을 받습니다. 안 믿으면 아무 축복도 받을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네 믿음대로 되라 고 말씀하셨 습니다.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것이 없다 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에는 큰 힘이 있습니다. 과학으로 변화시킬 수 없는 인간의 내부를 변화시킬 수 있는 힘이 있는 것입니다. 과학의 힘은 외부 세계를 변화시켰습니다. 그러나 인간 내부 세계에 는 손을 대지 못하고 아무런 영향력을 미치지 못하고 있습니다. 사실 할 수도 없습니다. 이것은 믿음의 힘만이 이룩할 수 있는 것을 누구나 인정하게 되었습니다.
사실 믿음의 힘은 바다의 세력보다도 강합니다. 여러분 기억하시지요. 모세가 이스라엘 민족 을 이끌고 약속의 땅을 향하여 애굽을 등지고 떠났을 때 이스라엘 민족을 해방시켜준 것을 후회 한 애굽 왕 바로는 자기의 군대를 동원해서 이스라엘 백성을 추적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 앞에 는 홍해가 가로 막혀 있었습니다. 진퇴양난에 빠진 모세는 하나님께 호소하였습니다. 이때 하나님은 모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지팡이를 들고 손을 바다 위로 내밀어 홍해가 갈라지게 하라 이스라엘 자손이 바다 가운데 육지로 행하리라 모세는 그대로 믿고 순종했더니 홍해가 갈라졌습니다. 힘은 힘과 대결합니다. 바다물의 힘보 다 더 강한 힘이 아니고는 홍해가 갈라질 수 없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믿음으로 홍해를 육지같 이 건넜다고 하였습니다. 믿음은 강한 힘이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능력을 믿음을 통해서 힘입을 수 있기 때 문입니다. 여호수아는 믿음으로 여리고의 강한 성을 무너뜨렸습니다. 믿음은 견고한 성보다도 강한 힘이 있습니다. 더구나 믿음은 우리를 뒤로 물러가게 하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나아가게 합니다. 믿음은 우리를 부정적이 아니라 적극적이게 합니다. 오늘 본문을 기억하시지요? 이스라엘의 출애굽의 지도자 모세가 하나님의 땅 가나안을 바라보 면서 이스라엘 12지파의 대표 청년 한 사람씩 그러니까 열 두 청년을 택해서 40일 동안의 기한 을 주면서 가나안 땅을 정탐하고 오라고 하였습니다. 40일 후에 저희들이 돌아와 이스라엘 민족 이 모인 가운데서 보고하였습니다. 열 두 사람 가운데 열 사람이 보고하기를 그 땅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훌륭한 포도가 열리는 곳입니다. 그러면서 두 사람에게 메워 가지고 온 크고 소담스러운 포도를 보였습니다. 거기까지는 좋았습니다. 그런데 거기는 산악이 험하고 성곽은 높고 견고하며 시민들은 우리보다 키가 장대합니다. 아 마 그들이 우리를 보면 메뚜기처럼 볼 것입니다. 그러니 그 땅은 점령할 수 없는 땅이라고 우리 는 보았습니다. 이 보고를 듣고 있던 이스라엘 회중은 큰 소란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낙심하고 실망한 이스 라엘 사람들은 대성통곡을 하며 지도자를 원망하고 이제라도 늦지 않았으니 다른 지도자들을 뽑 아 애굽으로 다시 돌아가자고 하는 사람들이 많게 되었습니다. 이때 모세와 아론은 이스라엘 회중 앞에서 엎드려 하나님께 기도만 합니다. 이제 미처 보고하 지 않았던 눈의 아들 여호수아와 여분네의 아들 갈렙이 그 옷을 찢으며 온 회중을 향해서 말했 습니다. 우리가 두루 다니며 탐지한 땅은 아주 아름다운 땅입니다. 여호와께서 우리를 기뻐하시면 우 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시고 그 땅을 우리에게 주실 것입니다. 이 땅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입니다. 우리는 오직 하나님을 거역하지 마십시다. 그리고 그 땅의 백성들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들은 우리의 밥입니다. 그들의 보호자는 그들에게서 이미 떠났습니다. 여호와 하나 님은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고 격려하였습니다. 용기를 주었습니다. 여러분 꼭 같은 것을 보았는데 무엇이 이렇게 서로 다른 입장을 취하게 만듭니까? 차이는 믿 음 뿐 입니다. 믿음이 없는 열 사람은 못합니다, 안됩니다 하였고 믿음이 있는 두 사람은 합니 다, 됩니다 하였습니다. 믿음이 우리를 이렇게 다르게 만듭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믿음이 있을 때 우리의 현재와 미 래가 승리적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무리 어려운 환경에 놓인다고 할지라 도 낙심하거나 비관하거나 두려워하지 맙시다. 원망하지 마십시다. 믿음을 가지십시다. 믿음 있 는 사람 앞에는 험산준령이 가로막힐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함께 하므로 극복해 나아갑 니다. 저는 이 교회를 책임지고 일해 나아가면서 감사하는 것은 우리 교회는 믿음 있는 교회입니다. 무슨 일이든지 하나님의 뜻으로 믿고 사회와 민족을 위해서 도움이 될 일이라고 믿어져서 교회 앞에 내놓으면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사람이 대부분입니다. 합시다. 해봅시다 하고 나서지 안됩 니다. 그만 둡시다 하시는 분 별로 없습니다. 우리 교회가 여기서 축복을 받는다고 저는 믿습니 다. 여러분, 우리 영락 교회 교우는 언제나 믿음으로 살아서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삶의 자세로 살 아가십시다. 세상에는 두 가지 사람이 있어요. 하나는 인생에 패배한 사람이고 다른 하나는 인 생에 승리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인생에 패배한 사람과 만나서 이야기해 보셨습니까? 5분 이상들을 수가 없습니다. 그 저 우는 소리, 탄식 소리, 원망 소리, 한숨 뿐 입니다. 그들은 이런 패배적인 신념을 가졌기 때 문에 그대로 패배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승리한 사람, 성공하는 사람을 보세요. 그 입에서는 절대로 절망적인 말이 나오지 아 니합니다. 어려움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믿음이 있는 사람은 어려움을 극복합니다. 그래서 그 입에서는 승리와 소망에 찬 말만 나옵니다. 무엇을 의미합니까? 우리의 믿음은 우리 자신을 만 들어 냅니다. 그러므로 믿음이 큰 사람이 성공합니다. 어제 어느 신문에서 큰 사업을 하는 분의 말을 적은 대목을 읽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이 사 업이 다 사양기에 들었다고 하지만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아니 합니다. 그 방면으로 힘만 쓰면 아직도 얼마든지 개발할 수 있는 여지가 있습니다. 이 분은 다 안된다고 하지만 될 수 있다는 신념을 가지고 파헤쳐 나아갔습니다. 성공하는 사람은 신념에 차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믿음 있는 우리 영락 교회에서 신앙 생활하는 여러분은 범사에 적극적이고 긍정적이고 신념 있게 살아서 개인이나 가정이 승리하고 성공하시기를 바랍니다. 몇 해 전에 우리 교회를 다녀가신 로버트 슐러 목사님이 이런 말씀을 하시는 것을 아마 들으 셨을 것입니다. 미국 캘리포니아주에서 어느 가까운 두 친구가 바닷가에 낚시를 하러 나갔습니 다.
비록 낚시질은 서툰 사람들이지마는 고기가 잘 물렸습니다. 그런데 한 친구는 손바닥만한 작은 고기가 물리면 그것을 잡아서 가지고 간 구럭에다 집어넣 고 월척이 되는 큰 고기가 물리면 다시 바다에다 놔 주더래요. 옆에서 같이 낚시를 하던 친구는 이상하게 생각했으나 낚시 도중에 물을 수 없어서 궁금하게 지내다가 점심 시간이 되어 준비해 온 도시락을 함께 나누면서 궁금했던 이야기를 했습니다. 여보게, 나는 이상한게 하나 있어. 뭔데? 자네는 가만 보니까 작은 고기는 잡아 구럭에 넣고 큰 고기는 오히려 다시 물 속에 놔주는데 내 상식하고는 다른데. 나 같으면 오히려 큰 것을 집 어넣고 작은 것은 불쌍해서 다시 놔줄 터인데 무슨 특별한 이유가 있나? 이때 그 친구 대답하는 말이, 글쎄 우리 집엔 프라이팬이 10인치 짜리 밖에 없어서 하더랍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큰 축복 주시기 위해서 큰 기회를 주시는데 내 믿음의 그릇이 너무 작아서 그 큰 축복을 놓쳐 버리는 경우가 없습니까? 그래서 성경은 말씀합니다. 네 입을 넓게 열라. 내가 채우리라. 우리는 믿음의 입을 넓게 열 어야 합니다. 이것은 우리의 책임입니다. 그리하면 하나님께서는 채워주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큰 믿음 가집시다. 그래서 큰 축복 받읍시다. 그리고 믿음 있는 교회는 승 리합니다. 우리는 말하자면 공중에 권세를 잡은 마귀의 세력과 싸우는 군대입니다. 그런데 우리 힘만 가지고는 절대로 승리할 수 없습니다. 이 세상의 누구도 마귀를 이길 사람은 없습니다. 그 러나 주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면 능히 이길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자기의 힘으로는 가나안의 시민들을 도저히 이길 수 없는 것이 사실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여호수아의 호소를 들어보세요. 오직 여호와를 거역하지 맙시다. 또 그 땅 백성을 두려워하지 맙시다. 그들은 우리의 밥입니 다. 그들의 보호자는 그들에게서 떠났고 여호와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그들을 두려워 하지 맙시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실 때 두려운 것 없습니다. 승리의 확신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도 로마서 8장 37절에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 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하였습니다. 마틴 루터의 찬송은 너무 유명하고 은혜가 됩니다. 내 주는 강한 성이요 방패와 병기되시니큰 환란에서 우리를 구하여 내시리로다옛 원수 마귀는 이때도 힘을 써 모략과 권세로 무기를 삼으니 땅위에 누가 당하랴 제 힘만 의지 할 때는 패할 수밖에 없으나 힘있는 장수 나와서 날 대신하여 싸운다이 장수 누 군가 주 예수 그리스도 만유의 주로다당할 자 없으니 반드시 이기리로다 이 땅에 마귀 들끓어 우리를 삼키려하나겁내지 말고 섰거라 진리가 승리하리라 네친척 네재물 네명예 네생명 다 빼앗긴대도 진리는 살아서 그 나라 영원하리라 히브리서 11장 33절 이하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저희가 믿음으로 나라를 이기기도 하며 의 를 행하기도 하며 약속을 받기도 하며 사자들의 입을 막기도 하며 연약한 가운데서 강하게 되기 도 하며 전쟁에 용맹되어 이방 사람들의 진을 물리치기도 하며 하였습니다.
여러분 소년 다윗의 승리를 보세요! 하루는 형님들이 있는 일선에 위문품을 가지고 갔던 다윗 이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블레셋 장군 골리앗이 이스라엘 군대에 도전하면서 안하무인격 으로 이스라엘 군대를 조롱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소년 다윗은 의분을 억제할 수가 없었습니다. 세상에 이런 법이 어디 있나? 하나님도 모르는 저 블레셋 놈이 하나님의 군대를 이렇게 조롱 해? 형들의 책망도 아랑곳없이 다윗이 블레셋 장군 골리앗과 대전하러 나서겠다고 하였습니다. 사울 왕도 다윗의 말을 듣고 그의 신념 있는 자세에 감동을 받아 다윗이 일선에 나가는 것을 허락하였습니다. 다윗은 베들레헴들에서 양을 칠 때 사자와 곰이 달려들면 물매로 쳐부수던 경 험 밖에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이 함께 하실 때 이길 수 있다는 확신이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진에서 나오는 도전자 소년 다윗을 본 골리앗은 어처구니 없다는 듯이 웃었습니다. 그 러나 다윗은 심각하게 골리앗을 향해 나아갔습니다. 그리고 유명한 말을 했습니다. 너는 칼과 단창으로 내게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 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가노라. 오늘 여호와께서 너를 내 손에 붙이시리니 내가 너를 쳐 서 네 머리를 베고 블레셋 군대의 시체로 오늘날 공중의 새와 땅의 들짐승에게 주어 온 땅으로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계신 줄 알게 하겠고 또 여호와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 이 무리로 알게 하리라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즉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붙이시리라 하면서 앞 으로 다가오는 블레셋 장군 골리앗을 향해 다윗이 빨리 달려나가면서 물매를 던졌더니 그 돌이 골리앗의 이마에 명중해서 그 자리에 엎드러지고 말았습니다. 여러분, 다윗이 골리앗을 이긴 것이 무기가 좋아서 였습니까? 그의 경험이 많아서 였습니까? 하나님이 함께 하는 믿음이 그를 이기게 하였습니다. 개인이든 교회든 믿음 있을 때 승리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말하자면 선한 싸움을 싸우고 있습니다. 이 싸움에 승리할 수 있는 길은 믿음밖에 없 습니다. 오늘까지 우리 교회가 믿음 있는 교회로 성장한 것을 감사합니다. 계속 이 위대한 믿음 가지고 마귀와의 싸움에서 승리하십시다. 우리 영락 교회에 속한 성도 여러분 한 분 한 분이 다 큰 믿음 가지셔서 큰 축복 받으시고 큰 힘 가지시고 크게 승리하시기를 축원합니다.
두려워 말고 믿고 가라
민 14:1-10 / 윤영택 목사
출애굽을 한 히브리인들이 1년이 좀 지났을 무렵 바란 광야에 도착했을 때 모세는 12명의 정탐군을 선발하여 가나안 땅을 탐지하고 돌아오라고 보냈습니다. 40일간 정탐을 마친 정탐군들의 첫 보고는 그 땅에 대한 아름다움과 그 증거로 가져온 그 땅의 과일들이었습니다. 말로만 듣던 가나안 땅을 직접 다녀온 정탐군들의 보고는 출애굽 이후 1년이 넘게 방랑생활 하던 히브리인들에게 즐거운 소식이었습니다.
그런데 기쁨은 잠간이었고 정탐군들 입에서 나온 ‘그러나’라는 말로 이어지는 보고는 히브리인들을 순식간에 절망으로 몰아넣고 말았습니다. 그 땅이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고 불리울 만큼 정말 기름지고 아름다운 것은 우리가 본 그대로 사실입니다. 그러나 거기 사는 사람들이 워낙 강하고 성읍은 견고하고 심히 클 뿐 아니라 우리가 거인족 아낙 자손들을 보았습니다. 이렇게 보고를 할 때 히브리 백성들의 낯빛은 금방 어두워지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여기저기서 웅성거리며 탄식 소리가 들립니다.
그때 이런 상황을 그대로 보고만 있을 수 없던 갈렙이 앞으로 나와 백성들을 안심시키며 ‘우리가 올라가서 그 땅을 차지합시다 우리가 충분이 이깁니다’ 하였지만 다른 정탐군들이 더 큰 소리로 갈렙의 말을 가로막았습니다. ‘우리는 못합니다. 우리가 결코 그들을 칠 수 없습니다. 그들은 우리보다 훨씬 강합니다’ 하며 좀 전에는 그 땅이 아름답다고 하던 말을 바꾸어 그 땅을 악평하기 시작합니다. ‘그 땅은 기름지고 좋기는 하지만 욕심을 내는 사람들이 많아 전쟁이 계속되어 사람들을 삼키는 땅입니다. 우리가 보고 온 그 땅 사람들은 키가 엄청나게 큰데다 거기서 거인 족 아낙 자손을 보았는데 우리는 그 사람들에 비하면 메뚜기처럼 보였습니다. 아마 그들이 우리를 볼 때에 그렇게 볼 것이 분명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더 이상 희망을 가질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밤새도록 소리를 높여 울고불고 난리가 났습니다. 그리고는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기 시작합니다. 우리가 애굽 땅에서 죽었거나 광야에서 죽었다면 차라리 좋았을 걸 어찌하여 여호와께서 우리를 가나안 땅으로 가라고 하여 그들의 칼에 망하게 하려는가? 우리 아내와 자식들이 다 사로잡히게 되었으니 애굽으로 돌아가는 것이 낫겠다고 하며 모세와 아론을 제쳐두고 새로운 지도자를 세우고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선동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절망은 몹쓸 전염병처럼 참 신속하게도 번져갑니다. 어제까지만 해도 가나안 땅에 대한 기대감으로 참고 견디며 행진했던 사람들이 오늘은 완전 패배자가 되어 내일에 대한 소망을 내팽개치고 옛날로 돌아가자고 아우성입니다. 이런 돌발적인 상황에 속수무책이었던 모세와 아론은 그만 백성들 앞에 엎드리고 맙니다. 희망을 잃은 군중들, 내일에 대한 기대감이 완전 무너진 군중들은 그 책임을 하나님께 돌립니다. ‘과연 하나님이 계신다면 왜 우리를 이런 곤경으로 몰아넣으시는가? 이것이 전능하신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란 말인가?’ 하며 지도자와 하나님께 대한 불평을 털어놓았습니다.
백성들의 어리석은 원망과 불평을 듣다듣다 참을 수 없었던 여호수아와 갈렙이 다시 한 번 사람들 앞에 나서 소리 높여 외칩니다. ‘우리가 40일간 두루 다니며 탐지한 그 땅은 심히 아름다운 땅입니다. 여호와께서 우리를 기쁘게 여기시면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시고 그 땅을 우리에게 주실 겁니다. 그 땅은 정말 젖과 꿀이 흐르는 아름다운 곳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약속하신 여호와 하나님을 절대로 거역하지 맙시다. 그리고 그 땅 사람들을 두려워하지도 맙시다. 그들은 우리의 밥일 뿐입니다. 그들의 수호신은 그들로부터 떠나버렸지만 여호와는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그러므로 그들을 두려워하지 맙시다’ 이렇게 간절히 호소하였습니다.
하지만 이미 가나안 땅에 대한 희망을 잃고 하나님께 대한 기대감마저 잃어버린 그들에게 여호수아와 갈렙의 호소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습니다. 도리어 지도자에 대한 분노가 폭발하여 돌을 들어 그들을 치려고 달려들었습니다. 그와 동시에 하나님의 영광이 성막에서 나타났고 하나님의 소리가 모세에게 들림으로 성난 군중들의 폭동은 진정되었습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본문의 내용입니다.
40일 동안 함께 정탐하며 보고 들은 것을 전하는 12명의 보고가 어쩌면 그렇게 정반대로 다를 수 있을까요? 그 땅이 아름다운 곳이라는 점에는 모두 동의했지만 그 땅을 나의 것으로 삼는 일에서는 절대 긍정과 절대 부정으로 서로 달랐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행동에서 나타난 절망과 희망의 차이는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따라 내일에 대한 희망과 절망으로 나뉘어졌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목표에 이르는 과정에서 넘고 싸워야 할 엄청난 장애물의 크기와 상대방의 힘만 보았고 초라한 내 모습만 보였습니다. 반대로, 하나님의 약속을 분명히 믿고 가는 사람들에게는 자기들을 그 아름다운 땅으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엄청나게 커 보였습니다. 우리처럼 별볼일 없는 백성들을 애굽으로부터 불러내어 이렇게 아름다운 곳으로 보내시려고 하셨다니 이 얼마나 놀라운 은혜인가 하며 감사가 터져나옵니다. 이것이 희망과 절망의 차이였습니다.
고소공포증 때문에 비행기를 못타는 분들이 있습니다. 비행기만 타면 불안하여 착륙하는순간까지 맘을 놓지 못하고 여행해야만 하는 불행한 분들입니다. 저는 비행기를 자주 탈 기회가 없어서 그런지 비행기 여행할 때는 어린애 마냥 즐겁고 기대가 됩니다. 가족과 함께 여행하면 아이들에게 창가쪽을 양보하지만 나 홀로 갈 때는 도중에 화장실 가는 불편함을 무릅쓰고 주로 창가쪽 좌석을 얻습니다. 창가 좌석을 택했는데 어떤 날은 날개가 있는 자리를 만나면 실망이지요. 비행 중 틈틈이 창 밖의 경관을 바라보는 일이 너무 재미있습니다. 구름 위를 날 때는 마치 새하얀 눈밭을 지나가는 듯하여 신비롭고, 아래를 내려다 보면 어릴 때 사회과부도에서 항공사진으로만 보았던 산과 하천과 해안선과 가물거리는 도로들의 모습이 한 눈에 들어와 흥미진진합니다. 그래서 저는 비행기 여행을 무서워하는 분들이 너무 안 되어 보입니다.
최근에 프랑스 여객기가 브라질에서 오던 중 사고를 만나 추락하여 탑승객들 모두가 사망했다는 안타까운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런 사고가 언제라도 발생할 수 있기 때문에 비행기 타기를 두려워하는 사람이 있기 마련입니다. 그렇다고 사고가 무서워 비행기도 자동차도 배도 못타고 그냥 걸어만 다닐 수는 없는 세상입니다. 어떤 교통수단을 이용하든지 승객은 운전자의 안전운행을 믿으며 생명을 맡기고 함께 갑니다. 이왕 여행하는데 창밖으로 펼쳐지는 넓은 세상을 즐기며 가는 것이 좋지 않을까요?
가나안을 향해 여행하던 이스라엘 사람들 중에는 별로 즐겁지 않은 마음으로 가던 사람들도 참 많았던 것 같습니다. 물론 도중에 힘든 일들을 많이 만났습니다. 하나님께서 거저 주시는 가나안 땅이지만 그래도 사람이 해야 할 일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땅을 주겠다고 약속하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원하시는 것 한 가지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오직 하나님을 신뢰하고 그 땅을 향해 순종하며 행진하라는 것입니다. 어쩌면 대단히 쉬워보이는 요구인데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걸 못하고 말았습니다.
우리가 그 상황에 있었다면 어땠을까요? 홍해를 육지처럼 건넜고 매일 아침 하늘에서 내리는 만나를 먹는 기적을 체험하고 살면서 광야를 걷는 그 정도 수고도 못하고 원망하며 불평하느냐고 그들을 비난하기도 합니다만 우리가 그 처지가 되어보면 그들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우리 역시 하나님 나라를 약속받고 여행하는 나그네들이기는 마찬가지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 길을 잘 걷고 있습니까? 도중에 예상치 않았던 어려운 문제를 만날 때 나는 어떤 식으로 그 어려움을 통과하고 있습니까? 누구든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로 믿고 고백하며 사는 사람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그의 나라 시민으로 산다고 말씀하시는데 그 말씀을 액면 그대로 믿고 살고 있습니까?
‘글쎄요, 어쩌면, 아마도 그럴걸요?, 죽어봐야 알지요, 잘 모르겠습니다’ 이런 식으로 대답하고 있지는 않는지요? 하나님께서는 내가 항상 너희와 함께 하겠다고 하시는데 그 약속을 받은 사람들이 이 놀라운 약속에 감격함도 없고 감탄할 줄도 모른체 인생길을 나 홀로 걸으려 하고, 내 능력과 내 의로움을 의지하고 사느라 전전긍긍하고 있지는 않는지요?
내년이면 남아공에서 열리는 월드컵 축구 경기가 기대됩니다. 이번에는 남북한 팀이 동시에 본선에 나가게 되어 그 어느 때보다 흥미진진한 경기가 될 것 같습니다. 지난 2002년 월드컵 때 우리 나라가 4강에 들어간 감동이 아직도 남아 지금도 그때 경기 녹화 장면을 보면 여전히 스릴 넘치고 신이 납니다. 그런데 녹화 테입을 보는 사람은 실황중계를 볼 때와는 달리 긴장감이 덜합니다. 게임이 우리에게 불리하게 진행되고 먼저 골을 먹어 패색이 짙어보여도 열받지 않고 느긋하게 팝콘 먹으며 경기를 즐깁니다. 골을 먹고 밀리는 광경을 보면 아쉽기는 하지만 그래도 끝에 가면 우리가 이긴다는 확신이 있으니 한숨 쉬며 선수들에게 고함지르고 열받지 않아도 됩니다. 조금 있으면 안정환 선수가 골든 골을 넣게 되었으니까요. 이미 결과를 알고 보는 경기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나라 시민으로 살아가는 우리가 이런 느긋한 마음으로 인생길을 여행해야 되지 않을까요? 결과를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비록 지금 상황으로는 죽을 맛이고 희망의 빛이라고는 한 줄기도 없이 막막하지만 그 순간조차 한 가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그래도 우리는 이 어려움을 통과하여 결국 그 나라에 다다를 것이라는 확신입니다. 조웰 오스틴이 말하는 ‘긍정의 힘’ 처럼 긍정적인 사고방식을 가지면 당신이 인생에서 원하는 것을 이룬다는 식의 별로 성경적이지 않은 인간적 사고방식에서 나오는 확신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의연하게 가라는 말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그리스도인의 믿음입니다. 조금만 견디고 참으면 금방 안전한 곳을 만나게 될텐데 그 찰나를 견디지 못하여 하나님을 향해 투덜거리고 할말 못할 말 다 쏟아붓고 휑하니 뒤돌아 옛날로 가버리지 말아야 합니다.
어느 목사님이 쓴 글에서 읽은 내용을 인용합니다. “종교 개혁자 마틴 루터가 학창 시절에 겪었던 이야기입니다. 독일에서는 고학생들 중에 노래 잘하는 학생들이 남의 집 창문 밖에서 노래를 부르고 돈을 받는 관습이 있었다고 합니다. 물론 노래를 너무 못하거나 주인이 고약한 사람이면 무안을 당하고 빈 손으로 쫓겨날 수도 있었습니다. 하루는 루터가 어느 부잣집 창문 아래서 큰 소리로 노래를 불렀습니다. 노래를 시작하자 마자 험상궂고 건장한 사나이가 창문을 열고 내려다 보더니 갑자기 뛰어나왔습니다.
루터는 이 사나이가 자기 노래를 듣기 싫어 혼내주려고 나오는 줄 알고 도망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이 사나이는 끈질기게 뒤쫓아 왔고 루터는 기어코 그 사람에게 붙들리고 말았습니다. 겁을 잔뜩 집어먹은 루터는 무서워 벌벌 떨고 있는데 그 사람이 루터에게 돈뭉치를 불쑥 내밀었습니다. 알고보니 그 사람은 루터에게 장학금을 주려는 따뜻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었더랍니다. 나중에 루터는 그 일을 회상하면서 ‘나는 목소리가 별로 좋지 않다는 열등의식 속에 노래를 하다보니 그 사람이 뛰어 나올 때 자기를 해치려는 사람인 줄 알고 도망했었다’ 고 하였습니다. 그러면서 루터는 ‘두려움의 안경을 끼고 세상을 보면 세상만사가 다 걱정과 염려로 가득 차 있고, 믿음이라는 안경으로 바꿔 끼면 세상이 다 감사하고 좋게 보이며 하나님의 손길이 보인다’ 고 했답니다.”
생각을 바꾸어야 합니다. 투덜대고 징징거리는 자세로 인생을 살지 말고 즐거움으로 내 앞에 놓인 짐을 지고 갑시다. 지금까지 나를 인도하신 하나님 사랑에 감사하며 가다가 좀 힘들거든 앉아서 쉬고 또 일어나 갑시다. 이스라엘을 광야에서 앞장서 인도하던 구름과 불기둥이 한 시도 쉬지 않고 움직인 것은 아니었습니다. 사람이 감당할 정도로, 견딜만한 정도로 우리를 몰고 가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질병과 사고와 이별과 실패... 이런 불행한 일들이 우리를 천국으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계획 속에 들어있을까요? 물론입니다. 그런 어려움을 통해 우리를 연단하시고 더 큰 짐도 지고 갈 수 있도록 시험하여 강하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계획이 분명합니다.
‘목적이 이끄는 삶’이라는 책에서 릭 워렌 목사님은 “나 자신의 삶 속에서 하나님이 문제들을 통해 나의 믿음을 테스트하시고, 내가 나의 소유를 어떻게 다루는가에 따라 나의 소망을 테스트하시며, 내 주위의 사람들을 통해 나의 사랑을 테스트하고 계심을 깨달았습니다” 고 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나의 인생 길에서 만나는 크고 작은 문제들을 던져 주시고 내가 그 문제들을 어떻게 다루는가 살펴보고 계십니다.
릭 워렌은 말하기를, “가장 중요한 테스트는 나의 인생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전혀 느끼지 못할 때 내가 어떻게 행동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때때로 하나님께서는 의도적으로 뒤로 물러서 계실 때가 있습니다. 그때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 가까이 계심을 느끼지 못하기도 합니다. 사람들이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를 즐기지만, 때로는 내 인생의 가장 험악한 순간에 나의 성품을 테스트 하시려고 나 홀로 두십니다. 나의 약함이 노출되게 하심으로 나의 마음 속에 있는 것들이 그대로 드러나도록 테스트하십니다.” 하였습니다. 이것이 나의 믿음을 테스트하는 한 방식입니다. 문제들을 만났을 때 나의 반응 방식에 따라 믿음이 있고 없고가 비로소 드러납니다.
광야의 이스라엘은 두려움의 안경을 끼고 가나안을 바라보고 말았습니다. 그 아름다운 가나안 땅이 순식간에 절망의 땅으로 보였고 죽음의 땅으로 보였습니다. 절망은 불신앙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않고 저버린 불신앙입니다. 내 안에 내 계획, 내 야망, 내 욕심만 가득하다 보니 하나님의 약속이 설 자리가 없습니다. 그래서 그런 것들이 무너지면 자포자기로 가던가 심지어 죽음으로 인생을 끝장내려고 합니다. 절망은 순식간에 사람들에게 몰려오지만 희망은 서서히 떠오릅니다. 떠오르는 아침 해처럼 서서히 밝아오는 희망은 오래 참음이 필요합니다.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시고 예수께서 나를 구원하셨다는 확실한 믿음을 가지고 끝까지 견디고 참으며 주께서 나에게 주실 그 영광을 기다릴 줄 아는 성도로 살아갑시다.
히브리인들을 가나안 땅으로 들여보내지 않으실 거라면 애당초 그들을 애굽에서 건져내지도 않으셨을 하나님이십니다. 가나안으로 데려가지 않으실 거라면 홍해에서 바로의 군대에게 붙잡혀 끌려가도록 내버려두셨을 겁니다. 가나안의 기름진 땅에서 풍성한 열매를 먹고 살도록 해주시지 않을 거라면 광야에서 하늘의 만나도 내려주실 필요가 없으셨을 겁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를 영원한 하나님 나라로 들여보내지 않으실 거라면 우리를 옛날의 죄악된 삶에서 꺼내주시지도 않으셨을겁니다. 하나님의 뜻이 과연 그렇다면 험한 인생의 나그네 삶에서 고민하고 아파하는 우리를 무관심으로 방치하실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맘 내키는대로 살다가 마지막 두려운 심판의 자리에 이르도록 구경만 하고 계실 분이 아니심을 믿습니다.
정탐군을 보낸 목적은 가나안의 거인들을 보고 놀라 겁먹고 애굽으로 돌아가도록 하려고 하신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 백성으로 하여금 현실을 똑바로 보게 하십니다. 그 땅의 아름다움을 인정하게 하시고 우리처럼 비천한 사람들에게 그 아름다운 땅을 선물로 주신다는 엄청난 약속을 하신 하나님을 찬양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오늘은 많이 힘들지만 조금만 더 가면 그 아름다운 땅으로 들어갈 수 있다는 희망을 더 강하게 가지고 여행하라고 보내신 겁니다. 하나님의 의도는 가나안 땅을 보고 그것을 주신 하나님을 바라보라는 거였지 메뚜기처럼 초라한 자신을 보던가 가나안 땅의 거인들을 보고 주저앉아 울고불고 원망하라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고 그 나라에 들어가는 마지막 순간까지 하나님의 약속을 붙잡고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찬양하라고 하신 것이지 오늘과 내일의 힘든 길을 원망하고 투덜거리며 가라고 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생각을 바꾸면 길이 보입니다. 즐기며 감사함으로 가야 할 길을 마지 못해 끌려가는 포로처럼 죽을 상으로 가지 않기를 바랍니다. 생각을 바꾸면 천국 길은 고생 길이 아니라 특권이 됩니다. 하나님께서 아무에게나 이런 기회와 특권을 주시지 않으십니다. 좁은 길, 십자가의 길은 아무에게나 허락하시는 길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 앞에 놓인 험한 길을 두려워하지 말고 하나님께서 함께 가신다는 약속, 끝내 이기게 하신다는 그 약속,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내가 너를 자녀 삼았다는 그 분명한 약속을 믿고 나갑시다.
그들은 우리의 밥이라
민 14:1-10 / 김정호 목사
요즘 세상 사람들은 모두 스마트폰 교에 깊이 빠져 있습니다. 어른이나 학생들이나 어린이들까지 모두 스마트폰을 손에서 뗄 줄 모릅니다. 지하철이나 식당이나 어디를 가든지 사람들이 서로 바라보며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니라 스마트폰을 두 손으로 잡고 화면을 보면서 기도하고 있습니다. 학생들은 스마트폰 화면을 보면서 길을 가고 일상생활을 합니다. 심지어 고등학생들 사이에서는 옛날에 ‘4시간 자면 서울대 가고 5시간 자면 서울대 못 간다’는 말이 “스마트폰을 버리면 서울대에 가고 스마트폰을 버리지 못하면 서울대 못 간다”라는 말로 바뀌어 사용되고 있습니다. 스마트폰교의 교주 스티븐 잡스(Steven Paul Jabs)는 1955년에 이 세상에 로그인(login)하여 2011년 56세에 로그아웃(logout) 되었습니다. 그가 이 세상에 뿌려놓은 업적은 실로 대단합니다.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이 편하게 사용하는 PC와 스마트폰이 인간이 실제로 할 수 없는 세계를 실제처럼 만들어 내는 CG 기술의 원천, 음악을 걸어 다니면서 들을 수 있도록 한 MP3도 모두 그의 머리에서 나왔습니다. 현대인들의 마음과 눈과 손과 삶을 꽉 움켜쥐고 있는 종교이상의 종교가 되었습니다. 중독을 넘어 신앙화 되었습니다. 이 스마트폰 때문에 정신이 딴 데 가 있고 말씀과 기도와 교회를 멀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리와 기도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현실입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언제나 어렵고 신앙생활 하기가 만만하지 않습니다. 방해와 유혹이 언제나 가까이 있습니다. 교회와 성도는 이런 것들 앞에서 우리는 메뚜기라는 메뚜기 콤플렉스를 가질 것이 아니라 그들은 우리의 먹이라고 외치고 정복해야 합니다. 그들 앞에 무릎을 꿇는 것이 아니라 그 모든 것을 무릅쓰고 일어나 극복하고 정복하는 교회와 성도들이 되어야 합니다.
오늘 말씀은 가나안을 40일 동안 정탐한 이스라엘의 12명의 지파 대표들이 보고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 중 10명이 ‘우리는 메뚜기다’고 부정적인 보고를 하였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불신앙적인 반응을 보였습니다. 그러나 여호수아와 갈렙은 ‘그들은 우리의 먹이라’라고 긍정적인 보고를 하였습니다. 부정이 아닌 긍정적인 생각과 신앙으로 오늘의 많은 어려움과 고통과 문제를 극복하고 승리하는 이 시대의 여호수아와 갈렙 같은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드립니다.
1. 원망하지 맙시다
본문 2-3절 “이스라엘 자손이 다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며 온 회중이 그들에게 이르되 우리가 애굽 땅에서 죽었거나 이 광야에서 죽었으면 좋았을 것을 어찌하여 여호와가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칼에 쓰러지게 하려 하는가 우리 처자가 사로잡히리니 애굽으로 돌아가는 것이 낫지 아니하랴”
이스라엘 백성들은 매사에 그리고 언제나 원망 투성이며 원망덩어리였습니다. 원망하는 기계이었습니다. 평생 기대하던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 없다는 10명의 보고를 들은 백성들이 원망을 쏟아 냈습니다. 모세와 이론을 원망했습니다. 애굽땅이나 광야에서 죽었으면 좋았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원망하고 선동을 하였습니다. 원망은 원망을 낳습니다. 더 큰 원망을 하게 됩니다. 평생 원망의 인생이 됩니다. 원망의 사람이 되면 그 주위에 모든 사람들이 불행해지고 멸망과 저주를 받게 됩니다. 이 원망으로 인하여 10명의 정탐꾼과 20살 이상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광야에서 질병과 고통으로 죽게 되었습니다. 원망은 습관이고 질병입니다. 사탄이 역사하면 원망하게 됩니다.
소년시절의 안데르센의 꿈은 오페라 가수가 되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아버지가 11살에 돌아가셔서 직물공장 직공이 되었지만 가수가 되는 꿈은 버리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는 유명한 음악가를 찾아다니며 제자로 삼아 줄 것을 부탁하였지만 그를 받아 주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포기하지 않고 덴마크 왕립 음악학교 교장선생님 댁에 살면서 노래공부를 하였지만 지독한 감기로 인하여 목소리가 변질되어 가수의 꿈을 접어야 했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실망하지 않고 가수가 되지 못하면 배우라도 되겠다고 결심하고 온갖 노력을 기울인 끝에 간신히 배역 하나를 얻어 첫무대에 섰지만 결과는 “당신은 재능이 부족하므로 무대에 설 생각을 마시오”라는 판정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래도 그는 절망하지 않고 노래도 못하고 연기도 못한다면 글을 써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어 동화를 쓰기 시작했으며 세계적인 명성까지 얻게 되었습니다. 성공하려면 절망에는 끝까지 둔감하고 희망에는 끝까지 민감해야 합니다. 도전 없는 성공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도전했다가 실패하면 50% 실패한 것이지만 도전조차 하지 않는다면 100% 실패한 것입니다. 무슨 일을 하던지 위험은 따르게 마련입니다. 위험이 있다고 도전하지 않는다면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사망사고 원인의 20퍼센트는 자동차 사고이기 때문에 자동차를 탈 수 없습니다. 비행기, 열차, 배로 여행할 수도 없습니다. 모든 사고 중 16퍼센트가 이런 것으로 인해 발생하기 때문입니다. 거리에 걸어 다닐 수도 없고 집에 있을 수도 없습니다. 집에서 침대에서 자다 죽은 사람도 많아 잠을 자는 것도 두렵습니다.
미국의 소매상협회에서 세일즈맨의 거래실적과 집념의 상관관계를 연구 공개했습니다. 물건을 판매할 때 세일즈맨 중 48%는 단 한번 권유하고 포기합니다. 25%의 세일즈맨은 두 번 권유하고 포기합니다. 15%의 세일즈맨은 세 번 권유하고 포기합니다. 세일즈맨 중 오직 12%만이 네 번 이상 권유합니다. 그러나 놀라운 사실은 네 번 이상 권유하는 12%의 세일즈맨이 전체 판매량의 80%이상을 차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결국 88%의 세일즈맨이 판매한 상품은 고작 20%에 불과했습니다. 도전하는 자에게 정상은 자리를 내어 줍니다.
「도전만이 희망이다」라는 책을 쓴 정훈기 씨는 뇌성마비 장애인입니다. 그러나 그는 절망하지 않고 1994년에 뇌성마비 장애인 최초로 서울대학교에 입학하여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였습니다. 성공하는 사람은 도전의 줄을 놓지 않습니다. 미국의 교육가인 존 듀이가 90회 생일을 맞았을 때 한 신사가 “그동안 많은 일들을 하셨는데 이제 무엇을 할 생각이십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가 대답했습니다. “산맥은 깊습니다. 산 하나를 넘으면 또 다른 산이 있지요. 나는 여전히 새로운 산을 향해 올라갈 것입니다.”도전할 높은 산이 보이지 않는다면 이미 그 인생은 끝난 것과 다름없습니다. 일본 정부로부터 ‘의지의 기업인’으로 표창을 받은 쇼가키 야스히코씨는 부친까지 무려 37대가 의사 집안에서 태어났답니다. 도쿄대 물리학과를 졸업한 그가 선택한 첫 사업은 레스토랑이었습니다. 그러나 취객이 난로를 넘어뜨려 가게가 몽땅 타버렸습니다. 그는 다시 스파게티 전문점을 내어 5년 동안 혼신의 힘을 쏟았으나 찾아오는 손님은 적었습니다. 그는 음식 값을 절반으로 내렸습니다. 이때부터 야스히코의 사업은 불이 붙었습니다. 체인점은 193개로 늘었고 한 해 매출액은 무려 2천 4백억 원이 되었습니다. 끊임없는 도전 정신의 열매입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대저 의인은 일곱 번 넘어질지라도 다시 일어나려니와 악인은 재앙으로 인하여 엎드러지느니라(잠언 24:16)”
여러 가지 일들이 힘들고 어렵고 제대로 되는 일이 없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과 부모와 이웃을 원망하거나 불평하지 말고 감사와 용기와 도전 정신으로 “그들은 우리의 먹이라”는 긍정적인 믿음으로 승리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드립니다.
2. 거역하지 맙시다
본문 9절 “다만 여호와를 거역하지는 말라 또 그 땅 백성을 두려워하지 말라 그들은 우리의 먹이라 그들의 보호자는 그들에게서 떠났고 여호와는 우리와 함께 하시느니라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하나”
“다만 여호와를 거역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원망하는 성난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하여 여호수아와 갈렙은 목숨을 걸고 여호와를 거역하지 말라고 옷을 찢으면서 외쳤습니다. 어떤 일이 있어도 여호와를 거역하는 선을 넘어서는 안 됩니다. “한국 민족은 기분 나쁘면 천당도 안 간다”라는 말이 있기는 하지만 그러면 불행한 것입니다. 마지노선을 넘어 갈 데까지 가면 안 됩니다. 그만 하고 여호와께로 돌아가야 합니다. 여호와를 거역하는 것은 여호와의 약속을 믿지 않는 것과 여호와의 뜻을 거부하는 악행을 의미합니다. 여호와는 가나안을 이스라엘 민족에게 약속하사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해방시켜 가나안에 하나님의 거룩한 나라를 건설하는 것이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여호와를 거역하지 아니하면 여호와의 약속대로 손쉽게 정복할 수 있는 것입니다. 내게 불가능한 것이 여호와께도 불가능한 것은 아닙니다. 나 정도의 여호와가 아닌 전능하신 여호와이심을 믿어야 합니다. 믿음이 부족하면 여호와를 거역하게 됩니다. 거역은 믿음의 파산선고입니다. 더 이상의 희망도 기회도 없는 막장인 것입니다.
하버드 메디컬 스쿨에서 의학박사, 교수, 의사로 근무했던 이븐 알렉산더(Eben Alexander)는 뇌의학에서 세계적인 권위자이자 신경외과 전문의입니다. 그는 ‘죽었다가 살아난 사람들’의 경험을 모아서 <나는 천국을 보았다>라는 책을 펴냈습니다.(우리나라에는 2013년에 김영사에서 출판되었습니다.) 2012년 10월 미국 시사주간지 <뉴스위크>가 이 의사의 ‘사후세계 체험기’를 표지 기사로 실었을 정도로 죽었다가 살아난 사람들의 이야기는 흥미로운 이야기로 가득합니다. 죽었다가 살아난 사람들은 대부분 죽기 전과는 전혀 다른 태도로 세상을 산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죽어 보니 천국이 있고 지옥이 진짜로 있었거든요. 이 땅에서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천국으로도 가고 지옥으로도 간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나서 어떻게 이 땅에서 지옥으로 갈 일을 하고 살겠습니까? 당연히 모든 것이 다 바뀔 수밖에 없지요. 그런데 예수를 진짜로 확실하게 믿으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사람처럼 그렇게 확! 변하게 됩니다. 그렇게 변한 상태를 ‘거듭났다’고 합니다. 다시 태어난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예수 안에서 거듭난 사람은 옳고 그름의 판단을 이제 세상 사람처럼 하지 않게 됩니다. 예수 안에 굳게 서서 두려움 없이 세상의 온갖 풍조에 휩쓸려 내려가지 않으며 남들이 무어라 해도 오직 예수님이 정해준 기준을 따라 살아가게 됩니다. 예수 안에서 거듭난 사람은 세상이 준다고 하는 행복이 거짓이라는 것을 알고 세상에서 즐거움을 구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거듭난 하나님을 찬양하기를 즐거워하고 하나님을 두려워합니다. 예수 안에서 진짜로 거듭난 사람의 삶의 목적은 오직 하나님을 즐겁게 하는 것이며 이 목적을 향하여 앞만 보고 전진할 뿐입니다. ‘대저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요일 5:4)
하나님의 사람은 어떤 고난과 고통이나 유혹이나 시험에서도 결코 하나님을 부인하거나 돌아서거나 거역하지 않습니다. 구원의 확신과 믿음이 없거나 부족할 때 거역이라는 현상이 일어납니다. 우리는 평생 신앙생활을 하면서 거역이라는 것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과 교회와 부모와 어른과 목회자를 거역해서는 안 됩니다. 거역하는데 앞장을 서도 안 되고 남을 거역하게 만들고 조정하는 사람이 되어서도 안 됩니다. 순종하고 청종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성령 충만하고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사람들의 공통점은 절대적인 순종입니다. ‘아니오’가 아니라 ‘예’만 할 뿐입니다. 10명의 정탐꾼과 믿음 없는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거역하는 저주의 삶이 아닌 여호수아와 갈렙처럼 ‘그들은 우리의 먹이라’고 고백하고 순종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드립니다.
3. 두려워하지 맙시다
본문 9절 “다만 여호와를 거역하지는 말라 또 그 땅 백성을 두려워하지 말라 그들은 우리의 먹이라 그들의 보호자는 그들에게서 떠났고 여호와는 우리와 함께 하시느니라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하나”
‘그 땅 백성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두 번이나 여호수아와 갈렙은 순교자적인 자세로 외쳤습니다. 가나안 백성을 향한 여호와의 보호 기능은 일반적 은총인데 일상생활을 영위할 수 있도록 배려하신 보호입니다. 구원을 목적한 보호가 아닙니다. 가나안 원주민에게는 이제 이러한 배려까지 철회된 상태이므로 그들은 전혀 희망 없는 족속들임을 강조한 말입니다. 하나님이 그들을 떠났기에 그들은 이스라엘의 먹이(밥)에 불과합니다. 하나님께서 일찍이 아브라함에게 예언하신바 가나안 족속에 대한 심판 유예 기간이 이제 끝났던 것입니다. 정곡을 찌르는 여호수아와 갈렙의 설득에 오히려 백성들이 완전히 이성을 잃고 설치는 격앙된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여호수아와 갈렙을 돌로 쳐서 죽이려 할 때 여호와의 강력한 영광이 나타나 여호수아와 갈렙을 지키시고 보호하셨습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한 어머니가 출가한 딸의 집에 갔습니다. 아침에 일어나 보니 딸은 자고 있는데 사위가 일찍 일어나 혼자 아침식사를 해먹고 출근하는 것이었습니다. 자신의 딸을 아껴주는 사위를 보며 대견스럽게 생각하였습니다. 다음날 아들집에 갔습니다. 아침에 일어나 보니 며느리는 자고 있는데 아들이 일찍 일어나 혼자 아침식사를 해먹고 출근을 하였습니다. 어제와는 달리 아들이 측은하게 보였고 며느리가 괘씸하게 느껴졌습니다. 똑같은 상황이지만 느낌과 평가는 전혀 달랐습니다. “대견스럽게 보이던 사위, 측은하게 보이는 아들, 기특한 딸, 괘씸한 며느리…….” 왜 이런 차이가 생기게 됩니까? 자기 입장에서 보기 때문입니다. 사위가 집안일 하는 건 기특하고 아들이 집안일 하는 건 못 참는 것입니다. 딸이 딸 낳으면 살림밑천이고 며느리가 딸 낳으면 그래도 듬직한 건 아들이라고 말합니다. 아들이 살찌면 부은 것이고 사위가 살찌면 딸이 잘한 것입니다. 딸네 시어머니 오실 땐 어른이 주책이 없는 것이고 자신이 아들 집에 가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딸에게는 옷 좀 사 입으라고 하고 며느리에게는 옷 많다고 구박합니다. 딸이 애 맡기면 스트레스 풀고 오라고 하고 며느리가 애 맡기면 늦지 말고 들어오라고 합니다. 어떤 입장에서 보냐에 따라 말과 태도가 달라집니다. 관점의 차이입니다. 시각의 차이입니다. 사람에게는 보고 듣고, 만지고, 맛보고, 냄새를 맡는 오관(五觀)이 있습니다. 관(觀)이라는 말은 보통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주의 깊게 의도적으로 보는 것을 말합니다. 어느 입장에서 사물을 의미 있게 보느냐를 말합니다. 자신이 서있는 입장을 고려한 말입니다. 그래서 어느 입장에 서느냐에 따라 인생관, 역사관, 국가관, 시국관, 세계관, 가치관 등이라는 말이 생기게 됩니다. 어떤 색깔의 안경을 끼느냐에 따라 세상의 색깔이 달리 보이듯 똑같은 사물 똑같은 사건이지만 며느리와 딸, 아들과 사위 어느 입장에 서냐에 따라 느낌과 감정, 말과 행동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바로 보기 위해서는 먼저 공시적(公示的) 관점으로 보아야 합니다. 나무를 정확히 보려면 전화 좌우에서 보아야 합니다. 보는 공간의 폭을 넓혀야 합니다. 코끼리의 코만 보면서 코끼리를 뱀 같다고 말하면 안 됩니다. 공시적(公示的) 관점 즉, 전체적으로 보아야 합니다. 인간관계에서는 “입장을 바꾸어 생각해 보라”는 말과 같은 말입니다. 며느리 입장에서, 사위입장에서 생각해보면 같은 상황일지라도 생각과 느낌은 달라집니다. 똑같은 상황이지만 서 있는 자리 즉 입장을 바꾸어 보면 눈에 보이는 것이 달라지고 느낌과 생각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편견과 아집에서 벗어날 수 있는 눈이 생기게 됩니다. 둘째는 통시적(通時的) 관점으로 보는 것입니다. 단순히 아침 밥 해먹는 모습만 보고 판단할 것이 아니라 결혼하여 진행된 아들과 며느리의 관계 속에서 사건을 판단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아침밥을 해 먹고 가는 전후 사정을 알게 될 것이고 그 정황 속에서 판단을 하면 보다 바른 판단을 할 수 있습니다. 한 단어만 붙들고 전체 문장을 판단하는 것처럼 시간을 빼어 놓고 순간만 판단하면 바른 판단이 되지 못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시간적 관계 속에서 상황은 판단되어야 합니다. 과거 없이 현재만 있을 수 없고 현재 없이 미래가 존재할 수 없습니다. 과정 속에서 모든 것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셋째는 초월적(超越的) 관점으로 보는 것입니다. 신앙인으로 말하면 하나님의 시각으로 보는 눈입니다. 신앙인은 이 눈이 발달되어 있어야 합니다. 모든 것을 볼 때 “하나님께서 어떻게 보실까?”에 집중해야 합니다. 그럴 때 인간의 한계를 뛰어 넘어 공시적인 눈과 통시적인 눈을 동시에 가질 수 있습니다. 아무리 자신을 객관화시키려 해도 시간과 공간의 제한을 받아 주관의 늪을 벗어날 수 없습니다. 주관은 항상 존재하는 것이고 자신의 입장에서 모든 것을 판단할 수밖에 없는 것이 인간입니다. 이것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눈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의 시각으로 상황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잃은 것보다 남은 것, 없는 것보다 있는 것, 문제보다 해결, 방해물보다 목표물, 미움보다는 사랑의 눈으로 보십니다. 하나님의 시각을 가진 요셉은 보복이나 앙갚음을 두려워하는 이복형제들에게 “형님들은 나를 해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악을 선으로 바꾸어 주셨습니다.”(창세기 50:20)라고 고백합니다. 오늘 이 시대는 초월적인 하나님의 시각을 가진 사람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공시적, 통시적, 초월적 관점으로 사람이나 사건이나 미래나 세상을 바라보면 무엇도 두렵지 않습니다. 한 부분만 보면 두렵고 떨리는 것입니다. 특별히 하나님의 시각으로 보면 두려움이 아니라 담대하게 살 수 있습니다. 성경에는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씀이 366번 나온다고 합니다. 윤달까지 배려하신 것입니다. 매일 두려워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우리 인생의 가나안과 아낙 자손은 우리의 먹이입니다. 하나님을 신뢰하고 하나님의 시각으로 두려움 없이 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 드립니다.
사랑하는 번동가족 여러분!
우리를 포함한 현대인들이 인생 거인 아낙 자손 앞에서 원망하고 거역하고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여호수아와 갈렙처럼 하나님만 믿고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하나님의 시각으로 ‘그들은 우리의 먹이라’고 담대하게 고백하고 선포하고 승리하는 성도가 되시기를 축원드립니다.
그 땅을 우리에게 주시리라
민 14:1~10 / 김광일 목사
1930년 미국 경제 대공황 당시 활동하던 클래런스 대로(Clarence Darrow) 변호사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존재를 부인하던 무신론자였습니다. 경제적으로 상황이 어려워지자 무신론을 전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하고 강연을 할 때마다 “여러분, 이 사태를 보십시오. 하나님이 살아 계신다면 어려운 상황을 주시겠습니까? 우리가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있는 것만 보아도 분명히 하나님은 안 계십니다”라고 주장했습니다. 한번은 흑인들이 모여 있는 자리에서 무신론 강연을 하면서 “여러분, 우리는 다 잃어버렸습니다. 꿈과 재산을 잃었고 노래까지 잃었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어떻게 노래를 부를 수 있단 말입니까?”라고 외쳤습니다. 그때 뒤에 있던 할머니가 손을 번쩍 들며 “저는 노래할 수 있습니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아니, 이 지경이 됐는데 어떻게 노래할 수 있단 말입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할머니는 큰소리로 “예수님 때문에 노래할 수 있습니다”라고 외쳤습니다. 그러자 이곳저곳에서 흑인들이 “맞습니다. 할렐루야! 예수님 때문입니다”라고 목소리를 높이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이 없다고 외치던 강연장의 분위기가 순식간에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인정하는 분위기로 바뀌었습니다. 클래런스 대로는 그들의 모습에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렇습니다. 삶이 어렵고 힘들어도 희망을 가질 수 있다면 바로 예수 그리스도 때문입니다.
본문은 가나안 족속들의 강대함 때문에 그 땅을 정복할 수 없다는 열 명의 정탐꾼 보고를 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반역하는 내용입니다. 백성들의 불신앙적 태도는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반역이자 통치권에 대한 반역이었습니다. 그러나 여호수아와 갈렙은 다른 태도를 보였습니다. ‘그 땅을 우리에게 주시리라’는 하나님의 약속을 상기시키며 이스라엘 백성들을 안심시켰습니다. 이렇듯 같은 장소에서 다른 태도를 보이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함께하심을 믿느냐? 믿지 못하느냐? 즉 믿음의 차이입니다.
힘들고 어려운 시대를 지내고 있습니다. 코로나로 인한 우울감이 심각해져 갑니다. 코로나 때문에 사업이 힘들고 대인관계가 무너지고, 교회들도 많이 어려워지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낙심하고 절망해야 합니까? 아닙니다. 갈렙과 여호수아와 같은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 땅을 우리에게 주시리라’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나아가야 합니다. 그 믿음으로 행하여야 합니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행하여야 합니까?
첫째로 원망하지 말아야 합니다
사이드 아베디니(Saeed Abedini) 선교사는 이란에서 모슬렘으로 태어났지만 목사가 되어 미국과 이란을 오가며 고아들을 위한 사역을 하다 2012년에 체포되었습니다. 이란에서는 전도가 불법이며 기독교로의 개종은 사형에 처해집니다. 그가 감옥에서 당했던 핍박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습니다. 심문을 받을 때마다 자신이 저지르지 않은 범죄까지 시인하고 서명하라는 강요를 받았습니다. 매번 거부하자 돌아오는 것은 엄청난 폭력과 고문이었습니다. 죄수들에게도 폭행을 당했습니다. 심한 구타로 내복부 출혈과 복통이 심했습니다. 장기 손상을 입은 상태였지만 적절한 치료를 제공받지 못했습니다. 그에게 더 힘든 것은 심리적 고문이었습니다. 다른 수감자들이 처형되는 모습을 보게 하고 간수들이 협박했습니다. “기독교 신앙을 버리고 이슬람 신앙으로 돌아오지 않는다면 형량이 늘어날 것이다. 그리고 죽을 때까지 매를 맞을 것이다! 너도 곧 사형될 것이다!” 그때 하나님의 음성이 들렸습니다. “아니다, 나는 아직 너를 위해 일하고 있다!” 그는 모든 일에 원망하지 않고 하나님을 붙잡았습니다. 아내가 금식하며 남편의 석방 운동을 전개하고 있었는데 하나님의 음성이 들렸습니다. “사이드에 관한 모든 일을 내려놓고 내게 맡겨라!” 그녀는 순종하며 기도하였습니다. 그 후 하나님께서 기적적으로 남편을 풀려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석방된 사이드 아베디니는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저는 믿음으로 시련을 통과할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이를 기회로 사용하셔서 복음이 전파되도록 하실 것도 알았습니다. 제가 겪는 시련은 가치가 있고, 의미가 있습니다. 이로부터 선한 것이 나올 것이라며 스스로에게 말하면서 용기를 북돋았습니다.”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원망해서는 안 됩니다.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아야 합니다. 믿음으로 바라볼 때 문제가 되지 않으며 해결되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본문 2절입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다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며 온 회중이 그들에게 이르되 우리가 애굽 땅에서 죽었거나 이 광야에서 죽었으면 좋았을 것을” 여기의 ‘원망하며’는 원어로 ‘와일로누’는 ‘으르렁거리듯 불평하다’라는 의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는 일에 한마음이 되었습니다. 원망은 강한 분노와 적개심을 동반하였습니다. 애굽이나 광야에서 죽었으면 좋았을 것이라고 불평하게 하였습니다. 결국 이스라엘 백성은 원망으로 인해 하나님의 심판을 받고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문제와 어려움 속에서도 하나님을 원망해서는 안 됩니다. 원망은 문제 해결의 길이 아니라 파멸로 이끌어가는 지름길입니다. 그러므로 문제 앞에서 원망하기보다 자신을 돌아보며 해결자이신 하나님께 도움을 요청해야 합니다. 그리할 때 문제를 해결해 주실 뿐 아니라 성숙된 믿음에 이르게 하실 것입니다.
둘째로 거역하지 말아야 합니다
아프리카에서 성공적 사역을 하였던 선교사에게 아프리카 선교 활동을 정말로 좋아하는지 물었습니다. 그러자 선교사의 대답이 뜻밖이었습니다. “이 일을 좋아하느냐고요? 천만에요. 저와 집사람은 더러운 것은 딱 질색이에요. 우리는 상당히 섬세한 감각을 지닌 편이거든요. 냄새나는 고약한 오두막에 기어들어가는 일은 아예 몸서리쳐져요. 그러나 자기가 싫다고 그리스도를 위해서 아무것도 하지 않을 수 있나요? 거역할 수 있나요? 좋다든지 싫다든지 하는 것은 선교사업과 아무 관계가 없어요. 우리는 그저 ‘가라’는 명령을 받아 갔을 뿐이죠.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를 강요한 것이니까요.” 할 수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가 아닙니다. 순종하느냐 하지 않느냐의 문제입니다. 선택은 우리의 몫입니다.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서 자신을 인정하고 겸손하게 나아갈 때 하나님을 거역하지 않게 됩니다. 그러므로 거역하지 않는 비결은 하나님을 향한 순종에 있습니다. 능력이 부족할지라도 하나님을 믿고 순종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거역하지 않습니다.
본문 9절입니다. “다만 여호와를 거역하지는 말라 또 그 땅 백성을 두려워하지 말라 그들은 우리의 먹이라.” 여기의 ‘거역하지는 말라’는 원어로 ‘알 티므로두’인데 ‘반역하다’라는 의미입니다. 원망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하여 여호수아와 갈렙은 옷을 찢으며 여호와를 거역하지 말라고 외쳤습니다. 여호와를 거역하는 것은 약속을 믿지 않는 행위이며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악한 행동이기 때문입니다. 가나안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는 것이 하나님의 계획이었기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거역하지 아니하였더라면 약속대로 그 땅을 정복할 수 있었습니다.
고통이 있어도 하나님을 거역하지 말아야 합니다. 거역은 믿음이 부족할 때 생기는 현상입니다. 그리스도인은 거역하는 일에 앞장서면 안 되고 다른 사람을 거역하게 하거나 선동해도 안 됩니다. 복을 받은 사람들의 공통점은 거역이 아니라 순종이었습니다. ‘아니오’가 아니라 ‘예’만 대답할 뿐입니다. 불신앙적 태도로 하나님을 거역하지 말아야 합니다. 여호수아와 갈렙처럼 ‘그 땅을 우리에게 주시리라’고 고백하며 하나님께 순종하시기 바랍니다.
셋째로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종교 개혁자 루터(Martin Luther)가 학창 시절에 겪었던 이야기입니다. 당시 고학생들은 남의 집 창문 밖에서 노래를 부르고 돈을 받던 관습이 있었습니다. 노래를 못하거나 고약한 주인을 만나면 빈손으로 쫓겨날 수도 있었습니다. 한번은 루터가 부잣집 창문 밑에서 노래를 불렀습니다. 험상궂은 주인이 창문을 열고 내려다 보더니 뛰어나왔습니다. 루터는 혼내려는 줄 알고 도망치기 시작했습니다. 주인은 뒤쫓아 왔고 루터는 붙들리고 말았습니다. 겁을 먹은 루터가 두려워하는데 봉투를 내밀었습니다. 장학금을 주는 것입니다. 루터는 그때 일을 회상하면서 “나는 목소리가 좋지 않다는 생각으로 노래를 하였는데 주인이 뛰어나오기에 해치려는 줄 알고 도망을 쳤다. 두려움의 안경을 끼고 세상을 보면 만사가 걱정과 염려로 가득 차 보이지만, 믿음의 안경으로 바꿔 끼면 세상이 좋게 보이며 하나님의 돕는 손길이 보인다’라고 고백하였습니다.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도리어 어려움을 통해 강하게 만드시는 하나님의 계획을 보아야 합니다.
본문 9절입니다. “그들의 보호자는 그들에게서 떠났고 여호와는 우리와 함께 하시느니라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여기의 ‘두려워하지 말라’는 원어로 ‘알 티라움’인데 ‘상황에 대한 불안’을 의미합니다. ‘그 땅 백성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두 번이나 여호수아와 갈렙은 외쳤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표현을 사용하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관심을 하나님께 집중시켰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일에 실패하고 가나안 족속들을 두려워하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호수아와 갈렙이 가나안 족속을 두려워하지 않았던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들의 보호자는 떠났고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면 큰 문제라도 해결할 수 있는 작은 문제인 것을 알게 됩니다. 믿음으로 문제를 바라보면 두렵지 않습니다. 불신앙적인 시각으로 문제를 바라보면서 낙심하지 말고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믿고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목적이 이끄는 삶(The Purpose-Driven Life)이라는 책에서 릭 워렌(Rick Warren) 목사는 “나의 삶 속에서 하나님께서 문제들을 통해 나의 믿음을 테스트하시고, 소유를 어떻게 다루는가에 따라 나의 소망을 테스트하시며, 주위의 사람들을 통해 나의 사랑을 테스트하고 계심을 깨달았습니다”라고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인생길에 크고 작은 문제들을 주시고 문제들을 어떻게 다루는지 살펴보십니다.” 이어서 릭 워렌(Rick Warren)은 “가장 중요한 테스트는 나의 인생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지 못할 때 내가 어떻게 행동하느냐입니다. 때때로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뒤로 물러서 계실 때가 있습니다. 그때 우리는 하나님이 가까이 계심을 느끼지 못합니다.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를 즐기지만, 때때로 내 인생의 가장 험악한 순간에 나의 성품을 테스트 하시려고 홀로 두십니다. 약함이 노출되게 하여 마음속에 있는 것들이 드러나도록 테스트하십니다”라고 말합니다. 어려움은 믿음을 테스트하는 하나님의 방식입니다. 문제를 만났을 때 어떻게 반응하느냐에 따라 믿음이 있느냐 없느냐가 드러나게 됩니다. 믿음이 있는 자들은 하나님의 약속을 바라보며 실망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힘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어려운 상황에 처했다고 할지라도 결코 낙심하거나 좌절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 앞에 하나님의 약속이 주어졌습니다. ‘그 땅을 우리에게 주시리라’는 약속입니다. 힘든 상황이나 환경을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며 평안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믿음 없는 사람들의 말을 듣지 말고 ‘그 땅을 우리에게 주시리라’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부디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원망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불순종으로 하나님을 거역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두려워하지 말고 모든 일 가운데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믿고 앞으로 나아가는 복된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바른 눈과 바른 신앙
민 14:1-10 / 임덕순 목사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세 가지 큰 선물이 있는데 하나는 하나님이 당신의 아들을 우리의 구주로 보내 주신 사실이고, 다음은 창조와 구원 설명서와 인생 사용설명서인 성경을 주신 것이고, 마지막 하나는 예수를 나의 구주로 믿을 수 있는 믿음을 주신 것입니다.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른다고 성경에 기록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믿음이라고 다 같은 믿음이 아닙니다. 세상에는 별스런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 다 있습니다. 자기 최면에 빠져 있으면서 자기는 믿음이 좋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고, 이단의 속임수에 빠져 있으면서도 하나님을 잘 믿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는 사람도 많습니다. 그렇다면 바른 신앙은 무엇이고 어떻게 해야 바른 신앙을 가질 수 있을까요?
이스라엘이 모세의 인도로 애굽에서 해방을 받아 2년 동안 광야 길을 걸어 가나안이 건너다보이는 가데스바네아에 도착했습니다. 거기까지 오는 도중에 불기둥과 구름기둥, 만나와 메추라기, 아말렉과의 전쟁에서 기적의 승리 등 수많은 하나님의 섭리와 기적의 도움을 경험하였고, 가나안에 들어가 살아야 할 삶의 법칙도 받았습니다. 이제 고생이 거의 다 끝이 났습니다. 요단강만 건너면 지난 2년 동안의 광야 생활이 끝나고 가나안에 들어가 평안하게 정착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스라엘에게는 이제 마지막 용기가 필요했습니다.
모세는 각 지파에서 지혜롭고 날쌘 족장 한명씩 열두 명을 선발하고 그들을 먼저 가나안 땅으로 보내면서 가서 그 땅을 정탐하고 돌아오라고 보냈습니다.
40일이 지난 뒤에 그들이 돌아와서 백성들을 모아 놓고 보고회를 열었습니다. 13장부터는 정탐꾼들이 보고하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열 두 명의 보고가 일치하지 않았습니다. 열 명의 견해와 두 명의 견해가 정 반대였습니다.
먼저 열 명이 보고합니다. "자 이것을 보십시오. 이것은 그 땅의 포도송이입니다. 그 땅은 과연 젖과 꿀이 흐르는 땅 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땅은 우리에게는 그림의 떡과 같습니다. 왜냐하면 그 땅의 주민은 모두 거인이었습니다. 그들에 비교하면 우리는 메뚜기 같습니다. 만일 우리가 그 땅에 들어가면 우리는 모두 죽음을 당할 것이고 우리의 처자가 저들의 노예가 될 것이 분명합니다. 우리를 여기까지 끌고 와서 죽게 만든 모세 영감이 원망스럽습니다. 이제 할 수 있는 일은 지도자를 새로 뽑아서 애굽으로 돌아가는 수밖에 없습니다. 어서 애굽으로 돌아갑시다."
이런 보고를 듣고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탄식하며 모세를 원망하다가 결국 하나님을 원망하기 시작했고 절망감에 휩싸여 하나 둘씩 울기 시작합니다.
그들의 통곡은 하나님을 원망하는 불신의 통곡이었습니다.
모세는 당황스러웠을 것입니다. 정확한 정보를 얻어서 가나안을 좀 쉽게 정복하기 위해서 일군을 세워 정보를 가져오라고 했더니 오히려 그들이 백성들을 낙심 시키고 절망에 빠뜨린 것입니다. 일을 하게 하려고 일꾼을 세웠더니 그 일꾼들이 일을 다 망치고 있습니다. 이런 낭패가 어디 있습니까? 어떻게 해볼 방법이 없었습니다.
이때, 여호수아와 갈렙이 옷을 찢으며 일어섰습니다. 그들도 가나안땅에 가서 살피고 돌아온 정탐꾼들 중에 두 명이었습니다.
"여러분! 우리의 말도 좀 들어보세요. 우리도 그 땅을 보고 왔습니다. 그 땅은 과연 젖과 꿀이 흐르는 옥토였습니다. 그곳의 원주민들의 체격이 크고 강해 보이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먼저 보고한 저 열 명이 보지 못한 것이 있습니다. 그들에게는 돕는 신이 없었습니다. 그들이 섬기는 신은 살아있는 신이 아니라 사람이 깎아 세운 생명 없는 우상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나라인 애굽 왕을 항복시키고 우리를 해방 시켜 주셨고 홍해를 갈라서 길을 내주셨던 여호와가 우리 하나님 아닙니까. 지난 2년 동안 날마다 만나로 양식을 공급하셨고, 반석에서 물을 내어 마시게 하셨고, 불기둥과 구름기둥으로 인도하시며 여기까지 인도하신 전능하신 하나님을 잊었단 말입니까? 그 하나님이 우리에게 가나안을 주신다고 약속하시고 이끌어 오신 것이 아닙니까? 우리가 가나안을 정복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 땅은 우리를 위하여 예비 된 땅이고 그 땅의 주민들은 우리의 밥이나 마찬가지니 믿음으로 전진합시다." 이렇게 힘차게 설득했습니다.
그러나 이미 열 명의 불 신앙적 보고에 낙심한 사람들, 패배주의 사상에 오염된 백성들은 용기를 얻기는커녕 오히려 돌로 두 사람을 치려고 덤볐습니다.
그때에 여호와께서 나타나셔서 백성들을 향하여 진노하시고 그들을 당장에 그 광야에서 다 멸하고 모세의 자손으로 다른 백성을 만들겠다고 하셨습니다.
모세는 하나님께 저들을 용서해 달라고 간청하였고, 하나님은 온유한 사람 모세의 간구를 들으시고 당장에 멸하는 것은 참으셨으나 그들을 다시 광야로 보내어 지난 2년 광야생활의 20배인 40년을 광야에서 살도록 하셨고, 그 사이에 그들은 광야에서 다 죽게 하여 세대교체가 이루어지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도 모르고 하나님의 손길도 보지 못하고 다만 가나안의 체격이 큰 원주민들만 보고 겁을 먹은 사람들은 한 명도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였고, 오직 여호수아와 갈렙 두 사람과 그날의 반역에 참여하지 않은 광야에서 태어난 후대들만 가나안 땅에 들어가 살게 되었습니다.
똑같은 가나안땅을, 똑같은 기간 동안에, 똑같은 눈으로 살피고 돌아왔는데 왜 열 사람의 보고와 두 사람의 보고가 이렇게 달랐을까요?
열 사람은 봄에 보고 두 사람은 가을에 보았습니까? 아닙니다.
열 사람은 군인들을 보고 두 사람은 농부들을 보았습니까? 아닙니다.
열 사람은 산위에서 보고 두 사람은 골짜기에서 보았습니까? 아닙니다.
열 사람은 외적 형편만을 보았고, 두 사람은 배후의 하나님도 보았습니다.
열 사람은 지식의 눈으로 보았고, 두 사람은 믿음의 눈으로 보았습니다.
열 사람은 자기들의 능력에 비추어 보았고, 두 사람은 하나님의 능력에 비추어 보았습니다. 인간의 능력은 한계가 있으나 하나님은 전능하십니다.
열 사람은 부정적으로 보았고, 두 사람은 긍정적으로 보았습니다.
결국 열 사람은 잘못 보았고, 두 사람이 잘 보았습니다.
잘못 본 열 사람은 자기 자신과 주변사람들에게 절망과 비극을 주었으나
잘 본 두 사람은 자신과 모두에게 믿음과 희망을 주었습니다.
2년 고생으로 광야생활을 끝내고 가나안에 들어갈 수 있었는데 다시 광야로 들어가 20배나 더 고생하도록 만든 요인이 하나님의 능력과 섭리를 보지 못한 불 신앙적이고 부정적인 눈이었습니다.
우리는 어떨까요? 우리는 사람과 사건을 볼 때 하나님의 뜻과 함께 봅니까?
시대를 보고, 교회를 보고, 사회를 보고, 사람을 보고, 사건을 볼 때, 하나님과 겹쳐서 보지 못하면 비극과 고통을 자신과 타인에게 가져다주는 법입니다.
여러분의 눈은 어떻습니까?
예수님은 “눈은 몸의 등불이니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 눈이 나쁘면 온 몸이 어두울 것이라" (마6:22-23)고 하셨습니다.
오늘 내 앞의 환경보다 배후의 하나님의 섭리를 바라 볼 수 있습니까?
자신의 능력의 한계보다 하나님의 능력에 비추어 볼 수 있습니까?
사람이나 환경보다 전능하신 하나님을 더 비중 있게 바라보십니까?
베드로는 파도치는 밤 사경에 바다 위를 걸었습니다. 거기가 바다인줄을 알면서도 예수님만 바라보았더니 출렁이는 바다 위를 밟고 걸어갈 수가 있었습니다. 주님을 바라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가 파도가 넘실거리는 바다를 바라보는 순간, 즉시 빠져버리고 말았습니다. 무엇을 주로 보느냐가 문제입니다.
사람들 중에는 바로 보는 사람보다는 잘 못 보는 사람이 훨씬 더 많습니다. 12명중에서 10명이면 80%가 넘습니다. 믿음의 눈은 없고 세상을 보는 눈만 가지고 신앙생활 하는 사람이 훨씬 더 많다는 말입니다. 세상적인 경험이나 자기 지식을 기준으로 신앙생활 하는 사람, 사람을 바라보고 남들 하는 대로 따라가는 사람들이 더 많습니다. 이스라엘 족장 중에도 그러했듯이 오늘 교회 안에도 그런 사람들이 더 많을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열두 정탐꾼들이 가나안을 살핀 기사를 기록한 앞장 13장에 보면,
"본다." "봤다." 라는 말이 여러 번 나옵니다. (13:25-33)
열 두 명이 다 봤다는 말입니다. 열 명도 봤고, 두 명도 똑똑히 봤습니다.
같은 대상인 가나안을, 같은 시기에, 같은 여건에서 봤다는 말입니다.
그런데도 바로 본 사람과 바로 보지 못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환경의 차이가 아니라 눈의 차이였습니다.
두 명은 하나님의 섭리를 보면서 신이 났고 감사 했지만,
열 명은 거친 형편만 보면서 불평하며 원망하며 절망했습니다.
두 명은 자신들의 능력보다 하나님의 능력에 비추어 할 수 있다고 보았고
열 명은 자신들의 능력만 생각하고 할 수 없다고 절망하고 원망했습니다.
비관적 눈을 가진 사람은 남도 불행하게 하고 자신도 불행하게 만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두 눈을 똑바로 뜹시다. 영의 눈과 육의 눈입니다.
현실도 바로 직시해야 하지만, 배후의 섭리자의 손길도 똑똑히 봐야 합니다.
내가 할 수 있는 범위도 알아야하지만 하나님은 전능하시다는 것도 믿읍시다. 그래서 "이것은 내 힘으로는 어림없구나" 하는 판단도 필요하지만 "그렇지만 하나님은 하실 수 있으니 순종하자!" 하는 믿음의 눈이 있어야 합니다. 이렇게 현실의 눈과 믿음의 눈, 두 눈을 가진 사람이 참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애초에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해방시켜 주신 이유가 가나안에 데려가서 살게 하시려고 해방시킨 것 아닙니까? 그 약속을 몇 번이나 하셨습니까? 하나님이 한번 시작하신 일을 중도에 포기하신 적이 있습니까? “너희 안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능히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라”(빌 1:6) 라고 말씀하였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우리가 중요하게 보아야 할 것은 내가 당한 오늘의 어려운 환경이나 세상의 여론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손이며 하나님이 약속입니다. 하나님의 손을 보지 않고 사람들만 바라보면 근심이 가득차고 원망이 나오게 됩니다.
그리고 남들에게도 불신과 원망을 전염시키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여호수아와 갈렙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가나안을 주시려 하신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랬기에 담대하게 그 땅은 우리의 밥이라고 말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저 가나안땅을 우리에게 주시려고 우리를 애굽에서 이끌어 내신 것이 아니냐, 가나안의 주민들이 강하다고 하나님께 문제가 되겠느냐, 하나님은 전능하시고, 역사를 주관하시는 분이시다. 하나님의 일은 실패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일에 쓰임 받는 사람은 망하지 않는다. 그러니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가자. 하나님의 종 모세에게 힘이 되어 드리자.’ 그들은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가나안의 형편만 바라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과 하나님이 일하시는 손과 방향을 바라보았기에 긍정적인 보고를 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선택하신 목적은, 천하 만민에게 하나님을 알리는 선전꾼을 삼아서 모든 사람이 하나님께 복을 받게 하려는 데 있었습니다. 그들을 가나안으로 가게 하시려는 이유가 그것이었습니다. 그들에게 줄 땅이 그것밖에 없어서가 아닙니다. 그들이 그동안 살아왔던 애굽의 고센을 줄 수도 있습니다. 그들이 애굽의 주인이 되게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가나안은 특별했습니다. 가나안땅은 북쪽의 메소보다미아, 남쪽의 애굽등 문명이 교차하는 곳이요 세계의 이목이 집중되는 곳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된 이스라엘이 거기에 살면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복을 받음으로 앗수르와 애굽과 바벨론 등 주변의 강대국들과 모든 나라에 하나님의 전능하심과 하나님의 사랑을 알리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들을 가나안으로 보내는 것이고, 남들과 다르게 살라고 훈련시킨 것입니다. 그들이 살아야 하는 삶은 거룩, 즉 다른 사람과 다른 삶이었습니다.
그들이 거룩한 백성이 되기 위해서 할 일은 안식일 성수였고, 십일조였고, 우상숭배와 도덕적인 죄를 버리는 삶이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모든 날을 똑같이 여기고 살아가지만, 그들은 엿새 동안은 자기의 일을 할 수 있는 날이지만 일곱째 되는 날은 여호와께 경배하는 일을 위해 바쳐야 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안식일성수를 세 번씩이나 명하셨습니다.(출 20:31:35:) 그리고 우상을 숭배하지 말고, 먹는 것이나 입는 옷도 구별되게 살라고 하셨습니다. 주변의 모든 이방인들에게 주목거리가 될 만큼 구별되게 살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들이 일곱날 중에서 하루를 쉬면 그만큼 일을 못하는데도 농사와 목축이 잘되고, 십분의 일을 바치면 그만큼 부족한 것이 아니라 도리어 은금이 증식되게 하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축복으로 그들이 부자가 되고 평안하고 행복하게 사는 모습을 이웃나라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싶으셨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가나안으로 보내시면서 그 가나안 땅을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가나안 땅은, 그들이 떠나온 애굽의 고센 땅에 비하여 형편없이 나쁜 땅이었습니다. 강우량이 아주 적어서 메마른 땅이고, 돌이 많아서 곡식을 심기에 적당하지 않았으며, 비탈이 많아서 목축하기에도 적합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모두가 생각하기를 거기서는 풍성해 질 수 없고 성공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땅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그 메마른 땅에 들어가서 살면서 광야에서 하나님께 배운 말씀대로 순종하기만 하면, 하나님은 때를 따라 비와 이슬을 적당하게 주시고 필요한 것들을 제때에 공급하셔서 그 땅에 젖과 꿀이 흐르게 하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되면, 그 모습을 바라본 이방 사람들이 놀라서 주목할 것이며, 너희는 무슨 비결로 그 메마른 땅을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바꾸어 놓았느냐고 묻게 될 것입니다. 이때를 놓치지 않고 그들이 해야 할 말이 있습니다. “천지를 창조하신 여호와 하나님이 우리더러 이렇게 살면 복 주신다고 하셔서 우리는 그렇게 순종하였을 뿐인데, 하나님이 이렇게 복을 주셨단다. 하나님은 복의 근원이신데, 말씀대로 순종하기만 하면 누구에게도 이렇게 복을 주신단다!” 그렇게 전하는 것이 그들이 애굽에서 해방 받은 이유이고, 광야에서 훈련을 받은 이유이고, 가나안에서 살아야 하는 이유였습니다.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능력과 약속을 믿기 때문에 남들처럼 부정한 짓을 하지 않고, 수입에서 십일조를 떼어 드리고, 주일을 성수하면서도 남들보다 행복하게 사는 모습을 통해서 세상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능력을 보여 주고, 의의 승리를 보여 주는 것이 우리가 받은 사명입니다.
주님의 시선은 아직도 하나님을 모르고 우상에게 절하고 있는 영혼들에게로 향하고 있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알아야 하고 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세상 사람들과 경쟁해서 승리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하나님을 믿는 사람의 축복을 보여주는 것이 우리의 사명입니다. 바로 그 일을 위하여 교회를 세우셨고, 여러분을 불러 성도로 삼고 교회의 일군으로 삼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손길과 하나님의 시선을 보아야 합니다. 그런 믿음의 눈이 열려 있는 사람은, 여호수아와 갈렙 처럼 아무리 힘든 상황을 만날지라도 절망하지 않습니다. ‘이 상황은 우리를 실패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결국은 하나님의 능력을 드러낼 기회가 될 것이다’라고 말하면서 하나님을 바라보게 됩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뜻을 알고, 그 손의 능력을 믿고, 순종하고 충성하는 승리의 사람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우리교회는 설립 된지 54주년이 지났습니다. 여기까지 인도하신 하나님의 특별하신 은혜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앞으로 해야 할 일이 더 많이 남아있습니다. 새 성전도 지어야 하고, 새로운 도약도 해야 합니다. 그래서 지난날을 돌아보면 그간의 인도하심이 감사하지만, 앞으로 해야 할 큰일을 생각하면 걱정이 될 수 있습니다. 이럴 때 바로 하나님을 바라보는 믿음의 눈이 필요합니다. 교회의 장래를 바라볼 때도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는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가데스 바네아에서 바라다 보이는 가나안 땅은, 결코 만만하지 않았습니다. 요단강도 가로막고 있었고, 견고한 여리고성도 버티고 있었으며, 체격이 너무 큰 가나안의 원주민들이 두려움을 주었습니다. 믿음의 눈이 없는 사람들이 볼 때 그 땅을 점령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당연했습니다. 그러나 전능하신 하나님, 그 땅을 주겠다고 약속하신 하나님을 바라본다면, 걱정할 게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여호수아와 갈렙은 그들이 우리의 밥이라고 큰소리 쳤습니다.
“예, 제가 먼저 순종 하겠습니다. 저 문제는 우리를 가로막는 장애물이 아니라 도리어 우리를 성장시키는 우리의 밥입니다. 제가 앞장서겠습니다.”
이렇게 고백하고 앞장서 나갈 분이 누구십니까? 우리가 그렇게 하십시다.
열 두 정탐꾼은 각 지파에서 선출된 사람들입니다. 각 지파의 지도자들이고 모세와 함께 동역하는 중간지도자들입니다. 교회로 말하면 장로 같은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들의 시선방향은 모세와 달랐습니다. 눈높이도 같지 않았습니다. 모세는 하나님을 대면한 사람입니다. 하나님께 직접 들은 것과 본 것이 있습니다. ‘내 백성을 이끌어 가나안땅으로 데리고 가라. 내가 함께 하리라’는 명령과 약속을 받은 사람입니다. 그래서 모세는 눈앞의 현실이나 과거를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과 가나안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중간지도자들이 모세가 보는 것을 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떤가요?
모세는 하나님을 보는데 그들은 사람을 봅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능력을 보는데 그들은 사람의 경험을 봅니다. 모세는 가나안을 보는데 그들은 애굽을 봅니다. 그래서 그들은 절망 할 수밖에 없었고, 2년으로 끝날 수 있었던 광야의 훈련을 20배 연장하게 만들어 백성으로 40년을 고생하게 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과 약속을 보지 못한 열 명의 두령들 때문에 역사는 후퇴했습니다. 그래서 자신들도 광야에서 다 죽고 말았고, 기회를 잃고 말았습니다.
환경이나 상대가 문제가 아닙니다. 배후의 하나님을 보느냐 못보느냐의 시력의 문제입니다. 나를 부르신 하나님의 목적을 보느냐 못 보느냐가 문제입니다.
시력이 성패를 좌우합니다. 신자의 장래는 영적 시력에 의해서 결정됩니다.
창13:에 보면, 조카 롯에게 비옥한 땅을 다 내어주고 풀이 죽어 언덕위에 올라가서 한숨을 짓는 이가 있었습니다. “좋은 땅은 조카가 다 차지하고 나는 뭔가, 내 양들 다 굶겨 죽이겠구나.” 그렇게 한숨짓는 그 사람은 아브라함이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그 아브라함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너 있는 곳에서 눈을 들어 동서남북을 바라보라. 보이는 땅을 내가 너와 제 자손에게 주리니 영원히 이르리라. 그 땅을 종과 횡으로 행하여 보라. 내가 그것을 네게 주리라" 무한한 가능성을 바라보라. 나의 능력을 믿으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이것은 아브라함에게는 새 출발의 신호탄 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그 말씀 한마디를 희망삼아서 다시 일어섰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자기의 기업으로 삼아서 그의 자손들과 오늘 우리에게 복을 전해 주었습니다.
문제는 약속을 이루시는 하나님을 볼 줄 아는 시력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우리가 능력이 없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자신만을 보는 것이 문제이며,
환경이 열악한 것이 아니라, 우리 영적 시력이 어두운 것이 문제입니다.
내가 누구인가를 알고, 나를 붙잡은 전능하신 하나님의 손을 보고, 나를 어디로 이끌어 가시는지 그 방향을 볼 수 있다면, 그 사람은 어떤 환경에서라도 성공할 수 있습니다. 영적인 눈이 밝아야 좋은 믿음을 가질 수 있습니다.
“여호와여! 원컨대 눈을 열어 보게 하옵소서.” 엘리사가 했던 기도입니다.
저도 같은 기도를 하고 싶습니다. 여러분 모두의 눈을 열어주시기를 원합니다.
말씀이 결여된 삶
민 14:1-3, 10 / 이정익 목사
오늘 설교 제목을 “말씀이 결여된 삶"이라고 정했습니다. 무엇이나 결핍한 것은 좋지 않습니다. 영양이 결핍되거나 양식이 결핍되면 삶에 불균형을 낳습니다. 오늘 세계적으로 경제파동이 발생한 것도 결핍 때문에 나타난 현상입니다. 그래서 지금 온 세계가 홍역을 치루고 있습니다. 신앙의 삶에도 영성과 말씀의 결핍이 아주 좋지 않은 불균형을 낳습니다. 이 영성의 불균형은 신앙에 문제를 야기하고 사고와 판단에 지대한 문제를 야기합니다. 그래서 판단을 착오하고 그릇 판단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 세상에 풍성한 영적 은혜를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을 말씀으로 창조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곧 예수입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에 예수를 생명으로 말씀으로 보내셨습니다. 예수께서 세상에 오셔서 가장 먼저 주신 것이 천국에 대한 언약입니다. 주님은 세상에 오셔서 제 일성으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다”는 선포였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세상에 새 길을 제시하셨고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그 길을 가도록 안내하셨습니다. 그 언약과 말씀을 마음에 잉태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이고 하나님의 사람이고 영적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이 말씀과 언약에는 무한한 힘과 능력이 들어있습니다. 그래서 이 말씀을 잉태하고 힘입고 의지하고 살아가는 사람과 이 말씀이 없이 살아가는 사람과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그 차이가 잘 나타나 있는 사례가 오늘 읽은 본문에 나타나 있습니다.
본문을 보면 열두 명의 정탐꾼의 이야기가 나타납니다. 모세는 마침내 백성을 이끌고 가나안 입구인 바란 광야에 이르렀습니다. 이제 곧 가나안에 들어가야 합니다. 그래서 12지파에서 1명씩 12명의 지도자를 차출해서 들어갈 땅 가나안을 실사하기 위해서 정탐을 실시했습니다. 13장21절을 보면 “신광야에서 하맛 어귀까지 정탐”하기 위해서 입니다. 신광야는 가나안땅 제일 남쪽 경계선을 말합니다. 그리고 하맛 어귀는 최북단 경계선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가나안땅 남쪽 끝에서 북쪽 끝까지 약 160km의 땅을 두루 살펴보고 오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12명의 지도자를 엄선해서 중책을 맡겨 40일 동안 정탐을 실시하라고 보냈습니다. 그 12명의 정탐꾼들이 정탐을 마치고 돌아와서 마침내 보고를 했습니다. 그 보고 내용이 둘로 갈라졌습니다. 12명중 갈렙과 여호수아 두 사람은 긍정의 보고를 했습니다. 그 긍정은 절대적인 긍정이었고 그 땅은 언약 그대로 젓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고 보고 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땅을 정복 할 수 있다고 긍정적으로 보고했습니다. 그런데 나머지 10사람은 부정적으로 보고하고 그 땅을 악평했습니다. “우리가 가나안 땅에 들어간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그 땅은 젓과 꿀이 흐르는 땅이 아닌 사람을 삼킬 정도이고 그곳 사람들은 모두 장대 같았고 우리는 메뚜기 같았다, 그리고 그곳 성벽은 철벽으로 우리가 가나안에 들어가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보고 했습니다. 그 보고를 받고 백성들이 누구의 말을 믿었겠습니까. 그래서 모든 백성들이 절망하고 낙심하고 밤새도록 통곡하였다고 했습니다.
지도자는 참 중요한 사람입니다. 지도자는 정신도, 생각도, 말도, 사고도, 판단도, 미래를 내다보는 안목도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없으면 그 조직이 갈등하고 불화하고 분란이 끊어지지 않습니다. 여기 10명의 지도자들은 하나님이 주신 언약을 잊었습니다. 그 언약은 신앙의 근거인데 불행하게도 그 언약을 잊고 하나님의 약속을 잊었습니다. 신앙인은 이 성경에 나오는 언약, 약속, 계시, 섭리, 말씀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신앙인에게 이 약속, 계시, 말씀을 잊으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러면 어떤 현상이 일어나는가 하면 다음과 같은 현상이 나타납니다.
미래 불투명
미래는 꿈이 있는 사람에게만 보이는 세계입니다. 그래서 미래가 없는 사람은 내일, 미래, 장차, 먼 훗날, 저 산 너머에 관심이 없습니다. 오직 있다면 오늘 현재만 보일 뿐입니다. 그런데 신앙인에게 미래는 천국입니다, 언약입니다, 신앙의 안목을 가지고 내일을 보면 그 천국이 보입니다. 언약이 보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보입니다. 장차 있을 심판이 보입니다. 그리고 장차 주어질 상급도 보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면류관이 예비되었을 것”이라고 외쳤습니다. 바울은 장차 주어질 상을 보았습니다. 그 상을 보았기 때문에 그는 상을 바라보고 매일 달려간다고 했습니다. 야곱은 20년 종살이를 하는 동안 인내로 이겨나갔습니다. 왜냐하면 벧엘에서 본 언약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요셉도 종살이와 옥중생활을 잘 이겨나갔습니다. 그가 일찍이 꿈에서 본 것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10명의 정탐꾼들은 내일, 언약, 말씀, 하나님의 약속을 잊었습니다. 그러니까 가나안이 젓과 꿀이 흐르는 땅인 것을 보지도 발견하지도 못했습니다. 그 마음에 꿈도, 미래도, 언약도, 말씀도 없으니까 가나안이 그들에게 주어진 선물의 땅인 줄을 몰랐던 것입니다.
현실 더 부각
가나안땅에 가서 본 것은 그곳의 땅이 거칠다는 것만 보였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모두 키가 큰 것만 보였습니다. 성이 견고한 것만 보였습니다. 그들은 그 땅에서 가져온 포도송이가 너무 커서 두 사람이 메고 온 것은 까맣게 잊었습니다. 그러니까 그 땅에서 젓과 꿀이 흐르는 땅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겉에서 보기에는 견고한 성처럼 보였지만 어디엔가 허점이 있다는 것도 보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모두 크고 견고하고 황무지 같은 땅만 생각났을 것입니다. 마음에 말씀이 없는 사람은 주어진 언약도, 하나님 약속도 작용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현실의 모양에 덮여 버립니다. 하나님이 모세를 통해서 수없이 가나안에 대한 약속을 주셨습니다. 그들이 출애굽을 한 목적도 가나안에 가기 위해서였습니다. 광야에서 40년 동안 고생한 것도 가나안에 가기 위해서였습니다. 하나님이 그들로 하여금 가나안에 들어가게 하시겠다고 수 없이 언약과 약속을 주셨습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결정적인 순간에는 이 말씀에 대한 확신도 믿음도 없었습니다. 그리고 눈에 보이는 것은 아득한 현실만 보였습니다. 이 무서운 현실은 내 안에서 믿음이 약해질 때, 언약이 흐려질 때, 말씀이 고갈될 될 때 더 크게 나타납니다. 내 안에 믿음과 말씀과 영이 강하게 역사하실 때는 현실은 아주 작게 보입니다. 그래서 현실을 두려워하지도 무섭게 여기지도 않고 이기게 되는 것입니다.
목회자도 기도와 말씀과 하나님의 영감에 사로잡혀 살아갈 때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피곤도 없습니다. 고난도 적게 느껴집니다. 그래서 그 때는 아골 골짝 빈들에도 어디든지 가오리다 하고 찬송을 크게 부를 수 있습니다. 그 때는 이 언약과 약속과 말씀과 주의 영이 내 마음에 충만하기 때문입니다. 그 때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가난도 좋습니다. 오히려 그 삶이 감사하고 기쁨이 있고 행복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사역자의 길을 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말씀과 언약이 흐려질 때는 앞이 캄캄해 옵니다. 가난이 무섭고 그래서 더 피곤하고 미래가 두려워집니다. 거기에서 무슨 소망적인 생각이 나오고 안목이 나오고 올바른 판단이 나오겠습니까. 그때 나오는 말은 불평과 불만과 짜증과 넋두리와 두려움의 말들만 나타날 것입니다. 여기 10명의 정탐꾼들은 마음에 언약도 말씀도 영도 고갈되었던 사람들입니다. 무거운 사명을 가지고 갔다 오기는 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눈에는 암담한 현실만 보였습니다. 그러니까 나타난 현실과 그곳 사람들의 건장한 모습과 견고한 성만 눈에 강하게 띄었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나온 말이 모두 두려운 보고뿐이었습니다.
지도자는 그래서 중요한 사람들입니다. 꿈이 없고 말씀도 없고 언약도 안목도 없는 지도자는 자신만 불행한 것이 아니고 그 백성들을 불행하게 만듭니다. 그들의 보고를 듣고 자신들만 비관한 것이 아니고 온 백성들을 비탄에 빠지게 하였고 낙심하게 하고 불행하게 하여 그 순박한 백성들로 하여금 밤새도록 통곡하게 만들었습니다.
부정적 생각에 사로잡힘
말씀이 결여될 때 나타나는 또 다른 현상은 부정적인 생각에 사로잡히게 되는 일입니다. 성령의 생각은 희망이고 가능이고 긍정이고 소망입니다. 말씀에 의지해 살고 하나님의 영에 의존해 살면 환경과 처지와 상관없이 소망의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그래서 주님이 함께 하시는 곳 그곳은 어디나 천국이 될 수 있습니다. 거기에서 나오는 대답이나 언어나 말이나 생각은 한결같이 밝고 따뜻하고 소망이 넘치는 것 입니다. 그런데 영에 의지하지 못하고 말씀을 떠난 삶에는 현실만 강하게 대두되고 두려움이 엄습해 오고 불평과 부정적인 생각에 사로잡혀 살아가게 됩니다. 이 10명의 지도자들은 언약을 잊었고 말씀의 힘도 상실했으니까 나오는 생각은 모두 부정과 불신과 불가능과 두려움뿐이었습니다. 특히 신앙지도자의 요건은 말씀에 대한 의지력이고 성령에 대한 의지력과 언약에 대한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거기에서 자신감이, 믿음이, 긍정의 생각이 나오게 됩니다. 그래서 지도자는 사고가 긍정적이어야 하고 미래적인 안목이 있어야 합니다. 지도자가 그런 안목이 없다면 그 조직은 불행하게도 전진하거나 새롭게 앞으로 나아가기가 어렵습니다.
그렇게 부정적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모인 곳에는 대부분 역사가 후퇴합니다. 본문을 보십시오. 그때 그 10명은 도대체 누구입니까. 어떻게 생긴 사람들입니까. 그들의 명단이 민 13장4-16절까지 모두 기록되어 있습니다. 참으로 부끄러운 수치입니다. 그것은 대대로 씻어지지 않는 수치였고 불명예였습니다. 성경에 그들의 이름을 기록해 놓은 것은 출애굽의 목적지인 가나안을 앞두고 그 역사의 길을 가로 막았던 장본인들을 역사적으로 심판하기 위해서 일 것입니다. 그들은 도도히 흐르던 역사의 물줄기를 억지로 가로막았던 사람들입니다. 역사적 사명을 띠고 정탐을 하고 돌아와서 그렇게 악평을 할 것이 무엇입니까. 그 결과 온 백성들이 그날 밤 소리 높여 밤새도록 통곡하였다고 했습니다.
여러분 도둑질만 죄가 아닙니다. 사람들의 희망을, 소망을, 기대를 꺾는 것도 죄입니다. 그리고 흘러가야 할 역사를 멈추게 하는 것도,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진로를 가로막는 것도 다 죄입니다. 우리들이 살아가다가 부정적인 생각에 사로잡히거나 내 마음에서 원망이 솟아나오거나 요즘 특히 웬일인지 짜증이 많이 나온다거나 누군가가가 괜히 보기 싫어진다거나 미래가 암담하다거나 신앙생활에 회의가 찾아온다거나 하면 여러분 자신을 한번 깊이 살펴보십시오. 살펴보면 틀림없이 내 안에 말씀이 결여되어 있거나 영이 고갈되어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틀림없습니다. 그래서 12명의 정탐꾼을 보낼 때에 모세는 보내기 전에 기도회를 하고 보냈어야 합니다. 그들을 다시 무장시키고 하나님께서 수차례 주신 언약들을 다시 확인시키고 말씀을 회복시킨 후에 보냈어야 합니다. 그런데 모세가 그것들을 생략하고 그들을 그냥 보낸 것이 잘못입니다.
섭리 잊음
이 대목에서 가장 슬픈 현실은 그들이 여기에 오기까지 주어졌던 하나님의 섭리를 잊은 것이 문제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가나안에 대해서 수차례 주신 언약의 말씀들을 잊은 것이 문제입니다. 그리고 이 백성들이 가나안에 가기까지 나타났던 수많은 기적들을 그들은 너무 쉽게 잊었습니다. 출애굽할 때까지 주어진 10가지 재앙들, 홍해를 건널 때 있었던 그 통쾌한 기적, 마른 광야에서 주어진 구름기둥과 불기둥, 반석에서 물을 내 마셨던 일, 만나를 먹었던 일, 여기까지 오는 동안 수많은 적들을 손쉽게 물리쳤던 일 등 얼마나 많은 섭리와 기적과 하나님의 손길이 있었습니까. 그런데 그 10명은 가나안땅에 살고 있는 키가 큰 사람들을 보는 순간, 그 땅의 박토를 보는 순간, 견고한 성을 보는 순간, 그 섭리들과 기적들과 하나님의 손길은 다 잊어버렸습니다. 그들은 애굽의 철병거가 쫒아올 때 불기둥이 막았던 것도, 홍해 앞에서 오도 가도 못해서 쩔쩔맬 때 넘실거리던 홍해가 두 쪽으로 갈라져 유유히 건너가던 일도 다 잊어버렸습니다. 마치 제자들이 풍랑을 만났을 때 눈앞에 나타난 풍랑이 너무 크게 보였던 것과 똑같았습니다. 그 순간 방금 전에 있었던 5병 2어로 5천명을 먹이시던 그 섭리의 주님이 그 옆에 있었는데도 그것을 까맣게 잊었습니다. 그러니까 넘실거리는 파도가 더 크게 보일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 결과 10명의 지도자들은 부정적인 보고 뿐 아니고 사실도 왜곡했습니다. 너무 커서 두 사람이 어깨에 메고 온 포도송이를 가져왔으면서도 그 땅이 사람을 삼킬 만큼 박토라고 사실을 왜곡해서 보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그들의 눈에는 좋은 면은 안보이고 좋지 않은 면만 보였습니다. 왜 이렇게 되었는가 하면 그들이 언약도 잊고, 말씀도 상실하고, 출애굽을 시키고 홍해를 건너게 하신 하나님의 섭리를 잊었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자신들만 낙심했으면 괜찮은데 자신은 물론이고 그 부정적인 영향이 파급되는 효과가 너무 컸습니다.
행복도 전염되기는 합니다. 그런데 소망, 희망, 행복은 전염되는 효과가 너무 작습니다. 그에 비해서 어두움, 절망, 낙심, 분노, 부정은 전염성이 너무 큽니다. 백성들에게 오직 희망과 소망은 가나안에 들어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갔다 온 사람들의 보고를 들어보니 절망이었습니다. 그래서 모두 분노하고 절망하고 밤새 통곡하다가 마침내 돌을 들어 모세와 아론을 죽이려고 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결국 이 10명은 참으로 불행한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사건은 너무 불행한 결과를 낳았습니다. 그들은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고 가나안 입구에서 모두 죽었습니다. 그리고 그 보고를 듣고 분노하고 불신하고 통곡했던 그 백성들도 모두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고 그곳에서 죽었습니다. 뿐 만 아니라 모세도 아론도 기성세대들 모두가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고 광야에서 모두 죽었습니다. 그뿐 아니고 그 백성들은 가나안을 목전에 두고 들어가지 못하고 40여 년간 광야에서 재훈련을 받게 되었습니다. 가나안은 그런 생각, 사고, 자세, 불평, 불신 등 언약을 잊고 말씀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은 들어가지 못하는 곳입니다.
여러분은 마음에서 이 말씀과 언약의 믿음을 갉아먹고 잊어버리게 하고 영을 소멸시키는 모든 질투, 투기, 경쟁심, 물욕. 현실집착 삶, 탐욕들을 조절하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여러분들도 이 10명과 똑같이 신앙의 길에서 떨어져 나갈 위험이 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가나안 즉 우리에게 언약으로 주어진 천국도 잃어버리게도 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내 안에 이 말씀을 간직하고 살아가야 합니다. 그때 이 말씀이 내게 힘과 깊은 안목과 능력과 언약을 믿게 하는 영감을 얻게 됩니다. 그 말씀이 내게 꿈과 먼 미래를 바라보는 안목도 가지게 합니다. 겨자씨는 작고 볼품이 없지만 그 씨가 땅에 심겨지면 큰 나무가 되어 새들이 깃들인다고 했습니다. 겨자씨는 작지만 그 안에 생명의 근원이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내 안에 이 말씀과 언약이 있으면 주님은 내게 말씀으로 오시고 주님으로 오시고 구세주로 오시고 메시야로 내 마음에 오셔서 나를 움직여 주어진 소명의 삶을 소화해 낼 수 있는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신앙의 삶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