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월3일 오늘의 역사
2023년 이채운, 세계선수권 하프파이프 우승…한국 스키·스노보드 최초
스노보드 '신동' 이채운(17·수리고)이 한국 스키·스노보드 선수로는 최초로 세계선수권대회 정상에 올랐다. 이채운은 조지아 바쿠리아니에서 열린 국제스키연맹(FIS) 프리스타일·스노보드 세계선수권대회 스노보드 남자 하프파이프 결선에서 93.5점을 받아 우승을 차지했다. 한국 스키·스노보드의 사상 첫 세계선수권대회 입상이 금메달이다
이전까진 2021년 스노보드 남자 평행대회전의 김상겸과 2017년 프리스타일 스키 여자 듀얼 모굴 종목의 서지원이 기록한 4위가 한국 스키의 역대 세계선수권대회 최고 성적이었다. 2006년생으로 지난해 베이징 동계올림픽에 한국 선수단 전체 최연소 선수로 출전했던 이채운이 한국 스키에 사상 첫 세계선수권대회 금메달을 안기는 주인공이 됐다. FIS에 따르면 만 16세 10개월의 이채운은 스노보드 세계선수권대회 역사상 남자부 최연소 챔피언으로도 이름을 남겼다.
2023년 홍콩 건축중이던 42층 호텔(건축비 1조원) 화재로 전소
2022년 숙명여자대학교에 공군학군단(ROTC) 첫 창설
2022년 러시아의 고위급 장성이 우크라이나 저격수에 의해 사살
안드레이 수호베츠키(47) 러시아 제7공수사단장 겸 제41연합군 부사령관이 우크라이나군 저격수가 쏜 총탄에 맞아 사망했다 해당 장군은 러-우 전쟁 이후 사망이 확인된 가장 고위급 인물인 것으로 알려졌다.
사망 당시 수호베츠키 소장은 러시아 부대원들에게 연설 중이었다
2021년 성전환 수술 후 강제 전역 당한 변희수 하사 사망
변 전 하사는 2019년 휴가 중 외국에서 남성에서 여성으로 성전환 수술을 받고 돌아와 계속 복무를 희망했지만, 군은 변 전 하사 신체 변화에 대한 의무 조사를 통해 심신장애 3급 판정을 내리고 2020년 1월 전역을 결정했다. 변 전 하사는 2월 육군본부에 "다시 심사해달라"며 인사소청을 제기했으나, 육군은 "전역 처분은 군인사법에 규정된 의무심사 기준 및 전역 심사 절차에 따라 적법하게 이뤄졌다"며 받아들이지 않았다. 변 전 하사는 이후 행정소송을 냈고, 첫 변론 전 자택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대전지법 행정2부(부장 오영표)는 2021년10월7일 변 전 하사가 생전 육군참모총장을 상대로 낸 전역처분 취소 청구사건에서 원고 승소 판결했다.
이로서 변 전 하사는 정상전역으로 처리 되었다
2016년 환경파괴 댐 건설 막던 온두라스 시민운동가 베르타 카세레스(45세) 무장괴한에게 살해당함
2015년 부정청탁 및 금품 등 수수의 금지에 관한 법률(김영란법) 국회 통과
2006년 서울시 숭례문의 중앙통로 개방
2005년 스티브 포셋(Steve Fossett)이 무착륙, 무급유 단독 세계 일주 비행
1998년 김종필 국무총리 서리 취임
1998년 대한항공 화물기 북한비행정보지역 첫 비행
1998년 3월 3일 한국전쟁 후 처음으로 대한항공 보잉 747 화물기가 북한 비행정보구역(FIR)을 통과했다. 북한의 하늘이 열리는 순간, 우리 조종사들은 국제관례를 깨고 북한 관제사들과 우리말로 대화,동포애를 나누면서 한민족임을 확인했다.
첫 대화가 이뤄진 것은 항공기가 북한 비행정보구역에 진입하기 직전인 오전 8시57분 무렵. 대한항공 부기장과 평양관제소의 관제사간의 대화였다. 이 때만 해도 국제관례상 영어로 얘기했다.
이날 대한항공 화물기가 통과한 구간은 북한측 비행정보구역 3백km. 일본 서해안을 따라 내려오던 종전 항로보다 6백km가 짧고 상층 편서풍의 영향도 적어 운항시간이 34분 단축되는 효과가 있었다. 이날의 순조로운 시험비행으로 한국 국적기는 1998년 4월 23일부터 북한 비행정보구역을 이용해 미주로 향할 수 있었다. 이로 인한 유류 절감액은 연간 2천만 달러(3백20억원)에 달했다.
1997년 파키스탄 열차탈선사고로 125명사망
파키스탄 중부 하네왈시 인근에서 3일 발생한 열차 탈선사고로 최소한 1백25명이 숨지고 1백50여명이 부상했다고 구호 요원들과 병원 관계자들이 밝혔다.
앞서 파키스탄 철도 당국은 지금까지 남자 71명, 여자 28명, 어린이 22명 등 모두 1백21명이 숨졌다고 발표했었다.
병원 관계자들은 부상자 가운데 목숨이 위태로운 중상자가 28명이나 되며 매몰 사상자 구조작업도 계속되고 있어 희생자 수는 더욱 늘어날 것으로 전망했다.
한편 나와즈 샤리프 총리는 이날 사고현장을 방문, 조사를 벌여 철도당국의 과실이 발견될 경우 관련자들에 대한 엄중한 조치를 취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날 사고는 승객들을 가득 싣고 달리던 카라치행 열차가 하네왈역 인근 철도에서 브레이크 고장을 내면서 때마침 달려오던 열차와 충돌을 피하기 위해 비상조치를 취하는 와중에 발생했다.
생존 승객들은 이날 사고가 새벽 4시쯤(현지시각) 아주 어두울 때 일어나 구조가 늦어지는 바람에 사상자가 늘어났다고 전했다.
1995년 김영식(9세) 킬리만자로 길만포스트(5,685m) 세계 최연소 등정
1995년 한국-체코 이중과세방지협정 체결
1994년 UH 60 헬기, 공중 폭발사고, 조근해 공군참모총장 등 사망
1994년 3월 3일 오후 2시35분쯤 경기도 용인군 외사면 근삼리 야산에 조근해 공군참모총장(57)과 부인 조인화씨(48), 조종사와 부관 등 6명이 탄 공군 헬기가 폭발하면서 추락, 전원이 사망했다. 사망자는 조총장 내외와 조종사 강성윤 소령(35.공사 31기) 부조종사 유영재 대위(28.공사 38기), 수행부관 이상훈 대위(31.공사 36기), 정비사 전해술 원사(35)이다.
사고헬기는 지난 1990년부터 한국군 육-해-공군에 배치되기 시작한 UH60 14인승 중형수송헬기로 승무원 3명 외에 11명의 완전무장한 병력을 태울 수 있고 최대속도는 시속 2백96㎞. 항속거리는 2천2백㎞, 작전행동반경은 6백㎞에 달하는 헬기였다. 사고 원인은 꼬리부분 부품결함으로 밝혀졌다.
1994년 근로자의날, 5월1일로 변경
1992년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독립 건국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공화국의 알리야 이제트베고비치 대통령은 3일 공화국이 유고슬라비아로부터 독립했음을 공식 선포했다.
한편 공화국 선거관리위원회 관리는 이날 지난달 29~1일 양일간 있었던 공화국 주민투표의 공식집계결과 총 유권자의 63.4%가 투표에 참가, 그 중 99.34%가 독립에 찬성했다고 밝혔다.
베고비치 대통령은 이날 기자회견을 갖고 이같은 투표결과에 언급, “보스니아는 독립국이다. 보스니아는 국제적으로 공인된 주권국이 되는 것을 원하고 있다” 고 말하고 독립을 반대해 사라예보 일원에 바리케이드를 설치한 세르비아 민병대를 비난했다.
한편 공화국 내무장관은 사라예보에서 독립에 반대하는 세르비아인들과 독립에 찬성하는 시민들 사이의 유혈 충돌로 5명이 목숨을 잃었다고 밝혔다.
1992년 알리야 이제트베고비치 대통령, 보스니아 독립선포
1991년 한 아마추어 촬영가가 로스엔젤리스 경찰관이 로드니 킹을 구타하는 장면을 촬영했다. 이 영상 때문에 1992년 로스엔젤레스 폭동 사태가 벌어졌다.
1991년 라트비아와 에스토니아에서 소비에트 연방로부터 독립을 결정하는 국민투표
1991년 미국-이라크 휴전회담
1990년 북한 제4땅굴 발견
제4땅굴은 양구 동북방 26km지점 비무장지대 안에서 발견되었다
1990년 3월3일 군사분계선 1.2km 떨어진 곳에 있으며 높이와 폭이 각각 1.7m이고 지하 145m지점에 있으며 총길이는 2052m이다
이는 군사분계선 남쪽으로 1502m나 파 내려온 것으로 확인 되었다
땅굴은 1974년 11월15일 경기도 파주시 고량포 비무장지대 안에서 1땅굴이 발견된 이후 1975년 철원지역에 2땅굴, 1978년 경기도 파주에 3땅굴 이후 4번째 발견된 땅굴이다
땅굴 발견 이후 국방부에서 1992년 2월까지 37억 원을 들여 안보기념관과 기념탑을 세우고 갱도 및 갱내시설을 설치해 안보교육장으로 활용하고 있다.
지하갱도를 300m 정도 내려가면 땅굴을 만날 수 있으며 지하갱도차량으로 견학할 수 있디 땅굴왼쪽에는 당시 땅굴 수색 중 북한군이 설치한 수중지뢰에 의해 산화한 군견을 위로하는 충견비가 세워져 있다
1981년 전두환, 12대 대통령에 취임
1980년 미국의 원자력 잠수함 SSN-571 노틸러스가 퇴역하고 해체.
1978년 솔즈베리협정 조인
로디지아의 스미스 수상과 온건파 흑인지도자 무조레와 주교가 1978년 3월 3일 솔즈베리 협정을 체결해 연말까지 흑인 다수파정권을 수립하기로 합의했다. 이 협정에 따라 1979년 6월 1일 무조레와를 최초의 흑인 총리로 한 짐바브웨-로디지아공화국을 발족시켰고 1980년 4월 짐바브웨로 독립하여 짐바브웨 아프리카 국민연합(ZANU)이 탄생했다.
1889년 영국인 세실 로즈가 영국령 남아프리카회사를 창립하고 통치권을 확립했으며, 로즈의 이름을 따 로디지아로 이름지었다. 1911년 북로디지아(잠비아)와 분리됐고, 1923년 영국연방의 자치식민지가 됐다. 1953년 북로디지아(잠비아), 니아살랜드(말라위)와 함께 로디지아 니아살랜드 연방을 형성했으나, 원주민의 민족독립운동으로 1963년 연방이 해체됐다. 1965년 이언 스미스가 이끄는 소수의 백인이 영국에 일방적인 독립을 선언하고, 1970년 백인 국가인 로디지아공화국이 성립됐다.
1977년 미국하원, 윤리강령 채택
1975년 유엔측 군사정전위서 북한의 서해상공 침해를 항의
1973년 한국방송공사 창립.
한국방송공사(KBS)가 1973년 3월 3일 국내외 방송을 효율적으로 실시하고 전국에 방송의 시청을 가능하게 함으로써 방송문화의 발전과 공공복지의 향상에 이바지함을 목적으로 창립됐다. 국영방송인 KBS는 1947년 중앙방송(호출부호 HLKA)이라는 명칭으로 출발했지만 전신은 1927년 설립된 경성방송국(호출부호 JODK)이었다.
한국방송공사의 설립은 1972년 12월 30일 문화공보부 소속 중앙방송국과 16개 지방방송국을 공영체제로 전환시키는 `한국방송공사법` 공포가 근거가 됐다. KBS는 1961년 텔레비전 방송을 개시했다
1971년 인도-파키스탄 전쟁이 시작
1969년 아폴로계획: 미국 항공우주국(NASA)가 아폴로 달 착륙선을 시험할 목적으로 아폴로 9호를 발사.
1966년 국세청, 수산청 발족
1963년 페루에 군사 쿠데타
1961년 하산 2세가 모로코 국왕으로 즉위하다.
1958년 북한, 김두봉 등 연안파 숙청발표
북한은 1958.3.3 - 6 북한 제1차 노동자 대표자 회의를 소집하여, 연안파와 소련파의 숙청을 발표함으로써 김일성의 10년 집권에 정면으로 도전한 반 김일성 세력을 숙청하였다.
1957년말 연안파의 두목 김두봉(최고 인민 회의 상임 위원장)을 반당 종파 분자로 몰아 숙청한 것도 이때였으며 김두봉은 마침내 순안 목장의 노동자로 전락하는 신세가 되었다
1958년 북한, 천리마운동 시작
1958년 3월3일부터 4일간 열린 북한 제1차 노동당 대표자회의는 ‘반(反)종파사건’을 마무리짓고 제1차 인민경제5개년계획(1957∼1961)을 중간 점검하는 자리였다. 천리마운동 의 본격 시작도 이때 결정됐다.
‘반종파사건’이란 1953년∼1955년까지 중공업 우선투자 노선을 둘러싸고 불거진 당내 갈등이 1956년 8월에 폭발한 북한내 권력싸움이다. 연안파ㆍ소련파 등 반대파들은 이때 반당종파분자로 몰려 대부분 숙청당한다. 비판세력을 일소하고 김일성 중심의 단일지도체제가 확립된 것도 이 사건 후부터였다.
천리마운동은 김일성이 1956년 12월 당 중앙위 전체회의에서 자력갱생을 강조한 뒤 강선제강소를 방문, ‘천리마를 탄 기세로 달리자’며 제안한 것이 시초가 됐다. 천리마는 하루에 천리를 달린다는 전설속의 말. 당시 북한은 김일성이 1956년 6월부터 50여일간 소련과 동구권 등을 순방하며 원조를 요청했으나 성과를 얻지못해 부득이 홀로서기를 감내해야 하는 절박한 상황이었다. 천리마운동은 인민들의 자발적인 역량을 총동원해 대중의 증산의욕을 북돋기위한 경제적 목적도 컸지만, 사상고양을 통한 혁명노선 강화도 못지않게 중요했다. 그러나 점차 운동 열기가 시들해지고 실적경쟁에 따른 위화감 표출로 한계에 부딪힐 수 밖에 없게 됐다.
1957년 이스라엘군, 가자지구서 전면 철수 선언
1957년 나토 상임이사회서 영국군대 감축안 토의
1956년 대한증권거래소 개점
1955년 미국-중국 방위조약 정식 발효
1950년 유엔은 한국에 군사감시단 파견을 결정
1949년 한국-필리핀, 국교수립
1945년 제2차 세계 대전(태평양 전쟁), 미국군과 필리핀군이 마닐라를 탈환하다.
1939년 모한다스 간디가 인도에 대한 폭압 통치에 항의하는 단식을 시작하다.
1938년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석유가 발견되다.
1938년 일제, 조선교육령 개정
1937년 독립운동가 김동삼선생 옥사
한국독립운동사에 우뚝 솟아 있는 독립운동가 김동삼 선생이 1937년 3월 3일 옥사했다. 당시 많은 애국지사들이 해외에서 독립운동을 벌였지만 선생은 시종 일본군이 우글거리는 만주벌에서 무장항일투쟁을 고수한 ‘광야의 맹호’였다.
일송(一松) 김동삼은 1878년 경북 안동에서 태어났다. 1908년 고향에 사립 협동학교를 세워 젊은인재를 키우다 한일합방이 되자 1911년 열혈청년을 거느리고 만주로 건너가 1931년 하얼빈에서 체포될때까지 오로지 나라와 민족을 위해 자신을 던졌다. 만주벌에 바친 일송의 20년은 첫째가 독립운동, 둘째가 군관양성, 셋째가 재만주 동포의 민생안정과 권익옹호, 넷째가 교육이었다. 만주에 가서 그가 처음 한 일은 이시영, 이동녕 등과 경학사를 조직, 재만동포의 농지개척-생활안정계획과 신흥강습소(뒤에 신흥무관학교로 발전) 설립이었다.
1918년에는 길림성에서 김좌진 등 39인 민족대표의 일원으로 연서한 ‘독립선언서’를 발표했으며, 이듬해 3·1운동이 일어나자 독립운동의 총본산으로 군정부를 조직했다. 이 군정부는 상해임시정부 휘하에 들어가 서로군정서로 개칭, 일송은 참모장으로 취임했다. 일송의 독립운동중 가장 특기할 만한 것은 남만주의 각종 한족단체들을 대단합, 1922년 대한통의부를 창립하여 총장에 추대된 것이라 할 수 있다. 1931년 만주사변 때 하얼빈에서 붙잡혀 본국으로 강제송환, 징역 10년을 선고받고 복역 중 이날 옥사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1931년〈스타-스팽글드 배너(The Star-Spangled Banner)〉미국 공식 국가가 되다.
“오 새벽 햇빛에 성조기가 빛나도다.”로 시작되는 민중적인 애국가이다.
곡조는「축배의 노래」와 같다.
1814.7.31 미․영 전쟁에서 영국 함대에게「맥헨디」요새가 포격을 당했지만, 8월 1일 이른 아침 미국 국기가 아직도 게양되어 있는 것을 보고 미국인「프랜시스 스코트 키(Francis Scott Key ; 1779 -1843)」는 감격, 이 노래를 지었는데 그것이 바로 국가가 된 것이다.
*2008년 2월 말 북한 평양에서 열린 뉴욕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공연에서 미국 국가가 연주됐다.
북-미 관계가 6·25전쟁 이후 50여 년 동안 적대적이었던 점을 감안하면 분명한 역사적 이벤트다.
‘적국’의 심장부에서 미국 국기인 성조기까지 올렸으니….
미국 국가의 정식 명칭은 ‘별이 빛나는 깃발(The Star-Spangled Banner)’이다.
일부 언론에서 ‘성조기여 영원하라’라고 번역하기도 했지만 공식 명칭은 아니다.
이 노래는 1931년 3월 3일 미국 의회가 관련 법안을 결의하고 허버트 후버 대통령이 서명함으로써 미국의 국가가 됐다.
가사는 1814년 미국의 프랜시스 스콧 키라는 한 아마추어 시인이 만들었다.
물론 이 시가 100년이 훨씬 지난 뒤에 국가의 가사로 쓰일 줄은 몰랐을 것이다.
그는 미국이 영국을 상대로 독립전쟁을 벌이던 1812년 이른바 ‘포트 맥헨리 전투’에서 승리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시를 썼다.
‘전투를 치른 뒤에도 자랑스럽게 휘날리는 넓은 줄과 밝은 별들. 자유의 땅, 용기의 터전 위에 성조기는 아직도 휘날리고 있다.’
이 시는 당시 미국에서 유행하던 영국의 권주가(勸酒歌) ‘천상의 아나크레온’의 음과 결합돼 유행처럼 번져갔다.
1889년 미국 해군이 ‘별이 빛나는 깃발’을 공식 행사에 사용한다고 결정한 데 이어 1916년 우드로 윌슨 대통령은 각종 군대 행사에서 연주할 것을 명령하기도 했다.
‘별이 빛나는 깃발’은 1931년 국가로 지정된 뒤 미국프로농구(NBA)와 미국프로야구(MLB), 북미프로미식축구리그(NFL) 등 주요 스포츠 경기 개막식의 단골 연주곡이 됐다.
하지만 정작 미국인에게는 부르기 어려운 노래로 꼽힌다.
한 옥타브 반에 이르는 음역 때문에 보통 미국인이 부르기 쉽지 않다는 게 이유다.
1924년 리예카 자유국이 이탈리아 왕국에 병합.
1923년 주간지 `타임` 창간
1923년 3월 3일, 24세의 헨리 루스와 브리튼 해든이 뉴욕에서 뉴스주간지 `타임`을 창간했다. 가격은 15센트. 당시 공화당 하원의장 캐논을 커버 스토리로 다뤘다. 뉴욕타임스 등 일간지로부터 일주일치 기사를 취사 선택, 22개 고정란으로 분류했다. 기사 하나에 400단어 안팎, 한 문장에 평균 20단어를 넘기지 않았다. 간결한 문장이 독자들의 눈길을 끌었다. 특히 국제뉴스와 문화적 사건을 집중적으로 다루었다.
발행인 두 사람은 예일대학 동창생으로 한 해 전 볼티모어 뉴스지 기자를 그만두고 일간지의 틈새 시장을 공략한 것이다. 이들에게 출자한 사람은 72명, 금액은 8만6000달러였다. 2만5000명으로부터 정기구독 신청을 받았으나 창간호는 9000부 밖에 찍지 못했다. 창간 된지 10년 만에 타임지는 미국 중산 계급의 영도자, 미국 이미지와 가치관의 보호자로 확고하게 자리 잡았다.
1923년 미국의 시사주간지 《타임》이 창간.
1919년 고종황제 국장 거행
1918년 제1차 세계대전: 소비에트 연방이 동맹국과 브레스트리톱스크 조약을 맺고 전쟁을 중단하다
레닌 정권이 1918년 3월 3일 독일 및 동맹국과의 강화조약에 조인했다. 소비에트 국가 성립이후 처음 체결한 이 조약으로 동부전선에서의 전쟁은 중단됐다. 소비에트와 독일-오스트리아-불가리아-터키 4국과의 강화조약 협상은 1917년 12월부터 동폴란드 브레스토-리토프스크에서 진행됐다.
손해를 보더라도 전쟁보다는 강화가 낫다고 주장하는 레닌과 불공정한 강화조약 반대와 철저항전을 주장하는 부하린, 전쟁을 하며 협상하자는 트로츠키간의 의견 대립으로 소련 내부가 어수선했다.
볼셰비키 당중앙위는 1월에는 부하린의 주장을 지지했지만 2월 들어 독일의 공격이 심해지자 레닌 주장을 지지해 강화조약이 체결됐다. 이 조약은 소련 역사상 가장 굴욕적인 조약의 하나로 영토의 1/4과 주민의 1/3을 상실했다.
1915년 영화 `국가의 탄생` 개봉
캘리포니아 패서디나. 지금의 할리우드에서 그리 멀지 않은 태평양 연안 햇빛 도시의 영화 촬영장, 릴라이언스 머제스틱 스튜디오. 삼각 두건 복면을 쓴 쿠 쿨럭스 클랜(kkk) 일당이 흙먼지를 일으키며 말 달리는 장면이 한창 촬영 중이었다. 세계 영화사상 최초의 대작영화로 기록될 `국가의 탄생(the birth of a nation)`은 이렇게 미국 서부에서 태어났다. 이 3시간짜리 대작영화는 1915년 3월 3일 뉴욕 리버티 극장에서 개봉됐다.
감독 데이비드 워크 그리피스는 당초 뉴욕을 무대로 활동하던 중견감독이었지만, 당시로선 대단한 제작비 11만 달러를 쏟아부은 이 영화를 찍으러 캘리포니아로 달려왔다. 친구 빚까지 끌어다 겨우 제작비를 막았지만 개봉후 미 전역에서 1,500만달러 수입을 기록하며 영화산업이 숨은 벤처산업임을 확인했다. 전투장면에는 5백명이 넘는 엑스트라가 출연했고 박진감 넘치는 장면을 위해 10m가 넘는 촬영탑을 세웠다. 당대 최고 인기스타였던 릴리언 기쉬와 나중에 영화감독으로 활약한 라울 월시같은 쟁쟁한 캐스팅 역시 이후 할리우드 제작방식을 예고한 `흥행 캐스팅`이었다.
토머스 딕슨의 역사소설 '가문의 사람'을 원작으로 한 국가의 탄생은 1914년 7월 4일(미국 독립기념일) 촬영을 시작했다. 당시로서는 이례적인 2개월 반 남짓한 촬영기간과 3개월간의 편집기간은 3시간짜리 대작 영화의 완성도를 높이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날 영화가 개봉되자 전국적으로 항의시위가 줄을 이었다. 상영시간 3시간의 영화를 관통하는 너무도 명백한 인종주의에 항의, 미국 유색인종 지위향상 협회(naacp) 수천 회원이 극장마다 시위를 벌였다. 그러나 백인 영화매니아들은 영화감독 그리피스를 `미국 영화의 아버지`라고 추켜세웠다. 새로운 기법을 도입,영화에 혁신을 가져왔기 때문이었다. 사물이나 사람의 얼굴을 스크린 가득 채우는 `클로즈업`,전체광경을 파노라마식으로 보여주는 `롱쇼트` 등이 그것이다.
1910년 록펠러재단 설립 신청
미국 최대갑부 존 록펠러는 1870년에 ‘스탠더드 오일’을 설립하고 동업자들과 카르텔을 형성해 성장가도를 달려온 ‘석유왕’이었다. 1883년 출범시킨 ‘스탠더드 오일 트러스트’는 가혹한 경영으로 업계를 평정, 전미 석유생산의 95%를 점할 정도였다.
하지만 독점 폐혜를 우려한 사회적 비판도 만만치 않았다. 사람들은 그가 당대 최고의 기업가인 점은 인정하면서도 뇌물을 통해서라도 자신의 목적을 관철시키고 마는 악랄한 기업가로 생각했다. 여론을 의식한 연방의회는 셔먼 독점금지법(1890)을 제정해 록펠러의 탐욕을 견제했다.
록펠러는 자선사업으로 눈을 돌렸다. 1910년 3월3일, 그의 자선사업에 법적인 근거가 될 법안이 미 상원에 제출됐다. 출연금은 5000만달러. 이미 시카고대 설립에도 기여하고 록펠러의학연구소(록펠러대 전신)도 설립하고 나서였다. 박물관에도, 대규모 국립공원에도 거액이 투입된 후였지만, 일부에서는 ‘유다의 키스’라며 여전히 그의 재단신청 의도를 불신했다. 재단이 정식 설립된 것은 1913년 5월14일 뉴욕주의회가 설립을 허가하는 조례를 제정하고 나서였다. 출연금도 1억달러로 올랐다.
1898년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 결성
1883년 한국 일본간 해저전선부설 조약 체결
1875년 조르주 비제의 오페라 《카르멘》이 파리 시의 오페라 코미크 극장에서 초연.
1878년 - 산 스테파노 조약으로 불가리아가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자치권을 얻다.
1861년 러시아 농노해방령 공포
1857년 프랑스와 영국이 청나라를 상대로 제2차 아편 전쟁을 일으키다.
1845년 플로리다 주가 미국의 27번째 주가 되었다.
870년 불가리아에 정교회가 설립되었다.
42년 가야 시조 수로왕 태어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