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
"…혹시, 숀이신가요?"
"……네?"
끼이끼이 소리를 내며 돌아가는 수차 앞에서
헤어밴드로도 정리가 되지 않는, 숱 많은 진녹색 머리카락들 사이에서
다갈색 눈동자가 이 이방인들을 응시하고 있었다.
레쟈리가 소년의 손과 피부, 옷 군데군데 먼지가 내려앉아 있는 모양을 잠깐 응시했다.
"아아……응.맞아요."
"저는 신비령이라고 합니다."
비령이 평소답지 않게 지극히 사무적인 태도로 숀의 얼굴을 마주바라봤다.
"드래곤 유적지의 셰이머스 씨 아들분, 맞으시죠?"
"……우리 아빠를 알아?"
숀의 경계심어린 질문을 무시하고는
그의 다갈색 큰 눈을 가만히 응시하는 비령이었다.
- 1년 전쯤인가?
뱅크가 시끄럽다. 새로 온 지점장이 마을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고 있다.
또, 그 옆의 딸처럼 보이는 소녀도 보인다.
- 보인다.
하얀 피부의 세련된 금발의 소녀 ……
병약하여 늘 기침하고 있는 ……
그리고 조금 떨어진 곳에서, 안타까워하며 입술을 깨무는 소년이 보인다.
- 그리고 또……
'돈을 모아서, 아주아주 많은 돈을 모아서
내 손으로 저 아이의 병을 낫게 할꺼야!'
라고 당차게 소리치는 숀도 보였다.
"…… 좋아하는 사람이 있나요?"
숀이 흠칫-, 하더니,
이내 고개를 돌리며 마지못해 대답했다.
"응."
"도시 소녀군요."
"그래. 어떻게 알았어?"
"그런 세세한 걸 꼬마 도련님께 가르쳐드려야 할 의무는 없겠지요?"
"…참 특이한 누나구나."
숀이 씨익 웃으며 말했다.
"이비는 말이야, 저어기,
반호르 입구쪽 제일 높은 자리 위에서 늘 하늘을 바라보고 있어.
이비네 아버지는 뱅크 지점장이신데,
이멘 마하에서 좌천되어서 이곳으로 오신 거래.
좌천이 뭔지는 모르지만…마을 사람들이 그랬어.
근데 안 좋은 건가봐."
아이다운 표정을 지으며 숀이 말을 이었다.
"이비…본적 있어?
아마 못 봤을 거야. 그렇지?
정말 이뻐. 피부도 하얗구……머리카락도…
나 같은 아이하고는 전혀 달라!
다른 세계 사람 같아……"
숀이 몽롱한 표정을 지으며 두 손을 모았다.
예상 외의 소년의 행동에, 세 여자가 살짝 당황해했다.
"근데 병약하대. 음? 병약이란 건 말야.
아프다는 건가봐. 아주 아주 많이 ……
이비는 맨날 기침을 해. 뛸수도 없구, 마을 밖으로 나갈 수도 없어.
매일 매일 …… 하늘만 바라봐. 구름만 멍하게 보고 있구……
…그게 다 이비의 병 때문인거야!
내가 돈을 벌어서 그 병을 고쳐 주려구……
수차에서 철광석을 괴로 제련할수 있도록 해주고
사람들에게 돈을 받고 있어. 꽤 모였구."
아이다운 천진난만한 웃음이 숀의 얼굴에 퍼졌다.
그 아이에 대해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이렇게 좋아하는구나……
비령이 마음 한 구석이 찌릿해지는걸 느끼며 입을 열었다.
"숀. 잘 생각해봐.
그건 단지 「동경심」이라고 생각해본적은 없어?"
"…응?"
"그냥, 이 마을 밖의 낯선 세계에 대한 동경심 말이야.
그런 냄새가, 이비라는 소녀에게 묻어 있으니까……
이비가 아니라, 그 분위기와 냄새라는 것에 반한 게 아닐까?"
순식간에 숀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가까이에서 자신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고 있는 비령이
귀찮은 파리라도 된다는 듯 손을 휙 내저었다.
"포기하게 하려는 거면 가. 가라고!"
"내 말 들어."
비령이 숀의 작은 어깨를 두 손으로 잡았다.
뭔지 모를 압박감에, 숀도 두 말 않고 비령의 눈을 맞바라보았다.
- 또다시 보인다.
이번에는 소녀가 아니야……
소년의 상상 속 도시다.
화려한 옷차림의 사람들 ……
높디높은 건물들과 깃발……
영주가 기거하고 있다는 웅장한 성……
그리고 그것들이 한순간에 사라지면서 이비라는 소녀의 얼굴이 나타났다.
하얀 피부, 크고 맑은 눈, 아파 보이는 기색……
어딘지 모르는 도시미.
"……거짓말 하지 마!"
비령이 화를 내며 숀의 어깨를 부러트리기라도 할 기세로 꽉 잡았다.
"거짓말! 거짓말! 거짓말쟁이!
오래 전부터 그려왔잖아.
상상 속의 도시를! 저 먼 곳의 영주를! 많은 사람들을!
멋지고 화려한, 너의 도시를!"
"아냐!"
숀이 비령을 확 밀쳐냈다.
비령이 비틀거리며 뒤로 넘어졌다.
레쟈리와 유키에가 양쪽에서 그녀를 부축하여 일어나게 하였다.
"아냐! 아니라구!
난 이비가 좋은 거야. 좋은 거야. 좋은 거야!
좋아하고 있어. 좋아하고 있어!
아무것도 모르면서, 그딴 말 하지 마!"
"……"
비령이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더니 옷에 묻은 흙먼지를 털었다.
냉철하게 소년을 노려보던 비령이,
'가자'라는 말을 하지도 않고 앞서 그 자리를 벗어났다.
…………
"그래, 이건 뭔가 잘못된거야."
유키에가 레쟈리에게 나무장작들을 건네받고는
광장에 불을 피우며 계속 중얼댔다.
"혹시 있잖아. 심안으로 잘못 봤다거나."
"그럴 리는 없어요."
비령이 손톱을 깨물면서 흔들리는 불꽃을 불안하게 바라보았다.
"제 심안은 정확해요.
홍안[紅眼]이 괜히 홍안이 아니에요.
붉으면 붉을수록, 심안의 능력은 더욱 강해지죠."
"아아, 그러면 뭔데?
셰이머스가 분명하게 이야기 했다면서!
그 이비라는 아이의 도시적 향기에 사로잡혀 있는 거라고 말이야!"
"그래요. 분명히…… 분명히 그랬는데……
그런데…모르겠어요…… 정말로 분명히 그 영상들과 그 말이 관계가……"
순간 감겨있던 비령의 눈이 크게 뜨여졌다.
아직 온기가 식지 않은 빵을 뜯으며 유키에가 그런 비령을 어리둥절하게 쳐다보았다.
"……그래요."
비령이 숨을 몰아쉬었다.
"……그래…우리는 뭔가를 착각하고 있었어요."
그녀가 하얗고 기다란 손가락으로 자신의 머리카락을 헤집었다.
그런 비령의 이상한 행동을 보며 유키에가 짜증을 냈다.
"뭘 착각했다는 거야?"
"……순서가 바뀌었어요."
"순서?"
"이비라는 아이한테……다녀올게요!"
"자,잠깐! 우리도 같이……"
비령을 따라 일어서려는 유키에를 레쟈리가 붙잡았다.
그 사이 비령은 이미 저만치 달리고 있었고,
유키에는 또다시 짜증을 부렸다.
"아, 왜그래?"
"혼자 해결하도록 내버려 둬."
"뭐어? 저 아이가 혼자 할수 있을거 같아?
도와줘야지! 동료잖아!"
"무작정 도와주다가는 자신감도 잃게 돼."
"……아."
"동료라면, 혼자 해결할수 있는 상황은
혼자 해결하게 내버려 두어야지."
"……"
레쟈리의 말을 듣고는 가만히 자리에 앉아 열심히 빵을 뜯는 유키에였다.
레쟈리도 그런 유키에를 보며 조용히 빵을 입에 대었다.
…………
"하아…… 하아아 ……"
- 아, 보인다.
저만치서 푸르른 하늘을 쳐다보며 공상하고 있는 어린 소녀.
숀의 또래처럼 보인다.
연분홍빛 원피스와 모자……
크고 맑은 다갈색 눈망울과 어울리는 머리카락을 가진,
척박한 이 곳, 반호르와는 어울리지 않는 예쁜 소녀였다.
"…저어, 혹시 이비……?"
"응?"
방금 공상에서 벗어난 듯,
소녀가 깜짝 놀라며 고개를 돌렸다.
"……아아…그런데…언니는 이 곳 사람이 아니구나?"
"응."
"헤에…… 여기까지 온 이방인은 언니가 두 번째야."
"두 번째라니?"
"저번에는 수도 타라에서 왔다는 언니가 한번 다녀갔었어.
여기는 반호르에서 제일 높은 곳이거든 ……하늘에 가장 가까운."
소녀가 하얗고 통통한 손가락을 들어 푸르디 푸른 하늘을 가리켰다.
"언젠가 내가 가게 될 곳이지……"
"……뭐?"
"난 병에 걸렸어."
때맞추어 소녀가 뱉은 기침에
비령이 안쓰러이 소녀를 바라보았다.
"성인이 되기 전에 죽는대……
사실 나도, 여기 온지 얼마 안 됬어.
그 전에는 이멘 마하에서 살았는데, 아빠가 발령이 이 곳으로 났거든."
"……아하.
저어…,혹시 숀이라는 아이에 대해서 뭔가 해줄 이야기는 없니?"
숀이라는 이름을 듣자마자 소녀의 얼굴에 환하게 웃음이 드리워졌다.
생글대던 이비가 입을 열었다.
"숀은 참 착한 아이야.
날 위해서…… 돈을 모으고 있거든.
저기 던전 근처에 수차 봤지?
거기서 일하고 있대. 돈도 꽤 잘 버는 모양이야."
"…그 애, 널 진심으로 좋아하니?"
"어머. 그걸 어떻게 알았어, 언니?
그거야 말 하나 마나 당연하지!"
"……언제 만났어? 여기 와서?"
비령이 말라가는 입안을 적시며 이비의 말 한 마디 마디에 집중했다.
그래……어쩌면 내 짐작이 맞을지도 몰라.
"아니. 그 전에 한번 만났었어."
"……!"
"내가 가이레흐 언덕에서 길을 잃어버렸을 때……
아차, 가이레흐 언덕이 어딘지는 알지?
저어기 강한 몹들이 많은 곳 말야……
늑대에게 잡혀죽을 뻔했는데, 숀이 구해줬어.
뭐 죽이는 정도는 아니고 날 잡아먹지 못하도록 해주는 정도였지만 ……"
"그 애가 「도시」에 대해서 알게 된 건…… 언제쯤이야?"
"응! 내가 이 곳에 와서 이야기해 줬어.
하나도 모르고 있더라구! 영주라던가, 큰 상점이라던가 하는 것들도."
…………
"……알았어!"
"무슨 말이야?"
돌아오자마자 무슨 미친 짓이냐는 듯,
다섯 덩어리의 빵을 해치운 유키에가 비령에게 눈을 흘기며 물었다.
"착각했던 건, 바로 그거야……
우리는 셰이머스에게 ‘먼저’ 들었어.
숀이 도시적 향기 때문에 이비를 좋아하는 거라고 말이야……"
순간 유키에도 무언가를 깨달은 듯 자리를 박찼다.
"…그래……그렇다면……"
"내가 간과했던 게 있어."
비령이 조용히 말했다.
"심안이라고 해서, ‘모든 걸’보여주는 건 아니야.
소유자가 ‘보고 싶어 하는 것’만 보여주지."
"……그 말은."
"심안은 소유자가 올바르게 이해하지 못했다고 해서,
올바른 길을 가르쳐 주거나 하는 건 아니야.
정말로 보고 싶어 하는 것만 보여주는 거야."
레쟈리도 뜯던 고기 조각을 내려놓고 일어섰다.
"나에게는 일종의 ‘편견 비슷한 것’이 작용했어……
셰이머스 씨에게 ‘숀이 도시적 향기 때문에 이비를 좋아한다’
라는 말을 ‘먼저’ 듣고는 이미 머릿속에 각인시켰던 거야.
근데 그게 아니었어. 숀은 이비가 반호르에 오기 전에도
한번 만난 적이 있었대. 그리고 그때부터 죽 좋아하게 된거래."
"하지만, 도시적 느낌 때문에 좋아하지 않았다는 증거는 없잖아?"
"숀은 이비를 만나기 전까지는 도시라는 게 어떻게 생겼는지도 몰랐대."
비령의 말에 레쟈리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비가 이 곳에 온 이후로 말해 준 거래.
‘동경’은 그때부터 시작된 거야!"
유키에가 탄성을 질렀다.
"좋아! 그럼 문제는 다 해결 된 거네?
윈-윈(WIN-WIN)작전으로 가자고!"
"…이봐, 이봐.
우린 트레져 헌터(Treasure hunter)지, 해결사가 아니라고."
"일단 셰이머스를 설득해야겠지?"
"……"
한숨 쉬며 트레져 헌터임을 강조하는 레쟈리를 싹 무시하고,
어느새 비령에게 가까이 다가가 혼자 신나서 종알대는 유키에였다.
비령이 미소지었다.
"네에,셰이머스의 의뢰를 받기는 받았지만,
정황을 보니까 그가 잘못 알고 있는 듯 하네요. 숀을 도와줘야겠어요."
"……그러니까, 우리가 언제부터 사랑의 큐피트가 되어버린 건데!"
레쟈리가 소리를 꽥 지르는 사이
비령과 유키에는 앞서서 반호르 마을의 입구를 빠져나갔다.
※ Molto vivace energico ※
이 소설은 넥슨, 데브캣 스튜디오의 게임 [마비노기]
와 관련있는, 팬픽션에 가깝다는 사실을 알려드립니다.
게임을 하지 않으시는 분도 즐겨주세요.
세계관이라던가 하는 부분은 그쪽에서 따오긴 했습니다만,
게임과 다른 부분이 많으니까요.
Q&A, 지적 언제나 메일로 받습니다 :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