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나는 삶의 불확실함 앞에서
초조와 분노, 두려움에 자주 휩쓸린다.
붓다께서는 내려놓으라 하셨는데,
나는 그 집착을 오히려 꽉 움켜쥔 채
몸부림치듯 살아가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불교의 연기와
현대 물리학의 정보 개념이
같은 방향을 가리키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우주는 태초의 빛에서 시작되었고,
그 빛은 에너지이자
분별 이전의 정보의 첫 진동이었다.
그 진동은 스스로를 펼치며
차이를 만들고,
관계를 만들고,
서로를 비추며
무수한 인연의 그물망을 이루었다.
그리고 나는
그 그물망 속에 잠시 드러난
한 조각의 연기이다.
그런데도 나는
이 한 조각을 전부인 것처럼 붙잡고
세상과 싸우려 했다.
왜 세상은 내게 이렇게 고통을 주느냐고,
왜 세상은 내 마음대로 드러나지 않느냐고.
그러나 지금,
붓다와 정보이론은 이 지점을 가리키고 있다.
나는 사물 속에 사는 존재가 아니라,
연기의 패턴 속에 잠겨 사는 존재다.
내 분노와 불안도
‘나’라는 국소한 인연이
자기 보존을 위해 일으키는
한 순간의 마음일 뿐이다.
그것을 없애려 애쓸 것도,
그것이 곧 나라고 믿을 것도 없다.
그저
일어남을 보고,
머묾을 보고,
사라짐을 보면 된다.
빛의 향연은
어느 한 점에 머무르지 않는다.
인연은 흐르고,
나는 그 흐름 위에 잠시 맺힌
한 물결이다.
내가 울부짖는다고
이 거대한 법계의 그물망이
멈추지는 않는다.
그러니
놓아라.
도망치듯 버리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내 것이라 붙잡으려는 마음을 내려놓는 것이다.
현상은 계속 펼쳐진다.
기쁨도, 불안도, 상실도, 사랑도
모두 연기의 파노라마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마음에 새겨본다.
행하되 집착하지 말고,
받아들이되 휩쓸리지 말라.
일어나면 보고,
사라지면 보내라.
오늘도 이렇게
한 걸음 내려놓으려 다독인다.
첫댓글 친구에게 가끔 그런 말을 해요.
부처님께서 말씀하셨지, 시작을 알 수 없는 때로부터 우리가 흘린 눈물은 저 바다보다 넓고 깊다...
마찬가지로, 시작을 알 수 없는 때로부터 우리가 쏟은 비탄과 절규는 우주로도 모두 담아낼 수 없습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요. 찰나가 영겁을 담고 티끌이 일체를 담는다는 겁니다. 그러니 자꾸만 태초로 갈 필요 없습니다.
지금 흘린 눈물이 저 바다를 가득 채우고, 지금 쏟아내는 비탄과 절규가 우주를 가득 채우고 넘칩니다. 그래서 우주가 팽창한다고 그러나?
살아보니, 쌀은 쌀이고 보리는 보리더라구요. 감자는 감자고 고구마는 고구마, 이게 참 신기합니다. 그래서 눈물이 절규와 비탄이 저 바다를 채우고 우주를 채웁니다. 중생이 스스로 찾은 행복이란게 그런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