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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세의 중보기도
민 14:11-25
11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이 백성이 어느 때까지 나를 멸시하겠느냐 내가 그들 중에 많은 이적을 행하였으나 어느 때까지 나를 믿지 않겠느냐
12 내가 전염병으로 그들을 쳐서 멸하고 네게 그들보다 크고 강한 나라를 이루게 하리라
13 모세가 여호와께 여짜오되 애굽인 중에서 주의 능력으로 이 백성을 인도하여 내셨거늘 그리하시면 그들이 듣고
14 이 땅 거주민에게 전하리이다 주 여호와께서 이 백성 중에 계심을 그들도 들었으니 곧 주 여호와께서 대면하여 보이시며 주의 구름이 그들 위에 섰으며 주께서 낮에는 구름 기둥 가운데에서, 밤에는 불 기둥 가운데에서 그들 앞에 행하시는 것이니이다
15 이제 주께서 이 백성을 하나 같이 죽이시면 주의 명성을 들은 여러 나라가 말하여 이르기를
16 여호와가 이 백성에게 주기로 맹세한 땅에 인도할 능력이 없었으므로 광야에서 죽였다 하리이다
17 이제 구하옵나니 이미 말씀하신 대로 주의 큰 권능을 나타내옵소서 이르시기를
18 여호와는 노하기를 더디하시고 인자가 많아 죄악과 허물을 사하시나 형벌 받을 자는 결단코 사하지 아니하시고 아버지의 죄악을 자식에게 갚아 삼사대까지 이르게 하리라 하셨나이다
19 구하옵나니 주의 인자의 광대하심을 따라 이 백성의 죄악을 사하시되 애굽에서부터 지금까지 이 백성을 사하신 것 같이 사하시옵소서
20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네 말대로 사하노라
21 그러나 진실로 내가 살아 있는 것과 여호와의 영광이 온 세계에 충만할 것을 두고 맹세하노니
22 내 영광과 애굽과 광야에서 행한 내 이적을 보고서도 이같이 열 번이나 나를 시험하고 내 목소리를 청종하지 아니한 그 사람들은
23 내가 그들의 조상들에게 맹세한 땅을 결단코 보지 못할 것이요 또 나를 멸시하는 사람은 한 사람도 그것을 보지 못하리라
24 그러나 내 종 갈렙은 그 마음이 그들과 달라서 나를 온전히 따랐은즉 그가 갔던 땅으로 내가 그를 인도하여 들이리니 그의 자손이 그 땅을 차지하리라
25 아말렉인과 가나안인이 골짜기에 거주하나니 너희는 내일 돌이켜 홍해 길을 따라 광야로 들어갈지니라
민 14:11-25 / [모세가 무리를 위해 빌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대체 언제까지 이 무리가 나를 믿지 못하고 거스르려느냐? 내가 그동안 얼마나 많은 이적을 베풀었는데도 나를 믿지 못하고 저 모양들이냐? 12) 차라리 내가 전염병을 퍼뜨려 이들을 모조리 쓸어 버려야겠다 그런 다음 네 후손을 통해서 훨씬 더 큰 민족을 세우겠다.' 13) 그러자 모세가 여호와께 여쭈었다. `주께서 힘을 발휘하시어 이 무리를 애굽에서 이끌어 내신 사실을 모든 애굽 사람들이 알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주께서 그렇게 하신다면 애굽 사람들이 뭐라고 하겠습니까? 14) 또 이 땅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뭐라고 말하겠습니까? 여호와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고 우리와 같이 움직이신다는 것을 이 땅에 살고 있는 사람들도 듣지 않았습니까? 주님의 구름이 늘 우리 위에 머물러 계셨고 낮에는 구름 기둥으로 밤에는 불기둥으로 우리를 이끌어 그토록 애지중지 보살펴 주셨는데 15) 이제 와서 이 백성을 모두 쓸어 버리시겠다니요 이 백성 모두가 땅바닥에 나뒹군다면 뭇나라 사람들이 16) 이 백성에게 주시겠다고 약속한 땅을 여호와께서 넘겨 주실 힘이 없어 모두 이 광야에서 죽게하셨다고 하지 않겠습니까? 17) 하오니 주여, 주님의 힘을 보여주소서. 주께서 약속하신 대로 주님의 힘을 드러내소서. 18) `나 여호와는 좀처럼 화를 잘 내지 않고 사랑이 한없이 많아 한결같이 아끼고 어지간해서는 잘못이나 허물을 들추어 벌하지 않는 하나님이다. 그러나 당연히 벌을 받아야 할 사람은 용서하지 않는다. 아비가 벌받을 짓을 하였으면 자손 삼사 대까지 그 벌을 내리고야 말리라' 하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까? 19) 주님의 사랑은 한이 없으시고 한결같으시오니 이 무리가 잘못하였다 하더라도 제발 어여삐 여기소서. 주께서 애굽에서 이끌어 내신 이래로 끊임없이 보살펴 주신 이 무리를 이번도 불쌍히 보아 주소서. 노여움을 거두어 주소서.' 20)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다. `네가 그토록 간청을 하니 내가 이번만은 용서하리라. 21) 그러나 내가 살아 있는 한 또 온 누리에 나 여호와의 영광이 가득 차 있는 한 22-23) 이 무리는 결코 그 조상들에게 주겠다고 약속한 그 땅으로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이 무리는 나의 영광을 두눈으로 똑똑히 보았을 뿐만 아니라 애굽과 광야에서 내가 베푼 이적도 많이 보았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이 무리는 수없이 나를 시험하고 내 말을 따르지도 않았다. 이처럼 나를 우습게 여기는 사람은 그 누구라도 내가 주기로 약속한 그 땅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24) 그러나 내 종 갈렙은 다른 사람과는 달리 나에게 충성스럽게 행동하였고 내 말을 믿고 따랐다. 그러므로 갈렙만은 그가 살피고 온 그 땅에 들어가 살 수 있게 하리라. 그 후손이 그 땅을 차지하게 하리라. 25) 그 평원에는 지금 아말렉 사람과 가나안 사람들이 살고 있다. 그러니 너희는 내일 홍해 쪽으로 돌아서 광야로 들어가거라.'
반역하는 이스라엘 백성을 향하여 하나님께서 멸망의 진노를 선포하시자, 모세는 그 진노가 백성들에게 임하지 않도록 용서하여 달라며 간절히 중보 기도합니다.
이 백성이 어느 때까지 나를 멸시하겠느냐(11-12) 그들의 불신앙은 하루아침에 생긴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전염병으로 멸망시키고 모세를 통하여 새로운 민족을 일으키겠다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과거 금송아지 숭배 사건(출 32:10)에 이은 두 번째 말씀으로서 이스라엘의 반역과 불신앙이 얼마나 심각하였는지를 보여 주는 것입니다. 이와같이 신앙의 세계에서 불순종은 습관의 문제입니다. 하나님을 신뢰하여 순종하는 것이 거룩한 습관이라며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 것도 죄악된 습관의 문제입니다(렘 22:21).
이 백성을 사하신 것 같이 사하시옵소서(13-19) 불순종이 이스라엘의 습관이라면 모세의 습관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나오게 된 것은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 때문이었음을 고백하며 기도합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고도 환경이 변하자 하나님의 능력을 망각하고 무시해 버렸습니다. 모세는 가나안 땅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맹세하신 땅이오니 주의 큰 권능을 나타내시고, 하나님은 노하기를 더디하시고 인자가 많아 죄악과 허물을 사하시는 분이라고 다시 고백하며 기도하며 백성들을 용서받을 수 있도록 중보 기도합니다. 이런 모세의 중보 기도 중 하나님께 대한 신앙고백은 그가 신앙적으로 놀랍도록 성숙했다는 것과 철저하게 하나님 중심적인 삶을 살았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내가 네 말대로 사하노라(20-25) 모세의 간절한 중보기도에 하나님께서는 전염병으로 그들을 멸하고자 하신 계획을 취소하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반역하고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를 거절한 출애굽 1세대는 한 사람도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는 처벌을 내리셨습니다. 반역하는 자들은 심판의 대상이었으나, 변함없이 하나님을 온전히 좇은 갈렙과 그의 후손이 가나안을 차지하리라는 약속을 주셨습니다.
적용: 하나님을 기뻐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지 않습니다. 하나님 중심적인 기도는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입니다. 당신은 어떻습니까?
사명을 완수하려면 하나님의 계획을 우선적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하나님 제가 하는 일들이 잘되게 해주세요.”라는 기도는 이제 그만하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하도록 도와주세요.”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예수의 약속의 말씀대로,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 6:33)라는 말씀은 우리들의 삶의 우선순위가 어떠해야 하는지 분명히 보여주시는 말씀입니다.
< 설 교 >
모세의 중보기도
민 14:11-20 / 유재명 목사
내일 새벽부터 시작하는 제13차 영적전쟁을 앞두고 저는 오늘 포기할 수 없는 모세의 중보기도라는 제목으로 함께 말씀을 전하고자 합니다.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 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고 사도행전20:24절에 있는 바울의 고백이요 삶의 이유입니다.
사랑하고 존경하는 여러분! 여러분에게 있어 삶의 목적은 무엇입니까? 살아야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 질문에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은 참으로 행복한 사람이라 합니다.. 이것이 내안에서 정리되어 표현 할 수 있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역시 하루를 시작하며 눈을 떠야 할 이유가 있는 사람이어야 행복할 것입니다. 하루를 시작하며 내가 더 누워 있으면 안돼 일어나야 할 분명한 이유가 있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일어나야 하니까 살아야 하니까? 아니라 내가 살아야 할 분명한 이유가 있는 것은 주님에게나 많은 사람에게 너무나 소중한 것입니다. 그러면 또 하나 점검해 보아야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의 목적이 나라는 울타리에 갇혀 있습니까? 내 가정 내 울타리에 갇혀 있다면 나라는 울타리에 갇혀 있다면 오늘은 행복할지 모르나 결코 행복한 것은 아닙니다..
다른 사람을 섬기는데 있어 또 다른 나를 섬기는 것은 더 큰 행복을 가져오고 참으로 보람 있는 일이라 할 수 있습니다. 나라는 울타리를 벗어나 영원한 것을 추구하는 것은 진정한 가치를 추구하는 삶입니다. 우리들의 마음에 누군가를 사랑하는 마음 그리고 봉사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기도가 그러한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제13차 영적전쟁을 앞두고 우리가 기도할 때 그냥 하는 것이 아니라 기도해야 할 이유가 분명히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기도의 넓이 깊이가 내 문제를 넘어 또 다른 이유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기도가 있어야 합니다.
오늘 여러분에게 멋진 기도를 기도의 모범을 소개하니 바로 모세의 중보기도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니 오랜 광야생활을 끝내고 가나안 입성을 앞둔 이스라엘백성과 모세는 요단 건너에 있는 가나안땅에 12명의 정탐군을 보냅니다. 40일 동안의 정탐을 끝내고 돌아온 12명의 정탐 군들의 정탐내용은 부정적인 보고에 일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전혀 계산하고 있지 않는 보고였습니다. 부정적인 보고로 인해 이스라엘 백성들을 낙심케 하였습니다. 백성들은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고 있습니다. 오랜 노예의 습관이 나오고 있는 것입니다. 고비만 만나면 저들은 원망하고 있는 것입니다. 애굽 땅에서나 광야에서 죽었더면 좋았을 것이다 합니다. 가나안은 없다 합니다. 사실 저들은 가나안에 갈려고 나온 것이 아니라 끌려 왔다 생각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억지로 믿어준다 생각하니 힘든 것입니다. 여호와가 우리를 망하게 한다하거나 한 장관을 세우고 애굽으로 돌아가자 합니다. 온 회중이 모세와 아론 그리고 갈렙과 여호수아를 돌로 치려 합니다. 이때 하나님의 진노가 있어집니다.
이 백성이 어느 때까지 나를 멸시하겠느뇨 이들이 지금까지의 이적은 믿고 정작 나는 믿지 않는구나 그러니 내가 전염병으로 그들을 쳐서 멸하겠다 합니다.
이때 모세의 중보기도가 시작됩니다.
첫째: 모세의 중보기도는 저들을 사랑하며 하는 기도입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지금의 이스라엘 백성들을 다 멸하고 너에게는 그들보다 크고 강한 나라를 이루게 하겠다라는 제안에 저 같으면 고민을 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저들을 포기하겠다 하나 모세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모세는 지금 누구를 사랑합니까? 수없이 실망시키고 좌절하게 하고 결국 자신을 향하여 돌을 던지는 저들을 철저히 사랑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러나 나를 해하는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목자의 심정, 예수그리스도의 마음이 아니고는 사랑하기 힘이 든다는 것입니다. 다윗이 사울을 사랑한 것도 이와 같은 맥락입니다. 사울이 죽었을 때 나 같으면 감사헌금을 냈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그러하지 않았습니다. 사울을 억지로 참고 견딘 것이 아니라 사랑한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매력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어느 정도 사랑했는지 압니까? 모세의 기도를 보니 자신의 영혼을 걸고 기도할 정도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사랑했습니다.
출32:33절에 보니 그러나 합의 하시면 이제 그들의 죄를 사하시옵소서 그렇지 않사오면 주의 기록한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버리소서 라고 자신의 영혼을 걸고 기도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듯 하였습니다. 모세 자신은 지옥에 가도 좋다는 것입니다. 대신 저들을 구원하여 달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목자의 마음인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습니까?
배추장사가 배추를 얼마나 사랑하는 지 잘 모르실 것입니다. 제가 언젠가 부산에서 있었던 일입니다.큰 용기에 낙지를 담아 파는 가게 앞에서 발로 낙지용기를 툭 치며 이 낙지 얼마요? 했더니 주인이 얼마나 화를 내던지요... 사랑하는 낙지를 발로 찼다는 이유로 말입니다. 이들이 사랑하는 것들은 상품가치로 사랑하는 것이지만 그리스도의 사랑은 이익의 개념이 아닙니다.
둘째: 모세의 중보기도는 하나님의 명예를 붙들고 하는 기도였습니다.
이들을 죽이시면 그동안 주의 명성을 들었던 저들이 애굽에서 인도는 했지만 가나안으로 인도할 능이 없어 그러했다 합니다. 그러니 나는 죽어도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이름이 손상되면 어떻게 합니까?우리의 기도가 삶의 이유가 이러해야 합니다. 나는 죽어도 됩니다. 나는 가난해도 됩니다. 나는 병들어도 됩니다. 주님 안에 내가 선명한 것만큼이나 내 안에서 주님이 선명합니다. 나는 가난해도 병들어도 주님을 인정하지만 믿음 없는 가족, 믿음 없는 남편은 어떡합니까? 주변의 사람은 어떡합니까? 사실 나는 별것 없지만 다른 사람들은 내가 믿음 좋은 줄 아는데 힘들 때 하나님이 없다 합니다. 사실 나는 괜찮습니다. 나는 여전히 주님 안에 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명예를 붙들고 골리앗을 향하여 나아간 것입니다.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으로 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교회나 사업이나 당신의 삶에 하나님의 명예를 붙들고 씨름하고 있습니까? 네가 내 이름을 드러내면 나도 너의 이름을 드러내리라 합니다.
셋째: 모세의 중보기도는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고 하는 기도입니다.
따라하십시오 말씀하셨던 대로 약속하지 않으셨니까? 이제 구하옵나니 이미 말씀하신대로 주의 큰 권능을 나타내옵소서 이르시기를 여호와는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가 많아 죄악과 과실을 사하나 형벌 받을 자는 결단코 사하지 아니하고 아비의 죄악을 자식에게 갚아 삼사대까지 이르게 하리라 하셨나이다. 하나님이 말씀하신대로 약속하셨던 대로 일을 행하시고 성취하옵소서 아브라함에게 이삭에게 야곱에게 약속하지 않았나이까? 이 백성을 긍휼이 여기고 축복해 달라고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놓아버렸는데 모세는 아니라 합니다. 그들을 위하여 자기의 영혼을 걸고 생명을 걸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아직까지 예수를 믿으면서 여러분의 자존심이 중요하다면 이는 은혜를 모르는 것입니다. 우리가 받은 은혜를 알면 더 할 말이 없잖아요. 여러분 우리가 아무리 힘들어도 북한보다 힘들겠습니까? 우리의 자격이 아닙니다. 절대로 자격이 아닙니다. 모든 하나님의 사람들의 특징은 약속을 붙드는 것입니다. 17절에 말씀합니다. 이제 구하옵나니 이미 말씀하신대로 주의 큰 권능을 나타내시옵소서 주의 긍휼을 붙들고 영적싸움에 참예하는 것입니다.
넷째: 모세의 중보기도는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붙들고 하는 기도입니다.(19절)
구하옵나니 주의 인자의 광대하심을 따라 이 백성의 죄악을 사하시되 애굽으로부터 지금까지 이 백성을 사하신 것같이 사하시옵소서 모세는 철저히 주의 인자와 광대하심을 따라 용서하시옵소서라고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붙들고 기도합니다. 하나님! 원래부터 이들은 못났고 말 잘 안듣고 불평하는 백성임을 아셨지 않습니까? 저들은 못났지만 하나님의 백성이 아닙니까? 왜 이제 와서 심판하시겠다 합니까? 여러분 내가 못난 것 같아 걱정됩니까? 하나님 나 못난 것 하나님 알잖아요 이 고비만 오면 여지없이 나 넘어지는 것 아시잖아요. 그럼에도 하나님이 나를 놓아버린다면 나는 어떻합니까?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사랑할 수 없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자기 영혼 보다 사랑한 모세. 나를 알고 부르신 하나님 이스라엘의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께 모세는 긍휼을 바라고 있습니다.
결 론
모세의 중보기도는 자기목숨보다 더 사랑한 이스라엘을 위한 기도이며 하나님의 명예를 걸고 하는 기도이며 하나님의 약속을 붙잡고 기도하며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붙잡고 기도한 것입니다. 이런 모세의 중보기도에 하나님은 응답하십니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네 말대로 사하노라” 네 말대로입니다. 고쳐 말하면 네가 기도한대로 내가 응답하리라입니다. 금번 13차 영적전쟁에 이런 기도와 응답하심 그리고 선포들이 있기를 축복합니다. 따라서 하십시다. 사람이 나를 힘들게 해도 위로는 하나님께로 누가 손해를 입혀도 보상은 하나님께 이것이 영적전쟁의 정신입니다. ‘네 말대로’ 구체적으로 기도하는 것입니다. 당신은 오늘도 사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말 할수 있고 당신은 오늘 왜 기도합니까? 말할 수 있고 구체적으로 응답하십니다. ‘네 말대로 사하노라’ 이라는 응답을 얻기까지 모든 사람이 포기해도 모세는 절대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모세는 저들을 사랑합니다. 이 마음이 남다른 기도를 하게 한 것입니다.
전염병을 대하는 크리스찬의 자세
민수기 14:11-12, 누가복음 21:10-11 / 이상호 목사
2019년 12월 중국 우한시에서 발생한 바이러스성 호흡기 질환인 '신종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 일명 '코로나19'로 세계가 혼란에 빠졌습니다. 1월 감염자가 전세계 여러 국가로 확산되자 세계보건기구(WHO)에서는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에 대해 1월 30일 '국제 공중보건 비상사태(PHEIC)'를 선언했습니다. WHO는 2월 11일 공식명칭을 'COVID-19'로 명명했다고 발표했으며, 한국 질병관리본부에서는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로 표기하기로 했습니다. 2월 21일 기준 전 세계에서 76,781명(사망 2,248명)의 감염자가 보고되었으며, 한국에서는 방한중인 중국인이 1월 20일 최초 감염자로 확진된 이후, 대구 신천지 집단감염, 청도대남병원 등 2월 22일까지 모두 433명(사망 3명)이 감염자로 확진되었습니다.
레위기 13장 46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광야에서 부정하거나 병이 있는 자들은 진영밖에 살도록, 일종의 격리를 시키도록 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병 있는 날 동안은 늘 부정할 것이라 그가 부정한즉 혼자 살되 진영 밖에서 살지니라"(레 13:46) 이때 병은 오늘 날의 전염병에 해당될 수 있습니다. 병의 전염성을 막고자 부정한 자로 여겨 진영 밖으로 살게 한 것입니다.
말씀에 비추어 현재를 보면 급변하는 상황 속에서 누가 병 가운데 있는지와 누구를 진영 밖에 살도록 해야 하는지 알 수 없는 상황입니다. 특히 31번 확진자 발표 이후에 50여명(20일 오후 4시 기준)이 넘는 확진자가 쏟아졌고, 동선파악의 제대로 된 발표도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각별히 조심해야 할 이유입니다. 오늘은 전염병에 대해서 특별 메세지를 준비했습니다.
1. 전염병은 하나님의 심판의 일환입니다.
전염병이란 출 5:3 “그들이 이르되 히브리인의 하나님이 우리에게 나타나셨은즉 우리가 광야로 사흘길쯤 가서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제사를 드리려 하오니 가도록 허락하소서 여호와께서 전염병이나 칼로 우리를 치실까 두려워하나이다” (히) 네베르 - 구약에 약 49회 등장하며 하나님의 심판의 도구였습니다.
1) 하나님의 뜻을 거스렸을 때 애굽왕 바로에게 5번째 재앙으로 가축에게 전염병(돼지 코레라 AI)이 발생하여 많이 죽었습니다.
2) 하나님을 불신했을 때 : 본문 민 14:11-12
3) 하나님을 떠났을 때 : 예언서에 보면 우상숭배하고 음란, 쾌락, 돈을 따를 때 하나님께서 전염병이 돌게 하여 책망하십니다.
⇒ 본문 : 하나님의 인도하심 따라 불가능을 가능케 하며 주위의 모든 국가들을 놀라게 하고 공포에 몰아넣기까지 하며 약 2년 3개월간 광야와 사막을 약 200만 명의 남녀노유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약속의 땅을 향하던 중 최대의 위기를 맞았습니다. 민족 몰살의 위기입니다(12). 그 원인은 무엇입니까? 원인은 불신앙입니다(11).
이스라엘 백성은 출애굽 2년 3개월에 가나안 땅 바로 아래쪽 가데스 바네아에 도착하여(민 10:11, 신 1:2) 약속의 땅 가나안을 줄 터이니 두려워 말고 주저하지 말고 올라가 그 땅을 얻으라(신 1:2)고 말씀하셨으나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이 명령하시지도 않은 민족의 대표 12명의 정탐꾼을 선정하여 가나안 땅을 정탐하고 돌아와서 하는 보고를 듣습니다. 문제는 두려워서 한 정탐꾼 선정부터가 문제였습니다. 사람끼리의 합리성을 생각할 때는 지극히 합당한 일이나 지금까지 불가능한 것을 가능하게 하신 하나님의 이적을 체험하며 이적 가운데 살며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명령에 반대되는 불신앙의 행동을 한 것이 문제입니다. 백성들은 불평하며 모세와 아론을 원망합니다.(2절)
더욱이 정탐군은 10:2로 부정과 긍정으로 나뉘어 긍정적으로 얘기하는 여호수아와 갈렙을 돌로 쳐 죽이려하니 하나님께서 등장합니다.(10절)
모세는 앞서도 결단의 기도를 했습니다. 출 32장에 금송아지 숭배로 징계를 받아 하루에 3,000명 가량이 죽임을 당할 때 출 32:32절에 "합의하시면 이제 그들의 죄를 사하시옵소서. 그렇지 않사오면 원컨대 주의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 버려 주옵소서" 비장한 기도를 드렸습니다. 바울도 비슷한 기도를 했습니다. 롬 9:3절에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고 동족 구원을 원했으며 딤전 5:8절에 자기 친척, 가족을 돌보지 않으면 불신자보다 더 악한자라고 단정했으니 난국에 처한 조국을 위한 기도는 필수입니다. 에스더처럼 "죽으면 죽으리라"(에 4:16)는 각오가 필요합니다.
예) 다윗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었지만 하나님을 거스르고 제사장을 통해서 해왔던 인구조사를 요압장군에게 지시하여 무려 9달 20일 동안 조사하니 군사력 130만을 자랑합니다. 하나님이 하신 일을 자기가 한 일로, 자랑하고 드러내고 싶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불신이고 하나님을 떠나 군사력, 힘을 믿었으니 하나님의 책망으로 전염병이 돌아 무려 7만 명이 죽습니다.
사무엘하 24:13 “갓이 다윗에게 이르러 아뢰어 이르되 왕의 땅에 칠 년 기근이 있을 것이니이까 혹은 왕이 왕의 원수에게 쫓겨 석 달 동안 그들 앞에서 도망하실 것이니이까 혹은 왕의 땅에 사흘 동안 전염병이 있을 것이니이까 왕은 생각하여 보고 나를 보내신 이에게 무엇을 대답하게 하소서 하는지라” 이에 전염병을 택하니
15절 “이에 여호와께서 그 아침부터 정하신 때까지 전염병을 이스라엘에게 내리시니 단에서부터 브엘세바까지 백성의 죽은 자가 칠만 명이라” 무려 7만 명이 죽습니다.
2. 전염병은 하나님께 돌아오라는 메시지입니다.
“내가 너희 중에 전염병 보내기를 애굽에서 한 것처럼 하였으며 칼로 너희 청년들을 죽였으며 너희 말들을 노략하게 하며 너희 진영의 악취로 코를 찌르게 하였으나 너희가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였느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아모스 4:10)
하나님께 돌아와 전심으로 찾으라고 하십니다. 아모스 5:4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족속에게 이와 같이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나를 찾으라 그리하면 살리라” 6절에도 “너희는 여호와 찾으라 그리하면 살리라”고 하셨습니다.
역대하 6:28-31에는 솔로몬의 성전봉헌 기도가 나옵니다.
“만일 이 땅에 기근이나 전염병이 있거나 곡식이 시들거나 깜부기가 나거나 메뚜기나 황충이 나거나 적국이 와서 성읍들을 에워싸거나 무슨 재앙이나 무슨 질병이 있거나를 막론하고 한 사람이나 혹 주의 온 백성 이스라엘이 다 각각 자기의 마음에 재앙과 고통을 깨닫고 이 성전을 향하여 손을 펴고 무슨 기도나 무슨 간구를 하거든 주는 계신 곳 하늘에서 들으시며 사유하시되 각 사람의 마음을 아시오니 그의 모든 행위대로 갚으시옵소서 주만 홀로 사람의 마음을 아심이니이다”
전염병이 돌 때 백성들이 이 성전에서 기도하면 고쳐주신다고 하셨습니다.
“밤에 여호와께서 솔로몬에게 나타나사 그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미 네 기도를 듣고 이 곳을 택하여 내게 제사하는 성전을 삼았으니 혹 내가 하늘을 닫고 비를 내리지 아니하거나 혹 메뚜기들에게 토산을 먹게 하거나 혹 전염병이 내 백성 가운데에 유행하게 할 때에 내 이름으로 일컫는 내 백성이 그들의 악한 길에서 떠나 스스로 낮추고 기도하여 내 얼굴을 찾으면 내가 하늘에서 듣고 그들의 죄를 사하고 그들의 땅을 고칠지라”(역대하 7:12-14)
하나님의 심판임을 자각하고 하나님께 나아가 회개하면 하나님께서 돌보아 전염병을 막아주시고 능력을 베푸셔서 고치시며 도와주시고 우세하게 하신다는 말씀입니다.
시편 91:6절에는 “어두울 때 퍼지는 전염병과 밝을 때 닥쳐오는 재앙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로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전염병은 어두울 때 퍼지니 속수무책입니다. 상징적인 얘깁니다만 대구 신천지집회에서 퍼졌다는 거 아닙니까? 그러나 어두울 때 퍼지는 전염병과 밝을 때 닥쳐오는 재앙도 문제가 아닙니다.
시편 91:1-3절에 보면 “지존자의 은밀한 곳에 거주하며 전능자의 그늘 아래에 사는 자여, 나는 여호와를 향하여 말하기를 그는 나의 피난처요 나의 요새요 내가 의뢰하는 하나님이라 하리니 이는 그가 너를 새 사냥꾼의 올무에서와 심한 전염병에서 건지실 것임이로다”고 하셨습니다.
전염병에 걸리면 우선 격리됩니다. 가족과 이웃으로부터 out되는 겁니다. 고독, 두려움, 비참, 처참, 고통이 따릅니다. 그러나 지존자이신 하나님께 돌아와 그 그늘아래 피하면 요새가 되어주시고 사냥꾼 올무에서 벗어나게 해 주시고 심한 전염병에서 건지신다고 하셨습니다. 전염병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 돌아오면 승리하게 하십니다. 문제는 하나님께 돌아오라는 메시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기독교 박해를 중지하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그에게 나아가는 것입니다.
3. 전염병은 말세에 나타날 징조입니다.
본문 누가복음 21:10-11 “또 이르시되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겠고 곳곳에 큰 지진과 기근과 전염병이 있겠고 또 무서운 일과 하늘로부터 큰 징조들이 있으리라” 말세에는 전염병이 있으리라고 하셨습니다.
말세에는 재림신앙을 확보해야 합니다.
요한일서 3:2-3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지는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나시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참모습 그대로 볼 것이기 때문이니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
예수님의 나타나심, 곧 재림을 소망하며 깨끗하게 하고 거룩한 삶을 살게 됩니다. 귀한 손님이 온다고 하면 집안을 청소할 것입니다. 매주 드리는 구역예배 때만 돼도 청소하고 기다립니다.
1) 재림 예수님을 기다리는 신앙인은 자신을 청결하게 합니다, 생활을 정리하고 죄지은 것이 있다면 회개하고 갚습니다.
2) 재림신앙을 갖게 되면 하나님의 뜻을 행하게 됩니다.
사도행전 24:5 전도자 바울을 고발하면서 하는 말이 “우리가 보니 이 사람은 전염병 같은 자라 천하에 흩어진 유대인을 다 소요하게 하는 자요 나사렛 이단의 우두머리라” 바울에게 전염병(헬, 노이모스) - 구약의 ‘네베르’라는 말을 사용하면서 고발했습니다. 여기서 착안한 것은 우리는 세상에서 전염병이 아니라 전염명(傳染命), 곧 생명을 전하고 전염시키는 사람들이 되어야겠습니다.
이 어려운 시기에 하나님께 돌아와 전염병에서 구원받고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기는 복음전파, 전도의 기회로 삼자는 것입니다. 우리는 생명을 전하고 영혼을 구원하는 일에 목숨을 걸어야 합니다.
깨끗한 삶, 복음 전하는 삶, 하나님의 심판에서 화개하고 기도하여 하나님의 능력을 받으십시다. 전염병은 말세의 징조중 하나입니다. 더욱 더 하나님을 사모하고 재림 예수님을 기다리며 깨끗한 신앙, 말세를 사는 성도의 거룩한 삶을 결단합시다.
교회에 모이는 횟수는 줄이되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요4:24)라고 했는데, 영이신 하나님 앞에 각자의 자리에서 전심을 다해 영과 진리로 드리는 예배를 경험하시기 바랍니다. 모쪼록 전염병에 대해서 바르게 이해하고 하나님께 돌아와 승리하시기 바랍니다.
중보기도의 원리
민 14:11-25 / 박봉수 목사
오늘 본문은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극적인 사건 가운데 하나를 다루고 있습니다. 소위 ‘가데스 바네아’ 사건입니다. 먼저 그 배경부터 살펴보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을 출애굽시키셨습니다. 우선 저들을 2달 만에 시내 광야로 인도하셨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11달 체류케 하셨습니다. 그 동안 하나님께서 저들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훈련시키셨습니다. 율법을 주셨고, 제사 제도를 세워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저들과 언약을 체결하셨습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가나안으로 인도하셨습니다. 시내광야 훈련을 마치고 가나안 입성 준비를 끝낸 출애굽 제 2년 2월 20일에 이스라엘 백성을 가나안으로 출발시키셨습니다. 그러나 가나안으로 진군해 가는 도중 문제가 생겼습니다. 저들이 하나님 앞에 불평과 원망을 쏟아놓기 시작했습니다.
우선 험악한 광야 모습에 겁을 먹고 불평을 했습니다. 다베라 사건입니다.(민 11:1-3) 그리고 먹거리 때문에 불평을 했습니다. 기브롯 핫다아 사건입니다.(민 11:4-35) 또한 모세의 권위에 도전했습니다.(민 12:1-6) 하세롯 사건입니다.
이런 불평과 원망 사건들은 이스라엘 백성이 아직 가나안 땅에 들어갈 준비가 부족함을 암시해 줍니다. 비록 하나님과의 언약을 맺었고, 11달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훈련을 받았지만 충분치 못함을 말해 줍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는 저들을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셨습니다.
그러나 결정적인 사건이 터졌습니다. 바로 가데스 바네아 사건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의 입구인 바란 광야의 가데스 바네아에 도착했습니다. 저들이 12명의 정탐꾼을 가나안 땅에 보내어 40일 동안 정탐케 했습니다. 저들의 보고는 한 가지 점에는 일치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그 땅은 정말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는 점입니다.
그러나 결정적인 점에서 엇 갈렸습니다. 여호수아와 갈렙은 “우리가 곧 올라가서 그 땅을 취하자 능히 이기리라”고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보고를 했습니다. 그러나 나머지 10명의 정탐꾼들은 “우리는 능히 올라가서 그 백성을 치지 못하리라 그들은 우리보다 강하니라”고 부정적인 보고를 했습니다.(민 13:30-31)
보고를 들은 백성들이 술렁이기 시작했습니다. 저들이 두려워 통곡을 했습니다. 하나님을 원망했습니다. 그리고 여호와 하나님과 모세를 버리고 새 지도자를 세워 애굽으로 돌아갈 계획을 세우게 되었습니다.
이 모습을 지켜보신 하나님께서 가만히 계실 수가 없으셨습니다. 이 때 하나님의 반응을 민 14:11-12은 이렇게 기록해 놓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이 백성이 어느 때까지 나를 멸시하겠느냐 내가 그들 중에 많은 이적을 행하였으나 어느 때까지 나를 믿지 않겠느냐 내가 전염병으로 그들을 쳐서 멸하고 네게 그들보다 크고 강한 나라를 이루게 하리라”
이 말씀의 내용은 세 가지입니다.
첫째는 하나님께서 대노하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멸시를 당했다고 말씀하실 정도로 화가 나신 것입니다.
둘째는 이스라엘의 문제의 핵심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것이라는 점입니다. 바로의 집요한 방해도 10가지 재앙으로 물리치신 하나님, 홍해를 놀라운 기적으로 가르신 하나님, 불기둥과 구름 기둥으로 저 광야생활을 지켜주신 하나님, 만나로 먹이신 하나님 그 하나님을 믿지 못한다는 점입니다.
셋째는 하나님께서 저들을 전염병으로 멸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저들을 버리시고 모세를 통해서 다시 큰 민족을 이루어 구원 역사를 새롭게 펼치시겠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결정적인 위기 상황이 발생된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의 진노를 피할 길이 없게 된 것입니다. 자칫 전염병에 걸려 몰살당할 위기를 맞게 된 것입니다.
중보기도
이 절체절명의 순간에 모세가 나섰습니다. 본문 13절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모세가 여호와께 여짜오되”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이 멸절당하는 것을 그냥 보고만 있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기도를 드리기 시작한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말씀드리면 하나님께서 모세의 기도를 들으셨습니다. 그리고 20절에 이렇게 답하셨습니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네 말대로 사하노라” 하나님께서 모세의 기도를 들으시고 이스라엘 백성을 멸절키로 하신 것을 철회하셨습니다. 저들의 죄를 용서하셨습니다.
모세가 드린 이런 기도를 “중보기도”라고 부릅니다. 중보기도란 영어로는 ‘intercession’이란 말을 씁니다. 여기서 ‘inter’는 ‘사이’ 그리고 ‘cession’은 라틴어 ‘cedere’에서 나온 말로 ‘간다.’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intercession 이라는 것은 “둘 사이로 나간다.”라는 뜻입니다. 즉 양편의 가운데에 위치하여 서로를 연결시켜 주는 행위를 가리킵니다. 이런 뜻에서 중보기도는 그 누군가와 하나님 사이에 위치해서 그를 위해서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를 말합니다.
여기서 확인하게 되는 것은 중보기도의 놀라운 힘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 대한 진노를 가라앉히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멸절키로 하신 생각을 바꾸셨습니다. 출애굽 구원역사를 계속 이어가시기로 하셨습니다. 바로 중보기도 때문입니다. 모세 한 사람의 중보기도로 이스라엘 백성 전체가 살 길을 찾은 것입니다.
제가 4월 첫 주로 상도중앙교회 부임 10주년을 맞았습니다. 돌이켜보면 부족하지만 대과 없이 목회를 할 수 있었습니다. 선배들의 땀과 눈물이 헛되지 않도록 나름대로의 열매도 거둘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차분하게 감사의 제목을 정리해 보았습니다. 참 좋은 당회원들과 함께 사역할 수 있었던 것 감사했습니다. 너무 좋은 교우들 만난 것 감사했습니다. 새로운 목회 사역을 펼칠 수 있었던 참 좋은 시기를 주신 것도 감사했습니다. 열 손가락으로 다 손꼽을 수 없었습니다.
본당 옆을 지나다가 안에서 흘러나오는 기도 소리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제 마음을 흔드는 기도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우리 목사님 능력의 종이 되게 하시고, 건강을 지켜주시고... ” 저를 위한 중보기도를 드리는 소리였습니다. 누군가 하고 조용히 들여다보았습니다. 제가 잘 모르는 분입니다. 근자에 새로 등록한 분이셨습니다.
제가 새롭게 깨달았습니다. “지난 10년 나름대로 목회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우리 교우들의 중보기도 때문이었구나”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이 부족한 목사를 위해 기도해 주시는 교우들의 사랑의 중보기도 때문이었구나...
그렇습니다. 중보기도에 눈을 뜰 수 있어야 합니다. 우선 중보기도의 위력을 믿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기도 현장에서 체험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북한의 핵문제 때문에 국내외적으로 힘겨운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핵의 위력을 잘 알기 때문입니다. 북한이 핵무장을 할 경우 어떤 일들이 벌어질 것을 잘 알기 때문입니다. 마찬 가지입니다. 중보기도는 핵보다 더 큰 위력을 가지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중보기도를 하게 되면 놀라운 일들이 일어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중보기도의 소중함을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삼상 12:19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모든 백성이 사무엘에게 이르되 당신의 종들을 위하여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 기도하여 우리가 죽지 않게 하소서...” 백성들이 사무엘 선지자에게 중보기도를 청하는 내용입니다. 백성들이 중보기도의 소중함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12:23을 보면 사무엘이 이렇게 답합니다. “나는 너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쉬는 죄를 여호와 앞에 결단코 범하지 아니하고 선하고 의로운 길을 너희에게 가르칠 것인즉...” 사무엘 선지자가 중보기도에 헌신할 것을 약속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사무엘도 중보기도의 소중함을 깨닫고 자기가 할 일들이 많지만 이 중보기도를 최우선적으로 할 것이며 또한 마지막까지도 중보기도에 헌신하겠다는 약속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중보기도의 소중함을 알아야 합니다. 서로 중보기도를 부탁하고, 또 서로 중보기도의 짐을 질 수 있어야 합니다. 자녀들에게 줄 수 있는 가장 귀한 선물은 바로 중보기도입니다. 주의 종들에게 줄 수 있는 가장 귀한 선물도 바로 중보기도입니다. 나라와 민족을 위해 그리스도인들이 봉사할 수 있는 것도 바로 중보기도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마지막까지 할 수 있는 봉사도 바로 중보기도입니다.
중보기도의 원리
오늘 본문은 중보기도의 원리에 대해서 귀한 교훈을 줍니다.
첫째, 사랑의 원리
오늘 본문의 가데스 바네아 사건을 모세를 중심으로 주의 깊게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백성들이 밤새 통곡하고 한 자리에 모여 모세에 대해 원망했습니다. 지금까지 1년 넘게 자기들을 이끌어 온 지도자입니다. 목숨을 걸고 자기들을 위해 헌신해 온 하나님의 종입니다. 대들고 공격하고 원망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모세를 따르지 않기로 하고 다른 지도자를 세우기로 했습니다.
민 14:5를 보면 모세가 이스라엘 온 회중 앞에서 엎드렸다고 되어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외면당하게 되었음을 보여주는 표현입니다. 그리고 14:10을 보면 놀라운 말씀이 기록되어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돌을 들어 여호수아와 갈렙을 죽이려 했다는 것입니다. 만일 저들이 돌로 두 사람을 죽였다면 그 다음은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분명히 모세도 그 자리에서 돌에 맞아 죽게 될 상황입니다.
모세도 당연히 화가 났을 것입니다. 그동안 자기들을 위해 목숨 걸고 헌신했는데 이럴 수는 없다는 생각에 분노가 치밀어 올랐을 것입니다. 저들이 돌까지 들고 치려하는 모습을 보고 미움이 솟구쳤을 것입니다. 게다가 하나님께서 저들을 버리시겠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 뜻대로 하시라고 말하고 싶은 생각이 들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모세가 하나님의 뜻을 가로막았습니다. 그래도 이스라엘 백성 편에 섰습니다. 저들을 용서해 달라고 간청하고 나선 것입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중보기도는 사랑으로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마음이 없으면 중보기도는 응답될 수 없습니다. 사랑 없는 중보기도는 그야말로 울리는 꽹과리와 같습니다. 형식적이고 체면치레로 하는 기도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위해 중보기도할 때 먼저 우리의 마음이 바뀌어야 합니다. 우리 마음속에 그를 향한 사랑이 가득 차야 합니다.
둘째, 영광의 원리
모세의 중보기도 내용을 자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13-16절에 이렇게 기도하고 있습니다. “애굽인 중에서 주의 능력으로 이 백성을 인도하여 내셨거늘 그리하시면 그들이 듣고 이 땅 거주민에게 전하리이다. 주 여호와께서 이 백성 중에 계심을 그들도 들었으니 곧 주 여호와께서 대면하여 보이시며 주의 구름이 그들 위에 섰으며 주께서 낮에는 구름 기둥 가운데에서 밤에는 불기둥 가운데에서 그들 앞에 행하시는 것이니이다. 이제 주께서 이 백성을 하나 같이 죽이시면 주의 명성을 들은 여러 나라가 말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가 이 백성에게 주기로 맹세한 땅에 인도할 능력이 없었으므로 광야에서 죽였다 하리이다”
모세의 중보기도의 근거는 결국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전염병으로 멸절시키신다면 하나님의 영광이 가려지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이방 세계에 하나님께서 무능한 신이라 소문이 나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온 세상에 하나님께서 약속을 하시고 그 약속을 지키실 능력이 없는 분으로 소문이 나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중보기도는 하나님의 영광에 초점을 맞추어야 합니다. 중보기도가 기도가 자신의 유익에 초점을 맞추면 안 됩니다. 역시 중보기도가 또한 대상자의 유익에 초점을 맞춰도 안 됩니다.
12절을 보면 모세는 하나님께로부터 뜻밖의 제안을 받습니다. “네게 그들보다 크고 강한 나라를 이루게 하리라” 이스라엘 백성을 멸절시키고 모세로 하여금 다시 큰 민족을 이루게 해 주실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이렇게 된다면 모세가 아브라함을 대신해서 믿음의 조상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자신과 가문을 생각해 보면 가문의 영광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자신의 영광이나 가문의 영광을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영광만을 생각했습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위해 중보기도 할 때 하나님의 영광을 생각해야 합니다. 내게 돌아올 유익이 무엇인가를 따지지 말아야 합니다.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이 돌아갈 수 있는 길을 따라 중보기도를 드려야 하겠습니다.
셋째, 말씀의 원리
모세의 중보기도 내용을 묵상하다보면 한 가지 의문점이 듭니다. 모세가 하나님의 마음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제안도 받았습니다. 그런데 모세가 하나님의 제안을 거절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돌려달라고 청했습니다. 모세가 어떻게 감히 이렇게 할 수 있었을까요?
그 답에 본문 17-18절에 나옵니다. “이제 구하옵나니 이미 말씀하신 대로 주의 큰 권능을 나타내옵소서 이르시기를 여호와는 노하기를 더디 하시고 인자가 많아 죄악과 허물을 사하시나 형벌 받을 자는 결단코 사하지 아니하시고 아버지의 죄악을 자식에게 갚아 삼사대까지 이르게 하리라 하셨나이다.” 바로 그가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 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한 번 약속하신 것을 어기실 수 없는 분이시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식언치 못하시는 분이심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시내산에서 모세에게 말씀하신 것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명을 따라 두 번째 돌 판을 깎아들고 시내 산에 올랐을 때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이 있었습니다. 바로 출 3:6-7입니다. 모세는 바로 그 말씀을 가지고 하나님께 기도를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말씀대로 드리는 기도에 하나님께서 응답하시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중보기도는 말씀대로 드려야 합니다. 내 생각대로 기도드려서는 안 됩니다. 내 감정 따라 기도드려서는 안 됩니다. 사람들의 소리를 따라 드려서도 안 됩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위해 중보기도할 때 성령의 도움을 구해야 합니다. 성령께서 우리 마음속에 하나님의 말씀을 생각나게 해 주십니다. 우리가 그 말씀을 따라 기도하면 우리의 기도는 소위 “말씀에서 샘솟는 기도”가 되는 것입니다. 이런 기도는 능력이 있어서 응답을 받게 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중보기도는 우리 성도들에게 주신 특권입니다. 우리가 이 특권을 누릴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또한 중보기도는 우리 성도들에게 주신 명령입니다.(딤전 2:1-2) 우리가 이 명령에 순종해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중보기도 할 때 따라야 할 원리가 있습니다. 사랑의 원리입니다. 사랑하는 마음으로 기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영광의 원리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기도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말씀의 원리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드리는 기도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가문에 흐르는 저주 통로
민 14:18 / 강문호 목사
며칠 전 신문에 난 사건입니다. 가출하였던 3일만에 딸이 돌아 오자 어머니가 그 동안의 딸의 행적을 추궁하였습니다.그리고 가슴에 남자 애무 흔적이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어머니는 흥분하였습니다.그래서 딸을 옆에 있던 넥타이로 목을 졸라 죽였습니다.그리고 오른손으로 칼을 들어 자기 왼쪽 손목을 자르다가 쓰러졌습니다.기절하여 쓰러져 있는 어머니를 아들이 발견하여 병원으로 옮겨 간신히 살렸습니다.그렇게 흥분하였던 이유와 자살하려던 동기를 경찰이 물었습니다.살인범이기 때문이었습니다.어머니는 대답하였습니다. "결혼할 때 내가 순결하지 못 하였었는 데 딸이 음란한 것을 보고 나를 닮은 것같아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그렇지 않아도 남편에게 죄스럽게 살고 있는 데 딸마저 그렇게 살 것을 생각하니 속상하였습니다.그래서 순간적으로 딸 목을 졸랐습니다.죽일 마음이 전혀 없었습니다" 죄는 유전됩니다.나는 오늘 무서운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하나님은 부모가 죄를 지으면 그 죄값을 자녀에게서 찾겠다는 것입니다.자녀는 잘못없이 공연히 고통을 받을 때가 있습니다. <여호와는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가 많아 죄악과 과실을 사하나 형벌 받을 자는 결단코 사하지 아니하고 아비의 죄악을 자식에게 갚아 삼 사대까지 이르게 하리라 하셨나이다>(민14;18) 출애급기도 말하고 있습니다.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 이나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것의 아무 형상이든지 만들지 말며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 것들을 섬기지 말라 나 여호와 너의 하나님은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 를 갚되 아비로부터 아들에게로 삼 사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 키는 자에게는 천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출20;4-6) 예레미야도 말하고 있습니다. <주는 은혜를 천만 인에게 베푸시며 아비의 죄악을 그 후 자손의 품에 갚으시오니 크고 능하신 하나님이시요 이름은 만군의 여호와시니이다>(렘32;18) 가문마다 저주가 흐르고 있습니다. 어느 가문은 음란이 흐르고 있습니다.한 여대생이 내게 이런 편지를 보냈습니다. <우리 가문에는 색기와 음란이 흐르고 있음을 알았습니다.증조 할아버지께서는 첩이 있었습니다.그런데 할아버지도 나이 많아 느즈막이 여자를 아셨습니다.작은 아버지도 밖에서 난 딸을 데려다가 같이 기르고 있습니다.그런데 더 두려운 것은 내게도 그런 음란이 흐르고 있음을 알았습니다.하나님이 슬퍼하시는 것을 알았기에 더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려고 애를 쓰지만 음란은 내 몸을 점령하고 있습니다.그래서 신앙생활하는 것이 가식으로 느껴지고 있습니다.철저히 돌아설 수 있도록 기도하여 주십시오> 어느 가문은 병이 흐르고 있습니다.어느 가문은 혈기가 흐르고 있습니다.심지어 자살이 흐르는 가정도 있습니다.어느 가정은 정신분열증이 흐르고,어느 가문은 거짓말이 흐릅니다.어느 가문은 단명이 흐르고 어느 가문은 사고가 흐릅니다.이혼이 흐르는 가정도 있습니다.어느 가문은 가난이 흐르는 가문도 있습니다.나는 이런 편지도 받았습니다. <강 목사님! 저는 60평생 남에게 이자만 주고 살았습니다.그리고 친정에는 자살이 흐르고,시댁에는 음란이 흐르고 있습니다.이 저주의 흐름을 어떻게 끊을 수가 있을 가요?> 분명히 부모의 죄는 흐르고 있습니다.그러면 어떤 경로로 죄와 저주가 흐르는 것일까요? 5가지 통로를 오늘 말씀 드리려고 합니다. 1.유전 인자를 통하여 민족마다 독특한 유전인자가 있고 가문마다 유전인자가 다르다고 합니다.흑인들에게는 적혈구 빈혈증(sickle-cell anemia)이 있습니다.이탈리아 민족에게는 우울증이 많습니다. 컴퓨터 앞에 갔을 때 깨져있는 마우스를 보았습니다.약 10만원짜리였습니다.그리고 책상위에 기물이 파괴되어 있는 것을 보고 직감적으로 나는 심상치 않은 일이 일어났음을 알았습니다.아들이 어머니에게 대들다가 자기 분을 참지 못 하여 마우스를 던져서 마우스도 파괴되고 기물도 파괴되어 있는 것을 알았습니다.아들을 야단치면서 나는 <저것이 나다>라고 여겼습니다. 학생시절 어머니와 의견이 맞지 않는다며 집을 나가겠다고 밥상을 엎었던 내 모습이 떠올랐습니다.혈기는 유전됩니다. 어느 산파가 아이를 받고 나니 손가락에 끼었던 금반지가 없어졌습니다.온통 다 뒤졌으나 못 찾았습니다.나중에 아이 목욕을 시키다가 움켜쥔 손에 금반지가 있는 것을 발견하였습니다.그런데 그 아이 어머니는 도벽이 심한 이였습니다. 다윗이 이런 말을 하여 주었습니다. <내가 죄악중에 출생하였음이여.모친이 죄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시51;5) 죄 인자가 유전되었음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나는 지난 주간 대구 순복음교회 기도원에서 200여명의 목사님들을 모시고 145기 성막 쎄미나를 마치고 돌아 왔습니다.마침 카자흐스탄에서 18명 신학생들이 참석하여 동시통역으로 같이 공부를 하였습니다.그런데 그 중에 두 명이 고려인이었습니다.할아버지가 1937년 쏘련으로 강제징용되어 끌어려 간 자녀들이었습니다.어느 덧 3대가 흘렀습니다.이들은 한국에 처음 온 것이었습니다.같이 둘러 앉아 된장찌개 를 먹는 데 다른 신학생들은 냄새도 싫어하는 데 이 두 명은 맛있다고 잘 먹는 것이었습니다.나는 이것을 보며 속으로 중얼거렸습니다. "종자를 속일 수 없구나.피는 무시할 수가 없구나" 부모의 인자가 자녀에게 흐릅니다. 2.모방을 통하여 자녀들은 부모를 제일 가까이서 보게 됩니다.보면서 자연히 저주스런 죄가 전가됩니다. 중학교에 다니는 아들이 담배를 피우다가 아버지에게 들켰습니다.아버지는 대가리에 피도 안 마른 녀석이 담배를 피운다고 몹시 때렸습니다.그리고는 화가 풀리지 않아 아들을 앉혀 놓고 담배를 피우더라는 것입니다. 알고보니 아버지도 학생시절부터 골초였습니다.아들은 그것을 보고 자란 것입니다. 성남을 지나다가 육교위에 이런 프랭카드가 걸려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나는 아버지 운전하는 대로 할 것입니다" 성경에 나타난 왕들을 보면 대부분이 아버지 왕을 본받아 그대로 정치하였습니다. <여호야김이 그 열조의 모든 행한 일을 본받아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였더라>(왕하23;37) <여호야긴이 그 부친의 모든 행위를 본받아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였더라>(왕하24;9) 술주정뱅이 아버지가 두 아들을 남겨 놓고 세상을 떠났습니다.가정은 아버지의 음주로 인하여 하루도 편할 날이 없었습니다.일하지 않고 밤낮 마셔대다가 결국 가산도 탕진하고 가난뱅이로 가족들을 남겨놓고 죽었습니다.후에 큰 아들은 유명한 의과대학 교수가 되어 <금주운동>을 주도하였습니다.그러나 동생은 주정뱅이가 되었습니다.두 명에게 같은 질문을 하였습니다. "왜 그렇게 되었습니까?" 동생과 형의 대답은 똑같았습니다. "알콜중독자 아버지 때문에....." 도박하는 부모는 도박하는 자녀를 만들기 쉽습니다.폭행을 당하며 자란 아이들은 <난 커서 폭행하지 말아야지!"라고 다짐하면서 폭행을 배우게 됩니다. 해롤드 브롬휠드(Harold Bloomfield) 박사는 말했습니다. "자식들의 부모와의 관계는 부모의 행동으로 영향을 미친다.부모들은 자신들이 자라면서 혐오하였던 행동을 자기도 모르게 반복한다.그리고 그것을 자녀는 배운다" 유타대학 사회학과 니콜라스 월핑거(Nichilas Walfinger) 교수 연구팀의 연구 결과는 우리의 관심을 끌어 줍니다.1977년부터 1994년 사이에 18세에세 98세까지 성인 11,000명을 대상으로 이혼이 습관에 미치는 영향을 연구하였습니다.1998년 9월 11일자 <건강과 사회적 행동 회보>에 발표한 자료를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이혼한 부모의 자녀들은 그렇지 않은 자녀들보다 알콜 중독이나 흡연에 빠질 위험이 30%나 높았다> 자녀들이 부모를 볼 때마다 죄와 축복이 모방을 통하여 흐르게 됩니다. 경주에서 수학여행단을 받는 여관을 하는 장로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한국 중고등학교 아이들이 자고 간 자리는 마치 전쟁을 방불케 할 정도로 어지럽다는 것입니다.베개잎은 찢어져 있고 이불은 담배재로 얼룩져 있고 야단들입니다.더럽기 짝이 없습니다.그런데 일본 중고등학교 아이들이 자고 돌아 가고 나서 방에 들어가 보면 "누가 자고 간 방인가?" 의심할 정도로 흔적이 없다는 것입니다.모방을 통하여 배웁니다.모방을 통하여 축복과 저주가 흐릅니다. 3.추수의 법칙을 통하여 세상에는 하나님이 만들어 주신 자연법칙이 있습니다.콩심으면 콩나고 팥심으면 팥납니다.많이 심으면 많이 나고 나쁜 것을 심으면 나쁜 것이 납니다.하나님은 자연법칙을 이 땅에 이루셨습니다. 만일 <중력의 법칙>을 무시하고 63빌딩에서 떨어지면 즉사합니다.<추수의 법칙>을 무시하고 겨울에 씨를 심으면 싹이 날 리가 없습니다.부모가 죄를 지으면 자기가 벌을 받거나 자손이 재앙을 받는 것은 뻔한 추수의 자연법칙입니다. 조사 결과에 의하면 여자가 임신하였을 때 담배를 피우면 담배를 피우지 않는 여자가 난 아기보다 독서능력이 6개월 가량 뒤진다고 합니다.그리고 평균 키가 5cm 작았습니다. 다윗이 밧세바와 간음하였을 때 그 간음을 태어난 아이가 죽었습니다(삼하12;18) 태어나자 말자 아이가 무슨 잘못이 있어서 죽었습니까? 어려서 아이가 죽었다면 부모 죄값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을 섬겼습니다.그러나 요시아왕만은 하나님을 잘 섬겼습니다.요시야 왕만은 하나님께 통곡하며 기도하였습니다.그랬더니 훌다라는 여자 선지자를 보내어 이런 예언을 하였습니다. <이는 이 백성이 나를 버리고 다른 신에게 분향하며 그 손의 모든 소위로 나의 노를 격발하였음이라 그러므로 나의 이곳을 향하여 발한 진노가 꺼지지 아니하리라 하라 하셨느니라 ...........내가 이곳과 그 거민에게 대하여 빈 터가 되고 저주가 되리라 한말을 네가 듣고 마음이 연하여 여호와 앞 곧 내 앞에서 겸비하여 옷을 찢고 통곡하였으므로 나도 네 말을 들었노라 여호와가 말하였느니라 그러므로 내가 너로 너의 열조에게 돌아가서 평안히 묘실로 들어가게 하리니 내가 이 곳에 내리는 모든 재앙을 네가 눈으로 보지못하리라 하셨느니라 사자들이 왕에게 복명하니라>(왕하22;17-20) 조상들의 죄 때문에 재앙을 퍼부을 것인 데 요시아 왕이 겸비하게 기도하니까 왕 시대에는 이런 재앙을 주지 않겠다는 말씀입니다.백성들의 자손에게 저주,요시아 왕에게 축복을 주시 겠다는 말씀입니다. 욥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친구를 지적하여 해를 받게 한 자의 자식들은 눈이 멀지니라>(욥17;5) 눈먼 이들의 조상이 다 친구를 해한 것은 아니나 분명히 친구에게 해를 끼치면 자녀 가운데 눈먼 자가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이같이 추수의 법칙을 통하여 조상의 죄가 자손들에게 흘러 들어 가고 있습니다. 4.악령들을 통하여 예수님이 변화산에서 기도하고 내려 오시니 어떤 아버지가 아들을 데리고 와서 귀신들렸다 고 고쳐달라고 하소연하였습니다. <예수께서 그 아비에게 물으시되 언제부터 이렇게 되었느냐 하시니 가로되 어릴 때부터니이다>(막9;21) 딕커슨 박사가 귀신들린 이들 400명 가량을 치유하고 내린 결론은 귀신들린 아이들의 3-4 대를 거슬려 올라가면 반드시 귀신을 섬겼던 조상들이 나타난다는 사실을 발견하였습니다. 이런 영을 <가계 영>(family spirits)라고 이름을 붙였습니다.귀신에게 헌신을 서약하였거 나 맹세하였기에 자손들에게 귀신이 들어가서 악령의 역사를 하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것의 아무 형상이든지 만들지 말며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나 여호와 너의 하나님은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비로부터 아들에게로 삼 사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출20;4-6) 가계영은 한 가문에 비슷한 병들을 가져 오기도 합니다.술이 흐르게 하고,음란이 흐르게 하고,우울증,자살,암,당뇨병이 흐르게 합니다.흐르는 저주는 조상을 한번 점검하여 보게 합 니다. 5.영혼육의 접촉을 통하여 우리는 다른 사람들과 늘 영혼육을 접하며 살고 있습니다.영을 접할 때 접하는 사람의 영이 흐르게 되어 있습니다.혼을 접할 때 그 사람의 정신이 흘러 들어오게 됩니다.육을 접할 때 접하는 이의 육이 흘러 전달되게 되어 있습니다.이를 <공유영>(share spirits)라고 부릅니다. 육을 접하면 접한 이의 육이 흘러 들어오게 됩니다. 창기와 접하면 좋지 않은 음란의 영이 들어와 일생을 괴롭히게 됩니다.그래서 바울은 말했습니다. <창기와 합하는 자는 저와 한 몸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일렀으되 둘이 한 육체가 된다 하셨나니 주와 합하는 자는 한 영이니라>(고전6;16-17) 혼과 접하면 접한 이의 혼이 흘러 들어오게 됩니다. 다윗을 사울이 죽이려고 하였습니다.그 때마다 살려 준 이가 있습니다.자기를 죽이려고 한 사울의 아들 요나단이었습니다.만나면서 마음과 마음이 연락되어 하나가 되어 같은 영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다윗이 사울에게 말하기를 마치매 요나단의 마음이 다윗의 마음과 연락되어 요나단이 그를 자기 생명 같이 사랑하니라>(삼상18;1) 영과 접하면 접한 이의 영이 흘러 들어오게 됩니다. 하와가 마귀와 접하니까 마귀영이 들어와 결국 에덴동산을 파괴시키고 말았습니다.마귀역사하는 이와 만나려면 기도많이 하고 그 사람의 영을 이길 수 있을 때 만나야 합니다.그러면 승리할 수 있습니다.영적 전쟁에 승리할 수 있을 때 이민족 전도가 이루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세 가지 영혼육을 다 접하며 사는 것이 부부입니다.그렇기에 부부관계가 제일 중요합니다.부부는 육혼영을 다 접하며 살기에 한 사람이 잘못 되면 아담과 하와처럼 같이 잘못 되기가 쉽습니다. 부부간에 수평적 접촉관계와 부모자식간에 수직적 관계가 제일 <공유영>이 흐리기 쉬운 관계입니다.부모가 잘못되면 자녀도 잘못되기 쉬운 것은 이런 것입니다.접촉을 통하여 저주가 흐르기 쉽습니다.부부,부모관계가 공유영이 제일 빨리 흐르는 관계입니다. 6.두려움을 통하여 마음에 두려움을 가지면 두려움을 통하여 악령이 흘러 들어오게 됩니다.욥은 동방의 의인이었습니다.그런데 그에게 왜 자녀가 다 죽고 악창이 나서 잿더미에 앉아 있는 고통을 당하여야 했습니까? 부정적인 언어때문이었습니다.그는 두려운 것이 올 것을 늘 두려워 하고 있었습니다.욥은 이런 사람이었습니다. 1.정직하며 부자였습니다. 정직과 부가 겸해진다는 것은 그리 쉬운 것이 아니었습니다.정직하면 가난하거나 부자면 좀 덜 정직한 이들이었습니다. 2.자녀가 많고 사이가 좋았습니다. 부자가 자녀가 없어서 아들이나 딸을 데려다가 기르는 경우를 종종 봅니다. 그런데 그 많은 자녀가 사이가 기가 막히게 좋았습니다.10남매인데 자기 생일이면 늘 같이 모여 생일을 즐겼습니다.그러니까 부모까지 합하면 꼭 12명이나 적어도 한 달에 한 번은 파티였습니다.보기 드문 집이었습니다.재산이 많은 집 자녀들이 재산 싸움이 심하기 마련입니다. 3.명예가 높았고 신앙이 좋았습니다. 동방에서 제일 큰 자였습니다.그런데 믿음도 둘째 가라면 서러울 정도로 좋았습니다.흔히 높은 이들의 믿음이 그렇고 그럴 수가 있습니다.믿음을 이용하는 이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데 욥은 생일을 지내고 나면 늘 모인 수대로 회개의 번제를 드렸습니다.혹시 죄를 범하였을 지 몰라서였습니다. <그 잔치 날이 지나면 욥이 그들을 불러다가 성결케 하되 아침에 일어나서 그들의 명수대로 번제를 드렸으니 이는 욥이 말하기를 혹시 내 아들들이 죄를 범하여 마음으로 하나님을 배반하였을까 함이라 욥의 행사가 항상 이러하였더라>(욥1;5) 한꺼번에 드린 것도 아니고 명수대로 드렸습니다.적어도 일년 12번은 12마리씩 드렸습니다.양을 잡는다 하더라도 한번에 240만원쯤 됩니다.12이면 2640만원을 일년에 죄를 점검하는 데 사용하였습니다.육을 점검하는 종합검진에는 돈을 써도 영을 점검하는 데 돈을 썼는 가요? 욥은 어느 한 구석도 모자람이 없었습니다.대단히 완벽한 사람이었습니다.그런데 욥에게 마귀가 틈탈 수 있는 구석이 꼭 하나 있었습니다.욥은 그 것을 몰랐습니다. <나의 두려워하는 그것이 내게 임하고 나의 무서워하는 그것이 내몸에 미쳤구나>(욥3;25) 욥은 모든 것이 만족하였는 데 늘 두려움의 향과 무서움의 향이 맴돌고 있었습니다.늘 불안하였습니다.이 줄을 타고 마귀가 쏙 들어와서 자녀를 죽이고 재산을 날리고 몸에 건강을 빼앗아 갔습니다. 욥의 행복 너머 한 구석에는 늘 불안이 솔솔 피어나고 있었습니다.이것이 문제였습니다. "내가 암이 아닐가?""교통사고가 나지 않을가?""우리의 행복이 깨지지 않을가?""자녀가 가출하지 않을가?" 두려움이 임하여 있으면 마귀가 오는 길을 닦아 놓는 것입니다.그러나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징조가 있습니다.담대함입니다. <내가 네게 명한 것이 아니냐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하라.두려워 말며 놀라지 말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 하시니라>(수1;9) <우리가 그 안에서 그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담대함과 하나님께 당당히 나아감을 얻느니라>(엡3;12)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하시니라>(요16;33) <그를 향하여 우리의 가진 바 담대한 것이 이것이니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1요5;14) 두려워하면 저주가 자식에게 흐릅니다.그렇습니다.우리는 지금까지 가문에 저주가 흐르는 통로를 면밀하게 살펴 보았습니다. 1.유전 인자를 통하여, 2.모방을 통하여,3.추수의 법칙을 통하여,4.악령들을 통하여,5.영혼육의 접촉을 통하여, 6.두려움을 통하여 저주가 자손들에게 흐르는 것을 보았습니다. 부모의 죄도 흐르고 부모의 축복도 자식에 흐릅니다. 신앙의 위대함은 <태어난 대로><생긴대로><되는 대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창조적으로 생활을 바꾸는 데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12지파가 십일조를 내어 레위지파를 살렸습니다.그리고 레위지파는 오직 하나님의 일에만 전념하게 하였습니다.그런데 레위가 십일조를 받고 살아간 것은 증조 할아버지 아브라함이 멜기세덱에서 십일조를 바친 것 때문에 그런 축복이 흐른 것이라고 성경은 말해주고 있습니다. <이는 멜기세덱이 아브라함을 만날 때에 레위는 아직 자기 조상의 허리에 있었음이니라 레위 계통의 제사 직분으로 말미암아 온전함을 얻을 수 있었으면(백성이 그 아래서 율법을 받았으니) 어찌하여 아론의 반차를 좇지않고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별다른 한 제사장을 세울 필요가 있느뇨>(히7;9-10) 축복을 흘리는 조상,축복이 흐르는 가문이 되어야 합니다.이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피의 공로를 믿음으로만 가능합니다.
참된 믿음의 유전자
민수기 14:19-25(P.218),디모데후서 1:5(P.342) / 이성희 목사
서론
유전자란 부모에서 자식으로 물려지는 특징이며 형질을 만들어내는 인자로서 유전 정보의 단위를 말합니다. 유전자를 구성하는 물질 자체를 말하며 DNA가 됩니다. 유전자는 DNA를 복제함으로써 다음 세대로 이어집니다. 그래서 요즘에는 DNA 검사를 통하여 가족관계를 알아내는 기술이 발달하였습니다.
DNA가 유전된다는 사실은 20세기에 와서 비로소 밝혀졌습니다. 이런 유전학의 발달로 좋은 DNA, 나쁜 DNA가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되고 DNA를 구분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좋은 DNA를 자손에게 물려주어야 합니다. 좋은 유전자는 가장 좋은 유산입니다. 특히 신앙의 DNA를 물려주어야 신앙의 유산이 됩니다. 미국의 조나단 에드워즈(Jonathan Edwards)는 18세기 미국 청교도 신학의 절정을 이룬 분입니다. 그의 가문은 지금까지 8대를 내려오면서 부통령, 주지사, 대학총장, 시장, 장. 차관, 변호사, 판. 검사, 의사, 교수, 세계적 사업가, 발명가 등을 배출하였고 그리고 가문에서 목사가 116명이나 나왔습니다.
19세기 미국에 무신론자이며 경건치 못한 맥스 죽스(Max Jukes)라는 이가 있었습니다. 어느 학자가 그의 후손 560명을 추적하여 조사하였습니다. 그의 후손 가운데 310명이 거지로 죽었고, 150명이 범죄자이었는데 그 가운데 7명은 살인자이었습니다. 100명이 알코올 중독자였고, 그 가계에 속한 여자 절반 이상이 창녀이었습니다. 신앙의 유전자를 물려주지 않은 가문은 그 가문이 추락할 뿐만 아니라 사회에 엄청난 피해를 끼치게 됩니다.
하늘나라를 향하여 가는 자들은 홈에 들어가는 게임을 하는 자들입니다. 스포츠 가운데 골에 볼이 들어가는 게임은 많습니다. 그러나 홈에 사람이 들어가는 게임은 야구입니다. 럭비나 미식축구는 사람이 마지막 선 안에 들어가야 하지만 볼과 함께 들어갑니다. 야구는 볼이 아니라 사람이 홈에 들어가야 점수가 납니다. 수비수 아홉 명이 한 사람의 공격수를 막기 위해 치열한 머리싸움을 하고 경쟁 끝에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이런 치열한 하늘나라 DNA가 필요합니다.
출애급기는 구원사입니다. 출애급기는 창세기의 연속입니다. 창세기는 요셉을 입관하는 것으로 끝이 납니다. 출애급기는 요셉을 알지 못하는 왕이 나와 하나님의 사람을 박대하고 하나님의 사람이 세상 왕의 종이 되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모세가 출현하여 출애급을 하고, 광야생활을 하며 성막을 건축하는 것으로 출애급기도 끝납니다. 모세가 죽고 여호수아가 백성들을 인도하여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에 정착하는 이야기는 여호수아서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이 애급에서 탈출하여 가나안에 이르기까지 쉬운 게 하나도 없습니다. 바로가 쉽게 보내주지 않았습니다. 천신만고 끝에 애급을 빠져나왔지만 광야에서 백성들의 불평과 원망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정탐꾼들을 보냈더니 하나님의 언약을 믿지 못하고 기가 죽어 돌아왔습니다. 모세가 하나님을 만나러 간 사이에 금송아지를 만들었습니다. 르비딤에서는 아말렉과 전쟁을 해야 했습니다. 물이 없다고, 고기를 먹고 싶다고, 부추와 마늘이 생각난다고 투덜거렸습니다. 암몬과 모압을 지나올 때는 위협도 당했습니다. 그러나 결과는 가나안의 정착이었습니다. 모든 과정이 모험의 순간이었습니다. 그 과정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말씀에 대한 순종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일이었습니다.
가나안으로 행군하는 가운데 불평과 원망의 유전자를 가진 자들은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고 광야에서 죽었습니다. 가나안은 순종 유전자만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광야에서 부정적 유전자가 너무 많았습니다. 물, 고기, 부추, 마늘 등 먹는 것 때문에 나쁜 유전자가 드러났고, 심지어 고라와 같이 애급으로 돌아가자고 하는 파괴적 유전자도 발생했습니다. 이런 부정적 유전자는 심지어 모세의 누나 미리암, 모세의 형 아론에게까지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열 번의 시험을 거쳐 출애급하게 하셨는데 그것을 믿지 못하고 하나님의 목소리를 따르지 못한 자들에게는 맹세한 땅에 들어가지 못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또 한 해 동안 하나님의 나라를 향해 가면서 참된 순례자의 DNA를 가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첫째, 우리 죄를 고백하는 회개의 유전자를 살려야 합니다.
민수기 14:19에는 “구하옵나니 주의 인자의 광대하심을 따라 이 백성의 죄악을 사하시되 애굽에서부터 지금까지 이 백성을 사하신 것 같이 사하시옵소서”라고 합니다. 가나안 정탐을 끝내고 돌아온 정탐꾼들이 부정적인 소리를 내자 백성들의 원망은 하늘을 찔렀습니다. 이에 모세는 백성들의 죄가 용서 받기 위해 절박한 기도를 하나님께 드립니다.
이미 출애급을 하였는데 출애급을 하고 가나안에 못 들어가면 가장 억울한 일입니다. 출애급을 하지 말든지 출애급을 해놓고 들어가지 못하면 얼마나 헛된 일입니까? 어느 지점을 향하여 출발해놓고 결승점에 못 들어가면 쓸데없는 일입니다. “가다가 중지 곧 하면 아니 간만 못하니라”는 속담이 있습니다. 가다가 말거면 출발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디모데후서 4:10에는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고 그레스게는 갈라디아로, 디도는 달마디아로 갔고”라고 합니다. 이 편지를 쓸 때 바울의 심정은 무너지는 것 같았을 것입니다. 데마는 바울이 “나의 사랑하는 동역자”라고 하였던 인물입니다. 하늘나라 향해 가면 끝까지 가야지, 출발했으면 어떻게든 골인해야지 중간에 세상으로 빠져버리니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모세는 백성들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대속적 기도를 합니다. 대제사장적인 기도를 하나님께 드립니다. 마치 변호사와 같은 기도입니다. 다락방 강화의 한 부분인 요한복음 17장은 예수님의 ‘대제사장의 기도’라고 불리는 장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위해 대속적인 기도가 필요하셨습니다. 모세는 예수님의 모형으로서 죄 사함의 대속적 기도를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모세의 대속적 기도는 출애급한 백성들이 가나안에 무사히 정착할 수 있기를 기원하는 모세의 기도입니다. 하나님께서 백성의 죄를 용서하셔야 가나안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모세가 용서해 달라는 대속의 기도를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애굽에서부터 지금까지 이 백성을 사하신 것 같이 사하시옵소서”라고 모세는 기도합니다. 백성들이 애급에서부터 지금까지 죄를 지었다는 사실을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바로의 군대가 추격해 올 때 그들은 하나님과 모세에게 불평하였습니다. 물이 없다고 불평하여 마라의 쓴 물을 만났습니다. 신 광야에서 먹을 것이 없다고, 르비딤에서 마실 물이 없다고, 모세가 시내산에 올라가서 더디 온다고, 광야생활이 힘들다고, 애급에서 먹던 생선과 마늘이 먹고 싶다고, 가나안 정복이 도저히 불가능할 것이라고 끊임없이 불평하였습니다. 애급에서부터 지금까지 용서해 달라는 것은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을 기억하시어 그들을 멸하시지 않으실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드린 기도입니다. 하나님께 다시 한 번 큰 자비를 의뢰하여 죄 사함을 간구하는 기도였습니다.
20절에는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네 말대로 사하노라”고 합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하나님께서 무한한 사랑으로 용서하심을 말합니다. “사하노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살라흐티’라는 말인데 ‘내가 사했노라’는 뜻입니다. 용서를 구하면 구하는 순간 하나님은 이미 죄를 사하셨다는 것입니다. 죄를 사하시는 일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하여 반드시 하시는 일입니다.
시편 51편은 시편 6편, 32편, 38편과 함께 ‘회개의 시편’에 속하는 네 번째의 시편입니다. 이외에도 시편 102편, 130편, 143편 등이 회개의 시편으로 분류됩니다. 마르틴 루터는 이 네 개의 시편을 ‘바울의 시편’이라 하였습니다. 다윗은 죄를 짓지 않은 사람이 아니라 죄를 지었지만 철저하게 회개한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회개는 그로 하여금 성군이 되게 하였고,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가 되게 하였습니다.
시편 51:10에는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라고 합니다. 이 말씀에서 ‘창조’라는 단어는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실 때 와 같은 단어입니다. 없는 것을 새롭게 만드시는 말입니다. 다윗은 하나님께만 적용되는 단어를 사용하여 정결한 마음을 창조해 달라고 합니다. 완전히 새롭게 창조해달라고 합니다. 우리에게 있어서 확실한 개혁은 새롭고 완전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재창조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죄를 사하신다는 것은 새롭게 창조하시는 것입니다.
야고보서 5:16에는 “그러므로 너희 죄를 서로 고백하며 병이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고 합니다. 죄를 서로 고백하는 것은 오래 전 교회의 전통에 있던 사역입니다. 모라비안선교단, 웨슬리의 홀리클럽, 러시아정교회의 연말 참회모임 등에서 이어져 오는 교회의 전통입니다. 광야와 같은 세상, 죄악이 가득한 이 세상에서 우리에게는 회개의 유전자가 절실하게 요구됩니다.
베드로는 닭이 울기 전에 세 번 주님을 부인하리라는 말을 주님께로부터 들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제사장의 집에 들어갔다가 예수님을 부인하였습니다. 그는 닭이 우는 소리를 듣고 회개하였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는 지적 회개, 통곡하는 정적 회개, 그 집에서 뛰쳐나오는 의지적 회개를 하였습니다. 그 후에 베드로는 닭이 울 때마다 주님을 부정한 자신을 생각하며 울었다는 전설이 남아 있습니다. 이런 회개의 유전자가 필요합니다. 개혁이란 변화를 의미합니다. 개혁은 개인의 회개에서 시작합니다. 회개의 유전자를 잘 전수하여 회개의 영으로 새로운 모습을 보이는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회개하라”는 외침은 세례요한의 첫 선포였고, 예수님의 첫 선포였습니다. 회개는 신약의 시작입니다. “회개하라”는 촉구는 개혁의 시작입니다.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고 세례요한은 촉구합니다.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고 라오디게아교회에 말씀합니다. 교회개혁의 시작은 회개입니다. 회개는 개인과 교회의 개혁의 시작입니다.
광야생활은 교회생활의 모형입니다. 출애급한 다음 광야생활을 하면서도 죄는 계속 하나님의 사람을 따라다닙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어도 죄악에서 면제되는 것은 아닙니다. 육체로 사는 동안 회개는 누구에게나 필요합니다. 회개의 유전자를 잘 살려 늘 회개하여 용서 받는 삶을 사는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둘째,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는 유전자를 살려야 합니다.
민수기 14:24에는 “그러나 내 종 갈렙은 그 마음이 그들과 달라서 나를 온전히 따랐은즉 그가 갔던 땅으로 내가 그를 인도하여 들이리니 그의 자손이 그 땅을 차지하리라”고 합니다. 갈렙은 온전한 순종의 믿음을 가진 하나님의 사람이었습니다.
광야생활은 실패의 연속이었지만 크게는 두 가지가 가장 큰 실패였습니다. 하나는 가데스바네아에서 가나안 정탐을 하였는데 12 정탐꾼 가운데 여호수아와 갈렙을 제외한 10사람이 부정적이고 절망적인 보고를 하였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모세가 하나님을 만나기 위하여 호렙산에 올라갔을 때에 자신들을 이끌 신을 만들자며 금송아지를 만든 것입니다. 12 정탐꾼 가운데 여호수아와 갈렙은 하나님이 주신 땅을 정복할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갈렙은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순종하여 하나님은 그를 가나안에 들어가게 허락하셨습니다. 가나안은 말씀에 순종하는 자가 들어가는 곳입니다.
“나를 온전히 따랐은즉”이라는 말의 ‘온전히’는 히브리어로 ‘말레’라는 단어입니다. 이 단어는 ‘가득 채우다’, ‘충만하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 단어입니다. 갈렙은 하나님의 말씀에 빈틈 없이 순종하였고, 하나님은 갈렙의 순종에 충분히 만족하셨습니다. 제사보다 나은 것이 순종이며, 수양의 기름보다 나은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 ‘충만’이란 말의 헬라어인 ‘플레로마’도 빈틈이 없이 완전한 것을 의미하는 하나님의 단어입니다.
하나님은 말씀을 순종하는 갈렙에게 후손들이 “그 땅을 차지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여호수아 14:14에는 “헤브론이 그니스 사람 여분네의 아들 갈렙의 기업이 되어 오늘까지 이르렀으니 이는 그가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온전히 좇았음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갈렙에게 말씀하신 것이 훗날 성취되었음을 확인하는 말입니다.
성경에는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갔고”, “모세가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 “여호와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따라 돌아갔더라”,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등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따르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디모데후서 1:5에는 “이는 네 속에 거짓이 없는 믿음이 있음을 생각함이라 이 믿음은 먼저 네 외조모 로이스와 네 어머니 유니게 속에 있더니 네 속에도 있는 줄을 확신하노라”고 합니다. 디모데는 좋은 신앙의 유전자를 전수받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거짓 없는 믿음을 전수받았습니다. 성경에 대한 지식을 전수받았습니다. 디모데후서 3:15에는 “또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라고 합니다. 그는 신실한 성품을 전수받았습니다. 고린도전서 4:17에는 “내 사랑하고 신실한 아들 디모데”라고 합니다. 또 그는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는 성품을 전수받았습니다. 사도행전 16:2에는 디모데를 “루스드라와 이고니온에 있는 형제들에게 칭찬받는 자니”라고 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디모데를 “참 아들, 사랑하는 아들, 내 아들”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디모데는 참 좋은 신앙의 유전자를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거짓 없는 믿음이나, 신실함이나, 칭찬을 받는 이 모든 것은 성경에 대한 지식 때문이었습니다. 말씀에 대한 순종과 말씀에 대한 진지함 때문에 디모데는 좋은 신앙의 유전자를 보전할 수 있었습니다.
마르틴 루터가 종교를 개혁할 때입니다. 1521년 보름스 국회에 출두하게 되었습니다. 국회는 루터에게 주장을 철회하라고 하였지만 루터는 자신의 주장을 철회하기를 거부하였습니다. 이 일로 신변의 위협을 느끼고 보름스 국회가 끝난 후 바르트부르크 성에 피신하여 가명을 사용하며 지냈습니다. 거기에서 루터는 독일어로 성경을 번역하였습니다. 1522년에 구약을 번역하였고, 1534년에는 신약을 번역하였습니다. 그의 성경번역은 독일어의 표준을 제시했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루터의 종교개혁은 성경번역이 실제적인 개혁의 시작이었습니다. 그의 개혁을 “성경으로 돌아가는 운동”이라고 표현하는 까닭도 이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중심, 말씀 순종 운동이 곧 개혁입니다.
최근 우리는 말씀을 지키려는 노력이 너무 부족합니다. 성경과 찬송가를 지참하고 다니기를 귀찮아합니다. 성경은 많이 알지만 실천하지 않아 ‘글은 글대로 나는 나대로’(書自書我自我)라는 말을 듣습니다. 우리는 다시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사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루터의 종교개혁 500주년을 기념하는 해를 맞이하여 실제로 성경 말씀대로 돌아가고 그렇게 사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진정한 개혁입니다.
평신도 수도사였던 로랜스형제는 ‘하나님의 임재 연습’이란 그의 책에서 “하나님의 뜻에 대한 완전한 복종이야말로 자기가 좇아야 할 유일하게 안전한 길이기 때문이다”라고 하였습니다. C. S. 루이스는 “순종은 모든 문을 여는 열쇠다”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은 온전한 신앙생활의 기본이며 열매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내 머리로 이해하고, 내 경험으로 해석하고, 내 이성적인 힘으로 판단하는 것은 어림도 없는 일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따르는 것이 최고의 신앙입니다. 성경에는 노아가 방주를 지을 때에, 모세가 성막을 지을 때에 ‘말씀대로 준행하였다’는 말이 반복되게 등장하고 있습니다. ‘준행’이란 말은 성경에 52번이나 등장하는 단어입니다. 히브리서 11:7에는 노아를 “믿음을 따르는 의의 상속자”라고 하였습니다.
올해는 ‘성경찬송가 지참하기’ 운동을 하려고 합니다. 요즘에는 영상으로 성경, 찬송 등 모든 것을 띄워주니 성경과 찬송가를 아예 가지고 다닐 생각을 않는 것 같습니다. 성경을 잘 가지고 다니는 자가 성경을 많이 읽는 자라고 합니다. 이런 자가 성경대로 실천하는 자일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가득히, 충만히 따르는 자가 됩시다. 우리 모두가 좋은 말씀 순종의 유전자를 가지고 이 유전자를 잘 전수하기를 바랍니다.
결 론
최근 미국 뉴욕에서 영국 런던으로 가는 비행기에서 한 남자가 옆자리의 여자에게 자리를 옮겨달라는 황당한 요구를 하였습니다. 그는 종교적 이유로 고집을 부렸고 결국 승무원은 이 여인의 자리를 옮겨 주었습니다. 이 남자는 부인이 아닌 여자 옆에 앉지 못하는 율법규정을 철저하게 지키는 초정통파(Ultraorthodox) 유대인이었습니다. 물론 율법을 문자적으로 지키려고 하는 너무 지나친 면도 없지 않아 부정적인 시각도 있지만 이런 철두철미한 신앙은 긍정적인 면도 많습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철저하게 지키려고 무던 애를 씁니다. 태어나서 청년이 될 때까지 9단계로 나누어 단계에 맞는 교육을 합니다. 이런 그들의 교육이 유대인으로 하여금 평생 말씀 DNA를 가지고 살게 하는 것입니다.
흔히 “피 속에 조상의 얼이 흐른다”는 말을 합니다. “뼈 속까지 빨갛다” 혹은 “뼈 속까지 보수다”라는 말도 합니다. 완전한 품성을 말합니다. 철저한 신앙적 생각을 가지고 사는 것이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절실하게 요구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온전한 신앙의 소유자이어야 합니다. 좋은 신앙의 유전자를 가지고 있고 전수해야 합니다. 철저한 회개와 말씀에 순종하여 좋은 신앙의 유전자를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우리 모두가 뼈 속까지 그리스도인인 온전한 성품을 가지고 실천적 신앙으로 살아가는 하나님의 사람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갈렙의 마음
민 14:20-24 / 조용기 목사
<서론>
갈렙의 마음이란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겠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전에 열 두 명의 정탐꾼을 정탐하러 보냈었습니다. 그런데 그 중 열 명은 절망 보고서를 가지고 왔고, 여호수아와 갈렙은 희망 보고서를 제출했습니다.
모두가 같은 것을 보았는데, 왜 어떠한 사람은 절망을 말하고 다른 사람은 희망을 말했습니까? 민수기 14장 24절은 ‘내 종 갈렙은 그 마음이 그들과 달라서 나를 온전히 따랐은즉 그가 갔던 땅으로 내가 그를 인도하여 들이리니 그의 자손이 그 땅을 차지하리라’고 말씀했었습니다. 즉 여호수아와 갈렙은 마음과 생각이 달랐던 것입니다. 열 명의 정탐꾼들은 부정적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우린 메뚜기 같더라.” 그렇게 말했습니다. 여호수아와 갈렙은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고 생각해보면 그 원수가 아무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같이 계시니 저 원수들은 우리 밥이다.” 여러분, 하나님을 인정하지 아니하고 인생을 살면 어려움이 닥쳐오면 “나는 지렁이다.” 그렇게 말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같이 계신 것을 내가 알면 뱀이 와도 “저거 아무것도 아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 본론>
1. 놀라운 생각의 힘
놀라운 것은 여러분의 생각입니다. 우리 생각이 얼마나 강한 힘이 있다는 것을 성경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1979년 하버드 대학 심리학과 엘렌 렝어 교수는 ‘정신이 신체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를 연구했습니다. 70대 노인 8명을 시골 수도원에 일주일 동안 생활하게 하고 두 가지 생활 규칙을 주었습니다. 첫째 규칙은 “20년 전으로 되돌아가서 그때 일을 현재 시제로 이야기하라”는 것입니다. 지금 늙은 영감의 생각으로 이야기 하지 말고 20년으로 돌아가서 20년 전에 살았던 그것을 제목으로 이야기하라는 것입니다. 그러고 둘째 규칙은 “청소나 설거지를 직접 하라”는 것입니다. 노인들은 “몸도 가누기 힘든데 노인을 보고 청소를 하라니? 말이나 되나? 빗자루 들 힘도 없는데.” 하면서 규칙을 열심히 따랐습니다. 그런데 일주일 만에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8명 모두가 시력, 청력, 기억력, 지능 등이 신체 나이 50대 수준으로 좋아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젊어지려거든 젊은 말을 하십시오. 그리고 집안일을 하는데 불평하지 말고 솔선수범 하십시오. 젊어집니다. 마음이 젊어지니까 몸 전체가 젊어지잖아요? 저 보십시오. 우리는 엘렌 랭어 교수가 내린 결론에 찬동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를 가두는 것은 신체의 한계가 아니라, 우리의 생각의 한계를 따라서 된다. “아이고 나는 이제 늙었어. 나는 음식 맛도 없고 잠도 잘 못자고 올해 죽을는지도 모르겠다. 인생이 힘들다.” 그런 부정적인 말을 많이 합니다. 그러면 여러분 몸속에 있는 세포들이 그 말을 받아들여서 “예 순종하고 갈 테니까 공동묘지 갈 준비하십시오.” 우리의 말로 묶이고 말로 사로잡히는 것을 성경은 그렇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삶이 변화되기 위해서는 우리의 생각이 먼저 바뀌어야 하는 것입니다.
배가 항구를 떠나서 넓은 바다를 향해 갈 때, 가장 중요한 것이 커다란 몸체가 아니라, 눈에 안 보이는 조그마한 키입니다. 이 키는 배에 뒤편에 물에 가라앉아 숨어있기 때문에 보이지 않지만 이 키의 움직임을 따라서 그 큰 배가 동서남북을 찾아가는 것입니다. 아무리 큰 배라 할지라도 작은 키를 오른쪽으로 돌리면 오른쪽으로 가고, 왼쪽으로 돌리면 왼쪽으로 갑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새해를 시작하면서 한 해 동안 우리 삶의 방향을 결정하는 것은 여러분 생각입니다. 올해 어떻게 살 것인가? 영혼이 잘됨같이 범사에 잘되며 강건하고 생명을 얻되 풍성하게 얻어서 살 것이냐? 안 그러면 절망하고 우울하고 좌절하고 살 것인가? 우리 마음속에 생각이 이 세상에 일어나는 모든 일을 주장하는 것입니다. 3차원의 세계는 여러분 생각인 4차원의 세계의 지배를 받는 것입니다. 블레즈 파스칼은 “어제의 생각이 오늘의 당신을 만들고 오늘의 생각이 내일의 당신을 만든다.”라고 말했습니다. 생각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보이지 않는 생각이 우리의 삶을 결정하는 것입니다.
영국 런던 대학의 앤드류 스텝토 박사 연구팀이 ‘긍정적인 사고가 건강에 어떤 영향을 주는가’를 연구했는데,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말하면, 행복한 삶은 물론이고 건강에도 탁월한 효과가 있다는 것입니다. 연구팀의 조사 결과에 따르면 긍정적인 사람들이 평균 수명이 부정적인 사람들보다 10년이나 더 길게 산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집안에서 살 때 남편, 아내, 자녀들 함께 살므로 그중에 남편이나 아내가 부정적이 되어서 자꾸 부정적인 말을 하면 다른 사람들은 그 말에 따라서 생각하고 말하게 되어서 일찍이 죽습니다. 절대 부정적인 말을 하는 사람이 집안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해야 되는 것입니다. 부정적인 말을 하는 사람은 자기 말 하나로 집안을 무덤으로 만든다는 것을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잠언서 17장 22절에 ‘마음의 즐거움은 양약이라도 심령의 근심은 뼈를 마르게 하느니라’ 양약이 이건 장난으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 약 먹잖아요. 마음의 즐거움은 여러분 실제로 밥상에서 밥 먹고 약, 보약 먹은 것과 한가지인 것입니다 마음의 즐거움이 있을 때 이 세상 과학이 만들어내는 어떠한 약보다도 효과가 있는 것입니다. 마음의 근심은 뼈를 마르게 한다. 마음에 근심을 가지면 몸에 기름기를 다 마르게 하는 것입니다. 뼈를 마르게 한다. 마음의 즐거움은 양악이라도 심령의 근심은 뼈를 마르게 하느니라. 모든 일을 하나님께 맡기고 긍정적으로 생각하면, 우리 몸의 건강도 지킬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도를 하고 하나님 앞에서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나가면 심한 암도 나은 경험이 너무나 많지 않습니까? 암으로써 이 세상 약이 없습니다. 이제는 그저 살 때로 사십시오. 그런 최후 통고를 받고 교회 온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교회 와서 죄를 회개하고 그 다음에 병을 고쳐주신 하나님께 감사하고 원망과 불평과 탄식을 다 저버리고 긍정적이고 적극적이고 생산적으로 “나는 산다. 건강하다. 하나님이 고쳐주신다.” 그러고 난 다음에 조사를 해보니 병이 사라진 사람이 한 두 사람 아닙니다. 우리가 생각하고 말하는 것이 우리의 현재 육체의 영향을 미칠 뿐 아니라 사람 삶 전체가 어떻게 살게 되는가를 좌우하는 것입니다. 삶이 변화되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의 생각이 바뀌어져야 되는 것입니다. 한번 따라 말씀하세요. “내 삶이 변하기 위해서는 생각이 먼저 바꿔져야 한다.” 육신의 삶은 3차원의 삶인 것입니다. 직선, 평면, 입체 이건 3차원인데 그냥 세상에 사는 것은 3차원으로 살아요. 4차원은 눈에 안 보입니다. 직선도 아니고 평면도 아니고 입체도 아니고 바람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나 이 바람과 같은 생각은 여러분이 긍정적으로 하고 그 다음에 목적이 있는 꿈을 가슴에 그리고 그 다음에는 믿습니다. 그러고 그 믿음이 주는 승리를 입으로 고백하는 것입니다. “나는 나았다. 나는 해방되었다. 나는 자유롭다.” 놀라운 기적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잠언서 4장 23절에 ‘모든 지킬 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켜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 우리 살고 못 사는 것이 우리 마음의 생각에 달려있다는 것입니다. 잠언서 15장 13절에 ‘마음의 즐거움은 얼굴을 빛나게 해도 마음의 근심은 심령을 상하게 하느니라’ 누구든지 다 알고 있는 사실인 것입니다.
2. 긍정적인 생각이 희망찬 꿈을 만든다
우리 긍정적인 생각이 희망찬 꿈을 만드는 것입니다. 마음이 긍정적이야 희망찬 꿈이 생기지, 마음이 부정적이면 희망찬 꿈도 안 생기는 것입니다. 거미줄 같은 희망이라도 희망이 있으면 꿈이 있습니다. 영국의 학자인 토마스 풀러는 “사람은 희망이 있어야 산다. 그 희망이 거미줄 같이 가는 것일지라도 사람들은 그것을 잡고 마침내 위대한 일을 이루어낸다”고 말한 것입니다. ‘할 수 있다’라고 긍정적으로 생각할 때 미래에 대한 희망찬 꿈을 꿀 수 있습니다. 사람은 희망이 없으면 살아갈 수 없습니다. 적은 희망이라도 거미줄 같은 희망이라도 희망이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9장 20절로 22절에 보면 ‘열두 해 동안이나 혈루증으로 앓는 여자가 예수의 뒤로 와서 그 겉옷 가를 만지니 이는 제 마음에 그 겉옷만 만져도 구원을 받겠다 함이라 예수께서 돌이켜 그를 보시며 이르시되 딸아 안심하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하시니 여자가 그 즉시 구원을 받으니라’ 아무도 못 본 희망이 그 여인의 가슴속에 있었습니다. 거미줄 같은 희망 하나 가지고서 예수 그리스도의 옷자락에 손대니까 그 거미줄 같은 희망이 기적을 가져온 것입니다. 마가복음 9장 23절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할 수 있거든 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 여러분, 시간이 있으면 그냥 헛것 생각하고 앉아있지 말고 눈을 감고 4차원의 세계로 들어갑니다. 목적이 분명한 희망을 마음속에 그려봅니다. 아브라함이 그냥 엎드려서 자꾸 기도만 한다고 75세에 자식을 달라고 기도했는데 85세가 되도록 기도해도 아들을 얻지 못했어요. 눈감고 목적 없는 기도를 했기 때문에 안 되는 것입니다. 기도는 목적이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기도해야 되는 것입니다. 돈이 필요하면 돈을 바라봐야 되는 것입니다. 만 원짜리나 오만 원짜리를 내다 봐야 하는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돈이 얼마나 필요하다고. 그래서 하나님께 기도하고 믿으면 하나님이 이것을 주신다는 희망을 가져야 되는 것입니다. 구체적인 목표를 가지고 믿음으로 기도하면 하나님이 여러분 마음속에 믿음을 주는 것입니다.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것은 말할 필요 없거니와 정말로 목표 있는 구체적인 꿈을 가져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불러내어서 “하늘을 쳐다보아라. 뭐가 보이느냐?” “별들이 보입니다. 수없이 많은 별들이 보입니다.” “네 자손이 저 별들처럼 많을 것이다.” 구체적으로 별들에 비교해서 이젠 눈만 감으면 별들이 보입니다. 그러니까 믿음이 생기고 믿음으로 자기 이름을 바꾸고 자기 아내 이름을 바꿔서 많은 민족의 조상, 많은 자식의 어미라고 불러 젖히니까 어찌할 도리가 없이 아들이 생겨난 것입니다. 백세에 아들을 낳은 것입니다. 여러분, 생각을 부정적으로 하지 마십시오. 부정적으로 뭘 했냐? 생각이 자꾸 “할 수 없다. 안 된다. 어렵다.” 그게 부정적인 것입니다. 생각이 다른 것이 아니고 생각을 언제나 “할 수 있다. 하면 된다. 해보자. 편안하다. 괜찮다.” 그러나 변화와 기적은 가져와야 되기 때문에 꿈은 구체적이 돼야 되는 것입니다. 막연하게 “잘됐으면 좋겠다. 병 나았으면 좋겠다.” 그게 아닙니다. 구체적으로 “이 병은 낫는다. 이 일은 된다.” 구체적으로 마음속에 그것을 그리고 기도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이것을 이루어주시옵소서.” 마음에 믿음이 생깁니다. 그 믿음이 생기면 그 믿음을 가지고서 명령을 내려야 되는 것입니다. “너희 문제는 해결되라. 병은 고침을 받으라. 미움은 사라져라. 실패는 성공으로 돌아서라.” 창조적인 명령을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계속하면 “네 믿음대로 될지어다” 쉽게 여러분의 인생을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인생을 어렵게 살지 말고 생각을 긍정적으로 하고 났으면 보고 믿고 말하기 시작하십시오. 한번 따라 말씀하십시오. “보고, 꿈을 본다는 것입니다. 꿈을 보고, 믿고, 말하라.” 그냥 집에 시간 있을 때 다른 헛일 이야기 하지 말고 텔레비만 쳐다보고 있지 말고 너 환경에 변화를 가져온다. 새로운 창조를 가져온다. 놀라운 하나님의 기적을 체험하고 춤추고 기뻐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잊지 말아야 될 것은 하나님은 우리에게 새로운 삶을 주기 위해서 애를 많이 씁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아 몸 찢고 피 흘리게 하고 난 다음 그 결과로 뭘 주시는 것입니까? 일생에 지은 죄를 다 용서해주신다. 허물을 다 사하여 주신다. 그러고 채찍에 맞아서 몸 찢고 피 흘린 그 공로로 병을 고쳐주신다. 나무에 달려서 9시간 동안이나 고통을 당한 그 고통으로 아담이 아버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저주를 예수님이 다 청산해버렸다. 다 이루었다. 저주를 다 없애버렸다. 그것을 우리가 받아들여서 우리 삶에 저주가 사라지고 이마에 땀을 흘려야 먹고사는 고난이 사라지고 축복이 다가오는 것을 가질 수가 있는 것입니다. 거기에다 하나님 또한 죽어도 사는 약속을 주었지 않습니까?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그러니 예수님이 죽었다가 3일 만에 부활하심으로 사망과 음부를 멸하시고 여러분 우리는 죽어도 육신을 벗었다가 입었다가 할 따름이지 버림받지 않은 것입니다. 우리가 갈보리 산 십자가 밑에서 오중복음과 삼중축복 만나도 하나님이 주신 얼만한 약속 아닌 것입니까. 시편 103편 1절로 5절에 ‘내 영혼아 야훼를 송축하라 내 속에 있는 것들아 다 그의 거룩한 이름을 송축하라 내 영혼아 야훼를 송축하며 그 모든 은택을 잊지 말아라’ 하나님이 도와주겠다고 약속한 것을 안 믿고 잊어버리면 얼마나 큰 손실인 것입니까. ‘그가 네 모든 죄악을 사하시며 네 모든 병을 고치시며 네 생명을 파멸에서 속량하시고 인자와 긍휼로 관을 씌우시며 좋은 것으로 네 소원을 만족케 하사 네 청춘으로 독수리 같이 새롭게 하신다’ 좋게 만들어 준다. 하나님이 여러분 일어서고 앉는 곳을 나쁘게 만드는 게 아니고 좋게 만들어주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약속을 잊지 말고, 성경을 읽음으로 성경에서 수많은 약속을 거두어내서 꿈으로 꿈꾸고 믿고, 입술로 시인해서 창조적인 환경을 만드시기 바랍니다.
3.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은 우리의 승리의 터전이다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은 우리의 승리의 터전인 것입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라고 선포하며 우리에게 영원한 승리를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십자가가 우리의 꿈입니다. ‘저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로 인함이요 저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으로 인함이라 저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이사야53장5절)’ 이 예수님의 당하신 고난이 여러분 쳐다보고 있으면 그게 다 여러분 꿈인 것입니다. 여러분 희망이요, 꿈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심이라(고린도후서4장10절)’ 모두 다 예수님이 당한 고난을 내가 내 것으로 걸머지면 여기에서 그 꿈이 변화되어가지고서 영혼이 잘됨같이 범사에 잘되며 강건하고 생명을 얻되 넘치게 얻는 예수님의 부활의 생명으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5장 57절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예수님을 통째로 살펴보고 꿈으로 삼으면, 예수님이 이긴 부활이 우리의 것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골로새서 2장 15절에 ‘통치자들과 권세들을 무력화하여 드러내어 구경거리로 삼으시고 십자가로 그들을 이기셨느니라’ 통치자들이라는 것은 사람이 아니고 마귀. 귀신들이 공중에 권세 잡고 우리를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는데, 예수님 십자가를 통해서 보면 우리가 다 이긴 것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6장 33절에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끝없는 승리를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항상 예수 십자가를 바라보고, 일을 시작해야 되는 것입니다. 십자가보다 더 귀한 것이 없습니다. 히브리서 12장 2절에 보면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바라봄의 법칙으로 바라본다. 밥 먹다가도 바라보고, 일 하다가도 바라보고, 베개 베고 자다가도 바라보고, 십자가에 뭐가 보입니까? 못 박혀 계시는 예수님이 보이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여러분 마음속에 모셔드리고, 꿈을 꿉니다. “그 흘리신 피로 주님 나를 의롭게 하소서. 예수님 나는 예수님을 의지함으로 병을 다 없애 버려주십시오. 저주를 주님 다 없애버리고, 아브라함의 복이 임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저는 죽음이 겁나지 않습니다. 부활, 영생이 내 것입니다.” 십자가를 바라보고, 마음에 음미하고, 십자가를 감사하는 것 그것이 여러분의 꿈이 되고, 믿음이 되고, 열매를 맺게 되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4장 10절에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예수 죽음 내 죽음, 예수 부활 내 부활. 한번 따라합시다. “예수 죽음 내 죽음. 예수 부활 내 부활” 예수님의 죽음을 바라보고 나는 저 때문에 생명을 얻었다고 마음으로 시인하면 하루 종일 생수가 여러분 속에 강같이 흐르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바라보고 그 말씀을 마음속에 모으면 생수가 넘치고, 여러분이 감사 찬송을 하면 그 다음에는 생기가 넘칩니다. 예수님의 말씀으로 생수를 마시고, 기도하며, “주여! 믿습니다.” 그러면 생기를 마시게 되는 것입니다. 생수를 마시고, 생기를 마시고, 활발하게 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오늘도 예수의 이름으로 여러분이 말씀을 지금 먹고 계시지 않습니까? 생수를 마시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누구든지 목마른 자는 내게로 와서 마셔라. 너희 뱃속에서 생수가 강같이 흐르리라” 에스겔서에 보면 백골 골짜기에 사람의 뼈다귀가 꽉 들어찼는데, “생기야 뼈다귀에 들어가서 살아나라!” 그러니 그 뼈다귀들이 전부 사람으로 부활했습니다. 생기가 그 힘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주님의 이름으로 감사와 찬송을 부르면 그 생기를 얻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주 활달한 사람이 되는 것이에요. 우리가 예수 죽음을 몸에 짊어지면, 예수 죽음 내 죽음이 되면, 예수의 생명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요. 예수 부활 내 부활.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위해서 죽은 것을 생각하며 자꾸 감사하십시오. “주님 보혈을 흘려서 나를 씻어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주님이 채찍에 맞았으므로 내가 나았지 않나요. 채찍에 맞음으로 내가 나음을 얻었습니다. 주님이 저주를 받음으로 나의 모든 피땀 흘리고 괴로운 삶을 주님이 제하여 주시고, 축복을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죽어도 주님과 같이 죽고 살아도 같이 살기 때문에 나는 영생복락이 있습니다. 주님 감사합니다.” 그렇게 하면 예수님 속에 있는 생명이 여러분에게 막 흘러 들어오는 것입니다. “나의 피를 통해서 의롭게 하고 거룩하게 되라. 나의 채찍에 맞은 공로로 너는 나았다. 내가 십자가에 못 박힌 고난을 통해서 너는 저주에서 해방되고 아브라함의 복을 얻게 되었다. 네가 죽어도 살고, 살아서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하지 않았느냐.” 예수 죽음 내 죽음, 예수 부활 내 부활, 예수 승천 내 승천, 예수 천국 내 천국. 그러므로 우리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특별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흙으로 사람을 만들었지요.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을 하나님의 능력으로 거듭나게 해서 또다시 하나님을 닮은 인생을 만드신 것입니다. 여러분은 모두 다 예수님의 생명을 걸머지고 있으므로 행복한 사람인 것입니다.
우리가 할 수 없다고 생각하면 하나님의 길이 안 생겨집니다. 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 성령이 길을 열어 주는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어떤 네 사람이 중풍이 든 친구를 들것에 실어서 예수님께 데려가기로 결심했습니다. 하지만 와 보니깐 인산인해로 집을 사람들이 둘러쌓아있고, 병든 자들이 너무 많아서 이 들것에 들고 간 이 사람을 도저히 예수님 앞에 데려갈 수가 없습니다. 만일 그를 데려온 네 사람의 친구가 “할 수 없다. 집으로 돌아가자.” 그랬으면 할 수 없이 되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사람들은 포기를 하지 않고, 이 세상에 사람들은 문을 통해서 들어갔다 나갔다할 수도 있고, 공중에 줄로 매여서 왔다 갔다도 할 수 있으니 “들것을 지붕 위에 올라가서 우리 지붕을 뚫고 지붕으로 내려오자!” 할 수 있다고 생각하니깐 지붕으로 들어갈 생각이 났습니다. 그래 지붕을 뜯어냈습니다. “어떤 놈이 지붕을 뜯냐!”고 고함 고함을 쳐도, “잠깐만 기다리십시오. 지붕 도로 다 덮어 주실 터이니까.” 그 지붕 구멍으로 침대를 내 밑으로 내려오니깐 예수님이 죄를 사해주고 말씀 한 마디 하시니깐 살아서 일어나갔습니다. 살아 일어나셨으니 지붕을 도로 안 지어줬는지는 모르겠지만은 우리는 깨밭도 도로 만들어 주었는데 불광동에서..누가 깨밭에 천막을 치냐고 야단법석을 하기 때문에 나중에 깨밭에 깨를 뿌려서 다 좋게 만들어 주었습니다. 깨밭에 천막 쳤다가 경찰서에 끌려가서 새벽부터 꿇어앉아서 혼났는건 아주 기억이 나고 좋은 추억이 돼 있습니다. “우리 깨밭에 전도하는 놈들이 와가지고서 천막을 치고 점령을 해서 남의 재산에 손해를 가져오니까는 이거 돌봐달라”니까는 아 그때 경찰관이 오더니만 깨밭에 천막 쳤다고 손에 철고랑을 채워가지고, 아침에 일찍이 와서 사람들이 없으니까는 경찰관이 다른 사람이 올 때까지 꿇어 앉아 있으라는 겁니다. 그래 꿇어 앉아 있는데 서울에 유명한 신문사 기자가 사건이 있으면 적으려고 왔다가 내 사건을 보고 “왜 왔느뇨?” 그래요 나보고. 그래서 “교회 세우려고 천막 치다가 남의 깨밭에 있었다고 잡혀가지고서 여기 와 있다”니까는 “아니 그렇다고 경찰서에까지 끌려 올 일이냐!”는 거예요 “이거 정말 신문 기사거리구나! 내 지서장을 만나야 되겠다.” 그러니까는 풀어서 당장 가라 그래요. 내가 참 놀라운 것은 그분 나에게(나를) 풀어준 덕분으로 미국에 건너가서 요사이 큰 회사 회장이 되어 있어요. 우리가 할 수 없다고 하면 못하지만, 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 지붕을 뚫고도 내려갈 수 있고, 깨밭에 천막을 칠 수도 있고, 할 수 없다고 생각하면 길이 없지만 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 길이 열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금년 한 해 동안은 여러분 목표를 세우고 구체적으로 바라보고, 그리고 기도하고, 입으로 일이 이루어질 것을 명령하십시오. 막연한 꿈은 꾸어지지가 않습니다. 목표를 세우고 꿈을 꾸어야 되는 것입니다.
매년 연말이 되면 우리는 “벌써 한 해가 다 지나갔네.”라고 말합니다. 일들을 하느라고 정신이 없어 살다보면 별로 한 일도 없는데 한 해가 지나간 것입니다. 요즘 구글의 엔지니어 맷 커츠(Matt Cutts)라는 사람이 주목을 받고 있는데, 그 한 가지 목표를 정해놓고 한 달 동안 그 목표를 실천하면 굉장한 기적이 일어난다고 말을 해서 그가 유명한 사람이 됐습니다. 예를 들면, 그는 원래 책상(에)만 틀어박혀있던 컴퓨터 미치광이였는데, 자전거로 출근하는 목표를 세우고 언제나 자전거를 타고 저렇게 출근을 했습니다. 저걸 타고 출근을 하니까는 몸에 건강이 되고 취미가 생겨서 아프리카에서 가장 높은 킬리만자로 산까지 자전거를 타고 올라갈 수 있는 유명한 인사가 되고 만 것입니다. 그가 하는 말은 자기는 “오전 10시 이후에 이메일에 답장을 쓰지 않고, 정해진 시간동안 신약성경을 읽겠다는 목표를 세우고 한 달 동안 실천을 했는데, 그 결과 마음이 느긋하고 부드러워지고 삶이 매우 풍성해졌다.” 목표를 세우고 일을 하는 것입니다. 작은 목표지만 자기가 하고 싶었던 일을 목표로 세우고 한 달 동안 실천했더니, 습관이 바뀌고, 습관이 바뀌니 삶이 바뀌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도 매일 한 가지씩 목표를 세우고 실천한다면 올해 연말에 마음에 뿌듯한 성과를 얻을 것입니다. 이것이 뭐냐 하면, 제가 여러분에게 늘 말하는 ‘보고, 믿고, 말하라’ 그것을 적은 것부터 실천하라 하십니다. 마음속에 목표를 세우는 것은 보는 것입니다. 꿈을.. 한 번 말씀해 주십시오. “꿈을 보고, 둘째는 믿고, 셋째는 말하라” 말하면 그대로 실천하게 되는 것입니다. 큰 것을 기다리지 말고 적은 것부터 여러분 시작하면, 성공하게 되는 것입니다.
< 결론>
2016년 새해가 놀라운 가능성을 안고 우리에게 다가왔습니다. 성경은 “네 입을 넓게 열라 내가 채우리라(시편81:10)”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항상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고 꿈과 희망을 품고 앞으로 나가야 합니다. 또한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묵상하여 늘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말씀에 의지하여 꿈꾸고 믿고 입술로 고백해야 합니다. 그러면 성령께서 한 해 동안 우리의 삶에 놀라운 기적으로 가득히 채워주실 것입니다. 분명한 구체적인 목표 있는 꿈을 가지자. 꿈이 이루어지기 위해서 기도하면 믿음이 생겨난다. 그 믿음을 따라서 명령을 내리면 성령이 그 말씀을 통해서 기적을 행하신다. 적은 것도, 큰 것도 그렇게 변화를 가져오고 창조를 가져오는 일을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요 며칠 전에 한 청년이 내게 편지를 했습니다. 자기 같은 회사에서 일을 하는데 이제 장가를 가야되겠는데, 자기 마음에 드는 아가씨가 있는데 아무리 애교를 떨어도 아가씨가 관심이 없다는 겁니다. 그래 나보고 “어떻게 해야 그 아가씨에게 장가 들겠느냐?” 그래서 내가 “간단하다. 그 아가씨 사진을 당신 수첩에다 붙여 놓고, 목표 있는 꿈을 가지고서 기도를 하고, 기도해서 성령의 기름 부으심이 오면 점심 같이 먹으러 가자고, 저녁 같이 먹자고 그러면 길이 열릴 것 아니냐. 너무 간단하지만은 이루어지거든 나에게 저녁이나 한 턱 쏴라.” 그랬어요. 이 세상에 다 어려운 것 같이 생각이 되지만은 갈렙은 생각이 달랐다고 말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특별히 복을 주시는 것입니다. 축복은 생각으로부터 시작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생각은 굉장한 그릇입니다. 긍정적인 생각을 하십시오. 금년도에 살림이 어렵지만은 여러분이 제가 말씀한 대로 이대로 말하면 좋은 한 해가 될 것입니다. 아멘.
그들과 달라야 합니다
민 14:24 / 백장흠 목사
성공한 사람은 실패한 사람과 다릅니다. 그러므로 성공한 것입니다. 미국의 강철 왕이며 자선 사업가인 카네기는 실패한 사람들의 열 가지 공통점을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1)모든 책임을 남에게 전가합니다.
난처한 일이 생기면 핑계하기에 급급합니다. 성공한 사람은 매사에 책임적입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2)열등의식과 자기 비하에 젖어 있습니다.
성공하는 사람은 다릅니다. 매사에 자신감이 넘칩니다.
3)실패하는 사람은 삶의 목표가 없습니다.
그러나 성공하는 사람은 분명한 목표가 있습니다. 다르기에 성공하는 것입니다.
4)쉽게 포기합니다.
어렵다고 다른 사람의 여론이 좋지 아니하니까 포기합니다. 그러나 성공하는 사람은 결코 낙심하거나 포기하지 아니 합니다.
5)과거 지향적입니다. 항상 후회하고 잘못한 것을 탓합니다. 성공한 사람들은 미래 지향적입니다. 앞으로 잘하겠다는 다짐을 하고 힘있게 살아갑니다. 이것이 다릅니다.
6)독창력이 없는 이들이 실패합니다.
성공하는 이들은 다릅니다. 항상 창조적입니다. 새 것을 생각하고 찾습니다. 안되면 되는 방법을 찾아서 시행할 줄 아는 이들이 성공합니다.
오늘을 사는 우리는 불신앙의 사람들과는 달라야 합니다. 같은 넥타이를 삽니다. 색깔도 같고 모양도 비슷합니다. 그런데 값이 다릅니다. 이유는 질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사람도 그러합니다. 성경 민수기 14: 24절에서 하나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내 종 갈렙은 그들과 다르다" 고 말씀하십니다. 다 같은 이스라엘 사람입니다. 선민의 대표로 뽑혔습니다. 같은 목적으로 일한 사람들입니다. 민족성이 같았고 목적이 같으면 모든 게 같아야 하는데 하나님께서 보실 때 갈렙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달랐습니다.
무엇이 달랐습니까?
1. 관점이 달랐습니다.
관점이란 본다는 말입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본다는 말 한 마디가 여러 각도에서 사용됩니다. 여인들이 시장을 보고 왔다고 했을 때는 시장에 다녀왔다는 말입니다. 다른 남자를 보았다는 말은 여자가 탈선했다는 말입니다. 맛을 보았다는 말은 먹어보았다는 말입니다. 체험을 말할 때에 보았다고 합니다. 매운 맛 좀 볼래. 관(?이란 분명한 견해요, 명확한 판단입니다. 삶의 철학이요, 자기의 확고한 태도입니다. 잘못 보는 것은 편견 때문입니다. 어머니들이 아들을 보는 눈과 며느리를 보는데 편견으로 볼 때가 있습니다. 아들이 부모에게 잘못하는 것 같습니다. 그때 아들이 나쁘다고 하지 않습니다. 며느리 그 애가 자꾸 제 남편에게 말해 가지고 아들이 그런다는 것입니다. 혹 잘하면 모두 아들이 잘해서 효자라고 합니다. 편견을 가지고 보면 잘못 보게 됩니다. 사견도 문제입니다. 자기가 좋은 대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원하는 대로 하자는 것입니다. 초기에 복음이 한국에 들어왔을 때 평양에 어느 교회 목사님께서 성경 마태복음 16장 13절을 읽으십니다. 예수께서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에 이르러라는 말씀을 읽으시니까 보신탕을 좋아하는 어느 분이 예수께서도 보신탕을 좋아하셔서 가이 사러 빌립보까지 가셨는가? 그곳에서는 개를 가이라고 한답니다. 자기가 생각하는 대로 말합니다. 이는 사견입니다. 어떤 젊은이가 잘못을 했습니다. 요즈음은 큰일이랍니다. 젊은 아이들이 모두 틀렸다는 것입니다. 그 한 사람이 그런 거지 다 그런 것은 아닙니다. 이런 것은 단 견이요 망견입니다. 우리는 관점이 달라야 합니다. 물건을 잘 사는 사람은 물건을 볼 줄 아는 사람입니다. 아파트를 구입하는데 집이 좋다. 그것만으로는 잘못 사기 쉽습니다. 교통이 좋으냐 주거환경이 어떠한가? 이것까지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신앙인들은 불신앙인들과 관점이 달라야 합니다. 성공적인 삶을 살기 원한다면 분명히 관점부터 달리해야 합니다.
1) 미래 지향적으로 보아야 합니다.
바둑을 두는 사람도 아무런 생각 없이 놓은 이는 바둑을 둘 줄 모르는 사람이고 고수일수록 판을 길게 보고 바둑알을 놓는다고 합니다. 최고의 고수라면 바둑의 마지막 끝 수를 보면서 한 알 한 알을 놓는다고 합니다. 신앙인들이 보는 관점이 일시적이요, 찰나적이 아닙니다. 먼 미래를 볼 줄 알아야 합니다. 오늘만 보는 게 아닙니다. 그 날을 봅니다. 주님을 만났을 때 어떤 모습으로 주님을 만날 것인가를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결혼하는 사람들이 상대를 볼 때에 인물이 잘생겼는가? 오늘 경제적으로 윤택한가? 만 보면 잘못 볼 수 있습니다. 장래성이 있는가? 우리는 오늘만 보고 판단하고 말하고 주장하는 것은 잘못 보는 것입니다. 우리만 보는 게 아니라 다른 이들도 보아야 합니다. 한국만 보는 게 아니라 중국도 보고 일본도 볼 줄 알아야 합니다. 유럽도 보고 미주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이 힘드십니까? 신앙생활 하는데 어렵습니까? 우리는 오늘을 보고 사는 게 아닙니다. 오늘 십자가를 지는 사람은 그 날에 면류관이 있습니다. 농사꾼의 심리를 알고 살아야 합니다. 봄에 씨를 뿌리는 농부는 힘이 듭니다. 계속 땀을 흘립니다. 그러나 가을이 있다는 것을 잊지 않고 사는 게 농부입니다. 신앙생활도 그러합니다. 유달리 다른 이들보다 열정을 가지고 믿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오늘을 바라고 하는 게 아닙니다. 그 날을 생각하고 하는 겁니다. 선민 이스라엘이 왜 멀고 먼 길 광야 길을 걸어왔습니까? 약속대로 가나안에 들어가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럼에도 가나안이 보이지 아니한다고 뒤로 돌아가자는 것입니다. 돌아갈 힘이 있으면 앞으로 더 힘있게 나아가야 합니다.
2)관점이 믿음이어야 합니다.
다른 열 지파 사람들은 현실적으로 보았습니다. 갈렙은 믿음으로 보았습니다. “그 땅 백성들을 두려워 말라 그들은 우리의 밥이라 그들의 보호자는 그들에게서 떠났고 여호와는 우리와 함께 하시느니라”(민 14:9) 현실만 보는 게 아니라 믿음으로 보았습니다. 어린아이가 교회 건물 위에 십자가를 보면서 아버지 저 교회는 더하기(+)를 하는 가봐요. 그때 아버지는 구걸하려고 그러는가 보다 보태달라고 하는 말이지. 예전에 더하기를 보태기 라고 하였기 때문입니다. 같은 것을 보아도 관점이 믿음인가? 아닌가 다릅니다. 도로에서 교통사고가 나면 어떤 반응이 생기는가? 미국에서는 경찰관이 제일 먼저 나타나 수습을 한다고 합니다. 일본에서는 보험회사 직원이 달려와 환자를 응급처치하고 보상조처를 하는데 한국에서는 먼저 견인차가 나타나고 마스크를 한 뻥튀기 아줌마가 나타난다고 합니다. 무엇을 하던지 이익을 챙기는 방향에서 보고 있다는 말일 것입니다. 우리는 매사를 믿음으로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이 일은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인지? 다른 성도님들에게 유익이 되는 건지를 생각할 수 있어야 믿음의 관점입니다. 벳세다 광야에서 빌립이 본 것은 5천명을 먹이는데 배불리 먹지도 못하면서 200 데나리온이 있어도 모자란다고 말합니다. 현실적으로 잘 보고 계산한 것입니다. 현실적인 관점으로는 아무런 기적과 축복이 될 수가 없습니다. 안드레 같은 이는 어린아이의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주님 발 앞에 가져옴으로 기적을 일으킨 것입니다. 현실주의자들 합리적인 사람이 틀림없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다. 우리는 믿음의 사람들입니다. 모든 것을 믿음이라는 안경으로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믿음으로 보면 절망이 없습니다. 갈렙은 믿음으로 보았습니다. 믿음으로 볼 때 모든 것이 가능합니다.
3)가치관이 분명해야 합니다.
바울과 가룟 유다의 다른 점이 무엇입니까? 가룟 유다가 먼저 부름을 입고 예수님의 제자의 길을 걷게 되었습니다. 바울은 기독교인들을 핍박하다가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납니다. 가룟 유다의 가치는 돈이었습니다. 돈 때문에 예수를 배신하고 버렸습니다. 바울은 그렇게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을 분토같이 여기고 오직 십자가만을 자랑하였습니다. 유명한 역사가 아놀드 토인비는 바울이 머무는 곳 그곳은 어느 시골이나 어느 도시이든 그 순간부터 예수의 영향력을 나타내지 아니한 곳이 없었다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자기 자신의 가치관이 달라지지 아니하고는 아무 것도 변화시킬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가치가 인정되어야 신앙도 성장하고 건강하여집니다. 수고하여 소득을 더 얻고 신앙적인 것보다는 세상적인 즐거움이 가치라고 생각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들과 우리의 가치관이 달라야 합니다.
2. 말이 달랐습니다.
사람은 말할 수 있는 특권을 하나님께로부터 받았습니다. 말을 통하여 전쟁이 시작되기도 하고 말을 잘 함으로 평화를 가져올 수도 있는 것입니다. 10지파 사람들의 말을 듣고 백성들은 실망하게 되었습니다. 사랑의 표현이 말로 할 수 있게 됩니다. 유순한 대답은 분노를 쉬게 한다고 하였습니다. 잠언 15:1절 “과격한 말은 노를 격동하느니라” 열 지파 사람들의 말을 듣고 백성들은 소리 높여 부르짖으며 밤새도록 곡하였습니다.(민 14:1) 원망하면서 하는 말이 우리가 애굽에서 죽었던지 광야에서 죽었어야 했었다고 탄식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민수기 13:30절에는 갈렙은 “백성들을 안돈 시켜 가로되 우리가 올라가자” 라고 하였습니다.
말은 그 사람의 인격입니다. 그 사람의 삶에 모습입니다. 말에도 은혜가 있어야 합니다. 은혜 받은 사람은 말이 은혜롭습니다. 갈렙은 말이 다른 사람과 달랐습니다.
1) 부정적인 말이 아닌 긍정적인 말을 하였습니다.
민수기 13:28절을 보세요. “그러나 그 땅 거민은 강하고 성읍은 견고하고 심히 클 뿐 아니라 거기에서 아낙 자손을 보았다”고 하였습니다. 31절에서는 “우리는 능히 올라가서 그 백성을 치지 못하리이다” 라고 하였습니다. 33절을 보면 “우리는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으니” 라고 하였습니다. 열 지파 사람들이 하는 말입니다. “갈렙이 모세 앞에서 백성을 안돈 시켜 가로되 우리가 곧 올라가서 그 땅을 취하자 능히 이기리라 올라가자 능히 이기리라”(민 13:30) 말이 전혀 다릅니다. 현실을 부정적으로 보면서 부정적으로 말하는 것을 듣습니다. 말은 자동차의 기어와 같고 배에서는 키와 같습니다. 안 된다는 말로 작동시켜 놓았으니 안되게 되어 있습니다. 안 되는 방향으로만 가게 됩니다. 같은 선택받은 지도자적인 사람들입니다. 그럼에도 부정적인 말을 합니다. 다른 이들에게 나쁜 영향을 미치게 하였습니다. 믿음은 말에도 포함되어 있어야 합니다. 말을 들어보면 그 사람의 믿음을 알 수 있습니다. 비판적인 말을 합니다. 남을 해롭게 말하는 이가 있습니다. 믿음 없는 사람입니다. 수탉이 물을 먹는 모습을 보고 자칭 인도주의자가 말했습니다. 저렇게 고개를 올렸다 숙였다 하니 얼마나 힘들까? 측은한 일이로다 그러자 현실주의자가 이렇게 말합니다. 다 먹고 살자고 하는 것 아니겠소. 목을 쳐들지 아니하면 물 한 방울이라도 목구멍으로 넘어가겠습니까? 그때 신앙의 사람은 말합니다. 두 분의 말씀을 들으니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작은 미물도 하나님께 감사하면서 먹고 마시는 것 아닙니까? 말이 다릅니다. 어려운 일이 생깁니다. 무어라고 합니까?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좋게 하시려고 그럽니다. 이것이 믿음의 사람의 말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꿈자리가 사납더니 재수 없게 되어가는구먼 그럽니다.
2) 우리는 믿음의 말을 하여야 합니다.
불신앙적인 말이 문제입니다. 인본적인 말을 합니다. 우리는 무어라고 말합니까? 말할 때마다 모든 것이 주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시기에 지금보다 더 좋게 하실 것입니다. 이런 게 믿음의 말입니다.
민수기 14:8절 “여호와께서 우리를 기뻐하시면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시고 그 땅을 우리에게 주시리라” 말속에 믿음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믿음대로 될지어다 라고 하십니다. “여호와는 우리와 함께 하시느니라”(민 14:9) 말 한 마디마다 믿음이 있습니다. 우리나라 속담이 있습니다. 말이 씨가 된다는 것입니다. 불신앙적으로 말하면 그렇게 되어집니다. 믿음의 말을 하세요. 하나님이 나를 축복하십니다. 나를 도와 주십니다. 나는 복 받은 사람입니다. 믿음의 말을 하면 하나님이 들으십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십니다. 그대로 이루어 주십니다. 생산적인 말을 해야 합니다. 믿음의 말이 생산적입니다. 어느 분이 몸에 이상이 생겼습니다. 의사의 말에 간에 혹이 있다는 것입니다. 물혹이라는 겁니다. 나는 얼마 살지 못한다. 입맛도 없고 잠이 오지 아니합니다. 한 주일만에 몸이 수척해 있습니다. 그런데 믿음의 의사가 하는 말입니다. 그건 암이 아닙니다. 물혹은 병도 아닙니다. 그 말을 듣고 얼굴색이 달라집니다. 밥맛이 납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말하고 낙관적인 말을 하여야 합니다. 밝은 면을 보고 말하고 살아야 합니다. 이것이 믿음 좋다는 사람의 다른 점입니다.
3)확신의 말을 하여야 합니다.
현대인의 말은 문제가 있습니다. 그건 무엇 같아요. 그런 것 같아요 라는 말입니다. 얼마나 불확실한 시대인가를 증명해 줍니다.
요즈음 자기 남편을 보고 오빠라고 합니다. 남편의 동생은 무어라고 불러야 합니까? 오빠 아닌가요? 남편이 남편인지 불확실하다는 것입니다. 분명하지 못한 시대의 언어 사용입니다. 기도하는 분들이 기도의 단어를 사용하면서 정말로 설교하는 분들 중에도 정말로 라는 말을 합니다. 얼마나 불확실하면 이것만은 정말이라는 말로 표현하겠습니까? 우리의 말은 확신이 있는 말을 하여야 합니다. “능히 이기리라.” 그 병은 하나님께서 고치십니다. 확신이 있는 말을 하는 신앙인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신앙인의 말은 달라야 합니다.
3. 충성이 다릅니다.
열 두 사람들이 똑같이 지파의 대표로 부름을 입었습니다. 그들은 맡은 임무에 충성해야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예수 믿고 구원 얻은 순간부터 해야 할 게 있습니다. 충성해야 합니다. 거룩한 의무요 하나님을 사랑하는 증거입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게 충성입니다. 충성하는 데는 몇 가지 전제가 있습니다.
1)내가 할 일이 무엇인지 알아야 합니다.
요즈음 말로 은사가 무엇인지 알아야 합니다. 예를 들어 회사의 사장님이 출근하면서 청소를 한다면 이는 회사를 위해 일을 하는데 자기 할 일은 모르는 사람입니다.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 것인지 알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지도자는 백성들을 격려하고 새 힘을 얻게 해주어야 합니다. 방향을 제시하여야 했습니다. 다른 이들은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말합니다. 지도자는 뒤로 가는 게 아닙니다. 앞으로 가야 합니다.
2)충성은 전문성이 있어야 합니다.
일은 하고 싶은데 할 줄 모르면 문제입니다. 전문성이란 계속적으로 하면 익숙해지는 것입니다.
3)불변의 열정이 있어야 합니다.
거룩한 욕망이며 에너지입니다. 어떤 이들은 자기가 할 일임에도 그 일을 하지 않으려 합니다. 피하려 하고 미루고자 합니다. 연기력은 있는데 열정이 없으면 충성을 못합니다. 물론 연기력이 있어야 합니다. 기도하지 않아도 많이 하는 것처럼 친하지도 않으면서 친한 것 같이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열정이 있어야 합니다. 여호수아 14:10-12절을 보면 그가 나이 85세 때에 여호수아 지도자를 찾아가 전과같이 건강하니 산지를 내게 주어 아낙자손을 쫓아 내리이다 라고 부탁을 합니다. 이것이 열정입니다. 갈렙을 보세요. 여호수아와 같이 정탐하였고 동행하였습니다. 여호수아는 지도자가 되었고 자기는 아무 것도 되지 아니하였습니다. 마음에 섭한 생각도 들고 속된 말로 속이 상하였을지도 모릅니다. 진정한 충성은 누구는 무엇이 되고 나는 못되었기에 나는 안 한다 라고 생각하지 아니합니다. 변함 없이 자기 임무에 충성하는 것 이것이 달랐습니다.
4)갈렙은 끝까지 충성하였습니다.
그의 충성에 대하여 신명기 1:36절에서는 “온전히 여호와를 순종하였다” 고 말하고 있습니다. 온전히 순종하는 것 이것이 충성입니다. 여호수아 14:9절에는 “온전히 좇았으므로” 라고 하였습니다. 신앙도 변함이 없어야 하고 충성도 변하지 않아야 충성인 것입니다.
우리는 차별화 된 신앙인이 되어야 합니다. 그때 가치가 있습니다. 보는 것도 말하는 것도 달라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충성됨이 달라야 합니다. 지금 필요한 게 외형적인 무엇이 아닙니다. 중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요청됩니다. 이기주의를 버리고 예수 중심의 일꾼이 필요한 때입니다. 다른 사람들, 다른 신앙인과 다른 점이 있는 특색 있는 귀한 성도가 되어 영원히 기록에 남는 복된 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 아멘 -
다른 사람, 다른 사랑
민 14:24 / 김우영 목사
본문은 하나님의 뜻을 따라 남달리 살면 하나님으로부터 남다른 사랑 받음을 보여 주시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땅 가나안을 열 두명이 정탐하러 갔습니다. 그런데 열명은 불 신앙의 눈으로 그 땅을 보았고 두명, 갈렙과 여호수아는 그들과 달리 하나님의 언약을 신뢰, 믿음의 눈으로 그 땅을 보았습니다.
갈렙의 다름Ⅰ: 마음이 달랐다.
'갈렙은 그 마음이 달라서', 이에서 '마음'이란 히브리어의 '루아흐', 곧 '영'을 말한 것으로서 갈렙의 '영'이 열명 정탐꾼과는 달랐다는 의미입니다(본문에서 여호수아가 언급되지 아니한 까닭을 성서학자들은 "여호수아는 모세의 후계자, 즉 이스라엘의 총 지도자가 될 특별한 위치에 있었기 때문이다"라고들 합니다). 갈렙은 그들과 영이 달랐기에 열명의 정탐꾼과 전 이스라엘이 믿음 없는 선택을 함에도 담대히 하나님 편에 설 수 있었습니다. 그는 사람들이 '안된다' '못한다'라고 부정적인 주장을 할 때 '된다' '할 수 있다'라고 긍정적으로 피력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고, 약속의 이루어짐을 확신함이 여타의 사람들과 달랐던 갈렙은 하나님의 남다른 사랑을 받는 자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은 머리가 아니고 마음이며, 하나님을 만나는 것은 두뇌가 아니라 영입니다. 해서 그리스도인들에게는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영의 골방'이 있어야 합니다. 기독교인의 영은 하나님과 주파수가 맞아야만 합니다. 영이 잘못되면 이것도 저것도, 세상의 모든 것을 잃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까지도 잃어버림니다. 세상살이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마음이요 영입니다. 1960∼70년대, 우리가 너무나 가난하던 시절, 병들어도 병원에 가지 못하고, 약도 제대로 사먹지 못하던 때, 죽음을 보면서도 어쩌지 못했던 그 시절, 우리 나라의 성도들은 하나님만을 열심히 찾았고, 바랐습니다. 그래서 신유의 역사가 많이 일어났고, 교회가 부흥되기 시작했습니다. 1980∼90년대, 생활이 펴지자 교회들은 무릎꿇는 예배당에 의자를 들여 놓고 허리를 폈으며, 다리를 꼬고 걸터앉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기도가 약해지고, 심령이 잘못되어져 갔으며, 교회의 자리가 비기 시작했습니다. 간단히 말하면 우리의 영이 달라짐에 교회가 올라갔고, 우리의 영이 달라지자 교회가 내려갔습니다. 이것이 한국교회 실상입니다. 사도행전 8장에서 베드로와 요한이 전도된 사마리아 성도들에게 안수함에 성령 받는 것을 보고 마술사 시몬이 돈으로 성령을 사려고 합니다. 해서 베드로의 무서운 책망을 받습니다. "네가 하나님의 선물을 돈주고 살 줄로 생각하였으니 네 은과 네가 함께 망할지어다 하나님 앞에서 네 마음이 바르지 못하니 이 도에는 네가 관계도 없고 분깃 될 것도 없느니라" 마음이 잘못되면 생각이 삐뚤어지고, 생각이 삐뚤어지면 영이 타락합니다. 우리 인생에 정말 큰일 날 일은 영의 잘못됨입니다.
갈렙의 다름Ⅱ: 온전히 좇았다.
'나를 온전히 좇았은즉', '온전히'라는 히브리어 '말레'는 '충만하다' '만족시키다' '고갈을 해소시키다'라는 의미입니다. 따라서 순종의 극심한 가뭄 상태에 계시던 하나님께서 흐뭇하게 해소하실 만큼 하나님 뜻에 순종했음을 뜻합니다. 하나님을 섬김은 내가 할 수 있는 것만 하거나 부분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전부로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좇는 전진을 멈추거나 포기함은 자기의 잘됨을 그치게 함이요 방기함입니다. 갈렙은 하나님을 저버리고 자아대로 사는 자들과는 달리 하나님만을 믿고 의지하며 하나님께로만 나아간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온전히 좇으려면 영이 달라야 합니다. 하나님만을 경외하고 악에서 떠나야 합니다. 새마을 연수원장을 지낸 김준 선생이 황등중학교장직을 이임하며 남긴 교훈이야기입니다. 김준 선생이 돌멩이 두 개를 들고 이임식 단위에 오르더니 돌멩이 하나는 전교생이 모여서 있는 뒤편으로 멀리 던지고, 하나는 단상밑에 내려놓더랍니다. 그런 그가 말했습니다. "여러분! 항상 멀리 바라보며 꿈을 펼치십시오, 던지지 않은 돌을 그저 발 아래 있을 뿐입니다." 오늘의 사회는 아파트, 자동차... 생활에 필요한 모든 것을 구입함에 있어 '할부 구매'를 할 수 있는 편리한 세상입니다. 허나 신앙생활은 할부구입 방법이 통하지 않습니다. 사도바울의 신앙생활 승리는 회심 한 후 옛것을 모두 버리고 자기를 다하여 오직 예수님 앞으로만 달려감에 있었습니다. 갈렙이 사람들과 달랐음은 온전히 하나님만을 향하여 좇아감입니다. 서부 아프리카 우가두구에 사는 한 종족은 신앙을 '하나님께 자기를 붙잡히게 내 맡기는 것' 이라고 하는데 이는 하나님께 자신을 완전히 맡기는 것을 표현한 것이라고 합니다. 멕시코 시카포악스틀라의 아주텍 족은 '남긴 발자국을 따라간다'라는 의미에서 신앙을 '주님의 뒤를 바짝 따라 가는 것' 이라고 한답니다. 신앙생활은 내가 하나님께 붙잡히도록 나를 다 내어놓는 것이요, 예수님을 놓치지 않도록 붙어 따라가며 주님께서 사신 그대로 행하며 사는 것입니다. 갈렙은 남다르게 하나님을 만족시켜 드리는 순종을 함으로서 하나님의 남다른 사랑을 받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갈렙의 다름Ⅲ: 그 땅을 차지했다.
'그 땅을 차지하리라'는 히브리어 '요리 쉔나'는 '그것을 기업으로 삼는다'라는 말로 미완료형입니다. 그러나 주어가 3인칭이기에 본문은 하나님의 간접 명령으로 '그 땅을 차지 하라'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불신하는 자들과는 다른 신앙으로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 없이 신뢰, 확신한 갈렙은 그의 믿음대로 축복의 땅, 약속의 땅, 가나안에 입주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히11:6)" 하나님께서는 가데스 바네아 반역 사건의 징벌 대상을 20세 이상으로 규정, 20세 이하만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하셨습니다. 20세 이상은 모두 죽었습니다. 징벌 대상을 20세 이상으로 규정하심은 그들을 성인으로 인정하심입니다. 다시 말하면 20세 이상에게는 선거권이 부여됨에 판단 능력이 있는 자들로 간주, 불 신앙에 대한 책임 추궁을 하심입니다. 그러나 갈렙과 여호수아는 20세 이상의 사람으로서는 유일하게 가나안 입주의 복을 받은 사람이 되었고, 약속하신 기업의 땅을 차지했습니다. '다른 사람, 다른 사랑', 남다르게 사는 내가 되면 남다른 사랑을 받는 내가 됩니다.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시며, 행한 대로 갚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갈렙의 온전한 믿음, 최선을 다한 신앙에 풍성한 보상, 최고의 복을 주셨습니다.
성경에는 남다른 신앙 때문에 하나님께로부터 남다른 사랑의 보상을 받은 실례들이 많이 있습니다.
아브라함-갈 바를 알지 못함에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함으로(히11:8) 하나님께서는 그가 밟는 땅, 보는 곳마다 주셨고(창13장), 여호와 이레의 복도 주셨습니다(창22장).
이삭-우물만 파면 그랄 사람들이 와서 빼앗았습니다. 그래도 이삭은 다투지 아니하고 또 다른 곳으로 가서 우물을 파고 또 팠습니다. 그는 에섹, 싯나를 거쳐 르호봇이라는 우물을 또 팠습니다. '르호봇'이란 여호와께서 우리의 장소를 넓게 하셨으니 이 땅에서 우리가 번성하리로다'라는 뜻입니다(창26장).
백부장-예수님의 말씀 한마디면 하인의 병이 나을 줄 믿음으로 주님께로부터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만나 보지 못하였노라 가라 네 믿은대로 될지어다"라는 최고의 축복 선언을 받았습니다(마8장).
흉악한 귀신들린 딸의 어머니-예수님께로부터 개 취급을 당하면서도 끝내 포기하지 않는 믿음으로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는 엄청난 축복을 받았고, 그의 딸이 그 시로 나았습니다(마15장).
중풍병 환자와 친구들 - 예수님을 만나기 까지 여러 장애가 있음에도 개의치 아니한 연합의 믿음으로 "소자야 네 죄사함을 받았노라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네 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는 인생의 더 할 수 없는 복을 받았습니다(막2장).
12년동안 혈루병을 앓은 여인-예수님의 옷자락에 손만 대어도 자기 병이 나을 줄 믿음으로서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는 복중의 복을 받았습니다(눅 8장).
다른 사람이 갖지 아니한 신앙을 가짐은 다른 사람이 받지 못하는 최상의 복을 소유함입니다.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은 특별한 신앙을 가진 사람의 것입니다. 건짐 받고, 치료받고, 해결 받고, 자유케 되려면 먼저 남다른 신앙을 소유해야만 합니다. 믿음만이 진정한 재산이요 승리입니다. 믿음은 복의 씨앗이며 뿌리입니다. 사랑에도 질서가 있습니다.
성서의 하나님 사랑 질서는
첫째,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고
둘째,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하나님을 사랑해야하며
셋째,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사랑이 베풀어짐입니다.
어거스틴(Augustine)에게 빌린 인간의 사랑 질서입니다. 먼저, 하나님을 사랑하라. 다음, 자기를 사랑하라. 그다음, 세상을 사랑하라. 현대는 신뢰를 상실한 불행의 시대입니다. 대신 관계, 하나님을 신뢰치 못하는 인간들이 되어 하나님의 약속 성취도 없습니다. 대인관계, 이웃과의 사랑이 파괴되어 조그마한 일에도 서러운 고나계가 잘못 되어지고 있습니다. 은총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이며, 믿음, 신뢰, 순종은 인간이 복을 받는 조건입니다. "우리 시대가 발전한 것중 가장 위대한 것은 사람들이 자기 마음가짐을 바꿈으로서 그 삶까지도 바꿀 수 있다는 사실이다" 심리학자 윌리엄 제임스(W.James)말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짐은 범사에 끝까지 하나님만을 바라보고 전진하는 자에게서입니다. 하나님께 대한 일편단심만이 일생이 기쁨이요 다른 사랑이 연속임함입니다. 하나님을 신뢰함은 복된 미래의 보장입니다. 기독교인의 삶의 길은 처음부터 끝까지 믿음, 소망, 사랑으로 만들어져 있습니다. 위대한 신앙 인격자는 이 세상에 하나님보다 더 귀한 것이, 없음을 아는 사람입니다. 마음보다 머리의 개입이 많은 자는 하나님께서 살아 계심을 체험할 수 없습니다. 해서 '머리는 순교자를 낳지 못한다' 라는 말이 있나 봅니다. 하나님의 말씀, 성경 66권은 인간인 '너'를 믿지 말고, 오직 '하나님'만을 믿으라는 말씀이십니다. "너의 신뢰를 자신에게가 아니라 하나님께 두도록 명령받았다" 어거스틴의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할부 신앙, 부분적 신뢰를 원치 아니하십니다. 내 전부의 신앙, 전체적 신뢰를 드려야 합니다. '다른 사람, 다른 사랑', 그리스도인의 일컬음이 되어야만 합니다.
열매가 전하는 의미
민 14:26-38 / 김철현 목사
늦은 여름에 정상옥 집사님이 교회마당에다 호박을 심었습니다. 그리고 날마다 부지런히 와서 보살피고 줄을 매주고 했더니 컨테이너 지붕으로 줄기가 타고 올라가 호박이 열렸습니다. 처음에는 호박이 몇 개나 열릴까 생각했습니다. 매일 들여다보아도 호박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가을이 되어 지붕에 올라가 봤더니 한 아름만한 호박이 네 덩이나 열려 있는 것입니다. 따다가 교회 주방에다 놓았습니다. 권사님들이 보시고 호박죽을 끓여야겠다고 하십니다. 교우들이 모두 맛있게 먹었으면 좋겠습니다.
씨앗은 거짓말을 하지 않습니다. 그 말처럼 심은 대로 싹이 나고 열매를 맺는다는 진리를 보았습니다. 보이지 않는 듯해도 수확한 열매를 보면 그 진리를 깨달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가을은 확실히 복된 계절이자 심판의 계절이기도합니다. 부지런히 일한 사람에게는 흐뭇한 계절입니다만 게으른 사람에게는 참 후회스럽고 답답한 계절입니다. 좋은 씨앗을 적기에 뿌려 놓은 사람에게는 이 가을이 복입니다만 어쩌다가 나쁜 씨앗, 좋지 못한 종자를 뿌려 놓은 사람에게 가을은 두렵고 괴로울 수밖에 없습니다.
이제 우리는 한 해를 결산하는 이 늦가을에 공정한 심판 앞에 엄숙히 서봅니다. 과연 맺힌 열매가 아름다운 것인지, 아니면 어딘가 모르게 부끄럽고 무서움에 떨고 있는지 스스로 물어야 할 것입니다. 맺힌 열매를 보면 내가 뿌렸던 씨앗을 알 수가 있습니다. 내 신앙과 내 경건과 나의 사회생활과 가정생활에 어떤 열매가 맺혔습니까? 여러분이 맞이하는 가을은 어떻습니까? 성공한 가을입니까? 실패한 가을입니까?
성공이란 세 가지 차원에서 옵니다. 첫째는 목적에서의 성공이 있습니다. 이 말이 무슨 말이냐 하면 바른 목적을 선택하는 것 자체가 성공이라는 말입니다. 뒤늦게 후회해야하고 버려야 하는 이유가 목적이 잘못된 것 때문이라면 그것은 처음부터가 실패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애초부터 좋은 목적, 가치 있는 것을 목적으로 하여 초지일관 할 수 있다면 이것이 곧 성공이라는 말입니다. 일생을 사는데 있어서 목적을 수시로 바꾸면서 평생을 살아야 한다면 그 사람은 이미 목적에 실패한 사람일 수밖에 없습니다. 좋은 목적은 그것 자체가 성공입니다. 둘째, 과정에서의 성공이 있습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최선을 다했다면 그것으로 성공이라는 말입니다. 최선을 다하지 못한 사람은 언제나 후회합니다. 학생들이 공부를 합니다. 목적이 있다면 처음부터 결과를 걱정하고 염려할 것 없습니다. 오직 최선을 다하여 공부할 뿐입니다. 성적이 나쁜 건 죄가 아닙니다. 목적에 최선을 다하지 않은 것이 죄입니다.
이제 수학능력시험이 끝나고 대학교 입학철이 됩니다. 해마다 부정입학 문제로 시끄럽습니다. 최선을 다하여 시험을 치르고 합당한 학교에 입학하는 것이 정당합니다. 그런데 간혹 시험은 최선을 다하지도 않고, 정당한 성적을 얻지도 못하고, 돈으로 입학을 한다든지 아니면 예능으로 입학한다든지 해서 정당하고 최선의 노력을 다한 학생들에게 불이익이 돌아가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것이 조직적으로, 돈이 오가는 거래 속에 이루어졌다는 것은 범죄의 구성요소가 성립 되는 것입니다. 이게 죄입니다. 안타깝습니다. 최선을 다하는 과정 자체를 성공으로 평가해야합니다. 세 번째로는 하나님께서 은사로 주시는 결과적인 성공, 즉 복이 있습니다. 이것이 열매입니다. 경험하시는 대로 이 열매란 내가 생각하지 않았던 그 이상의 것이 열릴 때가 참 많습니다. 내 수고는 보잘 것 없다고 생각했는데 맺힌 열매를 보니까 과분합니다. 부지런히 기대하지 않았어도 커다란 호박이 열려있는 것이 그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열매는 하나님이 주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좋은 씨앗을 뿌리기만 하면 그 이상의 열매는 이미 하나님께서 작정해 놓으신 것입니다. 엄밀히 생각해 봅니다. 씨앗과 열매는 같습니다. 질적으로 같은 것입니다. 그것이 성경의 결론입니다. 콩을 심었으면 반드시 그 열매는 콩입니다. 이것이 첫째원리입니다. 두 번째 원리는 시차입니다. 대부분이 봄에 심고 가을에 거둡니다. 오늘 심어 오늘 거둘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때로는 가을에 심어 봄에 거두기도하며 심은 지 10년이 되어야 열매를 얻는 것도 있습니다. 셋째원리는 행동하면서 무던히 기다려야합니다. 가만히 앉아서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꾸준하게 땀을 흘리고 수고하며 기다리는 것입니다.
열매를 돌아보는 이 시기에 우리는 우리의 신앙의 열매를 보아야합니다. 본문을 보면 그 원리를 배웁니다. 오늘 읽은 본문은 앞장 민13장과 연결 지어 생각해야합니다. 이스라엘이 가데스바네아에서 가나안 정복을 위한 정탐꾼을 보냅니다. 총12명 중 10명이 부정적인 보고를 하자 이스라엘은 지금까지 애굽에서의 노예 신분으로부터 하나님의 위대한 구속사역으로 말미암아 영광의 탈출을 하였고, 약속의 땅에 들어가 자유를 누리며 떳떳이 살 희망을 순식간에 잊어버리고 맙니다. 또한 하나님의 능력과 그 구원의 가치를 부인하고 모세를 죽이려고까지 음모를 꾸밉니다. 그러는 와중에 여호수아와 갈렙이 목숨을 걸고 긍정적인 믿음의 시각을 제시했고 지도자 모세의 간곡한 중보자적 기도로 하나님의 진노를 면하게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0세 이상 소위 출애굽 1세대는 단 한명도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고 광야에서 방황하다가 죽으리라는 선고를 받고 맙니다. 이런 배경을 생각하며 오늘 본문 속에서 우리는 어떤 신앙의 씨앗이 어떤 열매를 맺는지를 보게 됩니다. 그리고 뿌려야 할 씨앗과 뿌리지 말아야 할 씨앗을 분간하시기 바랍니다.
먼저는 부정적인 원망의 씨앗과 그 열매를 봅니다. 사람이 살아가면서 말을 하지 않고 살 수는 없습니다만 무슨 말을 하든지 그 말에 대해서는 심판 날에 심문을 받는다고 하십니다. 마12:34에 보면 “독사의 자식들아 너희는 악하니 어떻게 선한 말을 할 수 있느냐?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라.” 는 주님의 말씀이 있습니다. 사람이 마음에 악한 것이 가득하면 악한 말을 하게 되고, 마음에 선한 것이 가득하면 선한 말을 하게 되고 그 말이 씨앗이 되어 그에 응당 하는 열매를 맺게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보면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백성들의 원망하는 말을 들었는데 더 이상은 못 참겠다. 내 귀에 들린 대로 행하겠다.” 하시더니 37절에 보니까 그들이 죽고 말았습니다. 원망의 씨앗이 맺은 열매는 죽음이었습니다. 거듭 말씀드립니다. 원망은 늘 또 다른 원망을 불러냅니다. 원망하는 사람은 마음에 자유가 없습니다.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와서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한 가장 확실한 죄목이 있다면 바로 이 원망이라는 죄 때문입니다. 이 원망이 불신앙입니다. 원망의 씨앗을 심지 않기를 바랍니다. 열매가 좋지 않기 때문입니다.
둘째는 믿음의 씨앗과 그 열매를 봅니다. 가나안을 허락하신 하나님께서 “그 땅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다.” 하실 때 백성들은 “아닙니다. 사람을 잡아먹는 땅입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들어가면 너희에게 주리라.” 하셨는데도 그 백성들은 하나같이 “아닙니다. 들어가면 우리는 죽습니다.” 합니다. 말끝마다 배반하고 거절합니다.
하나님께서 어찌나 화가 나시는지 35절을 보면 “모여 나를 거역하는 이 악한 온 회중에게 내가 반드시 이같이 행하리니 그들이 광야에서 소멸되어 거기서 죽으리라.” 고 청천벽력 같은 말씀을 하십니다. 그런데 이 말씀처럼 정말 다 죽고 말았지 않습니까? 단, 여호수아와 갈렙만은 믿음의 씨앗을 심었기에 살아났습니다.
가만히 보면 결국 믿는 대로 죽었고, 믿는 대로 살았습니다. 그래서 여러분, 믿음도 어떤 씨앗으로 심느냐에 따라 추수할 때에 열매가 달라집니다.
올 한해 여러분의 신앙은 어떻습니까? 신앙의 목적에 성공하셨습니까? 최선을 다하여 과정에도 성공하고 계십니까? 그렇다면 무엇보다도 하나님 앞에 얻어지는 은사로써의 열매, 즉 복 받는 신앙인들이 되실 것입니다.
교회 내에 신앙생활을 하는 중에 특히 예배를 드리는 모습을 보면서 누가 연구한 것인데요, 난치병이 여섯 가지가 있다고 합니다. 첫째 증세가<습관성 주보 탐닉 증>이라고 합니다. 이 병에 걸린 사람은 설교가 시작되면 꼭 주보를 뒤적입니다. 어쩌다 낸 헌금명단에서 자기 이름을 찾아서 볼펜으로 표시하는 증상으로 이거 고치기 쉽지 않답니다. 두 번째 증세는<찬송 추월 증>입니다. 찬송 중 망상의 나래를 펴고 이곳저곳 헤매다가 꼭 남들보다 한 소절씩 앞서 가는 사람들이 있답니다. 남들 2절 할 때 혼자 3절을 신나게 부릅니다. 딴 생각하는 사람들의 대부분입니다. 세 번째 증세는<습관성 예배 지각 증>입니다. 모든 예배에 5분에서 10분씩 늦게 오는 병입니다. 이 사람들은 예배시간을 늦추어도 꼭 목숨처럼 지켜서 늦게 옵니다. 네 번째 증세는 찬양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증세인데요<습관성 안면 철판 증>입니다. 습관적으로 찬양 연습 없이 찬양대 가운을 입는 증상 이 병 또한 난치병입니다. 그리고 다섯 번째 증세는<습관성 제 발 저림 증>입니다. 찔리는 설교를 들으면 "또 나를 씹는군!" 하고 생각하는 증상입니다. 마지막 여섯 번째 증세가 심각합니다.<만사 삐딱 증>입니다. 모든 일을 삐딱하게 받아들이는 증상이지요. 면이 고르지 않은 안경으로 세상을 바라보듯 모든 것이 굽어보이는 증세가 있으면 이것 난치병입니다. 이런 신앙은 성장할 수 없습니다. 항상 좋지 않은 열매를 거둘 수밖에 없는 신앙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수확의 계절에 여러분은 무엇을 거두고 있습니까? 그 열매가 좋지 않다면 씨앗이 잘 못 되었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이 아픔이 있는 것이요, 풍성한 즐거움과 행복을 거두십니까? 그렇다면 좋은 씨앗, 훌륭한 씨앗을 심은 덕분입니다. 열매가 전하는 의미를 깊이 깨달아 올 해의 성공과 실패를 거울삼아 내년에는 꼭 성공해야할 것입니다.
너희 말이 내 귀에 들린대로 행하리라
민 14:26-30 / 김상수 목사 안흥교회
운전하다가 또는 길을 걷다가 길을 잘못들어서 헤멘 경험이 있는가? 물론 길은 다 연결되어 있으니까 다시 돌아오게 되지만, 그 만큼 고생안해도 될 고생을 하고 시간을 낭비하게 된다. 그야말로 한 순간에 판단이 이런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 그런데 우리 각 사람의 인생이나 공동체에도 이런 분깃점들이 있다. 한 순간의 판단이나 말을 잘못해서 엄청난 고통과 시간을 허비할 수 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이스라엘 백성들도 이런 실패를 경험했다. 시내산에서 출발한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땅의 남쪽에 위치한 가데스 바네아라는 곳에 도착했다. 이곳에서 직진하면 바로 약속의 땅 가나안이다. 이곳은 지리적으로 매우 중요한 분깃점이다.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곳에서 12명의 정탐꾼을 가나안땅에 파송했다. 그런데 바로 이 문턱에서 그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여호수아와 갈렙을 제외한 20세 이상의 사람들은 그 땅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충격적인 말을 들었다. 그리고 그 말씀대로 38년(출애굽까지 포함하며 40년)을 광야에서 유리하게 된다.
그러면 이들은 왜 가데스바네아라는 분깃점에서 그 문턱을 넘지 못했는가? 오늘 본문인 민수기 14장 28절은 그 중요한 원인 중 한 가지를 기록하고 있다. 그것은 그들의 극단적인 불신앙의 언행 때문이다. 이 말씀은 20세 이상은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라는 말씀을 하시기 직전에 하신 말씀이다. 20세 이상이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는 것이 결과라면, 이 말씀은 그러한 실패의 원인이 되는 말씀이다.
“그들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나의 삶을 가르켜 맹세하노라 너희 말이 내 귀에 들린 대로 내가 너희에게 행하리니”(민14:28).
“너희 말이 내 귀에 들린 대로 내가 너희에게 행하리니”, 이 말씀이 바로 이 시간에 주님이 감동주신 메시지의 핵심이다. 우리 옛말에도 ‘말이 씨가 된다’는 속담이 있다. 일반적인 사람과의 관계에도 이런 말을 하는데, 하물며 하나님 앞에서는 더 말할 나위가 없지 않겠는가?
그렇다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무슨 악한 말을 했고, 반대로 여호수아와 갈렙은 어떻게 말했기에 가나안에 들어갈 수 있었는가? 이들이 했던 언행은 민수기 13장과 14장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민수기 13장25절 이하에 보면 10명의 정탐꾼들은 그 땅에는 이스라엘 보다 강한 거민들과 견고한 성읍들(아마 여리고성도 보았을 것)이 있고, 심지어 거대한 아낙자손들이 있기 때문에 그들은 이길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 땅을 악평했고, 스스로를 메뚜기로 자청했다(민13:28, 31-33). 이들은 눈에 보이는 견고한 성읍과 강한 거민은 보았으면서도, 그 모든 것 위에 계신 광대하신 하나님은 보지 못했던 것이다.
“[31] 그와 함께 올라갔던 사람들은 가로되 우리는 능히 올라가서 그 백성을 치지 못하리라 그들은 우리보다 강하니라 하고 [32]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그 탐지한 땅을 악평(惡評)하여 가로되 우리가 두루 다니며 탐지한 땅은 그 거민을 삼키는 땅이요 거기서 본 모든 백성은 신장이 장대한 자들이며 [33] 거기서 또 네피림 후손 아낙 자손 대장부들을 보았나니 우리는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으니 그들의 보기에도 그와 같았을 것이니라”(민13:31-33)
이러한 불신앙과 악평의 말이 온 백성들에게 까지 빠른 속도로 전염되었다. 이 소리를 들은 백성들이 밤새도록 소리 높여 곡을 하면서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면서, 심지어는 하나님을 향해 해서는 안되는 극단적인 말까지 서슴없이 내뱉었다(“어찌하여 여호와가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칼에 망하게 하려 하는고”). 가나안에 들어가면 자신들의 처자가 사로잡히고, 칼에 망할 것이고, 심지어 그들 중에 한 장관을 세워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소리쳤다(민14:2-4).
그런데 그때나 지금이나 그리고 앞으로도 이런 노예근성과 메뚜기 정신을 가지고는 새 땅에 들어갈 수 없다. 이런 것은 그곳까지 인도하신 하나님을 멸시하는 것이었다. 11절 말씀을 보라.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이 백성이 어느 때까지 나를 멸시하겠느냐 내가 그들 중에 모든 이적을 행한 것도 생각하지 아니하고 어느 때까지 나를 믿지 않겠느냐”(민14:11)
이 말씀을 보면 “멸시”라는 단어가 나온다. 뭐가 멸시인가?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것이 하나님을 멸시하는 것이다. 반대로 하나님을 믿는 것이 하나님을 높이는 것이다. 그리고 이들의 말처럼 설령 애굽으로 돌아간다 할지라도, 멋진 생활이 기다리고 있는 것이 아니다. 돌아가면 그들은 죽거나 그 이전보다 더 혹독하고 잔인한 고통을 당해야 한다.
그러나 이와는 반대로 여호수아와 갈렙은 동일한 상황에서도 믿음의 선포를 했다(민13:30, 민14:6-9)
“.... 우리가 곧 올라가서 그 땅을 취하자 능히 이기리라”(민13:30)
“오직 여호와를 거역하지 말라 또 그 땅 백성을 두려워하지 말라 그들은 우리 밥이라. 그들의 보호자는 그들에게서 떠났고, 여호와는 우리와 함께 하시느니라”(민14:9)
“그들은 우리의 밥”이라는 선언을 보라. 정말 통쾌하고, 하나님의 마음을 시원하게 하는 기백있는 선포다. 이것이 바로 영적인 반대정신이다. 이것이 바로 진정한 용기다. 이런 믿음의 고백을 주님이 오늘 우리에게 기대하신다. 지금 여기 나오는 여호수아와 갈렙의 선포는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단순한 긍정의 힘이나 심리적인 마인드 컨트롤 수준이 아니다. 지금 이들이 가진 것은 일반적인 ‘긍정의 힘’ 수준을 넘어서, 임마누엘 신앙으로 무장된 절대 믿음의 선포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자세히 보면 “너희 말이 내 귀에 들린 대로 내가 너희에게 행하리니”라는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만 적용된 것이 아니다. 여호수와와 갈렙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되었다. 그래서 여호수아와 갈렙은 20세가 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믿음대로 약속의 땅에 들어갈 수 있었다. 이 부분은 지금 오늘 우리들의 사회생활이나 신앙생활 속에서 어떻게 행할지에 대한 중요한 것을 깨닫게 해준다. 하나님은 우리의 말이 하나님의 귀에 들린 대로 행하신다. 우리의 믿음대로 행하신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나안에 들어가는 길목에 가데스바네아라는 분깃점이 있었듯이 오늘 우리들에게도 각종 문제들로 인한 인생의 분깃점들이 있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어떤 특정한 때만이 인생의 분깃점이 아니라, 지금 매 순간 순간이 바로 가데스바네아같은 분깃점이다. 그렇기에 매 순간마다 하나님의 귀에 믿음의 말을 들려드려야 한다. 하나님을 높이는 말, 하나님께 감사하는 말, 하나님을 인정하는 믿음의 선포를 더 많이 들려 드리자. 부정적인 말이든, 믿음의 선포든 하나님은 모든 말을 다 들으시고, 하나님의 귀에 들린 대로, 그 믿음대로 행하신다.
그러므로 매순간 인생의 가데스바네아같은 순간에 ‘메뚜기’가 되지말고, 믿음으로 ‘밥’을 선택하자. 더 많이 기도하자. 하나님의 귀에 더 많은 믿음의 고백을 들려드리자.
“하나님은 나와 함께 하십니다!”
“하나님이 하십니다!”
“기도하면 됩니다!”
“그들은 우리의 밥입니다!”
“예수 보배로운 피 모든 것을 이기니 예수 공로 의지하여 항상 이기리로다!”
다시 한 번 민수기 14장 28절을 믿음으로 선포하여 읽자. 주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
“너의 말이 내 귀에 들린 대로 내가 너희에게 행하리라”(민14:28)
말의 씨앗
민 14:25-38 / 홍문수 목사
일본의 에모토 마사루 박사가 쓴『물은 답을 알고 있다』는 책이 있습니다. 거기 보면 아주 신기한 실험 결과들이 소개되어 있습니다. 물에다 글씨를 보여주거나 말을 해주고, 음악을 들려주고 결정체의 모양을 촬영해 보았다고 합니다. 그랬더니 각각에 대한 반응에 따라 다양한 모양이 되었다는 겁니다. 예를 들어 사랑, 감사 등 좋은 말에 대해서는 물이 아름다운 모양의 결정체를 이루었습니다. 반면 악마 등 나쁜 말에 대해서는 흉한 모양의 결정체를 이루었습니다. 이런 예도 있습니다. 기도하기 전과 후의 물의 결정체 모양이 달라졌다고 합니다. 참 신기한 현상이죠? 이처럼 의식이 없는 물도 ‘말’에 반응을 보인다면 우리 인간들에게 ‘말’이 얼마나 중요할지 두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실제로 말에는 놀라운 능력이 있습니다.
하나님 말씀에 능력이 있다는 사실은 우리가 잘 알고 있습니다. 창세기 1장 보면 하나님이 태초에 ‘말씀’으로 우주만물을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대로 그대로 되었습니다. 창조의 능력입니다. 사55:11 보면, 하나님 말씀의 능력에 대해 이렇게 말씀합니다. “내(=하나님) 입에서 나가는 말도 헛되이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고 나의 뜻을 이루며 나의 명하여 보낸 일에 형통하리라”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의 말씀에도 놀라운 능력이 있습니다. 막1:41~42 “예수께서 민망히 여기사 손을 내밀어 저에게 대시며 가라사대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신대 곧 문둥병이 그 사람에게서 떠나가고 깨끗하여진지라” 예수님의 말씀대로 몹쓸 병이 치유 된 것입니다. 막4:39 보면 바다조차 예수님의 말씀에 잠잠해졌습니다. “예수께서 깨어 바람을 꾸짖으시며 바다더러 이르시되 잠잠하라 고요하라 하시니 바람이 그치고 아주 잔잔하여지더라”
그런데 우리 인간의 말에도 하나님과 비교할 수는 없지만 나름대로 큰 능력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인간은 유일하게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피조물로 하나님을 닮은 점이 많이 있습니다. 생각하는 능력이 있어서 호모 싸피언스(Homo Sapience)라고 부르죠. 또 한 가지 말하는 능력이 있어서 호모 에로퀀스(Homo Eloquence, 언어적 존재)라고 부릅니다. 말의 능력으로 인생이 달라집니다. 잠18:20~21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사람은 입에서 나오는 열매로 하여 배가 부르게 되나니 곧 그 입술에서 나는 것으로 하여 만족하게 되느니라 죽고 사는 것이 혀의 권세에 달렸나니 혀를 쓰기 좋아하는 자는 그 열매를 먹으리라” 입에서 나오는 말이 씨앗과 같아서 열매를 맺는다는 것입니다. 그것에 따라 인생의 축복과 저주, 행복과 불행이 좌우된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말은 씨앗과 같은 것입니다. 심는 대로 거두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옛말에 이런 말이 있지 않습니까? “말이 씨가 된다.”
심리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실제로 인생에서 언어생활이 2/3 정도를 차지한다고 합니다. 정말 그렇죠. 인간 삶의 거의 모든 일들이 말로 이뤄집니다. 사업을 해도 공부를 해도 어떤 일을 해도 다 말을 통해서 하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이렇게 정리해 봅니다. “언어생활에서 승리하면 인생에서 승리하고, 언어생활에서 실패하면 인생에서 실패한다.”
그러므로 여러분! 우리는 반드시 명심해야 합니다. 좋은 씨앗을 심어야 좋은 열매를 맺듯이, 좋은 말을 심어야 좋은 인생을 거두게 됩니다. 오늘 본문에서 그런 원리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아무쪼록 이 말씀이 우리의 언어생활에 좋은 지침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 좋은 말을 통해 복된 인생을 이루시기를 축원합니다.
본문은 잘 아시는 대로 이스라엘이 출애굽 이후 광야에서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전 정탐한 결과 백성들이 원망하고 불평하다가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사건의 기록입니다. 이 사건을 여러 각도에서 살펴볼 수 있겠지만 오늘은 정탐꾼들과 백성들의 ‘말’에 초점을 맞춰 살펴보도록 합니다.
[1] 나쁜 씨앗을 심은 사람들 : 10명의 정탐꾼과 이스라엘 백성
가나안 땅을 정탐하기 위해 12명의 정탐꾼이 파견되었습니다. 그들은 40일간 정탐 활동을 마치고 돌아왔습니다. 똑같이 보고 왔는데 두 그룹으로 나뉩니다. 여호수와와 갈렙 2명, 나머지 10명입니다. 이 10명이 악평을 하면서 부정적인 보고를 합니다. 좋기는 한데 원주민들이 강성해서 거기 가면 다 잡혀 죽는다는 겁니다. 그 말을 들은 백성들이 겁을 먹고 원망을 합니다. 울고불고 난리를 피웁니다. 그들이 토해낸 말이 어떠했습니까? 민14:2~3 “이스라엘 자손이 다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며 온 회중이 그들에게 이르되 우리가 애굽 땅에서 죽었거나 이 광야에서 죽었더면 좋았을 것을 어찌하여 여호와가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칼에 망하게 하려 하는고 우리 처자가 사로잡히리니 애굽으로 돌아가는 것이 낫지 아니하랴” 차라리 미리 죽을 걸, 우리가 가면 분명히 죽을 거다, 그럼 다시 애굽으로 돌아가자 ... 이런 말들을 마구 뱉어버렸습니다.
10명의 정탐꾼과 백성들은 나쁜 씨앗을 뿌린 것입니다. 그 말을 들은 하나님께서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28절(하). “너희 말이 내 귀에 들린 대로 내가 너희에게 행하리니 ..." 그들의 말대로 되게 해 주시겠다는 겁니다. 그들은 나쁜 씨앗을 뿌리고 나쁜 결과를 거둔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그들이 어떻게 된다고 했습니까? 32절~34절. “너희 시체는 이 광야에 엎드러질 것이요 너희 자녀들은 너희의 패역한 죄를 지고 너희의 시체가 광야에서 소멸되기까지 사십 년을 광야에서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 너희가 그 땅을 탐지한 날수 사십 일의 하루를 일 년으로 환산하여 그 사십 년간 너희가 너희의 죄악을 질지니 너희가 나의 싫어 버림을 알리라 ... ” 36절~37절. “모세의 보냄을 받고 땅을 탐지하고 돌아와서 그 땅을 악평하여 온 회중으로 모세를 원망케 한 사람 곧 그 땅에 대하여 악평한 자들은 여호와 앞에서 재앙으로 죽었고” 무슨 말입니까? 그들이 말한 대로 다 죽이시겠다는 겁니다. 정탐한 날짜 40일을 연수로 환산해서 40년 동안 광야에서 고생하다 다 죽을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신학자 레온 우드(Leon Wood)의 연구에 의하면, 40년간 매일 한 시간마다 7명의 장례를 치러야 했을 것으로 추산됩니다. 얼마나 비극적인 일입니까!
여러분, 우리는 여기서 중요한 원리를 발견하게 됩니다. 나쁜 말의 씨앗을 심으면 반드시 나쁜 결과를 거두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이런 성경구절들이 있습니다.
잠17:20 “마음이 사특한 자는 복을 얻지 못하고 혀가 패역한 자는 재앙에 빠지느니라”
약3:6 “혀는 곧 불이요 불의의 세계라 혀는 우리 지체 중에서 온 몸을 더럽히고 생의 바퀴를 불사르나니 그 사르는 것이 지옥 불에서 나느니라”
그러므로 우리는 조심해야 합니다. 나쁜 말을 하면 나 자신에게도 영향이 있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영향이 있습니다. 다 잘못 됩니다. 더욱이 하나님께서 그 말을 들으시고 심판하십니다. 무서운 사실입니다. 우리는 결단코 불신앙의 말, 부정의 말, 원망의 말, 저주의 말, 비난의 말, 분노의 말 ... 이런 나쁜 말의 씨앗을 절대 심지 말아야 합니다.
[2] 좋은 씨앗을 심은 사람들 : 여호수아와 갈렙
다행히 그 와중에서 여호수아와 갈렙은 좋은 말을 했습니다. 민14:6~9을 보십시오. “그 땅을 탐지한 자 중 눈의 아들 여호수아와 여분네의 아들 갈렙이 그 옷을 찢고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에 일러 가로되 우리가 두루 다니며 탐지한 땅은 심히 아름다운 땅이라 여호와께서 우리를 기뻐하시면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시고 그 땅을 우리에게 주시리라 이는 과연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니라 오직 여호와를 거역하지 말라 또 그 땅 백성을 두려워하지 말라 그들은 우리 밥이라 그들의 보호자는 그들에게서 떠났고 여호와는 우리와 함께 하시느니라 그들을 두려워 말라 ... ”
이렇게 좋은 말을 심는 그들을 하나님이 기뻐하셨습니다. 민14:10(하) 보면, “ ... 여호와의 영광이 회막에서 이스라엘 모든 자손에게 나타나시니라”고 말씀하였고, 본문 38절 보면 “그 땅을 탐지하러 갔던 사람들 중에 오직 눈의 아들 여호수아와 여분네의 아들 갈렙은 생존하니라”고 했습니다. 출애굽 1세대 중에서 이 두 사람만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기업을 받고, 지도자의 지위를 감당하며 복을 누립니다. 그들은 좋은 말의 씨앗을 심고 좋은 결과를 거둔 것입니다. 잠13:2 말씀 대로입니다. “사람은 입의 열매로 인하여 복록(福祿, good things)을 누리거니와 ... ”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우리 인간의 말은 너무 중요합니다. 농사짓는 것과 같습니다. 좋은 씨를 심으면 좋은 열매를 거둡니다. 그러므로 최선을 다해 좋은 말의 씨앗을 심으려고 애쓰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미래를, 우리의 인생 좋은 것으로 만들어 주실 줄로 믿습니다.
[3] 말을 통한 인생 농사 : 좋은 씨앗 심기
그러면 우리는 구체적으로 어떤 말의 씨앗을 심어야 할까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대표적인 몇 가지만 제시해 드립니다.
① 믿음의 말 :
제일 좋음 말은 믿음의 말입니다. 하나님을 믿음으로, 예수님을 믿음으로 말 고백하는 말입니다. 그런 말을 하나님이 받으십니다. 그리고 역사하십니다.
i) 구원의 은총을 주십니다. 롬10:9~10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믿고 말로 고백할 때 비로소 구원(죄 사함과 영생)을 얻습니다.
ii) 문제 해결의 은총을 주십니다. 마9:28~30 “예수께서 집에 들어가시매 소경들이 나아오거늘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능히 이 일 할 줄을 믿느냐 대답하되 주여 그러하오이다 하니 이에 예수께서 저희 눈을 만지시며 가라사대 너희 믿음대로 되라 하신대 그 눈들이 밝아진지라 ... ” 예수님에게 몰려온 소경들이 믿음의 말을 고백할 때 그 말을 들으시고 그대로 이뤄주십니다. 소경이 눈을 뜨는 기적이 나타난 겁니다.
여호수아와 갈렙도 마찬가지 믿음으로 “그들은 우리의 밥이라! 하나님이 함께 해 주시시라!” 고백하는 말 그대로 가나안 땅에 들어갔을 때 승승장구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의 말대로 역사해 주신 것입니다.
여러분 중에 아마 많은 분들이『긍정의 힘』이란 책을 읽어보셨을 겁니다. 그 책에 보면 저자 조엘 오스틴 목사님의 어머니께서 암에 걸려서 현대의학으로는 고칠 수 없었는데, 치유 받은 간증이 나옵니다. 의사들은 몇 주밖에 살 수 없다고 사형선고를 내렸습니다. 하지만 그 어머니는 결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인간 권위자는 불가능하다고 했지만, 하나님 절대권위자를 바라본 것입니다. 그녀는 이렇게 외쳤습니다. “나는 죽지 않고 살 거야! 나는 하나님의 역사를 선포할 거야!” 그리고 치유에 관한 성경구절 30~40개를 종이에 적어놓고 큰 소리로 읽으면서 선포하였다. 그러자 놀라운 역사가 나타났습니다. 점차 식욕도 되찾고 건강을 회복하더니 온전해졌습니다. 그 후 20년이 지났지만 건강하게 생존해 계시다는 겁니다.
그러므로 성도 여러분! 어떤 상황 속에서도 사람을 바라보지 말고, 조건을 바라보지 말고 전능자 하나님, 십자가를 이기신 예수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믿음의 말로 고백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능력의 역사를 체험하는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② 긍정의 말 :
하나님을 믿는 성도의 특징 중 하나는 긍정적인 마인드를 가지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성경을 보면 훌륭한 신앙의 선배들은 한결 같이 긍정적인 생각과 말의 소유자였습니다. 예를 들어 다윗을 보십시오. 그는 소년 시절 참전 중에 있는 형들 면회를 갔다가 블레셋의 골리앗 장군 앞에 벌벌 떠는 이스라엘 군대의 모습을 보고 의분을 느낍니다. 그리고 자기가 나서서 싸우겠다고 말합니다. 승리할 수 있다는 겁니다. 그 말은 들은 맏형이 화를 냅니다. 그때 다윗이 뭐라고 말합니까? 삼상17:28~29 “장형 엘리압이 다윗의 사람들에게 하는 말을 들은지라 그가 다윗에게 노를 발하여 가로되 네가 어찌하여 이리로 내려왔느냐 ... 네가 전쟁을 구경하러 왔도다 다윗이 가로되 내가 무엇을 하였나이까 어찌 이유가 없으리이까 하고 우리말 성경에 의미가 분명하지않게 번역되어 있는데, 영어 성경을 보면 아니, 말도 못합니까? 이런 뜻입니다. 다윗은 절망의 상황 속에서 긍정의 말을 한 것입니다.
사실은 이게 보기처럼 쉽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대개 부정적입니다. 심리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하루에 5만~6만 가지 생각을 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중에 75%가 부정적인 생각이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말도 부정적이 될 수밖에 없죠. “안 된다.” “큰일 났다.” “죽겠다.” “끝장이다.” “다 틀렸다.” “못 살겠다.” 부정적인 생각과 말에 사로잡혀 쉬이 실패하고 맙니다. 그러므로 긍정적인 말을 하려면 노력이 필요합니다. 의식적으로 밝은 면을 봐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긍정의 말을 토해내야 합니다. “할 수 있다.” “된다.” “괜찮다.” “다시 해 보자.” “잘 될 거야.” 이런 말을 하면 자기도 모르게 용기가 솟아나고, 하나님도 도와주십니다.
미국의 여자 속옷을 만드는 사업가가 신제품을 출시하면서 치수를 정하는데 큰 치수를 빅 사이즈, 더블 빅 사이즈로 불렀다고 합니다. 그랬더니 뚱뚱한 사람들이 사가질 않더랍니다. 결국 사업이 큰 위기에 몰렸는데, 고민 중에 그 사실을 깨닫고 빅 사이즈 대신 퀸 사이즈라고 붙였다고 합니다. 그랬더니 불티나게 팔려서 큰 부자가 되었다고 합니다. 신앙과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이야기지만 긍정의 말이 얼마나 큰 위력을 발휘하는지 알 수 있는 좋은 예입니다.
저와 여러분도 상황에 갇히지 말고 눈을 들어 주님을 바라보고, 밝은 면을 바라봄으로 긍정을 말을 고백함으로 용기를 갖기 바랍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그 말대로 축복해 주실 줄로 믿습니다.
③ 감사의 말 :
우리는 흔히 조금만 어려운 일을 당해도 쉬이 불평하고 원망하기 쉽습니다. 그런데 그 원망은 사람에게 대한 것이라도 결국은 하나님을 향한 것이 됩니다. 왜냐하면 그 일을 당하게 허용한 것은 어디까지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어려운 상황에서도 마음을 지키고 원망 대신 감사의 말을 하면 하나님이 기억하시고 축복해 주십니다.
욥을 보십시오. 극한 시련을 만났지만, 그는 결코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찬송하고 감사의 말을 합니다. 욥1:21~22 “가로되 내가 모태에서 적신이 나왔사온즉 또한 적신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하고 이 모든 일에 욥이 범죄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향하여 어리석게 원망하지 아니하니라” 이와 같이 입술을 잘 자킨 욥을 하나님이 기뻐하셨습니다. 마침내 갑절의 복을 받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감사의 말을 하면 어려운 시련은 물러갑니다. 그리고 형통할 때는 더욱 더 형통한 일이 많이 생기게 됩니다. 감사의 말은 감사 조건을 계속 양산하는 것입니다. 결국 그런 사람들은 감사 속에서 행복한 삶을 누리게 됩니다.
여러분, 서양 사람들을 보십시오. 지금을 신앙이 약화되었지만, 그들이 기독교 문화의 전통을 보존하는 데서 아직도 많은 복을 누리고 있습니다. 그 중 하나가 감사의 말입니다.
별 것도 아닌데 감사의 말을 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우리도 감사의 말을 많이 하시기 바랍니다. 기도도 달라는 기도보다 감사의 기도를 많이 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더 많은 감사거리를 만들어 주실 줄로 믿습니다.
④ 축복의 말 :
인간관계 속에서 중요한 한 가지는 바로 축복의 말입니다. 남이 잘 되기를 비는 말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그 말을 들으시고 상대방에게 복을 주실 수도 있고, 설사 합당치 않아서 그 사람이 받지 못해도 축복의 말은 하는 본인에게 그 복을 주십니다. 시109:17 “저가 저주하기를 좋아하더니 그것이 자기에게 임하고 축복하기를 기뻐 아니하더니 복이 저를 멀리 떠났으며” 심지어 원수를 위해서도 그렇게 하라고 말씀합니다. 그게 나에게 이익이 되기 때문입니다. 벧전3:9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말고 도리어 복을 빌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이는 복을 유업으로 받게 하려 하심이라”
축복의 말 중에 칭찬의 말도 있습니다. 사람은 칭찬받을 때 잘 한다고 합니다. 잠27:21 “도가니로 은을, 풀무로 금을, 칭찬으로 사람을 시련하느니라” 모든 사람에게 칭찬의 말을 하되, 특히 우리 자녀들에게 많이 해 주시기 바랍니다. 쉽지 않죠. 오히려 남에게는 체면으로라도 하는데, 자녀들에게는 오히려 꾸지람을 하기 쉽습니다.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 가장 사랑하는 자녀들에게 축복의 말, 칭찬의 말을 많이 해줘야 합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특히 이런 데 약합니다. 요즘을 좀 나아졌지만, 옛날에는 살기 어려워서 그랬는지 자녀들에게 얼마나 욕을 많이 했는지 모릅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무시무시합니다. “망할 놈아!” “육시를 낼 놈아!”(육시=죽은 시체의 목을 다시 베는 것) 이 말대로 되면 어쩌려고 그러나요?
세계적인 지휘자 정명훈 씨의 인터뷰 기사를 본 적이 있는데, 성공 비결이 어머니의 칭찬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어릴 적에 피아노를 치면 항상 “넌 어쩜 그렇게 잘하니?” 이렇게 격려해 주었다는 겁니다. 그것이 성공을 위한 큰 에너지가 된 겁니다.
성경 보면 부모들이 자녀들을 축복기도해 주는 것을 장려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특권이며 책임입니다. 그 축복 기도를 하나님이 다 이뤄주십니다. 우리는 모든 사람들을 축복하는 말을 하되, 특히 자녀들에게 축복하는 말, 축복하는 기도를 많이 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이렇게 좋은 말의 씨앗을 심는다는 게 그리 쉽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마음과 말을 제어하는 게 너무 어렵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말씀과 기도로 혀를 제어(Control)해야 됩니다. 약3:8 “혀는 능히 길들일 사람이 없나니 쉬지 아니하는 악이요 죽이는 독이 가득한 것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많이 읽고 그것으로 말하시기 바랍니다. 벧전4:11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같이 하고 ... ” 그리고 우리의 입술을 위해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성령님께서 제어해 주시도록! 시141:3 “여호와여 내 입 앞에 파수꾼을 세우시고 내 입술의 문을 지키소서”
성도 여러분! 모든 사람이 그래야 되지만, 특히 우리 믿는 성도들은 말을 잘 해야 합니다. 그것이 신앙의 중요한 모습입니다. 아무쪼록 저와 여러분은 나쁜 말의 씨앗을 심지 말고 오직 좋은 말의 씨앗을 심어서 좋은 인생을 거두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의 말한 대로 하나님이 축복하시는 아름다운 인생, 복된 인생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