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월4일 오늘의 역사
2023년 인천 송도 현대시장 방화로 인한 화재로 점포 55개 전소
2023년 유도 김원진, 2023 IJF 타슈겐트 그랜드슬램 금메달 획득
2022년 울진, 강릉 영월 대형산불 발생 울진 역대 최장기간 산불
오전 11시17분쯤 경북 울진군 북면 두천리 야산에서 원인을 알 수 없는 산불이 발생했다. 산불이 확산하면서 오후 2시10분 산불 3단계로 격상하고 산불재난 국가위기경보 ‘심각’을 발령했다. 당국은 산불진화헬기 28대와 산불진화대원 417명을 투입해 진화에 나서고 있다. 소방청도 오후 1시50분을 기해 전국 소방동원령 1호를 발령했다. 산불은 순간 초속 25m 이상 강풍을 타고 번졌다. 이 산불은 역대 기록 중 최장기간인 3월13일 213시간 만에 진화 되었다
영월에서는 지난 4일 낮 12시 45분쯤 불이 난 뒤 헬기 7대와 인력 280여 명이 투입됐지만 산세가 워낙 험한 데다 험한 데다 우산이 뒤집힐 정도의 초속 10m 안팎 강풍 탓에 진화에 어려움을 겪었다. 인근 15개 가구 주민은 주민 센터로 긴급 대피했다. 불은 밤새 정상인 해발 1000m 부근까지 번지면서 산 천체로 확산하고 있다.
강릉에서는 주변사람들이 자기를 무시한다는 60대 남성이 토치로 불을 질러 동해까지 번졌으나 4일만에 진화되었다
동해안 산불이 피해면적에서 역대 두번째 규모인 것으로 조사됐다.
가장 피해가 컸던 산불은 2000년 동해안 지역에서 발생한 산불로, 이번 산불은 이후 22년간 발생한 산불 중 피해 규모에서 최대였다.
피해 면적은 2만3천993ha로 울진 1만8천484ha, 삼척 1천509ha, 강릉 1천900ha, 동해 2천100ha의 피해가 발생했다 인명피해는 발생하지 않은 가운데 울진 388개, 강릉 12개, 동해 63개 등 463개 시설이 소실됐고, 4천663세대 7천374명이 대피 중이다. 임시 주거시설에 885세대 1천75명이 머무르고 있다.
2022년 러시아 포격으로 우크라이나 자포리자 원자력발전소 단지 폭발 사고
2021년 윤석열 검찰총장 사의표명
2013년 고종 손녀 이해경 여사, 아베신조 日총리에 “조선왕실 투구갑옷돌려달라” 서신.
2012년 해피선데이가 1박 2일 시즌 2를 방송하게 되다.
2003년 조선일보 강인선 기자, 이라크전 종군취재 차 쿠웨이트로 급파
2003년 필리핀 남부의 다바오 국제공항서 폭탄테러, 19명 사망 114명 부상
필리핀 남부의 다바오 국제공항에서 4일 오후 5시15분 강력한 폭탄 테러가 발생, 최소한 19명이 숨지고 114명이 부상했다
이날 테러는 공항 여객터미널 외곽에 있는 대기실에서 발생했다.
경찰은 즉각 공항을 폐쇄했으며 무장군인들이 경계를 섰다.
거의 같은 시각 다바오의 버스 터미널에서도 폭탄 폭발이 일어나 3명이 부상을 입었다.
글로리아 아로요 필리핀 대통령은 폭탄공격을 “파렴치한 테러” 라고 비난하고 비상각료회의를 소집했다.
2002년 이브라힘 루고바, 코소보 초대 대통령에 당선
코소보 의회는 알바니아계 온건파 지도자 이브라힘 루고바를 4일 코소보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했다.
의회는 또 알바니아계 반군 지도자였던 하심 타치가 이끄는 온건파 정당 소속 베지람 렉스헤피를 총리로 선출하고 10명으로 된 내각을 구성했다. 이번 표결은 지난주 주요 알바니아계 정당 대표들간 합의된 권력배분안에 따른 것이다.
미하엘 슈타이너 유엔 코소보 행정관은 이번 결과에 대해 “코소보의 미래를 위한 선거”라며 환영을 표했다. 의회는 지난 3개월간 세 차례에 걸쳐 대통령 선출을 시도했으나, 단일 후보였던 루고바가 필요한 지지를 얻지 못해 실패해왔다
2000년 일본에서 플레이스테이션 2가 발매되다.
2002년 조요한 전 숭실대 총장 별세
학술원 회원인 조요한 전 숭실대 총장이 2002년 3월 4일 별세했다. 서울대 문리대를 나와 그리스 고전철학을 전공한 조 총장은 국내 학계에 예술철학을 본격적으로 소개한 개척자다. 1971년부터 서울대 미학과에 출강하면서 예술철학과 미술사학을 강의했고, 그의 주저인 `예술철학`(1973)은 요즘도 미학도나 예술학도가 반드시 읽어야 할 필독서로 손꼽힌다.
함경북도 경성 출신인 조 총장은 서울대 문리대 시절, 화가 김환기 집에서 머문 인연으로 환기미술관 설립시 초대 이사장을 지내기도 했다.
조 총장은 비판적 사회의식의 소유자이기도 했다. 기독교교수협의회 회장으로 있던 1980년 `지식인 103인 선언`에 서명했다는 이유로 그해 숭전대(현 숭실대)에서 해직됐다. 정부의 해직교수 복직허용 조치가 내려진 1984년 9월에야 다시 학교로 돌아갈 수 있었다. 이듬해인 1985년 8월 숭전대 재단이사회가 5대 총장으로 선임했으나, 문교부가 해직 교수란 이유로 총장승인을 거부해 한동안 취임을 못하기도 했다.
2001년 서울 홍제동에서 진화작업을 하던 소방관 6명 사망
2001년 3월 4일 화재현장에서 진화 및 구조작업을 하던 소방관 6명이 건물더미에 깔려 숨지고 3명이 중경상을 입는 참사가 발생했다. 이날 새벽 소방대원들은 서울 서대문구 홍제1동의 한 2층 주택에서 발생한 화재 진화 작업을 하던 중이었다. 자신의 아들이 집 안에 있다는 집주인의 다급한 외침은 작업 중이던 소방대원들을 사지로 몰아 넣은 신호탄이었다. 아직 불길이 잡히지 않은 상태였지만 대원들은 아들을 구하기 위해 무리한 작전을 감행했다.
진화작업과 구조작업이 동시에 전개됐다. 김기석 구조대 부대장등 구조대원 4명이 1층 현관을 통해 건물진입을 시도했다. 공기호흡기와 손도끼만 든 채 로프로 서로 몸을 묶고 자욱한 연기 속에서 바닥을 더듬어갔다. 5명은 대원들을 엄호했다. 그러나 이 시각, `방화 혐의`를 받고 있는 집주인의 아들은 이미 집을 빠져 나온 상황이었다. "무너질 것 같아. 빨리 피해, 빨리…." 오전 4시12분, 구조대원들이 1층 방을 돌며 수색하는 순간 주변에서 외마디 소리가 터져나왔다. 그러나 대피할 새도 없이 2층 건물이 내려앉으면서 대원들을 덮쳤다.
매몰 20분 후, 강남길 소방사 등 2명이 구조됐지만 나머지 대원들은 무너져 내린 벽돌에 묻혀 모습조차 찾아볼 수 없었다. 굴착기까지 동원돼 구조작업을 벌인 결과 대원 6명은 이미 숨이 멈춰 있었다. 우리나라 소방 역사상 처음으로 소방관 6명이 한꺼번에 순직하는 참사가 벌어진 것이다.
불이 난 집은 슬래브와 벽돌로 지은 2층 주택으로 30년이 지난 노후건물이었다. 집주인 등 거주자 8명은 화재 직후 모두 집을 빠져나와 화를 면했다. 경찰은 집주인의 아들 최씨로부터 "어머니와 심하게 다툰 후 술을 먹고 방에다 불을 붙였다"는 어처구니 없는 자백을 받고 이튿날 최씨를 구속했다.
1995년 한국-체코 과학기술협력협정 체결
1993년 청와대, 김영삼 대통령 지시로 안가 철거해서 시민공원 만들기로 결정
1993년 뇌사자 장기 이식, 공식적으로 인정
1989년 근로자 주44시간 노동제 결정
1989년 타임사-워너영화사 합병 발표
미국 시사주간지 타임을 발행하고 있는 타임사와 3대 영화사에 속하는 워너 브러더스의 모회사인 워너 커뮤니케이션사가 합병, 자산규모 1백89억달러의 세계최대의 언론-흥행 통합 메머드 회사를 설립한다고 두 회사가 1989년 3월 4일 공동발표했다. 타임워너로 명명되는 이 거대 회사는 출판, 케이블TV, 영화, 음악 등 언론과 흥행에 관련된 거의 모든 사업체를 거느리게 돼 한해 수입만도 1백억 달러에 이르는 이 부문 세계 최대의 회사가 될 것으로 전망됐다.
타임은 타임 외에 라이프, 포천, 스포츠 일러스트레이티드, 피플 등의 잡지류로 전세계에 총 3천만부의 발행부수와 1억 2천만명의 독자를 자랑하고 있다. 타임은 이외에도 리틀 브라운, 타임-라이프북스 등의 출판사를 가지고 있고, 미 유선TV업계의 선두주자인 홈 박스 오피스(HBO) 등 유선TV망 2개까지 거느리고 있어 1988년의 경우 총수입이 45억 달러에 이른 것으로 나타났다.
워너사 역시 약 40억 달러의 자산에 지난 1987년 총매출 34억 달러, 순익 3억2천8백만 달러를 올린 미국 유수의 영화 및 TV 제작 흥행회사로, 미국 최대이자 세계 제2위의 음악 녹음 및 출판업체에다 워너 브러더스 영화사, 워너 브러더스TV, 그리고 워너 케이블 커뮤니케이션사 등의 방계 회사를 가지고 있다. 타임워너사는 2000년 1월 다시 대형 인터넷 그룹인 아메리카 온라인(AOL)과 사상최대인 3500억달러 규모의 합병을 합의해 끊임없는 변신과정을 보여주었다.
1983년 미국, 북한UN대표 재입국 허용
1982년 사병 복부기간 30개월로 단축키로(84년까지 단계적)
1980년 아프가니스탄 회교반군 파키스탄에 망명정부 구성
1979년 미국-중공간 7개년 통상협정 체결
1977년 루마니아를 비롯한 발칸반도 강진으로 1541명 사망
1977년 3월 4일 오후 9시, 루마니아에서 매그니튜드 7.2의 강진이 발생, 루마니아를 중심으로 하는 발칸반도 일대에 큰 피해를 냈다. 진원지는 부카레스트 북방 약 120km이고 진원 깊이는 100-150km였다.
루마니아 수상 차우세스크는 방문지인 나이지리아로부터 급거 귀국,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하고 군대를 투입해 피해자 구조에 나섰다.
강진으로 고층 아파트 등 약 40개 빌딩이 붕괴됐고, `발칸의 작은 파리`로 불리는 부카레스트는 폐허가 됐다. 3월 14일 사망자는 1541명, 부상자는 1만 1275명으로 발표됐다. 또 피해 가옥은 2만호, 피해 공업시설은 195개소, 특히 원유생산지대에서는 300기의 유정이 파괴됐다.
1977년 세이무어 크레이, 프레온 냉각방식을 적용한 크레이-1 슈퍼컴퓨터 개발
1977년 특허국, 특허청으로 승격
1976년 북한 모잠비크에 군사고문단 파견
1975년 찰리 채플린 기사 작위 수여
1973년 제주 우도 무장간첩사건
1973년 3월4일 새벽 제주도 동쪽 3.5㎞ 해상에 있는 우도에 무장간첩이 출현했다. 대간첩대책본부에 의하면 3월 4일 0시30분쯤 우도에 나타난 무장간첩들은 순찰중인 해조건조장 경비원에게 암호와 `동무`라는 용어를 사용, 경비원이 대답을 하지않자 5m거리에서 사살했다는 것이었다.
또 인근 해안에서 거룻배를 포함한 2척의 선박이 발견됐다. 현지 경찰, 예비군, 각종 함정이 출동해 수색작전을 폈으나 무장간첩들은 이미 탈출한 것으로 판단됐다. 현장에서는 권총 탄피 1개만 발견됐다.
간첩침투사건 조사결과 우도에 고정 간첩 9명이 활동해왔다는 사실도 밝혀졌다.
1973년 일요일 우편 배달제 폐지
1971년 한미 합동공수기동훈련(프리덤볼트작전)개시
1966년 일본 하네다 공항서 캐나다 여객기 폭발 , 64명 사망
1962년 미국 남극 원자력발전소 조업 개시
1958년 충북선 명암터널 개통
1957년 세레베스도 반군, 인도네시아 정부에 자치권 요구
1956년 모로코, 메뚜기떼와의 전쟁
1956년 영국회사, 알래스카 석유 채굴
1951년 제1회 아시아경기대회 인도 뉴델리서 개막
1951년 3월 4일 제1회 뉴델리 아시아경기대회가 인도의 뉴델리에서 개막됐다. 뉴델리 대회는 아시아경기연맹 가입국 중 일본, 태국, 인도, 필리핀, 버마, 이란, 인도네시아, 싱가포르, 실론(스리랑카), 아프카니스탄, 네팔 11개국이 참가한 가운데 거행됐다. 경기는 4일부터 11일까지 8일 동안 치뤄졌고, 경기종목은 육상, 수영, 축구, 사이클, 농구, 역도 6개 종목이었다.
아시아경기대회는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아시아 여러 나라의 우호와 세계평화를 촉진할 목적으로 창설된 국제스포츠대회로, 4년에 한번씩 올림픽 중간해에 회원국 중 희망국에서 개최한다. 1948년 제14회 런던 올림픽경기대회가 열리던 기간 중에 아시아의 13개국 단장들은 세계올림픽위원회로부터 아시아 지역대회 개최를 위한 사전 협의를 요청받고 한국·필리핀·미얀마·인도·타이완·스리랑카 등 6개국이 모여 개최할 것을 결정했다. 그 결과 1949년 2월에 인도의 뉴델리에서 제1회 아시아육상선수권대회를 개최하기로 했으나 개최국인 인도의 사정으로 대회는 열리지 못했다. 이때 9개국 대표 11명이 다시 모여 제2차 회의를 갖고 아시아경기대회로 대회명칭을 바꾸고 제1회 아시아경기대회를 인도의 뉴델리에 개최하기로 결정했다.
한국은 전쟁중이어서 제1회 대회에는 불참했지만 그 이후에는 모두 참가했고, 1986년 제10회 서울 대회를 개최하여 종합 2위를 하였으며, 또한 2002년 제14회 대회도 9월 29일부터 10월 14일까지 부산에서 개최됐다.
1949년 소련 외무장관 몰로토프 퇴임, 후임에 비신스키
1938년 조선교육령(朝鮮敎育令) 개정 공포
중일전쟁의 포연(砲煙) 속에서 전시체제를 강화하던 일제(日帝)가 조선교육령을 개정했다.
조선교육령 개정에 따라 4월에 들어서 보통학교․고등보통학교․여자고등보통학교 규정이 폐지되고 소학교․중학교․고등학교 규정의 내용이 전면 실시. 제3차 조선교육령은 일본어, 일본사, 수신 등 일본식 교육을 통해 민족정신을 말살하려는 ''황국식민화'' 교육에 주안점을 두고 개정되었다.
조선교육령은 한일합방 한 해 뒤인 1911년 8월 처음 공포되었고, 3.1운동 세 해 뒤인 1922년 2월 개정되었다가, 1938년 3월4일 다시 개정되었다.
제3차 조선교육령의 가이드라인은 국체명징, 내선일체, 인고단련 따위였는데, 그 고갱이는 황민화 교육에 있었다.
그 때까지 보통학교, 고등보통학교, 여자고보 등으로 불리던 초.중등학교 명칭이 일본식으로 소학교, 중학교, 고등여학교 등으로 바뀌었을 뿐 아니라, 각급 학교에서 학생과 교사들이 황국신민서사(皇國臣民誓詞)를 외게 되었다.
황국신민서사의 전문은 이렇다.
하나, 우리는 황국신민이다. 충성으로써 군국에 보답하리라.
둘, 우리들 황국신민은 서로 신애촵협력함으로써 단결을 굳게 하 리라.
셋, 우리들 황국신민은 인고단련, 힘을 길러서 황도를 선양하리라.
미나미 지로(南次郞) 총독의 지시에 따라 이 문안을 작성한 사람은 김포 군수를 지낸 조선인 이각종(李覺鐘)이다.
1911년의 제1차 조선교육령은 조선인을 충량(忠良)한 제국신민으로 양성하기 위해 조선의 교육을 보통교육과 실업교육으로 한정했다.
3.1운동 이후 이른바 문화정치에 있게 했다.
이에 따라 경성제국대학이 세워지고 민립 대학 설립운동이 일어나기도 했다.
1938년의 제3차 조선교육령으로 황국신민화를 추진하던 일제는 태평양 전쟁이 한창이던 1943년 3월 제4차 조선교육령을 공포해 국민학교로 이름이 바뀐 소학교 어린이들까지 전쟁 관련 부역에 동원하는 한편, 전문학교생.대학생들을 학도병으로 강제 지원시켰다
1933년 루스벨트 제32대 미국 대통령에 취임
미국 최초의 4선 대통령인 프랑클린 루즈벨트가 대통령으로 취임한 당시 미국의 경제는 최악의 대공항이라는 양상이었는데, 1933.3.4의 취임사에서 『우리가 두려워할 것은 두려워 한다는 그 자체이다.』라고 국민을 격려한 것은 유명하다.
이어 그는 1933.3.9 뉴딜 회의를 소집했고, 일련의 뉴딜 정책을 수립했는데, 이러한 뉴딜에 관한 여러 가지 법안을 차례로 성립시키는데는 100일이 걸렸기 때문에 이 기간을 특별히「one hundred days」라고 한다.
한편 1933.3.12 루즈벨트 대통령은 백악관에서 전국민에게 말하는 노변 담화를 시작했는데 이것은 그가 라디오를 효과적으로 이용한 최초의 정치가로 타이틀을 붙게 만들었다.
1932년 일본군, 중국 상해 공격
1932년 2월 만주국을 세워 대륙침략의 야욕을 노골화한 일본!
한달 뒤인 1932년 오늘 중국의 무역중심지인 상하이시를 공격합니다.
3만여명의 일본군이 상하이의 주요건물에 불을 지르고 약탈했습니다.
중국과 일본은 두달 뒤 상하이시에서 정전협정에 조인했습니다.
일본은 5년 뒤인 1937년 7월에 다시 베이징과 상하이로 진격하면서 중일전쟁을 일으켰습니다.
중일전쟁 결과 중국의 국민정부군은 군사력이 약화돼 1949년 마오쩌둥의 공산당에게 굴복했습니다.
1913년 윌슨 미국 대통령에 취임
1909년 민적법(현행 호적법의 효시) 공포
1909년 3월4일, 일제 통감부가 현행 호적법의 효시가 되는 ‘민적법(民籍法)’을 제정ㆍ공포했다. 민적법은 이후 4월 1일부터 시행됐다. 개인의 신분관계를 법률상으로 명확히 하고 전국의 호수를 정확히 파악하는게 목적이었다지만 조선을 효과적으로 수탈하기 위한 일제의 은밀한 계산이 숨어있었다.
조선의 호적제도는 1894년 갑오경장 당시 신분제도가 철폐되고 1896년 갑오경장 입법의 일환으로 호구조사규칙(1896년 9월 1일)과 호구조사세칙(1896년 9월 3일)이 공포되면서 근대적인 모습을 갖추었다. 그러나 호를 구성하는 기준이 호주와의 혈연관계가 아닌 동거 여부에 따라 결정됐기 때문에 호주의 직계존속 및 직계비속이라도 동거하지 않으면 호적을 달리해야했다. 민적법은 호구조사규칙과 달리 가(家)와 가에 속한 개인의 신분관계를 증명하는 신분등록제도였다.
민적법에 의거, 통감부가 1909년에 조사한 ‘민적 통계표’에 따르면 당시 우리나라 인구는 1300만명. 경북이 153만명(11.5%)로 가장 많았고 전남이 150만명, 경남과 경기는 각각 136만명과 110만명이었다. 서울은 23만명(1.8%). 성비는 남자 100명당 여자가 88.4명으로 극심한 남아선호사상을 드러냈다.
1894년 갑오경장으로 신분계급은 타파됐지만 성(姓)과 본(本)은 여전히 양반이나 양민들의 전유물이었다. 민적법은 거의 절반에 가까운 하층민들에게 새로운 성과 본을 부여, 새 삶을 살도록 했다. 전국민이 성을 갖도록 한 민적법 시행 이후 파악된 당시 한국인의 성은 약 250여개 미만이었다.
1904년 러일전쟁에서 10만명의 일본군의 진격으로 러시아군이 조선에서 만주로 퇴각
1894년 중국 상하이에서 큰불이나 1000여채 이상의 가옥이 불에 타다.
1892년 이광수 출생
1889년 청나라, 서태후 들어앉고 덕종제친정
1889년 미국 카톨릭 성직자 스펠만 출생
1883년 미국 정치가 알렉산더 스티븐스 사망
1882년 런던 동부 지역(North East)에 영국에서 첫번째로 전기식 시가 전차가 등장
1866년 대원군의 천주교 탄압으로 프랑스 신부 베르네 순교 (병인박해)
1852년 러시아 작가 니콜라이 고골리 사망
러시아의 소설가 겸 극작가 니콜라이 바실레비치 고골리가 1852년 3월 4일 모스크바에서 사망했다. 43세였다. 우크라이나에서 소귀족의 아들로 태어난 고골리는 어려서부터 문학에 재능을 보였으나 관리로서 꿈을 펼치고자 했다. 하급관리 생활 중에도 틈틈이 신문이나 잡지 등에 글을 투고했다.
1830년 ‘이반 쿠팔라의 전야’로 각광을 받은 그는 농촌을 무대로 한 단편소설집 ‘다칸키 근교 농촌 야화’로 문단에 그의 지평을 넓혀나갔다. 그의 가장 뛰어난 작품가운데 하나인 소설 ‘죽은 넋’은 제1부만 완성되고 2부는 미완성인 채로만 남아 있어 오늘날 그의 이름은 주로 희곡 ‘검찰관’과 중편소설 ‘외투’로만 기억되고 있다. 관료사회의 악을 폭로한 ‘검찰관’으로 그는 지배 계급의 반발을 사 서유럽으로 피신해야 했다.
10여년 동안을 거의 서유럽 특히 로마에서 보냈으며 이 기간에 대작 ‘죽은 넋’ 1부와 최고의 걸작 ‘외투’(1842)를 완성했다. 도스토예프스키가 “우리는 모두 고골리의 ‘외투’에서 태어났다”고 말했을 만큼 고골리는 러시아 문학에 큰 영향을 끼쳤다. 인간의 악을 풍자적으로 그린 ‘죽은 넋 1부’와는 반대되는 도덕적인 인간과 갱생하는 인간을 그려보려 했던 ‘죽은 넋 2부’는 그를 끊임없이 괴롭혀 정신착란에까지 빠지게 했고 그것이 원인이 되어 이날 숨을 거두고 말았다. 그의 작품은 중국 루쉰(魯迅)에게도 영향을 끼쳐 ‘아큐정전’이나 ‘광인일기’ 등에 그의 흔적이 묻어나오고 있다.
1832년 이집트학의 비조로 꼽히는 프랑스 문헌학자 장프랑수아 샹폴리옹 사망
1789년 미국 연방의회 뉴욕시에서 개원되고 연방헌법 발효
1665년 영국의 국왕 찰스 2세가 네덜란드와 제 2차 영국-네덜란드 전쟁을 선포하다.
1678년 이탈리아 작곡가 비발디 출생
1493년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카리브해 탐험을 마치고 포르투갈 리스본으로 귀환
1461년 장미전쟁: 랭커스터 왕가의 헨리6세가 물러나고 요크의 에드워드 4세 즉위.
1394년 포르투갈 항해왕자 엔리케 출생
1063년 (고려 문종 17) 거란, 대장경 보내옴
852년 크로아티아의 트르피미르 1세 공작이 성문법을 발행함
51년 고대 로마 제국의 네로가 황제가 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