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바이트로 일을 하다보니 나름대로 열심히 일을 했는데 이번 달에도 역시 넉넉한 봉투를 받지는 못했다. 삼십년전 고등학교를 다니며 저녁에는 어묵공장에서 일하던 소년은 못내 아쉬움에 마음이 편치 않았다.
오월은 푸르구나.우리들은 자란다.오늘은 어린이날 우리들 세상.
푸르기만 해야할 청소년 시절에 어깨에 얹힌 삶의 무게가 무거울 만도 하건만 언제나 철이 없을 정도로 밝기만 하던 소년도 오월의 눈부신 신록과 무언지는 확실히 몰라도 사람의 마음을 들뜨게 만드는 봄날의 마력 앞에는 반대로 가끔 우울한 생각이 들기도 했다.
삼일 후면 어린이 날.
곧이어 어머니 날이 오고.
그리고 스승의 날.
이제 여섯살인 막내 동생은 어린이 날이 무언지 알기나 하는지. 그리고 날마다 아픈 허리를 거칠해 지신 손으로 받치며 간신히 일어나셔서 장사를 나가시는 어머니께서는 곧 어머니 날이 온다는 것을 생각이나 하시는지. 그런 여유없는 빠듯한 생활을 꾸려나가는 집안 이었지만 청량리 산동네의 팔천원짜리 단칸 월세방에서는 언제나 웃음이 새어 나오는 따뜻함이 있었다.
살면서 불편했던 것은 책을 넉넉히 보지 못하는 금전적 여력과 시간적 짬이 없었을뿐 하루에 세끼 먹으며 살아가는 일에 감사를 느끼던 소년에게 주변을 둘러싼 환경 같은 것이 별다른 문제로 보이지 않았던 시절이지만 기념할 날들을 그냥 보내기엔 너무 섭섭한 마음이 들었다. 게다가 때 마침 사 보아야 할 책들도 밀려 있었는데 이달에 받은 아르바이트비로 메꾸어 넣기에는 구멍이 너무 컸다.
오월의 봄날 밤. 친구 아버지께서 돌아가셨다는 연락을 듣고 늦은 시간에 청량리에서 정릉가는 버스에 몸을 싣고 문상을 마친후 빠듯한 시간에 다시 버스를 타려하니 주머니에 돈이 하나도 없었다.이리 저리 뒤지며 회수권(버스표)이라도 찾던 소년은 피식 웃고 말았다. 학교를 걸어 다녔는데 주머니에 회수권이 있을리 만무 했으니 자신의 행동이 요행을 바라는 모습으로 비추어진 때문이다. 당시는 통행금지가 있던 시절이라 자정이 되기 전에 버스가 끊기는 것은 물론이고 사람도 돌아다니면 안되는 시간으로 접어 들었지만 무슨 일에나 자신이 있었던 소년은 교복 주머니에 양손을 푹 찌른채 아무도 없는 새벽거리를 걷기 시작했다.
모자를 쓰지는 않았지만 위 아래 교복을 입었으니 경찰이나 방범대원에게 발각이 되어도 사정 이야기를 하면 그냥 보내 주던지 아니면 파출소에서 날이 밝을때까지 기다리는 정도로 끝낼것이라 생각했다. 물론 그 시간에 돌아다니는 것은 꼼짝 없는 벌금 감이었다. 종암동을 지나 경동시장쪽으로 접어드는데 시장 부근이다 보니 순찰을 돌던 방범대원에게 그만 들키고 말았다. 대강의 사정 이야기를 들은 방범대원이 버스비를 줄테니 이슬 맞고 걸어다니지 말고 방범초소에 들어가서 눈이라도 좀 붙이고 통금이 풀리는 네시에 버스가 다니기 시작하면 집으로 가라고 따뜻한 마음 한자락을 건네 주셨다. 방범대원의 수입이라야 뻔할 터인데 마음써 주시는 아저씨의 고마운 뜻을 못 이기는척 받고 조그만 방범초소의 책상에 엎드려 슬그머니 훈기가 몰아오는 잠에 빠져 단꿈을 꾸었다.
얼핏 실눈으로 벽에 걸린 시계를 보니 네시가 넘었다. 고마운 아저씨에게 인사를 드리려 했는데 보이지 않기에 책상위에 뽀샤시한 마음을 간략히 메모하고, 어차피 얼마 남지 않은 거리이니 달려가는 버스를 뒤로 한채 다시 털레 털레 집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이렇게 이른 시간에도 경동시장과 청량리시장의 부지런한 상인들은 벌써 삶의 현장으로 모여들기 시작했고 소년은 부지런히 집을 향해 발길을 옮기는데 어떤 허름한 건물의 뒷마당에 십여명의 사람들이 줄을 서 있는 것을 보고 무심코 발길을 멈추었다.
생소한 풍경이었다. 조그마한 철제 계단을 앞에두고 사람들이 줄을 서 있는데 철제계단은 이층의 철문으로 연결이 되어 있었다.몹시 궁금하던 차에 가장 마음이 착할것 처럼 보이는 아저씨를 찾아 물어보려 했는데 결과는 제일 기운이 없어 보이는 아저씨를 골랐던 것 같다.
"아저씨,,,이게 무슨 줄이예요?"
괭한 눈과 많이 말랏던 것으로 기억되는 아저씨는 무표정한 얼굴로 이렇게 대답했다.
"피 파는거야"
순간 귀를 의심했다. 피를 팔다니.
"혈액형은요? / 돈은 많이 주나요? / 얼마나 뽑나요? / 여기 줄서 있으면 되나요?"
한꺼번에 궁금한 것을 연이어 물어보는 소년의 질문이 귀찮기도 하련만 차분하게 대답을 해 주신다.
"혈액형은 재수 좋으면 걸리는 것이고 한번에 000cc 만큼 뽑고 돈은 우리 네식구 보름은 먹구 살 쌀값은 된다."
여쭈어 보지 않은 이야기까지 덧붙여 주시는데
"나는 한달에 한번이나 두번 정도 하는데 학생은 안 하는게 좋아,,한참 커야 하니까"
학생복을 벗고 씨름꾼으로 변신해도 바로 통할것 같은 체구를 가진 소년의 귀에 뒤의 말이 들어올리가 없었다. 같이 줄을 서서 기다려 보는데 10분쯤 지났을까..철제문이 싸늘한 금속성 소리를 내며 반쯤 열렸고 고개를 내민 어떤 남자는 이렇게 외쳤다. "O형 다섯 , AB형 셋"
이 말이 군대 지휘관의 명령이나 되듯이 사람들은 줄 서잇던 순서대로 자신의 혈액형에 따라 분류되어 계단 앞에 정렬했다. "에이 오늘도 꽝이네" . 우수수 여러명의 탄식 소리가 들렸다.
그곳은 매혈을 하는 곳이었다. 당시에도 헌혈이 있었으나 그 양은 턱없이 부족했을테고 그 부족량의 일부를 이런 방식으로 조달하는 혈액으로 충당하였던 것이다. 물론 법에는 저촉이 되는 것이었으니 조용한 건물 뒤편에서 그 거래가 이루어 지는 것이었다. 나는 조금의 충격 어린 생각을 뒤로 한채 집으로 발길을 돌렸다. 자신의 피를 팔아 쉽게 돈을 챙기니 잘못된 일임에는 분명했으나 새벽별을 머리에 이고 줄을 서있던 사람들의 얼굴을 생각하면 하느님도 그 사람들을 비난하면 안 될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나마 피라도 팔수 있으니......
그날 저녁은 어묵공장의 아르바이트를 쉬었다. 새벽에 일어나려면 일찍 자야 할것이고 어쩌면 기운이 없어질지도 모르니 좀 쉬어야 할것 같은 생각이 들어서였다. 통금이 풀리자 마자 일찍 나서는 소년에게 어머니께서는 피곤한 눈을 뜨시며 물어 보셨지만 잠깐 바람이나 쐬고 온다고 말씀드린 후 급한 걸음으로 어제의 허름한 건물로 뛰어 가다시피 한달음에 내 달렸다. 풍경은 어제와 똑 같았고 다행이 줄이 길지는 않았으니 혈액형만 맞으면 될것 같았는데 이번에는 철문이 무서운 소리를 내며 덜커덩 열렸다. "O형 여섯명 , B형 네명" 순서대로 줄을 서니 간신히 네번째에 턱걸이가 되었다. 조금 두렵기는 했지만 다른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 그 사람들의 몇배는 뽑아도 끄떡 없을 몸이니 괜한 걱정은 이내 접었다.
철제문으로 들어서서 그 남자가 이끄는대로 조그만 야전용 간이 침대에 누웠다. 얼굴이 퉁퉁한 아주머니가 와서 팔뚝의 푸른 혈관에 바늘을 찌르니 붉다 못해 검은 색이 도는 피가 용솟음 친다. 피의 색이 그토록 강렬한 것임을 처음 느꼈다. 혈액을 담는 비닐주머니는 이내 팽팽해 졌고 비슷한 시간에 시작을 했지만 다른 사람들 보다 가장 먼저 끝이 났다. 바늘을 뽑은 아주머니는 문지르지 말고 꼭 누르고 오분쯤 있다가 손을 떼라고 말을 했고 조금 후 손을 떼어보니 붉은 반점이 하나 생겼다. 생명이 회오리 돌며 빠져나간 구멍은 의외로 작았다.
자리에서 일어나니 호명했던 남자가 봉투를 하나 건네주며 이야기 한다. "밖에 건물 모퉁이를 돌아가면 수도가 있으니까 물 많이 먹고 가라,,그리고 자주 하면 안된다,,꼭 해야하면 두달에 한번만 해라". 봉투에는 나의 눈높이로 보기엔 제법 많은 돈이 들어 있었다.금액과 피의 양도 정확히 기억하고 있지만 그냥 덮어 두기로 하자.
그것으로 여러가지를 해결할 수 있었다. 어린이 날에 꼬마 동생이 갖고 싶어했던 권투 글러브를 사주고 소년도 권투 글러브를 끼고는 신나게 권투를 했다. 홍수환선수로 인해 온나라가 권투의 붐이 불었고 그 뒤에 유제두 선수가 세계미들급챔피언을 따내는 바람에 권투가 최고 인기 스포츠였던 때이다. 꼬마 동생은 그 뒤에도 그 권투 글러브가 닳아서 여기 저기 구멍이 날때까지 애지중지 하며 가지고 놀았다. 여동생에게는 생전 처음 머리를 감는 샴푸 라는 것을 사 주었다 (국내 최초로 샴푸가 출시될 당시,주황색유니나샴푸)
어머니 날에는 동네 약사에게 꼼꼼히도 물어가면서 허리에 좋고 혈액순환에 좋다는 약을 고르는 정성을 보태어 사 드릴수 있었다.스승의 날에는 담임선생님이 좋아하시던 담배를 한보루 사 드렸고.
남은 돈으로 연탄도 조금 들여 놓았고 석유곤로에 기름도 채웠다. 그런 후에 피를 팔고 싶었던 진짜 이유를 해결하기 위해 서점으로 갔다. 무조건 수학정석을 샀고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 입문'과 '꿈의 해석' , 토인비의 '도전과 응전'을 아낌 없이 샀다. 중고책방을 기웃거리지 않고 반짝이는 표지의 새책을 산 후에 서점 주인에게 책의 표지가 상하지 않게 꼼꼼히 겉표지를 싸 달라는 주문을 했다.
서점을 나서는 오월의 하늘은 파랗게 빛났다. 빛나는 하늘을 보며 바람직하지 못한 짓을 한것이 마음에 조금 걸리기는 했지만 그것은 파란 하늘을 지나가는 하얀 뭉게 구름과 같이 소년의 쪽빛 인생에 어쩌다 걸치는 흰 조각구름 한점이라 생각 하기로 했다. 앞으로 살아 가면서 수없이 다가올 먹장구름을 걷어 낼수있는 힘을 길러줄 마음의 양식을 먹는다는 생각으로 햇살에 책이 바랠까 가슴에 꼬옥 안고 가파른 비탈길을 오르며 집으로 향했다.
첫댓글 5월에는 참 많은 것을 생각하게 되네요. 까망투에게도 그렇고 모두에게도 그렇고,,,잘 읽고 느끼고 가용....
올만에 오셔서 눈물 어린 글 올리고 가셧네요. 그렇게 생활을 했기에 오늘의 그대가 있지 않을까합니다. 존경하고 사랑합니다..
참 가슴 뭉클하군요.. 좋은글 잘 감상하고 갑니다. 그런 날들이 있었기에 오늘 같은 날도 있는거 아닐까요? 앞으론 좋은 날 되세요~
어려운 시절을 잘 이겨냈습니다. 앞으로는 쭉~ 행복하시기를..^^
님에 삶이 우리들에 삶이 아닐까요 풍요롭게 살거나 가난에 찌들어 살거나 우리들이 살아가는 모습인것을 우리들은 그것을 망각하고 우리들에게 비수를 꼿는 사람도 있죠. 님에 마음 지금 편안하시죠? 즐겁게 사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