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14일 결심
하느님은 아니 계신 곳 없이 어디에나 계시고, 특히 마음 안에 머무르실 수 있다. 히브리인들은 마음이 선택하고 결정하는 데라고 여겼다고 한다. 지금은 영, 영혼, 감정 등 사람의 내면을 더 상세하게 나누지만 그것들이 위장 대장처럼 눈에 보이는 기관이 아니라서 심리학자나 정신분석가가 아니면 구분하기 어렵다. 어쩌면 옛날 사람들 생각을 따라 내가 하느님과 대화하고 뭔가 선택하고 결정하는 그곳을 뭉뚱그려 마음이라고 해도 괜찮을 거 같다.
신학교 성윤리(性倫理) 시험 문제지에 사람 모습을 그려주고 성감대를 표시하라고 했다. 정답은 머리였다. 이마가 아니라 뇌다. 뇌가 아니라 마음이다. 예수님 말씀 그대로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음욕을 품고 여자를 바라보는 자는 누구나 이미 마음으로 그 여자와 간음한 것이다(마태 5,28).” 하느님을 속일 수 없고, 하느님 앞에서 감출 수 없다. 그분은 마음 안에, 내가 선택하고 결정하는 바로 그곳에 같이 계신다.
결심하지 않는 영혼은 성장하지 못한다. 기도와 묵상, 공부를 많이 하고, 성체를 매일 모셔도 결심하고 실천하지 않으면 늘 그 모양 그대로다. 그런데 성숙하고 거룩해지기를 바라는 이들의 고민은 똑같은 결심을 수없이 해왔다는 데에 있다. 결심하려는 그 순간에 ‘해봐야 너는 안 돼. 저번에도 너는 똑같은 결심을 하느님께 말씀드렸어. 너는 거짓말을 하는 거야.’하는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그 마음을 조금 더 들여다보면 그 녀석 말대로 그런 결심대로 하고 싶지 않은 바람이 있는 거 같다. 어떻게 해야 할까?
답은 ‘그래도 결심한다.’이다. 예수님 말씀대로 눈을 빼고 팔다리를 잘라낼 수는 없지만 그 대신 눈을 감고 귀를 막고 발걸음을 다른 데로 돌린다. 이것이 유혹에 빠지지 않는 유일한 방법이다. 그 녀석이 결심해 봐야 안 된다는 불편한 진실을 소곤거려도 있는 힘을 다해 창피함을 무릅쓰고 똑같은 결심을 또 한다. 그리고 하느님은 나의 이런 결심을 처음 바치는 제물로 받아들이신다고 믿는다. 그전 것들은 그분의 기억 속에서 사라졌다고 믿는다. 하느님은 용서하시는 분이고, 인류의 죄를 없애는 아드님의 수난과 죽음은 그때 딱 한 번이 아니라 오늘도 내일도 그리고 세상 끝나는 날까지 미사 안에서 계속 이어진다. 그렇게 하느님은 나를 조금씩 조금씩 차지해 가신다.
예수님, 제 안에 밀과 가라지가 함께 자랍니다. 사람들은 치료한다고 가라지만 보게 하지만 주님은 그냥 내버려 두라고 하셨습니다. 나중에 추수 때에 손수 처리해 주신다는 주님 말씀을 믿습니다(마태 13,30).
영원한 도움의 성모님, 선택하고 결정할 때 옆에서 도와주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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