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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완장군 묘에서 영녕릉에 들렀다가 최시형선생 묘로 향했습니다. 최시형선생 묘는 문화재로 지정되지는 않았지만 청운당이 가 보고 싶어했던 묘지입니다. 여주군에서 발간된 지도를 보고 물어 물어 찾아갔습니다. 도로에서 묘역 입구까지 계곡을 따라서 한참을 올라 갔습니다. 더 이상 차가 올라갈 수 없는 곳까지 가서 차를 세우고도 한참, 등산을 할 정도였습니다. 묘역 입구를 찾기 어렵고, 찾았어도 입구에서 묘역까지도 멀고, 이렇게 높은 곳에 있는 줄은 몰랐으며, 너무 힘들다고 청운당도 혀를 내 두를 정도였습니다. 무슨 산인지는 몰라도 8부 능선까지 올라서야 최시형 선생의 묘가 있었습니다. 위 사진을 보아도 얼마나 높은 곳에 있는지 짐작이 가실 겁니다. 묘역은 토담에 봉분에는 호석을 두르고, 봉분 앞에는 상석과 향로석 그리고 촛대석이 있으며, 우측에는 묘비가 서 있습니다. 높은 곳이라 그런지 전망은 좋더군요. |
▲ 해월 최시형선생 묘소 전경 |
최시형(崔時亨, 1827~1898) 선생은 조선 말 동학의 제2대 교주로서 초명은 경상(慶翔). 호는 해월(海月). 본관은 경주(慶州)이다. 일찍이 고아가 되어 조지서에서 일하다가 철종 12년(1861)에 동학에 입교, 1863년 최제우의 후임으로 제2대 교주가 되었다. 동학이 탄압받던 시기에 관헌의 눈을 피해 포교에 힘썼고 동경대전, 용담유사 등의 동학 경전을 발간했다. 동학의 육임제 조직을 확립하고 전국에 육임소를 설치하는 한편 고종 30년(1893) 이후 교조신원운동에 전력했다. 선생은 당시 교조신원, 부패관리의 처단, 척왜양창의 기치 아래 추진되던 시위운동에 일체의 폭력사용을 금하도록 시달했다. 그러나 고종 31년(1894) 전봉준이 동학농민운동을 일으키자 이에 호응했고, 동학군의 재기포 때 북접접주들에게 총궐기를 명령, 10여만의 병력을 인솔하여 남접군에 합세했다. 동학농민군이 관군, 일본군의 혼성군에게 연패하자 영동, 청주로 피신했다가 1898년 원주에서 송경인에게 피체 서울로 압송되어 6월 2일 사형되었다. 6월 5일 이종훈 등이 광화문밖에 가매장된 시신을 수습 밤길을 달려와 이곳에 장사지냈다. 1907년 고종의 특지로 신원되었다. 묘의 주위는 호석을 둘렀으며, 묘 앞 중앙에는 대리석 상석, 향로석, 촛대석을 마련했고, 우측에는 옥개석과 장방형 비좌를 갖춘 대리석 묘비가 서 있다. 묘비는 1980년 3월 21일 해월신사 묘비건립위원회에서 세운 것으로 2.12m, 폭 76.4cm, 두께 47cm 규모이다. - 최시형선생 묘 앞의 안내판 내용 - |
최시형선생 묘 위치도 |
소재지 : 경기 여주군 금사면 주록리 산 96-19 빨간 압정이 있는 산 골짜기의 8부 능선 쯤에 최시형 선생의 묘가 있습니다. 어떻게 찾아 갔는지 설명은 못합니다. 일단은 주록리로 접근해야 합니다. 지도상의 상품초등학교란 곳에서 산쪽으로 계속해서 들어가야 합니다. 안산말이란 곳 까지는 차량 진입이 가능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