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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망에 따른 징벌
민 14:26-45
26 여호와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27 나를 원망하는 이 악한 회중에게 내가 어느 때까지 참으랴 이스라엘 자손이 나를 향하여 원망하는 바 그 원망하는 말을 내가 들었노라
28 그들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내 삶을 두고 맹세하노라 너희 말이 내 귀에 들린 대로 내가 너희에게 행하리니
29 너희 시체가 이 광야에 엎드러질 것이라 너희 중에서 이십 세 이상으로서 계수된 자 곧 나를 원망한 자 전부가
30 여분네의 아들 갈렙과 눈의 아들 여호수아 외에는 내가 맹세하여 너희에게 살게 하리라 한 땅에 결단코 들어가지 못하리라
31 너희가 사로잡히겠다고 말하던 너희의 유아들은 내가 인도하여 들이리니 그들은 너희가 싫어하던 땅을 보려니와
32 너희의 시체는 이 광야에 엎드러질 것이요
33 너희의 자녀들은 너희 반역한 죄를 지고 너희의 시체가 광야에서 소멸되기까지 사십 년을 광야에서 방황하는 자가 되리라
34 너희는 그 땅을 정탐한 날 수인 사십 일의 하루를 일 년으로 쳐서 그 사십 년간 너희의 죄악을 담당할지니 너희는 그제서야 내가 싫어하면 어떻게 되는지를 알리라 하셨다 하라
35 나 여호와가 말하였거니와 모여 나를 거역하는 이 악한 온 회중에게 내가 반드시 이같이 행하리니 그들이 이 광야에서 소멸되어 거기서 죽으리라
36 모세의 보냄을 받고 땅을 정탐하고 돌아와서 그 땅을 악평하여 온 회중이 모세를 원망하게 한 사람
37 곧 그 땅에 대하여 악평한 자들은 여호와 앞에서 재앙으로 죽었고
38 그 땅을 정탐하러 갔던 사람들 중에서 오직 눈의 아들 여호수아와 여분네의 아들 갈렙은 생존하니라
39 모세가 이 말로 이스라엘 모든 자손에게 알리매 백성이 크게 슬퍼하여
40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산 꼭대기로 올라가며 이르되 보소서 우리가 여기 있나이다 우리가 여호와께서 허락하신 곳으로 올라가리니 우리가 범죄하였음이니이다
41 모세가 이르되 너희가 어찌하여 이제 여호와의 명령을 범하느냐 이 일이 형통하지 못하리라
42 여호와께서 너희 중에 계시지 아니하니 올라가지 말라 너희의 대적 앞에서 패할까 하노라
43 아말렉인과 가나안인이 너희 앞에 있으니 너희가 그 칼에 망하리라 너희가 여호와를 배반하였으니 여호와께서 너희와 함께 하지 아니하시리라 하나
44 그들이 그래도 산 꼭대기로 올라갔고 여호와의 언약궤와 모세는 진영을 떠나지 아니하였더라
45 아말렉인과 산간지대에 거주하는 가나안인이 내려와 그들을 무찌르고 호르마까지 이르렀더라
민 14:26-45 / [광야에서 사십 년을 헤매다] 여호와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이르셨다. 27) `도대체 내가 언제까지 참아야하겠느냐? 이 못된 무리가 이다지도 나에게 반항하면서 불평만 늘어놓지 않느냐? 28) 무리에게 가서 내가 이렇게 말하더라고 전하여라. `너희에게 분명히 맹세하노라. 나 여호와가 살아있는 한 너희가 말한 그대로 이루어 주리라. 29) 너희가 원한 대로 이 광야에 너희 시체가 즐비하게 널리게 되리라. 너희 가운데 20세 이상 되어 병적부에 오른 사람으로서 불평을 늘어놓은 자는 한 사람도 그 땅으로 들어가지 못하리라. 30) 내가 너희에게 주겠다고 맹세하였던 그 땅을 밟아 보지도 못하리라. 그러나 여분네의 아들 갈렙과 눈의 아들 여호수아만은 그 땅으로 들어갈 것이다. 31) 너희가 포로로 사로잡히겠다고 걱정하던 너희 자식들은 너희가 그렇게도 가기 싫어하던 그 땅으로 들어가 자리잡고 살 것이다. 32) 하지만 너희 시체는 이 광야에 뒹굴 것이다. 33) 너희 자식들은 광야에서 40년을 헤매다 그 땅으로 들어갈 것이다. 너희가 내 말을 믿지 않고 따르지 않은 까닭에 너희가 한 사람도 남지 않고 모조리 죽을 때까지 너희 자식들이 너희의 허물을 대신 짊어지는 것이다. 34) 너희가 그 땅을 40일 동안 살피고 돌아왔으니 하루를 일년씩 계산하여 40년 동안 너희는 광야에서 방황하며 지내야 할 것이다. 너희가 내게 대들고 나를 업신여긴 죄의 대가이다. 너희 허물은 당연히 너희가 짊어져야 한다. 35) 나 여호와의 말이다. 함께 모여 나를 거스르고 내게 대들었던 이 못된 무리에게 나는 내가 말한 것을 그대로 다 행할 것이다. 너희는 이곳 광야에서 하나도 남지 않고 죽을 것이다.' 36-37) 모세가 그 땅의 형편이 어떠한지 살펴보라고 보냈던 자들 중에서 돌아와서 그 땅의 실제 형편보다 훨씬 좋지 않게 말하며 백성들을 선동하여 모세를 괴롭혔던 자들은 여호와께서 내리신 재앙으로 모조리 죽었다. 38) 그러나 그 땅을 살피고 돌아온 사람 가운데에서 눈의 아들 여호수아와 여분네의 아들 갈렙만은 죽지 않았다. 39) [백성이 그 땅을 쳐들어가다] 모세가 여호와께서 하신 말씀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전하자 온 무리가 통곡하였다. 40) 다음날 아침 일찍 일어난 무리가 산악 지방으로 올라가면서 이렇게 말하였다. `우리가 여호와의 말씀을 믿지 못하고 지금까지 머뭇거리기만 하였구나! 자, 어서 올라가자. 쳐들어가자. 여호와께서 가라고 말씀하신 곳으로 쳐들어가자.' 41) 그러나 모세는 한사코 만류하였다. `이게 무슨 짓들이냐? 너희들이 여호와의 명령을 또다시 거스를 셈이냐? 쳐들어가 봐야 성공하지 못할 게 뻔하다. 42) 올라가지 말아라. 여호와께서 너희와 함께 하시지 않으니 적에게 패할 것이 분명하다. 43) 아말렉 사람과 가나안 사람이 너희 앞에 저렇게 버티고 서 있지 않느냐? 너희가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않고 그분께 등을 돌렸으니 저들의 칼에 쓰러질 것이다.' 44) 모세가 그렇게 말렸는데도 그들은 산악 지방으로 쳐들어갔다. 그러나 여호와의 계약궤와 모세는 진영을 떠나지 않았다. 45) 산악 지방에 살고 있는 아말렉 사람과 가나안 사람들은 이스라엘 백성이 쳐들어오는 것을 보고 급히 내려와 그들을 크게 무찔렀다. 가나안 사람과 아말렉 사람들은 호르마까지 쫓아 내려와 그들을 공격하였다.
불신앙을 그대로 가지고서는 결코 하나님의 유업에 참여할 수 없습니다. 본문은 계속하여 하나님을 원망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 대한 하나님의 징벌입니다.
내 귀에 들린대로 내가 너희에게 행하리니(26-38) 하나님을 원망하는 백성들의 원성은 줄어들지 않고 점점 더 고조되었습니다. ‘차라리 광야에서 죽었으면 좋겠다’라는 그들의 바람대로(민 14:2) 그들에게 행하시겠다고 하였습니다. 이스라엘 사회에서 성인은 20세 이상입니다. 그들은 자신의 말과 행위에 대하여 책임을 져야 하는 존재이기에 그들은 모두 그 원망의 말에 대한 책임으로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고 40년 동안 광야에서 방황하며 죽음의 형벌을 감당해야 했습니다. 20세 이상으로는 여호수아와 갈렙 외에는 가나안 땅에 결코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애굽에서 가나안까지는 3가지 루트가 있습니다. 해안길, 수르길, 세밀산길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가데스바네아로 우회시키셨습니다. 시내 산에서 11개월가량 머물렀으니 7개월이 걸린 것입니다. 그런데 앞으로 40년이 걸릴 것입니다. 순종하면 1년 6개월, 불순종하면 40년입니다. 아울러 불신앙적인 보고를 해서 온 회중으로 모세를 원망하게 했던 10 정탐꾼들은 곧 하나님 앞에서 재앙으로 죽었지만 여호수아와 갈렙은 생존하였습니다. 악인들로부터 의인들을 분류하셨습니다. 이처럼 의인은 하나님의 보상을 받게 됩니다(딤후 4:8).
여호와께서 너희 중에 계시지 아니하니(39-45)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홍해 길을 따라 광야로 들어가라고 하셨지만(민 14:25), 그들은 산꼭대기로 올라갔습니다. 이는 불신앙의 극치이며, 하나님의 말씀을 경멸하는 행위였습니다. 이곳은 가데스바네아 근처 호르산으로 아말렉인이 살고 있었습니다. 모든 백성이 산꼭대기로 올라간 것이 아닙니다. 모세와 모든 레위 사람과 하나님을 진정으로 경외하는 일부 백성들은 언약궤가 있는 산 아래에 있었습니다. 산으로 올라간 그들은 아말렉과의 싸움에서 참패를 당하였습니다. 출애굽 후 첫 패배입니다. 그들의 패배는 하나님께 대한 불순종의 대가였습니다(신 11:28; 삼상 12:15).
적용: 하나님의 참으심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모든 말에는 책임이 따릅니다. 우리는 함부로 말을 뱉는 사람들이 되어서는 안되겠습니다. 악은 자신과 타인을 상하게 합니다. 당신의 언어생활은 어떻습니까?
올바른 그리스도인의 신앙생활은 성령과 함께 호흡하며 살아가는 생활입니다. 성령 안에서 살 때 우리는 진정 살아있는 신앙인이 됩니다. 늘 감사와 마음 속으로부터 찬미가 흘러나오고 전도의 불길과 기도에 열심있는 생활을 하게 됩니다. 성령에 무관심하여 구하지 않는 사람은 신앙의 근본을 이해하지 못한 사람입니다. 올바른 그리스도인은 성령을 인정하고 간절히 원하고 늘 의지하는 사람입니다.
< 설 교 >
말씀의 힘으로 산다
민 14:36-38 / 이정익 목사
오늘은 경제적으로 참 어려운 시기입니다. 그래서 모두들 불안해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내년에는 경제가 더 어려울 것이라는 말에 모두 두려움이 배로 느껴지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이런 때 덩달아 불안해하지 말고 자세를 가다듬어야 합니다. IMF때 온 나라가 나라 망하는 줄 알고 모두 앞이 캄캄해서 난리를 떨었지만 2년 만에 거뜬히 그 위기를 극복하였습니다. 오늘의 고난도 곧 극복되어질 것입니다. 우리는 그 소망을 바라봅니다. 그리스도인은 이런 때에 값을 발휘해야 합니다. 위기가 곧 기회라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일찍이 일제의 탄압을 받았고 6•25의 불행한 역사를 거쳐 왔습니다. 그 때는 참 불행한 역사였지만 어찌 보면 그 불행들이 오늘 우리나라를 만들었는지도 모릅니다. 그 모진 훈련들이 오늘 강력한 체질을 만든 것입니다.
윌리엄 번스타인은 그의 저서 “부의 탄생“에서 사람이 살아가면서 얻은 엄청난 충격들이나 실패의 경험은 큰 이익을 준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예들 들었습니다. 세계 1,2차 대전 때 전쟁을 겪은 나라들 중 일본, 독일, 한국은 전쟁당시에는 다 망가져 회복불능상태까지 되었지만 그런데 전후 유독 이 나라들만 고도성장을 누린 국가들이 되었다고 지적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때 전쟁이 없었던 나라 중 오늘 가장 낙후된 나라는 영국이라고 지적하였습니다. 오늘 이 어려움은 우리나라가 더 다져지게 되는 계기가 되고 도약의 기회가 될 것입니다. 모두 두려워한다고 덩달아 두려워하고 움츠러들면 안 됩니다. 오늘처럼 미래가 암담할 때에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12명의 정탐꾼 중 10명처럼 처신해서는 안 됩니다. 이런 때에는 갈렙과 여호수아와 같은 역할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 10명은 참 무책임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가나안은 하나님으로부터 언약으로 주어진 땅이며 하나님이 거저 주신 땅입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그 땅을 돌아보고 와서 그 땅을 악평했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언약을 부정한 것이고 가나안을 부정하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그리고 그 백성들에게 소망을 빼앗고 밤새도록 통곡하게 만들었습니다. 죄는 남의 물건을 훔친 것만 죄가 아닙니다. 사람들의 용기를 빼앗고 낙심하게 하고 절망하게 하는 것도 죄입니다. 믿음을 상실하게 하고 소망을 빼앗는 것도 죄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이 불평과 불만과 악평하는 자세를 버려야 합니다. 이것은 전염됩니다. 빨리 무섭게 파괴력을 가지고 전염시킵니다. 그래서 온 백성들이 그들의 보고를 받고 밤새도록 통곡하였다고 했습니다. 그들이 가지고 있던 가나안에 대한 소망과 기대감을 순식간에 빼앗아 버렸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그 시대에 행복을 말하고 언약을 말하고 희망을 전염시켜야 합니다. 희망도 전염됩니다.
미국 하버드대 의대 니콜라스 크리스타키스 교수는 영국 의학저널에 기고한 논문에서 “행복은 일반적인 통념보다 훨씬 전염성이 강하다”고 말 했습니다. 1983년부터 2003년까지 20년간 미국인(메사츄세츠) 4,739명을 대상으로 행복감이 어떻게 이웃과 공유되는지에 대해 연구하였습니다. 연구결과 옆집이 행복할 때 가까이 사는 나에게 전염되는 확률이 34%로 가장 크게 나타났다고 했습니다. 이웃을 잘 두어야 합니다. 그리고 가까운 친구가 행복할 때 42%로 최고로 행복을 전염시킨다고 했습니다. 그때의 행복감은 갑자기 5천 달러가 생긴 것만큼 행복이 전염된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행복감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그 사회의 중심에서 살아가게 되면 그 주위의 사람들 모두에게 행복감을 전염시킨다고 했습니다.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은 그런 역할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는 일은 반드시 돈을 주는 것만이 아닙니다. 사람들을 행복하게 하고 용기를 주고 격려하고 희망을 주는 것도 아주 큰 도움을 주는 일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이나 지도자들은 세상에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고 행복을 주고 용기를 주는 역할을 해야 합니다.
그런 점에서 정탐꾼 12명중에서 10명은 그 시대에 지도자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믿음도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오히려 백성들에게 꿈과 용기와 희망을 빼앗았습니다. 그 결과 백성들이 꿈에도 그리던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고 광야에서 죽게 만들었습니다. 결국 자신들과 가족들도 그 밤에 낙심하여 통곡하였던 모든 사람들도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고 그 땅에서 죽고 말았습니다. 그 결과로 40년 동안 광야생활이 연장되고 재훈련을 하면서 피나는 고난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면 그 12명중에서도 갈렙과 여호수아 두 사람은 가나안에 들어갔다고 했습니다. 그들은 유일하게 그날 보고할 때 가나안은 하나님이 약속하신 그대로 젓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고 소개한 사람들입니다. 본문을 보면 “모세의 보냄을 받고 땅을 정탐하고 돌아와서 그 땅을 악평하여 온 회중이 모세를 원망하게 한 사람 곧 그 땅에 대하여 악평한 자들은 여호와 앞에서 재앙으로 죽었고 그 땅을 정탐하러 갔던 사람들 중에서 오직 눈의 아들 여호수아와 여분네의 아들 갈렙은 생존하니라”고 했습니다. 이 두 사람에게는 몇 가지 남다른 태도가 있었습니다.
청개구리 믿음
민 14:36-46 / 윤영택 목사
구약에 세번째로 나오는 책 민수기는 말 그대로 인구조사를 제목으로 삼은 책입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명을 따라 이스라엘 백성의 인구를 두 차례 조사했습니다. 첫번째는 출애굽한 후 2년이 되던 해 시내 광야에서 실시했고(1-4장), 두번째는 그후로 약 40년 세월이 지나고 광야에서 출생한 신세대들이 모압 평지에 도착하여 가나안 땅을 눈앞에 두었을 때였습니다(26장). 첫번째 조사에서 20세 이상 싸움에 나갈 수 있는 남자들의 숫자가 총 육십만삼천오백오십 (603,550) 명이었습니다. 레위 지파는 따로 계산했는데 1개월 이상 된 레위 지파 남자의 숫자는 모두 이만이천(22,000) 명이었습니다.
40년이 지난 후 2차 인구조사 결과는 무엇이었습니까? 20세 이상으로 전쟁에 나갈 수 있는 남자들의 숫자가 총 육십만일천칠백삼십(601,730)명이었고 레위 지파에서 일개월 이상 된 남자의 숫자는 모두 이만삼천명(23,000)명이었습니다. 그사이 인구가 얼마나 늘었습니까 40년을 한 세대로 친다고 할 때 광야의 이스라엘 인구는 한 세대동안 놀랍게도1,820명이 감소되었습니다. 그들이 애굽에서 고된 노예생활을 할 때는 자손의 번성이 왕성하여 애굽 본토인들이 겁을 내며 강제로 인구억제 정책을 쓸 정도였는데 이번에는 어떻게 이런 결과가 나왔습니까?
출애굽기와 레위기를 읽으며 그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서 어떤 태도로 살아왔고 그에 따른 엄한 징벌이 어떤 식으로 내려졌는지 볼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민수기를 읽으면 40여년의 광야생활 동안 하나님께 대한 그 백성들의 불신과 배신의 행동들이 보다 자세하게 나옵니다. 광야 40년의 훈련기간 동안 수많은 백성들이 하나님께 대항하고 불신앙으로 고집하다 전쟁이나 전염병 혹은 사형집행과 천재지변 등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레위 지파의 인구도 겨우 1천명이 증가된 것을 보면 제사장 가문을 비롯하여 성막에서 수종을 들던 레위의 후손들 역시 하나님의 징벌로부터 제외된 것은 아니었다는 뜻입니다. 이스라엘을 거룩한 백성으로 삼으신 하나님은 그들의 범죄에 대하여 죽음으로 책임을 물으심으로 40년 광야생활 중에 엄하게 훈련시키셨습니다. 민수기에 나오는 두번째 인구조사 결과는 이스라엘이 겪었던 광야의 삶이 얼마나 혹독한 훈련기간이었는지 짐작하게 합니다.
그리고 민수기의 이야기는 요단강 동편의 땅들을 정복한 신세대들에게 요단강 건너편의 가나안 땅을 나눠주시기 위해 대표자들을 지명하시는 내용으로 마무리됩니다. 민수기 마지막 부분에는 요단강 건너편 여리고 성이 바라보이는 모압평지에서 대기하며 하나님의 출전 명령을 기다리는 광야 신세대들의 패기 넘치는 모습이 보입니다. 민수기는 이렇게 40년간 광야의 유랑생활을 간략하게 기록한 책이며 오늘 읽은 본문은 그들이 광야를 40년간 유리방황해야만 했던 결정적인 계기가 된 사건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가나안을 정탐하고 돌아온 12명의 대표자들은 그 땅에서 40일간 눈으로 보고 확인한 것을 보고했습니다. 가나안에서 가져온 과일들과 식물들을 증거로 보이며 그 땅이 아름답고 기름진 것은 사실이지만 그 땅은 사람을 삼키는 땅이라고 했습니다. 거기 살고 있는 가나안 사람들은 우리보다 몸도 크고 키도 큰 대장부들이며 그 성읍들은 요새처럼 단단하여 우리 힘으로 정복하기는 불가능한 곳이라 했습니다. 여호수아와 갈렙을 제외한 열명의 정탐군들은 이렇게 한 목소리로 부정적인 발언만 잔뜩 늘어놓았습니다.
이 말을 들은 백성들이 낙심하여 밤새 울고불고 난리를 치며 모세와 아론을 원망합니다. ‘우리가 애굽에서 죽었거나 이 광야에서 죽었으면 차라리 좋았을 것을 어찌하여 하나님은 우리를 가나안으로 인도하여 그들의 칼에 망하게 하려는가? 우리 처자자 사로잡히리니 애굽으로 돌아가는 것이 낫겠다. 우리를 인도할 지도자를 새로 세워 애굽으로 돌아가자’하며 아우성쳤습니다. 모세와 아론은 백성들의 부르짖음을 듣고 그들 앞에 엎드렸습니다. 백성들에게 항복했다는 말이 아니라 대책이 없는 이 상황에 하나님께서 이 일을 처리하시길 바라며 땅에 엎드렸다는 말입니다.
그때 여호수아와 갈렙이 ‘두려워 말고 그땅을 향해 올라가자. 하나님이 우리를 기뻐하시면 그들은 우리의 밥이다’외쳤습니다. 그러나 소수의 목소리가 다수의 아우성에 묻혀버렸고 절망에 빠진 백성들은 분노하여 여호수아와 갈렙을 돌로 치려고 달려드는 폭동이 일어나고 말았습니다. 가나안의 거대한 힘이라는 현실 앞에 기가 죽고 마음이 쫄아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을 거절하는 허약한 믿음을 드러냈습니다. 여호수아와 갈렙이 돌에 맞아 죽게될 긴박한 순간에 하나님의 영광이 성막에 나타났고 백성들의 광기는 중단이 되었습니다.
불신앙으로 똘똘 뭉친 그 백성에게 실망하신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십니다. ‘이 백성이 어느 때까지 나를 멸시하겠느냐? 어느 때까지 나를 믿지 아니하겠느냐? 불순종하는 이 백성들을 모두 전염병으로 멸하고 너 모세를 통해 이 사람들보다 강한 나라를 이루게 하겠다’ 상황의 급박함을 깨달은 모세가 즉시 백성들을 위한 중재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애굽에서부터 지금까지 이 백성의 죄를 사하신 것처럼 이번에도 용서하시길 간절히 구할 때 하나님은 그 백성을 재앙으로 당장 멸하는 것은 보류하셨지만 앞으로 되어질 일을 알리셨습니다.
‘그들이 광야에서 나를 열 번이나 시험하고 내 목소리를 청종치 아니하였으니 이 백성들은 조상들에게 약속한 그 땅을 결코 보지 못할 것이며 나를 멸시한 사람은 한 사람도 그 땅을 보지 못하리라’ 하나님을 시험했다는 말은 어려운 일 만날 때마다 하나님이 계신가 아니 계신가? 의심하며 만일 하나님이 계시다면 어찌 우리를 이런 상황에 몰아넣으시는가 하며 불평한 것을 말합니다. 애굽에 내리신 열 가지 재앙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고 홍해를 육지처럼 건넜으며 매일 아침마다 하늘의 만나를 먹고 생존하는 그들이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고 시험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갈렙의 순종과 믿음을 보시고 그를 칭찬하시며 갈렙을 그 땅으로 들이시리니 그의 후손들의 그 땅을 차지할 것이라 하셨습니다. 그리고 백성에게는 아멜렉과 가나안 사람들이 골짜기에 살고 있으니 그곳으로 가지 말라. 너희는 내일 길을 돌이켜 홍해길을 따라 광야로 나가라 하셨습니다. 가나안 땅을 바로 눈앞에 둔 지점에서 하나님은 그 백성을 다시 광야로 몰아내십니다.
모세와 아론에게 또 말씀하기를 ‘불순종한 이 백성들이 나에게 원망하는 소리를 들었으니 그들이 입으로 불평한 그대로 그들에게 시행하겠다. 출애굽할 때 20세 이상의 사람들, 그 중에 나를 원망했던 사람들은 아무도 그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그 시체가 광야에 엎드러질 것이며 오직 여호수아와 갈렙만 들어간다. 너희가 걱정했던 어린 아이들은 너희 걱정처럼 사로잡히지 않을 것이며 내가 그들을 그땅으로 인도하여 들일 것이다. 그러나 너희 자녀들은 너희의 패역한 죄를 지고 광야에서 40년간 방황하게 될 것이다. 너희가 정탐한 40일을 40년으로 환산할 것이니 너희가 너희의 죄를 지고 광야를 방황하면서 내가 너희를 싫어버림이 무엇인지 알게 될 것이다. 모이면 나를 원망하고 거역하는 너희 무리들을 이같이 벌하리니 너희가 광야에서 소멸될 것이다’하십니다.
여호수아와 갈렙을 제외한 정탐군 열 사람은 그날 하나님의 재앙으로 죽임을 당했으며 모세는 하나님이 하신 말씀을 백성에게 전했습니다. 백성들은 크게 슬퍼하였고 그 다음날 이른 아침 가나안 사람들이 살고 있는 산으로 올라갔습니다. 하나님께서 어제 분명히 ‘너희 길을 돌이켜 홍해 길을 통해 광야로 나가라’하셨는데 그들은 그 명령과 반대로 산으로 올라가고 있습니다. 가나안 족속들이 살고 있는 산으로 올라가라 하실 때는 땅을 치고 통곡하며 애굽으로 다시 돌아가자 난리를 치던 사람들이 그럼 광야로 다시 나가라고 하시니 하룻밤 사이에 마음이 변하여 이제 산으로 올라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거꾸로 따르는 이 사람들의 행동이 꼭 청개구리 같습니다.
모세가 그들을 말립니다. ‘너희가 어찌하여 여호와의 명령을 범하느냐? 이 일이 형통치 못하리라 여호와께서 너희 중에 계시지 아니하니 올라가지 말라. 너희가 적들에게 패할 것이다. 너희가 여호와 하나님을 배반하였으니 너희와 함께 하지 않으실 것이며 너희는 아말렉과 가나안 사람들의 칼에 망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백성들이 고집을 부리며 산꼭대기로 올라갑니다. 두려워 말고 믿고 가라고 할 때 못간다고 울고불고 난리를 친 것도 불순종이지만 가지 말라는데 고집부리며 가겠다고 하는 것 역시 명령에 대한 불순종입니다.
이스라엘은 일전에 르비딤에서 아말렉을 물리친 경험이 있습니다(출17장). 그때는 모세가 하루 종일 팔을 들고 하나님께 기도했으며 아론과 훌이 곁에서 모세의 팔이 내려오지 않도록 붙들고 협력할 때 주신 하나님의 승리였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여호와의 언약궤도 모세도 캠프를 떠나지 않았으니 하나님께서 그들의 행동을 인정하지 않으신다는 뜻이었습니다. 그런데도 백성들은 끝내 산으로 올라갔고 아말렉과 가나안 원주민이 호르마까지 내려와 이스라엘을 쳤습니다. 믿음으로 나서야 할 때는 거절하고 의심하며 잠잠하라 할 때는 쓸데없이 나서서 일을 저지른 이스라엘은 결국 아멜렉과 가나안 사람들에게 참패하였고 그 일로 인해 이스라엘은 가나안 원주민들에게 얕잡아 보이는 빌미를
제공했습니다.
잘못을 깨닫고 회개한 사람이라면 자숙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의 명령을 기다리며 순종해야 옳습니다. 일전의 실패를 만회하려는 듯 갑자기 분에 넘치는 열심을 내고 하지 말라고 말리는데도 불구하고 고집을 부리며 기여코 자기 뜻을 강행하는 것은 또다른 불순종의 모습 아닙니까? 마치 청개구리처럼 거꾸로 행동하는 신앙입니다. 정말 순종으로 믿음을 보여야 할 때는 현실 상황에 눈이 멀어 하나님의 능력을 믿지 못하고 울고불고 난리를 치더니 가나안 땅에 못 들어가고 광야에서 40년간 방황하다 모두 사라진다는 말을 듣자 겁이 덜컥 났습니다.
약속의 땅을 정탐하고 돌아와 악평했던 열 명의 정탐군들이 하나님의 진노로 죽임을 당하는 것을 목격한 백성들은 자기들도 같은 벌을 당할까 심히 두려웠습니다. 하나님께서 기대하신 좋은 믿음은 불가능해 보이고 불합리하게 보이는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이니 그대로 이루어지리이다 하고 움직이는 자발적인 순종이지 죽을까 두렵거나 선물을 잃을까 아쉬워 마지 못해 움직이는 것이 아닙니다. 하라고 할 때는 속을 썩여가며 하지 않다가 이제 하지 말라고 하니 또 거꾸로 하겠다고 청개구리처럼 어깃장을 놓으니 어찌 하나님이 기뻐하시며 가나안으로 들여보내실 믿음이라 하겠습니까?
가지 말라는 데도 기여코 산으로 올라간 사람들은 하나님의 처분에 맡기고 그 뜻에 따르겠다는 회개와 자숙의 태도가 아니라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고 죽어야 한다는 것이 억울하고 아쉬웠기 때문에 제힘으로 만회해보려고 뛰쳐나간 것 같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보세요. 우리가 여기 있습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신 곳으로 올라가겠습니다. 그래요. 맞습니다. 어제는 우리가 범죄했습니다. 이제 알았으니 가면 될 것 아닙니까?’ 이런 식으로 대든 것은 아닐까요?
이스라엘이 자기들 힘으로 애굽을 나왔고 홍해를 건넜습니까? 자기들의 노력으로 양식을 공급했고 아말렉과 싸워 이겼습니까? 가라는 곳까지 가고 서라는 곳에 멈추며 하나님의 명령을 기다리기만 하면 되는 백성들입니다. 그런데 자기와 상대방의 힘을 비교해보고 안되겠다 싶자 두 다리 쭉뻗고 주저앉아 통곡했으니 그들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은 어디로 가셨다는 말입니까? 자기들이 하나님을 마음에 두지 않았지 하나님께서 그들을 버리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하나님께서 그들을 싫어버리신다고 하니 그제서야 아쉬워 매달리며 ‘우리가 할테니 좀 봐달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가지 않겠다고 하시는데도 자기들 열심이 뻗혀 산꼭대기로 올라갑니다. 자기들이 가면 하나님도 어쩔 수 없이 따라오실 것이라는 생각이었을까요? 하나님이 주인이신지 자기들이 주인인지 분간이 가지 않습니다. 불기둥과 구름기둥으로 길을 인도하고 하나님의 언약궤를 맨 제사장들이 앞장섰지 자기들이 앞장 서서 하나님의 언약궤를 이끌고 가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언약궤를 메고 블레셋과의 전투에 나갔다가 전사하고 언약궤마저 적에게 빼앗긴 엘리의 두 아들 제사장 홉니와 비느하스를 아시지요? (삼상 4장) 하나님의 영광이 떠나버린 ‘이가봇’의 비참함이 오늘
본문에 나온 이 백성에게서도 보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떠나버린 사람, 하나님의 영광이 떠나버린 교회는 껍데기만 남은 허무한 존재입니다. 하나님은 참 회개를 바라시지 자기 허물을 가리우려고 열심내는 것을 원하지 않으십니다.
이런 황당한 일이 오늘날도 벌어지고 있습니다. 한국 교회가 지금 이런 상황에 빠진 것은 아닐까 하는 두려움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떠나버리셨음에도 불구하고 껍데기만 남아 허세를 부리는 기독인들과 교회가 세상으로부터 지탄을 받고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합니다. 하나님의 뜻은 아랑곳하지 않고 자기 영광과 이름을 나타내려고 무리수를 두는 모습이 빤히 보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입으로는 언제나 예수 이름을 앞세우고 하나님의 영광 운운합니다. 그러면 세상이 나의 뜻을 알아주고 하나님도 나의 열심과 성의를 봐서라도 도와주시겠지 한다면 그건 믿음이 아닙니다.
바른 신앙은 내 주장과 내 뜻을 앞세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먼저 헤아리는 신앙입니다.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하신 주님의 말씀을 바로 알고 따라야 합니다. 먼저 구할 것이 있고, 하늘에서 먼저 이루어진 하나님의 뜻이 우리 가운데서도 이루어지기를 구하는 것이 바른 순서입니다. ‘우리가 메뚜기처럼 볼품이 없고 가나안 사람들은 대장부처럼 강대할지라도 우리와 함께 가시는 하나님을 의지하고 올라갑시다’ 해야 복있는 믿음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힘이 아니더라도 하시고자 하는 일을 이루십니다. 내가 아니라도 다른 사람을 통해 원하시는 일을 이루십니다. 맨날 불평하고 의심하는 백성들이 없어도 모세 한 사람만으로도 충분히 약속을 이루실 분이시지만 모세의 강청을 들으시고 20세 이하 어린 세대들에게 가나안 정복의 사명을 다시 맡기십니다. 우리가 움직이지 않으면 하나님도 어찌하시겠는가 하고 버티며 자기 좋은 길로 되돌아가려 하면 우리가 아닌 다른 사람들을 통해 일을 하시지만 끝내 버티고 돌아가려고 하는 사람은 광야라는 세상에서 허망하게 삶을 마치고 맙니다. 예 해야 할 때는 예 하고, 아니라 해야 할 때 아니요 할 줄 아는 신앙으로 하나님의 뜻을 따릅시다.
민수기 21장을 보면,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거의 40년을 지낸 다음 하나님께서는 그 백성들이 전에 주춤하고 거역했던 실패의 자리에 다시 세우십니다. 전에 부모님들이 실패했던 그 자리에 자녀들을 세우시며 전진하게 하십니다. 가나안의 아랏 왕이 이스라엘이 자기 땅으로 온다는 소식을 듣고 군대를 이끌고 나가 그중에 몇 사람을 사로잡았습니다. 그때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께 서원합니다. ‘주께서 만일 이 백성을 내 손에 붙이시면 내가 그들의 성읍을 다 멸하리이다’ 40년 전에 울고불고 난리를 치던 부모 세대와 전혀 다른 모습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의 기도를 들어 허락하셨고 이스라엘은 그 성읍을 점령한 후 그 이름을 ‘호르마’라 하였습니다(민21:1-3).
부모님 세대가 하나님을 거역하고 자기 맘대로 올라갔다가 가나안 사람들에게 쫓김을 당할 때 가나안 군대가 추격하여 내려왔던 곳이 바로 ‘호르마’였는데 이번에는 상황이 역전되었습니다. 실패와 성공의
차이점이 보입니까? 하나님께서 함께 가시느냐 떠나셨느냐의 차이입니다. 40여년 전에 이스라엘의 무기력한 모습을 보았던 가나안 사람들이 이번에도 이스라엘을 얕잡아 보고 내려왔습니다. 가나안 사람들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과거의 실패를 거울삼아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군대가 되어 돌아온 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민수기는 이렇게 과거의 실패를 회복하고 새출발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넉넉한 은혜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혹시라도 하나님 없이 내 뜻대로 행동했다가 실패의 쓴잔을 맛본 경험이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나를 다시 그 자리에 세우신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이번에도 또 하나님 없이 내 힘으로 밀어부치고 반항심과 오기로 무엇을 해보겠다 하면 또 다시 쓴잔을 마실 수 밖에 없을 겁니다. 약속을 믿고 산으로 올라가라 하시는데 힘들다 원망하며 애굽으로 되돌아가겠다고 하지 맙시다. 광야로 돌아가라 하실 때 청개구리처럼 산꼭대기로 뛰쳐 올라가지 말고 먼저 하나님께 여쭤봅시다. 하나님 이번 일을 제 손에 붙여주시겠습니까?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면 제가 넉넉히 이길 수 있습니다. 언제나 순종하는 자세로 먼저 그의 나라와 그 뜻을 구하는 교우 여러분에게 주실 하나님의 은혜를 기대합니다. 이번 한 주간도 주 안에서 힘있게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믿고 순종하면 형통하리라
민 14:36-45 / 이수영 목사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모세의 영도 하에 애굽을 떠나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땅 가나안을 향해 행진해온 이스라엘이 바란 광야에 이르러 진을 친 일이 있습니다(민12:16). 바란 광야에서 곧바로 북쪽을 향해 올라가면 가나안입니다. 바란 광야에서 볼 때 가나안은 높은 지역 곧 산지입니다. 그 가나안 산지의 제일 남단 산자락에 있는 도시가 본문 45절 끝에 언급된 호르마입니다. 이스라엘이 바로 그 바란 광야에 진을 쳤을 때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명령하셔서 이스라엘 각 지파 중에서 족장 한 사람씩을 뽑아 보내어 북쪽에 있는 가나안 산지를 정탐하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잘 아는 대로 가나안 산지를 정탐하고 돌아온 사람들 가운데 여호수아와 갈렙만이 가나안이 젖과 꿀이 흐르는 심히 아름다운 땅이라고 보고했고, 나머지 사람들은 그 땅이 거민을 삼키는 땅이며 그곳에 살고 있는 거민들은 신장이 장대하고 강하여 그들에 비할 때 이스라엘은 마치 메뚜기 같다고 했습니다. 여호수아와 갈렙은 가나안 산지 거민들이 이스라엘의 먹이에 불과하니 올라가 치자고 한 데 반해서 다른 정찰자들은 이스라엘이 그들을 쳐서 이기지 못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대다수 정찰자들의 보고를 들으시고 진노하셨습니다. 본문 36-38절에서 보듯이 하나님께서는 그 땅을 악평하여 온 회중이 모세를 원망하게 한 자들을 그 앞에서 재앙으로 다 죽게 하셨고 오직 여호수아와 갈렙만 생존하여 약속의 땅에 들어가게 하셨습니다. 신1:37에 따르면 하나님께서는 그 땅을 악평한 자들 때문에 진노하셔서 모세까지도 그 땅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돌이켜 홍해 길을 따라 광야로 들어갈 것"을 새롭게 명하셨습니다(민14:25). 즉 북쪽 산지를 통하여 가나안으로 들어가게 하시려던 계획을 바꾸셔서 정반대방향으로 즉 남쪽으로 한참 더 내려갔다가 멀리 동쪽으로 우회 북상하여 가나안 중부의 동쪽 허리쯤 되는 여리고를 통해 들어가게 하신 것입니다. 애초에 하나님께서 뜻하셨고 여호수아와 갈렙이 올라가자고 했던 북쪽 길은 가장 짧은 직선 경로였습니다. 그것은 젖과 꿀이 흐르는 심히 아름다운 땅으로 곧바로 들어가는 길이었습니다. 비록 그곳 거민들이 장대하고 강하며 그곳 성읍이 크고 견고하기는 했지만(민13:28)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면 문제될 것이 하나도 없는 길이었습니다. 이렇게 가나안에 가장 빠르게 진입할 수 있는 좋은 길을 불평하며 거부한 대다수 이스라엘 백성에게 진노하신 하나님께서는 그 대신 한없이 멀게 돌아가는 힘든 광야길을 새로이 명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정탐보고에 대한 하나님의 노한 응답의 소식이 전해졌을 때에 이스라엘 백성이 보인 반응을 오늘 본문 39절 이하는 전하고 있습니다. 39-40절을 봅니다: "모세가 이 말로 이스라엘 모든 자손에게 알리매 백성이 크게 슬퍼하여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산 꼭대기로 올라가며 이르되 보소서 우리가 여기 있나이다. 우리가 여호와께서 허락하신 곳으로 올라가리니 우리가 범죄하였음이니이다." 그러자 모세가 만류했습니다. 41-43절을 봅니다: "모세가 이르되 너희가 어찌하여 이제 여호와의 명령을 범하느냐 이 일이 형통하지 못하리라. 여호와께서 너희 중에 계시지 아니하니 올라가지 말라 너희의 대적 앞에서 패할까 하노라. 아말렉인과 가나안인이 너희 앞에 있으니 너희가 그 칼에 망하리라 너희가 여호와를 배반하였으니 여호와께서 너희와 함께 하지 아니하시리라." 그러나 그들은 모세의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44절을 봅니다: "그들이 그래도 산 꼭대기로 올라갔고 여호와의 언약궤와 모세는 진을 떠나지 아니하였더라." 그 결과는 무엇이었습니까? 참담한 패배였습니다. 45절을 봅니다: "아말렉인과 산간지대에 거주하는 가나안인이 내려와 그들을 무찌르고 호르마까지 이르렀더라." 산지 거민들이 산지의 남쪽 끝자락 기슭에 있는 호르마까지 이스라엘을 추격해왔다는 것입니다. 우리말성경에서는 그저 "아말렉인과 산간지대에 거주하는 가나안인이 내려와 그들을 무찌르고 호르마까지 이르렀더라" 했지만 보다 원문에 가깝게 실감나게 번역하면 "아말렉인과 산간지대에 거주하는 가나안인이 내리 닥쳐 호르마까지 쫓아오며 이스라엘을 박살내었다"는 것입니다. "호르마"라는 도시 이름 자체의 뜻이 "파괴"인데 이는 이스라엘 백성의 그 때 그곳에서의 그 수치스럽고 철저한 패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라고 여겨집니다. 같은 사건을 전하는 신1:44에 보면 "그 산지에 거주하는 아모리 족속이 너희에게 마주 나와 벌 떼 같이 너희를 쫓아 세일 산에서 쳐서 호르마까지 이른지라" 기록하고 있습니다. 벌 떼처럼 무섭게 달려드는 산지족속들에게 혼비백산하여 쫓겨 내려왔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무모한 가나안공략시도와 그 참담한 실패에 대한 묘사를 신1:41-46을 통해 다시 봅니다: "너희가 대답하여 내게 이르기를 우리가 여호와께 범죄하였사오니 우리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명령하신 대로 우리가 올라가서 싸우리이다 하고 너희가 각각 무기를 가지고 경솔히 산지로 올라가려 할 때에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그들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올라가지 말라 싸우지도 말라 내가 너희 중에 있지 아니하니 너희가 대적에게 패할까 하노라 하시기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였으나 너희가 듣지 아니하고 여호와의 명령을 거역하고 거리낌 없이 산지로 올라가매 그 산지에 거주하는 아모리 족속이 너희에게 마주 나와 벌 떼 같이 너희를 쫓아 세일 산에서 쳐서 호르마까지 이른지라 너희가 돌아와 여호와 앞에서 통곡하나 여호와께서 너희의 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며 너희에게 귀를 기울이지 아니하셨으므로 너희가 가데스에 여러 날 동안 머물렀나니 곧 너희가 그 곳에 머물던 날 수대로니라." 첫 가나안공략에 실패한 이스라엘이 하나님 앞에서 통곡했으나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소리를 들으려 하지도 그들에게 귀를 기울이려 하지도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으로부터 철저히 외면당한 것이 이스라엘의 근원적인 실패였습니다. 그것은 이스라엘이 먼저 하나님의 명령을 외면함으로써 자초한 실패였습니다.
이스라엘은 이렇게 그들의 불순종으로 참담한 패배를 맛보아야 했습니다. 39-40절을 다시 봅니다: "모세가 이 말로 이스라엘 모든 자손에게 알리매 백성이 크게 슬퍼하여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산 꼭대기로 올라가며 이르되 보소서 우리가 여기 있나이다. 우리가 여호와께서 허락하신 곳으로 올라가리니 우리가 범죄하였음이니이다." 얼핏 보면 이 말은 이스라엘 백성이 자신들의 범죄사실을 인정하고 통회하며 하나님께서 명하신 대로 산지로 올라가지 않으려 했던 그들의 뜻을 돌이키고 순종하여 용감하게 산지로 올라갔다는 것 같이 들립니다. 그러나 그것은 순종이 아니라 정반대로 또 하나의 불순종을 저지른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처음 그들이 북쪽 산지를 통한 가나안 진입을 거부하자 하나님께서는 "돌이켜 홍해 길을 따라 광야로 들어갈 것"(민14:25)을 새롭게 명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모세도 "너희가 어찌하여 이제 여호와의 명령을 범하느냐 이 일이 형통하지 못하리라. 여호와께서 너희 중에 계시지 아니하니 올라가지 말라 너희의 대적 앞에서 패할까 하노라. 아말렉인과 가나안인이 너희 앞에 있으니 너희가 그 칼에 망하리라 너희가 여호와를 배반하였으니 여호와께서 너희와 함께 하지 아니하시리라"(41-43절) 하며 만류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모세의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언약궤와 모세가 그들과 함께 진을 떠나지 아니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산으로 올라갔던 것입니다(44절).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해서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올라가지 말라 싸우지도 말라 내가 너희 중에 있지 아니하니 너희가 대적에게 패할까 하노라" 하셨지만 그들은 듣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며 거리낌 없이 산지로 올라갔던 것입니다.
한 번 하나님의 뜻에 저항하다가 재앙을 목도한 그들이 어떻게 또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것은 그들에게는 근본적으로 믿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게는 하나님을 경외함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는 무조건 순종해야 한다는 경외심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명령보다는 자신들의 바램과 의지를 더 중요시했습니다. 그들은 우선 가깝고 좋은 북쪽 산지길이 아니라 멀리 힘들게 우회해야 하는 길을 가라는 하나님의 명령이 싫었던 것입니다. 처음에는 하나님께서 지시하시는 길을 안 가겠다고 버티다가 하나님께서 그 대신 더 멀고 고된 길을 제시하시자 이제는 하나님께서 허락하시지 않는 본래 길을 가겠다고 우긴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존중하는 마음은 없고 자기의 편의만 생각하는 방약무도함을 드러낸 것입니다. 이것이 그들의 불신앙이고 그 필연적 결과로서의 불순종입니다.
또 그들은 자기들의 힘을 믿었습니다. 그들은 그들의 첫 과오가 그들이 용감하지 못했던 것으로 여긴 것 같습니다. 그들이 용기만 가지고 싸운다면 산지의 크고 강한 거민들도 능히 이길 수 있으리라고 뒤늦게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괜히 지레 겁먹고 싸우지 않으려고 북쪽 길을 회피하려다가 오랫동안 더 고생할 남쪽 우회길을 가게 생겼으니 차라리 단단히 맘먹고 싸워 이겨서 빨리 편하게 북쪽으로 가나안 입성을 마치는 것이 낫겠다고 생각을 고쳐먹은 것입니다. 여기서도 그들의 불신앙이 드러납니다. 그들의 불신앙은 그들의 승리나 패배가 적군의 강성함 여부나 그들 자신의 용기 여부에 달린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느냐 아니냐에 달린 것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승리를 오기로 쟁취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 즉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말씀에 순종함으로써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 하실 때 얻는 것이며 하나님의 선물로 받는 것임을 까맣게 잊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때문에 "너희가 어찌하여 이제 여호와의 명령을 범하느냐 이 일이 형통하지 못하리라. 여호와께서 너희 중에 계시지 아니하니 올라가지 말라 너희의 대적 앞에서 패할까 하노라. 아말렉인과 가나안인이 너희 앞에 있으니 너희가 그 칼에 망하리라 너희가 여호와를 배반하였으니 여호와께서 너희와 함께 하지 아니하시리라"(41-43절) 하며 만류하는 모세의 말이 귀에 들리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의 언약궤도 하나님이 세우신 지도자 모세도 함께 가지 않는 정복의 길을 감행했던 것입니다(44절). 분명히 하나님께서 함께하시지 않을 것이라고 반복하여 경고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갔습니다. 이것은 그들에게 하나님께서 함께하셔야겠다는 간절한 바램이 없었다는 것을 말합니다. 또 그것은 그들이 스스로 잘 할 수 있으리라고 믿었음을 가리킵니다. 이것은 그들의 교만함을 여실히 드러내주는 것입니다. 교만은 하나님을 필요 없게 만듭니다. 더더군다나 교만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순종하는 참 믿음과 함께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게 교만한 자들에게 하나님께서 형통함을 주실 리가 없습니다. 그들의 실패는 너무나 자명한 일이었고 처음부터 예상된 것이었습니다. 모세는 "너희가 어찌하여 이제 여호와의 명령을 범하느냐 이 일이 형통하지 못하리라" 하며 만류했습니다. 모세의 그 말은 뒤집어 말하면 "믿고 순종해야 형통하리라"는 뜻입니다.
처음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가나안으로 이끌어 들이시려고 하셨던 길은 가장 짧고 젖과 꿀이 흐르며 심히 아름답고 가나안으로 곧바로 들어가는 길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좋은 길을 불평하며 거부한 이스라엘 백성은 그 대신 힘든 광야길을 멀리 돌아가야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하시고 그가 명하시는 것은 언제나 선한 일이고 바른 길임을 굳게 믿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리고 절대적으로 순종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함께하시지 않는 일은 결코 하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일을 함에 있어서 내 욕심과 지혜와 판단과 힘과 용기를 앞세우려 해서는 안 됩니다. 철저하게 하나님중심으로 행해야 합니다. 그럴 때 만사가 형통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고 자기 생각대로 행하려 하면 되는 일이 없이 온갖 환난과 고통을 자초하게 됩니다. 그것을 이스라엘 백성의 역사가 우리에게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하시고 그가 명하시는 것은 언제나 선한 일이고 바른 길임을 굳게 믿는 믿음이 있는 이에게는 하나님께서 보이시는 모든 땅이 젖과 꿀이 흐르는 심히 아름다운 땅으로 보이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믿음이 없는 자들에게는 아무리 좋은 땅이라 할지라도 다 사람을 삼키는 땅으로 보이는 것입니다.
우리 앞에 놓인 세상과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하시고 그가 명하시는 것은 언제나 선한 일이고 바른 길이라는 확고한 믿음을 우리가 지닌다면 우리 앞에 놓인 세상은 아름답고 풍요로운 세상이고 그 속에서의 우리의 삶은 언제나 행복한 삶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믿음을 갖지 못한다면 이 세상은 언제나 우리를 삼키는 저주스런 세상이며 우리의 삶은 늘 불안하고 불행할 것입니다. 믿지 않고 순종하지 않음으로 사서 고생하며 패배를 자초하는 어리석은 자들이 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복 주시는 삶으로 곧바로 들어갈 수 있는 인생을 교만과 불순종으로 낭비하며 참된 행복을 멀리 비껴가는 불쌍한 자들이 되지 말아야 합니다. 이 세상에서 승리하고 복된 삶을 누리는 것은 우리 자신의 의지와 용기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오직 하나님을 믿는 이에게 하나님께서 주시는 선물입니다. 믿고 순종함으로 만사가 형통하는 복된 이 한 해가 되시기를 빕니다.
회개 고백을 앞세우라
민 14:39-45 / 이햔규 목사
< 뒷북을 치지 말라 >
가나안 땅에 대한 10명의 정탐꾼의 부정적인 보고를 듣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원망하자 하나님은 그들을 가나안 땅이 아닌 광야로 들어가라고 명령하셨다. 그러자 그들이 뒤늦게 슬퍼하고 후회하며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고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가나안 남쪽 땅과 경계선 역할을 했던 호르산 꼭대기로 올라가며 말했다(40절). “보소서! 우리가 여기 있나이다. 우리가 여호와의 허락하신 곳으로 올라가겠습니다. 우리가 범죄했습니다.”
그 뒷북치는 고백을 듣고 모세가 책망했다. “너희가 어찌하여 이제 여호와의 명령을 범하느냐 이 일이 형통하지 못하리라 여호와께서 너희 중에 계시지 아니하니 올라가지 말라 너희의 대적 앞에서 패할까 하노라.” 하나님이 이미 그들을 외면했는데 그때 뒷북치며 인간적인 열심을 가지고 나아가면 전쟁에서 패한다는 뜻이다. 하나님이 후퇴하라면 후퇴할 줄도 알아야지 믿음이 있는 척 자기 뜻대로 전진하겠다고 하면 그것도 불순종이다.
당시 이스라엘 백성에게 필요했던 것은 ‘참된 회개’를 통한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이지 ‘헛된 용기’를 내세운 전쟁에서의 승리가 아니었다. 그러나 그들은 뒷북을 치면서 자기들 맘대로 산꼭대기로 올라갔다. 그때 언약궤와 모세는 진을 떠나지 않았다(44절). 모세가 그 공격을 독려하거나 허락하지 않았는데 백성들이 맘대로 공격했다는 암시다. 결국 아말렉과 산간지대에 거주하는 가나안인에 의해 이스라엘 백성들이 패했다.
본문의 패배는 출애굽 후 이스라엘이 겪은 최초의 패배로서 그 패배가 미친 파급효과가 커서 주변 국가들이 이스라엘을 깔보기 시작했고 이스라엘 백성들도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지 못한다는 패배의식으로 40년간 광야를 방황했다. 그처럼 적시에 순종하지 않고 하나님의 진노가 무서워 나중에 뒷북치며 헌신하겠다고 하면 오히려 치욕과 멸시를 당한다. 뒷북치는 불행한 인생이 되지 않고 적시타를 날리는 복된 인생이 되려면 회개를 앞세우라.
< 회개 고백을 앞세우라 >
죄를 짓고 잘못된 행동을 했을 때 필요한 것은 후회나 변명이 아닌 참된 회개다. 회개와 후회는 다르다. 후회하는 사람은 죄로 인한 형벌을 두려워하며 이렇게 생각한다. “그때 그렇게 행동하지 말아야 했다. 이제 나 같은 인간에게 어떻게 밝은 미래가 있겠는가? 내가 한 짓이 있는데 어떻게 자식이 잘 되겠는가? 남을 억울하게 했는데 왜 내게 억울한 일이 없겠는가?”
반면에 회개하는 사람은 미래를 어둡게 전망하지 않고 하나님과의 관계복원에 힘쓰며 이렇게 고백한다. “하나님!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한 저를 용서하소서. 이제 그 죄를 힘써 멀리하겠습니다.” 후회는 ‘죄로 인한 결과’를 두려워하면서 원망과 불평과 자책으로 절망적 불안에 빠지게 하지만 회개는 ‘죄 짓는 것 자체’를 두려워하면서 하나님과의 관계 복원에 힘쓰기에 오히려 죄로 인한 먹구름을 사라지게 한다.
다윗이 간음죄를 짓고 처음에는 죄지은 것 자체를 두려워하기보다 죄가 드러날 것을 두려워했다. 그래서 살인죄까지 저질렀다. 죄의 결과로 생기는 심판과 남들의 따가운 눈총과 질타를 두려워하며 후회하지 말고 죄 자체를 두려워하며 회개해야 복된 새날이 펼쳐진다. 후회는 근심을 증폭시키지만 회개는 근심을 가라앉히기에 성도는 세상적인 근심을 하지 말고 바울처럼 하나님 앞에서 바로 서지 못한 것에 대해 근심해야 한다.
이제 “일이 잘못되면 어떡하나? 그가 없으면 어떡하나?” 하고 근심하지 말라. 살다 보면 먼저 떠날 사람은 먼저 떠나고 나중에 떠날 사람은 나중에 떠난다. 중요한 것은 최후에 하나님 앞에 어떻게 서느냐 하는 것이다. 회개 고백을 앞세우라. “하나님! 말씀대로 살지 못한 저를 용서하시고 늘 말씀대로 살게 하소서.” 그런 고백과 함께 하나님의 뜻대로 살면 그의 미래는 누구보다 찬란할 것이다.
내 귀에 들린 대로 내가 행하리라
민 14:26-38/ 잡초잡초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날이 갈수록 그들 마음에 자리 잡은 것은 가나안을 향한 소망이 아니라 힘든 현실에 대한 불평이었습니다.
어찌 이것이 그들만의 한계이겠습니까. 모든 인간들의 예측 가능한 한계일 것입니다.
이들의 불평은 결코 단순하지 아니했습니다. 그들은 약속의 땅 가나안이 과연 축복의 땅인가를 의심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회의에 빠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나안 땅을 직접 목격할 수 있도록 정탐꾼을 파견하기로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백성들이 믿음으로 행하여 가나안 땅을 정복하기를 원했습니다(신 1:22)
그러나 하나님의 뜻과는 달리 백성들은 약속의 땅에 확신을 가지기는커녕 가나안 정복 자체에 대하여 불안한 나머지 정탐을 요청하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발상은 그들이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못한데서 온 것입니다.
마침내 가나안 땅을 정탐하기 위하여 레위지파를 제외한 12지파에서 한 사람씩 선발하게 되었습니다.
① 르우벤 지파 삼무아 ② 시므온 지파 사밧 ③ 유다 지파 갈렙 ④ 잇사갈 지파 이갈 ⑤ 에브라임 지파 여호수아 ⑥ 베냐민 지파 발디 ⑦ 스불론 지파 갓디엘 ⑧ 므낫세 지파 갓디 ⑨ 단 지파 암미엘 ⑩ 아셀 지파 스둘 ⑪ 납달리 지파 나비 ⑫ 갓 지파 그우엘이 각각 뽑혔습니다.
모세가 가나안 땅에 정탐꾼을 파송한 곳은 바란 광야의 가데스 바네아였습니다. 정탐꾼들은 이곳에서부터 북상하여 사해 서쪽 헤브론을 지나 갈릴리 바다 북쪽 하솔을 거쳐 가나안 최북방 경계인 르홉까지의 가나안 온 땅을 정탐하고 다시 가데스 바네아로 돌아 오는 것으로 정했습니다.
마침내 그들은 40일간의 긴 여정동안 충분한 정탐을 마치고 가데스 바네아의 이스라엘 본 진영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들이 돌아올 때 증거물로 가나안 땅의 수확물을 가지고 돌아왔습니다.
이들은 가나안 땅의 풍성한 생산 현장과 함께 그곳 원주민의 강대한 사실을 본 그대로 보고했습니다. 여호수아와 갈렙은 백성들 앞에서 가나안 땅의 정복의지를 강하게 보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을 제외한 열 정탐꾼들은 그곳 원주민이 강대하다는 이유를 들어 가나안 정복 불가론을 주장했습니다.
그들이 f급기야는 민심을 얻기 위하여 그럴듯한 과장법까지 동원했습니다.
민수기 13장 33절에 『거기서 또 네피림 후손 아낙 자손 대장부들을 보았나니 우리는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으니 그들의 보기에도 그와 같았을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이러한 정탐꾼들의 상반된 보고는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동요를 일으키기에 충분했습니다. 열 정탐꾼들의 부정적인 보고는 가나안 입성을 준비하고 있는 백성들의 마음을 찢어놓고 말았습니다.
본문 14장 1절에 『온 회중이 소리를 높여 부르짖으며 밤새도록 백성이 곡하였더라』고 했습니다.
그들은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면서 애굽 땅에서 죽었거나 광야에서 죽는 것이 더 좋았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더 한심한 일은 그들이 서로 말하기를 한 장관을 세워 애굽으로 돌아가자는 발상을 하게 되었습니다(14:4)
이때 모세와 아론이 회중 앞에서 엎드리며 여호수아와 갈렙은 그 옷을 찢고 말하기를 가나안 땅은 과연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신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고 강변했습니다(14:8-9).
이 말을 듣고 있던 백성들이 모세와 아론을 향해 돌로 치려 할 때 동시에 여호와의 영광이 회막에서 그들 앞에 나타났습니다(14:10).
본문 14장 11-12절에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이 백성이 어느 때까지 나를 멸시하겠느냐 내가 그들 중에 모든 이적을 행한 것도 생각하지 아니하고 어느 때까지 나를 믿지 않겠느냐 내가 전염병으로 그들을 쳐서 멸하고 너로 그들보다 크고 강한 나라를 이루게 하리라 』고 했습니다.
다급해진 모세는 백성들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의 기도에 응답하시고 그들을 용서해 주셨습니다(14:20).
저들은 여호와 하나님의 영광과 애굽과 광야에서 행한 하나님의 이적을 체험한 사람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열 번이나 하나님을 시험하고 그 목소리를 청종치 아니했습니다. 따라서 그 사람들에 대한 응분의 대가는 당연한 것입니다(14:22). 그것은 그들이 그 조상들에게 맹세한 땅을 결단코 보지 못하고 또한 여호와 하나님을 멸시하는 사람은 하나라도 그것을 보지 못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14:23).
열 번이나 시험했다는 말은 그들이 심판을 자처하기에 만족할 만큼 시험했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이스라엘의 대표적인 패역상을 살펴보면 홍해(출 14:11-12), 마라의 쓴물(출 15:23-24), 신광야(출 16:2), 만나(출 16:20-27), 르비딤(출 17:1-3), 금송아지(출 32:1-6), 디베라(민 13-14장) 사건 등을 예로 들수 있습니다.
그러나 본문 14장 24절에 『오직 내 종 갈렙은 그 마음이 그들과 달라서 나를 온전히 좇았은즉 그의 갔던 땅으로 내가 그를 인도하여 들이리니 그 자손이 그 땅을 차지하리라』고 했습니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들 가운데 가장 결정적인 사건이라고 한다면 바로 본문에 나타난 가데스 바네아에서의 불평 사건이라고 하겠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말씀하시기를 나를 원망하는 이스라엘 자손의 말을 들었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내 귀에 들린 대로 행하겠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혈기를 따라 함부로 말한 것 곧 14장 2절에 『…이 광야에서 죽었더면 좋았을 것을』이라고 한 그 말대로 하나님께서는 실제로 광야에서 그들을 죽이기로 결정하셨다는 말입니다.
Ⅰ. 하나님의 언약의 불변성을 말하는 것입니다.
출애굽기 3장 8절에 『내가 내려와서 그들을 애굽인의 손에서 건져내고 그들을 그 땅에서 인도하여 아름답고 광대한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곧 가나안 족속, 헷 족속, 아모리 족속, 브리스 족속, 히위 족속, 여부스 족속의 지방에 이르려 하노라 』라고 했습니다.
출애굽기 6장 4절에 『가나안 땅 곧 그들의 우거하는 땅을 주기로 그들과 언약하였더니』라고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고난 당하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는 출애굽의 지도자로 모세를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친히 인간 역사에 개입하셔서 하나님 자신의 의지대로 세상 역사를 주관해 가고 계셨습니다.
여기 아름답고 광대한 땅이란 비옥하고 넓은 땅이라는 말인데 팔레스틴 지역은 요단강물이 흐르고 샘이 풍부하여 대체로 비옥했습니다.
이스라엘이 광대하다고 한 것은 그들이 애굽에서 일정한 지역에 종살이하면서 살고 있는 것에 비하면 가나안 땅은 그 보다 훨씬 넓은 땅입니다.
더 중요한 의미는 가나안 땅은 하나님께서 예비해 주신 자유 할 수 있는 땅이라는 것에 힘을 실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이 땅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기로 약속하셨습니다.
여기에 언약은 하나님의 일방적이고 불가항력적인 은혜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믿음의 조상들과 체결하신 언약에 대해 성경 여러 곳에서 가나안 땅에 관한 약속이 한결같이 언급되어 있습니다.(창 15:18-21; 17:7; 26:3; 28:13).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을 주신다고 약속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것을 믿음으로 수용하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의 불변성은 하나님의 비공유적 속성 중의 하나입니다.
하나님의 언약하신 바를 믿지 못하고 불평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하여 "내 귀에 들린 대로 내가 행하리라"고 하셨습니다. 말씀 속에는 하나님 자신의 언약은 변함이 없다는 것을 알려주는 말입니다.
Ⅱ. 하나님의 언약에 대한 불신앙적 도전 은 멸망이라는 사실입니다.
본문 14장 2-3절에 『이스라엘 자손이 다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며 온 회중이 그들에게 이르되 우리가 애굽 땅에서 죽었거나 이 광야에서 죽었더면 좋았을 것을 어찌하여 여호와가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칼에 망하게 하려 하는고 우리 처자가 사로잡히리니 애굽으로 돌아가는 것이 낫지 아니하랴』고 했습니다.
이것은 열 정탐꾼의 부정적인 보고 때문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못하는 저들의 불신앙 때문입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애굽의 종살이에서 해방되었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이 지시한 땅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을 향해 가는 도중에 조그마한 고통을 당해도 '차라리 죽었더라면 좋았을 것을' 이라는 말을 습관적으로 했다는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습니다(출 14:11; 16:3).
이러한 부정적이고 비관적인 망언은 살아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능력과 존재를 불신앙하는 죄악이기 때문입니다. 열 정탐꾼들의 불신앙적인 보고에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은 물같이 녹아버렸습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도전하고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아니하는 자들에게 그들이 말한 그대로 심판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욥기 3장 25절에 『나의 두려워하는 그것이 내게 임하고 나의 무서워하는 그것이 내 몸에 미쳤구나』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뜻을 거역하는 자들은 모두 가나안에 입국하지 못하고 광야에서 죽게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가데스 바네아 반역 사건의 징벌대상을 20세 이상 된 자로 규정하시고 광야 40년 방황 기간동안 그들 모두를 죽이기로 작정하셨습니다. 결국 20세 이상인 사람은 불신앙의 책임을 물어 광야에서 죽게 했습니다. 그 이유는 그들은 군대의 자격이 있는 사람들로서 마땅히 싸워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하나님을 대적하고 약속을 믿지 못한 죄 때문입니다.
20세 미만은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성숙하지 못했기 때문에 징벌이 제외된 것입니다. 따라서 20세 미만인 자들이 생존할 수 있었던 이유는 하나님의 은혜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20세 미만이라고 해서 모두가 불평과 불신앙의 죄를 범하지 아니했다고 볼 수 없습니다. 그러나 20세 이상은 그 연륜의 값을 하지 못한데 대한 책임을 묻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땅 나그네 세월의 나이 값을 해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신앙의 연륜의 값을 해야 합니다. 어떤 이들은 지성인의 값을 해야 합니다. 잘 사는 값을 해야 합니다. 큰 교회는 큰 교회 값을 해야 합니다. 오늘날 교회의 직분자들이 자리를 지키지 못하고 철없는 유아식 사고방식을 가져서는 안 됩니다.
레온 우드(Leon Wood)박사는 말하기를 징계를 받은 120만 명(남녀 각 60만 명)이 광야 유랑기간 38년 6개월 즉, 14052일 동안 매일 죽어야 했다면 매일 85명가량이 죽었다는 계산이 나온다고 했습니다.
가데스 바네아의 징계사건은 불신앙하는 무리들에게 대대에 이르도록 경고가 됩니다.
열 정탐꾼들은 『우리는 능히 올라가서 그 백성을 치지 못하리라』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으니 그들의 보기에도 그와 같았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러한 열 정탐꾼의 불신앙적인 보고를 듣고 백성들이 죽겠다고 말한 불신앙의 말 그대로 되고 만 것입니다.
수없이 하나님은 가나안 땅을 언급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들은 하나님의 말씀보다는 눈에 보이는 것과 귀에 들리는 것으로 모든 것을 결정하고 판단해 버리는 데 익숙해져 있었습니다. 이러한 저들의 불신앙적이고 인본주의적인 삶의 결국이 바로 파멸로 나타난 것입니다.
Ⅲ. 하나님의 언약에 대한 신뢰는 영생과 축복입니다.
본문 14장 38절에 『그 땅을 탐지하러 갔던 사람들 중에 오직 눈의 아들 여호수아와 여분네의 아들 갈렙은 생존하니라』고 했습니다.
본문 14장 30절에 『여분네의 아들 갈렙과 눈의 아들 여호수아 외에는 내가 맹세하여 너희로 거하게 하리라 한 땅에 결단코 들어가지 못하리라』고 했습니다.
여호수아와 갈렙은 열 정탐꾼의 보고와는 상반된 보고였습니다. 열 정탐꾼의 불신앙의 보고는 백성들을 불신앙적인 행동을 하도록 선동하기에 충분했습니다. 여호수아와 갈렙은
① 가나안 땅은 심히 아름다운 땅이라고 했습니다(민 14:7).
② 여호와 하나님께서 우리를 기뻐하시면 그 땅을 우리에게 주시리라고 했습니다(민 14:8).
③ 그 땅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고 했습니다(민 14:8).
④ 여호와를 거역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⑤ 열 정탐꾼들과는 달리 아낙 자손들은 우리의 밥이라고 했습니다(민 14:9).
⑥ 그들의 보호자는 그들에게서 떠났고 여호와는 우리와 함께 하신다고 격려했습니다. 그리고 저들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했습니다(민 14:9).
이러한 여호수아와 갈렙의 보고는 하나님의 언약에 근거한 그들의 신앙심의 표현입니다.
여호수아와 갈렙이 한 말 중에 저들 나름대로 지어낸 말이 없었습니다. 여기 저들의 '과연'이란 말은 "말한 대로구나", "참으로 그렇구나"라는 말입니다.
'과연'이라는 말이 곧 하나님의 언약을 믿는 저들의 언약신앙을 표현하는 압권입니다. 충분합나다. .
열 두 정탐꾼이 다 같은 땅을 보고 돌아왔습니다. 그들의 보고는 10대 2로 양분되었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소수보다는 다수를 따랐습니다.
열 두 정탐꾼들의 보고가 모두 가나안 정복에 대하여 부정적인 보고를 하였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의 은혜와 계속되는 기적을 체험한 그들로서는 적어도 그렇게 극단적인 말은 하나님 앞에서 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들은 불신앙의 망발(妄發)을 했던 것입니다. 이것은 실로 중생받지 못한 자의 포악입니다. 이것은 같은 사물을 두고 신앙의 눈과 불신앙의 눈과의 차이입니다. 신앙의 입과 불신앙의 입과의 차이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성경)에 대한 도전적이고 부정적인 불신앙적인 망언은 하나님 귀에 들린 그대로 되고 맙니다.
반대로 하나님의 약속(성경)에 대한 긍정적이고 신앙적인 말은 하나님의 귀에 들린 그대로 되게 하십니다. 그래서 사람의 혀는 자신의 현재 상태와 절대 무관하지 않습니다.
지난 수요일(6월 8일) 한국갤럽은 종교의식 설문 조사를 위해 만 18세 이상 전국(제주도 제외) 성인 남녀 1천500명을 대상으로 가구방문을 통한 1대1 개별면접을 실시했었습니다. 표본 오차는 2.5% 포인트(95% 신뢰수준)였습니다.
설문조사에 의하면 젊은이 1,500명 중 63.4%가 '천국은 저 세상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생활하는 이 세상에 있다'고 대답했고 '아니다'라고 대답한 사람은 23. 9%에 불과하다고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종교에 의지하지 않고 선하고 착하게 살면 천국을 갈 수 있다'고 대답한 젊은이는 1,500명의 응답자 중 71.5%였으며 '아니다 갈 수 없다'라고 대답한 자는 18.5%에 그쳤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결국 무신론 사상이 창궐하는 시대가 도래했다는 적신호입니다. 과학 지상주의가 모든 사상의 우위를 점령하고 황금만능주의를 실천적 가치로 하는, 극에 달하는 인본주의 시대가 도래했다는 신호입니다.
물질(빵)을 절대 삶의 수단으로 삼고 주어진 현재의 환경을 행복의 절대 기준으로 삼는 이른바 공산주의자들의 논리입니다.
이렇게 될 때 천국도 성경도 교회도 하나님도 예수도 저들 앞에 산산조각이 나게 되는 것입니다.
신권(神權)이 배척당하는 시대는 바로 암흑시대입니다. 어두운 시대의 특색은 무질서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절대적 지배 이데올로기의 자리에서 밀려나는 시대입니l다. 닏. 모든 것에 대한 가치판단의 기준이 없는 시대입니다. 혼돈입니다.
고린도후서 5장 10절에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아 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