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지정 산사와 서원을 따라(12-1)
(2021년 9월 3일∼9월 14일)
瓦也 정유순
<제12일-1> 논산 돈암서원/사계종가
(2021년 9월 14일)
동가식서가숙(東家食西家宿) 아니 서가식동가숙(西家食東家宿)이다. 어제 저녁 서쪽의 충남 서천(舒川)에서 식사를 하고 동쪽에 있는 논산(論山)에 와서 잠을 잤다. 오늘도 눈 뜨기 바쁘게 움직인다. 오늘의 첫 행선지는 논산시 연산면(連山面) 임리(林里)에 있는 돈암서원이다. 돈암서원(遯巖書院)은 사적(제383호)으로 지정되었고, 2019년 7월 6일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아홉 개 서원 중의 하나다.
<세계유산 돈암서원>
돈암서원이 창건되기 이전에는 김장생의 아버지인 김계휘(金繼輝)가 설립한 정회당(靜會堂)이 있어 문풍(文風)이 크게 진작되었고, 김장생은 양성당(養性堂)을 세워 학문 연구와 후진 양성에 힘을 기울였다. 이에 1634년(인조12) 양성당과 정회당을 중심으로 서원이 건립하게 되었으며, 1660년(현종 1)에 ‘돈암서원’으로 사액(賜額)되었다.
<돈암서원 배치도>
서원은 선현을 봉사하는 사우(祠宇)와 유생들을 교육하는 재(齋)가 결합된 사학(私學)이다. 처음 돈암서원은 이곳에서 서북방 1.5㎞ 떨어진 숲말에 건립되었으나 1880년(고종17)에 홍수피해로 이곳으로 옮겼다. 그리고 1866년 흥선 대원군의 서원철폐 때에도 보존된 전국 47개 서원 중의 하나다. 사계 김장생(沙溪 金長生)을 주향(主享)하고 그의 아들인 김집(金集)과 제자인 송준길(宋浚吉), 송시열(宋時烈)을 배향(配享)하였다.
<돈암서원>
돈암서원은 산앙루를 지나 외삼문인 입덕문(入德門)을 들어서면 정면에 양성당 좌측에 응도당(凝道堂) 그리고 사우는 양성당 후면에 있고, 장판각, 정회당이 있다. 산앙루(山仰樓)는 ‘높은 산을 우러러 보듯 김장생의 정신과 학문을 더 높이 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고 한다. 누에 올라 사방을 둘러보니 황산벌에서 불어오는 한 줄기 바람은 천오백 년 전 백제의 꿈결 같다.
<돈암서원 산앙루>
사우인 숭례사(崇禮祠)에서는 매년 음력 2월과 8월 중정(中丁)일에 향사(享祀)를 올린다. 사우의 전면은 1칸통을 개방하여 전퇴를 두었고, 내부는 우물마루를 깔았으며 전퇴는 전돌 바닥이다. 전면 기둥사이에는 사분합 띠살문을 달고 옆면과 뒷면은 회벽이다. 숭례사를 둘러싼 담장은 지부해함(地負海涵, 땅은 만물을 짊어지고 바다는 만천을 포용) 박문약례(博文約禮, 지식은 넓히고 행동은 예의에 맞게) 서일화풍(瑞日和風, 상서로운 햇살과 온화한 바람) 12자로 장식한 꽃담장이다.
<돈암서원 숭례사>
<돈암서원 꽃담장 - 지부해함(地負海涵)>
보물(제1569호)로 지정된 응도당(凝道堂)은 유생들이 공부하던 곳으로 1880년(고종17) 서원을 현재의 위치로 옮길 때 옛터에 남아 있던 것을 1971년에 옮겨지었다. 응도당은 사당방향과 직각으로 배치되어 있는데, 이는 서원이나 향교에서 아주 보기 드문 예라고 한다. 여러 가지 기록에 의하면 돈암서원의 건물배치와 규모는 김장생이 논산시 강경읍(江景邑)의 죽림서원(竹林書院)을 창건했던 규례를 이어 받은 것이라고 한다. 이 건물은 기와의 명문(銘文)으로 보아 1633년(인조11)에 건립되었다.
<돈암서원 응도당>
응도당 옆의 정회당(靜會堂)은 유생들이 수행하는 방법 중의 하나로 ‘고요하게 몸소 실천하며 수행’한다는 뜻의 ‘정회(停會)’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김장생의 부친[김계휘(金繼輝)]께서 강학하던 건물이며, 대둔산자락의 고운사 터에서 1954년에 이곳으로 옮겨왔다. 정면 4칸 측면 2칸으로 후면열 가운데에 마루방을 두었고 우물마루를 깔았다.
<돈암서원 정회당>
돈암서원은 광산김씨 문중에서 관리한다. 연산 지역에서 세거하는 광산김씨(光山金氏)는 많은 인재를 배출한 명문사족가문으로 돈암서원은 서인-노론계를 대표하는 서원이다. 특히 김장생이 타계한 후 제자와 문인들이 만든 돈암서원책판(遯巖書院冊版) 등 여러 자료가 남아 있다. 현재까지 잘 보호, 관리되고 있으며 지역사(地域史)를 연구하는 향토 자료로서도 보존적 가치가 높다. 그리고 당시 실질적인 실력자인 김장생의 영향력을 알 수 있다.
<돈암서원 향나무>
돈암서원 앞으로는 제1호 국도(목포∼신의주)가 지나고 이 주변은 백제의 최후 보루였던 황산벌이 바로 이웃이다. 그리고 약 3.5㎞쯤에 이 서원에 주향(主享)된 사계 김장생(金長生)의 <사계종가(沙溪宗家)>와 <김장생선생 묘역>이 있다. 종가솟을대문 대신 쪽문으로 들어서면 ‘염수재(念修齋)’현판을 단 안채가 창문을 활짝 열고 우리가 올 것을 미리 안 것처럼 기다린다. 염수재 토방 아래 마당에는 정료대가 서 있다. 정료대(庭燎臺)는 야간 일을 할 때 등불이나 화톳불을 올려 주변을 환하게 밝혀주는 돌로 만든 받침이다.
<사계종가 쪽문>
염수재를 중심으로 뒤편에는 조상의 신위를 모시는 사당이 있으며, 우측의 서재(西齋)는 종손(宗孫)이 방문객과 담소 등 사적용도로 사용한다. 좌측의 동재(東齋)는 종손부부의 살림집으로 다실(茶室)을 운영한다. 마당을 서성이며 발길 닿는 대로 구경을 하고 있는데, 아침 일찍부터 찾아온 방문객을 보고 약간 의아한 종부(宗婦)의 모습이었으나 금방 평상으로 돌아온다. 우리도 전통차를 주문하여 종갓집의 차 맛을 음미하며 덕목이 몸에 밴 모습이 예학(禮學)의 대가인 사계의 종갓집 종부다운 면모를 엿본다.
<사계종가>
서울 중구 정동에서 출생한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 1548∼1631)은 본관이 광산이며, 자 희원(希元), 호 사계(沙溪), 시호 문원(文元)이다. 선조 때 서인(西人) 김계휘의 아들이며. 효종 때의 예학으로 주목받았던 김집(金集)의 아버지다. 이이(李珥)와 송익필(宋翼弼)의 문인이었으나 과거를 포기하고 학문에 정진하다가, 1578년(선조 11) 유일(遺逸)로서 천거되어 창릉참봉(昌陵參奉)에 임명됨으로써 벼슬과 연을 맺는다.
<사계종가 사당>
임진왜란 중에는 정산(定山)현감으로 있으면서 피난 온 사대부들을 구휼하였다. 1596년 호조정랑이 되어 남하하는 명(明)나라 원군의 군량조달을 담당하였으며, 선조 말과 광해군대에는 단양·안성·익산·철원 등 주로 지방관을 맡았다. 1613년(광해군 5)에는 서얼들이 일으킨 역모사건(계축화옥)에 연루되었으나 무혐의로 풀려난 후 연산(連山)으로 낙향·은거하면서 예학 연구와 후진양성에 몰두하였다. 1657년(효종8)에는 영의정에 추증(追贈)되고 ‘문원(文元)’이라는 시호(諡號)를 하사받았다.
<사계 김장생 초상화>
사계 가문은 세도가보다는 대대로 학자를 많이 배출했는데 묘역에서 앞쪽 멀리 보이는 산은 금남정맥으로 기가 밖으로 빠져나가지 못하게 막아 발복(發福)이 오랫동안 유지되는 지형이라고 한다. 사계는 조선 예학의 한 줄기를 형성했고 제자로 아들인 김집을 비롯하여 송시열과 송준길, 윤증 등의 대학자를 많이 배출했다. <김장생선생 묘역>은 광산김씨 종중에서 관리하며, 1984년 7월 26일에 충청남도 기념물(제47호)로 지정되었다.
<사계묘역 후면>
사계종가 뒤로 올라서면 바로 묘역(墓域)이다. 묘역 주변이 소나무 숲으로 둘러 싸여 있고 김씨 일가의 묘소와 사당, 비 등이 한곳에 모여 있다. 묘역의 맨 위에는 김장생의 묘가 있고, 그 아래에 김장생의 7대 조모인 양천허씨 묘가 있으며, 허씨의 아들인 6대 조부 김철산을 비롯하여 김겸광, 김공휘 등의 묘지가 있다. 이는 후손이 조상보다 위에 있는 역장(逆葬)으로 지금 같으면 비난 받을 만한 일이지만, 그 시대에는 별로 문제 삼지 않은 것 같다. 사계의 스승인 율곡(栗谷)의 파주에 있는 묘역도 역장이다.
<사계묘역>
광산김씨의 중흥을 이룬 사계의 7대 조모 양천허씨(陽川 許氏)는 조선 태조 때 대사헌을 지낸 허응(許應)의 딸로 광산김씨 김문(金問)과 결혼하였다. 17세에 남편이 죽자 부모가 다시 출가시키려고 하므로 개성(開城)에서 아이를 데리고 시댁인 연산으로 가서 평생을 마쳤다.
<보호수로 지정된 배롱나무 - 사계종가>
양천허씨는 유복자인 김철산(金鐵山)을 정성을 다해 키워 좌의정을 지낸 손자 김국광(金國光)을 비롯하여 김계휘(金桂輝), 김장생(金長生), 김집(金集), 김반(金槃) 등 조선시대 정치·사상계의 주요 인물을 배출시킬 수 있는 기반을 만들었다. 이러한 절행이 조정에 알려져 1467년(세조 13) 명정을 받는다. 명정(命旌)은 ‘절부 예문관 검열 증 의정부 좌찬성 김문 처 증 정경부인양천허씨지려(節夫藝文館檢閱贈議政府左贊成金問妻贈貞敬夫人陽川許氏之閭)’라고 쓰여 있다.
<양천허씨 정려>
사계종가와 묘역을 둘러보고 다음 일정인 공주 마곡사로 가는 차창에 몸을 기대고 눈을 감고 지나온 발걸음을 더듬어 보며, 사계종가 서재에 걸려 있던 편액 <知者不言>을 마음에 새겨본다. 이는 <노자도덕경(老子道德經)> 제56장의 첫 구절에 나오는 문구인데, 知者不言 言者不知(지자불언 언자부지)로 ‘아는 사람은 말하지 아니하고, 말하는 사람은 알지 못한다.’라는 뜻이다. 이는 말의 중요성을 일깨우고 말로 인한 오류를 경계하라는 말이다. 지금까지 세상을 살아오면서 나는 어느 부류에 속하는 사람이었을까?
<지자불언(知者不言)>
※ <제1일>부터 <제12일>까지 후기가 계속 이어지며
다음은 제12-2일차 <공주 마곡사>편이 연재됩니다.
첫댓글 돈암서원의 건축물에 걸려있는 한자로 된 현판들을 읽으며 뜻을 되새겨본 기억이 나네요.
하나같이 좋은 뜻을 지니고 있는데 그대로 수양만 된다면 더할나위 없겠지요.
노자는 '지자불언 언자부지'라 했지만 오늘날에는 '부지자불언 불언자부지'가 되는 세상으로 바뀐 듯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