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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한동안 입지 않았던 교복을 꺼냈다. 직접 깨끗이 빤 셔츠부터 주름이 흐트러지지 않은 치마까지. 글쎄. 내 입으로 이런 말하기는 좀 뭣하지만 옷걸이가 좋으면 뭘 입어도 태가 난다고, 그 말이 딱 인 것 같다. 넥타이까지 조여 매고 나니 완벽한 듯 보였으나 역시 문제는 머리인가. 염색이야 어쩔 수 없다고 쳐도 최소한 덜 구불거리기는 해야 할 것 같아서 고데기로 머리를 폈다. 그렇게 하고 나니 길이가 제법 길다. 뭐, 길이는 상관이 없으니까 괜찮을 터였다. 아침은 간단하게 토스트를 굽고, 키위를 갈아 주스를 만들었다. 토스트를 먹으면서는 점심 도시락을 쌌다. 급식비를 내지 않았기 때문에 내 몫의 급식은 없을 테니까 말이다. 괜히 밖에 나가서 사 먹는 것 보다야 직접 싸 가는 게 낫다. 오후 수업을 들을 걸 감안할 때, 사실 점심시간 50분은 밖에 나갔다 오기 조금 촉박한 시간이다. 나는 느리게 먹는 편이기 때문이다.
도시락은 간단하게 김밥을 쌌다. 너른 김 위에 밥을 펴고 그 위에 햄과 오이, 계란만 간단하게 올리고 말자 생각보다 금방 끝났다. 참기름을 바르고 반듯하게 썰어 도시락에 넣자 소풍가는 기분이 들어 좋았다. 남은 키위 주스도 같이 싸니 이건 뭐 당장 팔아도 될 것 같은 도화리 표 도시락이 아닌가. 책가방에 교과서 대신 풀던 문제집들을 챙겼다. 찬우에게 들으니 요새 학교에서는 수업보다는 자습 시간이 많다고 들었다. 필통까지 넣어 가방을 매고, 도시락을 드니 제법 무거웠다. 아. 태워다 준다고 할 때 그냥 그렇게 해 달라고 할 걸 그랬나하고 잠시 후회하다가 나는 교통카드를 집어 들었다. 뭐, 버스를 타서 앉아서 가면 되니까 괜찮다. 도시락을 싸고 하다 보니 시간이 조금 지체되어 어느덧 7시 10분. 완벽한 등교시간이 되어 버렸다. 나는 사람이 많은 걸 별로 좋아하지 않아서 여태 학교에 다닐 때 7시가 되기 전에 버스를 타고 집을 나서곤 했었다. 그렇게 먼 거리가 아니니 견디는 거야 어렵지 않겠지만…….
“그래도 가수니까 알아보려나?”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내가 무슨 엄청난 십만의 팬을 거느린 아이돌도 아니고, 오빠 부대가 있는 것도 아니니 괜찮을 거란 생각이 들어 자신 있게 숙소를 나섰다. 도착한 정류장에는 사람이 생각보다 많았다. 그래도 막상 교복을 입자 알아보는 사람이 없어서 나는 안심하고 버스를 기다렸다. 곧 버스가 도착했고 나는 앉지는 못해도 최소한 얌전히 서서는 갈 수 있겠다는 생각에 재빨리 버스에 올라 손잡이를 잡았다. 내 앞의 자리에 앉아 있는 교복이 내 도시락을 흘끔거렸다. 아, 냄새 나나. 도시락을 들어 올려 냄새를 맡던 찰나였다.
“도화리야!”
나는 데뷔 이후 매니저 오빠와 떨어져 본 일이 없었다. 기껏해야 찬우의 숙소에 놀러간 것이 다였고, 밖으로 나다닌 적이 없어서 이렇게 빨리 내 신분이 발각될 줄은 몰랐다. 이런 경우 가만히 고개를 숙이고 있어야 한다는 것도 잊고 나는 내 이름이 불린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게 사단이었다.
“진짜야! 세상에!”
“혼자? 혼자 탄 거야?”
“야. 진짜 진심 예뻐.”
“저게 인간이냐.”
나는 당황하여 고개를 숙였으나 거기에도 놀란 눈초리들이 따라 붙었다. 특히 아까는 내게 아무런 관심 없이 도시락만 보고 고개를 돌렸던 내 앞자리의 교복이 입을 벌리고 나를 쳐다보는 게 아닌가. 어디에서 많이 봤다 했더니 찬우네 학교 교복이다. 아. 젠장. 이럴 줄 알았으면 찬우랑 같이 오는 건데. 아니, 아예 타지를 말았어야 했는데.
“……진짜.”
“…….”
“도화리네요?”
“…….”
“…….”
“……네.”
“…….”
“그렇……네요.”
네, 그렇네요. 라니. 나는 당황하여 말이 꼬여 버렸다. 아직 학교 정류장까지는 많이 남았다.
“버스는 왜 탔……어요?”
“……학교. 가려고…….”
“매니저 없어요?”
“……있기는 있어요.”
“안 태워다 준데요……?”
“아니요. 그게. 태워다 주신다고 했는데……. 그러니까 그냥 혼자 버스를 타고 싶어서…….”
“아, 예…….”
교복은 신기한 듯 이것저것을 물어댔다. 나는 나도 모르게 그 말에 대답을 하고 있었다. 나중에야 안 거지만 그 교복은 인터넷에 후기를 올렸고 그는 두고두고 얘깃거리가 되었다. 학교 정류장에 도착해 나는 부저를 누르고 내릴 준비를 했다. 얼굴이 화끈거려 견딜 수가 없다.
“수능 잘 봐요!”
“아, 예.”
“대박!”
“네, 네.”
내리는 순간, 뒷문 주변에 서 있던 사람들이 내게 응원의 말을 전했다. 웃으며 인사를 꾸벅 하고는 괜스레 교복을 털었다. 버스가 다시 출발했으나 그것은 또 다른 관심의 시작에 지나지 않았다. 여고였음에도 굉장히 주목받는 이 기분. 교문에 서 있는 선도부부터 등교를 하던 학생까지. 지도 선생과 눈이 마주친 나는 어찌할 바를 모르다가 인사를 했다. 학교에 그렇게 정성을 쏟았던 적이 없는 것 같은데 이상하다 싶을 만큼 호의적이다. 노래로 1등을 해서 그런가. 뭐, 홍보 효과 그런 거.
그 시선은 내가 교실로 올라가 자리에 앉을 때까지도 계속 되었다. 그 사이에 자리가 바뀌었는지 내 책상은 그냥 복도 쪽 창가 맨 뒷자리였다. 나는 실내화를 갈아 신고 조용히 눈치를 보다가 문제집을 꺼냈다. 그 전에도 특별히 친하게 지낸다거나 하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아무도 내게 대놓고 말을 걸지 않았다. 조례를 하러 들어온 담임 또한 이렇다 할 말없이 그냥 지나갔다. 다만 1교시 시작 전에 몇 몇 아이들이 CD를 들고 와 사인을 부탁했다. 아. 사인. 나는 황송해져서 그저 ‘사인 좀 해 줘.’라는 말에 ‘응, 응.’하는 대답을 연발하며 열심히 사인했다. 아무런 거부감 없이 사인을 해 준다는 소문이 돈 것인지 학년과 반을 가리지 않고 종종 학생들이 찾아왔다. 나 때문에 방해가 되는 것 같아 미안했으나 찾아온 이들도 그것을 아는지 특별히 시끄럽게 굴지 않았다. 이런 나를 분명 마음에 들지 않아 할 사람도 있을 거라는 생각에 나는 4교시가 끝나자마자 결국 옥상으로 올라가 버렸다.
“…….”
옥상은 그대로였다. 오지 않으려고 생각했는데, 생각해 보니 내가 오지 않을 이유 같은 건 없었다. 언제나 이곳을 드나드는 것은 나의 자유였고, 선생은 내가 부르는 날이 아니면 여기 오지 않았으니까. 처음 프렌치아에서 선생과 여자가 함께 있는 장면을 보았던 날. 나는 선생에게 아무런 변명도 하지 말라 종용했었다. 선생은 머리가 좋은 사람이고 배운 사람이니, 내 말이 충분히 무슨 뜻인지 알아들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게 첫 번째든 두 번째든, 프렌치아든 고급 레스토랑이든 상관없을 거라는 것 역시 잘 알고 있을 터다. 선생은 오지 않을 거란 느낌이 강하게 들었고 나는 조금 추운 옥상에서 도시락을 열어 먹기 시작했다.
“아. 석식.”
문득 도시락을 다 먹어 치웠을 때, 야자까지 하고 가려면 저녁도 여기서 먹어야 한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그 동안 야자를 할 때는 바깥에 나가서 사먹고는 했는데, 오늘은 교통카드만 달랑 들고 와서 그럴만한 돈도 없다. 앨범이 많이 팔리고 분명히 통장 어딘가 수익이 들어 왔을 텐데 나는 아직 그걸 확인조차 못하고 있었다. 변함없이 가난한 것도 재주인가. 나는 결국 야자는 무리라는 생각으로 8교시만 끝나면 숙소로 돌아갈 계획을 세웠다. 찬우는 뭘 하는지 문자가 없다. 어쩌면 찬우는 의외로 학교에 친구가 많을 지도 모른다. 아니, 많지는 않더라도 하나, 둘쯤은 있을지도. 그러면 나처럼 밥을 혼자 먹지도 않을 테고, 심심해서 내 문자를 기다리는 일도 없겠지. 문득 헛살았다는 생각이 들었으나 나는 애써 떨쳐 버리고 얼른 다시 교실로 내려왔다. 점심시간이 아직 남아 있었으나, 그래도 선생과 같이 있던 옥상에 오래 있는 것은 내게 그다지 좋은 것만은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5교시, 6교시, 7교시, 8교시. 그 중 7교시가 수학이었다. 수학 시간에는 어떤 여자 선생님이 들어 왔는데, 상당히 엄한 스타일이었다. 수학은 중요 과목이고 또 아이들이 어려워하는 만큼 자습이 아닌 수업을 했는데, 그 선생님의 수업은 한동안 학교를 빠졌던 나조차 이해할 수 있을 만큼 논리 정연했다. 딱 부러지는 성격 같다고나 할까. 과거에 학생 지도부에 있었나 싶은 의심이 들만큼 아이들의 용의 복장에 관심이 많은 듯했다.
“도화리?”
“……네?”
“너야? 도화리?”
“……네.”
“그거, 염색?”
“……아. 죄송해요.”
“쯧쯧. 네 탓은 아니지. 요새 세상이 참 이상해? 아무리 연예인이라지만 그래도 학생인데 염색은 왜 지들 맘대로 시킨대?”
평소에 뭔가 그 문제에 대해 생각이 많았던 듯 결국 선생님은 그 얘기를 꺼내었고 특유의 말투로 아이들을 웃기게 만들었다. 그 이야기의 주장은 결국 ‘헤어 디자이너들은 유죄.’라는 것이었다. 유죄야! 그 상큼한 목소리는 나조차도 웃게 만들만큼 뭔가 이상한 힘이 있었다. 그렇게 수업을 모두 마치고 나는 가방을 둘러매었다. 오늘 내가 문제집을 푼 건지, 사인회를 연 건지 잘 모르겠다. 그래도 10월 음반 판매량이 1위라더니, 헛된 소문은 아니었나 보다. 꽤 많이 팔렸다는 걸 눈으로 직접 확인하니 이상스레 기뻤다. 숙소로 돌아가면 당장 통장의 잔고를 확인해 봐야겠다.
“……교무실.”
야자를 하지 않고 가는 것에 대해 담임에게 말을 할까, 말까 하다가 내 언행 하나가 이미지를 결정한다는 사장의 말이 떠올랐다. 내일도 또 올 건데 말도 없이 가면 어쩐지 담임이 서운해 할 것 같기도 하고, 버릇없어 보일 것 같아서 나는 결국 교무실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다행히 1,2학년의 하교 시간이라 교무실 앞 복도는 상당히 붐비고 있었다. 이 정도면 선생을 마주 해도, 선생이 나를 알아보지 못할 정도는 된 것 같다. 나 또한 교복을 입고 있었기 때문에 그 인파에 섞이면 평범해 보였기 때문이다.
“저기, 선생님.”
“……어? 어, 화리구나. 무슨 일?”
담임은 40대의 남자다. 아마 결혼을 했을 테고, 아이가 있을 것이다. 그 동안 대충 겪어 본 결과 그렇게 철저한 스타일은 아니었기 때문에 내가 야자를 하지 못할 것 같다고 하자 알았다며 쉽게 수긍을 했다. 그리고 금방 보내줄 줄 알았는데, 담임은 나를 앉히더니 입시 자료를 화면에 띄우기 시작했다.
“어디. 무슨 학과 가려고 생각하니? 아, 그래도 내가 담임이니까. 어느 정도는 조금 조언을 해 주고 싶어서.”
“저는…… 음악 관련한 쪽으로 생각 중인데요.”
“네가 성적이 생각보다 괜찮아. 노래 연습하면서도 공부를 하는 줄은 몰랐다.”
그것은 찬우의 영향이었다. 찬우의 부모님은 언제나 찬우가 좋아하는 작곡을 하도록 도와주시면서도 공부를 게을리 하지 않는 것을 조건으로 거셨다. 인간으로서 기본적으로 갖추어야 할 소양이 갖춰지지 않으면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다는 것이 그 분들의 주장이셨고, 그래서 찬우는 비록 공부에 많은 시간을 투자하지는 않았지만 어렸을 때부터 결코 소홀이 하지는 않았다. 나 역시 고아원에 있을 때는 휘겸이와 열심히 공부를 했었고 -비록 성적은 휘겸이만큼 나와 주지 않았지만- 그건 PM에 들어온 이후에도 마찬가지 였다. 내신도 어느 정도는 챙겨 놓았기 때문에 담임은 내게 수시 2차 전형을 추천했다.
“제가 정말 이런 데를 갈 수 있어요?”
“그럼.”
때문에 담임이 내게 보여준 대학들은 다 눈에 익은 대학들이었다. 듣도 보도 못한 대학을 가게 될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괜찮은 말을 들으니 갑자기 희망이 생기며 열심히 해야겠다는 생각이 마구 들었다. 그런 내 표정을 보고 담임이 웃으며 여태 잘 해왔다는 칭찬을 해 주었다. 내가 졸업 전에 학교 선생님에게 칭찬을 들을 줄은 몰랐는데.
“수능 후에 많이 바쁘지?”
“네? 네……. 하지만 사장님께 잘 말씀 드려서 원서도 접수하고 그럴게요.”
“그래. 붙으면 연락 주는 거 잊지 말고. 통계를 내야 하니까.”
“네, 선생님. 그럼…… 이만 가 볼게요.”
인사를 꾸벅 하고 교무실을 나왔다. 나는 시간이 지나 한산해지고 조용해 진 분위기조차 자각하지 못하며 발걸음을 옮겼다. 대학에, 나도 대학에 가는 거다. 당장 숙소로 돌아가 인터넷 뱅킹으로 통장 잔고를 확인 해야지. 등록금이 있어야 하는데……. 그것도 사장에게 빚을 져야 하려나.
“도화리!”
그대로 건물을 나서려던 나는 깜짝 놀라 발걸음을 멈추었다. 내 이름을 저렇게 부를 사람은 별로 없다. 기껏해야 선생 정도. 그러나 여자의 목소리였고, 천천히 뒤돌아 본 곳에는.
“너 내일도 오냐?”
“…….”
아까 7교시 수업을 들어왔던 수학 선생님이었다. 그리고 옆에는……. 정말, 악연일까.
“……네. 와요.”
……같은 수학 교과면 친하게들 지내는 모양이다. 그건 몰랐는데. 뭔가 상의할 것이 있었던 듯 모의고사 문제를 손가락으로 짚으며 열심히 설명을 하던 선생의 입이 다물렸다. 내 수업을 들어오는 수학 선생과, 내 수업을 들어왔던 수학 선생. 조우.
“아. 이 선생님, 혹시 작년에 화리 가르치셨나요?”
나의 수학 선생님은 선생보다 나이가 많아도 열 살은 많다. 그럼에도 정중한 말투는 약간의 거리감이 느껴진다. 그래. 선생은 대인 관계에 있어 뛰어나게 활발한 편은 아니다. 어색한 사이는 아닌 것 같으나 일 문제가 아니면 대화 또한 많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지금 여선생의 입에서 나온 내 이야기는 어떻게 보면 선생에게 있어 일이 아닌, 조금 사적인 이야기.
“……예. 그랬습니다.”
옆에 여자가 없어서일까. 선생은 전보다는 조금 빠르게 굳어 있는 상태에서 깨어난다. 전보다는 조금 빠르게 내게서 눈을 뗀다. 선생의 입에서 나오는 존댓말은 조금 낯설다. 나에게는 언제나 반말이었는데. 처음 만났을 때 몇 분을 제외하면 말이다. 다시 들은 존댓말은 제법…… 뭐랄까. 정형화 된, 틀에 박힌 말처럼 느껴진다. 선생 특유의 우유부단함과 소심함이 드러나 극도로 자제하는 태도. 그러니까 쉽게 말하면 윗사람에 대한 깍듯한 예우. 그래. 선생은 예의가 바르다. 배운 사람이니까.
“오늘 한 번 화리 점수 봤는데, 생각보다 괜찮더라구요. 내신도 그렇고.”
“……예.”
“2학년 때도 잘 했었나 봐요?”
대답을 하지 못하는 선생 대신 나는 입을 열었다. 웃으면서. 선생은 예의는 바르지만, 구렁이를 조금 닮아야 할 필요가 있다. 아침부터 내가 왔다는 이야기들이 돌았을 것 같은데 그에 대한 마음의 준비도 해 놓지 않고 있었단 말인가. 저런 식으로 시선을 피하고 말수가 적어지면 누구나 눈치를 채도 금방 채 버릴 것 같다.
“아니에요. 별로 못했어요. 전 과목 중에도 수학이 제일 어려워요.”
선생님. 선생님은 어려운 사람이에요. 아무것도 보여주지 않아. 입으로도, 눈으로도. 지금 선생님 어떤지 알고 싶어요. 내가 조금 마음에 걸려 아픈가요. 아니면 그 여자랑 데이트도 하고 연애도 하며 지금 행복한가요. 그 정도 알 권리는 있다고 생각했는데. 아닌가 봐요. 나는 그럴 자격 없는 사람인가 봐요.
“……아닙니다. 잘했었죠. ……잘하려고 했고요.”
“그랬죠? 역시. 어디 음악하면서 1등급 나오기가 쉬운 일이던가요. ……그래도 작년 일인데 기억까지 하시고. 이 선생님이 화리한테 관심이 있으셨나 봐요?”
“예?”
나도, 선생도 깜짝 놀라 여선생을 쳐다보았다. 뭘 알고 그러는 눈치는 아니다. 다만 우리가 제 발이 저렸을 뿐이다.
“……저 그만 가볼게요.”
“아, 그래. 수학 내일도 들었어. 내일 보자.”
“네. ……안녕히 계세요.”
여선생에게 한 번 그리고 선생에게 한 번 인사를 하고는 나는 건물을 빠져 나왔다. 화리한테 관심이 있으셨나 봐요? 그 대목에서 눈에 띄게 놀라던 선생의 표정이 잊히지 않는다. 두려운 걸까. 학교에 나와의 관계가, 내가 저를 좋아한다는 사실이 알려지기라도 할 까봐 겁이 나는 걸까. 그 때 여선생의 시선은 다행이도 나를 향해 있었다. 나는 놀라기는 했으나 그걸 드러내지 않을 정도는 되었다. 선생 또한 그것을 다행으로 여기고 있겠지. 우리가 이처럼 남 보듯 하는 사이가 되기 전에도, 선생은 언제나 내가 옥상으로 불러낼 때 곤란해 했었다. 여긴 학교다. 나는 선생이고, 너는 학생이다. 그런 선생마저 나는 귀여웠었고, 그럼에도 언제나 내게 져 주던 선생의 착한 마음이 고마웠었다.
“…….”
그러나 이제는 불러도 오지 않을 것이다. 내가 어느 순간 마음이 약해져 매달려도 오지 않을 것처럼 그는 생각을 고쳐먹었다. 마음도 독하게 먹은 것 같다. 완벽한 연기까지는 아니었으나 평소 선생의 성정을 미루어 볼 때, 분명히 뭔가 결심을 하기는 한 것이다. 나를 밀어내는 것. 그저 수많은 학생과 다름없이 대하는 것. 관심을 가지지 않는 것. 걱정을 해도 티내지 않는 것. 그래. 이렇게 우린 멀어져 가는 것이다. 그리고 나는. 나는.
“그래도…….”
뒤돌아본 학교의 야경은 생각보다 멋있다. 설치된 조그만 백색의 가로등이 교정의 분위기를 살리고 있었다. 겨울이라 일찍 져 버린 해가 조금 아쉽기는 했으나 그것도 그런대로 또 분위기가 있다. 그리고 나는 그래도, 선생이 아무리 그래도 당분간은…… 사랑할 것 같다.
-Common people, Special love-
숙소로 돌아와 인터넷 뱅킹으로 잔고를 확인한 나는 깜짝 놀라 그 자세 그대로 굳어져 버렸다.
“이…… 이게!”
평생 손에 쥐어본 적 없던 돈이다. 나를 길거리로 내 몰 때 원장이 쥐어준 돈 보다, 내가 힘들게 아르바이트를 해서 번 돈 보다 몇 십 배나 더 많은 돈이 지금 내 통장에 있다. 내 통장에 있다는 것은, 지금 365코너로 달려가 이 통장을 밀어 넣으면 내가 이 많은 돈들을 직접 눈으로 확인할 수 있다는 의미가 된다.
“괘, 괜히 음반 판매 1위가 아니야…….”
물론 음반 말고도 다른 수입원들이 있겠지만 그래도 이것은 엄청난 금액이 아닌가. 이 기세를 몰아간다면 내 집도 살 수 있을 것 같고, 찬우에게 밥도 몇 번이고 사 줄 수 있으며, 아이들에게 크게 한 턱을 낼 수도 있다. 이제 선생에게…… 밥은 살 수 없게 되어버렸지만.
“…….”
문득 그 생각이 나자 조금 들떴던 기분이 차악 가라앉았다. 이제야, 이제야 돈을 벌어서 뭘 좀 갚을 만한 처지가 되니까 선생은 저 멀리 가 버렸고 이제 나랑은 다시 엮이고 싶지 않아 할 것이다. 나 자신보다 찬우보다 다른 연습생 아이들보다 간절하게 뭔가를 해 주고 싶은 사람이 선생인데, 이제는 그럴 수 없게 되었다. 내가 자초한 일이었고 누구를 탓할 게재가 못 되었다. 그래도 해 주고 싶다. 해 주고 싶어. 뭔가. 나와 같이 밥을 먹는 건 아니라도, 뭔가를 해 주고 싶다. 단 한 번뿐이라도 뭔가 의미 있는 것을 해 주고 싶다. 머리 좋은 선생이라면 눈치 챌 확률이 높지만, 이름을 밝히지 않고 보내면 나라고 확신할 증거는 없을 테니까 주는 건 어렵지 않을 지도 모른다. 그러면 중요한 것은 무엇을 해 주느냐 인데…….
“무료 식사권……?”
아니면.
“……넥타이? 셔츠?”
무료 식사권은 그 여자랑 같이 먹어버릴 지도 모르니까 안 되고, 역시 의류인가. 넥타이는 내가 직접 매 주면 좋은데. 셔츠도…… 내가 같이 입을 걸 골라주면 좋은데. 선생은 패션 감각이 훌륭한 편이 아니다. 색감이 없는 것인지, 옷이 그다지 많지 않은 것인지. 아마 둘 다일 것이다. 돈을 벌면 쓰는 데가 있어야 하는데 선생은 매우 검소한 편이다. ……검소. 그런 검소한 선생이 여자를 데리고 찬우처럼 돈 많은 귀공자가 가는 레스토랑을. 역시 아무 여자가 아닌 것이 틀림없다. 아, 관둬. 관둬. 생각을 하지 않으려 하는데 뭔가 다른 생각을 하다보면 그게 또 결국 선생의 생각이 되어 버린다.
드드드득- 식탁 위에 올려 둔 핸드폰이 울려 열어보니 찬우였다.
-지금 연습실로 내려 와. 파티 할 거야.
다 같이 저녁을 먹으려나 보다. 아, 이제 돈이 있으니까 내가 사야 하는 건가? 당연히 그래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아직 오늘은 돈을 찾아 놓지도 못했고 나는 카드 같은 것도 없는데…….
-돈 걱정 하지 말고 내려 와. 얼른. 기다린다.
나를 너무도 잘 아는 찬우 때문에 조금 웃음이 났다. 나는 옷을 갈아입는 것이 조금 귀찮게 느껴져 그대로 교복을 입고 연습실로 내려갔다. 언제나 익숙했던 문을 연 순간, 커다란 케이크가 보였다. 스무 개의 촛불. ……아, 맞아. 그러고 보니 이 근처가 내 생일이었다. 오늘이던가, 내일이던가.
“…….”
너무 예쁘게 케이크 옆에 눕혀져 있는 장미 꽃다발에 잠시 숨을 멈추었으나 이내 빙그레 웃음이 떠올랐다. 얼핏 보면 이 넓은 연습실에 케이크와 꽃다발만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저 어둠 속에는 적어도 열 명은 되는 아이들이 숨어 있다. 언제나 혼자 살던 나였기 때문에 아무도 없는 어둠과 사람이 가득 있는 어둠의 차이는 쉽게 분별해 낼 수가 있었다. 그래도 속아주는 게 좋을까.
“야. 그냥 내가 성의를 생각해 속아 주는 거야. 이거 누가 하자고 했어? 연찬우, 너지?”
내 말에 웃음을 참지 못한 어떤 아이가 바람 새듯 웃음을 터뜨렸고 곧이어 들려온 억, 하는 비명 소리로 보아 그 옆에 있는 또 다른 아이가 웃었던 아이를 꼬집기라도 한 것 같다. 어둠 속으로 한 발을 내딛은 순간 불이 환하게 켜졌고, 케이크에 달려왔을 법한 폭죽들이 펑펑 터졌다. 겨울이랍시고 눈 스프레이까지 준비한 아이들을 보며 웃음이 났다. 가장 케이크와 가까운 곳에 있던 찬우가 장미 꽃다발을 들어서 내게 건넸다.
“축하한다, 도화리. 이제 완전히 성인이네.”
“다 늙었다고 노는 데 안 끼워 주기만 해 봐라.”
“축하해. 이건 작지만, 선물.”
깜짝 드밀어진 포장된 상자에 놀라 고개를 드니 구원이가 씩 웃고 있었다. 연습생들의 형편이 어떤지 나는 대게 잘 아는 편이다. 찬우처럼 유복한 집안의 아이가 아닌 이상 돈을 마련하긴 힘들었을 텐데 괜히 구원이 지갑을 턴 것 같아 기분이 썩 좋지만은 않다. 나는 나중에 꼭 구원이에게 맛있는 밥을 사주어야겠다고 생각하며 고맙다 말했다.
“이거 우리가 다 조금씩 돈 모아서 산거야.”
아. 구원이가 산 게 아니었구나. 순간 안도감이 느껴지는 마음과 함께 이상하리만치 배로 기쁨이 커져 버렸다. 여러 사람의 마음이 있는 것이 난 더 좋다. 나는 언제나 많은 사랑을 받고 싶어 했었다. 욕심쟁이였지만, 그래도 그건 어쩔 수가 없는 거였는데. 지금은 왠지 다 이룬 것 같다. 받고 싶은 만큼 다 받은 것 같은 기분.
“그리고 저건…… 팬들이 보낸 거.”
“뭐? 팬?”
“그래. 네 팬들 말이야. 대부분 다 남자 팬들이긴 하지만. 여자 팬도 간간히 있는 것 같기는 해. 생각보다 많이 왔어. 편지도.”
고개를 돌린 구석에는 평생 받아보지 못한 양의 선물과 편지가 쌓여 있었다. 나도 모르게 걸음이 그 쪽으로 움직였다. 내용물이 뭐건, 얼마짜리건 간에 여기 이렇게 모여 있다는 것이 말로 할 수 없을 만큼의 감동을 주었다. 태어난 날을 여태 이렇게 행복하게 보냈던 적이 있었던가. 아니, 없었다. 어차피 고아라서 가짜 생일이니까 선생에게조차 말하지 않았었다. 축하해 줄 가족이 없었고, 형제도 자매도 없었다. 친구……. 그래. 친구는 찬우 하나쯤 있을지도 몰랐다. 언제나 나는 모든 아이들과 찬우만큼 친하게 지낼 수는 없었다. 기본적으로 깔려 있는 사람에 대한 두려움이 원인이었을 것이다. 나는 언제나 사람에게 또다시 버려지거나 상처 입는 것을 병이라 여겨질 정도로 싫어하고 두려워했다. 실제로 원장에게 돈을 받고 스스로 고아원을 나와야 했던 날 이후, 나는 매일 밤 악몽을 꾸기도 했었다. 고아원에서의 삶이 결코 행복하고 즐거웠던 건 아니었으나 기본적으로 생계의 안정감이 사라진 생활은 괴로웠다. 여기 PM에 들어오기 전이나 선생을 만나기 전, 나는 거의 죽어 있었던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런데 지금, 찬우와 구원이 그리고 아이들이 내 생일을 축하해 준다. 내 노래와 나를 좋아해 주는 사람들이 기꺼이 내 생일을 축하해 준다. 순간 내가 고아라는 사실이 대한민국에 다 퍼져 내심 아파했었던 며칠 전의 나 스스로가 우스웠다. 힘내라는, 잘 되어서 다행이라는 그 말들은 어쩌면 동정이 아니라…….
“도화리. 이건 동정이 아니야. 축하지. 저것마저 동정이라고 할 셈이야?”
“……나도 알아.”
동정이 아니라 축하였고, 격려였다. 기쁠 때 눈물이 난다는 게 뭔지 전혀 이해할 수가 없었는데, 지금 그게 뭔지 아주 조금 알 것 같기도 하다. 코끝이 찡한 것이 울기 직전의 느낌과 비슷하니까. 코끝이 싸하다고 잠깐 생각했을 뿐인데 눈에서부터 뭔가 차가운 액체가 흘러내렸다. 알 수 없었다. 기뻐서 눈물이 나는 것인지 슬퍼서 우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다만 이 순간 내 머리를 가득 채워버린 것이 선생인 것만을 알았다. ……보고 싶다. 이런 말 이제 지겹지만, 그래도 보고 싶다…….
이제는 생각만 해도 울게 되는 구나. 뭐가 뭔지 몰라서. 슬픈 것인지, 좋은 것인지 잘 모르면서 그냥 울어버리는 구나. 말이 안 나와서……. 차마 그 앞에서 단 한마디도 떨어지지가 않아서. 그 수많은 사랑한다는 말을 대신하면서……. 그렇게. 눈물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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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난히 출연 분량이 적은 인물들...
음, 왜일까요?
저는 그들을 다루는 것이 두렵습니다 ㅋㅋㅋ
다음 흔/흔/특 16편 연재 예정일은,
1월 29일 금요일 저녁 7시 00분 - 7시 30분 입니다.
읽어주신 분들 모두 정말 감사드려요~^^
첫댓글 ...........두려워하면...내가 원하는..달달한것은요? ㅠㅠ 너무해요 !! 선생이 너무 답답해요-_-하긴.. 화리가 그러라곤 했지만.. 왠지 흐지부지 하는거 같아서..좀.. 꿈에서 처럼 싫다고 소리질러버리던가..-_- 화리가 시키는 대로 하고 마는건가..ㄷㄷㄷ
차분히 지켜봐 주세요~ 읽어주셔서 감사해요 ^^!
아 이제 화리도 유명세를 타기 시작했군요 ㅋㅋㅋㅋㅋㅋㅋ
1등 했으니까요 >.< 읽어주셔서 감사해요~!!
우와화리축하해요~
읽어주셔서 감사해요~ ^^
이예에 오늘은 기쁜화리탄신일
읽어주셔서 감사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