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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혈 포도주에는 극독이 들어있지 않았습니다."
밤을 잊고 뛰어온 폴란드 왕국 자문회 위원들 모두가 핀란드인 리쿠의 다음 말을 숨죽여 기다립니다.
"격심한 갈증을 유발하는 무언가가 들어간 듯합니다. 여공작을 제게 부탁하신 폐하의 다음 분부는, 당장 물을 가져오라는 것이었습니다."
의장이자 재상인 보구발이 무언가를 깨달은 듯 말을 이어갑니다.
"극독은 물에 들어있었겠군."
첩보관 우리야가 난감해하며 답합니다.
"여공작에게 물을 건넨 하인은 이미 죽어있었습니다. 음모자들이 이 바벨 성내에 있다는 뜻입니다."
왕실 고해사제가 이해되지 않는다는 듯 머리를 젓습니다.
"성혈을 마시면, 목이 타서 뒤이어 바쳐진 극독이 든 물을 마시고 죽게 된다... 헌데 이상하지 않습니까?
성혈은 여공작이 바친 것인데, 그녀가 폐하를 해치려 했다면 왜 그 물을 마셨겠냐는 겁니다."
"유대인들은 돈만 주면 뭐든 하잖소?"
날선 말을 던지는 재무상 가르치아를 이번에는 보구발이 제지합니다.
"사안이 중대하니, 불필요한 발언을 삼가시오."
"여공작에게 성혈을 비싼 값에 팔아치운 유대인을 족쳤더니, 술술 불더군요.
실레시아의 볼레스와프와 대폴란드의 미에슈코를 당장 잡아들여야 합니다."
모두의 시선은 리쿠를 떠나 이번엔 가르치아에게 향합니다.
"저희 유대인은 원래 신의라곤 모르는 족속입니다. 돈을 주면 받아먹고, 칼을 들이대면 입을 열지요."
우리야의 관심은 그의 민족을 향한 모욕보다는 그 결정적 자백의 내용에 쏠려 있습니다. 가르치아는 말을 계속합니다.
"성혈은 원래 갈증을 유발하는 물건이 아닙니다. 놀기 좋아하는 마자르인의 왕도 탐내던 것이고,
이 세상 것이 아닌 듯한 강렬한 향기가 사람을 사로잡지요. 그것이 헝가리와 보헤미아, 실레시아를 거쳐 대폴란드로 흘러들어간 겁니다."
"그렇다면 엄청나게 비싼 포도주일 텐데, 누가 그 돈을 대고 처음으로 사갔단 말이오?"
보구발의 질문에 가르치아는 더욱 충격적인 이야기를 털어놓습니다.
"최근 대폴란드 공작 오돈이 체납한 세금의 양이 어마어마합니다. 여전히 제가 왕인 척 행세하는 미에슈코가 아들에게서 돈을 짜냈고,
그 돈은 다시 카이저의 궁정으로 흘러들어갔죠. 독일인의 군대를 사서 왕좌를 되찾으려고..."
"저런 역적놈을 봤나!"
대원수 보구밀이 격노해 회의장 테이블을 두 주먹으로 내리칩니다.
"미에슈코는 매우 실망했겠지만, 카이저의 대답은 '다른 이가 더 많이 바쳤다'는 것이었죠. 왕좌를 되찾겠다는 이가 거액을 먼저 바치고,
그 왕좌를 지키려는 이가 더 많은 금액을 지불했다면, 그 결과는 뻔하잖습니까?"
"칼의 힘을 빌릴 수 없으니, 남은 건 야비한 수법뿐이다...?"
"맞습니다."
보구밀의 말을 침통한 표정으로 긍정하는 리쿠. 가르치아도 고개를 끄덕입니다.
"아무것도 얻지 못하고 빈털털이가 된 미에슈코가 손을 벌린 곳이 바로 실레시아입니다."
이웃 보헤미아가 늘 탐내는 풍요로운 땅. 이 곳을 서로 차지하려고 수많은 피가 흘렀습니다.
"미에슈코, 이 찢어죽여도 시원찮을 놈이...! 죽으려면 혼자 죽을 것이지, 나를 끌어들여 놓고 뻔뻔하게 거짓말까지 해?!"
분명히 그는 독약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하지 않았습니다. 술기운과 약기운에 들뜬 여공작과 국왕이 탐욕스럽게 살을 섞게 될 거라는,
동전 한 닢보다도 못한 싸구려 극본을 들이밀었을 뿐. 그가 적선한 은화 한 접시도 미에슈코의 술값으로 들어갔겠죠.
망명자 비그나니에츠의 아들, 실레시아의 볼레스와프에게 거대한 절망이 덮쳐옵니다.
"저 독사의 혓바닥을 가진 놈을 믿은 내가 바보였다. 쿠야비아와 마조비아를 얻으려다, 이젠 실레시아까지 잃게 되겠군..."
어떻게든 살 길을 찾아야 합니다. 그렇지 못하면, 그는 더 이상 '실롱스키(실레시아의 영주)'로 불리지 못할 겁니다.
"키예프의 마녀는 절대로 지금 죽어선 안된다. 그 년이 입을 열어야 내가 산다."
성혈 한 모금과 작은 잔에 든 물을 마신 리크사는 아직 살아 숨쉬고 있지만, 의식이 돌아오지 않고 있습니다.
애초에 그녀를 죽이려 한 죄로 거액의 벌금을 문 실롱스키. 하지만 그는 정말로 국왕을 시해할 뜻은 없었습니다.
물론 죽이지만 않을 뿐, 왕과 왕비, 왕세자와 제 2왕녀, 제 2왕자를 모두 내쫓고 제 딸을 미에슈코가 낙점한 후계자 브와디스와프와 혼인시키려 했던 사실은 벌써 그의 머릿속에서는 없던 일이 되었지만요.
"도대체 어떻게 여길 빠져나간다...?"
문득 전 쿠야비아 공작 레셰크의 이름이 머리를 스칩니다. 미에슈코의 아들들이 제 아비와 상극이라는 사실을 첩보관으로서 왕에게 고한 자.
그러면서도 미에슈코의 말 몇 마디에 넘어가, 왕을 거스르고 스스로 파멸의 길을 걸었죠.
그가 묻힌 성당에 여봐란 듯 거액의 기부금을 헌납할 만큼, 왕의 죄책감은 여전합니다.
"가만히 있다가는 대원수가 나를 잡으러 들이닥칠 테니, 선수를 치는 게 답이다."
대폴란드 공작 오돈은 안 그래도 아비에게 이가 갈리는 판에, 카이저의 군사를 사들이려는 역모와 엮이게 생겼습니다.
실레시아와 대폴란드는 이제 한 배를 탄 사이입니다. 그의 바짓가랑이를 잡고 늘어지는 것조차 통하지 않는다면...
소 엘레오노르 왕비의 고향에서 쓰는 극형- 교수척장분지형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이건 결코 이유없는 공포가 아닙니다.
레셰크의 반란 당시 배신감과 격노로 머리가 뜨거워져 있던 왕은, 이웃한 그단스크에서 농노들이 폭동을 일으키자 분풀이라도 하듯 그들을 찢어발겼습니다.
폭도들의 수괴는 왕의 성검에 사정없이 난도질당한 후, 목이 매달리고 배에서 장기가 끄집어내졌으며 사지가 잘려 효수되었죠.
바벨 성의 심장, 국왕의 옥좌가 있는 곳. 폐왕 미에슈코 3세 스타리는 천천히 발걸음을 옮깁니다. 한 발, 또 한 발.
옥좌까지는 지척입니다. 곧 손만 뻗으면 만져질 거리까지 다가왔습니다. 한때 자기 것이었던 그 자리.
이제는 그 경멸스런 잉글랜드 여자가 이름지은, '피와 장미의 왕관'을 머리에 쓴 자만이 거기에 당당히 앉을 수 있습니다.
"어울리지도 않는 그 자리가 아직도 탐이 나십니까?"
아무 감정이 섞이지 않은 동생의 목소리에 그는 대답하지 않습니다.
장미정원 한 구석에 독초를 길러, 그 재료와 비방을 자신에게 건넨 아내 에우독시아와, 동생을 대신할 후계자로 점찍은 아들 브와디스와프는 여전히 대폴란드에 있을 터.
카지미에시 2세는 성혈을 사들여 리크사에게 되팔게 만든 실롱스키도, 막대한 돈을 아버지에게 반란 준비금으로 뜯긴 오돈도 처벌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같은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살과 피를 지닌, 형제들 가운데 이젠 유일한 생존자인 스타리만을 크라쿠프로 소환했습니다.
대원수 보구밀은 별 저항 없이 따라가겠다는 그에게 말했습니다.
"내 맘 같아선 당장이라도 죽이고 싶지만, 폐하의 분부가 계시니 살살 다루어야겠지."
"미에슈코 볼레스와보비치."
동생이 아니라 국왕으로서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카지미에시를 그제야 돌아보는 스타리.
"나를 몰아내고 앉은 그 자리는 푹신하니 좋더냐?"
"푹신하진 않아도, 따뜻하긴 하더군. 나를 위해 왕좌를 데우는 네 역할은 여기까지다."
"목에 힘이 바짝 들어갔구나. 손은 떨지 마라. 네 심약함이 다 티가 나서 시끄러울 지경이다."
"벌주어야 할 자를 벌주지 못하는 것은 뭐라 불러야 할까. 힘없는 정의? 아니면 또다른 불의?
아무리 그 아이를 죽이지 않았다고 소리쳐도, 핏자국은 남는다. 그런 내가, 눈앞의 너를 못 죽일 것 같은가?"
"답을 찾았구나."
천국으로 가는 길에 속죄의 눈물을 흩뿌리던 모습은 이제 없습니다.
부정한 엘레오노르가 아버지의 군사들을 데려와 지켜준, '피와 장미의 왕관'이 스프라비에들리비의 머리 위에서 찬란히 빛납니다.
"너희들이 키예프의 마녀라 부르는 그 여인은, 구원 없는 세상에서 제 마음을 쏟아 나를 지켜주었다.
술기운 때문이라는 핑계는 대지 않겠다. 내 의지로 누군가를 원한 일이 있다면, 그건 리크사뿐일 테니까.
하지만... 그녀가 소중하다면, 그 자식들의 미래가 어찌 소중하지 않을까? 내가 뒤로 구르는 바퀴를 거스르고 오늘 여기까지 온 것은,
오로지 내 정숙한 아내, 헬레나 즈노옘스카가 남겨두고 간 그 아이들을 위해서였다. 모든 걸 더러운 추문으로 엮으려는 너희들은 죽었다 깨어나도 모를 것이다."
"이젠 그 아이를 범하지 않았다는 말이 하고 싶은 게냐?"
"진실은 중요하지 않다. 열리기만 하면 거짓을 말하는 네 비뚤어진 입에서 나오는 것이 무엇이든, 패배자인 너에게는 이제 어떤 권리도 없다."
누구도 범접 못할 절대적인 권력. 마시고 마셔봐도 성에 차지 않았던 것은, 평생을 바치고도 그걸 손에 넣지 못했기 때문이겠죠.
"너를 섬기는 충실한 핀란드인이 말하더구나. 내겐 남은 시간이 별로 없다고."
"말귀를 못 알아듣는군. 네 마지막이 언제일지 결정하는 것은 나다."
그래야 한단다. 바퀴장인 피아스트의 후예인 우리는.
"네 판결을 받아들이겠다. 목이 타는군. 거기 있는 작은 잔을 좀 건네주겠나?"
리쿠의 말대로, 고칠 수 없는 불치의 병이 이미 노쇠한 그의 몸을 잠식하고 있습니다.
카지미에시는 물잔을 들고 앞으로 나아갑니다. 한 발, 또 한 발.
그러더니 돌연 거기 든 물을 마셔버리려는 듯 얼굴을 가까이 가져갑니다. 당황한 쪽은 스타리입니다.
"너는, 끝까지 이런 방식으로..."
말을 잇지 못하는 카지미에시의 손끝에서, 리크사가 마신 것과 똑같은 독수가 사정없이 바닥에 흩뿌려집니다.
"내 손으로 너를 죽이게 만들어, 왕좌를 지키는 날들이 하루하루 지옥같도록 만드는 것이 네 마지막 계획이었겠지.
두 번은 당하지 않겠다. 탐욕으로 썩어가는 네 몸뚱이에서 하루빨리 도망치고 싶겠지만, 네 영혼의 마지막 한 점이라도 구하고 싶은 나는 그따위 죽음을 허락할 수 없다."
허탈하게 웃음짓는 그를 남겨둔 채, 카지미에시는 등을 돌려 그 곳을 벗어납니다.
폐왕 미에슈코 3세 스타리는 얼마 후, 말기 암의 고통 속에서 사망하였습니다.
여담
유대인만도 못한 놈에게서 기별이 왔습니다.
"넌 도대체 조카가 몇이냐? 다리 안 부러지게 살살 묶었으니 찾아가라."
스타리의 아들, '길고 가는 다리(라스코노기)'를 지닌 브와디스와프는 누구보다 빠르게 도주했으나... 크라쿠프로 돌려보내졌습니다.
물론, 그의 우정어린 선물에는 착불 택배 영수증만 달려있던 건 아닙니다.
"필리프 오귀스트가 죽었다."
첫댓글 아니 여기서 프랑스가(..)
통수 맞은 거 정산도 하기 전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