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엘리엇의 시 '황무지'로 인해 4월이 잔인한 달이 되었다면 13일의 금요일은 예수님의
처형과 깊은 관계가 있어 보입니다. 2,000여 년 전 울 주님이 돌아가시던 날 13일의
금요일이 시작된 셈입니다. 이 때문에 서양인들은 13을 배반과 불행의 숫자로, 성
금요일을 공포와 불안의 날로 인식하게 됐다 네요(맞나 몰라). 중세에서 르네상스로
-
넘어가기 전 막간을 이용해 ‘무기여 잘 있어(거)라.’를 보았어요. 1932년 생 영화니까
선친과 갑장입니다. 원작자 헤밍웨이, 남녀 주인공 게리 쿠퍼나 헬렌 헤이스, 프랭크
보제이기 감독까지 모두 생을 마감했을 것입니다. 선무당이 보기에도 헤밍웨이
소설은 염세적인 색채가 드리워져 있는 것 같습니다. T.S 엘리엇의 시 황무지입니다.
-
사월은 가장 잔인한 달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키워 내고
추억과 욕정을 뒤섞고
잠든 뿌리를 봄비로 깨운다.
겨울은 오히려 따뜻했지요.
망각의 눈으로 대지를 덮고
마른 뿌리로 약간의 목숨을 남겨 주었습니다.
여름은 우릴 놀라게 했어요, 슈타른베르크 호 너머로 와서
소나기를 뿌리고는, 우리는 주랑에 머물렀다가
햇빛이 나자 호프가르텐 공원에 가서
커피를 마시며 한 시간 동안 얘기했어요.
저는 러시아인이 아닙니다. 출생은 리투아니아지만 진짜 독일인입니다.
어려서 사촌 대공의 집에 머물렀을 때
썰매를 태워 줬는데 겁이 났어요.
그는 말했죠, 마리, 마리 꼭 잡아.
그리곤 쏜살같이 내려갔지요.
산에 오면 자유로운 느낌이 드는군요.
밤에는 대개 책을 읽고 겨울엔 남쪽에 갑니다.
이 움켜잡는 뿌리는 무엇이며,
이 자갈더미에서 무슨 가지가 자라 나오는가?
사람의 아들아[5], 너는 말하기는커녕 짐작도 못하리라
네가 아는 것은 파괴된 우상더미뿐
그 곳엔 해가 쪼아대고 죽은 나무에는 쉼터도 없고
귀뚜라미도 위안을 주지 않고
메마른 돌엔 물소리도 없느니라.
단지 이 붉은 바위 아래 그늘이 있을 뿐.
(이 붉은 바위 그늘로 들어오너라)
그러면 너에게 아침 네 뒤를 따르는 그림자나
저녁에 너를 맞으러 일어서는 네 그림자와는 다른
그 무엇을 보여 주리라.
한줌의 먼지 속에서 공포를 보여 주리라.
-
영화의 배경은 제1차 세계대전(The Great War)당시 당시의 이탈리아와 스위스입니다.
우리가 아는 것처럼 1차 대전은 오스트리아가 헝가리 제국과 한 편을 먹고 세르비아
왕국의 전쟁으로 촉발되었는데 4년 동안(1914년-1918년) 유럽 전체가 전쟁에 휘말리게
됩니다. 18세기 유럽은 늘 전쟁이었으며 특히 7년 전쟁과 프랑스 혁명의 나폴레옹
-
전쟁도 전장은 컸지만, 빈 회의 이후로 약 100년간 유럽 열강들 간의 전투는 크림 전쟁,
보오 전쟁, 보불전쟁이 전부라서 더욱 충격이 컸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제1차 세계
대전과 제2차 세계 대전 사이의 전 간기 동안 전 계층이 전쟁에 참가해서 인민전쟁
(People's War)이라고도 해요. 전쟁 기간 동안 발생한 전사자는 약 1,000만 명이며
-
학자에 따라서는 이 전쟁에 참가한 국가들 대부분이 제국주의 국가라는 것을 지적해
제국전쟁(Imperial War)이라고도 부릅니다. 당장 프랑스, 독일, 영국, 러시아, 오스만,
이탈리아, 일본,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만 봐도 이미 답은 나옵니다. 이 전쟁으로
독일 제국,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오스만 제국, 러시아 제국이 몰락합니다.
-
19세기는 인문학에 있어 중요한 시기였는데 문명국을 자처하던 유럽이 그 어떤 야만인
들보다 더 끔찍한 전쟁을 벌였던 것에 대해서 그들 스스로도 충격을 받았을 것입니다.
산업혁명 이후 급속도로 발전하는 문명이 모든 것을 해결해 줄 것으로 낙관하던 분위기는
문명의 이기들을 이용해 서로 죽고 죽이는 전쟁을 통해 박살이 나고 말았어요. 낭만적인
-
생각을 가지고 전쟁에 자원하던 유럽의 젊은이들을 기다리고 있던 것은 생지옥이었으며
1차 대전 이후로 유럽 문화는 상당 부분 비관적이고 염세적인 분위기가 흐르게 됩니다.
이미 제1차 세계 대전이 터지기 전에 유럽 바깥의 나라들의 군주정은 식민지배나 내부
소요로 무너지고 있었고 그나마 건재하던 유럽의 군주정들도 이 전쟁으로 인해 러시아
-
제국, 독일 제국, 오스만 제국,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등 4개의 제국이 망해 버리고
잠시 세워졌던 핀란드 왕국이나 독일 제국 내부의 수많은 제후국들의 왕정이 폐지되고
10여 개의 신생 공화국이 제국의 폐허 위에 세워지면서 20세기 왕정의 몰락의 신호탄을
울린 전쟁이기도 합니다. 이후 제2차 세계 대전을 거치면서 이탈리아, 유고슬라비아,
-
루마니아, 불가리아, 헝가리, 알바니아의 왕정도 폐지되어 버림으로 유럽의 왕정은 서,
북유럽 지역의 일부 국가를 제외하곤 깡그리 무너집니다. 스토리는 이렇습니다.
군의관인 헨리가 간호보조로 일하는 캐서린과 전쟁 통에 병동에서 만납니다.
헨리라 불리는 주인공은 의무장교로서 중위 계급장을 달고 있는 젊은 미국인인데
-
그는 전쟁 중에 입은 다리의 부상으로 후방으로 송환되어 치료를 받게 되었어요.
그 때 전쟁터에서 잠깐 만난 적이 있던 캐더린과 사랑 만들기에 성공합니다. 이들의
러브스토리는 우연도 필연도 아닙니다. 그냥 외로운 청춘남녀가 만나 사랑을 하는
내용이라고요. 이쯤 해서 비 하인드스토리를 꺼낼 차례입니다. 제가 21살 때
-
첫 휴가를 나왔다가 황 충제의 피아트를 타고 테헤란로를 달리다가 사고가 났어요.
운전을 친구가 했는데 조수석을 받혔기 때문에 제가 2주 동안 병원 신세를 진적이 있네요.
“따르릉, 친구 용준이 녀석이 술 한 잔 하자고 합니다. 생맥 한 잔 했는데 해골에 신호가
왔어요. 충제 형 레코드를 빌려왔다고 했어요. 서울의 야경, 빌딩 숲들이 획획 지나갑니다.
-
어, 쾅! 언놈한테 복부를 야물게 얻어맞은 느낌입니다. 눈을 떠보니 병실입니다.
목이 당기고 배가 고팠습니다. 간호사가 왔고 혈관 주사를 놓아주었어요. 촉촉이 적신
눈이 흰 피부 탓인지 유난히 반짝거렸어요. 좀 더 있어 주길 바랐지만 그냥 볼일 보고
나가버렸어요, 텅 빈 병실엔 공허와 고요만이 엄습해 왔어요. 친해볼까 했는데 곧바로
-
휴가 중이라는 것이 떠올랐고 아쉬웠어요. 출입구 쪽에 온통 신경이 쓰여서 계단 밟는
소리만 들려도 심 쿵 해지는 저는 이제 어쩌지요? 그녀의 이름이 영0이었을 것입니다.
저보다 나이가 한 살 많았을 것인데 상비약을 일일이 펜글씨로 써서 보내준 그녀가 문득
생각이 납니다. 35년이 지났어도 얼굴이 기억나는 걸 보면 그냥 인연은 아니었을까요?
-
헨리 중위가 다리 부상이 완치되어서 임신한 캐더린과 뒷날을 기약한 채 이별하고 다시
전선으로 돌아옵니다. 그러나 복귀한지 이틀도 채 못 되어서 독일군의 대 공격을 받게
되고 결국 패전, 후퇴의 길에 오르게 되면서 부하의 죽음을 목격합니다. 아군에게
첩자라는 누명을 쓰고 총살당하기 직전에 그는 탈출에 성공해서 무기를 버립니다.
-
그에겐 아무런 분노도, 죄책감도 없고 다만 전쟁이 싫었기 때문에 냉혹하게 계급장을
떼어 버린 것입니다. 그는 화물열차에 몸을 싣고 무사히 밀라노에 도착, 캐더린을
만나, 자기를 잡으러 온 헌병들의 추격을 피해 보트로 호수를 횡단합니다. 도피행각도
큰 스릴과 서스펜스는 없었고 무사히 스위스에 도착합니다. 알프스 소녀 하이디가 금방
-
이라도 뛰어 나올 것 같은 스위스의 아름다운 자연에 파묻혀서 크리스마스도 보내고
꿈같은 나날을 함께합니다. 둘만 바라보는 밋밋한 사랑을 저도 해보고 싶긴 합니다.
조건은 온전히 서로만 바라보는 사랑 말입니다. 플롯 전개가 반전도 없고 그냥 밋밋
하다싶었는데 출산 중에 아이가 먼저 죽고 캐서린도 과다 출혈로 인해 죽어요.
-
바람을 피운다든지 출생의 비밀 같은 것도 없이 그냥 죽어요.
그는 병원을 뒤로 하고 비를 맞으면서 쓸쓸하게 호텔로 돌아오면서 엔딩을 맞습니다.
‘노인과 바다’, ‘누구를 위하여 종을 울리나’, ‘무기여 잘 있어(거)라’ 모두 그냥 비망록에
끌쩍거린 일기장을 보는 것 같았어요. 그래서 애정의 결실을 보지 못한 비극적인 종말이
더욱 뚜렷하게 부각되었을까요? 헤밍웨이도 엽총 자살을 했어요, 72세에.
2.
헤밍웨이 작품이 저랑은 안 맞는 것 같다고 생각하고 영화 후기 한편으로 끝내려고
했는데 잉글리드 버그만의 얼굴이 자꾸 떠올라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를 놓을
수가 없었어요. 누구에게나 리즈시절이 있었을 테지만 그녀의 19살은 눈이 부실 만큼
예뻤어요. 그 시대 여인상이 메조키스트이었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녀의 캐릭터에
-
혼을 쏙 빼앗겨버렸다면 저는 자칭 진보가 아닐지도 모르겠습니다. 사랑을 이념으로
논하기는 무리가 있을 테니 그냥 따지지 말고 그녀가 사랑스러운 여인이라고 생각하시라.
제목이 ‘누구의 죽음을 알리는 종소리인가’가 더 좋은 번역일 것입니다. 스페인 내전을
다룬 이 작품은 성공회 신부 존 던(1572~1631)이 쓴 시에서 제목을 따온 것으로 압니다.
-
존 던 이 병상에 있었을 때 ‘묵상(meditations) 17’이라는 제목이 붙은 글의 일부입니다.
“사람은 아무도 그 자체로 온전한 섬이 아니다. 모든 사람은 대륙의 한 조각, 본토의
일부이다. 흙 한 덩이가 바닷물에 씻겨 가면, 유럽은 그만큼 줄어드니, 그건 곶이 씻겨
나가도 마찬가지이고, 그대의 친구나 그대의 영지가 씻겨 나가도 마찬가지이다.
-
누구의 죽음이든 그것은 나를 줄어들게 하는 것이니 그것은 내가 인류에 속해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저 종소리가 누구의 죽음을 알리는 종소리인가 알아보려고 사람을 보내지 마라.
그것은 그대의 죽음을 알리는 종소리이니.“ 큐 티 하는 양반이라 그런지 이제 좀 심오합니다.
-
주인공인 미국인 로버트 조던(게리쿠퍼)은 국제 여단의 일원으로 스페인 내전에 참전합니다.
그는 게릴라들과 협동하여 다리를 폭파하는 작전을 맡아 며칠을 그들과 보내게 되는데 그
곳에서 현지 게릴라들의 지도자인 파블로와 필라르 부부를 만나고, 내전 당시 끔찍한 일을
당하고 게릴라들에게 구출된 후 그들과 생활하던 젊은 여자 마리아를 만나 사랑에 빠져요.
-
한편, 철교를 폭파시키기 위해서는 이 산악지방의 집시의 힘을 빌지 않고서는 불가능해요.
이 집시 두목 파블로는 술을 좋아하는 파블로로인데 이일에 선뜻 협력하려들지 않아요.
그래서 조단은 파블로의 필라와 이 일을 협의합니다. 억척 아줌마 필라 는 자진하여 집시를
지휘해서 이 계획에 원조할 것을 약속해요. 약간의 트러블이 있었지만 파블로의 부하는
-
전원 필라의 명령에 따라 착착 계획을 진행하는데 이러는 중에 스페인의 소녀 마리아와
게리쿠퍼의 러브라인이 블링블링 합니다. 누가 이런 여인을 좋아하지 않을 수 있을까요?
드디어 3일째인 이른 아침, 조단일행은 철교 폭파에 성공합니다. 철교 난간에 매달려
폭파장치를 하는 시퀀스에서는 심장이 존득존득해집디다. 다리가 폭파되었고 적군의 탱크가
-
모두 물에 쳐 박힐 때까지만 해도 해피엔딩인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말을 몰고 달리는
순간, 우리의 주인공 게리쿠퍼가 적군의 포화에 부상을 입습니다. 마리아는 쓰러진 그의
몸에 매달려 울며 불며 초상이났습니다. 조단은 그녀에게 떠날 것을 설득합니다. 가라고?
못 가요. 절대. 마리아는 필라 에 의해 강제로 말에 올라탔고 조단은 최후의 기력을 다해
뒤쫓는 적군에게 총탄을 퍼붓다 장열이 전사합니다. 그리고 교회 종이 울립니다.
누구의 죽음을 알리는 종소리인가?
2020.3.29.sun.악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