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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소개
『국가는 왜 실패하는가』 대런 아세모글루 신간
‘기술 발전=진보’라는 통념을 뒤엎는 역작!
『국가는 왜 실패하는가』로 찬사를 받은 대런 아세모글루의 최신간 『권력과 진보』가 출간되었다. 우리 시대 최고의 경제학자 중 한 명으로 꼽히는 아세모글루는 예비 노벨상이라 일컬어지곤 하는 ‘존 베이츠 클라크 메달’을 수상하였고, 지난 25년간 번영과 빈곤의 역사적 기원과 새로운 테크놀로지가 경제 성장, 고용, 불평등에 미치는 영향을 연구해 왔다. 저자 대런 아세모글루와 사이먼 존슨은 『권력과 진보』에서 과거와 현재를 아우르는 광범위한 연구를 토대로, 정치적·사회적 권력이 어떻게 기술 발전의 방향을 ‘선택’하는지, 그리고 테크놀로지가 어떻게 모두에게 이득이 되는 방향으로 발전할 수 있을지를 치밀한 논증과 함께 설득력 있게 제시한다. 저자들은 책에서 지배적인 계층(권력자와 엘리트)에 의해 설정되는 비전에 도전하고 테크놀로지의 발전으로 취한 풍요를 모두가 함께 공유하기 위해서는 사회의 권력 기반이 재구성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기술의 발전은 모든 것을 해결해 주지 않는다. 그것을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우리의 ‘멋진 신세계’가 어떻게 펼쳐질 것인지 결정된다.
🏫 저자 소개
대런 애쓰모글루
MIT 최고 교수직인 인스티튜트 교수다(현재 총 12명이 있다). 지난 25년간 번영과 빈곤의 역사적 기원, 그리고 새로운 테크놀로지가 경제 성장, 고용, 불평등에 미치는 영향을 조사했다. 2005년에 존 베이츠 클라크 메달(40세 미만의 경제학자 중 경제 이론과 지식에 가장 중요한 공헌을 한 사람에게 수여된다)을, 2016년에 이제까지의 업적에 대해 BBVA 지식 프론티어상(경제학·금융학·경영학 부문)을, 2019년에 키엘 경제연구소가 수여하는 경제학상을 수상했다. 제임스 로빈슨과 공저한 『국가는 왜 실패하는가』 『좁은 회랑』의 저자다.
사이먼 존슨
IMF 수석 경제학자 출신으로 MIT 슬론 경영대학원 교수이며 이곳의 “글로벌 경제 및 경영학 그룹”도 이끌고 있다. 지난 30년간 글로벌 경제 위기와 회복에 대해 연구했으며 『뉴욕타임스』 『월스트리트저널』 『워싱턴포스트』 『파이낸셜 타임즈』 『애틀랜틱』 등에 300편 이상의 글을 기고했다. 존 그루버와 공저한 『점프 스타팅 아메리카』, 제임스 곽과 공저한 『백악관이 불타다』, 베스트셀러 『13인의 은행가』 등의 저자다. 전 세계에서 기업, 정부, 시민사회 단체와 여러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 목차
프롤로그: 진보란 무엇인가
1장 테크놀로지에 대한 통제
2장 운하의 비전
3장 설득 권력
4장 비참함의 육성
5장 중간 정도의 혁명
6장 진보의 피해자
7장 투쟁으로 점철된 경로
8장 디지털 피해
9장 인공 투쟁
10장 민주주의, 무너지다
11장 테크놀로지의 경로를 다시 잡기
감사의 글
출처 및 참고 문헌에 관하여
참고 문헌
사진 출처
찾아보기
📖 책 속으로
이 모든 것이 테크놀로지와 관련해 주목해야 할 가장 중요한 것 하나를 가리킨다. 바로 선택이다. 생산성 향상을 위해 우리의 집합적인 지식을 사용하는 방법은 아주 많으며 혁신의 방향을 잡는 방법은 그보다도 더 많을 것이다. 디지털 도구를 감시에 사용할 것인가? 자동화에 사용할 것인가? 아니면 새로운 업무를 창출함으로써 노동자의 역량을 강화하는 데 사용할 것인가? 미래의 진보를 어느 방향으로 이끄는 데 우리의 노력을 쏟을 것인가?
---「37쪽, 1장 테크놀로지에 대한 통제」중에서
인류가 성취한 기념비적인 기술 진보에 너무 속지 말아야 한다. 공유된 비전은 우리를 덫에 빠뜨릴 수도 있다. 기업은 경영진이 판단하기에 수익을 가장 크게 높일 수 있다고 여겨지는 쪽에 투자한다. 가령 어느 기업이 새로운 컴퓨터를 도입하기로 했다면 이를 통한 매출 증가가 컴퓨터 구매에 들어간 비용을 충분히 상쇄하리라고 판단했다는 의미여야 한다. 하지만 공유된 비전이 행동을 이끄는 세계에서는 일이 꼭 그렇게 전개되지만은 않는다. 모두가 인공지능이 꼭 필요하다고 믿는다면 기업은 더 이득이 되게 생산을 조직할 다른 방법이 있더라도 인공지능에 투자하게 될 공산이 크다. 마찬가지로, 대부분의 연구자가 특정한 방식의 기계 지능을 개발하는 데 집중하고 있다면 다른 연구자도 신실하게, 때로는 맹목적으로 그 길을 따르게 될 것이다.
---「46쪽, 1장 테크놀로지에 대한 통제」중에서
레셉스는 카리스마도 있었고 사업가적 안목도 있었고 야망도 있었다. 프랑스 권력층에 연줄도 있었고 때로는 이집트 당국의 지지도 받았다. 또한 그가 전에 거두었던 성공은 동시대의 많은 사람을 매혹했다. 더 중요하게, 레셉스는 거대한 공공 인프라 투자와 기술 진보가 유럽뿐 아니라 전 세계의 모든 이에게 득이 되리라는 19세기판 테크노-낙관주의를 설파했다. 이 비전이 프랑스 대중, 그리고 프랑스와 이집트의 의사결정자들이 그에게 동참하게 만들 수 있었던 요인이었다. 이러한 비전의 역할이 없었다면 레셉스는 약 190킬로미터에 걸쳐 이집트의 사막을 가로지르는 공사에 엄두를 내볼 만한 의지를 가질 수 없었을 것이고, 계획대로 일이 돌아가지 않기 시작했을 때도 그러한 의지를 가질 수는 더더욱 없었을 것이다. 비전이 없으면 테크놀로지는 아무것도 아니다.
---「102쪽, 2장 운하의 비전」중에서
사회적 권력이 갖는 일반적인 특징은 테크놀로지의 비전과 관련해서 특히 핵심적이다. 자연에 대한 인류의 지배력을 고양하는 방법에 대해 강렬하고 설득력 있는 내러티브를 가지고 있다면 다른 이들, 그 견해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과 그 견해에서 고통받는 사람들을 옆으로 제쳐놓을 수 있다. 그들의 고통에 대해서는 기껏해야 립 서비스 수준의 언급이 나올 뿐이다. 비전이 과잉 확신으로 이어지면 이러한 문제는 더 증폭된다. 이제 그 비전의 경로를 방해하는 사람이나 다른 경로가 있을 수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중요치 않거나 시대에 뒤떨어졌거나 틀린 견해를 가졌다고 여겨지며, 따라서 무시되고 짓뭉개져도 괜찮은 사람이 된다. 비전은 모든 것을 합리화한다.
---「142쪽, 3장 설득 권력」중에서
테크놀로지 혁신과 변화는 늘 있었고, 무엇이 누구에 의해 달성되어야 하는지의 의사결정은 늘 권력을 쥔 사람들이 내렸다. 지난 1만 2000년 동안 농업 테크놀로지는 계속해서 발달했고 때로는 극적으로 발달했다. 생산성이 오르면서 평범한 사람들도 이득을 얻은 시기도 있었다. 하지만 이득이 폭넓은 사람들에게 흘러가는 것은 전혀 자동적으로 이뤄지지 않았다. “폭넓게 공유된 이득”은 토지를 소유한 지배층과 종교 지배층이 자신의 비전을 강요하면서 새로운 테크놀로지가 가져다준 잉여를 모두 추출하기에는 충분히 강력하지 못할 때만 나타날 수 있었다.
---「205쪽, 4장 비참함의 육성」중에서
순전한 자동화는 이와 다르다. 노동자가 산출에 기여하는 바를 증가시키지 않아서 추가적인 노동력을 고용해야 할 필요를 일으키지 않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자동화는 소득 분배에 더 극명한 결과를 낳는다. 아주 크게 이득을 보는 승자(가령, 기계의 소유자)와 아주 많은 수의 패자(가령, 일자리에서 밀려난 사람)를 낳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자동화가 많이 진행되는 곳에서는 생산성 밴드왜건이 더 약하다.
---「276쪽, 6장 진보의 피해자」중에서
더욱 고통스러운 사실은 유럽 식민지 대부분에서는 여건이 개선되기는커녕 상당히 악화되었다는 점이다. 인도 같은 나라는 영국의 직물이 밀려 들어오면서 탈산업화의 길로 심각하게 내몰렸다. 인도와 일부 아프리카 지역 등은 빠르게 성장하는 유럽 산업 영역의 맹렬한 식욕을 채우는 천연자원 공급지가 되었다. 미국 남부 같은 곳에서는 노예제의 형태로 최악의 억압적 노동이 한층 더 강화되었고, 원주민과 이민자에 대한 사악한 차별이 심화되었다. 이 모두가 진보의 이름으로 벌어진 일이었다.
---「309쪽, 6장 진보의 피해자」중에서
거대 기업이 빠르게 덩치를 불린 것은 굉장히 폭넓은 함의를 갖는다. 많은 경제학자들이 이제 거대 기업들이 심지어 더 큰 시장 권력을 행사하고 있으며 그 권력이 경쟁자의 혁신을 저해하고 자신의 경영자와 주주를 살찌우는 데 사용된다고 우려한다. 거대 독점 기업은 소비자에게도 종종 좋지 않다. 가격과 혁신을 왜곡하기 때문이다. 거대 독점 기업은 생산성 밴드왜건에도 문제를 일으킨다. 노동자들을 끌어오기 위한 경쟁이 줄기 때문이다. 그들은 원래도 부유한 주주들을 더 부유하게 만듦으로써 불평등을 꼭대기 쪽에서 강력하게 증폭시킨다. 때로는 거대 기업이 수익을 노동자들과 분배해서 노동자의 소득을 높여주기도 하지만, 지난 몇십 년간 벌어진 제도적 변화의 또 다른 측면이 이를 더 어렵게 만들었다. 바로 노동자 권력의 쇠락이다.
---「398쪽, 8장 디지털 피해」중에서
인간을 밀어내고 막대하게 데이터를 수집하면서도 새로운 테크놀로지가 생산성을 높여 노동 수요를 늘리고 노동자의 소득을 높이는 경우도 있긴 하다. 하지만 노동자들이 얻는 이득은 새로운 테크놀로지가 생산성을 아주 많이 높일 때만 나타날 수 있다. 오늘날 바로 여기에 심각한 문제가 있다. 아직까지는 AI가 “그저 그런 자동화”, 즉 생산성 이득이 그리 크지 않은 자동화만 아주 많이 가져왔기 때문이다.
---「447쪽, 9장 인공 투쟁」중에서
먼 과거와 가까운 과거를 막론하고, 역사를 해석할 때 우리는 결정론적 오류를 저지르곤 한다. 벌어진 일은 벌어졌어야만 했기 때문에 벌어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하지만 종종 이는 정확한 해석이 아니다. 역사가 갈 수 있었을 경로는 아주 많다. 테크놀로지의 역사도 마찬가지다. AI의 세 번째 파도를 규정하는 오늘날의 지배적인 접근 방식은 대규모 데이터 수집과 끊임없는 자동화에 초점을 두고 있는데, 이것은 필연이 아니라 “선택”에 의한 결과다.
---「464쪽, 9장 인공 투쟁」중에서
이 모든 것이 반드시 그렇게 되어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디지털 테크놀로지가 꼭 자동화에 쓰여야 하는 것도 아니고 AI 기술이 꼭 무차별적으로 동일한 추세를 강화해야 하는 것도 아니며 테크 공동체가 기계 유용성을 위해 노력하지 않고 꼭 기계 지능에 현혹되어야 하는 것도 아니다. 테크놀로지의 경로에 미리 예정된 것은 없고, 오늘날 지배층이 만들고 있는 이중 구조의 계층 사회와 관련된 어느 것도 불가피한 것이 아니다.
---「482쪽, 9장 인공 투쟁」중에서
불행히도, 온라인 민주주의는 주요 테크 기업이 가진 사업 모델 및 AI 환상과 부합하지 않는다. 사실 온라인 민주주의는 중요한 의사결정 대부분이 평범한 사람들이 내리기에는 너무 복잡하다고 보는 기술 관료적 접근과 대척점에 있다. 천재들이 공공선을 위해 노력하면서 열심히 일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 대부분의 테크 회사에서의 분위기다. 그들이 중요한 의사결정을 내리는 사람이 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이러한 접근에서 대중의 정치 담론은 독려되거나 보호되어야 하는 무언가가 아니라 이용하고 이득을 뽑아내야 하는 무언가다.
---「530쪽, 10장 민주주의, 무너지다」중에서
🖋 출판사 서평
“민주주의의 운명을 걱정하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읽어야 할 책”
- 마이클 샌델(『정의란 무엇인가』 저자)
“거침없이 진전되는 자동화와 집중된 부와 권력이 멈출 수 없는 추세처럼 보이는 현시대에, 이 책은 우리가 통제력을 되찾을 수 있으며 되찾아야만 한다는 본질을 상기시켜 준다.”
- 아비지트 배너지, 에스테르 뒤플로(2019년 노벨경제학상 수상자, 『힘든 시대를 위한 좋은 경제학』 저자)
“강력한 새 테크놀로지들은 자연적으로 우리 모두에게 이득을 주는가? 150년 전에 산업혁명은 우리의 조상들에게 행복을 가져다주었는가? 오늘날 인공지능은 우리에게 더 큰 행복을 가져다줄 것인가?”
- 재레드 다이아몬드(퓰리처상 수상작 『총 균 쇠』 저자)
더 일찍 나왔어야 할 중요한 책이다.
- 앵거스 디턴, 2015년 노벨경제학상 수상자
역사는 기술 진보가 자동적으로 더 폭넓은 번영을 가져다주지는 않음을 명백하게 보여준다. 인공지능 같은 기술의 진보는 소수의 부유한 특권층만 이득을 보는 결과로 이어질 수도 있다.
- 니얼 퍼거슨, 스탠퍼드 대학 후버 연구소 시니어 펠로우
기술 발전은 곧 진보인가?
통념을 뒤흔드는 경제와 역사에 대한 대담한 재해석
『국가는 왜 실패하는가』로 찬사를 받은 대런 아세모글루의 최신간 『권력과 진보』가 출간되었다. 우리 시대 최고의 경제학자 중 한 명으로 꼽히는 아세모글루는 예비 노벨상이라 일컬어지곤 하는 ‘존 베이츠 클라크 메달’을 수상하였고, 지난 25년간 번영과 빈곤의 역사적 기원과 새로운 테크놀로지가 경제 성장, 고용, 불평등에 미치는 영향을 연구해 왔다. 저자 아세모글루와 존슨은 『권력과 진보』에서 과거와 현재를 아우르는 광범위한 연구를 토대로, 정치적·사회적 권력이 어떻게 기술 발전의 방향을 ‘선택’하는지, 그리고 테크놀로지가 어떻게 모두에게 이득이 되는 방향으로 발전할 수 있을지를 치밀한 논증과 함께 설득력 있게 제시한다. 저자들은 책에서 지배적인 계층(권력자와 엘리트)에 의해 설정되는 비전에 도전하고 테크놀로지의 발전으로 취한 풍요를 모두가 함께 공유하기 위해서는 사회의 권력 기반이 재구성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기술이 발전하면 모든 이들의 생활 수준이 높아질 것이라는 게 기존의 경제 상식이었다. 현대 경제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애덤 스미스는 ‘더 나은 기계의 도입은 거의 자동적으로 노동자들의 더 높은 임금으로 이어진다’고 봤으며, 최초의 근대적 보수주의자로 여겨지는 영국의 철학자이자 정치인 에드먼드 버크 또한 ‘상업의 법칙은 자연법칙이자 신의 법칙’이라고 말했다. 오랜 시간 대부분의 경제학자들은 기술의 진보가 직접적으로 자본이나 노동의 생산성을, 혹은 둘 다를 높인다고 가정해 왔다.
물론 많은 이들이 기술 발전이 혜택을 가져다주는 만큼 그로 인해 발생하는 병폐도 어느 정도는 불가피할 것이라는 사실을 모르지 않았다. 그러나 ‘테크노-낙관주의’에 눈이 먼 이들은 “인류는 자신의 지식을 통제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현명하며, 놀라운 혁신을 이루는 데 사회적 비용이 따른다면 해법은 한층 더 유용한 것들을 발명하는 데 있으리라(25쪽)”고 믿는다. 미래에 가치가 있을 만한 것에 우선 투자하고 밀어붙이고 발전을 향해 나아가면, 그로 인해 발생하는 ‘사소한’ ‘부차적인’ 문제들은 추후 또 다른 과학 기술이 해결해 주리라고 굳게 믿는 것이다.
그러나 기술 발전의 방향을 정하는 집단은 소수의 엘리트층 및 권력가이고, 진보로 인한 풍요는 그들의 주머니를 불린다. 이들은 언제나 자신들에게 이득이 되는 방향으로 비전을 설정해 왔고, 그 비전을 실현하기 위해 공동의 이익이라는 대의를 앞세워 수많은 이들을 뒤로 물러나게 하고 희생시켰다. 이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이들에게는 대다수 사람들을 자기가 원하는 방향으로 가게끔 설득할 수 있는 ‘권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일들은 종종 대놓고 일어났으며, 행여 나중에 그 비전이 엄청나게 잘못된 것으로 판명이 나더라도 이와 같은 패착이 권력자들을 권좌에서 끌어내리지는 못했다.
이 책에서 저자들은 뿌리 깊은 통념에 전면으로 반박하며, 기술 진보로 일궈낸 번영이 결코 자동적인 과정이 아니었으며, 어떻게 하면 우리가 거침없이 질주하는 기술 발전의 경로를 모두에게 이득이 되는 방향으로 ‘선택’할 수 있는지 대담한 통찰을 제공한다.
AI의 발전은 저절로 모두에게 금빛 미래를 가져다주지 않는다
‘진보’라는 환상이 당신의 눈과 귀를 막고 있다
더 늦기 전에 기술의 발전이 궁극적으로는 누구를 위한 것이었는지를 자문해 보아야 한다. 2022년 11월, 오픈 AI는 챗gpt를 세상에 조용히 내놓았다. ‘연구 미리보기’ 정도로 간주해서 주목을 받을 거라 예상하지 못했던 챗gpt는 유례없는 역사를 쓰고 있다. 출시 후 무서운 기세로 입소문을 타며 반년 만에 전 세계 11퍼센트에 해당하는 9억 명의 사람들이 챗gpt를 이용했다. 골드만삭스는 챗gpt가 생산성을 끌어올려 세계 GDP를 7조 달러가량 높일 것으로 내다보면서 동시에 AI 자동화로 3억 개의 일자리가 사라질 수 있다고 분석했다. 그렇다면 챗gpt, 인공지능이 우리 모두에게 번영을 가져다줄 것인가?
소셜미디어가 떠오를 당시, 초기에는 시민들 사이에 열린 광장 역할을 하여 부패와 폭력을 폭로하고 지혜로운 정치 담론의 장을 이루어 민주주의에 이로운 영향을 미치리라 예상했다. 그러나 지금은 가짜 정보를 퍼 나르고 극단주의자들의 혐오 선동이 판치는 온상이 되었다. ‘페이스북’은 플랫폼에 무분별하게 업로드되는 유해한 콘텐츠들에 대해 책임지지 않았고, 오히려 ‘사용자 관여(user engagement)’를 높인다는 목적으로 사람들이 관심을 가질 만한 자극적인 콘텐츠들이 상위 노출되도록 알고리즘을 수정해 거짓 정보가 더 빠르게 확산되고 정치적 양극화가 심해지는 데 일조했다.
중국 정부는 감시를 위한 AI 기술에 막대하게 투자하고 있다. 혹시 모를 반란이 발생하는 것을 예방한다는 이유로 사적인 데이터를 방대한 규모로 수집하여 분석할 것을 주요 테크 기업에 지시하여 사람들의 사회적 활동을 통제하고, 정치적으로 민감한 정보를 즉각적으로 검열하고 삭제하여 대중들의 접근을 차단한다. 강력한 힘을 가진 중국 공산당이 많은 돈을 감시 기술에 투자하자 중국의 테크 기업들에게는 이것이 이와 같은 기술을 먼저 개발할 인센티브가 되었고, 현재 AI 분야에서 유일하게 중국이 미국을 앞선 항목이 ‘데이터’다. 심지어 감시와 억압용으로 개발된 AI 도구들은 신장 지역을 넘어 비민주주의 국가들에 수출되고 있다.
‘아마존’과 같은 거대 기업에서는 생산성을 높이기 위한다는 명목으로 노동자를 감시하고 업무 일정을 엄격하게 관리하며, 작업하는 노동자들의 휴식 시간까지 모니터링한다. 어느 정도의 모니터링은 고용주의 합당한 권한일 수 있다. 하지만 고도의 감시 환경은 노동자를 로봇으로 전락시키고 모멸감을 주며, 무리한 업무 일정과 작업 기준을 맞추느라 위험천만한 상황을 초래한다. 실제로 아마존 물류센터에서의 사고 발생률은 전체 평균보다 두 배나 높았으며, 업무량이 특히 집중되는 피크 시즌에는 더욱 사고가 잦았다.
위와 같은 사례들 모두에서, 거대 기업과 강력한 정부의 ‘선택’으로 인해 피해를 입거나 영향을 받을 시민들의 의견은 수렴되지 않았다. 이러한 디지털 기술 개발을 통해 기업은 어마어마한 수익을 올렸고, 중국 등 비민주적인 국가는 효과적으로 사람들을 감시·통제할 수 있었다. 이 디지털 도구들은 노동자의 생산성을 높이고 수익을 늘리며 기업들이 노동자를 관리하는 데 도움이 되었을지 모른다. 기관 및 정부에게는 데이터를 수집하고 독점하는 기술이 권력을 집중시키고 시민들을 효율적으로 통제하는 데 더없는 도구가 되어주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기술들은 결과적으로 사회적 후생을 낮추고 민주주의를 쇠퇴시켰다. 그럼에도 ‘기술의 발전은 곧 진보’라고 여전히 확언할 수 있을 것인가?
책에서 아세모글루와 존슨은 지난 1,000년의 역사를 정치적·경제적·사회적으로 살펴보며, 기술 발전이 공유된 번영과는 거리가 먼 정반대의 결과를 불러온 순간들을 포착하고 있다. 개선되고 체계화된 농업 기술은 당시 인구의 90퍼센트에 가까운 농민들에게는 부를 가져다주지 못했다. 중세 말 바닷길이 열리고 대서양 교역을 통해 유럽의 일부 사람들은 막대한 부를 축적했으나, 이면에는 그 배로 운송된 수백만 명의 노예가 있었다. 산업혁명 시기 혁신적인 기계의 발명은 공장의 생산량을 크게 늘려주었으나 노동자들은 오히려 더 착취당하고 억압적인 환경으로 내몰렸다. 기술의 발전은 모든 것을 해결해 주지 않는다. 그것을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우리의 ‘멋진 신세계’가 어떻게 펼쳐질 것인지 결정된다.
“공유된 번영은 우리의 선택에 달렸다”
권력이 조준하는 협소한 비전에서 벗어나
공유된 번영으로 나아가게 할 날카로운 제언
아세모글루와 존슨은 이와 같은 낙관들을 정면으로 반증하고, 어떻게 우리가 ‘공유된 번영’을 누릴 수 있었는지를 풍부한 사례를 통해 의견을 개진한다. 기술의 발전은 분명 이 세계에 풍요를 가져다주었다. 몇백 년 전 조상들의 삶에 비해 오늘날의 삶은 가히 비약적으로 쾌적하고 편리해졌음은 자명하다. 저자들에 따르면, 오늘날 우리가 진보의 수혜를 누릴 수 있게 된 주효한 이유는 우리 앞의 세대들이 진보가 공유된 번영을 향해 나아갈 수 있도록 ‘만들었기’ 때문이었다.
오늘날 세계 대부분의 사람들이 조상보다 생활 수준이 높은 이유는 우리 앞에 있었던 산업 사회 국면들에서 시민과 노동자가 스스로를 조직해 테크놀로지와 노동 여건에 대해 상류층이 좌지우지하던 선택에 도전했고 기술 향상의 이득이 더 평등하게 공유되는 방식을 강제해 냈기 때문이다. (19쪽)
저자들은 새로운 기술이 개발되고 발전할 때 그것이 모두에게 이득을 가져다주기 위해서는 해당 기술이 기존에 인간이 하던 업무를 보조하여 인간의 역량을 강화시켜 주고, 새로운 업무를 창출해 내어 노동자를 대체하는 것을 상쇄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또한 테크놀로지의 발달로 얻은 번영을 공유하기 위해서는 더 다양한 곳에 놓인 사람들의 목소리를 듣고 포용적인 ‘비전’을 설정할 수 있어야 한다. 이에 자본 소유자나 사업가들의 반대편에 놓인 노동자들이 목소리를 내고 저항할 수 있는 길항 권력을 가질 때에 ‘공유된 번영’이 더 실현 가능해진다.
영국에서 산업혁명으로 새로운 산업용 기계가 도입되며 셀 수 없는 돈을 벌어들이게 되었지만 다수의 평범한 사람들은 되려 열악한 노동 여건과 심각하게 오염된 환경으로 내몰렸다. 이에 사람들이 조직화하여 테크놀로지 기득권에 맞서자 정부의 비전이 재설정되었고 모두에게 이득이 분배되는 방향으로 내러티브가 조정될 수 있었다. 마찬가지로 20세기 초에 포드컴퍼니의 헨리 포드는 공장에 대량생산 기법이 도입되면서 노동자들의 이탈이 잦아지자 ‘최저임금’ 제도를 도입하고 새로운 기술에 대한 노동자 교육 훈련을 실시했다. 이는 새로운 블루칼라 일자리를 창출해 낸 동시에 노동자들의 생산성도 향상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내러티브가 바뀌고 사람들이 조직된다면, 사회적 압력이 높아지고 절대 도전받지 않을 것 같던 ‘진보’의 방향이 달라질 수 있다. 그것은 아마 쉽지 않은 일일 것이다. 그러나 불가능하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