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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제와 전제에 대한 규례
민 15:1-21
1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2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여 그들에게 이르라 너희는 내가 주어 살게 할 땅에 들어가서
3 여호와께 화제나 번제나 서원을 갚는 제사나 낙헌제나 정한 절기제에 소나 양을 여호와께 향기롭게 드릴 때에
4 그러한 헌물을 드리는 자는 고운 가루 십분의 일에 기름 사분의 일 힌을 섞어 여호와께 소제로 드릴 것이며
5 번제나 다른 제사로 드리는 제물이 어린 양이면 전제로 포도주 사분의 일 힌을 준비할 것이요
6 숫양이면 소제로 고운 가루 십분의 이에 기름 삼분의 일 힌을 섞어 준비하고
7 전제로 포도주 삼분의 일 힌을 드려 여호와 앞에 향기롭게 할 것이요
8 번제로나 서원을 갚는 제사로나 화목제로 수송아지를 예비하여 여호와께 드릴 때에는
9 소제로 고운 가루 십분의 삼 에바에 기름 반 힌을 섞어 그 수송아지와 함께 드리고
10 전제로 포도주 반 힌을 드려 여호와 앞에 향기로운 화제를 삼을지니라
11 수송아지나 숫양이나 어린 숫양이나 어린 염소에는 그 마리 수마다 위와 같이 행하되
12 너희가 준비하는 수효를 따라 각기 수효에 맞게 하라
13 누구든지 본토 소생이 여호와께 향기로운 화제를 드릴 때에는 이 법대로 할 것이요
14 너희 중에 거류하는 타국인이나 너희 중에 대대로 있는 자나 누구든지 여호와께 향기로운 화제를 드릴 때에는 너희가 하는 대로 그도 그리할 것이라
15 회중 곧 너희에게나 거류하는 타국인에게나 같은 율례이니 너희의 대대로 영원한 율례라 너희가 어떠한 대로 타국인도 여호와 앞에 그러하리라
16 너희에게나 너희 중에 거류하는 타국인에게나 같은 법도, 같은 규례이니라
17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18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여 이르라 너희는 내가 인도하는 땅에 들어가거든
19 그 땅의 양식을 먹을 때에 여호와께 거제를 드리되
20 너희의 처음 익은 곡식 가루 떡을 거제로 타작 마당의 거제 같이 들어 드리라
21 너희의 처음 익은 곡식 가루 떡을 대대에 여호와께 거제로 드릴지니라
민 15:1-21 / [희생제사 규정]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셨다. 2) `이스라엘 백성에게 이렇게 일러라. `내가 너희에게 주기로 약속한 그 땅으로 너희가 들어가거든 다음과 같이 제물을 바쳐라.' 3) 맹세한 것을 지키기 위한 서원제물이든지 즐거운 마음으로 바치는 자원제물이든지, 아니면 절기 때 바치는 절기제물이든지, 그 제물의 향기로 나를 기쁘게 하려고 불에 태워 바치는 번제물로 소나 양을 바치는 사람은 4) 그것과 고운 가루 2.2리터에 기름 약 1리터를 섞은 곡식제물을 함께 바쳐라. 5) 또 번제나 다른 제물로 어린 양을 바칠 때에는 포도주 1리터를 전제로 함께 바쳐야 한다. 6) 제물이 숫양일 경우에는 고운 가루 4.4리터에 기름 1.2리터를 섞은 곡식제물을 함께 바치고 7) 전제로 포도주 1.2리터를 함께 바쳐라. 그렇게 바쳐 그 향기로 나 여호와를 흐뭇하게 하여라. 8) 수송아지를 번제물이나 서원제물이나 화목제물로 나 여호와에게 바칠 때에는 9) 고운 가루 6.6리터에 기름 1.8리터를 섞은 곡식제물을 그 수송아지와 함께 바쳐라. 10) 또한 포도주 1.8리터를 전제로 함께 바쳐라. 그렇게 제물을 불살라 바쳐 나 여호와가 그 향기를 맡고 흐뭇하게 하여라. 11) 수송아지나 숫양이나 어린 숫양이나 어린 염소를 바칠 때 반드시 곡식제물과 포도주를 함께 바쳐야 한다. 12) 가축을 여러 마리 제물로 바칠 경우에도 각각에 반드시 곡식제물과 포도주를 함께 딸려서 바치도록 하여라. 13) 이스라엘 본토민은 이처럼 제물을 불살라 바쳐 향기로운 냄새가 나게 하여 나 여호와를 흐뭇하게 하여라. 14) 뿐만 아니라 너희에게 몸붙여 사는 이방인이나 또는 대대로 너희와 함께 섞여 사는 사람은 누구든지 제물을 바칠 때 너희와 똑같이 제물을 불살라 바쳐 향기로운 냄새가 나게 하여라. 15) 나 여호와 앞에서는 너희나 너희에게 몸붙여 사는 이방인이나 모두 이 규정을 따라야 한다. 나 여호와 앞에서는 너희들 모두가 다 똑같기 때문에 16) 이 규정을 똑같이 지켜야 한다.' 17) [맏물로 빚은 떡은 여호와께]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셨다. 18) `너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이같이 일러라. `내가 너희를 이끌어 갈 땅에 너희가 들어가 살게 되거든 19) 그 땅에서 거두어들인 소출로 떡을 빚어 먹을 때, 그 중에서 얼마를 떼어 나 여호와에게 특별한 예물로 바쳐야 한다. 20) 타작 마당에서 거두어들인 곡식을 예물로 바치듯이 거두어들인 곡식으로 맨 먼저 빚어 낸 떡은 나 여호와에게 바쳐라. 21) 너희는 대대로 이 특별한 예물을 나 여호와에게 바쳐라.
하나님은 가나안 땅 입성에 실패한 1세대들처럼 실패하지 않고 장차 가나안 땅에 입성하게 될 세대들이 지켜야할 제사의 규례에 대하여 말씀하십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1-2) 하나님께서 제사제도를 강조하시는 이유는 출애굽한 1세대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에 입성하지 못한 것과 관계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하나님을 올바르게 경배하지 못하는 백성이 되면 하나님의 백성에서 끊어지게 됩니다. 삶의 실패의 뿌리에는 반드시 예배의 실패가 먼저 자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의 참된 만남과 교제를 통하여서만이 하나님과 백성의 관계가 인정되고 유지되기 때문에 제사제도를 강조하십니다.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유지한다면 삶의 모든 일에서도 믿음으로 승리하게 될 것입니다.
여호와께 향기롭게 드릴 때(3-13) 하나님께 드리는 화제, 번제 서원제, 낙헌제, 정한 절기제에 소나 양을 드릴 때 제물에 따라 정해진 양의 고운 가루를 드리는 소제와 기름, 포도주를 드리는 전제를 함께 섞어 드리라고 하십니다. 제사 방식과 정해진 양을 순종하는 것은 드리는 자가 아무리 자기의 것을 드린다 해도 받으시는 이의 마음에 따라 받으시는 제사인지, 받지 않으시는 제사인지 결정되는 하나님의 주권적 의지가 중요함을 나타냅니다. 그러므로 제사의 열납은 나는 너의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나의 백성이라는 인정을 받는 것입니다.
거류하는 타국인에게나 같은 율례이니(14-16) 하나님께 향기로운 화제를 드릴 때 에는 하나님의 명령하신 법과 정해진 양을 지켜드리며, 하나님께 약속을 받은 이스라엘 백성, 곧 같은 민족은 아니지만 출애굽할 때 믿음을 가지고 따라 나온 거류민들과 타국인들도 율례를 지키는 대상이 되었습니다. 이는 그들도 내 백성이라고 선포하셨기 때문입니다.
너희의 처음 익은 곡식 가루(17-21) 이 규례는 가나안 땅을 가는 여정에서 드리는 것이 아니라 가나안 정복을 하고 그 땅에서 첫 농사를 지어 결실을 얻은 것을 하나님께 거제의 방식으로 드리라는 것입니다. 이 약속의 시작을 성취로 마감하신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감사하고 모든 결실의 근원은 하나님께 있음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적용: 당신이 드리고 있는 예배 하나님이 받으시는 예배입니까(롬 12:1)?
하나님 나라는 죽어서 시작되는 곳이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는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순간부터 시작됩니다. 우리 마음에 하나님의 말씀이 주어지는 순간에 하나님 나라의 씨는 뿌려졌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내 마음에서, 내 삶의 현장에서, 우리 가정에서, 우리 교회에서 우리 사회 안에서 내가 머무는 그 곳에서 시작되어야 합니다.
< 설 교 >
예배를 우선순위에 두라
민수기 15장 1-14절 / 이한규 목사
< 예배를 우선순위에 두라 >
가데스 바네아에서 가나안 정탐 후 보인 이스라엘 백성들의 불신앙으로 하나님은 가나안 땅으로 들어갈 준비가 되지 않은 그들에게 광야로 돌아가라고 명령했다. 그 명령을 백성들이 듣지 않고 자기들 멋대로 가나안 땅으로 올라갔다가 가나안 사람에 의해 패퇴했다. 그때 하나님은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임을 알려주시려고 모세에게 제사와 관련된 비교적 상세한 말씀을 주셨다. 그것은 예배를 삶의 우선순위에 두어야 한다는 암시다.
사람들은 흔히 일이 잘 풀리면 하나님을 외면하고 예배를 등한시한다. 그러나 잘될 때도 변함없이 하나님을 경배하라. 욥은 형통할 때도 하나님을 잘 섬겼다. 그는 의로운 부자로써 자녀에게 믿음과 예배의 좋은 모델이 되었다. 그가 겸손하고 신실하다고 해서 잔치를 멀리하게 하지는 않았다. 다만 생일잔치 후에는 하나님을 혹시 욕되게 했을까를 염려해서 자녀를 위해 번제를 드렸다. 그의 삶이 예배가 생활화되었다는 암시다.
욥처럼 잘 나갈 때도 예배하는 삶이 후퇴하지 않도록 하라. 형통할 때 콧노래만 부르지 말고 감사의 노래를 부르라. 형통할 때도 예배에 대한 간절함을 잃지 말아야 행복이 따라온다. 왜 솔로몬이 왕이 된 후 일천번제를 드렸는가? 자기 능력으로는 왕의 역할을 잘 감당할 수 없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예배를 삶의 우선순위에 두어야 나의 한계를 극복하고 나의 재능과 기회를 최대한으로 살릴 수 있다.
< 예배 형식도 중시하라 >
본문 3-4절에 언급된 화제는 제물을 불태워 그 향기를 드리는 ‘제사 방법’이다. 번제는 제물을 불태워 드리는 ‘제사 종류’로서 온전한 헌신을 상징한다. 서원을 갚는 제사는 하나님께 드리기로 서원한 것을 드리는 제사다. 낙헌제는 화목제 중 자원해서 드리는 제사다. 절기제는 절기에 드리는 제사다. 소제는 곡물을 드리는 ‘제사 종류’로서 감사를 상징한다. 소제로 드릴 때 고운 가루 십분의 일 에바(23리터)와 기름 사분의 일 힌(3.8리터)을 섞어 드렸다.
본문 5-10절에 언급된 전제는 번제물이나 화목제물 위에 술을 부어 드리는 ‘제사 방법’을 뜻한다. 화목제는 하나님과의 깊은 소통을 위해 드리는 ‘제사 종류’로서 감사제, 서원제, 낙헌제(자원제)가 있다. 그리고 제사드릴 때는 제물의 수효와 양을 정확히 맞춰 제사드리라고 하셨다(11-12절). 결국 수송아지를 드릴 때는 고운 가루 3/10에바와 기름 1/2힌과 포두주 1/2힌, 숫양을 드릴 때는 고운 가루 2/10에비와 기름 1/3힌과 포도주 1/3힌, 어린 숫양이나 어린 염소를 드릴 때는 고운 가루 1/10에바와 기름 1/4 힌과 포도주 1/4힌을 함께 드렸다.
또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물론 그들과 함께 지내는 타국인이나 오래 거주하면서 동화된 자들도 화제를 드릴 때에는 똑같은 제사법대로 제사하라고 했다(13-14절). 신약적인 의미로는 예배 형식도 중시하라는 뜻이다. 형식주의를 버리라는 말은 형식이 필요 없다는 말이 아니라 형식에 너무 매이지 말라는 말이다. 형식에 너무 매이면 참된 능력을 잃는다.
중세 교회 때 성만찬의 떡과 포도주가 예수님의 살과 피로 변한다는 화체설로 인해 성찬식 후 남은 떡과 포도주를 버리지 못하고 창고에 쌓아두었다. 그때 창고에 들어가 떡을 먹은 쥐가 구원 받았는지에 대한 논쟁과 세례 물에 빠져 죽은 파리가 성화 되었는지에 대한 논쟁을 했다. 형식주의에 빠지면서 중세 교회는 점차 부패해졌다. 북미와 남미의 기독교가 어떤 차이가 있는가? 북미에서는 예배를 생활화했고 남미에서는 예배를 의식화했다.
예배 의식에 너무 얽매이지 말라. 의식과 형식 중심의 예배보다 생활과 내용 중심의 예배를 앞세우라. 물론 의식과 형식도 경시하지는 말라. 내용을 중시한다면서 의식과 형식을 무조건 배척하면 주관적인 견해와 감정으로 본질과 정체성까지 흔들리거나 변질된다. 형식이 내용을 질식시키지 않는다면 적절하고 마땅한 형식은 존중하라. 신앙도 중요하지만 신앙을 오래 보존하기 위해 체계화시킨 신학이란 틀도 있어야 신앙이란 내용도 오래 보존된다.
여호와께 향기롭게
민 15:1-16 / 박봉수 목사
오늘 본문을 자세히 읽어보면 한 두 가지 이해하기 힘든 부분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에 들어갈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바로 앞 장 14:30을 보면 하나님께서 “내가 맹세하여 너희에게 살게 하리라 한 땅에 결단코 들어가지 못하리라” 말씀하셨습니다. 또 14:35를 보면 “그들이 이 광야에서 소멸되어 가기서 죽으리라” 말씀하셨습니다. 게다가 14:39 이하를 보면 저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 가나안 땅을 공격해 들어가다가 패했습니다.
현재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못했고, 또한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이었습니다. 결단코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라는 일종의 저주의 말씀을 듣고 있는 상황입니다. 그런데 본문에 하나님께서 장차 가나안 땅에 들어갈 것이라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도대체 이 말씀은 무슨 뜻일까요?
다른 하나는 자세한 제사 규정이 새롭게 소개되고 있는 점입니다. 4-5절을 보면 이렇게 되어있습니다. “그러한 헌물을 드리는 자는 고운 가루 십분의 일에 기름 사분의 일 힌을 섞어 여호와께 소제로 드릴 것이며 번제나 다른 제사로 드리는 제물이 어린 양이면 전제로 포도주 사분의 일 힌을 준비할 것이요”
그런데 이 말씀은 레 1-3장 말씀과 다릅니다. 번제를 드릴 때 그냥 제물만 바치라 하셨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와 보면 곡물을 더 추가해서 바쳐야 하며 전제로 포도주도 붓게 했습니다. 불과 2년도 안돼서 말씀하신 내용을 보완하신 것입니다. 도대체 왜 그렇게 하셨을까요?
이런 두 가지 의문을 품고 본문을 보다 깊이 성찰해 보면 하나님의 보다 깊은 뜻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역시 하나님이시구나
오늘 본문 말씀을 자세히 살펴보면 결론적으로 말할 수 밖에 없는 것이 있습니다. “역시 하나님이시구나!”
우선 하나님은 크신 분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택하셨습니다. 사 41:14를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버러지 같은 너 야곱아 너희 이스라엘 사람들아 두려워하지 말라 나 여호와가 말하노니 내가 너를 도울 것이라” 원래 이스라엘 백성은 벌레 같고 지렁이 같은 연약한 존재들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택하셔서 하나님의 소중한 도구로 삼으셨습니다.
그런데 연약한 그들이 허물까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저들을 도우셔서 애굽에서 구원해 내셨습니다. 그리고 시내산에서 하나님의 특별한 백성으로 세워주셨습니다. 그런데 저들이 원망하고 불평합니다. 차라리 애굽으로 돌아가기를 바랍니다. 또한 하나님을 말씀을 불순종합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저들을 미련없이 버리실 상황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면 저 이스라엘 백성을 그래도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38년 동안 광야에서 더 훈련 받게 하신 후 광야에서 태어난 출애굽 2세들을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또 참으셨습니다. 그리고 또 한번의 기회를 주십니다. 연약한 존재를 택하신 것도 감사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못하고 불순종합니다. 그런데 용서하시고 또 한 번의 기회를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할 수 있는 말은 역시 하나님이시로구나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우리 자신을 보면 실망하게 됩니다. 주변 상황을 보면 절망하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을 바라보면 희망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분은 우리의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들어 쓰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우리의 허물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새로운 기회를 주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국민일보에서 영동농장 김영복 회장의 이야기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 이분은 한 때 잘 나가던 사업가였습니다. 그러던 중 사고로 사업을 접어야 했습니다. 그리고 고향에 내려가 양식업을 시작하다가 완전히 망하고 말았습니다. 완전히 좌절하고 절망하여 술에 절어 미친 사람처럼 방황하다가 전도를 받고 예수를 믿게 됐습니다. 이제부터는 인간적인 잔꾀나 오기로 살 것이 아니고 오직 하나님의 인도하심만 받고 살겠다고 다짐하게 됐습니다.
그러던 중 기도 하다가 중동 사막지대에 노무자들이 먹는 김치용 배추를 사막에서 재배해 보자는 꿈이 생겼습니다. 모래땅과 섭씨 50도의 뜨거운 햇빛에서 채소를 가꾼다는 것은 모두 다 불가능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아무도 거기에 손을 대지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이 꿈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라 믿고 뛰어들었습니다. 땅을 찾아 빌리고 농부들을 데려다 배추를 심고 키웠습니다.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너는 나의 백성이니 너의 일은 모두 나에게 맡겨라’ 라는 말씀을 마음에 새겼습니다. 크신 하나님이 나와 함께하신다는 믿음으로 정진했습니다.
수많은 시행착오가 있었지만 결국 기적같이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사우디 현지 농장에서 무와 배추가 생산되자 엄청난 주문이 밀려들게 되었습니다. 사우디 대지주들이 수십 만평의 땅을 개발해 달라는 주문을 하여 농장 네 개를 더 개발해 주자 사우디 정부에서는 녹색혁명 기수란 칭호를 주었고, 개인 외화 송금액 1위로 한국에서 산업 훈장도 받았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크신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연약하고 허물 많은 나 자신을 바라보면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다음으로 하나님은 전지하신 분이십니다.
레위기 1-7장을 보면 제사에 관한 규례를 말씀하셨습니다. 번제, 소제, 화목제, 속죄제, 그리고 속건제를 드리는 자세한 규례를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하신 장소는 시내 광야 한 복판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곳에서 농사를 지을 수가 없었습니다. 아직 본격적으로 목축도 하기 힘이 든 상황입니다. 그저 애굽에서 부터 끌고 나온 가축들을 돌보는 정도입니다. 그래서 이 제사 규정은 기본 원칙을 담고 있지만 당시 상황을 반영한 것일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본문에 와 보면 저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갈 것을 전제하고 있습니다. 그곳에서 목축도 하고 농사도 지어서 많은 소출을 얻을 것을 전제로 하셨습니다. 그래서 제사 규정도 보완하여 말씀하시고 계신 것입니다. 즉 제사를 드릴 때 곡물 제물도 곁들여서 바치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오늘은 물론이시고 또한 우리의 내일도 이미 잘 알고 계십니다. 그래서 우리의 오늘은 물론이고 내일에 관한 것도 배려하셔서 우리의 앞길을 인도하십니다. 그래서 때로는 당황스럽기도 하고 때로는 받들기 힘든 명을 하실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의 미래를 미리 아시고 인도하신다는 점을 믿고 순종하고 나아가야 하겠습니다.
지난 주간 잠시 중국을 다녀왔습니다. 한 자매를 만나 영적 교제를 나누었습니다. 제게 신앙상담을 청했지만 오히려 제가 도전과 은혜를 받았습니다.
이분은 한 직업학교에서 한국어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원래 공산당원이었고, 대학에서도 철저하게 공산주의 사상을 훈련받아서 예수를 믿을 수 없었던 분입니다. 그런데 하나 밖에 없는 아들이 속을 썩입니다. 공부를 안하는 것은 물론이고 생활 자체가 문란하기 그지없습니다. 게다가 엄마를 거칠게 대합니다. 이분은 살 소망까지 잃어버렸었다고 말합니다.
그러던 중에 전도를 받고 예수를 믿게 됐습니다. 예수 안에서 소망을 찾게 됐습니다. 새벽기도를 드리면서 아들에 문제를 하나님께 맡겼습니다. 놀랍게도 마음에 평안이 찾아오게 됐습니다. 다시금 아들에 대한 사랑을 되찾게 됐습니다. 아들에게도 조금씩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이분이 제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는 아들 때문에 예수를 믿게 됐습니다. 비록 지금 이 아들이 제게는 고통을 주지만 장차 이 아들 제게 큰 기쁨을 줄 것으로 믿습니다. 지금 제게 절망을 주었지만 장차 희망을 줄 것으로 믿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미래를 모릅니다. 그래서 불안해 하고 절망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미래를 이미 다 알고 계십니다. 그래서 우리를 선한 길로 인도하십니다. 그분을 따라 나아가면 우리는 희망을 찾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큰 기쁨을 얻을 수 있습니다.
여호와께 향기롭게
“역시 하나님이시구나”라고 깨달은 우리에게 본문이 제시하는 메시지는 이것입니다. 여호와께 향기롭게 지사를 드리라는 것입니다.
우선 여호와께 제사를 드려야 합니다.
3절을 보면 “여호와께 화제나 번제나 서원을 갚는 제사나 낙헌제나 정한 절기제에 소나 양을 여호와께 항기롭게 드릴 때에...” 제사는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라고 못 박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여호와께 제사를 드린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요? 바로 여호와를 위해서 제사를 드려야 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창 12:7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 이르시되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 하신지라 자기에게 나타나신 여호와께 그가 그곳에서 제단을 쌓고”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명을 따라 가나안으로 나아갈 때 세겜이라는 곳에 처음 도착을 했는데 그곳에서 제일 먼저 한 것이 예배였다는 것입니다. 옛 개역성경을 보면 이 부분을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자기에게 나타나신 여호와를 위하여 그곳에 단을 쌓고”
그렇습니다. 예배는 우선 하나님을 위해서 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기 위해서 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찬양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그분께 예물을 드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면 하나님께서 복을 주셔서 예배드리는 사람들에게도 참 좋은 일들이 일어납니다. 은혜를 받게 됩니다. 말씀을 듣게 됩니다. 복을 받게 됩니다. 그러나 이것은 예배의 목적이 아닙니다. 예배를 통해 얻는 부수적인 결과일 뿐입니다.
출 20:4을 보면 이렇게 되어있습니다.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잘못된 예배의 문제를 지적하신 것입니다. 바로 “너를 위해 예배를 드린다는 것입니다.” 우상숭배의 본질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사람들을 위한 예배라는 것입니다. 비록 하나님께 예배를 드려도 그 예배의 목적이 예배자 자신을 위한 것이라면 우상숭배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오늘도 이 땅에서 드려지는 수 많은 예배가 잘못되고 있습니다. 물론 그 형식도 문제고 우상을 세워두고 예배드리는 것도 문제입니다. 그러나 결코 간과할 수 없는 문제는 사람들을 위한 예배가 만연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설교가 점점 개그화 되어가고 있습니다. 재미있고 웃겨야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사람들이 듣고 싶어하는 내용으로 변질되고 있습니다. 위로를 주는 설교, 복을 선언하는 설교, 할 수 있다고 용기를 주는 설교들 위주가 되고 있습니다.
예배 형식이 유행을 타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좋아하는 예배 음악들로 변해가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예배드리기 좋은 시간으로 예배 시간대가 바뀌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예배 드리기 편한 시설로 바뀌고 있습니다. 물론 예배 형식에서 사람들을 배려해야 합니다. 그러나 사람이 중심이 되면 안됩니다.
예배자들이 이동해 갑니다. 듣고 싶은 설교를 하는 교회로 예배자들이 이동해 갑니다. 최근에 급성장하는 교회들 가운데 교회 성장 원인이 바로 예배자들의 수평이동 때문인 경우가 많습니다. 다니기 편한 곳으로 교회를 쉽게 옮기는 경우도 많습니다. 역시 사람들 중심의 예배 현상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의 예배는 하나님을 위해 드리는 것입니다. 나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 때문에 예배를 드린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다음으로 향기로운 제사를 드려야 합니다.
3절을 보면 “여호와께 향기롭게 드릴 때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의 의미는 레위 1:9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제사장은 그 전부를 제단 위에서 불살라 번제를 드릴지니 이는 화제라 여호와께 향기로운 냄새니라” 제단 위에서 제물을 불살라 하나님께 드릴 때 하나님께서 그 제물이 타는 연기를 향기로 맡으신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흠향하신다는 것입니다.
엡 5:2를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 같이 너희도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 그는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제물과 희생 제물로 하나님께 드리셨느니라” 사도 바울은 예수님께서 자신을 버리신 희생이 바로 구약의 제물들이 불살라져 하나님께 향기로운 제사가 된 것과 같다고 비유하여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향기로운 제사는 우선 수고가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 예배 드리기 위해서 주의 전을 찾는 수고가 있어야 합니다. 예배 시간에 최선을 다해서 마음을 드리고 시간을 드리고 헌금을 드리는 수고가 있어야 합니다. 이럴 때 향기로운 제사가 되는 것입니다.
2005년 한미준이 발표한 통계 중 예배에 관한 부분을 살펴보면 이렇습니다.
우선 예배 참석 여부에 관한 통계입니다. 매주 참석 65.2%/ 한달 2-3회 18.0%/ 한달 1회 3.7%/ 한 달 1회 이하 1.4%/ 참석 안함 11.7% 그러니까 약 2/3 정도만 매주 참석하고 1/3은 잘 참석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다음 참석하지 않는 이유에 관한 통계입니다. 직장, 학업 문제 33.3%/ 게을러서 33.3%/ 가정 문제 13.7 %/ 거리가 멀어서 2.0%/ 싫은 사람 때문에 2.0% 이유도 가지가지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향기로운 제사를 드리려면 예배를 위한 수고가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향기로운 제사를 위해서는 정성이 필요합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농사를 짓기 전과 농사 지은 후의 제물이 달라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가면 농사를 지을 것이기 때문에 반드시 소출이 있을 것입니다. 그 때 그 소출로도 제물을 드리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막 12:42 이하를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한 가난한 과부는 와서 두 렙돈 곧 한 고드란트를 넣는지라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다가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가난한 과부는 헌금함에 넣는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 그들은 다 그 풍족한 중에서 넣었거니와 이 과부는 그 가난한 중에서 자기의 모든 소유 곧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니라 하시니라”
여기서 렙돈은 우리 돈으로 약 60원 정도의 가치입니다. 그러니까 두 렙돈은 120원 정도라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두 렙돈을 헌금한 과부가 가장 많은 헌금을 했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 과부에게 이 돈은 백만장자의 수십억보다 더 큰 가치였기 때문입니다. 결국 예수님께서 정성의 무게를 보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의 예배가 하나님께 향기롭습니까? 여러분의 예배에 수고가 있습니까? 여러분의 예배에 정성이 담겨있습니까?
하나님께서는 크신 분으로서 연악하고 허물 많은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 삼으셨습니다. 전지하신 분으로 우리의 앞길을 열어주고 계십니다. 이제 우리가 바로 이런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이 예배가 향기로운 예배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믿음 안에서 하나 되라
민수기 15장 15-16절 / 이한규 목사
< 민족적인 편견을 버리라 >
하나님은 제사와 관련해 명령하셨다. “회중 곧 너희에게나 거류하는 타국인에게나 같은 율례이니 너희의 대대로 영원한 율례라 너희가 어떠한 대로 타국인도 여호와 앞에 그러하리라/ 너희에게나 너희 중에 거류하는 타국인에게나 같은 법도, 같은 규례이니라(15-16절).” 회중은 ‘단순한 사람들의 모임’인 회중(congregation)이 아닌 ‘특별한 목적 하의 모임’인 총회(assembly)를 뜻한다. 즉 당시 회중은 혈통적인 히브리인을 뜻하기보다 인종이나 혈통을 초월해서 여호와 신앙을 가진 사람들의 모임인 영적인 유대인을 뜻하는 용어다.
타국인도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거하길 원하면 그들을 받아들이면서 그들에게도 율법을 지켜야 할 책임과 동시에 이스라엘 사람들이 누리는 권리와 혜택이 똑같이 주어졌다. 그것을 보면 유대교는 원래 폐쇄적이거나 배타적인 종교가 아니었다. 기독교인도 하나님의 뜻과 말씀을 의도적으로 왜곡하지 않고 성도의 책무를 저버리지 않는다면 예수님 안에서 어떤 차별, 배타, 편견도 없기를 힘써야 한다.
예전에 한 미국 교회 담임목사가 사임했다. 교회 중직과의 갈등 때문이었다. 나중에 장로들이 담임목사가 사임한 경위를 밝히면서 이렇게 말했다. “젊은 목사가 나이 많은 장로들과 한마디 상의 없이 강사를 초청해서 문제가 생겼죠. 그분은 이태리계 이민자 출신인데 너무 질서와 체계를 존중하지 않는 것 같아요. 그러면 됩니까?”
담임목사가 장로들과 한마디 상의 없이 부흥회 강사를 초청했다면 잘못한 것이지만 그때는 담임목사의 말도 들어봐야 누구의 잘못인지 바르게 판단할 수 있다. 그러므로 누구의 잘못이 더 큰지는 사실상 정확한 내막을 알 수 없다. 그러나 그 경우에 장로들에게는 있었던 아주 큰 잘못은 문제의 본질과 관계없이 담임목사가 이태리계 출신임을 밝힘으로 민족적인 편견으로 자기들의 견해를 옳게 보이려고 한 것이다.
< 믿음 안에서 하나 되라 >
편견적인 언어로 자신의 옳음을 증명하려는 태도는 비겁한 태도다. 사람들의 언어생활을 보면 그런 편견적 언어구사가 상당히 많이 발견된다. 편견적 언어 구사는 자신이 아무런 잘못과 인격적인 결함이 없는 사람인 것처럼 보이려는 의도가 깔려 있다. 또한 자기의 깨끗함과 정당함을 역으로 증명하려는 본성 때문에 구사한다. 편견적 언어를 구사하는 사람의 공통적인 자세는 자기 잘못에 대해서는 쉽게 용납하지만 남의 잘못에 대해서는 쉽게 용납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자기가 잘못된 삶을 살지 않는 의로운 인생임을 편견적 언어구사를 통해서 역으로 증명하려는 것은 잘못된 태도다. 편견은 교만을 나타내는 증거다. 교만에도 두 종류가 있다. 진짜 무엇인가를 가지고서 교만한 것과 가진 것이 없으면서 교만한 것이다. 진짜 무엇인가를 가지고서 교만해진 사람은 사람의 본성을 생각하면 어느 정도 이해가 가지만 가진 것이 하나도 없으면서 편견적 언어구사를 통해 남을 부당하게 폄하하는 모습은 부끄러운 모습이다.
누가 더 편견이 심한가? 진짜 무엇인가를 가지고서 교만해진 사람은 의외로 편견이 심하지 않다. 있는 사실을 사실대로 드러내고 남과 정당한 비교를 해도 자기가 가진 것이 있어서 자신감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세울 것이 별로 없는 사람은 의외로 편견이 심하다. 수시로 편견을 내세워 자기 입자를 세우고 자기가 타당함을 증명해야 하기 때문이다.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남에게 편견을 가지고 대하지 말라. 남에게 편견을 가지다 보면 자신은 마치 심판자가 된 느낌을 가지게 하고 자신은 죄가 없는 사람인양 착각하게 한다. 그런 태도가 결국 패망의 원인이 된다. 모든 사람에게는 편견적이고 배타적인 본능이 있다는 사실을 겸허하게 인정하고 예수님 안에서 하나 됨을 이루려고 힘쓰 때 그가 드리는 예배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참된 예배가 된다.
앞날을 속단하지 말라
민수기 15장 17-20절 / 이한규 목사
< 처음 익은 곡식으로 감사하라 >
거제는 추수할 수 없는 광야에서 지키라는 규례가 아니라 가나안 땅에 들어가 정착해서 농사를 짓고 추수할 수 있을 때 여호와께 거제를 드리라는 규례로서 결국 추수에 대한 감사 제사다(18-19절). 거제란 제물을 높이 들어 하나님 앞에 올려드렸다가 내리는 방식으로 하는 제사 방법이다. 거제 떡은 처음 익은 곡식 가루로 만들어 타작마당의 거제 같이 들어 드려야 했다(20절). 처음 익은 곡식으로 감사 제사를 드리는 것에는 어떤 의미가 있는가?
첫째,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고 감사하라는 뜻이다. 내게 집중된 마음을 하나님께로 집중하라. 내게 집중하거나 사물이나 환경에 집중해도 감사하기 힘들다. 어떤 것도 천하보다 귀한 사람을 만족시킬 수 없다. 마음을 하나님께 집중해야 참된 감사가 나온다. 하나님께 집중할 때는 특히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에 집중하라. 예수님이 죄로 죽게 된 나 대신 죽으심으로 구원의 은혜를 베푸셨다. 그 은혜를 생각하며 기본적인 감사를 잃지 말라.
둘째, 처음의 작은 것으로도 감사하라는 뜻이다. 아직 내가 바라는 결과가 나오지 않아도 감사하라. 처음의 작은 은혜를 감사하면 나중에는 인생 전체가 감사로 채워진다. 나의 감사가 흥정하는 감사가 되지 않게 하라. 즉 “하나님! 기도를 들어 주시면 감사하며 이렇게 하겠습니다.”라고 하지 말라. 결과를 보고 감사하지 말고 첫 열매만으로도 감사하라. 내가 원하는 것을 다 얻지 못했어도 내게 주어진 작은 것과 적은 가능성만 가지고도 감사할 때 하나님은 더욱 큰 축복으로 함께 하실 것이다.
셋째, 양이 얼마 되지 않아도 감사하는 마음으로 드리라는 뜻이다. 추수를 마친 후 곡식으로 떡을 만들어 드리면 더 많이 드릴 수 있지만 하나님은 처음 익은 곡식으로 떡을 만들어 드리라고 했다. 양과 상관없이 먼저 작은 것으로도 감사하며 드리면 더 많은 감사거리가 주어진다. 그러나 더 많은 감사거리가 주어지지 않아도 괜찮다. 이미 감사한 삶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기 때문이다. 가진 것이 없어도 감사가 넘치는 사람이 가진 것이 많아도 감사를 모르는 사람보다 복된 사람이다.
넷째, 현재의 모습 그대로 감사하라는 뜻이다. 처음 익은 곡식의 적은 양을 생각하면 아쉬움 때문에 이런 생각이 들 수도 있다. “하나님이 더 주시면 더 감사할 수 있는데....” 그러나 지금의 적은 양으로 감사하지 않으면 앞으로 많은 양을 가지고도 감사하기 힘들다. 왜 사람이 불평하는가? 현재의 모습을 보고 너무 속단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뜻과 섭리를 속단하지 말라. 하나님의 오묘하신 뜻은 눈에 보이는 것만이 전부가 아니다.
< 앞날을 속단하지 말라 >
앞날을 너무 쉽게 속단하지 말라. 사람들은 너무 쉽게 판단해 결정하고 너무 쉽게 절망한다. 인생이란 복잡한 것이고 하나님의 뜻은 나의 생각을 초월한다. 현재의 모습만 보고 평가하지 말라. 눈에 보이는 대로 살아가는 현실주의자에게는 눈에 보이는 것만이 진리이기에 더 큰 것을 보지 못한다. 사람이 보면 얼마나 보며 들으면 얼마나 듣겠는가? 그 사실을 인정하지 않고 속단하면 편협하게 살 수밖에 없다.
사람은 대개 자기의 관심 영역 안에서만 보고 듣는다. 한 애기 엄마는 소리에 대해 둔감해서 잘 때는 자명종 소리도 못 듣고 남편 나가는 소리도 못 듣는다. 그 엄마가 어떻게 엄마 노릇을 하나 걱정되지만 아이가 내는 작은 소리는 신기하게도 금방 알아차린다. 그만큼 내가 보고 듣는 것이 한정되어 있다는 뜻이다. 현재의 모습으로 속단하지 말고 그 모습 그대로 감사하면 하나님이 그 감사를 받고 지금보다 훨씬 복된 미래가 펼쳐지게 하실 것이다.
처음 익은 곡식으로 떡을 만들어 하나님 앞에 거제로 드릴 때 흔히 두 단계로 나뉜다. 첫째, 떡을 하나님 앞에 들어 올리는 단계로서 하나님이 그 감사를 받으시는 것을 상징한다. 둘째, 다시 그 떡을 내리는 단계로서 드려진 떡이 제사장을 위한 떡으로 변함을 상징한다. 하나님께 감사를 올려드리면 하나님은 그 감사를 통해 영광 받고 그 감사로 주어지는 은총을 다시 내게 돌려주신다. 즉 내가 감사하면 더 큰 감사거리가 내 품으로 다시 돌아온다.
민수기 15:1-21
찬송가 206장 ‘주님의 귀한 말씀은’
내가 주어 살게 할 땅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따라 출애굽 한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을 향해 가는 여정 중에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고 하나님을 원망하고 불평했습니다. 하나님을 원망하고 불평한 백성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함께 하지 않으심에도 아말렉인과 가나안인을 치겠다고 고집부렸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고집부리며 참패를 당한 상황에서도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1~2절입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여 그들에게 이르라 너희는 내가 주어 살게 할 땅에 들어가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명령을 거스르고 하나님을 배반했던 가데스 바네아 사건으로 인해 광야에서 40년 동안 지내야 하는 징계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일이 아니라고 말을 해도 가나안을 점령하겠다는 불신앙의 모습을 보이는 백성에게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해 ‘너희는 내가 주어 살게 할 땅에 들어가서’라고 말씀하십니다.
출애굽 1세대들은 여전히 불신앙으로 살고 있지만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들어가야 할 출애굽 2세대들이 하나님을 어떻게 섬기며, 어떻게 경배해야 하는지를 알려주기 위해 말씀하고 계십니다. 1세대들이 하나님께 징벌을 받았다 해서 2세대들에게까지 하나님의 약속을 파기시키신 것이 아닙니다. 신실하신 하나님의 약속은 변함이 없음을 본문 2절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인간의 시간적인 개념을 넘어 계속 진행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 약속의 성취를 이루어가는 모든 과정에 하나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며, 눈을 들어 하나님을 바라보는 순종이 필요합니다.
출애굽 2세대들은 광야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들에게는 안락한 요람이 아닌 언제든 이동해야 하는 장막이 그들이 만난 첫 번 안식처였습니다. 출애굽 2세대들은 푹신한 침대도, 안락한 의자도 경험하지 못하고, 이동용 간이침대가 전부인 줄 알고 성장했을 것입니다. 그러한 그들에게 하나님께서는 더 이상 떠돌아다니지 않아도 되는 정착된 보금자리를 약속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출애굽 1세대들이 하나님께서 현재 살게 하신 땅 광야에서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굳게 붙잡고 살았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생각하면 참 안타깝습니다. 방랑 생활에 익숙한 채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보다 자신들의 소견에 옳다고 여기는 것을 선택하며 살던 1세대들의 삶이 현재 우리의 삶은 아닌지 돌아보는 아침이 되길 원합니다.
3절에서 12절까지 말씀은 가나안 땅에 들어간 후에 하나님을 어떻게 섬기며, 어떻게 경배해야 할지 각종 제사에 대해 다시 말씀하셨습니다. 각종 제사에 동반되는 소제물과 전제물의 분량에 대해 자세히 알려주셨습니다.
‘소제’는 레위기에서 설명하고 있는 5대 제사 가운데 하나로 곱게 빻은 밀가루에 감람유를 섞어 유향과 함께 불태우고 누룩 없는 떡으로 굽거나 과자로 만들어 드리는 제사입니다. ‘전제’는 번제물이나 화목 제물 위에 포도주나 독주를 부어서 드리는 제사입니다. ‘에바’는 ‘광주리’라는 뜻으로 곡식의 양을 재는 부피 단위로 사용되었습니다. 그리고 ‘힌’은 ‘작은 항아리’라는 뜻으로 액체의 양을 재는 단위로 알려져 있습니다. 제물의 종류대로 소제와 전제의 양을 정하게 하시고, 각기 수효에 따라 그 분량도 비례하여 늘리게 하셨습니다.
13절입니다. 누구든지 본토 소생이 여호와께 향기로운 화제를 드릴 때에는 이 법대로 할 것이요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서 하나님을 경배하는 누구든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법대로 이행해야 했습니다. ‘본토 소생’은 순수 혈통의 이스라엘 사람은 물론 이스라엘 사람과 결혼하였거나 귀화하여 이스라엘 백성과 같은 권리를 갖게 된 모든 사람을 의미합니다.
계속 이어지는 14절 이후 말씀에는 본토 소생뿐 아니라 타국인도 하나님을 경배할 사람들의 범주 안에 포함시켜 주셨습니다.
14절~16절입니다. 너희 중에 거류하는 타국인이나 너희 중에 대대로 있는 자나 누구든지 여호와께 향기로운 화제를 드릴 때에는 너희가 하는 대로 그도 그리할 것이라. 회중 곧 너희에게나 거류하는 타국인에게나 같은 율례이니 너희의 대대로 영원한 율례라 너희가 어떠한 대로 타국인도 여호와 앞에 그러하리라. 너희에게나 너희 중에 거류하는 타국인에게나 같은 법도, 같은 규례이니라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간 뒤에 드려야 할 소제와 전제 규례는 내국인은 물론 타국인에게도 동일하게 적용하도록 하셨습니다. 타국인은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에 정착한 이후 상업적인 목적 등으로 이스라엘 가운데 머물러 사는 외국인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이들은 이스라엘로 귀화하지 않고 나그네로 살았지만 이스라엘 백성과 같은 이스라엘 문화에 동화된 사람들입니다. 이들도 똑같이 율법의 규례대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려야했습니다. 이스라엘 문화에 동화된 사람들은 여호와 신앙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의 신앙 공동체의 일원이 되었고,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는 의미가 됩니다.
모든 인간은 죄인입니다. 죄인인 인간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죄 사함의 은총이 열려있듯이 구약시대에도 이스라엘뿐 아니라 이방 타국인에게도 하나님의 사랑이 열려있음을 본문이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께서 제정해 주신 모든 법과 규례를 바르게 실천해야 했습니다. 하나님을 경배하는 이스라엘 백성을 보고 함께 거주하는 타국인들이 하나님 경외하는 법을 익혀갈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예배하는 하나님이 이방 타국인이 예배하는 하나님과 다른 분이 아닙니다. 만군의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위해 제정해 주신 법은 이스라엘을 넘어 타국인에게까지, 그리고 우리에게까지 적용됩니다. 하나님의 구원하심에는 차별이 없기에 오늘 우리 각 사람이 살아가는 삶의 자리가 하나님을 바르게 예배하고 경배하는 자리인지, 나의 뜻과 나의 의지가 우선되는 자리인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내가 드리는 예배와 나의 삶을 보고 하나님을 경험하는 이웃이 있음을 기억하는 하루되기를 원합니다.
17절~21절입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여 이르라 너희는 내가 인도하는 땅에 들어가거든 그 땅의 양식을 먹을 때에 여호와께 거제를 드리되 너희의 처음 익은 곡식 가루 떡을 거제로 타작 마당의 거제 같이 들어 드리라 너희의 처음 익은 곡식 가루 떡을 대대에 여호와께 거제로 드릴지니라
2절 말씀에 이어 18절 말씀에 ‘너희는 내가 인도하는 땅에 들어가거든’이라는 말씀이 등장합니다. 출애굽 1세대들의 힘이 아니라, 그들의 지략이 아니라 바로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하실 때 그들이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들어갈 수 있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가나안에 들어갈 출애굽 2세대들은 그 땅에서 나는 양식을 먹으며, 그 땅에서 나는 곡식으로 제사를 드릴 것을 미리 전달받았습니다. 실제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리고 성을 점령하기 직전에 가나안 땅의 양식을 처음으로 먹게 되었고, 그 땅의 양식을 먹은 바로 다음 날 광야에 내리던 만나가 그쳤다고 여호수아서는 기록하고 있습니다(수 5:11-12).
2020년 초부터 사용하고 있는 마스크는 우리 삶을 불편하게 했지만 우리를 코로나로부터 지켜주는 역할도 감당해 주었습니다. 언제쯤 마스크를 벗을 수 있을까 기대하며 지내다 보니 현재는 실외에서 마스크를 벗을 수 있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또 어느 날인가 실내에서도 마스크 없이 생활할 때가 반드시 올 것입니다. 마스크를 착용하며 살 때에나 마스크를 벗고 생활할 때에나 우리는 변함없이 그리스도인입니다. 얼굴이 가려졌다고 해서 그리스도인이 아닌 것이 아니고, 마스크를 쓰고 있다고 하여 우리의 신앙이 사라진 것이 아닙니다.
마스크를 쓰든 벗든 우리의 정체성은 그리스도인이고, 주님의 제자입니다. 우리는 주님 나라에 도착하는 그 순간까지, 아니 그 이후로 영원까지 하나님을 예배하는 예배자로 살아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우리의 상황이 척박한 광야이든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이든, 마스크를 쓰든 벗든 오늘도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사는 삶의 주인공이기를 소망합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출애굽의 1세대들은 지속적으로 하나님을 원망하고 하나님을 배신하였습니다. 그럼에도 신실하게 약속을 지키시는 하나님께서 출애굽 2세대들이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 지켜나가야 하는 제사에 대해 말씀해 주셔서 소망이 됩니다. 하나님의 구원하심에는 본토인이나 타국인이나 차별이 없음도 보았습니다. 우리를 하나님을 아는 존재로 먼저 부르셨사오니 우리의 예배와 우리의 삶을 바라보는 이웃들이 우리를 통해 하나님을 경배하는 은총으로 연결되게 하옵소서. 그러한 삶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삶, 제자의 삶임을 잊지 않는 오늘 하루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묵상을 돕는 질문
1. 하루 또는 한 주간 하나님께 언제, 어떻게 예배하고 있는지 묵상해 보십시오.
2. 나는 예배를 위해 무슨 준비를 하고 있는지 묵상해 보십시오.
3. 나의 예배는 향기로운 예배인지 묵상해 보십시오.
4. 내 소산의 첫 열매를 주님께 드린 기억이 있는지 묵상해 보십시오.
5. 만약 내 소산의 첫 열매를 주님께 드렸다면 그 때의 느낌을 기억해 보고, 이후 내 삶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묵상해 보십시오.
제사의 율법
민수기 15:1-21 / 매튜 헨리 주석
Ⅰ. 소제와 전제에 대한 완벽한 지시 사항이 있다.
이것은 동물을 희생 제물로 드리는 모든 제상에 부속되는 제사이다. 이 율법의 서두는 매우 고무적이다. "너희가 내가 너희에게 준 그 땅에 들어가게 되거든" 이러 저러한 일을 하라는 것이다(2절). 이것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내린 선고에도 불구하고 그들과 화해하셨다는 사실뿐만 아니라, 그들은 하나님을 배반하는 성향을 지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자손들에게 약속된 땅을 보장해 주시리라는 사실을 명백히 말해 주는 것이다. 그들은 종종 생각하기를, 자기들은 운명적인 악을 범한 죄책 때문에 지난 세대들처럼 자기들로 영원히 가나안에서 축출되고 말 것이라고 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말은, 그들이 가나안 소유권을 몰수당한 정도로까지는 죄를 짓지 않게 되리라는 보증이었다. 때가되면 그들 중 어떤 자들은 가나안에 들어가게 되리라는 사실이 그 말속에 암시되어 있기 때문이다.
소제에는 두 가지가 있다. 때로는 소제만이 드려지기도 했다. 거기에 대한 율법은 이미 나왔었다(레 2:1 이하). 또 때로는 번제와 화목제에 부가되었으며, 번제와 화목제에는 반드시 소제물이 첨가되었다. 거기에 대한 주의 사항이 여기에 지시되어 있다. 감사제(3절에 명시된 바와 같이)는 하나님의 식탁 음식을 뜻하는 것이므로, 어떤 유의 육식에든지 언제나 떡, 기름, 포도주가 동시에 차려져야 하는 법이다. 솔로몬의 성전에서 식탁을 맡은 자들은 "고운 가루" (왕상 4:22)를 마련했었다. 또 하나님의 식탁에는 고기는 물론이요 떡도 있어야 하고, 하나님의 전이 언제나 넘쳐서 훌륭한 살림이 운영되는 것이 마땅하다. 내 "아버지의 집에는 떡이 넉넉하도다."
이 율법의 의도를 보면, 그들이 함께 드리는 여러가지 희생 제사에 각각 부가될 소제물과 전제물의 분량을 말해 주려는 것이다. 희생 제물이 어린양이나 어린 염소면 한 오멜(약 2.5ℓ)이다. 그것을 1/4힌(1힌은 1/2오멜)의 기름(oil)과 섞어야 한다. 전제물은 그와 같은 양의 포도주 곧 1/4힌을 겸비해야 한다(3-5절). 또 희생 제물이 수양이면, 소제물은 두 배가 필요하다. 곧 2 오멜의 가루와 3/4힌의 기름(이 기름은 우리들에게 있어서의 빵에 바르는 버터 격이다)을 섞어야 한다. 전제의 분량은 마찬가지이다(6,7절). 제물이 수소일 때는, 소제물이 3배가 된다. 곧 3오멜의 가루와, 기름 1/2힌, 그리고 전제로는 같은 양의 포도주가 필요하다(8-10절). 그리고 각각의 희생물은, 그것이 개인 부담이든 공동 부담으로 드리든지 하게 된다. 우리들의 예배도 다른 규칙들에 의해 곧 적당한 분량의 법칙에 의해서 근절되어야만 함을 기억하자.
Ⅱ. 다른 문체에서와 마찬가지로 여기서는(13-16절) 본토인이나 나그네가 같은 수준에 서게 되어 있다. "너희에게나 나그네들에게 한 율법이 되리라. 곧 유대인의 신앙으로 개종한 외국인들에게도 한 가지니라." 그러므로 이렇게 살펴 볼 수 있다.
1. 이것은 이방인도 개종하여 신앙을 갖게 되고 참 하나님을 예배하게 될 것을 의도하고 있다. 그들의 일반 사회 생활에는 선천적인 이스라엘인들과 나그네들 간에 차별이 있었으나, 하나님께 관한 일에 있어서는 차별이 없었다. "나그네도 여호와 앞에서 너와 같게 되리라." 하나님은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않기 때문이다(사 56:3 참조).
2. 이것은 유대인이 나그네들에게 친절을 베풀고 압제하지 말아야 할 의무가 있음을 말해 준다. 그들도 하나님께 인정을 받고 용납 될 것이기 때문이다. 신앙의 사귐은 가장 큰 상호부조요, 모든 대적을 물리치고 만다.
3. 저들의 생득적 특권을 자랑하려고 하던 유대인들에게는 하나의 수치이기도 하다. "우리는 아브라함의 자손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방인들의 아들들로 야곱의 아들들처럼 하나님께 영접될 것임을 알려 주신 것이다. 사람의 출생이나 가문은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해서는 아무런 도움이나 방해가 되지 않는다. 이것은 또한 믿는 이방인들은 이스라엘인들로 간주되듯이, 믿지 않는 이스라엘인들은 이방인으로 간주된다는 사실을 암시해 준다.
4. 이것은 하나님께서 이방인들을 불러 교회에 들이시리라는 것을 말해 주는 좋은 전조이다. 유대인과 이방인을 율법조차도 이렇게 거의 구별치 않았다면, 하물며 복음이랴! 복음은 율법의 의식을 준행하지 않고도 모든 장벽을 무너뜨리고 한 희생 제사 속에서 하나님과 서로 화해되게 하신 것이다.
Ⅲ. 하나님께 처음 익은 가루를 드리는 제사에 관한 율법 앞에서와 마찬가지로. 여기에서도, 그들이 "약속된 땅에 들어가게" 되거든 이라는 위로의 전제(18절) 속에서 시작된다. 지금 그들은 만나를 먹고 살아가고 있으므로, 저들의 일용한 양식에 대한 하나님의 권리를 특별히 감사할 필요가 없었다. 그들의 생존은 온전히 그에게 달려 있었고, 만나 자체가 그 사실을 증언해 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가나안에서는 자기들이 수고한 열매를 먹게 됨으로써, 하나님은 당신이 그들의 지주(地主)요 그들에게 은혜를 베푸는 위대한 시혜자라는 인정을 받을 필요가 있었다. 그들은 첫 산물뿐만 아니라 그들의 수확물의 l/l0(이것은 이미 따로 떼어둔 것이었다)도 드려야 했다. 또 그들이 곡물이 집에나 떡반죽 통에 있을 때에, 또 이미 식탁에 놓을 준비가 거의 다 되었을 때에도, 하나님은 그들의 가루의 일부를 감사의 예물로 더 받으셔야 한다(유대인들은 전체 덩어리의 최소한 1/40을 다시 드린다고 한다)(20,21절). 그리고 그것은 제사장들의 식구들이 먹어야 한다. 이처럼 저들은 날마다의 양식으로 인하여도 하나님께 의존되어 있음을 고백해야 했으니, 집안에서 식사를 할 때에도 그랬던 것이다. 그리고 나서 하나님께 바쳐 그것을 잘 사용해 줍시사고 비는 것이다. 왜냐하면, 곡식을 집에 가져왔지만, 하나님께서 "그것을 불어 버렸기 때문에" 곡물이 아주 소량이 되어 버렸다는 기록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학 1:9).
그리스도께서 가르치기를, "우리에게 해마다 쓸 수확물을 주소서" 라고 하시지 않고 "우리에게 일용한 양식을 주옵소서" 라고 했다. 먼 훗날 예언자가 사렙다 과부에게 말했듯이, 하나님은 이 율법을 통하여 그 백성들에게 말씀하고 계신 것이다. "먼저 나로 작은 떡 하나를 만들어 내게 가져오라" (왕상 17:13). 이 예물은 에스겔이 환상으로 본 그 성전의 율법에서도 밝히 지지 받고 있다. 그리고 그것은 가정에 자비를 베푸시겠다는 약속이 붙어 있는 계명이다(겔 44:30). "너희가 첫 가루를 제사장에게 주어, 그들로 네 집에 복이 임하도록 하라." 하나님께서 우리의 재산 중에서 당신의 응분을 받으셨다면, 그대에야 우리에게는 위안이 찾아올 것임을 기대할 수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