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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6일 오늘의 역사
2023년 개그맨 장동민이 베트남에서 열린 아시아 포커 챔피언십에서 우승
2022년 베이징 동계패럴림픽(장애인올림픽)에 출전하려던 러시아패럴림픽위원회 선수단 올림픽 참가 못하고 귀국
러시아 타스 통신은 "러시아 선수단은 선수촌을 퇴촌해 공항으로 이동했고, 곧바로 러시아 모스크바로 돌아갔다"고 보도했다. 이 매체는 "러시아 선수들은 중국 장자커우 선수촌을 나오면서 러시아 국가를 불렀다"고 전했다. 러시아는 이번 대회에 총 71명의 선수를 파견했다. 장애인 노르딕 스키 33명, 파라 아이스하키 17명, 장애인 알파인스키 10명, 장애인스노보드 6명, 휠체어 컬링 5명 등 대규모 선수단을 꾸렸다 러시아 선수단은 일찌감치 베이징에 도착해 훈련을 소화했고, 국제패럴림픽위원회(IPC)도 러시아를 '중립국 선수 자격'으로 출전하도록 길을 열어줬다. 그러나 각국 선수단이 우크라이나 침공에 관한 책임을 물어야 한다며 거세게 비판하자 IPC는 급하게 러시아와 벨라루스에 출전 금지 결정을 내렸다.
결국 러시아 선수단은 이번 대회에 단 한 경기도 뛰지 못하고 러시아로 돌아갔다
2022년 고진영 미국여자프로골프(LPGA) 투어 우승
올해 첫 출격한 고진영(27)이 역전 우승을 차지하며 2022시즌 미국여자프로골프(LPGA) 투어 4번째 대회에서 한국에 시즌 첫 승을 선물했다. 15라운드 연속 60대 타수와 30라운드 연속 언더파라는 두 개의 신기록을 달성하며 LPGA 투어 역사까지 새로 썼다.
고진영은 6일 싱가포르 센토사GC 탄종 코스(파72)에서 열린 HSBC 위민스 월드 챔피언십(총상금 170만 달러·20억5000만 원) 4라운드에서 버디 7개와 보기 1개를 묶어 6언더파 66타를 쳤다. 최종합계 17언더파 271타를 기록하며 공동 2위 전인지(28), 이민지(호주·이상 15언더파)를 2타 차로 따돌리고 우승상금 25만5000달러(3억1000만 원)를 손에 넣었다.
2019년 국제대기오염조사기관 에어비쥬얼(Air Visual) 도시별대기질지수(AQI)에서 서울과 인천을 세계최악의 대기질 2위와 3위로 꼽음
2018년 안희정 충남지사 전 수행비서(김지은)가 성폭행 고발(3.5)하자 사퇴
2017년 주한미군 사드발사기 2대 반입
2011년 동아출판사 창업주 김상문 전 회장 별세
1970~80년대 학습참고서 시장을 호령하며 '참고서의 제왕'으로 군림했던 동아출판사 창업주인 김상문(金相文·96·사진) 전 회장이 6일 오전 숙환으로 별세했다.
1915년 대구에서 태어난 고인은 대구사범(경북대 사범대)을 졸업하고 일본 도쿄 흥아공학원을 수료했다. 1941년 대구에서 출판업을 시작해 6·25전쟁 직전 서울에서 동아출판사를 세운 그는 광복 이후 초·중등 교과서의 효시인 '신생국어독본'을 출간한 데 이어 초등학생용 '동아전과'와 중학생용 '완전정복' 등을 펴내며 국내 참고서 시장을 석권했다.
승승장구하던 그의 출판사업은 1983년 참고서로 번 돈 대부분을 투자해 펴낸'동아원색세계대백과사전(전30권)'이 실패하며 나락으로 떨어졌다.
김 전 회장은 1985년 동아출판사를 두산그룹(두산 출판BG)에 넘겨준 뒤 출판계를 떠났다. 김 회장에게는 좌절을 안겼지만 백과사전은 살아남았고, 1996년 두산세계대백과사전(전30권)으로 다시 출간됐다.
고인은 2001년 서울대 의대에 사후 시신기증을 했다.
2010년 조경철 박사 별세
평북 선천에서 태어난 조경철 박사는 1947년 연희대(현 연세대) 물리기상학과에 입학, 이원철 교수로부터 천문학을 배웠다. 6·25 전쟁 중 육군 중위로 복무한 조경철 박사는 전후 정치 상황에 실망하고 미국 펜실베이니아 대학원으로 정치학을 배우기 위해 떠났다. 이를 들은 이원철 박사는 미시간대 천문학과 대학원 입학허가서와 국비유학생 지명 서류를 보내며 천문학자의 길을 걷기를 권했고 조경철 박사는 곧 펜실베이니아대에서 미시간대로 옮겼다.
조경철 박사는 1962년 천문학 박사학위를 마친 후 1965~67년 한국인 최초의 미국항공우주국(NASA) 연구원으로 과학탐사로켓에 적재할 광전측광기 개발에 기여했다. 이후 미국 메릴랜드대 천문대 교수로 재직하다가 1967년 한국과학기술처가 창설되자 연세대 교수로 귀국했다. 1969년 아폴로 11호의 달착륙 방송을 생중계하면서 '아폴로 박사'라는 별명을 얻었다. 영어와 우주과학에 능통한 조경철 박사는 AFKN(주한미군방송)에서 전송한 달착륙 화면을 멋지게 생방송했다.
그는 1971년 마흔둘에 영화 '미워도 다시 한 번'의 여주인공 전계현씨와 결혼하기도 했다. 조경철 박사는 1992년 한국우주환경연구소를 설립했으며 50여편의 논문과 177권에 달하는 저서, 그리고 3000건이 넘는 단편·기고문을 남겼다.
이런 공로로 1970년 국민훈장 동백장, 1972년 미국 국무부 우주개발홍보 공로 표창, 1989년 헝가리 에오트보스(Eotvos) 국립대로부터 아인슈타인 물리학상을 받았다. 2001년 일본인이 발견한 소행성(4976번)에 도쿄대학의 제안으로 'CHOU KYONG CHOL'라는 이름으로 국제천문연맹(IAU)에 등록됐다.
2002년에는 영국 케임브리지대학 인물평의회가 수여하는 '20세기의 탁월한 과학자상'을 받았다.
2009년 요리연구가 하선정씨 별세
한국 요리계의 ‘대모’(代母)로 불려 온 원로 요리연구가 하선정(87·사진)씨가 6일 별세했다. 고(故) 하 회장은 수도여자사범대 가정학과를 졸업한 후 평생을 한국 전통요리를 연구하고 알리는 데 헌신했다.
고인은 1954년 서울 종로에 국내 최초의 요리학원인 ‘수도가정요리학원’을 설립한 후 자신의 이름을 딴 김치, 젓갈 가공식품을 만들며 사업가로도 입지를 굳혔다. ‘하선정식품’은 미국으로도 수출되고 있는 포장 젓갈과 김치 제조업체로 유명하다.
고(故) 하 회장은 배급 밀가루가 주식이었던 1950년대 제빵용 전기오븐을 개발했고, 1980년대에는 끓일 필요가 없는 김치용 젓갈을 개발해 한국 요리 역사를 새로 썼다. 또 한식 상차림에 외국 뷔페식 식사와 중국식 회전상의 개념을 접목시켜 ‘회전상’을 개발하기도 했다.
2003년 ‘세종대왕자태실(世宗大王子胎室)’ 사적 444호로 지정
문화재청은 2003년 3월 6일 경북 성주군 월항면의 성주 ‘세종대왕자태실’ 을 사적 444호로 지정했다.
세종대왕자태실은 조선 세종대왕의 18왕자와 단종의 태실(태반을 넣어둔 독) 19기가 모여있는 곳으로, 왕실의 번창을 기원하기 위해 명당을 골라 봉안돼 오던 곳이다. 일제 강점기에 대부분이 훼손되거나 서오릉으로 이장된 뒤 현장에 그대로 남아있는 태실은 이곳이 유일하다.
문화재청은 또 전남 장성군 필암서원(사적 242호)과 경기 연천군 신라 경순왕릉(사적 244호)의 보호구역 1만5300평을 추가지정하고, 경주 남고루(사적 17호) 등 11건에 대해서 보호구역 추가지정을 예고했다.
2003년 알제리 여객기 추락, 102명 사망
2003년 노무현 대통령 청남대(대통령별장) 개방 지시
2003년 3월 6일 노무현 대통령의 청남대 개방 지시와 함께 대통령 한 사람만을 위한 여름피서지였던 청남대(靑南臺)가 20년 만에 주민들의 품으로 돌아오게 됐다.
청남대는 충청북도 청원군 대청댐 부근 약 55만평의 면적에 전두환 전대통령이 “이런 곳에 별장 하나 있으면 좋겠다”고 말한 것이 계기가 되어 생긴 대통령 전용 별장으로 ‘남쪽에 있는 청와대’라는 의미이다.
1997년 소설 ‘남부군’ 저자 이태(본명 이우태)씨 별세
이태씨는 지난 1988년 7월 소설 남부군을 출간, 우리 사회의 금기대상이었던 빨치산을 역사 평가의 대상으로 본격 거론했다. 남부군은 영화로도 만들어져 인기를 모았다. 그러나 이씨는 책이 나온 후에도 한동안 본명을 숨겼을 정도로 이데올로기의 피해자였다.
1923년 충북 제천에서 초등학교 교장의 아들로 태어난 이씨는 국학대학을 나와 1948년부터 서울신문-합동통신 기자로 근무했다. 6·25때 인민군에 징발된 이씨는 북한의 조선중앙통신 기자가 됐으며 인민군이 북으로 밀려간 후 빨치산이 돼 지리산 등에서 활동하다 1952년 토벌대에 체포됐다. 이때의 기록을 바탕으로 소설 남부군을 썼다. 전향한 이씨는 1963년 민중당 전국구 국회의원을 지낸 후 1970년대까지 야당 정치인 생활을 했다.
1995년 유럽연합(EU), 터키와 관세 동맹 결성
1992년 아야즈 무탈리보프 아제르바이잔 대통령 사임
1991년 국제해사위성국 개통
한국통신이 1991년 3월 6일 충남금산위성지국에서 국제해사위성 지구국 개통식을 가짐으로서 선박과 선박, 선박과 육지간의 통신이 자동화되는 등 원.근해 해상통신이 현대화됐다. 국제해사 위성통신은 국제해사기구(IMO)가 선박통신개선을 위해 창설한 국제해사위성기구(인바르새트)에서 운영하고 있는 통신서비스로, 태평양, 인도양, 대서양, 적도상공 3만5천8백km의 지구정치궤도에 위치하고 있는 3개의 통신위성을 통해 선박상호간이나 선박과 육지간의 국제자동화 및 텔렉스를 중계해준다. 그동안 무선통신에만 의존해 오던 원·근해 통신이 해사위성국 개통으로 자동화·현대화됐다.
1985년 전두환 대통령, 김대중.김영삼.김종필씨등 14명에 대한 정치해금 단행
1985년 미국의 교향곡 작곡가 세션슨 사망
1983년 서독 녹색당 의회 진출
반핵, 환경보호, 페미니즘를 내세운 서독의 녹색당이 1983년 3월 6일 치러진 총선거에서 득표율 5.6%를 획득, 보수파가 우위를 점하고 있는 연방의회에서 27개의 의석을 확보했다. 창당 3년만의 쾌거로 시민운동을 크게 고무시켰다. 당선 의원들은 개원일에 진바지를 입고 아프리카의 큰 북을 치며 나무를 들고 입장했다.
녹색당은 1970년대 반핵운동을 주로하는 시민단체 `녹색단체`를 모체로, NATO가 소련의 SS-20에 대항하기 위해 중거리미사일을 유럽에 배치키로 결정한 1980년 1월에 정식으로 발족했다. 이번 선거로 연방의회에 들어가게 된 35세의 반전-반핵운동가 켈리는 `군비확장경쟁은 반드시 인류의 종말을 가져올 것이다`라는 주장을 펼쳤다.
4년후엔 득표율이 8.3%까지 신장했으나 그후 지도력 부재와 현실파와 이상파간의 분열로 세력이 서서히 약화되어 1990년 선거에서는 의석을 모두 잃어버렸다.
1983년 한국 해적출판 세계1위
1983년 콜 서독수상 재집권
1981년 가정의례에 관한 법률 시행령 개정
1980년 박정희대통령 시해사건으로 사형 확정된 박흥주 총살형 집행
1980년 엘살바도르 전국에 계엄령 선포
1979년 한국-멕시코, 일반사증면제협정 체결
1977년 프랑스 역사의 현장인 클래리지 호텔 문 닫음
1973년 미국 소설가 펄 벅 사망
‘대지’의 작가로 유명한 미국 소설가 펄벅이 1973년 3월 6일 세상을 떠났다. 생후 수개월 만에 장로회 선교사인 부모를 따라 중국으로 건너가 상하이에서 학교를 다닌 뒤, 1914년 버지니아주 린치버그의 랜돌프메이컨여자대학을 졸업했다. 그 뒤 중국에 돌아와 난징에서 대학교수가 됐다. 1917년 후에 중국 농업연구의 세계적 권위자가 된 존 로싱 벅 박사와 결혼, 두 딸을 두었지만 큰딸은 극도의 정신박약아였다. ‘자라지 않는 아이’에서 펄 벅 자신이 술회하듯이, 이 사실이 그녀를 작가로 만든 주요한 동기의 하나가 되었다.
1923년 중국 생활에 대해 쓴 논설과 단편소설들을 미국 잡지에 처음 기고했고, 1930년 중국에 있어서의 동서양 문명의 갈등을 다룬 장편 처녀작 ‘동풍.서풍’을 발표했다. 이어 1931년 ‘대지’를 발표하면서 작가로서의 명성을 얻기 시작했다. 이 작품은 한 중국인 농부와 노비 출신의 아내가 땅과 지위를 얻기 위해 분투하는 과정을 그린 것으로 속편으로 발표된 ‘아들들’ ‘분열된 집안’과 함께 1935년 3부작 ‘대지’로 출판됐다.
1938년에는 미국의 여류작가로서는 처음으로 노벨 문학상이 ‘대지’ 3부작에 수여됐다. 제2차 세계대전 후에도 미국의 양심으로서 평화를 위한 집필을 계속하면서, 펄 벅 재단을 설립하여 전쟁 중 미군으로 인해 아시아 여러 국가에서 태어난 사생아 입양 알선사업을 벌였다. 6·25전쟁 후에는 한국의 수난사를 그린 ‘살아있는 갈대’와 한국의 혼혈아를 소재로 한 소설 ‘새해’를 썼다.
한국과도 인연이 깊어 두 차례나 한국을 다녀갔으며 1967년에는 경기도 소사에 혼혈 고아 수용시설인 소사희망원을 설립하여 전쟁의 아픔을 달래주었다.
1971년 케냐, 최악의 가뭄
1970년 체코 자유화 기수 두브체크, 공산당서 축출
1967년 헝가리 민속음악의 권위자인 대표적작곡가 졸탄 코다이 사망
1965년 미국 해병대 2개부대, 파월 결정
1963년 4대의혹사건 관련자 유원식, 천병규 등 15명 구속
1958년 아랍연맹과 예멘 정식합병 조인
1958년 납북 KNA기 승객 32명 귀환
1958년 2월16일 납치되었던 창량호가 납치 18일 만에 소환되었다
부산을 출발해 서울로 향하다가 납북된 KNA기 !
처음 있는 일인 여객기 납북사건은 국민들에게 큰 충격을 줬습니다.
북한측은 자발적인 월북의거라고 선전했지만 우리 정부는 간첩에 의한 납북이라고 발표합니다.
납북 18일만에 돌아온 승객 가운데에는 현직 국회의원이었던 유봉순씨와 미군장교 한사람이 포함돼 있었습니다.
간첩으로 추정된 8명은 귀환을 거부했습니다.
오랜 실랑이 끝에 승객들을 돌려보낸 북한은 기체는 끝내 돌려보내지 않았습니다
1957년 김종원 치안국장, 판사를 향해 법정모욕
1957년 3월 6일 김종원 치안국장이 장면 부통령 저격사건과 관련해 서울지법에서 법정증언을 하고 있었다. 한국전쟁 중 부산정치파동때 헌병사령관으로 야당 국회의원들을 불법 연행했고, 거창양민 학살사건 국회 조사단 방해 책임자였던 김종원(별명 백두산 호랑이)은 약 20분동안 저격사건 피고들인 이덕신 최훈 김상붕 등이 자기를 근거없이 사건관련자로 끌어들이고 있다고 비난하며 판사를 향해 "공정한 재판을 하시오" 노발대발 고함을 쳤다.
그는 "법정도 믿을 수 없다" "당신은 일개 판사이지만 나는 과거에 헌병사령관을 지냈다. 얼마든지 할테면 해봐라"며 법정모욕을 일삼는 행동을 서슴지 않았다.
재판장이 법정모욕죄를 선언하고 퇴장을 명령했으나 고함을 치며 퇴정을 거부했다. 재판부가 6일 후인 3월 12일 김종원을 서울지검에 법정모욕죄로 고발하자 국민들은 재판부의 결정에 열렬히 호응하며 지지했다. 김종원은 곧 치안국장 자리에서 물러났다.
1957년 가나공화국 영국연방으로부터 독립
1953년 소련 수상 후임에 말렌코프, 외상에 몰로토프
1950년 프랑스 제3공화정의 마지막 대통령(1932~40) 르브룅 사망
1945년 유고, 티토 임시정부 성립
1937년 거룩함에 대한 인간의 체험을 연구·발표 한 독일의 신학자 오토 사망
1936년 조선일보 여성지 월간`여성` 창간
1935년 독일 재군비 선언
1926년 제8대 중앙정보부장 김재규 출생
1921년 발렌티노 첫 주연 영화, '묵시록의 네 기사' 개봉
루돌프 발렌티노가 첫 주연을 맡은 영화 '묵시록의 네 기사'가 1921년 3월 6일 개봉했다. 당시까지 무명이었던 발렌티노는 영화 속에서 탱고를 선보이며 자신의 매력을 한껏 발휘해 이 영화 한편으로 당대 최고의 미남자, 섹스심벌로 부상했다.
발렌티노의 본명은 로돌프 구글리엘미로 이탈리아에서 태어났다. 1913년 18세의 나이로 미국에 정착한 발렌티노는 뉴욕에서 택시기사로 일하기도 했지만 곧 직업 댄서로 일하면서 여성들의 이목을 끄는 일에 두각을 나타냈다.
이름을 루돌프 발렌티노로 바꾼 그는 몸매가 날렵해 보이도록 셔츠 속에 코르셋을 입었고, 여성들만의 전유물이었던 손목시계도 착용했다. 잘생긴 외무와 능숙한 춤 솜씨도 한 몫했다.
1917년 부터 스타가 되기 위해 할리우드를 찾은 발렌티노는 처음 3년간 20여 편 이상의 영화에 출연했지만 모두 삼류영화의 엑스트라 역할을 맡았던 무명배우였다.
영화 '묵시록의 네 기사'를 통해 시작된 발렌티노의 화려한 시절은 5년만에 폐렴으로 사망하면서 막을 내렸다. 1926년 8월 23일, 31세의 나이였다. 발렌티노가 사망하자 3명의 팬이 자살했으며 35명의 여성이 그의 아이를 가졌다고 밝히는 등 대소동이 벌어졌다. 장례식에는 10만 명이 운집해 발렌티노의 죽음을 애도했다.
여성들에게는 최고의 수퍼스타였지만 비평가들에게는 '소질이 없는 배우', '화장한 호모' 와 같은 혹평이 따라붙는 등 배우로서는 크게 인정받지 못했다.
1919년 곽산(郭山) 학살 사건
3.1 운동 때 일본 경찰이 시위 군중을 학살한 사건.
평안 북도 곽산에서 독립 만세를 부르는 군중을 참혹하게 아연(亞鉛) 탄환으로 쏘아 죽이고, 한편 소방대를 이용하여 야견(野犬)을 박살하는데 쓰는 쇠뭉치로 군중들을 박살하였다.
1918년 러시아 사회민주당, 러시아 공산당으로 개칭
1905년 멕시코 이민 1천33명 인천항 출발
멕시코 이민 1.033명 인천항에서 출발하였다
그러나 멕시코 이민은 한마디로 외국인 이민 브로커들에 의해서 끌려간 노예노동이었다.
이와같은 노예노동의 음모는 미국인 마야스와 일본인 다이쇼가 꾸며냈다.
마야스는 멕시 코 농장주인들과 동양이민을 계약하고 중국과 일본을 돌아다니며 이민모집을 하려다 실패하자 한국으로 건너왔다.
4년간의 계약노동이었다.
마야스는 당시 한국에서 대륙식산회사의 간판으로 대정매일과 접선하여 비밀리에 이민모집을 시작했다.
농장에서 난폭하게 굴던 이준혁이 앞장서 원산, 진남포, 부산, 인천 등지를 쏘다녔다.
선금조로 1백 50원을 주었으니, 돈받는 재미로 하와이 이민모집과 똑같은 것으로 생각한 순박한 백성들은 응모했던 것이다.
1904년 10월 15일부터 4개월만에 1천 33명이 모였다.
이렇게 되자 마야스는 본성이 드러나 이민을 부산에 모아 놓고 멕시코로 직행하려 하였다.
그러나 아무래도 한국정부의 여권이 없으면 국제적으로 시끄러워질 것 같아서 여권을 받기 위해 이민에 응한 자들을 인천에 옮겨놓고 졸단 영국공사를 졸라댔다.
졸단의 계약임을 알고 국가체면도 있고 해서 프랑스공사 블란시에게 교섭을 의뢰했다.
블란시는 한국 고관들 사이에 신망이 두터웠으므로 한국정부는 진상조사도 하지않고 선뜻 여권을 발행해 주었다.
이리하여 마야스는 1905년 3월 6일 인천항을 떠나 요꼬하마에서 영국상선 엘․보트호로 갈아타고 멕시코의 살리나․쿠르스항에 안착하여 그곳에서 입국수속을 마쳤다.
한국 이민들은 그해 5월 15일 운명의 유카단주 베라크루즈에 상륙하였다.
일행은 남자 8백 2명, 아녀자가 2백 31명이었으며, 항해 중에 남자 2명이 병사하여 총 1천 31명이 멕시코에 상륙했다.
그들은 메리다지방에서 3일 묵고 멕시코 식민회사의 지시를 받아, 수십명씩 한 조가 되어 24개의 농장으로 헤어졌다.
어저커농장이 가장 많았지만, 소수는 시멘트 광산과 황무지 개간 으로 들어가 비참한 노예생활이 시작되었다.
이미 브로커, 영국인 마야스는 전술한 하와이에 와 농장에서 추태를 부렸던 데일러와 같은 사기꾼이었다.
테일러의 경우는 호놀룰루에서 재판이 시작되자 자기의 협잡행위가 드러날까 두려워 종적을 감춰버리고 한국인 8명이 풀려남으로써 끝났다.
1887년 국내 첫 전기 도입
1887년 3월6일은 우리나라에 전기가 처음 들어온 날입니다.
경복궁 향원정 연못에 냉각수를 이용한 발전기를 설치해 우리나라에서는 처음으로 전등을 밝힙니다.
당시에는 고장이 잦고 불이 자주 켜졌다 꺼졌다 해서 건달불이라고 불리기도 했습니다.
11년뒤인 1898년 미국인 콜브란과 보스트위크는 정부로부터 서울의 전차, 전기, 전화경영권을 받아 첫 민간전기사업을 시작합니다.
1900년 4월에는 발전기가 증설돼 종로에 처음으로 3개의 전등이 켜졌습니다.
남북이 분단 되면서 북한의 송전중단으로 한때 우리나라는 전력부족으로 어려움을 겪기도 합니다.
1883년 고종황제, 태극기를 국기로 제정
우리나라에서 국기에 대한 논의가 본격 거론되기 시작한 것은 개항 후 서구 열강과의 교섭이 빈번해 지면서였다. 국기제정에 대해 청(淸)의 의견을 물었으나, 청은 조선이 청의 속국임을 강조하기 위해 국기 도안에 중국기를 본뜬 용(龍)을 넣을 것을 요구했다. 태극문양이 절충안으로 채택됐다. 1882년 5월 미국과의 통상조약 체결로 국기 제정의 필요성이 다시 제기되자, 김홍집 등이 태극 문양을 안(案)으로 제시하면서 국기 제정에 대한 논의가 구체화되기 시작했다.
1882년 8월, 수신사로 파견된 박영효가 일본행 배 위에서 태극기를 만들어 사용했고, 이 사실을 보고받은 고종은 1883년 3월 6일, 태극을 중심으로 건곤감리 4괘를 사각형 네 귀퉁이에 배치한 태극기를 국기로 제정•선포했다.
이듬해 조선은 태극기를 널리 알리기 위해 태극기 도안을 넣은 우표 5종 280만장을 일본에 제작 의뢰했으나 일본은 우리의 요청과 달리 4괘를 삭제하고 태극문양도 중국의 태극도형으로 바꿔 우표를 보내왔다. 우리가 중국의 속국임을 나타내기 위한 치밀한 계산이었다.
현재의 국기가 대한민국 국기로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1949년 10월 15일부터였다.
1866년 고종명성후가례(高宗明成后嘉禮)
1866년 3월 6일 치러진 조선 제26대 왕 고종과 명성황후의 성혼 의식.
가례란 왕의 성혼(成婚)이나 즉위, 또는 왕세자·왕세손·황태자·황세손의 성혼 및 책봉(冊封) 의식을 말한다.
국가적인 중대한 의식이기 때문에 여러 달에 걸쳐 수천 명의 인원이 동원되는 것이 보통이다.
왕세자빈의 경우에는 납채(納采)·납징(納徵)·고기(告期)·초례(醮澧)·친영(親迎)·전안(奠雁)·동뢰(同牢) 등의 순서로 진행되는데, 왕비의 경우에도 거의 같다.
고종과 명성황후의 가례는 1866년(고종 3) 3월에 행해졌는데, 순서는 다음과 같다.
가례를 치르기 전인 같은 해 1월 1일 전국에 있는 12~17살의 규수에게 금혼령이 내려졌다.
금혼령이란, 국혼준비령이 내리면 결혼 적령기에 접어든 처녀의 혼인을 금하는 법령으로, 초간택(初揀擇)이 끝난 뒤 해제된다.
이어 초간택에서 5명, 2월 29일 재간택에서 3명이 간택되었고, 3월 6일 삼간택에서 민치록(閔致祿)의 딸 민자영(閔紫英)이 왕비로 간택되었다.
이에 따라 3월 7일 민자영을 조선 26대 왕비로 맞이한다는 조칙이 발표되었다.
가례는 이후에 행해진 의식으로, 3월 9일 납채의(納采儀)가 창덕궁(昌德宮)에서, 수납채의(受納采儀)가 별궁인 운현궁(雲峴宮)에서 행해진 것을 시작으로 11일 납징의·수납징의, 17일 고기의·수고기의, 20일 책비의(冊妃儀)·비수책의(妃受冊儀)가 행해졌다.
이어 21일 진시(辰時)에 운현궁에서 왕비를 맞아들이는 친영의를 행한 뒤, 정시(丁時)에 창덕궁에서 왕비와 서로 절을 한 뒤 술과 찬을 나누고 첫날밤을 치르는 의식인 동뢰연(同牢宴)을 치름으로써 왕비를 맞는 의식인 가례는 끝이 난다.
가례는 원래 친정집에서 치러야 하는데, 별궁인 운현궁에서 치른 것은 국가적인 큰 의식인지라 사가(私家)에서 치르기에는 여러 가지 어려움이 있기 때문이다.
조선시대에는 이를 위해 별궁제도를 두고, 별궁을 가례 장소로 이용하였다.
운현궁에서는 지금도 1년에 두세 번씩 고종과 명성황후의 가례를 육례에 따라 재현하는 행사가 열린다.
**명성왕후(明成皇后 ; 1851.9.25 - 1895(조선 고종 32).10.8(음8.20)) : 민비.
1853년 베르디 오페라 `라트라비아타` 베네치아에서 초연
1834년 영국 풍자만화가 뒤 모리에 출생
1806년 영국의 여류 시인 엘리자베스 브라우닝 출생
1779년 프랑스 장군 조미니 출생
1672년 영국이 네덜란드에 선전포고
1475년 천재 예술가 미켈란젤로 출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