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GM: 롤랜드 리조 'France(The Medieval Era)'
"마그누스의 부대가 먼저 물러났습니다."
"젠장, 처음부터 머릿수가 너무 부족했어... 어서 놈들을 쫓아라!"
그단스크의 람베르트. 저 빌어먹을 놈이 내 손에 죽기 전엔 죽지 못하게 해야죠. 아메데의 준마는 날아갈 듯 달려갑니다.
좌익은 프랑스가 승리, 우익은 폴란드가 승리. 먼저 중군을 도우러 가는 쪽이 승기를 잡을 겁니다.
"밥값은 할 줄 아는군."
"네가 버텨준 덕이다, 람베르트."
여우 낯짝을 한 프랑스인이 이런 말도 할 줄 알다니. 물론 그의 얼굴을 뒤덮은 흙먼지는 거짓말을 하지 않습니다.
"그저 면목이 없습니다."
가장 궂은 일을 도맡은 마그누스가 뒤늦게 나타났을 때, 둘 중 누구도 그를 탓하지 않았습니다.
전투가 시작되기 전, 그들은 한 목소리로 진군가를 노래했습니다.
기독교를 받아들인 폴란드인들이 전투에 나서기 전, 성모 찬가를 노래하는 것은 이미 오래된 전통입니다.
"하느님의 어머니, 주님의 영광을 입으신 마리아여..."
"당신의 아드님, 주님께 택함 받으신 마리아여..."
"자비를 베푸소서. 저희를 구하소서."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발음이 어색해도, 몇몇 단어를 잊어도 상관없습니다.
그 순간만큼은 모두가 폴란드 왕국을 섬기는 무사들이었으니까요.
"시몽은 부르봉을 대가로 협상을 하려는 속셈인 것 같습니다."
"어림없지. 툴루즈 공작의 군대도 빠져 있는 판에... 그의 계책에 흔들리지 말고, 잉글랜드의 본대와 합류해야겠소."
주앙도, 보구밀도 마주보며 고개를 끄덕입니다. 헨리의 집에 불이 붙기 전에 물동이를 퍼부었으니, 이젠 원래 목적지로 가야 할 시간입니다.
"그러게 덴마크와 싸울 때도 진득하게 왕좌를 지키고 있었으면 좋았을 것을... 이제 좀 철이 들었구나."
오쟁이진 남편이란 도발에 넘어가 대사를 그르칠 뻔했던 카시미르. 그는 한 발 더 성장한 것 같네요.
정말 칭찬하고 싶은 점은, 폴란드가 아직 그 힘을 다 쓰지 않았다는 것. 프랑스의 몰락은 이제 시간문제입니다.
서쪽에서 플랜태저넷과 카페의 싸움이 벌어지는 동안, 동방에서도 이런저런 일이 있었습니다.
평생을 제국의 무게에 눌려 발버둥치던 스테판 네마냐는 세르비아 독립의 야망을 이루지 못하고, 어린 아들들을 남긴 채 죽었습니다.
자신들의 왕을 잃은 크로아트인들이 마자르인의 지배하에 놓였듯, 이제 세르비아인들은 그리스인들의 전적인 지배를 받아들여야 합니다.
동로마는 어째 안드로니코스라는 이름의 바실렙스가 즉위하면 골로 가는 게 국룰인가...
현실에서 제국을 난장판으로 만들고 본인도 끔찍하게 죽은 '그 안드로니코스'는 이 세계에서 잠잠한데도 말이죠.
애먼 세르비아 머리채만 잡더니 제위도 잃고 쫓겨나게 생겼네요. 이래서 혼자 다 먹으려 하지 말고 맘을 곱게 써야지.
에스테르곰에 죽치고 앉아서 팝콘을 튀기고 있을 '가짜 알렉시오스'의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카즈메르, 쟤들 뭐하냐? 내가 황제라도 저것보단 잘하겠다."
"그런데 너 황태자였던 건 진짜냐?"
"였는데 아니게 됐지. 마누일... 망할 놈의 영감탱이."
"왜?"
"너라면 보랏빛 산실에서 나온 아들이랑 야만인 사위 후보 중에, 누구한테 제국을 물려줄래?"
"할말 없네..."
마누일이 죽을 당시에 '진짜 알렉시오스'가 아직 꼬맹이만 아니었어도, 동로마는 이 난리를 안 겪었겠죠.
"샬롬."
지난 이집트 십자군의 기억이 문득 되살아납니다. 한결같은 그녀의 인사. 아이유브는 사라졌지만, 장기는 건재합니다.
"성지의 수호자여, 그대보다 주님께 사랑받는 지상의 군주는 없을 것이오."
"유대인과 사라센들에게 당신만큼 사랑받는 임금도 없겠지요, 레흐족의 왕이시여."
교황의 명에 순종해 이집트까지 와놓고도, 성지를 넘보는 적들에게 단호하지 못했던 게 아직도 마음에 쌓여 있는 모양이죠.
하지만 그녀의 다음 말은 정말로 의외였습니다.
"당신이 애타게 찾는 살라흐 앗 딘의 혈족이 시리아 어딘가에 있다 합니다. 사람을 보내 직접 알아보십시오."
"안티오키아가 사라센들에게 공격받고 있다는데, 내가 도울 수 있는 일이 있겠습니까?"
"참 알다가도 모를 분이군요. 호의는 감사하나, 마자르인의 왕은 자기 처가의 고난을 좌시하지 않겠다 합니다. 그의 도움이면 충분합니다."
안티오키아의 언너. 헝가리의 왕비인 그녀는 벨러와의 사이에서 벌써 다섯 명의 자식들을 두고 있습니다.
"내 딸이 맘에 안 든다면, 네 딸을 우리에게 보내는 방법도 있다."
아직도 그는 폴란드와의 동맹에 미련을 놓지 못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엘레오노라와 레셰크는, 진정 짐의 자식인가? 대답하라, 엘레오노르!'
세상에 죄를 짓고, 그래서 세상에 버림받았다고 느꼈을 때... 사정없이 후려쳐서 깨워준 저 믿음직한 개자식.
'가짜 알렉시오스'에게만은 결혼사기를 치고 싶지 않습니다.
잉글랜드군과 폴란드군이 합류해 툴루즈의 성들을 하나하나 공략해가던 1188년 1월,
왕세자인 소 카지미에시와 실레시아의 베르타 사이의 첫 아이, 카지미에시가 태어났습니다.
할아버지도 아버지도 본인도 모두 이름이 같기에, 그는 '카지크'라는 귀여운 애칭으로 불리게 될 겁니다.
시몽은 거추장스러운 왕대비를 치워버리기 위해 나바라와 협상을 벌였습니다.
이베리아의 기독교 왕국들 중에서도 그 세력이 가장 미약한 곳.
폴란드의 제 1공주는 마리 드 폴로뉴라는 이름을 잃고, 이젠 나바라의 왕세자비가 되었습니다.
어린 이자보와 제랄드는 '고아'가 되었습니다.
"파도가 나를 덮쳐오네요. 부디 나를 잊지 말아 주세요.
나는 한때 젊고 아름다웠고, 내 영혼은 자유로웠죠.
하지만 운명은 나를 고국과, 사랑하는 이들로부터 떼어놓았어요.
어쩌면 나는 그 새로운 땅을 영영 보지 못할지도 몰라요..."
"양위를 생각하신다니요?"
"나는 내 형제들 중에서도 가장 보잘것없던 자요. 그 동안 너무 오래 앉아 있었지..."
예고없는 폭탄선언에 당황한 궁중사제 스트라시의 말이 빨라집니다.
"그 자리는 사람의 일들로 폐하께 온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은총으로 앉으신 자리이니, 물러나시는 것도 주님의 뜻인지는 기도로 구하십시오."
'당신이 우리를 이끌어 주셔야겠소!'
'우리의 청을 들어주지 않겠다면, 투항의 뜻으로 당신부터 묶어다가 대공 앞에 바치는 수밖에. 어쩌시겠소?'
그 때는, 죄없는 처자식을 지키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수락했다...고 자신을 속여왔습니다.
솔직히 욕심이 났습니다. 내게 뭐든지 할 수 있는 힘이 주어진다면, 모두가 공평하게 그 몫을 갖도록 만들리라... 그런 허튼 꿈도 꾸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누군가는 내게 은혜를 입었고, 누군가는 나를 원수로 알며, 누군가는 내가 존재하는지조차 모르겠죠.
'내가 이교도들과 싸우러 가서 돌아오지 못하면... 산도미에시는 네가 물려받아야 한다, 카지미에시.'
처음부터 성기사로 살다가 성기사로 죽기 위해 태어난 듯했던, 넷째 형 헨리크.
그는 어떻게 이토록 세속의 삶에 초연할 수 있었을까요.
네, 사실 도망치고 싶습니다. 이젠 장성한 아들도, 손자도 있으니 모든 짐을 그들에게 떠넘기고, 어디론가 세상이 나를 잊어버릴 곳으로.
"누더기 걸치고 맨발을 질질 끌면서 오면, 그 똥멍청이같은 얼굴을 보고도 누군지 모를 줄 알았나..."
폴란드에서 눈치 밥말아먹은 손님이 찾아왔네요. 헝가리-크로아티아 왕 벨러 3세의 미간에 깊은 주름이 잡힙니다. 안 그래도 스트레스 받는데...
시빌라에겐 미안하지만, 출병을 미룬다는 연락을 보내야겠습니다. 당신이 늘상 하던 일이니까 조금만 더 버텨요.
장기 왕조의 안티오키아 공략이 실패로 돌아가자, 칼리프 알 무스타디는 모든 무슬림들에게 빼앗긴 이집트를 되찾으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살라흐 앗 딘이 버텨줄 때는 뭐하고...
아주 오래 전, 형제의 눈을 뽑아버린 죄를 참회하기 위해 남루한 행색으로 헝가리의 순례지를 찾은 이가 있었습니다.
그는 비뚤어진 입을 가진 볼레스와프, 폴란드의 대공이었죠. 겸허함을 연기하는 이 고귀한 손님을, 헝가리 국왕이 몸소 나가 영접했습니다.
칼을 숭상하는 마자르인의 왕답지 않게 책을 좋아했던 칼만. 그는 문제많은 동생 알모시 때문에 속을 썩이던 중이었습니다.
'사제들은 거만떨길 좋아하지만, 그 입에 은화를 쑤셔넣으면 언제 그랬냐는 듯 고요해진다오.'
입비뚤이 볼레스와프가 칼만과 함께 깊은 대화를 나누고 사냥을 즐기다 돌아간 지 2년 후.
형의 눈엣가시였던 왕자 알모시와 아직 어린아이에 불과했던 그의 아들 벨러는 실명형에 처해졌습니다.
사악한 조언을 건넨 자는 카지미에시 2세의 부친, 볼레스와프 3세 크시보우스티였고...
아무것도 모른 채 빛을 잃은 가련한 아이 벨러- 그가 지금의 헝가리-크로아티아 왕, 벨러 3세의 조부인 맹인왕 벨러 2세입니다.
"사서 고생하는 멍청이... 이번에야말로 정신이 번쩍 들게 해줘야겠다. 폴란드 대사 보구발을 불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