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GM: 제프 크노르 'Germany(The Medieval Era)'
회색 먼지를 뒤집어 쓴 한 무리의 발걸음이, 푸른 빛을 뿜어내는 들꽃 앞에서 잠시 멈춥니다.
"마자르인들이 귀하게 여기는 꽃입니다. 탈이 난 속을 달래거나, 부어오른 곳을 가라앉히는 데 쓰기도 합니다."
폴란드 왕국 자문회의 새로운 조언가, 루스인 의사 마트페이가 조심스럽게 꽃을 따서 왕에게 바칩니다.
역병에 시달리는 백성을 구하기 위해 성왕이 하늘에 기도를 올리며 화살을 쏘았고,
그 화살이 떨어진 자리에 피어난 풀의 효험이 그들을 살렸다는, 아름답지만 믿기는 힘든 이야기.
눈에 보이지도, 손에 잡히지도 않는 영혼의 통증은 무엇으로 다스려야 할까요?
"하늘과 땅의 이치를 깨달아 아는 현자여, 가서 그대 주인에게 전하라.
성 이슈트반의 가호는 유효하며, 우리 마자르인은 폴란인의 벗이라고."
맑은 음성이 서늘한 숲의 공기를 가르며 울림을 만들어냅니다. 손님으로 받겠다는 선언입니다.
"나의 사촌, 마자르인과 크로아트인의 신실한 왕에게 주님의 평화가 있기를."
"설마 풀쪼가리가 필요해서 여기까지 온 건 아닐 테고... 순례자 놀이는 뭐야. 죽을 죄라도 졌냐?"
"보는 눈들이 사라지니 바로 본색이 나와버리는군."
"아아, 역시 왕이랍시고 거들먹거리는 건 내 취향에 안 맞아..."
"중요한 이야기니까 제발 진지하게 들어라. 나는 곧 물러날 생각이다."
"뭐라고? 네가 왜?"
이제 좀 심각한 척이라도 하는 건지, 재밌어하는 건지, 저 푸른 눈에서는 아무것도 읽히지 않습니다.
대답을 이어가려 하는데, 목소리가 나오지 않습니다. 삼킬 수도, 토할 수도 없는 거대한 덩어리가 걸려 있는 탓이겠죠.
내 손과, 내 혀로 지은 모든 죄. 우리 선조들이 그러했고, 후손들이 반복할 끝없는 악의 순환.
"...미친 소리는 집어치우고, 일어나. 밖으로 나가자."
"어디로...?"
뒤도 안 돌아보고 먼저 자리를 벗어나며 그가 내뱉은 말들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어디긴 어디야, 사냥터나 가자고. 내 재미를 위해서, 살아 움직이고 푸드덕대는 놈들의 숨을 끊으러 가잔 말이야.
헝가리의 사냥매들은 큰 몸집과 위력, 아름다움으로 유명합니다.
"저 위험한 녀석들을 어떻게 데리고 다니지?"
"말같지도 않은 질문을 하는 걸 보니, 길들이는 것부터 실패한 거지? 네 성격에 꼬박꼬박 먹이를 줘가며 키우려고 했겠지. 그러면 안돼."
적당히 배고파야 말을 듣는 거야. 놈의 말을 듣고 있으니, 더 혼란해집니다. 어디부터 잘못된 걸까요...
모두가 공평하게 제 몫을 얻으면, 이 소란이 가라앉을 줄 알았습니다.
그 경계를 지키지 않는다는 이유로, 나는 집행자의 이름으로 그들을 짓이겼고요. 조카도, 아내도, 적들도...
"제대로 놀 줄 모르는 놈을 데리고 노는 것도 일이군. 아아, 따분해..."
혼자 떠들다 제풀에 지쳐버린 건지, 부드러운 풀 위에 그대로 털썩 누워버리네요.
보면 볼수록 참 안 어울립니다. 뭇 사내들보다도 머리 하나는 더 큰 놈이, 쉴새없이 수다떠는 아낙네들마냥 그 입을 멈추질 않으니.
"너 때문에 흥이 깨져버렸으니까 책임져라."
"뭘 어쩌라고."
"네 얘길 더 해 봐."
또다시 서늘히 빛나는 푸른 눈. 이런 자는 절대 적으로 돌리면 안되겠죠.
"너는 분명 내게 말했다. 제국의 인질이라는 것이 뭔지를 안다고, 우린 너무 닮았다고."
"그래."
"노루가 사냥꾼의 손에서 벗어나는 것같이, 새가 그물치는 자의 손에서 벗어나는 것같이 스스로 구원하라..."
벨러, 혹은 알렉시오스였던 그가 자리를 털고 일어납니다.
"너덜너덜해지도록 읽고 또 읽었지. 그 구절을."
어느덧 하늘이 수줍게 그 얼굴을 붉힐 시간. 카이저의 심부름꾼은 아직 도착하지 않았습니다.
삶의 마지막 날로 삼기엔 너무 아름다운 하루였습니다.
형들은 충성의 표시라며 나를 카이저의 궁정에 인질로 보냈지만, 제국의 중재에 따를 생각따윈 없었습니다.
기한 내에 마그데부르크로 출두하겠다는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고, 그 뒤에 남은 것은 배반자들에 대한 응징입니다.
죽음이 두려운 이유는, 혹시라도 내 죽음을 슬퍼할 이가 있다면... 그에게 죄짓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혼자인 나는 그런 걱정이 없습니다.
"카지미어. 네가 지금 여기 왜 왔는지 아느냐?"
아버지의 유언장에도 올라있지 않은 나의 이름.
"그들이 약조를 지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솜씨 좋은 집행인을 보내달라는 마지막 청을 올리려 했지만, 카이저는 말을 계속합니다.
"그렇다. 네가 살 길은 오직 하나다. 당장 여기서 충성을 맹세하는 것이다. 그럼 패역한 네 형들을 내쫓고, 그들이 가진 모든 것을 네게 주마."
어머니는 나를 사제로 키우려 했다 들었습니다. 맞지 않는 옷을 탐하는 것은, 비참하고 더러운 죽음으로 가는 지름길입니다.
"저는 쓸모없는 다섯 번째 바퀴일 뿐입니다."
모든 것을 독식하려는 탐욕이 사라지지 않는 한, 우리 가문의 수레는 한없이 뒤로 굴러갈 것입니다.
"지금 짐에게 거짓말을 하는 것은 어느 쪽이냐? 죽음을 앞두고도 의연한 체하는 네 혀냐, 두려움이 가득한 네 두 눈이냐?"
사냥꾼의 손 안에 든 새가 무슨 생각을 하건, 달라질 것은 없습니다.
"그들의 집보다는 폐하의 궁이 더 편안하겠지요. 뜻대로 하십시오."
프리드리히- 바르바로사라는 이름으로 더 즐겨 불리는 이 존엄한 자의 입에서, 예상치 못한 한숨이 흘러나옵니다.
"짐의 칼이 아무리 날카로워도, 흐르는 물줄기를 둘로 가를 수는 없겠지. 그만 돌아가라. 네 운명은 나의 손을 떠났다."
인질로서의 가치도 없는 초라한 자. 나는 살아남았습니다.
‘무사했구나, 내 하나뿐인 동생… 카이저가 너를 해치지 않아서 다행이야!'
잊고 있었습니다. 내 죽음을 슬퍼할 이가 하나쯤은 있었다는 사실을.
"그의 고결함이 아우인 너를 이렇게 만들었군."
"다른 이들은 그 유산에 더 관심이 많았다. 나 또한 그랬단 걸 부정할 수 없고."
"아마도 천국의 가장 빛나는 자리는 그의 몫일 테지. 하지만..."
나를 마주한 심판자가 내릴 최후의 선고는 어떤 모습일까요.
"너는 아직 죽지 마라. 도망치지도 말고. 왕이라는 이름을 달고 있어도, 모두를 구할 수는 없다."
다시 말한다. 피투성이가 될지언정, 살아라. 그리고 네가 가장 두려워하던 것들에 맞서라.
미래에 너를 기다리는 것이 죄의식과 파멸뿐이라면, 너를 닮은 나 또한 살아갈 이유가 없다.
이것이 거대한 제국의 후계자가 될 뻔했던, '가짜 알렉시오스'의 마음이었습니다.
하늘은 또다시 붉은 빛으로 물들고, 일렁이는 물결은 오늘의 태양을 삼킬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아아, 따분해..."
우리는 오늘 제대로 된 사냥감을 손에 넣지 못했습니다. 그냥 하루를 공친 셈이죠.
하지만 그의 뒷모습은 따분하다 못해, 너무도 편안해 보입니다.
"정말 이렇게까지 따분한 날은 처음이야..."
End title: Auf Dem Wasser Zu Singen(물 위의 노래)
거울처럼 비치는 파도의 반짝임 속에서,
작은 배는 백조처럼 미끄러지듯 나아간다.
아, 기쁨의 부드럽게 반짝이는 파도 위에서,
영혼은 작은 배처럼 떠다닌다.
하늘에서 파도 위로 내려온,
저녁 노을이 작은 배 주위를 춤추듯 감싼다.
서쪽 숲의 나무 꼭대기 위로,
붉은빛이 우리를 다정하게 부른다.
동쪽 숲의 가지 아래에서,
붉은빛 속에서 창포가 바스락거린다.
하늘의 기쁨과 숲의 고요함이
영혼은 그 수줍은 빛을 들이마신다.
아, 흔들리는 파도 위에서, 시간은
이슬 맺힌 날개를 타고 내게서 미끄러져 간다.
내일도 시간은 다시 미끄러져 갈 것이다.
어제, 오늘처럼 반짝이는 날개를 타고,
더 높고 찬란한 날개를 타고,
나 자신도 끊임없이 변하는 시간에서 미끄러져 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