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GM: 어노인팅 '아버지 품 안에서 난'
더 나은 내가 되기보다, 이대로 주님 따라가리.
내 주님과 함께 있는 한, 두려울 것 없네.
"폴란드가 잉글랜드를 배반했다고?"
하여튼 오래 살고 볼 일입니다. 크라쿠프에서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요?
놀라움이 가득한 주인의 푸른 눈동자를 응시하며, 헝가리 왕실의 술잔 관리인인 슬로바키아의 이슈트반이 대답합니다.
"그 반대입니다. 잉글랜드가 폴란드를 등진 것이지요."
"분명 폴란드가 먼저 손을 내밀었을 텐데."
나랑은 죽어도 동맹 안 맺어주더니. 카즈메르가 저렇게 미쳐날뛰는 이유를 도무지 모르겠습니다.
입이 심심해서 안주거리 좀 알아보라고 했더니, 엄청난 걸 내놓는군요.
"폴란드 국왕만큼 사도좌의 총애를 독차지하는 자도 없지요."
"가짜 교황을 내보내라는 최후통첩을 헨리 왕이 거절했다?"
"그렇습니다. 성전기사단장의 이름을 빌렸을 뿐, 사실상 사도좌의 뜻을 어긴 셈이지요."
이제야 알겠습니다. 어리석은 헨리... 욕심많은 제 아비의 나쁜 버릇을 버리질 못하고, 교회를 독점하려 폴란드에 손을 벌렸군요. 그래봤자 그가 내세운 근본없는 교황 '스테파누스 10세'의 명은 브리튼을 벗어나지 못합니다.
제 장난감을 뺏기기 싫은 헨리의 철부지짓을 카즈메르가 받아줄 이유는 없죠. 이웃한 덴마크와도 국경을 확정지은 지 오래고, 제국의 그늘 밑에 숨은 보헤미아조차 침묵을 지킨 지도 꽤 됐습니다.
적어도 헨리 2세는 먼저 도움을 준 뒤 청구서를 내미는 양심이라도 있었는데... 그 아들은 제 힘이 깎여나가는 게 싫으니, 초장부터 폴란드를 고기방패로 쓰려 한 겁니다.
하지만 모든 길이 로마로 통하는 건 아니죠. 동맹파기자 모디파이어가 주는 불이익은 어마어마합니다. 무려 향후 10년간 그는 모든 기독교 군주들에게 배신자로 불리게 될 처지.
"너 진짜 괜찮겠냐...?"
이슈트반이 바친 포도주에서 나는 매혹적인 향이 온 방안에 퍼집니다. 마시는 순간 온 몸을 깃털처럼 가볍게 만들어주고, 모든 근심을 잊게 해준다는 '전설의 성혈'.
이건 나보다도 저 놈에게 더 필요할 것 같지만, 마음뿐이군요.
"폴란드가 약해지면 제일 먼저 카이저의 먹잇감이 될지 모릅니다. 그 다음엔 아마도..."
"...우린 쓸모가 없다. 팝콘이나 가져와라, 피슈티(이슈트반의 애칭)."
이럴 때를 위해서 그토록 졸라댔건만. 솔직히 두 나라가 힘을 합쳐도 카이저를 상대하긴 벅찹니다.
헝가리도 살고 봐야죠... 폴란드에 땅을 빼앗기고 이를 득득 가는 덴마크의 발데마르와 손을 잡아서라도, 지켜내야만 합니다.
성 이슈트반의 왕관 위로 위대한 라슬로 1세가 덧씌워준, 크로아티아의 즈보니미르 왕관까지.
카즈메르... 망하지 마라, 망할 놈아.
벨러의 얘기가 정정해야 할 만큼 틀린 건 아니지만, 그가 모르는 이유가 하나 더 있습니다.
산발적인 약탈, 내부 폭동을 제외하고 외침을 받거나 원정에 나서면 '왕국의 번영을 지켜보기' 목표를 달성하지 못하고, 다시 선택하려 해도 제약이 걸리죠.
덴마크가 여전히 서부 포메랄리아를 차지하고 있지만, 카이저에게 홀슈타인 공국을 통째로 빼앗긴 상황이라 저긴 안 건드리는 게 낫습니다.
신성로마제국은 봉신한계가 다 찰 때까지 정복을 돌리다가, 그래도 힘이 남아돌면 주변국을 무조건 속국으로 삼아 세금과 병력을 뜯어내려 할 겁니다.
폴란드로부터 연거푸 동맹을 거절당한 헝가리가 덴마크와 혼사를 맺고 적극적으로 돕는 데는 다 이유가 있습니다.
먼 옛날, 카이저 오토 3세가 우리 선조 흐로브리에게 제국왕관을 씌워주며 약속한 폴란드의 자주독립은, 그가 요절하면서 공허한 먼지가 되어 흩어져버렸죠.
무엇보다... 아무리 잉글랜드의 힘이 아쉬워도, 대립교황을 옹호하는 그를 도울 수는 없습니다.
아내 엘레오노르의 얼굴에 드리워진 그림자는 더 짙어져 가지만, 모든 선택에는 대가가 따릅니다. 스스로 책임져야죠.
역설신, 아니 하느님은 아십니다. 누가 바른 길로 가고 있는지. 결과가 모든 걸 말해줄 겁니다.
미에슈코가 못이룬 꿈(?)을 대신 이뤄줄 때가 왔습니다. 솜씨 좋은 자들이 만든 새로운 주화가 온 왕국에 퍼졌습니다.
현재 폴란드 왕국의 연간 순수입이 200골드를 약간 밑도는 걸 감안하면, 주조에 들어간 비용 100골드는 꽤 큰 금액입니다.
통치자의 위신점수가 높을수록 외교 관계도가 올라가니, 영광을 좇는 것이 무모한 일만은 아니죠.
(가령 위신점수가 1000이라면, 모든 캐릭터들과의 관계도가 5만큼 가산됩니다)
1191년 여름, 라돔 시뿐 아니라 왕국 전역의 종소리가 엄숙하게 울려퍼졌습니다.
아무도 그의 신분을 들먹이지 못할 만큼 눈부신 활약을 펼쳤던 재상 보구발이 영원한 쉼을 얻었습니다.
그는 이제 가고 없지만, 왕은 묵묵히 할 일을 찾아 다음 한 발, 또 한 발을 내딛습니다.
시민들과 소통하며 관리력을 더 올리고, 새 성당의 낙성식을 거행해 베네딕토회 공헌도를 올리며, 그들이 준 영감으로 탐식의 악습에서 벗어났습니다.
'내가 그만 먹으랄 때는 죽어도 말 안 듣더니...'
어쨌거나 아내 엘레오노르의 표정은 조금 부드러워진 것 같습니다.
그리고 보구발의 후임으로 재상이자 세임 의장에 취임한 자는, 놀랍게도 볼레스와프 실롱스키.
그의 집념은 결국 보상받았습니다. 물론 오는 게 있으면 가는 게 있어야겠죠.
실롱스키는 대폴란드 공작 오돈 미에슈코비치에 대한 지지를 철회했습니다. 풀이 죽은 오돈도 그를 따라 셀프 추천을 그만두었죠.
이제 헬레나 즈노옘스카의 아들이 다음 국왕이 되는 것에 불만을 표하는 자는 없습니다. 공식적으로는요.
내가 아주 작은 꼬마였을 때, 내 아버지는 이미 백발이 성성한 노인이었다.
그가 열심히 읽던 거룩한 책에서는, 머리 위에 내려앉은 하얀 세월의 흔적을 '영광의 면류관'이라 불렀다.
모두가 그를 우러러보았지만, 그 아들인 내게 들려오는 얘기들은 아주 많이 달랐다.
'젊은 왕비가 외로움을 못 이겨 저지른, 일생일대의 실수.'
그 잔인한 수근거림. 아무리 선량한 나의 형이 두 귀를 가려주어도, 그 틈새로 파고들던... 내 존재를 부정하는 말들.
"아버지, 왜 숨어 계세요? 보고 싶어요!"
진짜 아들이 아니니까, 만나러 오지도, 안아주지도 않는 거라고...
그렇게 떠드는 자들에게 자랑하고 싶었다. 그뿐이다.
너희들은 그저 샘이 나는 거야. 누구보다 좋은 사람, 내 아버지와 같은 분은 없으니까!
"얘야, 이리 와 앉거라. 같이 성경을 읽자꾸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이같은 마음을 갖지 못한 자는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아버지는 벌써 머리도 수염도 하얀데, 그럼 천국에 못 가시나요? 하느님은 너무해요..."
은은한 웃음, 따뜻한 포옹.
"그럼, 네가 나를 좀 도와줘야겠구나."
어이, 네 늙은 친구다. 천국의 문을 열어다오. 암호는 흰수리.
'내가 했던 일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시는,
내 아버지 품안에서 난 더 바랄 것 없네.'
하느님을 속일 생각을 하다니, 기가 막히지.
그렇게 생각하지 않나, 카지크?
- 1214년 그단스크에서, 너의 친구 레셰크가.
첫댓글 흑흑 보구발 ㅜㅜ 어째 이름이 낯익어서 검색해보니 매 회 활약했네요(..)
이 양반 덕분에 라돔 시를 기억하게 됐을 정도 ㅜ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