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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아는 세기의 여인은 아프로디테, 헤라, 클레오파트라, 조세핀, 마리 앙투아네트
같은 여인들인데 명성황후를 보면서 자꾸만 베르사유 장미의 주인인 마리 앙투아네트가
떠올랐습니다. 마리 앙투아네트(1755.11.2-1793.10.16.)는 프랑스 왕 루이 16세의 왕비
입니다. 신성로마제국 황제 프란츠 1세와 오스트리아 제국의 여제 마리아 테레지아 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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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서 막내딸로 태어났어요. 오스트리아의 오랜 숙적이었던 프랑스와의 동맹을 위해 루이
16세와 정략결혼을 했지요. 왕비로 재위하는 동안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 38살 생일을
2주 앞두고 단두대에서 처형된 비운의 왕비입니다. 마리 앙투아네트가 1세기 정도 먼저
왔고, 정략적으로 왕비가 된 것이나 비운의 죽음을 맞은 것이 처량 맞게 닮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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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생각에 비주얼은 마리가 더 나았을 것같기도 합니다. 제가 원래 서구적인 비주얼을
좋아해서 그러니 용서하시라. 하지만 나머지 지덕체는 하늘 땅, 비교불가 명성황후가
위너입니다. 두 사람에 대한 평가도 흥미롭습니다. 프랑스 혁명 당시에는 마리 앙투아네트
에 대한 평가가 극도로 부정적이었으나, 최근의 연구들에 따르면, 당대 퍼져 있던 그녀에
대한 평판의 대부분이 과장된 것으로 부정되고 있는 편입니다. 왕정 시대 프랑스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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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비로서는 특별히 부적합한 행동이 없었다는 평가가 주류를 잇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정치 참여를 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상황윤리라는 것을 가만해야 합니다.
1793년 로베스피에르의 공포정치가 시작되면서 혁명광장에 설치된 단두대에는 피비린내가
가시지 않았는데 혁명세력은 그녀를 성적 스캔들의 주인공으로 만들었으며 로베스피에르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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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가 만족할 줄 모르는 ‘자궁의 충동’을 갖고 있다고 몰아붙였답니다. 남성 공화주의자들은
왕비의 부정한 사례를 들어 여성의 정치참여를 도덕적 타락으로 몰고 갔는데 미국의 여성
사학자 린 헌트는 “그것은 남성끼리의 새판 짜기였다. 남성 중심의 혁명, 여성을 정치에서
배제한 절반의 혁명. 이것이 혁명에 감추어진 보수성”이라고 말한 것을 주목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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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오스트리아와 프랑스는 앙숙관계였고, 두 국가 간의 전쟁으로 프랑스는 많은 아들과
형제들을 잃었으니 국민 대부분이 오스트리아에 적대감을 가지고 있었어요. 그 두 나라의
화해와 동맹을 위해 마리 앙투아네트가 프랑스로 왔지만 역사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프랑스
혁명의 원인이라는 죄를 뒤집어쓴 것으로 봅니다. 그녀가 왕비로 있었을 때 국고가 파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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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경이었던 것은 사실이나, 그것은 그녀의 사치 때문이 아니라 선대의 향락과 미국 독립
전쟁 지원 때문이었던 것이 정설입니다. 결혼당시 정치에는 무관심한 순수한 마음을 가진
15살 행복한 소녀였던 마리 앙투아네트는 '사치와 환락의 궁전'으로 알려진 쁘띠 트리아농
궁에서 실제는 시골처럼 꾸며놓고 전원생활을 즐겼을 뿐이었어요. 그녀는 프랑스 왕실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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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일하게 소작인의 밭에 마차를 몰아 밭을 망치지 않게 배려한 사람이었으며 루이 16세가
활을 쏘다 실수로 농민을 다치게 했을 때에도 직접 치료를 해준 사람이었다고 해요.
그녀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동정심을 가지고 있었으며 프랑스 왕비로선 이례적으로 빈민
구제와 프랑스식 농경생활에 관심을 가진 것으로 압니다. 구제를 위해서 자신의 드레스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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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접 팔고 당시 악마의 음식이라고 불린 감자에 혐오감을 없애기 위해 직접 꽃을 꽂아
나눠 주거나 감자 꽃을 머리에 꽂았으며, 그녀는 딸 마리 테레즈에게 사치를 도외시하고
가난한 사람들을 이해하도록 가르치다 딸의 불만을 사기도 했을 만큼, 아름답게 꾸미고
자애롭게 돌보는 것을 좋아했던 여인이었습니다. 유명한 다이아몬드 목걸이 사건 역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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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 앙투아네트가 결백하다고 해명되었습니다. 그 목걸이는 애초 루이 15세가 애첩 마담
뒤 바리의 사치를 위해 제작된 것이고, 마리 앙투아네트는 그 목걸이 구입을 거부했대요.
“빵이 없다면 과자를 먹으세요."라는 말도 원래는 거리에서 굶고 있는 아이들을 보고 신하
에게 "저 아이들에게 브리오슈를 주세요."이었는데 혁명군은 의도적으로 그 말을 왜곡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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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뜨렸습니다. 그뿐 아닙니다. 아들을 무척 사랑했던 마리 앙투아네트는 혁명군 측의 음모로,
재판에서 아들을 성추행했다는 누명을 쓰기도 했습니다. 당시 8살이었던 루이 17세는 마약
까지 먹은 상태로 그것이 무슨 뜻인지도 모르고 동의했고, 그것은 마리 앙투아네트 생애 가
장 큰 상처였다고 전합니다. 명성황후(1851~1895)는 조선시대 사뿐만 아니라 한국사 전체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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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틀어 매우 독특한 행보를 보여준 왕비였습니다. 역사상 권력의 정점에 오른 왕비들은 종종
있었지만, 그들이 권력을 쥔 것은 지아비인 왕이 죽고 난 뒤, 아들이나 손자를 내세워 수렴
청정하면서라던가, 아니면 명문가인 친정을 등에 업고 왕을 뒤에서 조종하는 방법을 통해서
이었는데 명성황후는 이전의 왕비와는 확연히 달랐습니다. 그녀는 지아비인 고종이 국정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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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논하는 가장 가까운 상대였으며, 외국의 세력들이 고종보다도 더 예의주시했던 권력의
중심에 있던 인물이었습니다. 그녀는 명문가 친정의 도움으로 왕비 자리에 오르지 않았으며
오히려 자신이 왕비가 되어 정치적 필요에 의해 친정세력을 키웠습니다. 살아 있는 왕보다도
더 주목받으면서 사실상 왕과 권력을 나눠 가졌다고도 보이는 명성황후의 존재는 당시 망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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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로 치닫는 조선의 특수상황을 고려하고 생각하여도 매우 특이하고도 경이롭습니다.
배경이 없어서 오를 수 있었던 왕비자리 명성황후는 여흥 민 씨로 여주에서 태어났습니다.
어렸을 때 이름은 자영이었다고 하나 확실하지는 않습니다. 그녀가 태어난 집안은 숙 종을
두고 장 희빈과 삼각관계를 겨루었던 왕비, 인현왕후를 배출한 민 씨 가였습니다. 명성황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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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아버지 민 치록은 인현왕후의 아버지였던 민유중의 5대손이었습니다. 이런 가계를 통해
볼 때 명성황후 집안은 당색으로는 서인 계였고 아버지 민 치록이 세도정치기인 철 종 때
음서로 관직에 오른 것을 보면 그때까지도 꽤 내로라하는 집안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민 치록은 음서로 관직에 올라 지방관과 중앙의 중간관리 벼슬을 했으며 훗날 명성황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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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는 딸아이 하나만 남긴 채 이른 나이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8살에 아버지를 여읜 이후
명성황후는 어머니와 함께 여주를 떠나 서울로 올라와 ‘감고 당’에 기거합니다. 감고당은
대조 민유중의 집으로 민 치록이 소유하고 있었습니다. 당시 서울에 집을 소유한 것을 볼 때
집안 형편은 꽤 넉넉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조선시대에 대를 이을 사내아이가 없는 집안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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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몰락을 예정한 것과 같습니다. 12촌인 민 승호가 양자로 들어와 집안의 제사를 맡기는
했지만, 사실상 명성황후는 어머니와 단둘이 외로운 성장기를 보냈을 것이 분명합니다.
명성황후는 어렸을 때부터 무척 총명하여 주변에 칭찬이 자자하였습니다. 특히 훗날
왕비 자리에 오르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친척 아주머니 민 씨 부인의 마음에 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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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었습니다. 이 민 씨 부인은 바로 당시 아들 고종을 앞세워 조선의 실권을 쥐고 있던
대원군의 아내, 부대부인 민 씨였습니다. 부대부인 민 씨는 명성황후의 아버지 민 치록의
양자로 들어간 민 승호의 누나였습니다. 그녀는 둘째아들 고종의 왕비로 자신과 친인척
관계이던 명성황후를 적극적으로 대원군에게 추천하였습니다. 대원군은 명성황후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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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정이 단출한 것을 매우 마음에 들어 했다고 합니다. 왕비를 내세운 안동김씨의 외척
세도정치를 무척이나 경계하던 대원군은 가문 적으로는 그다지 빠지지 않으나 주변에
힘이 될 사람은 별로 없는 명성황후를 전격적으로 왕비로 간택했습니다. 물론 제대로
된 왕비 간택 절차를 거쳤지만, 이 간택 절차 이전에 대원군은 이미 아비 없고 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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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제 없는 민 씨 가의 외로운 처녀를 며느리로 점찍고 있었습니다. 몰락한 친정을 둔
왕비가 정치에 개입할 여지는 전혀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지요. 그러나 대원군의
예상은 보기 좋게 뒤집어졌습니다. 총명했던 명성황후는 대원군의 사람도 자기 사람으로
만들 수 있는 능력이 있었습니다. 그녀는 양 오빠이긴 하지만 실제로는 대원군의 처남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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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 승호를 자신의 세력으로 끌어들였고 대원군의 형인 이 최응, 대원군의 큰아들 이재면
(고종의 맏형)까지도 대원군에게 등을 돌리고 고종에게 힘이 될 수 있도록 만들었습니다.
친인척을 모두 끌어들인 후 명성황후는 대원군에 의해 정계에서 밀려난 안동김씨 세력과
대원군이 권력을 잡게 해주었지만 결국 반목하게 된 풍양 조 씨 세력까지 끌어들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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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방에서 대원군이 운신할 범위를 점차로 좁혀 나갔던 것입니다. 명성황후가 처음부터
대원군에 맞서는 지략적인 정치가였던 것은 아닙니다. 여기에는 시대의 흐름을 읽고 이를
자기 것으로 만들고자 했던 명성황후의 노력, 그리고 무엇보다도 시아버지 대원군과의
감정적인 대립도 한 몫 하였습니다. 저는 명성 황후를 키운 것은 대원군으로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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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세의 나이에 왕비의 자리에 오른 그녀는 신혼 초부터 여성으로서는 쓰디쓴 질투의
감정을 맛보았으며 이를 시아버지 대원군이 부추긴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명성황후와
혼례를 치를 무렵 고종은 이미 사랑하는 여인이 있었으니 상궁 출신의 궁인 이 씨(정 선경)
을 매우 총애하여 가까이 두고 정작 정식 왕비인 명성황후는 냉대했던 것입니다. 여기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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엎친 데 덮친 격으로 궁인 이 씨가 아들 완화 군을 낳자 궁중의 관심은 모두 궁인 이
씨에게로 몰렸습니다. 완화 군이 태어나자 대원군은 명성황후가 젊은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완화 군을 세자로 책봉하려고 까지 했습니다. 대원군은 배경 없는 왕비를 며느리로 들인
것도 모자라 혹시나 외척이 발호하는 것이 두려워 신분적으로나 가문 적으로 아무것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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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댈 데 없는 궁인의 자식에게 힘을 실어주는 것이 외척에게 시달리지 않고 왕권을 더욱
오롯이 하는 방법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대원군의 완화 군에 대한 성급한 세자
책봉 시도는 결국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이때부터 명성황후는 시아버지 대원군의 의중을
알아보았고 자칫 자신은 허울만 좋은 찬밥신세 왕비로 전락할 수 있음을 간파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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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고종의 사랑을 회복한 명성황후는 아들을 두 명이나 낳았지만 모두 요절하였고 그
과정에서 대원군의 원자에 대한 무리한 약 처방이 그녀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었습니다.
국정부터 왕가의 가정생활까지 간섭하며 모두 자신의 손아귀에 두려 했던 대원군의 독단
적인 태도는 결국 명성황후를 돌아서게 들었습니다. 그리고 이즈음 왕위에 오른 지 10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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년이 되어 성인이 된 고종도 더 이상 전제적인 아버지 대원군의 간섭 없이 자신이 왕인
나라를 자기 스스로 다스려야겠다는 결심을 굳히게 됩니다. 고종과 명성황후는 대원군이
꼼짝할 수 없도록 자신들의 세력을 서서히 형성하여 정치적 입지를 강화하였습니다.
또한, 외세에 대한 정치적 입장이나 경복궁 중건 등으로 인한 대원군의 거듭된 실정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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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의 친정이라는 시대적 요구를 증폭시키고 있었기에 이를 적극 이용하였습니다.
마침내 1873년 고종과 명성황후는 최 익현이 대원군의 실정과 정책을 비판하는 상소를
올리게 하여 이를 계기로 고종 친정을 선포함으로써 대원군을 권력의 중심에서 축출했습니다.
외세의 틈바구니에서 고종은 친정 직후 대원군 집권 시의 쇄국을 풀고 일본과 수교하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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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차례로 서양의 열강들과 수교를 맺어나갔습니다. 그러나 이전의 강력한 통상수교거부
정책(쇄국정책)으로 미처 외세에 대해 준비가 되지 못한 상태에서 이루어진 개방은 여러
가지 문제점을 드러내기 시작했습니다. 개국 이후 내적으로는 여전히 남아 있는 대원군과
의 대립과 기존 세력과의 갈등, 외적으로는 조선의 국권을 침탈하고자 하는 일본과 서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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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강의 틈바구니에서 고종과 명성황후는 여러 가지 시행착오를 하면서 외줄타기를 하듯
위태로운 상황에서 정국을 운영하였습니다. 그 와중에 1882년 신식군대에 대한 구식군대의
불만이 표출된 임오군란이 터지고 명성황후가 힘을 기르기 위해 키웠던 민 씨 세력이
위협 당하자. 명성황후마저도 그 신변의 안전을 도모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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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성황후는 궁궐을 탈출하여 장호원에 은거하였고 임오군란을 계기로 일시적으로
정권을 되찾은 대원군은 명성황후가 죽었다고 선포하고 국장까지 치르려고 하였습니다.
이때 명성황후는 고종에게 자신이 건재함을 알리고 청나라에 지원을 요청하도록 합니다.
청나라 군대의 출동으로 대원군은 청으로 압송되었고 명성황후는 궁궐로 돌아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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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이때부터 더욱 자신의 안전을 위해 민 씨들의 힘을 모으는 다소 파행적인 정국
운영을 해나가기 시작하였습니다. 1884년에는 청의 개입으로 더뎌진 개화에 불만을
품은 개화파들이 일으킨 갑신정변으로 왕권이 위협받자, 명성황후는 더욱 청나라와
가까이하게 되었고 이후부터 전업 정치를 합니다. 한편 신하들과 대원군에게 조차 권력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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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전을 받은 고종은 명성황후와 더욱 밀착되었고 모든 국정을 그녀와 의논하였습니다.
특히 외교적인 문제는 명성황후와 거의 뜻을 같이하였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이부분을
놓고 고종이 줏대가 없다고 말하는 사람은 꼰대라고 생각합니다. 각시가 나보다 나으면
각시에게 전권을 위임하는 것도 용기입니다. 제 보기엔 고종이 솔직한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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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오군란 이후 명성황후의 대가 더 단단해지고 커지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호랑이 굴에 들어갔다가 나왔으니 야물어 질 수밖에요. 권력에 강한 집착을 보이기 시작
한 것은 인지상정입니다. 살아남아야 하니까요. 또한 궁궐에서 굿을 하거나 명산대천을
찾아다니며 치성을 하는 등 국고를 낭비하는 비이성적인 모습을 보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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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부분도 할말이 있습니다. 차관300냥을 무기 구입 비로 쓰기 위해 사발통문을 만든
것으로 봅니다. 그도 그럴 것이 명성황후에 대한 외국 측의 기록을 보면 하나같이
그녀가 영민하고 총명하며 나라를 위해 노심초사하는 여인이었다고 쓰여 있습니다.
19세기 말 한국을 다녀간 영국의 비숍 여사는 명성황후를 알현한 후 "왕후는 가냘프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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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인이었다. 눈은 차고 날카로워서 훌륭한 지성의 소유자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명석하고 야심적이며 책략에도 능할 뿐 아니라 매우 매혹적이고 여러 가지 면에서 매우
사랑스러운 여인이었다." 고 전합니다. 선교사 언더우드의 부인은 "그녀의 지식은 주로
중국에서 얻은 것이었지만 세계 강대국과 그 정부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나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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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질문을 던졌고 자기가 들은 것을 모두 기억하고 있었다. 그녀는 섬세한 감각을
가진 유능한 외교관이었고, 반대세력의 허를 찌르는 데 능했다. 그녀는 일본을 반대했고
애국적이었으며 조선의 이익을 위해 몸을 바치고 있었다. 그녀는 아시아의 그 어떤
왕후보다도 그 수준을 훨씬 뛰어넘는 여인이었다."고 전합니다. 명성황후를 시해한 일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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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인들조차도 그녀를 동양의 호걸, 여장부로 평가했습니다. 지나치게 총명하고 정치에
적극적이었기에, 또 보기에 따라서는 시대를 앞선 매우 현대적인 자존감을 가진 여인이었기에
명성황후는 정적들의 표적이 되었고 신변은 늘 불안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1894년 동학
농민전쟁, 청일전쟁을 거치면서 조선정치에 깊이 개입하고 들어온 일본을 아라사(러시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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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원하여 견제 하고자 했고, 일본은 일본대로 명성황후의 계획을 무너뜨리기 위해
후안무치한 음모를 세우기에 이릅니다. 그것은 일명 ‘여우사냥’으로 불린 명성황후의
시해시도였습니다. 일본은 자신들이 조선의 국권을 침탈하는 데 가장 방해요소로 왕비였던
명성황후를 지목하고 제거하고자 하였습니다. 1895년 음력 8월 20일 새벽, 경복궁 안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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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는 건 청궁의 옥호 루에서 명성황후는 난입해 들어온 일본 낭인들의 손에 처참하게 시해
당했습니다. 시신마저 향원정의 녹원에서 불살라지는 수모를 당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을미
사변(명성황후시해사건)입니다. 이 을미사변을 지휘한 것은 일본 정부의 지시를 받은 일본
공사 미우라 고로였지요. 외세에 의한 왕비살해는 국내뿐만 아니라 국외적으로도 충격적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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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이었습니다. 국내에서는 일본에 왕비 살해의 원한을 갚자는 움직임이 일어나면서 을미
의병이 일어났고 국제적으로는 일본을 비난하는 목소리가 드높아졌습니다. 시아버지였던
대원군은 이 틈에 잠시 정권을 되찾는 뜻하였지만, 고종이 이미 아버지마저 믿을 수 없는
상황에서 러시아 공관에 안전을 의탁하는 '아관파천'을 행함으로써 곧 실각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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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성황후의 시해 사건으로 인해 조선은 국 격을 훼손당하고 망국으로 가는 길을 한발 더
내딛게 됩니다. 명성황후는 시해 직후 대원군에 의해 폐위되어 서인으로 강등되었다가
같은 해 고종에 의해 복호되었고,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황제로 즉위하면서 '명성'
이라는 시호가 내려지고 황후로 추봉되었습니다. 장례는 죽은 지 2년 만인 1897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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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장으로 치러졌으며 홍릉에 안장되었습니다. 요절한 두 아들 다음에 낳은 셋째 아들이
마지막 임금 순종황제입니다. 명성황후에 대한 평가는 살해 직후부터 오늘날까지 여러
가지로 엇갈립니다. 그녀가 망국의 왕비로서 나라를 망치게 한 장본인이라는 평가부터
구국을 위해 몸을 바친 시대의 여걸이었다는 평가까지 참으로 극단적으로 다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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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아마도 19세기 말 시대적 혼란 상황 속에서 그녀가 보여준 정국운영의 다양한
면 때문일 것으로 보입니다. 대원군의 쇄국 정치에 반대하여 미처 준비도 안 된 상황에서
나라를 열었지만 급진적 개혁은 원하지 않아 개화파의 불만을 샀고, 일본을 물리치려고
외세를 끌어들였으며, 그녀의 친정이 새로운 외척 세력으로 급부상하는 등 시대를 역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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했다는 것이 주요한 비판의 이유였습니다. 한편에서는, 똑같은 그녀의 정치적 행보에 대해,
명성황후가 지나친 쇄국과 급진적 개혁 사이에서 중심을 잡고자 노력했고, 열강들을 이용
해 나라의 독립을 유지하는 외교술을 펼쳤으며, 그녀가 의도적으로 키운 외척들이 훗날
고종의 측근이 되어 고종이 대한제국이라는 마지막 시도를 해볼 수 있게 했고 이것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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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과 이어졌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평가를 내리기도 합니다. 저는 한 치 망설임도
없이 후자에 한 표를 던지겠습니다. 또한 명성황후와 대원군의 대결에서도 명성황후가
이겼다고 봅니다. 명성황후를 10년 만에 다시 접하면서 우리조국페미니즘의 시작은 바로
명성황후로 봅니다. 저는 우리 공주들이 명성황후를 벤치마킹하기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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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수공방 내내 책이 닳도록 읽으면서 지혜를 배웠을 것이고 대가 센 것은 천성이지만
시대의 흐름을 정확히 읽을 줄 아는 안목이 있어야 가능할 것입니다. 십대에 시아버지와
맞닥트려서도 기가 죽지 않았고 건30년을 대원군 같은 상대와 싸우려면 자기 소신이
분명하지 않으면 불가능합니다. 10년 전 명성황후를 볼 때는 너무 분하고 억울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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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 방 하는 날 꺼이꺼이 울었는데 대원군의 나이가 된 지금 저는 담담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죽는 것이고 임오군란 때 이미 죽다가 살아나났으니 그만하면 됐습니다.
훗날 직접적인 복수도 안 중근 의사가 했습니다. 200년이 지난 오늘 일본, 러시아, 중국, 미국,
영국, 프랑스 중에 러, 영, 프는 이미 제쳤고 내년이면 일본 제치고 미국, 중국만 남았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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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국의 '수소차, 5G' 성공하면 이제 우리가 1빠 할 날도 멀지 않았다고 보는데 동의해 주시라.
연기는 기라성같은 인물들 가운데 고종 역(이 진우), 대원군 역(유 동근)을 칭찬합니다.
위화군의 어미(장 상궁) 역, 이 재은이나 세자 빈 이유리가 이미 이때부터 싹수가 있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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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뽑은 명장면 중 하나는 세자의 아이를 가진 나인이 수정과를 먹고 급사한 장면에서
실성한 왕비를 연기하는 최명길이 압권입니다. 이 스퀀스 때문에 배역을 바꿨을 것입니다.
영화 ‘마리 앙투아네트’의 주인공은 커스틴 던스트(39세)가 맡았고 감독(소피아 코올라,50세)
이 배우 뺨치는 미인입니다. 감동은 ‘불꽃처럼 나비처럼’ 이 낫지만 베르사유 풍의 건축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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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라든지 프랑스 귀족들의 실생활 같은 눈요기 감성들은 '마리 앙투아네트'가 훌륭합니다.
제 취향을 저격해서 그럴 것입니다. 아내가 화장대나 장미꽃무늬를 좋아했던 것으로 기억
하는데 설마 베르사유를 벤치마킹 한 것일까요? 저는 남성패션은 이태리가, 여성 브랜드는
프랑스가 1빠라고 봅니다. 루이비통이나 샤넬이 비싼 이유는 황실에서 나온 이름이라서
그럴 것입니다. 루이비통은 루이16세에게서 따왔을까요?
"님은 갔습니다. 아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습니다.
푸른 산 빛을 깨치고 단풍나무 숲을 향하여 난 작은 길을 걸어서 차마 떨치고 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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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의 꽃같이 굳고 빛나던 옛 맹세는 차디찬 티끌이 되어서 한숨의 미풍에 날아갔습니다.
날카로운 첫 키스의 추억은 나의 운명의 지침을 돌려놓고 뒷걸음쳐서 사라졌습니다.
나는 향기로운 님의 말소리에 귀먹고 꽃다운 님의 얼굴에 눈멀었습니다.
사랑도 사람의 일이라 만날 때에 미리 떠날 것을 염려하고 경계하지 아니한 것은 아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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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별은 뜻밖의 일이 되고 놀란 가슴은 새로운 슬픔에 터집니다.
그러나 이별을 쓸데없는 눈물의 원천을 만들고 마는 것은 스스로 사랑을 깨치는 것인 줄 아
는 까닭에, 걷잡을 수 없는 슬픔의 힘을 옮겨서 새 희망의 정수박이에 들어부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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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만날 때에 떠날 것을 염려하는 것과 같이 떠날 때에 다시 만날 것을 믿습니다.
아아, 님은 갔지마는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
제 곡조를 못 이기는 사랑의 노래는 님의 침묵을 휩싸고 돕니다.
2019.12.14.sat. 악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