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출처: 비공개 입니다
|
호들러
one of the best-known Swiss painters of the 19th century.
스위스의 주요화가. 그는 12세 때 고아가 되었으며 처음에는 툰에서 관광객들에게 풍경화를 그려주는 미술가 밑에서 공부했다. 그러나 1872년 이후로는 제네바에서 바르텔레미 멘 밑에서 좀더 마음에 맞는 분위기에서 공부했다. 1879년 제네바에 정착했고 프랑스의 사실주의 화가인 귀스타브 쿠르베의 영향이 엿보이는 간결한 구성의 대형 초상화들을 그렸다. 그러나 1880년대 중반 무렵 그의 그림에서는 눈에 띄게 자의식이 강한 선을 위주로 한 경향을 보이면서 유럽 전역에서 찬사를 받은 〈밤 Die Nacht〉(1890, 베른 미술관)과 같이 청춘과 노년·고독·명상 등의 상징적 주제들을 점차로 많이 다루었다. 이 시기부터 그의 중요한 작품들은 풍경화와 초상화 및 웅장한 구도의 집단 인물화로 나눌 수 있다. 이 웅장한 인물화들에는 엄숙하고 의례적인 제스처를 통해 호들러의 신비스러운 철학을 나타내고 있는 누드들을 딱딱한 선으로 그리고 있다. 여기에서는 선과 구도의 강렬한 리듬과 선명하고 평면적·장식적인 표현이 눈에 띈다.아마도 스위스의 19세기 화가들 중 가장 추앙받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단연 페르디난트 호들러(1853~1918)일 것이다. 호들러는 1853년 스위스의 베른에서 태어났다. 이후 그가 18세가 되던 해에 그는 제네바로 가서 화가수업을 받게 된다. 호들러는 전 생애를 통해 대략 3~4가지 정도의 다른 화풍을 전개시켰다. 습작기에는 주로 사실주의 풍으로 풍경, 인물 등을 그렸다. 하지만 40대 이후 호들러는 상징주의나 아르 누보 등의 영향을 받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호들러는 당대의 이들 여러 미술운동들을 맹목적으로 추종하지 않고 이를 자신 만의 독특한 화풍으로 발전시킨다. 소위 호들러만의 독특한 화풍으로 그 스스로 명명한 '평행주의'(Parallelism) 라고 하는 화풍은 화면에서 여러 인물들이 마치 어떤 의식을 행하거나 혹은 춤을 추는 듯한 독특한 동작을 취하는 모습을 보인다. 하지만 말년에 와서 호들러의 화풍은 강렬한 색채와 기하학적으로 환원한듯한 인물들의 모습을 특징으로 하는 표현주의적 화풍을 보여준다. 호들러의 작품중 가장 유명한 것은 일상적인 인물들의 모습이다. 특히 그의 "장작캐는 사람"(Der Holzfaeller)는 스위스의 50프랑 지폐의 뒷면에도 등장한다.(참고로 스위스는 대부분의 지폐에 주로 미술가들을 새기고 있는데, 일예로 100프랑에는 쟈코메티의 초상을, 10프랑에는 건축가 르코르뷔지에의 초상이 새겨져 있다.) 이 작품은 현재 프랑스 파리의 오르세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말년에 호들러는 암투병 중인 그의 정부 발렌틴 고데-다렐을 극진히 보살폈는데, 이 때 그녀의 모습을 기록한 일련의 유명한 작품들을 제작한다. 결국 발렌틴 고데-다렐이 1915년 암으로 사망하게 되자, 호들러는 크게 상심을 하게 되고, 그 역시 1918년 제네바에서 임종을 맞게 된다 호들러의 작품에는 뭉크처럼 죽 음의 이미지가 자주 등장하는 것은 불행했던 그의 가족사와 관련이 있다.
천사의 모양을 한 6명의 여인이 각자 다른 무엇인가를 들고 있다. 그 안에 혼자 있는 어린아이는 제목처럼 무엇인가를 선택하여야 한다면 당연히 그의 어머니에 대한 선택의 문제일 가능성이 높다.
마티스의 댄스에서 처럼 이 작품에서는 다섯 명의 여인이 신비한 종교적 제의 또는 요가의무념무상의 상태로 천천히 연속된 동작을 펼쳐보이는 듯 하다. 호들러는 인간의 운명과 삶과 죽음이란 개인이 어떻게 해볼 수 없는 거대한 초자연적 힘의 통제 아래 있다고 본 것이다. 이럴 때 지혜란 그 사실을 깨닫고 그 힘에 순종할 때 비로소 생겨난다고 할 수있다.
어릴때부터 그림그리는 것을 좋아한 호들러는 1871년 18세때 제네바의 '에콜 데 보자르'에서 미술수업을 하면서 본격적인 화가의 길로 접어 든다. 처음 시작은 사실주의와 아카데미즘에 입각한 풍경화와 인물화를 주로 그렸으나, 75년 바젤에서 한스 홀바인의 그림 '예수의 죽음"에 영향을 받은 호들러는 그 후 죽음에 관한 주제에 깊이 빠져든다.
상징주의 시인인 두코잘(Duchosal)과 우정을 나누면서 상징주의의 세계에 빠져들았다. 그는 뵈클린을 정신적 지주로 삼고, 인상주의에 대한 깊은 저항감과 더불어, 윤곽선을 강조하며 독일 및 스위스의 화풍을 주도해 나간다..
그의 그림에는'평행주의'(Parallelism)라는 다소 생소한 단어가 나온다. 호들러는 그림을 배워나가며 여러 화풍을 도입을 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호들러는 당대의여러 미술운동들을 맹목적으로 추종하지 않고 이를 자신 만의 독특한 화풍으로발전시킨다. 소위 호들러만의 독특한 화풍으로 그 스스로 명명한 '평행주의'(Parallelism)라고 하는 화풍은 화면에서 여러 인물들이 마치 어떤 의식을 행하거나 혹은 춤을 추는 듯한 독특한 동작을 취하는 모습을 보인다. 스위스 출신의 상징주의자 호들러는 생로병사의 주제에 대해 많은 생각을 했던 화가다. 36세의 나이에 부모와 다섯 명의 남매를 모두 결핵으로 다른 세상에 보낸 아픔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생에 지치다’에서는 수평선 위에 수직으로 다섯 사람이 마치 나열되듯 앉아 있다. 평평하고 반복적이고 좌우 대칭적인 구도는 이들의 삶을 더욱 지루해 보이게 만든다. 사제가 입는 의례용 가운 같은 것을 입은 것으로 보아, 이 사람들은 어떤 수행을 행하고 있었나 보다. 아니면 생 그 자체가 수행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마침내 무언가 깨달음을 얻었을지는 모르지만, 잔인하게도 세월은 이미 그들에게서 젊음을 앗아가 버린 지 오래다. 생에 대해 깨닫자마자 죽음에 훌쩍 가까워져 버린 것이다.
그림에 흰옷을 입고 꿈속을 거니는 듯한 여인의 모습 자체가 매우 상징적이다. 그러나 이 여인만이 아니라 그림 속의 모든 요소가 나름의 깊은 의미를 지닌 듯한 인상을 풍긴다. 외롭게 뻗어 있는 길은 두 굽이 작은 언덕을 만들고 있다. 그 언덕을 넘어가면 어떤 풍경이 펼쳐질까? 마냥 횐 하늘은 그리움과 동경으로 가슴 부풀게 하지만은 않는다. 백지장처럼 하얀 하늘이 시사하는 시작 혹은 종말의 예감은 이 언덕길을 삶과 죽음에 대한 사색의 대상으로 만든다. 그나마 푸른 방초 동산이 언덕길 좌우로 넓게 펼쳐져 있어 신선하고 온화한 기운이 있다. 드문드문 하얗게 피어 있는꽃들도 다소 쓸쓸해 보이기는 하지만 사랑스럽고 정겹다. 단지 여인의 시선이 꽃들을 향하지 않아서인지 여인의 외로움을 완전히 씻어주지는 못한다. -비평글-
호들러는 평행주의 이후에도 끊임없는 변화를 시도하며 말년의 작품에는 오스트리아 표현주의적인 화풍이 많이 보인다. 호들러는 가족의 죽음에 대한 강박관념으로그렇게 두려워하고 조심스러워 했는데도 1913년그의 아내(Berthe Jacques, 1898 년에 결혼)는 딸을 낳은지 얼마 못 가 암으로 인해 숨을 거두었다. 이런 비극적인 배경을 가진 화가였던 호들러는 붓을 들 때마다 삶과 죽음의 수수께끼에 깊이 침잠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말년에 호들러는 암투병 중인 그의 비서이자 정부인 발렌틴 고데-다렐 (Valentine Godé-Darel)을 극진히 보살폈는데, 이 때 그녀의 모습을 기록한 일련의 유명한 작품들을 제작한다. 결국 발렌틴 고데-다렐이 1915년 암으로 사망하게 되자, 호들러는 크게 상심을 하게 되고, 그 역시 1918년 제네바에서 많은 미완성의 작품을 남겨둔 채 임종을 맞게 된다.
말년의 호들러의 작품중 가장 유명한 것은 일상적인 인물들의 모습이다. 특히 그의 "장작캐는 사람"(Der Holzfaeller)는 스위스의 50프랑 지폐의 뒷면에도 등장한다.
Mother and Chiild 1888-1889
![]()
![]()
![]()
![]() Autumn Evening, 1892
![]() Commnion with Infinity 1892 ![]() Floraison, 1917
![]() Forest Stream, 1904
![]()
Mountain Stream at Champery, 1916
![]()
The Good Samaritan 1883
실망한 영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