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TX / 전광열
속도는 누군가를 무언가를
구시대의 제물로 보내버리는 비낭만파다
서울역에서 동대구역까지 잠시 눈감았다
어디까지 왔나,
휙 지나는 산과 들을 보다
이내 다다르는 동대구역 하행선
내게 깊이 있는 감상의 시간을 주지 않았다
낭만과 추억에 절대 불친절한 속도였다
한 시절 뜨겁던 젊은 날의 연애처럼
한창 때 이 속도에 나도 매료된 적 있다만,
식어버린 짜장면 면발처럼 열정도 녹아내려
정년퇴직 후 하릴없고 남은 게 시간밖에 없는 내겐
속도는 나의 최고의 가치는 아니다
순간이동 된 듯 노인네 하나 동대구역 광장에서
어리둥절 어제를 떠올리는 패배자로 서 있다
과거의 느림은 현재의 속도를 위해
현재의 빠름은 더 빠른 미래를 위해
느린 속도는 정녕 버려져야 한다는 것인가
희망을 위해 피땀흘리며 살아 온 세월 앞에
유보된 느림의 미학은 없단 말인가
엔진을 밟고 속도를 올릴수록 커져가는 쾌감
아이스크림같은 달콤한 그녀 기다리는 약속장소로
쿨한 속도로 달려가는 젊은이들의 부산한 발걸음
솜사탕같은 달콤함도 속도 없이는 재미 없겠지
나의 느리디 느린 촌역과 간이역은 어디에 있느냐
자주 타던 금호여객도 비둘기호 무궁화호도
속도에 밀려 낡은 추억 속 흑백사진이다
지나간 사랑 붙잡듯 새마을호를 가끔 찾지만
그도 새마을운동처럼 추억의 간이역에 전시될 것
날 잡아 봐라!
KTX는 냅다 달리는데, 아마도 저 녀석
철로 위를 비행기처럼 날듯이 떠다니는 미래의
비행기호 기차에 밀려 찬밥신세 될 지 모르겠다
습기 잃은 꽃처럼 나는 시들 무렵이 되었다
지금부터는 추억을 먹으며 살 시간이다
그저 세월이 좀 완행으로 흘러 갔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