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GM: 생상 'Danse macabre'
"우리는 늘 죽음을 맞이하는 게 서툴다. 항상 준비는 덜 되어 있고, 모든 사람들은 죽기 너무 이른 때에 세상을 뜬다."
1195년 1월, 소베슬라프 2세의 칭왕과 대관식 이후로 잠잠하던 프라하에서 기별이 왔습니다.
"인사드리겠소. 보헤미아인의 왕, 바츨라프라 하오."
사실 전혀 낯선 인물은 아닙니다. 그 또한 카지미에시 2세가 즉위한 후부터 몸담은 베네딕토회의 회원이니까요.
폴란드 국왕이 1138년생, 보헤미아 국왕이 1137년생이므로 둘은 같은 세대입니다.
전통에 따라 최연장자에게 가주의 자리가 넘어가는 보헤미아는 벌써 두 번의 왕위계승이 있었습니다.
소베슬라프 2세의 뒤를 이어 즉위한 자는 다름아닌 헬레나 즈노옘스카의 오빠 콘라트였고,
그가 일족의 손에 살해당한 후 소베슬라프 2세의 동생 바츨라프가 왕위를 물려받았습니다.
아내는 몇 년 전 세상을 떴고, 아직 재혼하지 않은 채로 두 어린 딸을 키우고 있습니다.
즉위 축하 인사를 먼저 건네는 게 옳을까요, 선왕 시해 사건에 유감을 표하는 게 먼저일까요.
"처음 있는 일은 아니지... 우리는 저주받았소. 세 그루가 한 뿌리에서 났으나, 두 그루는 말라죽어버렸으니까."
시조인 프르셰미슬로부터 내려오는 불길한 예언. 내게는 세 아들이 태어날 것이나, 한 사람만 군림하리라.
보헤미아인들을 평화롭게 다스린 바츨라프 1세는 동생 볼레슬라프 1세의 손에 최후를 맞았습니다.
혈육을 해치지 않기 위해 검을 휘두르는 대신 교회로 달아났지만... 문이 굳게 잠겨 있었기 때문입니다.
"베드르지흐는 그대의 처남을 죽이고, 잘츠부르크로 도주했소. 그곳의 대주교 또한 사람을 죽였으니까... 살인자를 감싸줄 건 살인자 뿐."
'짐의 허락도 없이 보헤미아의 왕을 칭하는 자가 누구인가? 소환에 응하지 않으면, 반역으로 간주하겠다.'
바르바로사의 명령으로 찍소리 못하고 왕위를 빼앗겼던 베드르지흐입니다.
그런데 자신이 무시하던 즈노이모의 콘라트가 왕위에 올랐으니, 얼마나 분하고 시기심이 치밀었을까요...
"하느님께서 나를 얼마나 여기에 앉혀두실지는 모르나, 맹세컨대 베드르지흐가 왕위를 되찾지 못하게 막아내겠소.
시간은 산 자의 것... 폴란인을 의롭게 다스린 그대라면 이해하겠지. 세상이 동맹을 배반한 자라고 욕해도, 나는 다르오."
"프르셰미슬의 유산을 상속받은 자로서, 피아스트의 후예인 그대에게 지난 날 저질러진 모든 잘못에 대해 용서를 구하오.
선조들이 거짓된 혀와 피묻은 손으로 저지른 일들을 우리가 바로잡지 않는다면...
모두가 땅에서 끊어져 말라죽고, 내 집도 그대의 집도 함께 멸망하겠지."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 모를 때는, 진실을 말하라.
"폴란인들이 아직 하느님을 모르던 때에, 이 땅에 빛을 가져온 것은 보헤미아의 딸이었습니다."
볼레슬라프 1세는 자신이 죽인 형의 무덤에서 연이어 기적이 일어나자, 그 앞에 무릎을 꿇고 온종일 회개했습니다.
966년, 피아스트가의 미에슈코 1세가 볼레슬라프 1세의 딸 도브라바와 결혼하면서 최초로 세례를 받았습니다.
996년, 아르파드가의 바이크가 성 아달베르트에게 세례를 받고 이름을 이슈트반으로 바꾸었습니다. 그가 헝가리의 성왕 이슈트반 1세.
성 아달베르트는 이후 미에슈코와 도브라바의 아들인 흐로브리가 있는 폴란드로 향했고, 프러시아인들을 개종시키려다 순교했습니다.
우리들의 오랜 이야기는, 이렇듯 잔혹함과 숭고함이 엮인 베틀에서 짜여나왔습니다.
오늘을 어제보다 낫게 만들기 위해, 때론 실패해도 계속 시도하다 보면 분명 뭔가 달라져 있겠지요.
그것이 서로가 서로를 용납 못하는 이 세상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전부입니다.
1195년 7월, 두너(도나우)강은 피로 물들었습니다. 보헤미아와 우정을 다지는 사이에 뭔 짓을 저지르고 다닌 건지...
차근차근 알아보니, 매우 복잡한 사정이 있네요. 동로마 제국의 내란은 안드로니코스가 폐위당하고 곧 죽으면서 끝났지만, 이 쪽은 이제 시작.
덴마크의 왕위계승자였던 크누트 3세가 불과 스물여덟에 급사했고, 아들을 잃은 발데마르는 시름시름 앓다가 그 해 겨울에 죽었습니다.
따라서 헝가리와 덴마크의 동맹은 끊어졌죠. 새로운 동맹들은 지중해의 두 지배자인 제노아와 베네치아. 척봐도 돈 보고 한 결혼.
그런데 신성로마제국의 봉신인 밀라노 공작이 제노아를 공격했고, 지참금에 팔린 헝가리군은 출동을 안할 수가 없습니다.
진짜 큰일은 다음부터입니다. 이슬람으로 개종한 쿠만족, 이아시의 소탄 칸이 그 틈을 노려 쳐들어왔습니다.
그의 요구는 헝가리 왕국의 복속. 여기서 지면 벨러는 직할령을 모조리 잃고 크로아티아로 쫓겨나게 됩니다.
소탄 칸이 헝가리 동남부를 통째로 점령해버리니, 왕이 우스워 보이는지 이번엔 헝가리의 봉신인 페슈트 공작이 들고 일어났습니다.
한줄요약: 제노아를 도우러 집을 비운 사이 쿠만족이 문을 열어달라고 난리치고, 안에선 페슈트 공작이 집기들을 다 부수고 있음.
"그래서 유대인한테 꾼 돈부터 먼저 갚으라고 했잖아. 이러다가 동로마까지 쳐들어오면 어쩌려고..."
"구경났냐? 전처럼 지갑부터 열 거 아니면 입은 좀 다물지?"
한 손으로는 페슈트 공작의 목덜미를 움켜쥐고, 다른 손으로는 폴란드의 머리채를 잡는 벨러의 독설은 그 절정에 달했습니다.
바츨라프가 좋은 말만 골라 해주니, 뭐라도 된 것 같나? '정의로운' 카즈메르.
네게는 분명 기회가 있었다. 말뿐만이 아니라, 행동으로 보여줄 기회가.
너는 내 딸의 비뚤어진 입을 핑계삼았지. 하지만 내가 네 딸의 혈통을 문제삼은 적이 있나?
모든 걸 다 이해하는 것처럼 굴면서, 아무것도 하지 않은 네가 우리를 망쳤다.
동맹으로 묶여있지 않아도, 내부 반란이나 복속 전쟁은 참전 요청을 넣음으로써 도와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마지막 줄이 너무 아파서, 차마 그렇게는 못하겠습니다. 내가 우리를 망쳤다니?
단 5년만이라도 나는 왕국의 신민들에게 휴식을 주겠다고 선언했습니다. 참고 견디면, 그 보상으로 번영을 가져다주겠다고요.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해 동맹파기자라는 세상의 손가락질을 받아가며 버텨온 것인데...
"날 가르치고 싶다면, 너부터 철 좀 들어라, 알렉시오스."
"두 번 다시 나를 그 이름으로 부르지 마라. 내 손에 죽고 싶지 않다면."
이젠 돌이킬 수 없는 걸까요.
"바깥은 위험하니, 이걸 가져가셔야 합니다."
쌍룡호부(雙龍護符: Dragon Amulet). 한껏 취해 있을 때 하사했다가, 다음 날 아침에 어디로 갔나 찾는 게 요즘 생긴 주인의 술버릇입니다.
"그들은 정말 이게 효험이 있다고 믿나?"
"하느님을 모르니 그렇겠지요."
사실 거기 깃든 게 하느님의 가호든, 용의 불꽃이든 상관없습니다. 이 어려움에서 벗어날 수만 있다면.
"느긋하게 한잔 기울이고 싶은데, 귀찮게들 구는군..."
왕의 손에 쥐어진 성검이 차갑게 빛납니다. 한때 헝가리의 왕위에까지 올랐던 어버 가문이 단절되자, 작위 및 영토와 함께 왕실로 귀속된 물건.
"피슈티."
"분부 받들겠습니다."
"약속한 날짜까지도 짐이 돌아오지 않으면, 그대는 지체말고 세자 임레를 세케슈페헤르바르로 데리고 가라."
대관식이 지체되는 만큼, 신성한 왕관을 노리는 자들은 더욱 날뛸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이 마지막 명령이 되지 않기를.
"지금같은 때 떠오르는 게 하필 그 유대인같은 놈이라니... 이 목걸이로 놈의 얼굴을 있는 힘껏 후려쳐주고 싶군."
첫댓글 벨러는... 갈 때가 되었습니다(..)
현실 역사에선 1196년 사망이죠. 따흐흑...